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겨울 - 1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건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온을 주었다. 난 원래도 예쁜 것을 구경하며 멍하니 있는 것이 취미였다. 악공들이 잔잔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운치가 극대화되어 온몸이 나른해졌다. 유일한 흠이라면 상석에 앉아 있는 친왕이었다. 말없이 술잔을 받아 마시는 친왕의 굳은 얼굴은 부담스러웠지만 견딜 만했다. 다른 모두가 벌레라도 씹는 듯한 표정으로 친왕의 굳은 얼굴을 함께 견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년이 되어 동부로 갔던 친왕이 돌아왔다.
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쫓겨나다시피 동부로 갔던 친왕은 잔뜩 비틀린 얼굴로 금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겨우내 지방에서 성벽이나 보수하며 지낸 탓인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심술을 부려댔다. 금성에 들어온 지 이틀도 되지 않았는데 조정의 모두가 그를 슬슬 피해 다녔다.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들이 결국 그 심술을 다 받아내야 했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버티고 있자니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자 친왕이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벌써 세 번째였다.
돌아왔으니 연회를 벌여야겠다며 이전 옥패를 받았던 정자에 판을 벌인 것이 한 시진 전이었다. 동부에 있다가 객으로 온 것이니 접객소의 접대를 받아야겠다며 난동을 피우고, 결국에는 나까지 끌어내어 술을 따르게 했다.
밤새 추위에 떨며 배고픔을 참은 탓인지 바람 부는 정자에 앉아 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희락기를 황제와 보내고 난 뒤 처소로 돌아가자 그나마 살림이라 할 만한 것들이 죄 밖으로 팽개쳐져 있었다. 내게 잘 대해줬다가 벌을 받은 내관이 원망스런 얼굴로 기다리다가 엉망이 된 내 꼬라지를 보고 경악을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비틀거리며 처소로 들어갔다. 보복이 걱정되긴 했으나 길게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연거푸 들이켠 피임약 때문인지 배가 너무 아파서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눅눅한 침상에 몸을 누이자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다.
의관이 몇 차례인가 다녀가는 사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늘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차가운 바람이 손발을 얼렸다. 따뜻하고 두꺼운 솜이불도, 외투도 사라진 탓에 벌벌 떨며 추위를 견뎌야 했지만, 심적으로는 편안하고 무난한 날들이었다. 황제의 체향과 시커먼 멍 자국을 무기처럼 두른 채 아무도 오지 않는 폐궁의 얼어붙은 연못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낙엽을 품은 채 얼어붙은 연못의 표면이 하얀 옥패를 연상시켰다. 금붕어 세 마리가 헤엄치는 아주 예쁜 물건을 잠깐이나마 가졌었는데, 처소가 뒤집혔던 그 날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친왕이 준 것이라고는 하나 주제에 맞지 않는 물건을 치우라는 황제의 명령이 더 위였던 것이다.
누가 가져갔을까? 유일하게 있던 귀한 물건이니 가장 힘 있거나 눈치 빠른 자가 가져갔을 것이다. 바닥에 버려져 부서진 물건들 중에는 옥패도, 옥패가 담겨있던 상자도 없었으니 분명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갔겠지.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던 내관의 얼굴이 언뜻 떠올랐지만 강등당해 정신없는 와중이었으니 물건을 챙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뭐. 모를 일이기는 했지만.
방 안에 있던 물건들 중 그나마 값어치 있는 것은 전부 친왕이 준 것이었고 그것들 모두가 새 주인을 찾았다. 물건을 포기하는 것엔 익숙하므로 괜찮았지만, 친왕이 준 옥패만은 가끔씩 떠올라서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 둥글고 예쁜 옥패는 꼭 내 것 같았는데, 역시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 해도 좋은 물건들은 다른 이의 것이 된다. 그런데 그건 정말로 누구의 것이 되었을까? 접객소를 관리하는 내관이 돈으로 바꾸거나 다른 이에게 뇌물로 주었으려나? 어디 있는지만 알면 몰래 숨어 들어가 훔쳐 주겠다는 독한 마음까지 먹었지만, 물건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가늘고 짧은 한숨을 토해내는데 눈발이 또 흩날렸다. 요 며칠 매일같이 눈이 와서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침마다 궁인과 노비들이 눈을 쓸어댔지만 단단하게 얼어버린 땅은 미끄럽기만 했다. 지겹도록 내리는 걸 보니 내년 농사는 풍년일 듯했다. 화전을 일굴 때에는 쌓이는 눈에 고립되어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빌었는데, 그래도 궁 안이라 이렇게 돌아다닐 만한 여유가 있었다.
습관처럼 하얗게 쌓이는 눈 위를 훑어보자 짐승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꿩이며 산토끼처럼 작은 짐승들의 발자국이 내리는 눈에 덮여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지엄한 황궁이라 해도 그것은 인간에게만 속한 것이라, 짐승들은 황궁의 담장을 마음껏 오가며 흔적을 남겼다. 나도 원한다면 이 짐승들처럼 훌쩍 사라질 수 있으리라. 황제는 날 추격할까? 감히 도망친 노예를 용서할 수 없다며 찾아서 끌고 오려나?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날 찾아 끌고 오리라.
눈이 얇게 내려앉은 연못이 하얗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을 물고기들을 떠올렸다. 다시는 이 별궁에 오지 않겠다 말했으나 친왕이 황궁에 없다는 핑계로 요즘 계속 출근부를 찍고 있었다. 처지가 안 좋아진 뒤로 밖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처소 밖으로 아예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조용히 앉아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엔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가장 좋아했던 연못은 얼어버렸지만 사람이 없다는 점에선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으스스한 소문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목을 매단 인간이라는 점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어째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과거에 내가 죽인 사람의 유령이 출몰한다면 응당 등골이 섬뜩해야 할 터인데도, 이곳에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했다.
유령이 내 모습을 보고 도망간 것일지도 모르지. 자신을 죽인 인간을 보고 무서워하며 숨어버린 것일지도. 이 폐궁에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이는 단연코 나인데, 단 한 번도 목을 매어 죽었다는 유령을 보지 못했다.
“애초에 유령 같은 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옥좌를 내리는 하늘이 있고 지저에선 괴력난신이 기어 올라와 흉험한 일들을 벌이는 세상이었다. 황제의 치세가 정의로울 때에야 기묘한 것들이 땅 위를 걷지 못하나, 그 성정이 흐트러지면 온갖 기괴한 것들이 활개를 쳤다. 작금의 황제는 치세가 곧으며 흐트러짐이 없어 온 세상이 태평성대를 누리니 귀신들도 모습을 감춘 것일 터이다.
내게는 좋지 않은 주인이지만 그가 옥좌에 있음으로 세상은 평화로웠다. 황제가 노예 한 명을 때리는 일 같은 건 그의 훌륭한 성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내게는 참담한 일이지만 그 정도로 세상이 어지러워졌다면 나 또한 책임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리고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던한 불안감과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했겠지.
문득, 평화로운 세상이란 어떤 모양인가 싶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둘러보았다. 폐궁의 광경엔 을씨년스러운 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흉한 것들이 모두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눈이 내려앉은 처마의 곡선이 유려했다. 새까만 기왓장과 대비를 이루는 하늘은 삭풍에 반쯤 녹아든 듯 빛바랜 색상이었다. 정원을 감싸며 심어진 나무들 중 하나는 바짝 말라 고사해 있었다. 기생하고 있는 겨우살이 몇 그루만이 빨간 열매를 뽐내는 회색의 정원 속에서, 문득 휑하니 비어있는 자리가 눈에 뜨였다. 제법 커다랬던 밤나무는 이제 휑하게 잘려 둥치만 남아 있었다. 낙엽도 다 쓸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리저리 떨어졌을 밤송이도 껍질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드러누워 뒹굴어도 상처 입지 않으리라.
나무가 베어진 자리를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이가 있어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연못가로 다시 눈을 돌리자 그새 쌓여버린 눈이 연못의 모습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잠깐 눈을 돌렸을 뿐인데도 뽀얗게 쌓여버린 눈이 원망스러웠다. 손이 빨갛게 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쌓여버린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자 하얗고 뽀얀 얼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못의 차가운 얼음 위를 손으로 조심조심 더듬어 보았다. 하얗게 얼어붙은 표면을 손바닥을 슬슬 쓸어보아도 연못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돌을 들어 깨 볼까도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만일 연못 안까지 얼어붙은 게 아니라면 수면을 깨는 행동이 물고기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익숙한 무늬를 지닌 그 물고기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이 궁의 주인이었다면 이렇게 방치해 놓지 않았을 텐데. 연못도 더 깊고 커다랗게 보수하고 수면을 덮은 낙엽들도 정리해주었을 것이다. 쭈그리고 앉아 연못 위를 쓰다듬고 있자니 꾸륵거리는 소리가 배 속에서 울렸다. 잠깐 대접받을 때 먹었던 음식들이 그리워졌다. 맛도 있었지만 정갈하고 영양이 있어서 아픈 와중에도 살이 쪘었다. 지금은 살이 다 빠져서 뱃가죽이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말려놨던 감들도 죄 땅을 굴러버려서 처소에는 먹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씩 권 의관이 약을 지어 주며 먹을 것도 주었지만 그 정도로는 살이 오르지 않았다.
황제가 내 처소를 뒤집어엎은 뒤부터 음식이나 생필품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나오는 것에도 벌레가 섞여 있어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내관들이 원한을 품은 탓에 처지가 이전보다 더 안 좋아지고 말았다. 부엌을 터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도둑질을 할 순 없었기에 굶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신년행사가 있기 전에는 연회도 없어 훔칠 만한 음식도 사실 많지 않았다.
‘이대로 고장 나려나.’
이대로 버티다가 쓰러지면 황제가 구해줄까? 나날이 몸이 마르는데도 황제는 상처가 사라질 때마다 불러 화풀이했다. 질척하고 폭력적인 밤이 끝날 때마다 의관을 불러주었지만 한 번 축나기 시작한 몸은 계속해서 안 좋아졌다. 처음에는 쌀쌀맞았던 권 의관도 측은지심이 생겼는지 행동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고압적이기는 했으나 잔정이 많고 무른 편이어서 치료를 하러 올 때마다 내 모습에 혀를 차고는 했다.
의관이라 그런지 아픈 사람에게 모질지 못했다. 말라가는 내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올 때마다 만두나 말린 과일 같은 것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가 오래전 상처(喪妻)했으나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내 정신이 썩어있기 때문인지 다른 이의 의도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호의라는 걸 겪어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나는 살면서 누구에게 부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고,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황제는 나를 노예로 구입한 것이었고, 친왕의 선물은 그의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과거에 누군가의 신세를 졌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과거들 중엔 그런 것이 없었다.
겨울바람이 스산했다. 눈이 흩날리는데도 바람이 가라앉기는커녕 차가운 습기를 머금은 채 칼날처럼 불어댔다. 이런 날엔 처소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았지만 뭔가 좋은 것을 보고 싶었다. 자꾸 어둡고 우울한 생각만 하게 되어서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희락기 이후로 유독 우울하고 어두운 꿈만 계속 꾸었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이 무척 고역이었다. 딱히 주어진 일이 없음에도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몸이 아프지 않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희미해져서, 문득 아픈 것이 지겹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처소를 나와 혹한이 몰아치는 황궁 안을 걷고 있었다.
종이를 넣어 만든 옷을 두르고 얇은 버선을 겹겹이 겹쳐 신어도 추위는 거리낌 없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바람이 따가워 흘러나온 눈물이 속눈썹을 얼리는 바람에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황궁의 길을 오가는 이들 모두가 따스하게 차려입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 또한 겨울옷이라고 차려입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에 잠깐 걸쳐보았던 솜옷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볍고 부드럽고, 늦가을의 찬바람을 모두 막아주어 해가 진 뒤에도 방 안에 있는 듯 따스했다.
생필품을 훔치면 바로 들키겠지. 옷이든 물건이든 얻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았으나 먹어 없앨 수 있는 음식과는 달리 그 흔적이 남았다. 내가 이 허름한 옷이 아니라 조금 멀끔한 솜옷 같은 걸 껴입고 다닌다면 순식간에 소문이 날 터였다. 따스한 화로도 구운 밤도 먼 옛날의 꿈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뒷산을 오가며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연기가 나더라도 몰래몰래 불을 피워 몸을 덥히지 않는다면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얼어 죽는 게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것보다는 깔끔하지 않을까? 하지만 동상을 입은 채로 살아남는다면 그 또한 비참할 것이다. 겨울이 되자 잡생각만 많아졌다. 우울함을 밀어내기 위해 좋은 생각만 하려 했지만 떠오르는 것들이 마땅치 않았다. 연못을 노닐던 물고기들의 모습이라든가, 하나 남은 감을 차지하기 위해 오가는 새들의 모습 같은 것들을 열심히 떠올려봤지만 시원치 않았다. 가을에 잠깐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상하게도 이제 와서 떠올리면 더 우울한 기분만 들게 되었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이리라.
‘하긴. 지금껏 빼앗길 정도로 가져본 적이 있었어야지.’
친왕이 주었던 옥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쁜 얼룩이 올라앉은 세 마리의 금붕어와 하얗고 둥근 옥패를 보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연꽃과 연잎 또한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그나마 친왕이 먼 동부로 간 게 다행이었다. 주었던 물건이 없어졌다고 무슨 심술을 부려댈지 어찌 알겠는가? 난 빼앗긴 것이지만 괴롭히고자 맘먹는다면, 감히 자신이 준 물건을 어딘가 팔아치운 게 아니냐 야료를 놓고도 남을 작자였다.
좋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영 도움되지 않는 작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짧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자 오래 앉아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저려 왔다. 요즘 들어 친왕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가 심술을 품고 한 일들이기는 하나 덕분에 호사를 누렸으니 딱히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가 체향을 묻혀놓은 탓에 황제가 한동안 거칠게 굴기는 했지만 감당할 만한 폭력이었다. 그가 심술부리는 것은 매우 피곤했으나 그만큼의 대가는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동부로 떠나고 난 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다시 떠올렸다. 그가 준 선물이나 심술. 그가 부린 심술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 하지만 친왕을 떠올리는 이유는 사실 하나였다. 변화.
그가 있을 땐 뭔가가 변했다. 황제의 화풀이 인형으로 얻어맞고 낫기를 계속하는 일상에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었다. 날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과 환경이 좋든 나쁘든 변했다. 단단한 벽같이 느껴지던 황제의 태도마저 변화를 일으켰다. 다른 이의 체향이 묻어나는 것을 불쾌해하고, 좋은 사이라던 친왕을 저 먼 동부의 끝으로 쫓아냈다.
친왕이 동부로 향하자 변화는 사라졌다.
처소는 예전으로 돌아갔고 황제의 태도 또한 예전으로 돌아갔다. 평화로운 일상과 평화로운 고단함이 익숙함이란 옷을 입고 내 곁을 둘러쌌다. 좋든 나쁘든 변화가 그리웠다. 얄미운 목소리도 왠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멍청이구나.”
난 내가 좀 더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굉장히 어리석고 가벼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몸이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의 냉기는 대단했고 건강하던 체력에도 흠집을 냈다. 황제의 폭력이나 정사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져서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도 예전처럼 빠르게 낫지 않았다. 가장 비참한 것은, 이처럼 추운 날에는 황제의 침궁이 그리워진다는 것이었다. 폭력에 노출되어 엉망이 되기는 해도 황제를 모시기 전에 잠깐 누리는 그 따스함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몸을 씻는 잠깐이 특히 좋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엉망으로 갈라졌던 몸이 다시 달라붙고 생기를 되찾아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황제와의 잠자리는 가차 없는 폭력으로 이어지지만 가끔은 추위와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었고, 나는 대부분 폭력을 선택했다.
추워서 머릿속까지 얼어붙은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멍청한 생각이 커져 갔다. 지겨워서 밖으로 나온 거라는 변명을 대기는 해도, 사실 처소와 바깥의 온도 차가 크지 않았다. 해가 잘 나는 날에는 밖이 더 따뜻하기도 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죽음이 실체를 얻어갔다. 피부도 엉망으로 갈라지고 입술은 입을 열 때마다 피가 나서 조심스레 침으로 녹여야 했다. 하얗게 일어난 피부는 분명 보기 싫을 텐데, 황제는 대체 왜 나 같은 걸 안는 걸까? 그저 폭력을 휘두르고 싶을 뿐이라면 신분 낮고 예쁘장한 노예들쯤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텐데. 계속 의관을 보내 고치지 않더라도 새것을 사서 쓰다 버리면 되는 것이 황제라는 지위였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자 하늘이 핑 돌았다. 비틀거리며 나무둥치를 잡고 한참을 버티자 빙빙 돌던 하늘이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골병에 익숙해진 몸은 이제 차가움을 견디는 것에도 이골이 났다지만, 가끔씩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오늘은 음식을 좀 훔쳐서 먹어야겠다. 체력이 더 떨어지면 뭔가를 훔칠 만한 힘도 남지 않을 듯하니.
하늘이 시커멓게 덮이더니 철새들의 무리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이역만리를 오가는 행렬은 수백의 무리가 뭉쳐있어 외롭지 않은 듯했다. 황궁의 높은 담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늘을 날아 움직이는 짐승들을 볼 때마다 충동이 부싯돌마냥 탁탁 튀어 일어났다.
이곳을 떠나서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노예로서 황제의 화를 받아내는 것이 내 의무라지만, 이 정도 했으면 된 게 아닐까? 나는 내 몸값을 이미 치른 게 아닐까? 하지만 마음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내가 사라지면 황제는 나를 쫓기도 하겠지만, 분명 내 부모의 무덤 또한 파헤칠 것이다. 겨우 묻어준 아버지의 시신은 엉망으로 부서져 갈 곳 없는 원혼이 되고 말겠지.
화전을 같이 일구면서도 그다지 살갑지 않은 부자지간이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것이 세상의 빛이라는데, 내가 발현을 끝내고 처음으로 본 것은 날 감싸고 막아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기억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부모고 누구고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그는 감싸 안고 있었다.
발현이 끝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마을 사람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힘도 반 토막이 나버린 내가 너무 쓸모없어서, 버러지라고 폄하하는 한편 이상할 정도로 나를 두려워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던 말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모두가 날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때 아버지가 날 감쌌다. 어차피 기억을 잃었으니 함께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면 된다고. 마을의 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죽어도 무덤에 묻히지 못해 망귀가 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자간의 정이 두터운 것도 아니었고, 그가 날 감쌌던 일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책임감 있게 굴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가 없었다면, 그가 마을 사람들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것이다. 깨끗한 돈으로 묻혀야 귀신이 되지 않을 거라고. 주름 깊이 파묻힌 눈동자로 덜덜 떨던 모습이 요즘 들어 계속 떠오르는 건, 아마도 내가 그 곁에 갈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지만 지은 죄가 많으니 어떻게 묻히든 좋은 곳엔 가지 못하겠지. 그래도 기왕이면 따뜻한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 죽어서까지 추운 곳에 있어야 하는 건 너무 슬프고 괴로울 것 같으니까. 내가 죽으면 황제는 나를 잘 묻어주려나? 기왕이면 따뜻한 곳에…. 아니면 연못이 있어서 예쁜 물고기가 많은 계곡에….
잡생각이 길어져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해가 더 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다. 아무리 밖과 처소의 온도가 비슷하다지만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지면 바람 또한 차가워져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화로는 없다지만 침상 위에서 빈약한 이불이나마 감싸고 있어야 견딜 만했다. 매일 밤 그러고 있다가 잠이 오면,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영영 못 뜨는 것이 아닐까 겁이 날 때도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폐궁에서 처소까지 가는 길은 익숙하기에 비틀거리면서도 별 어려움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새소리가 유난히 신경에 거슬리는 밤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깐 멈춰서 쉬는데, 원치 않던 인기척이 앞쪽에서 느껴졌다.
“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익숙한 체향과 커다란 체구가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시커먼 짐승의 털이 목 주위를 두툼하게 감싸고 있었지만 조금도 둔해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니 무릎 꿇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신년이 지척이라 올 때가 되긴 하였다. 둔중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걸어오던 친왕은 나와 마주친 것이 뜻밖인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비아냥거리며 지나치리라 생각했던 친왕은 생각보다 꽤 긴 시간 침묵하며 멈춰 섰다. 그가 허락하기 전에는 일어날 수조차 없기에 나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기다렸다.
“아. 누군가 했네. 못 알아봤어.”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무릎이 다시 저려 올 즈음이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로 툭 던지듯 말한 친왕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친왕에 대한 생각을 잔뜩 했기 때문일까. 공교롭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반가운 마음 또한 일었다. 누굴 만나서 반가워한다는 것은 익숙지 않은 일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형님께서 하도 성질을 부리시기에 꽁꽁 싸매고 있을 줄 알았더니, 꼴이 비루먹은 개 같군.”
냉기가 어린 말에 몸이 움찔 떨렸다. 여유 넘치는 장난기 대신 독기 어린 날카로움이 깃든 목소리였다. 감히 고개를 들어 친왕의 얼굴을 살필 수 없어 몸만 더욱 땅에 붙였다. 머리 위로 싸늘한 냉기만이 흘렀다.
“비빈으로 봉해 비단을 칭칭 감아놓았을까 싶었는데. 접객소에서 일 할 수 있는 수준도 안 되는 것 같군. 어디 측간이라도 치우나?”
“…송구합니다. 아직 접객소에 속해 있사옵니다.”
짐승을 돌보거나 측간을 처리하는 등의 일을 하는 노예들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말에 반박을 하기 힘들었다. 오물 냄새가 나지 않을 뿐이지 차려입은 행색 자체는 험한 일을 하는 이들보다 좋지 않았다. 측간을 관리하는 노예들은 그 부산물을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고 짐승을 돌보는 것은 사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이었다. 수입 때문이 아니라 가축들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돌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 될 터였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머리채가 콱 잡혔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냐. 천한 놈아.”
“저, 전하.”
“거슬려.”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봐 왔던 친왕의 모습과 명백히 다른 분위기였다. 여유롭던 한량이 아니라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넘기던 장수의 위압감이 북풍처럼 몰아쳤다. 살갗이 에는 것만 같았다.
거슬린다니.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합….”
“닥쳐.”
친왕이 거친 태도로 내 뒷덜미를 내팽개쳤다. 산길의 비탈이 가파르지 않아 구르는 건 면했지만 눈 속에 파묻힌 몸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가워지는 몸보다는 내 앞에서 으르렁대는 친왕이 당장 큰 문제였다.
“네놈이 어떤 식으로 베갯머리송사를 지껄였기에 형님이 넘어갔는지는 모르나, 그 요사스런 허리 짓도 별 게 아니었는가 보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역정을 사 쫓겨나다니 대단하구나.”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던 친왕은 문득 코끝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형님의 체향이 진동을 하는군. 참 대단하긴 한가 보지? 쫓겨난 주제에 계속해서 황상을 모시는 것을 보면 말이야.”
“용서하십시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소인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몰라?”
“크윽!”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친왕이 발을 들어 배를 밟았다. 숨이 턱 막혀오며 커다란 나무둥치에 눌려버리기라도 한 듯 온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힘을 주어 밀어내서도 안 될 것이지만 작정하고 밀쳐내도 밀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 전하.”
배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가 치솟았다.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친왕의 발을 움켜쥐자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양 친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말 그대로 밟혀서 꿈틀대는 벌레 같겠지. 신발에 배가 밟혔어도 내 옷이 더러워지기보다는 그의 신발이 더러워졌을 것이다.
“제발. 아, 아픕니다!”
목소리가 불쌍하게 들렸으면 좋겠는데. 몸은 일부러 떨지 않아도 추위 때문에 덜덜 떨렸다. 정말로 밟아 죽이려는 걸까? 그가 밟고 있는 배가 지독히도 아팠다. 목을 베기 전에 적의 몸을 밟아서 고정하는 것처럼 친왕은 나를 밟은 발에 무게를 잔뜩 싣고 있었다. 고통에는 무뎌진 몸인데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주인 없는 궁이라지만 너 따위 노예가 더럽혀도 되는 곳이 아니다. 어딜 감히 계속해서 드나드느냐?”
친왕이 동쪽으로 떠나있어 방심했던 것이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이야. 친왕은 화가 이글거리는 얼굴로 으르렁댔다.
“궁이 가지고 싶다면 황상께 청을 드려라. 그도 아니면 그 알량한 다리를 여기저기 벌리고 다니며 돈을 모아 면천하든가.”
잔인한 말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폐궁이라지만 함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일 리가 없는 것을, 유령이라는 흉험한 소문을 믿고 멋대로 방문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부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여기저기 몸을 팔아 돈을 모은다는 건 목숨을 내건 짓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체향이 풍기는 상처투성이 음인을 안으려 하는 이도 물론 없을 것이고.
‘면천?’
황제가 내게 내어준 돈은 금화로 아홉 냥이나 되었다. 그 돈으로 깨끗한 관을 사고, 새하얀 수의를 사서 부모의 시신을 감싸고 양지바른 땅을 사서 묻을 수 있었다. 관을 옮긴 인부들에게 일당을 주고 작게나마 제사상을 차리는 것으로 돈은 거의 없어졌다. 은 몇 개가 남았지만, 궁 안의 물가는 높았기 때문에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음식과 약간의 토탄을 구입하는 것만으로 바닥이 났다.
아. 친왕이 준 옥패는 분명 내 몸값을 훨씬 넘었겠구나. 하지만 노예가 면천을 하려면 돈도 돈이지만 주인에게 놓아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했다. 황제의 화풀이 도구라는 치부가 세상 밖으로 나가도록 놔둘 리 있겠는가?
몇 번이고 배를 꾹꾹 누르던 친왕의 발이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콱 막혔던 숨이 트이자 마른기침이 절로 터졌다. 몸을 뒤집으며 한껏 웅크리자 등으로 스며든 눈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친왕이 지척에 서 있었으나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죄송합니다. 죄, 죄송…. 용서하십시오. 전하. 저, 전하.”
마냥 웅크리고 있을 수 없어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폐에 차가운 바람이 반쯤 들어차 내뱉는 음성이 겨울 가지처럼 스산했다. 더 이상은 맞고 싶지 않았다. 얼어붙은 몸은 폭력에 더 취약해서 잘 맞는다고 주의해서 맞아도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부디 불쌍하고 애처롭게 여겨주길 바라며 고개를 조아리고 애원했지만 좀처럼 허락이 떨어지질 않았다. 등은 빙판이 되고 무릎은 겨울 땅에 박힌 바위처럼 얼어붙었다.
문득 나는 친왕이 자리를 떠난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짐승이 소리도 없이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친왕은 화풀이하듯 나를 몇 번 밟아대고는 소리도 없이 떠난 것이다.
나는 산길에 허망히 앉아 눈이 떨어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몸이 시리고 무거웠다.
“…형제의 화를 동시에 받아내며 살아남을 순 없을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화풀이를 당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친왕이 내게 쏟아낸 감정은 지나칠 정도로 날카롭고 그 연유를 짐작기 힘들었다. 황제와는 달리 친왕은 폐궁에 아무런 감정도 지니지 않은 걸로 보였는데, 갑자기 폐궁의 연유를 안다는 듯 말해오자 혼란스러웠다. 하기야 황친이 지내던 궁이라는 게 그리 큰 비밀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폐궁에 있는 것을 언짢아 한 것이 처음도 아니다. 밤나무 아래에서 무릎 꿇린 것도, 사실은 경고였는데 내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서러움에 가슴이 콱 조여들었다. 내가 멍청하고 갈 곳이 없어 폐궁을 드나든 건 잘못이라지만 정말로 누가 드는 게 싫다면 봉문(封門)하면 될 일이었다.
“이간질이라니.”
황제의 질투를 유발하고자 체향을 묻힌 건 친왕이었다. 황제는 친왕의 도발에 반응하여 동부로 가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날 골탕 먹이고자 한 일이라지만 자신이 자초한 일인데 이러는 건 경우가 맞지 않았다.
나는 콜록거리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가느다란 달이 서쪽에서 떠올랐다. 하얀 달이 잘려나간 손톱처럼 이지러져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것을 가늠치 못하다가 하늘의 모양을 보고서야 그믐이 지척임을 깨달았다. 으슬거리는 달빛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려니 저 높은 곳에서 말 없는 인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화가 난 듯, 무심한 듯, 저 하늘의 달처럼 가늠할 수 없는 빛으로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 * *
감기에 걸린 덕에 건강이 좋아졌다. 이상한 말이었지만 몸에 열이 오르자 의관이 왔고, 의관은 오면서 음식을 가져왔다. 음식과 약을 먹고 열에 들떠 하루를 자고 일어나니 몸이 예전보다 가뿐하고 편안해졌다.
접객소는 신년을 맞아 발칵 뒤집혀 있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야말로 접객소의 역할이기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궁에서 매일같이 연회가 열리는 것은 아니라도 황제를 배알하고자 올라온 이들이 기다리는 동안 물 한 잔 대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바쁘기는 했으나 손님을 맞이하면서 받는 사례비는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술을 따르거나 몸을 팔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돈이라는 건 그야말로 눈먼 돈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궁녀와 내관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내 처소는 조용했다. 나는 한가하게 앉아 부엌에서 훔쳐온 가래떡을 우물거렸다. 드나드는 음식이 많을 때엔 한 끼 분량 정도 없어져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들키지 않게 오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무리 번잡한 날이라 해도 양인의 체향을 달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눈이 먼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새벽에 어둠을 틈타 움직였는데 다행히도 떡시루가 다 익어가는 참이라 꽤 괜찮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따끈한 떡은 순식간에 식었지만 아직 말랑해서 잘 씹혔다. 오늘처럼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오랜만이었다. 배고픔을 참는 게 너무 익숙해서 허기를 느끼지 않을 때에는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그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감기 때문에 방문한 권 의관이 상기시켜주었다. 문득 나는 내가 올겨울에 죽을 것이라고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장 나면 안 된다고 말로만 되뇌었던 거지.”
고장 나지 않으려면 정신만 다잡아서 될 게 아니었다. 우선 잘 먹고 건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육체가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왠지 모를 무기력에 꼼짝도 하지 못한 건 나름대로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겠지만.
친왕이 돌아올 것을 미리 눈치채고 행동거지를 조심했어야 했는데, 폐궁에서 내려오다가 친왕과 마주친 건 분명 실수였다. 신년인사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 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는데, 생각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주변이 변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기왕 신년이 되었으니 어두운 감정은 털어내고 가벼운 마음을 먹고자 노력했다. 우울할 게 다 뭔가? 황제가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서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황궁에 들어온 건 행운이었다. 황제가 내게 손을 올리기는 하지만 영구적인 상해를 입히는 건 아니고 다른 이의 손을 타게 하지도 않았다. 호사를 누리지 못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노예가 다 그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친왕이 갈 때까지 처소에 처박혀 있어야지.’
변덕스럽다는 건 익히 겪어 알았지만 이런 방향으로도 변덕스러워질 수 있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언제나 한량같이 굴었기에 변덕스레 군다 해도 마냥 장난기가 넘칠 줄 알았는데,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짓밟는 자와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황제에 비하면 보상이 정확한 편이라 피해를 입어도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 보상조차 변덕의 일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콕 박혀 있으려던 결심은 반나절이 채 가지 못했다.
* * *
“아주 장관이구나. 장관이야.”
짜증이 절절히 어린 권 의관의 목소리에 나는 말없이 동의했다. 사람들이 한창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접객소의 마당이 환자들로 가득했다. 접객소에서 점심으로 끓인 조개탕이 잘못되어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것이다. 날이 추운 것을 믿고 방만하게 해산물을 다룬 것이 화근이었다. 측간은 이미 만원이었고 시퍼런 얼굴로 앓아누운 자들 사이로 의관들만 뻘뻘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멀쩡한 것은 따로 식사를 하는 내관들과 식사를 제공받지 못한 나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일손을 빌려 왔지만 턱없이 부족한 탓에 결국은 번외 취급받던 나까지 불려 나와 일을 하게 되었다.
“밥도 못 얻어먹어서 멀쩡한 건데, 이렇게 밥값을 하게 되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사람들이 다 앓아누웠는데, 그럼 혼자서만 노닥거릴 생각이었나?”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부르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일하는 법이며 뭐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열심히 쏘다닌 탓에 길을 헤매는 것만 간신히 면했다. 그래도 황제의 체향이 남아 있는 탓에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피하게 되었다.
친왕만 피할 수 있다면 일하는 것 자체는 괜찮았다. 이런 식으로 같이 어울려 일을 하게 되면 대놓고 홀대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연회 준비가 끝날 때쯤엔 저급품이나마 토탄과 옷을 좀 얻어서 갈 수도 있을 듯했다.
정신없이 부엌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일을 하자 한겨울인데도 땀이 났다. 워낙 춥게 지내다가 불이 지펴져 있는 실내를 오가니 열이 훅훅 올랐다. 맛있는 음식 냄새와 환자들의 분뇨 사이를 오가며 움직이고 있자니 마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했다.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써야지. 천벌이다, 이것들아!”
권 의관이 탕약을 처방 내다 말고 뜬금없이 외쳐대는 소리에 환자들이 기운 없는 얼굴로 날 힐끔거렸다. 아픈 면면들에 짜증스런 기색이 도는 것을 보자 입이 썼다. 저런 설교에 반성할 정도로 무른 인간은 황궁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만간 나와 권 의관 사이에 더러운 소문이 돌 것 같았다. 황제는 날 감싸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으니 권 의관의 앞날은 썩 좋지 않을 것이고.
권 의관은 나라의 녹봉을 받는 정식 의관이기는 했으나 말단 중의 말단이었다. 황궁에서 오랜 시간 봉직했음에도 관직이 오르지 않는 것이 의아했는데, 저런 식으로 자신을 깎아 먹는 짓을 종종 저지르는 모양이었다.
“약재를 달일 탄입니다. 손님이 많아 다른 의관은 보내줄 수 없으니 혼자 처리하라 하십니다만.”
“흥. 신년 선물로 들어온 약재들 나누느라 정신들이 없겠지. 내명부도 아니고 바깥일은 나 같은 말단이나 하라 이거지. 뭐 하루 이틀 지나면 다들 괜찮아질 테니 상관없다.”
“내일이 바로 그믐입니다. 모레면 신년인데요.”
다른 곳도 모두 바빠져서 손을 빌릴 수 없는 시기였다. 엉덩이 무거운 내관들도 다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다니는 상황인데 오늘보다 더 바빠진다면 감당이 되지 않을 터였다. 내 말에 권 의관이 삐쭉거리며 환자들로 가득 찬 접객소를 휙 둘러보았다.
“양인이나 평인들은 다 괜찮아질 걸세. 음인들은 아무래도 사나흘 더 앓을 것이고.”
“그렇습니까.”
접객소의 절반 이상이 음인이었다. 그래도 평인들이 일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어차피 황족과 같은 귀빈들은 접객소가 아니라 내명부 담당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경빈의 주도 아래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희빈의 빈자리를 느끼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노라 호언장담을 했다는 듯했다.
경빈이라면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놀랄 정도로 당당한 양인 여성으로 연못에 걸쳐진 다리 위에서 황제와 정답게 노닐었었다. 양인 여성은 임신이 다난함에도 불구하고 명문가의 대재상을 부친으로 둔 덕에 일찍이 황제와 성혼하였다. 경빈의 궁에서 일하는 음인들은 그 미색이 특히 뛰어났는데 황제보다는 경빈의 첩이 아니냐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다.
“왜 일손을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은가? 지금 힘든가? 자네도 자리 걷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무리하는 것 아니야?”
“일하는 건 괜찮습니다. 처소에만 계속 있는 것도 고역이라 이렇게 움직이니 좋습니다.”
“하하. 그렇지? 움직이지 않으면 기계만 고장 나는 게 아니야. 사람 몸에도 이렇게 기름칠을 해 줘야 돼.”
권 의관이 여상한 듯 말하며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권 의관은 십 년 넘게 황궁 물을 먹은 자로 소문에도 밝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사태를 일으킬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러 환자들에게 잔소리를 하여 내가 엮인 더러운 소문을 내고 자신의 출셋길을 스스로 막아버렸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는 낮은 곳에서 의술을 베풀며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욕이 꽤 있는 편에 속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계만 고장 나는 게 아니라 사람 또한 고장 난다는 말을, 언제 제게 하셨던가요?”
“음?”
“뭔가,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야 들어봤겠지. 흔히들 쓰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그렇네.”
권 의관이 여상히 대꾸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화전을 일구다 황궁으로 들어온 탓에 이게 흔히 쓰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파서 비몽사몽한 와중에 그가 했던 말을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고장 나면 안 된다는 말은 내가 계속 되뇌는 말인지라 어디선가 기억이 뒤섞인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신년이 지나면 생각할 시간 따위 썩어날 만큼 많았으니까.
* * *
황궁에서 가장 큰 연회 중의 하나를 꼽자면 신년연회와 황제의 생일연회를 들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년연회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왕들과 제독들이 금성으로 들어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새해의 기쁨을 논하는 큰 행사였으므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황친과 신료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으므로 연회의 크기 또한 거대해서 경운당 앞이 천막으로 가득 차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추위를 막기 위해서 사방에 병풍을 두르고 열 걸음마다 화로를 놓아 불을 지펴 땀이 날 정도였다. 바닥에 쌓인 눈은 깨끗이 쓸어내고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돗자리를 위에 깔았다. 그 모든 일이 내관과 궁인들의 몫이었으므로 바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귀빈들이 앉는 상석은 내명부의 소관이었다. 올해는 경빈의 주도 아래 실로 우아하면서도 대범한 분위기로 연회가 꾸려졌다. 경빈은 아직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은 빈 연회장을 천천히 둘러보며 모자란 것이 없는지 살폈다.
여성이지만 양인으로 발현한 경빈은 본래 명문가의 자녀로 어려서 채 발현하기도 전에 황제와 혼인하였다. 그때는 황제의 모친인 유태후가 살아서 수렴청정을 하던 때였다. 황제가 나이 들수록 태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황제는 세를 불릴 필요가 있어 경빈이 양인으로 발현한 뒤에도 놓아주지 않고 옆에 두었다. 여인의 몸을 지녔으므로 자식을 보고자 작정한 적도 몇 번 있었으나 그녀의 몸에 용종이 들어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부부의 사이는 썩 나쁘지 않고 다정하였으나 경빈에겐 큰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년이 고꾸라져서 어찌나 속이 다 시원한지 모르겠다. 아무리 예쁘다 해도 미운 년이 있기 마련인데 그년이 딱 그러하였지.”
깔깔 웃는 소리가 새해의 공기를 울렸다. 경빈은 그 우아한 외양이나 배경과는 달리 명문가의 자제답지 않게 입이 험했다. 오죽하면 입이 경박하여 경빈이라 부르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경빈은 희빈이 사라진 것이 못내 기분 좋은지 높고 고운 웃음소리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연회장이 아주 환하지 않으냐?”
“그렇사옵니다. 마마.”
경빈의 곁에 선 궁녀가 간드러지게 말하며 말을 받았다. 경빈의 궁에서 일하는 자답게 아름다운 외모의 음인이었다. 경빈은 사뭇 다정하게 웃음을 돌려주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한껏 차려입은 경빈은 경박한 입과는 달리 손끝은 우아하고 눈가를 내리뜨는 모습 하나하나가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완벽했다. 거칠게 흘러나오는 양인의 체향만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홀릴 만한 미녀의 모습에 연회를 준비하던 내관과 궁녀들의 얼굴이 죄 떨떠름해졌다. 눈과 코와 귀가 영 따로 노니 신경이 거슬려 머리가 아파 올 정도였다. 하지만 저런 자라도 황제의 후궁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이였다. 감히 누구도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짐을 날랐다. 힘들지는 않았다. 워낙에 일손이 없어 나까지 동원되기는 했으나 내가 높은 분들의 눈에 띄는 것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언의 동의 속에 나는 경빈의 시선을 피해 짐을 착착 들어 옮겼다.
신하들이 앉을 자리에 상을 놓는 것이 내 주된 일이었다. 보통 음인들이 상 하나를 겨우 옮길 때에 나는 네 개 정도를 한꺼번에 옮길 수 있었다. 요 며칠 식사도 잘 하고 따뜻한 이불과 토탄을 조금 얻었기에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미움으로 얼룩졌던 내관들의 얼굴도 여전히 마뜩잖기는 했으나 열심히 일을 해주자 살짝이나마 풀어졌다.
신년을 축하하는 연회는 정오부터 시작이었다. 아침에 문안과 제(祭)를 올린 사람들이 궁에 모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음식과 술을 받아 허기를 채우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점심에 시작한 연회는 보통 저녁까지 이어졌고 새벽이 되어서야 끝나는 일도 허다했다.
황궁의 모든 인력들이 원활한 진행을 위해 달라붙었다. 정초부터 일을 하게 된 이들의 얼굴엔 불만이 어릴 법도 하건만 그보다는 기대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혹여 실수라도 한다면 크게 경을 칠 것이지만 별 사고가 없다면 금일봉이 내려올 것이다. 나 또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머리와는 반대로 몸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오가니 누가 누구인지 모를 법도 하건만, 내가 지나갈 때마다 역병신이라도 본 듯 꺼려 하거나 수군대며 몸을 피했다. 음인들이 아직 일어나지 못한 덕에 연회장의 준비까지 돕게 되었지만 영 돌아다니는 것이 거북했다. 아직 황제의 체향이 벗겨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향을 맡을 수 있는 이들이 내 모습을 볼 때마다 흠칫하며 몸을 떠는 것을 보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난 귀인도 비빈도 아닌데 황제의 체향을 두르고 있는 것이 마치 유세라도 떠는 양 여겨졌다. 아무런 승은도 받지 못한 후궁들의 눈초리가 썩 좋지 않았으나 이처럼 큰 자리에서 소란을 피울 정도로 어리석은 이는 없어 다행이었다.
‘희빈이 있었다면 뭔가 일이 생겼겠지만.’
의관의 말에 의하면 냉궁에 갔다던가.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이후로 궁 안이 꽤 평화로워졌다는 듯했다. 아버지인 호부시랑도 목숨을 잃었겠다, 황제와 친왕의 분노까지 샀으니 재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재기하면 그 날로 나는 죽는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며 상을 옮기는 사이 어느덧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직급이 낮은 이들부터 모여든 연회장은 상석으로 갈수록 한가한 모습을 보였다.
황궁의 문이 열리자 하급 관리들부터 연회장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해가 머리 위에 뜨자 거의 모든 자리에 신하들이 앉았다. 수백 명의 말소리와 체향이 뒤섞이자 공기가 혼몽해졌다. 준비를 하던 내관과 궁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 연회장의 구석구석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이윽고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상석에 앉을 귀인들이 들어섰다. 경빈과 다른 비빈들이 일어서서 황제와 황친들을 맞이했다. 후궁은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정략혼이라 그 지체들이 높았다. 화려한 비단과 장신구가 늘어서자 그 광채에 눈이 시렸다. 문득 내가 걸친 옷과 황제의 체향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너무나 걸맞지 않은 두 가지가 한 몸에 섞여 있으니 부자연스럽기가 경빈 못지않았다. 장막의 그림자에 슬쩍 몸을 기대며 상석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무심했고 친왕의 얼굴엔 짜증이 어려 있었다. 둘 다 정복을 걸치고 있어 장엄한 풍채가 흘렀다.
황족만 사용할 수 있는 자색(紫色)이 들어서자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황족이라 해봤자 셋밖에 되지 않았다. 황제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친왕의 얼굴은 익숙했으나 연배가 좀 더 많은 두 명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선황의 누이인 연연 공주와 자금 공주가 남편과 함께 친왕의 옆에 앉았다.
연회의 상석은 멀리 있어 사람의 크기가 주먹만 했다. 사람 얼굴을 알아보기 쉽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친왕의 모습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몸에서 풍기는 기세와 자세가 남달라 절로 시선이 갔다.
친왕은 짝이 없구나.
배우자와 함께 앉은 다른 황족들과는 달리 친왕은 홀로 자리에 앉았다. 황족은 씨가 귀해서 이르게 성혼한다는데 친왕은 그 흔한 처첩 하나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가 동평왕으로 임명되어 동부에 거처를 두었으므로 금성에는 홀로 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가 맘에 들어 맞아들인 음인이 있다는 건 잘 상상되지 않았다. 물론 그도 언젠가는 성혼하여 처자식을 가질 테지만….
문득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언뜻 친왕이 이쪽을 본 것 같았다. 거리도 거리인 데다 그가 앉은 자리에선 내가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착각이겠지만 가슴이 섬뜩해져 일하는 이들이 있는 쪽으로 조심스레 이동했다. 마침 연회를 주관하는 내관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음. 상차림이 바뀔 때까지 잠깐 들어가 있게.”
내관이 인심 쓴다는 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는 길었으므로 자잘한 음식들이 계속 바뀌었으나 상 자체가 바뀌는 것은 한 번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쪽으로 갔다.
다들 제대로 앉아 식사를 하지 못하는 탓에 주방에서 나눠주는 주먹밥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주방을 담당하는 궁녀가 힐끔 노려보면서도 주먹밥을 내주었다. 날 주려고 따로 만든 게 아니라 벌레나 썩은 게 섞여 있지 않은 멀쩡한 주먹밥이었다. 음식을 보자 허기가 밀려왔다. 대충 주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자니 눈앞의 풍경이 문득 멀게 느껴졌다.
음식을 하고 수다를 떨며 도란도란 앉아있는 궁인들. 이리저리 오가며 얇은 목소리로 외쳐대는 내관들과 길을 잃고 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관료들의 모습.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광경이 문득 꿈이나 그림처럼 느껴졌다. 장막이 한 겹 내려있는 것처럼 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높은 곳이나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편안한 기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지독한 익숙함은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편린이리라.
‘예전에 누구였더라.’
작은 아이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웃었던 기억이 슬쩍 떠올랐다 사라졌다.
음인으로 발현하며 기억을 잃었지만 가끔씩, 폭풍이 몰아치면 강바닥이 뒤집히는 것처럼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냥꾼이라는 과거 때문일까? 대부분은 피 냄새나는 기억들이었지만 가끔씩 좋은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비가 떨어지는데도 구름 한 점 안 보여서 별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지던 하늘이라든가, 손 안 가득 부드럽게 쓸리던 커다란 짐승의 털가죽, 그리고 옛이야기를 읊어주던 다정한 목소리 같은 것.
아마 검을 휘두르는 작은 아이에 대한 기억도 그와 같은 것이겠지. 완전히 기억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힘들 것이다. 나쁜 기억들과는 달리 좋은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화전을 일궜던 마을의 의사가 생존에 필요한 것부터 기억하게 될 거라 말했었다. 사람의 몸이란 응당 그런 법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사람을 죽이는 법과 목매다는 법, 그늘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움직이는 방법 같은 것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떠올린 그 기억들 덕분에 살아남았다. 막상 황제가 궁금해하는 과거는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살아남은 것이다.
자신은 황궁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대체 어떻게 살아나온 것일까? 황자를 죽이는 게 임무가 아니었다면 대체 누가 표적이었던 것이고, 누구의 의뢰로 황궁에 들어간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는 임무를 완수했나?’
모든 것이 미궁이었다. 두 눈을 가린 채 걸어가는 것 같았다. 앞에 있는 건 넘어지는 정도에서 끝나는 돌밭일 수도 있지만, 끝도 없이 떨어지는 절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놓쳐버린 기억을 다시 찾을 방법 따위는 없고, 그저 떠오르길 기다리며 잔잔하고 어두운 기억의 강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상을 바꿔야 한다. 움직여라! 쏟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나는 내관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연회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을 들일 때가 되었다. 힘을 쓸 사람이 드물었기에 나는 연회석으로 들어가 상을 들어 옮겼다. 내가 다가가자 하급 관리들이 움찔 몸을 떨며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최대한 모른 척하며 그들을 외면했다. 아직 상에 남아 있는 음식들에서 기름진 냄새가 올라왔지만, 주먹밥을 먹은 덕분에 참을 수 있었다. 남은 음식들은 궁인들이 먹기도 했지만 아마 나에게까지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멀리서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빈의 목소리였다.
“한동안 관노 한 명을 놀리며 재미 보셨다면서요. 그나저나 섭섭합니다. 왜 전 형수라 불러주시지 않는 겁니까?”
저 여자가 대체 뭐라는 건가? 나는 상을 들어 옮기다 말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경빈이 내뱉은 말에 머리가 다 얼얼했다. 친왕이 날 형수라 부르며 놀린다는 게 비밀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연회에서 회자되자 당혹스러웠다.
친왕이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까딱 실수했다간 형부라 부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좌중이 꽁꽁 얼어붙었다. 황제와 경빈을 동시에 모욕하는 대꾸에 서리라도 내린 듯 좌중의 얼굴이 파삭 굳었다. 나 또한 얼음장처럼 굳어 상을 든 채 서 있는데 경빈의 높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소첩이 어찌 형부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정신 나간 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 나간 자가 아니고서야 본왕에게 형수니 뭐니 나불거릴 리가 있나.”
심히 뒤틀린 목소리였다. 가볍게 던진 농에 본전도 못 건지고 얻어맞은 경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왠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애써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도망쳤지만 불행히도 일이 끝나지 않아 다시 돌아가야 했다. 대체 식중독 따위를 왜 걸리는 건가? 부아가 치밀었다.
상을 하나 들어 나르는 사이에도 날카로운 말이 수없이 오갔는지 다시 돌아간 연회장에선 숨소리 하나 크게 나지 않았다. 체한 것이 명백한 표정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보기에 안쓰러웠다. 왠지 방금 전보다 좀 더 춥게 느껴지는 건 해가 기울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과연 그 입담에 적들의 사기도 태풍 앞의 갈대처럼 꺾였을 것입니다. 그리도 영명하시니 황제께서도 친왕을 동부로 보내신 것이겠지요?”
둘러앉은 황족과 후궁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데도 경빈은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거리했다. 그녀와 말싸움을 하여 이길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모르셨습니까? 제 입이 그렇게 대단합니다. 그나저나 궁이 이렇게 적적할 줄 알았으면 안부 편지나 한 장 날리고 말 걸 그랬습니다. 황궁이 이렇게 썰렁해서야. 올해는 꼭 조카의 얼굴을 보고 한껏 귀여워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경빈이 이를 까득 악물었다. 황제에게 자식이 없는 것은 후궁의 치부였다. 경빈은 양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조차 별 기대를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 희빈도 사라져 내명부의 가장 윗사람이 되었지만 용종을 잉태하지 못해서야 면이 서지 않았다. 그 꼴이 고소해서 나는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연회장의 그늘로 숨어들었다. 흘러가는 얘기에 흥미가 갔다. 친왕이 날 형수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촉발된 말싸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싸움은 웃음 섞인 음성으로 인해 끝났다.
“아우가 심기가 불편하구나. 동부로 보낸 것이 그리도 싫었느냐?”
황제의 목소리에 친왕이 짜증스런 표정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동부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누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아도 싸울 일이 넘치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니 그렇지요.”
“그래도 조카 운운한 건 네가 심했다.”
“반성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친왕이 황제를 향해 포권하며 짐짓 사과했다. 동복형제이기 때문인지 확실히 격의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여염의 형제 같은 모습에 당혹스러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겪은 황제는 그렇게 격의 없이 굴 만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가깝고 동등한 이들이라 이토록 다른 것일까?
“믿을 이가 없어서 동쪽으로 보냈는데 내가 아우에게 큰 잘못을 했던 것 같군. 그래, 어떻더냐?”
“어찌나 지겹던지요. 새로운 얼굴들도 없고 뭐 싸울 건덕지도 없으니 지루하더이다.”
“새로운 얼굴이 없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뭐 새로운 여자들은 많더군요.”
친왕의 대꾸에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여자라. 마음에 드는 이는 있고?”
“왜요. 마음에 드는 음인이 있다면 맺어주기라도 하시려고요?”
“하나뿐인 아우가 성혼을 하겠다면 형으로서 힘을 써줘야겠지.”
황제의 말에 연회장이 술렁였다. 황족과 사돈을 맺는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었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후손이 없는 지금 친왕의 자식이 다음 황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황제의 외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쉽게 떨칠 수 있는 유혹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친왕이 질색하여 혼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황제가 밀어준다면 얘기가 달랐다.
황제의 말에 친왕이 영 쓰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술잔을 한입에 털었다.
“차라리 맘에 드는 이가 있다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너무 따져 고르지 말거라. 같이 살다 보면 정이 드는 법 아니겠느냐?”
슬쩍 경빈을 바라보는 황제의 모습에 친왕이 코웃음 쳤다.
“다들 체향이 독해서 안을 마음도 들지 않는데, 무슨 수로 한평생 같이 산단 말입니까?”
“……체향이 독해? 그런 말은 처음 하는 게 아니냐?”
“제 취향이 고약한 것을 뭐하러 말하고 다닙니까? 예전부터 음인들의 향이 영 맘에 들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더 심하더군요.”
“예전부터라면 언제부터?”
황제의 질문에 친황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발현한 뒤부터 줄곧 그랬던 것 같은데.”
“발현한 뒤부터? 네가 발현을 언제….”
속으로 숫자를 헤아리는 듯하던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나를 향하는 것을 나는 기이한 기분으로 마주 보았다. 분명 숨는다고 몸을 숨겼는데도 날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은 똑바르기만 했다. 황제의 검은 눈동자는 충격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일그러짐은 한순간이었으나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 라고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들썩였다.
뭘까. 친왕이 한 얘기의 무엇이 황제를 그리도 동요하게 만든 것일까? 곧 황제와 친왕 사이에 작은 목소리로 대화가 오갔다. 내가 있는 자리에선 들리지 않았으나 상석으로 더 다가갈 순 없었다. 황제 주위에 있는 것은 무예에 능하지 않은 내관이나 궁녀가 아니라 병부에 속한 장교와 호위병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친왕부터가 강한 무인이라 단번에 들킬 터였다.
내가 음인만 아니었어도 저 정도 경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입술을 악물었다. 기억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숨어들 수 있는 길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 길을 밟아 움직일 힘이 없었다. 발현하고 난 뒤 음인이 되어서 쓸모가 없어졌다 했던가? 과연 그런지도 모르겠다. 힘은 약해지고 몸은 부드러워져 쉽게 다치고 양인에게 짓눌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양인의 힘을 떨쳐낼 수 없다는 것에 지독한 무력감과 공포가 솟아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황제가 남긴 멍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연회가 끝나자마자 불려갈 듯한 느낌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 얼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독한 체향.’
친왕의 말이 껄끄러운 모래마냥 입 안에 달라붙었다. 체향은 개인적인 것이라 같은 향이라도 맡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성향이라는 것은 존재해서 매운 향은 매운 향이고 달콤한 향은 달콤한 향이었다. 그것은 맛을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어떤 사람은 매운맛을 더 잘 견디고 좋아하지만 어린아이의 입맛처럼 단것만을 좋아하는 이도 있는 것이다.
내 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했다. 그리고 친왕은 대부분의 향을 싫어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먹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이가 있는 것처럼 타인의 향을 싫어하는 이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걸까? 마치 친왕이 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게 내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에서 도망쳤다. 일은 한참 남아 있었지만 도무지 그 안에서 버티고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농담처럼 오가는 상황 속을 돌아다니다 들키기라도 하면 대체 어떻게 뒷감당을 하겠는가? 개인적인 모욕을 받는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일 것이다. 친왕에게 핀잔을 당해 잔뜩 독이 올라있는 경빈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하늘만 알 터였다.
희빈에게 당했던 고초를 경빈에게 또 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희빈처럼 허술하지도 않으니 날 해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분명 빠져나갈 수 없게 옭아맬 터였다. 그녀는 입이 경박한 것과 더불어 음인에게 약한 것으로도 소문나 있었지만 난 어여쁘지도 향이 좋지도 않으니 동정을 살 여지도 없었다.
조심스레 경운당 밖으로 발을 옮기자 한참 일을 지휘하던 내관이 두 눈을 부라렸다. 난 그를 향해 조용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눈치가 있는 자라면 내가 뜻하는 바를 알아챌 것이다.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한숨만 훅 내쉬었다. 당장 일손이 부족하니 걱정이야 되겠지만 연회장에서 나온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억지로는 아무것도 시킬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일하다가 사라지면 겨우 쌓아 올린 관계가 다시 무너지겠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황제와 또다시 눈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 나에 대해 농담하는 경빈이나 친왕의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내가 이 황궁 안에서 조롱당하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직접 눈앞에서 보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니겠는가?
‘내가 노예라서?’
노예라는 신분으로 존중받길 바라는 건 분명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게다가 나 같은 죄인은 좀 더 고통스럽게 살고 자존심을 짓밟히고 죽어 마땅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 또한 들었다.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지만 사람을 죽이는 게 내 일이었다면 나는 분명 중죄인이다. 나 같은 자가 존중받길 원한다는 건 내게 죽은 이들에게 너무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황제는 악독한 주인이었다. 자비롭지 않았고 이유 없는 폭력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하지만 그에게도 선은 있었다. 의관을 보내주고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무언으로 지켜주었다. 그걸 지켜줬다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황제의 그 선 때문에 나는 아직 살아있다.
‘또, 접객소의 노예로 두기는 하지만 다른 이의 수청은 못 들게 하니까. 어쩌면 조금은 특별한 게 아닐까.’
쓸데없는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착각을 하게 된다. 격에 맞지 않는 화풀이 대상이기 때문에 노예로 두고, 그럼에도 황제의 체향이 배어있기에 체면상 돌리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분명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만. 그런 내 착각은 그 무엇보다 무서운 족쇄였다.
나는 황궁 담장 너머에 있을 것이 분명한 푸른 산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첩첩이 쌓여있는 산맥은 금성의 북쪽을 둘러싸고 맑은 물을 뱉어냈다. 황제의 노예이길 포기하고 멀리 떠나는 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부모의 무덤이 파헤쳐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아직까지도 날 이곳에 붙들어 놓고 있었다.
내게 돈을 던져주었던, 어쩐지 구원받은 듯 느껴졌던 그 한순간 때문에….
처소로 돌아가자 싸늘한 방 안이 날 반겨주었다. 나는 전날 얻은 솜옷을 껴입고 이불 속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무런 온기가 없어 눅눅해진 이불 안이 그래도 바깥보단 나았다. 의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일쯤부터 음인들도 몸이 나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손이 모자라 나를 찾는 일도 없겠지.
사실은 모욕당한다 해도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람도 세게 들이치지 않고 화로도 잔뜩 놓여있어서 일하고 있다 보면 더워서 땀이 흘렀다. 그 따뜻했던 연회장이 그리워 우울해졌다. 일하면서 나누는 짧은 대화도 그리웠다. 차가운 곳에 몸을 묻고 있자니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가슴을 쳤다. 경멸하듯 말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나, 날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던 수많은 얼굴들. 형수라 불러달라며 농담하던 경빈의 웃음소리. 나를 돌아보며 충격과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황제.
내가 있던 곳은 어떻게 알아챈 걸까? 그러고 보면 친왕도 내가 있는 곳을 똑바로 바라봤던 것 같은데. 실력 있는 양인들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기척을 잘 눈치채는 것인가?
‘아냐.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음인으로 발현하여 몸이 망가지긴 했으나 황궁에 잠입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살수였다. 이렇게 쉽게 들킬 리 없다. 사냥을 하기 위해 숨어있던 중 목표로 했던 짐승에게 목덜미를 잡힌 기분이 이럴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섬뜩하고 오금이 저려 왔다.
나는 두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멍이 거의 다 사라져서 만지는 것 정도로는 통증이 올라오지 않았다. 황제의 체향은 아직 남아 있었다. 황제가 심하게 때리지 않은 덕분에 멍이 빨리 사라진 것이다. 몸이 마르고 비실거리자 황제의 손속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런 사소한 행동이 날 자꾸 착각하게 만들었다. 아픈 이에게 손을 올리지 않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일 텐데, 첫 경험부터가 폭력적이다 보니 그런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서 자꾸 의미를 찾게 되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문득 아버지의 무덤에 가보고 싶어졌다. 무덤 위로 자라난 부드러운 풀이 햇볕에 따땃하니 달아오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위를 덮듯이 몸을 누이면 조금은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판 건 내 자유고 이 황궁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도주뿐이었다. 폐허가 된 마을도 한 번쯤은 다시 가서 보고 싶지만 불가능할 것이다. 담장에 가로막힌 산의 그림자만이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일 것이다. 축축한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에 귀를 대어 보았다. 운희루의 풍악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한겨울의 마른 공기 때문인지 목이 바짝 말라 기침이 났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는데 문득 신경에 거슬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기 기조 있는가?”
꾸며낸 듯 가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솜옷을 벗었다. 추위도 지금 당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얇고 어두운 빛의 평상복 하나만을 걸치고 탁자 위의 칼을 집어 들었다. 처소로 향했을 때가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에 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처소 밖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내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건지요?”
“황제께서 뵙자고 하시네.”
황제의 궁에서 나온 내관이 아니었다. 그 정도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내색 없이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발밑을 밝히는 등롱도 없이 내관은 성큼성큼 길을 걸었다. 그가 가는 방향 또한 황제의 침궁과는 달랐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되는 밤이면 가끔씩 이런 이들이 날 찾아왔다. 험악한 의도를 숨기고 찾아오는 이들은 거의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인기척 없는 공터로 날 데리고 갔다. 황궁에 이런 장소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지만 재미있게도 난 이곳에 벌써 몇 번이나 와 보았다. 이곳이 정말로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 흉한 의도를 품은 자들이 계획을 실행할 장소로 이곳을 고른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짐승 소리도 울리지 않는 스산한 골목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달라붙는 듯하여 나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이 내관은 아마도 진짜 내관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틈을 이용해 잠입시킨 심부름꾼일 것이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밝은 빛 아래에서 보면 푸르게 남아 있는 수염 자국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보냈는지 알겠는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같은 이들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혼자서 나를 찾아온다는 거지.”
내관의 얼굴이 확 굳었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렇게까지 눈치가 좋아 보이지도 않고. 어둡고 외딴곳에 끌려와 벌벌 떨어야 할 음인 노예 나부랭이가 이토록 자신을 무표정하게 마주 보는 것에 지금에서야 이상함을 느끼는 듯했다.
“누가 보낸 거지? 희빈인가?”
내관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난 이렇게 몰래 찾아오는 사람을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과거의 직업 때문인지 나와 동류의 인간들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비를 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날 방도가 있는 법이었다. 나는 소매 속에 숨겨온 칼의 손잡이를 잡아 던졌다.
비열한 기색을 띠며 일그러지려던 남자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끄윽거리는 소리를 내며 목을 부여잡는 남자의 모습을 나는 무심히 바라보았다. 내 손아귀에서 튀어 나간 칼날이 남자의 목을 관통해 있었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경악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빛을 잃고 잠잠해지는 것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남자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기에 경계하며 다가가 목에 꽂힌 칼을 비틀었다. 핏줄기가 뿜어져 나올 것을 알고 각도를 틀어 피했지만 자잘한 방울들이 묻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부러 어둡고 낡은 옷을 골라 입고 나왔지만 고달픈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찾아오는 음험한 이들을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놈들은 내가 죽여 입을 막는다 해도 문제 될 게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후궁이나 궁인들과는 달리 숨어들어온 놈들은 사라져도 찾는 이가 없어 처리가 편했다.
죽어 마땅한 놈을 죽이는 데 죄책감을 느낄 정도의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공개적으로 날 깔아뭉갤 수 있는 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함정을 친 다음 나를 처박는 것이었다. 황제조차 구해줄 수 없을 정도의 명분을 들어 날 친다면 죽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한없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몸은 지나치게 피폐해졌고 사는 것에 대한 의미 또한 잃어버렸다. 은인에 대한 도리를 지킨다든가, 성군인 황제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등의 모든 행동이 점차 빛을 잃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고 멍을 달고 다닌다 해도 내 존재를 위협으로 느끼는 자들이 있었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서 자신이 총애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몇몇 후궁들은 과다할 정도로 나를 질투하고 싫어했다.
그 배후를 궁금해한 적은 별로 없었다. 나를 죽이고자 하는 시도를 뿌리치면 한동안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지엄한 황궁 안으로 사람을 들이는 일은 쉽지 않기에 살수를 고용했던 자들은 그 살수가 사라진 것에 당황하며 몸을 사렸다. 황제가 그들 몰래 내게 호위라도 붙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체를 어떻게 할까?
돼지우리가 있는 축사는 너무 멀고, 땅을 파서 묻자니 얼어붙어 여의치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그것대로 또 난리가 나겠지. 이전 호부시랑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와 비슷한 난리가 벌어질 것이다.
죽은 남자의 목에서 칼을 뽑아 그의 옷에 닦았다. 안주머니와 소매를 뒤지자 금전과 호패 따위의 자잘한 물건들이 나왔다. 의뢰자의 신분을 짐작할 만한 물건들은 당연하지만 없었다. 하지만 없다고 해서 유추를 하지 못하겠는가?
남자의 호패에 새겨진 직위로 보아 그는 호부의 말단으로 짐을 옮기는 자였다. 희빈의 아버지가 호부시랑이었으니 이 자는 분명 희빈과 관련된 자일 것이다. 희빈을 모함하기 위해 보내졌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희빈은 이미 몰락하여 냉궁에 있었으니까.
“어쩔까.”
시체를 노출시키면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수사가 들어갈 것이다. 희빈이 원한을 가질 만한 이는 나와 친왕 정도일까. 친왕을 죽이고자 이런 허접한 놈을 보낸다는 건 말이 맞지 않으니 분명 그 화살은 나를 향하리라.
역시 안 되겠다. 나는 시체를 어깨에 메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황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의 시체를 숨기는 법은 많지 않았다. 황궁에도 돌아다니는 짐승들이 많아 그저 덮어만 두었다간 하루 이틀도 안 되어 발견될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엔 시체를 던져둘 곳이 있었다. 그가 날 데려온 곳과 희빈이 감금되어 있는 냉궁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죽인 뒤 그 증거를 희빈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가까운 곳을 실행 장소로 택한 것 같았다.
새하얀 눈송이가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바람에 실려 춤을 췄다. 하얀 숨이 입 안에서 터져 나왔다. 손바닥 가득 달라붙은 미끈한 피가 마르는 것인지 얼어붙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지만 시체를 등에 메고 가는 내내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사람을 치운 것처럼 냉궁으로 가는 길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과연, 그녀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일각도 안 되어 도착한 냉궁의 담벼락은 쇠락의 끝을 상징하는 양 무성한 넝쿨과 스산함을 품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벽과 허옇게 일어난 먼지가 무덤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잔뜩 쌓여있는 눈이 시야를 깨끗하게 만들 법도 한데 삐죽이 솟은 나뭇가지와 잡초 때문인지 지저분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지체 없이 담장 너머로 시체를 던져 넣었다.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났다. 아마도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희빈은 금세 저 시체를 발견할 것이다. 발견한 시체를 어떻게 할지는 그녀의 마음이겠으나, 굳게 닫힌 문을 붙들고 울어도 어느 누가 신경 쓰겠는가? 폐궁 안에 시체가 있다 외쳐도 그녀가 미쳤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아직 체온이 남은 시체를 옮긴 덕에 땀이 났다. 하늘에선 싸락 같은 눈이 내려와 바닥을 덮고 있었다. 붉은 핏자국과 끌린 자국은 밤새 내리는 눈이 지워줄 것이다. 혹시 다 덮이지 않아 드러난다 해도 별로 상관없었다. 내 낡은 옷과 몸은 붉은 피로 물들어 꼴이 말이 아닐 테지만 그 또한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옷은 빨면 되었고, 내가 피나 상처를 달고 다니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얼굴이 시커멓게 멍들어 다녀도 내가 황제에게 맞았겠거니 막연히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다.
‘응. 정말로 그랬었지.’
내가 처음으로 암살자와 마주쳤던 날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황제에게 계속해서 얻어맞고, 그에게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에 상심하던 차였다. 조용히 날 불러낸 내관이 검을 꺼내 휘두르는 것에 놀라서 몸이 굳었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자 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무기를 지닌 이를 내가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향해 내지르는 검의 궤도가 다 보였고, 그 검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음인의 몸은 약했지만 힘겨루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몸은 생각보다 유연하며 단단했고,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피가 흘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나기가 내리쳤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넋을 놓거나 망연히 서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흔적이 남지 않을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시체의 발에 돌을 달아 연못으로 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전날 누군가가 죽어 나갔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잠잠하기만 했다. 서툰 싸움으로 인해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계속해서 신경에 거슬리던 작은 소음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 감시하던 암살자의 시선과 움직임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잡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잡놈에게 죽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누구를 죽이려면 자신 또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었다. 과거의 누군가. 약간 상냥한 음색의 누군가가….
“희빈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을까?”
처소로 돌아가기에 앞서, 초라한 냉궁의 처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 보았던 희빈은 화려하고 커다란 궁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런 곳으로 내쳐졌으니 죽은 것과 진배없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은 것 같은 기분과 죽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 내가 황제를 만날 때마다 괴로워 삶의 의지를 잃으면서도 죽고 싶지는 않아서 버둥거리는 것처럼.
눈을 들어 피 묻은 피부에 문질러 닦았다.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고 몸이 덜덜 떨렸지만 꼼꼼히 시간을 들여 몸을 닦았다. 처소로 돌아와선 피 묻은 옷을 벗어 물에 빨았다. 내게 충분한 물건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물이었다. 내가 직접 길어서 놓기 때문에 처소 옆의 항아리엔 언제나 물이 가득했다.
돌아온 처소는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나는 옷을 빨고 몸을 씻은 뒤 축축한 이불 속으로 다시 몸을 묻었다. 나갔다 온 적 따위 없다는 듯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았다. 멀리서 풍악 소리가 들려와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시체를 발견한 희빈이 비명을 내질러도 당분간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잠을 청했다.
* * *
연회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지만 냉궁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얘기도, 희빈이 발광을 일으켰다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일을 조용히 묻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냉궁에 갇혀있음에도 밖과 연락을 취해 사람을 들여올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남아 있다는 건 대단했으나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 슬슬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돕는다면 그건 그녀 본인이 지닌 미색과 미향 때문이겠지. 그녀의 미색은 그야말로 황궁 제일이라 사랑에 눈먼 이가 한둘 정도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의관이 말했던 것처럼 식중독으로 앓아누웠던 음인들의 몸이 하나둘 나았다. 신년 연회는 끝났지만 작은 연회가 이어지는 탓에 일손은 계속해서 부족했다. 하지만 일을 돕겠다고 접객소에 가도 처소에 있으란 말만 돌아왔다. 무언가 위에서 말이 나온 듯했으나 자세한 사정은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이 기다리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했다. 황제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대체 뭘까? 바쁘게 돌아가는 황궁 안의 움직임과는 달리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황제에게서 부름이 온 것은 신년 연회가 끝나고도 나흘이 지난 뒤였다. 익숙한 얼굴의 내관이 처소 밖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거울을 보거나 물에 비춰보지 않아도 얼굴의 멍이 완전히 사라진 걸 알 수 있었다. 손목에 자리 잡고 있던 시커먼 멍이 사라진 지 며칠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밝은데 부르신 건가요?”
중천에 떠 있는 해를 힐끔거리며 말하자 내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조금 늦어질 것 같으니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 명하셨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주인 없는 침궁에서 황제를 기다리는 건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요즘같이 추운 겨울이면 더욱 그랬다. 황제가 늦을수록 따뜻한 곳에서 한참이나 몸을 녹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욕실로 향하려는 나를 내관이 붙잡았다.
“오늘은 술 시중을 들 것이야. 밖에서 볼 것이니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하고 나오도록.”
“밖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어서 준비하고 나오게.”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 하는 내관의 재촉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연회 이후로 두근거렸던 가슴이 급기야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기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옷을 갖춰 입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단정하고 깔끔하게 보이길 원하며 처소 밖으로 나오자, 내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차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그는 좋다 나쁘다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게.”
접객소의 겨울용 옷은 살짝 두꺼웠지만 겉옷은 각자 구비하여 걸치도록 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겉옷은 아무런 솜도 대어져 있지 않아 모양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솜옷을 한 벌 얻어놓긴 했지만, 황제를 배알할 때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옷은 아니었다. 추위에 몸이 얼어붙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본으로 지급되는 얇은 겉옷을 단단히 여미고는 내관의 뒤를 쫓았다.
내관은 황제의 침궁이 아니라 편전 근처의 작은 정자로 발을 옮겼다. 황제가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장소인 만큼 작지만 섬세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자의 기와와 주변을 둘러싼 붉은 동백나무 위로 하얀 눈이 덮여 선명한 색의 대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세필을 들어 검은 먹과 붉은 물감을 점점이 흩뿌린 듯 고요한 풍경이었다. 지붕에서 늘어진 풍경(風磬) 위에도 눈이 쌓여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제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정자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목을 감고 늘어진 두꺼운 모피를 본 적이 있기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황제께서는 조금 늦으시니, 친왕 전하의 말 상대라도 해 드리게.”
“친왕 전하의 말 상대요?”
내관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접객소의 노예에게 말 상대를 하라는 뜻은 너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해가 밝은 대낮이니 최악의 경우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만 애초에 상식이란 게 통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친왕이 부른 것도 아니고, 황제의 내관이 와서 날 친왕의 옆에 앉힌다는 건 너무나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대접하라는 게… 혹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게. 정말로 말 상대나 좀 해드리라는 것이니.”
“그렇습니까.”
주저하며 묻는 나를 향해 내관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그의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친왕은 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발로 짓밟았는데, 나 같은 게 옆에 앉아서 시중을 들어도 괜찮은 걸까?
어쨌거나 황제의 명령이었다. 친왕이 싫은 기색을 보이더라도 억지로 어떻게든 버티면 곧 황제가 올 것이다. 유쾌한 상황은 아니겠으나 친왕이 싫어하더라도 몸을 바짝 엎드리고 용서를 빌어 버티는 게 좋을 듯했다. 황제가 왔을 때 기왕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내관의 뒤를 따라 정자를 오르자 친왕이 인기척에 뒤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좀 늦게 되었으니 간식을 먼저 하시라는 황상의 전갈이옵니다.”
“형님답지 않군.”
“정사를 논하시던 중 강을 정비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길어지게 되어….”
“저건 뭐지?”
친왕이 내관의 말을 끊으며 대뜸 나를 가리켰다. 친왕의 흉흉한 시선에 내관 또한 잠시지만 몸이 굳었다.
“폐하께서 술 시중을 들게 하려 부른 아이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일단은 저 아이에게 전하의 시중을 들게 하란 당부가 있었나이다.”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지는 표정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역시 내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에 친히 밟아놓고, 연회장 안에서도 나 때문에 쓸데없는 언쟁을 벌였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원해서 그의 시중을 들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고개를 슬쩍 떨어뜨리자 내관이 내 옆구리를 꾹 찔렀다.
“어서 가서 뫼시게.”
“친왕께선 제가 싫으신 것 같은데, 다른 아이를 부르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황제께서 명하신 걸 어길 셈인가?”
내관의 으름장에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황제의 명령이니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날 여기에 밀어 넣은 것엔 분명 의도하는 바가 있을 터, 나 따위가 회피할 수 없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또한 황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을 용서할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덜 맞은 걸 몰아서 맞게 되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정자로 완전히 올라서자 기다렸다는 듯 다과상이 들어왔다. 색색깔의 예쁜 과자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에 시선이 갔다. 가끔 황제가 차를 마실 때 본 적이 있는 과자들이었다. 음식이라기보단 공예품에 가까운 모습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과자들이 탁자 위로 몇 접시나 올라왔다.
“그렇게 멀뚱히 서서 시중을 들 건가? 아주 재주도 많으시군.”
“황송합니다.”
네모난 상 옆에 앉아 무릎을 꿇었다. 때맞춰 들어온 화로가 상 옆에 놓이고 찻물을 끓이기 위한 준비가 갖춰졌다. 차를 우리는 법은 대충 알고 있었다. 황제와 잠자리를 하기 전에 몇 번 내려본 적이 있기도 했다. 내가 달아오르는 주전자를 바라보고 있자 친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네가?”
“썩 솜씨가 좋지는 않습니다만.”
황제는 내가 내린 차를 마시기는 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은 듯했다. 그야 다도를 제대로 공부해서 배운 것도 아니니 귀하신 입에 흡족할 리 없다. 그럼에도 황제는 가끔씩 내게 차를 내리게 했는데, 늘 한 번에 마시지 않고 여러 번 시간을 두어 나눠 마셨다. 두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차를 음미하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날 닮았다는 형의 추억을 떠올리려는 게 아닐까 내심 짐작했다.
친왕은 뭔가 말을 덧붙이려는 듯했으나 곧 입을 다물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나와 말 섞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투였다. 바람이 불자 숨을 참고 있었던 듯 크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체향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처럼 철저하게 숨겨지질 않는 듯했다.
내 체향은 왜 이 모양일까. 희빈처럼 황홀하진 않더라도 맡고 불쾌하지 않을 정도는 되어도 좋았을 텐데. 내 흉흉한 전직 때문이라기엔 아름다운 향으로 상대를 유혹하여 목숨을 앗아가는 이들도 꽤 있었다. 희빈만 생각해도 체향이 인성을 따라간다는 얘기는 영 틀리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냥 이렇게 생겨 먹은 게지.’
향이 좋은 사람이 있는 만큼 향이 나쁜 사람도 있는 거겠지. 이제는 거의 단념하게 된 사실인데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게 왜 한숨은 푹푹 내쉬나? 사람 무안하게.
정자 위에 무릎 꿇고 앉아 붉은빛을 내는 화로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화로에서는 따스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추위를 녹일 정도는 아니었다. 황족의 수발을 드는 중에 손을 내밀어 녹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바라보고만 있자니 어느덧 물이 다 끓어 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기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바로 다 쏟아버리고 다시 물을 넘칠 때까지 부었다. 궁에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차 내리는 법은 어째선지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내려봐서 기억하고 있다기보단 누군가가 내리는 모습을 많이 봐서 기억하고 있다는 쪽에 가깝기는 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나는 내 손이 아니라 다기를 다루는 다른 이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적당히 우려진 듯하여 잔에 따르고 뚜껑을 덮자 친왕이 찻잔 위를 손끝으로 따각따각 두드렸다. 내가 내린 건 마시기도 싫다는 걸까. 한참을 손끝으로 찻잔만 두드리던 친왕이 갑자기 날 노려보았다.
“넌 왜 마시지 않지? 독이라도 탔나?”
“예?”
“감히 어디서 반문이냐. 독이라도 탔기에 마시지 않는 것인지 물었다.
“당치 않사옵니다, 전하. 노여움을 푸소서.”
납작 엎드리자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무슨 말만 하면 엎드리니 매번 일으키는 것도 아주 귀찮다.”
친왕의 명령에 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차를 한잔 우려 따라줬을 뿐인데 독이니 뭐니 하는 걸 보니 오늘도 날 괴롭히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신년 연회에 내내 짓고 있던 심술궂은 얼굴이 못마땅하다는 듯 날 노려보고 있었다.
“마셔라.”
내 앞으로 찻잔이 내밀어졌다. 방금 전까지 친왕이 두들기던 찻잔이었다. 못내 의심스러운 기분으로 내미는 찻잔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독이 든 게 아니라면 마셔. 설마 못 마시겠다고 하진 않겠지?”
그야 차 한잔 마시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가 심술궂게 말하는 것처럼 내가 차에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찻잔의 뚜껑을 열고 적당히 식은 차를 머금자 향기로운 다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황제가 동생과 함께 마시고자 준비한 차이니만큼 그 향긋함이 비할 데 없었다. 마치 꽃이나 소나무를 머금은 듯한 기분에 살짝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정말로 뭔가 들었나?”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있었더니 친왕이 살짝 당황하며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뚜껑을 열고 그 안을 살피는 모습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전하. 향이 너무 좋아서요.”
“향이 좋아? 평범한 것 같은데.”
그야 황족에겐 평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린 물맛을 지우기 위해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라 이처럼 좋은 차를 마실 기회가 없었다. 내가 궁에 들어와서 마시는 차도 풀냄새는 날지언정 향이 좋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여간 유난이군.
친왕이 기가 차다는 듯 비웃었다.
“이것도 먹어봐.”
친왕이 다과 하나를 찍어 내밀었다. 분홍색으로 색이 예쁘게 들어있는 꽃 모양의 과자였다. 정확히 어떤 음식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주저하고 있자니 친왕이 재차 입가로 들이밀었다.
“어서.”
친왕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꽃 모양의 다과 하나를 조심스레 삼켰다. 달콤하고 말랑한 감촉이 입 안 가득 번지며 녹아내렸다.
뭐지 이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에 몸이 굳었다. 곶감보다 달고 꽃잎보다 부드러웠다. 마치 눈이라도 삼킨 것처럼 순식간에 입 안에서 녹아버렸다.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내가 아니라 친왕이 아닐까. 너무나 충격적인 맛에 몸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이런 음식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아니. 이게 음식이긴 한 것인가? 두 눈이 절로 커지고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충격으로 인해 굳어 있으려니 친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너…. 대체 뭐냐 그 표정은? 내가 못 할 짓이라도 했다는 듯이.”
“죄송합니다. 너무 맛있어서 그만.”
차의 향기로움과 쓴맛으로 물들었던 입 안이 과자의 달콤함으로 중화되었다. 적절하게 뒤섞이는 씁쓸함과 달콤함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실제로 하늘이 빙빙 돌았다. 너무도 단맛에 코끝이 찡하니 아려왔다.
“요란도 하군.”
친왕이 비아냥거렸지만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입 안의 과자가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이 못내 서럽고 아쉬웠다. 입을 가린 손을 겨우 내리고 과자가 더 담겨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엔 그저 예쁘게만 보였는데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달아요.”
“팥 앙금 처음 먹어보나?”
“이게 팥 앙금이란 거군요.”
이런 맛은 처음이다. 팥은 값비싼 작물이라 먹을 일이 거의 없었고 어쩌다 한 그릇 얻어먹는 명절날의 팥죽도 이렇게 달지는 않았다. 대체 뭘 넣어 만든 건지 모르겠다. 입 안의 단맛이 자꾸 떠올라 그릇만 쳐다보는데 당장에라도 빈정거릴 줄 알았던 친왕이 묘하게 조용했다
내가 또 심기를 거스른 걸까? 이제는 친왕이 뭐든 비꼬아야만 안심이 됐다. 농담을 하지 않고 빈정거리지 않는 친왕은 무서웠다. 내가 과거에 무슨 능력을 가졌건 간에 친왕을 앞에 두고 있으면 숨이 턱 막혀왔다. 해칠 방법은커녕 도망칠 방법도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찮은 살수 나부랭이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완벽한 무인이라는 게 이런 자인가 싶었다.
“…독을 먹어도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을 터인데.”
왠지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사라졌다. 친왕은 딱딱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듯하던 친왕의 얼굴은 곧 정자 밖에 펼쳐진 하얀 풍경으로 향했다.
친왕이 움직이지 않았기에 나는 다과상 옆에 앉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달고 맛난 것을 먹은 충격으로 잠시 떨렸던 몸은 이제 다른 이유로 떨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모피를 걸치고 있는지라 친왕은 모르겠지만 겨울의 날씨란 매섭기 짝이 없었다. 괜히 주전자를 화로 위로 옮기며 두 손도 같이 녹였다.
“남은 건 가져가라. 먹는 놈의 표정이 이상하니 나는 손도 대고 싶지 않군.”
친왕이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으며 말했다. 말투는 쌀쌀맞았지만 그 내용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의 그 달콤함을 또 맛볼 수 있다는 건가? 갑자기 몸을 꽁꽁 얼리고 있던 추위가 녹아 달아나는 듯했다. 기쁜 마음에 정신이 확 깨었다.
“감사합니다.”
이전에 보았을 때 친왕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또 이렇게 먹을 것을 주고 잘 대해준다. 뭔가 변덕스럽다는 말만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부분이 친왕에겐 있었다.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남아 있는 다과들을 쳐다보자 그 양이 꽤 되었다. 방금 전에 먹은 꽃 모양의 과자뿐만 아니라 감과 과일의 모양을 본뜬 것이나 작은 떡 같은 것들도 놓여 있었다.
전부 다 주는 걸까? 아니면 방금 먹은 과자만 주는 걸까? 기왕이면 전부 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음식들인데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
탁자 위의 과자들을 다 주시는 거냐고 감히 물을 수 없어 속으로만 끙끙 앓자니 절로 열이 났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기가 막혔지만 어쨌건 기분이 붕 뜨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을 가져가라던 친왕은 내게 더 말을 붙이는 일도 없이 먼 경치만 바라보았다.
문득 친왕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양심이 찔려왔다. 차도 과자도 나 혼자 먹은 탓에 친왕은 차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황제가 오기 전까지 친왕이 지루하지 않도록 잘 챙기는 것이 내 일인데 너무나 방만했다.
“저, 차를 새 잔에 다시 따르겠습니다.”
“됐어. …숨쉬기가 힘들어.”
친왕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뒤돌아서 있어서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갑갑함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짐승의 비린내와 비슷한 체향이 공기를 타고 설핏 퍼졌다. 심기 불편한 짐승이 애써 그 원인을 외면하고 있는 듯했다.
어서 황제가 왔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황제는 대체 왜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일까? 이전까지만 해도 내게 친왕의 향이 묻어있는 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침묵 속에 이런저런 생각만 깊어졌다. 한껏 흐트러지며 체향을 내뿜던 친왕은 심정이 계속 혼란스러운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침묵이 끝난 것은 내관의 발소리 덕분이었다. 날 이 정자로 데려온 내관이 한껏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황상께옵서 일이 길어져 오늘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차일 날을 다시 잡아 연통을 넣겠다 하시니 오늘은 그만 들어가소서.”
“이거야. 사람을 바람맞히다니.”
친왕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또한 따라 일어나기는 했으나 어찌할 바를 몰라 주춤거렸다. 친왕은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면 되었지만 나는 처소로 돌아가도 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침궁에서 황제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네도 그만 돌아가게.”
다행히도 따로 들은 얘기가 있는지 내관이 내게 돌아가도 좋다 말해 주었다. 화로를 가져왔던 궁인이 남은 다과를 상자에 차곡차곡 넣어 내게 건넸다. 묵직한 상자를 받아들자 방금 전까지 느꼈던 곤혹스러움이 거짓이라도 되는 양 저 멀리 날아갔다.
과자 상자를 소중히 품에 껴안자 친왕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갤 돌렸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나는 기쁘기만 했다. 꽃 모양의 다과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모두 가져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궁에 들어온 뒤 이런 기쁨과 두근거림을 느낀 건 지난번 옥패를 받은 이후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얼마나 가볍고 쉬운 인간인가. 그가 내 배를 짓밟고 경멸했음에도 이런 작은 콩고물에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다. 친왕은 내 인사에 대꾸도 않고 성큼성큼 발을 옮겨 사라졌다. 나는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정자에서 몸을 돌렸다.
처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기대감과 기쁨으로 가벼웠다. 황제와 만나게 되어 각오했던 아픔도 없고 친왕도 생각보다 못되게 굴지 않았다. 처소로 돌아오는 품 안에는 맛있는 과자도 한 상자나 있었다. 얇은 옷차림으로 밖에 한참이나 있었는데 별로 추운 것도 모르겠다.
탁자 위에 상자를 조심스레 올려놓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래 두면 상하거나 벌레가 꼬일까? 일단 무른 것부터 먹고, 아니 모양마다 한 개씩만 먹고 잘 놔둘까. 겨울이니까 그렇게 쉽게 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웬만하면 오래 두고 먹고 싶었다.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 아직 먹어보지 못한 녹색 잎사귀 모양의 과자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과자에서는 달콤한 꿀 냄새가 났다. 조심스레 반을 잘라 삼키자 씹지도 않았는데 스르륵 입 안에서 녹으며 싸한 향이 번졌다.
기분이 하늘 위로 날아갈 듯 좋아져서 절로 얼굴이 풀어졌다. 상자의 뚜껑을 다시 덮고는 침상 위로 몸을 뉘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기분이 스르륵 풀릴 것 같았다. 요즘 계속 우울한 생각만 들어 시야가 어둡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맛있는 음식 하나에 살 것만 같았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니.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달콤한 것을 입에 머금고 기쁨을 누리는 짧은 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이런 기쁜 순간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언젠가는, 살아있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