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3장. 겨울 - 2 (4/9)

3장. 겨울 - 2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황제의 이상한 부름은 계속되었다.

시중을 들기 위해 내관을 따라나서면 황제는 없고 친왕만 기다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가끔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을 때엔 뒤늦게 친왕이 왔다. 그러한 일이 두어 번 계속되자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오랫동안 황제를 보지 못하자 어느덧 내 몸에 묻어 있던 체향도 사라지고 말았다.

황제의 체향이 벗겨진 내 몸엔 친왕의 비릿한 향이 엉겨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친왕은 체향을 잘 조절하지 못했고 근처에 앉아있던 나는 본의 아니게 그의 향을 덮어쓰게 되었다.

장소는 처음의 그 정자일 때도 있었고 실내의 대기실일 때도 있었다. 다른 이가 오가지 않는 조용한 장소라는 공통점 외에는 아무것도 일치하지 않았다.

신년이 지나고 겨울은 더욱 깊어져 날은 싸늘해지기만 했다. 본의 아니게 친왕을 접대하느라 얇게 입고 돌아다니는 날이 늘었다. 오늘따라 날이 건조해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따스한 곳에 있을 땐 괜찮았지만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시면 여지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 영 고통스러웠다. 일을 도우며 얻은 토탄이나 솜옷 덕분에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귀한 분 옆에서 시중들기엔 곤란할 정도로 기침이 자주 터졌다.

“몸이 좋지 않은데 괜찮을까요? 불쾌해하실까 저어됩니다.”

“황상께서 기조 자네가 수발을 들게 하라 직접 명하신 것인데 어찌 물릴 수 있겠는가.”

내관은 곤란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내가 나가지 않는 것은 안 된다며 등을 밀었다. 황제가 직접 명령한 것이라니. 이제는 친왕과의 약속을 어쩌다 어기게 되었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슬슬 알 것도 같았다.

“황제께선 제가 친왕을 모시길 원하시는 건가요?”

“노복은 아는 것이 없네.”

황제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내관이 아는 것이 없다 한들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나한테 질린 걸까? 질린 거라면 그냥 부르지 않고 놔두면 될 텐데. 이렇게 친왕에게 떠넘기듯 자리를 마련하지 않아도 나 같은 게 뭘 할 수 있다고.

아. 어쩌면 내가 친왕의 성질을 건드려서 그의 손에 죽는 걸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황제는 벌써 세 번이나 친왕을 바람맞혔다. 황제가 가장 가까운 형제를 홀대한다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니었고 사람들 사이에선 벌써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막상 친왕은 그다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그를 대해야 하는 나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꼬는 것도 그만둔 친왕은 다가가기 힘든 짐승 같았다. 가끔씩 내게 말을 걸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침묵을 지키며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황제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것일지 모른다. 형제 사이가 좋다고 했으니 날 죽이라든가, 어떻게 하라는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르지.

‘내게 질려?’

음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제 황제가 남긴 멍도 사라지고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던 체향도 사라졌지만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시커먼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이유 없이 주어진 폭력이라든가 강간 같은 잠자리는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할 정도였다.

‘질린다고?’

배신감이 느껴졌다. 황제가 내게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 따위 조금도 없건만 그가 내게 질리고 내치려 한다는 사실이 이해되질 않았다. 시커멓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분노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분노할 만한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휘몰아치는 마음속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불안감과 슬픔과 분노는 제대로 된 형체를 띄기도 전에 사라졌다. 모든 것이 추측이었다. 음울함만이 찌꺼기처럼 남아서 마음을 어지럽혔다. 대체 왜 친왕과 나를 만나게 하는 것일까? 황제가 친왕을 내치고자 나를 도화선으로 삼으려는 걸까?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질렸다든가,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실컷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질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번 황제가 화풀이할 때 그다지 세게 때리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어떠면 그 손속이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때리는 것도 지겹고 질려서 그만둔 것인데, 난 바보처럼 많이 맞지 않아 몸 상태가 괜찮다고 좋아했다. 어쩌면 황제가 마음을 달리 먹고 내게 잘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멍청하게나마 잠깐 가졌더랬다.

아주 우울할 때만 먹으려고 놔두었던 과자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지만 기분이 영 나아지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입 안에 달콤함이 퍼지면 삶에 대한 의욕이 치솟았는데 황제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축 처진 어깨와 고개를 다시 세우기 힘들었다. 머리에 열도 슬쩍 오르는 듯했다. 처소 안에서 체온을 보존하고 있으면 괜찮았지만 이렇게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밖으로 나올 때마다 몸이 조금씩 갉아 먹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병이 있을 경우에 귀한 사람 옆에는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황궁의 법도였지만 황제는 내 상태 따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친왕이 워낙에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전장에서 몇 년을 있었다는 극양인이 나처럼 비실거리는 음인의 감기에 옮을 것 같진 않았다.

오늘 내관이 안내해준 장소는 전경이 탁 트인 연무장이었다. 장소도 계속 바꾸어가며 약속을 잡고 파투내는 황제의 저의가 점점 수상해졌다. 아직 친왕이 오지 않아 텅 비어 있는 연무장에는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고 앉을 곳만 마련되어 있었다.

눈은 그치지 않는 듯하다.

휘몰아치는 하늘은 이미 푸른빛을 잃고 회색의 명도만을 달리하고 있었다. 바람이 적잖이 불고 있어 연무장에 꽂혀 있는 기가 퍼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훈련하는 군관도 없어 텅텅 빈 공터가 바람만을 외롭게 품고 있었다. 차가운 풍경이었다. 왜 이런 곳에 자리를 만든 것일까? 요즘 들어 황제가 하는 일들은 모두 이해되지 않는 것들뿐이라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연무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관망대에 탁자와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앉는 대신 비어 있는 공터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자박거리는 소리가 나서 친왕이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어서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친왕 전하 납시오.”

“삼가 전하를 뵈옵니다.”

친왕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하자 물끄러미 살펴보는 시선이 위쪽에서 느껴졌다. 내가 무릎을 꿇고 절할 때마다 친왕은 꼭 한참 동안 침묵하며 살펴보았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도 같다. 정수리에 느껴지는 시선은 이제 익숙한 것이었다.

“일어나라.”

친왕은 짧게 명령한 뒤 곧바로 의자에 앉았다. 뒤따르듯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자 안주 몇 가지와 술병이 곧바로 준비되었다. 오늘은 술자리인 모양이었다. 고기 볶은 것과 삶은 야채가 먹음직스런 냄새를 풍기는 가운데 하얗고 거대한 두부가 정갈하게 썰려 나왔다. 술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술병이 따뜻해서 북쪽 지방의 화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나도 흥이 돋는군. 따라보도록.”

친왕의 말에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따뜻한 술에서 하얀 김이 올라오는 것이 마치 눈이 날려 일어난 안개인 양 운치 있었다.

“시음하겠습니다.”

친왕에게 술잔을 올리기 전 입술을 대고 조금 마셨다. 만일 황제가 친왕을 해치고자 한다면 이 술을 마시고 죽게 될 수도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나를 죽이고자 하는 암살자들이 먹을 것에 독을 타서 줬다면 더 깔끔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날 죽이려는 자들은 언제나 칼을 들고 덤볐다.

어쩌면 이미 독을 탔는데 내가 먹는 것이 워낙 적어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건 지금까지 나는 먹을 것으로 인해 탈이 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지간히 단단한 것도 잘 씹어 삼켰고 상태가 좀 이상하다 해도 별문제 없었다. 만독불침같이 거창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남들보다 좀 뻔뻔한 위장을 가졌을 뿐이었다.

한 모금 마신 술잔을 친왕에게 내밀자 그가 빤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마치 네놈이 입을 댄 것을 감히 내미느냐는 투여서 서둘러 변명을 했다.

“소신이 따른 술을 미덥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 시음하였습니다.”

“…됐다.”

친왕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잔을 받았다. 새하얀 도자기 잔을 그는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내가 입을 대어서 더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더럽다고 생각되면 버리면 될 것을 사람 무안하게 뭐 저리 쳐다보는지 모르겠….

“술에 향취가 더해지니 마시지 않아도 취할 것 같구나.”

친왕이 술을 삼키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

“햐, 향취요?”

당황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를 생각도 못 하고 얼이 빠져 있으려니 친왕이 드물게도 날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왜 너를 박대하지?”

갑작스레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친왕의 그 질문에는 나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제 신분이 천하고 향이 독해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신분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방국에서 황족의 지위란 것은 기후와 재난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니 인간의 법 따위 기실 의미가 없지. 묘하단 말이지. 형님께서 네놈을 그리 방치하면서도 꾸준히 안아 체향을 남기시는 게.”

친왕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턱에 손을 괴며 물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 같지 않은데.”

안다 해도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황제의 형을 닮았으며, 그로 인해 황제가 대리만족을 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깊은 혐오감을 품게 되었다는 걸 어떻게 밝히겠는가?

“그냥 화를 풀 곳이 필요하셨던 게 아닐까요. 저는 음인답지 않게 생겼고.”

나는 내가 믿고 싶은 이유들을 계속해서 주워 삼켰다. 내가 신분이 천하고 만만한 데다가 늦게 발현한 덕에 튼튼한 탓이라고. 하지만 친왕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는 작정을 한 것처럼 따지고 들었다.

“몇몇 나이 있는 궁인들이 그러더군. 네가 죽은 큰형을 닮았다고.”

가슴이 섬뜩하니 차가워졌다. 친왕은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큰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거든. 내가 발현할 때 즈음 죽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난 발현을 전후해서 기억이 별로 없어. 흔히 일어나는 증상이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기억에 구멍이 있다는 건 께름칙한 일이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친왕이 발현 전후의 기억이 없다는 건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기억이 없으시다고요?”

“그래. 넌 어땠나?”

“무엇이 말입니까?”

“발현할 때 어땠어? 넌 나이가 꽤 들어서 발현한 거지? 그전까진 평인으로서 다져진 생활이 있었을 텐데 그게 무너진 거잖아. 어땠어?”

친왕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다 알고 묻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친왕의 얼굴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긴장으로 인해 목이 말라붙었다. 모르겠다는 친왕의 시선이 묻는 듯 깊어졌다.

“저도 발현 때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발현 전의 기억도 산산조각 나서 떠오르는 게 많지 않고요.”

“기억이 나지 않아?”

“네. 짤막짤막 떠오르는 건 있습니다만 앞뒤가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 대답에 친왕이 흥미롭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발현 전에 누구를 만나고 뭘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

“네. 제가 사냥꾼이었다는 것도 주위 사람들이 말해줘서 알 수 있었습니다. 사냥하던 때의 일이 띄엄띄엄 떠올랐기에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었죠.”

“그럼 적응이 힘들진 않았겠군.”

“네. 전하.”

화전을 일구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적응은 쉬웠다. 어차피 무슨 일을 하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얼룩덜룩한 그림을 고쳐 그리는 것보다는 백지에 새로 그리는 것이 더 쉬운 것처럼.

“난 발현한 시기 앞뒤로 몇 달 정도만 기억이 날아갔어. 아주 안 나는 건 아닌데 쓸모없는 것들만 기억나니 짜증스럽더군. 그래도 이 연무장에서 죽자고 버둥거렸던 거 하난 기억나.”

친왕이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야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져 조심스레 눈치를 봤다. 그가 내게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이런 개인적인 얘기를 할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데 내가 듣기 싫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내 역할이란 건 이러한 얘기에 말 상대를 해주고 대꾸하는 것이었으니.

“어렸을 때부터 무(武)에 능하셨나 보군요.”

“내가 잘했던 건지 황족이라 져주었던 건진 알 수 없다만. 뭐 또래 중엔 적수가 없었지.”

연무장을 향한 친왕의 모습이 문득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근데 단 한 번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패배해서 바닥을 구른 적이 있다.”

“사범이었나요?”

“아니. 그게…. 누군지 기억나질 않아.”

친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 발현하기 전이었지만 그때부터 웬만한 양인만큼 힘이 셌거든. 그런데 상대도 양인이 아니라 평인이었단 말이지. 어지간히 분했던 것 같아. 며칠을 그와 대련했는데 단 한 번도 이기질 못했거든.”

“별일이네요. 무예에 능한 평인이라니 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도 금세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친왕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그자에게 이기고 싶어서 발현한 거지 싶어.”

극양인이 되었을 때 주변의 반응이 어땠던가. 친왕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형과 나이 차가 많이 났기에 직접적으로 황위를 겨루진 않았으나 양자로 맞아들이라는 압박은 있었던 듯했다.

극양인이라는 것은 한 세대에 한 명 정도나 나올까 말까 한 형질이었다. 나라를 건국하거나 영토를 수복하고. 주변을 정벌하는 패왕의 형질이 극양인이었다. 그 머리가 비상하고 체력이 범과 같아 감히 범인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형질이 황가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황제로 옹립하려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황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괘씸한 자를 이기는 것뿐인데, 아무리 애써도 그놈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단 말이지.”

친왕은 정말로 분하다는 듯이 한숨 쉬었다. 문득 철검을 휘두르며 덤비는 어린아이의 환상이 나를 덮쳤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그 아이는 어린애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덩치가 컸는데,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표정 때문에 제 나이로 보였다. 아 설마.

“전하께선 발현을 언제 하셨는지요?”

“글쎄. 팔 년 정도 전인가?”

난 친왕의 빈 잔을 채우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팔 년 전 그와 무예를 견줄 정도의 평인이라면 짚이는 게 있었다. 짐작 못 하는 것이 힘들 정도가 아닌가.

“그렇습니까. 꼭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근데 네가 걱정해 줄 일은 아니다만. 내가 왜 네놈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친왕이 갑자기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소박을 맞게 되니 어떤 기분인지요, 형수님?”

말을 돌리려는 의도가 명백한 질문이었다. 그놈의 형수님 소리 좀 이제 안 듣나 했는데 또다시 시작인가 싶었다. 친왕은 방금 전 감상에 젖었던 게 거짓인 양 메마르고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자기 얘기를 한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더욱 성질을 부리는 모양새였다.

“송구합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

“내가 물은 건 소박맞으니 기분이 어떠냐는 것인데. 무엇이 송구하다는 거지?”

친왕의 질문은 언제나 대답하기 힘들었으나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방금 떠오른 기억과 알아챈 사실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과거의 나는 대체 황궁에 들어와 뭘 하고 다닌 것인가? 황제의 형을 목매달고, 발현도 하기 전의 친왕과 대련을 하고, 황제가 알고자 하는 비밀을 속에 품었다. 내 과거라지만 그 모든 것이 남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친왕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형님께선 오늘도 오지 않으시려는 모양인데, 형수께선 이 아우와 바람이라도 피워보지 않으실는지?”

능글맞게 말하는 친왕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반쯤은 진담인 듯 유혹하는 듯한 체향이 훅 끼쳤다. 몸이 떨린다고 생각한 찰나, 공교롭게도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제대로 들이켠 찬바람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마른 목이 달라붙고 눈물까지 고일 정도로 기침이 계속 나왔다. 친왕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날 노려보았다.

“뭘 그리 놀라서 사레까지 들려?”

“사레가, 콜록! 아니라. 큽. 쿨럭!”

“뭐야 몸도 계속 떨고. 내가 그렇게 무섭나?”

빈정거리던 친왕이 문득 조용해졌다. 겨우 터져 나온 기침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자 냉막하게 얼어붙은 친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기침을 한 게 그리도 거슬렸나? 그야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테지만 겨울에 감기 걸리는 거야 죽을병도 아니고 특이할 것도 아니었다.

“전하 그….”

“왜 옷을 그따위로 입고 다니지?”

화가 난 목소리였다. 옷에 뭐라도 묻었는지 슬쩍 살펴보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접객소에서 주는 지급품은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어 그리 흠잡을 곳이 없었다. 겉옷이 얇아서 추위를 제대로 막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였다.

“몸 선이 다 드러나 보여 천박하기 그지없다.”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형님께서 날 유혹하라고 명령이라도 하시던가? 왜. 자기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내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싶다던?”

얼토당토않은 오해였다. 황제는 내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유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말문이 막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친왕은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간을 구긴 채 심호흡을 내뱉는 친왕의 모습이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바람맞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는 것이다. 황제에게 불만이 쌓여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친왕에게 화풀이라도 당할까 싶어 몸을 한껏 움츠리는데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주었다고 형님께 자랑이라도 하려무나.”

펄럭이는 소리가 나며 등 뒤가 따뜻해졌다. 묵직한 무게의 털외투가 내 몸을 감쌌다. 친왕의 몸을 감싸고 있던 외투는 극양인의 체온을 그대로 품고 있어 따뜻했다. 갑작스런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리고 정신이 반쯤 날아가 돌아오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에 들어간 것 같았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형수님.”

조롱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도무지 정신이 들질 않았다. 온몸이 녹아내리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껏 경직되어 추위에 저항하던 살갗이 부드럽고 따스한 것에 감싸여 적응하지 못하고 덜덜 떨렸다.

“…따뜻합니다. 전하.”

“…….”

“따뜻해요.”

갑자기 따뜻해져도 몸이 떨리는구나. 바깥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온기에 몸이 놀라 굳어버렸다.

“따뜻합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걸 받을 수는….”

“…본왕이 준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할 수 있지?”

두꺼운 털외투를 벗었는데도 친왕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외투를 벗자 단단한 몸매가 드러났다. 압도적인 힘과 경험이 녹아있는 근육은 우락부락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균형을 자랑했다. 내 시선을 알아챈 것인지 친왕이 피식 웃으며 외투의 옷고름을 여며주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형수님.”

어울릴 리가 있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안다. 단정하다고 깨끗하다고 좋게 생각하기는 해도 결국 초라하기 그지없는 단벌 신세였다. 얇은 외투는 계절에 맞지 않아 겉도는 탓에 마주치는 궁인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 와중에 한눈에도 귀해 보이는 털외투를 걸쳤으니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해도, 지금 날 감싸고 있는 체온을 어떻게 벗어버리겠는가?

친왕이 내게 외투를 벗어주자 내관들이 호들갑을 떨며 화로를 가져왔다. 두 명밖에 없는 작은 공간인데도 대여섯 개나 되는 화로가 놓이자 마치 한여름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친왕이 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기에 나 또한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이처럼 추운 날에 따스함을 느끼며 눈이 내리는 풍경을 감상한다니, 생각도 못 한 호사였다. 눈이 내리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도 쓸어야 했고, 허름한 신발은 방수를 다 하지 못해 시간이 지날수록 젖어 들었다. 젖은 신발이 그대로 얼면 발에 감각이 없어 한참이나 고생했다.

“눈 내리는 풍경이 이리도 아름다웠군요.”

이처럼 따스한 곳에 앉아 밖을 보자 겨울의 풍경이 심히 볼만하였다.

외투 가득한 따스함과 함께 친왕의 체향이 내 몸에 배었다. 뺨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자 마치 친왕에게 꼭 껴안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짐승의 털은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잘 관리하지 않으면 냄새가 난다. 짐승의 사체를 가공하여 만든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더러워질 경우 물에 빨 수도 없다. 기름을 먹여 잘 관리하는 한편 안 좋은 냄새를 없애고 좋은 향을 입혀야 한다. 난 이 좋은 털외투를 관리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외투의 앞섶을 있는 대로 끌어안자 마치 짐승 한 마리를 끌어안은 듯 풍성해서 기분 좋았다.

“눈이 마치 여우 같아.”

“예?”

“기분 좋은 여우마냥 가늘게 휘어있어.”

친왕이 혀를 찼다.

“여우 털을 걸치고 그렇게 여우 같은 표정을 짓다니. 홀릴 것 같군.”

친왕이 툭툭 말을 내뱉으며 내게서 고개 돌렸다. 여우 같은 표정이라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자꾸 나를 외면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인가 했는데, 사실은 부끄러워서 마주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못된 말만 하는 입이었지만 왠지 귀엽게도 느껴졌다. 이게 다 몸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상한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게 여우 털이군요.”

손으로 털을 쓰다듬자 부드러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얀 눈이 털끝에 내려앉아 반짝반짝 빛을 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목과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간질 일어나는 듯했다.

“그, 감사합니다. 전하.”

“뭐가?”

“이런 훌륭한 걸 주시고.”

“주면 뭘 하나. 간수도 잘 못 하는데.”

친왕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친왕이 내게 직접 준 물건은 밤과 화로와 옥패. 그리고 일전의 과자 상자까지 네 가지였지만 마지막의 과자를 빼고는 모두 빼앗기고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치우라 명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것들을 숨기겠는가? 땅을 파서 묻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송구합니다. 신분에 맞지 않는 물건은 회수하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됐다. 뭐 네 탓은 아니지.”

빼앗고서 더 좋은 물건을 주지 않은 치의 잘못 아니냐.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험담을 하며 친왕이 술을 다시 들이켰다.

부드러운 털이 뺨을 간질이고 따뜻한 화로가 열기를 뿜어내니 겨울이란 계절이 비껴간 듯 몸이 풀렸다. 차갑게 부는 바람조차 즐겁고 떨어지는 눈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풍류를 즐긴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풍경은 바뀌지 않았을 텐데, 몸이 편해지고서야 그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리저리 아름답게 우거진 나무들의 낙엽을 떨구듯 눈송이를 떨궈내니 눈이 내리는 속에 또 눈이 내리는 형국이라 그 아름다움이 일품이었다.

“물도 없는데 파도가 치네요.”

바람이 불 때마다 연무장에 쌓인 눈이 안개처럼 일어나 하얗게 흩날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의 풍경이 이럴까. 문득 황궁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풍경들이 생각났다.

“황궁으로 오는 길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습니다.”

다리가 놓일 수 없을 정도로 큰 강을 그날 처음 보았다. 배가 뜨고 파도가 치는 모습이 너무나 생소해서 넋을 놓고 바라봤었다.

“호수라고는 하는데 건너편도 보이지 않고 파도가 쳐서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기억하고 있는 풍경들 중 가장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 속에는 머나먼 고장의 여러 경치가 있겠지만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녁에는 가게마다 등롱을 밝혀 어둡지 않았습니다. 걸어가는데 발밑이 환했어요.”

“아. 금주를 말하나 보군. 그곳의 호수가 크기는 하지.”

친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향락의 도시라 부르기도 하는데. 거길 지나왔다면 재미 좀 봤나?”

“재미요?”

친왕이 한쪽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는 저질스런 손짓을 했다. 하는 짓만 보면 황족이 아니라 건달 같은데 생각해보니 황족 출신의 건달이란 표현이 딱 맞기는 했다.

“황궁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전 음인이고. 황제께서는 관사에 묵으셨기 때문에 시내를 돌아다닐 일도 없었습니다. 그곳은 지나가며 본 게 다입니다.”

“형님과 함께 궁으로 들어왔다고?”

친왕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웃음기 어린 얼굴에 의아하다는 빛이 흘렀다.

“형님께서 금주를 지나서 황궁으로 오신 일이 많지는 않을 텐데. 궁에 들어온 게 언제였다고 했지?”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삼 년 전입니다.”

음인으로 발현한 지 어느덧 십일 년이나 흘렀다.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에 부족함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있다. 발현한 뒤 살아온 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전을 일굴 때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어서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불변함이 좋았다. 무료하고 보람 없는 일상 속에서도 유일하게 좋았던 게 있다면 바로 그런 평범함이었기 때문이다.

“삼 년 전?”

친왕은 내 대답을 듣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산적을 토벌하기 위해 황제께서 친정하셨을 때인데 그때 전하께서도 함께하셨다 들었습니다.”

“아. 산적토벌. 그래. 그랬지.”

친왕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턱을 긁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표정이 영 심각했으나 그 이유를 내게 말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래. 그때 형님께서 사람을 하나 주웠단 얘기를 듣긴 했었지. 그게 너였군.”

여상히 웃던 친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일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그게 너였어.”

“…예. 아마 저일 겁니다.”

그때 황제가 구입한 사람은 나 하나였으니 친왕이 들은 것도 내 얘기겠지. 황제가 밖에서 사람을 사 온 것은 내가 유일하다고 들었다. 무슨 변덕을 부리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저런 외모의 음인이 취향이셨던 거냐고 한동안 말이 돌기도 했다. 내가 얻어맞아 멍들어 나온 뒤로는 다른 얘기가 돌긴 했지만.

“산적들의 잔당이 마을로 도망쳤을 수도 있으니 샅샅이 수색하여 색출하란 명령이 있었지. 본래 나도 마을로 내려가 형님과 함께 돌아다닐 예정이었어.”

“그렇습니까. 사실 산적들의 횡포가 심한 것은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황제께서 친정하셨다고 하니 사실은 심각했구나 생각했지요.”

“산적들이 아니야.”

“네?”

친왕이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 산에는 오래전부터 암살단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것들을 뿌리 뽑기 위해 나선 것이지.”

“암살단….”

아.

“그렇군요. 산적이 아니라 암살단을 없애기 위해 두 분께서 직접 가셨던 거군요.”

아버지를 죽인 게 황제였구나.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산적을 쓸어버렸다고 하는데 어째서 내가 몸담고 있던 화전촌이 쓸린 것일까. 단순히 토벌에 휩쓸렸다기엔 너무 조직적으로 짓밟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근처의 화전촌에 식구들을 두고 있었다지.”

내가 있던 마을이었다. 그래. 그곳에는 분명 살수를 가족으로 둔 이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었다. 화전촌이라고는 해도 밭을 일구지 않는 이들이 더 많은 기묘한 마을이었다. 밭을 일구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일수록 삶이 풍족했다. 겉보기에는 허름해도 안으로 들어가면 어지간한 부농 못지않은 살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 집은 식구 중 누군가가 사냥꾼이어서, 훌륭한 짐승을 잡았기 때문에 큰돈을 번 것이라 말하곤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는 화전촌에 아무도 없었다. 그 마을에서 사냥꾼이라는 건 살수를 뜻했다. 기억나지 않는 예전의 나처럼.

단단하고 거친 손이 내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따스하게 녹아있던 피부에 차가운 손이 파고들자 깜짝 놀란 몸이 파드득 떨렸다. 친왕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비린 체향이 코끝에 어른거렸다.

“그 화전촌에 있었던 거야?”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내 목을 슬쩍 움켜쥔 친왕이 엄지로 목덜미를 슬슬 쓰다듬었다. 마치 부러뜨리기 전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재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당장이라도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친왕의 손아귀는 느긋했지만 그것은 사냥감을 앞발로 내리누른 맹수의 느긋함과 다를 바 없었다.

“화전촌이 여러 곳이라 어느 곳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뭐 마을 이름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친왕이 실실 웃었다. 웃음에서 살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한 이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이상한 이들?”

“일하지 않는 자들이요. 일하지 않는데도 부유한 자들이 마을에 꽤 있었습니다.”

친왕의 눈동자가 슬쩍 내려와 내 손을 바라보았다.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여있는 내 손은 좋은 말로도 곱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발현한 뒤 황궁에 들어올 때까지 나는 계속 화전을 일궜다. 나도 부모도 사냥꾼이 아니었으므로 살기 위해선 밭을 일구는 수밖에 없었다.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아귀는 황궁에 들어온 뒤에도 부드러워지지 않아 뻣뻣하고 단단했다. 목을 움켜쥔 친왕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뭐 그렇다고 해두지.”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체했다. 친왕의 의심보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내가 살수였다는 사실을 황제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마을에 간 거면서 막상 발견한 잔당을 살려 옆에 두었다고?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황제가 내 과거를 알고 있다면 내게 행하는 폭력이나 다른 모든 행위들의 이유가 납득되었다. 황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내가 살수 출신이고 그가 사랑하는 형을 죽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럼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살려서 옆에 둔 이유는….

“왜 이렇게 비틀거려?”

목덜미 대신 어깨를 끌어안고 당기는 손에 맥없이 몸을 기댔다. 친왕은 자신이 내게 무엇을 던졌는지도 모르고 비틀거리는 나를 책망했다. 다정하게 어깨를 끌어안는 손은 방금 전 내 목을 움켜쥐고 부러뜨리려 했던 손이었다. 경계해야 한다. 황제가 그러지 않았는가. 친왕을 믿지 말라고.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 날 흔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날 안심시키고자 하는 양인의 체향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양인이 음인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체향에 울렁이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타인의 보호에 당혹스러움이 밀려들었다.

“이제 형님의 체향도 나지 않고. 형수라고 부르기에도 거리낌이 생기는데, 어쩔까.”

반쯤 끌어안겨 기대어 선 탓에 친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술 냄새는 났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날 죽일 듯이 굴던 것과는 달리 상냥함을 가장한 손길이 슬쩍 귓가를 쓸었다.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의 변덕스러움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친왕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성애의 의미가 담겨있는 진득한 손짓이었지만 거부하며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내가 거부하면 놓아주기는 할까? 그러고 보면 황제도 내 목을 어지간히 좋아했다. 그와 밤을 보내고 나면 다른 곳은 몰라도 목만큼은 얼룩덜룩 진한 멍이 들어 만질 수조차 없을 정도로 변했다.

“황제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사람이 하는 생각은 그 사람만 아는 법이다. 어떨 땐 본인도 모르는 법이고.”

그럴지도.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가 많으니.

“누구든 아이를 낳는 이가 황후가 될 거야.”

친왕이 뜬금없는 얘기를 하며 털외투를 슬쩍 들췄다. 따뜻하게 익은 몸을 차가운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삼 년이나 안겼는데 용종을 잉태하지 못했다는 건 영영 잉태하지 못한다는 얘기야. 그러니 포기해.”

“포기라니. 무엇을….”

“넌 접객소의 노예 신분을 영영 벗지 못할 거다. 적당히 비빈으로 올려 총애할 거라면 진즉 했겠지.”

친왕의 목소리에서 심술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황제와 관계할 때마다 피임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은 역시 모르는 걸까. 나는 굳이 내 비참한 현실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조용히 그를 외면했다.

언젠가 황제의 손에 죽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았다면 물론 거짓일 것이다. 꽃처럼 꾸민 후궁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초라한 내 모습을 한 번쯤 돌아보지 않은 적이 없으니. 하지만 그가 나를 증오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저 내가 그의 형을 닮았기 때문에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친왕의 빈정거리는 말들이 한쪽 귀로 들어와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든 뒤 빠져나갔다.

“그렇겠지요.”

자기 형을 죽인 살수를 임신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형을 닮은 얼굴 때문에 성욕을 풀기는 해도 좋은 마음이 들 리 없는 것이다.

“어차피 황제께선 절 싫어하시는걸요.”

위가 따끔따끔 아파 왔다. 내겐 황제의 처사에 화내거나 실망할 만한 자격조차 없었다. 나는 그의 형을 죽인 원수이니 얻어맞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형님께서 널 싫어한다고?”

“친왕께서도 절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응? 허어!”

친왕이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내 어깨 위에 얹은 팔을 끌어당겼다. 자연히 그에게 반쯤 안겨버려 숨이 막혔다. 그의 체향이 일렁거렸다. 심기가 잔뜩 꼬여버린 목소리엔 아까보다 더한 심술이 그득그득 묻어 있었다.

“지금 네가 걸치고 있는 외투는 본왕이 꽤 아끼는 물건이다.”

“어차피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이라 빼앗길 텐데요.”

“감히 누가 본왕의 물건을 뺏어간단 말이냐?”

황제는 무엇이든 가져갈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대꾸하는 대신 친왕의 얼굴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형은 그의 형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죽인 것을 알면 친왕 또한 황제와 다를 것 없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어쩌면 황제가 원한 게 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분지 일의 확률로 친왕이 진심이라 해도 내가 과거에 한 짓을 알게 되면 황제와 다름없이 대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잠깐 정신이 나갔습니다.”

“형님에게 버려져서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속상해?”

친왕이 빈정거렸다. 음울한 생각들이 악귀처럼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황제가 결국은 내 몸에 질려서 버려지고 말았다는 생각. 하지만 그조차 아니었던 거다. 그는 처음부터 나라는 인간에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뭇 다정하게 다가와 있는 친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제와 닮아있는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거칠었지만 날 보호하듯 둘러싼 체향은 부드럽고 따뜻해서 의지가 됐다. 황제의 비빈을 유혹해서 가지고 놀다 버리는 것이 취미라던 친왕의 악명은 자자했지만 알고서도 당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미 몇 명이나 되는 황제의 비빈들이 친왕의 수작에 넘어가 신세를 망쳤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들도 친왕의 이런 태도에 넘어가고 말았는데 나처럼 아무것도 없는 노예가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나야 더 망칠 신세도 없기는 하지만 이런 호의에 길들면 버려졌을 때 배로 더 힘들 것이다.

“친왕께서는 참 친절하십니다.”

“네놈에게 친절한 적은 없는데? 미인에게야 당연히 친절하다만.”

경빈에게 하던 것을 보면 미인에게도 친절한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친왕이 빈 술잔을 내밀기에 조심스레 잔을 채웠다. 향긋한 술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따스한 술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마치 사람의 입김처럼 하얬다. 술에 취한 사람이 따스한 술을 들고 숨을 내쉬면 어느 쪽이 연기고 어느 쪽이 사람의 입김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후궁의 음인과 여성들은 당연히 황제의 것인데 어찌하여 자꾸 손을 내미시는 것인지요?”

“너는 형님의 후궁이 아니잖아?”

“저야 그렇습니다만. 궁금해서요.”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니 의외인데.”

친왕은 내가 따라준 술을 단번에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황족의 가장 큰 의무는 자손을 보는 것이니까, 조금이라도 끌리는 자를 유혹하여 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제의 후궁인데도요?”

“나는 황족이니 상관이 없지. 내 피를 이었다면 황족일 테니.”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농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친왕이 피식 웃었다.

“방가의 씨앗이기만 하면 조카든 아들이든 상관없다는 거다. 황위에 오른 자가 방가의 피를 지니고 있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고 땅에 윤기가 흐르면 만사 다 괜찮다는 얘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황제가 자식을 보면 하늘에 제를 올린다. 그때 자식의 머리카락을 잘라 제단에 던지는데 자색의 연기가 올라오면 황족이 맞으니 작위를 내리고, 검은 연기가 올라오면 비빈이 외도를 한 것이니 구족을 멸한다. 그게 법도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야 대놓고들 얘기하진 않지. 황제가 자식을 보기 전에는 친왕들이 황궁에서 거주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태자로 세워도 그게 정말 아들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친왕이 혀를 차며 술을 다시 들이켰다.

“불행히도 그런 짓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씨가 귀해. 자식을 많이 보는 때도 있지만 도무지 후손이 번창하지를 않아. 선황께선 형제자매가 많은 편이었지만 대부분이 단명하거나 자식이 없어.”

“친왕께서도 자식이 없으신가요?”

“없지. 왜. 하나 낳아주려고?”

“저같이 천한 몸에서 후손을 보는 건 누가 될 것입니다.”

“형님께선 지금 이 불륜을 아주 장려 중이신 것 같은데.”

친왕이 내 귓가를 슬쩍 핥았다. 귓불을 슬쩍 씹고 떨어지는 친왕의 행위에 불에 덴 듯 열이 확 올랐다. 뒤로 물러서려는 내 몸을 친왕이 억센 힘으로 틀어잡았다. 사나운 체향이 내 몸을 완전히 덮어 감쌌다.

무서움에 몸이 굳었다. 이 자리에서 친왕에게 범해져도 감히 거부해선 안 된다는 게 새삼 현실로 와 닿았다. 이 자리에서 옷이 벗겨지고 짐승처럼 해체되어도 누구 한 사람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까지 그런 꼴을 당하지 않은 게 신기한 거였다.

이전에도 친왕이 나를 희롱하긴 했지만 장난기가 어려 있었던 반면 지금 그의 태도는 아주 진지했다. 낯선 손길이 두려웠지만 동시에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싶은 자포자기가 눈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 궁에 들어온 뒤부터 내겐 결정권이 없었다.

“이런. 자리를 비켜줄 걸 그랬나.”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 * *

황제의 뒤로 잔뜩 도열한 내관들이 허리를 1조아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니 당황스러웠다. 양인의 체향에 감싸여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 줄이야. 당황하며 무릎 꿇으려는 내 몸을 친왕이 잡아챘다.

“엎드리지 마.”

“저, 전하?”

왕이 황제에게 무릎 꿇으려는 노예를 막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친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젖은 바닥에 끌리면 옷 상한다.”

기가 차서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친왕이 덮어준 외투는 이미 눈에 젖어 축축한데 바닥에 끌리면 안 된다니. 핑계가 괴악했다.

“됐다. 기다리는 동안 네가 친왕을 즐겁게 만들어 준 모양이구나.”

놀랍게도 황제가 웃으며 넘어갔다. 이러한 무례를 보아 넘기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언짢은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어서 몸을 반쯤 숙인 채 굳어 있으려니 친왕이 힘을 주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후끈한 열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외투를 내게 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친왕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인지 따뜻한 몸을 하고 있었다.

“요 며칠 갑자기 일이 많아지지 뭐냐. 땅이 얼어붙었는데 공사를 하느니 마니.”

“농번기엔 인부를 충당하기 힘드니까요.”

“그렇긴 하지. 치수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어쨌건 바람맞힌 건 본의가 아니었다.”

“별말씀을.”

친왕이 내 머리칼을 슬쩍 쓸어내렸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더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그가 의도한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친왕과 가까워지는 게 싫었다면 부러 불러서 그의 상대를 하도록 놔두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는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친왕의 외투 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황제가 무서웠지만 매달릴 만한 곳도 의지할 만한 곳도 없어서, 믿을 만한 것이라곤 친왕의 알량한 호의 정도였다. 하지만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모피와 황제로부터의 보호는 비교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기대조차 해선 안 되는 일임에도 붙들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모피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리를 좀 옮길까? 생각보다 바람이 차구나.”

친왕이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은 춥지 않지만 약해빠진 나를 배려해준다는 투였다. 이대로 자리가 파했으면 싶지만 황제가 뭔가를 의도하고 있는 이상 물러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움직이는 친왕의 뒤를 따라 걸으려는데 잡혀있는 팔이 묵직하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문을 담아 친왕을 쳐다보자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황제의 앞인지라 감히 고개를 똑바로 들고 바라보는 이는 없었으나 날 쳐다보는 궁인들의 눈빛들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왕이 걸치던 모피를 몸에 걸치고 그의 비라도 되는 양 반쯤 안겨있자니 내가 노예가 아니라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마음이 울렁였다. 친왕이 내게 보이는 호의나 보호하고자 하는 태도 등이 진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날 가지고 놀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내게 애정을 갖고 대하는 거라면 얼마나 든든할까. 하지만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의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터였다.

황제의 별궁으로 향하는 길은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귀한 이가 오가는 길이기에 미끄럽지 않도록 흙을 뿌려두었으나 끊임없이 내리는 폭설엔 속수무책이었다. 신발이 젖어 들어 발이 시렸지만 두꺼운 외투 덕분에 그리 크게 춥지 않았다. 사실은 날이 풀려 따스해진 걸까 싶었으나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매섭기만 했다.

준비가 미리 되어있는 것인지 황제의 별궁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먹음직스런 음식과 술이 상에 놓여 있었다. 곧잘 왔던 곳이기에 익숙한 공간이었으나 언제나 둘만 있던 장소에 친왕이 더해지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석에 황제가 앉자 친왕이 그 옆으로 앉았다. 누구 옆에 앉아서 시중을 들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자니 친왕이 자신과 황제 사이의 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이전에 호부시랑과의 술자리에서도 시중드는 이는 나 하나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일로 희빈에게 곤욕을 치렀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까 불안해졌다.

술상이 놓인 곳은 침상 높이로 만들어진 넓은 평상 위였다. 반쯤 누울 수도 있게 만들어져 편안한 자리였으나 황제와 친왕 사이에 앉아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바닥에 가시라도 깔린 듯했다.

술상이라기보다는 잔칫상에 가까운 커다란 상 위로 안주가 가득 올랐다. 몇 종류나 되는 술이 여러 술잔과 함께 놓이자 친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단단히 준비하신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새벽까지 마셔보자고. 형제라곤 우리 둘뿐인데 그간 너무 내외하지 않았는가.”

친왕은 웃음을 터뜨리며 황제에게 직접 술을 따랐다. 황제 또한 친왕에게 직접 술을 따라 답례하자 나는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술자리가 아니라 형제가 오붓이 담소를 나누는 자리였다. 나처럼 시중들 사람은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황제와 친왕은 첫 잔을 제외하곤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르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친한 사이는 아닌 것일까?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태도엔 허물이 없어 보였다. 나는 부지런히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지만 새벽까지 마시겠다는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꽤나 고된 일이 될 듯했다.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신분도 아니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술만 따르고 있자니 갑자기 친왕이 심술을 부렸다.

“그렇게 입 다물고 술만 따를 건가? 여기 음인이라곤 하나뿐인데 칙칙하기 그지없군.”

“죄송합니다. 노래라도 부를까요, 전하?”

“…할 수 있는 걸 하겠다고 해라.”

친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술잔을 털어 넣었다. 빈 잔에 냉큼 술을 채우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슬쩍 흔들었다. 술자리가 깊어지며 수많은 얘기가 오갔지만 이해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복잡한 정무와 인사에 대한 이야기, 결론을 낼 수 없는 학문과 사상에 대한 얘기들이 상 위에 놓인 반찬처럼 계속해서 바뀌었다.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친왕과 황제의 기색을 살폈다. 친왕은 웃고 있었으나 그 의중을 알 수 없고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어딘지 차갑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술이 세 병가량 비워지자 황제가 내관을 불러 새 술을 가져오게 했다.

“산군자라는 술이다.”

“향이 꽤 특이하군요.”

“신년인사랍시고 올라온 명주인데 썩 괜찮은 듯하더군. 어떠냐?”

“향이 아주 좋습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술기운이 오르는 것이 꽤 독한 듯합니다.”

“그래. 독하지. 아주 독해.”

황제가 설핏 차가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너도 한 잔 마셔라.”

일순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황제가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하얗고 정교한 잔에 담긴 술이 짙은 꽃향기를 품고 있었다.

“따르는 술이 무슨 맛인지 정도는 맛을 봐야 할 게 아니냐? 자.”

황제가 내미는 잔을 거절할 수 없어 두 손으로 받자 그가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지금껏 그 많은 밤을 함께 하면서도 그는 내게 무언가를 권한 적이 없었다. 친왕이 함께 있기 때문일까. 황제의 태도가 평소와는 매우 달랐다. 나는 곤혹스런 심정으로 황제가 따라준 술을 쳐다보았다. 술잔에 담긴 술은 일견 평범해 보였으나 흔들리는 표면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에 오른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이어진 모든 일들이 지금 주어진 한 잔의 술을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힐끔 눈을 들어 황제의 얼굴을 살펴 보았지만 그는 새까만 눈을 차게 빛낼 뿐이었다.

“삼가 받들겠나이다.”

이 자리에서 나와 친왕을 함께 독살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황제가 날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지금 이 술잔을 피해도 어차피 죽게 될 것이다. 어찌 돼도 좋다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잔을 들이키자 독한 술기운에 목구멍이 확 달아올랐다.

“쿨럭! 크흡!”

“음인에게는 너무 독한 술이었나?”

“괜찮, 콜록. 괜찮습니다.”

힐끔 쳐다본 친왕은 술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그 향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술을 들이켜는 친왕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콜록거리는 내 모습을 보더니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술 한 잔 제대로 마시나? 덩칫값도 못 하기는.”

친왕의 비아냥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술이 독했다. 목구멍을 태울 듯 뜨거운 기운이 배 속까지 번졌다. 시야가 어지러워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술이 아니라 뭔가 수상한 약이라도 들이켠 것처럼 온몸이 들끓었다.

“죄, 죄송합니다.”

“술도 마셔야 느는 법이지. 자.”

황제가 손수 빈 잔을 채워주었다. 겨우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황제가 내민 두 번째 잔까지 들이켰다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폐, 폐하. 소인 만취하여 실수라도 저지를까 걱정되오니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무엄하다. 감히 짐이 내리는 술을 거부할 것이냐?”

조금도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황제가 꾸짖었다. 소름이 돋았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친왕도 마찬가지인지 움직임을 멈추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종일 머리를 어지럽혔던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는 나를 싫어하고, 혐오하고, 그리고 이젠 질리기까지 했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제가 따라준 술을 입에 머금었다. 어차피 내가 무릎 꿇고 애원한다 해도 그가 술을 먹이고자 한다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헛된 발버둥을 치는 대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는 나를 싫어하니까 저항해봤자 더 심하게 망가질 뿐이었다.

“음인을 취하게 만든다는 건 그 속셈이 너무 뻔한데.”

어질어질한 머리로 친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묘하게 거친 손놀림으로 내 귀를 잡았다 놓았다 하며 가지고 놀았다. 쳐내려고 손을 올렸지만 애꿎은 몸만 비틀거리다 엎어지고 말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쓰러진 곳이 황제의 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황제는 기분 나쁘다는 듯 날 후려치는 대신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황제가 이렇게 상냥함을 가장할 때면 언제나 심한 폭력이 이어지곤 했으므로 몸이 굳었다.

“폐하. 요, 용서를….”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안쪽을 헤집었다. 다정한 듯 입 맞추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 방 안에는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황해서 몸을 굳히고 있는 사이 옷고름이 풀어졌다.

“이 아이가 가지고 싶어?”

황제의 시선은 내 뒤에 앉은 친왕을 향해 있었다.

친왕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황제는 낮고 느린 웃음을 흘리며 내 목덜미를 슬쩍 밀었다.

“가서 좆이라도 빨아주렴.”

“……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멍하니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개에 휩싸이듯 파묻혔던 술기운이 혼몽하게 흩어졌다. 농담을 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내 등을 밀었다.

“어서. 내 아우가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

“…폐하?”

“잘 모시라고 몇 번이나 자릴 마련했는데 그렇게나 내외하다니. 기특하긴 하다만.”

황제가 내 어깨를 친왕 쪽으로 잡아 돌렸다. 슬쩍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밀었지만 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 어서.”

그만두라고 친왕이 황제를 말려주길 원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친왕의 눈이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었다. 먹먹한 기분에 머리가 멍해졌다. 술기운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아닌가? 아직도 취해있는 것인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던 친왕의 얼굴이 조금 붉다고 생각될 찰나, 커다랗고 거친 손에 뒷목이 붙잡혔다.

“저, 전하. 전하, 제발.”

“이렇게 직접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주 주는 건 아니고.”

“아닙니까?”

“일단 맛만 보도록.”

친왕의 체향이 흉폭하게 일어났다. 진득하니 달라붙는 극양인의 체향에 머리가 다시금 핑 돌았다. 친왕이 반쯤 부풀어있는 바지춤에 내 얼굴을 내리눌렀다. 저항해보았지만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에 고개가 그대로 처박혔다.

작정하고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양인의 향에 몸이 멋대로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뜨끈해지며 간질거리기 시작하는 것은 생리적인 본능 때문일 것이다. 어서 꺼내어 핥으라는 듯 뒷머리를 툭툭 치는 손길에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무장에 내리는 하얀 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악몽이 아닐까? 친왕에게 안길 수도 있다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황제의 앞에서?

“흐으.”

황제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자신의 형을 죽인 암살단과 한솥밥을 먹은 죽여 마땅한 암살자일 뿐, 그 어떤 애착이나 애증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식으로 친왕에게 줄 수는 없다.

‘아니야.’

애초에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의 첩 따위가 아니니 소첩이란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그토록 많은 밤을 같이 보냈는데도 접객소에 방치되었다. 노예라는 신분을 벗겨주지도 않았다. 황제의 체향을 두르고는 있어도 누군가가 정말로 다리를 벌리라 명령하면 거부할 수 없는 신분으로 계속 놔두었다.

황제는 내가 착각할 만한 일 따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멋대로 착각하며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대도 얻어맞지 않았는데 눈물이 계속 흘렀다.

사랑인 줄 알았다.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하기는 했지만 몸을 섞지 않는 날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몸 안에 파정할 때면 사랑을 나누었다 착각하고 만 것이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친왕에게 주어지나? 아니면 적당히 가지고 놀았으니 되었다며 처형이라도 되는 것일까?

토할 것 같았다. 내 처지가 하도 어이없어서 구토가 치밀었다. 애초에 착각 따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노예일 뿐이라고 되뇌면서도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첫날밤에 황제가 결착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날 향한 분노를 거두고 아이를 갖게 해 줄 거라고 믿었다. 내게 결착한 일 때문에 황제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몸이 좀 맞는 상대와 성교를 하다가 성기가 좀 부풀었을 뿐이었다. 영혼이 맺어졌다고 하는 각인과는 엄연히 다른데도 황제의 유일한 뭐라도 되는 양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망가지면 안 된다고?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을까? 그는 내가 망가지길 원하는데…….

「결착한 상대가 아니면 아이가 생기지 않아. 쉽게 결착하지도 않지. 그 때문인지 황제의 총비는 언제나 한 명뿐이었지. 즐기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안을 수 있지만 자식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성욕들도 떨어지는 것인지.」

누가 한 말이었더라? 머릿속에서 말하는 목소리는 날 닮아있었다.

「얼굴이 닮았다 해도 목소리는 다르니 연습을 해야겠네.」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더라? 검소하지만 잘 꾸며진 방 안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느껴졌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피 묻은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 같았고, 형체조차 지니지 못한 허깨비 같았다.

결착한 이가 아니면 아이를 낳지 못하니, 그 상대는 황제의 유일한 사람이 되기 마련이라고. 그런 말을 그가 내게 했기 때문에 나는 내내 착각하고 만 것이다. 그가 한 말을 제대로 다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멋대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이건 유령의 복수일까? 내가 목매달아 죽인 율목친왕의 차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친왕의 허벅지를 밀어냈다. 버둥거리며 온 힘을 다해 거부해 보았지만 친왕은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 별 힘도 쓰지 않고 날 제압했다. 머리 위에서 친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보는 곳에서 이러는 건 사실 좋아하지 않지만. 맛만 보라시니.”

친왕이 달달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어르듯이 말했다.

“입 벌려.”

“싫…! 흐윽!”

그냥 죽고 싶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달리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벅지를 밀어내던 손이 황제에게 잡혀 뒤로 꺾였다.

“으흑!”

“미안하게 됐군. 성노치고는 버릇을 잘못 들여서.”

발버둥 치는 나를 보다 못한 황제가 예의 그 술을 머금고 입을 맞춰왔다. 목구멍을 타고 계속해서 넘어가는 술에서는 이상한 맛이 났다.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술 자체가 이상했다.

“아. 아흐….”

“목소리는 잘 들리지? 입 벌려.”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벌렸다. 입 안으로 뜨거운 뭔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짙은 한숨 소리와 함께 목구멍까지 성기가 들어찼다. 평소보다 더 굵은 성기가 목구멍을 찌르고 입천장을 쿡쿡 문대 숨이 막혔다. 극양인의 체향 때문에 익숙지 않은 성감이 치솟아 뒷골이 아뜩해졌다. 뱉어내고 싶어서 혀로 성기를 밀어냈지만 자극만 된다는 듯 커다래진 것이 입 안을 헤집었다.

배 속이 홧홧하니 타올랐다. 비릿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우자 건드리지도 않은 아랫도리에서 물이 질질 흘렀다. 불편하고 수치스러워서 바르작댔지만 단단히 잡힌 두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의 끝까지 몰렸을 때가 아니면 흘러나오지 않는 체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흘러나왔다. 매캐하고 독하다며 욕만 먹던 향이니 흥이 식었다며 놓아주지 않을까. 잠깐 기대했지만 입 안의 성기가 더욱 커지는 것에 절망하고 말았다.

“씨발. 미치겠네.”

거칠게 터져 나온 욕설에 움찔 몸이 굳었다. 그렇게 지독한 향인가? 그렇다면 그만 놔줬으면 좋겠는데. 뒤통수를 잡은 손이 머리채를 단단하게 움켜쥐고는 잡아당겼다. 미끌거리고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밀어젖히며 파고들었다. 구역질이 치솟으며 목울대가 꿀렁였지만 들어온 것을 저지하기는커녕 상대의 성감을 자극하기만 했다.

“크흡! 컥!”

“제길. 너무 흥분해서. 괜찮아?”

눈물이며 콧물이 질질 흘렀다. 엉망이 된 얼굴로 콜록대자 친왕이 사뭇 걱정스런 태도로 뺨을 쓰다듬었다. 병 주고 약 주는 일이었지만 지금껏 약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난 친왕의 태도에 멍해지고 말았다.

“저, 전하. 놔, 놔주세요, 놔주십시오, 전하. 제발.”

“…음. 그건 안 되겠는데.”

친왕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매만졌다.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음험하고 질척했다.

“이렇게 꼴린 게 너무 오랜만이라.”

굶주린 맹수 앞에 목을 드러낸 기분이었다. 입가를 쓰다듬던 손이 그대로 입 안까지 들어와 혀를 꾹꾹 눌렀다.

* * *

확 물어버리고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신경이 녹아버린 것마냥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달아오른 몸이 괴로웠다. 희락기가 지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전조도 없이 이상해진 거지?

입 안을 어루만지던 친왕이 손가락을 넣은 채로 입술을 슬쩍 핥았다. 인두로 지지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에 열이 올랐다. 황제가 준 술에 미약 같은 게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질 나쁜 곳에서는 종종 그런 약을 쓰기도 했으나, 황궁에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약물을 이용해 황제나 비빈의 성욕을 의도적으로 격발하는 것은 천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을 한 친왕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존심이 강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서 성교를 할 정도로 난잡한 자였나?

“딴생각을 해?”

친왕이 비틀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어당기는 손길이 단단했다. 턱을 움켜잡아 억지로 입을 벌리게 만든 뒤 두꺼운 성기를 밀어 넣었다. 짙은 비린내에 역겨워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달아서 당황스러웠다. 맛있는 것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침이 질질 흘렀다. 삼켜야 된다고 생각해서 목울대를 울리자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착하네.”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부드러운 애무는 드문 것이어서 자꾸 몸이 움츠러들었다. 따스한 물에 반쯤 잠겨있는 것처럼 안온한 기분이 들면서 두 귀가 먹먹해졌다.

“크흡! 하아. 학!”

“숨 쉬어야지. 어서.”

“하악. 학, 하아….”

숨이 막히는 것도 모르고 친왕의 아랫도리를 빨고 있었다니. 너무나 이상했다.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내 뺨과 입술을 친왕이 계속해서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음란하네. 접객소에 있어서 그런가.”

“다른 이에게 돌린 적은 없어.”

“그럼 내가 처음? 이거 참. 영광이군요, 형님?”

비죽이는 대화들이 나를 제외한 채 오갔다.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성기를 바라보며 흐려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내 앞에 있는 이게 대체 누구 것이지? 손을 뻗어 우람한 남근을 만지작거리자 곤란한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귀엽네. 약을 쓰는 건 취향이 아닌데.”

“약이라도 쓰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소중한 동생의 남근이 물어 뜯겨 끊기기라도 하면 안 되지.”

“무서운 소리를.”

손안에 담겨있던 남근이 움찔거리며 튕겨 나와 얼굴을 쳤다. 아. 약을 썼구나. 황제가 내게 뭘 먹인 거였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시야가 흔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구나. 내가 형편없이 음란하거나 되먹지 못한 탓이 아니라….

“자. 이제 다시 삼켜야지.”

머리를 기분 좋게 쓰다듬던 손이 뒷덜미를 꾹 눌렀다.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힘에 덜덜 떨며 입을 벌렸다.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다시 쓰다듬는 손길에 안도했다. 누군가가 요구할 때 거절할 수 없도록 훈련되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말았다. 싫다고 말해봤자 얻어맞는 시간이 빨라지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쫓겨나는 게 빨라질 뿐이니까.

침전의 천장이 익숙했다. 바닥도 익숙했다.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것도 익숙한 일이니 괜찮은 거라고 계속 되뇌었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말을 아주 잘 듣고 목소리는 내지 않게 되었다. 겨우 이 년. 햇수로는 삼 년이 되었을 뿐인데 영혼이 마모되었다는 것이 이럴 때 실감 났다. 노예로 몸을 팔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는 했지만 각오와 실체는 달랐다.

나를 사서 길들인 황제가 하의를 들어 올렸다. 벗기기 쉬운 옷이 아닌데도 맨살이 드러나는 데는 일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리 벌려. 역시…. 젖었네.”

“흐읏!”

긴 손가락이 허벅지를 쓰다듬고 올라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질척거리며 고여 있던 물이 자극을 받아 터지듯 흘러내렸다. 음문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익숙하게 속살을 헤집으며 파고들었다. 대번에 느끼는 곳을 찾아 찔러대는 손끝에 몸을 바르르 떨자 뒤통수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쉬지 말고. 계속 빨아.”

“아. 아웁! 흡!”

상하의가 다 벗겨져 허리께에 걸렸다. 접객소에 속한 노예를 벗겨서 범하는 건 마치 그것 같았다. 지나가다가 군것질을 사 먹는 것. 황제가 무심한 손짓으로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몸 안을 헤집는 손가락이 너무 차가워서 몸이 절로 굽어들었다.

“홍수라도 난 거 같네. 이렇게 젖은 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황제가 중얼거렸다. 어이없다는 듯 울분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얼굴이 꽉 잡혀있어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몇 번 귀찮다는 듯 내벽을 질척이던 황제의 손가락이 곧장 느끼는 지점을 만지작거렸다.

“아학!”

입에 담고 있던 성기를 뱉어내고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두 남자를 밀치고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무릎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친왕이 거친 손길로 턱을 잡아 벌렸다. 머리채를 움켜쥐는 손길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입천장을 부러 긁으며 들어오는 굵은 성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밑을 휘젓는 차가운 손가락이 느끼는 지점을 문지를 때마다 질척거리며 애액이 쏟아졌다. 저항 따윈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매끄럽게 내벽을 오가는 손가락이 빠르게 그 개수를 더했다.

입에 문 성기를 뱉어내고 숨을 들이켤 때마다 친왕의 손이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지만 곧 다시 입을 벌리고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침이 흐르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비문에서도 애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고장 나면…고장 나면 안 되는데. 안 됐던가?’

안쪽을 살피듯이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두툼하고 뜨거운 게 입구를 쿡쿡 찔렀다. 황제는 애액으로 흠뻑 젖은 내 아랫도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으며 단번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애액 가득한 내벽이 황제의 성기를 제대로 잡아내지도 못하고 깊숙이 받아들였다.

“아. 아아! …앗!”

“…제기랄!”

괴로워. 버티기 힘들어. 이게 뭐람.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발버둥 치는 팔을 황제에게 꽉 잡히고 머리며 목은 친왕에게 단단히 잡혔다. 다리를 버둥댔지만 몸속에 든 성기만 부피를 더했다. 앞뒤로 쾌감이 몰려와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헐떡거리며 울음을 쏟아내는데 어서 핥으라는 듯 커다란 남근이 입술을 찔러 서러움이 복받쳤다. 목구멍이 헐 것만 같아서 혀만 내밀었지만 친왕은 봐줄 생각이 없는 듯 목구멍까지 남근을 꾹 밀어 넣었다. 귀두가 목젖을 쿡쿡 찔러 토기가 치밀었다.

“뒤도 제대로 조여야지. 왜 이렇게 미끄러워? 그새 몸을 굴려 먹기라도 한 건가?”

“크흑! 큿!”

뒤로 잡힌 팔을 잡아당기며 황제의 성기가 내벽을 긁어댔다. 느끼는 곳만을 콱콱 찔러대는 움직임에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황제가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앞으로 몸이 쏠려 친왕의 성기가 목구멍에 콱콱 박혔다. 애액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아무리 힘을 주어 황제의 성기를 조여도 제대로 마찰되지 않고 빠져나갔다. 굵고 긴 모양인데도 쉽사리 빠져나가는 성기의 움직임에 제대로 된 자극을 받지 못한 내벽이 안달을 내며 벌름거렸다. 배 속의 간지러움이 점점 커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흔들자 어디선가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친왕인가? 황제? 누구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아. 쌌네.”

사정감이 몰려오며 아랫배가 덜덜 떨렸다. 내가 흘려대는 게 정액인지 오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젖어 드는 게 불쾌하기만 했다. 아니 불쾌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벌벌 떨며 몸을 웅크리자 누군가의 손이 배를 꾹꾹 눌렀다.

“앗! 아앗! 흐으.”

“제대로…. 큿. 조이라니깐.”

“아흣! 앗! 아!”

아무리 힘을 줘도 제대로 조여지지 않았으므로 또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면 쓸모없다며 당장이라도 주먹이 휘둘러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화를 누그러뜨리고 만족시켜야 했다. 황제가 날 사랑한다는 착각조차 벗겨진 지금 뒤쪽에서 움직이는 차가운 손길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턱에까지 찬 숨을 토하듯 내뱉으며 허리를 움직이자 친왕이 거칠게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숨 쉴 때마다 간지러워.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아. 형님에게 배운 건가? 읏. 입 더 벌려봐.”

허리를 흔들며 잠깐 뱉어냈던 성기가 다시 입을 막았다. 처음보다 확연하게 커다래진 남근이 기형적으로 입 안을 긁었다. 귀두보다 더 굵게 부풀어 오른 기둥에 핏줄이 바짝바짝 서 있었다. 버거웠다. 입 안이 꽉 막혀 신음도 비명도 제대로 세어나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달래야겠다는 생각으로 혀를 내어 핥았지만 침만 주륵 흘러내릴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친왕이 욕 같은 것을 주워섬기며 허리 짓을 빨리했다. 서러워서 눈물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가빠지는 숨 때문에 성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사타구니에 얼굴이 계속 처박혔다.

“읍! 으웁! 크흐…!”

황제의 성기가 느끼는 곳만을 계속 찔러댔다. 한 번 사정한 탓에 예민해진 몸이 계속된 자극으로 계속 덜덜거렸다. 그만해달라고 애원하며 빌었지만 두 남자 모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느끼는 곳이 꽤 안쪽에 있어서 손가락은 잘 안 닿는단 말이지.”

“으윽! 앗! 아앗!”

황제의 허리짓이 더 거칠어져 질척거리는 소리가 찢어질 듯 계속 울렸다. 둔부 쪽으로 퍽퍽 치닫는 살이 아팠다. 뒤로 잡힌 팔도 통증을 호소하고 입가는 이미 찢어진 듯 따갑고 쓰라렸다. 느끼는 곳만 집요하게 문지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도망치면 친왕이 목구멍 깊이 남근을 박아 넣었다. 숨 쉬는 것이 힘들어 버티지 못하고 뱉어내면 황제가 팔을 잡고 강하게 잡아 치댔다. 울음 섞인 비명이 흐느낌처럼 힘없이 흘러나왔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꿈같은 게 아니므로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형제에게 붙잡혀 아래위로 성기를 머금은 탓에 성적으로 소모되는 느낌이 지독했다. 황제에게만 시달릴 때엔 그저 좀 거친 정사를 나눈다고 생각하며 불쾌함과 고통을 치울 수 있었지만 이렇게 형제 사이에 끼여서 흔들리고 있자니 좋게 포장할 수가 없었다.

친왕은 입 안에 박아대는 것이 영 성에 안 찬다는 듯 자꾸 목구멍까지 성기를 밀어 넣으려 했다. 비린내 나는 친왕의 체향이 작정한 듯 목구멍 너머로 계속해서 흘러들었다. 극양인의 체향이 배 속에 고일 때마다 안 그래도 예민한 몸이 더욱 홧홧하니 달아올랐다.

“아. 아!”

목구멍이 성기가 된 것 같았다. 꿀렁이는 점막과 혀가 친왕의 양물을 머금고 빨아대며 꿈틀거렸다. 그럴 때마다 잘했다는 듯 친왕이 뺨이며 턱, 목덜미와 머리칼 등을 쓰다듬었다. 손만 부드러운 개새끼였다.

“집중이 영 안 되나? 한 명 더 불러주랴?”

황제가 이죽거리며 협박을 했다. 뒤로 꺾어 잡은 팔목에 힘이 확 들어갔다.

황제도 제대로 조이지 못하는 것을 탓하며 느끼는 곳을 문지르고 질척거리는 내벽을 빠르게 왕복했다. 익숙한 악기를 조율하듯이 내벽을 비벼대는 황제의 움직임에 절정을 느낀 몸이 확 곱아들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바래고 붙잡힌 팔이 비틀릴 정도로 경련을 일으켰다. 사람들 모두가 매캐하다 말하는 체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크읏!”

먼저 사정한 건 친왕이었다. 입 안에 박혀있는 성기가 기이할 정도로 부풀며 기도를 밀어냈다. 숨이 턱 막혀 버둥거리는 어깨와 얼굴을 친왕이 단단하게 잡아 눌렀다. 안 그래도 숨이 모자란 상태라 눈앞이 금세 새까매졌다. 언제나 황제에게 조였던 목이 이번에는 안쪽에서부터 조여드는 듯한 느낌에 경련을 일으켰다.

“가만히. 움직이지 마. 다친다.”

“컥! 커흡! 크업!”

목구멍으로 바로 쏘아진 정액이 삼킬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잔뜩 배 속에 퍼부어졌다. 비릿하고 뜨끈한 것을 남기고 조금 줄어든 성기가 목구멍에 대고 몇 번을 왕복한 뒤에야 나갔다. 토하듯이 기침을 내뱉으며 간신이 숨을 고르는데 황제 또한 움직임을 빨리하며 성기를 부풀렸다.

“아악! 으, 학! 흐으으.”

“안쪽이 너무 미끄러워서 박는 것 같지도 않군.”

“아, 아파…!”

“엄살 부리지 마.”

황제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퍽퍽 허리를 치댔다. 거친 행위에 몸이 앞으로 죽죽 밀렸다. 친왕의 아랫도리에 얼굴이 다시 처박히자 어느새 다시 기립한 남근이 뺨을 툭툭 쳤다. 잔뜩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물건을 다시 빨아야 한다면 목구멍이 죄 헐어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내 목이 헐어버리든 피를 토하든 이자들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공포와 고통으로 턱이 덜덜 떨렸다. 이런 난교를 벌이기로 작정하고 자리를 마련한 이상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양인 한 명을 감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두 명이라니.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고통을 삭이며 눈물을 흘리는데 문득 따스한 손이 뺨을 쓰다듬었다.

“힘들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건가? 목은 아프고 달아오른 몸은 괴로웠다. 뒤로 결박당한 팔도 손목도 단단하게 굳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강제로 끌어올려진 성감 때문에 쾌감은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고 수치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친왕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 불온한 기색이 스몄는지 그가 피식 웃었다. 같잖다는 듯, 하지만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흐읏. 흣!”

친왕을 바라본 것을 책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황제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배 속 가득한 부피감에 구토가 치밀었다. 느끼는 곳만 집요하게 찔러대는 성기 때문에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이 또다시 절정을 맞이했다. 허벅지며 아랫배의 근육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순간, 친왕에게서 살기가 솟아났다.

갑자기 왜…? 아.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런가? 가지고 놀 만큼 놀았으니 슬슬 죽여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서? 극양인의 살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겁을 먹고 딱딱하게 굳은 몸을 황제가 억지로 파고들며 결착을 시작했다. 애액으로 미끌거리던 내부가 한계까지 벌어지고 뜨끈한 정액이 배 속에 퍼부어졌다. 끊어질 듯하면 다시금 쏟아내는 씨물의 양이 굉장했다. 내장을 가득 채울 것처럼 이어진 사정은 황제의 결착 때문에 흘러나가지 못하고 안쪽을 맴돌았다.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며 식은땀이 솟았다.

결착을 하게 되면 임신할 확률이 높으므로 보통은 불안해하는 음인을 양인이 위로해주고 책임지겠다며 안심시키곤 했다. 황제는 시간을 들여 안심시키는 대신 내게 피임약을 내밀었다. 노리개를 대하는 평범한 태도라 할 수 있었다.

양인의 품에서 안심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대신 고통과 자괴감에 몸을 떠는 건 흔한 일이었다. 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르는 사이 결착이 끝났다. 그 시간 내내 친왕은 저릿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감히 황제에게 향하는 살기는 아닐 테니 그 대상은 나일 것이다. 황제를 만나며 무기를 가져오진 않았겠지만, 그가 마음먹는다면 한 손으로 내 목을 분지를 수 있을 것이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지쳐 눈을 감았다. 몸도 마음도 과도하게 소모되어 온몸이 아파 왔다.

“기분 나빠?”

황제의 성기가 내벽을 주르륵 문지르며 길게 빠져나갔다. 내내 잡혀있던 팔이 놓이자 상체가 힘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쓰레기처럼 버려졌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잡혀있던 팔은 굳어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현성아. 기분이 나쁘냐?”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왜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군요.”

“현성아.”

“네. 형님.”

“살기가 짙다.”

황제의 느른하고 어두운 목소리에 친왕이 거친 숨을 고르며 살기를 진정시켰다. 내가 쓰러져 있는 바닥에선 그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터져 나올 것 같던 울음이 멈추고 나니 간헐적인 떨림만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추웠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형님.”

“아우야. 넌 내 형제지?”

“…네. 형님.”

형제라는 단어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일까?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살기가 사라지고 흉포한 모래바람처럼 퍼져있던 체향 또한 사그라졌다. 두 사람의 목소리엔 회한이 담겨 있었다. 나 같은 건 침범할 수 없는 깊은 신의와 다독임이 담겨 있었다. 기가 막혔다. 한 명의 음인을 나눠 먹고 형제애를 다지기라도 하려는 것이었을까?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오는 것은 고통 어린 신음뿐이었다.

“이제 나가보거라.”

친왕은 대답 없이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집요하고 음울한, 어두운 시선이리라. 날 죽이려 하는 자의 시선.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몸을 살짝 웅크렸다. 추웠다.

떠나는 발소리와 침궁의 문들이 여닫히는 소리가 머나먼 곳의 환상처럼 들려왔다. 이제 황제와 단둘이 남았으니 나는 구타당하고 멍들 것이다. 속이 덜 풀렸다면 살려둘 것이고, 이 정도로 질렸다 생각한다면 죽일 것이다. 갑자기 메마르게 굳어 있던 눈이 뜨거워졌다. 소리를 내어 관심을 끌고 싶진 않았으므로 필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럼에도 소리는 흘러나와 눈물과 함께 파편처럼 바닥에 흩뿌려졌다.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잖아. 사람이나 죽이던 쓰레기잖아. 이런 게 대체 뭐가 억울하다고 우는 것일까? 마땅한 죗값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은가?

“기조야.”

황제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무서워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내게 떨어지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황제가 내 앞에 앉아 상처 입은 입술이며 멍든 팔을 스치듯이 매만졌다. 젖어있는 머리칼을 하나하나 매만지고 소름 돋은 팔뚝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조심스런 손길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행위를 하면 더한 폭력이 떨어지곤 했으므로 공포에 질린 몸뚱이가 제멋대로 떨렸다.

“추우냐?”

“폐, 폐하.”

황제가 내 몸을 침상으로 들어 옮겼다. 내가 무엇 때문에 덜덜 떠는지 모를 리 없는데도 괜스레 추위만 탓했다. 황제가 내게 이불을 덮어주려다 말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거기 정 내관 있느냐?”

“네. 폐하.”

“친왕의 외투를 가져와라.”

“분부 받들겠나이다.”

숨을 몇 번 내쉬기도 전에 정 내관이 친왕의 외투를 들고 들어왔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친왕이 내게 준 여우털 외투였다. 황제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을 테니.”

황제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으며 내게 외투를 덮어주었다. 아끼는 옷이라던 말이 사실인지 외투에선 친왕의 체향이 짙게 배어났다. 나를 죽이려던 자의 냄새였으나 기묘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여우털이 지극히도 부드럽기 때문일 것이다.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자 날 바라보던 황제가 비틀리고 음울한 미소를 띠었다.

“약은 필요 없다.”

내관이 들고 온 피임약을 물리며 황제가 말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것이니 수발을 드는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이곳에서 말씀이옵니까?”

“당분간은 이곳에 있을 것이다.”

황제의 손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질척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황제의 곱고 긴 손가락에 얽혀들었다. 문득, 오늘 황제가 단 한 번도 자신의 체향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종을 잉태하려무나.”

황제가 음울한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작게 속삭였다.

* * *

본디 황제의 침궁은 황제만의 것이라 특별한 이유가 없고서는 그 어떤 음인도 잠을 자고 갈 수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황제가 희락기를 맞았을 때로, 그땐 음인이 직접 침궁으로 들어 옥체를 모시곤 했다.

내 처소는 외궁에 위치하는 데다 초라하여 황제가 머물 만한 곳이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침궁에서 수청을 들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익숙해지긴 했으나 사실 침궁은 황제의 개인적인 공간이라 나 같은 자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곳이었나.’

익숙하다고는 해도 희락기가 아니고선 하루 이상을 묵은 적이 없기에 지금 같은 제정신으로 침궁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흑단과 비단으로 꾸며진 방은 온갖 상징이 가득하여 마치 잉태를 위한 사당 같았다. 천하의 젖줄이라 할 만한 다섯 줄기의 큰 강이 침상으로 모여들었고, 겹겹이 쌓여 있는 이불은 여러 층의 토지를 의미했으므로 이것은 곧 옥토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방 안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침상 위에 홀로 앉아있으려니 마치 제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황제가 잠을 청하는 곳이니 그 품격은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상서로움보다는 음습한 질척임이 느껴졌다. 이곳에 올 때마다 험한 꼴을 당했기 때문이리라. 위태로운 정신이 까마득한 벼랑으로 추락하는 듯 깜박거렸다.

‘내가 다른 궁의 침상을 본 적이 있던가?’

문득 검소하게 꾸며진 침상이 떠올랐다. 한여름에 드리워진 푸른 삼베 위로 단정한 글씨가 쓰여 있었고 꽃을 올려두면 나비가 내려와 앉고는 했다. 그 어떤 곳보다 화려하고, 또 한편으론 소박한 침상이었다.

내가 자주 가곤 했던 폐궁이 주인을 잃기 전의 모습이었다. 마치 선비의 처소처럼 깨끗하게 꾸며진 침상에 그 남자는 앉아있었다. 욕심 없는 얼굴로 그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굴던 황제의 장자(長子).

‘율목친왕.’

흩어졌던 조각들이 맞춰졌다. 흐려진 거울이 닦이는 것처럼 갑작스레 선명해진 과거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더러운 것을 청소했을 때 오는 개운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드러난 진실은 추잡했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추잡함이었다.

그는 의뢰인 중 한 사람이었다. 되도록 자신과 비슷한 얼굴과 체형을 지닌 자로 보내달라는 말에 내가 궁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그가 의뢰인인 줄도 몰랐으나 얼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핏줄이 섞인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럴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얼굴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땐 율목친왕의 모친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으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의 출생을 의심할 정도로 나와 율목친왕은 닮아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닮은 건 그저 우연이었다. 하지만 꽤나 유용한 우연이었다. 귀하게 자란 율목친왕은 나이보다 어려 보여서 내가 그의 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있으면 누구나 착각을 했다. 친한 이가 아니면 상대를 하면서도 구분하지 못했다.

「난 이 궁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 거다. 그러니 넌 나 대신 이곳을 지키려무나.」

언뜻 자유를 원하는 것 같은 말이었으나, 그 속뜻은 잔인했다. 그가 자유를 찾아 사라지는 대신 나는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들켜서 목숨을 잃든가, 자진하여 시체를 남기란 뜻이었다. 그 어떤 살수도 그런 의뢰는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내가 속한 암살단은 율목친왕의 의뢰를 수락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이미 황족의 암살이라는 과중한 의뢰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욕심을 내어 막대한 선금을 받기는 했으나 황궁 안으로 잠입할 방법을 찾지 못해 암살단 전체가 고심하던 중이었다. 율목친왕의 비호 아래 황궁으로 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둘째는 율목친왕이 요구한 것이 내 목숨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음인으로 발현하기 전부터 암살단은 날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양인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고, 그러나 언제고 고삐를 끊고 도망칠 괴물이라 수군거렸다.

황족의 암살이라는 막중한 이득 앞에서 내 목숨 같은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실력 좋은 살수라고는 하나 내가 평생을 움직여 얻을 이득보다 황궁 안에서 얻을 이득이 더 클 게 분명했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의뢰였으나 난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살 방도는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와 닮은 율목친왕의 모습은 지극히 신기했으나 인간적인 감정이나 애착은 생겨나지 않았다. 애초에 의뢰의 내용이 인도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죽을 사람을 대하듯 나를 보았다.

나는 두 개의 의뢰를 받아 황궁에 들어갔다. 그리고 세 명의 황자를 만났다.

* * *

“이것은 인삼, 조개, 거북 등을 제비집과 함께 끓인 것이옵고 이것은 새벽에 잡아 올라온 빙어를 튀긴 것이옵니다. 이것은 설탕을 실처럼 뽑은 뒤 꿀에 절인 생강에 감은 것이옵니다. 입가심으로 좋사옵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 눈앞에 줄줄이 차려졌다. 아침에 나온 음식을 쳐다도 보지 않았더니 침궁의 내관과 궁인들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굴렀다. 황제가 뭐라 이르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칠 정도로 절절매는 꼴이 우스울 정도였다.

손을 대면 지문이 묻을 정도로 반짝이는 상 위에 이름조차 처음 듣는 것들이 계속 올랐다. 며칠 친왕의 시중을 들면서도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살짝 기가 질릴 정도였으나 먹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용종을 잉태하라 하였지.’

황제가 남기고 간 말에 뒷목이 스산해졌다. 다른 이에게 성적인 봉사를 하도록 강요해놓고 아이를 낳으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인가? 임신할 기회라면 지금껏 얼마든지 있었다. 삼 년 동안 내게 결착한 횟수는 잠자리를 함께한 횟수와 같았다. 그는 그냥 내게 약을 먹이지만 않아도 되었다. 굳이 친왕을 불러 봉사하게 하고, 자신과 관계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으….”

입 안이 껄끄러웠다. 구역질이 치밀어 허리를 확 꺾자 음식을 내려놓던 궁인들이 놀란 새 떼마냥 소란을 피워댔다. 입 안을 가득 채우며 목구멍까지 밀려 들어오던 낯선 살덩이와 번들거리던 검은 눈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놓아달라고 버둥거려도 비키지 않고 막무가내로 몸을 벌려 들어오던 살덩이와 비린 정액이 아직도 입 안에 담겨 있는 듯했다. 그리고 죽이고 싶다는 듯이 내뿜던 살기와 욕망으로 일렁이던 체향도.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본 걸까? 왜 그렇게 죽이고 싶다는 듯이…….

“괜찮으십니까?”

사뭇 걱정스럽다는 듯 다가와 열을 재는 궁인이 시선을 한 군데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맸다. 눈앞에는 산해진미가 있었으나 나는 벌거벗은 채였다. 황제가 아무런 옷도 주지 말라 명한 것이다. 친왕의 체향 가득한 외투만이 내 몸에 덮여있었다. 벌어진 외투 사이로 보이는 울혈 가득한 맨피부에 궁인들이 똑바로 바라보질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저리 가.”

사나운 목소리가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쇠를 스치는 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엉망으로 헐어버린 점막들이 열을 내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험하게 가지고 논 장난감이 망가지는 것처럼 온몸이 삐걱거렸다.

“조금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죽을 다시 올릴까요?”

“저리 가라잖아!”

상이 엎어지는 소리가 먼 곳의 꿈결처럼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궁인의 모습이 보였다. 귀하디귀한 음식들이 바닥을 구르고 내 몸값보다 비쌀 그릇들이 상하는 것을 나는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언제나 굶주렸기에 지금 내가 저지른 일이 믿기지 않았으나 어찌 되든 좋았다. 아무리 배고파도 이곳에선 먹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파리 수천 마리가 날뛰는 듯 어지러웠다.

‘임신을 시켜서 어쩌려는 걸까.’

황제가 좋은 의도로 내게 아이를 가지라 했을 리 없다. 내가 살수였다는 것을 쭉 알고 있었다면 어쨌거나 비참한 최후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내게 아이를 낳게 한다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내가 아이를 낳는다 해도, 그 아이를 내가 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겠지. 아이를 빼앗기고 난 뒤엔 아마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다신 돌아올 수 없는 비참한 곳으로 팔려가거나 미칠 때까지 고문을 당할지도 모르고.

“싫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웠다. 엉망이 된 몸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도 싫고, 정사를 나눈 것이 확연한데도 황제의 체향이 아니라 친왕의 체향만 나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지금도 친왕의 외투를 걸치고 있자니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일부러 환기하지 않은 탓에 침궁의 공기는 친왕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상황을 알 수 없기는 내관들도 마찬가지라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황제가 날 망가뜨리고 싶었던 거라면 참으로 잘한 짓이 아닌가. 헐어버린 목구멍을 타고 신물이 계속 올랐다. 음인으로 발현한 뒤 황제가 아닌 그 누구와도 성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친왕과의 관계는 충격적이었다. 원하지 않는 관계가 이토록 역겨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내가 미치는 걸 원하는 걸까? 그래서 이런 짓을 내게 한 걸까?

친왕의 외투 아래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자 더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배에서는 꾸륵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얼굴을 씻을 물은 주어졌지만 목욕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서 어젯밤의 냄새가 계속 코끝에 따라붙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 때문에? 내가 죽인 율목친왕 때문에?

침궁의 꽃창살 너머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림자가 바닥에 호화로운 무늬를 그리는 것이 지금의 내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화려한 그림자는 낮이 기울어짐에 따라 어그러지다 기어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당장은 구중심처에 앉아있는 내 모습처럼.

상을 뒤엎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황제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한참 정무를 보고 있을 시간인데 침궁까지 행차한 모습에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사뭇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면서? 많이 배고플 텐데.”

차갑고 아름다운 손이 내 이마를 쓸었다. 조심스런 손길은 다정했지만 독을 품은 뱀이 피부 위로 흘러가는 듯 소름 끼쳤다. 흠칫 몸을 떠는 내 모습에도 그는 개의치 않으며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태가 잘 자리 잡을 터인데. 워낙 말라서 아이가 잘 자랄까 걱정이구나.”

“…폐하.”

“왜? 뭐 들고 싶은 게 있느냐?”

황제는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며 내관에게 손짓했다. 황제가 나타난 뒤로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내관은 그 손짓에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절 여기 두셨습니까?”

황제가 날 멋대로 굴린 뒤 처소로 내쫓았다면 상황을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침궁에 가둬두고 산해진미를 퍼주는 건 이상한 짓거리였다. 설마 날 방심시키려는 것일까? 그런 짓을 한 뒤 잘해 준다고 방심할 정도로 내가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정신을 놓은 듯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황제가 내게 이러는 이유를 여럿 짐작해 보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의 검은 눈엔 광태(狂態)가 흘러넘쳤다.

“오랫동안 굶었으니 타락죽으로 속을 달래렴.”

“폐하.”

물 한 잔을 떠 와도 이보단 빠를 것이다. 내관이 재빠르게 들고 들어온 하얀 죽을 망연히 바라보자니 황제가 서슬 퍼런 미소를 베어 물었다.

“짐은 예전부터 이러고 싶었으니. 네가 기억나지 않는다 고집 피우지만 않았어도 일이 쉬웠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소인은 정말로….”

“상관없어.”

황제가 내 말을 끊으며 뜨거운 죽을 한 수저 떴다. 무심한 표정으로 후후 불어 식히는 모습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이젠 상관없어. 누군지 알았으니, 이제 되었다.”

한숨 불어 식힌 죽이 입가로 다가왔다. 황제가 직접 식혀 주는 음식이라니 황공해야 할 것이나, 그 무엇보다 심한 맹독처럼 느껴졌다. 황제가 어서 받아먹으라는 듯 수저를 슬쩍 흔들었다.

“입맛이 없습니다.”

“내가 네 입을 잡고 들이부어야 하나?”

목소리는 느긋했으나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감춰두었던 상처가 터져 나오는 듯 황제의 기세가 흉폭해졌다.

“네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냐. 그래도 이제 다 해결되었으니 어서 몸을 다스려야지. 아니면 친왕을 불러줄까?”

갑작스런 말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며 사고가 정지했다. 황제가 정말로 고민된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였다.

“그가 옆에 있는 편이 더 안심되겠어? 내가 없는 동안 꽤 가까워진 것 같던데. 하지만 한 번 맛을 봤으니 이제 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을걸.”

미지근해진 수저가 입술을 두드렸다.

“어서 먹고 몸을 살펴야지. 귀한 씨가 들어선 몸인데 이리 혹사해서야 쓰나.”

“귀한 씨가… 들어서다니요.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황제가 소리뿐인 웃음을 흘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이 내 몸 위의 털외투로 향했다. 불이 튀는가 싶을 정도로 한차례 번들거린 눈이 다시금 요요히 가라앉아 나를 향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후려칠 것 같아 몸이 떨렸다. 폭력에 익숙한 몸이 제멋대로 떨리며 뒤로 빠지자 그것을 바라보던 황제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이리 와. 이제 때리지 않을 것이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멋대로 떨렸다. 황제가 부르는 옆자리로 가 앉을 수가 없었다. 예전엔 그가 부르면 어떻게든 본능을 거스르고 기어갔지만 이젠 무리였다.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는 내 모습에 황제가 화를 억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한숨 뒤에 올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안다. 아마 개처럼 끌려가서 목이 조이고 얻어맞겠지.

“기조야.”

하지만 황제는 힘이 잔뜩 든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기운 빠지고 지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내게 마음 상한 건 알겠지만 이제 익숙해져야지. 뭔가 원하는 건 없느냐? 무얼 해줄까? 뭘 해주면 이걸 먹을 테야?”

“…씻고 싶습니다.”

“아직은 안 돼.”

황제가 코끝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나도 네게서 나는 냄새가 심히 역겹지만, 그래도 씨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참아야 하지 않겠니?”

“씨라니요? 줄곧 제가 임신하지 않길 원하셨잖습니까! 피임약에 절여진 몸인데 이제 와서 그리 쉽게 임신할 리도 없고!”

“무슨 소리니 기조야. 내가 설마 네게 그런 걸 먹였을까 봐.”

황제가 순진하게 웃었다. 옆을 보자 죽을 들고 온 내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다.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쳐다보자니 황제가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피임약 같은 게 아냐. 오히려 임신을 돕는 약이었지. 피임약이라니. 내가 얼마나 네게서 내 아이를 보고 싶었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벌레들이 다시 날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대체 무슨 소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어째서 아직껏 임신하지 못한 거지? 황제는 내게 결착했다. 몇 번이고 희락기를 같이 보냈다. 중간중간 들이켰던 걸쭉하고 불쾌한 액체가 지금도 목구멍에서 기어 나올 것 같은데, 그게 피임약이 아니었다고?

“괜찮아. 다 용서하마.”

황제가 자상하고도 음울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가 정말로 미쳤다는 것. 그가 국정을 얼마나 잘 논의하고 천하를 다스리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앞의 이 남자는 미쳐 있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손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소스라치는 내 반응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벗고 있는 것이 정 마음 쓰인다면 새 옷을 주마. 대신 친왕이 준 외투는 입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네 몸이 착각하고 내 씨를 머금지 않겠니.”

황제가 다시금 죽을 떠서 내게 들이밀었다. 목은 잔뜩 부어 음식을 삼킬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나 억지로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타락죽은 부드럽고 고소했다. 씹지 않아도 매끄럽게 넘어가는 음식 덕분에 가라앉았던 허기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하루 내내 굶었던 배 속이 아우성을 쳤지만 묘하게도 식욕은 일지 않았다.

하지만 먹어야 했다. 기운을 차려서 이 정신 나간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 돌아버린 눈동자가 불길하고 소름 끼쳤다. 내가 한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던 그 고상하고 위엄 넘치던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네가 원하는 것으로 지어 입으려무나. 그래. 자색의 비단이 좋겠어.”

황제가 권유를 가장한 명을 내리자 내관이 황망한 얼굴로 허리를 조아렸다. 그의 당황한 심정이 이해되었다. 자색이란 황족의 색이어서 방씨 성을 지닌 자가 아니면 황후와 태후만이 입을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죽만 삼켰다. 어째서 그런 것을 주느냐는 질문을 했다가는 더 무서운 대답이 들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락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도 한 젓가락씩 뜬 뒤에야 황제는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억지로 삼킨 탓에 속이 거북했으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토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전 내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던 황제는 지금 내가 그릇을 비우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애틋하게 굴었다. 다정한 태도는 녹아내릴 듯 달콤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으나 가끔씩 번들거리는 광기가 황제의 눈에 깃들었다.

“서동에서 들어온 공물 중에 비단이 이백 필 있을 것이다. 전부 사용해도 좋으니 빠지는 물건 없이 지어 올리도록.”

“예. 폐하.”

“탕약은?”

“빈속으로 계셨기에 아직 올리지 않았나이다.”

“이제 올리도록 해라.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지어 올려야 할 것이다.”

“삼가 받들겠나이다.”

서동의 비단이라면 나 같은 노예도 이름을 알 정도의 귀물이었다. 한 필이 집 한 채에 버금간다는 것으로 그 빛깔과 곱기가 다른 것의 몇 배나 된다는 얘길 들었다. 일전에 날 괴롭혔던 희빈이 황제에게 한껏 총애받던 때에 세 필을 하사받아 지극히도 아낀다는 얘기는 유명했다. 경빈도 커다란 연회 때에나 서동 비단으로 된 옷을 지어 입고 나왔다.

그런 비단이 이백 필이라니. 본래라면 보물고에 들어가 수년에 걸쳐 밖에 나올 분량이었다. 하물며 노예의 몸을 감싸기 위해 쓰일만한 옷감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자색의 비단으로 옷을 지으란 얘기까지 나온 마당이었다. 그 어떤 비단도 황제가 명한 것보다 부담스럽진 않을 터였다. 정신 나간 규모의 하사품인 데다, 어차피 현실감도 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황제를 말리는 대신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다.

대전에서 신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황제는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몸 간수 잘하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어 고개만 떨어뜨렸다. 황제가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다 말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침궁 안은 극양인인 친왕의 체향으로 가득 차 있어 황제에겐 꽤나 불쾌할 터였다. 다른 양인의 체향을 기꺼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 앞에서 함부로 체향을 내는 자는 없었으므로 지금과 같은 일은 그에게 있어 처음 겪는 수모일 터였다. 하지만 황제는 친왕의 냄새를 밀어내는 대신 이를 악물고 자신의 체향을 억눌렀다.

“다녀오마.”

황제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며 침궁을 떠나자 뒤에 남은 내관과 궁인들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하룻밤 새에 신세가 바뀐 음인이야 여럿 있을 것이나 황제와 그 동생 사이에 끼여 난교를 하고 침궁을 차지한 음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치 않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황제의 저 미친 짓을 일으킨 게 무엇이냐는 거였다.

‘몸을 착각하게 한다고?’

황제는 집요할 정도로 내게 친왕의 체향을 덮어씌웠다. 다른 양인의 체향이 나는 음인을 탐하는 성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명백히 친왕의 체향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어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들은 친왕의 말처럼 누구의 아이든 상관없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친왕의 체향으로 범벅이 되긴 했으나 그에겐 구음만 했으므로 만일 아이를 가진다면 황제의 자식이었다.

용서한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 이제 안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몸을 착각하게 한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황제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았다.

음인과 양인에 대해 잘 아는 이가 필요했다. 나는 산골에 있었고 궁에 와서도 고립되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궁 안엔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날 동정하고, 내가 잘 되길 원하는 내 사람이 필요했다.

“저를 전담했던 권 의관을 불러주십시오.”

“몸이 편찮으십니까?”

“목이 아픕니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내관이 잠시 고민한 뒤 권 의관을 불러오라 명했다. 내관 한 명이 의관을 부르러 나가기 무섭게 침방(針房) 궁인이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황상께옵서 자색의 옷과 여러 필요한 것들을 지어 올리라 명하시었나이다.”

그녀는 알몸에 털외투만 하나 걸치고 있는 내 모습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 또한 민망해져 옷깃을 추슬렀다. 그녀는 침궁 안에서 진동하는 체향에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했다.

“그, 그, 치, 치수를 재겠나이다. 일어나 주소서.”

“치수를 재려면 외투를 벗어야 할 텐데요.”

내 말에 침방 나인이 기겁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침의를 준비하겠나이다.”

말하기가 무섭게 얇은 나삼으로 만든 침의가 방으로 들어왔다. 후궁이 황제를 모실 때 입는 옷이기에 살빛이 다 비쳐 보였으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무거운 털외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잠자리의 날개처럼 얇은 옷이 더러운 내 몸에 입혀졌다. 침방 나인은 밖에서 무슨 얘기를 듣고 온 것인지 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멀리서 치수를 쟀다.

비빈에게나 할법한 태도였다. 내 신분은 아직 노예였지만 용종을 잉태하라 말하며 자색의 옷을 지어 올리라 명한 황제의 목소리가 메아리마냥 귓속을 맴돌았다.

‘미친 거야.’

첩지조차 주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더니,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돌변한 황제의 모습에 두려움만 밀려왔다. 황궁에 들어온 이래 오늘처럼 소름 끼친 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금군이 들어와 나를 끌어낼 것도 같고, 황제와 친왕이 함께 들어와 나를 범할 것도 같았다. 황제의 행동이 너무나 이상해서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다 되었습니다.”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치수 재는 것이 끝났다. 궁인은 내게 친왕의 외투를 다시 공손히 내밀었다. 부드러운 갈색 털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받아서 입는 대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궁인이 절절매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이 옷을 꼭 입고 있게 하라 명하셨나이다.”

“…방이 더워서 입고 있기 힘듭니다만.”

“황명이옵나이다.”

고운 빛의 부드러운 털외투는 호사스러웠으나 실내에서 계속 입고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계속 입고 있을 것을 황제가 당부하고 가긴 했으나 선뜻 입지 못하고 주저하자 궁인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어서 착의하소서 마마.”

“제가 어째서 마마입니까?”

울컥하고 분기가 역류한다. 황제의 기세에 눌려있던 열기가 터져 나왔다.

“폐하께서 첩지라도 내리셨습니까?”

“그, 그건 아니오나.”

“말씀을 낮추시지요. 전 접객소의 노예가 아닙니까? 손끝으로 부려도 되는 천한 놈인데 어째서 이러십니까?”

명백한 화풀이였으나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궁인이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고, 귀하게 대하라 해서 그러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부리고 있는 변덕이 끝나면 나는 또다시 접객소로 쫓겨날 것이다. 신년 연회에서 잠깐 일을 하며 얻었던 호의는 이미 바람처럼 사라졌을 것이고, 돌아가게 되면 이전보다 더한 박대가 쏟아질 것이다. 지금 내 앞에서 굽신거리는 궁인도 꼴 좋다며 분을 풀려 할 확률이 높았다.

화를 내자 기분이 엉망진창으로 곤두박질쳤다. 기운이 쭉 빠져 궁인이 내미는 외투를 몸에 걸치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내관이 재빨리 창을 열었다. 겨울의 바람은 날카로웠으나 침궁 가득 차 있는 온기 덕에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창문을 열자 침궁 가득 차 있던 친왕의 체향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끔찍했던 지난밤의 기억이 친왕의 체향과 함께 지금껏 엉겨 붙어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그제야 날이 바뀌는 것 같았다. 침궁의 공기가 바뀌는 것을 황제가 원치 않으리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으나 이젠 상관없었다.

바람에 부드러운 여우 털이 흔들리며 뺨을 간지럽혔다.

황제에게 버림받으면 친왕이 구해줄까? 그 또한 변덕이 조금 일었을 뿐 딱히 나를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의 말대로 이제 맛도 보았고 적당히 가지고 놀았으니 흥미가 떨어졌으리라. 어쨌거나, 정말로 날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젯밤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인지한 음인을 그 어떤 양인이 공유하겠는가?

‘하지만 너무 이상해.’

황제와 내가 한 건 사실 결착이 아니었던 걸까? 경험이 없다지만 그런 건 본능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왕의 성기가 내 입안에서 부풀어 오르다 멈췄던 게 떠올랐다. 완전히 부풀었다면 아마 질식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양인의 성기라는 건 씨물을 뱉어낼 때 부푸는 것인데 내가 멋대로 결착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아니. 그건 아니지.”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무리 성적으로 무지하고 기억이 날아갔다 해도 그게 아니란 건 알겠다.

“의관은 언제쯤 올 것 같습니까?”

“소식을 전하러 갔으니 곧 올 것입니다.”

“한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하문하소서.”

“제가 먹은 게 정말로 피임약이 아닙니까?”

내관은 내 질문에 기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눈썹이 반쯤 하얗게 새어있는 그는 침궁을 관리하는 내관이었다. 내가 황제에게 안겼던 첫날밤부터 이곳에 있었으므로 진실을 알 것이었다.

“황상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면 피임약이 아닐 것입니다. 소인도 몰랐으나 따로 의관을 불러 명하신 바가 있긴 하였습니다.”

내관이 조심스런 태도로 대답했다. 공손한 어투였다. 황제를 모시는 내관쯤 되면 어지간한 관리보다 높은 위치였으나 그는 노예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다만 그에게선 두려움의 기색이 느껴졌다.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이이기에 그가 이상해진 것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낀 것이다.

궁인들은 황궁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다름없었다. 기온이 변하거나 물이 오염된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고 몸을 피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 나는 닿아선 안 될 극독이었다. 황제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었고 친왕 또한 얽혀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내관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의관이 왔습니다. 들라 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침소의 문이 열렸다. 내관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오는 권 의관의 얼굴이 당황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어수선한 기색을 줄줄 흘리던 그는 침대에 앉아있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진료를 받고 싶어 모셔달라 했습니다. 아무래도 익숙한 분이 편해서 권 의관을 청했는데, 실례가 되었는지요?”

“아니요. 안 그래도 침궁에 드셨다는 말에 기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자였다. 권 의관은 대뜸 말을 높이며 방 안을 힐끔거렸다. 하급 의관인 그로서는 처음 보는 곳일 터였다. 그는 기대하지도 않고 구입한 잡동사니가 보물이란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맥을 먼저 짚겠습니다.”

“귀인의 몸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옆에 서 있던 내관이 권 의관을 향해 경고했다. 아까 궁녀에게 쏴붙였던 영향인지 마마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내 손목을 잡으려다 제지당한 권 의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내관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누가 귀한 사람이냐고 되묻는 대신 눈알을 한 번 굴리고는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경축드립니다. 마마.”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팔을 내밀자 권 의관이 내관의 눈치를 보면서도 냉큼 잡아 왔다. 사실 맥을 잡을 필요는 없지만 진료받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얻어맞아 멍이 든 것도 아니고 관계를 많이 가진 탓에 열상이 생기거나 배탈이 난 것도 아니었다. 따뜻한 방에서 자고 일어난 덕에 몸 상태는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맥을 짚은 권 의관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가슴 한편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기가 많이 상하셨습니다. 본래도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만. 근래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는지요?”

“…하하.”

궁에 들어온 이후로 쭉, 마음 상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은 그중에서도 발군이라 할 만했다. 대답할 말이 없어 기운 없이 웃음만 흘리자 권 의관이 눈치를 보며 침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쉬었습니다. 고뿔은 아닌 듯한데.”

권 의관은 내 목이 상한 이유를 바로 눈치채고 말을 흐렸다. 침통이며 약통을 꺼내는 손길이 능숙했지만 내가 권 의관을 부른 것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방을 지키고 선 내관을 향해 말했다.

“잠깐 나가주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황제의 침궁이고 지금 날 지키는 이들은 황제의 명을 받은 이들이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은 당연했으나 나도 지금 앞뒤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가지 않는다면 옷을 벗겠습니다.”

털외투의 앞섶을 잡아 벌리자 내관이 기겁을 하며 소스라쳤다. 무거운 외투에 침의가 딸려 내려가 알몸이 훤히 드러났다. 어차피 볼꼴 못 볼 꼴 다 보인 처지라 부끄럽지도 않았다. 황제와 밤을 보내고 기절하면 침궁을 지키는 이들이 날 추슬러 내보냈고, 권 의관은 붓고 멍든 곳을 치료하느라 내 알몸을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을 드러내자 둘 다 기겁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외투를 벗으면 안 됩니다! 황명을 거역할 셈입니까?”

“잠깐 이야기만 나눌 것입니다.”

물러날 기색이 없는 내 모습에 내관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듯, 외투를 벗는다는 말에 늙은 얼굴이 시커멓게 질렸다.

“…정 그러시다면 문밖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목소리만 들리지 않으면 되었다. 조심스레 물러나는 내관의 얼굴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황제를 모시는 내관이 저렇게나 두려워하며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 나 또한 두려워졌다. 황제의 번들거리던 눈이 다시금 생각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허어. 이게 대체 어찌 된 건가…요? 정말로 책봉되신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용종을 잉태하라 말했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해준 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살수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비빈에 봉하겠는가? 자색의 옷을 억지로 입히고는 나중에 트집을 잡아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결착해도 임신이 안 되는 건 어떤 경우입니까?”

권 의관이 말문이 막힌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당황하며 눈알을 굴리던 권 의관은 이내 속삭이듯 대답했다.

“글쎄요. 첫째로는 둘 중 하나가 불임인 경우가 있겠지요.”

황제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황족의 씨가 워낙 귀해 확신할 수는 없으나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였다. 아이를 보지 못해서 황제가 돌아버린 것일까?

“둘째로는 피임약을 먹은 경우가 있겠고.”

황제와 관계를 할 때마다 마셔야 했던 검은 약이 떠올랐다.

“둘 중 하나가 다른 이에게 각인한 상태일 때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각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각인이 대체 뭡니까?”

“하늘이 묶어놓은 인연을 각인이라 합니다.”

권 의관의 목소리가 더욱 나직해졌다.

“결착이란 그저 육체의 상성이 잘 맞아서 관계 시에 양인의 성기가 부푸는 것이지요. 몸만 맞으면 사이가 좋지 않아도 얼마든지 결착할 수 있습니다. 각인은 극히 희귀한 일이라 그런 일이 있다 없다 의견이 많습니다만, 몇몇 고사에서 그 존재가 드러나 있습니다. 음인과 양인이 서로에게 마음을 주었을 때 영혼과 향이 묶이고, 다른 이의 체향을 거부하게 되니 음인은 각인한 양인에게만 향기롭고 양인은 각인한 음인만을 향기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본래 양인과 음인은 하나였기 때문에 진실한 짝을 만나면 그리된다고 합니다만, 하여튼 각인한 상대가 있으면 다른 사람과 아무리 결착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되며 황제의 행동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황제는 내가 친왕과 각인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다 나왔다. 내 향이 아무리 고약하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난 음인으로 발현했을 때부터 향이 독했다.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권 의관이 바깥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결착하셨습니까?”

나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권 의관은 내게 잘해 주었지만 입이 무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내 대답에 조금 실망한 듯 흥이 식은 얼굴을 했다.

“그래도 이제 황제의 총애를 얻으셨으니 앞으로 기회를 노리면 임신도 될 것입니다.”

권 의관이 이어 덕담을 늘어놓았으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친왕과 각인했다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친왕을 만난 건 황제와 결착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마신 것이 피임약이 아니었다면 아이를 가져도 진즉 가졌어야 했다. 그도 아니면.

“…10년 전에?”

황제를 만나기 전에 친왕을 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땐 나도 친왕도 발현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되찾은 기억 속에서 친왕은 그냥 아이였고 호승심을 부리며 날 이기고자 드는 애송이였다. 하늘이 묶어놓은 인연? 영혼과 향이 묶여? 기가 막혔다.

그냥 내가 불임이거나 황제가 불임인 것이다. 씁쓸한 마음에 이를 악물고 있는데 어느덧 사위가 조용해졌다.

“꿇어 엎드리지 말랬더니 이젠 일어나지도 않나? 아주 버릇이 없어지셨군그래.”

창을 열어 놓았는데 언제 다시 이렇게 향이 차올랐는가?

나는 고개를 들어 흉흉한 기색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화살을 한 대 얻어맞은 맹수처럼 사나운 표정의 친왕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서슬이 시퍼렇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글거리는 두 눈이 새파랗게 달아올라 베일 것만 같았다. 잔뜩 굳은 얼굴은 이빨을 드러낼 듯했고, 겉으로 흘러나오는 기세는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눈이 침상에 앉아있는 내 모습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였다.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 꿇었다. 말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이마를 바닥에 대고 두 손도 바닥에 대었다. 황제가 뭐라 했든 난 아직 노예니까 노예의 예를 취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삼가 친왕을 뵙습니다.”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나는 하염없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친왕의 외투 덕분에 몸이 어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들어찬 냉기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외투가 바닥에 끌리니 꿇지 말라고 팔을 잡아 올리던 손이 문득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일어나.”

한참 만에야 나온 목소리는 먹먹하게 잠겨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땅만 쳐다보자 험악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감히 얼굴을 봐선 안 된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한껏 수그렸다. 그가 예의를 지키라 트집 잡았으니 한 치의 실수도 더 해선 안 되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아직까지 황제의 침전에 뭉개고 있나 했는데, 지금 꼴이 대체…. 하!”

친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이죽거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 또한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아끼는 이라 해도 해가 떠오르면 침궁에서 내보내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얇은 침의에 털외투만 걸친 꼴이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황당한 꼴이라 고개도 들기 힘들었다. 친왕의 체향이 베어 있는 외투 덕분에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내 몸에 엉겨있는 체향도 정상이 아니었다. 황제와 관계하는 것을 보았을 텐데, 그의 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벌어진 외투의 앞을 여몄다. 외투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친왕이 이를 까드득 악물었다.

“옷도 안 주나? 그따위 차림새로 사람을 맞이하다니.”

대답할 말이 마땅찮았다. 황제가 옷을 주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줄 모르며 앞섶만 여미자 친왕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열기가 느껴지는 한숨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떨어지자, 서리라도 내린 듯 차가운 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이 힐끗 움직여 바닥에 엎드린 의관에게 향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괜찮습니다, 전하.”

잔뜩 쉰 목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친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내가 목이 쉰 건 순전히 친왕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식하게 입 안에다 대고 사정할 게 뭐란 말인가? 친왕도 찔리는 바가 있는지 슬쩍 혀를 찼다.

“목소리 말곤 멀쩡해 보이는군.”

“네. 전하.”

내 대답을 들은 친왕이 살벌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었기에 대답한 것인데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지 진한 살기를 흘려댔다. 그가 괜히 권 의관을 발로 걷어차며 화풀이했다.

“뭘 구경하고 앉았어? 꺼져라.”

갑작스레 떨어진 날벼락에 권 의관이 화들짝 몸을 떨며 문밖으로 도망쳤다. 아직 물어볼 것이 많은데 이렇게 쫓아내다니. 의관과 독대하는 것이 썩 쉽지 않았기에 괜스레 친왕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의관이 문밖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친왕이 손을 뻗어 턱을 잡아당겼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심히 기분이 더럽더란 말이지.”

“전하?”

“어차피 접객소의 노예이니 며칠 데리고 놀아보면 확실히 알 것 같아서 불렀는데, 아직 처소로 돌아오질 않았다잖아?”

뜨거운 손가락이 턱선을 쓰다듬었다. 밖에서 들어왔는데도 그의 손에선 열기가 났다.

“갈증이 나.”

욕망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에 등줄기가 저릿해졌다. 목구멍이 아릿하니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그의 아랫도리가 목에 박힌 게 바로 엊저녁이라는 것이 떠올라 새삼 놀랐다. 황제와의 만남이 지독히도 피곤했기 때문이리라. 형제 사이에 끼어서 흔들렸던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마실 것을 올릴까요?”

모른 척 묻는 말에 친왕이 가증스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맛을 보다 말아서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전하!”

친왕이 턱을 놓고 손목을 잡아당겼다. 침전의 열린 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거칠었다. 짧은 쇳소리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끌고 나가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어제 못다 한 것을 하려는 것이다. 먼일처럼 느껴졌던 지난밤이 갑자기 눈앞으로 떨어지며 시야가 새하얘졌다. 이대로 끌려가면 정말로 당하고 만다는 생각에 문지방을 잡고 저항하자 같잖다는 듯 차가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야?”

“화, 황제께서 이 방을 나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뭐?”

“전하!”

방 밖을 지키고 있던 내관 또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친왕의 앞을 막았다. 친왕의 발밑에 꿇어앉은 내관은 그 몸으로 나갈 길을 막고 덜덜 떨며 말을 올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고정하소서. 전하!”

“고정하라? 왜? 이 자는 접객소의 노예가 아니냐. 본왕이 가지고 놀겠다는데 감히 내관 따위가 가로막아?”

내관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친왕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색의 옷을 지어 올리라는 명이 떨어진 판국이었다. 내관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이마를 땅에 박았다.

“침궁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황명이 있었나이다.”

“황명이라.”

친왕이 한껏 비꼬인 웃음을 실실 흘렸다. 불길한 기색에 소름이 쫙 끼쳤다. 친왕은 내 팔목을 움켜쥔 손을 한 번 보더니 눈알만 굴려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피식피식 미소 짓던 얼굴이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그럼 나가지 않으면 되지.”

친왕은 피식 웃더니 곧 내 몸을 침상 위로 집어 던졌다.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묵직한 무게가 몸을 눌렀다.

“여기서 맛보면 되겠네.”

“전하! 이곳은 황상의 침전이옵니다!”

친왕은 내관의 외침을 들은 척도 않으며 내가 입은 외투를 잡아당겼다. 얇은 침의가 외투와 함께 벌어지며 맨살이 드러났다. 옷이 벗겨지자 차갑게 식은 침전의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뜨거운 것은 내 품으로 파고든 친왕의 손바닥뿐인 것 같았다. 단단하고 거친 손이 유두를 한 번 매만지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친왕의 무릎이 고간을 꾹 누르는 것에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

어떻게 하지? 거절해도 되나? 싫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황제는 내게 용종을 잉태하라 했고 또 자색의 옷을 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싫다고 말하며 거부해도 되는 것일까? 이대로 당하면 끔찍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상하게 변해버린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분노한 극양인의 체향에 일어난 본능적인 공포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황제의 것과는 다르지만, 분노한 양인의 체향이란 내게 하나만을 의미했다.

얻어맞을 거야. 아무리 울부짖어도 봐주지 않겠지. 저항하면 고통스런 시간이 길어질 뿐이니까, 죽은 듯이 가만있어야 한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은데….

반쯤 얼어붙은 팔을 움직여 친왕의 팔을 잡았다. 무섭다. 함부로 팔을 잡았다고 날 때릴지도 모른다. 고통이나 쾌감을 못 이겨 황제의 신체를 잡았다가 호되게 얻어맞은 적이 많아 몸이 떨렸다. 고통을 예상한 머리가 한껏 굳어 벌벌 떨렸다.

“…뭐야 이건.”

친왕이 서늘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음 같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더니 상처 입은 맹수마냥 살기를 자아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리는 것을 두려움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가 상체를 숙여 내 목에 코끝을 들이댔다. 킁킁 냄새를 맡는 기색에 소름이 돋았다. 친왕은 차근차근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드러난 맨살 위로 얼굴을 미끄러뜨렸다.

“전하, 전하. 하, 하지 마세요.”

외투가 벗겨지자 흘러나온 적나라한 체향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제의 체향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온통 친왕의 냄새만을 머금은 맨살을 뜨거운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갔다. 친왕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나를 보았다. 날카롭던 기세가 누그러지고 험악하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어째서 형님의 향이 나지 않지?”

그는 내가 황제와 자는 것을 눈앞에서 봤다. 어제는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느끼지 못한 것일까? 황제의 것임이 분명한 이 침전에 그 주인의 체향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친왕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체향을 내보내지 않고 정사를 나눈다는 건 일부러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친왕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제의 의심을 친왕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제가 전하와 각인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

친왕은 내가 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입속으로 각인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며 잠시 그 뜻을 생각하는 듯하던 친왕의 얼굴이 곧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각인? 그게 뭐…. 아. 그 각인? 하!”

친왕은 불쾌함이 절절히 어린 목소리로 웃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그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영민한 사람이기에 각인이라는 말과 지금의 내 상태에서 많은 걸 깨달은 것이다. 나는 무서우리만치 굳어버린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제 향이 본래 매캐하여 그런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각인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만, 그런 것이 있다더군요.”

“…그래. 그런 게 있기는 하지.”

“혹시 제 향이 달게 느껴지시는지요?”

내 질문에 친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석상마냥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이 들을 말이 무엇인지 곱씹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너무나 어이없는 말을 들은 나머지 분노를 삭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욕설 비슷한 것을 나직이 삼키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음인들과 비슷해. 매캐하고 고약하지.”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그래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실망으로 수그러드는 마음이 간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누군가와 영혼에서부터 맺어져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적어도 내 체향이 원래부터 고약하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불모지라는 것보다야 믿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어진 친왕의 말은 상냥했다.

“하지만 가끔은 달콤하게도 느껴져.”

“위로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위로라니. 내가 뭐하러?”

대꾸하는 친왕의 목소리가 다시금 잔인해졌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제는 달았는데 오늘은 쓰군. 왜 그럴까?”

그는 과거에 맡았던 향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콧등을 찌푸렸다. 그는 맛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귓불을 입에 머금었다. 성감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버둥거리며 팔로 가슴을 밀자 친왕은 의외로울 정도로 쉽게 물러났다.

“역시 써.”

나는 침상에 누운 채 벌어진 외투를 다시 여몄다. 쓰다는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친왕은 경멸 섞인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각인이라.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 그래. 그래서 어제 그런 일을 벌이신 거군.”

친왕이 비웃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뭐라도 된 것 같았나? 천한 접객소의 남창 주제에.”

내 몸 위에서 깔끔하게 일어서는 친왕의 모습을 나는 기운 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침상으로 밀친 게 언제냐는 듯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 들어온 뒤로 익숙해져서 이제 말에 상처받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더 날카로운 말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길게 꿈꾼 것도 아니다. 의관의 말을 듣고 친왕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찰나와 같은 시간 생각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짧은 소망은 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섬광처럼 왔다 사라질 것이었는데.

“조만간 정말로 형수님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친왕은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전을 나섰다. 비난과 냉소를 퍼붓고 떠나는 뒷모습에 설움이 울컥 솟았지만, 감히 붙잡을 수는 없었다. 붙잡을 이유도 없었다.

친왕이 떠나자 물러나 있던 내관과 궁인들이 방으로 들어와 흩어진 것들을 정리했다. 조용하면서도 부산스러운 기색들이 유난히도 멀게 느껴졌다. 지금 있었던 일은 곧바로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기껏 의관을 불러 독대했는데, 모두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옆으로 몸을 돌려 한껏 웅크렸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싫었는데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입 안에서 번지던 과자의 달콤함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도둑맞은 옥패의 반짝임 때문일까? 차가운 몸에 와 닿던 화로의 열기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명멸하던 불빛의 기억이 머릿속을 두드렸다.

‘정말로 각인이면 좋았을걸.’

그런 어린애와 각인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란다. 누군가의 유일한 사람이길 원한다. 변덕스런 장난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엎드려 있는 내게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어준 것도,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해준 것도, 달콤한 게 무엇인지 알려주고 예쁜 물건을 선물해준 것도, 모두 그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열려 있는 창으로 친왕의 체향이 다시 빠져나갔다. 선선해지는 공기 속에서 나는 한껏 외투 속에 파묻혔다. 외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 감촉 역시 그가 처음으로 알게 해준 것이었다.

* * *

“오후에 친왕이 방문했다지?”

정무를 마치고 돌아온 황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자색의 용포를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황제는 여유로워 보였으나 불쾌한 초조감이 서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폐하.”

“친왕을 만나니 좋던가?”

“아니요.”

“그래. 대답이라도 그리해야지.”

황제의 목소리엔 이죽거리는 기색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실룩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완전히 친왕과 각인한 사이인 듯했다. 옷매무시를 다듬던 궁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황제가 번거롭다는 듯 달라붙어 있던 궁인들을 밀쳐낸 탓이었다.

“아무리 좋아도 내색하지 말도록. 그럼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었다. 친왕을 만나서 얻은 거라곤 마음의 상처뿐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내 말을 조금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황제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 방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공기라는 것이 이리도 갑갑할 수 있다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온기라는 것은 내게 있어 안락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여름의 더위 또한 풍족하다는 점에서는 내게 기꺼운 것이기에 따스함은 언제나 기꺼운 것이었다.

침궁의 창문은 어느덧 굳게 닫혀 있었다. 황제가 들어오자마자 열려 있는 창문을 보고는 얼굴을 희게 굳힌 탓이었다. 화로의 불도 지나칠 정도로 세서 친왕의 여우털 외투를 입고 있는 것은 지나친 부담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덥습니다, 폐하.”

황제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털외투 때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대로면 땀띠가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제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벗어도 좋아.”

“감사합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옆에 서서 눈치만 보던 내관이 냉큼 옷을 받아 들었다. 문득 황제의 시선이 찌를 듯이 느껴져 몸을 움츠렸다. 안 그래도 얇은 침의가 땀에 젖어 투명해져 있었다. 황제의 검은 눈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뭔가, 다른 걸칠 것을….”

“뭐하러? 그대로 있어.”

황제가 내게 다가와 팔을 움켜쥐었다. 침상 위로 부드럽게 눕히고는 살피듯이 내 모습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와 닿았다.

“폐하. 저는 친왕 전하와 각인하지 않았습니다.”

“아아. 현성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아도 된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녀석에게도 좋겠지.”

황제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곧 사그라들고 분노가 비어버린 눈동자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이리 와.”

나는 황제의 품으로 유순하게 안겨들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에 끌어안긴 것처럼 무서워졌다. 황제는 안심하라는 듯 등을 토닥였다.

“이제 선을 넘어버렸으니, 임신이 확인될 때까지는 이곳에 있도록 해라.”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입 다물어.”

황제가 말을 끊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은 황제의 모습에서 절망감이 느껴졌다.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어젯밤과 같은 일을 또 겪어야 하는 것일까? 고통과 절망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친왕의 체향을 가득 품은 채 황제에게 안겨 있자니 머릿속이 마비되는 듯 정신이 흐트러졌다.

* * *

금방이라도 거칠게 파고들 것 같던 황제는 수일이 지나도록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언뜻 자상했으나 나는 두렵기만 했다. 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다. 내 배 속에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친왕은 그 후로 오지 않았지만 종종 그의 체향이 배어 있는 옷가지나 물건들이 침전으로 들어왔다. 허락을 받고 가져온 물건은 아닌 듯 다음 날이면 다시 없어지기 일쑤였다. 친왕의 체향이 가득 찬 침전 안에 앉아있자니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추운데 왜 자꾸 창문을 여는 게냐?”

“답답합니다, 폐하.”

“밖은 위험하니 조금만 더 참도록 해라. 아이가 든 것이 확실해지면 내 너에게 황후궁을 내릴 것이다.”

황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달콤한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바깥보다 이 침궁이 내게는 더 위험했다. 밖에서는 암살자들이 찾아왔지만 난 잘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선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음식과 약들이 끼니마다 앞에 놓였다. 따뜻한 곳에 앉아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몸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신은 부담감으로 황폐해지고 있었다.

“저는 그 누구와도 각인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이해한다. 각인했다고 말하면 내가 친왕을 죽일 것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냐?”

황제는 예사롭게 말하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검은 눈이 잔인한 빛을 품고 일렁였다.

“나도 내 동생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황족이 아니었다면 간편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않니. 친족을 죽이는 것은 큰 죄라 그가 반역의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사사(賜死)할 수 없다.”

“무슨 말씀을……. 전하의 친동생이 아닙니까?”

경악한 내 표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니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니냐.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아라.”

살기를 흘리는 황제의 얼굴에선 그 어떤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려움에 손끝이 바싹 얼었다. 형제의 사이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죽음을 논하는 것이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지금은 날 장중보옥이라도 된 양 애지중지 쓰다듬고 있으나, 당장 돌변하여 바닥에 내리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어의가 내 진맥을 짚고 아직은 임신을 확인할 수 없다고 고할 때마다 황제의 기세는 흉흉해졌다. 빠르면 열흘, 늦어도 한 달이면 산맥(産脈)이 잡힌다고 하였으니 황제의 인내가 버틸 날도 그 정도 남은 셈이었다.

얼어붙어 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던 황제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어 왔다. 당과를 핥듯이 빨고 핥으며 침입한 혀가 입 안쪽을 뭉근히 쓸었다. 따뜻한 곳에 있어도 차가운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부드러운 살을 꽉 잡았다 놓았다.

“어서 안고 싶군.”

“…안으십시오.”

“어서 내 향으로 뒤덮고 싶어.”

황제가 달콤한 숨을 불어넣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공포와는 반대로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졌다. 믿어도 될까. 그런 희망이 치솟다가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그라진다. 시선을 돌려 침전을 둘러보았다. 침전의 벽을 가득 채운 온갖 다산의 상징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슬쩍 짚어 보았지만 뭔가가 들어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곳은 답답합니다.”

“말동무라도 불러주랴?”

언뜻 다정하게 말하며 주변으로 향하는 황제의 눈이 언짢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말동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내가 답답하다 말하게 만든 것을 책망하는 듯한 기색에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침전을 지키는 궁인들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들은 황제의 사람이었고 귀인들을 모시는 이들이었다. 관노에게 함부로 입을 놀릴 정도로 경박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관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의관?”

“제가 접객소에 있을 때 상처를 봐주던 자입니다.”

황제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혹시 양인인가?”

“평인일 것입니다.”

“아. 전에 이곳으로 불렀다던 그자인가. 그자는 왜?”

“익숙하여 편합니다.”

“어의를 옆에 계속 붙여놓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런 잡관을….”

황제가 날카롭게 비웃었다. 하지만 황제가 잡관이라 비하하는 그 의관 덕분에 나는 목숨을 건졌다.

“그가 아니었으면 희빈에게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희빈이 날 처넣은 감옥은 차갑고 축축하여 목숨을 잃기 딱 좋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머리는 깨져 피가 흘렀고 몸을 가누지 못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가 들어와 따뜻하게 해주고 치료해주지 않았다면 어찌 목숨을 부지했겠는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황제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채를 띤 검은 시선이 내 머리 쪽을 향했다. 상처는 잘 아물었지만 머리카락을 헤쳐보면 하얗고 긴 흉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 기특한 자로구나. 한 번 생각해보마.”

황제는 내 몸을 끌어안고는 한참을 가만있었다. 달큰한 숨이 머리 위를 간질였다.

그가 첫날밤에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속아 넘어갔을 텐데.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리 다정하게 굴었다면 아마 내 신분도 잊고 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혹여나 버림받을까, 그의 마음이 식을까 전전긍긍하며 희빈처럼 패악을 부렸겠지.

하지만 그는 내게 너무 못되게 굴었고 그의 손이 가까이 올 때마다 놀라는 몸은 폭력이 남긴 흔적들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내 머리에 남은 희빈의 패악질이나, 밤송이에 뚫렸던 거죽 같은 것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내 마음을 할퀴었다.

날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던 황제는 곧 한숨과 함께 일어나 서탁으로 향했다. 황제는 정무를 보지 않는 시간 대부분을 나와 함께 보냈다. 편전에서 끝내야 할 일거리들이 침전의 서탁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차가 황제의 옆에 놓이고, 그는 남은 정무를 보는 사이사이 침상 위에 앉아있는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저녁 식사에서부터 이어지는 황제와의 대면은 심히 부담스런 것이었으나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답답하고 지루했다. 황제의 침전에서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산책조차 허용되지 않아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수나 독서처럼 시간을 때우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 나는 침상 위에서 잠을 자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접객소에 있을 때도 아프지 않을 때면 늘 무료함에 짓눌려 우울했었다. 궁 안에서 땅을 갈아 밭을 일굴 수는 없기에, 몸이 굳지 않도록 운동하거나 폐궁의 물고기를 보러 가고는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화풀이 인형이라는 인식 때문에 다른 이들과 교류도 드물어 외롭기 그지없었다.

“확실히 답답하긴 하겠구나.”

황제가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나를 향해 말했다.

설령 내가 용종을 잉태했다 해도 황제의 침전에서 지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내가 친왕과 각인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는 듯, 그의 체향이 가득 차 있는 침전을 선뜻 포기하지 못했다.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잠만 자는 것도 용종에게 좋지 않을 터.”

황제가 있지도 않은 아이를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

“거동이 편한 장소로 옮겨주마.”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의 착각은 달갑지 않았지만 침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기뻤다. 일부러 환기를 하지 않은 침전의 공기는 답답했고, 철통같이 지키고 선 내관과 궁인들 때문에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모두 죽이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 경우 탈출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이곳은 황제의 침궁이었다. 호위병들의 무위는 그리 낮지 않았고 나는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다.

‘도망이라.’

황궁의 담장은 높았으나 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이 답답한 침궁을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로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까? 아버지의 시신을 파내어 아무도 모를 곳으로 옮기고, 아예 다른 나라로 가버리는 게 좋을 테지만 방제국을 벗어나는 것에만도 몇 달은 걸릴 것이다.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의관의 확진이 나오면.’

그러면 도망치자. 권 의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자주 불러 정보를 얻고, 산기가 없다는 게 확인되면 그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과분한 총애에도 불구하고 용종을 잉태하지 못한 관노가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생각을 해주길 원했다.

황궁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날 대신 세워 죽이려 했던 율목천왕이 떠올랐다. 그도 이런 기분으로 내게 의뢰한 것일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도망치고 싶어서?

‘우스운 꼴이 되었네. 지금 내 처지가 웃기겠지?’

같은 처지가 되어 꼴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율목친왕과 있었던 일이 전부 다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날 왜 불렀고, 그로 인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는 기억났지만 그 중간중간이 벌레 먹은 것처럼 비어 있었다. 친왕을 죽인 것은 기억났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황궁을 빠져나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생존에 관련된 것들부터 기억난다면, 어떻게 황궁을 빠져나갔는지도 슬슬 기억나야 할 것 같은데 영 진전이 없었다. 우울해하며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지만 떠오르는 것이라곤 발칙하게 덤벼드는 어린아이의 얼굴뿐이었다.

* * *

답답하다고 연신 되뇌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음일까, 날이 밝기도 전에 십여 명의 궁인들이 패물을 들고 찾아들었다.

“옷이 다 되었습니다.”

눈 앞에 비단옷이 줄줄이 늘어졌다. 반지르르한 빛의 도톰한 자수가 소매와 옷단을 장식하고 섬세한 금박들이 자잘하니 박혀있었다. 서동비단은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그 색을 바꾸었다. 녹색의 비단이 그늘 속에서는 화려한 보랏빛으로 바뀌는 것이 그야말로 아름다워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것 같지 않았다.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옷이었으나 내 것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들어갈 선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꽃과 구름을 수놓은 털가죽신은 산호로 장식되어 있어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소리가 났고, 양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손안에서 흘러내릴 듯 부드러웠다. 구경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화려한 옷들이 놓이는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하얀 족제비 털로 안감을 댄 외투였다. 마치 친왕이 준 외투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화려하고 섬세한 외투는 눈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폐하의 하사품이옵니다.”

옷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온갖 보석 장신구였다.

푸른 새의 깃털로 만든 비녀와 관이 작은 흔들림에도 몸을 떨며 시선을 끌어모았다. 나처럼 초라한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물건들이었다. 훌륭한 물건들이었지만 내가 착용하면 어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틀어 올릴 정도로 길지 않은 머리카락도 문제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구름과 꽃이 조각된 옥 팔찌와 건드리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섬세한 세공의 호갑투가 특히 아름다웠다.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바라보았다. 거칠게 일그러진 손가락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톱은 짧게 잘려있어 볼품없었다.

“옷에 맞추어 착용해보소서.”

옷도 장신구도 내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침의만 입고 있을 순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히 몸을 숙이고 있던 궁인이 다가와 시중을 들어주었다. 궁인의 존대도 이제는 꽤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 옷과 장신구도 익숙하게 여기는 날이 올지 모른다. 나는 아랫배를 슬쩍 쓸어보았다. 황제의 바람대로 용종을 잉태한다면 정말로 첩지를 받고 호사를 누릴 수도 있겠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이겠지만, 그것은 나름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꿈속에선 이런 것을 원했었는데, 막상 현실에 펼쳐지자 만족감 대신 음습한 탈력감만 느껴졌다.

화려한 옷들 중에 그나마 가장 수수한 것을 골라 몸에 걸치자 기다렸다는 듯 귀걸이며 반지가 앞에 놓였다.

“옷 색깔에 맞추어 마노로 꾸미심이 어떠한지요.”

흰색의 둥근 보석이 달처럼 아름다웠다. 푸른색의 물결무늬가 보석의 중심을 물들이고 있어 단조로움을 지워주었다. 엄지만 한 마노의 밑으로는 진주가 늘어져 있어 마치 빛이 흩어져내리는 듯 고왔다.

“아름답네요.”

“잘 어울리실 것입니다.”

소가 꽃으로 장식된 것 같겠지. 어색함의 극치겠지만 거절해봤자 귀찮은 일이 늘어날 뿐이었다. 침전 안은 마치 꽃밭이 펼쳐진 듯 화려함이 넘실거렸다.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궁인들은 침전을 가득 채운 패물들의 모습에 부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부드러운 비단이 몸에 감기는 감촉은 물살처럼 매끄러웠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보석들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궁인이 단장해주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몸에 걸친 것들의 값어치를 헤아렸다. 하얗고 푸른 자수와 비단을 바탕으로 보드라운 털조끼가 입혀지고 마노 장신구가 채워졌다. 황실의 물건이니 파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제값의 십 분지 일만 받아도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도망치게 된다면 돈이 필요했다. 황제가 내게 내린 패물은 막대했지만 따로 관리하는 자가 있으므로 내 멋대로 싸 들고 도망칠 순 없었다. 최대한 몸에 걸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길러 관을 올리면 좋겠습니다.”

황제가 내린 패물 중 머리 장식들이 꽤나 비싸 보였다. 머리는 잘라서 버리고 장식은 팔아버린 뒤 움직일 셈으로 말하자 궁인이 아첨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아름다우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 가발을 올리는 건 어떠신지요?”

가발도 값비싼 물건이지만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는 데엔 방해가 됐다. 하지만 벗어버리고 도망치면 될 일이니 상관없을 것이다. 고개를 까딱이자 곧바로 가발이 대령 되었다.

수족같이 굴고 있는 궁인들의 시중이 꿀을 바른 듯 달콤했다. 하지만 이것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달콤함이었다. 그들의 눈은 황폐했고 황제가 쳐다볼 때마다 공포에 질렸다. 인자하고 자애롭던 성군은 아직 그 어떤 광기도 드러내지 않았으나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이를 겁에 질리게 했다.

패물을 몸에 감은 다음 날, 가까운 별궁으로 내 거처가 옮겨졌다. 작은 정원이 딸린 별궁은 후궁이 아니라 황족을 위한 건물이었다. 별궁 곳곳을 장식한 자색의 비단이 철거조차 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황제의 침궁과는 달라서 방문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그 누구 앞에서도 예를 취하지 말라는 황명이 함께 떨어졌다.

과분한 성은이었으나 내 신분은 아직도 노예였다. 그 사실이 내게 현실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그는 아직 내가 살수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혹시라도 아이를 정말 낳는다면, 알맹이를 들어낸 포도 껍질처럼 버려지고 말 것이란 사실을 내 신분으로 상기시켰다.

“이 방을 사용하라는 어명입니다.”

별궁에서도 가장 커다란 방이 내 거처로 주어졌다. 황족을 위한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방은 호사스러웠고, 또한 익숙한 누군가의 체향이 배어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를 향해 내관이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어제 황상께서 친왕을 불러 우애를 다지셨습니다. 체향이 남아 있어도 당황하지 마시라는 말씀이 있었나이다.”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제의 침전보다는 작았으나 창은 더 크고 밝아 지내기 좋아 보였다. 그러나 곳곳에 배어 있는 친왕의 체향과는 달리 황제의 체향은 어디서도 나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내가 황제가 아니라 친왕의 잉첩이라 생각할 것이다. 황제의 집요함과 광기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시선을 슥 돌려 별궁을 둘러싼 담장을 바라보았다. 높았으나 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키는 자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따돌릴 수 있을 듯했다. 이곳에서 황궁의 외벽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밤의 어둠을 틈타 움직인다면 아침이 되자마자 도성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변을 패물로 채우며 의관을 계속 불러들였다. 황제의 명으로 관직이 높아진 권 의관이 그야말로 입 안의 혀처럼 굴며 궁 안의 소식을 주워 날랐다. 덕분에 경빈이 방문을 청했을 때, 미리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놀라는 기색 없이 그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경빈을 뵙습니다.”

황제의 명에 따라 몸을 굽히지 않자 경빈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곧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상석에 앉았다. 그녀에게서 더는 기분 나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경빈에게서 화려한 양인의 향이 흘러나왔다.

“접객소의 노예라 들었는데?”

“네. 마마.”

“황상께서 장난을 심하게 하시는군. 심려가 깊겠어.”

“괜찮습니다. 제가 장난감인 것은 황궁 안의 모두가 아는 일 아닙니까.”

내 대꾸에 그녀가 즐겁다는 듯이 한껏 미소 지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패물과 방을 채운 가구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좀 질린 듯한 기색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긴 했다만.”

그녀는 코끝으로 웃으며 뒤로 몸을 기댔다.

“침전에 두고 꼭꼭 감싸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셨다지. 황제께서 네게 결착하셨나?”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지나치게 천박한 질문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든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몸에서 후사가 나올 리도 없고. 후궁에게 있어 신분의 귀천이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황자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비천한 신분으로 황상의 침상을 더럽힌 죄를 물을 것이다.”

“절 죽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경빈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되물었다.

“왜. 못 할 것 같으냐?”

“경빈께서 저를 겁박했다고 황제께 울며 고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희빈도 똑같은 말을 하며 울며 고했지. 결국 어찌 되었지?”

“냉궁에 갇혔지요.”

“그녀는 살아있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해.”

경빈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등을 지키고 있는 가문의 힘이 곧 그녀의 힘이었다. 희빈 또한 호부시랑이 딸이었으나 경빈이 지고 있는 배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몇백 년에 걸친 혈연과 지연이 거미줄처럼 엮여있어 그 어떤 적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자신하고 있었다.

“네게는 참으로 다행이지 않으냐? 내가 음인이었다면 귀비를 치워버린 태후처럼 널 치워버렸을 것이다. 하나 난 황제보다 다른 음인들과 지내는 게 좋으니 지금 이것은 네 복이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내가 황제에게 얻어맞아 끌려나갈 때는 그 누구도 날 부러워하지 않았다. 이제 와 복이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기껍지 않았다. 복이라는 것은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굴곡 없이 빈의 자리에 오른 경빈 같은 이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당황스러워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녀는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말을 이었다.

“아아. 지방의 화전민이었다고 했나. 그래도 황궁에서 삼 년을 살았으면 알 법도 하거늘.”

“무슨 말씀이신지요?”

“결착은 여러 음인과 할 수 있으니 천하를 다스리는 이에게 있어 너는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결착에 대한 얘기를 꺼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자 경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황자를 생산하거라. 그러면 내 친히 널 친왕께 하사하도록 청할 것이니.”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황제가 친왕과 함께 음인 노예 한 명을 가지고 난교를 즐겼다는 얘기는 모르는 이가 없는 소문이라고 의관이 알려주었다. 분명 그녀의 귀에도 얘기는 들어갔을 것이다. 굳이 황자를 낳으라고 한 뒤 친왕에게 보내겠다는 건 나를 모욕하기 위해 작정한 것이겠지만,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내 처지가 하찮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황제가 내게 비단과 장신구를 내린 것도, 보라색 옷을 지어 올리라 말하며 황후의 자리를 운운한 것도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아무리 천하다지만 황자를 낳고서도 노예의 신분이겠습니까?”

“친왕께서 널 달라고 황제께 청하셨다지. 회임했을지도 모르는 자를 내줄 수는 없다며 거절하셨다는데, 황족들이 결착한 상대를 끼고도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단 자식을 보고 나면 그 흥미도 빠르게 식어버린다. 황자가 탄생했는데 너 같은 것이 모친이라니, 그처럼 참담한 사태를 누가 그냥 보아 넘기겠느냐? 그러니 어서 황자를 생산하라는 거다. 황제께서 네놈에게 둔 정이 사라져야 치워버릴 수 있을 터이니”

참으로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 황제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황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만일 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다 해도 황후라는 자리에 나 같은 자가 앉아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친왕이 나를 청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각인이라는 내 말에 경멸 가득한 말을 쏟아낸 뒤 사라졌다. 궁 안의 소문에 밝은 권 의관도 그러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슬쩍 기울여 경빈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훑어보았다. 황제가 누구에게 관심을 주든 상관없다는 듯 굴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예민하게 구는 모습이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날 모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양인으로 발현한 이들은 머리가 명석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는다는데, 이렇게 후궁전에 앉아있자니 답답하기도 하시겠습니다. 절 투기하시는 건가요?”

경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투기?”

경빈이 아주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칼을 품은 듯 날카로웠다.

“희빈은 아주 아름다운 데다 향도 좋고 집안도 좋아 능히 자색의 옷을 걸칠 만했다. 황상을 지극히 사랑하여 회임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지. 성격이 좋지 않아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웃을 때면 꽃망울이 터지는 듯하여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너는 뭐냐?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코를 막고 싶을 정도고 웃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본궁이 질투라고?”

“말씀대로입니다. 저 같은 게 무슨 투기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다만 조정 관료와 황상을 투기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경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돌처럼 굳은 얼굴을 향해 나는 말을 이었다.

“양인으로 발현했으나 그 기세를 떨치지도 못하고 후궁전에 앉아 황상이 버린 음인들만 가지고 노시니 참으로 심심할 것 같습니다.”

정곡을 찌른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입술이 미소를 지으려는 듯 움직였지만, 그것은 표정이 되지 못하고 경련 같은 꿈틀거림만 굳은 얼굴에 더해주었다. 경빈은 언제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후궁에 얽매이지 않은 것처럼 자유롭게 굴었지만 결국 양인이었다. 황제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것은 그녀가 그녀 집안에서 내놓은 볼모이기 때문이었다. 양인으로 발현했는데도 황제와 이혼하지 못하고 황궁 안에 잡혀있으려니 속이 뒤집히겠지.

“잘도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경빈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황궁에 적으로 돌려서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경빈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얌전히 숙이고 들어갔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제 황궁에 머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뭣 하러 다른 이의 시비를 참아 넘겨야 한단 말인가? 이제 곧 다시 볼일도 없을 터인데.

“참으로 편한 처지가 아니냐? 정식으로 첩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의무도 없고, 노예라고는 하나 황상의 품에 있으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지. 지금 이 궁 안에 너보다 팔자가 좋은 자가 없을 것이다. 마치 개나 고양이 같구나.”

경빈이 굳은 목소리로 꾸짖었으나 나는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마. 목이 졸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뭐?”

“얻어맞아서 정신을 잃어본 적은 있으십니까? 맞을 때도 고통스럽지만 맞고 난 뒤가 더 고통스럽습니다. 멍이 가라앉아서 멀쩡해 보여도 속은 다 문드러져 있어서 바람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올라오지요. 내장이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너무 아파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됩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숨이 막혔다 풀리면 기침이 터집니다. 기침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숨을 들이쉬기 위해 가슴이 경련을 일으키지요.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 시야가 벌겋게 물들면 내가 이미 지옥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나 같은 노예가 대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타고난 신분 때문에 그녀는 날카로운 말을 뱉으면서도 반박당하는 일이 없어 제 잘난 듯 살 수 있었다. 황친 정도는 되어야 그녀에게 핀잔을 줄 수 있었다.

“목이 졸리고 얻어맞으며 흘렸던 눈물과 콧물이, 숨을 들이켤 때마다 숨구멍을 막습니다. 그리되면 폐부가 타는 것 같죠.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경련을 일으킵니다. 심할 때면 몸속이 타들어 가는 동시에 익사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너무 노골적인 묘사였을까. 듣고 있던 경빈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살펴 가십시오.”

축객령을 내리자 그녀는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네발 달린 짐승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일어서는 그녀에게서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우아함의 극치였으나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경고처럼 느껴졌다.

“재밌는 얘기로구나. 만일 친왕께서 싫다 하시면 내가 주워주마.”

경빈이 독을 품은 거미처럼 위험하게 미소 지었다. 방금 전까지 굳어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매끄러운 미소였다.

“주워서 어쩌시려고요?”

“글쎄. 목이라도 졸라볼까?”

그녀의 목소리에선 악의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나 색이 짙은 뱀을 본 것처럼 몸이 굳었다. 내가 건방지게 대꾸한 탓에 그녀가 자존심을 상한 건 분명해 보였다. 내 약점을 보았으니 기회가 온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경고가 방 안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나는 뒤돌아 사라지는 경빈을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싹트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 목을 조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황궁에서 도망칠 테고, 만일 실패한다면 황제의 손에 죽을 테니까.

* * *

권 의관이 탕약을 들고 방문한 건 경빈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오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한 것인지 권 의관의 얼굴은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별일은 없었는가? 방금 경빈께서 아주 무서운 표정을 하고 나오시던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나는 덤덤히 대꾸하며 의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침에 권 의관을 만나 진맥을 하고 탕약을 마시는 게 요즘의 일과 중 하나였다. 나는 황제에게 받은 패물 중 일부를 그에게 내주었고 그는 내게 궁 안의 소식들을 알려주었다.

“산맥은 없는 듯하네. 슬슬 잡힐 시기가 되었는데 어의께서 확실히 하시겠지만, 아무래도 임신은 아닌 듯 허이.”

“그렇습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황상께서도 건강하시고 자네도 건강하니 곧 아기씨가 들 것이네.”

내가 상심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권 의관은 짐짓 위로하며 탕약을 내밀었다. 내가 황제에게 얻어맞을 때마다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마시던 탕약이었다. 이유 모를 발열과 구토가 일어날 때 이 약을 마시면 괜찮아졌다. 권 의관이 지어주는 약은 황제의 침전에서 받아 마시던 것들과는 전혀 달라서 역겨움 없이 잘 넘어갔다.

“자, 쭉 들이켜게. 몸의 원기가 워낙 상해있어서 아직도 다 회복되질 않았어.”

나는 맑은 차를 우려낸 듯 푸르른 빛이 도는 탕약을 단번에 들이켰다. 울렁거리던 속이 대번 가라앉았다. 싸한 통증이 아랫배를 스쳤지만 늘 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탕약을 마시면 가벼운 열이 났는데, 그 열이 한차례 식고 나면 몸이 제법 개운해졌다.

내가 탕약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권 의관이 쑥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어의께서 지어주는 약이 물론 좋기는 하겠지만, 내가 자넬 쭉 봐오지 않았는가? 내 자네의 체질에 대해서만은 이 황궁 안의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네.”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봐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대답에 그가 안심한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가 내 몸을 진료한 지도 어언 3년이었다. 그의 말대로 내 몸에 대해서는 아마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겨울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던 때도 그랬다. 내가 막연히 죽음을 짐작하고 있을 때, 그는 아무런 위로도 없이 굳은 얼굴로 먹을 것과 약을 주기만 했다. 아마 그도 내 죽음을 짐작했으리라.

권 의관은 내 맥을 다시 잡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아주 좋아.”

나같이 천한 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스러워하던 권 의관. 혹여나 죽을까 먹을 것을 가지고 오던 권 의관. 측은지심 때문인가 정이 들었기 때문인가? 태도가 바뀐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텅 비어있는 그릇의 밑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약그릇의 밑바닥이 일그러진 내 그림자를 담고 있었다.

“이대로 잘 관리하면 고장 나는 일은 없을 것이네.”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날 바라보며 웃는 권 의관을 향해 나 또한 마주 웃어주었다. 그는 분명 내 은인이었지만 그가 내 목숨을 붙여놓고자 노력했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안 보이던 그림을 예측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권 의관님.”

“응?”

탐욕과 선량함이 뒤섞인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적인가 동지인가? 말썽을 부린다던 그의 두 아들과 십여 년 전 세상을 떴다는 그의 아내를 떠올렸다.

“언제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하하.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을…. 이제 자네가 날 신경 써 줄 것 아닌가? 마마가 되실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넉살 좋게 말하는 권 의관의 얼굴에선 한 점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마음 약한 기회주의자의 얼굴은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들어 기분이 계속 좋아 보였던 것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문드러졌다. 내가 도망치거나 죽으면 황제가 그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계획을 그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모른 척 웃으며 일어나 그가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원한은 원한. 은혜는 은혜. 어디까지 갚을 것인지 고민해봐야 했다.

* * *

오후가 되자 황제의 명령을 받은 어의가 방문했다. 권 의관의 단출한 방문과는 달리 조수를 세 명이나 뒤에 이끈 거창한 행렬이었다. 진맥을 위해 내 손목을 받아드는 어의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산맥은 잡히지 않습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어의는 기력이 많이 상해있어 회복이 쉽지 않다며 권 의관의 진단과 비슷한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회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로선 조금도 놀랍지 않았지만 옆에 서 있던 내관은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확실한 겁니까? 황상께선 확신하고 계십니다. 실망스런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될 터인데.”

“그렇다고 회임하셨다 거짓을 아뢸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도 한 번 더 잡아 보시지요. 얼마나 지나야 확실해지는 것입니까?”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산맥이 잡혀야 합니다. 아직도 잡히지 않는다는 건 홑몸이라는 뜻이지요. 다음을 기약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내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원래 황제를 모시는 내관들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지만 요 근래 이어진 황제의 태도는 주변을 모두 불안에 빠뜨렸다. 광기 어린 황제의 행동 때문에 내관과 궁인 모두가 눈치를 보며 지나칠 정도로 몸을 숙였다. 황제가 내게 한 말들이 새어 나가지 않은 것도 그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말을 흘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다음 기회라….’

다음 기회라는 게 과연 있을까? 황제는 친왕의 체향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제가 친왕에게 날 권한다 해도 그가 함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각인이니 뭐니 하는 우스운 얘기까지 들었으니 더할 것이다. 한 달이 다 지나도록 그는 날 보러 오지 않았다. 내게 환멸이 나서, 이제 얽히는 것조차 싫은 것이리라.

소매를 만지작거리자 비단의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솜을 넣은 겨울옷은 따뜻하면서도 가벼웠고 장식을 위해 두른 모피도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로 이렇게 긴 나날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이 많아서 새로 알게 된 음식들의 이름이 지금껏 알고 있던 음식들의 숫자보다 더 많았다.

한겨울인데도 손끝과 발끝이 시리지 않고, 코끝이 차갑지 않았다. 머물고 있는 별궁은 완벽해서 손끝에 닿는 모든 것이 반듯하고 깨끗했다. 바닥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원 또한 훌륭했다. 작은 연못에는 금을 녹여 만든 듯 반짝이는 물고기가 헤엄쳤고 주변을 둘러싼 돌들은 산맥을 줄여놓은 듯 유려하여 보기 좋았다. 안개가 끼는 날이면 그야말로 구름이 산을 타고 흐르는 듯 장관이었다.

꿈 같은 한 달이었다. 황족을 살해한 암살자에게 주어지기엔 과분하기 그지없는 호사이기도 했다. 겨울은 지내기가 힘들고 먹을 것이 적어서 궁에 들어오기 전에도 지내기 힘든 계절이었다. 그런 계절이 이처럼 편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다.

‘꿈처럼 사라지겠지.’

황제가 돌아오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후사를 위해 베풀었던 호의와 가식은 모두 벗어 던지고 잔인한 맨얼굴로 날 후려칠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동안 돈이 되는 패물들을 훔쳐서 꾸려놓은 작은 보따리를 들고 황궁의 담장을 훌쩍 넘고 싶었다. 임신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니 이제 도망쳐야 하는데도 나는 망부석마냥 별궁에 앉아있었다.

황제가 내게 무슨 짓을 하기로 마음먹은 뒤에는 도망칠 수 없을 텐데도.

한겨울의 추위 속에 추적을 피하며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도주는 힘든 일이고, 패물을 처리하는 데에만도 애를 먹을 것이다. 내가 과거에 어두운 일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이 토막 나 있는 상태라 영 쓸모없었다.

추운 것이 싫고 배고픈 게 지겨웠다. 따뜻한 곳에서 떨어지는 눈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건 의외로 즐겁고 평화로웠다. 화로에 데운 공기는 포근해서 바깥이 얼마나 추운지 자꾸 잊게 되었다. 이처럼 안락한 생활이 얻어맞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제 고난은 끝나고 행복한 일들만 있을 것처럼 나 자신을 속이고 싶어졌다.

다정하게 대해지는 것이 이렇게나 우쭐한 기분이 드는 것이라고 알려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주변의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객관성은 사라지고 내 바람만이 남았다. 내 멋대로 친근감을 느꼈던 친왕과의 사이는 허상이었고 나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도망치지 못하고 죽게 된다 해도 괜찮은 게 아닐까. 기분이 특히나 우울할 때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도망친다고 해서 잡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리고 잡히게 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비참한 꼴로 전락하겠지. 그나마 날 지켜주고 있던 황제의 집착이 사라지면 정말 누구에게나 다리를 벌려야 하는 남창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한때는 그럴 수 있는 자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의 폭력을 버틸 수 없다. 죽을 때까지 거칠게 다뤄졌다면 모를까, 이처럼 안락한 생활의 맛을 알아버린 이상 이전으로 돌아가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번 겨울을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나약했다. 일단 한 번 얼었던 것이 다시 녹으면 가장 빨리 부패하는 것처럼, 얼어붙었다 녹은 땅이 더 질척하고 더러운 것처럼….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졌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보고 있는 사이 황제가 내관과 궁인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회임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황제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미쳐 있었다. 입술은 미소 짓고 있으나 눈동자는 시커멓게 가라앉아 이글거리고 있었다. 황제의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이 궁 안에 없을 것이다.

“폐하.”

“그래. 회임이 아니라는 얘기는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차가운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이냐?”

“송구하옵나이다.”

“괜찮아. 그래도 시기가 아주 좋으니.”

황제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주먹이 날아오지 않을까, 목이 잡혀 졸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황제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그는 내게 다가오지조차 않았지만 움켜쥔 그의 손을 보는 순간 몸이 떨렸다.

“너는 꼭 회임을 해야 돼. 이제 더는 버틸 수 없다.”

“송구하오나, 제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아이가 들어서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이해가 안 되는 건가? 괜찮아.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괜찮아. 아직 방법이 남아있으니.”

황제가 비틀린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해 보였다. 그는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길게 흘렸다.

“그래도 시기가 딱 맞아 떨어졌다. 아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네 말대로 말이야. 아이를 갖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지 말이다.”

“무슨, 무슨 뜻이신지요?”

황제가 내 양쪽 팔을 꽉 잡았다. 황제의 체향이 흉폭한 기세로 터져 나왔다. 지금껏 참은 것이 용할 정도로 황제의 체향은 울분에 차 있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양인의 체향에 술을 마신 듯 정신이 멍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황제가 단단히 잡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비단이 뺨을 눌렀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자 펄떡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냥은 못 주겠어.”

팔뚝을 잡은 손이 그대로 내 몸을 끌고 갔다. 침상 위에 밀쳐진 몸 위로 황제가 타고 올랐다. 익숙한 상황에 몸이 절로 굳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황제의 손이 내 목을 슬쩍 훑어 내렸다. 목이 졸리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 막혀왔다.

“겁먹지 않아도 돼. 아프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의 손이 내 옷을 풀어헤쳤다. 한 달 내내 황제는 나를 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회임하지 않은 것이 확실해지자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흐읏!”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양인의 체향에 성감이 자극당했다. 살갗이 오소소 일어나며 솜털들이 곤두섰다. 오랜만의 성교에 두려움이 일었지만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내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고 말았다.

내가 감히 떠올려 생각하지 못한 희망. 내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라는 것을 황제가 깨달은 뒤에도 죽이거나 내치지 않고, 계속해서 잘 대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쩌면 내 최후의 희망.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건가요?”

“죽여? 너를?”

황제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죽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목소리에서 진심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황제의 손아귀가 목울대를 건드리며 가볍게 움켜쥐었다. 살짝 조여진 목은 갑갑한 정도였지만 순식간에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정말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어.”

부드럽게 목을 움켜쥔 채로 황제가 내게 입을 맞췄다. 그와 몸을 접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차가움이 느껴졌다. 입 안쪽이 헤집어지고 작정한 듯한 체향이 몸을 덮었다. 독한 향기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제의 체향은 우아하고 지독해서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양인의 체향에 취해서 휘청거리는 사이 비단 스치는 소리가 났다. 겹겹이 껴입은 옷들이 하나둘 벗겨졌다. 어딘가 걸려서 뜯어지거나 헤지기라도 할까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옷들이 황제의 손에 뜯겨 침상 위로 던져졌다.

사막을 건너온 자가 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갈급한 태도로 황제가 내 몸을 핥았다. 손으로 움켜쥔 목덜미 아래쪽으로 따끔한 통증이 흘렀다. 조급하게 이를 박아오는 황제의 태도가 낯설었다.

“자, 잠깐. 잠시만요 폐하, 윽!”

“불쾌한 냄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내 몸에 배어 있는 친왕의 체향은 공들여 입혀놓은 가짜나 다름없었다. 친왕의 냄새가 나는 커다란 겉옷이나 처음 보는 물건들이 계속 내 옆에 놓였고 나는 그것들을 군말 없이 입고 썼다. 그 모든 것은 황제가 지시한 것임에도 그는 불쾌하기 그지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날 만나러 올 때마다 부드러운 태도를 취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기분 나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이를 가는 모습에선 분노만이 느껴졌다.

“그놈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손에 넣었지. 그리고는 그것이 쓰레기라도 되는 양 내버리고는 했어. 그래.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널 손에 넣고 내버린 것처럼 말야.”

“오해이십니다, 폐하. 전 친왕 전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극양인으로 발현한 뒤 그놈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황위에는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듯 내게 양보를 했어. 그러고는 내게 묻더군. 우리는 형제가 아니냐고 말이야.”

날카로운 웃음이 허공을 갈랐다.

“오만한 놈. 내가 가진 것을 탐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했던가? 천하의 그 어떤 부귀영화도 탐나지 않으니 형님이 다 가지시라고. 내 언젠가 그 말을 후회할 날이 올 거라 경고했는데.”

“폐하?”

“그래. 결국은 후회할 날이 올 줄 알았지.”

황제의 웃음소리는 진득하고 음습했다. 기쁜 듯도 하고 우울한 듯도 한 웃음이었다. 황제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체향을 내봐.”

“…폐하.”

“어서.”

황제 앞에서 체향을 내는 건 언제나 고역이었다. 내 체향을 맡을 때마다 황제는 좋지 않은 의미로 흥분했고 그 반동은 고스란히 내게 향했다. 근래 황제는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그건 내가 회임했다고 착각한 덕분이었다. 회임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통보받은 이상, 그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쭈뼛거리며 체향을 밖으로 내자 매캐한 냄새가 방을 채웠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황제의 얼굴을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차 바라보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손이나 손가락 같은 것들이 방금 전과는 다른 무게로 내 눈에 박혔다.

“무서워하지 마.”

어떻게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지? 몸이 저절로 굳어 딱딱해졌다. 흘러나온 체향도 덩달아 굳는 것 같았다. 벗겨진 비단 속에 파묻혀서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도무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의 정사이기 때문인지, 긴장한 몸이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넌 언제나 짐을 무서워하는구나.”

날 무서워하게 만든 것은 황제인데도 그는 나를 탓했다. 부드러운 침상에 파묻힌 몸 위로 익숙한 무게가 올라탔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는 마땅히 자신의 것을 취하는 자의 당당함이 묻어났다.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곧장 비문을 파고들었다.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몸속을 헤집자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허리가 확 접혀 들었다. 차가운 살덩이가 뻑뻑한 몸속을 가르고 헤집었다. 좀처럼 젖어 들지 않음에도 느끼는 곳을 자극당하자 숨이 차올랐다.

바르작거리는 내 몸을 황제가 꼼짝 못 하게 잡아 눌렀다. 내 체향이 짙어질수록 그의 눈동자가 흉험하게 번들거렸다.

“말해봐. 지금 기분이 어떤지.”

무서웠다. 그를 밀쳐낸 뒤 도망치고 싶었다. 강제로 끌어올리는 성감은 고통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노동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을 때가 새삼 편했다. 그는 내 과거 말고는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저 그에게 속한 노예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되었다.

“제 기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시잖아요….”

움직임이 뚝 멈췄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나치게 건방진 짓이었다. 얻어맞으며 다리 벌리던 노예 주제에 비단옷 좀 걸치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왜 이런 말을 입 밖에 낸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나를 감옥에 가둘까, 죽이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주제에.

하지만 충격을 받은 듯한 황제의 얼굴을 보자 마음속이 비틀렸다.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도 내 기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날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그저 집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우울함이 몰려왔다. 경빈의 말대로, 황제가 내게 이러는 것은 결착했기 때문에 생겨난 집착일 뿐이었다.

“그래. 신경 쓰지 않지.”

황제의 턱이 이를 악문 탓에 불거져 나왔다.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이 살기를 띠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헤매다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는 증오스럽다는 듯 날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신경 쓴다면 어떻게 널 붙잡을 수 있겠어? 왜? 그놈 성기를 한 번 빨아보니 못 잊겠어? 그에게 가고 싶어?”

“그런 뜻이….”

“닥쳐!”

분노의 방향이 이상했다. 몸이 꽉 끌어안겨 숨이 막혔다. 몸속을 휘젓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뜨끈한 귀두가 우악스럽게 박혀 들었다. 갑자기 당하는 일에 아무리 익숙하다 해도 잔뜩 긴장한 몸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굳어있는 내 몸이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에게 보내느니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어.”

“으윽! 큭!”

잔뜩 굳어있는 몸을 뜨겁고 굵은 성기가 억지로 가르고 들어왔다.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뒤로 한껏 젖혀진 목을 황제가 이로 물어뜯었다. 고통 때문에 뒤틀리는 몸이 완력으로 짓눌렸다.

“왜 저번처럼 젖지 않지? 저번엔 물이 줄줄 흘러서 다리를 타고 내릴 정도였잖아. 아. 내 동생이 없어서 그런가?”

상처 입어서 독기를 잔뜩 품은 목소리로 황제가 목을 잘근거렸다.

“설령 싫다 해도 이렇게까지 티를 내면 안 되지. 넌 짐의 노예니까. 언제라도 질척거리는 아랫도리로 준비하고 있어야지.”

황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음담패설에 정신이 멍해졌다. 황제는 행동이 거칠고 폭력을 휘둘렀지만 이처럼 저급한 말을 입에 담진 않았다. 그는 날 안으면서 언제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했고 이처럼 말로 희롱할 만한 여유 같은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이죽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내 허리를 잡고 몸을 밀어 넣었다.

“아! 으윽! 흑!”

“왜 이렇게 힘들어하느냐? 언제나 이 정도 간격은 있었거늘.”

너무 조여서 아프다며 황제가 인상을 썼다. 그는 자신이 낸 상처가 사라진 뒤에야 나를 다시 안았으므로 한 달 정도의 간격은 흔한 것이었다. 잠자리가 기껍지 않더라도 양인의 체향을 뒤집어쓰면 애액이 나왔지만 오늘은 유난할 정도로 안이 마르고 퍽퍽했다.

황제가 허리를 추켜 올릴 때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통증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억지로 내벽을 가르며 허리를 박아대던 황제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기름을 가져와라.”

방 밖에서 문을 지키던 내관이 부리나케 들어와 황제의 손에 기름병을 올려놓았다. 얇은 목을 지닌 기름병의 뚜껑을 열자 달큰한 꽃냄새가 진동했다. 병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황제가 병목을 내 비문으로 곧장 밀어 넣었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것이 뱃속을 적시는 감촉에 소름이 확 돋았다.

“으, 흐윽!”

“깊은 곳까지 잘 젖어야 내 물건을 먹어 치울 것 아니냐.”

“차, 차갑! 읏…!”

황제가 무심한 표정으로 기름병을 흔들었다. 병을 털어내듯 흔들 때마다 차가운 병목이 배 속에 미끈거리는 기름을 토해내었다. 배탈이 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랫배를 감싸쥐고 몸을 둥글게 말자 황제가 허벅지를 잡고 위로 밀어 올렸다. 차가운 기름병이 아랫도리 깊숙한 곳을 거칠게 헤집었다. 느끼는 곳을 노골적으로 문지르는 이물질의 감촉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황제는 기름을 완전히 부어 넣으려는 듯 병을 내 몸에 박은 채 이리저리 왕복했다.

딱딱하고 얇은 기름병의 감촉과 미끈거리는 기름의 난잡함에 배 속이 엉망으로 질척해졌다. 나도 모르는 새 울음과 신음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네 탓이다.”

황제가 속을 다 비워낸 기름병을 뽑아 던지며 음울하게 말했다. 뜨겁고 두꺼운 황제의 성기가 반쯤 들려있는 아랫도리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것들이 들어와서 소스라친 몸에 갑자기 뜨거운 성기가 밀고 들어오자 불에 타는 것처럼 배 속이 홧홧하니 달아올랐다.

황제가 허리를 처박을 때마다 미끈거리는 기름이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기름 때문에 젖기는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몸은 그대로라 황제의 성기가 내벽을 가르고 문지를 때마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살갗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 채 식은땀을 머금었다. 기름과 성기에 달궈진 내벽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며 황제의 성기를 조였다.

“아학! 악! 크윽!”

아랫배며 허벅지가 고통으로 떨렸지만 기름을 머금은 내벽은 황제의 성기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거친 움직임에 몸이 뒤로 죽죽 밀렸다. 느끼는 곳을 계속 찔리자 애액이 나오는 대신 성기 끝이 젖어 들었다. 그것이 맘에 들지 않는 듯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더 거칠게 허리를 찍어 박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름이 마르며 내벽이 찐득해졌다. 한 병을 전부 들이부었는데도 미끈거림을 잃은 내벽이 황제의 성기를 붙잡으며 달라붙었다. 뜨거운 성기가 처박힐 때마다 마찰 때문에 배 속이 뜨거워졌다. 잔뜩 부풀어 오른 힘줄이 내벽을 까슬하니 긁으며 빠져나가는 게 보일 듯이 느껴졌다.

성기에 딸려 움직이는 내벽이 잡아 뜯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황제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감히 밀칠 수가 없어 울음만 터져 나왔다. 음습한 웃음소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귓가를 울렸다. 흐윽거리는 숨소리가 내 것인지 누구 것인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이렇게 괴로워할 거라면 그냥 밀쳐내고 도망치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황제의 손에 길든 몸은 관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몸을 열었다.

“이런 짓을 당해도 너는 유순하게 다릴 벌리지. 날 좋아하니까. 그렇지? 흐읏.”

“아흑! 큭! 윽! 아, 아프…! 앗!”

“네가 가만히 있는 건 날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황제가 내게 물었다. 난 터져 나오는 비명 속에 대답을 회피했다. 내벽을 잔뜩 긁어대던 성기가 부피를 더하며 안을 빠듯하게 채워왔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버거운 행위에 잔뜩 겁먹은 몸이 벌벌 떨렸다.

황제가 습관처럼 내 목을 움켜쥐었다. 소스라치는 몸을 짓누르며 안 그래도 버거운 아랫도리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아아악!”

“죽여버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목을 움켜쥔 손은 부드러웠지만, 공포에 질린 몸은 죽음의 냄새를 맡고 멋대로 버둥거렸다. 눈앞이 시커멓게 깜빡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황제의 얼굴이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저 표정 다음에 일어날 일이 뭔지 나는 안다. 이제 내 몸에 폭력이 떨어지고 목은 조여 숨을 들이쉴 수 없게 될 것이다.

결착 당해 매캐하게 퍼져나가는 내 체향을 맡을 때마다 그는 나처럼 질식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했다. 빛을 잃은 검은 눈으로 내 몸에 멍을 새겼다.

황제의 체향이 지독한 안개처럼 너울거렸다. 메마른 기름 위로 뜨거운 정액이 끝도 없이 부어졌다. 줄어들기 시작하는 황제의 성기를 타고 하얗고 끈적한 것이 삐져나왔다. 황제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어.”

성기를 완전히 뽑아낸 황제가 내 밑에 깔려 있던 옷을 그대로 다시 입혔다. 체액으로 꿉꿉하게 젖은 옷이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꼼꼼하게 입혀주는 황제의 손길을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결착할 때마다 이성을 잃고 날뛰던 황제는 오늘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준비는 되었느냐?”

“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대꾸했으나 황제의 물음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온 내관이 고개를 땅에 처박을 듯 조아렸다.

“예. 폐하.”

“데려가라.”

“이리로 오소서.”

내관이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시커멓게 죽어있는 내관의 얼굴이 마치 시체 같았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황제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뒤돌아선 황제의 목덜미로 굵은 핏대가 서 있었다.

“…폐하?”

“따라가서 시키는 대로 하도록.”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한 발짝 발을 내딛자 질척한 정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지친 몸이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내관이 한쪽 팔을 부축해 왔다. 내관의 팔에 의지해 방을 나오자 눈에 익은 궁인이 흰 외투를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녀의 얼굴 또한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이제 걸을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요?”

내관이 등불을 들어 발밑을 비추었다.

“밖을 조금 걸으실 것입니다.”

내관의 발걸음이 별궁 밖을 향했다. 그 뒤를 따라 걷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황제와 정사를 나누고도 멀쩡하게 걸어 나온 게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는 실려 나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걸어서 처소로 돌아가는 게 정상이겠지. 임신이 아닌 것이 확실해졌으니 접객소의 내 처소로 돌아가는 것일까? 이제 춥고 배고픈 것은 싫은데, 그래도 황제가 때리지만 않는다면 견딜 수 있을 듯했다.

내관과 궁인들의 태도도 아직 공손해서 예전과는 달라지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있었던 곳이 황제의 별궁이므로, 후궁에게 적합한 새로운 처소를 내려주시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접객소가 있는 외궁 쪽이 아니라 모르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 그 추측을 부추겼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내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조아리기만 했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별들이 다 보였다. 땀이 식으며 몸이 차가워졌지만 황제가 하사한 흰 외투는 어렵지 않게 한기를 막아주었다. 나뭇가지가 미처 떨어내지 못한 눈들이 달빛을 머금어 새하얗게 빛났다. 삭풍에 잎이 다 떨어졌지만 단풍나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커다란 돌들을 박아 잘 정돈해 놓은 길은 썩 걷기 좋았다. 어쩐지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앞에 화려한 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드시옵소서.”

등 뒤를 슬쩍 미는 손에 미덥잖은 기색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에는 술 시중을 들기 위해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화려하고 위풍이 당당하여 주인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는 궁이었는데, 지금은 시커멓게 불이 다 꺼지고 오가는 이조차 없어 버려진 곳인 양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는 왜?”

“드시옵소서.”

등을 미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격한 정사로 체력을 소모한 몸이 내관의 힘에 앞으로 밀려났다. 주인이 떠난 폐궁인 듯 삭막한 분위기였으나 화로가 곳곳에 놓여 있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굳게 닫힌 창살 너머로는 숨죽인 인기척 또한 느껴졌다.

겁먹은 쥐 떼들이 몸을 잔뜩 구긴 채 숨어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궁 안으로 들어갈수록 세간이 망가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분노한 짐승이 날뛰기라도 한 것처럼 박살 난 가구와 그릇 등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사람이 잔뜩 숨어있는 것치고는 짙은 향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자욱한 향냄새 너머로 피 냄새가 풍기는 듯도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겨울 하늘 아래에서 오직 이 궁만이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괴기함을 뽐냈다.

“이쪽입니다.”

별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내전 앞에서,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황제의 명을 거부할 순 없으므로 내관이 이르는 대로 따라 왔으나 불길한 예감이 물씬 일었다.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이처럼 섬세한 궁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무문이었다. 정교한 꽃살 대신 기름을 먹이고 철판으로 테두리를 두른 육중한 나무문이 방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피 냄새가 나.’

날 여기까지 데려온 내관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은 의외로 부드럽게 열리며 그 속을 보여주었다. 코끝을 찌푸리고 서 있자 문을 연 내관이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 넘어뜨렸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뒤돌아 문을 밀었지만 육중한 나무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짓입니까?!”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시란 황명이옵니다.”

불빛 한 점 없는 시커먼 방 안에선 피 냄새가 났다. 밖을 가득 채운 향은 이 냄새를 지우기 위함임을 알 수 있었다. 누가 궁 안에서 감히 커다란 짐승을 잡아 해체라도 한 것인가? 이 궁의 주인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겠으나, 대체 왜 여기에 나를 들이민단 말인가?

“씨발, 이건 또 뭐야?”

익숙한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벽 높이 나 있는 창을 통해서 들어온 달빛이 방 안에 앉아있던 이의 모습을 비췄다. 잔뜩 헝클어진 모양새의 친왕이 시뻘건 숯처럼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친왕 전하.”

“형님? 아니…. 조금 다른데.”

피 냄새라고 생각했던 것은 친왕의 체향이었다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듯한 모양새의 친왕이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을 한 채 그 큰 몸을 일으켰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친왕 전하.”

양인의 희락기는 간헐적으로 찾아오기에 예측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번 시작되면 삼 일 이상을 침상에 묶였지만, 신상에 위험이 있을 땐 희락기가 오지 않으므로 생존에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는 친왕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양인은 희락기에 든다 해도 이성을 완전히 잃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눈앞에 음인이 있는데도 참을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자는 많지 않았다. 친왕 정도의 양인이 희락기를 홀로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 밀폐된 방 안에서 함께할 음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시기가 좋다는 것은 설마 이걸 말한 것일까? 친왕이 희락기라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짙은 극양인의 체향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방금까지 시달려 녹초가 된 몸임에도 성욕이 슬금슬금 기어오를 정도로 강렬한 체향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뒤로 갔다. 단단한 나무문에 몸을 기대자 차가운 냉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친왕의 모습에서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황제는 내가 친왕과 자길 원하는 걸까? 믿고 싶지 않았지만, 희락기의 양인에게 음인을 보낸다는 한 가지 뜻만을 의미했다.

명치 안쪽이 차갑게 식어서 돌처럼 굳어간다. 방금 전까지 내 몸속을 파고들었던 건 내다 버리기 직전의 미련이었나? 하잘것없는 내 처지에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그에게 기대를 갖지 말고 그냥 바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럼 잡히더라도 목숨은 잃을지언정 작은 착각 하나 정도는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단단하고 거친 손가락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귓가로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흉흉한 기세로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정욕으로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친왕의 눈동자는 의외로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형님의 냄새가 나는데.”

황제는 나를 씻기지도 않고 여기 보냈다. 비문에서 흘러내린 정액이 다리를 축축하게 적셨다. 옷을 흠뻑 스며든 애액이며 기름 향기 같은 것이 그대로 남아 진동하고 있었다. 친왕은 콧등을 찌푸리며 경멸 가득한 눈초리로 날 노려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황제가 보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오라 했던가? 아니면 나오지 말라고 했나? 내관이 뭐라 말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황제는 날 어떻게든 굴릴 권리가 있지만, 그렇다면 아무런 기대도 갖지 말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냥 죽여버리는 게 나았을 것이다. 회임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집착하며 안지 말고 바로 여기 보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배신당했습니다.”

난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이 감히 주제넘은 것인가 잠시 고민해보았다. 상관없었다. 주제넘은 짓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뒷골을 타고 오르는 열기는 분노와 실망이었다. 절벽에서 떠밀린 것처럼 발밑의 땅이 느껴지지 않았다.

친왕의 시커먼 눈동자는 묘하게도 차가웠다. 그는 내가 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배신당해?”

난 대답하지 않았다. 친왕이 숨을 내쉴 때마다 머리카락이 날려 간지러웠다. 그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한 소릴 하는군. 그냥 네가 걸레인 것뿐이잖아.”

걸레로 여기저기 닦는 것이 어째서 배신하는 행위냐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다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나무문에 등을 기댄 채 죽 미끄러지자 친왕이 기다렸다는 듯 내 몸을 받아들었다.

“내 음란한 형수님.”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내 절망감을 부추기려는 듯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아. 이 사람들에게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구나. 진즉 알아챘어야 했는데. 나는 사실 눈치가 아주 좋지 않은 듯했다.

뜨거운 손이 옷자락 사이로 들어왔다. 허벅지 안쪽을 꾹꾹 누르며 들어오는 손은 거친 못이 박혀 있어 까끌하고 간지러웠다. 퍼득 몸을 떨며 뒤로 향했지만 기대고 있는 문이 덜컹거릴 뿐이었다. 가슴 속에 울컥 뜨거운 게 치밀었다.

“건드리지 마.”

“문은 잠겼고. 형수님 아래는 이렇게 젖어있고. 시건방지게 말은 짧고.”

그는 나를 만지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듯했다. 희락기에 황제가 보낸 선물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귀족이거나 그가 주의해야 하는 신분의 음인이었다면 아까처럼 더러운 말들을 귓가에 속삭이지도 않았을 테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가슴을 묵직하니 막고 있던 덩어리가 툭 하고 터졌다.

“놔! 놓으라고! 건드리지 마!!”

나를 끌어안고 있는 친왕을 정신없이 밀치고 주먹으로 후려쳤다. 팔목이 잡히고 다리 사이로 커다란 몸이 들어와 제압되었다. 압도적인 체격과 힘의 격차에 내 발버둥은 그저 앙탈일 뿐이었다.

뜨겁고 단단한 몸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갑작스레 현실이 정수리로 떨어졌다. 친왕의 진한 체향과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소리가 살갗에 끈적하니 달라붙었다. 여기서 친왕에게 안기는 건가? 정말로? 그에게 안긴다고?

“하, 하지 마. 하지 마세요.”

친왕이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이를 갈았다.

“그럼 씨발, 여긴 왜 들어왔는데?”

“무서워요. 제발, 무섭습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날 누르고 있는 친왕이 너무 무서웠다. 누구에게도 안기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궁 밖으로 도망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살고 싶었다. 날 끌어안은 친왕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내 몸까지 뜨끈해졌다.

“너한테서 형님의 냄새가 나.”

친왕이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쳐다보았다. 내 허벅지는 황제의 정액이며 기름이 흐르고 굳어 꿉꿉하게 젖어있었다. 걸레라고 비하하는 발언에도 대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모양새였다. 부끄러움과 참담한 심정이 솟구쳤다. 혀라도 끊어버릴까.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친왕이 피워내는 체향이 너무 강해 내가 죽어도 밖에선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때 무심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내가 싫어?”

날씨가 어떠냐고 묻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친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가 옷을 입혀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지금 친왕이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얼굴이 타오를 듯 열이 올랐다.

친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힘들어?”

“…힘듭니다.”

당장이라도 누워서 잠들고 싶었다. 황제에게 시달린 몸은 지치고 피곤했다. 친왕은 이제 자신의 손바닥 대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서워서 그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희락기에 들어선 친왕의 체향은 지독한 것이었다. 싫고 무섭다고 하면서도 몸은 달큰하니 끓어오르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 것 같았다.

“향을 내봐.”

“전하?”

“네게서 나는 냄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형님이랑 붙어먹자마자 여길 오다니. 그렇게 급했어? 향을 내봐. 네놈의 그 매캐한 향을 맡으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희락기에 들어선 양인 앞에서 음인이 체향을 내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가 아닐까? 내 향이 아무리 지독하다지만 본능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심스런 시선으로 친왕을 힐끔 바라보자 그는 피곤하기 그지없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경빈이 하고 간 말 중에 의문으로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친왕이 황제에게 나를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우습지만 그녀의 그 조롱은 희망이었다. 어쩌면 변덕이 아니라 진심이 아닐까? 진심은 아니더라도 장난은 아니지 않을까?

“폐하께 절 달라고 하셨나요?”

“아니. 네가 그냥 발정 나서 여길 온 거지. 애새끼 가져보려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자 친왕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 지금 네가 여기 있는 것 아니냐?”

“왜죠?”

“반말이었다, 존대였다 아주 제멋대로인 노예 새끼.”

친왕이 짜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경멸에 가득 차 있었으나 한편으론 불타는 듯 이글거리기도 했다. 거칠게 내쉬던 숨이 처음보다는 진정되어 있었다. 희락기에 들어섰는데 다른 양인의 체향이 나는 사람이 영역 안에 들어왔으니 물론 기분이 좋지 않겠지. 친왕의 체향이 잔뜩 풍기는 장소를 한 달 넘게 참아낸 황제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체향을 흘렸다. 황제가 증오스러워하고, 친왕 또한 좋지 않다고 말했던 내 매캐한 체향은 오늘따라 잘 맡아지지 않았다. 내 향이 어떤 냄새였더라? 분명 소나무 잎을 불에 태우는 것처럼 코가 맵고…….

“향긋해.”

친왕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는 깊은 숲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풀어진 얼굴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짜증이 사라지고 열락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얼굴을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향기롭다느니….

“달콤해.”

달콤하다느니.

다리 사이로 파고든 친왕의 고간이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게 옷 너머로도 느껴졌다. 친왕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한 얼굴로 내게 입 맞춰왔다.

부드러운 혀가 입술을 핥고 치열을 훑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입천장을 간질이는 뾰족한 혓바닥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귓가를 쓰다듬고 이마를 쓰다듬는 거친 손이 다정하고 상냥해서 그가 내게 했던 모진 말들이 다 거짓인 듯싶었다. 거칠어진 숨이 왠지 달큰하게 느껴졌다. 친왕이 달콤하다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셔야…. 전하?”

“달아.”

체액 때문에 더러워진 친왕의 손이 내 비문을 밀고 들어왔다. 숨을 참으며 몸을 웅크리자 쓰라린 내벽 깊숙이 들어온 손이 갈퀴처럼 휘어졌다. 비명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자 커다랗고 거친 손이 잘 참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왔다. 몸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조심스레 안쪽의 정액을 긁어내렸다. 나도 모르는 새 밑을 조여 담고 있던 황제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뺨으로 떨어졌다. 눈가를 두드리고 코끝을 간질였다.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주저하던 것이 다시 파고들어 입 안을 먹어치웠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향이 났다. 누가 머리를 휘젓는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불쾌하지 않은 종류의 어지럼이었다.

“왜 울어?”

내가 울고 있었나?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자 눈물이 묻어났다.

“그냥. 그냥 좀…. 이런 건 처음이라.”

“형님에게 버려진 게 슬퍼서 그래?”

그랬나? 황제에게 버려진 게 슬퍼서 눈물이 나는 건가? 아니다. 슬픔보다는 분노가 더 컸다. 내 주제에 그런 마음을 품어도 된다면 말이지만. 나는 그에게 화가 났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이를 갖고 황후가 되고 싶었는데, 실패해서 우는 거야? 나랑 자는 게 싫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는 가지고 싶었지만 실패해서 우는 건 아니었다. 황제는 내게 어찌하라는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여기로 가라고만 했다. 황제는 언제나 상처 입은 얼굴을 했지만 자신의 상처만 신경 쓸 뿐 내가 받을 상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괜찮았다. 나는 죄인이고 하찮은 신분이니 그런 상처쯤이야 견뎌 넘길 수 있었다. 아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정하게 달래왔다.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 쓰다듬었다. 희락기에 들어 음인을 품에 안은 양인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하고 다정한 태도였다. 그는 달다고 말해주었지만 역시 내 체향은 양인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종류는 아닌가 보다.

어두운 방 안에서 친왕의 얼굴은 짙은 음영 속에 묻혀있었다. 두 눈동자만이 물기를 품은 달처럼 빛났다. 황제가 질색하는 극양인의 황족. 내가 각인했다는 의심을 받게 한 남자.

“전하.”

나는 고개를 숙여 친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향을 더욱 풀며 그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던 친왕의 손이 움찔 떨렸다. 문득, 피 냄새라고 생각했던 친왕의 체향이 무척이나 달콤한 향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알아차렸다.

친왕이 지금 내게 보이는 다정함은 그의 변덕 때문이리라. 희락기에 들어 욕정이 치밀어서 눈앞의 음인을 내치지 못하는 것뿐이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다정함에 기대고 싶었다.

“저는 체향도 지독하고 아름답지도 않지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게 아이를 주시겠어요?”

나는 양인에게 애교를 부려본 적도, 누군가를 유혹해 본 적도 없지만 지금 친왕을 꾀어내는 것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보다 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친왕은 어울리지 않게도 말간 얼굴로 나를 보듬고 있었지만, 내 비문을 긁어내는 손가락은 집요할 정도로 안쪽까지 파고들어 황제의 흔적을 긁어내고 있었다. 결착을 한 탓에 억지로 벌어졌던 곳을 손끝으로 건드리자 둔통 같은 쾌감이 허리를 두드렸다.

“흣!”

작은 신음으로 충분했다. 참고 있던 것을 내뱉는 순간, 친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끝에서만 드러나던 그의 집요함이 시뻘건 색채를 띠고 눈앞에 드리워졌다. 달콤한 피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색깔이 보일 것처럼 지독한 극양인의 체향에 머리가 녹는 듯했다.

“제기랄…!”

“으읏. 큭!”

다리 사이를 긁어내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친왕의 남근이 귀두를 들이밀었다. 뜨거운 체온에 비문이 놀라 벌름거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박아댔던 내벽으로 친왕의 성기가 사정없이 처박혔다. 아직 다 밀고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커다란 성기의 압박감 때문에 숨이 턱 막혀왔다. 친왕이 잡아 벌린 허벅지가 한계에 달해 벌벌 떨었다.

“아! 아파! 아앗!”

“엄살 부리지 마. 헐거워서 조이는 기분도 안 드니까!”

친왕이 이를 득득 갈며 허리를 조금 빼냈다. 쪼는 듯이 달콤한 입맞춤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안심하라는 듯 조심스레 둔부를 쓰다듬고 주무르던 친왕이 허리를 잘게 쳐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희락기를 맞아 커다랗게 부푼 성기가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다는 듯 꺼떡거렸다. 갑작스레 시작된 정사에 지친 몸이 비틀거렸다.

“빌어먹을! 네가 해달라고 한 거잖아.”

“네, 전하. 네, 으으!”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을 뜨거운 살덩어리가 밀치고 들어왔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더 깊이 성기가 처박혔다. 뜨거운 열기에 배 속이 휘저어졌다. 극양인의 체온이란 이런 것일까? 배 속에서 숯덩이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

친왕이 짐승 같은 신음을 낮게 흘렸다.

“다 들어갔어.”

“흐윽! 흐으… 읏!”

“내걸 다 먹다니 어떻게 된 구멍이야. 큭!”

친왕이 아래쪽을 매만지며 포만감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정신이 나갈 듯한 고통에 친왕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움켜쥔 주먹이 벌벌 떨렸다. 친왕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떨기만 하자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기조….”

“……무슨?! 아!”

“기조야.”

여기저기 못이 박혀있는 커다란 손이었다. 내 목숨을 단번에 끊어낼 수 있는 손이 성기를 잡고 치대자 공포인지 성욕인지 모를 것이 아랫배를 진탕시켰다. 내가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는 젖은 신음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친왕의 옷자락을 움켜쥐자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딱딱한 손끝이 귀두 끝을 슬쩍 긁으며 한 손에 감아쥐었다. 친왕의 손가락 마디마다 박여 있는 굳은살이 기둥을 긁고 조이며 왕복했다. 음인에게 남근이란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또한 움켜쥐고 쾌감을 취하는 일이 거의 없는 그 물건을 친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움켜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절정을 맞은 성기가 정액을 쏟아냈다. 아랫배를 뭉근히 울리는 쾌감에 힘을 잃고 늘어지자 친왕이 다시 성기를 잡아 치댔다.

“내걸 문 채로 가니까 장난 아니게 꿈틀거려. 알아?”

“아. 아앗! 아! 그, 그만…! 아직!”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몰아친 쾌감에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뒤로 젖혀진 허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안쪽에 든 친왕의 물건을 조였다. 느끼는 부분들이 제멋대로 친왕의 성기와 부딪치며 쾌감을 자아냈다. 비명이 터졌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황제의 물건을 받느라 한껏 예민해졌던 내벽이 친왕의 성기까지 물게 되자 물을 줄줄 흘리며 철벅대기 시작했다.

“아! 아! 아아!”

“질척거려. 후윽.”

인내심이 다한 얼굴로 친왕이 허리를 쳐댔다. 주욱 길게 내벽을 비비며 빠져나간 성기가 단번에 다시 처박혔다. 딱히 느끼는 곳을 노리고 박는 게 아닌데도 커다란 성기가 내벽을 죄다 비벼대는 통에 쾌감이 몰아쳤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나오지 않던 애액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질질 흘렀다. 철벅거리며 살을 치대는 소리에 귀가 먹을 것 같았다. 견디기 힘든 기분이 되어 버둥거려도 벗어나기는커녕 허벅지를 움켜쥔 손아귀만 더 단단해졌다.

굵고 두꺼운 성기가 아랫배를 난도질하며 들어올 때마다 허리며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지나친 쾌감에 벌어진 입에서는 말도 신음도 아닌 것들이 흘러나왔다. 등을 기댄 나무문이 쿵쿵 울릴 때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절정으로 치달았다.

아무리 밀어내도 친왕은 봐주지 않고 허리를 처박았다. 등줄기를 타고 간지러운 거미줄 같은 것이 퍼져나가는 듯했다.

“으아아! 아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희락기에 든 것은 친왕이지 내가 아닌데도 지나칠 정도로 느끼는 몸이 이상했다.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친왕이 아랫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뭉근하니 찍어 올리자 눈앞이 또 새하얘졌다.

바닥으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애액뿐만 아니라 쾌감을 주체하지 못한 성기가 물 같은 정액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생식기가 망가진 것 같았다. 사정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버둥거리자 친왕이 귀찮다는 듯 무릎 밑을 잡아 올렸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자 몸이 뒤로 젖혀졌다. 친왕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리자 그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허공에 뜬 몸이 흔들리자 처박힐 때마다 무게가 더해져 더 깊이 쑤셔졌다. 지금껏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깊은 곳을 친왕의 귀두가 찌르고 또 찔렀다.

“안 돼! 이, 이런 건 이상…! 아아!”

친왕은 아직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그의 성기가 내 몸을 쑤실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목이 조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 살갗이 예민해졌다. 끝나지 않는 쾌감이 고문 같았다. 아무리 울부짖으며 애원해도 돌아오는 것은 입을 막는 친왕의 입술뿐이었다.

커다란 남근이 몸속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안쪽에 남아있던 찌꺼기가 밀려 나왔다. 두꺼운 귀두가 내벽을 찌를 때면 재촉받기라도 한 것처럼 애액이 질컥질컥 솟았다. 연이은 정사에 체력은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친왕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단단한 성기를 흉흉하게 곧추세웠다.

“지금 몇 번이나 간 건지 알아? 무슨 약이라도 하고 온 건 아니지?”

친왕이 귓불을 깨물고 빨며 중얼거렸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몸이 파드득 휘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무슨 약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예민했다.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가락의 감촉에도 저릿저릿 간지러운 기분이 솟구쳤다. 계속되는 쾌락에 지쳐서 눈이 절로 감기는데도 안쪽을 찔러대는 성기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눈앞이 명멸했다. 이런 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발 그만…. 아!”

“달아.”

친왕이 내 뺨을 핥으며 말했다.

“통째로 먹어치우고 싶어.”

내가 달콤한 과자를 입에 문 채 넋을 잃은 것처럼, 친왕 또한 넋을 잃은 듯했다.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이든 다 삼켜버리겠다는 듯 그는 욕심 사납게 내 살을 한껏 물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난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시야는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아랫도리에선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위쪽으로만 숨을 겨우 내쉬는데도 친왕은 만족할 줄 모르고 허리를 부닥쳐 왔다. 난폭한 표정을 지은 잘생긴 얼굴이 계속해서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흉포한 아래쪽이 미안하다는 듯 굴면서도, 말투는 험악하고 날카로웠다.

그만하라는 말을 해도 그만둬주지 않아서 나는 이제 말도 잃고 그가 휘두르는 대로 흔들리기만 했다. 아랫도리는 이제 조여지지도 않았다. 내벽이 찰기를 잃고 덜덜 떨리기만 하는데도 친왕은 계속해서 성기를 밀어 넣고 흔들었다. 희멀건 한 정액이 안쪽 가득 흘러넘쳐 움직일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아무리 안아도 냄새가 나.”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누구의 냄새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황제의 체향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친왕은 계속해서 자신의 체향을 밀어 넣으며 못 견뎌 했다. 매캐하다고 생각했던 내 체향도 이제는 잘 맡아지지 않았다.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 지나도 친왕의 체향이 지워지지 않을 듯했다.

딴생각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친왕이 내 유두를 비틀었다. 하도 빨아대서 두툼하게 부풀어버린 유두가 쓰라렸다. 평소와는 달리 내 몸에 있는지도 몰랐던 성감대들이 죄다 저릿저릿 통증을 호소했다.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 들이닥칠 때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자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언제나 내 몸을 좀먹게 했던 통증들이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내 위에 있는 것이 황제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별것 아니네.’

실소가 났다. 다른 이와 잔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도, 땅이 꺼지지도 않았다. 희락기의 극양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이 고통스럽진 않았다. 덤덤함 속에서 나는 미약한 복수의 쾌감마저 느꼈다.

내 몸에 배어 버린 친왕의 체향은 일 년이 지나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향을 잔뜩 머금고 황제를 마주하면 그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친왕의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중간중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던 것도 같은데, 친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대답할 힘도 없어 늘어져 있자 친왕이 괜히 성질을 부리며 재차 물었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어올 것 같아 입을 벌려 보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바람 새는 듯 죽어가는 소리만 흘러나오자 친왕이 흠칫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허약해 빠져 가지고.”

투덜거리는 친왕의 말에 몹시 억울해졌다. 난 음인치곤 강건한 편이었다. 보통의 음인이었다면 벌써 곡소리가 났거나 실려 나갔을 것이다. 나도 좀 실려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잘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름 뿌듯하던 와중에 허약하단 소리를 듣자 기운 없는 와중에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벌써 몇 번이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내 아랫도리에는 아직도 친왕의 성기가 박혀있었다. 간헐적으로 흔들면서 계속 정액을 싸지르는 통에 침상이고 바닥이고 난잡하게 젖어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시달린 것치고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와 여러 번 색사를 나눈 탓에 녹초가 되었지만, 황제의 화풀이를 받을 때처럼 따갑거나 쓰라리지 않았다. 애액도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나와서 따로 윤활제를 들이붓지 않아도 매끄러웠다.

자꾸 달콤하다고 말하는 친왕의 속삭임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잠자리에 끌어들인 음인에게 던지는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겨우겨우 들어 올려 친왕의 목에 두르자 이를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극하지 마. 정말 죽고 싶어?”

“아이는… 벌써, 생겼을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해도….”

몸속에서 친왕의 성기가 부풀 때마다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쾌감의 끝에서 제정신을 지키는 건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았다. 몇 번이고 추락한 뒤 억지로 끌어올려지고, 다시 떨어지길 반복했다.

친왕의 입에서는 얄미운 소리만 나왔지만 입맞춤은 다정했다. 황홀한 듯 풀려있는 눈을 보고 있으면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달콤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내게는 더 달콤하게 들렸다. 매캐하다더니, 이제 와서 이럴 건 뭔가.

“정말로 각인이면 좋을 텐데.”

[각인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네가 음인이라 다행이야. 평인이라면 내 물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테니.”

[네가 음인이라면 좋았을걸. 난 분명 양인으로 발현할 테니까.]

꿈결같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앳된 아이의 목소리였다. 조각났던 기억들이 점점 큰 형체를 취하는 것을 나는 쾌락의 잔향 속에서 바라보았다. 만화경의 가루마냥 흩어져 있던 것들이 하나로 뭉쳐 단단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경이로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검을 휘두르던 아이와, 날 무서워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기세에 넘어가고 마는 나. 친구 같기도 하고, 스승 같기도 하던 그 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날 기억하지 못하고 나 또한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이 떠오르자 말간 눈을 한 어린애의 모습이 선명해서 가슴 한쪽이 뜨끔거렸다.

“제길. 더 박고 싶은데.”

“안 돼요. 정말로 죽…. 흐읏!”

지독한 쾌락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젊음으로 가득 찬 육체가 지칠 줄도 모르고 내 허리를 감아왔다. 침상 위가 마치 형틀처럼 느껴져 두려움이 몰려왔다. 비척이며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친왕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는 덕에 보채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형님이 널 때린 이유를 알 것 같아.”

무슨 소린가? 멍하니 바라보자 친왕이 이를 득득 갈며 말했다.

“분명 몸 멀쩡히 내보냈다간 여기저기 아랫도리를 굴려댈 것 같아서겠지. 이렇게 음란한 구멍이라니. 어떻게 안심하고 내보낼 수 있겠어?”

대꾸할 기력도 가치도 없어 친왕의 얼굴을 노려보자 그가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놈의 냄새를 풍기기라도 했단 봐. 전부 죽여버릴 거야.”

괜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나 같은 음인을 원하는 건 이 성격 이상한 형제뿐이었다. 내가 체향을 내지 않으면 대부분의 양인이 나를 평인이라 생각했다. 친왕이 또다시 자신의 체향으로 나를 덮었다. 그의 음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양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제가 적선하듯 묻혀놓은 체향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표식을 새기듯 퍼부어진 체향에선 소유욕이 느껴졌다.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친왕이 보호해줄 거라는 믿음이 들어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어둠을 틈타 들어오는 자객을 걱정하거나, 끼니에 독이 숨겨져 있을까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 * *

기절하듯 잠들었지만 드문드문 정신을 차릴 때마다 먹을 것이 입술을 두드렸다. 문은 잠겨있었지만 어디로 들어온 것인지, 삼키기 쉬운 죽이나 음료가 친왕의 손에 항상 들려있었다.

마치 아기라도 된 것처럼 그가 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으며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한 차례 열락이 지나간 공간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친왕의 체향을 내가 뒤집어쓴 것처럼 친왕 또한 내 향을 뒤집어썼다. 바보같이 경계가 허물어져 친왕의 달콤하다는 말에 마음껏 체향을 뿜어낸 덕분이었다.

피 냄새와 매캐한 냄새가 뒤엉킨 방 안의 공기는 그야말로 가관이었지만, 그야말로 친숙하고 편안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친왕의 과거와 살육이란 점에서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과를 갈아 만든 과실주는 달콤했고 고기를 갈아 넣은 가지 튀김은 담백하고 바삭거렸다. 친왕이 먹기 좋게 발라놓은 생선과 전복 등이 배고픈 위장으로 하염없이 들어갔다.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친왕이 입가에 묻은 음료를 닦아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락기에 이런 식으로 성욕을 풀어본 건 처음이야.”

“음인이 많으시다 들었습니다만.”

“누굴 안아도 향이 역해서 구역질이 났어. 거의 평인 여성만 안았지만 희락기를 견딜 수 있는 평인 같은 건 없으니까.”

친왕이 코끝을 찌푸렸다.

“음인이란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존재인가 싶어 환멸이 났었는데.”

“…제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와 각인했기 때문이라고 황제께선 의심하셨죠.”

“각인일 리는 없지. 우리가 만난 건 일 년밖에 안 되는데.”

‘우리.’

달콤한 울림이었다.

“제가 임신하지 못한 이유는 피임약 때문입니다.”

“이상한 소릴 하는군. 황궁 안에선 그런 약을 쓰지 않아. 다른 놈과 눈이 맞으면 그냥 내쳐버리지. 아이의 출생을 속일 수 없으니까 그런 점에선 관대한 편이라.”

“황제께서 내린 약은 아닙니다.”

“황제가 내린 게 아니라면 감히 누가?”

친왕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권 의관이 건네주던 탕약을 떠올리자 입 안이 씁쓸해졌다. 잔에 남아있던 사과주를 한 번에 다 들이켜자 친왕이 기다렸다는 듯 내 몸을 끌어안았다.

“말해. 누가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질렀지?”

“말하면 어쩌시려고요?”

“죽여야지.”

당연하다는 듯 친왕이 대답했다.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게 약을 먹인 이유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화전을 일굴 때, 마을에 의원을 남편으로 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의원과 자식들은 모두 도성에서 지냈는데 그녀만은 어째선지 화전촌에 남아있었다. 바깥은 위험하니 안전한 화전촌에 숨겨둔 것이었으리라.

황제와 친왕의 군대가 마을을 불태울 때 그녀 또한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그녀가 권 의관의 아내일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의관이 내게 피임약을 먹인 이유였다. 그의 아내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닌데 왜 내게 그런 짓을 한 걸까? 설령 원한을 가졌다 해도 이상한 방법이었다. 나는 그가 주는 약을 아무 의심 없이 먹었으니 비참한 최후를 선사하는 것쯤 아주 쉬울 터인데.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의 아이를 낳았겠지요.”

날 끌어안은 친왕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댄 채 도리질 쳤다.

“그런 소리 말아.”

“친왕께 절 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심술궂은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듯 그가 입을 맞춰왔다. 질척하니 얽히는 혀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정신이 얼추 들고 체력이 회복된 탓인지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빨랐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친왕이 성기를 들이밀었다. 위쪽으로 굽어 있는 그의 굵은 성기가 마주 보고 안을 때와는 달리 내벽의 반대쪽을 긁으며 깊이 박혔다.

“크윽!”

“제대로 조이지도 못하고. 액만 질질 흘려대네.”

등 뒤에서 키득거리는 친왕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낮았다. 체력이 조금 채워졌다고는 하나 완전히 혹사당한 내벽은 그의 말대로 제대로 꿈틀거리지도 못하며 애액만 흘려댔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친왕의 성기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안으로 푹푹 파고들었다.

손을 뒤로 뻗어 흘러내리는 애액을 손끝으로 문지르자 친왕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씨발, 어디서 이딴 걸.”

희락기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친왕의 숨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삽시간에 두꺼워진 성기가 속도를 높여 내벽을 콱콱 문댔다. 조일 힘이 없어 한껏 풀어져 있는 내벽인데도 두꺼워진 친왕의 성기가 한계까지 들어차 숨이 막혔다.

“너무, 너무 커.”

“빌어먹을. 이 요사스러운 새끼가.”

애액을 문지르기 위해 뻗었던 손이 친왕에게 잡혀 뒤로 당겨졌다. 상체가 뒤로 휘며 반쯤 일어서자 방금과는 다른 각도로 성기가 박혀왔다.

“아! 아! 아아!!”

친왕이 이를 득득 갈며 허리 짓을 천천히 했다. 처음 안겼을 때처럼 조금 문지르기만 해도 절정에 닿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때문인지 자극이 부족해지자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제발, 빨리.”

“나도 이제 지쳤어. 가고 싶으면 네 능력껏 조여봐.”

“으흑, 으…. 아아.”

있는 힘을 다해 내벽을 조였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벅지가 부들거릴 정도로 힘을 줘도 친왕의 성기를 꽉 조일 수가 없어서 몸이 더 달아올랐다. 채워지지 않는 자극에 허리를 흔들자 애액에 젖은 친왕의 성기가 느릿하니 빠져나갔다.

“나, 제발, 아!”

“내 좆으로는 다 차지도 않겠네. 손가락이라도 몇 개 더 넣어주랴?”

거친 손가락이 이음새를 어루만졌다. 공포로 인해 확 굽어드는 등 위로 친왕이 상냥한 척 입술을 떨어뜨렸다.

“소름 돋았어. 꼴리게.”

“저, 전하, 전하.”

“아. 잘 들어가네.”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비집고 들어왔다. 식은땀이 흐르며 귀가 멍해졌다. 머리꼭지까지 달리는 쾌락에 아랫배며 상체며 할 것 없이 모두 떨렸다.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벌벌 떨며 버둥거리자 친왕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빼고 허리 짓을 했다. 절정에 달한 몸에 박혀 드는 성기의 움직임으로 인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학!”

“힘도 못 주는 게, 윽! 다시 벌름거려. 씨발.”

절정감이 가라앉기도 전에 더해진 쾌감에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무릎으로 침상을 밀며 꿈틀거려도 안쪽에 박힌 성기가 부풀어 빠지지 않았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희락기에 든 극양인을 받아내는 건 성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아직까지 쾌감을 쾌감으로 느끼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달콤하다 말하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부드럽게 안아오며 달콤하다 말을 하면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사라졌다.

수도 없이 결착하며 정액을 받아냈다. 내 몸이 정상이라면 분명 회임했을 것이다. 침상에 엎어진 채 아랫배를 만지작거리자 감상적인 느낌보단 왠지 좀 튀어나와 있는 듯한, 친왕의 흉물스런 성기의 존재감만 느껴져 소름 끼쳤다.

“내 물건이 만져져? 거기까지 들어간 게 느껴져?”

“……아뇨. 지금 이건 좀…. 좀 징그럽네요.”

“징그러워?”

친왕이 기분 상한 목소리로 따지듯 몸을 일으켰다. 정액이 질척거리며 흘러나오는 감촉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징그럽다니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내 물건이 징그럽다고?”

“징그럽습니다, 징그러워요…. 저, 저리 치우세요!”

말 그대로 징그럽게 커다란 성기가 눈앞에서 꺼떡거렸다. 현실감이 없어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저 물건이 내 몸에 들어왔단 말인가. 정사가 끝나고서도 빼지 않고 내 몸에 담가놨단 말이지. 저런 흉물을?

쳐다보기도 싫어 친왕의 성기를 외면하자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잡아 왔다.

“빨아봐. 아래 입은 이제 제구실을 못 하니 위 입으로 빨아서 만족시켜 봐.”

“방금 먹은 게 소화도 안 됐는데요. 토할 겁니다.”

“토한다고? 내 물건이 토할 만큼 역겨워?”

꼬투리를 잡아대는 친왕의 태도에 급속히 피곤해졌다. 순간 꼴도 보기 싫어져서 이불에 얼굴을 묻자 친왕이 발끈하며 추근거렸다. 추근거리는 말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고 친왕의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엄하다 말하면서도 친왕은 내 뒤통수에 계속해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간지러운 감촉에 키득거리는 사이, 나는 내가 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에 잠겨 들었다.

‘이건 꿈일까.’

배가 불렀다. 쾌감으로 나른하게 풀어진 몸으로 피곤함이 내달렸다. 뒤통수를 입술로 쪼던 친왕은 내 몸을 끌어안은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든 것인지, 그저 껴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편안한 기분 속에 눈을 감았다.

이건 꿈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웃을 수는 없을 테니까.

굳게 닫힌 방 안으로 문득 차가운 공기가 한 줄기 흘러들었다. 바깥이 아직 겨울인 것을 깨닫는다. 친왕의 희락기가 끝나고 방 밖으로 끌려나가면 다시 혹독한 무언가가 내 몸을 움켜쥐겠지

어쩔 수 없다. 꿈은 깨기 마련이니까.

* * *

꿈을 꾸었다.

친왕의 품에 안겨 있는 꿈이었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고, 그러면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의 몸에선 피 냄새가 났지만 조금도 역하지 않았다. 그는 달콤하다고 말하며 내 몸에 이를 박았고, 나는 사람을 죽일 때 느끼는 손끝의 감촉에 대해 그와 토론했다.

꿈을 꾸었다.

작은 아이가 검을 휘두르는 꿈이었다. 언제나 괴물이라 불리며 경외시 되던 나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소년의 눈빛에 감응했다. 아직 발현하기 전이었지만 싹수가 시퍼렜다. 연무장에는 눈 대신 하얀 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져본 적이 없다는 소년은 계속해서 바닥에 널브러지며 투기를 불태웠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 평인에게 계속 고꾸라지자, 소년은 주변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을 봐줬던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귀여운 아이였다.

평인인데도 어떻게 이리 강하냐고 되묻지 않았다. 좀 더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웃음이라 생각한 아이의 얼굴에 독이 잔뜩 올랐다.

자신이 괴물을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소년은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자신은 양인으로 발현할 테니, 그 전에 널 이길 거라고 말하는 얼굴엔 진심이 가득했다.

눈이 흩날리는 날이었다. 아니 꽃이 휘날리는 날이었나?

괴물에게도 소년은 버거운 존재였다. 지칠 줄 모르는 소년을 상대하느라 힘이 쪽 빠진 나는 그의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목검을 손에 쥔 채 누워있던 소년이 문득 내 손을 잡아당겼다.

‘네가 음인이라면 좋았을걸. 난 분명 양인으로 발현할 테니까.’

풋풋한 입맞춤이 내 입술 위로 떨어졌다. 소년의 입술은 열이 오른 듯 뜨거웠다. 어디선가 달큰한 향이 나는 것도 같은데, 한겨울의 연무장에는 아무 꽃도 없었다. 아니, 꽃이 있었나? 흩날리는 것이 눈이 아니라 꽃이었던가? 내가 맡은 것은 그렇다면 눈의 냄새였던가?

‘각인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소년의 몸을 가득 채운 불이 내 몸에도 옮겨붙었다. 감기가 옮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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