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틈으로 비스듬히 파고드는 그것
나선몽
螺旋夢
아아.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꿈이 지금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내려와 있구나.
그가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기에 난 지금 이것이 꿈이란 걸 알아차렸다.
커다란 손이 내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얼싸안았다. 머리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숨결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숨기지 못한 미소가 그의 입술 끝에 걸려있다.
깨어났을 때 이 달콤한 꿈을 기억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잊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 내 뺨을 데우는 온기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걸며 부드럽게 쓰다듬고 조심스런 입맞춤을 떨어뜨렸다. 난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좌우로 늘어선 궁인들이 상전들의 모습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 또한 나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꿈속에서 내 이야기는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부모의 관을 사기 위해 나는 시장 한복판에서 내 몸을 노예로 팔았다. 쭉정이처럼 딱딱하고 못난 몸이지만 그래도 음인이라 험한 꼴도 각오하였다. 기루의 주인이며 씨받이가 필요한 잡부들이 내 앞을 오갔으나 부모를 장사지내기 위해 몸을 파는 것을 두고 효와 불효를 논하기만 할 뿐 나를 사려 하지 않았다. 힘쓰는 일에 쓰기엔 허약하고 음행을 하기엔 뻣뻣하다는 것이 그들의 평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사흘을 부모의 시신 옆에 앉아있었다.
잠행을 나온 황제의 눈에 뜨인 것은 우연이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오라며 황제는 내게 돈주머니를 던졌다. 관을 사서 부모를 묻어준 뒤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새 주인을 따라 황궁으로 갔다.
나는 아름답지 않았지만 천한 신분임에도 황제와 초야를 보내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미모도 없고 신분도 없고, 가진 것 모두 털어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 처량한 처지였으나 놀랍게도 첫날밤 황제와 결착했다.
하늘의 보살핌이자 천하의 홍복이었다. 결착이란 부부의 정 중 최고로 치는 것이라, 양인은 자연히 음인을 보호하며 귀애하게 되고 음인은 양인을 흠모하고 다산하게 되는 것이다. 씨가 귀한 황가에서 황제와 결착하였으니 나는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꿈이다.
현실의 나는 황제와 결착하지 않았고 비천한 신분에 걸맞게 버려져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처소에는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살림은 초라해서 부드럽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황제는 그저 두려운 존재일 뿐이다.
꿈속에서 나는 황제의 품에 몸을 묻으며 단단한 가슴에 볼을 부볐다. 그 모습에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난 세상 누구보다 기쁜 얼굴로 등줄기를 쓰다듬는 황제의 목을 다시 끌어안았다. 궁에 들어오기 전엔 거칠었으나 이젠 잘 관리되어 부드러워진 살결이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상처 하나 없는 하얀 팔뚝이 마치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현실의 내 몸은 멍과 상처로 가득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다. 손가락엔 굳은살이 박여있고 관리받지 못한 피부는 거칠게 일어있었다.
현실과 꿈의 차이를 자꾸 깨닫는 건 기껍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나의 깨달음을 무시하고 황제를 향해 몸을 기댔다. 따뜻하고 넓은 품이 날 단단히 끌어안으며 보호해주었다. 용종을 품어 부풀어 오른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이 꿈이 길게 이어졌으면 했다. 나는 배부른 행복감에 젖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에 기대어 있자니 차갑고 혹독한 현실이 오히려 꿈인 듯 느껴졌다.
하지만 아침은 잔인한 맹수의 발톱처럼 새벽을 찢으며 도래했다.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긴 종소리는 고양되었던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아귀 같은 현실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차갑고 메마른 공기가 반쯤 부서진 창살의 틈새를 타고 냉기를 퍼부었다. 배고픔으로 푹 꺼진 배가 통증을 호소했다. 비약한 이불은 식은땀을 머금어 눅눅했고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 이것이 꿈이라면 좋으련만 현실은 명확하다. 나는 시체처럼 누워 행복했던 꿈을 오랜 시간 곱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모든 것을 회상하고 기억하려 애썼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이란 꿈을 꾸며 얻은 기억뿐이기 때문이었다.
고왔던 꿈은 현실로 역류하자 어둡고 진득한 토사물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토사물조차 아까워 버리지를 못했다.
1장. 가을
“……크흑!”
목이 달라붙어 엉켜있는 것만 같았다. 메마른 거죽 두 장이 달라붙은 듯 도무지 트일 생각을 않는 목구멍에 숨이 한계에 달했다. 손끝을 세워 눈 앞의 상대를 밀어보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톱을 짧게 깎인 탓에 미끄러지기만 하는 내 손가락과는 달리 남자의 손은 땅을 움켜쥐는 거목의 뿌리처럼 단단했다. 목이 졸린 지 얼마나 됐을까? 시야가 급격히 흐릿해지며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죽을 때엔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데,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까맣기만 했다. 이제 끝이구나. 지옥으로 가는 일만 남았구나. 아아. 그래. 언제나 이런 끝을 예상하고는 했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 나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자조하며 체념하는데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속을 얼렸다.
“큭! 흐흑! 크흐으윽!”
쪼그라들었던 폐가 터질 듯이 부풀며 공기를 끌어들였다. 어지러웠다. 시야는 빙빙 돌거나 흑백으로 점멸하며 깜빡거렸다. 숨통이 트였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벌벌 떨리는 내 몸을 붙잡고 남자는 아랫도리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난폭하게 처박히는 살덩어리를 경련하는 몸이 힘껏 조였다. 아랫배가 꿈틀거리며 몸이 굽었다. 남자가 나를 향해 뭐라 말하는 듯했으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숨을 들이켜고 기침을 내뱉는 소리가 마치 먼 곳의 소리처럼 작게 울렸다.
목은 타는 듯하고 배 속은 헤집어져서 꿈틀거리고 있는데 따귀가 날아왔다. 겨우 정상으로 돌아오려던 시야가 충격으로 번뜩였다. 내가 내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있는 힘껏 애원했다. 뭐라 중얼거리는지도 모르며 외치는 말에 남자가 다시 내 목을 움켜쥐었다.
“아! …아학!”
남자는 사나운 표정으로 허리를 퍽퍽 쳐올렸다. 처음과는 달리 가볍게 잡힌 목은 숨통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조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날 공황으로 몰아넣었다. 뜨겁고 미지근한 것이 다리 사이를 타고 흘렀다. 이것은 피일까 정액일까? 둘 다일지도 모른다. 몸속을 미끄덩하게 채우며 들어온 난폭한 살덩어리가 제 욕심을 채우고 나간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흔들린 뒤에야 남자가 내 몸을 침대 밑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쓰레기를 버리듯이 내던져졌지만 기분이 상하기보단 안도하는 마음이 더 컸다. 끝난 것이다. 난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계속해서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지만 서서히 소리도 들려오고 통증도 돌아왔다.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느끼기 힘들 정도로 가해지던 폭력은 남자가 내 몸에서 떨어지자 완전히 끝났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잘 움직이지 않았다. 기침을 내뱉자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뺨을 계속 얻어맞은 탓에 입 안이 터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날 내팽개친 남자를 쳐다보았다. 옷조차 벗지 않은 채 오만하게 앉아있는 남자의 시선이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얻어맞은 건 나인데도 남자는 늘 피해자의 얼굴을 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자색의 옷자락이 빛을 받아 일렁였다. 황궁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만 걸칠 수 있는 옷의 색채는 내게 있어 죽음의 색깔과 진배없었다.
“끌어내라.”
황제의 명령에 발소리 여럿이 다가와 내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환관들의 손에 들려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일그러진 얼굴의 황제와 내 사이는 휘장과 장지문으로 가로막혀 차단되었다. 젖은 수건이 다리 사이의 씨물을 씻어내고 역한 탕약이 입 안에 들이부어졌다. 황제의 자취는 꼼꼼히 지워버리면서도 폭력에 노출되어 생긴 상처나 멍은 보이지 않는 양 무시했다.
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뒤처리가 끝났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화가 나거나 슬프기보다는 이제 내 처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리자 화려한 침궁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장지문 너머, 얼굴을 일그러뜨린 자색 옷의 황제처럼 높고 아름다운 천장이었다,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 * *
궁궐의 담은 높고 지붕은 첩첩산중과 같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며, 무엇이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세간은 평했다. 인두겁을 쓰고 있으나 속에는 귀신과도 같은 자들이 개미처럼 줄지어 오가는 모습은 지옥도의 일부를 잘라놓은 듯도 했다. 궁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자신이 요괴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니 밖에 사는 이들이 그 본질을 알아챌 수 없는 것도 당연하리라.
“나도 마찬가지.”
생각보다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혼잣말이고 대화고 간에 그간 말을 할 일이 없어 목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천한 노예에게 대화를 청하는 대신 명령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일이 없었던 것이다.
뻑뻑한 목을 풀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내봤지만 완전히 쉬어버린 것인지 좀처럼 좋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차가워진 손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무 추웠다. 추위에는 익숙한데도 매년 이 계절만 되면 몸이 떨렸다. 온기 없는 방 안은 여름이 저무는 것과 동시에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총애받지 못하는 노예에게 물자가 제대로 지급될 리 없으니 화로를 채울 갈탄도 따스한 솜옷도 한겨울은 되어야 겨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작년엔 받지 못해서 무슨 정신으로 겨울을 났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바깥이 더 따뜻할 지경이었으나 나는 감히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침상 위에 몸을 뉘었다. 나가서 돌아다닐 정도로 몸이 멀쩡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밤사이 얻어맞은 뺨이며 이마가 욱신거렸다. 거울에 비춰보면 시퍼런 멍이 들어있을 터였다. 거칠게 다뤄진 탓에 허리도 허벅지도 덜덜 떨렸고 몇 번이고 졸린 목은 침을 삼키기도 힘들 정도로 부어 있었다.
다른 이들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잠자리에서 부드럽고 포상에 너그러운 편이라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얘기였다, 황제는 첫날밤부터 폭력적이었고 매사 잔인하게 굴었다. 그래서 황제의 성정이 부드럽다는 소린 귀하신 분을 치장하는 아첨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에게만 그리 포악한 것이었다. 귀하신 경빈과 산책하는 모습을 지나가다 보았는데 어찌나 친절하고 배려가 넘치는지 난 유령이라도 본 양 한참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아무리 만만해도 그렇지.”
하기야 황제가 안은 음인들 중 내 신분이 독보적으로 비천하기는 했다. 성(姓)도 없는 화전민 출신의 노예라는 건 몇 푼만 있어도 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궁에서 내 신분 같은 건 황제 하기 나름이니, 결국 지금의 이 낮은 신분 또한 황제가 준 것이었다.
그 너그럽다는 하사품도 내게는 일절 내려주지 않아 궁에서도 가난을 느껴야 했다. 언제나 추위에 떨고 무시당하며 사는 것은 고달프고 서러웠다. 나는 큼큼 다시 한 번 목을 울렸다. 목소리가 이대로 망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낫더라도 일주일은 지나야 제 목소리가 돌아올 것이다. 별로 써먹을 일은 없는 목소리지만 혼잣말에 깜짝 놀라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제법 서글퍼졌다.
화풀이 인형.
사람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보통의 음인보다 단단한 뼈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음인으로 태어난 남성은 아름답고 부드러워 양인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다는데, 산골에서 자라 화전을 일구며 살았기 때문인지 나는 뼈대가 크고 단단해서 거의 평인으로 보였다. 기실 희락기가 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평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시장 한복판에 앉아 내 몸을 매물로 내놓았을 때, 궁에서 산다는 미래는 선택지에 있지 않았다. 사창가에 팔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받으며 몸을 혹사시키든가, 그도 아니면 노역장에 팔려 낮에는 땅을 파고 저녁엔 인부들에게 당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얻어맞으면 어떻고 무시당하면 어떤가. 궁에 팔려온 건 내게 있어 다시없을 행운이었다.
“행운이야. 진짜로 행운이니까.”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겁이 덜컥 났다. 황제가 내게만 잔인하다고 구시렁대다가도 지금의 행운을 잃을까 봐 덜컥 무서워졌다. 황제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까 봐 겁이 났다.
망가지면 안 되는데…….
망가지면 나 같은 싸구려 노예는 버려진다. 고쳐 쓰는 것보다 그게 싸니까. 그러니 어서 몸을 추슬러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 화풀이 인형이든 천한 남창이든 상관없었다. 황제가 욕정을 풀어내길 원한다면 다리를 벌리고, 분을 풀고 싶다면 뺨을 내주면 된다.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맞는 게 좋은 변태는 아니니 기왕이면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졌으면 좋겠지만 무리인 건 무리인 거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나았다. 토질이 다른 땅에 심어진 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것처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 꿈처럼 말이지.
아. 지금 꽤 우울한 걸지도.
우울한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살면서 딱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떠올리는 것마다 죄 우중충했다. 몸이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은 몸을 따라간다는 말처럼 멍든 몸에 멍든 정신이 깃든 거겠지.
갑자기 통증이 치밀어 신음이 길게 터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통보다는 아픈 소리를 냈다는 게 더 싫어서 표정이 구겨졌다. 듣는 이도 없는데 신음 소리를 내는 건 궁상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 기조 있는가?”
갑작스런 고통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하신 의원님의 행차에 나는 송구스러운 얼굴로 끙끙 몸을 일으켰다.
“그냥 누워있게.”
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온 권 의관이 혀를 끌끌 차며 내 가슴을 밀어 다시 눕혔다. 의관이라고는 해도 가장 말단에 속한 조수였으나 내 처지엔 감지덕지였다.
“매번 죄송합니다.”
“됐네. 목소리는 또 왜…. 아니야. 말하지 말게.”
권 의관은 내 목의 멍을 한 번 흘깃하더니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의 잠자리에 들어 목이 졸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는 익숙한 손길로 약 상자를 펼쳤다. 말단이라고는 하지만 시험을 거쳐 궁에 들어온 정식 의관(醫官)이었다. 두꺼운 손가락엔 어울리지 않는 꼼꼼한 손길이 상처 부위를 약으로 덮었다.
“크게 찢어지거나 피가 난 곳은 없으니 상처는 남지 않을게야. 멍이 좀 가라앉으면 굳은 근육에 침을 좀 놓아주겠네.”
권 의관의 너그러운 발언에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나같이 천한 자들을 치료하는 걸 기꺼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투덜거리며 최소한의 처치만 하던 자가 부러 뭔가를 더 해주겠다니 신기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 티가 나나?”
얻어맞아 누워있는 사람 앞에서 기쁜 티를 낸 것이 민망한지 권 의관이 멋쩍게 웃었다.
“오랫동안 전장에 나가 계셨던 친왕께서 금경으로 들어오셨네.”
“친왕이라면 폐하의 아우님이신가요.”
“그래. 동평왕(東平王)이시지. 동쪽 국경에서 오랑캐들의 항복 서한을 받아 오셨다는군. 곧 연회가 있을 거야. 까다롭고 심술궂은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씀씀이가 후하다고도 하니 설이 좀 기대돼서 말이야.”
과연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황가는 씨가 귀해서 황제가 자식 없이 죽어 아우나 사생아가 황위를 잇는 일이 잦았다. 일단 태어난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는 편이지만 성인이 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기에 그 출생이 어떻든 소중히 대해졌다. 그리고 지금 황제는 자식이 없었고 아우인 동평왕은 태자나 다름없었다.
권 의관은 문득 불쌍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궁의 접객소(接客所)에 속해 있었다. 사신이 오거나 연회를 치러야 할 때 옆에 앉아 술 시중도 들고 밤 시중도 드는 것이 접객소에 속한 자들의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모시는 분의 마음에 들면 하사금을 받기도 하고 첩으로 따라 나가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물론 내게는 있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술 시중이고 밤 시중이고 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연회에는 나가지 못할 듯합니다. 폐하의 체향이 남아있으니까요.”
권 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제대로 된 신분이 없는 성노라는 건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것이 이상하기에 화풀이 인형이라는 별칭이 내게 붙은 것이다. 나는 그냥, 누군가를 때리며 화를 푼다는 사실 자체가 밖에 알려지는 것을 황제가 꺼리는 것뿐이라 생각한다.
“약을 두고 갈 테니 꾸준히 바르게.”
“감사합니다. 나으리.”
권 의관은 작은 약병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침상에 누운 채로 의관이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말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멍들어 아프기 때문인지, 목이 죄여오는 듯 고통스러웠다.
* * *
단풍은 땅으로 떨어져 붉게 빛나고 차가운 바람은 구름을 끌고 다녔다. 푸른 하늘은 높았지만 떼를 지어 나는 새들의 모습은 허허롭기만 하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에 아침이 온 것을 깨달으며 나는 침대 밖으로 몸을 내렸다.
일주일이 지나 멍이 흐릿해질 즈음 엉망이었던 목소리도 제 음색을 찾았다.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 그 이전에 목이 졸려 죽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래를 잔뜩 범해지며 목이 졸리다 보면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기 일쑤였으니까. 언젠가 황제가 자제하지 못하고 손을 풀지 않는 날 나는 죽을 터였다.
“망가지면 안 돼. 잘 고쳐서 움직여야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옷을 껴입었다. 건강하고 회복이 빠른 체질이라 다행이었다. 보통의 음인처럼 연약했다면 사달이 나도 진작 났을 것이다.
추위는 더 깊어졌을 것이나 차가운 공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날씨가 푹하게 느껴졌다. 조금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두꺼운 옷을 몸에 걸쳤다. 솜 대신 다 쓴 종이를 넣어 누빈 옷이었는데 어찌저찌 겨울을 날 만은 했다. 솜옷이라 봐야 입어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따뜻한지도 모르겠고, 의외로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해서인지 밖은 아직 흐릿하니 어두웠다. 나는 조심스레 처소를 나와 길을 따라 걸었다.
고관대작들은 궁에 이러한 길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이다. 내 처소가 있는 곳은 화려한 궁궐이라기보단 초라한 뒷골목을 닮아 있었다. 애초에 궁 안에 두기는 해야 하지만 귀한 분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몰아넣은 곳이었다. 자유를 지닌 이들이 반도 되지 않았고 죄를 짓거나 버려져 정신을 잃은 후궁들이 냉궁의 담벼락 너머로 우는 소리를 토했다.
내가 있는 곳은 그래도 냉궁이나 노예들의 숙소보다는 나았다. 나 혼자 거주하는 방이 있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데다 따로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노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 때 옆을 지나가던 궁녀들이 나를 보고 서로 속살거리며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확연한 눈빛이었지만 냉랭한 시선 속엔 약간의 동정도 섞여 있었다. 그야 얻어맞아서 멍들어 있는 모습이 일 년의 절반 이상이니 측은지심이 생길 법도 하였다. 그녀들을 뒤로 하고 계속 걸어가자 낮은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왔다. 제법 운치 있었을 산책로는 본디 작은 궁에 붙어있는 정원이었다고 하는데, 근처에 접객소가 들어서는 바람에 버려졌다는 듯했다.
정원이라고는 해도 관리되지 않은 나무들의 모습은 초라했고 쓸쓸한 바람과 바랜듯한 빛만 들어와 퍽 음산했다. 뾰족한 침엽수가 잔뜩 쌓인 산길을 걸어가자니 멀리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회 준비 때문에 하얀 천막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정오가 되면 음악 소리가 궁을 가득 울릴 것이다.
나도 한껏 꾸미고 연회에 나가 시중을 들면 어떨까? 예전에 한 번 자신을 관리하는 내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내관의 얼굴이 어땠더라? 시퍼렇게 질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며 고함쳤던 것도 같은데, 천한 신분이라지만 황제의 체향이 나는 몸으로 다른 이의 품에 안기는 건 무엄한 일이라는 것 같았다.
연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 걸어가는 사이 무너져가는 정자에 도착했다. 썩어가는 연못에는 그래도 물고기가 조금 있었다. 나는 연못가에 쭈그려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 그림자를 알아챈 물고기들이 모여들었지만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바라보기만 했더니 곧 흩어져버렸다. 다음엔 쉰밥이라도 좀 가져와 볼까. 내가 먹을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물고기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좀 더 볼 수 있다면 한 끼 정도 굶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슬슬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아직 다 낫지 않은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래도 날씨가 따듯하다 생각해서 나왔는데 찬바람은 아직 무리였던 모양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쉴 때였다.
“물고기가 좋은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비단옷을 입은 장신의 사내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이런 초라한 곳에 있기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위엄 있는 인상이었다. 고풍스런 자수가 옷깃을 가득 채우며 빛나고 단아한 빛의 옥 장식이 허리께에서 흔들렸다. 황족만이 입을 수 있는 금색의 비단이 남자의 소매를 살풋 덮고 있었다. 전장에서 돌아왔다는 친왕이 분명했다.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급히 무릎 꿇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오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흐음.”
남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황제와 비슷할 정도의 압력에 몸이 절로 떨렸다. 청량하던 연못가의 공기가 극양인의 짙은 향에 뒤덮여 숨통을 무겁게 막아왔다. 복종을 요구하는 노골적인 향에 순순히 굴복했지만 버티기 힘들 정도의 압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곳에서 풍류를 즐기는가 했더니. 형수님이셨나?”
“…예?”
“형님의 체향이 느껴지는데. 이거 제 쪽이 무례를 범했군요.”
이어진 말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무례라는 것도 모르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자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이 비죽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서 무릎을 꿇으십니까? 이거 참 송구스럽게.”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와는 달리 남자는 우아한 몸짓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말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다. 난 멍청한 표정으로 내밀어진 손을 쳐다보기만 했다.
“제 손을 부끄럽게 하시네요, 형수님.”
“…형수라니요?”
“형님과 몸을 섞은 음인을 형수라 하지 않으면 뭐라 불러야 하는지. 하하.”
아 날 가지고 놀려는 거구나. 남자의 의도를 알아채자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덜덜 떨렸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 옷을 보면 후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부러 저런 태도를 취한다는 건 안절부절못하는 아랫것의 모습을 보며 즐기고자 하는 심산일 터였다. 심술궂다는 평이 사실인 듯했다. 참으로 꼬인 작자가 아닌가. 내가 정말로 황제의 인가를 받은 후궁이라 해도 이러한 농에는 혼비백산하고 말 것이다.
“그런 송구하신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전하. 소인은 천한….”
“일어나.”
남자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변해 몸을 후려갈겼다. 그는 내 모습에 매우 짜증이 난다는 듯 입술 한쪽을 비죽 밀어 올렸다.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더욱 캄캄해졌다. 눈가를 비집고 나온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두 눈 가득 일렁였지만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데 울 수 있을 리 없다.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몸을 덜덜 떨고 있으려니 친왕이 미소를 지우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황상의 취향도 참으로 일관되시군. 이런 얼굴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하하.”
가볍게 웃는 소리가 칼 가는 소리처럼 소름끼쳤다.
“너무 떨지 마십시오, 형수님.”
“요, 용서… 으흑….”
“이런. 쯧쯧. 떨지 마시라 했더니 우시는 겝니까? 제가 꼭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자 그가 곤란한척하며 눈물로 젖은 뺨을 쓸어 올렸다. 부드러움을 가장했지만 온기는 없는 손짓이었다. 생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가 이러할까. 얼굴에 장난기가 없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 나는 뺨을 제멋대로 만지는 손가락을 느끼며 바짝 굳어 친왕의 눈치를 봤다.
“연회가 곧 있을 터인데, 이런 곳에 계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실 텐데요.”
“소, 소인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사옵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어째서요? 폐하께서 소제를 환영해주시는 자리인데 형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제발 용서하십시오, 전하. 소인이 심기를 거슬렀다면…!”
무릎을 꿇고 읍소하려는 것을 친왕이 힘을 주어 막았다.
“이거 참 섭섭합니다. 형수님.”
곤란하다. 너무나 곤란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렸다. 욕보이려는 것이 분명한 상전의 태도에 나 같은 것이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는 내 모습이 퍽이나 재미난지 흥미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친왕에게 형수라 불리려면 비빈은 되어야 할까? 아니면 황후라도 되어야 무엄한 일이 아닌 것일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뺨이 온통 축축했지만 손을 들어 닦을 수도 없었다.
황제에게 목이 졸려 죽거나 얻어맞아 죽을 줄 알았지. 이렇게 산책을 하다가 친왕에게 죽게 될 줄 알았겠는가. 뺨을 만지던 차가운 손이 이제는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대었다. 그는 재미난 장난감을 본다는 듯이 내 얼굴을 살피며 차갑게 미소지었다.
“이렇게 생긴 주제에 음인이란 말이지? 참 재미나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생겨서 죄송하다고. 마치 넋두리처럼 죄송하다는 소리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존대와 하대를 섞어서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는 친왕의 모습이 소름끼쳤다.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황제와는 달랐다. 적어도 황제는 내게 있어 아주 일관된 태도를 고수했기에 눈치를 보며 절절매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적당히 하소서 전하. 슬슬 가보셔야 하옵나이다.”
구명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왔다. 검은 옷을 입은 환관 하나가 친왕의 뒤에서 나타나 허리를 굽히고 고한 것이다. 이 사람 또한 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내 눈은 그저 장식이고 귓구멍은 그냥 구멍인가보다. 황제를 모시는 상서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환관은 내 얼굴을 보더니 안쓰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자는 뉘신지요?”
“형수님이시다.”
“……전하?”
뭔 미친 소리인가 하는 표정이 늙은 환관의 얼굴에 가득 피어올랐다. 그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무엄하게도 짜증 가득한 표정을 제 상전에게 향했다.
“형님의 향이 느껴지지 않느냐? 아 네놈은 고자였지.”
“전하아-.”
“됐다. 가자.”
친왕은 귀찮다는 듯 대꾸하며 내 얼굴을 놔주었다. 나는 그제야 숨이 쉬어져 급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열이 올랐다. 친왕은 뭔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날 쳐다보더니 곧 장난스런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조만간 다시 뵙지요. 형수님.”
나는 오솔길을 따라 멀어지는 친왕의 뒷모습을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바라보았다. 단단한 어깨와 곧은 허리가 그의 형인 황제와 무척이나 비슷해 소름 끼쳤다. 아까 내게 뭐라고 했더라? 조만간 다시 보자고…?
궁에 들어와서 들은 말들 중 가장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 *
내 방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갑작스런 긴장에 열은 치솟고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궁에 들어와서 이 정도로 긴장한 건 황제를 뵐 때 정도였는데, 같은 황족이라 그런가 위압감에 짜부러질 지경이었다. 황제와 보낸 마지막 밤 이후로 겨우 채워지던 기력이 죄다 고갈된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보약을 빨아대고 몸에 좋다는 걸 찾는가 보다. 힘이 축 빠져 늘어져 있으려니 마치 바늘방석 위에 누운 듯 마음이 안절부절못하게 변했다.
조만간 보자는 게 무슨 뜻이었을까? 대전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음악 소리가 바람을 타고 여까지 들려왔다. 그 음악 소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지고 자신을 형수라고 하는 친왕의 말에 분노한 황제가 날 죽이겠다 끌어낼 것만 같았다. 내가 지은 죄가 있건 없건 그 친왕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그저 한 번 가지고 놀기에 재밌으면 그만일 테니.
그렇게 불안에 떠는 사이 연회는 파하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연회가 파했다는 말은 조금 이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노랫소리 울리는 흥겹고 건전한 일들이 이제 끝났을 뿐이다. 어둡고 질척하고, 정말로 술 냄새 풍기는 일들은 이제 시작이니까.
이웃한 접객소의 처소들이 시끄러워졌다. 환관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접대부들이 치장하며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잘생긴 모 대신이 어느 자리에 앉았다더라. 새로 급제한 누구네 집안이 그리도 부유하다더라. 깔깔거리고 기대하는 소리가 낮에 울렸던 음악 소리보다 더 귀에 박혔다.
난 정말로 저들 사이에 들어가 어울리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몸을 팔지 않아도 되는 현재에 기뻐하며 안주하고 있는 것일까? 황제의 체향이라는 가장 강력한 향을 풍기며, 그래, 우습게도 친왕에게 형수라는 소리나 들으며 조롱당하는 처지가 그래도 저들보다는 나은 것일까?
난 내가 죽게 될 것을 안다. 황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죽음과 가까운 자리를 배정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치도 않은 자들의 옆에 앉아 웃음을 팔고 술을 따르고 다리를 벌리고, 면천과 부귀영화를 꿈꾸는 것, 그래도 부모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게 해준 은인에게 가혹한 대접을 받으며 일생의 반을 병석에 누워있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나도 잘 몰랐다.
“하아.”
친왕의 조만간 보자는 말이 오늘 다시 보자는 뜻은 아니었는지 접객소의 소란이 다 사라질 때까지 내 처소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이불을 둘둘 말고 눈을 붙였다. 이렇듯 바깥이 시끄러울수록 마음이 쓸쓸해졌다. 문득 아침에 본 물고기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짐승들을 보고 있자면 우울한 기분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물들이 보고 싶었다. 내게 어떠한 악의도 없는, 그저 경계할 뿐인 동물들을 보고 싶었다. 귀여운 것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멍든 목이나 허리의 통증 같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요즈음 계속 어두운 생각만 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이러다 고장 나버리면 버려지고 말 텐데.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어 더욱더 우울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주저앉아있던 내게 내밀어졌던 커다란 손이 문득 떠올랐다.
마치 연약한 음인을 일으켜주겠다는 듯, 지탱해주겠다는 듯 내밀어진 양인의 손이라는 건 기실 흔한 것일 터이나, 막상 내게 그런 손이 내밀어진 건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 * *
연회가 끝난 후 접객소는 친왕에 대한 얘기로 소란스러워졌다. 집 안에만 있는데도 그의 얘기가 들려왔다. 처소의 창문이 뒷골목 쪽으로 향해 있는 탓인지 그쪽에서 비밀스런 얘기를 나누는 미련한 치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귀족들이며 내관들이 꼼짝도 못 하더라니까. 아무 말 없이 폐하의 옆 상석에 앉아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늠름한지. 마치 무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어.”
“그렇게 잘생긴 분이라니. 한 번 모실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
“성격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변덕스런 윗전만큼 힘든 게 없기는 하지.”
“우리가 상대하는 것들 중에 변덕스럽고 못되지 않은 놈들이 얼마나 있다고.”
그건 그렇다며 깔깔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접객소의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비참하다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겁을 집어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성노라고는 해도 궁에 속한 노예이기에 정말로 해코지를 당하거나 피를 보는 일은 없다는 걸 그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실 접객소의 접대를 받는 이들은 점잖게 놀다 돌아가는 편이었다. 황제가 거주하는 곳에 손님으로 온 자가 기방에서 놀듯이 바닥까지 까 보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형수님.’
날 그런 호칭으로 부를 정도로 이상한 놈이라는 건 저들도 모르겠지. 알았다면 저런 식의 농담을 나누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사실 친왕쯤 되면 접객소의 노예는 물론이요 내관을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처소 뒤에서 얘기를 나누는 치들은 그 위험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 같지만 기실 농담의 대상으로 혀 위에 올려서도 안 되는 인물인 것이다.
“폐하께서 후계가 없으시니 친왕의 위세가 더욱 당당하고. 또 동쪽을 평정하신 영웅호걸이라 무관들의 신임도 두텁다 하던데.”
“조용히 해 바보야. 우리가 그런 얘기 나눠서 뭐할 거야?”
“너도 연회에서 봤잖아? 그리 방자하게 구는데도 폐하께선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보고만 계시지 않았어? 어차피 자식이 없으시니 찍어낼 수 없어 그러신 건가?”
후사 문제까지 거론되자 대화 나누던 상대가 몸을 사리며 떨리는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하라고. 그러다 경을 치겠어!”
“그래도 아직은 객이니, 우리가 모실 수도 있는 노릇이잖아. 그러다 아이라도 가지거나 결착이라도 하게 되면 이 신세도 벗어날 수 있겠지.”
“…….”
노예라지만 높은 이들을 모시는지라 기본적인 교육은 받은 자들인데 어지간히 겁이 없는 듯했다. 접객소의 노예가 황족의 밤 시중을 들 때엔 피임약을 마셔야 했다. 황족이 아닌 자들과 늘상 관계하기 때문에 태가 섞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기는 지금 접객소에서 황제를 모셔본 건 나 하나뿐이다. 접객소에 있는 이들과 내가 말을 나누지 않으니 이러한 일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던 그 꿀렁한 약의 감각이 떠올라 토기가 치밀었다. 음인의 자궁문을 경직시켜 열리지 않게 하는 그 쓰디쓴 약은 효과가 아주 좋았다. 벌써 몇 번이고 황제의 씨를 받았는데도 임신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러니 내 처소 뒤쪽에서 소곤거리는 저 치들이 친왕을 모시게 되더라도 임신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수다를 떨던 접객소의 노예들은 정오를 알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릴 떠났다. 내 처소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우욱.”
아. 토할 것 같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던 미끈하고 꿀렁한 쓴 액체. 마치 악의로 만들어진 진흙 같은 그것. 내벽을 경직시키는 그 약 덕분에 황제와의 잠자리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가끔은 얻어맞은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 더 멍이 든 게 아닌가 싶을 때도 많았다. 자궁문이 경직되어 닫혀 있는데도 황제는 기어코 그 문을 찍어대며 괴롭혔다. 빌어먹을. 씨가 귀하다느니 다 핑계가 아니고 뭔가. 정말로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다면 나 같은 것 따위 그냥 안아도 무방한 게 아닌가?
‘씨가 귀하다고는 해도, 음인과 양인의 결합인데 기이할 정도로 임신하는 이가 드물다. 양인의 일반적인 번식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정도의 확률이지.’
황족의 임신에는 천신의 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도 같다. 누구였더라? 어릴 적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음인으로 발현하면서 과거의 많은 것들이 흐릿해진 탓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는 것만이 슬쩍 기억나서 안타까웠다. 좋은 기억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힘들 때에 떠올리며 시간을 때울 수 있을 텐데.
토할 것 같은 기분과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 엇물려 어지러웠다. 눈을 감으면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친왕에게 불려 가지 않았다는 것이 문뜩 아쉽게 느껴졌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친왕에게 희롱당하면, 자신을 화풀이 도구로만 쓰던 그 잔인한 얼굴에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것은 꿈같은 일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 내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
구역질이 났다. 고장 나면 안 되는데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 * *
친왕이 나를 부른 것은 연회가 끝나고도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나 같은 건 잊었겠거니 안심하고 있었기에 내관의 부름은 날벼락과도 같았다. 멍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날 안았던 황제의 체향도 거의 사라져 불안해졌다. 귀한 이의 체향이 나지 않으면 난 그냥 접객소의 노예였다. 아니 황제의 체향을 잔뜩 풍길 때에도 접객소의 노예이긴 했으나 그래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방어막 정도는 되어줬던 것이다.
“술 시중만 들 것이다.”
몸 안쪽까지 씻어야 하나 고민하는 내게 내관이 전했다. 웃기는 얘기였다. 술 시중이 잠자리 시중이 되는 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처음 황제에게 안길 때에도 처음엔 술 시중만 들 것이라 했다. 하지만 아직 날이 밝으니 궁에서 정사를 치를 것 같진 않아 정말 딱 술 시중 들 채비만 했다. 손님을 맞을 때 입도록 정해진 푸른색 윗옷을 걸치고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하얀 천으로 묶자 별것 아닌 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러고 보면 처음인가.’
객의 술 시중을 드는 것은 접객소의 일 중 하나였지만 실제로 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황제의 술 시중을 들긴 하지만 그는 객이 아니라 이 궁성의 주인이니 본래 내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날 부르러 온 내관의 얼굴을 힐끔 살피자 그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그야 난감하기도 하겠지. 황제가 내게 잘 해주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대우하기는 하니 이리저리 돌리다가 일이라도 생기면 뒷감당을 어쩔 것인가?
화풀이 인형이라고 부르면서도 사람들이 날 보는 시선에는 묘한 불안감과 공포가 섞여 있다는 것을 언제나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일상에서 벗어난 존재. 다시 말해서 특별한 존재. 지금 자신을 부르러 온 내관의 얼굴이 굳어있는 것도 날 친왕의 앞에 바쳤다가 사달이 날까 두려운 탓이리라.
뭐. 폐하께서 이 일로 화가 나셔봤자 화풀이 인형을 불러다 화나 푸시겠지. 내가 접객소에 속한 노예인 건 사실이고 내관이 법도를 어겨 날 끌어낸 것도 아니다. 친왕이나 되는 귀하신 분의 요구를 거절할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내하시죠.”
내관을 재촉하자 그는 퍼뜩 몸을 한 번 떨고는 앞서 걸었다.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길은 황궁의 외곽으로 향해 있었다. 내가 있는 접객소도 외곽에 위치했지만 같은 외곽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돌의 재질부터가 달랐다. 잘 조성되어있는 경관은 단풍을 뽐내며 늘어져 있고 공기에서는 좋은 냄새만 났다.
“친왕께서 계시는 궁으로 갈 것이다.”
내관은 무언가 주의를 덧붙이려다 말고 말을 삼켰다. 으레 따라올 만한 잔소리론 귀하신 분이니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것 정도였을 텐데, 내가 모셔본 것이 황제뿐이라는 걸 내관도 뒤늦게 떠올린 듯했다.
황족은 결혼하여 자식을 갖기 전엔 황궁 안에 기거했다. 황실의 씨가 워낙 귀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황궁의 외벽에 맞붙은 궁들이 친왕들의 거처로 주어졌다. 모친과 함께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친왕의 어머니는 작고한 지 오래였기에 혼자 궁을 썼다.
자수가 가득 놓인 호화로운 비단 방석들을 쌓아 올리고, 벽지 또한 화려하여 기름이 반지르르 도는 듯한 방 안에서 친왕은 한량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너무나 어두워서 남색으로까지 보이는 머리카락은 반만 묶어 옥으로 된 관을 올리고 황금색 장포 안으론 피처럼 붉은 비단을 대 움직일 때마다 그 빛이 드러났다. 소매 끝에는 색색의 자수와 비단을 대 파도가 물결치는 듯했고 허리춤의 검대에는 장식이 아닌 철검이 묵직한 위엄을 드러낸 채 걸려 있었다.
친왕의 앞에 놓인 술상 위엔 벌써 비어버린 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안주에도 손을 댄 흔적이 있었고 가벼운 술 냄새도 풍겼다. 친왕의 건너편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관복의 무늬며 풍채가 대단했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날 데려온 환관을 슬쩍 보자 그가 친왕의 옆을 가리켰다. 하긴 상석을 차지한 자의 옆이 비어있는데 손님 옆에 먼저 앉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데 접대하는 이가 한 명인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감히 모시겠습니다. 전하.”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앉자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던 친왕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뭔가 재미있는 작태라도 보는 듯 시선이 꼬여 있었다. 며칠 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라 희롱을 각오했으나 친왕은 농을 부리는 대신 나를 무시하고 선객을 향했다.
“내 오랜만에 금경으로 돌아오니 풍경이 많이 바뀌었어. 영 적응이 쉽지 않아.”
“바뀌었다고는 하나 방씨(方氏)의 풍경이 아니옵니까? 내키는 대로 행동하시어도 그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하. 호부시랑은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친왕은 짧게 웃으며 술잔을 털었다. 나는 빈 술잔에 바로 술을 채웠다. 안주를 집어 입가에 대어 주었으나 치우라는 손짓에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호부시랑이라 불린 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선학의 자수가 놓인 흉배며 옥으로 만든 허리띠가 훌륭했으나 그 안의 사람은 그다지 훌륭해 보이지 않았다. 기름기가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은 얼굴엔 흉흉한 심보가 잔뜩 매달려 있었다. 처진 볼살은 둔중해 보였으나 두 눈만은 의외로울 정도로 형형하고 날카로웠다.
하긴 저 정도 관직에 오른 이들 중에 녹록한 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명문세가라 해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괴물 같은 자를 앞에 두고서 친왕은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 멍청해서 모르거나 그도 아니면 친왕 역시 괴물 같은 자이거나.
“전하의 공으로 동쪽이 평정되어 만백성이 천하태평을 외치고 그 공로를 칭송합니다. 참으로 길이 남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 야만스런 놈들의 먼지는 가라앉았어도 오래도록 황폐했던 곳이라 평화로움이 강물처럼 스며들기 쉽지 않으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강물처럼 스며들기 쉽지 않다라. 그래 강물이란 자고로 그 줄기가 뻗어있는 곳부터 적시는 법이지.”
친왕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호부시랑의 말을 받았다. 친왕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술잔을 잡은 손이 가벼워 아무런 부담도 없어 보였고 공기 또한 부드러웠다. 얼굴에 걸려있는 미소에도 다른 뜻은 없는 듯 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친왕과 호부시랑이 만나 산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어둠을 외면하며 친왕의 술잔에 다시금 술을 채웠다.
호부시랑이 말을 이었다.
“소인의 낮은 식견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천하 모두가 강물을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더 절박한 자들이 있고, 물이 흘렀을 때 더 비옥해져서 많은 수확을 내는 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강물이 흐른다 한들 그곳에서 무슨 작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옳은 소리다. 하지만 동쪽을 다스리는 일을 내가 하게 될 것 같지는 않군. 형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니 말이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감히 누가 그 공을 가로채어 동쪽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친왕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 웃음이었으나 순간 긴장이 방 안을 달렸다. 친왕의 심기가 꼬인 것을 느꼈는지 호부시랑의 기세도 조심스러워졌다.
“두 분의 우애가 두터우시니 전하께서 평정한 동쪽을 어디 다른 이가 맡겠습니까?”
“뭐 형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만 궁금하기는 하군. 그 강물이란 것이 강인지 길인지.”
“둘 다가 아니겠습니까? 하나 강물을 다스리기 위해선 일단 길이 놓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옮기고 물자를 옮기지 않으면 어찌 물을 다스려 댐을 짓겠습니까?”
두 사람은 길의 정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동쪽의 외적을 처리했으니 그곳의 땅을 다스리고 길을 내어야 할 터인데 시간과 물자란 한정되어 있기에 한꺼번에 정비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호부시랑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먼저 길을 내기 위해 지금 친왕을 찾아온 것이다.
화전을 일굴 때에도 길은 중요했다. 곡식을 수확하더라도 옮길 길이 없으면 썩힐 수밖에 없다. 길이 있더라도 관부의 눈이 미치지 않으면 도적이 들끓었고 길이 중요해서 순사들이 자주 오가면 근처의 화전을 빼앗길 수 있었다. 작은 산길 하나에도 이토록 명운이 바뀌는데 하물며 동쪽 끝까지 향하는 길은 어떠할 것인가?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친왕이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호부시랑이 이토록 백성을 걱정하니 내가 걱정을 더는군.”
“전하?”
“시랑은 시랑이 원하는 쪽으로 길을 내면 되겠네. 허가하도록 하지.”
호부시랑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느껴진 게 내 착각만은 아닌 듯 술잔을 받아드는 호부시랑의 손이 떨렸다.
“허가라니요, 전하?”
“길을 내고 정비하는 것을 허가하도록 하겠네. 내가 외적의 침입만 정리하면 되었지 강물의 흐름까지 정리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내가 허가할 테니 마음대로 길을 내게.”
호쾌하게 잔을 터는 친왕의 모습이 기괴했다. 길의 정비는 보통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들의 일이었으므로 동쪽의 길을 정비하는 것 또한 순전히 동평왕의 일이었다. 수레가 다닐 정도로 큰 길을 사사로이 내는 것은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하여 처벌받으므로 관청의 허가가 필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호부시랑은 길을 내는 허가를 받고자 친왕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동쪽 끝까지 아우르는 대로를 허락 맡아 홀로 정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전하. 소신은 그저 그런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로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대로고 소로고 간에 맘대로 하라지 않나. 사비를 내어 관도를 정비하겠다니 참으로 기특하다. 난 너그러운 자이니 십 리마다 관청을 세워주기만 하면 어느 쪽으로 길을 내든 묵인하도록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이상한 소리였다. 친왕은 마치 호부시랑이 사비로 길을 낼 것처럼 말 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를 아우르는 큰 관도를 정비하는 것에는 국가의 예산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지방에서 길을 내겠다 하면 호부에서 그 금액을 승인해 주고 공부에서 처리하는 식이었다. 호부시랑은 예산을 승인해 주는 김에 자신이 원하는 지역으로 길을 내어 이익을 보길 원했다. 그런데 그 세세한 조정을 정하고자 한 만남에서 친왕이 초를 치니 호부시랑의 눈에 짜증이 어렸다.
“전하. 말씀이 이상하십니다. 소신이 어찌하여 사비로 길을 낸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동쪽으로의 길은 내어야 할 터인데….”
“짐은 길을 낼 생각이 없다. 길이 있든 없든, 백성들이 물을 마시든 댐을 만들든, 그걸 내가 왜 상관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하하.”
“전하?”
“형님께서 요잔족을 쓸어버리라 해서 쓸어버렸을 뿐이야. 천하태평이니 백성의 안위니 내가 황제도 아닌데 뭣하러 상관하겠나? 내가 돈이 궁해서 호부랑 작당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거침없고 유쾌한 말투에 호부시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친왕은 그런 호부시랑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잔을 다시 비웠다. 술을 따라주는 족족 비우면서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얼굴에선 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음을 흘리는 친왕의 얼굴에선 눈앞에 앉아있는 자를 가지고 놀겠다는 즐거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즐거움을 느낀 것이 나 혼자는 아닌 듯 호부시랑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런 노리개 취급을 당해본 건 처음이리라. 하지만 황제니 뭐니 하는 말까지 나온 마당에 친왕을 더 조종하려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로 친왕의 말은 위험했다. 길을 내고 싶으면 날 황제 자리에 올리라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모로 몰릴 수도 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친왕의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아 그나저나.”
울그락불그락 하는 호부시랑의 얼굴만 안주 먹듯 바라보던 친왕이 내 쪽으로 고갤 돌렸다.
“형수께서 술을 직접 따라주시니 송구스럽습니다.”
친왕이 조금도 송구스럽지 않다는 태도로 말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형수 얘기로 끝을 보려는구나 싶어 피곤이 엄습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설설 기며 형수 같은 게 아닙니다. 말을 낮춰주십시오?
“혀, 형수라니요, 전하?!”
나보다 호부시랑이 더 놀라 날 쳐다보았다. 혹여나 황제의 비빈 중 하나가 변복이라도 했는가 싶어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내 모습을 살폈다. 그의 눈에 나는 평범한 접객소의 노예로 보일 것이다. 내 얼굴에 노예라고 써놓은 것은 아니지만 갖춰 입은 복식이며 장신구가 그랬다. 과연 시랑은 의뭉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명부에 남자 음인은 없을 터인데….”
“저번에 보았을 때만 해도 형님의 체향이 완연했는데, 그간 소박이라도 맞으셨습니까?”
날 쳐다보는 친왕의 표정이 방금 전 호부시랑을 놀릴 때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용서하십시오!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고 땅에 넙죽 엎드렸다. 고개를 처박듯이 조아리고 벌벌 떨었다. 어차피 이런 절절매는 꼴을 보고자 농을 한 게 아니겠는가. 적당히 만족하며 보내줬으면 싶었지만 친왕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몸을 낮추시면 제가 민망하지 않습니까. 형수님.”
호부시랑이 숨을 헉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을 것이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호부시랑의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친왕이 자신은 아주 상종 못 할 놈이라고 호부시랑을 통해 소문을 내는 중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친왕의 의도를 짐작할 여유도 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뒷덜미로 내려앉았다.
“민망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경고 가득한 어조에 나는 엎드렸던 상체를 세웠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비참했지만 절로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감히 일어서지는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땅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은 거부를 허용치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편히 앉으시지요.”
무서웠다. 그의 말처럼 이제 황제의 체향도 사라지고 날 지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친왕이 날 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전하.”
“하하. 대체 뭘 용서하라는 것인지.”
“심기를 거슬렀다면 그게 무엇이든, 가르침을 주십시오.”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릿해졌다. 나는 아무도 가지 않는 낡은 궁의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저 눈에 띈 것이 죄라면 죄겠지만 무섭고 두려웠다.
“전하. 이자는 접객소의 궁인이 아닙니까?”
호부시랑의 당황한 목소리가 친왕을 향했다. 친왕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정색하며 대꾸했다.
“신분이 무슨 상관이지? 그 귀하신 희빈에게서도 형님의 체향이 나질 않는데, 내가 알아챌 정도로 형님의 체향이 나는 음인이라면 마땅히 형수 대우를 해 드려야지.”
지금 고개를 들어 호부시랑의 얼굴을 보면 신분을 뛰어넘는 공감을 나눌 수 있을 터였다. 황제의 동생이 변덕스럽다는 소문은 잘 봐준 정도가 아니라 날조에 가까운 망언이었다. 황제와 비빈을 논하며 농을 하는 자세는 언제 역모로 몰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느껴졌다.
나는 죽을 것만 같은 위협 속에 몸을 덜덜 떨었다. 떨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떨렸다. 이처럼 무엄한 말은 듣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하필 희빈을 꼭 찍어 걸고넘어졌으니 이 또한 위험했다. 지금 친왕이 한 말이 비빈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들이 날 어찌 여기겠는가?
“…흐윽.”
결국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나직이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젖은 뺨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흥이 깨졌다는 듯 짧은 한숨과 함께 사라졌다.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소. 호부시랑.”
밤은커녕 해가 휘영청 떠 있는 대낮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문하여 더 머무르는 실수를 호부시랑은 하지 않았다. 재빨리 인사하며 떠나는 발걸음 소리가 부럽게 느껴졌다.
술자리가 끝났으니 내게도 돌아가라고. 그렇게 한마디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흥미가 사라진 기색임에도 친왕은 내게 돌아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쪽으로 빈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친왕의 잔을 채웠다. 오랜 시간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상 위엔 벌써 빈 병이 여러 개였다. 친왕에게서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이미 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술을 마시다 말고 내 뺨을 만지겠는가?
참지 못해 떨어졌던 눈물은 곧바로 그쳐 메마르게 식어 있었다. 딱 한줄기 터지듯이 흘러내린 눈물은 이미 땅에 떨어져 얼룩이 되어 있었다. 친왕은 내 뺨의 눈물 자국을 덧그리듯 문질렀다.
“좀 더 버텨보지 그랬어?”
“…요, 용서를.”
“마셔.”
방금 전 내가 따라주었던 술잔을 다시 내게 내밀며 친왕이 명했다. 감히 거부할 수 없어 두 손으로 받아들자 그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내 손에 잡힌 술잔을 바라보았다.
“벌주다.”
친왕의 명을 어찌 감히 거역하겠는가?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우자 그가 손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연거푸 잔을 비웠다. 궁에 들어온 뒤로 술을 거의 마셔보지 않은 데다 식사도 거른 참이라 금세 취기가 올랐다. 이대로 쓰러질 때까지 마신 뒤, 상전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욕을 보게 되는 것일까? 대충 버티다 먼저 쓰러지는 게 나을지, 아니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는 게 나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잔 두잔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덧 병 하나가 다 비었다.
예전에 접객소의 한 궁인이 관료에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먹이고는 급기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에게 먹물까지 먹인 것이다. 처소로 돌아와 끊임없이 검은 물을 토하던 모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병이 비었군.”
무심한 듯 떨어진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검은 것을 토하던 궁인. 내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검은 어떤 것. 이런저런 생각이 모두 물 밑으로 사라지고 내 앞에는 빈 술병을 든 친왕이 앉아있었다.
술기운에 열이 올라 얼굴이 뜨거웠다. 친왕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색 그대로 평온했지만 두 눈동자는 집요할 정도로 내 뺨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기운을 빌어 친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제의 동복형제라는 게 티 나는 얼굴이었다. 단단한 턱선이라든가 흐트러짐 없는 콧날 같은 것이 모두 닮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이 닮아 있었다.
“병도 비고 얼굴도 붉고, 뭐 괜찮군.”
친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친왕의 손이 닿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들려온 것은 물러나도 좋다는 명이었다. 나는 그가 말을 바꿀까 봐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듯 방을 나오자 문밖에 서 있던 내관이 돌아갈 길을 안내해주었다. 호부시랑이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바깥은 어느덧 붉게 저문 해로 가득 차 있었다. 단풍이 하늘의 빛깔과 어우러져 반쯤 뭉개져 있었다. 바람이 불어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이 마치 하늘이 떨어져 흩날리는 듯했다. 술에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세상이 몽환적으로 보이는 것은.
쌀쌀한 바람이 옷깃 가득 스며들었다. 토해내는 숨결에선 술기운이 묻어났다. 길게 드리워진 내관의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흐드러진 단풍 사이를 걸었다. 바람에 떨어지는 잎의 흔들림을 따라 내 발걸음도 흔들거렸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 퇴장을 명하던 친왕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친왕은 만족한 듯 흥미가 떨어진 듯 뭔가가 식어버린 얼굴이었다. 꽤나 잔인한 일을 당하리라 예상했던 것치곤 술에만 잔뜩 취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물을 빼긴 했으나 이 정도 심술이면 버틸 만했다. 그래. 소문이 참으로 맞기는 했다.
변덕스러웠다.
* * *
없어지지 않을 것 같던 목의 멍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내 처소에 처박혀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몸이 다 나을 때 즈음 황제의 부름이 있곤 했는데 이번에는 좀 길어지고 있었다.
초조함에 목이 말라 왔다. 저번에 안겼을 때 어땠었더라? 평소와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뭔가 심기를 거스른 걸까? 황제는 내가 잠자리에서 목소리 내는 걸 싫어했다. 얻어맞을 때 내는 소리는 괜찮은 것 같았지만 성교 시에 내는 신음 소리도 종종 마뜩잖아 하며 뺨을 날렸다. 그 때문에 궁금한 점이 있어도 묻지 못하고 서운한 점이 있어도 토로하지 못한다. 애초에 말을 나눌만한 관계가 아니기는 했지만 갑갑했다.
불려 가면 고통밖에 없는데도 부름이 없자 불안함을 참기 힘들었다.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아직 망가지지 않았는데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때리는 데에도 질려서 좀 다른 자를 패보려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이 굴뚝의 연기마냥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황제의 체향도 사라지고, 그가 남긴 멍 자국도 사라지면 내 처지는 퍽이나 비참해졌다. 접객소의 노예들부터가 날 죽일 듯이 노려보며 시샘 가득한 목소리로 왜 저자는 황제의 노리개도 아닌데 자신들처럼 일을 하지 않느냐고 환관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멍 자국이 있을 때엔 동정하거나 역신이라도 만난 양 날 피하던 궁인들도 내 얼굴이 멀쩡해지면 제법 살벌한 눈초리로 노려보기 시작한다. 황제의 화풀이 인형이라는 별명은 사라지고 왠지 기분 나쁜 접객소의 노예라는 특징만 남아 삭막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벌써부터 음식의 양이 줄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음식에 벌레도 섞일 것이다. 벌레야 골라내면 된다지만 썩어버려서 목구멍으로 넘기지도 못하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돈을 들여 다른 음식을 사 먹어야 했다. 하지만 애초에 돈이 없어 여기 팔려온 몸이다. 그리고 접객소에서 일을 할 기회도 차단당한 처지였다.
한숨을 내쉬며 밥그릇을 수저로 긁었다. 잡곡이 두루 섞인 밥은 수저질 네 번에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방치된 게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나름의 대책은 있었으나 영 내키지 않았다. 그 대책이라는 게 수라간에 숨어들어 가 도둑질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들키면 굶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중죄지만 아직까진 걸리지 않았다.
배가 고프더라도 당분간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어차피 조금만 더 버티면 황제가 부를 것이다. 그가 날 멀리하려고 애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먹을 것을 주지 않는데 왜 죽지 않느냐고 조롱하는 소리를 면전에서 듣기도 했다. 어차피 한 달도 안 되어 날 부르게 될 것이다.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더 수모인 건지.”
강간당하듯 안기고 폭력에 멍든 몸으로 설설 기는 것이 수모인지,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골방이라지만 멀쩡한 몸으로 앉아있는 게 수모인지 분간키가 힘들었다.
먼 데서 동생이 와 있으니 나 같은 걸 부르기 꺼려지는 걸까? 황제가 누군가의 눈치를 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또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두 번밖에 못 보기는 했지만 친왕이라는 자가 두르고 있는 분위기엔 무서운 긴장감 같은 것이 있었다. 변덕이 단순한 변덕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분위기 때문이었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펴 손바닥의 손금과 근육을 꼼꼼히 살폈다. 단단하게 잡혀있던 굳은살은 사라지고 부드러워졌지만 직접 손끝으로 만지고 살피면 옛 직업의 잔재가 느껴졌다. 화전을 일구느라 생긴 굳은살은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았고 관리받지 못한 손끝은 거칠어서 거스러미가 일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 고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조. 안에 있어?”
처소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만 빼꼼 밖으로 내밀었다. 그나마 알고 지내는 접객소의 음인 두 명이 곱게 차려입고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옆구리엔 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단풍 모으러 갈 건데 같이 갈 테야?”
그 말에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니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맘때가 되면 접객소의 노예들도 단풍잎을 한껏 모아 말리곤 했다. 곱게 말린 단풍잎은 그네들의 연서에 동봉되거나 창문을 바른 종이에 붙여지곤 했다. 나름 가을의 사치였다.
움직이는 것이 매우 귀찮았지만 배가 고팠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단풍 줍기는 구실이고 다들 감을 따는 게 목적이었다. 나는 접객소의 음인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사람 키만 한 장대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었다.
“기조는 키가 커서 같이 가면 좋아.”
“이런 일엔 기조가 최고지.”
접객소의 음인들이 공치사를 해댔다. 평소 살갑게 지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힘쓰는 일을 해야 할 땐 곧잘 불려 나갔다. 음인은 많았지만 남자 음인은 몇 명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접객소의 음인들에 비해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힘도 더 셌다.
음인들은 낮은 쪽의 가지들이 벌써 앙상하다며 조잘거렸다. 밝은 목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마치 작은 새들이 모여 지저귀는 것 같아 머리를 짓누르던 음울함도 조금 걷혀나갔다.
“축사 쪽은 아직 괜찮을 것 같은데.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잘 안 가잖아.”
“그쪽에 감나무가 있었나?”
“난 감보다는 밤이 좋은데.”
“궁엔 밤나무 없어.”
밤나무는 열매껍질이 뾰족하기 때문에 궁에 심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가 밟거나 넘어져서 다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화전을 일구며 궁핍했을 때에도 밤은 화로에 구워 종종 먹을 수 있었는데 궁에 들어온 뒤부턴 구경도 하지 못했다.
말이 나오니 먹고 싶어지네. 나는 조심스레 입맛을 다셨다. 궁 안에도 밤나무가 한 그루 있기는 했다. 접객소 뒤쪽의 무너진 궁에는 제법 많은 종류의 나무가 있었다. 예전 주인이 원예며 식목에 취미가 있었던 듯 시들어버린 덩굴 중에도 희귀한 것들이 꽤 있었다. 내가 물고기를 구경하던 연못만 해도 여상한 규모는 아니었다. 궁의 위치로 보아서는 황족이 살던 별궁 중 하나였을 텐데, 퍽이나 적막하게 방치되어 있구나 싶었다.
“접객소 뒤쪽의 궁은 원래 뭐였어?”
“응?”
“접객소 뒤쪽에, 산길로 올라가면 궁이 하나 나오잖아. 거기도 감나무랑 이것저것 있는 듯한데 왜 아무도 안 가나 싶어서.”
음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나눴다.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하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내게 장대를 넘겨줬던 음인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했다.
“귀신 나온다는 거기? 뭐 총애받던 후궁이 목매달았다고 들었는데.”
“어. 나는 황후였는데 황제가 다른 이에게 결착해서 좌절한 나머지 죽었다고.”
“황후궁은 따로 있는데 왜 거기서 죽어?”
“결착한 사람에게 궁도 뺏기고 쫓겨나서 목매달았다 하던데.”
세 명의 음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조잘조잘 잘도 말했다. 눈치를 보는 것조차 작고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들으면 경을 칠만한 얘기인데도 얘기를 나누는 사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황자님 중 한 명이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그래서 슬퍼한 어미가 목을 매달았다고.”
음인들의 이야기엔 공통점이 있었다.
“어째 다 목을 매단 얘기네?”
“그야….”
“나오니까.”
“유령이.”
“목을 매달고 죽은 유령이 처마에 대롱대롱~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혼절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걸.”
무언가 생각날 듯 머리가 아파 왔다.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는 하얗고 긴 옷자락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유령 얘기를 해서 그런가. 좀 춥네.”
괜히 부산을 떨며 옷자락을 여몄다. 바람은 가을치고는 따뜻한 편이었지만 겁 많은 음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츠렸다. 머리카락을 무심히 쓸어 넘기자 언제 붙었는지도 모를 단풍잎 하나가 손가락에 걸려 떨어졌다. 유령 얘기를 나누는 사이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축사에 도착했다.
마사와는 달리 축사는 상인들이 오가는 측문 근처에 위치했다. 축사라고는 해도 궁 안에서 도축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닭이나 오리 같은 계금류와 우유를 얻기 위한 암소가 염소 몇 마리와 함께 매어져 있을 뿐이었다. 달걀을 훔쳐가지 못하게 축사를 지키는 이가 졸린 얼굴로 우리가 오는 것을 쳐다보았다.
“뭣하러들 온 거지?”
“단풍 좀 주우려구요.”
축사지기는 내가 든 장대를 보고서는 피식 비웃었다. 축사지기는 신분 낮은 환관이었다. 그는 감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둘렀다. 음인들은 재잘거리며 모양이 예쁜 단풍을 줍고 내가 떨어뜨리는 감을 바구니로 받았다. 아직은 떫은 단단한 감들이지만 햇볕 좋은 곳에서 잘 익히면 맛있는 홍시가 될 터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음인들과 함께 나무 밑을 노닐었다. 가축의 분뇨 냄새가 괴롭기는 했지만 못 견딜 정도도 아니었고 주변을 둘러싼 단풍이 퍽 예쁘기도 했다.
“여기 좀 명당인 듯!”
“그러게, 그러게.”
음인들은 바구니 가득 딴 감을 단풍잎으로 덮으며 밝게 웃었다. 축사지기에게 감 대여섯 개를 선물한 뒤 접객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난 장대 대신 바구니를 들어주었다. 내게는 무겁지 않은 것도 여성 음인들에겐 휘청거려야 겨우 옮길 수 있는 짐이었다. 이런 신체적인 장점은 궁 안에서 꽤 큰 자산이었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세 명의 음인들을 나는 조금 아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이 곱고 연약해서 아무리 난폭한 황제라도 이런 이들에겐 주먹을 휘두르지 못할 듯했다. 역시 내 체형이 문제인 거다. 내가 보통의 음인처럼 아주 어릴 때 발현했다면 봄철의 새싹처럼 곱고 연약했겠지. 그렇다면 꿈에서처럼 상냥하게 대해주었을지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가정이구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무너진 궁의 유령만큼이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어릴 때 발현했다면, 결착했다면, 혹은 음인으로 발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다.
“도착했네. 고생했어, 기조야.”
“잘 들어가, 기조야.”
“바구니 들어줘서 고마워~”
작은 새들은 가벼운 목소리로 인사하며 헤어졌다. 접객소의 노예들은 정오가 지나면 춤사위를 익히고 노래를 연습했다. 시서화에 재능이 있는 자들은 지체 있는 궁인들의 말벗으로 불려 가기도 했다. 처음엔 내게도 주어진 일정이 있었다. 뻣뻣한 몸이지만 춤을 배우고 노래를 익혔다. 황제의 침전에 불려 갈 때엔 선망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딱 그다음 날까지만.
멍과 상처를 가득 달고 나온 내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평소 성정이 자애롭다 칭송받던 황제였다. 대체 무슨 죄를 지어 심기가 상하신 것이냐며 추궁하는 목소리가 매서웠으나 해 줄 말이 없었다. 난 황제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술을 한 잔 따랐을 뿐이었다. 초유의 사태에 당황하던 사람들은 내 상처를 치료하라며 황제가 의관을 보내자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황제의 심기가 상한 이유라……. 사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음인으로 발현하기 전의 기억은 흐릿했지만 아주 안 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과도를 집어 들고 빙빙 돌렸다. 단련했던 근육은 빠져버리고 체력도 떨어져 유약해졌지만 이런 작은 손기술은 남아있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 껍질을 빙빙 돌려 깎으며 흐릿해진 과거를 열심히 떠올렸다. 가끔 이렇게 떠올리지 않으면 완전히 잊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처음 음인으로 발현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절망, 그리고 깊은 안도와 해방감.
음인은 냄새가 나니 사냥엔 쓸모가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네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니 어디에도 필요가 없다며 화전을 일구던 부모에게 돌려보내졌다. 발현할 때 몸조리를 하지 못해 기억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버린 바보는 쓸 데가 없다고 했다. 쓸모없는 짐이 되었지만 화전이라도 일구게 돌보아주는 건 식구이기 때문이라고 짐짓 너그러운 척 말했었다.
껍질을 벗겨낸 감을 탁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일각의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탁자 위엔 열 개도 넘는 감이 놓여 있었다.
과도를 내려놓고 닭살이 돋은 팔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감기가 오려는 것인지 머리가 아파 오고 어깨도 무거웠다. 감을 실로 엮어 매달아야 하는데 감꼭지를 한 번 돌려 묶자마자 아주 불쾌한 기억이 치솟았다. 처마 밑에 목을 매달아 흔들리는 긴 그림자….
“아 진짜.”
토기가 치솟았다. 왜일까. 음인이 되기 전의 일은 모두 흐릿한데 오직 그 일만이 선명한 건.
도저히 일할 기분이 나지 않아 손을 놓았다. 배가 고팠지만 감은 아직 떫어서 먹을 수 없었고 오늘 점심 배식은 아예 건너뛴 듯 부르는 이도 없었다. 감기에는 잘 먹고 쉬는 게 최고라는데 이 화려한 궁궐에는 내가 먹을 게 없었다. 이런 날씨에 몸이 축나면 길게 앓다가 죽기도 하니 초반에 잘 다스려야 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겉옷을 다시 입었다. 뒷산의 폐궁에 가서 밤이라도 주워야 했다.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난 곳이라지만 난 숱하게 발걸음을 했어도 보지 못했으니 오늘도 보지 못할 것이다. 바구니에 남아있는 단풍잎을 탁자 위로 쏟아버리고 빈 바구니를 옆에 끼자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가을이라 해는 짧았고 산에 난 오솔길은 좁았다. 화전을 일구느라 좋았던 체력도 궁에 들어와선 하향일관도였다. 맞아서 앓아눕고, 몸 좀 괜찮다 싶으면 식사가 끊겨서 굶고. 권 의관은 골병 안 든 게 용하다며 감탄하고는 했다. 아직 젊어서 버티는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건강을 챙기라 말하면서도 네가 뭔 수로 그러겠냐며 혀를 찼다.
그래도 가을이라 다행이었다. 여기가 궁이 아니라 산이었다면 먹을 것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렇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먼지 쌓인 기와가 눈에 들어왔다. 관리되지 않은 정원도 썩어가는 연못도 그대로였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더 짙어진 단풍과, 떨어진 잎으로 수면이 닫혀버린 연못만이 시간을 느끼게 했다. 긴 나뭇가지로 연못 위를 조금 치우자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들이 숨을 쉬러 올라왔다.
“떫은 감이라도 좀 가져올 걸 그랬나. 줄 게 없구나.”
줄 건 없지만 그래도 나 좀 반겨주렴. 장대로 감 따줄 사람이 필요한 접객소 노예들 말고는 아무도 날 반기지 않는단다.
몰려드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어여뻐서 잠시 지켜보았지만 밥을 주지 않자 곧 모습들을 감추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폐궁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밤나무는 안쪽에 있었다.
경첩이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중문을 지나 폐궁 안쪽으로 들어가자 스산한 바람에 목덜미가 싸해졌다. 바람에 쓸린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람의 옷자락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걸음 소리 같기도 했다.
쓸데없이 귀신 얘기를 들어서는. 나는 목매달려 있더라는 처마 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며 뒤뜰로 바삐 움직였다. 가지치기를 전혀 하지 않아 산만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들이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문득 친왕의 거처가 떠올랐다. 풀 하나 허투루 심어지지 않아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던 정원의 모습은 그 주인이 귀하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유령만 살고 있다는 폐궁도 한때는 아름다웠을까 싶어 잠시 찬 숨을 들이켰다.
뭐 아름다웠겠지. 적어도 처음에 지어졌을 때에는 귀히 여겨졌겠지. 내가 이렇게 누추한 처소의 쇠락을 걱정할 정도로 감상적인 인간은 아닌데 요즘 헛생각이 잦기는 하다.
밤나무는 작은 밤송이들을 땅에 잔뜩 떨구어 놓고 있었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아 밤송이로 가득한 땅은 바늘로 이루어진 융단이라도 펼쳐진 듯했다. 살벌하기도 하고 군침이 돌기도 한 광경이었다.
튼튼한 가죽신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밤송이를 벌려 잘 익은 알들만 주워가면 될 터인데, 내가 신고 있는 건 빈말로도 튼튼하다 말하기 힘들었다. 집게라도 가져올 걸, 해가 지는 것만 신경 쓰느라 맨손으로 오다니 멍청했다.
“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으니.”
조심스레 꿇어앉아 손끝으로 뾰족한 밤송이를 주워 올렸다. 살짝 터져있는 껍질 사이로 갈색의 밤알이 반지르르하게 빛났다. 아. 전부 여기서 까는 건 무리라지만 하나 정도라면…….
“그렇게 건드리다간 손이 피투성이가 될 터인데?”
“으악!”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바닥에 잔뜩 널려있는 것이 밤송이라 손바닥이며 종아리가 잔뜩 찔렸다.
“악!”
“저런. 덤벙거리기는.”
“치, 치, 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밤송이에 찔려 아프다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친왕의 모습에 나는 기겁을 하며 무릎 꿇었다. 무심하게 널려있던 밤송이들이 악의라도 가진 양 몸을 파고들었지만 놀라서 고통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친왕은 시큰둥한 얼굴로 무릎 꿇는 날 쳐다보았다.
이렇게 찔려 피범벅이 될 수가 있어 밤나무를 궁에 안 심는구나. 그런데 여기엔 왜 심어서 날 이 꼴로 만드는 거야?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하며 엎드려 있으려니 친왕이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 숙인 내 눈에 고급스런 황친의 신발이 들어왔다.
“형수는 얻어맞는 게 취미라더니, 형님께서 부르지 않으시는 동안엔 이런 곳에서 피를 보는가 보지?”
“…저, 전하.”
“그렇게 무릎 꿇고 계시면 아프지 아니하신가?”
무심한 듯 이어지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전혀 없어 소름 끼쳤다. 아마 알아서 꿇지 않았다면 부러 무릎 꿇리지 않았을까. 친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은데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뭐 아픈 게 좋으시다면야 계속 꿇고 계시지요. 내가 소박맞는 형수의 취미를 방해할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니까.”
“화, 황공합니다.”
“황공하기는요. 애먼 투기 부리지 않고 혼자 처리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것을. 폐궁에 나온다는 귀신은 친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이 밤송이 위에 무릎 꿇고 엎드려 있으면 일어나라 해줄 법도 한데 친왕은 움직이지도 않고 내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무게를 싣지 않으려고 손을 슬쩍 들어 올리자 살에 꽂힌 밤송이가 딸려 올라왔다. 놀라 주저앉은 탓에 어지간히도 깊게 박힌 듯했다. 너무 놀라서 아픈 것도 몰랐지만 슬슬 통증이 팔과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렇게 꿇어 엎드려 있는 상황이 서러워서 눈물도 찔끔 나왔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나 같은 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친왕이 여기에서 목을 베어버린다 한들 아무도 따질 수 없다. 물론 구설수에야 오르겠지만 그 어떤 법도 어긴 것이 아니니 그것으로 끝이다.
“우십니까? 좋아서 그러고 계신 줄 알았는데.”
“으으….”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나는 고개를 더욱 숙이며 몸을 떨었다. 고통이 점점 선명해지고 선뜻해졌다.
“용서해주십시오. 전하.”
“무얼 용서하시라는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소, 소인이 감히 주인 없는 곳이라 생각하여 밤을 주우러 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발……. 다시는 이곳에 발걸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될 일도 아닌 것을 죄라고 말하며 고하려니 눈물이 뚝뚝 흘렀다. 이 심술궂은 자가 이를 빌미 삼아 얼마나 괴롭혀댈까 생각하니 한층 무섭고 서러워졌다. 그래도 일단은 이 자리에서 일어나라 명해주었으면 했다.
“주인 없는 궁이라.”
한마디를 한 뒤 친왕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꿇어 엎드린 내 시야에 들어와 있는 친왕의 신발 또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손이며 다리에 구멍이 숭숭 나서 벌집처럼 되어버릴 것 같았다. 울음이 복받쳐 어깨를 떨고 있자니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여긴 원래 내 형님이 쓰시던 궁이지. 폐하를 이르는 것은 아니야, 평인이었던 형님이 한 분 더 계셨거든.”
정원이며 내궁 등이 분리된 제법 규모 있는 곳이었으므로 귀한 이가 거처했을 줄은 알았으나 설마 황친의 궁이었을 줄은 몰랐다.
“난 형님을 본 적이 없다만, 뭐 마음 약한 분이셨다지. 이런 꼴을 보고 즐거워하시진 않았을 것 같군.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지만 생각처럼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놀람과 고통에 굳어버린 몸이 삐걱거리며 자꾸 엎어지려 했다. 오뚝이마냥 비틀거리고 있자니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윽.”
“고슴도치가 되고 싶은 게야?”
진한 양인의 체향이 머리 위를 훅 덮듯이 다가왔다. 팔뚝을 잡은 커다란 팔이 내 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따뜻한 체온과 양인의 체향에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친왕은 비틀거리는 내 몸을 가벼운 지푸라기라도 되는 양 잡아당겨 단단한 땅 위에 내려주었다.
“…황송합니다.”
“이곳엔 안 오는 게 좋겠어.”
친왕의 시선이 쓰러져서 굴러다니는 바구니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목적했던 밤을 한 알도 줍지 못하고 상처만 났다. 손바닥을 펴서 힐끔 보자 시뻘건 피가 낙엽과 흙에 뒤섞여 지저분했다. 의관에게 받아놓은 약 중에 바를만한 게 있을지 찾아봐야겠다.
심란해하고 있는데 문득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친왕이었다. 굳어있는 얼굴은 왠지 불쾌해 보였다. 지저분한 것을 봐서 기분이 상한 것일까. 애써 주먹을 쥐어 상처를 숨기자 이번에는 얼룩덜룩해진 하의 쪽으로 차가운 시선이 옮겨갔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렇게 만든 것인데 그렇게 더럽다고 불쾌해할 일인가? 아. 생각보다 덜 다쳐서 불쾌한 것일 수는 있겠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형제는 닮는다는데 설마 친왕도…….
“황궁의 살림이 궁하지는 않을 터인데 식솔들을 굶기는 줄은 몰랐군.”
“아.”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를 쓸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며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붉은 단풍잎을 손끝으로 떼어냈다. 그 붉은 가을의 한 조각을 나는 멍청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친왕의 손이 스쳐 지나간 곳이 화상이라도 입은 양 화끈거렸다. 아마 내 목덜미의 색깔이 저 단풍잎의 색깔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밤나무는 뽑아버려야겠군. 의도치 않게 사람 몸이 상하니 궁에 있을 나무는 아니야. 꿇어 엎드리는 사람이 없는 곳에나 심어야지.”
제법 상식적인 말을 하는 친왕의 모습이 의외였다. 하지만 갑자기 말을 걸어 날 밤송이 위에 꿇어 앉힌 것도, 일어나라 말하지 않아 상처를 깊게 한 것도, 목덜미를 부러 만져 희롱한 것도 모두 그의 고의였다.
그는 방금 전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게 환상인 양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빙빙 돌리는 단풍잎의 처지가 꼭 나와 같았다. 가지고 놀다가 허공에 떨궈버려도 항의 한 번 하지 못한다.
“물러가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비틀거리며 폐궁에서 도망쳤다. 다 떨어져가는 중문을 지나 산길을 내려가도 뒤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더없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제 물고기가 보고 싶어도 이곳엔 못 오겠구나 싶어 울적해졌다. 친왕이 자신의 궁을 놔두고 왜 자꾸 이 폐허로 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그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밤송이에 찔린 상처가 낫기 전까진 어차피 돌아다닐 수도 없겠지만 다시는 오지 않겠다 말을 했으니 지켜야 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고 물로 씻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밤나무라 밤송이가 작아 가시도 길지 않았다. 손바닥에 박힌 가시부터 뽑고 약을 바르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밤이란 건 값비싼 과실도 아니어서 재미 때문에 줍는 것이 아니면 사 먹는 게 이득이었다. 아무리 궁 안이라도 돈만 주면 잘 여문 밤알을 망태기째 구할 수 있었고 별로 비싸지도 않았다. 음인들은 제 몸 고운 것이 제일이라 재미로도 밤송이를 손으로 줍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고운 것과는 거리가 먼 몸이 상하고 더러워지자 더욱 초라하고 볼품없이 느껴졌다.
상처를 대충 수습하고 나자 의관이 두고 간 약들 중 상처에 쓰는 것은 동이 나고 말았다. 황제를 모시기 전까지는 의관이 오지 않으니 이젠 내 타고난 건강이나 믿어야 했다.
치료를 대충 하고 나자 힘이 쭉 빠졌다. 사지가 축 늘어져서 침대에 몸을 누이자 눈앞이 어질어질 흔들렸다. 배에서는 먹을 것을 달라며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했다. 배고픔이 지나쳐서 좀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된다는 위기감이 졸음과 함께 밀려들었다. 잠들면 죽는 게 아닐까 싶어 고개를 뒤흔들었지만 도무지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았다. 비상용으로 숨겨둔 잡곡이 한 되 정도 있기는 한데 밥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솥을 얹고……. 무리였다. 저녁 시간은 지나버렸고 음식을 차려줄 시비가 있는 것도 아니라 아침까지는 쫄쫄 굶어야 했다.
“기조란 자의 처소가 이곳인가?”
아침까지 잠이라도 자는 게 좋겠다고 눈을 붙이는데 제법 나이 든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부르는 것이라면 내 처소를 찾아 헤맬 리 없으니 분명 모르는 자였다. 하루에 두 번이나 방문객을 맞게 되다니 별일이라 생각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여기라는구나. 옮겨라.”
방문을 열자 늙은 환관이 짐꾼을 부려 안으로 짐을 들였다. 갑작스런 일에 당황하고 있으려니 총총 앞으로 다가온 환관이 안쓰럽단 표정으로 날 위아래로 쭉 훑어 내렸다.
“노 총관이라고 하네. 그대가 기조인가?”
“네에. 노 총관님. 한데 무슨 일이온지.”
“폐궁의 밤나무를 한 그루 뽑게 되었는데, 여물어 떨어진 밤들은 여기 가져다주라 하셨네.”
짐꾼이 처소 안으로 들이는 바구니를 보자 눈에 익은 것이었다. 밤나무 옆에 팽개치듯 놓고 온 바구니 안엔 갈색으로 빛나는 알밤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는 환관이 건네는 밤 바구니를 황송한 기분으로 받아들었다.
“이건 대체.”
“친왕께서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도록 하게.”
“친왕께서요?”
“배고픈 나머지 밤나무 밑에서 쓰러졌다지? 가엾게 여겨 이것들을 주라 하셨네.”
밤이 잔뜩 들어있는 바구니 말고도 숯이며 화로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궁 안에 들어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받아본 적 없는 상등품의 물건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보고 있는데 환관이 품 안에서 주먹만 한 병을 꺼냈다.
“이것은 금창약이니 아껴 사용하도록 하게. 그대 같은 신분에겐 과분한 물건인데 어찌 이리 후한 인심을 부리시는지.”
어울리지 않는다며 환관이 도리질 치는 것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건네받은 약병의 차가운 감촉이 아니었다면 정말 꿈이려니 했을 터였다. 배가 고파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먹을 것을 보내주는 상전이라니. 감격스러워서 밤송이 위에 무릎 꿇린 게 아무렇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자네 지금 우나?”
“……아. 아파서요.”
일의 전후야 어쨌건 누가 날 챙겨주는 게 처음이었다. 고약한 짓은 잔뜩 당했는데 이런 작은 호의에 감동하는 내가 천치였다.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내는데 환관이 목을 길게 빼며 혀를 끌끌 찼다.
“친왕께 마음을 주어선 안 될 것이야.”
“예에?”
마음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망나니 같은 작자에게 마음을 준단 말인가? 눈물을 꾹꾹 닦아낸 뒤 밤알 가득한 바구니를 힐끔 보는데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런 일은 절대…….”
“절대 없어야 할 것이야.”
환관이 얼굴을 확 들이밀며 속삭였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진지한 기색을 띠고 경고했다.
“그분은 사람 가지고 놀길 즐기시니 현혹되면 흉한 꼴만 보게 될 걸세. 묘진국이 어쩌다가 그리도 허망하게 패망했는지 아는가? 세간에선 무용을 논하지만 측근들은 그저 두려움에 몸을 떨지. 그러니 그분의 희롱에 넘어가지 말게.”
참으로 실속 없는 경고가 아닌가. 나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도 아니고 후원자를 둔 가인도 아닌데 누구를 맘에 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기서 더 떨어질 위치가 있기나 한가? 똥을 푸는 노예라 해도 나처럼 맞고 배곯으며 지내지는 않을 터인데 말이다. 또한 지금은 배고프고 지쳐서 친왕의 친절이 가슴에 와 닿았으나 배가 부르면 밤송이 위에 무릎 꿇린 원한만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환관을 향해 기운 없이 미소 짓자 그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댁의 처지가 딱하여 일단 경고는 해주었네. 나중에 내가 매정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노 총관 나으리.”
총관이라 함은 친왕의 왕부를 돌보는 책임자를 뜻했다. 왕부의 총관은 황족을 어린 시절부터 보필한 환관이 맡는 일이 많았다. 혹시 모시던 황족이 황위에 오르면 환관 또한 주인을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른다. 그러니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노 총관이란 자는 보통 높은 신분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가 나처럼 천한 이에게 짐이나 넣어주자고 오진 않았을 터이니 아마도 경고가 본 목적이겠지. 나는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친왕의 변덕스런 성정은 잘 알고 있으니 갑작스런 호의에 홀리지만 않으면 되리라. 하지만 가슴 설레는 것은 막을 수 없으니, 그저 행동만 조심스럽고 낮게 유지하면 될 터였다.
환관과 짐꾼이 돌아가자 나는 두근거리며 화로에 불을 지폈다. 질 좋은 숯은 연기도 없이 따스한 열기로 방을 채웠다. 이런 계절에 이런 따스함이라니. 감동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병 주고 약 준다는 게 딱 이짝인데, 그래도 병 주고 약도 없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은걸.”
둥글고 작은 화로는 감히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도 못 하던 물건이었다. 숯 사이에 던져 넣은 밤알들이 까맣게 익어가는 게 사랑스러웠다. 껍질에 미리 내놓은 칼집이 더 벌어지며 노란 속살이 드러나고 달큰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뜨거운 것도 모르고 껍질을 훌렁훌렁 벗겨내며 배를 채우자 기다렸다는 듯 잠이 왔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살기 위해 취하는 잠이 아니라 따스하고 배가 불러서 오는 잠이었다. 이런 기분으로 잠든 적이 거의 없어서 손가락으로 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변덕이라면 밤송이에 구멍 몇 번 더 나도 좋을 것 같은데.”
황제에게 얻어맞는 것보다 친왕의 심술에 휘말리는 쪽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보상이 확실한 심술이라니 참으로 된 사람이 아닌가. 화로 속에서 불씨를 튀기는 하얀 숯을 바라보자니 두 눈이 스륵 감겼다. 날이 밝으면 놀란 얼굴로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겠지. 그러면 구멍 숭숭 난 손발을 보여줘야겠다 생각했다. 괜한 질투라도 사면 피곤해지는 건 나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곤히 잠들어야겠다.
* * *
따스한 잠자리에선 달콤한 군밤 냄새가 났다. 좋은 꿈을 꾼 듯도 한데, 드물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었는데 배가 고프지도, 아프지도 않아서 기분이 꽤나 좋았다. 보드라운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자니 밖에서 번잡스런 소리가 났다.
아침부터 찾아온 것은 궁금증에 미쳐가는 접객소의 노예들이 아니라 대전에서 찾아온 궁인들이었다.
“준비해라.”
대전에서 나온 내관은 절대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몸이 나았으니 황제를 모실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황제는 진탕 취했을 때가 아니면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취하는 건 기분이 나쁠 때뿐이었다.
“이런 아침에 말입니까?”
“노비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묻지 말고 명에 따르라는 내관의 경고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해를 보니 원래대로라면 황제가 조찬을 마치고 정무를 볼 시간이었다. 목(木)일이라 쉬는 날도 아니었으니 이 시간부터 약주를 했다는 건 심상찮았다.
무슨 일이기에 또 기분이 나쁜 걸까? 가면 또 맞는 걸까?
생각하다 말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야 맞겠지. 맞지 않은 적이 없지 않나. 안 맞을 이유가 있나? 맞는 게 내 일인데.
피식거리며 멍이 있던 뺨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살갗을 더듬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진정하려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황제의 화를 받아주는 것이 내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섭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체념하기 위해 애썼다. 희망 같은 사치는 모두 놓고, 누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버리고 내 처지에 순응하는 게 오늘따라 유독 어려웠다. 아마 배가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한 잠을 잤기 때문일 것이다. 몸이 너무 편해서 내가 내 주제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나는 내관의 경고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으며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내관은 재촉도 없이 음지의 고목처럼 음울한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저런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황제가 날 부르면 부를수록 내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황제의 기행이 내 멍든 얼굴만큼이나 그의 안색 또한 어둡게 하는 듯했다.
내 평소 행색은 초라하고 냄새나서 내전에 곧바로는 들 수 없었다. 나는 접객소 근처의 작은 욕탕으로 안내되었다. 몸을 담글 수 있는 작은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미리 채워져 있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솜도 아니고 종이를 솜 대신 끼워 넣은 옷을 벗자 가을의 싸늘한 공기에 닭살이 돋았다.
“노비는 목욕재계하고 이 옷을 입으라.”
욕탕 입구에 놓인 부드러운 침의는 아름답지만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 용도가 낮에 입을만한 옷은 아니었으나 알았다 고하며 옷을 벗었다.
옷을 벗고 몸을 담그자 잔뜩 굳어있던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비누와 해면으로 피부를 문지르자 거칠게 일어났던 피부가 부드럽고 깨끗해졌다. 밤송이에 찔린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목욕은 좋았다. 향기를 머금은 물이 내 피부를 스칠 때마다 꽃잎 속에 잠겨드는 것만 같았다. 단순한 향이지만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게 무척 좋았다.
예쁜 건 좋다. 예쁜 건 언제나 좋았다. 하지만 난 예쁜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예쁜 건 언제나 남의 것이어서 바라보거나, 훔쳐보거나, 어쨌건 보기만 해야 했다. 그 부분에 대한 체념은 쉬웠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걸 미친 듯이 갈망하는 이도 있지만 내게 있어 예쁜 물건이란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 같은 것이니까. 아름답고 부럽다고는 생각해도 갖고 싶다는 욕망은 그다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이 아름다운 향기가 내 것이 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눈을 감고 향기 속에 잠들고 싶다.
하지만 내가 이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건 모두 황제를 모시기 위해서다. 찢어지고 멍들고 앓아눕기 전에 주어지는 짧은 준비과정인 것이다. 지고하신 분 앞에 더러운 것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물로 씻고 향기를 발라 그럴싸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뜻한 물속에서 긴장을 풀자 슬슬 체념이 다가왔다. 반복적인 경험이 주는 교훈 덕이리라. 나는 따뜻한 욕조에서 비척비척 기어 나왔다. 침의를 입어 몸을 가리자 기골이 장대한 환관이 업히라며 등을 내밀었다. 침의가 준비되었을 때도 그랬지만 신발도 주지 않고 업히라는 태도에 당황이 밀려들었다. 침의에 맨발이라니, 침수를 들 때에나 하는 행색이었다. 하늘이 아직 훤해 민망하고 당혹스러웠다. 물론 내가 그런 걸 따질 처지는 아니지만 황제의 행동이 이례적이었다. 황제는 해가 떠 있을 때 날 부른 적이 없었다. 다른 이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간을 골라 부르곤 했던 것이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관노는 묻지 말라. 명을 따르라.”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관노, 관노. 계속해서 지칭하는 관노란 단어에 기운이 축 빠졌다. 승은을 입는 처지지만 너는 천한 노비라고 계속해서 주의 주는 것이다. 듣기 싫었다. 그렇게 콕 찍어 지칭하지 않아도 내가 노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나는 환관의 등에 늘어지듯 몸을 업혔다. 기운이 없어 목도 겨우 껴안을 수 있었다. 부드럽고 요염한 음인이 아니라 평인이 되다 만 듯한 몸이라 꽤 무거울 텐데도 환관은 어려움 없이 날 업고 걸었다.
방 안의 따뜻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마치 별세계가 펼쳐지는 듯 요요로웠다.
신록과 영수들을 묘사한 십이 폭 족자를 시작으로 자단나무와 흑단나무가 안개의 형상으로 조각되어 침전의 양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겹겹이 드리워진 휘장은 위로 걷어놓아 하늘의 구름처럼 부드럽게 일렁였다. 기둥마다 장식된 것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다섯 줄기의 강물과 우신의 모습이었다. 강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그리고 강을 채우거나 넘치게 하는 것은 비였으므로 손이 귀한 황실에 우신의 적절한 축복이 내려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온갖 길한 형상과 축언을 도형화한 그림이 사방 귀퉁이를 빼곡히 채워 눈이 어지러웠다. 향로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침전을 채운 구름과 안개에 어우러져 무엇이 실체인지 알기 어려웠다.
일전에 보았던 친왕의 처소도 화려했으나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제의 위격이 그야말로 형상화되어 있는 침전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화려하고 위엄 있는 방 안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존귀한 것은 중앙에 앉아있는 황제였다. 금색의 침의는 삼중의 자수가 빼곡히 어우러져 움직일 때마다 색을 바꾸고, 머리 위의 금관에는 커다란 진주를 입에 문 용이 양각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어수에 든 책을 읽느라 내리뜬 눈은 일견 무심했다. 그러나 그 눈은 투명한 접시와도 같아서 담긴 감정에 따라 색을 바꾼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엎드리기 직전 힐끔 훔쳐본 용안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고귀한 얼굴 위엔 기분을 짐작할만한 표정이란 게 없어 보는 이를 불안하게 했다. 양인의 강건한 뼈대 위로 위엄이 흘렀지만 친왕보다는 조금 부드럽고 경직된 선이었다.
황제가 일찍이 내게 말을 하지 말라 명하였기에 나는 비례(非禮)인 것을 알면서도 황제를 향해 아무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관과 궁녀들 모두 그것에 익숙한 자들뿐이라 소요는 일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피칠갑이 되어 실려 나가도 물론 소란피우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라.”
낮고 부드러운 바람 뒤로 칼이 서걱 지나가는 듯한 음색이었다. 명을 받잡겠단 말도 없이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예전에 명을 받잡겠다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가 목침에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고개는 숙이고 황제의 얼굴은 보지 않는다.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황제의 표정에 걸맞는 무표정을 따라 짓는다. 긴장으로 인해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때도 있지만 오늘은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차갑기만 했다.
황제는 한 손을 들어 침전 바닥의 방석을 가리켰다. 나는 천천히 움직여 방석 위에 앉았다.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석의 솜이 내 무게에 쭈그러들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쭈그러드는 것처럼 우묵하게 눌리는 비단 방석 위에서 나는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황제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어수에 든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메마르고 삭막했다. 웅장하기까지 한 침전에 사람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근래 짐의 아우가 그대를 총애한다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목소리를 내어도 좋다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고개만 천천히 가로저었다. 황제는 서책으로 향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호부시랑과의 면담에 술 시중으로 부르고, 지난밤엔 율자를 하사했다던가.”
그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바로 끄덕였으나 황제는 서책을 읽느라 보지 못했다. 고요한 시선은 흔들리는 일 없이 글을 쫓을 뿐이었다.
황제가 혼잣말을 하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황제는 혼잣말이 많아졌다. 술을 마시며 주정부리듯 혼자 떠들다가 내게 술잔을 내던지는 식으로 폭력은 시작된다. 주안상은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오늘은 서책을 내던지지 않을까. 단단한 도자나 술잔보다는 그래도 서책이 덜 아플 터였다. 운이 없다면 종이에 베이겠지만 머리가 깨지고 피멍이 들진 않겠지.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황제는 내게 책을 내던지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져서 슬쩍 황제를 보자 시선이 부딪쳤다. 낭패였다.
“…….”
“너는 짐의 것이 아니냐? 짐이 직접 돈을 주어 산 물건이니 다른 이가 손을 대어선 안 될 것인데.”
숨이 턱 막혀왔다. 날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드물게도 혼란스러워졌다. 황제는 놀랍게도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날 꿇려놓고 말을 걸면서도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때리는 것도 아니고 범하는 것도 아니니 확실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날 바라보면서도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뭉스런 표정에 나는 눈꺼풀을 유순히 내리깔았다. 황제의 이런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의 동요를 드러내는 건 한마디면 족하였을 텐데, 황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친왕은 변덕스런 자라 결코 널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시선이 따라가듯 끄덕이는 내 얼굴에 꽂혔다.
“네 이전에도 몇 명이나 그의 장난질에 목숨을 잃었으니, 경거망동하여 날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제는 침상에서 내려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방석이 찌그러질 때와 비슷한 소리가 황제의 옷자락에서 났다. 작은 짐승을 어루만지듯 어수가 조심스레 내 턱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은 목덜미로 기어들어 와 피부 위를 슬쩍 긁더니 옷자락을 잡아당겨 벌렸다.
“……이건 뭐지?”
황제의 얼굴이 무섭도록 험악해졌다. 그의 시선이 밤송이에 찔린 상처를 따라 움직였다. 얇은 침의에는 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몸을 씻을 때까지만 해도 얼추 아물어 있는 듯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피가 옷에 묻어있었다. 황제의 시커먼 눈동자가 벌레의 알 껍질마냥 번들거렸다.
“대답해. 이건 뭐지? 말해도 좋…. 아니 됐다. 밖에 들라!”
황제의 고함에 태감이 허겁지겁 침전에 들었다.
“삼가 명을 받드옵니다.”
“무슨 일로 저자의 몸에서 피가 나는 것이냐?”
내 침의에 배어 나온 붉은 핏자국을 본 태감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침전의 내관들은 내 몸의 찔린 상처들을 알아챘지만 워낙에 그런 모습이 익숙한 탓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그것을 황제가 따져 묻자 심히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저것은, 송구하옵니다. 율방에 찔려 난 상처이옵니다.”
“율방? 밤나무 밑으로 떠밀리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것이…. 친왕이 행차하실 때에 마침 밤나무 밑에 있어 율방 위에 엎드렸다 하옵니다.”
태감의 말을 들은 황제는 숨소리도 없이 침묵했다. 그 굳은 얼굴을 나는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로선 어심을 가늠할 수 없었다. 황제는 이마를 구기고는 나와 태감 사이의 허공으로 시선을 줬다. 이를 악물어 불거진 턱이 곧 힘을 잃고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아. 친왕이 율자를 내렸다더니 그러한 연유였는가.”
하지만 상해를 입혔다 하여 배상하는 것은 그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황제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황제와의 대화는 늘상 이런 식이었다. 황제는 내게 대답을 원치 않는 질문을 하고 답이 없는 질문에 혼자서 결론을 내린다. 이 침전 안에서 내 역할은 말 그대로 인형이었다. 겉모습은 인간과 비슷하나 속에는 허연 목화솜만 가득 든 인형. 밤송이에 찔린다 하여 피가 나는 인형은 없기에 황제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나는 황제가 돈을 주고 산 그의 물건이기 때문이리라.
손바닥과 정강이로 이어지는 상처들을 황제의 손끝이 툭툭 건드리며 문질렀다. 뾰족한 가시에 찔린 것이라 반점처럼 늘어진 상처들은 하얗고 아름다운 어수에 피를 묻혔다.
“그가 널 형수라 부른다지? 내 체향이 나지 않으면 그러한 농은 끝날 터인데. 어쩔까?”
무엇이 우스운지 황제는 작게 웃었다. 반면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제는 놀란 새를 달래듯 손으로 머리며 뺨을 쓰다듬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몸을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숨소리는 차분했으나 호랑이의 아가리에 물린 듯 섬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형수라 불렸으니 황제는 분명 진노했을 것인데 지금 그는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무를 보던 중 잠깐 쉬는 것이었는지 황제는 의복을 정제하고 있었다. 머리의 옥관에서 늘어진 주렴이 흔들리며 차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차갑고도 간지러운 소리였다.
얇은 침의 사이로 파고든 손이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살갗을 쓸었다. 부러 씻기고 약까지 먹였으니 친왕과의 일이나 묻자고 부른 건 아닐 터였다. 예상했던 손길이었으나 창문의 꽃살을 통해 들어온 대낮의 햇빛이 버거웠다. 정무 중에 잠깐 쉬던 황제를 음심에 빠뜨려 정사를 치르게 하는 건 지나치게 방종한 게 아닐까? 상황만 보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부가 따로 없지 않은가.
목덜미를 감싸는 황제의 손아귀에 몸이 절로 소스라쳤다. 되도록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얌전히 있고 싶었으나 오랜 폭력에 길들여진 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 마치 사갈이 닿은 듯 식은땀이 흘렀다. 황제의 손은 부드럽기만 한데 난 숨이 턱턱 막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조이는 듯 답답해져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황제 앞에 엎드려 빌고 싶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잘못했다 고하고 살려 달라 외치고 싶었다. 물론 나는 황제 앞에서 말을 해선 안 된다고 명받았으므로 그러한 외침은 마음속에서만 일었다.
“황족 중에 자식을 가진 이가 없으니 대소신료 모두가 두려워한다. 시정의 무지렁이들은 나와 친왕의 사이가 좋지 않다 떠들고 당장이라도 흉한 일들이 벌어질 것처럼 입을 놀리지.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제는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침묵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외로운 인간이 짐승을 가지고 놀며 말을 거는 모습이 지금의 광경과 같지 않을까? 황제는 이런저런 말을 내게 하고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일 터였다. 내가 폐궁의 연못에 노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말을 거는 것처럼.
“동쪽의 대로에 대한 얘길 나누었다지?”
질문의 형식을 띠었으나 이 역시 대답을 요하는 말은 아니었다. 황제는 친왕과 호부시랑 사이의 얘길 꺼내며 사납게 웃었다.
“호부시랑이 동쪽의 땅을 잔뜩 사들이며 공들인단 얘기가 진작부터 들려왔지. 침략과 약탈로 피폐한 동부에서 고리를 하고 땅을 빼앗아 배를 불리니 그 원성이 자자하다지? 그날 내 동생에게 길을 내어달라 청탁하다가 크게 망신을 당했다면서?”
황제는 대체 내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가?
나는 벙어리가 아니다. 황제의 눈앞에서 벗어나면 얼마든지 말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다. 인형 취급을 하며 다루다 보니 정말로 인형인 줄 아는 것인가? 궁 안의 호부시랑에게 쪽지 한 장 건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황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고 있다고 과시하고자 함이라면, 과시할 대상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옥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경쟁자를 감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친왕의 곁에 황제의 세작 한둘쯤은 붙어있는 게 당연하리라.
황제의 말보다는 손이 더 신경 쓰였다. 쇄골을 스치며 내려온 손가락이 유륜을 꼬집듯 희롱하며 만지작거렸다. 지필묵으로 인해 단단하게 박힌 군살이 연약한 살을 스치고 비비는 것에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단단한 이가 귓불을 잘근거리며 씹고 질척한 혀가 귓바퀴를 핥아 내렸다. 어느덧 내 머릿속은 젖은 소리로 가득해졌다.
“아까는 그렇게나 떨더니. 지금은 얌전한 새 같구나.”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니 시야가 금색으로 가득해 어딜 보나 눈이 부셨다. 황제는 날 반쯤 끌어안은 채로 희롱했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황제의 품에 반쯤 안겨있는 내 모양새가 문득 꼴사납고 천박하게 느껴졌다. 아까는 숨도 쉬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달뜬 숨을 내뱉고 있다니, 마치 음란한 창부가 된 것 같았다.
침전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내가 안겨있는 것이 누구인지 깨닫자 목덜미며 귓가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이 흉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날아올 것 같던 폭력은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께를 간지럽게 하는 주렴 소리와 익숙한 양인의 체향만이 꿈처럼 달콤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 냄새가 나니 흥이 돋질 않는군.”
황제가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 손으로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면서 다른 이가 낸 상처에 예민하게 구는 것인가? 어차피 일각 정도만 지나도 내 몸은 온통 멍들고 터져서 피 냄새로 진동할 터인데? 황제는 쓰다듬던 짐승을 내려놓듯 날 놓고 일어섰다. 방금 전 황제가 상처의 연유를 묻고자 불렀던 환관이 눈치 좋게 다가와 허리 숙였다.
“중한 날에 오수(午睡)가 길어지면 안 되지. 정무를 재개하겠다.”
“알리겠나이다. 폐하.”
“물러가라. 상처를 치료할 의관을 보내줄 것이니 정양(靜養)하도록.”
나는 흐트러진 침의를 추스르며 명을 받들겠노라 엎드려 절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난 황제가 구겨진 옷을 바닥으로 떨구고 내 피가 묻은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치 빠르게 다가간 환관이 수반(手盤)을 내밀자 황제는 매우 느릿한 속도로 손을 담갔다. 갈색으로 말라붙은 피가 금세 풀어져 말끔해졌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황제와 만난 뒤 멀쩡하게 걸어 나간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뒷걸음질 쳐 물러 나오자 시립해 있던 내관들이 당황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들도 내가 이토록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게 신기한 것인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침전에서 일하는 내관들답게 곧 침착한 표정을 지었으나 오늘 일이 궁에 소문이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왔던 모습 그대로 환관의 등에 업혀 처소로 옮겨졌다. 어젯밤의 잔열이 남아있는 방 안에서 달콤한 밤 냄새를 맡으며 앉아 의관을 기다렸다. 창상에 바르는 약을 모두 썼으니 이번에 의관이 오면 다시 한 병 얻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았던 의관은 밤이 늦도록 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기 전 황궁에 큰일이 일어나 아래부터 위까지 발칵 뒤집힌 탓이었다.
호부시랑 이원로가 황궁의 안뜰에서 목에 칼을 맞고 죽었다. 휴식을 끝내고 정무를 속행한 황제가 동부대로에 관한 일을 얘기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밤송이에 찔린 상처는 딱히 치료할만한 것도 못 되었다. 황제의 앞에서 물러나 만 하루가 지나고서야 나타난 권 의관은 건성으로 약을 바르며 간밤의 일을 말해주었다.
“황제께서 갑자기 대소신료들을 모아 말씀하시지 않겠나.”
이야기는 이러했다.
「동평왕의 공로로 요잔족이 정벌되어 어지럽던 땅이 평온해지고 곡식을 기르며 약탈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작황이 좋아질 것이니 수도로 이어지는 큰길을 내어 세곡을 운반함이 마땅할 것임을 토로하는 상서가 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약탈과 군역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겠는가? 요잔국 너머로는 마땅히 교류할만한 나라가 없어 무역도 원활치 않으며 세곡선은 강을 통해 이동하니 행정을 처리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다. 백성을 평온케 하고자 동평왕이 짐의 명을 받아 움직인 것인데 급하지도 않은 길을 내느라 백성들을 공사에 동원해선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성벽을 올리고 무너진 둑과 다리를 정비하여 다음 해를 계획하는 것이 중하다.」
그러자 호부시랑이 반대하여 말하길,
「대로라 함은 물자의 이동보다는 군의 이동에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요잔국이 잠잠하나 언제 그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니 길을 정비하여 백성을 안심케 하시고 국경을 보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동평왕의 장괘에 의하면 요잔국은 최소 십 년은 지나야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요잔국 국경의 세금을 감하고 주변 4개 현의 세금으로 방비하면 그로써 충분하다. 동평왕의 군대는 이미 국경에 가 있으니 다시 돌아올 것이 아니면 길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자 도열해있던 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지 않겠나. 마치 친왕의 역모를 돕기 위해 길을 내자 한 것처럼 몰아가시니 호부시랑도 시퍼렇게 질려버렸지. 그것만으로도 간이 떨어질 일인데 갑자기 황제께서 어제 호부시랑과 친왕이 술자리를 가졌다더니 뭔가 말이라도 오간 것이냐며 이원로 나리를 추궁하시는 게 아니겠어?”
“하나 궁 안에서 살해당하다니요. 전혀 다른 일 같습니다.”
권 의관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친왕이 입을 막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야.”
“그건…. 좀 멀리 나간 게 아닐는지요.”
“동평왕이신 친왕께선 아직 자식이 없어 황궁 안에 기거하시지 않나. 안뜰로 불러내서 콱! 한 게 아니냐는 거지.”
친왕과 호부시랑 사이에 오갔던 얘기를 들은 나로서는 황망하기 그지없는 얘기였다. 호부시랑과 친왕 사이에 입을 막을만한 얘기는 오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좋은 성격은 아닌 듯했습니다.”
“응? 으응?”
“그 비꼬이고 변덕스런 성미에 뭐가 맘에 안 든다 해도 설마 단칼에 죽이겠습니까? 남을 괴롭히는 데에는 끈기 있는 성미로 보였습니다.”
권 의관이 입을 떡 벌리고 날 쳐다보았다. 그래도 치료한답시고 건성으로 들고 있던 약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드, 드디어 실성이라도 한 겐가? 지금 무슨 말을.”
“술자리에 있던 일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친왕께서 호부시랑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일단 죽고 싶은 마음부터 들게 만드셨겠죠.”
이 부분은 아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술자리에서 보인 친왕의 태도는 우호적이라 보기 힘든 것이었고 호부시랑 또한 당황하고 있었다. 차근차근 피를 말리며 간을 보다가 아주 망하게 했을 것이다. 새 약솜을 꺼내는 권 의관의 손이 떨리며 약병에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자네. 새, 생각보다 대담하구만?”
“제게 그걸 묻고자 하셨던 게 아닙니까? 황제께서 친왕과 호부시랑의 술자리까지 언급하셨다면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도 다 알려졌겠죠.”
권 의관이 지금 내 앞에서 친왕이며 황제에 대한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풀어내는 건 그에게도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호부시랑과 친왕의 술자리에 불려 갔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그 술자리 이후 친왕이 내게 밤이며 화로를 주었고 그 일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소문이 어떻게 났겠는가? 그 술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를 모두 궁금해하던 중 권 의관이 날 치료하러 간다니 물어보라 등을 떠밀었겠지.
“친왕께 술을 따르러 갔을 때는 이미 자리가 파한 사태였습니다. 호부시랑은 얼마 안 되어 자리를 떴고 친왕께선 제게 짓궂은 농을 던지셨고요. 호부시랑의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는 것이 말씀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심술궂게 굴며 술을 권하던 친왕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는 하지만 잘 보상해주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그 마음은 황제에게 불려 간 뒤 사라지고 말았다. 황제는 친왕이 보상을 했다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다. 아마 황제의 의구심이 맞을 것이다. 친왕은 황제가 내게 어찌 대할지 궁금해서 나무를 자르는 등의 소란을 벌인 것이다. 그것이 날 더 곤란하게 만들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엊그제 먹은 군밤의 달콤함이 떠오르는 한편 황제와 만나기 전 들이켠 탕약의 맛 또한 떠올라 입 안이 썼다.
“호부시랑이 황궁 안에서 피습되다니. 큰일이었겠습니다.”
“아아. 그, 황궁 안에서 대신이 살해당한 것이니 말이지. 시신이 발견된 뒤부터 발칵 뒤집혀 지금도 비상이야. 황제께서 진노하시어 바로 부검을 명하셨는데 급소가 깨끗하게 찔려 있어 고수의 소행인 듯하다더군. 손속이 보통 깨끗한 것이 아니라 황궁에 살수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을 정도네.”
황궁 안에 살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경계가 가장 삼엄한 곳이 황궁이었다. 물 긷는 하인 한 명 허투루 쓰지 않았다. 황궁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신원이 확실해서 새로운 얼굴이 비집고 들어오면 반드시 눈에 띄었다. 전문적인 살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다. 황궁처럼 인간관계가 협소한 곳에서 사람을 바꿔치기하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시신을 직접 보신 겁니까?”
“얘기만 들었지. 부검을 하는 자들은 따로 있어. 내가 낄 자리가 아냐. 그래도 듣는 건 있지.”
권 의관은 흠칫 몸을 떨며 주변을 살폈다. 황제와 친왕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행동을 했다. 만약 감시하는 이가 있다면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주변을 경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한 듯했다.
“호부시랑이 동부의 땅을 어마하게 사들였다는 얘기는 유명하거든. 그에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달라붙은 이들의 수가 기백은 넘을 것이네. 동평왕에게도 금괴가 수백 관은 들어갔다는 소문이야. 그런데 일은 엎어지고 호부시랑은 추궁당하게 생겼지, 동평왕 본인은 역모로 몰리게 되지 않았나.”
호부시랑에 대한 이야기는 황제에게 직접 들은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에게 불려 가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입 밖에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몸과 마음은 문란하더라도 입만은 정숙해야 하는 것이 접객소의 노예였다. 그렇게 잘 지켜지는 규칙은 아니었으나 상대가 황제와 친왕쯤 되면 접객소의 노예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다.
친왕 앞에서 얼굴을 굳히던 호부시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짙은 야심과 욕심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명을 달리하리라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황궁에서 칼을 맞다니 참으로 허무한 끝이 아닐 수 없었다.
“돈 좀 벌어보려다 역모로 몰리게 되었으니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간담이 서늘하지 않았겠는가? 급한 나머지 호부시랑을 죽여 입을 막은 게 아니냐는 거지.”
“그렇습니까. 전 그런 정치적인 건 잘 모릅니다만.”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왔다고는 하나 지나칠 정도로 입을 놀리는 권 의관의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날 업신여기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쓸데없는 말도 많고 태도도 어쩐지 부드러웠다.
“폐하께 불려 갔다 들어서 엉망일 줄 알았는데, 폐하께서 평소와는 다른 연유로 부르셨는가 봐?”
아. 이게 본론이었군. 의관의 눈초리가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상처를 누르던 약솜도 어쩐지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황제가 날 때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사소한 대접이 이렇게 바뀌었다. 의관은 샐샐 웃으며 내 앞에 약병들을 늘어놓았다.
“이것과 이것. 요건 흉터가 남지 않게 하는 연고네. 상처에 매일 발라야 하니 내 저녁마다 찾아오지.”
“…그러실 것 없습니다만. 바쁘신 게 아닌지요?”
“무슨 소리! 그대를 치료하는 게 내 직무 아닌가.”
의관의 직무란 황궁 안의 병을 다스리는 것이지 두들겨 맞은 노예의 뒤처리가 아니라고 말하던 자의 언사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온 조정이 난리라서 사실 여기 오는 짬을 내기도 쉽지 않았네. 황제께서 의관을 보내겠노라 말씀하셨다면서?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이리 시간을 내지 못했을 것이야.”
황궁에 들어왔던 이들 모두에게 금족령이 내려졌노라 의관은 말했다. 황궁 안에 있는 자가 호부시랑을 해한 것이니 검문 없이는 내보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검문에 걸릴 거라면 이토록 대담한 짓을 저지르지도 못했으리라. 권 의관은 아직 흉기도 찾지 못했다며 아직 퇴궐하지 못한 대신들이 겁에 질려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볼만하더라고 얘기해주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딱 한 번이었다. 맞지 않고 제정신으로 걸어 나온 단 한 번.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태도가 바뀐다. 즐거워해야겠지만 내게 있어선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날 보호해줄 사람도 권위도, 돈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흥미는 개구리에게 던져지는 돌과 같은 것이다.
“친왕을 뵈었을 때 고두(叩頭)하였는데 하필 밤나무 아래였던지라 상해를 입었습니다. 감사하옵게도 친왕께서 보상을 해주셨는데, 그에 대해 묻고자 부른 것이었습니다.”
“아아. 이 상처가 그래서 생긴 것이었나.”
의관이 내 상처를 새삼 다시 보며 말했다.
“궁 안에 밤나무라니 이상한 일이로군. 밖에서 씨라도 날아온 모양이지?”
밤처럼 무거운 게 날아와서 싹틀 리가 있나.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권 의관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그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툭 내뱉었다.
“체향을 확인하고자 부르신 걸 수도 있겠군.”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황제가 그런 걸 신경 쓸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옅다고는 하지만 황제의 체향이 남아있는데 친왕이 건드릴 거라 의심했단 말인가? 아니. 그 이전에 누군가 날 건드리는 것에 대해 신경 쓴다고?
“…폐하의 의중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황제는 내게 친왕의 체향이 나는지 확인하고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상처가 난 것을 보고 표정이 굳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내 것이니 배신하지 말라는 말도 했지. 시험이었던 것일까? 황제가 아무리 험악하게 대해도 나는 다른 이에게 마음도 몸도 줘선 안 된다는? 뭐 이런 억지가 있나 싶다가도 내게 장례 치를 돈을 던져주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라 이를 악물었다. 그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대로 해야 했다. 그것이 내 일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무슨 심경인가?”
“…심경이라뇨?”
“본래 말을 거의 하지 않았잖은가? 오늘은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는 듯하여.”
“아무도 제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대화라는 걸 나눌 일이 없었다. 권 의관은 내 대답에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도 내게 말을 거는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었나? 대화라는 건 교류가 필요한 자들 사이에나 오가는 것이고 난 그다지 교류가 필요한 자가 아니다. 황제에게 맞아서 온몸이 멍든 채 돌아다니는 성노와 무슨 얘기를 나누겠는가?
“함부로 윗전들의 얘길 흘렸다간 혀가 잘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도 있지만요.”
“그런 자가 친왕에 대해 그리 말한단 말인가?”
“친왕께서 심술궂으신 건 유명한 듯하여….”
“그건…, 그건 그렇네만.”
권 의관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조심해야 될 거야. 호부시랑이 뭘 믿고 방자하게 굴었겠나? 부친의 소식을 듣고 희빈께서 혼절하셨네. 덕분에 내의원이 아주 발칵 뒤집혔어. 아버지가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제정신이 아닐 터인데, 여기저기 불똥이 튈 것이야.”
“희빈께서 호부시랑의 여식이었습니까?”
“뭐! 몰랐나?!”
“예.”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비빈이 몇 명 있고 그들의 이름이 어떠한지는 알지만 그녀들이 어느 집안의 여식이고 어떤 뒷배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선 무지했다. 접객소에서 대강의 교육은 받았으나 건성으로 듣고 흘린 탓이었다. 황제가 총애하는 이들에 대해 알아봤자 내 처지와 비교되어 비참해질 뿐이므로 부러 멀리하기도 했다.
희빈은 향과 미색이 훌륭한 음인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황후의 자리에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아직 황자를 생산하지 못해 비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자식이 없는 자는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황제의 친모인 양전 태후도 황자를 생산하고서야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친왕이 호부시랑을 향해 희빈 운운했던 것은 그의 딸을 조롱하기 위함이었구나. 그저 날 모욕하고 호부시랑을 놀라게 하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제법 뼈가 있는 얘기였다.
“아버지를 닮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미색이 출중했습니다.”
호부시랑은 미남이라 보기는 힘든 얼굴이었으니 분명 어머니를 닮은 것이리라. 태연한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자 권 의관이 혀를 찼다.
“태평한 소리를 하는군. 그럴 때인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
정말로 의문스러워서 권 의관을 쳐다보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버지가 살해당했는데 가만히 있겠는가?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려 음으로 양으로 난리를 칠 것인데. 아마 조만간 얼굴을 보자 하실 걸세.”
권 의관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저 당혹스러워 고개만 갸웃거렸다. 희빈은 음인 여성이었으므로 남성인 나와는 내외하는 것이 법도였다. 황제의 비빈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이로서 내명부를 다스리고 있는데, 나처럼 천한 이와 자리를 함께하여 이름을 더럽히려 할까?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벌어지고 말았다. 권 의관이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자마자 정국당에서 궁인이 찾아온 것이다. 정국당은 희빈의 처소였다.
* * *
정국당(貞菊堂)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희빈의 궁은 국화로 가득했다. 국화가 노란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여러 색을 지니고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각색의 국화들이 무게 있게 기울어졌다 몸을 바로 세웠다. 곱게 든 단풍들은 섬세한 잎사귀를 뽐내며 부드럽게 떨어졌다. 같은 가을 풍경인데도 이토록이나 다를 수 있을까? 부귀와 권세는 계절의 경치조차 바꾸는구나.
정원에는 제법 큰 연못도 있었다. 연꽃이 피어있는 수면으로 단풍이 점점이 떨어지는 가운데 아름다운 잉어가 등 비늘을 뽐내며 파도를 일으켰다. 참으로 절경이었다. 하염없이 멈춰 서서 구경하고 싶었으나 날 안내하는 이는 발걸음이 늦춰지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국화향 가득한 정원을 지나 도착한 희빈의 처소에선 짙은 한약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쓰러졌다니 약을 달이고 뜸을 들이느라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려나? 당연한 일이지만 비빈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가 난폭한 성향을 보이는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신분도 천한 주제에 황제의 체향을 두르고 다니니 보통 신경에 거슬리는 게 아닐 것이다. 비빈들이 직접 손을 쓰지 않는 것은 내 신분이 너무 천하기 때문이었다. 상대하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셈인 데다 늘상 멍들어 있는 이를 괴롭힌다는 악평까지 따라오니 괴롭혀도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하자만 아버지를 여의게 된 희빈이 그런 체면이나 악평을 따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문밖에서 한 식경 이상을 기다린 뒤에야 들어오라는 허락이 났다. 음인의 미려한 향이 가득한 방에 들어서자 몸이 절로 위축되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음인의 향이로구나. 뒤늦게 발현하여 기억도 잃고 향도 어중간한 나는 그야말로 반푼이에 불과하단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침상에 반쯤 몸을 기댄 희빈의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새하얗게 질려서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엊그제 황제께서 부르셨다니 체향이 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겠구나.”
경빈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내 몸의 멍을 찾아 헤맸다. 황제의 침전에서 멀쩡히 걸어 나왔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씁쓸함과 동시에 위장이 뒤틀리는 듯 아파 왔다. 확인을 마친 희빈이 심기를 다스리려는 듯 말없이 차만 몇 잔을 들이켰다.
“본궁의 심기가 매우 상해 예의를 차릴 수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내 부친이신 이원로 대감께서 친왕과 술자리를 가지셨다. 그때 네가 불려 가 시중을 들었다는데, 맞느냐?”
“네. 마마.”
나는 그녀 앞에 바짝 엎드려 대답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느냐?”
난 고개를 슬쩍 들어 주변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궁인들의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희빈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사실 멍청한 것인가? 아니면 부러 함정을 파는 것인가? 내가 음인이라고는 해도 남성이라 희빈과 단둘이 밀담을 나눌 수는 없으나 이처럼 보란 듯이 사람들로 둘러버리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인은 접객소에 속한지라 폐하의 명이 없고서는 들은 얘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무엄하다! 지금 어느 분이 하문한다고!”
날 데려왔던 중년의 궁인이 발끈하며 소리 질렀다. 내 뺨을 치고자 손까지 쳐들었으나 내리치진 못했다. 황제의 체향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리는 궁인 뒤에서 희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선 황제의 체향이 나지 않았다. 호부시랑을 향한 친왕의 조롱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희빈이 묻는 것에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접객소의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접객을 하며 듣게 된 것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했다. 그 규칙을 어기면 혀가 잘리고 곤장을 맞았다. 대개 죽었고 살아남더라도 궁 밖으로 내쳐져 얼마 살지 못했다. 그렇게 될 순 없었다.
나는 머리를 잔뜩 조아리고 덜덜 떨었다. 황제의 체향이 지켜준다고는 해도 신분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녀가 날 죽이고자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날 지켜주지 않는다. 이렇게 끌려와 수모당해도 누군가가 구해주러 오는 일 따윈 없다. 어떻게든 몸을 조아려 불쌍하게 보이고 동정을 얻어 내 힘으로 풀려나야만 했다.
“용서하십시오, 마마. 소, 소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접객소의 규칙이 그러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윗전이 묻는 것이다. 대답해라!”
“친왕 전하와 대신 사이에 오간 얘기를 저 같은 자가 어찌 떠들고 다니겠습니까? 용서하십시오!”
희빈은 내명부를 다스리는 비빈이고 나는 접객소에 속한 노예이니 사실 그녀가 날 불러 호통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희빈은 명백히 이성을 잃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내 아비가 이 황궁에서 흉수에게 살해당했다! 황제께서 부검을 명하시어 그 시신조차 온전치 못한데! 네놈은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냐? 말할 때까지 맞아볼 터이냐?!”
희빈의 목소리는 깊은 슬픔과 초조함으로 얼룩져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은 표독스럽게 일그러졌지만 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황궁에서 아비가 살해당했으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시신은 수습조차 하지 못했다. 부검을 위해 파헤쳐진 시신은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 염한다 해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할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비빈의 자리에 올라 무서울 게 없었는데, 이토록 허망하고 무기력한 기분을 언제 느껴 보았겠는가?
“삼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지만 황제께서 범인을 찾으라 명하셨으니 곧 관리가 와서 취조할 것입니다. 그때엔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돌덩이 같은 것이 날아와 머리를 쳤다. 시야가 새까맣게 변하고 충격에 몸이 고꾸라졌다.
무언가가 바닥을 또르르르 구르는 소리에 곧 그것이 찻잔임을 알아차렸다. 희빈이 이성을 잃고 내던진 찻잔이 내 이마를 때리고 떨어진 것이다. 얻어맞은 이마에서 뜨거운 피가 샘처럼 흘러나왔다.
“지금 말하라지 않느냐! 네놈이 지금 감히 본궁을 능멸하는 것이냐?!”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나는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피로 미끈해진 바닥 위에 다시금 조아렸다.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일까? 이마에서 쏟아지는 것이 피가 아니라 내 생명인 듯 느껴졌다. 두려움이 아니라 추위 때문에 몸이 떨렸다. 손끝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녀의 슬픔은 이해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그녀는 까마득한 상전이었으나 내 주인은 아니었다.
“…저도 부모를 잃고 장사를 지내기 위해 제 몸을 팔았습니다. 그것을 황제께서 가련하게 생각하여 사주셨습니다. 저는 그러한 연유로 이 황궁에 있는 것입니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바닥을 붉게 적셨다. 개의치 않고 고개 숙여 피 묻은 이마를 바닥에 문댔다. 눈으로 흘러내린 피가 눈썹에 엉겨 붙어 앞을 가렸다. 황제가 때리지 않아도 이렇게 엉망이 되니 내 팔자가 그냥 얻어맞을 팔자인가 싶어 자조가 흘러나왔다.
“제 부모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신 분을 배신할 순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마마.”
희빈은 그야말로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한참을 넋 놓고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우는 모습조차 아름답구나. 나는 피에 젖어 그 모습을 기운 없이 바라보았다.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니 기운이 없고 어지러워 버티기 힘들었다.
“너처럼 천한 놈이 부모를 잃은 것과 본궁의 처지를 감히 비교하는 것이냐!”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기운을 잃은 듯했던 눈빛에 독기가 어리고 잠시 주춤했던 것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는 더욱 앙칼져졌다.
“천한 노예가 감히!! 지존의 체향을 둘렀다 하여 감히 본궁을 같은 처지에 놓고 능멸해?!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게구나!”
같은 처지라면 좋을 텐데. 같은 처지라면 내가 지금 여기 꿇어 엎드려 피를 흘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황제의 체향을 풍기는 총비가 어찌 다른 비빈에게 수모를 당하겠는가?
분노한 희빈이 뭐라 계속 떠들었지만 말을 이해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내 몸에 쏟아지고 있는 다른 폭력들도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두꺼운 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피가 많이 흘러서 감각이 둔해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머리에선 피가 많이 나니 이대로 계속 버틴다면 피를 모두 쏟고 죽게 되리라. 살고 싶다면 희빈에게 빌며 애원해야 하지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한껏 웅크리며 견디는 게 최선이었다. 흐릿하게 치켜뜬 시야 가득 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가 들어왔다.
이대로 죽는다고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실혈로 인해 정신이며 감각 모두가 무뎌져서 추위만이 날카롭고 고통스레 느껴졌다. 그다지 괴롭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는 복수를 해 줄까? 황제는 자신의 총비가 나를 죽인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희빈을 칭찬할지도 모른다. 버릇없는 노예를 죽였다니 잘한 일이라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꾸하더니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이냐?!”
희빈의 고함에 심복 중 한 명이 내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거친 움직임 때문에 이마에서 흐른 피가 포물선을 그리며 앞으로 튀었다. 기이할 정도로 천천히 흐르는 피의 흐름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은 피의 느린 움직임에 마음 한구석이 자극되었다.
화전민이 되기 전 나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었다고 아버지가 말해주었다. 발현 전까지만 해도 산주인을 잡을 정도였으나 음인이 되면서 기술도 체력도 잃어버려 쓸모없게 되었다고. 참 아까운 일이라고 한탄하곤 했다. 그래서인가. 발현 전의 과거는 흐릿했지만 가끔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피를 보는 것에 익숙했고 다쳤을 때의 내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다.
살심이 들끓었다.
그냥 다 죽여버릴까? 희빈과 주변의 궁인들 모두 방심하고 있었다. 달려나가 희빈의 목에 칼을 꽂으면 가관이겠지. 내가 희빈을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면 황제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당황하며 비통해할까? 분노할까? 아니면 무표정한 얼굴로 알았다 대답할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와 목을 쿡쿡 울리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 실성했나 봅니다. 이놈이.”
피 때문에 시야가 붉었다. 하지만 붉은 시야 속에서도 희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롱당했다는 기분에 일을 저지르긴 했으나 막상 내가 피를 흘리고 이상한 행동을 하자 겁이 난 것 같았다. 뒷걸음질 치는 희빈의 급소가 어디인지 조심스레 따지고 있자니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새하얘졌다. 어쩌면 그녀는 내 살기를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겁이 났거나.
권세 있던 친가가 몰락했으니 이제 믿을 거라곤 황제의 애정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몸에서는 황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반면 내 몸에선 황제의 체향이 잔뜩 묻어 나왔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노예라지만 지금과 같은 사태는 그녀에게도 분명 부담스런 상황일 터이다.
참으로 궁금했다.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확신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나를 향한 황제의 미움조차 확신할 수 없는데 애정이라는 것은 미움보다 더 확신하기 쉬운 감정인가?
겁먹은 듯 질려 있던 희빈의 얼굴에 다시금 독기가 흘렀다. 자존심을 크게 상해 분노한 음인의 체향이 넘실거렸다. 음인의 향이라는 것은 극단적인 감정을 품고 흐를 때에도 다른 이에게 별 해를 끼치지 못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뿐만으로도 위압감을 풍기는 양인들의 체향과는 분명 달랐다.
“저놈을 가둬라. 일단 의관을 보내 살려둬라. 며칠이고 시간을 들여 취조할 것이니!”
“마마. 접객소에 속한 자를 후궁에 둘 순 없습니다.”
희빈의 곁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측근이 조심스레 충고했다. 외간남자를 후궁 안에 두는 건 확실히 안 될 일이었다. 희빈에게도 적이 많았다. 부친을 잃고 잠시 날뛴 것은 용인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접객소에 속한 이를 자신의 궁에 며칠이고 두는 건 추한 소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분한 듯 입술을 짓씹는 희빈의 눈치를 보며 궁인이 말을 이었다.
“일단 접객소의 징벌실에 넣어두시지요. 귀하신 몸이시니 그쪽으로 직접 발걸음 하실 순 없겠으나 사람을 시켜 고신하면 될 일입니다. 그것이 체통에도 더 맞을 것이구요.”
“하지만.”
“저런 놈과 이름이 함께 오르내리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나는 키득거리는 것을 멈추고 몸을 늘어뜨렸다. 흐르는 피를 보고 치솟은 살의 때문인가, 둔해졌던 신경이 날카롭고 선명해졌다. 오가는 이야기며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모두 들려 눈을 감고도 궁 안의 풍경을 그릴 수 있을 듯했다. 사냥꾼이었던 과거에 갈고닦았던 능력 중 하나이리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게 이러한 현상을 말하는 것인가 싶다.
“마지막 기회다. 그 날 술자리에서 아버님과 친왕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해라.”
희빈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희빈에게 얘기를 하면 그 순간 궁 안에 소문이 파다해질 것이다. 내가 규칙을 어긴 것을 접객소의 관리들은 모른 척 넘어가더라도 친왕은 반드시 걸고넘어지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다.
권 의관에게도 말했듯이 친왕은 마음에 거슬리는 자를 절대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희빈이 날 괴롭히는 것은 무섭지만 견딜 만했다. 단순하고 포악하여 사람을 말려 죽이지는 못할 성격이었다. 하지만 친왕이 날 괴롭히기로 마음먹는다면 내가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수모를 겪는다 해도 황제는 구해주지 않을 테니 나로선 그나마 덜 무서운 쪽을 선택할 수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친왕이 더 무서웠다. 희빈과는 동귀어진하고자 삿된 마음을 품고 노려볼 수 있으나 친왕에게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전장을 지배하던 극양인을 무슨 수로 내가 해하겠는가?
분노한 희빈의 수하들이 나를 다시 패기 시작했다. 두통 가득한 머리가 나무 바닥에 쿵쿵 찧어 피가 지저분하게 튀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덕에 통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고 안타깝다 생각하지 않았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눈물이었다.
“용서, 용서하십시오. 소인은 그저.”
뒤늦게 애원해보았으나 몸 위로 떨어지는 폭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징벌실에 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누군가가 말리는 소리와 함께 힘을 잃은 몸이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가을의 하늘은 어찌 이리도 푸르고 아름다운가? 속눈썹 사이로 파고드는 청량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정신을 차리자 눈앞이 시커멨다. 고통과 피곤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목소리도 잃고 시력도 청각도 모두 잃어 진짜 인형이 될 수도 있겠다. 기가 막혀 웃으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료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이 꼴이라니. 이러다 나랑 동숙(同宿)이라도 하겠네그려.”
권 의관의 목소리였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두툼한 손으로 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시력을 잃은 게 아니라 피를 멈추기 위해 두꺼운 천이 덮여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잘 맞았네. 어디 한 곳 부러진 곳도 없고 내장도 상하지 않았어. 아주 맞는 데 이골이 났구만?”
“……제 일이니까요.”
잘 맞았다는 말에는 뭐라 항의라도 하고 싶었으나 틀린 말도 아니기에 그만두었다.
황제의 화풀이 인형 역할이 바로 내 일이었다. 양인의 폭력도 견뎌내는데 기껏해야 음인이거나 평인인 궁인들의 폭력을 견디지 못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궁인들의 손속엔 어딘가 힘이 빠져있었다. 내 몸에 남아있는 황제의 체향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리라. 희빈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그들의 진짜 주인이 남긴 향을 두려워해 함부로 힘을 내지르지 못했다. 황제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체향은 내 목숨을 살린 것이다.
“다행히 얼굴은 빗맞았네.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을 거야.”
“여긴…. 징벌실입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떻게 오긴? 접객소의 관리가 기겁하여 연락했지. 송장 치우는 줄 알고 질겁했네!”
그간 정이라도 생긴 것인지 권 의관은 걱정스러워하며 머리의 상처를 살폈다. 깨끗한 붕대가 머리를 꼼꼼히 감싸는 것이 기이했다. 아파서 치료받는 것이라고는 하나, 누군가에게 보살핌받는다는 감각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다.
“급한 치료는 다 끝났네. 피를 많이 흘렸으니 물을 자주 마셔야 해. 내 간수에게 말해놓을 터이니 신경 써서 마시게.”
“감사합니다. 나으리.”
“감사하면 다치지나 말게. 대체 뭣 때문에 고집을 부린 것인가? 희빈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한다 한들 피해 입을 자가 아무도 없는데. 내게도 말해준 것을 희빈께 말 못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구경꾼이 많았습니다.”
희빈이 조용히 사람을 보내 물었거나 자리를 마련했다면 고민 없이 얘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끌려가서 취조당하니 입을 열 수 없었다. 별 얘기도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의 작당은 친왕의 거절로 파투났다는 것뿐이니 크게 꺼리거나 감춰야 할 일도 아니었다. 말이 작당이지 돌려 말하면 두 사람이 동부대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정도로 치장할 수 있는 얘기였다.
“으음. 희빈께서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시지. 지금까지 누구 눈치 볼 일이 있었어야지.”
권 의관이 신음을 흘리며 돌려 욕을 했다. 호부시랑인 아버지를 뒷배로 두고 궁궐로 들어온 희빈은 곧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높은 품계에 올랐다. 황제는 퍽 다정하게 굴었으며 그녀의 아비며 일가친척에게 너그러이 관직과 포상을 하사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금세 비위 맞추는 자들과 아첨꾼이 들끓었다. 본래도 좋은 성격이 아니었던 그녀는 빠르게 방약무인해졌다.
후궁 중에서는 경빈 정도만이 그녀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양인 여성이라 임신이 매우 다난하였다. 사람들은 더욱 희빈에게 몰렸고 거칠 것이 없어진 희빈은 벌써부터 황후전의 주인인 양 콧대 높게 굴었다. 하지만 몇 번의 희락기를 거쳤는데도 임신을 하지 못하자 내의원이며 주변을 들들 볶아대기 시작했다.
“임신하지 못해도 황제께선 다정하고 태평하시니 더욱 마음이 조급해진 게야. 그런 일은 초조해할수록 더 안 되는 법인데.”
희빈에게서는 황제의 체향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황제와 밤을 함께한 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희락기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일 년에 두어 번. 많게는 계절마다 한 번씩 찾아왔다. 음인은 욕정으로 몸이 들끓어 오르고 양인의 정을 갈구하게 되니 그 향을 맡은 양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색(色)에 탐닉한다. 때문에 희락기는 음인의 체향이 힘을 가지는 유일한 시기라고도 일컬어졌다.
“황제께서 찾으신 지 오래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가? 난 평인이라 향을 맡지 못하니 내밀한 사정까지는 모르네만. 뭐 좀 질리신 게 아니겠나? 저번 희락기에는 아예 찾지 않으셨다 하더군. 궁 안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못 들었나?”
못 들었다. 내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건 권 의관이 유일했다. 가끔 접객소의 음인들과 함께하긴 하지만 그 빈도가 워낙 길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 들은 얘기가 폐궁의 유령 이야기인 것이다.
황제의 가장 큰 임무는 후손을 남기는 것이므로 희락기의 후궁을 피하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황제에게 자손이 있어야만 이 제국이 평온할 수 있었다. 정무는 보지 않더라도 정사는 치러야 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피임약을 먹인 노예는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안으면서 씨를 뿌리고 총비의 희락기는 피하다니, 마치 자손을 꺼리는 듯한 태도였다.
“피는 멈췄지만 상처가 터질 수도 있으니 매사 천천히 움직이게.”
권 의관은 동네 아낙 같은 수다 대신 의관다운 충고를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켰다.
의관이 떠나자 징벌실의 삭막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돌바닥에선 냉기가 올라오고 벽에는 습기가 달라붙어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환자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깨진 것 빼고는 몸 상태가 괜찮았다. 권 의관의 말대로 뼈도 부러지지 않았고 내장도 상하지 않았으니까. 피부가 멍든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게 황제의 체향이 남아있을까? 머리에서 나는 피 냄새가 너무 심해서 다른 냄새가 잘 맡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린내와 밤꽃 냄새가 흐릿하게 풍겼다. 징벌을 받기 위해 감금된 접객소의 음인이 험한 꼴을 당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노예들을 관리하는 것은 사내구실 못 하는 내시들이었으나 뇌물을 받으면 감옥 안으로 누구든 들여보냈다.
접객소의 징벌실에서는 별다른 체벌이 가해지지 않았다. 그냥 들어가 갇혀 있기만 해도 윤간이며 다른 험한 꼴을 워낙 많이 당해 몸이 상하기 때문이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절룩거리며 징벌실에서 나온 노예들은 한동안 사람 구실을 하지 못했다.
희빈의 심복으로 보이는 자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여기 가두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만으로도 우울해졌다. 황제의 화풀이 인형이라는 건 감투도 뭣도 아닌 별명이었다. 접객소에서 특별히 다뤄지는 건 황제의 체향이 풍기기 때문이지 나라는 인간 자체가 특별해서는 아니었다. 모른 척 죽이거나 범하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은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말하고 있지만,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의관이 나가면서 불이 꺼진 징벌실은 어두컴컴했다. 낡은 건물에 창살을 박아 사용하는 것이라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간수라 할 것도 없는 내관 한 명이 돌아다니며 내는 소리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등을 통해 파고드는 냉기에 머리가 쾅쾅 울렸다. 얼마 전 따스한 화로 옆에서 잠들었던 것이 꿈인 듯 멀게 느껴졌다. 역시 내게 그런 좋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감을 묶어 매달아 놓았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그것도 꿈일지 모른다. 처소로 돌아가면 차가운 방과 눅눅한 이불만이 날 맞이하겠지.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붕대를 얼마나 단단히 감아놓았는지 주변의 피부가 다 저려 왔다. 머리는 어지럽고 열이 올라 괴로운데 신경만은 날카롭게 곤두서 기력을 갉아먹었다. 의관은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했으나 몸을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이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는지 급속도로 온몸이 아파 왔다. 어서 희빈의 측근이 왔으면 좋겠다. 공개적인 곳에서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런 감옥에 갇혔는데 무슨 말인들 못 할까? 겁박당해서 불었다 하면 나보다는 희빈에게 비난의 화살이 갈 것이다. 그럼 괜찮겠지. 친왕과 호부시랑이 나눈 이야기를 다 해 주어야지. 그러면 화가 풀려 날 놓아줄지도 모른다.
“……보호받고 싶어.”
몸이 아프니 약한 마음이 든다. 누구라도 좋으니 날 익애하는 이가 나타나 구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따듯하게 꼭 안아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을 텐데. 걱정스런 얼굴로 상처를 돌봐주고 나 대신 다른 이에게 화를 내주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보호해 주고…….
두 팔을 교차로 얽어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친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자니 꼭 누군가에게 안겨 위로받는 듯 가슴 한켠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찌르는 듯 아팠다. 나는 여전히 추운 감옥 안에 누워있고 배 속에선 연신 꾸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보답 없는 정사를 강요당하고 황제의 체향조차 나지 않는 비빈에게 무릎 꿇으며 빌고, 윤간을 당하지나 않을까 무서워하며 웅크리고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도무지 꿈을 꿀 수 없었다. 암흑뿐인 잠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열과 고통에 시달리며 정신을 잃다 깨어나면 하루가 지나 있었다. 의관의 잔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지만, 의미 없는 웅웅거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희빈은 왜 사람을 보내지 않는 거지? 그저 날 괴롭히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일까? 의관이 서너 번은 오간 것 같으니 벌써 사나흘이 흐른 것이다. 바로 다음 날에라도 사람을 보낼 것 같던 희빈은 날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치했다.
음인치고는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라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보통의 음인이었다면 벌써 폐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사냥꾼 일을 하며 기른 체력과 근력은 아직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듯, 의관의 치료를 받고 죽 같은 것을 몇 번 넘기자 놀랍게도 몸이 점점 나아졌다.
“꼴이 말이 아니군.”
비꼬는 말이 들려온 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날의 아침이었다. 창살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친왕의 얼굴이 있었다. 화려한 옷자락이 우아하게 늘어져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요괴에게 홀린 듯 멍해졌다.
예를 표하기 위해 상체를 일으키며 버둥거리자 친왕은 말리는 말도 않고 빙글빙글 바라보기만 했다. 참으로 얄밉기 그지없는 면상이었다. 이 어두컴컴한 감옥에는 대체 왜 나타난 것인가?
피 냄새와 땀 냄새로 엉망인 몸을 안으려고 들어온 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갑자기 나타난 양인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게 아직도 황제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뭘 그리 놀라고 무서워하시나. 제가 설마 형수를 어찌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저, 전하.”
“희빈에게 아무 말도 안 하셨다지요?”
“친왕 전하. 여기엔 왜….”
“참 기특하기도 하지.”
말과는 다르게 썩 기쁘지는 않은 얼굴로 친왕이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수모를 당하셨으니 보답을 해야지요. 호부시랑을 좀 놀려줄 생각으로 황제의 체향이 나는 형수를 술자리에 불렀던 것인데 쓸데없는 분란만 일어났으니, 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형수님.”
“마, 말씀을 낮추시옵소서. 송구합니다. 당치 않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문을 열고 처소로 모시지 않고.”
접객소의 관리들이 황망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잠겨있는 문을 열었다. 존대와 반말을 섞어 쓰는 친왕의 말투는 그야말로 듣는 이의 혼을 빠지게 만들었다. 황친으로 태어나 존대라고는 써볼 일도 별로 없었을 텐데 나 같은 노예에게 잘도 이러는구나 싶어 기가 막혔다.
“아. 희빈은 걱정 마시길. 내궁을 다스린다는 본분을 잊고 바깥일에 손을 댄 탓에 근신 중이랍니다. 누가 일러바쳤는지 원. 하하.”
궁 안에 기거하는 자는 모두 황제의 사람이니 누가 알렸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저렇게 말하는 친왕의 태도가 마치 생색내는 듯하여 어이가 없었다. 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꼴을 당했다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궁에 들어와 다른 이의 술자리에 불려 간 적이 딱 한 번이었고, 그 한번이 지금 이렇게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호부시랑을 약 올리기 위해 날 불렀다지만 날 놀리려는 의도 또한 다분했을 것이다. 황제의 체향에 관한 얘기를 부러 입 밖에 낸 것도 희빈에게 말을 흘려 날 골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내가 괴롭혀지리라는 것 또한 알았을 것이고. 호부시랑이 죽어 일이 생각보다 고약하게 흘러가기는 했지만 희빈에게 내가 술자리의 일을 말했다면 그것을 구실로 또 열심히 괴롭혔을 것이다. 상전의 일을 입 밖에 낸 것이니 죽은 죄를 지었다 하며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분이 알려주셨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속마음은 닫아두고 얌전히 감사를 표하자 그가 의기양양 미소 지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머리의 붕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주 얼굴을 노린 것인가? 꽤 상처가 크군.”
“의관께서 걱정이 많아 그렇습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닙니다.”
“뭐, 별로 걱정하는 것은 아니고.”
얄미운 작자 같으니. 내 처지가 처지다 보니 다른 사람의 행동에 크게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편인데 친왕의 행동은 가끔 속을 북받치게 했다. 이렇게 애매한 존대를 하며 가지고 노는 것이 밑으로 마냥 깔아보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친왕이 비릿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내게 향하자 얄미웠던 마음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누그러졌다. 내가 주저앉아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을 돕겠다고 내밀어지는 손은 오직 이 손뿐이었다. 하지만 감히 팔을 뻗어 저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일까? 상대는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용납받지 못할 신분이기에 매번 고민하게 되었다.
“손이 부끄럽습니다. 형수님.”
“……황공합니다.”
내밀어준 손이니 잡아도 되는 거겠지. 나 따위가 친왕을 무안하게 해선 안 되는 거니까. 나는 모른 척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단단히 끌어올려 주는 힘이 강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비틀거리며 기대도 흔들리는 일 없이 아무렇지 않게 지탱해 주겠다, 이렇게 흔들림 없고 강한 손에 아무 걱정 없이 기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처소로 모셔드리고 싶은데 제가 일이 많아서. 잘 챙겨두라 일러놓았으니 쉬고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별말씀을.”
징벌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이 따스해졌다. 차가운 골방에 계속 있었기 때문인지 머리 위로 내려오는 가을 햇살이 따뜻하고 눈부셨다. 약간 어지러움이 느껴져 비틀거리자 친왕이 팔을 둘러 지탱해왔다.
“평인 같은 몸매인데 이런 곳에서 음인 티를 내시다니.”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음인이 아니라 양인이라도 갑자기 일어서서 해를 보면 비틀거릴 것인데 하여간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어쨌거나 도와준 건 사실이므로 유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건 없고. 몸이 약하시니 모셔다드려라.”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친왕의 명령에 내관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내 몸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그냥 걸어갈 만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감사히 몸을 기댔다. 신기할 정도로 잘 낫는 몸이지만 이런 날씨에 추운 곳에서 보낸 건 타격이 컸다. 두통이 사라지고 열이 떨어졌다뿐이지 냉골에서 굳어버린 관절이 삐걱거렸다. 내관의 팔에 몸을 기댄 채 조심조심 발을 옮기려니 뒤쪽의 친왕이 신경 쓰였다. 그는 날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바쁘다고 했으니 일을 하러 가버렸을까? 궁금했지만 뒤돌아봐선 안 될 것 같았다. 뒤돌아봤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주 고달파지게 될 것 같았다.
친왕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자 떠오르는 건 희빈이었다. 황제에게 근신령을 받았다는 희빈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를 잃고 근신까지 하게 되어 더욱 심상했을 것인데 후환이 미칠까 두려웠다. 내 살기에 겁을 먹고 희게 질리던 희빈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부드럽고 달콤한 체향은 크고 화려한 꽃을 연상시켰고 몸매는 작고 풍만하여 보기 좋았다. 그야말로 절세의 미인이란 희빈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음인이 되기 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평인일 때 그런 여인을 보았다면 분명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기억을 잃긴 했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객관적인 판단마저 변하진 않았을 테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덧 처소에 도착했다.
“친왕 전하께서 몸을 보신하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들어가서 식사 먼저 하십시오. 탕약은 그 뒤에 올라갈 것입니다.”
갑작스런 존대에 내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겸연쩍어하며 헛기침을 했다. 친왕이 존대하는 상대에게 갑자기 하대할 순 없다는 듯 그는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상처는 어떠십니까? 의관을 오라 할까요?”
“말씀을 낮추시지요.”
“제가 어찌 감히.”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내관은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도 제가 하는 짓이 웃기다는 걸 아는 듯했다. 뭐 시간이 지나면 말투 따위 절로 돌아올 것이다. 기껏 잘해 준다는데 막을 필욘 없겠다 싶어 한숨만 내쉬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황제에게 얻어맞아 엉망이 되기 전까지 내관이며 궁인들 모두가 내 눈치를 보며 잘 대해줬던 것이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뭔가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이불이 좀 추운데 바꿔줄 수 있습니까?”
“솜이불로 벌써 바꿔 놓았습니다. 화로도 데워놓았으니 걱정 마시고 몸을 추스르십시오.”
이때다 싶어 필요한 걸 말하지 내관이 곧장 대답해왔다. 권력이란 게 좋긴 좋구나. 이 경우에는 오해를 해주어 좋다 해야 하겠지만. 나는 감사하다 대답하며 처소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따스한 공기가 흘러나와 뺨에 닿았다. 휑했던 방 안은 환자가 쉬기 좋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밤을 구울 때 얻어둔 것보다 더 많은 숯이 화로 안에서 타고 있었고 침상 위에는 보기에도 두툼한 새 이불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는 가구마저 바뀌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자니 곧 죽과 반찬이 든 그릇이 앞에 놓였다. 받아본 적 없는 호사스런 시중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잘 챙겨두라 일렀다는 친왕의 말은 아마 지나가는 말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나가는 말만으로도 이렇게 대접이 바뀐다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음식 냄새를 맡자 식욕이 들끓었다. 징벌실 안에서도 뭔가 음식 같은 것을 먹긴 했지만 제대로 된 음식도 아니었고, 몸이 아프기 때문인지 그마저도 다 먹질 못했었다. 식탁에 놓인 것은 하얀 쌀을 불려 만든 죽과 계란이었다. 하얀 자기에 담겨있는 죽에서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먹기 좋게 다져진 채소 절임을 죽 위에 얹어 삼키자 고소한 향이 코를 찔렀다.
정말 맛있었다. 별것 아닌 음식인데도 이처럼 따스한 음식을 대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궁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까지 다 뒤져도 이처럼 정갈한 음식은 먹어보질 못했다. 음식의 맛에 감동하고 있으려니 아직 나가지 않은 내관이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뭔가 맘에 안 드시는 게 있으신지요? 양이 모자라면 더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맛있어서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기에 미안하다는 말도 감사하다는 말도 할 일이 없었는데 오늘 밀린 인사를 다 하는 듯했다. 내관이 좀 지나치게 눈치 본다는 기분도 들지만 친왕이 내게 하듯 비꼬는 말투로 명했다면 내관들로서는 심장이 떨어질 일이었으리라.
당장 내일이라도 가구가 부서지고 이불이 찢어져 있는 게 아닐까? 죽그릇을 내려놓고 걱정에 차서 화로를 바라보는데 이번엔 약사발이 앞에 놓였다.
“권 의관의 처방대로 지어 올린 것입니다.”
내관의 태도는 마치 총애받는 비빈을 대하는 듯 깍듯했다. 황제를 따라 궁 안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공손한 것 같았다. 친왕이 명이 그토록 무서운가?
‘그야 무서울 만도 하긴 하지만.’
난 떨떠름한 기분으로 내관의 시중을 받았다. 몸이 피곤하니 깊이 생각하는 것이 피곤했다. 수발 들어주는 대로 상처를 다스리고 침상에 몸을 누이자 기다렸다는 듯 잠이 찾아왔다.
다음날, 권 의관이 아침부터 찾아와 궁 안의 소문을 말해 주었다. 내관의 태도가 바뀐 것은 친왕의 명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호부시랑과 희빈 때문이었다.
호부시랑과 공모하던 이들 중 하나가 자신의 죄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궁에서 일을 벌였다. 그리하여 호부시랑의 죄상을 밝혀내고 공모자들을 끌어내어 추죄하던 중, 희빈이 연관된 것 또한 드러나 그 품계가 박탈된 것이다. 그때 희빈은 접객소의 노예를 궁으로 끌어내는 등 풍기를 어지럽힌 죄로 근신 중이었다.
호부시랑의 친족과 도당들의 목이 잘리고 희빈은 냉궁으로 쫓겨나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되니 사람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황제가 친왕을 추궁하지 않자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채고 더욱 조심하며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희빈의 몰락 때문에 내 눈치 또한 보게 되었다.
대처 빠른 내관들은 법규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내 비위를 맞추며 약삭빠르게 굴었다. 궁인들은 어차피 만날 일이 한정되어 있었지만 어쩌다 궁 안의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 몸을 피했다. 혹시 시비라도 걸렸다가 호된 꼴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징벌실에 갇혀있는 동안 내 처지는 그렇게 바뀌었다. 황제는 여전히 나에 대해 말이 없지만 사람들은 지레짐작하고 무서워하며 내게 잘 대해주었다.
바쁘다던 친왕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는 나흘이 지나도록 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보상하겠다 한 것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는 언제나 잊어버릴 때쯤 나를 불렀다. 머리를 치료하러 온 권 의관이 호부시랑의 일로 친왕도 바쁜 것이 아니겠느냐 말을 흘렸다.
“그나저나 자네가 앉아있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의 처소에 들어온 줄 알았을 걸세. 살림이 폈다는 게 딱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군. 근데 친왕께서 따로 불러 보상한다 하셨다고?”
“부르겠다곤 하셨지만 글쎄요.”
내게 무엇을 해주든 생색내는 것을 빼먹지는 않을 테니 한 번은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희빈에게 끌려간 것을 황제에게 알린 걸 두고도 생색내던 자가 아닌가? 날 일으켜주던 친왕의 손이 다시금 떠올라 고개를 내저었다. 붕대 때문에 답답해하는 거라고 착각한 권 의관이 일주일 정도면 머리의 실밥을 풀 수 있을 거라 말해 주었다.
밤송이에 찔린 상처는 도지는 일 없이 잘 나아 딱지까지 떨어졌다. 이제 머리의 실밥을 푸르면 황제가 부를 것 같은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전에도 안을 생각으로 불렀다가 피 냄새가 나서 내친 것이 아닌가?
“무서워.”
며칠 호강했다고 내 할 일이 무서워지다니. 정신이 나약해졌다. 요즈음 황제를 만나지 않았음에도 온몸이 멍으로 얼룩졌지만 그다지 고된 일은 없었다. 멍 정도의 상처는 익숙하기에 아픈 것도 잘 모를 정도였고, 권 의관이 살뜰히 돌봐주어 덧나지도 않았다. 징벌실에 갇혀있을 때는 혹시나 험한 일을 당할까 두렵기도 했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었다.
마감이 잘 되어있는 나무 탁자의 표면이 반들거렸다. 그 매끄러운 표면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음식은 따뜻했고 이불은 포근했다. 따스한 방에 멍하니 앉아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하지만 이제 황제가 날 부르고 다시 멍투성이로 침전에서 나오게 되면, 이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행복함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 사라졌을 때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에서 고개를 돌리면 안 된다. 다짐에 또 다짐을 해보았지만 어깨가 자꾸 가라앉았다. 호부시랑과 희빈에 대한 일로 황제의 울화가 많이 쌓였을 텐데, 그걸 다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앞이 캄캄해졌다. 괜스레 침상에 누워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방 안이 계속 따뜻했기 때문인지 눅눅하지 않은 이불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좋은 생각만 해야지. 이렇게 좋은 일들만 계속 기억할 수 있으면 나쁜 일이 닥쳐도 더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지 싶어 눈을 감자 스르륵 졸려왔다.
꿈속에선 연못을 헤엄치는 금붕어가 나왔다. 수면 위로 자잘한 파도를 일으키며 헤엄치는 금붕어들은 내가 던지는 먹이를 먹기 위해 몰려들었다. 손을 내려다보자 말린 밥알이며 고기 조각을 간 것이 담긴 손바닥만 한 대나무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그 순간 이것이 꿈이란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대신 깨어나면 금붕어에게 밥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한껏 잘 대해주며 식사를 가져다주는 지금이라면 물고기 밥을 좀 달라 하여 연못에 가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찾아갈 수 있는 연못이란 폐궁의 연못뿐이고, 그곳은 가지 않겠다고 친왕에게 말했으나 궁을 잘 뒤져보면 누군가 오지 않는 연못 하나쯤 있을 것이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살아있는 생물이 악의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건 내 유일한 기쁨이었다. 내게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고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예쁘고 귀여웠다.
“주무시는가?”
좋은 꿈의 여운에 몽롱하게 젖어 있으려니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며칠 익숙해진 우 내관의 목소리였다. 징벌실에서 나올 때 걷는 것을 부축해준 우 내관은 그때부터 내 생활을 챙기며 제법 친근하게 굴었다.
“식사라도 함께하자는 친왕 전하의 명이 있었네.”
정확히는 식사 시중을 들라는 친왕 전하의 명이 있었다는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챙겨 입었다. 예전에 술 시중을 들 때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이었다. 푸르고 흰 색조의 옷은 수수했지만 단정했고 딱히 패용하는 장신구가 없어 화려하지 않았다. 지급되는 끈으로 머리를 묶자 준비는 금세 끝났다. 접객소에서도 인기 있는 무희들은 비빈 못지않은 자태를 뽐내었으나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처소를 나오자 우 내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었다. 초라한 모습이 불안한 듯했으나 나는 모른 척 무시했다. 지금 당장 의복을 맞출 수도, 장신구를 달 수도 없었다. 그리고 원칙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친왕의 앞에 섰다간 별로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기도 했다.
“그, 음. 뭐 단정하구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포기한 우 내관이 앞장서서 날 인도했다. 궁의 외곽이 아니라 중앙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친왕의 처소로 가는 게 아니었나? 보답을 하겠다던 친왕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대체 뭘 해주려는 걸까? 두근거리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징벌실에서 꺼내준 것만으로도 그는 내게 잘 대해준 것인데 뭔가를 더 해주겠다니,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가슴이 두근거렸다. 군밤 때문이다. 그 달콤함과 따뜻함이 자꾸 마음을 들뜨게 했다.
멀리서 풍악 소리가 났다. 꽃나무와 아름다운 돌들로 조성되어 있는 길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걷기 좋았다. 굽이굽이 돌아설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궁 안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역시 황궁이란 감탄사가 나왔다. 우거져 있는 단풍 사이를 벗어나자 푸른 소나무가 높이 솟아 고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연꽃이 가득 차 있는 못 위로 단청 가득한 정자가 꿈처럼 떠 있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름은 소나무의 뾰족한 잎에 엉겨있는 듯하고, 연잎은 쪼개지며 녹음을 흘려내니 마치 선녀가 내려와 소매를 풀어내는 듯하다.
“올라가게.”
“아.”
멍청이처럼 서 있던 나는 내관이 이끄는 대로 정자에 올랐다. 정자를 이루고 있는 목재마저도 중후했다. 시서화가 기둥마다 걸려있어 품격을 더해주었고 가장자리에 늘어선 악공들이 음악을 풀어내었다. 이 층 높이의 정자에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어 음식 냄새가 났다. 야외임에도 곳곳에 놓인 화로가 냉기를 쫓아주었다.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꽃은 수면과 함께 흔들리고 단풍은 비처럼 떨어져 가을이란 꽃이 낙화하는 듯하다. 이것을 어찌 인세의 풍경이라 할 것인가?
“단풍 구경 한 번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만. 퍽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군요.”
정자의 상석에는 친왕이 앉아 있었다. 목침에 반쯤 기대어 앉은 모습은 방만하게 흐트러져 있었으나 두 눈동자는 취기 없이 또렷했다. 그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내 모습을 쭉 훑어 내렸다.
“참 수수한 취향이시고.”
사랑받지 못하여 초라한 모습을 비꼬는 것인가? 송구하다 말하며 고개 숙이자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기껏 선물을 준비했는데 옷차림이 그래서야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황공합니다.”
“뭔지나 알고 황공하다 하시는지?”
친왕이 삐죽 웃으며 손을 흔들자 대기하고 있던 내관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상자를 내밀었다.
“친왕께서 하사하시는 것입니다.”
팔뚝 정도 길이의 긴 상자였다. 비단으로 겉을 발라 반짝거리는 상자는 지금까지 내가 가져본 그 무엇보다 예뻤다. 주저하며 손을 내밀자 묵직한 상자의 무게가 손안으로 떨어졌다. 손안에 예쁜 물건이 놓여 있다. 그 사실 자체에 당황하고 말았다. 녹색의 비단이 예쁜 나비의 날개처럼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 같은 게 만지면 부스러지는 게 아닐까? 비단이 상해서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일었다.
“열어보시지요.”
이럴 때는 뭐라고 인사하며 받아야 하지? 황궁에 들어올 때 받았던 교육 중에 분명 적절한 인사말이 있을 터인데,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다 형수께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 받는 것인데.”
친왕은 조금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미간이 살짝 구겨진 것이 그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는 내가 희빈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길 원했던 걸까?
상자의 뚜껑을 잡아 위로 들어 올리자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안이 드러났다. 상자 안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노리개가 하나 들어 있었다.
하얀 옥에는 붉고 검은 얼룩이 있었다. 그 얼룩에 맞춰 세 마리의 금붕어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금과 은이 연꽃과 연잎의 형상으로 테두리를 감쌌다. 붉고 풍성한 술이 길게 늘어져 호화로이 찰랑거렸다.
“이건….”
“차고 다니시지요. 자고로 음인이란 장신구와 비단옷을 좋아한다 하여 준비해 보았는데. 뭐 맘에 안 들면 저 연못에 던져버리시고.”
“마음에 듭니다.”
심술을 더 부릴까 싶어 냉큼 대답하자 친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람 빠지는 듯한 비웃음이었지만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손 위의 옥패가 마음에 들었다. 너무 예쁜 물건이었다. 폐궁의 연못이 생각나기도 했고 오늘 꾼 꿈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름다운 건 아무것도 가져보지 못했는데 이런 훌륭한 물건이 내 것이라 생각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물질에 약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건 가져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생각이었나 보다. 음인은 예쁜 옷과 장신구를 좋아한다는 친왕의 말에 동조하기 싫었지만 손 위의 옥패에서 눈도 뗄 수 없었다.
“너무 예쁩니다.”
재차 말하며 기쁨을 강조하자 더 이상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맘에 들면 지금 바로 차 보시지요.”
친왕이 은근히 권하는 소리에 문득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수수한 접객소의 옷차림에 이처럼 화려한 옥패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권해줄 때 한 번 해보지 않으면, 부끄러워서라도 패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조심스레 상자 밖으로 옥패를 꺼내 들자 세 마리의 금붕어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하얀 옥의 차갑고 맨들맨들한 감촉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손끝으로 매만지며 구경하자니 시간 가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건 아마도 함정이겠지. 좋은 의도로 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궁 안에서는 무엇이든 다 이중 삼중의 의도를 가지는 법이니, 이런 귀물을 주며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도둑으로 몰려고 하는 걸까? 친왕께서 직접 주신 물건이라 말해도 누가 믿어 주겠는가? 설령 믿는다 해도 친왕이 그리 우기면 훔친 것이 맞다고 다들 앵무새처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함정이라 해도…….
손안에서 세 마리의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마치 내 것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맘에 쏙 드는 모양이었다. 예쁘고 좋은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이런 모양이라면 나무를 조각해 만든 것이라 해도 기뻤을 것이다. 노예 신분에 짐승을 기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폐궁의 연못 정도나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렸는데, 이렇게 예쁜 것이 내 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되었다.
손 위에 놓인 옥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친왕이 답답했는지 몸을 가까이 붙여왔다.
“그렇게 마음에 드나?”
친왕이 손 위에 놓인 옥패를 집어 들었다. 아. 역시 다시 가져가려는 건가? 주려다 말려는 식으로 놀리려는 거였나? 친왕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옥패에 시선을 고정하자 억누르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친왕이 큭큭거리며 웃는 모양새에 심통이 났다.
“아니 꼭 고기 쳐다보는 개 마냥 고개가 움직여서.”
“…….”
“크흠.”
친왕의 향이 얼굴로 확 다가왔다. 껴안듯이 등 뒤로 돌아간 팔이 허리춤을 잡아채는 것에 온몸이 소스라쳤다. 감히 밀어내지도 못하고 몸을 굳히고 있자 손가락 두 개가 허리를 묶은 띠 사이로 쓰다듬듯 파고들었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지닌 손가락이 허리띠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는 감촉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의 체향을 숨기려는 의도도 없이 달라붙은 친왕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직접 채워주려는 것이니.”
더듬듯이 천천히 움직이던 친왕의 손이 드디어 앞쪽으로 돌아 나왔다. 허리띠라고는 해도 천으로 된 띠를 둘러 묶은 것이라 신축성이 없었다. 그 사이로 손을 쑤셔 넣어서는 반 바퀴 돌리자 옷차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몸이 잘게 떨렸다. 정자의 외곽으로는 악공들이 둘러앉아 음악을 연주했고 상자를 가져온 내관 역시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 시선들 사이에서 난잡하게 흐트러진 꼴을 보이자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상의가 흐트러지며 목덜미가 드러나자 친왕이 모른 척 턱을 문댔다. 까슬한 수염이 여린 살을 긁고 지나가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한 발자국만 뒤로 가면 친왕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 발자국을 도저히 내디딜 수 없었다. 서러운 기분이 들어 이를 악물었다. 허리춤에서 움직이는 친왕의 손에 정신이 온통 쏠렸다.
“살 좀 쪄야겠습니다. 형수님.”
장난스레 말할 때마다 숨이 귓가와 목덜미를 스쳤다. 몸이 움찔움찔 움츠러들 때마다 친왕이 허리춤을 당겨 몸을 바로 세우게 했다. 친왕이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꾹 눌렀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내 뒷덜미를 친왕이 이로 슬쩍 긁었다.
“제가, 제가 직접 할 터이니.”
“차는 법은 알고?”
“압니다.”
옥패를 차본 적은 없지만 차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봤고 어떻게 매는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왕은 들은 척도 않으며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옷을 두 겹이나 입었는데도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닿은 친왕의 얼굴도, 허리춤 사이로 들어와 옥패에 달린 끈을 매듭짓는 손길도 모두 지나치게 선명했다.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눈앞의 가슴팍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양인의 체향에 정신이 다 날아갈 것 같았다. 우아하고 고상한 황제의 향과는 전혀 다른 체향이었다. 나른했지만 그것은 잠자고 있는 맹수의 기세와 비슷한 것이었다. 배부르고 졸린 커다란 짐승의 손안에 놓인 장난감이 된 것 같았다.
마침내 옥패 매다는 것을 끝낸 친왕이 무릎을 떼고 물러섰다. 하지만 손은 그대로 남아 밑으로 내려갔다. 노골적으로 살을 잡아 주무르는 대신 손등이며 손끝으로 허벅지 안쪽을 스치듯 건드리는 태도에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여기서 다리라도 벌리길 원하는 건가?
지금 친왕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현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기루에서 화대를 지불한 손님처럼 굴었다. 접객소의 노예들은 모시는 이가 귀한 선물을 하사할 경우 그 자리에서 구음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혹시 내게 그런 걸 바라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떻게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몸을 쓰다듬는 친왕의 손길을 조용히 견뎌내기만 했다. 여기서 반응을 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흐음. 역시 살이 좀 찌셔야겠습니다. 형수님.”
마침내 친왕이 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안도의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제야 내가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형수라고 불렀으니 더 이상의 희롱은 하지 않을 듯하여 나는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 했다.
“잘 어울리십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떨어뜨리자 허리춤에 매달린 옥패를 볼 수 있었다. 얼룩이 예쁘게 들어찬 금붕어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조심스레 손을 뻗자 정교하게 조각된 금붕어의 비늘들이 손끝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어울린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내게 어울리기에 친왕이 준 옥패는 너무 예뻤으니까. 하지만 비꼬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흔들림에 따라 달라지는 옥의 반짝거림이 수면의 반짝거림을 닮아있는 듯도 했다.
“계속 넋 놓고 있을 건가?”
짜증스런 친왕의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날 쳐다보았다. 친왕 앞에서 마음 놓고 풀어지는 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정신이 딴 데로 날아갔다. 마음에 쏙 드는 예쁜 물건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럴까. 면역이 부족했다. 옥패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시선을 뗄 수가 없어 당혹스러웠다.
“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도록 하겠습니다.”
애써 옥패에서 시선을 떼며 친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행동이 너무 기대 이하였을까? 너무 천박하게 기뻐하는 티를 낸 걸까? 좀 더 꼿꼿하게 버티는 모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희롱당한 것에 몸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악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장신구 하나에 정신 놓고 휘둘리는 모습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긴. 금세 꺾이면 놀리는 재미가 적을 것이다. 방금 전 실컷 희롱당했으면서도 딴 데 정신 팔고 있으니 놀린 보람이 없기도 할 것이고. 하지만 황제의 시중만 들었다 해도 내 신분은 접객소의 노예였다. 친왕이 형수니 뭐니 불러도 그 손길을 거절하고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 것은 주제 모르는 일이 될 것이다. 난 친왕을 향해 그만두라는 말조차 해서는 안 되는 신분인 것이다. 주제를 모르게 되는 순간 내 목덜미에는 친왕의 송곳니가 박힐 것이다. 감히 기고만장하게 구는 노예를 친왕이 예쁘고 귀엽다 하며 넘어갈 리 없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내게서 흥미를 거둘까? 다행히도 친왕은 썩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처럼 맹수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풀 포기처럼 꺾으면 꺾이고, 뽑으면 뽑히는 게 벗어날 길로 보였다.
“술을 따를까요, 전하?”
친왕의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술병을 손에 들었다. 친왕은 흥이 완전히 깨진 것인지 지루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됐다. 노래나 한 곡 불러봐라.”
이건 또 무슨….
“노래… 말씀이십니까?”
“그래. 접객소에선 가무를 가르치지 않느냐? 여기까지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기도 뭣하니 한 곡 불러 봐라. 그래야 내가 형수의 노래를 들었다며 여기저기 농을 할 게 아니야.”
“노래를 배우긴 했습니다만.”
배웠다고 해서 잘한다는 건 아니었다. 내 노래를 들은 이들은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싫어했다. 못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존대를 때려치운 친왕이 짜증스레 명령하는 모습에 기가 죽었다. 그는 정말로 짜증이 난 것 같았고 빨리 노래나 한 곡 듣고 들어가고 싶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정자에 올라와서 벌써 몇 번이나 친왕의 기분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기분 나빠 하다가 웃고, 또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귀하신 귀가 더럽혀질 것입니다만.”
“불러.”
“정말로, 잘 못 부릅니다만.”
나는 양손으로 공손히 떠받들고 있던 술병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떫은 감이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접객소에서 가르치는 음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것이었지만 그 기초조차도 난 잘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저리 노래하라 명령하시니.
“그럼 월하도강(月下渡江)을 불러보겠습니다. 아는 것이 이것뿐이라.”
내가 가사를 다 아는 유일한 노래였다. 보름달이 뜬 날 강을 건넌다는 내용의 월하도강은 별 기교도 없는 단순한 노래였지만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다행히 악기 연주까지는 시키지 않아 둘러앉은 악공 중 한 명이 금을 타주었다. 음인의 높고 고운 목소리 대신 평인도 음인도 아닌 되다 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은 길에서 미끄러진 달구지처럼 엎어지고 날갯짓을 잊은 비둘기처럼 떨어졌다. 어찌저찌 노래라는 형태를 취하며 버티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노래하는 중간부터 탄주가 흔들렸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무시하고 계속 불렀다.
“달무리 번지는 구름 아래에, 하얀 물결 층층이 흐르니 개구리 우는 소리 사이로 미인이 강을 건넌다. 어이하여 작은 신을 밤이슬에 적시는가? 음인의 향 구름에 섞여 흘러가는데 강 건너 임의 향은 멀기만 하다.”
사랑하는 임을 만나기 위해 밤에 강을 건넌다는 흔한 내용의 노래였다.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노래였지만 지금 친왕의 술자리는 완전히 파토가 나고 말았다. 술잔을 들어 올린 채로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친왕의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월하도강은 이런 노래가 아니지 않아?”
친왕이 항의했다. 지당한 항의였다. 스윽 한 번 주변을 둘러보자 악공부터 내관까지 모두 혼백이 달아난 얼굴이었다. 음치가 노래를 부르면 보통 웃던데, 왜 사람 무안하게 저리 넋 나간 표정들이란 말인가? 억울한 마음이 일어 입술을 질끈 씹었다.
“황공합니다. 소인이 노래를 잘 못 부르는지라.”
“잘 못 불러? 이걸 불렀다고 하나? 방금 노래한 거야?”
“…죄송합니다. 소인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이 미흡하여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됐다. 귀가 썩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나서 진심으로 놀란 일이 별로 없는데 지금 머리가 다 아프다. 형님의 취향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잘하지도 못하는 걸 시켜놓고 너무하는 것 아닌가. 황제의 취향에 대해서는 나도 알 수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노래야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황제는 내 노래는커녕 목소리도 듣기 싫어하니 내가 음치인 것은 문제될 게 없었다.
“귀가 더럽혀질 것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겸양의 말인 줄 알았다.”
친왕의 계속되는 구박에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내 노래하는 꼴이 웃긴 건 나도 알았다. 발현이 늦은 몸은 뼈대만 어중간한 게 아니라 목소리 또한 어중간하게 만들었다. 보통은 평인보다 조금 높은 평범한 목소리였지만 노래를 한다든지 신경 써서 긴 음을 내어야 할 땐 여지없이 갈라지고 흔들려 형편없는 목소리가 되었다.
대체 발현이라는 게 뭐기에 사람을 이리 바꿔 놓는단 말인가? 머리에 열이 너무 많이 올라 과거의 일도 잊어버리고 단단하던 뼈대는 물러져 연약해졌다. 목소리는 망가져 노래도 부를 수 없다. 발작적으로 치미는 희락기도 끔찍했다. 황제는 내가 울며 몸부림치는 것을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거나, 쾌락을 견디지 못해 혼절할 정도로 괴롭히고는 했으니, 지나고 나면 짐승이 된 것 같은 자괴감만 느껴졌다.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에 제대로 발현을 한 이들은 나처럼 어중간하지 않았다. 희빈처럼 음인답거나 황제처럼 양인다웠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아귀가 맞는 향도 풍겼다. 희빈만 해도 화려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지 않았는가? 그에 비해 나는 향도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형수님이 옆에 계시니 벌레가 없어서 좋군요.”
내 향은 쓰고 매캐했다. 날벌레도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독했다. 여름에 모기에 물린 적이 없을 정도로 매캐한 내 체향은 그 누구의 호감도 얻지 못했다. 평소에는 잘 숨기고 다녔으나 예쁜 물건을 받은 기쁨 때문에 조금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칠칠치 못한 짓을 해버렸다. 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음인이 기쁨에 차서 향을 내는 것은 본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나처럼 괴상한 향은 주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었다. 희락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이렇게 멋진 정자에 올라 풍류를 즐기는데 매캐한 향이 흘러 얼마나 불쾌했을까.
“죄송합니다, 역겨우셨을 텐데.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향을 갈무리했다. 들뜨는 감정을 가라앉히자 그제야 내 몸의 향이 제대로 맡아졌다. 매캐한 탄내와 거의 사라져 가는 황제의 체향 사이로 친왕의 체향이 심술궂게 묻어 있었다. 허리에 옥패를 달아준답시고 달라붙었을 때 묻은 체향이었다. 정을 통한 것은 아니기에 조금 겉돌고 있었으나 다른 양인의 신경을 거스를 정도는 되었다.
이대로 황제에게 불려 가면 좋은 꼴은 못 당하겠구나. 이마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아가고 있었다. 황제가 부를 때가 다 되어서야 날 정자로 불러 체향을 묻힌 친왕의 심술이 새삼스레 와 닿았다. 희빈에게 끌려간 사실을 황제에게 알려주고, 징벌실의 감옥에서 꺼내어 주고, 이렇게 선물까지 주며 체향을 묻힌 것은 분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황제의 심기를 긁고 싶어서? 그로 인해 내가 고통받기를 원해서?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금붕어에 손끝을 얹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의 황홀함이 쓸쓸하게 가라앉는 내 마음을 조금 달래주었다. 친왕이 무엇을 계획하든 어차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원하는 도구가 되어 휘둘리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희롱하면 희롱당하고, 귀물을 주면 받고, 노래를 하라면 하는 수밖에.
“역겹지 않은데.”
“네?”
“역겹지 않다고. 누가 역겹다고 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으면 되었다.”
친왕이 갑작스레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뭐가 역겹지 않다는 것인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친왕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기가 막힌 듯 보이기도 했다.
“형님의 취향은 언제나 이상했지.”
“송구합니다.”
황제의 취향은 확실히 이상했다. 나처럼 이상한 반쪽짜리 음인을 종종 품었고 아름다운 희빈을 독수공방시켰다. 문득 황제에게서 다른 음인의 체향을 맡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에게선 언제나 황제의 체향만 났다. 황제를 모셨던 첫날밤 약간 모난 구석이 있는 양인의 향을 맡은 적은 있었다. 후궁 중에 양인은 경빈 하나뿐이므로 분명 그녀의 향이었으리라.
양인과 음인이 정을 나누면 체액을 받아들이는 음인의 경우 상대의 체향을 오랫동안 품게 되지만 양인은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이삼일 만에도 음인의 향을 잃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을 감안한다 해도 지금까지 황제에게서 다른 이의 체향을 맡은 적이 없다는 건 어찌 된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야.’
날 찾을 때는 지극히 기분이 저조할 때이므로 그 전에 다른 이를 안지 않았을 뿐이리라. 괜히 연약한 음인의 목을 조를 수도 있으므로 주의한 것이리라.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긴장을 해야 할 때였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언제 만날지 모를 황제가 아니라 눈앞의 친왕이었다. 지금 그는 날 시험하고 있었다. 친왕은 날 구해주지 않을 거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구해줄 것처럼 마음을 들뜨게 하다가, 막상 상대가 넘어가면 버리는 것이 그의 놀이라고 했다.
참으로 변덕스럽고 못된 취미니 결코 한눈팔아선 안 된다고 황제는 경고했다.
“술을 따르겠습니다. 전하.”
나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친왕의 잔에 술을 따랐다. 친왕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굳어 있었지만, 오늘 종일 기분이 널뛰듯 하였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그 후 자리가 파할 때까지 친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달이 떠오르기 직전 술자리는 막을 내렸다. 친왕은 술잔을 들이키는 틈틈이 날 바라보았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몸으로 술을 따르러 가서는 친왕의 체향과 호화로운 옥패를 매달고 온 내 모습에 사람들이 오해하기 시작했다. 친왕의 첩이 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느냔 소문과, 그래 봤자 노리개일 뿐이라는 말이 함께 돌았다. 깨끗해진 처소와 새로 지급된 의복, 풍성해진 식사 속에서 나는 조용히 이 모든 것의 끝을 세고 있었다.
희락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의 상처 또한 거의 아물어 실밥을 뽑았다. 의관은 심하게 움직이거나 부딪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는 진단을 내렸다. 의관의 진단은 분명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침소로 불려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희락기에 들어서면 부르려나.’
희락기가 올 시기는 아니었으나 몸이 약해졌기 때문인지 시기가 당겨지고 말았다. 머리에서 열이 오르는 일이 잦아지고 잠이 얕아져 깨는 일이 늘었다. 체향도 조절하기 힘들어져 내 방은 너구리굴처럼 매캐해졌다. 시중을 들려고 온 이들이 처소의 문가에서 흠칫 몸을 떨며 코를 막는 모습에 신경이 뒤틀렸다.
궁에 들어온 뒤 총 네 번의 희락기가 있었고 그중 두 번을 황제와 함께 보냈다. 혼자 지내야 할 땐 억제제가 주어졌으나 잘 듣지 않아 괴로웠다. 접객소의 다른 이들처럼 아무나 끌어들여 몸을 달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괴로움을 고스란히 버틸 때엔 비빈도 아닌데 이러고 있는 모양새가 억울하고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체향으론 어차피 그 누구도 유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체향은 불타는 풀과 비슷한 냄새여서 매캐한 연기를 들이켜는 것 같다고 했다. 향기로운 꽃냄새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부드러운 향이라면 좋았을 텐데 도저히 꺼내놓고 다닐 수가 없는 체향이었다. 발현 전에 살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토록 냄새가 독한 거라고 빈정거리는 이도 있었다. 한여름에 벌레도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독한 향이라 악귀가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었다. 희락기에는 그 향이 더 짙어지게 마련이니 황제도 날 안는 게 고역이었을 텐데 용케 두 번이나 함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해.”
황제가 불렀을 땐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희락기엔 특히 더했다. 두 번뿐이었지만 고통스럽고 끔찍했다는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엔 기대 같은 게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희락기는 고통뿐인 시간이 되었다.
차라리 부르지 않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다른 이와 함께 보내는 건 싫었다. 혼자 희락기를 보내야 했다던 희빈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도 나처럼 고통스러웠을까? 열감에 뒤틀려 울고 있는데, 자신의 짝이 다른 이를 찾아간다는 건 끔찍한 기분일 것이다.
흐릿해지는 뜨거운 이마를 벽에 기대었다. 차가움에 열이 떨어지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황제의 품에 있으려나, 그도 아니면 시커먼 억제제가 탁자 위에 있을까?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빨리 이 끔찍한 시간이 지나갔으면 했다.
다른 음인들에게 있어 체향을 풍기는 것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있어 체향을 조절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향을 맡는 사람들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있자면 고개가 점점 무거워졌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고 자연히 처소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음인의 희락기라는 것은 양인이 곁에 없을 경우 완전히 발현되지 않았다. 끊임없는 미열과 달아오르는 몸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이성을 잃고 사람에게 달려들진 않는 것이다. 억제제는 그 미열의 시간을 조금 빨리 끝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흐으.”
축축하게 젖은 이불 위에서 몸을 뒤틀었다. 열이 오른 몸에서 땀이 비 오듯 났다. 아랫배가 뭉근하니 저려 와 손을 뻗었지만 밑을 달래기도 전에 피부가 발진이라도 난 것처럼 간지러웠다. 예민하게 깨어난 성감이 양인의 정을 원하며 날뛰었다.
‘애매하게 정신이 붙어있는 게 더 안 좋아.’
아예 이성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텐데, 이렇게 침대 위에서 혼자 허우적거리는 게 수치스러웠다. 자위라도 하고 싶지만 언제 내관이 들어와 황제에게 불려 갈지 몰랐다. 손끝을 새워 음문 쪽의 엉덩이 살을 짓이겼지만 자극이 영 충분치 않았다. 밑에서 흘러나온 애액에 아랫도리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짐승 같아.’
희락기는 속된말로 발정기라고도 불렀다. 발정이 나서 아무하고나 붙어먹는 개새끼 같다고 평인들은 희락기에 들어선 이들의 흉을 봤다. 불쾌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성이 아직 남아 있지만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와 체향을 흘리기라도 하면 바로 다리를 벌리고 매달리게 될 테니까.
땀으로 눅눅해진 이불에 얼굴을 묻고 비비자 신음이 막혀 뭉개진 소리를 냈다. 헐떡이며 벌린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수가 없다. 열이 잔뜩 올라 머리는 멍한데 시야는 지독히도 선명해서 작은 먼지 하나하나가 다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밀어 넣자 애매하게 채워진 몸이 벌벌 떨렸다.
“아, 아흐.”
내벽이 경련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아랫배가 확 접히며 몸이 벌벌 떨렸다. 헐떡거리며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는 사이 다시금 간질거리는 감각이 아랫배를 덮쳤다.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고 움직였지만 부족한 감각에 안달이 났다.
애액이 잔뜩 손을 적시고 흘러나와 질척이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에 절정에 도달한 게 거짓말인 것처럼 이번엔 아무리 손가락을 밀어 넣고 흔들어도 끝에 도달할 수 없었다. 곧추선 성기를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흔들었다. 찔걱이는 소리가 나며 성감이 고조됐지만 희락기의 몸은 양인 없는 절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성기를 잡고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부풀었던 남근이 힘을 잃고 부드러워졌다. 양인의 정액으로 안쪽을 적시기 전엔 끝이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약을, 약이라도 받아야.’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눈물이 계속 흘러 눈가가 부풀어 올랐다. 억제제가 필요했다. 채워지지 못한 쾌락 때문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내가 느끼는 지점은 내벽 깊숙한 곳에 있어 손가락을 아무리 밀어 넣어도 닿지 않았다. 뭔가 집어넣을 것이 있나 숙소를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심하게 담백한 편이라 각좆 같은 것을 만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희락기는 언제나 힘들었지만,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성적인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황제와의 성교에 길들여진 몸은 쾌락에 젖을 때마다 폭력을 두려워하며 움츠러들었다. 억지로 끌어올려진 성감이 절정에 달할 때마다 황제는 목을 조르거나 뺨을 후려쳤고 쾌락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동시에 몸을 덮쳤다. 고통을 느끼면서 절정에 달하는 건 언제나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건드릴수록 간지러움이 커져만 가는 음문에서 손가락을 빼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자극하면 더 안 좋아진다는 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손을 대고 말았다. 잇몸 사이를 누르는 것과 똑같았다. 만지지 않으면 가라앉을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며 눈앞의 이불을 입에 물었다. 솜에 입이 막혀 숨이 가빠졌지만 입을 벌리면 민망한 신음이 흘러나와 견딜 수 없었다. 한 번 절정을 맛본 몸이 계속해서 쾌락을 보챘다. 잔뜩 젖어버린 아랫도리며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조차 자극처럼 느껴져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흑. 제발. 아…!”
누구라도 좋으니 몸을 달래줬으면.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느끼며 몸을 말고 있자니 서러움이 왈칵 일어나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본격적인 희락기에 들었다는 사실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아직 날이 밝아 날 부를 수 없는 거라면 억제제라도 보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식으로 방치하든 그의 마음이라지만 대체 언제까지 참고 버텨야 하는 걸까? 나는 황제가 구입한 노예고 그의 화풀이를 견뎌야 하는 장난감이지만 그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음인이기도 했다.
내 몸은 황제밖에 몰랐다. 물론 이 궁에는 황제에게만 속한 이들이 아주 많았다. 후궁의 수많은 여인들과 음인들이 황제만을 기다리며 독수공방하고는 했다. 그 대가로 황제는 그들의 생활을 보살펴주고 되도록 편안하게 희락기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원망이 솟아났다.
서럽게 웅크린 몸에서는 다른 이의 체향이 났다. 내 주인인 황제의 체향이 사라진 자리를 옅은 비린내가 차지했다. 친왕이 장난치며 남겨놓은 체향이 희락기의 열을 가중시켰다.
‘친왕에게 애원해볼까.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주지 않을까?’
멍한 머리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황제가 경고했던 것도 같은데. 구해주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극양인의 체향에 의해 촉발된 희락기는 더 강한 자에게 안기는 게 뭐가 나쁘냐고 속삭였다. 내 의무는 황제의 화풀이를 받는 것이지 그의 아이를 잉태하는 게 아니니 상관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경고했지.”
나는 자신의 것이니 다른 이의 손을 타선 안 된다고 했다. 아니, 정확히 그런 말은 아니었던 것도 같지만. 그래도 날 자기 것이라 말해줘서…….
“기조. 거기 있는가?”
처소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목소리였다. 약재를 가지고 왔다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왔을 것인데, 밖에서 묻는 걸 보니 황제가 부른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발정이 나 몸을 떨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정신이 확 환기되었다. 한껏 웅크린 몸을 풀고 침대 위에 바로 앉았다.
“황제께서 부르시네. 움직일 수 있는가?”
“아니요.”
“그럼 들어가겠네.”
내관이 콜록거리며 처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희락기의 음인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침소의 내관은 몸을 닦을 물과 수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침상에 기운 없이 앉아 다가오는 내관을 바라보았다. 땀과 애액에 축 젖어 있는 꼴이 민망했지만 숨길 방법도 이유도 없었다. 내관은 무심한 태도로 다가와 내 옷을 벗기고 얼굴과 아랫도리를 닦았다.
황제는 무치라지만 어째서 나까지 수치심을 잃은 것일까?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위한 탓에 흘러나온 정액이며 애액이 엉망으로 허벅지에 엉겨 있었다. 그것을 내관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 모습을 나 또한 무심하게 바라보며 마음이 무뎌지는 것을 새삼 느꼈다.
“침궁에서 준비하고 있으라 하셨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약은 침궁에 준비되어 있네. 걸어갈 수 있겠나?”
“……아니요.”
“그런 것 같군.”
동문서답하며 대답할 생각도 않는 내관의 모습에 답 듣기를 포기했다. 체향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내관이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 내 몸을 덮었다. 이불로 체향이 완전히 막아지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가릴 필요는 있었다. 샛길이라고는 하지만 궁을 가로질러 황제의 침전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후궁들은 자신의 거처가 있으므로 희락기에 들어서면 황제가 그들의 궁으로 갔다. 하지만 황제가 내 처소로 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내가 황제의 침궁으로 어떻게든 가야 했다. 이불에 둘둘 말린 내 몸을 내관들이 들어 올렸다. 정수리까지 감싸인 탓에 숨쉬기도 힘들었으나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다행이었다. 직접 걸어가야 했다면 중간에 주저앉아 아무나 붙잡고 매달리게 되었을 테니까.
잠깐 정신을 잃었을까.
흔들리는 이불 속에서 잠깐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기억이 끊어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제법 익숙해진 황제의 침궁이 눈에 들어왔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운 것을 보니 시간이 꽤 지난 듯했으나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깨어난 덕인지 한껏 들떠 올랐던 몸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기왕 황제를 만날 거라면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했는데.’
피곤함이 밀려와 얼굴을 쓸어내렸다. 황제의 불편한 얼굴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이성을 잃고 매달리는 게 나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매달리면 희락기가 끝난 뒤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황제를 마주하게 되는 것만큼 어색한 일이 없다.
“깨어났나?”
“방금 몸을 일으켰사옵니다.”
“물러가라.”
침실 밖에서 황제와 내관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락기가 되면 황제는 주변을 물렸다. 나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주변 단속할 일이 뭐 있다고 저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숨길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황제가 날 대할 때의 특이한 성벽은 유명했지만 희락기엔 좀 달랐으니까.
“정무가 늦어 빨리 올 수 없었다. 힘들었겠구나.”
침대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무서웠다. 한껏 고양된 양인의 체향이 침실 가득 차올랐다. 숨이 턱 막혀오며 간신히 진정됐던 몸에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가엾게도.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섬섬옥수라 할 만큼 아름다운 손가락이었다. 정교한 예술품처럼 잘 다듬어진 손가락이 이마에서부터 살갗을 쓸며 내려가는 것에 열이 확 붙었다. 아랫배가 긴장되며 몸이 부르르 떨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부드럽고 낮게 웃었다.
“운이 좋구나. 짐도 희락기가 가까운지라 오늘 널 그냥 보내진 않을 것이다.”
저번 희락기에 황제는 열에 들떠 꿈틀거리는 날 묶어놓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침상에서 떨어진 의자에 앉아있는 양인의 모습은 안 그래도 박살 난 내 음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처박았다. 내 향이 누군가를 유혹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라는 것도 그날 실감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발정 난 음인이 앞에 있는데 몸을 섞은 적이 있는 양인이 쳐다보기만 한다는 건 어디 가서 말해도 믿지 않을 얘기였다. 하지만 황제의 말처럼 운이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행일 리가 있나.’
달뜬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아랫입술을 핥으며 들어오는 혀가 질척하고 음습했다. 서로 즐겁게 쾌락을 나누기 위한 정사가 아니라 좋지 않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정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아오르고 싶지 않은데도 멋대로 뜨거워지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난초 같기도 하고 먹을 갈아낸 것 같기도 한 우아한 향을 맡으며 나는 한껏 발기한 아랫도리로 손을 내렸다. 선액이 흘러나온 성기가 미끌거렸다.
“안 되지. 멋대로 만지면.”
손톱으로 피부를 슬슬 자극하며 내려가던 황제가 내 손목을 잡아 올렸다. 머리 위쪽으로 결박한 손목을 몸무게로 내리누르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까끌한 수염이 목덜미를 긁고 혀가 귓불을 핥았다. 허리가 절로 튀어 올랐다.
“이대로 박아줄까? 아주 홍수가 났군.”
애무라고 할 것도 없는 자극인데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뒤로 실금이라도 하는 것처럼 애액이 흘러내렸다. 제어가 되지 않아 불쾌한 기분에 다리를 꾹 오므렸지만 황제의 무릎이 벌리고 들어왔다. 다리가 벌려지면 고여 있던 애액이 줄줄 쏟아졌다.
“으아아, 으.”
“지금 여기에 넣어줘도 아무 느낌도 안 들 것 같은데. 미끈거리기만 하고 내 좆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겠지. 안 그래?”
“아. 제발.”
“누가 말해도 좋다고 했지?”
박아주지 않는 황제가 원망스러웠다. 양인을 아예 만나지 않으면 모를까, 일단 양인의 체향이 이 정도로 노출이 된 이상 체액을 몸속 깊이 몇 번이고 받아들여야만 희락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황제는 내 희락기를 쉬이 끝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게를 실어 내 몸을 내리누른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다른 이의 냄새를 묻히고 나타나다니. 짐이 부러 시간을 내어 주제넘은 짓을 하지 말라 경고까지 해주었거늘.”
“죄, 죄송, 죄송….”
“말하지 말라 하였잖아.”
황제가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듯 말하며 찍어누르던 것을 그만두고 일어섰다. 침상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모습에 핏기가 가셨다. 떨리는 눈으로 방 안을 살피자 예전에 날 지켜보기만 할 때 앉아있었던 의자가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챈 것인지 황제가 웃었다.
“뭘 그리 두려워해? 걱정하지 말라 했잖아.”
손이 자유로워졌지만 아까처럼 아랫도리를 스스로 잡고 흔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친왕의 체향을 묻히고 온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차가운 눈빛이었다. 친왕을 거절할 수 있는 신분도 명분도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책망하기만 하니 트집이 따로 없었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마치 귀여운 애완동물을 어르듯 황제의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귓가의 잔머리를 넘기고 뺨을 쓰다듬고, 얼굴 여기저기에 짧은 입맞춤을 떨어뜨렸다. 마치 사랑받는 대상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지러웠다. 황제의 침의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가깝다고 생각할 때였다.
“으욱!”
“제대로 해라. 짐의 화를 풀어 주어야지. 응?”
뒷머리를 잡혀 황제의 사타구니로 얼굴이 처박혔다. 짙은 체향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덜덜 떨며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잔뜩 발기한 황제의 양물이 파고들었다. 혀를 구겨지고 침이 질질 흘렀다. 입 안의 살점을 뭉개며 목구멍을 두들기는 거친 삽입에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목젖을 꾹꾹 누르는 귀두가 유난히 더 두껍게 느껴졌다.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 삼켜.”
“우읍! 욱!”
음식물을 삼키듯 식도를 열고 목을 울려 삼키자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토할 것 같다. 숨이 막혀오는데 뒷덜미를 잡아챈 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다른 손이 목젖을 쓰다듬거나 장난치듯 툭툭 두드릴 때마다 신경이 바짝바짝 곤두섰다.
몇 번 앞뒤로 오가며 입 안에 길을 낸 황제는 곧 내 코가 뭉개질 정도로 거칠게 허리를 박아왔다. 귀두로 볼을 찌르거나 입천장을 긁어댈 때마다 비릿한 성기 냄새에 신물이 올라왔다. 그가 가르쳤던 대로 혀를 내어 기둥을 핥자 가당찮다는 듯 비웃으면서도 잠시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황제의 가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정성껏 혀를 놀렸다. 양인의 진한 체향을 직격으로 받은 몸이 아찔하게 달아올랐다. 기둥을 입술로 문대고 귀두의 갈라진 틈 사이를 혀끝으로 파고들었다. 핏줄이 불거지며 부피를 더하는 양물의 끝을 빨자 황제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내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머리카락과 함께 두피가 당기며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내 동생에게도 이런 식으로 봉사해 줬나?”
황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잔뜩 부푼 양물을 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아까보다 커진 양물은 입 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으나 그는 내 목을 젖히고 끝까지 밀어 넣었다.
깊숙이 박은 채 버티는 양물 때문에 한껏 열린 목구멍이 되새김질하듯 꿀렁거렸다. 벗어나기 위해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밀쳤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버둥거려 보았지만 작정하고 힘을 쓰는 양인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고 정신이 끊어질 찰나, 숨통이 트이며 쪼그라든 폐 속으로 공기가 들이찼다.
“커윽. 커헉! 욱! 우웩!”
눈물과 침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뒷덜미를 잡은 손이 무게를 가늠하듯 머리를 잡고 흔드는 것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숨이 모자라 부들부들 떠는데 성기가 다시 입 안에 처박혔다. 체향과 체액 때문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과는 별개로 목구멍이 쓰라렸다. 작지도 않은 살덩이가 입을 가득 채우고 들어와 방금처럼 깊숙이 밀려들었다. 목구멍에 처박힌 상태로 한참을 버티던 양물이 한층 더 부푸는 것에 눈이 뒤로 뒤집혔다.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떨자 바로 숨통이 다시 트였다. 욕이 절로 나왔다. 숨을 제대로 삼키기도 전에 잠깐 뒤로 밀려난 양물이 다시 목구멍을 막았다.
뒷덜미를 잡힌 채 머리가 계속 흔들려 눈앞이 깜빡거렸다. 잠깐 입 안이 비어 숨을 들이쉬려 해도 성기가 바로 처박히는 통에 귀두가 몇 번이고 기도를 찔렀다. 빌어먹게도 아랫도리는 노골노골 풀어져 애액을 흘려댔다. 발정 난 짐승도 이런 짓을 당하면 이를 드러내고 물어버릴 텐데, 희락기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달아오르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한참을 목구멍에 쑤셔대던 성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부르르 떨리더니 목구멍에 뜨거운 액체를 한참이나 쏟아냈다. 지독한 구토감에 발버둥 쳤지만 뒤통수가 황제의 손아귀에 꽉 잡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액을 삼키자 식도도 뱃속도 간지럽게 달아올랐다. 미끄덩한 감촉에 헛구역질을 하자 황제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하거나 뱉어낼 수 없어 밀려 나온 것들을 다시 삼키자 그제야 만족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개새끼.
“그렇게 울면서 노려보면 쓰나.”
“흐으… 흐윽.”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니. 생리적인 눈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뿐이다. 구음을 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지나치게 난폭한 태도에 두려움이 치솟았다. 희락기는 이제 시작인데 정신력이 벌써부터 바닥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지만 한 번 터져버린 울음은 그칠 생각을 않았다.
황제가 짜증스런 손길로 내 가슴을 밀었다. 침상에 확 밀쳐져 천장을 보고 있자니 황제가 심기 뒤틀린 맹수처럼 느릿하니 올라탔다. 뒷덜미를 잡고 흔들던 손이 이번엔 발목을 잡고 넓게 벌렸다. 시커멓게 가라앉은 황제의 눈동자가 애액과 정액으로 질척거리는 아랫도리를 적나라하게 훑어 내렸다.
“더러워.”
“흐윽, 흑!”
“역겹고.”
평소 인간 취급당하지 못하는 것엔 익숙한데, 오늘은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 희락기엔 감정이 평소보다 널뛴다지만 정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근데 왜 버릴 수가 없을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황제가 입을 맞추며 뭐라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아랫도리로 두툼한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아학!”
“큭!”
자신도 희락기가 다가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가. 잔뜩 젖어 있지만 제대로 풀려 있지는 않은 구멍을 두툼한 귀두가 비집고 들어왔다. 미끌거리는 애액의 도움을 받아 끝까지 밀고 들어온 양물이 적응할 시간도 없이 주르륵 다시 빠졌다. 아랫배가 확 땅기며 뒷골이 띵해졌다.
차라리 고통만 느낀다면 좋았을 텐데, 며칠에 걸쳐 차근차근 달아올랐던 희락기의 몸이 양물의 침입을 기뻐하며 벌름거렸다. 귀두만 간신히 걸치고 있던 성기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박혔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던 아랫도리가 조여들며 쾌락이 등줄기를 타고 달렸다.
“아! …아아!”
손 아래 잡히는 이불을 마구잡이로 쥐어뜯었다. 몸 안으로 양물이 두어 번 밀고 들어왔을 뿐인데 절정에 달한 몸이 정액을 질질 흘렸다. 순간적으로 기운이 확 빠졌지만 황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부피를 다시 키운 양물이 내벽 이곳저곳을 쑤시고 박아댔다.
길고 굵은 성기가 내벽 깊숙한 곳의 쾌락점을 찾아 익숙하게 찌르고 문댔다. 폭력으로 점철됐을지언정 황제와 내 잠자리는 꾸준히 이어졌고, 황제는 내가 느끼는 지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넣고 비비기만 해도 절정에 달하는 몸이었다. 작정하고 느끼는 곳만 찔러대자 과도한 쾌락에 몸이 벌벌 떨렸다.
구음할 때와는 다른 이유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정 때문에 뒤로 휜 허리가 바들바들 떨리며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불을 발꿈치로 밀며 버둥거리자 발목을 잡혀 어깨 위로 올려졌다. 손목까지 황제의 손에 잡혀 결박되자 그의 품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길고 두꺼운 성기가 안쪽을 퍽퍽 치대다 말고 사정을 시작했다. 뜨끈한 액체가 배 속을 가득 채우고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울음을 터뜨리며 팔다리를 흔들었지만 황제는 진정할 시간도 주지 않고 허리를 재차 움직였다.
“아, 아! 그만…!”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황제가 싸지른 정액이 퍽퍽 튀었다. 감당하기 힘든 쾌락에 숨을 할딱거리며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벅지며 아랫배가 푸들푸들 떨렸다. 비명과 신음이 뒤섞여 짐승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제에게 애원하는 내 목소리가 이명에 뒤섞여 멀리 들렸다. 이러다간 뇌가 쾌락으로 타버릴 것이다. 공포에 질려 애원했지만 황제는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흐! 악! 하악!”
어느새 다시 두툼해진 성기가 느끼는 점만을 콱콱 눌렀다. 버둥거릴 힘조차 없어 느리게 꿈틀거리자 황제가 혀를 입술로 핥으며 아랫배를 꾹꾹 눌렀다.
“아악!”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내 성기는 제어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묽은 정액을 질질 흘렸다. 제멋대로 뒤틀린 골반이 경련을 일으켰다. 황제의 손이 잘게 떨리는 아랫배를 계속 누르며 내벽 깊숙이 박힌 자신의 성기를 자극했다. 온몸의 신경이 아랫도리로 몰려있는 듯했다. 밀려드는 감각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황제가 성기를 주욱 길게 뽑았다.
“후우. 움직인다.”
“아, 안 돼, 안 돼!”
황제가 내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누르고는 허리를 치댔다. 물리적으로 좁아진 내벽이 아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비벼졌다. 더 이상 강해질 자극이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떨어진 더한 절정에 잠깐 정신이 끊어졌다.
“이제 좀 조이는 것 같네. 아깐 너무 헐렁해서. 후.”
“아! 아악! 아아악!”
아무리 발버둥 쳐도 황제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커다란 손이 배를 누를 때마다 쾌락점이 넓게 뭉개졌다. 황제의 두툼한 성기가 넓어진 쾌락점을 문지르고 찔러대자 한계를 넘어선 쾌락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 * *
황제는 내게 폭력을 휘둘렀다.
주먹을 휘두르지 않아도 그가 내게 저지르는 것은 폭력이었다. 얻어맞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감각이 타버리는 듯한 쾌감은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언제나 적당히, 미지근한 태도로 봉사 받던 것과는 달리 궁지에 몰린 것처럼 달라붙었다.
잠깐 정신을 잃고 깨어나도 내 몸은 흔들리고 있었다. 황제는 몇 번이고 사정했지만 희락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의 이성이 깜빡거렸다. 침실 안은 밝은 것 같기도 하고, 어두운 것 같기도 했다. 중간중간 삼키기 쉬운 음식이 주어졌고 시커먼 약물 또한 주어졌다.
희락기에는 피임약이 잘 듣지 않았다. 때문에 임신을 피하기 위해선 중간중간 계속해서 약을 먹어야 했다. 황제는 나와의 사이에서 아이 갖길 꺼렸다. 지나칠 정도로 주의하는 그 모습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추측했다. 내 신분이 낮기 때문에. 내 외양이 평인과 다를 바 없어서. 사랑하는 다른 이가 마음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전부 다 진실이 아니었다.
애액이 적은 편이 아닌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추삽질에 내벽의 살점이 딸려 움직였다. 귀두가 느끼는 지점을 난폭하게 짓이기고 뭉개며 파고들었다. 기운 없이 늘어진 팔다리가 바르작거렸다. 절정에 달한 내벽이 숨을 헐떡이는 것마냥 벌름거렸다.
그때 몸속의 양물이 부피를 확 더했다.
목을 한껏 뒤로 꺾고 입을 벌렸지만 비명도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뒷머리만 침상에 비벼댔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가가 아팠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아 눈물을 닦을 수조차 없었다. 배속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결착이었다.
“왜 너일까?”
어디선가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 과거에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때는 조금 더 젊었던 것 같은데. 내 과거는 부서진 조각 같은 것이라서, 원래 어떤 모양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자 황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비통함으로 가득 찬 얼굴은 익숙한 것이었다. 저번 결착 때도, 그 이전의 결착 때도 황제는 참담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했다. 왜 너냐고 물으며.
“……폐하.”
“어서 기억난다고 말해. 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해.”
“폐하.”
황제는 내 몸속 깊이 파정하며 날 끌어안았다.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런 손길이었다. 방금 전까지 비명을 내지르고 발버둥 친 것을 깔아뭉갰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기억난다고 하면 다 주마. 널 황후로 봉할 것이다. 너는 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것이다.”
“…….”
가끔씩 꿈을 꾼다. 첫날밤에 황제는 내게 결착을 하고, 나는 사랑받는 총비가 되어 그의 아이를 가진다. 달콤한 꿈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거짓이었다. 십 년 전의 일을 기억해내라는 요구에 나는 정말로 대답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친왕이 네게 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기억난다고 한마디만 하면 뭐든 해주마. 정자가 있던 자리에 궁을 지어주고, 싫은 사람이 있다면 죽여줄 것이다.”
몸속을 가득 채운 성기가 결착을 끝내고 서서히 줄어들었다. 잉태되지 않는 씨앗을 허무하게 남기고 빠져나가는 살덩어리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기회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파편뿐. 그리고 그 파편에는 황제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울먹이는 아이 같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거짓을 지어 말하는 건 쉬웠다. 황제 또한 내가 거짓을 말하길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는 폐하의 형님이 아닙니다.”
“그건 알아. 그 얘기가 아닌 걸 알고 있잖아! 네가 무슨 짓을 했다 해도 용서할 것이다. 그러니 말해.”
“제 과거를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굳이… 들을 필요도 없으신 게 아닙니까?”
말할 수 없었다. 황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내 과거를 밝히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는 내가 과거를 고백하길 원하지만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형과 얼굴이 닮았기 때문에, 혹 같은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근친에 대한 터부 때문에 날 자꾸 내치려는 걸 수도 있다. 그게 아니고서야, 대체 무슨 의심이 결착한 음인을 이런 꼴로 만들겠는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조각이라도 황제에게 말해 준다면 그는 의심을 풀고 날 아껴줄지 모르지.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과거의 기억은 도저히 누군가에게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정말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짓말쟁이.”
황제의 손아귀가 목을 조여 왔다. 죽일 듯 조르다가 겁을 먹고 물러났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길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던 황제는 곧 증오 어린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부서질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던 것이 무색하게 무자비한 폭력이 몸 위로 쏟아졌다. 살이 터지고 멍이 들었다. 뼈가 부러진 듯도 했지만 확실치 않았다. 어금니를 악문 황제의 턱이 불거져 있었다. 방금 전 결착한 자신의 음인을 때리며 황제 또한 무너지고 있었다.
고장 나면 안 되는데.
결착한 상대가 죽으면 다른 한쪽도 오래 살지 못한다. 영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며 서서히 망가졌다. 그러니 나는 고장 나선 안 되고, 황제는 나와 결착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내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화풀이를 하는 것이어야 한다. 황제와 나는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어야 한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전민이 되기 전의 나는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가끔씩 떠오르는 과거는 핏빛으로 얼룩져 있고 칼을 다루는 것에도 익숙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거나 그늘 속에 몸을 감추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과거에 사냥꾼이었다는 사람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사냥의 대상이 인간이었을 뿐이다.
나는 선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과거에 지은 죄의 무게에 짓눌려 악몽을 꾸지도 않고 필요하다면 다시 죄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황제는 내 은인이니 지켜주고 싶었다.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견딜 수 있었다. 이건 아마도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는 옥좌에 앉아 있는 자이며 이 땅의 흥망성쇠를 쥐고 있으니, 나처럼 비천한 자 때문에 괴로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십 년 전의 기억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목매달고 있었다. 시야의 한쪽에 있는 밤송이가 산뜻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매달리는 자의 얼굴은 내 얼굴과 비슷했다. 혀를 길게 빼물고 팔다리를 버둥거려서 길고 화려한 옷자락이 풍경(風磬)처럼 흔들렸다. 천을 당기며 했던 생각이 기억난다. 의뢰 대상과는 만나지도 못했는데 일이 단단히 꼬였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황제의 형을 죽였다. 하지만 그를 죽이기 위해 궁에 잠입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십 년 전의 나는 대체 누구를 죽이기 위해 이 궁에 들어온 것일까?
과거의 조각들이 빙빙 돌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 * *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깼다.
지독할 정도로 고통스런 희락기였다. 눈을 뜨자 시커멓게 멍든 팔이 보였다. 일어나려 했으나 몸에 추라도 단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워있으면 내관들이 알아서 옮겨주겠거니, 태평한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접객소에 속한 노예 하나가 분수에 맞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 시정토록 하라. 사치스런 물건은 거둬들이고 그와 같은 행태를 묵인한 내관을 강등시켜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예. 폐하.”
“그렇다 하여 짐의 체향을 지닌 이가 다른 이의 시중을 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나이다.”
황제가 내관에게 명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았던 시절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제 처소로 돌아가면 멀쩡한 물건이 없을 것이다. 괜히 잘해줬다가 봉변을 당한 내관들도 날 역병신마냥 피하고 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친왕은 당장 동부로 향하여 호부시랑이 남긴 죄상을 정리하고 동평왕의 직위를 수행하라. 궁에서 흉한 일이 발생하여 민심이 어지러우니 황가의 일원이 모두 힘을 합쳐 움직여야 할 것이다.”
갑작스런 발령이었다. 마치 쫓아버리는 듯한 내용에 내관이 당황하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친왕이 나를 계속 건드리는 게 그렇게나 못마땅했던 걸까? 내가 자신의 형과 닮았다는 이유로 책임지는 것조차 거부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독점욕을 보일 때마다 우울하고 피곤해졌다.
명령을 마친 뒤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온 황제가 침상 옆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공기에 코끝이 찡해졌다. 희게 바랜 하늘이 마른 가지로 뒤덮여 잘게 떨고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몇몇 과실을 두고 새들이 요란스레 다투며 악다귀처럼 짖었다.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