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방현성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동쪽의 야만인들을 평정할 때엔 좋았으나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불쾌한 것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승전연회니 뭐니 하는 공치사도 귀찮았지만 침실로 숨어드는 음인들과 귀족들의 행태가 특히 거슬렸다.
전쟁을 이리 빨리 끝내지 말 것을 그랬나. 고착상태로 만들어 동부에 처박히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초들의 고충을 생각하면 이는 할 짓이 아닌지라 재빨리 적을 격퇴하고 방어선을 정비했더니, 구국의 영웅이니 뭐니 이래저래 짜증 나는 일만 잔뜩 생겼다.
금성으로 돌아오며 지나쳐 온 성도마다 걸인과 노예가 넘쳐났다. 기후는 온화했지만 황제의 할 일이라는 것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만은 아닐 터인데, 재해가 없는 것만으로도 황제는 성군이라 불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오른 형님은 이른바 명문이라 불리는 귀족들의 등쌀 속에서도 제법 권력을 움켜쥔 편이었다.
‘그래 봐야 얼마나 가겠어?’
빈정거리는 것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황족은 그 수가 적을수록 권력이 강해졌다. 나도 형님도 자식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 중에도 아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형이 권력을 쥐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꼭두각시로 세울 어린애가 없으니 귀족들은 형님의 황제 노릇이 눈꼴시더라도 어울려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허수아비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해라도 하게 되면 그 즉시 평지풍파가 벌어져 사람이 죽어 나갔다. 황제가 도를 잃어 하늘에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마침 그 뒤를 이을 장성한 형제가 있으니 옥좌의 주인을 갈아치우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극양인인 자신이 옥좌에 앉게 되는 것이다. 내 기세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양인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형님을 황제의 자리에 앉혀 놓아야 했다.
“참으로 끔찍한 자리가 아니냐.”
“무엇이 말이옵니까? 전하.”
“황제라는 것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온 내관이 질겁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진정시키기 위한 산 제물과 다름없었다. 황제라며 굽신거리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은 방 씨 핏줄을 향한 질시와 분노였다. 아무리 자격 없는 인간이라도 상관없었다. 방 씨의 인간이 옥좌에 앉아 있지 않으면 재난이 천지를 덮치니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방 씨가 대체 뭐가 그리 특별하기에?
토룡의 후손이라 하면 말만 거창하지 결국 지렁이의 후손을 뜻했다. 황족을 나타내는 자색은 지렁이의 몸체 색을 표현한 것이었다. 지렁이란 밭에 유용한 미물이지만 그 생김새가 훌륭하다기보단 하찮고 비루했다. 그렇기에 신격화하면서도 물고기 밥이니 지렁이니 하며 비하하는 소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토룡이라는 것의 진정한 정체는 땅속을 흐르는 시뻘건 불길이었다. 지렁이란 그 불길을 본떠 만들어진 생물일 뿐이었다. 가끔씩 지저를 흐르는 불길의 꿈을 꾸고는 했다. 쇳물처럼 달아올라 땅을 덥히며 강물처럼 흐르는 그것은, 분명 황족의 본신을 뜻하는 것이리라.
“어째서 인간으로 화한 것인지는 몰라도, 황제라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자리지.”
위대한 용의 꿈을 꾸어도 어차피 자신은 인간이었다. 인내심과 현명함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뱃속 시커먼 것들을 모두 죽이고 새로운 자들을 뽑아 부리고 싶었다. 그런 짓이야말로 폭군이나 할 법한 행동이겠지만.
“잠깐 오수라도 즐기고 오마.”
“오수라니요, 전하? 벌써 저녁이 다 되어갑니다!”
달라붙는 내관을 떨구고 빠르게 걸어가자 등 뒤에서 난처한 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쟁터까지 따라와 충성한 노 내관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잠깐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 것처럼 불쾌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참을 수 있는 한계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발걸음이 절로 폐궁을 향했다. 돌아가신 큰형님이 지냈다던 궁은 사람이 오가지 않아 적막하고 시원했다. 귀신이 있다는 소문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것을 신경 쓴다면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어찌 베어 넘기겠는가? 그리고 설령 귀신이 있다 한들 사람들이 달라붙어 생기는 짜증스러움을 넘기진 못할 것이다.
폐궁으로 가는 길은 얕은 산을 하나 끼고 있어 그 풍광이 아름다웠다. 산을 가득 채운 단풍의 모습에 짜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단풍이 눈처럼 떨어지며 허공을 물들였다. 마치 불씨가 튀어 번지는 것 같은 하늘은 가라앉는 석양의 빛과 어우러져 그 색채를 더욱 빨갛게 했다.
폐궁의 정문이 눈에 들어오자 어디선가 나는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황궁에 온 것은 거진 이년 만이었다. 새로운 황족이 태어나지 않았으니 궁은 아직도 비어있을 터였다. 황족이 사용하던 궁을 처첩에게 내리는 법은 없으니, 아직 그곳은 낡아 무너지는 유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꽃씨가 싹을 틔웠는지도 모른다.
꽃향기를 맡으며 한숨 자고 일어나면 피부에 달라붙은 듯 찐득거리는 불쾌감도 어느 정도는 사라질 것이다. 꽃향기가 맘에 드니 꺾어서 내 궁의 정원에 심어도 좋겠지. 오랜만에 품은 기대감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꽃이 핀 줄 알았는데, 폐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꽃향기는 그대로인데, 어디에서도 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허허로운 정원의 풍경은 지금까지 봐온 것과 거의 같았다. 거미가 집을 지은 처마라든가 먼지가 쌓인 마루 같은 곳에선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날아온 꽃씨 같은 것은 없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구석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 보기 싫어 온 곳에서 인간을 보게 되자 기분이 삽시간에 더러워졌다. 내 공간을 눈앞의 인간이 망치고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다가가도 남자는 날 알아채지 못했다. 당장에 그를 후려치지 않은 건 예상치 못한 꽃향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등에서 달콤한 향이 한정 없이 피어났다. 마치 그가 꽃인 듯 달콤한 체향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지고 짜증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느긋해졌다. 누가 근처에 온 줄도 모르고 뒤돌아 앉아 있는 모양새가 그제야 눈길을 끌었다. 목덜미에서부터 등까지 쭉 떨어지는 선이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물고기가 좋은가?”
당황하며 주저앉는 모습에 나 또한 당황하고 말았다. 뒤돌아보는 얼굴이 새하얗고 고왔다. 길게 뻗은 눈꼬리 끝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턱선은 단정하고 깨끗해 시선을 끌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오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흐음.”
이런 곳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있기엔 아까운 미색이 아닌가. 남자는 날 보자마자 놀라며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땅을 향해 처박히는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꽤 고운 외모였다.
‘내가 이곳에 온다는 게 결국 소문나고 말았군.’
황족의 씨를 받기 위해 침대로 기어드는 미인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런 식의 유치한 만남은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체향을 지닌 미인이라면 쫓아내지 않고 내 체온으로 밤새 덥혀줬을 것이다. 향이 좋기로는 천하제일이라는 희빈의 향도 내게는 썩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음인의 향을 칭송할 때마다 공감하지 못해 술잔만 기울였는데, 이제야 그들의 칭송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달콤한 향기는 꽃에서 나는 것이라기엔 우아하고 고아했다. 소나무의 푸른 빛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의 답답하던 것들이 확 풀릴 듯 청량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이토록 깊이 숨을 들이쉰 게 언제인가 싶었다. 사람의 향을 맡기 위해 숨을 들이쉰 것은 그야말로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마음에 드는 향은 처음이기에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대체 누가 이런 곳에서 풍류를 즐기는가 했더니. 형수님이셨나.”
엎드려있는 자의 뒤통수에서 당황이 느껴졌다. 달콤한 향기 너머로 익숙한 양인의 향이 진동을 했다. 형님의 향이 이토록 진동하는데 왜 진즉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한심한 기분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심술궂은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형님의 사랑을 이렇게나 받으면서, 내 앞에서 알랑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한심한 형님이라지만 그 지루하고 환멸 나는 자리를 지켜주는 소중한 형님이었다. 그가 총애하는 음인을 가로채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제 손을 부끄럽게 하시네요, 형수님.”
잔뜩 놀리는 말을 하며 손을 내밀자 멍한 얼굴이 내 손을 쳐다보기만 했다. 창백하게 질린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말을 자아내었다.
“형수라니요?”
“형님과 몸을 섞은 음인을 형수라 하지 않으면 뭐라 불러야 하는지. 하하.”
그러니 내숭은 그만 떨고 빨리 일어나라고. 고매하고 훌륭하신 형님께서 이 일을 알면 분명 불쾌해하실 테니까. 자신의 총비가 내 앞에서 알랑거렸다는 것을 알면 분명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일부러 형수라 부르며 빈정거렸지만 남자는 영 말귀가 어두웠다.
“그런 송구하신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전하. 소인은 천한….”
“일어나.”
화가 났다. 순진하고 처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음인은 그야말로 내 취향에 꼭 맞는 체향을 가지고 있는데, 하필 형님의 체향이 짙게 풍겨 배 속이 뒤틀렸다. 사람을 피하고자 온 곳에서 역린 같은 일을 당해 기분이 최악이었다. 황자를 가지고자 내게 달려드는 음인이라니. 익숙한 일이지만 당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게다가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으나 얼굴이 꽤나 눈에 익었다. 음인치고는 키가 크고 중성적인 얼굴이 예전 잠깐 어울렸던 형님의 후궁과 얼추 닮았다.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잠깐 잘 대해주었더니 무슨 착각을 한 것인지 왕비라도 된 양 허세를 부리기에 쳐낸 적이 있었다. 형제라서 그런가, 형님과는 취향이 제법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황상의 취향도 참으로 일관되시군. 이런 얼굴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하하.”
대놓고 비웃자 음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속셈을 들켰기 때문인지 남루한 옷을 걸친 몸뚱어리가 겁에 질려 덜덜 떨렸다. 황족 사이의 외도가 아무리 불문율이라지만 그것도 들키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 일이 형님에게 알려지면 곱게 넘어가긴 힘들 것이란 생각이 이제야 든 것 같았다.
“너무 떨지 마십시오, 형수님.”
“요, 용서… 으흑….”
“이런. 쯧쯧. 떨지 마시라 했더니 우시는 겝니까? 제가 꼭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잔뜩 겁먹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것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속셈이 빤한데도 취향의 외모가 눈물을 흘리니 정신이 멍해지고 당황이 밀려왔다. 달콤하고 청량한 향기가 진동을 하여 가슴이 진탕되었다. 하얀 얼굴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어 올리자 불이라도 만진 양 손끝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전장에 간 사이 새로 황제의 총애를 받은 거라면 그 시간이 길어야 이 년 정도일 것이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초조해진 비빈들이 나를 찾아오는 일은 늘상 있었다. 하지만 부러 허술한 옷을 입고 이렇게 우연인 척 자리를 만든 자는 아직 없었다. 황제의 후궁인 것을 내가 알면 상대해 주지 않을까 봐 분장한 것이겠지만 이렇게 형님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앉아 있으면 도저히 속아줄 수가 없지 않은가.
“연회가 곧 있을 터인데, 이런 곳에 계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소, 소인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사옵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어째서요? 폐하께서 소제를 환영해주시는 자리인데 형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제발 용서하십시오, 전하. 소인이 심기를 거슬렀다면…!”
가증을 부리는 것도 일절만 해야 들어줄 만한 것이다. 계속되는 연기에 인내심이 박살 났다.
“이거 참 섭섭합니다. 형수님.”
당신의 아이를 황제로 만들고 싶지 않냐며 대놓고 유혹하는 쪽이 더 상대하기 깔끔했다. 이런 식의 내숭은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더러워졌다. 한껏 웅크린 턱을 잡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자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취향에 꼭 들어맞는 얼굴이라 아쉬운 맘이 일었다. 형님의 체향만 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넘어갔을 터인데.
문득 옷이며 장신구를 잘 차려입고 연회에 참가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이런 허술한 만남을 만들 정도로 멍청한 것과는 달리 생김새는 훌륭하니 분명 아름답고 우아하겠지. 체향도 달콤하니 견줄 자가 없을 것이다. 황제이신 형님께선 총애하는 티를 대놓고 내실 터이고….
“적당히 하소서 전하. 슬슬 가보셔야 합니다.”
날이 늦었다고 소란을 떨더니 결국 쫓아온 모양이었다. 내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송구하다는 듯 내 쪽을 흘끔거렸다.
“저자는 뉘신지요?”
“형수님이시다.”
“……전하?”
늙은 내관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전장을 떠돌았으니 그도 형님의 새 비빈에 대해선 아는 바가 많지 않을 것이다.
“형님의 향이 느껴지지 않느냐? 아 네놈은 고자였지.”
“전하아-.”
“됐다. 가자.”
오랫동안 함께 한 탓에 엄살과 능청만 잔뜩 늘어버린 내관이 그리 밉지 않았다. 혀를 쯧쯧 차며 몸을 일으키자 벌벌 떨던 음인이 몸을 다시 웅크렸다. 하는 짓만 보면 정말 노예 같았다. 자신의 역할에 너무 빠진 것 아닌가? 그래도 황제의 후궁이라는 체통이 있는데.
“조만간 다시 뵙지요. 형수님.”
음인은 넋이 빠진 듯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연회에서 보자는 말이었으나 남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속이 다시 밧줄처럼 꼬여 들었다. 연회에서 만나면 모른 척을 할 속셈이겠지. 어디 그렇게 하도록 둘까 보냐. 아주 개망신을 줘야지. 형님에게 버려지면 주워서 좀 가지고 놀아도 좋을 것이다.
심통이 잔뜩 올라 입술을 비틀자 내관이 한껏 눈치를 보며 살살거렸다.
“전하. 아까 그자는 정말로 누구인지요?”
“그건 내가 네놈에게 물어야 할 질문 같은데? 저놈이 누구인지 내가 어찌 알아. 네놈이 알아와야지.”
“송구하옵나이다.”
“도성에 오자마자 아주 웃긴 꼴을 보지 않았느냐. 형님의 냄새를 풍기면서 노예인 척하다니. 모른 척 넘어가려 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전하. 황상의 체향이 나는 노예라면 짚이는 자가 있사옵니다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말해보라는 듯 내관을 쳐다보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성에 들어오자마자 전해 들은 얘기입니다만, 황상께서 접객소의 노예 하나를 침실에 들이신다 하옵니다.”
“접객소?”
“예. 그리고 그….”
내관이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말해보라.”
“송구합니다. 그자에게 화를 푸신다 합니다.”
“뭐?”
“별명이 화풀이 인형이라 합니다. 황제를 모시고 나오는 날이면 얼굴에 멍이 들고 목이 졸려 처참한 모습인지라, 귀한 체향이 나는데도 도저히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고.”
내관의 얼굴에선 농담하는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관의 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잠자리 상대를 학대하거나 거칠게 다루는 성벽은 흔한 것이었으나 형님이 그런 자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자 당황스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그 노예라는 자가 속한 곳이 황당했다.
“접객소?”
“예. 황궁에 온 손님들을 대접하는 기관이온데.”
“접객소가 뭐 하는 곳인지는 나도 안다. 황제가 손을 댄 음인을 접객소에 그냥 둔다니. 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소인도 자세히는 모르오나 황상께서 직접 명하셨다 합니다. 자세히 알아볼깝쇼?”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허름한 옷을 입고 떨던 남자의 모습이었다. 형수라 불리자 당황하며 웅크리던 모습과 겁에 질려 울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손목은 말라서 가는 뼈대가 드러나 보였고 목덜미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아 휑했다.
“이상한데.”
“예. 이상한 일이옵니다.”
“지루하고 모범생 같은 면이 장점인 형님께서 폭력을 음인에게 휘두른다? 소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이 년 가까이 계속 그랬다 하니 헛소문만은 아닌 듯하옵니다.”
남자의 몸은 가녀려서 때릴 곳 따위 없어 보였다. 가벼운 농담에도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떠는데 어떻게 그 얼굴에 손을 올린단 말이지?
경계심이 경종을 울렸다. 내가 좋아하는 얼굴을 형님이 알아채고 음모를 꾸미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정비하고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음인 하나로 대체 무슨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인가?
“접객소 소속이라면 와서 술 시중이라도 들라고 해야겠는데.”
눈치 빠른 내관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노예라고는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업고 나대는 자들이 역사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역죄인의 후손이거나, 복권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은 그 신분을 내명부에 두지 못하고 회임만을 꿈꾸었다. 용종을 잉태하면 그 신분과 과거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회가 끝나기 전까지 잘 알아보도록.”
“예, 전하.”
문득 달콤한 향기가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만일 이것이 형님의 함정이라면, 아주 제대로 걸린 듯했다.
* * *
가을이 깊어 풍광이 아름다웠다. 하늘은 높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고 선선한 바람에 단풍이 춤을 췄다. 아침 이슬에 젖은 바닥에선 먼지 한 점 날리지 않아 얼마 전까지 전쟁터를 오갔던 것이 꿈인 듯 느껴졌다. 승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동안 너무 거칠게만 지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말이 달리며 일으키는 흙먼지에서 벗어나 비단에 몸을 묻자 잊고 지냈던 느긋함과 방만함의 즐거움이 되살아났다.
이렇게 좋은 날에 탐욕으로 가득 찬 면면들에 둘러싸여야 한다니, 울화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낮잠이나 잤으면 싶은데 오늘 하루 정도는 자리를 지켜야 할 모양이었다. 짐짓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자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다.
음악이 울리고 술잔이 오갔다. 단풍 아래 펼쳐진 연회가 참으로 흥겹고 성대했으나 기쁜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황위에 가까운 황족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축하할 일만은 아닐 터인데, 뭣 모르는 자가 이리도 많았는가 싶어 한숨만 비죽이 흘러나왔다.
“천하가 오랫동안 동쪽의 이민족들로 소란스러웠는데, 이렇게 아우가 요잔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 충의가 하늘을 찌르니 술을 내려 치하하겠노라.”
황제가 잔을 들어 치하하는 말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손위 형제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발현하기도 전에 황위에 올랐던 형님은 그야말로 옥좌의 주인다운 태도로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형의 무심한 눈동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흐를 때마다 긴장으로 가득 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내가 전쟁터에서 병졸들을, 장군들을 바라볼 때마다 흐르던 기운이었다.
그가 신하들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친족을 향한 온기라곤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눈이었다. 내가 동생이기보다는 신하이길 원하기에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신하라 생각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이신 형님께선 날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를 배신하지 않으리란 신뢰를 갖고 있었다.
“신. 잔을 받사옵니다.”
황제가 내리는 술을 받아 마시자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금의 태평성대에 나를 위한 옥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형도 알고 있었다. 적수라 하기에도 우스운 외적들이나 괴롭히며 지내는 수밖에.
내가 빈정거리지 않자 연회는 참으로 훈훈하게 흘러갔다. 귀족들이 술을 올리며 아부를 떨고 자식들을 소개하는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열심히 참았다.
폐궁에서 만난 음인은 연회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령 숨어있다 할지라도 그 향기를 숨길 순 없을 터이니 그는 정말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이들을 상대하긴 했으니 점점 배알이 꼬이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경빈과 희빈에게 다정히 대하는 형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이상하게 보였다. 황제의 비빈들은 모두 화려한 비단을 몸에 두르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었으나 그 누구도 그처럼 시선을 끌지 못했다.
자꾸 비빈들과 시중드는 자들 사이로 시선이 갔다. 정말로 접객소에 속한 자라면 이런 연회에 빠질 리가 없을 터인데. 역시 무늬만 노예인 것이고 형님이 지극히 총애하여 어디 숨겨놓은 것이겠지.
문득 아쉽다는 감정이 들었다. 폐궁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곱게 차려입고서는 새침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눈이 당황으로 물들고 내 빈정거림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바닥도 부딪쳐야 낼 수 있는 것처럼, 시비도 만나야 걸 수 있는 것이다.
“알아보라고 했던 그 남자에 대해선 알아 왔느냐?”
연회가 이제 시작이었지만 내관을 들들 볶았다. 골려주고 싶은 것은 다른 이였기에 내관이 당황하는 모습을 봐도 썩 맘에 차지 않았다. 혀를 끌끌 차자 늙은 내관이 억울하다는 듯 허리를 꾸벅꾸벅 조아렸다.
“사람을 시켜 놓았으니 자리를 뜨시기 전까지는 알아올 것입니다.”
“그래? 그럼 지금 자리를 떠야겠군.”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인데 주인공이신 친왕께서 어찌 벌써 자리를 뜨신단 말씀이십니까? 송구하옵나이다.”
“청산유수로구나.”
구렁이마냥 시비를 넘어가는 재주만 잔뜩 는 내관이 하나도 감사하지 않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래서 나이가 든 자들은 놀려도 재미가 없다. 당황도 하지 않거나 아주 황공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의지 박약한 자들뿐이니.
“친왕께선 마음에 둔 음인이 있으신지요?”
“황궁에 들 때마다 혼사를 재촉받으니 무슨 종마라도 된 기분입니다그려.”
“사직을 보전하는 것이야말로 황가의 가장 큰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희빈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입을 가렸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내 침소에 숨어들었고, 그 사실을 황제 또한 알고 있었다. 형제 사이의 신뢰는 정보를 숨기지 않는 것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친족의 정이라는 게 아예 없진 않은 것이다. 황족으로서 지고 있는 책임감이란 갈고리 달린 그물 같아서, 혐오하면서도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쉬게 되었는데 골치 아픈 얘기를 들으니 피곤하군요.”
황제가 손을 들어 후궁들의 입을 막았다.
“오늘은 친왕의 공을 축하하는 날이니 피곤해선 안 되지.”
“황공하나이다.”
후손을 봐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황족의 피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었다. 황족에게 자식이 없으면 천하에 지변이 일어나니 그것은 다스리는 자로서 의무와 도를 다 하지 못한 게 되는 것이다.
‘제국의 크기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일 때 얼른 망했다면 좋았을 텐데. 방국은 그 크기가 너무 커지고 말았다. 극양인이 황위에 몇 번 오를 때마다 영토가 넓어져, 이제 방국의 운명이란 천하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식이라도 많이 생기면 좋으련만. 그 핏줄의 중요성과는 반대로 태어나는 아이가 거의 없으니 매 세대가 고비였다. 선황께서는 자식이 셋이나 있었으나 그 세 명 모두 후손을 보지 못했다. 첫째인 율목친왕은 이른 나이에 죽었고, 나는 아직 결착한 상대가 없었다.
‘그 노예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폐궁에서 본 그 음인이 또 떠올랐다. 장미꽃과 솔잎이 뒤엉켜 뭉개진 듯 향기롭던 체향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결착할 수 있는 상대와 희락기를 보내면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잔뜩 겁에 질려있던 남자는 조금 딱딱해 보였지만, 다치지 않도록 잘 파고들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울음을 터뜨리겠지.
목이 바짝 타서 술을 들이켰다. 옆을 지키고 선 내관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바삐 굴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는 그 남자에 대한 것을 알아놔야 하는지라 제법 필사적인 기세였다. 못 알아오기만 해봐라. 내일 아침까지 빈정대어 줄 테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사실인 게 있다면 내 성격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노 내관은 ‘썩이요?’라며 정색을 하겠지만.
“전하.”
“말해라.”
“호부시랑이 긴히 뵙고 싶다 청하옵니다.”
“호부시랑이?”
희빈의 아버지인 호부시랑은 대표적인 탐관오리 중 하나로 동부에서도 그 악명이 매우 높았다. 희빈이 아이는 없어도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내 쪽으로 줄을 갈아타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은 곧잘 하는 자이기에 그가 부패한 것을 알면서도 황제는 묵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일단 만나보도록 할까. 희빈이 내게 눈웃음 짓는 꼴을 보아하니 곧 내쳐질 듯하구나. 미리 약점을 잡아놓는 것도 나쁘진 않지.”
“명대로 하겠나이다 전하.”
나는 마른 목을 축이며 연회석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찾던 이의 그림자도 향기도 없이, 파리 떼만 몰려드는 무익한 연회였다.
“두시진 뒤에 자리를 뜰 것이다.”
“예. 전하.”
“그가 정말 노예라면, 술 시중이라도 들게 하도록.”
정말로 아끼는 것에 손을 대면 황제도 참지 않을 것이다. 잠깐의 장난으로 건드린 것이라면 그가 내 술 시중을 들든 잠자리 시중을 들든 신경 쓰지 않겠지. 허름한 옷과 창백하던 얼굴이 다시금 떠올라 신경이 거슬렸다. 왜인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길한 기분이…….
* * *
술잔을 따르는 모습에 정신이 죄다 쏠려 호부시랑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얀 손목이 옷자락 사이로 슬쩍 드러나며 기울어지는 모습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술 시중을 들라고 부를 때만 해도 노예라는 신분은 가식인 줄 알았는데 그가 정말로 내 궁에 와 있었다.
‘그래서 정말 노예란 말이지?’
침착한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고, 술을 따르는 몸짓은 어설펐다. 교육받았지만 숙련되진 않은 몸짓이 그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옷은 보잘것없는 데다 생활감이 묻어났고, 장신구는 없었다. 그는 정말로 접객소에 속한 노예인 것이다. 호부시랑이 계속해서 수다를 떨자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오랜만에 금경으로 돌아오니 풍경이 많이 바뀌었어. 영 적응이 쉽지 않아.”
“바뀌었다고는 하나 방 씨(方氏)의 풍경이 아니옵니까? 내키는 대로 행동하시어도 그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하. 호부시랑은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내가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었다면 지금 당장 호부시랑의 모가지는 떨어지고 눈앞에서 술을 따르는 이는 범해지겠지. 헛소리를 계속해서 주워섬기는 호부시랑을 배경으로 술 따르는 이를 구경했다. 시간이 지난 탓인지 형님의 체향이 한결 옅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모른 척 침상 위로 눕히고 올라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반항하려나?
형님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아니면 정말로 날 겨냥한 함정인가? 알면서도 빠지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었지만 형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형수께서 술을 직접 따라주시니 송구스럽습니다.”
“형, 형수라니요, 전하?!”
놀라 까무러치는 호부시랑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막기 힘들었다. 희빈의 아버지인 그가 직접 내 침소로 딸을 밀어 넣은 게 언제였던가? 아직도 회임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황후 자리는 물 건너간 것인데 그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척거렸다.
조금 놀리자 남자는 땅에 엎드려 덜덜 떨었다. 정말로 겁에 질린 것인지 하얗게 질린 목덜미 안쪽의 살이 들여다보여 일순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렇게 몸을 낮추시면 제가 민망하지 않습니까. 형수님.”
이렇게 속살을 보이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계속 엎드려 비는 모습에 아주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민망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서야 음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땅만 바라보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있었다. 괴롭히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제멋대로 겁에 질려서는 이 꼴이 될 게 뭐란 말인가? 어깨를 움켜쥐어 일으키자 가녀린 뼈대가 한 손에 착 감겨들었다. 이대로 힘을 주어 움켜쥐면 부서지지 않을까. 음인치고는 키가 크지만 이토록 연약한데, 대체 이 사람의 어딜 때린다는 거야?
겁에 질려 용서해달라 계속 비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이토록이나 향이 좋은데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함마저 느껴졌다.
“전하. 이자는 접객소의 궁인이 아닙니까.”
“신분이 무슨 상관이지? 그 귀하신 희빈에게서도 형님의 체향이 나질 않는데, 내가 알아챌 정도로 형님의 체향이 나는 음인이라면 마땅히 형수 대우를 해 드려야지.”
미인을 감상하는데 왜 자꾸 잡소리가 끼어드는지 모르겠네. 한껏 빈정거리자 호부시랑의 얼굴이 못 볼 꼴로 일그러졌다. 희빈의 향이 천하제일로 유명하다지만, 내게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하수구의 냄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처럼 고운 향을 지닌 이가 노예로 있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까. 형님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나 같은 늑대 새끼가 모른 척 건드리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문득, 다른 이가 이 자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빨개졌다. 첫 만남부터 형님의 향이 느껴졌으니 물론 형님과는 잠자리를 하고 있겠지만, 형님이 아닌 다른 이가 불러서 안을 수도 있다고? 물론 형님의 향이 풍기는데 건드리는 간 큰 놈은 없겠지만, 지금처럼 흐릿해진 상태면 알아채지 못하고 헛짓거리를 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 험악한 기세에 음인이 눈물을 떨구며 몸을 떨었다.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소, 호부시랑.”
마음이 어지러우니 술이 계속 들어갔다. 이대로 술에 취해 일을 저지를까 고민 중인데 옆에 앉은 음인은 도무지 겁먹은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를 갖기 위해 내게 접근한 건 아닌 듯했다. 정말로 형에게 학대당하고 있는 것이겠지. 아무런 자존심도 세우지 못할 정도로 뭉개져 있는 것이다.
“마셔.”
얼굴이 너무 하얀 게 신경 쓰였다. 잔에 술을 따라주자 곤란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족이 따라주는 술이라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받는 손이 잘게 떨렸다. 곱고 연약한 인상과는 달리 술잔을 받아든 손가락의 굳은살이 눈에 띄었다.
내관이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화전민이었다던가 군역을 부역하던 농민들의 손과 얼추 비슷한 것도 같았다. 농장기에 익숙한 거친 손은 아무리 잘 관리한다 하더라도 그 굳은살이 빠지지 않았다. 섬섬옥수가 넘쳐나는 황궁에서 저런 손은 약점일 뿐이지만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잘 단련된 손가락은 우아하게 굽어진 매화의 나뭇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손을 구경하며 술을 따르는 사이 어느새 병이 비었다. 불을 붙이면 타오를 정도로 강한 독주였는데 눈앞의 음인은 얼굴만 좀 붉게 변해 있었다. 술을 따르는 건 서툴러도 마시는 건 서툴지 않은 듯 주량이 상당했다.
“…병이 비었군.”
딱히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주량이 셀 필요가 있나?
경계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나 풀어지지 않고 딱딱할 순 없는 것이다. 실수하게 만들어서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멀쩡한 모습을 보자 속이 좋지 않았다. 물어볼 것도 많은데 제정신인 자에게 물어보자니 대답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달큰한 향기가 술에 섞여 흘러나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향기에 잔뜩 뾰족해졌던 마음이 느슨해졌다. 궁금한 건 뭐 천천히 물어보면 될 것이다. 드물게 매우 너그러운 기분이 되어 남자를 쳐다보자 두 눈과 뺨이 붉게 물들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병도 비고 얼굴도 붉고, 뭐 괜찮군.”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방 안에 더 두었다간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이대로 안아버리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아직은 형님의 체향이 풍겼다. 그는 아직 형님의 장난감이었다.
“밤이 늦었군. 돌아가도 좋다.”
창가로 붉은 석양이 흘러들었다. 공손히 인사하며 몸을 일으키는 남자는 지나칠 정도로 붉은색과 잘 어울렸다. 묘한 기시감과 함께 두통이 왔다. 붉은색에 잠겨있는 남자의 모습을 분명 어디선가 보았는데, 달콤한 향기가 기억을 방해했다.
“설마.”
발현하기 전에 날 때려눕혔던 남자는 평인이었다. 화전민이 아니라 황궁의 손님이자 무관이었고 비단옷을 걸칠 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음인에게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동부로 떠나 요잔을 정벌하는 사이 황궁의 정세가 기묘해졌다. 황제가 자식을 아직 보지 못한 탓이었다. 비빈들과 그 뒤의 세력들 모두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황제의 장난감이라는 남자는 그 기묘한 정세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근 이 년간 황제의 희락기를 독차지한 음인 노예. 폭력을 동반하는 관계라고는 하나 황제가 그의 몸에서 자식을 보고자 한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황제의 태도에서 총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부러 외척이 없는 자를 고른 것처럼.’
어머니인 황태후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후는 죽기 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아서 황제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을 걱정하여 천한 자의 몸에서 후손을 보려는 것이 아닌가 많은 이들이 수군거렸다. 황후는 수렴청정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한때는 자식을 죽이려고 계획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던 것이다.
필요해서 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노예의 꼴도 보기 싫은 게 아닐까. 그를 볼 때마다 부러 천한 자의 몸에서 자식을 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날카롭게 와 닿을 테니. 그렇다면 폭력과 학대도 얼추 맞아 떨어졌다.
“아깝게.”
용종을 잉태해야 하는 몸이니 일부러 아름답고 향기로운 자로 골랐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만들어낸 황자에게 세도가의 양모가 생겨서는 안 되므로 목숨이야 건지겠지만 그뿐. 그 어떤 총애도 받지 못할 것이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으나 술을 따르던 손목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붉은 석양의 빛 속에 잠겨있던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형을 떠올리자 머리가 또 한 번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어린 날 극양인으로 발현을 끝내고 눈을 떴을 때, 그는 기억만을 남기고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내게 한 말, 행동, 모든 것이 기억나는데 그의 얼굴만은 기억나지 않았다.
* * *
남자는 가련했고 생각보다 허술했다. 밤송이 위에 꿇어 엎드린 나머지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은 당황스러웠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노예근성이 아주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 화전민이었다면 처음부터 노예인 건 아니었을 텐데 아주 능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이 계속해서 신경을 거슬렸다. 비굴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핏줄만 보고 몸을 숙이며 아양을 떠는 것들은 너무 흔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보지 않고 뻣뻣하게 구는 자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성질이 치솟아 나무기둥을 발로 걷어찼다. 잘 익은 밤송이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노 내관이 질겁을 하며 수선을 떨어댔다.
애초에 이따위 밤나무가 궁 안에 있는 게 문제였다. 악의가 없어도 사람이 다치게 되지 않는가. 배가 고프다며 주접스럽게 밤송이를 쳐다보던 남자의 모습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홧김에 명을 내어 밤나무를 베어내자 아주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했다.
율목친왕의 폐궁은 나름 추억의 장소였지만 이제 이곳에 오면 추억보다는 그 노예만 생각났다.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빌었는데 그 애원조차 신경에 거슬렸다.
“이 연못을 보고 있었지.”
녀석이 넋을 놓고 보던 연못에서 금붕어가 뻐끔거렸다. 지저분한 연꽃 같은 것이 한 줄기 솟아올라 시들시들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바라봤던 것치고는 볼품없는 연못이었다. 그 눈동자와 표정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며 위안을 얻는 듯 느껴져 잠시 얼이 빼앗겼지만. 그렇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싶어 심술이 삐죽 솟았다.
“옥패를 하나 만들게 해라.”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으신지요?”
“연못 속에 금붕어가 헤엄치는 모양으로. 테두리는 연꽃이 좋겠어.”
녀석이 바라보던 연못은 썩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고 싶었으므로 만들게 시켰다. 나 때문에 다쳤으니 약을 내리고, 먹어치워 복수라도 하라는 맘으로 남은 율자를 내렸다. 매우 감읍하며 받더라는 얘기를 노 내관이 전해주었다.
“그자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자라니 누굴 얘기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관은 더 묻지 않고 고개만 조아렸다.
답지 않은 짓을 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지금 당장이야 뭔가를 퍼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해도 어느 순간 사그라져 꼴도 보기 싫어지는 게 내 더러운 성미이거늘. 당장 내일만 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밤나무가 잘려나간 어두운 폐궁에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단아했던 궁의 모습은 이제 쇠락하여 먼지만 잔뜩이었다. 대들보에 매달려 혀를 길게 빼문 형님의 유령이 무게추마냥 흔들흔들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로 유령인지 과거의 기억이 비추는 반상인지 알 수 없었다.
흔들리는 율목친왕의 발치로 천천히 걸어가 그 밑에 섰다. 황족들이 사이가 좋다는 건 다 개소리일 뿐이지. 골육상쟁을 하지 않는 것은 천의를 거슬러 화를 부를까 자제하는 것일 뿐이다.
“전하. 서남부 웅천에 해일이 일어 어촌 다섯 개가 쓸렸다 합니다.”
“날이 점점 궂어지는군.”
아직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가을바람에 먼지가 날리듯 가벼운 지변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지극히 순조로운 황제의 치세를 생각하면 의외의 사태였다. 황제가 혈육을 죽인 것도 아닌데 땅이 점점 거칠어지고 하늘은 가물어졌다. 사람들은 해가 갈수록 예년만 못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인재라 불릴만한 재해는 언제나 있어 왔기에 사람들은 아직 알아채지 못했으나 언제 큰 재난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이 황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뒤집어질 수 있었다.
연못을 일별한 뒤 폐궁을 뒤로 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이제 그 미련을 떨칠 때도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된다면 뭐하러 몸을 움직여 부딪친단 말인가? 마음을 생각만으로 끊어낼 수 있다면, 그 모든 노래며 이야기가 어찌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가겠는가?
* * *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여기저기 원한을 잔뜩 산 호부시랑이 황궁 안에서 살해당한 일로 희빈의 심기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이처럼 무모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휩쓸려 머리는 깨지고 온몸에 멍이 들어 쓰러져 있던 모습이 문득 눈꺼풀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감옥에 누워있던 노예의 모습은 머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불쾌한 것이었다. 그를 처소로 보낼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독주를 들이킨 것처럼 위가 후끈하니 달아오르고 누가 얼음을 들이부은 것처럼 덜덜 떨렸다. 이성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화가 치솟아 오히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치솟는 분노를 조심스레 삭이고 나자 한 줄기 미안한 감정이 싹을 틔웠다.
“마음에 듭니다.”
옥패를 바라보며 두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듯이 굳어버린 노예는 눈을 깜빡이는 방법조차 잊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괜한 심술 때문에 옥에 갇혀 고생했기에, 그 대가를 뭐라도 치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충동적으로 만들라 했던 옥패가 있어 주었을 뿐인데, 저런 표정을 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다를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그는 옥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돌고, 무료하게 죽어있던 눈동자가 수면마냥 반짝였다.
“너무 예쁩니다.”
마치 손안에 별이라도 내려앉은 듯 조심스런 모습이었다. 그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놀라움에 당황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모습에 나 또한 굳어버렸다.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거나 황송하다는 듯 고개나 숙일 줄 알았지. 하지만 그는 감히 거부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새삼 그의 허름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지만 화려함은 조금도 없는 모습인데도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옷차림과 장신구엔 나름의 단계가 있어 무명옷에 청금석이 어울리지 않듯, 지금 그가 입은 옷에도 내가 하사한 옥패는 어울리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옥패를 차고 있는 모습을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맘에 들면 지금 바로 차 보시지요.”
꿈에서 깨어난 듯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주저하면서도 상자 안에서 옥패를 꺼내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간지러워졌다. 조금 투박하지만 긴 손가락이 양각된 금붕어의 비늘을 살살 만지작거렸다.
내가 다가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연못을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저렇게 연못 속의 물고기만 보고 있었다. 조금은 쓸쓸한 얼굴이었는데, 지금 옥패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연못의 반짝거림이 옮겨가기라도 한 양 수줍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질투가 나서 옥패를 빼앗자 반짝이던 눈동자가 체념과 억울함으로 혼탁해졌다.
가만 놔뒀다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패용하지 못할 것이다. 기왕 다가간 김에 달콤한 향을 들이키며 허리를 슬쩍 끌어안았다. 선물을 받고서 감격하는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선물을 바치며 구애하는 이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저런 표정을 지으며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허리를 슥 잡아당기자 가늘고 메마른 몸이 품에 폭 들어왔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부러질 것처럼 메마른 몸은, 불행히도 요염한 뼈대를 드러내어 시선을 붙잡았다. 이로 슬쩍 긁으며 체향을 쏟아내자 움찔거리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선물이 감격스러웠기 때문인지, 그가 노예라서 감히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전자일 거라고 내 멋대로 결정했다.
희롱하는 것이 즐거워서 자꾸 웃음이 흘러나왔다. 앙탈 같은 것도 부리지 못하고 흠칫거리는 것이 귀여워서 자꾸 손이 짓궂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내 손을 어색해하면서도 허리에 달린 옥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이 사뭇 즐거웠다.
‘덫에 걸렸다.’
달콤한 과자를 먹고는 놀라 굳어버린 모습 또한 사랑스럽고, 술과 맛있는 음식에 당황하는 것이 기꺼웠다. 판단력이 자꾸 흐려졌다. 황위에 오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 내 목표였거늘. 그의 몸에서 풍기는 형님의 체향을 맡을 때마다 어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잘 대해줘도 그의 마음이 기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벼운 자라고 폄하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름다운 장신구나 달콤한 과자 따위에 감동하는 것은 황제 때문이었다. 황제가 폭력만을 베풀고 좋은 것은 조금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몸을 떨며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것에 대한 면역이 없는 그는 아주 작은 호의에도 독한 감기를 앓듯 마음의 병을 앓았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병들게 했지만, 그가 앓는 병은 전염병이라 나도 곧 옮고 말았다.
기왕 덫에 걸렸으니 미끼를 삼켜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의 계획에 어울리는 것은 언제나 피곤했지만, 저 향긋한 음인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감수할 가치가 있으리라.
하지만 노예를 달라는 내게 돌아온 대답은 동부로의 유배였다.
“동쪽으로 돌아가라고?”
“민심을 정비하고 돌아오시라는 황명이옵니다.”
“군벌이 생길 터인데?”
“…전하.”
전쟁이 끝나자마자 도성으로 불려온 것은,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동쪽의 토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황실의 피가 진한 극양인이 전쟁의 영웅이 되었으니, 그것을 불안해하고 견제하지 않는다면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노예 한 명을 내려달라는 청에 돌아온 것은 축객령. 희락기에 들어선 노예가 황제의 침궁으로 들어가 며칠째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엔 뒷덜미가 홧홧해졌다. 보란 듯이 모욕당한 것에 자존심이 할퀴어졌다. 황제의 정신이 나간 것인가? 그도 아니면 내가 미친 것인가?
동쪽으로 향하는 내내 떨어지는 눈발이 앞을 가렸다. 좋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는 겨울의 추위 속에 얼어붙고 말 것이다. 황제가 내게 품고 있는 질투심 때문에 날 가지고 논 거라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나보란 듯 그에게 첩지를 내리고 잘 대해주면, 삭막하게 말라버린 그는 내게 마음을 쏟았듯 황제에게 마음을 쏟을 테니까.
그는 더이상 달콤한 것에 놀라지 않고, 금은보화를 선물 받아도 감흥 없는 눈초리를 하게 되겠지. 내게 술을 따라야 했던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율목친왕의 폐궁에서,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창백하고 초라한 몰골로 연못을 보고 있었다. 꽃향기는 사라지고 형님의 체향만 잔뜩 풍겨 구역질 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짓밟자 체념 어린 눈동자가 메마르게 떨렸다.
“주인 없는 궁이라지만 너 따위 노예가 더럽혀도 되는 곳이 아니다. 어딜 감히 계속해서 드나드느냐?”
“죄송합니다. 죄, 죄송, 용서하십시오. 전하. 저, 전하.”
용서해달라며 울부짖는 소리에 귀가 뜯겨나가는 것 같다. 얌전히 동쪽으로 가선 안 되는 것이었다. 기침을 터뜨리며 말리는 몸뚱어리가 예전보다 더 가늘고 비루했다.
그는 나를 낚기 위한 미끼가 아니었다. 그 누구를 위한 미끼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독약이었다.
폭력에 익숙하다는 듯이 몸을 말고 애원하는 모습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형과 내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노예를 내버리고 몸을 돌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쟁과 수탈로 어지러워진 동부를 정리하고 민심을 다스리자 염려했던 대로 동부 전체가 내 손에 떨어졌다. 해가 바뀌자마자 황궁으로 다시 불려 온 것은 형님이 정말로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겠지. 천하는 반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노예 하나 주지 않겠다고 이따위 악수를 둔 형님의 얼굴은 볼만했지만, 황궁에 돌아온 건 저런 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형님의 총애를 받고 한껏 거만해져서는, 새침하게 날 쳐다보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실연의 슬픔이나 곱씹고 궁상이나 떨고 싶었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장소는 언제나 끝이 안 좋았지.”
눈에 뒤덮인 폐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희게 빛났다.
* * *
율목친왕이라 불렸던 선황의 장자는 언제나 조용히 자신의 거처를 지켰다. 황태후가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시기였다. 양인이나 음인으로 발현하지 못한 탓에 그의 세력은 보잘것없었으나 황제가 장성함에 따라 불길한 기류가 황궁 안을 흘렀다.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싫은 황태후가 흉악한 일을 꾸미려 한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자자했다. 황제의 직계가 셋이나 되는 것은 역사에 드물게 번성한 경우였다. 때문에 장성한 황제의 목숨을 거두고, 아직 어린 셋째를 옥좌에 앉힌 뒤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장자인 율목친왕도 셋째인 나도 아직 발현을 하지 않아 평인이었다. 그러나 율목친왕은 이미 성인인 데다 친자식이 아니었다. 셋째인 나를 황제로 옹립하려면 장자인 율목친왕 또한 제거를 해야 수월할 것이라는 흉악한 말들이 어둠 속에 오갔다.
‘그런 말들을 할 거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긴 풀을 뜯어 물었다. 이제 열네 살이 되었지만 내가 황위에 오른다면 수렴청정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양인으로 발현할 것을 알았다. 내 체력이나 몸은 이미 소년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날 아이라 생각하여 우습게 대하지 못했다.
모후이신 태후를 존중하기는 하나, 만일 형님을 해하고 그 욕심을 채우려 한다면 천의를 거스르는 것이니 내 존중 또한 잃게 될 것이다. 모후의 뜻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황실의 피를 타고난 자로서 좌시할 수 없었다.
황위를 이어봤자 내가 양인으로 발현을 하면 무슨 짓을 저지르실지 모르는 모후이시니, 기왕이면 형님이 황위에 앉은 채로 무난하게 지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형님도 모후 보시기에나 만만해 보일 뿐이지 그 속이 시커멓게 썩어 뭔 짓을 할지 모르는 위인인 것을.
입 안에 쓴맛이 번져 씹어대던 잎새를 퉤 뱉어냈다.
흉험한 소문이 나도는 덕분에 무예를 수련하던 것도 중단하게 되었다. 대련을 빙자하여 해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 내관의 걱정은 좀 지나친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하도 답답하여 몰래 빠져나왔지만 갈 곳이 마땅찮아 오게 된 게 큰형님의 궁 뒤뜰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달라붙는 만큼 큰형님인 율목친왕은 경원시 되어 그 주변이 아주 스산하고 조용했던 것이다.
문(文)에 재능이 있다고는 하나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식이나 잔뜩 낳으면 좋을 텐데. 황제이신 둘째 형님은 하나뿐인 비가 양인이기 때문인지 아직 소식이 없었다. 하기야 지금 같은 때에 어린 조카가 있었다면 분위기가 더 흉흉했을 것이다. 형도 생각이란 게 있다면 지금 비빈을 더 들여 자식을 보진 않겠지.
큰 형님의 궁 뒤뜰은 본래 무예를 연마하기 위한 장소였지만 누군가가 있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큰형도 바보가 아니라면 경호하는 이를 좀 들이는 게 좋을 터인데, 워낙 세력이 없다 하니 믿을 자가 없어 아예 옆을 비우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때문에 지금 여기엔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와야 하는데…….
유려하게 휘어지는 변검(變劍)의 빛이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마냥 다채롭게 변화했다. 물색의 옷자락이 허공을 움켜쥐고 터뜨릴 때마다 바람이 암초에 부딪힌 양 굽이굽이 휘어졌다. 춤추듯 보법을 밟아가는 하체는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관이라기엔 우아했고 무인이라기엔 건조했으나 그 깔끔한 움직임엔 찬탄만 터져 나왔다. 사파의 것이라기엔 깨끗하고 정갈한 호선이 일순 뱀처럼 날카롭고 표독하게 땅을 훑었다.
“감히 누구에게 검을 들이대는 것이냐.”
“…….”
검을 뽑아 변검의 끝을 쳐내자 수련 중이던 남자의 얼굴에 이채가 흘렀다. 하얗고 앳된 얼굴이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익숙한 인상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웬 놈이지?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처음 보는 얼굴이라니. 네놈이야말로 누구냐?”
낯선 자의 반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저 미친놈이 대체 누구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것인가? 황망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놈이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거세게 찼다.
“쯧. 황궁에 있는 애라니 뻔한데. 쓸데없는 걸 물었군.”
“무어…! 애? 누가 애라는 거야!”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애라 하지 그럼 뭐라 부르느냐? 그리고 너는 네 형님도 알아보지 못하느냐?”
형이라고는 두 명뿐인데 내가 모르는 형제가 있었나 싶어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모르는 형제가 있을 정도로 자손이 번창했다면 방 씨 황족의 씨가 귀하단 말이 애초에 돌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네놈.”
“안 속는군. 큰일인데.”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나른한 손짓으로 이마를 쓸어 넘겼다.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것이 왠지 느리게 느껴졌다. 얼굴만 보면 첫째 형님과 조금 비슷한 듯도 했으나 갑자기 회춘하신 게 아니라면 절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설마 큰형님의 숨겨둔 자식?”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형님에게 자식이 있다 한들 이 나이일 리가 없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얼간이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몸은 다부졌지만 언뜻 보기엔 무예를 익힌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나약해 보였다.
“됐어. 형님께서 고용하신 거겠지. 호위인가?”
수상하고도 무례한 자였지만 위험한 것 같진 않았다. 무를 익히고 도를 닦는 자 중에는 황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기인들이 있어 그 성미가 괴팍한 것으로 이름 높았다. 아마도 그런 자 중 하나이리라.
요즘 궁 안의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황실의 손이 닿지 않은 자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말라빠진 평인이 형님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방금 전의 검무는 심히 아름다웠으나 평인의 완력엔 한계가 있었다.
“아깝군. 그 어떤 무예도 힘이 따라주지 않으면 무용한 것을.”
“평인의 힘으로도 사람 하나 지키는 것은 충분합니다, 전하.”
“흥. 평인이 무예를 아무리 익혀봤자지.”
같잖다는 표정을 띠는 남자의 얼굴을 나 또한 같잖다는 듯 쳐다보았다. 괜히 무관과 장수들의 대부분이 양인이겠는가? 평인의 힘은 양인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솜씨가 좋다 한들 타고난 완력을 이길 순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전하께서도 평인인 듯합니다만.”
“나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자라면 양인으로 발현할 것이다.”
“어찌 그리 자신하시는지요? 저랑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이시는데.”
“다르지 않다니? 내가 키도 더 큰데! 그러고 보니 네놈, 본왕을 대하고서도 예를 표하지 않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남자가 고개만 까딱였다. 아주 시건방진 태도였다.
“제가 친왕 전하의 호의를 맡고 있는지라,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건방진 자세를 지적하려는 순간 남자가 선수를 치며 미소 지었다. 흐릿하고 당장이라도 지워질 것 같은 미소였지만 마치 겨울날 피어오른 한숨을 처음 본 것처럼 당황하고 말았다.
“혀, 형님도 안 보이는데 무슨 호위를….”
“몸을 잘 단련해두는 것도 제 임무입니다. 그나저나 이곳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전하.”
“그, 형님을 뵈러 온 것이다.”
“월담하신 것 같습니다만.”
“…지름길이라.”
“약속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냥 갑자기 형님이 뵙고 싶어서….”
큰형님의 호위가 아주 야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담을 넘어 몰래 들어오신 거군요?”
“윽. 형제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난 막내잖아!”
막내는 조금 건방지고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존재가 아닌가? 갑자기 큰형님이 보고 싶어서 담을 넘어 들이닥쳐도 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 오신 걸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아니.”
대답하는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차가워지고 나무뿌리가 발목을 잡아챈 듯 두 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야비하게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살기가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그럼 전하께서 사라지셔도 아무도 모르겠군요?”
방심하고 있었기에 남자의 살기는 더욱 크게 와 닿았다. 천천히 검을 뽑는 손으로 시선이 갔다. 내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가 자기 입으로 호위라 말하긴 했으나 첫째 형님의 소개를 받은 것도 아닌데 너무 내 멋대로 그의 정체를 짐작한 것이다.
평인이기 때문에 방심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살기를 풀풀 흘려대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을 것 같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긴장했던 게 거짓인 것처럼 웃음이 비실 흘러나왔다.
“글쎄. 내가 사라지면 한두 명은 이곳으로 날 찾으러 오겠지. 이곳에서 자주 낮잠 자거든.”
내 대답을 들은 남자가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얼굴이 되었다. 당장에라도 날 찢어발길 것 같던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위험한 습관이십니다.”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땀 때문에 으슬으슬 추워졌다. 방금 대체 뭐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앳되게만 생각했던 남자의 얼굴이 문득 어른스럽게 와 닿았다.
“형님의 호위라고?”
“네. 전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어린아이를 달래듯 달콤하게 말했다.
“제 생긴 것이 닮지 않았습니까? 전 그분의 대역입니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데?”
조금도 닮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 봤을 때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라고,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첫째 형님과 눈앞의 남자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도는 단단하고 차가워서 무른 구석이 없었고, 본성에서 흘러나온 냉혹함이 사람들의 오해조차 용납지 않도록 드러나 있었다.
큰 형님은 문사의 기질을 뽐내며 풍류를 논하곤 했지만 그 속이 늪처럼 깊고 어두워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이신 둘째 형님이 큰형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야 내가 태어나기 전에 둘이 형제로서 지낸 시간이 길었을 터이니,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작은 형님은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달라. 전혀 달라. 그렇게 생겨가지고 무슨 대역을 한다는 거야?”
“다른 이들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눈들이 삐었군.”
“아랫사람이 황족의 얼굴을 쳐다볼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그 말엔 제법 일리가 있군.”
청산유수와 같이 말이 오갔다. 남자는 수상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가 큰형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음인의 행색을 하면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것처럼 뼈대가 가늘고 아름다워서 자꾸 눈길이 갔다.
참으로 무엄하고 발칙한 남자였다.
“어쨌건 나는 여기서 잠을 잘 테니, 넌 하던 일이나 마저 하지그래.”
“이곳에서 주무신다고요?”
“형님을 기다리다 잠이 드는 것이니라.”
하지만 남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만 슬쩍 기울인 채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만 주의를 흩트려도 그가 있는 것을 잊게 될 것 같았다.
문득, 그가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련이라도 할까?”
차가운 조각상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왠지 어깨며 가슴을 쭉 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몸을 늘리며 가볍게 뛰었다.
“내 스승도 나를 이기지 못하게 된 지가 꽤 되었다. 한 수 가르쳐 주도록 하지.”
그는 기가 막힌 것 같았다. 같잖다는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가 당장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연무장으로 사용되는 곳이기에 뒤뜰에는 연습용 검이 비치되어 있었다. 내게는 조금 가벼웠지만 철심이 안에 들어있어 진검도 능히 받아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자. 덤벼.”
“허허.”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며 허파 소리를 냈다. 무엄하고 건방졌다. 곧 저 시건방진 몸을 바닥에 굴려주리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디 평인 따위가….
“…잠깐. 무효야. 이건 무효. 방심해서 그런 거라고.”
손아귀가 얼얼했다. 소리도 없이 튕겨 나간 검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남자의 형체가 움직이는 것도 못 봤는데 손안의 검이 달아나고 없었다.
“아, 네. 방심요.”
남자가 여우같이 웃었다. 아주아주 건방지고 불쾌한 웃음이었다. 얼굴로 피가 몰렸다.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제대로 자세를 잡자 시건방진 여우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변검이 채찍처럼 휘며 내게로 짓쳐 들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인지 내게로 다가오는 검의 궤적이 흐릿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몸에 익어있는 보법을 사용해 몸을 피하자, 그 자유로운 형태에 맞게 뱀처럼 몸체를 휘며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맞으면 사람 구실을 하기 힘들 정도로 위협적인 기세에 목덜미의 잔털이 바짝 솟았다. 검을 휘둘러 쳐내자 놈의 변검이 덩굴처럼 휘감겼다. 힘에서는 져본 적이 없기에 팽팽히 담겼으나 의외로 남자는 힘든 기색 없이 잘 버텼다. 평인이라기 힘든 수준의 완력이었다.
과연 큰소리칠 정도의 실력은 된다는 거지?
하지만 나는 내 아버지 또래의 장군들에게도 종종 이겼다. 사범도 가끔 흐트러지는 내 자세를 잡아줄 뿐 감히 대련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발현만 하면 당장 갑옷을 입어도 되겠다는 칭찬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는 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다음 순간 땅에 등을 대고 있었다.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전하.”
큰형을 닮은 남자가 같잖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처음에 무기를 놓쳤던 것에 비하면 십 초 정도 더 버틴 것 같았다.
“이건… 무기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아, 네. 무기요.”
“비겁하잖아. 혼자서만 그런 걸 쓰고. 기다려.”
황궁에 변검을 사용하는 무관이 없진 않았다. 그런 특이한 무기는 보통 사용하는 자 전용으로 맞춘 물건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뒤뜰의 연습용 검을 들었으니 차이가 안 날 수 없다.
나는 날 듯이 달려 큰형의 궁을 빠져나갔다. 내 궁으로 돌아가 검을 들고 뛰쳐나왔다. 연습용이라지만 날을 세우지 않았을 뿐 명검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철검이었다. 돌아갈 때는 숨이 조금 차올라서 헉헉거리며 다시 담을 넘었다.
녀석은 내가 숨을 고르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일 다경가량 몸을 푼 뒤 다시 덤볐다. 검을 가져오고 몸을 푼 보람이 있어서인지 그래도 체면 차릴 정도는 더 버텼다.
“이렇게 빨리 질 리가 없어.”
“그야 전 어른이고 전하께선 애….”
“무엄하다!”
하지만 놈의 말에도 일리는 있는 듯했다. 내가 몸이 크다고는 해도 아직 발현도 하지 않은 아이인 건 사실이니까. 힘에서 밀려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양인들과 팔씨름이라도 하면 밀리는 일이 종종 있기도 했다.
“내일 다시 오마.”
“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전하를 계속 상대해 드릴 순 없습니다.”
“무예를 연마하는 것도 네 임무가 아니냐? 도와주도록 하지.”
“전하와 상대하는 것이 제 무예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한마디도 안 질 수가 있을까. 용케 존대는 하는구나 싶어 감탄스러웠다. 내가 수련에 도움이 안 된다 해도 쫓아낼 건가 도망칠 건가? 그에게 선택권 따윈 없었다.
그날 이후 매일매일 첫째 형님의 궁 뒤뜰에 숨어들었다. 놈은 없을 때가 많았지만 가끔씩은 냉랭한 얼굴로 날 상대해 주었다. 패배가 쌓일수록 의심이 가중되었다. 내가 황친이기 때문에 무관들이 손속을 봐준 것은 아닌가 싶은 구체적인 의심이 떠올랐을 때, 내 수련을 돕기 위한 사범을 사정없이 때려눕히고 말리러 온 장군 한 명도 고꾸라뜨렸다. 충격과 공포가 선연한 얼굴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큰형님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남자는 정상적인 수준을 벗어난 인간이었다. 같잖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볼 자격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련 시간 또한 점점 길어졌다. 그는 양인보다 강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민들레 씨처럼 하얀 눈이 흔들리는 날이었다. 처음으로 남자가 숨을 몰아쉴 때까지 합을 나눴다. 냉랭하던 얼굴이 붉게 물들고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입김을 쏟아냈다. 검을 놓치고 땅에 뒹굴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만족감이 차올랐다.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한 끗 차이였는데!”
“한 끗 차이….”
언제나 조각상과 인간 사이에 있는 듯하던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평소와 같이 나를 땅에 넘어뜨리고서도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그의 표정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문제에 직면한 듯 나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제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이상해?”
“평인 주제에 이 정도의 무력을 지닌 것이 꺼림칙하고 저어되지 않으십니까?”
“나도 지금은 평인인데?”
남자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괴물 같은 놈이라 부르기는 하지. 면전에서야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뒤에서 수군대는 얘기를 아주 모를까?”
“역시 괴물….”
“하지만 상관없지 않아?”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뭐든 짝이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 했다.”
“짝이요?”
“그래. 짝이 있는 것은 하늘이 허락한 것이니 이상한 게 아니라 했어. 괴물일 수는 있지. 그렇지만 짝이 있는 괴물이라면 자연을 거스르는 존재는 아니란 거지.”
남자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그 움직임은 움직인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다.
지금 손을 뻗으면 이 남자를 영원히 가질 수 있겠지.
“제가 무슨 전하의 짝입니까?”
“넌 괴물이잖아.”
남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내치듯이 말하는 퉁명스런 얼굴이 울 것 같았다.
본능이 속삭였다. 어서 손을 뻗어서 이 남자를 가지라고.
몸속이 확 달아올랐다. 불길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내장이 지글거렸다. 나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이 열기를 옮겨야 했다.
“네가 음인이라면 좋았을걸. 난 분명 양인으로 발현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입 맞췄다. 차가운 그의 입술에서, 일순 달콤한 향이 피어올랐다.
“각인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하얀 눈이 나폴나폴 꽃씨처럼 흩날렸다. 커다란 눈송이가 긴 속눈썹에 엉겨 붙었다. 남자는 내 입맞춤에 눈물을 흘리는 대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실은 고용주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고용주?”
“네. 그래서 고민을 좀 하던 중이었는데.”
남자가 눈을 깜빡이자 눈썹에 붙어있던 눈이 녹아 사라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찌푸린 얼굴로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눈이 녹는 것처럼 그도 또한 녹아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괴물의 의리로 지켜 드리죠.”
큰 형님의 호위를 그만두고 내게 온다는 것일까? 영문 모를 말이었지만 왠지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늘 그렇듯 따라 웃는 대신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뭐랄까. 달콤했다.
* * *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열이 올랐다. 온몸의 뼈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비명이 절로 흘러나왔다. 관절의 마디마디가 다 뭉개져 비틀리는 듯한 통증이었다.
어의가 오자마자 맥을 짚고는 발현열임을 알렸다.
언젠가 양인으로 발현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이 오늘일 줄이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입을 맞추며 고백하고선 곧바로 두문불출이라니. 분명 마음이 상할 것이다.
오해하면 어쩌지? 내가 아픈 사이에 어디로 사라지진 않겠지? 사라지면 안 되는데. 아프다고 소문을 내면 찾아와서 병간호를 해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퍽이나.
통증은 지독했지만 발현 뒤에 올 보상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발현하면서 손바닥만큼 자라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지금도 내 키가 그보다는 크지만 한 뼘쯤 더 커다래지면 그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비웃을 수 있을 터였다.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줘야지. 그가 지을 표정을 생각만 해도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통증이 심하십니까, 전하? 열이 너무 뜨겁습니다.”
“정신을 다잡으셔야 하옵니다. 전하. 정신을 차리소서, 전하.”
끙끙 앓다가 웃음을 흘리니 내관이며 궁인들이 기겁을 했다. 정신을 놓아버린 것처럼 보이기는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사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으니까.
당황하며 어의를 부르는 모습들이 장관이었지만 열이 너무 높아서 시야가 흐릿했다. 일반적인 발현열이 아니었다. 살가죽 안쪽에서 붉게 타오르는 숯이 굴러다니는 듯 뜨거웠다.
모든 인간은 평인으로 태어난다. 발현이라는 것은 그 평인이라는 그릇에 자연의 성질이 깃드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기쁜 일이었다. 대개의 인간이 발현을 하지 못하고 평인으로 살다 죽었다. 그들의 그릇이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 평인인데도 양인이나 음인보다 빼어난 자들이 있었다. 큰형님을 닮은 그 남자가 바로 그러한 평인이었다. 발현 따위 하지 않아도 그는 그 자체로 대단했다. 내가 아직 발현하지 않았다지만 힘으로 누군가에게 꿀린 적이 없는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팽팽하게 맞섰다. 발현이 끝나 양인이 된다 해도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평인이 아니라 양인이었다면 얼마나 대단한 무위를 뽐냈겠는가? 일가를 이루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의외로 몸이 가늘었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단단한 뼈대를 지닌 그를 상상해 보았지만 불쾌감에 가슴속만 그득해졌다. 그는 그냥 평인인 채 완벽했다. 양인도 음인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발현해야 된다면 음인인 쪽이 더 예쁠 것이다.
큰 형님을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는 왜 그리도 예쁜 것일까? 그가 음인이 되어 내게 안기는 모습을 잠깐 상상했다가 얼굴이며 몸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모두를 걱정케 했다.
“열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습니다. 오늘은 제 얼굴이 보이십니까?”
“으응. …흐릿하지만. 보여.”
발현열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발현할 때 오른 열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기억을 잃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왕왕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 속을 오가는 어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걱정을 가득 담은 노 내관의 표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슬슬, 내가 아픈 것이 발현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발현열로 위장할 수 있는 병이나 독.
만일 내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건 두 형님들 중 한 명의 짓이거나, 둘 모두의 짓일 것이다. 어린 황손이 없다면 감히 모후께서 작금의 황상을 폐할 수 없을 테니까. 슬슬 모후를 밀어내고 싶은 황제가 날 치워버리기 위해 독을 썼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황제가 쓴 독이라면 어의가 어찌 감히 그것을 독이라고 솔직히 고하겠는가? 내가 이렇게 뜨거워져서 앓다가 백치가 되거나 죽는다면 그저 발현열이 심하여 잘못되었다 하겠지.
“그가 지켜준다고 했는데.”
훌륭한 양인이 되어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는 아무도 오지 않는 그 별궁의 뒤뜰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것이다. 눈이 거세게 오는 날이면 그곳은 마치 갈대가 휘몰아치는 강가 같았다. 내가 다가가면 그는 차가운 얼굴로 힐끔 바라봤지만 결코 모른 척 무시하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전하라고 부르며 무릎을 굽히지도, 권력의 구조를 가늠하며 재어보는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 그가 좋았다. 그는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가 덤벼 곤란하다는 듯, 그럼에도 봐줄 수는 없다는 듯 진지한 태도로 나를 쓰러뜨렸다.
“…노 총관.”
“예. 전하.”
“나는 이대로 죽어?”
노 내관이 숨을 삼켰다. 그가 만부당하다는 듯 침상 옆으로 다가와 무릎 꿇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알잖아. 이건 너무…, 길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옥좌를 원치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내 눈에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다른 이들의 눈엔 당연하지 않다는 걸 열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해결책을 뒤로한 채 온갖 논의가 오가고 언성을 높이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황제가 되어 저 종알거리는 입들을 죄다 막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옥좌를 향한 꿈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꾸는 것이 아닌가?
노 총관이 울음 같은 것을 삼킨 먹먹한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정신이 또렷하시고, 소인을 알아보시니, 곧 일어나실 것이옵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노 총관은 바람처럼 속삭이는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몸을 주물러 줬다. 그가 늙은 목소리로 괜찮을 거다. 일어나실 거다 말할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커졌다.
내가 죽게 되면 그도 갈 곳이 없을 터인데. 그는 양자조차 두지 않고 나를 보살폈다. 아마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커다랗게 자랄 줄은 모르고 불쌍하게도 동정심을 품은 것이다.
“꼼짝도 못 하겠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있는가 하면, 온몸에 기운이 넘쳐흘러 발작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기억이 매끈하게 이어지는가 하면, 메마른 면발이 툭툭 끊어지기도 했다. 형님도 무심하시지. 기왕 죽일 거라면 이렇게 열에 시달리는 독 대신 깔끔하게 피를 토하고 죽게 해주는 게 자비 아닌가? 사이가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심 나를 증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현열이 심하신 것뿐이옵니다.”
“아, 그래. 발현열….”
정말로 발현열이면 좋겠다. 어서 어른이 되어야지. 양인이 되어서 그를 만나러 가야지. 그러니까 누구였더라. 큰형님의 궁에서 만났던 자인데…. 누구였지?
노 내관이 내 머리 위로 얼음을 대주었다. 아무리 열이 올라도 머리가 상해서는 안 된다고 지극 정성으로 식혔다. 양인으로 발현하면서 백치가 되어버린 이들의 얘기가 종종 들려오고는 했다. 내가 그렇게 될까 봐 노 내관은 몹시 두려워했다.
“다 나으실 때까지 소신이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비슷한 말을 내게 한 자가 있었다. 그가 날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다시 만나야 되는데.
잠인지 기절인지 모를 혼미함에 정신이 멀어졌다. 꿈같지도 않은 악몽 때문에 깨어났다가, 곧 그 내용을 잊어버리고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가 결국엔 완전히 깨어나 두 눈을 또렷이 떴다.
옆을 내내 지키고 있던 총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한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몸은 거짓말처럼 잘 움직였다. 땅에 발을 대고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인지 방이 조금 작게 느껴졌지만 오랜만에 침상 밖으로 나와서 그럴 것이다. 침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겨울의 냉기가 살갗을 타고 흘렀다. 궁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약을 달이는 냄새도, 얼음을 가져오라 외치는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궁 안은 그저 적막할 따름이었다.
“더워.”
땀에 젖은 침의가 거추장스러웠지만, 그대로 입고 밖을 향했다. 어차피 열을 떨어뜨린다면서 얼음으로 머리와 가슴을 계속 냉찜질했다. 이대로 나간다고 감기 같은 게 걸리진 않을 것이다.
가느다란 달이 물에 녹듯 달무리를 풀어내는 밤이었다. 홑옷을 입고 나왔는데도 몸이 조금도 춥지 않았다. 입춘이 다가오고 있다는데 아직도 황궁 안은 겨울이었다.
“…누굴 만나려고 했더라.”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날 연무장에 내치고, 가슴이며 배를 발로 차고, 팔을 비틀어 꺾어버렸다. 고약한 일을 당했음은 분명하나 왠지 썩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디서 만났는진 기억이 났다. 큰형님의 궁은 내 궁과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몇몇 지름길을 통해 가면 그리 멀지도 않았다. 얕은 산자락을 끼고 지어진 율목친왕의 궁엔 율목이 한 그루 있었다. 본래 궁 안에서 기를만한 나무는 아니었으나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을 가상히 여겨 그대로 기르게 된 것이라 했다.
실상은 까다로운 자라는 뜻으로, 그 안에 있는 것은 먹음직스럽지만 가시 가득한 껍데기가 있다는 조롱이었다. 모후는 그가 황궁 안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뜻을 담아 율목이라 불렀다. 저 어울리지 않는 나무를 언젠가는 베어버리겠노라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정말로 죽이신 건가.”
담을 넘기도 전에 활짝 열려있는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시끄러운 내관 한 명이 보초처럼 서 있어 깊이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궁문은 활짝 열려있고 안에선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앙상한 가지들이 불길하게 몸을 떨었다. 옥좌를 손에 넣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면 분명 죽은 자가 나왔을 것이다. 기왕이면 피가 덜 섞인 첫째 형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만일 그가 공격을 받았다면 그를 지키기 위해 머무르고 있던 호위 또한 화를 입었을 것이다.
홀린 것처럼 발걸음이 멋대로 움직였다. 겨울의 공기가 깨끗하고 차가웠다. 하늘은 잔뜩 젖어 있어 달무리가 길게 퍼졌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떨어뜨리지 않고 있었다.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당과를 만드는 것처럼 다디단 냄새가 궁 안에서 났다.
마치 일 년의 꽃을 모두 모아 짓뭉갠 듯 지독한 향기였다. 처절하기까지 한 그 단내 너머로는 짙은 피 냄새가 넘실거렸다.
달렸다.
달리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명(命)을 태울 것처럼 작렬하던 열기는 내 몸속에 남아 일렁였지만 더 이상은 나를 해치지 못했다. 별로 크지 않은 앞마당을 달려 아무도 없는 궁 안으로 달려들었다. 마치 내 궁처럼, 큰형의 궁도 텅 비어있었다.
궁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도 전에 그와 맞닥뜨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대들보에 매달려 부표처럼 흔들렸다. 하얗게 질려서 혀를 빼문 얼굴은 언제나 고상하게 미소 짓던 큰 형님과 똑 닮아있었다.
“보지 마.”
“……형?”
밧줄이 트득트득 걸리며 당겨지는 소리. 바람 빠진 허파마냥 끼익거리는 얼굴. 밧줄에 한 바퀴 감긴 목이 기이할 정도로 길어 보였다.
“보지 말라고 했잖아.”
아아.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하하. 아파서 이제 헛것까지 보이는가 보다. 큰형이 자기 자신을 대들보에 매달고 있었다. 밧줄을 움켜쥔 두 손은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냉랭한 얼굴로 힐끗 날 쳐다보았다. 역시 꿈인 거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기 자신을 대들보에 매달겠는가?.
“꿈을 꾸는 거야.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서….”
“이자가 널 죽이려고 했어.”
자기 자신을 매달던 형님이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는 놀랍게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날 고용할 때 말하기론 황궁이 환멸 나서 도망치고 싶은 거라 했지만, 처음부터 거짓말이란 걸 알 수 있었지.”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잔인한 내용을 속삭였다.
“살수를 부르는 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거든.”
“…이상한 꿈이야.”
“네가 지금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발현열 때문에 아팠다면서?”
“열 때문에 이상한 게 보여.”
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일까. 자꾸 헛것이 보였다. 큰형님이 자기 자신을 대들보에 매달아 올리고 있었다. 그 무표정하던 얼굴은 처음 만난 날 같았다. 얼어붙은 석상처럼 차갑고 고고한 그 모습에 나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돌아가렴. 이런 험한 일은 나같이 더러운 자의 손에 맡기고. 지금 본 건 완전히 잊어버리렴.”
밧줄을 기둥에 묶어 매듭진 남자가 내게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 비릿하고도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가 조금씩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큰형의 시체 옆을 지났다.
“네 궁으로 돌아가서 침상에 다시 누우렴. 지금 본 건 모조리 잊어버리고.”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얗고 단정한 그의 얼굴 뒤에서 혀를 길게 빼문 똑같은 얼굴이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 똑같은 얼굴보다는 절룩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더 신경 쓰였다.
“아파?”
“조금. 네 형이 친왕인 줄 알고 날 범했어. 덕분에 일이 쉬워졌지. 수치심 때문에 자살한 줄 알 거야. 황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천벌을 평생 두려워하며 살게 되겠지, 핏줄이 끊길까 두려워 너를 해치지도 못할 거고.”
이건 꿈이어야 한다. 몸속의 피가 꽝꽝 얼어붙는 듯했다. 얼어붙은 쇳물보다 차가운 무언가가 내 혈관을 따라 흘렀다.
“…뭐?”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괴물 같은 방식이라 미안해.”
“잠깐만. 지금 대체….”
“다 잊어버리렴.”
그가 놀랍게도 조금 겁먹은 얼굴을 했다.
“미안해.”
그가 사과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뱀처럼 휘어지는 손날이 모양을 바꾸는 순간. 뒷목의 통증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시커멓게 암전되었다.
“미안.”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대체 무엇이?
* * *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마치 꿈을 꾸고 깨어난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잠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더라? 아. 그래. 열이 올라서 며칠을 앓았었지.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기억을 복기하고 있는데 노 내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인으로 발현하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노 내관의 축하를 받는 순간 떠오른 것은 텅 비어있던 궁의 모습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간밤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픈 와중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큰형의 궁으로 갔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큰형을 살해하는 것을 목격했다.
“자리에 누워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는가?”
노 내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기쁜 날에 이런 소식을 알리게 되어 매우 분통하다는 듯이 큰형의 자살 소식을 고했다.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내관의 얘기에 꿈 같았던 간밤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자살?”
큰형의 목을 매달던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날 향해 미안하다 말하던 목소리도, 보지 말라던 목소리도, 지금 본 건 모두 잊어버리라고 말하던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져 아침 햇살 속의 먼지처럼 흩어졌다.
“발현 전에 있었던 일들이 잘 기억나질 않는군.”
발현 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이상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독한 상실감과 슬픔만 느껴졌다. 이유도 알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울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잊어버린 것 중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눈물이 흐른단 말인가?
의관이 들어와 맥을 다시 짚을 때까지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떨어졌다. 맥을 짚고 손끝에 피를 내어 약재에 풀어보던 내관이 극양인이라 고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남 일처럼 느껴졌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기억은 돌아올 것이옵니다.”
내 눈물을 처음 본 노 내관이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허둥거렸다. 사라진 기억과 함께 나타난 깊은 상실감은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무뎌졌다. 잊어버렸던 기억도 조금씩 떠올랐다. 이름조차 묻지 않았던 그 남자와의 기억도 결국엔 떠올랐다.
처음으로 나선 전장이었다. 타는 냄새가 가득한 가운데 시커먼 재가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높이 올라선 재들의 군무는 마치 철새 한 무리가 날아가는 듯 보였다. 귀를 찌르는 쇳소리와 비명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산야에 시체가 가득하여 피 냄새가 진동했다. 남자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작은 연무장에 내팽개쳐지던 기억이 피 냄새와 함께 떠올랐다. 발현열로 혼몽하여 정신이 없던 때, 나를 행해 소곤소곤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 잊어버리라고. 괴물의 방식이라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 한마디 한마디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그리움에 마음이 사무쳤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만은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 * *
“청금산에 자리 잡은 인간 백정 놈들을 쓸어 버릴 것이다. 같이 가겠느냐?”
“친정하려 하십니까?”
형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진중한 표정으로 술을 따랐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것도 아닌데 친정을 하겠다는 황제의 태도에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황제로서 형의 권력은 공고했으며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가득 있었다. 극양인으로 발현한 형제가 빤히 있는데 스스로 위험 속에 몸을 던지겠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려야 하나? 시험받는 것인가 싶어 황제의 기색을 살폈으나 그는 생각보다 진지하고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율목친왕의 서재에서 문서가 하나 발견되었다.”
“…이제서야 말입니까?”
“발견한 지는 좀 되었지. 오 년에 걸쳐 놈들을 파헤쳤다. 이제 뿌리를 뽑아야지.”
율목친왕이 자살한 지도 어느덧 8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의 죽음을 마음에 두고 뒤를 캤다는 말에 조금 질린 기분이 되었다. 사이가 좋다고는 하나 이복형에 경쟁자였다.
“황궁에 잠입하다니 간이 부은 자들 아닙니까. 그런 놈들의 손속에 당할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다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 모를 일이긴 하군요. 소제는 미인이 웃으며 다가오면 거절할 자신이 없습니다.”
“농담할 일이 아니다. 이런 놈들이 궁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형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놈들이 황궁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취했음을 암시하는 말에 표정을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허투루 보지 마라. 잡초 한 뿌리 남아서는 안 되느니.”
“예. 폐하.”
형에게 술을 받고 물러나면서도 정신이 얼떨떨했다. 황궁을 침범한 살수라는 말에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율목친왕의 목을 매달던 광경이 어지러이 떠올랐다.
“살수를 고용하는 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그는 살수였던 걸까? 이상할 정도로 강력했던 그의 무력을 떠올리면 그가 살수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인간 백정 같은 짓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정식으로 무과를 보고 급제하여 장군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 분명 산속 깊은 곳의 암자에서 수련하던 무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살수였다면?
“출정 준비를 해라. 황제의 친정을 따를 것이다.”
반드시 황제를 따라가야 했다. 그가 일개 군졸의 손에 목숨을 잃진 않겠지만 개인의 무력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엔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자라 해도 수십 수백의 인간에게 둘러싸이면 목숨을 장담키 힘들었다.
황제의 준비는 놀랄 정도로 빨랐다. 몇 년이나 계획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진군을 하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망갈 길을 막고 숨통을 끊어버리는 솜씨가 놀랍도록 깔끔했다. 황제의 지휘를 바라보는 군관들의 눈빛이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뭐 상관없나.’
황제의 지휘에 감탄하는 이들이 있는 것과는 별도로 이런 작은 일에 직접 나선 황제의 태도를 못마땅히 바라보는 시선 또한 늘어났다. 내가 반역을 일으킬 것도 아니니 황제가 군관들의 신망을 얻는 것을 딱히 경계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지옥 속에서 그를 찾는 게 더 중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군.’
불길이 올라오는 화전촌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숨어있던 화전민이 검을 들고 뛰쳐나오는 것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었다. 화전이나 일구던 인간들치고는 말도 안 되는 무력을 발휘했으나 완전히 무장한 군인들의 창검에서 도망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활을 맞고 쓰러지는 얼굴들 하나하나를 나는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그를 만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독한 오산이었다.
잔해가 파헤쳐지고 살아서 꿈틀거리던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재와 피가 가득한 산속의 폐허 속에서 나는 망연히 흩날리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차가워져 희게 질렸다. 무위가 굉장하니 숨어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인 것은 아닐 것이다.
“황상께선 잔당을 색출하러 마을로 가신다고 합니다. 전하.”
“난 이곳을 좀 더 살펴보겠다.”
말에서 내려 잔해를 뒤졌다. 뭔가 찾는 것이 있다면 말해달라 묻는 수하들의 요청에도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체들을 모두 모으게 하여 죽은 자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다시 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은 이렇게 완전히 사라지고 인연 또한 끊어져 남남이 되는 게 아닐까. 애초에 이름조차 모르는 타인이었으니 이대로 만나지 못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기껏해야 첫사랑 아닌가. 형님의 말대로 황궁에 들어와 무엄한 짓을 하고 도망친 살수이니, 만약 찾게 되더라도 단죄하여 벌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하여 황족을 죽인 자를 살려둘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둠이 내리자 잔불의 흔적들이 노랗게 튀어 올랐다. 산불이 나지 않도록 그것들을 모두 진화하고서야 화전촌을 뒤로했다.
“황제께선 먼저 금성으로 향하셨습니다. 전하.”
“그래.”
“그런데 잔당을 색출하러 가셨던 마을에서 음인을 하나 사셨다더군요.”
“음인을 사?”
“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노예로 팔고 있었다는데, 첫눈에 반하기라도 하신 것인지 그 자리에서 구입하셨다 합니다.”
무관이 외설스런 말을 늘어놓으며 낄낄 웃었다. 무엄한 일이었으나 전투가 끝난 지 한나절도 되지 않아 다들 흥분한 상태였다. 제정신이 아닌 것을 감안하여 용서키로 마음먹었다.
“음인이라….”
“아깝지 않으십니까? 황제께서 관심을 가질 정도의 음인이라니 분명 천하절색일 터인데. 전하께서 마을로 가셨다면 전하의 것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별로. 음인들은 하나같이 향이 독해서 맘에 안 들어.”
그 음인이 살수들의 잔당이라 해도 그는 아닐 것이다. 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평인이었다는 건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평인임에도 날 무력으로 누를 정도로 굉장한 무인이었다. 자기 몸을 시장에서 노예로 파는 일 따윈 있을 수도 없었다.
“흥. 음인 따위 형님이나 가지라지.”
나는 말을 달려 청금산을 뒤로했다. 형님이 구입했다는 노예에 대해선 곧 잊어버렸다. 신경 쓸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런 남자를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무용한 일이었다.
동쪽의 국경으로 향해 분란을 정리했다. 작은 지변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형은 태평성대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모자람 없는 황제였다. 제대로 된 치세를 펼치는데 어째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인지, 그 이유가 불분명했다.
정벌을 벗 삼고 술을 들이켜며 국경 너머에서 날뛰는 야만족들을 무력으로 쳐부쉈다. 새까맣고 하얀 재를 가득 떨구던 화전촌이 감은 눈 너머로 떠오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그 마을에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살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조리 가정뿐인 생각 속에서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금성으로 돌아왔다. 이 년 만의 일이었다.
* * *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꿈을 꾸었다.
다리에서 피와 정액을 떨어뜨리는 남자의 손을 막는 꿈이었다. 내가 기절하지 않자 곤란해하는 남자에게 숨겨줄 테니 어디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꿈이었다. 발현 때문에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몸으로 그의 차가운 몸에 엉겨 붙는 꿈이었다. 그는 익숙지 않은 일에 당황하면서도 내게 고이 안겨 병간호를 해주었다.
타오르는 화전민의 마을을 뒤로하고 마을로 가는 꿈을 꾸었다.
황제보다 먼저 도착한 마을에서 나는 한 음인이 자신의 몸을 노예로 파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음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라는 걸 알아채고 그 자리에서 값을 치른다. 내 궁으로 곧장 데려가 비단과 옥으로 둘둘 말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맬 것이다. 황후의 금관을 머리 위에 얹어 주고 달콤한 것만 잔뜩 먹여서 뽀얗게 만들 것이다. 그는 황제와 만나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동부를 평정하고 돌아온 황궁에서 그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연못을 바라보는 노예를 보는 순간 내 궁으로 데려와 감금하는 꿈이었다. 형의 체향이 풍기든 말든 내 체향으로 잔뜩 물들여서 다시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황제가 그를 다시 끌고 가기 전에 아이를 갖게 만들어 내 것으로 삼을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생생해진 모습으로 부른 배를 안고 있었다. 내 친절과 심술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부른 배를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렸다. 형이 퍼부은 학대는 봄날의 눈처럼 녹아서 사라지고 내가 들이부은 친절과 부드러움만 남아 그를 달콤하게 만들었다.
꿈속의 모든 기회를 차버리고서야 나는 그를 기억해냈다.
나는 발현열로 인해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라 잊어버린 것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면 그를 쫓아 처벌할 일도, 그를 향한 사랑을 잊지 못해 고통스러울 일도 없을 테니까.
정신을 잃고 늘어진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암살단이 모여 있었다는 화전촌에서 목숨을 건진 한 명의 음인.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연못을 바라보던 모습의 남자를 꽉 끌어안자 말 못 할 충족감에 가슴속이 차올랐다. 부드럽게 풀어진 몸이 맞춘 듯이 감겨왔다. 피곤에 지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왜 지금까지 기억해내지 못한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었다. 뒤늦게 발현한 탓에 그다지 변하지도 않은 얼굴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지 말라고 할 것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형님보다 먼저 마을로 내려가 자신의 몸을 파는 그를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내 품에 끌어들여 기뻐했을 것이다. 다른 이의 폭력에 노출되는 일 따위 없이 호사스런 비단과 패옥으로 감싸고, 마음고생 하는 일 따위 생기지 않도록, 흙을 밟는 일조차 없게 했을 것이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꿈이 계속 피어났다. 현실과는 다른 꿈들이었다. 조금만, 한 발자국만 달리했어도 제대로 아귀가 맞아 들어갔을 꿈이었다. 그 모든 비틀린 꿈속에서, 그래도 아직 우리는 맞물려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있으니 된 게 아닐까?
권력에 집착하던 모후는 황제를 죽이고 어린 나를 황위에 올리려 했다. 하지만 내가 극양인으로 발현한 것을 알았다면 큰형과 나 모두 죽이고 율목친왕을 황위에 올렸을 것이다. 아무런 뒷배도 없는 율목친왕은 황태후를 혐오하면서도 손발이 묶여 어쩌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그는 날 지키기 위해 율목친왕의 목을 대들보에 매단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 따위 모른 척하고 도망쳐도 되었을 텐데, 그는 날 위해서 손에 피를 묻혔다.
“기조야.”
달콤한 향이 방 안에 가득했다. 꽃 한그루 없는데 향긋한 공기 속에서 나는 나만을 위한 꽃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숨을 깊이 들이켜고 내쉬는 것이 행복해서 머리가 어질거렸다.
형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형은 기조가 임신하길 원해서 내게 보낸 것이다. 왕조의 연장이나 개인의 영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손에 넣기 위해서.
질척하고 추악한 집착의 끈적임이 손끝에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형.”
땀과 눈물에 젖은 하얀 얼굴에 입을 맞췄다. 계속된 정사로 지친 몸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배는 아직 납작했지만 곧 내 아이를 품어 커다랗게 부풀 것이다. 이 아이는 형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였다. 모른 척 그에게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으…. 흐읏.”
잔뜩 풀어져 있는 구멍으로 성기를 밀어 넣자 창백한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냉랭한 얼굴로 날 땅에 엎어뜨리던 그 얼굴이 약하게 무너지는 것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힘겹게 뜬 눈이 원망의 기색을 품고 파르르 떨렸다.
“그, 그만. 이젠….”
“난 희락기였지만 그대는 아니었으니, 아이를 가지려면 조금 더 확실하게 해야지.”
“이 이상 뭘 더…, 윽! 확실히. 크흑!”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박아댈 때마다 하얀 정액들이 질척거리며 밀려 나왔다. 깨어나자마자 벌어진 행태가 민망한 것인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양옆으로 굴려댔다. 양쪽 귀를 붙잡고 깊이 입맞춤했다. 살짝 말라 있는 입 안이 달콤해서 정도 이상으로 빨고 말았다.
숨이 모자라 벌벌 떨리는 몸이 금세 절정을 맞아 뒤로 젖혀졌다. 고개를 놓아주고 골반을 틀어쥔 채 깊이 박아대자 서럽다는 듯 울음소리만 커졌다. 이제는 완전히 외워버린 극점을 귀두로 꾹꾹 누르자 한껏 벌어진 몸이 소스라치며 꿈틀거렸다.
발로 차버리고 싶지만 각도가 나오지 않아 내 옆구리만 비벼대는 다리를 한쪽으로 잡아 모았다. 다리가 오므라지자 좁아진 내벽이 내 성기를 더 뻑뻑하게 씹어댔다. 절정을 맞아 꿈틀거리는 내벽 안을 계속해서 박아대자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억나? 예전에 날 만났을 때.”
“아. 아악! 악! 으, 으아아…!”
“각인했으면 좋겠다고 그랬었잖아.”
그는 자유로운 두 손으로 내 팔을 긁으며 버둥거렸다. 찐득거리며 내 물건을 빨아들이는 내벽이 이젠 거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제 잔뜩 풀어서 힘을 빼놓지 않았다면 추삽질도 못 할 정도로 뻑뻑하게 굳었을 것이다.
조금 속도를 늦춰 느긋하고 얕게 박자 숨이 모자라 헐떡거리면서도 조금씩 울음을 삼켰다. 한계까지 예민해진 그의 몸은 부드러운 움직임에도 절정을 맞이했다. 가볍게 떨리는 얼굴 위에 입술을 계속해서 떨어뜨렸다. 힐난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버틸 수 없다는 듯 내 어깨를 밀어내는 손목을 단단히 감아쥐었다.
기운이 빠져 애액만 흘려대는 밑구멍을 부풀어 오르는 내 성기가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압력에 기조가 숨을 멈췄다. 뒤로 젖혀진 목이 물어달라는 듯 새하얗게 열려있어 이를 박았다. 잔뜩 지친 내벽 안쪽을 잔뜩 벌리고 참았던 것을 모조리 싸버렸다. 엄청난 양의 정액이 그의 배 속에 싸질러졌다. 그의 내장을 뜨끈하게 채우며 엉겨 붙는 정액의 흐름에 그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기조야, 괜찮아. 괜찮으니까.”
어젯밤 몇 번이고 한 행위였지만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벌써 몇 번이나 그를 내 손에서 놓쳐버렸다. 더 이상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개 같은 꿈들을 더는 꾸기 싫었다.
정신을 잃은 얼굴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내가 입맞춤하는 것에 그는 무척 약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잔뜩 화를 머금은 이마가 입맞춤을 할 때마다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는 그의 몸을 끌어안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길게 흘렸다.
어린 날의 상냥한 괴물이 나를 지켜줬으니, 이제는 내가 괴물을 지켜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