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방연호
기조와의 첫날밤에 아무것도 묻지 않는 꿈을 꾸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장에 앉아서 자신을 팔던 음인을 황궁으로 데려오는 꿈이었다. 평인 같은 체형을 지닌 시장의 그 음인은 형과 똑같은 얼굴로 처연하게 앉아 있었다. 장례를 치르도록 돈을 주자 은인이라 부르며 몇 번이고 고개 숙였다. 황궁으로 데려와 옷을 벗겼다. 첫날밤 결착을 하고 곧바로 비에 봉했다. 그는 첫 희락기에 곧바로 용종을 잉태하여 장자를 낳아주었다. 음인 남성은 보통 한 번의 출산도 힘들어하지만, 단단한 몸을 지닌 그는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낳아주었다.
머리에서 흔들리는 황금의 황후관과 몸을 감싼 자색 비단이 눈을 끌었다. 기조는 작은 아이와 함께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다채롭게 빛나는 잉어를 바라보며 아이와 함께 물고기 밥을 뿌리고 까르륵 웃었다. 조용히 다가가 뒤에서 몸을 끌어안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 얼굴을 보고는 곧 순순히 몸을 기댔다.
양손 가득 박여 있던 굳은살이 없어지고, 고된 일로 시들었던 얼굴은 꽃처럼 화사해졌다. 입가를 쪼는 듯한 입맞춤에 나 또한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다. 이것은 꿈인가 환상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조의 웃음소리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고막에 달라붙었다.
눈을 뜨자 멍들어 시커멓게 변해버린 얼굴이 앞에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조의 얼굴은 메마르고 초췌했다. 정액과 피딱지가 몸 여기저기 들러붙어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그가 몸에 지닌 자색은 내가 때려서 생긴 멍뿐이었다. 금관 같은 건 써본 적도 없을 것이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잡아당겨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이제 와서 잘해준다고 해도 그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가 과거를 말한다 해도 믿지 못하겠지.
* * *
청금산에 자리를 깔고 앉은 도적 떼를 해치우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간만에 피를 봤지만 기분이 하도 더러워 욕지기가 치밀었다. 대외적으로는 산적질을 하는 도적 떼를 토벌하는 것이라 발표했으나 실상은 살수집단 하나를 절멸시키는 일이었다. 감히 황궁에 살수를 보낸 무엄한 놈들이 청금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죽은 형님의 기록 덕에 알 수 있었다.
죽은 형님을 떠올리자 입맛이 더욱 썼다. 장자로 태어났으나 발현하지 못한 탓에 아무런 직위도 받지 못하고 지내야 했던 율목친왕은 8년 전 목을 매고 죽었다. 죽은 이유에 대해 많은 소문이 돌았으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게 잘 숨겨져 있었다.
황제는 이를 까득 갈아붙였다.
율목친왕이 남긴 유서에는 황궁에 잠입한 무도한 놈들과 그들을 고용한 자들에 대한 얘기가 쓰여 있었다. 평범한 화전민을 가장하고 있으나 한 꺼풀만 들춰보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이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있다고. 그중 한 놈이 황가와 접촉하여 무도한 일을 꾸몄으니 찾아 응징하고 하늘의 법칙을 바로 세워달라 하였다.
율목친왕이 말한 살수들의 마을을 찾고 의뢰를 접수하는 창구, 물자와 정보를 운반하는 도우미들을 5년에 걸쳐 색출했다. 황제는 그 무도한 놈들의 뿌리를 완전히 뽑길 원했다. 율목친왕이 죽을 때에는 열다섯 어린애에 불과했던 셋째 방현성이 어느덧 대장부가 되어 있었다. 극양인으로 발현한 그는 약관이 되기도 전에 자신보다 키가 커졌다. 그는 살수들을 쓸어버려야겠다는 자신의 말에도 장난스런 표정을 지을 뿐 별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딱히 이유 따위 없어도 군대를 움직이고 작전을 펼 수 있다는 게 맘에 든 듯했다.
“황궁에 잠입하다니 간이 부은 자들 아닙니까. 그런 놈들의 손속에 당할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다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소제는 미인이 웃으며 다가오면 거절할 자신이 없습니다.”
“농담할 일이 아니다. 이런 놈들이 궁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현성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그는 설마 그런 말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황제를 바라보았다.
“설마…….”
“허투루 보지 마라. 잡초 한 뿌리 남아서는 안 되느니.”
8년 전이지만 황궁에 살수가 한 명이 들어왔다. 어떤 놈인지 잡아내지 못했으나 그놈이 황궁 안에서 분탕질을 치고 나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놈이 들어온 뒤 황족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황제는 딱딱한 얼굴로 자신의 동생을 돌아보았다.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 동생은 큰형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한 살 위의 형은 어머니가 달랐지만 개인적으로 꽤 좋은 사이였다. 평인이기 때문일까. 그처럼 부드러운 기색의 황족은 그뿐이었다. 자신과 기 싸움을 하려 들지도 않고, 조용히 앉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얘기를 나누곤 했다.
어머니인 유태후는 그를 싫어했지만 자신이 친정을 하게 되면 그에게 중임을 맡겨 잘 쓰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토록 귀하게 생각하며 맘에 들어하던 이였는데 8년 전 돌연 목을 매었다.
“용서할 수 없지. 마음 같아서는 모두 잡아들여 십 년쯤 고신을 하고 싶다만.”
산자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암살단을 쓸어버린 뒤 그놈들의 마을에 놓은 불이 시커먼 연기를 내고 있었다. 사람 목숨으로 밥을 벌어먹는 주제에, 그들도 가족이랍시고 아내며 남편을 옆에 끼고 자식을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황제를 해하려 계획한 것은 역모이니 이는 9족을 멸할 죄였다. 마을에 연관된 자들 모두를 죽여 없애라 명령했다. 갓난애 하나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살수 짓을 생업으로 삼은 놈들이니 작정하고 숨으면 찾아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기는 하나, 그 때문에 5년이나 철저히 준비한 것이다.
“도시에 잔당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호패를 확인하여 샅샅이 색출하도록.”
“명을 받드나이다!”
친왕이 고개 숙여 명을 받았다. 병사를 끌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세월이 새삼 빨리 감을 깨달았다. 극양인인 동생의 기세에는 자신도 가끔씩 위축될 때가 있었다. 평소에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사고를 치는 게 귀엽기까지 했으나, 이처럼 피 냄새가 나는 곳에서의 친왕은 맹수처럼 위험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친왕과 헤어진 황제가 들어선 것은 화전민들의 마을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약초와 가죽을 다루는 작은 시장과 농작물을 팔고 가축을 거래하는 곳이 모두 있었다. 암살단의 자금줄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했다. 의뢰하는 자들의 착수금을 받고 살수들의 저금을 모아두던 전장은 진즉 친왕이 접수하여 피칠갑을 해놓았다. 반항하던 이들을 모두 죽여 벽에 못 박아두었다는 말에 황제는 동생을 크게 칭찬했다.
배부른 짐승처럼 천천히 시장을 가로지르던 황제의 눈에 몰려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을 알아챈 호위병이 재빠르게 움직여 상황을 알아왔다.
“음인 한 명이 자신의 몸을 팔고 있습니다.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었는데, 마을에 불이 나서 부모가 죽었답니다. 양지바른 곳에 관을 사 묻어주고 싶으나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몸을 판다는군요.”
헛웃음이 다 나왔다. 요 근래 불이 난 마을이라면 그 발칙한 놈들의 마을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대놓고 이유를 말하며 꿇어앉아 있다는 건 죽여달라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음인?”
“예. 폐하. 하오나 벌써 이틀 넘게 꿇어앉아 있다는데 아직도 사간 이가 없다는 건….”
미색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이었다. 아름다운 음인의 수요는 높았다. 색주가뿐만 아니라 자식이 없는 평인의 집에서도 음인을 사들이는 일이 있었다. 딱히 양인과 교합하지 않아도 희락기의 임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잠깐 보니 몸이 음인치고는 컸습니다.”
“음인이 아닐 수도 있지. 그 사람백정 놈들이 급해서 이런 허술한 덫을 친 것일 수도 있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판다는 소리에 기가 막혔다. 웃기는 수작이었다. 황제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갔다. 안 그래도 형님의 생각이 나 속이 끓던 참이었다. 죽어 마땅한 놈을 베어 넘기면 조금 시원해지리라.
거적을 덮어놓은 시체 옆에 남자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호위병이 말한 것처럼 음인치고는 체구가 컸다. 마르고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길쭉한 뼈대를 따라 균형 있게 붙은 근육이 시선을 끌었다. 단순한 화전민이라기엔 묘하게 시선을 끄는 몸이었다.
가끔 성장은 빠르지만 발현이 늦으면 평인 비슷한 체구까지 몸이 성장하고는 했다. 뼈의 구조 자체가 완성된 뒤에 발현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특히 자궁 쪽의 뼈가 뒤틀리며 사망하는 일도 많다고 들었다. 씨받이를 원하는 집에서도 그런 자들은 기피하기 때문에 뒤늦게 발현한 이들은 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저자도 그런 사례 중에 하나일까 싶었으나.
“음인이라고?”
시체 옆에 앉아 있는 이에게선 아무런 체향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부모가 죽어 슬픈 것이라면 응당 감정이 북받쳐 있을 터인데 자연스레 흘러나오기 마련일 체향이 나지 않았다. 역시 함정인 것인가. 거적에 싸여 있다는 시체도 의심스러웠으나 일단은 궁금증부터 채우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봐라. 어떤 물건을 파는지 봐야겠다.”
어떤 평인이 음인 행세까지 하며 이리 허술한 짓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조롱거리가 하나 늘어서 나쁠 건 없지 않으니까. 동생이 돌아오면 그 우스운 꼴을 너도 봤어야 한다며 얘기해주고 싶기도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남자가 기운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턱선 밑에서 잘려있는 옅은 빛깔의 머리카락 사이로 창백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전을 일궜다는 사람치고는 깨끗한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끌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세상이 멈추는 게 이런 것일까. 황제는 8년 전 죽어버린 자신의 형과 똑 닮은 얼굴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충격의 순간이 지나자 곧바로 분노가 치솟았다. 어차피 암살단도 무너지고 식구들도 다 죽었으니 마지막 조롱이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칼자루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자신의 형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이 무도한 놈을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칼을 뽑기 전, 아무런 기대도 없는 눈동자가 물끄러미 자신을 향했다. 형을 닮은 남자는 체념과 우울함을 뒤섞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시면 제 한 몸 바쳐 평생 은혜를 갚겠습니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허름한 옷자락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차고 있었다. 추위에 질린 얼굴이 퍼렇게 얼어 있었고 거스러미가 잔뜩 일어나 군데 군데 피가 비쳤다. 칼자루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얼굴이기도 했다. 허술한 함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것일까? 이토록이나 자신이 동요할 줄 알고 만든 함정이었나?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음인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누가 자신을 사주리란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부모의 시체 옆에 꿇어앉은 음인은 가끔씩 극도로 겁을 먹었다. 채광이나 벌채 등, 무리 지어 험한 일을 하는 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는 두려워하며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런 곳에서 자신을 사 갈까 봐 무서워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무서워하면서도 그는 자리를 지켰다. 썩어가는 거적 밑의 시체를 때때로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우습게도 진짜 같았다. 하기야 사람을 죽이려 획책하는 놈들이니 이 정도는 해야 의뢰를 받아 돈을 벌 것이다.
“네가 음인인지 평인인지 어떻게 알지? 체향을 내봐라.”
음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불안한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역시 거짓인가 생각할 찰나, 체향이 났다.
“……특이하군.”
너무 흐려서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음인이 맞았다. 음인은 힘과 체력이 약해서 무예를 익히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자가 미인계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니 살수로서는 영 쓸모없을 듯했다. 이렇게 시장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특이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닐 터이고. 지금 이것이 함정이라 해도, 재주가 있는 자를 이렇게 버리는 패처럼 쓰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도 암살단에서 일하는 자의 가족이기는 하나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 자식일 것이다.
황제는 문득 자신이 이 남자를 살리기 위해 변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형의 얼굴을 본 따 역용한 역적이었다. 관련된 자들은 머리카락 하나 남지 않게 없애버릴 생각이었는데, 어처구니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못할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무릎 꿇은 남자 앞에 돈을 던졌다. 얼마였는지 제대로 세어보지 않았으나 외유를 위해 들고 다니는 돈이니 그리 큰돈도, 적은 돈도 아닐 것이다. 작게 쭈그러들어 있던 남자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쇳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마치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빛도 깃들어 있지 않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고, 뒤이어 감사의 빛을 띠는 것을 황제는 당황하며 바라보았다. 마른 가지에 물이 올라 부드러워지는 광경을 목격한 듯 가슴속이 간질거렸다.
“장례를 치른 뒤 내가 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정말 장례를 치를지도 모르겠고, 장례를 치른 뒤 도망치지 않을지도 확신할 수 없으나 일단 그리 말했다. 수하를 시켜 음인의 뒤를 쫓고 신상을 캐라 명령했다. 역용한 흔적이 있는지 또한 잘 살피라 일렀다.
음인은 감사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며 계속 절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기 싫었다. 그는 황제가 던진 돈주머니를 소중히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자신이 뭘 할 줄 알고 저렇게 감사하다 말하는 것인가? 이상한 취미가 있어 가죽을 벗겨 죽일지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팔다니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기조이며, 화전을 일구던 기부진이란 자의 아들이란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시체는 아버지인 기부진의 것이 맞았다. 두 사람은 암살단이 있던 마을에서 화전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아들만 군대가 들이닥친 날 약초와 작물을 팔러 나간 덕에 화를 면한 것이다.
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암살단을 뿌리 뽑아 복수했다는 해방감도 들지 않았다. 내심 그가 자신의 형일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나서 심기가 어지러웠다.
율목친왕은 평인이었다. 양인으로도 음인으로도 발현하지 못하고 평인인 채 죽었다. 사람이 죽을 때, 죽는 이는 자신의 체향을 이리저리 흩뿌렸다. 죽음보다 강한 감정은 없기 때문에 몸이 제어되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죽을 때의 공포나 슬픔, 분노나 억울함 같은 감정들이 체향과 함께 남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평인은 지닌 체향이 없기에 율목친왕 또한 아무런 흔적도 없이 하늘로 갔다.
형을 죽인 살수와 형을 닮은 암살단의 남자. 관련이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관련이 있다면 그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그 음인은 어찌해야 할지요?”
“어찌하다니?”
내관이 심기 불편한 황제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데려오신 음인 말입니다. 기조라는 이름이온데, 후궁에 처소를 마련해야 할지요.”
“당치도 않은 소리! 안으려고 데려온 게 아니다.”
내관의 물음에 버럭 역정이 났다. 형과 닮았기에 데려온 것인데 그걸 후궁에 넣는다니 참으로 역겨운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노예 신분의 음인을 황궁 안에 그냥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외궁 중에 음인들이 있는 곳이 접객소던가?”
“예. 폐하.”
“그곳에 두도록. 하지만 일은 하지 못하게 해라.”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하심은….”
“내가 따로 불러 물을 것이 있으니 처소만 거기에 두고 접객은 금하라.”
“예 폐하. 명을 따르겠나이다.”
접객소는 황궁에 오는 손님들의 수청을 드는 것이 주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면 험하게 굴려질 터였다. 채광하는 이들이 지나갈 때 그가 두려워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자신이 그를 사지 않았다면 그런 곳에 팔려가 단명했으리란 생각에 이상하게 속이 쓰렸다.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도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계속 인사했을 것이다. 몇 명이나 되는 이에게 돌려지고 얻어맞아도 싫단 소리 한 번 하지 않았겠지.
“꾸미는 바가 있어 내게 접근한 것일 터인데,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가는군.”
황제는 고개를 내저으며 업무에 열중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황궁에 돌아온 이후로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도 자꾸 그 음인이 떠올랐다. 암살단을 처리하며 알아낸 정보들을 정리하면서도 후궁에 처소를 마련할까 묻던 내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기가 막히는군. 그 얼굴을 후궁에 넣어서 대체 뭘 어쩌란 건가? 안기라도 하라는 건가?”
그렇게 초라하고 메마른 몸을 안아봤자 재미도 없을 것이다. 뭣보다 형을 닮은 얼굴이 음욕에 젖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근친상간 같아서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 기조란 자를 볼 것이다. 준비하도록.”
황제는 내관을 향해 명령하며 읽고 있던 서신을 거칠게 접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열흘 가까이 지나 있었다. 일단 시급한 것들을 처리하고자 그 음인에 대한 것은 미뤄두었지만 계속 떠올라서 일하는 것을 방해하니 안 되겠다 싶었다. 어서 궁금한 것들을 묻고 치워버리는 것이 좋을 듯하여 명하자 내관이 조례에 들 시간이라 알려주었다. 아침부터 무슨 주책이냐는 듯한 표정에 열불이 확 났다.
“누가 지금 보겠다더냐?! 저녁에 볼 것이다!”
“예. 폐하. 저녁에 보시도록 준비하겠나이다.”
머리가 지끈거려 그때부터 죄 건성으로 일을 해치웠다. 친왕을 경계하라는 쓸데없는 상소문과 산적 따위를 토벌하는 데 어찌하여 귀하신 몸이 직접 나셨냐는 꾸짖음까지.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입만 산 밥버러지들이 태반인 가운데 철없는 동생은 또 후궁을 건드려 말이 나왔다. 황제가 돌아보지 않는 것을 비관하던 궁녀 한 명이 친절하게 다가온 친왕에게 마음을 준 것이다. 마음만 주고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결국에는 몸까지 주어 신세를 망쳤다.
어리석은 여자였다. 간통을 했다 해도 친왕이 그녀를 원했다면 용서하고 보냈을 것이나 불행히도 그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친왕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이가 자신에게 홀리는 것을 재밌어했다. 그야 홀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궁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외로움에 사무쳐 있는데…….
황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건성건성 일을 처리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떨어져 있었다. 가서 그 형님을 닮은 무도한 자를 벌하고 과거로부터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기만 한다면, 그래. 목숨 하나 살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감히 폐하를 뵙습니다.”
예상치 못한 방 안의 풍경에 황제는 굳어버린 듯 멈춰섰다. 침상과 연결된 방에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속이 비치는 침의를 입고,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목소리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기조의 얼굴에 모든 것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신뢰 가득한 눈빛이 부드러움과 흠모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양순한 시선에 심장 한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그의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사실 자체에 배덕감을 느끼며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형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흐릿하니 비치는 침의 안쪽의 쇄골이며 유륜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상태에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치솟는 욕망을 저어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
자신은 황제였고 눈앞의 남자는 본래 죽어야 할 자였다.
열흘 가까이 간자를 붙여 미행한 결과, 그의 몸 상태는 음인답지 않게 강건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상한 물건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씻으며 내벽 안쪽과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확인했다는 보고 또한 받았다. 황궁에 들어온 이들에게 으레 행하는 절차라고 말하자 딱히 의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 또한 들었다.
침의를 입힌 것 또한 밤 시중을 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물건을 숨기지 못하도록 얇고 비치는 옷을 입혀놓은 것일 터였다. 하지만 보는 이가 음심을 느낀다면 옷의 의도가 뭐 중요하겠는가?
“누가 이런 옷을 입으라고 했지?”
“내관께서 몸을 씻은 뒤 이 옷을 입으라 하셨습니다. 자, 잘못한 것인지요?”
자신의 얼굴을 보고 화색이 돌았던 얼굴이 대번에 새하얘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옷자락을 움켜쥐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런 모습을 보니 확실히 형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죽은 형은 냉소적인 면이 있어서 황제인 자신을 대할 때도 혀 속의 칼날을 잘 숨기지 못했다.
“아니. 네 잘못은 아니다.”
나중에 내관을 탓하면 될 일이었다. 멋대로 저런 옷을 입히고 술상을 가져다 놓으니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는가? 얘기만 나눌 생각이었는데 기조의 옷깃 사이로 자꾸 시선이 갔다. 이상하게 후끈하고 어지러운 게 날씨 탓만은 아닌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네게 물어볼 것이 몇 있는데, 솔직히 대답하리라 믿는다.”
“하문하소서.”
“화전을 일궜다고 들었는데. 쭉 화전촌에서 부모와 밭을 일군 것인가?”
“예, 폐하. 원래는 사냥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뒤늦게 음인으로 발현을 하면서 몸이 많이 약해지고,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쭉 부모와 함께 밭을 일궜습니다.”
화전촌 근방의 마을에서 얻은 정보와 같았다. 근방에서 꽤 유명한 사냥꾼이었는데 어느 날 음인으로 발현하더니 쓸모없어졌다던가. 사냥이라는 것은 체력이 필요한 직업이기도 하지만 체향을 잘 가려야 하는 직업이기도 했다. 짐승들은 인간보다 예민하기 때문에 음인이나 양인이 아무리 향을 잘 가려도 곧잘 맡았다. 음인의 향을 맡은 맹수들은 그 대상을 사냥하려 했다. 상대를 먼저 알아차리고 위치를 선점한 맹수가 매복하여 덮치면, 그 어떤 사냥꾼도 버텨내기 힘들었다.
“음인으로 발현한 게 언제라고?”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겨울을 7번인가 8번 정도 지낸 것 같습니다.”
“확실치 않아?”
“네. 발현하면서 크게 앓았는데, 그, 기억이 흐릿합니다.”
기조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 숙였다. 살짝 말을 느리게 하며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잘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뒤늦게 발현하는 경우에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만.”
황제는 얌전히 몸을 숙이고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새삼 다시 살펴보았다. 양인보다는 왜소하다지만 굵은 뼈대에, 키 또한 커서 여느 평인 못지않았다. 이목구비의 균형이 잘 맞고 사람의 눈길을 끄는 곳이 있어 발현 전에는 꽤나 미남 소리를 들었을 듯했다.
‘일찌감치 발현하였다면 심히 아름다웠겠지.’
기조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자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몸이 바짝 얼었다. 긴 눈매가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광대와 턱으로 이어지는 선은 가늘면서도 유려해서, 어째선지 물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연상케 했다.
‘음인이라 그런가.’
술병을 들고 있는 손가락엔 굳은살이 가득했지만 얼굴의 피부는 뽀얗고 부드러웠다. 아니. 실제로 만져보면 꽤 거칠었지만 양인과는 다른 유약한 생물이란 게 실감 나는 피부였다. 두꺼운 방어막이 아니라 잘못 건드리면 찢어질 것처럼 연약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연약하리라. 그도 말하지 않았는가? 몸이 약해져서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문득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암살단의 일원인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거늘, 이런 식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변명하는 것이 참으로 같잖았던 것이다.
하기야 본색을 드러내고 기억난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현하기 전까지 사람 죽이는 일을 했다고 어찌 고백할 수 있겠는가? 황제는 소리 없이 웃으며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열흘 사이 술 따르는 법을 익혔는지 투박한 손가락이 술병을 들어 기울였다.
“그것참 큰일이었겠구나. 사냥 중에 발현하였다면 위험했을 터인데.”
“사실, 아팠던 것도 잘 기억나지 않는지라…….”
어색하게 웃는 모습은 거짓을 가리기 위함인가? 그도 아니면 황제에게 기억나지 않는 것을 고하느라 겸연쩍어서? 황제는 속이 점점 꼬이는 것을 느꼈다. 형과 비슷한 얼굴로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칠, 팔 년 전에 발현했단 말이지.”
형이 죽은 것은 8년 전이니 얼추 기간이 맞았다. 그가 발현하기 전에 황궁에서 살수 짓을 한 거라면 꼭 들어야 할 게 있었다. 고문하여 알아내는 방법도 있긴 하겠으나……. 황제는 이를 까득 악물었다. 움켜쥔 얼굴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얼굴을 돌리며 감상하는 사이 두 사람의 몸이 너무 가깝게 붙었다. 입욕제에 대체 무엇을 풀었는지 모르겠으나 기조의 피부에서 향긋한 살 내음이 올라왔다. 체온에 데워진 달달한 냄새는 음인의 체향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나 사람의 음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이대로 욕심을 채워버릴까?’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붉게 물들어가는 기조를 바라보았다. 암살단을 밀어버린 뒤 쏟아지는 일거리 때문에 후궁전에 갈 시간은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해서 욕구를 풀어내지 못했다. 오늘의 이 시간도 열흘 내내 갈린 뒤에야 얻어 낸 휴식과 다름없었다. 대상이 적절치 못하기는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게 욕구를 풀어내선 안 될 게 무언가?
이 기조라는 남자는 분명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후궁에 속한 음인들 대다수가 자신에게 순순히 안기며 기꺼워하기는 했다. 황제의 권력과 양인의 체향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때문에, 권력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을 안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이 자는 형을 닮았을 뿐이지 형 본인이 아니지 않은가? 황제는 일단 욕구를 풀어낸 뒤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고개를 숙여 발갛게 달아오른 귀 뒤쪽에 입술을 묻자 품 안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목이 새빨갛게 물들며 쇄골께까지 빨개지는 모습이 이상하게 사랑스러웠다. 아아. 정말로 상대를 좋아하면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감동 비슷한 감탄까지 느끼며 황제는 품 안의 몸을 한번 꼭 끌어안았다.
평인처럼 큰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는 뼈대가 품 안에 폭 감겨왔다. 따끈한 몸이 기분 좋았다. 끌어안기는 바람에 균형이 흐트러진 기조가 조심스레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귓불을 앞니로 슬쩍 물자 가는 몸이 떨리며 옷자락을 정신없이 움켜쥐었다.
순진한 반응에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처음일까? 음인의 희락기는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왔다. 임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음인은 집 안에 갇혀 엄중히 관리되는 게 보통이었다. 억제제를 지어 마시거나 독방에서 요양했고, 평소에도 환약을 상비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희락기에 들어선 음인은 양인의 체향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달아오르기 때문이었다.
평민들 중엔 음인이나 양인의 수가 적은 편이지만 취급은 비슷했다. 다만 살수업에 종사하는 놈들도 그렇게 정조를 중요시할까? 그야 애를 배면 곤란하니 주의 정도야 하겠지만, 어차피 음인이 되어 제 몫을 하지 못하는 폐물이니 아무렇게나 굴릴 것도 같았다.
짜증이 치밀어서 품 안의 몸을 침상 위로 밀어뜨렸다. 옷 같지도 않던 침의의 앞자락이 벌어져 단단한 가슴과 복근이 드러났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듯 살짝 말라 있었지만 농사일 때문인지 적당히 붙은 근육의 모양새가 맘에 들었다. 평범한 음인과는 다른 몸에 정복욕이 치밀었다.
“다리 벌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기조는 잠시 주저하며 어물거렸지만 곧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무릎을 살짝 세운 채로 벌어진 다리가 어중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벌어진 다리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화들짝 놀라며 숨을 들이켜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허벅지 안쪽의 피부가 생각보다 더 부드러워서, 바지를 입은 채 무릎으로 슥 긁어내리자 빨갛게 자국이 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핑글 돌았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암살단의 일원이 분명하여 취조하고자 했던 상대를 이불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으니. 색에 미쳐 거사를 일그러뜨리는 혼군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눈앞의 남자를 놓아줄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덜미를 이로 씹으며 엉덩이의 살을 잡아 벌렸다. 퍼득퍼득 놀라면서도 감히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견디는 게 맘에 들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자 혼란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황제를 받아들일 준비는 끝마쳤을 것이다. 벌린 엉덩이 사이를 중지로 쓸자 매끈한 향유가 만져졌다. 별 저항 없이 손가락을 밀어 넣자 따끈한 내벽이 뻑뻑하게 벌어졌다.
“흐읏!”
끌어안은 몸에서 나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에 이성이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허리춤만 대충 풀어 내리자 반쯤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밑에 깔려 있는 음인의 여린 비부에 억지로 밀어 넣자 기름칠 된 내벽이 성기를 뻐근하게 잡아 왔다.
“아…. 으윽! 폐, 폐하.”
기조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가에 습기가 차는 것이 가학심을 부추겼다. 황제는 체향을 맘껏 뿜으며 여린 속살 사이로 기둥을 밀고 들어갔다. 비명이 터져 나오고 가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츠러들었다. 오므라들려는 허벅지를 잡아 벌린 뒤 찍어 누르자 비명을 지르며 매달려왔다. 옷자락이 묵직해졌지만 그것이 귀엽게 느껴졌다. 옷깃에 얼굴을 부비며 고통을 삭이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다.
품 안에서 덜덜 떠는 무력한 생물의 허리를 잡고 움직이자 젖은 숨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살려달라는 듯 꼭 매달려 엉기는 허리를 움켜잡고 천천히 왕복하자 한껏 벌어진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키듯 벌벌 떨었다. 기조는 감히 자신을 찍어 누르는 고귀한 신분의 양인을 밀쳐내지도 못하고 고통을 견디며 가만히 떨기만 했다.
별다른 애무도 없이 갑작스레 삽입한 탓에 고통이 커 보였지만 배려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려해야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던 인간말종 따위, 욕구를 채우고 나면 고문실이든 어디든 처박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양인의 체향에 자극받은 아랫도리가 애액을 뱉어내기 시작하자 고통과는 다른 감각이 치솟는지 뺨에 홍조가 돌았다.
“아! 아읏! 윽!”
뻑뻑했던 내벽이 애액으로 미끌거리면서도 황제의 양물을 집요하게 물어왔다. 움직임이 아까보다 수월해지자 황제의 추삽질도 빨라졌다. 욕심껏 서너 번을 세게 올려친 황제는 눈물이 잔뜩 맺힌 기조의 눈꼬리를 입술로 훑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입맞춤을 잔뜩 겁먹은 얼굴 위로 드문드문 떨어뜨리자 용기를 얻은 기조가 옷자락 대신 목 뒤로 팔을 감아왔다.
목을 감으며 안겨 오는 체온이 어찌나 달콤한지, 황제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인간말종이니 뭐니 생각했던 것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눈앞에서 터져 나오는 들뜬 숨에만 정신이 팔렸다. 양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내벽을 조심스럽게 찌르고 박아대자 꽤 깊은 곳의 한 점이 돌출된 게 느껴졌다. 귀두 끝으로 그 부분을 꾹 누르자 품 안의 몸이 확 긴장하며 뒤틀렸다.
“아학!! 아……!”
“꽤 깊어. 손가락은 안 닿겠네.”
황제는 작게 웃으며 기조에게 입맞춤했다. 처음 봤을 땐 하얗게 들떠있던 각질이 시선을 끌었었는데, 며칠 사이 잘 관리된 입술은 아침 이슬에 젖은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입맞춤도 처음이려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황제는 기조의 혀를 슬쩍 물고 빨았다. 느끼는 곳을 처음으로 자극당해 튕겨 올라가는 허리를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잡아 누르자 원망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던 몸을 더럽히는 기분이 최고였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슬슬 긁자 급기야는 눈물을 터뜨리며 몸을 떨었다.
후궁에 들어오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성 경험이 없었으나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이가 이 몸을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기쁘고 흥분됐다.
문득 황제는 자신에게 깔려 있는 기조가 아무런 체향도 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락기가 아니라고는 해도 흥분했다면 당연히 흘려야 할 체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쾌락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황제는 슬쩍 시선을 내려 아랫배 사이에 비벼져 곧추선 기조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마른 근육이 잘 잡힌 아랫배가 그가 흘린 정액으로 얼룩져 있었다.
“왜 체향을 내지 않지? 병이라도 있나?”
황제는 기조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주며 다정히 물었다. 시장에서 체향을 맡아보긴 했으나 워낙에 흐려 잘 기억나지 않았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병이 있거나 아플 경우 체향을 잘 못 내는 경우도 있었다. 황제의 침실에 들어온 이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걱정이 되었다.
“대답.”
“내, 냄새가 역하기 때문에….”
기조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음인의 향이 역해봤자 얼마나 역하다고 이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음인의 체향은 각인한 다른 상대가 있거나 임신 중이 아니고서야 역하기가 힘들었다. 황제는 심술을 담아 내벽 안쪽의 깊은 곳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쾌락에 면역이 없는 몸이 자지러지며 펄쩍 뛰었다.
“체향을 낼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다니 짐의 잘못이로군. 기분 좋게 해주마.”
“아, 아닙니다. 정말로! 아…. 저, 정말로 향이 좋지 않아서.”
쾌락에 일그러진 얼굴이 힘들어하면서도 더듬더듬 대답했다.
“기분이 상하실까 봐.”
품 안의 음인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쾌락에 물들어 허우적거리면서도 체향을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호승심이 자극당해 황제는 기조의 목덜미를 이로 물었다. 체위를 바꾸어 범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양인을 처음 받는 듯한 몸이라 어려울 것 같았다.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주무르며 허리 짓을 빨리하자 기조가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절정감이 고조되자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뒤로하고 바르작댔다.
여린 내벽을 양물로 꽉 채우며 비벼대고, 한 번도 벌려진 적이 없던 깊은 곳까지 귀두로 찍어대자 처음 겪는 감각을 버티지 못한 기조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해댔다. 미끈하고 말랑거리는 내벽이 경련을 일으키며 양물을 꽉 잡아 물었다. 꿈틀거리며 성기 이곳저곳을 물어대는 감촉에 황제 또한 한계에 달해 정액을 길게 뿜었다.
내벽보다 뜨거운 액체가 기조의 배 속을 가득 채울 듯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꽤 오랜만의 정사이기 때문인지 황제의 사정은 길게 이어졌다. 끊어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꿀렁거리며 쏟아지는 뜨거운 액체에 기조가 망연한 얼굴을 했다.
그때 부르르 떨리며 마지막 정액을 쏟아낸 황제의 성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황제도 기조도 당황하는 사이 결착이 시작되었다. 귀두 끝보다 기둥이 더 크게 부풀며 내벽을 한계까지 밀어냈다. 정액 한 방울 흘리지 못할 정도로 기조의 가랑이를 꽉 채운 성기가 푸들푸들 떨리자 그때까지도 잘 참아내던 기조가 결국 비명을 내지르며 체향을 터뜨렸다.
불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숲이 타올라 시커먼 연기가 사방을 가득 채운 듯 메케하고 독한 체향이었다. 그것은 감히 형제를 탐한 군왕을 벌하려는 듯 땅 밑에서 흘러나온 지옥 같았다. 죄인에게 떨어지는 벌인 듯도 하였다. 사방이 불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제는 뒤통수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그러니까 그 때에….
“……형?”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얼굴을 돌처럼 굳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들리던 기조의 얼굴이 황제의 말을 알아듣고는 희게 질렸다. 못 들은 척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지만 이불을 움켜쥐고 있던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오랜 죄가 까발려진 자의 심정이 이와 같을까?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쾌락에 젖어있었던 것이 거짓인 듯 마음이 반전되었다. 눈앞의 남자를 죽여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범한 죄가 영영 묻힐 것이다. 하지만. 방금 이 남자에게 결착하지 않았는가? 씨물을 쏟아내고 성기가 부풀었다. 차가워진 머리와는 반대로 가슴은 상대를 찾았다는 희열에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하, 하문하소서.”
“8년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느냐?”
이곳에. 황궁에. 부드러움을 가장하며 흘러나오는 황제의 목소리가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기조는 자신에게 결착한 양인에게 받아야 할 애정과 토닥임 대신 준엄한 질문이 날아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첩은, 소첩은 마을 근처의 산에서 사냥하던 사냥꾼입니다. 마을 근처를 떠난 적이 없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소첩? 소첩이라니. 네가 어찌 짐의 첩이 될 수 있지?”
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얘졌다. 하지만 착각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황제는 결착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성기를 억지로 잡아 뺐다. 예민하게 달아올랐던 몸이 바짝 긴장하며 부들부들 떨렸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쏘듯이 말했다.
“주제를 알아라.”
“소, 송구하옵….”
고통으로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눈꼬리에 우울함이 깃들었다. 상처받은 게 분명한 얼굴이었지만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황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궁이 아니라 접객소에 넣은 이유를 마음속에 잘 새기도록 하라.”
“예. …예.”
고개가 떨어지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눈꼬리에 깃들었던 우울함은 이제 깊은 상처와 체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첫 경험이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방금 결착한 것도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꽤나 거칠게 당한 데다 결착한 양인에게 버려지는데도 원망보다는 포기가 깃든 얼굴이 깜빡깜빡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쾌락에 젖어 반짝이던 눈동자가 시커멓게 암전하는 모습을 보며 황제는 끔찍한 괴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니. 자신은 끔찍한 괴물이 맞았다. 죄가 드러날까 봐 겁나서 날뛰는 괴물.
“음인답게 아담하지도 않고, 그것을 상쇄할 만큼 아름다운 것도 아니니 참으로 쓸 곳이 마땅치 않다.”
“죄, 죄송합니다.”
어눌해진 목소리는 이제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주인을 맞이한 개처럼 빛나던 얼굴은 이제 죄를 지은 것마냥 생기 없이 식어버렸다. 살짝 봉우리 지어 피어나려는 꽃을 짓밟아 더럽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분명 황궁에서 널 본 것 같은데, 겁먹지 말아라. 8년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을 뿐이니.”
기조가 황제의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죄송합니다. 소, 소신은 발현 전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크게 앓으면서 머리가 다쳤기 때문에….”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그를 향해 형이라 말한 것을 듣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눈을 꾹 감고 인내했다. 자신의 형이 죽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시신을 직접 보고 확인하기까지 했다. 눈앞의 남자는 형과 닮았을 뿐 형이 아니었다. 형이었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순순히 안길 리도 없었고.
“…거짓말쟁이로구나.”
하지만 8년 전, 이 자가 황궁에 있었다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불타는 듯한 체향을 맡은 적이 있는 것이다. 황제는 밑에 깔려 떨고 있는 음인을 보며 희게 웃었다.
* * *
방 씨 황가의 핏줄에 광증이 흐르던가.
황제는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며 엉망이 된 음인을 바라보았다. 목이 졸리고 얻어터져 엉망이 되어버린 음인이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웅크린 허벅지 쪽에서는 거친 관계 때문에 흘러나온 피가 이리저리 뭉개져 있었다. 다른 상처들에서 터진 피와 뒤섞여 지저분한 모양이 문뜩 안타깝게 느껴졌다. 다리 사이로 손을 뻗자 기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수줍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은 이제 완전히 겁에 질려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모습에 겨우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금 치솟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기조의 눈동자는 멍하게 풀어져 먼 곳을 보고 있었고, 충격을 받은 탓인지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잃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허벅지와 가랑이로 시뻘건 피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질척하게 젖은 자신의 아랫도리가 보였다. 정신을 잃은 사이 강간이라도 한 것인가? 눈물에 한 번 젖었다가 말라붙은 뺨이 퍼석해 보였다. 손을 뻗자,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힘이 없는 듯도 하였고 손이 다가가는 것을 보지 못한 듯도 하였다.
제대로 초점도 잡지 못하며 흔들리는 기조의 눈동자를 보자 머릿속이 먹먹해졌다. 결착한 음인이 잔뜩 다쳐있는 모습을 보자 초조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의 짝을 이리 만든 놈을 잡아 죽여야 하는데, 기조가 다친 것은 자신이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폭력을 휘둘렀더라?’
형을 닮은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비열한 짓이 들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결착한 음인을 해할 정도로 공포에 질린 것이다.
아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기조를 때린 이유는…….
황제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자신의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얼룩덜룩한 나신이었다. 시장에 앉아 자신을 노예로 팔 때, 이 자는 이런 일을 예상했을까? 노예상이나 몰려 일하는 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무서워했던 것을 떠올리면 아주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험하게 굴려지거나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것과 결착한 상대에게 얻어맞는 것은 그 궤를 달리하는 일이었다.
황족은 언제나 결착한 상대에게서 아이를 보았다. 사랑과는 관계없었다. 때로는 결착한 상대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인 유 태후가 그 증인이었다. 선황은 정비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죽어버린 귀비만을 계속 그리워했다. 하지만 태후와 결착하여 두 명의 자식을 보았고 그들 모두 양인으로 발현하여 장성하였다. 그러니 결착과 사랑하는 감정은 무관하고 그 상대는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었으나, 자신에게 두 번째 상대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황제는 조용히 사실을 직시했다. 자신은 아마도 자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황제는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납득시켰다. 기조는 위험했다. 이리도 찝찝하고 위험한 상대에게서 자식을 볼 순 없었다. 자식이 생기는 순간 상대에게 암살당해 죽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이 살수의 뒤에 조종하는 이가 있다면 제국 전체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다행히 동생 현성이 있었다. 이 제국의 옥좌에는 방 씨 성을 지닌 인간만 올라앉아 있으면 되는 듯하니 꼭 자신처럼 일그러진 인간의 핏줄이 황위를 이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성이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를 태자로 삼아 물려주면 되었다.
순식간에 제위의 향방을 결정한 황제는 멍한 얼굴을 하고 누워있는 기조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형과 닮았던 얼굴은 이제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눈두덩은 부어있었고 코피가 흘러내려 인중에 딱지가 졌다. 푸른 멍이 뺨을 가득 채우고 있어 원래 얼굴빛이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죄인을 고신할 때 보았던 모습과 흡사했다. 충격으로 인해 망가진 게 역력한 모습은, 불행히도 죽어버린 형을 아직도 연상시켰다.
무언가가 타오르는 듯한 체향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그 날을 끊임없이 연상하게 만드는 체향 때문에 자꾸만 형이 떠오르는 것이다. 황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널 닮은 형이 있었어.”
8년 전, 형이 거하는 궁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열이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맞는 희락기였고, 머릿속이 혼몽하여 안개가 낀 듯했으나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자신은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그게 누구인진 확실치 않았으나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은 이복형의 흐트러진 침상에 누워 있었고 처마에는 목을 매달아 죽은 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살수가 아니라 대역죄인이라 해도 형과 닮은 이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애초에 이 황궁으로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장사 지낼 돈을 던져주고 그냥 와버렸어야 했다. 물을 것이 있어서 저녁에 은밀히 만나야겠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그를 안고 싶어 데려온 것이다.
형과 닮은 얼굴을 한 음인에게 결착하다니. 형에게 단 한 번도 음심을 품은 적이 없다 자신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8년 전 희락기가 왔을 때 형에게 발정하여 일을 낸 게 분명했다. 형은 암살당한 게 아니라 수치를 못 이겨 자진한 것이고.
형의 시체가 흔들리던 모습에 맞춰 세계가 비틀리고 있었다.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았다. 희락기의 열락에 휩쓸려 누군가를 안았을 때, 흔들리는 형의 시체를 보았을 때, 어디선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자신이 차마 입에도 올릴 수 없는 죄를 지어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 남자의 체향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엉망으로 구겨진 기조를 내려다보며 절망했다. 8년 전 황궁을 배회하던 암살자가 여기 있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며 과거를 숨기는지는 알겠으나 황제가 그에게 원하는 건 과거의 죄를 끄집어내어 처벌하는 게 아니었다. 기억해주는 것. 상냥한 증인이 되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준다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하지만 그 또한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발현 당시의 그 무엇도?”
애써 상냥한 목소리를 내어 보았지만 기조는 속지 않았다.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고 있다가 갑작스레 폭력을 휘두르며 강간한 상대가 아무리 상냥한 척해보아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멍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작게 끄덕이는 기조의 턱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방 안의 모든 기물을 쓸어버리고 싶은 광폭한 기분에 휩싸여 황제는 낮게 끓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라.”
거짓말이었다. 형이라 불렀을 때 일그러지던 얼굴과 당황하던 눈빛이 기억에 박힌 듯 떠올랐다. 뱃속에 구렁이를 열 마리는 넣고 다니는 듯한 관리들의 거짓을 꿰뚫어 보는 게 자신이었다. 화전이나 일구고 사람이나 죽이던 자의 거짓 따위 알아채지 못할까?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밀자 멍하니 누워있던 기조가 움찔거리며 발꿈치를 뒤로 밀었다. 도망가려는 몸짓에 짜증이 치솟았다.
“이리로 와. 어서.”
황제는 피곤한 얼굴로 재차 불렀다. 기조가 도망갈 때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 극단적인 감정엔 익숙지 않았다. 제 어미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에도 이처럼 분노하지 않았는데 눈앞의 이 남자는 너무도 쉽게 자신의 자제력을 파탄 냈다.
엉망으로 엎어진 주안상이 술 냄새며 음식 냄새를 풍겼다. 방을 관리하는 내관이 들어와 치울 법도 하건만, 갑작스런 난장판에 기가 질린 것인지 감히 누구도 침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심문하겠다던 황제의 말이 정말이었는가 싶어 기겁을 하면서도 밤새 들려온 정사 소리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들어와서 자신의 이 광증을 막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요원한 일인 듯했다. 자신에게도 기조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이러다가 누구 한 명이 죽어나가기라도 하면 남은 이는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황제는 이리저리 흩어진 자제력을 간신히 끌어모았다.
“오지 않을 게냐?”
짜증을 억누르며 다시 말하자 초점 없이 흔들리던 눈이 서서히 빛을 찾았다. 기조는 주인에게 얻어맞은 개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두려워서 목을 잔뜩 웅크리면서도 꼬리를 흔드는 개 같았다. 그의 부모를 죽인 것은 자신인데 그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운 게 그리도 큰 은혜인가? 피식 웃음이 나와 어깨를 떨자 일어서려 기조가 겁에 질려 움찔거렸다.
“폐하. 폐하…….”
“뭘 그리 무서워하지? 내가 널 죽이기라도 할까 봐?”
“아픕니다. 제발. 제발 이제 더는….”
“기억한다고 말해. 그게 아니라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조가 상처 가득한 얼굴을 밑으로 수그렸다. 황제는 기조가 다시 고개 들길 기다렸다. 떨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모든 것이 기억난다고 말하길 원했다. 그러나 기조는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고, 그 쉬어버린 목소리를 내는 일도 없었다.
깊은 시름이 강과도 같이 황제의 마음속을 흘렀다. 황제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를 만났을 때 죽이는 게 나았다. 그도 아니면 돈만 주고 떠났어야 했다. 체향을 내놓으라 윽박지르지 않았다면 그저 그를 마냥 귀여워하며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에 의해 비틀린 현실의 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끊임없이 웃었다. 자신과 결착한 음인이 두려움에 질려 떨고 있는데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이토록 망가지고 멍든 모습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혼자 지옥에 있고 싶지 않아 다른 이까지 끌고 내려간 듯한 기분이었다. 방국의 운명 따위 어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 따위 모르겠다는 듯 고개 돌린 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행복한 생각을 할 때마다 처마 끝에서 긴 그림자가 흔들렸다. 혀를 길게 빼물고 죽은 형이 자신을 바라보며 이를 갈아대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해놓고는 어찌 행복하려 하냐는 듯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튀어나와 있었다.
‘내가 죽였거나 기조가 죽였거나.’
형을 죽인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없고 죄인들만 남아 있었다. 행복해지는 건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니 이건 핑계였다. 율목친왕을 귀하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자주 그를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만만하기 때문이었다. 극양인으로 발현한 현성을 볼 때마다 마음 한 편이 불편했기 때문에 평인인 이복형을 보며 우월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떻게 해도 자신의 신하일 수밖에 없는 형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의 치졸한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아니. 그건 핑계지.’
황제는 덜덜 떨고 있는 가련한 음인을 쳐다보았다. 결착하여 불안에 떨고 있을 음인을 보듬으며 보호해 주겠다 약속하기는커녕, 폭력을 휘두른 쓰레기가 바로 자신이었다. 첫 경험에 결착당한 것만으로도 몸에 큰 무리가 갔을 것이다. 무슨 일을 겪는지도 모르는 사이 폭력에까지 노출되고 몇 번이나 강간당하며 무리하게 몸을 열어야 했다. 자신이 황제이고 그는 노예이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풀어지던 얼굴이 바로 어젯밤이었는데 헛것을 본 듯 가물거렸다.
황제는 기조에게 다가가 무서워하는 몸을 주섬주섬 끌어안았다. 모든 게 다 핑계였다. 형을 죽인 게 누구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피임약을 들여라.”
“예. 폐하.”
문밖에서 쥐죽은 듯 대기하던 내관이 부리나케 뛰어가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말을 듣은 기조가 품 안에서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황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타는 듯한 체향은 여전히 매캐하여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와 절망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른 이에게 각인한 음인의 체향이 이토록 매캐하다는 걸 황제는 알고 있었다. 조금 다르기는 했으나 그의 어머니인 유 태후의 체향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각인한 음인은 그 상대에게만 자신의 체향을 드러내는 편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인한 음인의 체향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각인한 상대가 아니라면 좋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만 풍문처럼 떠돌았다.
‘아무리 원해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리 없지.’
다른 이와 결착하는 순간 각인이 풀리는 일 또한 종종 있었다. 귀비에게 각인했으나 각인한 상대가 죽었거나 관계를 맺은 지 오래되었을 경우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조의 향은 아직도 매서워서 끌어안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내관이 가져온 탕약을 기조에게 넘기자 그가 멀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는 눈빛은 곧 메마르게 굳어 삐걱거렸다. 그 표정에 약간 안도하고 말았다. 이런 걸 마시지 않아도 어차피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고 대꾸했다면, 참지 못하고 그를 죽였을 테니까.
어차피 아이가 생기지 않을 거라면 약이라도 먹여 착각하게 하는 수밖에. 그것은 질투였다. 약을 먹었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거라고 모두를 착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기조가 다른 이에게 각인한 것을 깨닫지 못하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에게 약간의 기회라도 있을 것 같아서…. 황제는 치졸하지만 필사적인 심정으로 검은 약을 기조에게 내밀었다.
하얀 사발을 받아드는 손가락이 지독히도 거칠었다. 나뭇가지가 삭풍에 떠는 것처럼 그의 손도 벌벌 떨렸다. 용케도 쏟지 않으며 검은 피임약을 받아든 기조는 한 번 주저하는 일조차 없이 검은 약을 삼켰다.
약을 들이켠 뒤 구역질을 억지로 넘기는 기조를 내보내고 엉망이 된 침상 위에 홀로 누웠다.
잠이 들면 지독한 꿈을 꿀 것만 같았다. 해가 거의 중천인데 정무를 보러 나오시라 이르는 이 하나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자신의 상태가 엉망인가 싶어 헛웃음이 실실 나왔다. 의관을 부르라는 낮은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으란 듯이 났다. 기조를 치료하라고 자신이 명했던가? 그의 처우에 대해 몇 마디 한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를 갖지도 못하는 노예를 비빈으로 봉할 수는 없으니 분명 접객소로 다시 갈 터였다. 그를 비빈으로 봉한 뒤 매일 찾아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신분 낮고 자식 없는 후궁이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면 귀비처럼 될 확률이 높았다. 황제가 각인한 것을 질투한 자신의 어미가 귀비를 살해한 일은 비밀도 아니었다.
예전엔 그런 어미가 부끄러웠으나 지금은 그 누구보다 그 심정이 이해되었다. 기조가 각인한 이가 눈앞에 있다면 자신이라 한들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오체분시한 뒤 그 시신을 불태우고도 마음이 족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각인한 상대라면…….
‘아마도 접객소 쪽이 더 안전하겠지.’
황제는 눈을 감았다. 밤새 격앙하여 난동을 피운 탓인지 금세 잠이 몰려왔다.
꿈을 꾸었다. 그의 향은 다디달아 설탕을 들이켜는 듯하고, 꽃처럼 향기로워 야생화 가득한 들판에 있는 듯했다.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어두운 그림자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자신을 닮은 아이가 까르륵 웃으며 뛰놀고 있는 꿈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 모습에 이것이 악몽이란 것을 깨달았으나 도무지 깨고 싶지 않았다. 그 꿈속에서 자신은 괴물이 아니었고 그저 사랑에 빠진 얼간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바보 같은 짓을 하며 웃었고 그와 자신을 닮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며 뿌듯해했다. 기조는 험한 일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얼굴로 고운 옷을 바닥에 끌었다. 거만하기까지 한 그의 몸동작은 사랑의 증거나 마찬가지였기에, 황제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품에 안았다. 오직 자신만이 그를 안고 그의 달콤한 체향을 들이켤 수 있었다.
눈을 뜨자 매캐한 체향이 코를 찔렀다. 결착까지 하며 끌어낸 짙은 향은 도무지 지워질 생각을 않고 침상 위를 떠돌았다. 따스한 체온이나 울며 매달리던 팔도 꿈인 듯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조의 모습은 멍든 얼굴과 피폐한 눈동자로 피임약을 들이켜는 모습이었다.
지독한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황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밖은 어두웠고 잠이 들 시간이었다. 또다시 황홀한 꿈이 그를 찾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