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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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완전히 되찾기 전에도 권 의관에 대한 의심은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어투라든가 내 몸의 상태에 대해 잘 아는 것.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던 예전과 달리 마음 약한 의원의 모습을 보이는 등의 이중적인 괴리감. 다만 믿고 싶지 않아 무시해 왔다.

“날 죽여야 한다고 앞장서던 당신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저 괴물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숨을 끊어놔야 한다고 했었죠.”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의 유행은 기억을 되찾는 것인 듯합니다. 황제께서도 절 때릴 때의 기억을 하나둘 떠올리고 계신답니다.”

“…….”

권 의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들갑 없는 간결한 침묵이 그와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사람을 죽이고자 찾아온 이들이 내미는 돈과 문서를 가늠하고 계획을 짜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 밭을 갈듯이 그는 당연하다는 듯 사람 죽이는 일을 했다.

가끔 마을에 돌아올 때면 화전촌의 아이들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어르기도 했다. 인간의 생명이란 잡초와 같은 것이며,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는 베어 버려야 하는 생업의 대상일 뿐이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원래부터 절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마을의 눈치 때문에 살려두었던 것이니, 이제 와 거리낄 이유는 없었을 텐데요. 왜 그냥 살려둔 겁니까?”

“…글쎄다.”

권 의관이 침묵을 깨며 짧게 비소했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게 네놈 하나뿐이었으니까? 네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황제의 걸레 노릇이나 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건드려 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지.”

권 의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히 말을 이었다.

“오해는 말려무나. 예전에도 딱히 널 싫어해서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니.”

“오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내가 무서웠던 것뿐이니까요. 십여 년 전, 황궁에서 쓰러진 절 발견했을 때도 곧바로 죽이지 못했을 정도로.”

권 의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에게 겁간당하고 율목친왕의 목을 매달았던 그 날 새벽. 열이 올랐다. 어린 친왕을 그의 처소로 옮겨놓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열에 머리가 어지러워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이 정도로 아픈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장소가 좋지 않았다.

당장 황궁을 빠져나가야 했다. 날이 밝으면 시체들이 발견될 터였다. 율목친왕뿐만 아니라 그를 모시는 궁인과 환관 모두를 죽여놨으니 대대적인 수사와 수색이 펼쳐질 터였다. 그때까지 율목친왕의 궁에서 그로 위장하여 지내고 있었으나 더 이상은 그럴 수도 없어 묵을 곳 또한 없었다. 하지만 지독한 열 때문에 궁에서 빠져나가긴커녕 길 한가운데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야경꾼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숨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뚝뚝 떨어졌다. 결국 수풀이 우거지고 낙엽이 잔뜩 쌓여있는 도랑에 몸을 구겨 넣었다. 운이 좋다면 들키지 않을 것이나, 만일 들킨다면 내 운이 다한 것이리라. 파릇한 풀냄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죽음과도 같은 고열 속에 몸을 맡겼다. 축축하고 차가운 흙의 기운이 살갗을 타고 올랐다. 무덤에 묻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차가운 땅의 기운 덕분에 열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권 의관이 나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아직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을 때. 그답지 않게 놀란 얼굴을 한 것이 우스웠다. 뛰어난 머리로 의관 행세를 하는 그는 화전촌을 지배하는 장로 중 하나로 율목친왕의 의뢰를 받아들인 장본인이었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보고를 받고 정보를 취합했다. 그가 쓰러져 있는 나를 당황스레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논의했던 날이 아닌데. 왜 여기 있는 거지?”

“갑자기 열이 나.”

“네가? 무슨 일로 고장이 난 거지?”

“모른다. 지금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가까이 다가온 권 의관이 내 이마를 짚어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가늠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죽여 입을 막을지 데리고 나가야 할지 고민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율목친왕의 의뢰는 자신을 대신할 시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죽어도 그로선 손해 볼 게 없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으므로 권 의관에게 더는 시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율목친왕이 자결했다.”

의뢰인의 죽음을 알리자 권 의관이 혀를 찼다. 잔금을 받을 길이 영원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권 의관은 잠시 고민한 뒤 내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의뢰인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황궁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위험하지만 말 잘 듣는 장사 밑천을 구해내는 게 우선이었다.

허리에 감아두었던 검이 사라진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율목친왕의 처소를 정리할 때 마지막으로 사용했으니 아마도 친왕의 거처를 오갈 때 잃어버렸을 것이다.

몸도 좋지 않은데 무기까지 잃었다고 고백할 순 없었다. 날 괴물이라 부르며 어떻게든 없애고자 하는 이에게 내가 취약한 걸 드러내는 건 위험했다. 지금의 상황만 해도 충분히 아슬아슬했다. 나를 부축하고 있는 권 의관의 손가락 끝이 움찔거리는 것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눈에 들어왔다.

황궁의 그림자를 지나 산밑으로 파고들자 어둡고 좁은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이라기보단 토끼굴과 비슷하여 언뜻 보면 도무지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크기로 보이지 않았다. 방금 도랑 속에 파묻혔을 때보다 더한 흙냄새에 오감이 압도되었다. 마치 대지에 파묻힌 것처럼 차갑고, 안락한 흙더미가 뺨과 이마를 스쳤다.

황궁의 뒷산에서부터 이어진 이 굴의 존재를 아는 것은 본디 율목친왕뿐이라 했다. 그가 의뢰를 하며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처럼 아무도 모르게 오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열에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로 계속 기었다. 눈앞의 어둠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어 주저앉길 여러 번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갑고 신선한 바람이 뺨을 쓸었다. 흐릿한 별들이 초라하게 빛나는 새벽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그 별들의 흔들림을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기조? 정신 차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 굴을 기어 나온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시커먼 굴을 돌아보자 낯선 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방금 내 이름을 불렀음을 깨달았다.

“…누구?”

“이봐!”

하늘이 빙빙 돌았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하얀 하늘 밑에서 나는 열로 들끓는 몸을 웅크려 끌어안았다. 흐린 날의 별빛처럼 이성이 깜빡거렸다. 내 이름이 뭐지? 이름이란 게 뭐지? 난 누구인가. 나라는 게 무엇인가. 차갑던 구덩이. 흙이 몸에 달라붙는 동굴. 어둡고 따스한 동굴. 그런데 동굴이 무엇이더라?

이성이 깜빡거렸다. 정신은 암전되었다. 이대로 백치가 되어 강가의 갈대 마냥 허망히 흔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 그러나 나는 갈대가 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음인이 되어 있었다. 날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그를 가로막으며 안된다고 말하는 이가 나의 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났니, 기조야? 정신이 들어?”

“누구입니까?”

“…기조야?”

“전 누구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 부모로 추측되는 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의원이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 시야가 흐릿했다. 의원의 얼굴도 흐릿하기만 했다. 하지만 뜨끈하게 달아오른 귀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 * *

“음인이 되어버리다니 완전히 고장이 났다, 라고 했던가.”

나는 회상에서 벗어나 권 의관을 쳐다보았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얼굴과 지금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같을 것이다. 인간을 도구라 생각하기에 고장 났다는 말로 칭하길 즐겼던 그는, 우습게도 지금 완전히 고장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걸까? 그는 역용조차 하지 않고 내 앞을 돌아다녔다. 특징적인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마치 내가 그를 기억해내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조야. 기조야.”

권 의관이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내가 너 따위를 무서워할 리 있겠느냐?”

조금 비굴하면서도 사람 좋게 웃던 그의 뺨이 악귀의 얼굴마냥 악의로 번들거렸다.

“마을에 있던 이들도, 밖에서 일을 보던 이들도 모두 잡혀 죽었다. 땅에서 겨우 일어서 걸어 다니던 아이들도 모두 죽었어. 내 아내도, 딸도, 마을에 있다가 모두 죽었지. 난 물론 죄인이지만 내 가족이 무슨 죄란 말이야? 혹여나 살아있을까 잿더미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개 같은 군관 놈들이 시체도 그냥 놔두어 짐승들이 물어가도록 그냥 놔뒀지! 그런데 기조야. 네가 멀쩡히 살아있지 않겠니.”

내가 알기로 황궁의 권 의관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점을 지적하자 매정한 답변이 되돌아 왔다.

“친자식이 아니다. 마을 출신도 아니지. 위장을 위해 들인 양자들이다.”

“안타깝군요. 그들은 당신을 아버지라 생각하며 자랐을 텐데.”

“내 자식은 임화뿐이다.”

마을에 그런 이름의 여자애가 한 명 있기는 했다. 화전촌의 살림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집의 아이였다. 그 애도, 그 애의 어머니도 토벌군에 목숨을 잃었다. 죄 없는 어린아이라 말하기는 쉽겠지만 그들에게 어찌 죄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여자아이는 머리가 좋아 학당에서 독을 배웠다. 그 어미는 제 딸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도록 온 힘을 다해 뒷바라지했다. 더러운 살인마 집안과 역겨운 인간 백정 마을에 무고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임화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이 세상 전체에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그러던 중 깨닫게 된 거다. 세상 전체에 복수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권 의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 씨의 핏줄이 끊기면 이 세상은 자연히 지옥처럼 변한다는 걸 왜 그제야 깨달은 건지. 하하! 옥좌에 다른 씨가 앉으면 재앙이 닥치고 요괴가 출몰하지. 사람들은 죽어도 시체를 남기지 못하고 짐승들에게 뜯어먹힌다. 내 딸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다른 이들도 그리 당해야 해. 감히 누구 맘대로 평화로운 세상을 누린단 말이냐?”

“그래서 친왕의 아이라고 했는데도 죽이려 든 겁니까? 황가의 혈통을 끊어놓기 위해서? 내가 회임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이가 회임하면 그만인 것을….”

“다른 연놈이 임신해도 죽이면 그만이다.”

누굴 죽이는 건 조금도 힘든 일이 아니라고 권 의관은 말했다. 너도 아는 것 아니냐고 하는 말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다 네 덕분이다. 황제가 타락한 것도, 두 방 씨 놈들이 자식을 갖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 황제가 혈육을 죽인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음인 하나 가지고 논 것뿐이지 않은가.”

정말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찾았음에도 이것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형을 겁간하거나 죽이지 않았는데도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세상이 혼란스러웠다. 내 의문에 권 의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냐? 황제는 자기 손으로 제 혈육을 죽이지 않았느냐.”

“혈육을 죽여?”

“기조야, 기조야. 그가 널 때리지 않았느냐?”

그가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관계를 가지고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한 달가량을 지켜본 뒤,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너를 때렸지 않느냐.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네게 먹인 건 피임약이 아니다. 내가 네게 준 것은 네 향이 계속 쓰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약일 뿐이다.”

권 의관은 정말로 즐겁다는 듯 두 눈을 반달처럼 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지. 황제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 태아를 죽이는 것으로 될지 몰랐으나 그것이 한 번, 두 번, 수없이 반복되자 하늘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게지.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어찌나 가슴이 뿌듯하던지!”

아아. 그랬나.

황제를 만나기 전에 몸을 수색하던 의관이 권 의관이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내가 황제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내게 약부터 먹였다. 처음부터 이런 것을 노린 건 아니었겠지. 아마도 처음엔 날 괴롭히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내가 너무 싫고 미워서. 황제에게 소박맞고 버림받는 꼴을 보고 싶어서.

배 속에서 치밀던 둔통과 몇 번인가 있었던 하혈을 떠올렸다. 황제는 내가 다른 이에게 각인했기에 그리도 냄새가 독한 것이라 했다. 그토록 결착해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며 날 때리곤 했다.

“하지만 친왕은 내 향이 달다 했는데.”

“매캐한 향이 취향이라 달게 느껴졌는가 보지. 약이라 해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

권 의관은 대수롭지 않게 비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각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히던 생각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묶음이라고는 하나 기억도 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언제까지 얽매여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

친왕과 나는 분명 한 번 이어졌지만, 내가 기억을 잃으며 그 이어짐은 끊어졌을 것이다. 황제가 나를 사서 황궁으로 데려왔을 때 나는 잊어버린 인연을 잊고 새로운 인연과 맺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친왕을 황궁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 향이 달콤하다 해주었지만 나는 그의 향이 조금도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각인이라는 것은 영혼이 뒤섞여 생겨나는 것이라지만, 그 또한 기억에 근거하는 인연의 고리가 아니겠는가.

한숨이 흘러나왔다. 권 의관은 자신이 원하던 바를 성취하여 실로 희열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여기서 죽을 것이 두렵지 않은 듯했다. 음인으로 변한 내 무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된 독을 쓰거나 내 숨을 끊으려 들겠지. 하지만.

“대를 끊고 싶었다면 차라리 황족들을 전부 죽이는 게 좋았을 텐데. 아. 당신의 실력으로는 힘들었을까? 황제는 몰라도 친왕의 무위는 이전의 나를 뛰어넘을 정도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걸 네놈도 알면서. 말해 보거라. 온몸에 멍을 단 채로 사는 게 즐겁더냐? 몇 번이고 내게 죽음을 호소하지 않았어?”

권 의관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복수의 희열에 웃었다. 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나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보란 듯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시선이 뱀처럼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담담히 고백했다.

“화전촌이 전부 불탔는데 저만 살아남은 이유는, 마을을 밀고한 자가 제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권 의관의 얼굴이 웃던 표정 그대로 굳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마을 안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한 것일까? 나 외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황제의 돈으로 장례 치른 아버지를 떠올렸다. 애초에 마을이 싫어 도망쳤던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와 더러운 이리 떼에 자식을 바쳤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기억을 잃고 돌아오자 그는 빠져나갈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했다.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남편을 잃은 것도 마을의 교묘한 암살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리하여 그는 도망치는 대신 함께 파멸하길 선택했다. 천하와 함께 파멸하고자 하는 권 의관처럼.

“도심의 세력은 모두 색출했으나 마을의 위치와 학당의 장소만큼은 모르고 있던 관군에게 그 모든 정보를 넘겨주었죠. 그 대가로 도망칠 수 있는 일시를 받았으나 저만 보낸 겁니다. 그는 타오르는 마을을 보며 자결했지요.”

그리하여 나는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구덩이에도 제대로 묻히지 못해 짐승들의 아가리에 찢기는 대신 양지바른 땅에 묻혀 썩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이의 목숨을 장사 수단으로 택한 마을을 그는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마을에 넘긴 자기 자신 역시 용서하지 않았다.

나는 토기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권 의관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얼굴이 분노로 조금씩 일그러졌다.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가 고함을 내지르기 전에 일을 끝내기로 했다.

“어쨌거나. 궁금한 건 이제 다 알았으니…. 됐습니다.”

아랫배를 덮고 있던 손을 옆구리 쪽으로 미끄러뜨리자 연검의 손잡이가 감기듯 손에 잡혔다. 십여 년 전 내가 황궁에 놓고 갔던 검은 허리띠의 형태로 다시 내게 돌아왔다.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친왕이 사람을 통해 보낸 황금 허리띠는 그 누구도 무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힘을 주어 손잡이를 뽑아내자 허리띠의 이음매 사이에서 차가운 쇠 날이 튀어나왔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굳어있던 권 의관이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제 목을 부여잡았다.

“내가 살아남은 것은 내 부모 덕분이지만, 당신은 자신이 왜 살아남았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한 적이 있습니까? 황제는 마을을 지도에서 없애기 위해 오 년에 걸친 준비를 했습니다. 당신 정도의 거물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살했을 터. 하지만 잘못된 정보로 인해 황제는 당신이란 인물이 예전에 죽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지.”

죽어가는 자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에게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당신의 말대로. 살아있는 것이 더 지옥이기 때문에 일부러 놓아준 거다.”

군관이었던 부친을 죽인 것이 누구인지 아버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화전촌의 몰살로 가장 고통받는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그 원한의 대상 또한 저절로 알게 되었다.

목을 움켜쥔 권 의관의 손가락 사이로 피 거품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약 상자로 향하기에 발로 그 손을 밟아 짓이겼다. 그가 원한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내게 향했다. 참으로 뻔뻔한 자가 아닌가. 살아서 남에게 도움될 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주제에 어째서 이리도 당당하게 남을 원망하는 것일까?

나는 다시 검을 휘둘러 그의 몸을 베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은빛의 선이 채찍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소리를 냈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검을 손에 든 나를 제압하려면 무예를 익힌 양인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권 의관은 양인도 아니고 애초에 무인도 아니었다. 그의 딸과 마찬가지로 그는 머리로 계획을 짜고 독을 써서 사람을 죽였다. 나는 자신의 피에 잠겨 천천히 죽어가는 권 의관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까치가 가지에 꿰어놓은 개구리마냥 그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장 났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지.”

기억을 되찾기 전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엔 익숙했다. 날 찾아오는 암살자들을 모두 죽였으니까. 이제 와 한 명 더 죽인다고 다를 것은 없었다. 뭣보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권 의관의 교육 덕분이었다.

“누군가를 더 괴롭히고 싶다는 이유로 살려두는 건 이렇듯 역습을 유발하지.”

황제를 괴롭히고 싶었다면 날 진즉 죽이는 게 더 간편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암살에 당한 것처럼 독을 먹여 죽였다면 황제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지금과 비슷한 꼴이 되었을 테니. 기어서 도망치려는 권 의관의 힘줄을 끊고 허리의 신경을 끊었다. 멱 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들어올 법도 하건만 밖에 선 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부르기 전에 들어오면 죽이겠다 말해놨기 때문일 것이다.

권 의관은 한참을 버둥거린 뒤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안와(眼窩)로 검을 깊이 찔러 넣었다. 달콤한 과자가 입 안에서 녹는 것처럼 좋은 기분이 되었다.

“가서 고해라.”

“마, 마마. 마마.”

권 의관이 들어올 때부터 내 옆을 지키고 있던 궁인이 벌벌 떨었다. 담력이 좋은 자를 골랐으나 설마하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마마. 무, 무엇을 말이옵니까?”

“모두 고하거라. 내가 사람을 죽였고, 그자를 죽이기 전에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도.”

나는 궁인의 소매에 대고 칼을 닦았다. 검붉은 피가 그의 옷을 지저분하게 물들였다. 차가운 칼날과 피가 몸에 닿자 궁인은 파드득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황제께 천재지변의 이유를 알려드리도록.”

겁먹은 궁인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황제의 화풀이 인형이라는 내 별명을 황궁의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권 의관과 내가 나눈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그는 알 것이다. 황제가 제 자식들을 몇 번이나 죽였기에 지금과 같은 재난이 천하를 덮친 것임을 이제 모두가 알아야 했다.

“…한 달.”

황제는 그 이상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배가 부풀어 오르고 입덧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기다렸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아니. 아마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독살당했을 것이다. 권 의관의 말대로 누굴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까.

나는 종종 꾸던 꿈을 떠올리려 애써 보았다. 좋은 일이 없어 살아가기 힘들 때마다 그나마 행복한 상상을 하게 해주는 꿈을 떠올리고는 했다. 아이를 낳고 황후가 되어 황제와 행복하게 사는 꿈. 혹은 황제에게 사랑받아 임신하는 꿈.

나는 허리띠에 검을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차가운 쇠와 부드러운 황금의 감촉이 마치 꿈과 현실처럼 부드럽게 맞물렸다.

나는 내 꿈이 사랑받고 싶다는 내 욕망을 나타낸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 꿈들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꿈들은 태어나고 싶었던 작은 것들의 마지막 소망이었단 것을.

나는 시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마음속에서 용서라는 단어가 찢어져 사라졌다.

* * *

광기로 가득했던 황제의 얼굴은 다 타버린 숯처럼 하얗고 버석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몸을 이루는 것이 날려 사라지는 듯했다. 공기는 온화하여 봄기운이 완연한데, 그는 죽어버린 고목처럼 홀로 말라 있었다. 위엄있던 모습은 빛바랜 종이처럼 퇴색하여 당장이라도 시커먼 얼룩이 질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폐하.”

자색의 석이 핏물을 밟았다. 황제의 검은 눈이 시체의 모습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나를 보고, 고개를 젓고, 다시 나를 보았다.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그런 약이 있을 리 없어.”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것은 빈껍데기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체향을 좋게 만들기 위해 여러 약을 복용하는 일은 흔하지요. 그 반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이다. 네가 짐의 아이를 가졌을 리 없어. 짐이…, 죽였을 리 없어. 네가 현성과 각인했기 때문에….”

“하지만 천재지변이 천하를 덮치니, 이는 황제가 인의를 저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황제의 검은 눈은 그저 멍하고 지쳐 보였다. 너무 울어서 바싹 말라버린 눈은 아무런 빛도 머금지 않고 있었다. 내가 연심을 품었던 양인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극양인인 동생의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던 기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는 권 의관의 시체를 넘어 내게로 왔다. 좌절감으로 가득 찬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둔중하게 땅을 울렸다. 더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몸도 이전처럼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손을 내밀자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 저는 정말로 화풀이 대상이었다는 것을.”

“아니다.”

“동생에게 쏟아내지 못한 것들이 제게 쏟아졌던 거지요.”

“…….”

한참을 침묵하던 황제가 자조했다.

“열등감은 하찮은 자들이나 느끼는 감정이지.”

동생에 대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일그러지려는 마음을 억지로 바로잡고 어두워지려는 안색을 밝게 내보였다. 가끔씩 치솟는 음울함은 지존의 고민으로 치장할 수 있었다. 자신을 갈고닦으며 온 마음을 다해 천하를 경영했다. 그 시간에 잘못한 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결국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발시킨 것이다. 그가 원하던 음인이 다른 이를 선택했다는 생각에 무너지고 말았다. 반항하지 못하는 노예를 향해 터진 폭력은 결국 그의 모든 업적을 망쳤다.

“땅이 잠잠해질 생각을 않으니 양위를 해야겠지.”

황제의 메마른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바싹 마른 우물 같은 것이 마지막 남은 집착을 내보였다.

“너는 친왕이 황제가 되길 원하느냐?”

“네.”

“그렇다면 조건이 있다.”

“제게 말입니까?”

“그래.”

황제가 비틀린 고목에서 최후의 진액 같은 감정을 끄집어냈다.

“넌 내 곁을 지켜야 한다. 내가 옥좌를 내놓아도 날 따라와야만 한다. 어차피 넌 내게 속한 것이니 별문제는 아닐 터. 그리하면 친왕은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내게 양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집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내게 쏟아지는 황제의 폭력 속에서 나는 홀로 죽어간다 생각했다. 황제의 화풀이를 받아 주어야 한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신하로서 견뎌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돕는 일이니 보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폐하의 아이를 낳고 함께 즐거이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꿈에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작은 것들이 제 옆을 어수선하게 뛰어다니지요.”

황제가 희망을 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매우 보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폐하의 꿈을 꾸지 않습니다.”

바쁘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비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친왕이 내게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두워지는 황제의 안색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제 제 꿈에는 다른 이가 나옵니다.”

“하. 꿈 따위…!”

황제가 이를 갈았다.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게 첩지를 내린 뒤 양위할 것이다. 그럼 넌 영원히 짐의 것이니…! 짐과 함께 가서 짐의 아이를 낳을 것이다! 친왕이 거절할 것 같으냐? 노예 하나를 넘기면 황위를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친왕은 거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이지만, 당신은 정말로 황제로군요. 양위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옥좌에서 내려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황제에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가 황제로 남아있는 한 천재지변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이기에 그는 양위를 결심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그는 제위를 포기할 것이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자결하여 죽는다 해도 망해가는 나라를 끌어안고 자멸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망가뜨린 것일까. 친왕의 존재? 어린 친왕을 구하고자 한 내 행동? 수렴청정을 욕심내었던 태후? 발현하지 못하였음에도 옥좌를 바라보았던 율목친왕이 떠올랐다. 자신을 찾아와 열등감을 자극하던 황제를 그는 무던히도 증오했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거칠게 열리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잔뜩 흥분한 친왕의 모습이 봄날의 빛과 함께 시야로 박혀 들었다. 걱정으로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자 절로 마음이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기조야! 괜찮으냐?!”

“전하.”

우울함이 일시에 사라졌다. 계곡 사이로 해가 비추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아졌다. 그가 팔을 벌리며 나를 불렀다. 그의 시선이 매섭게 황제를 노려보는 것에 나는 안도와 즐거움을 느끼며 기꺼이 가서 안겼다. 따스한 친왕의 체온에 긴장했던 몸이 흐트러졌다.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피 칠갑을 한 궁인이 네 방에서 나오고, 황제가 네게로 갔다는데 뭘 어떻게 더 기다린단 말이지? 애초에 널 내 손에서 놓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엄한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가 침전의 공기를 울렸다. 황제의 서슬 퍼런 진노를 친왕이 경멸 어린 눈초리로 맞받아쳤다. 그 시선은 연적을 바라보는 시선도, 피가 섞인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아니었다.

친왕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소리로 만들어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표현했다. 그는 내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황제를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네놈…!”

“다 끝났습니다. 형님.”

뭐가 끝났다는 것일까?

아마 모든 것이 끝났다는 얘기이겠지. 끝났다고 말하는 친왕의 목소리에선 짙은 애환이 느껴졌다. 그는 곧 미련을 떨쳐대듯 긴 숨을 내쉬며 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임신한 몸으로 이런 험한 일을 하다니.”

애초에 내가 가도록 허락해선 안 되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친왕이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다. 내게 연검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죽일 놈이 있었으면 자신에게 말할 것이지 왜 이런 짓을 했냐고 탓하는 커다란 남자의 태도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괜찮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문득 뒤를 바라보자 황제가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첩지를 주어 끌고 간다는 둥 집요한 말을 내뱉던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친왕의 무례에 진노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이 방에 들어설 때처럼 성마른 남자가 되어 날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무엇에 그리 놀란 것인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사이 황제가 허탈하게 웃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만약…. 아니, 아니다. 하하.”

황제가 웃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얼굴이 두 손 아래 감춰졌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어 고민하는 내 얼굴을 친왕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웃는 것을 황제는 처음 본 것이다. 그는 나를 단 한 번도 웃게 해주지 못했다. 그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넋이 나간 것이다.

나는 웃던 얼굴을 그대로 일그러뜨리며 친왕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스하고 익숙한 체온이 내 몸을 감쌌다. 문득 친왕의 향이 달콤하게 느껴져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향해 삐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정원제 원년 3월 7일.

황제가 자신의 부덕에 한탄하며 하늘이 거칠고 땅이 비틀리는 것에 통곡하다. 곧장 양위의 뜻을 밝히니 동평왕이 정원제에 오르다.

정원제가 옥새를 받자 천지의 기세가 부드러워지고 얇은 비가 무지개와 함께 나타나다.

제위를 바로 세움에, 가뭄이 해갈되고 땅이 녹아 농업이 가능해지다.

강물의 범람이 끝나고 파도가 잠잠해져 어업과 치수가 이루어지다.

선왕이 윤여궁으로 향하니 비빈이 모두 뒤를 따르다.

정원제가 접객소의 노비 기조에게 화비의 첩지를 내리다.

정원제 2년 2월 15일.

화비가 황자를 생산하다.

황자의 이름을 방윤혁으로 짓고 그 패를 땅에 묻어 고하니 천하가 안심하다.

화비가 황후에 오르다.

정위제 이년 4월 7일.

황제가 천산에 올라 제를 지내다.

황제가 황자 방윤혁의 피를 내어 제단에 흘리니 자색의 연기가 하늘 높이 오르다. 이로써 친자임을 확인하고 태자에 봉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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