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봄
성청성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아버지는 군관이었다. 군관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어지는 편을 잘 썼는데, 범인을 압송할 때 사용하는 포승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양인이었다.
아이를 낳은 것은 아버지인 군관과 동거하던 음인 남성이었다. 혼인을 올린 사이는 아니었으나 희락기가 올 때마다 서로의 몸을 달래주고 생활을 채워주다 보니 어느덧 음인의 배가 아이로 부풀었다. 전염병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던 군관은 가족이 생긴 것에 퍽 기뻐했지만 음인이 출산할 때까지 혼인을 미루었다.
군관의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단출한 가족을 꾸려나가기에는 충분했다. 격렬한 사랑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은 잔잔한 물결이 끊임없이 흘러가듯 서로를 아꼈다.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리라.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 속이 따뜻해지는 듯했으나, 불행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 둘을 찾아왔다.
사소한 시비였다. 만취하여 노점의 기물을 부수고 소란을 부리는 자가 있다는 신고에 나섰다가 제압하던 중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 깊은 상처도 아니었으나 얇게 스쳤을 뿐인 팔뚝이 푸르게 부풀었다. 그의 팔을 스친 무기는 녹이 슬어 오염되어 있었다.
치료할 시기도, 팔을 잘라내어 목숨을 보전할 시기도 놓친 남자는 비참하게 죽었다. 그의 동거인은 잔뜩 부푼 배를 끌어안은 채 남자를 땅에 묻었다. 산달이 가까워졌기에 먼 길을 떠날 수 없어 아이는 성청성의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의 산고 끝에 태어난 아이였다. 외향은 남성의 모습이었으나 부모 모두 평인이 아니었으므로 나이가 들면 음인이나 양인으로 발현할 확률이 높았다. 아이를 낳은 음인은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갓난애를 품에 안고 길을 나섰다.
음인의 고향은 금화산이었다. 능선을 따라 층층이 늘어진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가난한 마을의 전경이 그를 맞아주었다. 오래전 이 화전촌을 떠난 것은 그가 음인으로 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향은 평인들로만 이루어진 마을이었기에 음인으로 발현한 그가 살아가기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음인의 부모는 세상을 뜬 지 오래였다. 하지만 친척들이 남아있어 유복자를 품에 안은 그가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이를 떼어놓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그의 부모가 일구었던 화전 중 일부가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유복자의 이름은 기조(基組)라 지어졌다. 남편이 군관이었으므로 성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이 아니기에 붙여주지 않았다. 모친을 닮아 새하얗고 작은 아이는 말이 늦고 걷는 게 늦었으나 날아가는 벌레나 먼지 같은 것을 눈으로 곧잘 쫓았다.
네 살이 되었을 때, 아이는 마을의 학당에 보내졌다.
화전촌 깊숙이 들어간 벼랑에는 말 한 마리도 지나갈 수 없는 잔도가 있었는데, 그 잔도를 지나 동굴로 들어가면 제법 규모가 있는 장원이 나왔다. 화전촌의 아이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예의범절과 몸을 지키는 법을 익혔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의술이나 산법 등을 익혔고 신체가 뛰어난 아이들은 무예를 몸에 익혔다.
아이들은 학당에서 암행과 잠술, 날붙이와 독을 다루는 법을 익히고 변장하는 방법과 말투를 바꾸는 방법 등을 배웠다. 어떻게 생각해도 정상적인 화전촌의 학당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이상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겐 이것이 익숙한 생활이기 때문이었다.
기조는 무예에 재능을 보였다. 낳아준 사람을 닮아 작은 키와 가녀린 풍채는 언뜻 유약한 인상이었으나 군관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짙게 이어 힘이 세고 재빨랐다. 마치 사슴이 튀어 오르는 듯한 유연하고 우아한 몸짓은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치명적이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재산으로 분란이 난 만석꾼의 장남을 죽이는 일이었다. 만 평에 달하는 땅의 후계자는 호위를 여럿 두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죽음을 막지 못했다. 밭을 둘러보던 중 사라진 만석꾼의 장남은 저수지에서 잔뜩 부풀어 오른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아이는 금방 두각을 드러냈다. 주어지는 모든 의뢰를 문제없이 처리하고 돌아오는 아이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 아이들이 자신의 힘에 취하거나 죄책감을 느껴 곤란해지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화전촌의 장로들은 점점 불안감에 잠겨 들었다. 암살자는 단순한 칼이자 도구여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나 잘 드는 칼로 자라난 아이는 주인의 손을 베고 달아날 것 같았다. 정교한 세뇌와 암살행이 이어졌다.
어느 날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마을의 장로들은 그를 무예로 이름 높은 가주의 암살행에 집어넣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 여겼으나 아이는 아무런 불만도 없이 마을을 나가서는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모두가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더 이상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마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의아할 정도로 순종적이었지만 광신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세뇌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화전촌의 사람들은 그가 양인으로 발현하기를 은근히 고대하게 되었다. 그가 양인으로 발현하면 그 점을 핑계로 마을에서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를 군 같은 곳에 보내는 것 외에 피해 없이 마을에서 내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암살은 논외였다.
하지만 그는 양인으로도 음인으로도 발현하지 않은 채 그 무력만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어느 가을날, 화전촌으로 가장한 암살단은 황궁으로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는 죽음을 각오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부터 듣고 자랐다. 사냥꾼들이 살기 위해 짐승을 죽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를 매일 몇 번이고 들어야 했다. 그 말에 납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인간의 목숨이 그리 귀하지 않다는 데엔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인간과 감정을 교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쓰러뜨릴 때, 나와 함께 공부하던 동료 모두가 얼굴을 굳혔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들을 왜 못 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워 바라보고 있으면 또다시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을 사람의 인간이나 내가 의뢰로 죽인 인간들 모두,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등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도 일지 않았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에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잘해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었다면 좋았을까? 암살단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기 위해선 그들이 날 내보내든가 그들 모두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마을 사람 전체를 죽이는 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낳아준 부모도 신경 쓰였다.
삶에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울 정도로 압도적인 즐거움 같은 것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더 살아가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과는 아직 좋지 않았다.
율목친왕의 의뢰는 놀랍도록 투명했다. 자신을 가장해서 대신 죽어달라는 것이었으나, 그 속에는 죽음을 가장해서라도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는 뜻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황족이라는 것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사람들이라 했다. 지배하는 자의 위엄은 사람들을 절로 무릎 꿇리고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만난 율목친왕도, 친왕인 척 가장하고 만난 황제도, 그다지 특출난 감상을 내게 주지 못했다.
다만 내게 겁 없이 덤비는 막내 친왕이 신경 쓰였다. 아직 어린 평인임에도 그의 움직임은 훌륭했다. 그를 보고 있자면 내가 무예를 익힐 때가 생각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내게 패하고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그 정도의 움직임은 당연하다는 듯 자기 자신을 갈고닦아 다시 덤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이 나와 같은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키만 큰 소년이 내게 입 맞추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풋풋하면서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두 괴물의 영혼이 뒤섞여 짝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두 눈을 뜬 순간 세상이 어제와 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차가운 봄이 성큼 다가와 개화를 촉진하듯, 머릿속을 후려친 기억들이 내게 다시 돌아왔다. 어수룩하게 쌓아온 시간들이 흔들리고 잊어버렸던 옛 성품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될 수 없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틀자 잠들어 있는 친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감긴 눈꺼풀 안쪽이 움찔거렸다.
‘피곤할 만도 하지.’
며칠에 걸쳐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정사를 나누었다. 누워있는 침상의 이불이 눅눅한 것이 날씨 때문인지 계속된 정사 때문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중간에 궁인들이 들어와 정리하는 듯도 했으나 확실치 않았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뜨는 것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듯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어떤 일이든 끝은 있었다.
극양인이기 때문에 이리도 희락기가 격렬한 것인가? 황제와는 달리 친왕은 거의 이성을 잃은 것처럼 달려들었다. 더 이상은 못 한다고 울며 외쳐도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아서 절망 속에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다.
이렇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죽을 수 없다면 내 위에 올라탄 친왕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자 놀랍게도 다 지나간 일처럼 느껴졌다.
얌전히 잠들어 있는 친왕의 얼굴에서 어릴 적의 얼굴을 찾아보았다. 고집이 어려 있던 입술은 비웃음을 머금듯 한쪽이 슬쩍 비틀렸지만, 쭉 뻗은 짙은 눈썹이며 콧대는 그대로였다. 전장에서 상처를 입은 것인지 한쪽 눈썹 끝이 끊겨있었다. 손끝으로 눈썹의 끊긴 부분을 살살 만지자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곤히 잠들어 있던 친왕이 잠에 취한 눈을 슬쩍 떴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난 친왕이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한과 고통을 뒤섞어 뭉쳐놓은 얼굴이 바스러질 듯 일그러졌다.
“네가 나오는 꿈이었어.”
겁도 없이 내게 덤비던 커다란 소년은 이제 강건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가 내게 덤비면 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힘을 얻은 만큼 나는 나약해졌다. 몸과 마음 모두가 약해져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무슨 꿈이었는지요?”
“어렸을 때 꿈.”
발현의 열병으로 잃었던 기억을 모두 되찾은 걸까? 그는 혼란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애틋함을 품은 얼굴이 고통과 분노로 들끓어 오르다가, 우울함에 잠겨 처량해지길 짧은 시간 반복했다. 그의 눈동자가 흐린 날 명멸하는 별빛처럼 일렁였다.
“너는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 얼마나 기억하고 있지?”
“전부요.”
“…전부?”
친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것을 달래듯이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머릿속이 명료하면서도 어지러웠다. 감정 없이 사람들을 도살하던 과거의 나와 학대받아 위축되어 있던 내가 부딪쳤다.
“전부요.”
이제 나의 기억은 온전하다. 태어나서 발현하고 이곳에 있기까지의 모든 기억을 기억한다. 하지만 기억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정보가 있는 것과 진실을 아는 것은 언뜻 비슷했지만 전혀 달랐다.
예를 들어서, 나는 친왕에게 친애의 정을 느끼지만, 그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그의 형을 죽였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친왕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는 내게 져서 바닥을 나뒹굴었을 때보다 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왕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실을 가늠하는 듯 새까만 눈동자가 날 샅샅이 훑어내렸다.
“전부?”
“네. 전부.”
낮잠을 자고 있던 그에게 수련하던 모습을 들켰을 때부터, 율목친왕을 대들보에 매달던 모습을 들켰던 것까지 전부. 그가 내게 했던 입맞춤과 사소한 대화들, 중요한 얘기들, 마치 첫사랑과 같았던 눈빛까지 모두 다.
“그럼 형에게 강간당했다고 내게 말했던 것도 기억해?”
뒤틀린 목소리가 지독히도 낮았다. 그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떠올렸다. 내게는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뭣보다 그걸 강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의 폭력을 이용했다.
“그런…, 일도 있었죠.”
친왕이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지금 뭐라고?”
“필요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밀쳐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
“그런 문제입니다.”
황제는 양인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를 충분히 밀어낼 만한 힘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와의 관계를 원치 않았다면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남자 하나쯤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황제를 밀어내지 않은 건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런 일을 당한다면 분명 상처받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 사건 자체를 도구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얼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조금 불쾌한 일을 당했을 뿐 황제가 내 몸을 유린한 것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을 찾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절 율목친왕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면 분명 제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하를 해치려 들었겠지요. 죽이지는 않더라도 감히 황위를 노리지 못하도록 수를 썼을 겁니다.”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인가?!”
친왕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서슬처럼 시퍼렜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내가 마땅히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치고 괴로워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마치 내 몫까지 같이 괴로워하려는 듯 그가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이 저항 없이 안겨 왔다. 그는 울지 않았지만 마치 우는 것처럼 가슴을 들썩였다. 누군가가 날 위해 마음을 쓴다는 것이 생소하고 어색했다. 그의 등으로 팔을 감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가 손톱으로 긁어놓은 흉터들이 만져졌다. 며칠 내내 이어진 음란한 밤들의 기억과 함께 현실이 손끝에 감겨들었다.
“전하. 전하께선 이제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무슨 뜻이지?”
“전하의 희락기가 끝났으니, 이제 전 황제의 침궁으로 다시 끌려가겠죠.”
얌전하게 안겨 있던 친왕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무섭도록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의 원망에 가까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를 꽉 악물었다.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얼굴이 되어선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네가 먼저 말해보도록.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글쎄요.”
대답하기 곤란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과거를 완전히 기억해내기 전에도 황제에 대한 정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나를 산 주인이었으므로 그에 합당한 복종을 바쳐야겠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굴며 집착하다가 한순간에 손을 뒤집어 친왕에게 보내버렸다.
한때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폭력을 버티려면 그런 착각이라도 해야만 했다. 황제와 나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 무언가가 있기는 했다. 나와 그 모두를 망치는 종류의 감정이었지만.
“저는 황제의 소유물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친왕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힘들어?”
언젠가 그가 내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해 왔다.
힘드냐고? 당연히 힘들었다. 지금의 나는 감정에 무딘 괴물이 아니었다. 강간당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과거의 그 사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금의 나는 고통을 온전히 고통스럽게 느꼈고, 좌절과 우울감에 땅끝까지 가라앉았다. 나를 기억해낸 친왕의 모습에 설레면서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불안했다.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친왕을 살리기 위한 내 과거의 행동 때문이라는 걸 이젠 알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의 행동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힘듭니다.”
“도와줄까?”
친왕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라는 듯 그의 손이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자 친왕의 얼굴이 말도 못 하게 말랑해졌다. 저 삐딱한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해했던 게 얼마 전인데 지금은 물속을 보는 것마냥 투명했다.
도와줄까 물어보는 친왕의 질문이 달콤했다. 이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에 숨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고신을 받은 뒤 목이 잘려야 하는 게 아닌지요?”
친왕의 얼굴이 삐딱해졌다.
“뭐?”
“저는 황족을 살해했습니다.”
“황족? 율목친왕이라면 어차피 반역을 획책하던 역도가 아니냐. 그가 너에게 날 죽이라고 했다면서? 날 죽이고 그가 뭘 하려 했겠어. 황위를 노렸겠지.”
“그렇다 해도, 천한 암살자가 황족을 해한 것입니다. 의뢰한 자도 없는데 제 의지로 그를 죽인 겁니다. 저는 살인자입니다.”
“네 의지로…….”
삐딱하게 기울어졌던 친왕의 얼굴이 어째선지 다시 말랑해졌다. 그가 어딘가 간지럽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참는 것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한 말의 어디에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내용이 있단 말인가?
“전하?”
“나는 날 죽이려던 자의 죽음에 슬퍼할 정도로 대인배가 아니라서, 네가 날 위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하군.”
친왕은 잠깐 기분 좋게 웃은 뒤 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족이라는 건 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다. 방 씨의 혈통이 옥좌에 앉지 않으면 천재지변이 닥치고 지하가 열려 망귀들을 토해낸다고? 그래. 그 말은 맞아. 하지만 황제가 그릇된 정치를 하면 그보다 더한 지옥이 천하에 펼쳐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재난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황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리고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황제는 지고하지만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황제가 죽으면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닌가? 황족이라는 것은 신이 내린 고귀한 혈통이라 감히 해해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존재가 아닌가? 옥좌는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자리에 앉은 이는 불가침의 존재였다. 내가 밟고 걸어가는 땅은 황제가 있기에 단단한 것이고,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황제가 있기에 불타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돈만 주면 누구나 죽이는 백정이었으나, 그럼에도 황족의 숨을 거둔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향해 친왕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날 너는 다리에서 피와 정액을 흘리며 율목친왕의 목을 매달고 있었지. 황제가 널 겁탈했기에 아프다고 말했어.”
“괜찮다고도 말씀드렸죠.”
“그랬지. 죽이는 김에 둘 다 죽여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갑작스러운 폭언에 등골이 뻣뻣해졌다. 당황해서 쳐다본 친왕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삐딱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잔뜩 빈정거리는 대신 그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전하?”
“네가 날 기절시키지만 않았어도 내가 죽였을 텐데. 그럼 율목친왕이 황제를 죽이고 죄책감에 자살한 것으로 묻어 넘길 수 있었을 테니까.”
“두 분은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가 아니십니까.”
“그래. 정말 짜증 나는군.”
그가 무표정한 얼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날 내가 그를 죽였으면 패륜을 저지른 것이 되어 천재지변이 몰아쳤겠지. 땅은 물처럼 꿀렁이고 하늘은 불처럼 타올랐을 것이다. 당최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황족이 도시 하나를 불태우더라도 떨어지지 않는 천벌이라는 게, 개차반 같은 친인척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떨어진다는 것이. 하늘이라는 것도 참 별 게 아니야.”
신성모독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에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화, 황제가 저를 안은 것은 사고였습니다.”
친왕이 가당찮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사고?”
“그 날, 갑자기 희락기가 찾아왔기에 눈앞의 사람을 안은 것뿐입니다. 양인의 첫 희락기는 음인의 것보다 지독하다더군요. 황제는 이성을 잃고 그냥…. 눈앞에 있는 것이 누군지도 모르고 범했을 뿐입니다.”
친왕이 날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칼을 맞댄 적장도 이처럼 험악한 눈초리를 받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해야 될 것 같았다. 황제는 그저 율목친왕을 만나러 왔을 뿐이었다. 율목친왕이 비밀스레 출타하였기에 내가 율목친왕을 가장하여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황제는 정상이었다.
“정말로 사고였습니다. 그 사고를 제가 멋대로 이용하여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긴 했으나….”
“지금 널 겁탈한 남자를 두둔하는 것이냐?”
“하지만….”
“닥쳐!”
친왕이 이를 갈아붙이며 이 사이로 말했다.
“그래서, 형님의 노예인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제대로 대답해.”
날 반쯤 끌어안은 친왕의 몸이 푸들푸들 떨렸다. 울분이 가득 차서 버틸 수 없다는 듯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불거져 나온 그의 턱을 쓰다듬자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내게 하듯이 그의 뺨과 얼굴에 입을 맞췄다. 받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부끄러운 짓이었다. 내 입맞춤을 받은 친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길게 흘렸다.
“우선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억을 되찾는 것과 진실을 깨닫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황궁에서 도망치거나 친왕의 뒤에 숨는 게 아니었다. 기억을 되찾으면서 생긴 의문을 먼저 풀어야 했다. 결자해지라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묶은 매듭만 풀 수 있을 뿐, 다른 이가 묶은 매듭은 풀 수 없었다. 나는 조심조심 친왕을 달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노예는 주인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지금 뭐라고….”
“황제께선 제게 용종을 잉태하라 하셨습니다.”
“닥쳐!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딱히 황제에게 가지 않아도 내 궁금증은 풀 수 있을 테지만, 이대로 친왕의 품에 안겨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 가슴은 멍든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 친왕의 궁에 머무는 것은 쉬웠지만, 그래서는 영영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고통받길 원했다. 분명 과거의 나는 벌 받아 마땅한 백정이었지만 아무런 기억도 없이 은애하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던 나는 죄가 없었으니까.
충분히 고통받았지만 더욱 고통받길 원했다. 내 마음의 한구석은 얼어붙어 영원히 녹지 않을 듯했고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나는 복수를 원했다.
“제가 회임했다고 생각하신 황제께선 한 달 정도 제 몸에 손을 대지 않으셨지요. 그 정도 기간이면 됩니다.”
“한 달? 일각인들 그의 손에 둘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역모라도 일으키시려는 건가요? 저 같은 노예 때문에?”
친왕의 얼굴이 불만스레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그러겠다 말할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가만히 계시면 전하의 아이가 제위를 이을 텐데요?”
친왕이 기가 차다는 듯 이를 갈았다. 누구라도 주저할 만한 말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내 말을 듣는 순간 혐오스럽다는 듯 진저리쳤다.
“황제라는 자리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그의 말에 동의하긴 힘들었지만 나는 배부른 기분에 휩싸여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반응이 지독히도 만족스러웠다.
“저는 다시는 황제와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 필요 없다. 가지 마. 내가 지켜줄 테니.”
“한 달입니다, 전하.”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든 걸 잊으라고 말하며 그를 기절시켰을 때처럼. 친왕이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물리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가는 나를 친왕이 뒤늦게 따라 나왔다. 방 밖으로 나와서야 나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관없었다. 알몸으로 침소 밖에 나온 나를 향해 환관과 궁인들이 고개 숙였다.
얇은 비단 침의를 내 몸에 걸쳐주는 것은 황제의 침전을 지키던 태감이었다. 젖은 몸에 감기는 얇은 비단을 나는 무심히 바라보았다. 친왕의 침전 앞에 늘어선 이 자들은 내가 나올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렸을까? 아무리 황제의 명이라 해도 정사를 나누는 중에 들이닥칠 순 없었을 것이다. 희락기가 끝나고 방에서 나오기를 내도록 기다렸겠지.
도열한 내관과 궁인들의 몸에서 무거운 냄새가 났다. 황궁의 기사에 휘말린 자들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공포의 냄새였다. 황제와 친왕이 얽힌 이 일의 끝이 좋을 수 없다는 걸 그들 또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황제의 사람들을 본 친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존의 곁을 지켜야 할 태감과 궁인들이 어째서 이곳에 늘어서 있느냐?!”
“전하. 폐하께서 빌려주었던 사노를 다시 데려오라 명하시었나이다.”
“사노(私奴)?”
“그렇사옵니다.”
“여기 어디에 황제의 사노가 있단 말이냐?”
친왕의 조소에 태감이 말을 바로 잇지 못했다. 내관과 궁인 모두가 내 옷치장을 들며 굽신거리는 모습은 노예를 대하는 태도라 보기 어려웠다. 나는 태연히 시중을 받으며 내 몸에 걸쳐지는 옷들을 살펴보았다. 비빈이나 걸칠 법한 아름다운 것들이었으나 자색의 비단은 섞여 있지 않았다.
“황공하옵게도, 이번에 동평왕 전하의 희락기를 모시게 된 기조라는 자가 황상의 사노이옵니다.”
“희락기에 내리셨으니 폐하께서 본왕에게 주신 것이 아니냐? 준 걸 다시 가져가시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네놈들이 본왕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전하. 황공하오나….”
“닥쳐라!”
“황상의 명을 거역하려 하시옵니까?”
태감이 몸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고했다. 죽음을 각오한 듯 두려움에 떨면서도 황제가 시킨 일을 꿋꿋이 해내는 태감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황제의 광기가 모두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친왕의 말이 틀린 것이 없기에 여기 와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자신의 음인을 빼앗긴 양인이 어떤 식으로 포악해지는지는 황제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옷깃이 잘 여며진 것을 확인한 뒤 친왕 앞에 무릎 꿇었다. 예를 표하는 내 모습에 친왕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전하.”
“일어나.”
“소인 주인께서 부르시어 돌아가야 하나이다. 부디 건강하시옵소서.”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굳어버린 친왕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내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배 속의 태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황제는 날 건드리지 않을 테지만 꼭 그러리라 확신할 순 없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황제가 내 목을 졸라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친왕의 품에 안겨 그로부터 숨는다면 모든 것이 파멸로 미끄러질 것이다. 날 보낼 때 황제가 그의 반항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금군을 보내지 않을까? 기억을 되찾자마자 나는 그를 걱정하게 되었다. 형제 둘 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인데, 마음속의 추가 완전히 기울어진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냐. 내 형님의 친절에 지극히 만족하였다고 전해 올리거라.”
한참의 침묵 끝에야 둔중한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제야 안도한 궁인들이 얼굴에 혈색 비슷한 것이 돌았다. 나는 공모자의 시선으로 친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빈정거리는 표정 속에 지독한 분노를 감춘 채 날 마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금니를 아려 물면서도 내 뜻대로 움직이게 놔주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강인함이 그것을 용납게 한 것일까? 이제 내 뼈는 가늘어지고 근육은 약해져서 썩어버린 갈대와 다름없건만.
“망극하옵나이다.”
나는 내 기억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닌 손짓에 놀라 물러섰던 친왕의 모습처럼, 내 기억은 서슬 퍼런 칼이 되어 상대를 찢어야 했다.
* * *
가벼운 옷자락 사이로 날카로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전날 따뜻했던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얼음처럼 매서운 공기가 사람들의 뺨을 얼렸다. 봄비가 내린다며 기뻐했던 것도 잠시.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고 무거운 바람이 들뜨려는 마음을 꺾어 눌렀다.
숨어들 듯 왔을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길엔 많은 이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굽힌 궁인들의 모습에서 황제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궁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환했으나 어딘가 어둡고 텁텁했다. 밝은 표정을 지은 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이를 가진 것일까? 아마도 가졌겠지. 보란 듯이 배 위에 손을 가져다 대자 훔쳐보는 시선들이 부산스레 오갔다. 다들 어두운 얼굴인데도 그 눈빛들에 기대감이 어려있는 것은 황제의 후계가 끊어지지 않으리란 사실 때문이었다.
‘방 씨의 핏줄이기만 하면 누구 애든 상관없다는 건가.’
내가 친왕과 희락기를 함께 보낸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황제의 사노를 운운했던 태감도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궁 안의 모든 것이 환멸스러웠으나, 괴물들이 모여 있는 이 황궁 안에서도 가장 징그러운 괴물이 바로 나였다. 고귀한 피를 해쳐 죽이고, 지고한 자의 정신을 더럽히고, 황위에 올라야 마땅한 자를 과거에 얽맨 머저리로 만들었다.
느린 걸음으로 황제의 침전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이곳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전에 묵었던 별궁이 더 낫겠어.”
“황제께옵서 하명하시길, 이곳에서 보겠노라 하셨나이다.”
“이곳은 마음이 안정되질 않는다. 안 좋은 기억도 많고.”
보란 듯이 목을 쓰다듬었다. 이 호화로운 침전에서 멍들어 기절한 게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 뜻을 알아챈 태감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어중간하게 굴었던 예전과는 달리 완전한 상전의 태도를 취하자 시중들던 이들 모두가 당황스러워했다.
“뭘 그리 보는 것이지? 어서 황제께 고해라. 마음이 답답하고 울렁거려 이곳에는 있지 못하겠다 하더라고.”
아무런 첩지도 없는 노예의 명령에 태감이 당혹해하면서도 고개 숙였다. 율목친왕을 대신할 때 배웠던 태도들이 마음먹은 즉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발현하지 못한 평인이라고는 하나 황제의 장자였던 율목친왕의 움직임은 지극히 우아하고 고압적인 것이었다. 화전민이 삶과 흐릿한 사냥의 기억들, 노예의 삶만을 알던 때와는 같을 수 없었다.
침전의 서탁에 한 손을 얹은 채로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별궁에 가도 좋다는 황명이 떨어졌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별궁을 향해 걸어갔다. 별궁이래도 황제의 궁에 속한 곳이었으나 그곳에는 도주를 위해 준비한 물건들이 그대로 숨겨져 있을 터였다.
봄이라고는 하나 나무들은 아직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잔뜩 부푼 꽃눈으로 울퉁불퉁해진 가지들은 껍질 밑으로 생기를 끌어올리며 피어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꽃과 새싹들은 갑자기 나타나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나무의 딱딱한 피죽 속에 숨어 겨울을 견디고 준비한 것들이었다.
나는 별궁의 의자에 앉아 자연스레 몸을 기댔다. 한 손으로 늘어지는 소매를 잡고 서탁 위의 책을 들추자 궁인들의 얼굴이 마치 귀신을 보는 듯 일그러졌다. 황궁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들의 태도가 바뀌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화전민 출신의 노예가 하루아침에 귀족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일까? 궁인들의 얼굴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황제께선 언제 발걸음 하신다던가?”
“저녁을 이곳에서 들겠다 하셨나이다.”
내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내게 죽을 먹이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또 굶는다면 그는 한 숟갈 한 숟갈 직접 떠서 억지로 먹일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길 원하니까.
“배가 고프니 상을 차려라.”
“화, 황상을 기다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시간이….”
“이곳이 냉궁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사람을 굶기려 들지?”
“그런 게 아니옵고.”
“내관과 궁인들이 작당하여 굶기고 핍박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고 황제께 고할 것이다.”
궁인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는 것을 나는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힘에 약하고 권력에 약한 것이 황궁의 인간들이었다. 대놓고 하대하며 찍어 누르자 어찌할 줄 모르면서도 복종하며 몸을 낮췄다. 앞으로 할 일에 그들의 굴종이 필요했기에 나는 보란 듯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소인이 노예라서 그리 무시하는 것인지?”
궁인이 기겁하며 무릎 꿇었다.
“아, 아니옵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곧 높은 궁에 올라 금관을 쓰실 터인데, 허락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마라 부르고 싶사옵니다. 소, 소인이 제대로 마마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시장하실 터인데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세 상을 올리겠나이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말과 행동을 조심하도록.”
내 머리에 물건을 집어 던졌던 희빈과 심술을 부리던 친왕의 태도를 반쯤 섞자 아주 성격 나쁜 인간이 만들어졌다. 그 사실에 만족하며 나는 궁인이 가져온 음식들을 천천히 비워 나갔다. 배가 고픈 것은 사실이었다. 깨어나서 이곳으로 바로 오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 황제가 두려워서 마냥 기다렸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한때 나는 그의 사랑을 갈구했는데, 이제 그 마음은 증오로 바뀌었다. 그릇을 다 비우고 저(箸)를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간 것처럼 버석한 얼굴에 광채를 품은 두 눈이 시커멓게 번들거렸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편해 보이는구나.”
“그렇습니까.”
“좋더냐?”
날 친왕에게 보낸 것은 황제인데도, 그는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듯 내게 따져 물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무딘 쇠를 갈아내는 듯 날카롭고 불쾌했다. 조정의 신하들도 이제는 저 광기를 눈치챘을 것이다. 어둡고 음습한 황궁의 분위기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네. 좋았습니다, 폐하.”
장창에 명치를 뚫린 것처럼 황제가 숨을 멈췄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좋았냐고 날 몰아가면서도 감히 내가 긍정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한 듯 그의 몸이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그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나는 냉소하며 바라보았다. 저렇게 올라간 손은 보통 내 뺨을 치고 목을 졸랐다. 반쯤 미쳐버린 황제는 힘을 조절하지 못해 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네놈이 감히…!”
“아이를 유산하면 또다시 친왕께 가야겠지요?”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린 모습 그대로 굳었다. 나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충격으로 굳어버린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 좋습니다, 폐하.”
폭력에 익숙해진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두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몸이 절로 떨렸다. 그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기억을 모두 되찾아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물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내가 무서워한다고 황제가 오해할 것이 두려워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눈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는 들어 올린 손을 내게 떨어뜨리지 못했다.
아마도, 이 세상은 황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기억을 잃게 하고 그를 연모하게 만들었겠지. 하지만 그 많은 기회들,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들을 그는 모두 날려버렸다. 그리하여 결국엔 세상도 그를 증오하게 되었으리라.
질투와 혼란, 그리고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눈은 마치 혼탁한 진흙 같았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선택으로 일어난 것임에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렸다. 방국의 신민 중 한 명으로서 황제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일었으나 한편으론 짙은 쾌감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식사를 준비하라 명할까요, 폐하?”
“대체 누구냐 네놈은?”
“무슨 말씀이시온지.”
황제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우가 역할에 따라 행동을 바꾸듯, 지금의 나는 살수행을 나갈 때처럼 그 움직임을 모두 바꿔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보란 듯이 우아하게 팔을 들어 손 아래 놓여있던 책을 덮었다.
책을 덮은 뒤 검지로 책등을 쓰다듬는 것은 율목친왕의 습관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며 한숨을 내쉬듯 작게 웃었다. 예전 그의 역할로 궁에 있을 때 황제가 찾아올 때마다 하던 행동이었다. 날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너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어째서…!”
황제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거칠고 어지러운 숨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형님께선 돌아가셨어.”
“당연히 돌아가셨지요.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광기조차 빛이 바랠 정도의 혼란이 그를 휘둘렀다. 한참이나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르던 황제는 이내 이를 악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집요한 시선이 내 얼굴과 책 위에 놓인 손을 살폈다. 그는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살피다가, 곧이어 아주 익숙한 친인의 버릇을 되새기듯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결국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한 그의 시선이 부질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흐트러졌다.
황제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럼에도 모른 척하며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 와 저런 표정을 지으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이제 와서 대체 누구와 나를 헷갈리는 것인가?
“율목친왕.”
입 안에서 감겨 나오는 단어가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가시에라도 찔린 양 퍼뜩 놀란 황제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유약하게 보였다.
“그분과 제가 그렇게나 닮았습니까?”
“…….”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내 얼굴을 향했다. 고개를 저으려던 그의 목은 이내 책등을 쓰다듬는 손가락을 보자마자 뻣뻣하게 굳었다. 황제는 내가 살수인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율목친왕을 죽인 것까지는 몰라도, 내가 어느 마을 출신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고 꽤나 명료한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닌가?
“폐하. 제가 누구이길 원하십니까?”
“…아니. 아니야. 넌….”
그가 나를 범하던 첫날 밤이 떠올랐다. 삼 년 전이 아니라 십 년도 전의 그날 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억은 열화되기 마련이나 오랫동안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들은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명료하고 깨끗했다.
그날 밤 그는 나를 율목친왕이라 부르며 안았다.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삼 년 전. 그가 날 데려온 뒤 처음으로 안겼을 때도 나를 보고 잠깐 형님이라 불렀지.
“넌 누구냐?”
황제가 괴로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침묵했다. 그는 내가 누구이길 원하는 걸까? 내가 율목친왕이라면 십여 년 전 대들보에 목을 매단 남자는 대체 누가 되는 것이며, 황제는 날 노예로 데려온 이후 내내 근친을 저지른 것이 된다.
인륜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가 옥좌에 앉아있으면 세상에는 재앙이 일어난다. 그 인륜이라는 것은 오로지 황족인 친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그 대상의 범위가 작은 만큼 그러한 일을 저질렀을 때의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나는 서책의 표지를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율목친왕의 사소한 버릇들은 마주 앉은 사람을 거슬리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라 기억해내기 쉬웠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대답할 것입니다.”
“율목친왕은 유서를 남겼다. 그의 필적을 모사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율목친왕이 명필이기는 했다. 유서를 남겼다는 건 몰랐으나 예상은 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그를 대신하여 내가 죽는 것이었으므로, 내 시신이 그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뭔가 써놓기는 했을 것이다.
황제의 얼굴이 문득 알겠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가 이렇게 행동하라고 하던가?”
어쩔 줄 몰라 하던 황제의 얼굴이 다시금 예민한 날카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가 내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이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쳐 주던가? 어렸을 때라 큰형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을 텐데. 하긴. 그때도 영민한 아이기는 했지.”
“윽, 아픕니다.”
“그가 황위가 탐난다던? 처음부터 그놈이 꾸민 것인가? 날 미치게 하려고, 널 내 앞에 들이민 건가?”
내가 친왕의 처소로 들어간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황제를 괴롭힐 생각이었다. 그의 마음을 찬찬히 갉아내려 미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나인지 율목친왕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고통 속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그가 반쯤 미쳐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했다. 그가 내게 손을 댈 때마다 아팠으니까. 그가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너무 아팠으므로.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몸에서 짙은 향냄새가 났다. 내 팔을 움켜쥐고 흔들던 그의 얼굴이 일순 얼음처럼 싸해졌다. 그가 차가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만 보면 제정신을 차리기 힘드니 이상한 일이다. 살면서 그토록 정신을 잃고 사람을 상하게 한 적이 없거늘.”
그가 나를 강제로 안았던 날이 떠올랐다. 십 년이 넘었는데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황제는 이성을 잃고 내게 폭력을 휘둘렀다. 양인의 첫 번째 희락기는 음인의 것보다 강하다고 들었기에 그의 행동을 내내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황제고 안고 싶은 사람 누구든 안을 수 있으니까.
그는 그때 자신이 범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어째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음인으로 늦게 각성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황궁에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으면서도, 그날 그에게 짓눌려 비명을 내지른 것이 나라는 것을 왜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까?
“율목친왕이 자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압니다. 폐하께서 궁금해하셨던 제 기억이 바로 그것이지요?”
내 말에 황제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그저 정지한 듯 보였다. 완전히 굳어버린 그를 향해 나는 토하듯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이성을 잃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싫다고 외치며 폐하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으셨지요. 바로 음인 아이를 준비시킬 것이니 잠시만 놓아달라 비는 얼굴을 폐하께선 비웃으셨습니다.”
그는 사냥감을 잡은 것처럼 즐거운 얼굴로 나를 찍어 눌렀다. 명치를 치고 컥컥거리는 뒷덜미를 잡아 입을 벌리게 했다. 율목친왕 대신 차려입은 얇은 포의 옷고름이 뜯어지고 키득거리는 얼굴은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율목친왕이 이런 일을 당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 것이라는 걸. 이부동생에게 힘으로 짓눌려 비웃음과 함께 범해지는 것을 그가 견뎌낼 리 없었다. 그리고 견뎌낸다 해도 그 이후 황제와 어떤 얼굴로 마주 볼 것인가? 그리고 황제가 과연 살아있는 자신의 치부를 용납해 줄 것인가?
표정을 잃은 황제의 얼굴은 놀랍도록 새하얬다. 마치 겨울의 하늘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얼굴은 모든 생기를 잃은 것처럼 파스스 부서졌다.
“아픕니다. 놔주십시오.”
황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을 잃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는 팔을 움켜쥔 황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누가 그랬던가. 기억을 다 잊었다지만, 생존에 필요한 것들부터 떠오르게 될 거라고. 그 말은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영영 기억하지 않고 묻어두게 되리라는 뜻이 아닐까.
친왕은 나와 보낸 밤들을 모두 기억했다. 반면 황제는 희락기가 끝나고서야 목을 매단 율목친왕을 발견했노라 말했다. 희락기 동안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치 날 때리고 나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아랫배를 팔로 감싸며 뒷걸음질했다. 황제의 시선만이 비밀을 들킨 뱀처럼 교교하게 나를 따라 흘렀다. 그가 정신 나간 것처럼 군적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 당시 율목친왕의 궁 주변에서 탄 냄새가 종종 풍겼지. 그가 자신의 글이나 그림을 종종 모아 태웠기에 그 때문인 줄 알았으나, 역시 그건 너였구나.”
어깨를 세게 쥐어 미안하다는 듯 그가 차가운 손으로 내 팔을 어루만졌다. 황제의 우아한 체향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가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내 팔을 다시 한번 단단히 잡아 고정시켰다.
“율목친왕은 암살단의 위치와 의뢰 경로, 그 패거리들이 이용하는 상단과 표국에 대한 것을 유서에 상세히 써 두었다. 외압과 두려움에 굴복하여 불쾌한 자들을 불러들였으나, 천하의 중심에 삿된 자들을 끌어들인 죄책감으로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었노라 고백하였지. 그 고통과 참회의 심정이 어찌나 절절하던지.”
율목친왕은 그러한 유서를 남김으로써 남아있을지 모르는 암살단의 꼬리를 완전히 자르려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의뢰한 내용이 새어 나가서도 안 되고, 그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와 협박하는 것도 원치 않았을 테니까. 단지 그것뿐인 꼬리 자르기였다.
“궁 안으로 끌어들인 삿된 자들.”
황제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는 내게서 뒤돌아 천천히 멀어졌다. 황제의 발걸음을 밝히는 등불이 바닥 가까이에서 휘영청 흔들렸다. 내게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황제의 모습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는 기억을 되찾았다는 내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잘 알겠다는 듯 멀어지기만 했다. 그것이 사실은 도망이라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나를 보면 이성이 끊어진다는 건 거짓이었다. 제 욕심껏 상대를 폭행한 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황제의 오랜 악습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지적받고 싶지 않아 내 앞에서 도망친 것이다.
* * *
주변에 친왕의 물건을 놓는 것도 아닌데, 내 몸에 배어 버린 친왕의 체향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 냄새와 탄 냄새라니. 그야말로 전장과 폐허의 냄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체향과 내 체향이 썩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황제는 매일 밤 찾아와 나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체향을 철저히 통제하던 이전과는 달리 황제는 어떻게든 나를 자신의 체향으로 물들이려고 했다. 그가 내 몸에 손을 댈 때마다 나는 발버둥 쳤다. 유산이 걱정될 정도로 심하게 몸을 뒤틀면 황제가 분노 가득한 얼굴로 내게서 물러났다.
회임 여부를 알 수 있을 때까진 약 한 달. 회임이 안정기에 들기까지는 약 석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유산하면 친왕에게 다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황제는 불쾌해했다. 혹여 내가 일부러 유산할까 봐 감시의 눈길을 견고히 했다.
“유산이라니.”
작은 혼잣말에 옆에 선 이들의 몸이 뻣뻣해졌다. 감시를 맡은 이들은 내가 유리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유난스레 굴었다. 내게 속한 궁인들은 계단을 증오하고 연못을 혐오했다. 내가 그 두 가지를 쳐다보는 것조차 불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일부러 유산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임신한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잘 먹지 못하고 갖춰 입지 못해서 몸이 아프고 배앓이를 하는 거라 여겼다. 황제가 내게 내리는 약이 피임약이라 생각했기에 회임의 가능성조차 의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가 황제에게 돌아간 지 딱 보름이 지났다.
겨우내 말라 있던 회색의 가지들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산과 연못의 돌들 사이로 녹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늘진 곳에까지 해가 들기 시작하자 두툼하게 쌓여있던 눈 밑에서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새벽이면 땅이 쩍쩍 갈라지며 녹는 소리가 났다. 황궁의 분위기는 험악했으나 작은 새들은 종종대며 봄의 분위기를 더했다.
그러나 봄의 도래와는 달리 천하는 그 거대한 몸을 불안감에 휘청거렸다. 봄과 함께 태풍이 땅 위를 휩쓸었다. 높아진 파도는 배들을 뒤집고 차가워진 바람은 폭설을 퍼부었다. 태풍이 비켜난 지역에는 비가 내리질 않았다. 얼어붙은 땅이 아직까지 무쇠처럼 단단했다. 밭을 갈 시기는 아니었으나 보에 물을 채우지 못한 농민들은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진에 대한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백여 가구가 땅 밑에 파묻혀 몰살하게 된 피해를 현령에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황제는 살아남은 이들을 조속히 구조하라 명하였으나 그와 비슷한 재난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계절이 바뀌는 때에 재난이 이는 것은 흔한 일이나 그 재난이 하필 지진인 것에 신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진은 토룡의 화신인 방 씨와 연관된 것. 황제의 치세에는 별문제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당황하며 어수선한 눈빛만 주고받았다. 황제는 그 모든 재난을 우연이라 일축했다. 불온한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케 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노라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각 지방을 돌고 온 상인들의 증언이 도성에 쏟아졌다.
“하늘이 땅을 갈아 밭을 만들면 지금과 같을 것이오!”
보부상이 참담한 얼굴로 외치는 말에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천하의 땅이 다 뒤집어져 있었다. 큰 도시는 가까스로 재난을 피하였으나 열네 곳의 마을이 통째로 사라졌다. 산맥은 뒤틀리고 길은 끊어져 물자가 제한되었다. 수원이 막히고 강줄기가 모양을 바꿔 두 개의 마을이 침수되었다. 요괴를 보았다는 목격담까지 나오자 더는 황제의 부덕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황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니 시정할 방도 또한 없었다. 누군가가 화풀이 인형에 대한 얘기를 입에 올렸으나 빈축만 샀다. 황제가 음인 하나 가지고 노는 정도로 하늘이 진노할 리 없었다. 황제와 친왕이 음인 하나를 두고 즐겼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황족들이 음인을 주고받는 것은 흔한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었다.
황제는 냉정한 얼굴로 국사를 돌보았다. 그런 황제를 향해 친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재난에 대한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옥좌의 추가 친왕에게 기울었다. 극양인인 친왕의 성미를 많은 이들이 경원시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 누구도 황제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황제의 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오랜만이옵니다, 마마.”
“오랜만입니다.”
내 앞에 사람이 무릎 꿇는 것이 이제는 익숙했다. 황제가 몰락하는 와중에도 황궁의 모든 이가 내게 굽신거렸다. 내가 황족을 잉태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오만하던 경빈조차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내가 손짓하자 궁인 하나가 권 의관을 의자로 안내했다. 권 의관의 손에는 익숙한 약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게 쭉 냉랭하고 거만하게 굴던 권 의관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요즘 몸이 통 무겁더군요. 어의가 봐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익숙한 사람이 더 안심되기도 하고, 상담할 일도 있어 기별을 넣었습니다.”
“하하. 소인을 높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마마께 최선을 다해 충성할 것입니다.”
권 의관은 이제 마마라고 대놓고 아부했다. 그 모습은 운 좋은 벼슬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나 나는 그의 본 모습을 잘 알았다. 나는 보란 듯이 배 위에 손을 올리고 그를 향해 웃었다.
“보름 전쯤 황제의 명으로 친왕을 모셨는데, 아무래도 회임을 한 것 같습니다. 축하해 주시겠지요?”
“허! 이런 경사가! 축하드리옵니다. 마마!”
권 의관이 한 점 그늘 없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줄을 잘 서서 출셋길이 열린 권 의관이 가감 없이 기뻐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데 요즘 통 기력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지어주셨던 약을 먹고 괜찮아졌는데, 다시 한번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오늘 혹시나 싶어 챙겨왔사옵니다. 하온데 보름 전이라면 아직 산맥이 잡히지 않을 때가 아니온지요.”
“희락기를 보내며 몇 번이나 결착했기에…. 부끄럽습니다.”
“하하. 그, 그렇습니까? 축하할 일입니다. 소인이 주책없이 굴었습니다.”
권 의관이 익숙한 약을 꺼내 궁인에게 건네었다. 궁인을 향해 손을 뻗자 공손한 자세로 받은 약을 내밀었다. 약을 감싼 하얀 종이를 풀어내자 익히 보아왔던 약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에 들어온 이후 내내 달여 마시던 바로 그 약이었다.
“몸을 보해주고 체질을 증진하는 약이라 하셨던가요?”
“그러하옵니다.”
권 의관의 얼굴에선 그 어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팔을 세워 턱을 괴고 그를 갸우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황제의 아이가 아닌 것에 놀라지도 않으시는군요?”
“소, 송구합니다. 그…. 황족의 피라는 것이 워낙 특별한 것이다 보니.”
권의관은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곤란해했다. 내가 그에게 따져 묻는 일이 워낙 없기 때문에 당황한 것도 같았다. 저 모든 것이 연기라는 사실에 나는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문하십시오.”
“황제의 아이를 낙태시킨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고향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니 복수하고 싶었겠지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저를 죽이지 않았냐는 점입니다.”
권 의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고 탁해지는 것을 나는 조금 무료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