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쿠하힐
쿠하힐.
생각보다 제대로 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수캐나 암캐. 아, 그전에는 뭐라고 불렸더라?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주인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여자였지만, 팔도 쓰지 못하고 약까지 중독된 자신을 산 사람이라면 그 밑바닥에는 뭐가 깔려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얼마나 자신을 데리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에스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의 행동은 예상의 범위를 한없이 벗어나기만 했다. 씻기고, 옷을 입히고, 먹이고. 심지어 잠자리는 손님방이었다.
푹신한 카펫과 비단 침구를 바라보며 쿠하힐은 도대체 이 여자가 자신과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정한 주인 놀이?
그리고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난 약을 맞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군.’
친절한 주인에게 매달리는 노예를 보고 싶은 건가.
난 작게 신음을 삼켰다. 금단현상을 괴롭다.
그건 단지 「괴롭다」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한계를 한없이 뛰어넘는 괴로움이었다. 그걸 보는 걸 즐기는 주인이라면 앞으로는 상당히 몸이 축날 것이다.
뭐, 이미 약에 의해 몸도 마음도 정신도 다 부서지기는 했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앉아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천천히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거추장스러운 팔을 잘라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다. 감각이 살아 있고 움직이지 못하는 팔은 주인들의 좋은 장난감만 될 뿐이었다. 게다가 그게 붙어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난 멋대로 팔이 경련하듯 꿈틀거리는 걸 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비틀거리며 에스카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방문을 꼭 닫혀 있었고 난 숨을 헐떡이며 방문을 걷어찼다.
주인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제대로 잘, 순종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쿠?”
얼마 지나지 않아, 애태우는 시간도 없이 방문이 확 열렸다. 놀란 그녀의 앞에 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야…… 약을…… 흐…….”
“아, 맞다!”
그녀는 정말로 잊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예상과는 달리 애태우거나 애원하는 걸 지켜보는 가학성은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약을 찾아서 나에게 주사했고 곧 머릿속을 태워버릴 만큼 강렬한 쾌감이 온몸에 퍼졌다.
지금 당장 사정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성욕이 척추를 타고 뇌를 태워버릴 듯 밀고 들어왔다.
난 바닥에 몸을 비비며 주인님에게 애원했다. 그리고 역시 그녀는 별다른 이의 제기도 하지 않고 내 성기를 손으로 붙잡고 핸드잡을 해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나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 쾌락이 너무 좋아서 이대로 돌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사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치지는` 못했고 주인은 그대로 2차전에 들어갔다.
난 흐느끼며 그녀의 손에 반응하는 한 마리의 발정 난 짐승일 뿐이었다. 그녀가 내 옷을 벗기는 게 어렴풋한 이성으로 느껴졌다.
‘아, 드디어 시작인가?’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고, 에스카는 세 번째로 내가 사정하게 도와주었다. 그제야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난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정액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고 그녀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정액투성이의 손을 내가 벗은 옷에 닦고 있을 뿐이었다. 난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아직 몸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스카가 날 밀어 상체를 세워주며 물었다.
“괜찮아? 물 좀 줄까?”
그녀의 어투는 어디까지나 상냥해서 기가 찰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 주인님은 나와 무슨 놀이를 하고 싶은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대로 무릎의 확 꺾였고 앞으로 쓰러지는 나를 주인님이 붙잡았다.
“으아, 괜찮아?!”
정말로 걱정하는 것 같은 목소리.
“왜…….”
“응?”
“왜…… 절 사신 겁니까……?”
“충동구매.”
그녀의 대답은 빨랐고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충동구매라니.
‘그냥 호구인가? 아니면 동정?’
어느 쪽이든 그녀가 곧 나를 팔아버릴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팔 병신에 약물중독인 노예를 누가 오래 데리고 있겠는가?
난 벽에 기대서서 숨을 골랐다.
아직도 약 기운이 다 빠지지 않아 머릿속에 안개라도 끼어 있는 기분이었다.
‘동정 때문에 날 산 거라면, 약이라도 잔뜩 줘서 죽여주면 좋을 텐데.’
웃음이 나와 히죽히죽 웃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집은 귀족들의 집과 다르고, 그렇다고 농민의 집도 아니었다. 어디를 갔나 했던 주인은 빨대와 물을 가져왔고 난 물을 전부 마셨다.
“피곤해?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수 있어.”
주인의 말에 난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난 그녀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크고, 몸집도 작지 않다.
주인이 날 옮기려면 바퀴 달린 수레라도 가져오지 않으면 불가능할 텐데.
“아, 한 번 더 해줄까?”
그 질문에 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스카의 눈은 황금색이었다.
‘흔하지 않은 색.’
그녀의 눈에는 경멸도 동정도 없었고 깨끗하고 투명했다. 시선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녀는 내 침묵을 찬성으로 알았는지 조심스럽게 내 성기를 붙잡았고, 난 저절로 허리를 떨며 신음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약 기운이 다시 날 절정으로 밀어 올렸고 난 입술을 깨물며 신음 소리를 눌러 참았다. 왜 이제 와서 신음 소리를 억누르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 안에 다시 정액을 토해내고 난 완전히 늘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올라갔던 기분은 약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그때부터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있는데 부드러운 게 가슴에 닿아 난 눈을 번쩍 떴다.
“괜찮아, 그냥 물이랑 수건이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따뜻한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건지 처음 알았다.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여자일까?’
주인은 내 몸을 깨끗하게 전부 닦고 나서 나에게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아니, 안 물을게. 그냥 내가 옮겨주지 뭐.”
그러더니 가뿐히 날 안아 들었고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꽤 자랑스럽게, 소년 같은 미소를 씩 지으며 말했다.
“마법이야.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지만.”
마법사……였던 걸까?
하지만 마법사의 옷차림이 아니었는데. 세공품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라면 에스카는 귀족일 것이다.
평민이 감히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니까.
하지만 귀족치고는 행동이 너무나도 파격적이었다. 이런 저택에, 달랑 혼자서, 노예의 수발까지 직접 들다니.
에스카는 날 침대에 눕히고 옷을 입혀준 후 잘 자라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푹신한 침대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잠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날 고칠 생각인 것 같아, 난 웃음이 나왔다.
약을 끊으라고?
대체 왜?
중독자가 아닌 양팔 못 쓰는 노예를 어디에다가 쓸 생각인 걸까?
“저 약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죠? 적어도 인세에서 맛볼 수 없는 극상의 쾌락이라도 맛보게 해주시죠, 주인님.”
그 말에 에스카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뺨을 긁적였다.
“음, 팔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그래?”
그 말에 난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팔을 고쳐?
다시 팔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힘줄이 잘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팔을?
희망을 주고, 믿음을 얻은 다음에 다시 나락으로 밀어 넣는 타입인 걸까.
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검.
검 손잡이의 감촉이, 휘두를 때의 바람을 가르는 그 느낌이, 갑자기 생생하게 떠올랐다. 만약에 한 번 더,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약을 줄이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딱히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더 마음이 놓였다. 지나치게 반응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줘야 하나 고민했을 테니까.
에스카는 나에게 식사를 하게 하고 자유시간을 주었다. 난 기꺼이 자유를 즐겼다.
바깥공기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숲길을 걷는 건 양팔이 없이는 꽤 힘든 일이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걸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곁에 오래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어쨌든 에스카 블란테는 좋은 주인이었다. 가학적인 성향도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팔도 고쳐주겠다고 했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
저절로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성적 봉사.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없었다.
1년간 철저하게 교육받고 써먹은 건 그것뿐이니까. 노예면 노예답게, 주인님의 욕구를 충족시켜드려야겠지.
어차피 난 그녀의 변덕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봉사하겠다고 했을 때 나온 그녀의 반응은 나에게 헛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아이 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쿠하힐, 음, 너 기사였다면서……. 그러니까 너도 자존심 같은 게 있고……. 나에게 봉사시키는 건…… 음…….”
기사?
그녀가 날 놀리는 거든, 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은 거든, 어느 쪽이든 실패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자존심이라니.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절 인간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군요.”
그런 건 사람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과거나 자존심 같은, 그런 마음 같은 건.
“당연하지. 그럼 인간이 아냐?”
순진한 소녀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스카가 하는 말에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
내가 인간이라고?
“그 조련장에서 제 일부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글쎄요.”
난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녀의 목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녀에게서는 섬세하고 따뜻한 향기가 났다. 뱃속에서 뭔가가 들끓어 올랐고 난 그게 욕망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부디 봉사하게 해주시죠. 적어도 제 존재 가치는 찾을 수 있게요.”
내가 그녀에게 봉사하는 상황인데도, 내가 위에 있다는 느낌이라 생소한 감각이 몸에 찾아들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스킬로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녀의 헐떡거리는 목소리와 내 머리카락을 붙잡는 부드러운 손가락은 나에게도 희미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정말로 경험이 별로 없는 건지 자극에 민감한 그녀의 몸은 금방 절정에 올랐다.
경련하는 그녀의 몸은 나에게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만족감에 난 스스로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랑할 게 혀 놀림밖에 남지 않은 기사.
동시에 몸을 떠는 그녀가 사랑스럽게도 느껴져서 난 부드럽게 그녀의 넘친 애액을 핥아 깨끗하게 정리해주었다. 어디까지나 난 그녀의 노예일 뿐, 본분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나를 저지하며 그녀가 피곤과 쾌락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쿠, 괜찮아. 그냥 씻을게…….”
그 말에 난 상체를 일으켰고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붉게 상기된 뺨, 나른한 얼굴, 촉촉한 황금색 눈동자.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표정에 복부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평범한 여자가 연인과의 정사 후에 지을 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인으로서의 정복감이라든가, 수고한 노예를 향한 칭찬의 표정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부드러워 보이는 몸, 가느다란 목과 풍만한 가슴, 가느다란 허리, 사슴같이 날씬한 두 다리.
여자들의 알몸을 보는 건 한두 번이 아니고, 그 어떤 알몸에도 익숙해졌지만 그녀는 달랐다. ……달라서 난 그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괴로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져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과 그럴 수 없다는 현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카가 수건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제 봉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난 봉사하는 노예고, 그녀는 주인이다.
“응, 엄청 좋았어.”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난 내 얼굴을 닦는 그녀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 누구의 손에 키스해본 게 얼마 만이더라?
그녀는 피식 웃었고 난 그저 눈을 내리깔았을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몇 번이나 그녀를 만족스럽게 해주는 노예가 되자고 생각하면서.
약을 줄이는 일은 순조로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괴로워서 난 밤마다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참아야 했다.
“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난 괜찮은 척을 하려고 애썼지만, 에스카는 침대까지 다가와 부드럽게 내 이마를 어루만졌다. 열이 나는 이마에 닿는 그녀의 차가운 손이 기분 좋아 저절로 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대체 얼마 만이지?’
아무런 욕망도 담겨 있지 않은 인간의 손길이…….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많이 아파?”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한 것뿐입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믿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고 난 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녀만큼 표정이 풍부한 사람도 처음이었다. 거짓 하나 없이,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이 드러나서 읽기가 쉬웠다.
“너무 힘들면 약을 천천히 줄여도 괜찮아.”
“아뇨, 이대로가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난 천천히 숨을 골랐다.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에스카가 손으로 가볍게 닦아주었다.
“그럼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
정말로, 그녀의 발언은 내 상상을 초월할 때가 많았다.
놀라운 점은 정말로, 그녀는 나에게 어떤 흑심도 없이, 순수한 호의와 선의로 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는데.
내 어미조차 날, 돈과 권력에 취해 팔아버렸는데. 전혀 얼굴도 몰랐던 이 사람은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주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역시 그녀에게 부응하기를 원했다. 그녀의 눈에서 실망이 나타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노예로서의 성적인 봉사가 아니라, 다른 면에서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에스카, 에스카 블란테.’
그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난 눈을 감았다. 에스카의 기척이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난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손을 잡았고 난 고통 속에서도 안정감을 찾으며 잠이 들었다.
봄이라도 산속이라서 날씨는 추웠다. 숲을 걷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서 난 눈을 감고 차가운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안개에 젖은 숲 냄새가 폐부 가득히 들어왔다.
엘란시아는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 있어서 이곳의 기후는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숨을 쉬다가 난 천천히 다리를 구부렸다가 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은 남아도니, 움직이는 것만이라도 예전 상태만큼 올려놓고 싶었다. 팔을 되찾고 나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본래 컨디션을 찾고 싶었다. 팔의 근육량이야 형편없이 떨어졌고, 코어근육도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벗은 채로 운동한다, 남에게 보이면 부끄럽다라는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 더욱 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2시간? 3시간?
다리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더 이상의 운동은 무리라는 걸 호소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낼 수 없으니 땀이 그냥 눈가를 피해 흘러내리기를 바라며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원래의 박동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시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골랐다. 근처 개울로 가서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이 없으니 이대로 미끄러지거나 잘못하면 빠져 죽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깊은 물에 머리끝까지 몸을 담갔다. 산의 물은 차가웠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다.
뭔가 잘못된 거라고, 아버지가 날 여기서 빼내줄 거라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믿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오른팔의 힘줄이 끊어진 날 어딘지 그 믿음이 희미해졌고, 다음 날 왼팔의 힘줄이 끊어질 때는 자신도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달라고.
‘양팔이 없어진 널 네 가족이 구할 것 같아? 쓸모없는 사생아를?’
깔깔 웃는 그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내 가치는 훌륭한 병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날 기사로 만들어준 것도 아버지였고, 국경에서 공훈을 세울 때 어깨를 두드려준 것도 아버지였다.
아버지.
아니, 그 개자식.
흐, 하고 짧은 웃음이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폐가 더 이상 숨을 참기가 어렵다고 필사적으로 고통을 호소했지만 난 여전히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네 팔을 고쳐준다고 해도?
투명한 금색 눈이 환각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난 자리에서 일어나 기침을 하며 물을 뱉어냈다. 개처럼 머리와 몸을 흔들어 털고 어깨로 가볍게 귓가를 쓸었다. 추위로 이가 딱딱 저절로 부딪쳤다. 그래도 땀범벅인 것보다는 나았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니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할 그녀가 웬일로 나와 있었다.
“쿠하힐!”
“주인님?”
“뭐야? 왜 또 젖었어?”
“그냥, 씻은 것뿐입니다.”
“춥잖아! 감기 걸려! 산의 추위가 얼마나 무서운데.”
그러며 에스카는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 손의 온기가 데일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날 난롯가 앞에 세워두고 그녀는 수건을 잔뜩 가져다가 내 몸을 닦았다. 그리고 낮은 스톨에 앉을 것을 명령하고 머리카락을 쓱쓱 문질러 물기를 닦아냈다.
“정말이지,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냐. 걱정하는 거라고.”
그녀의 손길이, 그녀의 걱정이 지나치게 달콤해서 난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지 주인에게 할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에스카는 날 닦은 다음 곧 옷을 가지고 나와 입혀주었다. 원피스처럼 생긴 넉넉한 옷이었지만 생김새가 어떻든 편리했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되었다.
“아까까지 뒷마당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져서 깜짝 놀랐어. 여기 산에는 늑대도 나온단 말이야.”
“흔적이라면 봤습니다.”
“그럼 조심해야지!”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하자 에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금갈색 머리카락은 항상 풀어져 있어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 젠장.’
난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런 감정은 이제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첫 번째 주인은 아니었고, 난 이미 여러 주인들에게 돌려진 경험이 있었다.
팔리고 팔릴 때마다 주인들에게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그들이 가하는 모든 짓들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그렇게 반응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에스카는 한정되었다고 해도 자유를 주었고, 자유는 스스로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의지를 가지게 했다.
주인이 노예에게 바라지 않는 것들을 그녀는 몽땅 그의 손에 쥐여준 것이다.
그리고 난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아직도 이런 마음이 남아 있었던 건가.’
다시 한 번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전부 사라졌다고 생각한 욕구가 튀어 올라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쿠.”
“네, 주인님.”
“약 줄이는 거 많이 힘들지?”
“견딜 만합니다.”
“너무 힘들면, 천천히 줄이는 게 어때?”
에스카가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결심했을 때 약을 끊지 못하면 실패할 것 같았다. 적은 양의 약은 쾌락이라기보다는 이제 고통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에스카의 손에 매달릴 때마다, 그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며 괜찮다고 다독이고 그 작은 혀가 살며시 살갗에 닿을 때마다, 오히려 난 그녀에게 중독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약이 아니라 그녀의 온기에, 손길에.
그건 사정하고 나서 반대로 에스카에게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제 나에게 익숙해진 듯했고 나 역시 그녀의 몸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에 이를 세울 때, 따뜻하고 좁은 질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을 때, 파드득 하고 떠는 에스카의 움직임은 한없는 즐거움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고 나면 약 기운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발기할 기운도 없을 텐데 반쯤 성기가 서기도 했다.
꿈속에서는 이미 몇 번이나 그녀를 안았다.
난 숨을 삼키고 에스카를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세요.”
“쿠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만…….”
그러면서도 걱정을 접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상념을 털듯이 고개를 흔들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녁 먹자. 배고프지? 오늘은 스테이크 구웠어.”
“맛있는 냄새가 나더군요.”
“헤헤, 내가 봐도 잘 구워졌거든. 얼른 와.”
에스카는 의자를 빼서 나를 앉히고 옆자리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테이크를 작게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스테이크를 먹여주며 말했다.
“둘이 같이 먹으니까 좋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챙겨 먹는 거 귀찮아서 적당히 먹게 되거든.”
“귀찮지 않으신가요?”
“어차피 본격적으로 요리하게 되면, 1인분이든 2인분이든 비슷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에스카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나로서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요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거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부엌 화덕은 새까만 색으로 얼룩 없이 반짝였고, 깨끗한 부엌의 싱크대는 칠이 벗겨진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리고 값비싼 도자기 그릇들과 우아한 다기들, 찬장에 늘어놓은 각양각색의 유리병 절임이 그녀의 열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맛있어?”
“네, 맛있습니다.”
「맛」이라는 감각도 얼마나 오랜만인지. 마치 새로 태어나서 하나하나 전부 세상을 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동시에 저릿한 과거의 기억들도 같이 불러일으켜서 날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날 「쿠하힐」이라고 부를 때마다 과거의 기억은 물 밑으로 가라앉았고, 난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크의 육즙과 부드러움을 음미하며 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했다.
“주인님은 요리가 능숙하시군요.”
“쿠는? 요리할 줄 아는 게 있어?”
“없습니다. 하지만 배울 수는 있겠죠.”
그 말에 에스카가 날 위아래로 빤히 훑어보더니 턱을 괴고 웃었다.
식탁에서는 안 좋은 버릇이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쿠가 요리하는 모습이라니, 안 어울려.”
“그런가요?”
“응, 하지만 기대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나에게 샐러드를 건네주었고 난 그걸 받아먹었다. 느린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나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작은 한숨을 삼켰다.
에스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날 거실로 이끌었다. 난 벽난로 위에서 그녀가 마약을 꺼내는 걸 보며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다시 고통과 쾌락의 시간이었다.
발버둥이 끝나고 진이 빠졌지만 이제는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다. 아직 상기된 얼굴로 절정을 음미하고 있는 에스카를 바라보자 그녀를 안을 팔이 없다는 게 다시금 괴롭게 느껴졌다. 그녀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쿠, 안아서 옮겨줄까?”
“제가 아니라 주인님이 안겨야 할 것 같은데요?”
에스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킨 다음 밝은 색 가운을 걸쳤다. 그녀가 만족한 것처럼 보이면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건 아마 뼛속까지 밴 노예근성이겠지.
에스카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하나로 묶고는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둘 다 씻고 나서 그녀는 평소처럼 날 침실로 데려다주었다. 이제 손님방이 아니라 내 방을 그녀에게 받았는데, 내 생각에 그녀는 노예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가구들을 새로 갖춘 방은 손님방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깔끔했고, 그녀의 방보다 떨어지지도 않았다.
“잘 자, 쿠.”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난 방의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찾아오는 고통을 피해 다른 것을 생각했다. 침구는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웠으며 햇빛 냄새가 났다. 난 낑낑거리며 침구를 빨았을 에스카의 모습을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팔이 고쳐지면 내가 해줘야지.
‘충실하게, 욕심은 부리지 말고.’
이미 에스카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쿠하힐?”
왠지 들뜬 목소리에 난 타오르는 벽난로에서 눈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자지 않으니 나도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물론 에스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주인은 아니었지만 난 신경이 쓰였다.
“여깁니다.”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위층에 있던 그녀가 반색하며 계단을 통통 뛰어 내려왔다. 내 앞에 선 그녀가 물었다.
“오른손잡이야? 아님 왼손잡이?”
“오른손잡이입니다.”
“그래? 그럼 먼저 이걸 오른손에 끼우고.”
그녀가 내 오른손에 보석 팔찌를 끼워주었다. 내가 끼기에는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스타일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비싸 보이는군요.”
“응, 사려면 50만 페소는 줘야 할걸.”
그렇게 말하고 에스카가 씩 웃었다.
50만 페소.
‘내 몸값이 천 페소였으니.’
계산이 되지 않아 멍하니 팔찌를 보는데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시동어는 「리커버리(Recovery)」야.”
“리커버리.”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 시동어를 말했다. 마법세공품에 대해 들은 적도 있고 본 적도 있지만 사용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음 순간 팔찌가 희미하게 진동하더니 곧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음 순간 저릿한 감각이 팔 안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손가락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숨을 멈추고 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내 의지에 반응해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아, 밖에서 할걸.”
에스카의 목소리에 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움직이는군요.”
그리고 팔을 들어보았다. 팔을 들고, 굽히고, 차례로 손가락이 움직인다. 경이에 차서 그걸 바라보는데 그녀가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내가 고쳐준다고 했잖아.”
“그랬죠.”
대답하고 에스카의 얼굴을 살피니 그녀는 별것 아닌 일을 한 것처럼, 동시에 약간의 칭찬을 바라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지금 나에게 뭐든 명령해도 될 텐데. 팔을 고쳐줬으니 어떤 걸 요구해도 될 텐데.
난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야말로 시건방진 태도였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손끝에 와 닿는 온기를 음미하며 말했다.
“주인님은 이상한 분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도 알아.”
그러고 문득 생각난 듯 말하며 조금 미안한 듯 날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왼팔은 또 일주일 기다려야 해.”
도대체가,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힘 조절이 안 되는 것 같아 아주 느릿하게 그녀의 광대뼈를 만지고 뺨을 만졌다. 그것만으로도 팔이 힘들어하는 게 느껴져서 난 그녀의 입술을 살짝 스치듯 하며 팔을 내렸다.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군요.”
“근육이 많이 손실됐을 거야. 예전처럼 움직이려면 재활훈련을 많이 해야 돼.”
“명심하겠습니다.”
“응, 힘내자. 아, 주사 맞을 시간이네.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지?”
그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숨이 턱 막혀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죄송하지만 아직 손이 하나뿐이라서 좀 힘들 것 같군요.”
“그런가?”
“네, 주사는 스스로 놓을 수 있지만, 최음 성분은 힘듭니다.”
“음…….”
내 말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넘어가서 긴장한 게 허탈할 지경이었다.
“알았어, 당분간은 도와줄게.”
에스카의 말에 난 안도했다.
그녀에게 중독되어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초조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쓸모없다고 여겨지지 않고 오랫동안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잘하는 게 뭐가 있지? 잠자리? 그리고…….’
검.
유일하게 인정받았던 재능.
‘빨리, 원래 피지컬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욕실로 향했다.
약 기운은 이제 살짝 어지러운 정도였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으며 향기를 들이마셨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이 꿈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히고 탐하면서 그녀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웠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짐승 같은 욕망을 토해내고 나서 이성을 찾기 위해서 애썼다. 약 기운과 그녀의 부드러움에 취해 「적당히」라는 수식어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발기된 성기를 그녀의 허벅지에 문지르는데 에스카가 물어왔다.
“손보다 허벅지가 더 좋아?”
“주인님은…… 안, 좋으십니까?”
목소리는 띄엄띄엄 새어 나왔다. 바닥에 손톱을 세우며 정신을 맑게 하려고 애썼다.
질문을 하며 에스카의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쩌나 하는 작은 걱정을 했다.
“아니, 자극적이었던 것 같아.”
그녀의 인정에 난 안도하며 그녀의 쇄골에 키스했다. 그녀의 유방을 삼키고 부드럽게 유륜을 혀로 쓸어내리다가 도드라진 유두를 문지르듯 하자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입술 아래로 빠르게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이 느껴졌다.
그녀를 절정으로 밀어 올리며 나 역시 사정했다.
씻겨주겠다는 말에 씻을 수 있다고 말하니 그녀는 “아, 맞다.” 하며 먼저 씻은 다음 나갔다. 욕조에서 바가지로 물을 푸는 팔이 부들부들 떨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엉망이다.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다음 날부터 그녀의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전혀 손에 익지 않은 일이라서 어색한 데다 한 손으로만 일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느리게 전부 해치웠다.
그러고 나자 작은 충족감이 찾아들었다. 외양간에 있는 염소들도 귀여웠고, 말은 경계심이 강하기는 했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한 팔로 건초를 주는 게 힘들어 몇 번이나 중간에 쉬어야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했다.
나중에 식탁에 앉으니 팔이 떨려서 포크가 흔들흔들했다.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걸 보며 에스카가 잔소리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근육이란 써줘야 발달하는 것이다.
일주일 내내 난 집안일과 훈련으로 바빴다. 크림을 떠내고, 휘저어 버터를 만들고, 텃밭의 잡초를 뽑는 등 작은 집인데도 손이 많이 가서 평소에 에스카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해내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팔을 움직이는 일은 괴로웠지만 괴롭지 않았다. 처음 적당한 나뭇가지를 잡아 휘둘렀을 때 마음속에서 몰아치는 강렬한 감정,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난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잡은 자세는 스스로 보기에도 엉망이어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괴롭지 않았다.
에스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상 궁금증이 들었다.
그녀는 내 봉사에 만족하기는 했지만, 먼저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고 나서야 그녀는 날 받아주었다.
단지 부끄러움이 문제일까? 생각했지만 그동안 봐온 것으로는 그런 성격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안의 갈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녀를 만지고, 핥고, 그 따뜻하고 말랑한 촉감을 음미하며, 손바닥 아래서 경련하는 근육을 느끼고 빠르게 뛰는 심장을 피부 아래로 느끼는 걸로는 부족했다.
그녀의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 이런.’
막대기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저쪽으로 날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막대를 주웠다. 악력 역시 약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날 성노예로 사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취급하고 있지도 않은데, 내가 그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단 말이지.’
비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에스카가 나에게 준 선택지 중에서, 헐떡이는 발정 난 개가 되는 선택지를 고른 건 나 자신이다.
‘나쁜 패만 고르는군.’
하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건 더 괴로웠다.
왜? 그동안 그렇게 길들어서?
여러 가지 문답들이 떠올랐다가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난 내 움직임에 점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정확한 동작들이 이어졌고, 더 이상 막대기를 휘두를 수가 없을 만큼 어두워진 후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자, 반대쪽 손도 줘봐.”
일주일이 지나자 어김없이 에스카가 팔찌를 들고 나왔다.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동어를 먼저 말했다. 다시 그때와 같은 저릿한 감각이 지나가고, 왼팔 역시 움직일 수 있었다. 두 팔을 다 가진 채로 그녀와 하는 정사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인간으로 돌아와서 섹스하는 기분이랄까.
씻은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며 속삭였다.
“내일부터는 그냥 약의 양을 반으로 줄여주십시오.”
“어? 그래도 돼? 그러다가 오히려 약을 더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괜찮을 것 같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너무 성급해하지 마, 쿠하힐. 그러다가 금단현상 와서 다시 많은 약을 하게 되면 첫 단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자 에스카는 불안한 얼굴을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정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어차피 약이야 꾸준히 줄여왔었고, 절반으로 줄어야 해독제와 함께 병행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기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에스카에게 중독된 노예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유치하고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이고 싶었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버릇없는 노예는 주인은 연모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스스로를 위해 변호해보았지만 치졸한 변명처럼 들렸다.
다음 날 에스카는 상회에 다녀온다는 말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난 짧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되팔 생각일까?’
팔을 고쳤으니 높은 가격으로? 아니, 양팔 다 해서 100만 페소는 들었는데 내가 그 이상으로 비싸게 팔릴 노예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불안감에 마음속이 술렁거렸다. 난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일에 집중했다. 그녀가 오기 전에 집안일을 끝내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밤이 되면 피곤해서 지쳐 떨어질 정도의 훈련을 계속했지만 그녀와의 정사는 항상 달콤했다. 만약 약을 끊게 되면 더 이상 관계를 맺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더욱 그녀에게 집중했다. 몸은 쾌락에 약하니까, 좀 더 기분 좋게 해주면 그녀 쪽에서 나에게 요구해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저녁이 되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에스카가 돌아왔고, 그녀가 데리고 온 것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여자 성노예…….’
갑자기 발밑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반응은 뭐였던 거지? 사실은 나와 닿기 싫었던 건가? 아니면 귀찮았나? 억지로 맞춰주고 있었던 걸까?
보통 노예에게 맞춰주는 사람은 없지만, 에스카는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인지라 속이 갑갑해져 왔다. 말없이 성노예를 바라보고 있자 에스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취향이 아니야? 바꿔달라고 할까?”
“아뇨, 됐습니다.”
난 빠르게 대답하고 그녀에게 이어 물었다.
“그녀를 데리러 다녀오신 겁니까?”
“응?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마약 끊는 것 때문에 사키에게 의논한 건데 사키가 공짜로 빌려주겠다고 하더라고. 너도 나보다는 프로 쪽이 더 좋지 않아? 아무래도 난 스킬도 좀 떨어지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카를 보자 허탈해졌다. 정말 그녀는 나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구나.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괴로운 것 역시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는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배려가 속을 찢었다.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이미 주인님께 익숙해져서 새로운 사람과 잘될지 모르겠군요.”
“그런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성노예가 웃으며 말했다.
“감히 제가 말씀드리는 걸 허락해주신다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 순간 난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에스카는 반색하며 「역시 프로」라는 얼굴을 했다. 표정이 하나하나 다 읽혀서 허무할 지경이었다.
“그럼 저녁 먹고 조금 시간 보내다가 하자.”
결정되었다는 듯이 말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에스카를 따라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를 돕다가 계속 묻고 싶던 걸 물었다.
“주인님.”
“응?”
“그동안 귀찮으셨습니까?”
“뭐가?”
“저 치료하는 것 말입니다.”
“응? 아니, 아냐.”
“그럼 불쾌하셨습니까?”
“불쾌했으면 처음부터 안 했겠지. 왜? 쟤가 마음에 안 들어?”
역시 바꿔줄까 하고 묻는 듯한 눈으로 성노예를 곁눈질하는 그녀에게 차마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평소보다 더 조용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치자 에스카가 주사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약을 반 덜어버리고 내내 불안한 얼굴로 내게 주사를 놓은 그녀가 물러섰다.
그러자 성노예가 웃으며 에스카에게 물었다.
“아가씨, 지켜보실 건가요?”
그 질문에 에스카가 멍한 얼굴을 했다가 순식간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음. 난 그냥 내 볼일 볼 테니까 끝나고 나면 알려줘.”
“네. 그럼 거실에서 하면 될까요? 아니면 침실?”
“아, 난 평소에 욕실 썼는데.”
“알겠습니다.”
그녀는 공손하게 에스카에게 인사를 했다. 난 여자의 팔을 붙잡고 욕실로 빠르게 끌고 들어갔다. 욕실로 들어온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어느 쪽으로 느끼는 편이신가요?”
작은 체구와 풍만한 가슴, 눈가의 눈물점까지 딱 남자들의 이상형 같은 느낌이었지만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약 기운이 퍼지면서 감각을 괴롭히는 소음이 들려왔다. 난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고, 내 상태를 빠르게 파악한 노예가 내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성기를 입안에 물었다. 그녀의 입안에서 성기가 반쯤 발기했고 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할짝거리는 소리와 추웁 하고 빠는 소리만 욕실을 메웠다. 잠시 후 그녀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혹시 느끼지 못하시는 거 아니에요?”
“주인님과 성생활은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아니면 약 때문에?”
“그건 더 아니죠. 이건 최음제인데.”
내 말에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녀가 거칠게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입술을 목에서 쇄골로, 그리고 가슴으로 떨어트렸다.
난 눈을 감고 에스카를 생각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가슴에 닿았을 때, 그녀의 손가락이 내 유두를 어루만질 때의 감각을 떠올리려고 애쓰자 아래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가 아래로 내려갔지만 어떻게 해도 절정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슬슬 이 여자도 나도 지쳐갈 때쯤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문 밖에서 지켜보던 에스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금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다음 순간 난 허리를 저릿하게 하는 쾌감에 의자 손잡이를 긁으며 낮게 소리를 냈다.
“여기가 좋으신가 보군요.”
노예가 말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적 흥분이 오는 것이다. 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토끼처럼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던 에스카 역시 그곳에 서서 날 지켜보았다.
“윽…… 흑…….”
짧은 신음 소리와 동시에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노예는 거기에 맞춰서 더 강하게 빨아들이며 혀로 귀두를 애무했다. 하지만 내게 자극을 주는 건 에스카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가운데 난 절정을 맞이하며 사정했고, 곧 몸을 축 늘어트리며 터지는 웃음을 눌렀다.
‘미치겠군.’
이제 그녀가 아니면 서지도 않게 되어버리다니.
어떻게 보면 참으로 충직한 노예가 아닌가?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이미 에스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늘어진 내 성기를 깨끗하게 핥은 그녀가 내 속옷과 바지를 정리하고 허리띠를 매주고 나서 말했다.
“끝났습니다.”
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녀는 예상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라면 차라리 몸을 섞을 걸 그랬군요.”
“그럼 더 피곤했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눈앞에 있는 여자로는 무리였다. 혼자서 버텨보자고 생각하고 욕실을 나왔다.
욕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양 뺨이 상기된 에스카가 곧 방에서 걸어 나왔다. 노예가 에스카를 향해 인사했다.
“아가씨께서 그동안 고생하셨겠네요. 다 끝났습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상회로 돌아갈 거지? 바래다줄게.”
“네.”
에스카는 나에게 「다녀올게.」 하고 입 모양만으로 말한 후 노예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난 욕실로 다시 돌아가서 앉았다.
“윽……!”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고통이 강해졌다. 누군가가 귓가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바닥에 손톱을 세웠다가 관두었다. 그 상황에서도 손톱이 빠지면 검을 잡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웃었다가 다시 고통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근육이 멋대로 경련하며 쥐어짜듯 전신에 고통을 주었고 그건 내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데다가 추웠다. 아니 더운가?
‘약, 약이 필요해, 약…….’
거실 난로 위에 있던 약상자를 떠올리며 욕실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욕실 문손잡이를 잡으려다가 문득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 움직이지…… 윽!’
난 욕조로 향해 물을 틀어놓고 위 내용물을 전부 게워냈다.
‘약은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며 욕실 구석으로 밀고 들어가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머리를 칼로 두 동강 내고 싶은 통증이었다.
얼마나 참고 있었을까? 욕실 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다.
“쿠! 어디 아파?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울렸다. 당황한 그녀가 내 상태를 살피더니 말했다.
“약을 갑자기 줄여서 그렇지? 내가 약 가져올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강하게 붙잡는다고 했는데 손이 멋대로 떨려서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았다. 에스카가 얼른 내 손을 맞잡았다.
“괜, 찮…… 흑…….”
“하나도 안 괜찮아!”
그녀가 빽 소리를 질러서 웃으려고 했지만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그러지 못했다.
“뭐야, 아까 그 노예가 다 끝낸 거 아니었어?”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끝내? 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내 성기를 붙잡은 그녀의 손길에 그제야 비로소 내가 발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손으로 문질러주었지만 쾌락보다는 고통이 더 강했다.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입안이 바싹 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허리를 숙이더니 내 성기를 물었다.
“허윽!”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감촉과 쾌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의 혀는 서툴지만 정성스러웠고 난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그녀가 내 허벅지를 부드럽게 두들기며 괜찮다는 듯이 신호를 보내왔지만 거기에 제대로 반응할 수도 없었다.
“읏, 하아…… 주인…….”
주인님, 그만…….
애원은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독한 고통만큼 강렬한 쾌락이 동시에 날 사로잡았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아서 그녀를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에스카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난 그녀의 입안에서 사정했다.
아까보다 더 고통스러운데도 훨씬 빠르게 끝난 사정이었다. 그렇게 한 번 사정을 하고 나자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벽에 기대 몸을 늘어트리자 그녀가 담요를 가지고 와 덮어주었다.
“어때? 조금 나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카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가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쳤다.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한 동작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했다.
그녀는 날 안아 들었다.
이것만은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나보다 훨씬 작고 늘씬한 그녀에게 힘으로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을 힘도 없었기 때문에 반가웠다.
에스카는 척척 걸어서 날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한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와 날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우유와 사탕, 풍성한 꽃향기.
그녀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에스카의 손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상처 입은 짐승이라도 달래는 듯한 동작이었다.
“괜찮아, 쿠.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새털처럼 부드러웠다. 고통이 누그러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온기 안에 있으니 고통이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더 이상 환청은 들리지 않았다. 팔딱이는 작은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울렸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었을 때도 여전히 에스카의 품 안이었다. 에스카는 작게 쌕쌕 어린애 같은 건강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고, 내 두통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잠시 그렇게 그녀의 온기를 음미하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만졌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손이 그녀의 팔에서 옆구리를 타고 내려와 허벅지를 만졌고, 탄탄하고도 말랑한 허벅지 피부 사이로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음…….”
그녀의 작은 신음에 온몸이 굳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깨닫자 헛웃음이 나왔다.
난 그녀의 가슴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엉키는 음모를 헤치고 촉촉한 소음순을 가르고 들어가 슬슬 문지르자 곧 애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스카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날 죽이거나 팔아버릴까? 아니면 그대로 잠을 자게 될까?
손가락 밑에서 작은 돌기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난 클리토리스를 아주 섬세하게 다루었고 이제 애액이 흐르듯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카는 깨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가 깨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내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욱 대담해졌다. 그녀의 질구를 가볍게 문지르며 입구를 찾다가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고 입구, 클리토리스 뒤쪽의 벽을 자극할 정도로만.
그녀의 안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촉촉했다. 자극을 하자 내벽이 오물거리며 손가락을 빨아들였지만 그 이상 넣지는 않았다. 슬슬 손가락을 구부려 자극하자 어느 순간 확 안이 조여들었다. 사정을 독촉하는 외설스러운, 동시에 절정에 달한 질벽의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손가락 끝을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이 상황에서도 깨지 않다니…….
깨어 있든 자고 있든 철벽같다고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뺐다.
‘그러면서도 결국 일부러 깨우는 일은 안 하지, 겁쟁이가.’
자조했다. 완전히 애액으로 질척해진 손가락이 그녀에게 닿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창문 밖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이다.
에스카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방에서 나와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욕실 벽에 기대서서 그녀의 애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자위를 했다.
짜릿한 순간이 지나가자 자조감이 들어 벽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손을 씻었다. 마당으로 나가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 저택 안으로 들어가 물을 한잔 마시고 운동을 했다. 바깥이 완전히 밝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카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응, 쿠는 괜찮아? 몸은 아프지 않고?”
“참을 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그 노예는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부터 약을 먹으면 중화작용이 일어나서 괜찮을 테니까요.”
“아, 맞다. 알았어.”
어차피 다시 노예를 불러도 소용없으니까. 그 뒤로는 평소와 같은 나절이 지나갔고 저녁에는 중화제를 먹었다. 그리고 어지러움을 느낀 한 시간 후쯤부터는 완전히 기억이 날아가고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에스카의 멍든 얼굴이었다. 반색하는 그녀의 얼굴에 생긴 상처를 보고 난 빠르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에스카는 괜찮다고 웃었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주인을 상처 입히는 노예라니. 게다가 그녀의 팔에 감긴 붕대는…….
나는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를 상처 입혔다.’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곤 해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하나도 없는 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공작이 와서 날 지팡이로 후려쳤을 때에도 딱히 반감이 들지 않았다.
마땅히 당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개에게 붙였던 이름을 나에게 붙였다고 그가 말했을 때는 조금, 속이 쓰리기는 했지만 에스카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아를에게 화를 잔뜩 내고 나서 씩씩거리는 에스카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난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핥았다. 경악해 날 부르는 그녀에게 “멍.” 하고 짖어주자 그녀는 넙죽 엎드리더니 사과를 쏟아냈다.
‘사과를 받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개를 원하시는 거면 기꺼이 개가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말에 그녀는 다시 사과하면서 쿠하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온화하고 눈이 반짝거려서 난 개 이름이든 뭐든 딱히 상관없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녀가 쿠하힐에게 마음의 빚이 있어서 내게 잘해주는 거라면, 나 역시 그걸 이용해서 그녀에게 파고들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것 아닌가?
그 이름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다시금 그 뜻을 전하자 그제야 에스카는 안도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핥고 키스했다. 좁은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에스카의 반응을 살폈는데, 그녀는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꼼짝도 안 하고 날 마주 볼 뿐이었다. 난 느긋하게 그녀의 입안을 맛보고 나서 말했다.
“개는 뭘 잘 모르니까요.”
그 말에 에스카는 귀까지 빨개지면서 쿠션으로 날 팡팡 두들겼다. 얌전히 얻어맞고 있으려니 그녀의 얼굴에 죄책감이 서리면서 쿠션을 소파로 던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무른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감췄다.
안절부절못한 에스카의 시선이 느껴져서 난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상대에게는 「미친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가볍게 검 손잡이를 고쳐 잡는 그의 행동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와 검을 나누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순수하게 즐거웠다. 그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이라고 해도, 점점 과거의 경험들이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란델, 아란델, 전장의 사신. 엘란시아의 흑기사…….
병사들이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은 쿠하힐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막대를 찔렀다. 이제 상대의 패턴을 알 것 같았다. 서너 번 검격이 오가고 난 다음 순간 그의 목에 막대 끝을 들이댔다. 스무 판 내내 상대를 하던 기사는 당황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짜증을 나타내며 순순히 항복했고, 그의 항복 선언이 끝나자마자 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
에스카가 후다닥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겼습니다.”
“봤어.”
그녀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난 몸을 숙여 그녀 손에 묻은 눈물을 핥았다.
입안이 터져서 피와 함께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이겼다는 승리의 쾌감이 내 안에서 뭔가 다른 걸 일깨우는 것 같았다.
“내일이 되면 전신에 멍이 들 거야.”
“뼈도 부러진 것 같습니다만.”
에스카가 부루퉁하게 말해서 난 태연히 대답했다. 갈비뼈에, 팔에도 금이 간 것 같고…….
내 말에 에스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자랑이다!”
그때 공작이 에스카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이 차가워서, 그 눈이 적의로 가득 차 있어서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그가 뭐가 부족해서 나에게 적의를 품는단 말인가? 한낱 노예에게.
“스무 판 중의 한 판이지.”
그의 말에 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시간은 앞으로 많이 있으니까요.”
에스카에게라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이고 봉사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게다가 그 사람이 날 적대하고 있다면, 글쎄.
내 대답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뻔히 보였다. 아를은 에스카와 대화를 나누더니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자리를 떠났다.
난 그날 밤 그녀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에게 날 밀어 넣고 사정을 하고 그녀를 쾌락과 절정에 밀어붙여도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내가 가장 원해서는 안 되는 걸 간절하게 원했다.
몸을 겹쳐도 욕망은 가라앉지 않고 날 더 괴롭게 했다.
마음속은 어둡고 질척하고, 타르같이 달라붙어서 괴로움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속과 정반대로 에스카는 반짝이고 빛나고, 또한 아름다웠다.
‘그녀의 곁에 계속 있고 싶다.’
그녀가 질려서 날 팔아버리지 않도록, 노예로서라도 상관없으니까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휙, 휙.
매끄러운 검날이 햇살에 반짝였다. 마법으로 가공된 칼날은 머리카락도 잘라낼 만큼 날카로웠고 무겁지 않으면서도 단단했다. 가볍게 옆면을 손가락으로 튕기자 텅,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날이 파르르 진동했다.
―쿠의 눈동자 색이랑 맞춘 거야.
그 말이 다시 생각나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살짝 눈치가 없고 둔한 면조차도 사랑스러웠다. 아니 그런 사람이니까 날 받아줄 수 있었던 거겠지.
다시 검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눈을 감고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며 천천히 검을 위아래로 그었다. 얼마 전에 했던 대련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위, 아래, 찌르고, 베고.
‘대련 상대가 필요해.’
실전 경험을 더 쌓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물론 이미지트레이닝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과 실전은 또 다른 것이었다.
몸을 혹사한다 싶을 정도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어도 아직 부족한 느낌이었다.
손안에서 검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근처의 늑대 같은 야생동물이라도 사냥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에스카가 날 불렀다.
“쿠!”
“주인님.”
“지금 바빠?”
“주인님이 부르실 때는 바쁘지 않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가 웃었다.
“버터 저어줘.”
그 말에 벌써 그럴 때인가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한 다음 검을 도로 꽂아 넣고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에 모아놓은 크림을 휘저어서 버터를 만들고, 버터밀크와 버터를 분리하는 일까지 끝내자 에스카가 들어와 버터를 단지에 옮겨 담았다.
“쿠가 진짜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가요?”
괜히 한 번 더 그 말이 듣고 싶어 되물었다. 에스카는 버터 단지를 선반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응, 진짜로. 쿠 없을 때는 나 혼자 어떻게 집안일을 했나 싶다니까.”
“저도 그게 신기합니다.”
“아, 쿠가 떠나면 어떻게 살지.”
“…….”
그녀의 말에 난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떠나? 쿠를 팔아버리면, 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아냐, 그래도 혼자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어떻게 되겠지.”
그녀는 내 침묵을 멋대로 해석하고는 헤헤 웃으며 지하실 계단을 올라갔다.
난 천천히 그 뒤를 따르면서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에스카가 날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거라면,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니까.
며칠 뒤 공작가에서 마차를 보내왔다. 여름 내내 그곳에 머무를 생각을 하며 나는 몸을 긴장시켰다.
‘사방이 다 적이로군.’
꼭 공작이 전력을 다해서 미워하라고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공작가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부 내게 칼날을 세웠다.
만약 에스카가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면 일단 밥부터 굶고 다녔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이라니.’
슬쩍 칼날을 비틀어보니 핏물이 칼날에 엉기지 않고 전부 다 떨어져 나갔다. 눈앞에 있는 기사들의 경악한 얼굴에 난 미소를 지어주었다.
‘80% 정도는 회복된 것 같은데.’
평소라면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널 자유롭게 해줄 예정이거든.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말이지.
눈앞의 기사가 나에게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노예새끼가!”
“그 노예의 소지품을 빼앗으려고 하는 기사님은 어디의 기사님이신가요?”
비꼬며 웃자 그가 검을 휘둘러왔다. 횃불에 칼날이 번득였다.
챙! 강하게 검을 부딪치자 순간 힘을 뺐다가 다시 강하게 밀어붙였다. 나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며 검을 피하고 그대로 검을 한 바퀴 돌려서 바깥으로 튕겨냈다.
아무래도 날 죽일 셈인 것 같아 그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영 날 죽여줄 수 있는 실력은 아닌 듯했다.
“윽!”
어깨를 찔린 기사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난 주변에서 흉흉한 기세를 보이고 있는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슬을 가져와!”
지켜보고 있던 기사가 외치자 곧 시종들이 사슬을 들고 왔다.
‘이건 좀 불리한데. 잡히면 그대로 사살하려나.’
나를 빙 둘러싸고 서 있던 시종과 기사들이 손에 든 사슬을 던져왔다.
몇 개는 피하고 튕겨냈지만 언제까지나 그걸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다리와 팔, 목에 사슬이 엉켜와 결국 난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 나에게 부상을 당한 기사들이 내가 완전히 제압된 걸 확인하고는 다가와서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시발, 이 노예새끼가 감히!”
“죽여버리자.”
“잠깐, 기다려. 일단 에스카님의 노예잖아.”
기사들끼리 잠시 말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나무에 묶어놓는 걸로 결론이 난 것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무에 묶은 후, 묶인 내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솜방망이로는 사람 못 죽이지.”
히죽 웃으며 말해주자 얼굴이 시뻘게진 기사가 내 머리카락을 붙잡아 고개를 치들게 하고는 그대로 다시 주먹을 날렸다.
“그만해, 진짜로 죽겠어.”
다른 기사가 그를 말렸다.
“쿠!”
그때 타이밍이 기막히게도 정원 길 사이로 에스카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 뒤로는 샤샤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와서 내 상처를 보고는 말문이 막힌 듯 손으로 내 뺨을 쓸었다. 난 피와 침을 함께 삼킨 다음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 사과를 받는 순간 에스카의 황금색 눈동자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시종이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에스카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검은?”
다른 시종이 얼른 그녀에게 검을 가져다 바쳤다. 그녀는 검을 뽑더니 나에게로 돌아섰고, 난 그 검 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검이 밧줄을 끊어냈다. 에스카는 검을 밀어붙이듯 나에게 돌려주었다.
“에스카! 기사에게까지 반항했다면 저 노예를 살려둘 수는 없어!”
“쿠는 내 노예야. 쿠에게 모욕을 주는 건 나에게 모욕을 주는 거고, 쿠를 적대하는 건 날 적대하는 거야. 검을 빼앗아? 그 검은 내가 그에게 만들어준 거야!”
에스카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동시에 차가웠다. 그런 에스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지.’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기뻐해야 하는 건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왜 네 시종이 쿠에게서 빼앗지? 네가 시킨 거니, 샤샤?”
“아, 아냐, 난 안 그랬어.”
샤샤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시종이 샤샤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에게 검을 내놓으라고 했으니까.
“그럼 이건 그냥 넘어가. 난 쿠를 처벌할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샤샤는 더 변명을 해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알았어. 에스카, 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아. 네 노예를 모욕함으로 널 모욕할 생각도 아니었어.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아줬으면 해.”
“고마워, 샤샤.”
에스카는 샤샤의 뺨에 친근하게 키스를 해주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가 잡아끌고 걷는 일이 꽤 있었지, 하고 슬며시 웃는데 그녀가 작게 물어왔다.
“죽였어?”
“아뇨. 조금, 아프게만 만들어줬습니다.”
“기사는?”
“수가 많지만 않았다면 제가 이겼을 텐데요.”
그 말에 에스카는 날 휙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다고 당당히 쓰여 있어서 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얻어맞고도 웃음이 나와?”
“육체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음에 누가 그 검을 보여달라거나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 물건일 뿐인걸. 다음에 또 만들어줄 테니까.”
“싫습니다.”
“쿠.”
“주인님께는 그냥 물건이겠지만 저에게는 아닙니다.”
유일한 내 소지품이며 검은 내 자존심이고, 무엇보다도 이건 당신이 나에게 준 물건이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품에서 떼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에스카는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고, 방 안에는 죽여버리고 싶은 그 금발 노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카에게 나는 저 노예와 비슷한 걸까?
‘아니, 그보다는 낫겠지. 자유를 주려는 선의까지 가지고 있으니까.’
에스카가 그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하자 그는 에스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에스카가 나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상자는 작았고 별다른 봉인도 없었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 든 건 오르골이었다. 고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의.
끔찍한 오르골.
“엘란시아산이래. 나오는 노래도 거기 동요고.”
“네……. 보면 압니다.”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가 허둥지둥 손을 뻗어서 상자를 빼앗으려고 했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꿔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좁은 방 안, 상자에서 오르골을 꺼냈다. 태엽을 돌리고 오르골 뚜껑을 열자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아들보다 자신의 안락과 편의가 더 소중했던 여자.
노예가 된 자신을 보고 공포와 혐오를 동시에 드러내던 그 표정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난 손을 뻗어 오르골을 부수기 시작했다. 단순히 힘으로 상자를 뒤틀어 산산조각내자 요란하게 금속음이 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지금 날 자유롭게 해주려는 자비로운 주인님은 다른 노예와 잠자리를 가지고 있겠지.
완전히 오르골을 부서트리고 난 신음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괴롭고, 비참했다.
낳아준 어머니에게까지 버림받은 주제에 에스카와 함께 계속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언감생심, 지독한 욕심을 낸 것이다.
“에스카.”
한 번도 입 밖으로는 내본 적이 없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자 숨을 쉴 수도 없어졌다. 울고 싶었지만 울 수도 없었다.
네 이름을 부르고 싶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건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라서 난 우는 대신 웃었다. 웃고 또 웃고 또 웃다가 그냥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얻어맞은 상처들이 아팠지만 오히려 그게 나았다. 쓸데없는 생각 없이 고통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에스카, 당신을 사랑해.’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하고 난 눈을 감았다.
공작가에서의 일정은 빠르게 끝났다.
세이칼이라는 기사가 한 번, 날 찾아오기는 했지만 “천박한 노예가 감히 우리 델루치아 기사단에!”라는 흔해 빠진 모욕을 퍼붓는 정도였다.
시종이 허락도 없이 멋대로 그를 내 방에 들여놓은 게 좀 짜증 난 정도의 사건이었다.
아주 조금 수명이 연장된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날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겠지.
그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호의니까.
하지만 그런 호의를 나는 바란 적이 없었다. 차라리 에스카가 이기적이어서, 노예로 날 부리는 게 편하다고 생각해 곁에 날 남겨두면 얼마나 좋을까?
이타심.
이타심.
당장이라도 날 죽일 것 같은 달콤한 호의.
아이로니컬하지 않은가? 상대는 날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해주는데, 그게 본인에게는 최악의 선택지라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녀에게, 좀 더 내 필요성을 어필해서…….
“후.”
난 한숨을 내쉬고 검을 내렸다. 검 끝이 자꾸 흔들렸다. 난 뒤쪽의 수돗가로 다가가서 펌프를 눌러 물을 퍼 올리고는 머리에 차가운 물을 부었다.
머릿속이 울릴 만큼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충 머리의 물기를 짜내고 손으로 얼굴을 훔치는데 에스카가 나를 보더니 말을 건넸다.
“쿠, 오늘이 사키네 가는 날이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데 에스카가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수건을 들고 도도도 뛰어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수건을 받아 들고 가볍게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어, 얼른 준비나 해.”
에스카는 정수리를 문지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 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사키의 집은 마을 외곽에 있어서 에스카의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편이었다.
딱히 그에게 악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노예이며 상품으로 대했고, 그건 사실이니까. 오히려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그의 부인은 나를 손님으로 대접해 똑같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난 사키를 슬쩍 한 번 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와 사키는 거실로 쫓겨났다. 사키는 아무 말 없이 체스판을 폈다.
흑백의 말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어서 그가 늘어놓는 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키가 툭 말을 내뱉었다.
“공작의 기사단을 거절했다고?”
“네.”
“잘했네.”
“그분이 절 살려둘 분으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내 대답에 사키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는 상의도 없이 하얀 폰을 먼저 옮겼다.
“공작가의 영지 중 하나가 분쟁 중이거든. 칼받이로 죽기에 딱 좋지.”
“겪어본 적 있는 내용이로군요.”
난 검은색 폰을 옮기며 답했고 잠시 말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사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둘 줄 아는군.”
“기본 소양이니까요.”
“팔만 아니었다면 비싸게 팔렸을 텐데.”
아쉬워하는 그의 어투에 난 픽 웃었다.
“그랬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요.”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키가 비숍으로 내 나이트를 잡았다.
“검 실력은 보장된 셈이니, 상회에 와서 일을 하는 건 어때?”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키가 내 얼굴을 보며 덧붙였다.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아? 물론 싼 가격으로 부려먹을 거지만.”
“주인님의 곁에 머물러 있을 생각입니다만.”
“머리가 있다면,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 말에 난 입술을 깨물었다.
에스카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받은 걸까? 날 자유민으로 만들어줄 예정이니 직장이라도 좀 잡아달라고?
“에스카님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야.”
그가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고 퀸을 움직인 나는 손을 놓자마자 아차 싶었다.
사키의 록이 거침없이 내 퀸을 먹어치웠다.
“체크.”
난 눈을 가늘게 뜨고 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록이 내 킹을 노리고 있었다. 킹을 움직인다고 하면…….
그때 루아와 에스카가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루아가 사키 귀에 대고 속삭이자 사키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루아의 임신 사실을 에스카가 확인해준 덕분이었다. 에스카는 그들에게 인사한 다음 나를 데리고 사키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마을에서는 카니발이 한창이었다. 바쁜 사람들의 걸음 소리와 웃음소리, 길거리 악단의 연주와 원색적인 장식들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평소보다 높아진 목소리로 떠드는 가운데 에스카 역시 거기에 한몫하고 있었다.
“나 서커스 진짜 오랜만이야.”
커다란 텐트 안, 맨 앞자리에 자리 잡은 에스카는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서커스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서커스에 대한 기대보다는 에스카의 표정 변화를 보는 쪽이 더 재미있었다.
‘그걸 말하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 차자 뚱뚱한 사회자가 나와 거드름을 피우며 서커스를 소개했다. 곧이어 나온 광대에게 쫓겨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회자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난 힐끔 에스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무대에 푹 빠져서 박장대소 중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나씩 쇼가 펼쳐질 때마다 가장 크게 환호하고 긴장하고 안도하고 손뼉을 치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엄청 재미있었지?”
“거기에서 주인님이 가장 즐거워하시는 것 같더군요.”
“오랜만에 보니까 나도 모르게…….”
“아뇨, 그런 주인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눈이 너무 반짝여서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아니라 서커스를 봐야지.”
그녀의 말에 난 웃었다. 그녀가 있기 때문에 서커스도, 그래, 나름 즐거웠다.
‘단검 던지기는 해보고 싶었어.’
예전에 연습하다가 그만뒀는데 공연을 보니 손이 살짝 근질근질해졌다. 그때 에스카가 내 손을 붙잡더니 손바닥에 동전을 쥐여주었다. 반짝이는 은색의 10페소였다.
“주인님?”
의아해서 그녀를 바라보자 에스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용돈! 카니발에 왔으면 뭔가 사 먹고 놀아야지. 어렸을 때 스승님께 용돈을 얻으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었던 걸 생각하면…….”
말을 할수록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그녀에게 동전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에스카는 한사코 거절했다.
‘용돈이라.’
묘한 기분이었다. 결국 그 돈으로는 반지를 사서 에스카에게 선물해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반지꽃 모양의, 내 사심이 섞인 반지.
10페소로 살 수 있는, 싸구려 액세서리여서 난 다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에게 받은 돈으로 그녀에게 선물이라니.
그러나 에스카는 충분히 즐거워해주었고, 그걸로 내 기분도 좀 나아졌다.
‘어차피 에스카가 날 버린다면, 무슨 상관이람?’
버린다.
그녀에게 난 쓸모가 없으니까. 내 마음 같은 건 어차피 안중에도 없겠지. 내 애정에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거절하면서도 미안해할 것이 뻔했다.
‘거기까지 그녀를 밀어붙일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카에게 미소 지었다.
난 자고 있는 에스카를 바라보며 밀크티에 딱 한 방울 최음제를 넣었다. 내일이 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단지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할 수 없는 마음속의 폭풍 같은 격정과 흔하디흔한 사랑 고백을 전부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떠날 생각이었다.
편지를 남기면 그녀도 조금쯤은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금세 납득할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삶의 의미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밀크티를 들고 조심스럽게 에스카의 어깨를 감싸며 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더 생각해냈다.
‘당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심장이 뛸 때마다 괴로워. 숨을 쉴 때마다 모래라도 마시는 것 같아. 세상은 온통 짓눌린 듯한 흑백이고, 그 안에서 너만이 선명한데.
“주인님.”
“어? 응? 앗, 쿠 왔어?”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미소 지으며 컵을 내밀었다.
“밀크티를 좀 끓였습니다만.”
“아, 고마워. 마시고 잠 좀 깨야겠다.”
그녀는 컵을 받아 들고 눈을 비빈 후에 천천히 밀크티를 마셨다. 난 차를 마시는 그녀를 폐가 조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컵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았고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쿠, 나 쿠에게 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저도 있습니다.”
“그, 그래?”
내 말에 에스카는 의외인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난 한마디 덧붙였다.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아, 응.”
그녀에게서 나올 말이 어떤 말인지 뻔해서 난 기대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쿠가 빨리 떠나줬으면 좋겠어, 이럴까? 아니지. 에스카는 상냥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말하겠지. 쿠는 얼른 집을 나가고 싶지 않…….’
“저기 쿠……. 있지. 나 쿠가 남아줬으면 좋겠어.”
생각을 가르고 예상치도 못한 내용이 날아왔다.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혹시 내가 드디어 미쳐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건가 하는데 에스카가 날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이야기라는 거 아는데. 쿠가 자유민이 되어서 떠나는 게 쿠에게 훨씬 좋은 거라는 거 알아. 알지만, 쿠가 가버리는 게 싫어.”
“주인님…….”
신음 소리처럼 그녀를 부르자 에스카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노예증서도 없는걸. 주인님이 아니라 에스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에 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에스카.
에스카 블란테.
“쿠는 어때?”
“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고민들은 다 뭐가 되지?
“제가 얼마나…….”
챙그랑!
“어……?”
그녀가 들고 있던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확장되는 에스카의 동공이 보였다.
“에스카?”
“쿠…… 나…….”
그녀는 몸을 숙이며 팔걸이를 짚었고, 다음 순간 그녀가 피를 토했다. 새빨간 피가 선명하게 그녀의 턱을 따라 흘러내려 그녀의 바지와 소파를 적셨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윽!”
에스카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오더니 그녀가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에스카!”
그녀는 전신을 경련하며 바닥을 긁고 발버둥 치며 계속 피를 토해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에스카? 에스카! 제발!”
그녀를 안아 들자 그녀가 발버둥을 치며 날 후려쳤지만 차라리 그럴 힘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난 에스카를 안은 채 밖으로 나와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냈다. 안장도 없이 그대로 말 위에 올라탄 나는 에스카의 움직임이 천천히 멎어가는 걸 품속에서 서서히 느꼈다.
절망이, 어둠보다 더 끈적하고 무거운 고통이 내 마음을 잠식했다.
“에스카, 에스카, 제발, 차라리…….”
내가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텐데. 말 옆구리를 걷어차며 독촉해 강제로 밤길을 달렸다.
난 그녀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흔들었다. 그녀의 맥박은 점점 희미해졌다.
‘최음제가 아니었어.’
난 자신의 어리석음에 관자놀이에 칼이라도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시에 샤샤를 향한 분노 역시 생겨났다. 그녀가 준 최음제가 사실 독약이었다니. 만약 에스카가 그 약을 잘못해서 먹기라도 하면? 차라리 날 겨냥해서 암살자를 보내든, 밥에 독을 섞든 했어야지!
그리고 동시에 자책했다.
사키의 집 앞에 도착해 구르듯 말에서 내려 문을 두들겼다.
“사키! 사키!”
문을 걷어차려는 순간 열렸다. 사키가 짜증 난 얼굴로 날 보았다가 품의 에스카를 보고 단숨에 표정을 바꿨다.
“에스카님?! 이게 무슨!”
“독을 마셨는데 무슨 독인지 모르겠습니다.”
“루아!”
사키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며 루아를 불렀다. 난 안으로 성큼 들어가 소파에 에스카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뺨이 너무 차가워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면 죽거나.
사키가 마법세공품을 가지고 나왔고 루아는 의사를 부르러 뛰쳐나갔다. 에스카의 귀걸이를 살핀 사키가 해독 마법을 걸었고, 에스카의 새파란 입술 사이로 가는 숨이 새어 나왔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루아가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의사는 에스카를 살피더니 나에게 독의 종류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난 기억을 잃게 하는 최음제라는 것 말고는 다른 걸 말해줄 수가 없었다. 의사의 눈에 경멸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공작가에서 받은 약이라는 말에 사키가 공작가에 연락을 취했다. 곧 아를이 담당의와 함께 순간이동으로 날아왔다. 다행히 그 담당의는 해독약을 가지고 있었다. 해독약을 먹이자 에스카의 숨은 훨씬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아를은 지팡이로 내 명치를 강하게 찔렀다. 숨이 턱 막히면서 휘청거렸다. 그는 분이 풀릴 때까지 나를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도중에 사키와 루아가 말리고 나서야 그는 폭행을 멈췄고, 난 피에 젖은 시야로 에스카를 바라보았다.
“네 목을 매달고 싶지만.”
“그는 이제 자유인입니다, 공작 전하.”
사키의 말에 아를은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 영지로 끌고 가서 재판이라도 할까?”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단 샤샤에게도 추궁을 좀 해봐야겠군.”
결국 그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루아가 창백한 얼굴로 내게 달려와 손수건으로 얼굴의 상처를 눌러주었고, 그녀의 흰 손수건은 곧 피범벅이 되었다. 난 손수건을 받아 들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요.”
루아의 말이 에스카의 말과 똑 닮아 있어서 난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에스카는 살았지만, 독에 의한 손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언어나, 몸에 불편함이 생길 수도 있다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그렇군요.”
난 멍하니 내 옷을 바라보았다. 앞섶은 에스카가 토한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아를이 지팡이를 휘두를 때 날카로운 부분에 맞아서 찢긴 옷 역시 엉망이었다. 사키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노예가 아니니까 딱히 존대할 필요도 없어.”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째가 되자 에스카는 안정을 찾아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졌다. 난 충실한 개처럼 그녀의 옆을 지켰다. 작은 신음 소리에도 반응해 눈을 떠서 몇 번이나 그녀의 숨소리를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다.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한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고, 그것도 10분씩 나눠서 자거나 깜빡 조는 정도였다.
샤샤와 아를도 에스카의 집에 묵었고 의사들도 함께였다.
극심한 피로감에 제대로 뇌가 돌아가지 않았다. 의사는 이대로 쉬지 않으면 당신이 먼저 죽게 될 거라고 했지만 멍한 와중에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카가 깨어나면 나에게 뭐라고 비난을 퍼부을까?
그녀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면, 그녀가 날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명령해도 웃으면서 그 말을 들어줄 작정이었다. 아니면 사지를 찢어서 죽인다거나?
‘에스카는 그러지 않으려나? 하지만 그렇게 해주는 쪽이 더 마음 편할 텐데.’
울고, 욕설을 퍼붓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에스카를 생각하면 폐부 깊숙이 칼을 찔러 비트는 기분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감정적인 고통이 실제 신체적인 고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게.
‘나는 항상 나쁜 패만 고르는군.’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사생아답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패를 골랐다.
단 한 번도 날 향해 웃어주지도 않은 남자를 위해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당신의 당당한 아들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검에 매진했다.
열넷에 처음 전쟁터에 나가 벌벌 떨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면서.
첫 출진 생각에 난 피식 웃었다. 그래, 나쁜 패만 골랐지.
그렇게 해서 엘란시아 제일의 기사라고 추켜올려지고, 국경에서 사람 죽이는 일에 청춘을 전부 소모하고, 결국은 버리는 패가 되었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기사들은 날 버렸고, 거기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몰랐지, 그때는. 사생아의 아들이 승승장구하는 게 당신 친아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옥에 처박혔다. 지독한 1년이었다. 아란델이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파괴해버린 그 1년간 자아도 의지도 마모되어서 전부 사라졌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에스카가 나타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유를 주고, 의지를 주고, 삶을 주고, 마음을 주었다.
그리고 딱 한 번,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말할 수 없지만 당신을 감히 사모한다고.
‘그리고 이런 상황인 거지.’
실핏줄이 터진 눈을 감고 눈꺼풀을 느리게 문지르는데 에스카가 작은 소리를 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스카의 곁으로 향했다. 에스카는 눈을 반짝 떴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듯 몇 번 깜박거렸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시도한 듯 신음 소리를 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는지 몸에 힘을 뺐다.
난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녀에게서 나올 비난을 각오하는데 나온 것은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그 말에 난 절망했다. 그리고 희미한 안도감 역시 그 아래에 깔렸다.
샤샤와 아를이 부산을 떠는 가운데 난 눈을 감았다.
‘폐를 찔렸나.’
난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며 정면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뒤쪽 침실에는 에스카가 있었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전부 죽이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야 했다.
에스카가 선물한 검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렇게 베었는데도 날은 조금도 죽지 않았고, 피와 기름으로 무뎌지지도 않았다.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에스카가 내 팔을 붙잡았다.
“블링크(Blink)!”
동시에 시야가 일그러지면서 다음 순간 난 차가운 숲의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쿠, 쿠, 다쳤어? 상처 보여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이거 가지고, 시동어는…….”
그녀가 내 몸을 더듬다가 내 손에 작은 반지를 쥐여주었다.
시동어가 뭔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힐.”
시동어와 동시에 손 안의 반지가 작게 진동하면서 고통이 감소했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걸 느끼며 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에스카가 울먹이며 말했다.
“쿠, 이 바보야.”
“이제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달라진 말투와 「쿠」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리고 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
“응…….”
“전부 다 기억나십니까?”
“응.”
대답하고 에스카는 울기 시작했다.
난 드디어 온 이때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죽으라고 말하기 전에, 저놈들을 먼저 죽이게 해주십시오? 그게 독약인 줄 몰랐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올 비난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덜덜 떨리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쿠.”
난 눈을 감았다.
“사랑해.”
다음 순간 난 눈을 번쩍 떴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위쪽에서 개새끼들이 뭐라고 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난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다시 한 번 말해주십시오.”
“사랑해.”
에스카의 입술이 손가락 밑에서 움직이는 것과 입김이 느껴졌다. 그러니 저 사랑해라는 말은 분명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겠지.
“제가 이미 죽어서 천국에, 아니 제가 천국에 갈 리가 없으니…….”
횡설수설하는데 에스카가 날 끌어안고 키스해왔다. 소름이 꼬리뼈부터 등을 타고 올라왔다.
에스카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에스카.
난 정신없이 그녀를 탐했다. 이게 꿈이라고 해도, 환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충분히 맛보고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빨아들였다. 그때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를 억누르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기에 계십시오. 나머지를 처리하고 올 테니까요.”
“몇 명이나 남았어?”
“일곱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씩 웃어 보인 다음, 그녀를 나무에 기대어 세워두고 발소리를 죽여 숲의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렇게나 즐거운 기분일 때가 내 인생에 있었나?
잘린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조차, 축배의 포도주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어딘지 현실감이 없다.
난 크게 웃고 싶은 걸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끄르르륵.”
마지막 남은 놈이 입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며 경악과 절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날 보았다. 난 그의 목에서 검을 빼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가볍게 검을 털어내는 것만으로도 날은 깨끗해졌다. 난 검집에 검을 꽂아 넣고 에스카를 찾아 돌아왔다.
“에스카.”
“히이익!”
에스카가 마치 토끼처럼 팔짝 뛰어 난 놀랐다가 웃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내 눈을 피했다.
역시 아까 들었던 고백은 뭔가 실수였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에 암운을 드리웠다. 하지만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에스카가 사키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챘고, 나와 그녀는 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사키의 집은 엉망이었다. 루아 역시 그랬다. 상황을 대략 정리한 후 둘만 남겨두고 현관문 밖으로 나와 앉자 에스카는 또 시선을 피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에스카.”
“으응?”
“아까부터 절 바라보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
“네, 지금도요.”
“…….”
“…….”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지나갔다. 난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하, 하지만 왠지 부끄러운걸…….”
“뭐가 말인가요?”
“그게, 그…… 내가 쿠에게 고, 고백했잖아……. 나…… 그러니까, 음, 연인은 처음인걸.”
그렇게 말하며 에스카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붉어진 귀가 시야에 들어왔다.
연인.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생생한 단어였다.
“쿠?”
에스카가 살짝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희 사이가 뭐라고요?”
“여…… 연인……. 아냐? 쿠도 날 사랑하고, 나도 쿠를…….”
난 그녀를 밀어붙이며 키스했다.
연인, 연인, 연인.
세상이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마시는 공기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온기도, 숨결도, 훨씬 또렷하게 느껴졌다. 포치 벽돌 사이에 낀 이끼조차도 찬란하게 보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날 꽉 안으며 말했다.
“꿈이 아닐까요?”
“꿈?”
“네, 아까 전 이미 죽었고, 지금은 제가 너무 원하는 걸…… 죽기 전에 뇌가 환상으로 보여주는 거죠.”
“뭔가 더 원하는 게 있어?”
에스카의 물음에 난 빠르게 답했다.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주십시오.”
“내가?”
“네, 내가 원하는 걸 당신이 들어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걸 제가 들어주고 싶군요.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줘. 날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줘. 날 외롭게 혼자 두지 말아줘. 항상, 항상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역시 꿈인 걸까요?”
이렇게나 달콤한 대답이라니.
“꿈이 아냐.”
에스카의 단호한 대답에 난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구나.
마치 세상에서 첫 숨을 내쉰 것 같은 감각이었다.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드디어 감각을 되찾았다는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산소가 피에 공급되고,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세포 하나하나가 일깨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살아났다고, 이게 삶을 사는 거라고 영혼이 환호성을 지른다.
부서진 조각들을 그녀가 맞춰주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걸, 진정한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내게 말 한마디로 그런 변화를 일으킨 에스카는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평이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내 인생의 첫날밤이었다.
“사람 살……!”
도망치는 산적의 등을 꿰뚫자 그가 단말마를 지르며 풀썩 고꾸라졌다. 산적이 사람 살리라니, 어울리지 않는 문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메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에스카 블란테의 애인!”
“무슨 상관인 겁니까?”
눈을 찌푸리며 묻자 메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블란테」의 애인인 거잖아. 굉장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굉장하지는 않습니다만.”
혹시라도 여자가 도망갈까 봐, 피임하지 않고 사정하는 인간이다.
정사 도중 에스카가 피임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나는 모른 척했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흥분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의 촉촉하고 좁은 안쪽과 헐떡이는 숨소리가 생각나 난 좀 더 난폭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제대로 검을 배운 사람이잖아? 게다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실력이 굉장한 게 눈에 보이는데? 보통 상회에 오는 칼잡이들은 용병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습니까.”
옆에서 엘런이 카악 퉤, 요란하게 침을 뱉으며 날 곁눈질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가 이 상단의 리더 격이었다는 건 분위기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건 열다섯 살 이후로 처음인데.’
어린 기사를 얕보던 고참병들과의 신경전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들을 적으로 삼으면 절대 안 된다. 어쨌든 등을 맡기고 싸우는 상대니까.
‘뭐, 결국은 거나하게 버려졌지만.’
나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고 검집에 탁 꽂아 넣은 다음 시체를 발로 밀었다. 메이가 사람들에게 손짓하자 시체를 숲 한쪽에 파묻는 작업을 끝마치고 다시 마차는 숲길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에 되어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데 엘런이 내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어이.”
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아니꼽다는 얼굴로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밥 먹고 한판 하지?”
“같은 편이랑은 안 싸워.”
“썅, 기사 출신이라고 되게 빼네. 깝치지 말고 한판 하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와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양쪽을 다 계산해보니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여기서 싸우지 않으면 내내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았다. 모욕과 괴롭힘이야 익숙하지만 귀찮은 일을 미리 막을 수 있다면 막아두는 게 좋겠지.
저녁 식사를 가볍게 끝내고 둘은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칼을 빼 들었다.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흐아압!”
요란한 기합과 함께 엘런이 검을 휘둘렀다. 변칙적이고 제멋대로인 용병 특유의 칼놀림이었다. 실전으로 검을 배우면 이렇게 된다. 이게 점점 더 간결해지면서 다듬어지면 놀라운 솜씨가 되지만 불행히도 엘런은 아직 그 경지까지는 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발이 따로 놀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난 거침없이 상대의 검을 퉁겨내며 발목을 호되게 걷어찼다. 잘못된 체중 이동을 하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걸리면 형편없이 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꼭 지금처럼.
바닥에 쓰러진 엘런은 얼굴부터 목까지 전부 시뻘겋게 물들었다. 난 조금 아차 싶어 얼른 검을 거두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붙잡지 않았다.
욕설을 내뱉은 엘런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확연하게 호위단의 중심이 나에게로 이동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니까 그 검도 보통 검이 아닌 것 같던데?”
“에스카가 만들어준 거야.”
꼭 비버처럼 생긴 로트가 내 말에 오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내 검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거 굉장히 비싸겠는걸.”
“가격은 모르겠지만.”
에스카를 칭찬하는 걸 듣는 건, 날 칭찬하는 걸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웠다. 메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감정해볼래? 응? 얼만지 궁금하지 않아?”
“딱히 궁금하지는 않은데요.”
그녀가 준 선물이니까, 1페소의 감정가가 나와도 내게는 1억 페소와도 바꾸지 않을 물건인 것이다. 검의 가치는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아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사 역시 궁금했던지 얼른 달려와 내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몇 가지 불안하게 만드는 시험을 한 뒤, 외알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5천만 페소는 거뜬히 가겠는데요. 무엇보다도 마법이 영구로 걸려 있으니까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검으로 쏠렸다. 난 검을 가볍게 쓸어주고 그 시선들을 하나씩 맞받아쳐 주며 웃었다. 가지고 싶으면? 덤벼. 네가 먼저 죽겠지만.
그 후로 사람들의 행동은 더욱 친밀해졌고 메이는 그걸 아주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인사기록에는 분명히 내가 노예였다는 기록도 실려 있을 텐데, 그건 쏙 빼놓고 기사라고 날 소개한 것부터가 그냥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생각이었던 듯했다.
‘엘런을 리더로 하기에는 불안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일은 끝났다. 멀지 않은 곳에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수입도 적았다.
‘이걸로는 새끼손가락에 낄 반지도 못 사겠는데.’
“쿠하힐.”
“단주님.”
부르는 소리에 정중히 인사를 하자 메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좀 더 장기로 가는 일이 있는데 같이 갈래? 조금 위험한 길이기는 하지만 대신 수입이 꽤 짭짤하니까. 한, 이 정도?”
그녀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어 보였고 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도 없이 청혼하는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메이가 거침없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좋아, 좋아, 잘 생각했어. 너같이 실력 있고 정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드니까, 웬만하면 내 상단에 정착해주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걸로 만족할게.”
난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호위도 쉽게 끝났다.
받은 돈으로 반지를 구매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사기에는 돈이 모자랐다. 혀를 차고 있는데 메이가 말했다.
“반지 사려고?”
“네.”
“그럼 내가 대신 사줄게. 직원에게는 20% 할인이니까.”
“정말입니까?”
반색하자 메이는 다시 웃었다.
엘란시아의 피가 짙게 흐르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먼 곳에서, 이방인 사이에서 보는 동향 사람이라니. 물론 난 혼혈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엘란시아 사람이 아니었고 그건 내 피부색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엘란시아 사람들은 전부 갈색 피부다. 내 피부는 연한 갈색이라 여기에서도 눈에 띄었지만, 엘란시아에서도 이질적이었다.
직원은 반지를 상자에 담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에스카가 청혼을 거절한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같은 놈과 결혼이라니. 상회에서 「블란테」의 명성에 관해 듣게 되자 더더욱 그러했다.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법세공사. 없어서 팔지 못하는 블란테의 세공품.
지금도 그녀가 날 사랑한다는 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에스카와 함께 집으로 가는 내내, 주머니 속의 상자를 손끝으로 굴리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 미리 예약해놓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를 한 다음에 말을 꺼내야겠지? 와인도 한 잔 들어가서 분위기가 좋아질 때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집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는 에스카를 보자 싹 사라졌다.
“에스카 블란테, 너 몸이 이게 뭐야.”
“어?”
“왜 이렇게 말랐어?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지?”
“가, 감기로 좀 아팠어.”
그녀의 변명이 어설퍼 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좀 아팠는데 이래? 왜 말 안 한 거야?”
“쿠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진짜로 괜찮아. 의사도 괜찮다고 했어.”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난 말라서 너무 가늘어진 그녀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낮게 말했다.
“부탁이니까, 앞으로는 미리 말해줘.”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어깨도, 몸도 너무 가늘어져서 이대로 바스러질 것 같았다. 단순한 감기?
정말 단순한 감기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마를 수 있는 걸까?
“꽉 안아도 안 부서져.”
“부서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저기 그런데 쿠.”
“응?”
“다녀오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녀의 질문에 난 허를 찔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있어.”
“그 이야기 뭔지 들을 수 있을까?”
“저녁 먹으면서 해줄게. 레스토랑 예약해놨어.”
“어? 아니…… 그냥 여기서 해주면 안 돼?”
“여기서 그냥 할 이야기가 아닌데.”
난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적어도 좀 더 분위기가 좋은…….
“아니, 지금 여기서 듣고 싶어.”
하지만 에스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어투에 난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 할 줄 아는 거야?”
거절할 테니, 레스토랑이 아깝다는 걸까?
하지만 에스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르지만 나도 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난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역시 어디 아픈 거지?”
“아니라고 했잖아.”
그녀의 입매는 고집스럽게 다물어져 있었고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 억지로 데려간 곳에서, 이미 기분이 상해 있는데 프러포즈를 한들 무슨 소용인가?
할 수 없이 나는 에스카를 소파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머니 속의 상자를 꺼내서 그녀의 앞에 내밀어 열었다.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 말했다.
“저와 남은 인생을 함께해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에스카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 차올랐다. 크게 뜬 황금색 눈에 경악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입을 열었다.
“쿠…… 저기…… 난.”
에스카의 반응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거절한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그러자 에스카의 어깨가 크게 움찔하더니 그녀가 양손을 뻗어 상자와 내 손을 동시에 붙잡았다.
“아니, 해요! 하겠습니다! 할래요. 하게 해주세요!”
정말로, 허락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해서 난 되물었다.
“정말로……?”
“당연하지!”
에스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 역시 팔을 뻗어 날 마주 안았고 난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에스카가 웃으며 내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간지러워, 쿠.”
그 말에 키스를 멈추자 에스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럼, 끼워주세요.”
“기꺼이, 내 여왕님.”
못 본 새 마른 그녀에게 반지는 살짝 헐거웠다. 그녀의 손에서 빛나는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에게는 더 크고 아름다운 보석이 어울린다는 생각에 속이 살짝 쓰려왔다.
“내 봉급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지만,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해줄게.”
작게 약속하자 에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그렇게 말하는 에스카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서 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고마워, 에스카. 내 여왕님. 네가 나에게 준 모든 것들에. 난 날 너에게 줄게. 줄 게 이것뿐이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날 너에게 줄게. 내 소중한 쿠하힐.”
한마디도 지지 않는 내 여왕님의 말에 난 미소를 머금었다가 물었다.
“그래서, 에스카가 할 중요한 말은 뭐야?”
그 말에 그녀가 내 손을 붙잡더니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나 임신했어.”
머릿속에 벼락이 친 것 같은 충격이었다. 새하얗게 텅 빈 후 뒤늦게 천둥이 따라오듯이 난 간신히 쥐어짠 한마디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맙소사, 에스카.”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스카와 나의 아이. 그녀와 나의 아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에스카를 붙잡고 키스를 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아주 좋아, 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괜찮지?”
“좋아? 그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맙소사, 세상에. 잠깐, 그럼 이렇게 마른 게…….”
“입덧 때문입니다.”
“많이 심한 거야?”
난 걱정이 되어 물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무했지만 입덧이라면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마르다니.
그런 나의 걱정을 다독이려는 듯 에스카가 내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초기가 지나면 입덧도 끝난대.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그다음에는 먹고 싶은 게 엄청 생긴다고 루아가 그러던걸.”
“빨리 지나가길 바라야겠네.”
난 그렇게 속삭였다. 앞으로 그녀의 배가, 내 아이를 품고 더 둥그렇게 될 것을 상상하자 욕망이 솟구쳤다. 마른 에스카의 얼굴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
난 항상 나쁜 패를 골랐다.
“……죽어?”
“그래. 임신한 여자 세공사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전부 사망했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그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었지만 단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사키는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초기니까 낙태해도 괜찮겠지.”
“에스카님이 허락하실까?”
그 질문에 난 입술을 짓씹었다. 피 맛이 났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문을 나서자 겨울바람이 얼굴을 따끔거리게 만들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 거실에 들어섰다. 벽난로 앞에서 에스카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난 그녀가 날 눈치챌 때까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가 죽는다고?
그 말이 저질스러운 농담처럼 여겨지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에스카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들었다.
“쿠, 갔다 왔…….”
“왜 말 안 했어?”
“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내 말에 그녀의 얼굴에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곧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아이 낳을 때는 그렇잖아.”
“그게 아니라. 아, 에스카.”
난 마른세수를 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두 번이나 널 죽일 짓을 내 손으로 저지르게 될 줄이야.”
사실을 말하고 스스로 놀라 난 쓰게 웃었다. 이제 에스카의 배 속에 있는 내 씨가, 저 괴물이 에스카를 먹어치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가벼운 기척이 느껴지고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아 내리고는 부드럽게 키스해왔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아냐, 에스카, 내가 모른 척했어, 네가 피임 반지를 끼지 않은 걸 알고도 그냥 모른 척했다고. 네가 내 아이를 임신하면 널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고백을 하며 차라리 난 그녀가 날 경멸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경멸의 씨인 그 괴물을 없애버리자고 결심하기를 바랐다.
“쿠하힐…….”
그녀는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해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난 기쁜걸. 쿠의 아이를 가져서 행복한데?”
에스카의 말은 달콤했다. 지독할 만큼 달콤하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에스카, 날 위해서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뭔데?”
“지우자.”
“…….”
내 말에 그녀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에스카, 널 잃고 싶지 않아. 아니, 잃을 수 없어. 절대로, 절대.”
그 말에 에스카는 나에게서 멀어지려는 듯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다 괜찮았다. 그녀가 죽는 것보다는 날 미워하는 게 더 나으니까.
“아니, 쿠하힐. 그건 안 돼.”
“에스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지우자? 그게 말이 돼?”
“제발.”
“쿠하힐! 쿠도 기뻐했잖아. 행복하다고 했잖아!”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기 전에는.”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살 수도 있다고.”
“사키에게 들었어. 단 한 명도 살아난 예가 없다고.”
내 말에 에스카는 멈칫하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옛날 일이니까, 지금보다 의학도 발달하기 전이고. 그 뒤로 오랫동안 여자 세공사가 없었잖아. 지금은 마법도 많이 발달해 있고 의술도 좋아졌어.”
“내 욕심 때문에 널 잃을 수는 없어. 만약 이런 줄 알았다면 결코 널…….”
“쿠하힐. 난 죽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생사의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지는 전쟁터에 있었던 내가 잘 알지.”
“내가 약속 어기는 거 본 적 있어? 괜찮아, 쿠.”
에스카는 필사적으로 날 달래고 설득하려고 애썼다.
무얼 위해서?
그녀가 날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우리 아이는 착해서, 엄마를 해치지 않고 잘 나올 거야. 쿠랑 나랑 반반씩 닮아서 분명히 미인일걸. 엄청 귀여울 거야.”
난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에스카의 말은 마치 천국을 약속하는 것처럼 달콤했지만 난 그게 현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 나쁜 패만 뽑으니까.
봐, 이번에는 그녀가 죽는 패를 골랐군.
“괜찮아, 쿠. 죽지 않을게. 약속할게.”
그녀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난 그대로 무너져서 울고 싶었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 희망을 뽑아버리고 없애버려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계속 경고하고 있었지만 난 결국 그녀의 천국에 굴복했다.
그 뒤로 난 에스카를 내 시야에서 벗어나게 두지 않았다. 그녀의 입덧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심해서 뭐든 제대로 먹지 못했다. 루아에게서 받은 요리 레서피를 가지고 조금씩 다양하게 잔뜩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에스카의 토하는 등을 두들기다가 난 손바닥 밑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척추뼈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말라서 그녀의 뼈가 그대로 느껴졌다. 배 속에서 에스카를 죽이려고 발버둥치는 애새끼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 애는 잘못이 없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임신시킨 건 나니까. 저 애를 만든 건 나다. 난 적의를 다스리려고 애썼다. 에스카는 어떻게든 나에게 부성애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난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입덧이 끝났을 때는 그제야 나도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에스카의 비쩍 말랐던 손목도 그럭저럭 이전처럼 되돌아왔다.
사키는 내 선택에 대해 비난도 옹호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선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배가 점점 부풀어오자, 난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카가 장담한 대로, 아이를 낳아서 셋이서 해피엔드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희망은 금세 부서졌다.
‘봐주는 게 아니라 죽였어야 했는데.’
온실에 앉아 난 그런 생각을 반복했다. 물론 공작가에서 엘런을 가만두지 않을 테고, 공작가에서 살려둔다고 해도 내가 그를 남겨두지 않을 터였다.
아를은 마법사를 초빙해 왔다. 난 그가 원한다면 그의 구두라도 핥을 수 있었지만 아를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온통 에스카에게 쏠려 있었고 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아를이나 나나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질투하면서 에스카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아를은 에스카의 사랑을 받고 그녀와 결혼한 나를 질투했고, 난 에스카에게 뭐든지 해줄 수 있는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그를 질투했다.
서로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걸 원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깨어난 에스카는 끈기 있게 침대에서의 생활을 버텼다. 샤샤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악기, 책, 아이용품 같은 것들을 항상 잔뜩 가지고 왔고, 수다를 떨 만한 화젯거리도 마련해서 매일같이 방문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에스카는 버티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얇은 천으로 된 벽 뒤에서 들리는 에스카의 비명은 끔찍했다. 아를도, 샤샤도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다.
난 무의식중에 손을 바지에 비비다가 바지가 피투성이가 된 것을 발견했다.
‘아, 주먹을 쥐었을 때.’
너무 세게 쥐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모양이었다.
피가 나는 손바닥을 멍하니 보는데 샤샤가 나에게 손수건을 던지듯 건넸다.
“자해가 유일하게 에스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거라면, 너 진짜 쓰레기네.”
그녀의 말에 난 픽 웃고는 상처를 눌렀다.
“아아아악!”
커다란 에스카의 비명에, 우리 셋 모두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흐느끼는 소리와 간호사와 의사들이 재촉하는 소리가 폐부를 쑤셔댔다.
1시간? 2시간? 아니면 영원?
짧은지 긴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앉아 있던 샤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기는 이쪽으로.”
“산모님?”
“안 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산모님, 예쁜 아가씨예요. 정신 차리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참지 못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확 끼쳐오는 피비린내와 시트에 가득한 붉은 피를 보고 멈춰 섰다.
너무나도 창백한 에스카가 그 피투성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에스카!”
한달음에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땀투성이인 하얀 손은 차가웠다. 그녀가 미약하게 눈동자를 움직여서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애썼다.
“에스카, 에스카, 에스카. 나랑 약속했잖아.”
난 다시 그녀에게 약속을 상기시켰다.
날 혼자 두지 말아줘.
죽지 않겠다고 했잖아?
힘주어 손을 잡으며 계속 이름을 부르는데 그녀의 눈꺼풀이 그대로 감겼다. 손의 움직임도 멎었다.
“에스카?”
작게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너무 작게 불러서 그런 걸까?
“에스카!”
의사가 에스카의 목에 손을 대고, 코 밑에도 손을 대보더니 말했다.
“유감입니다만.”
“아냐.”
“아내분은 사망하셨…….”
“아니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의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애도와 동정이 어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아냐, 에스카는…….”
난 다른 말을 해줄 사람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샤샤는 울음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난 아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나에게 꿈 깨라는 독설이라도 퍼부어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의 눈에는 고통과, 그리고 동정이 담겨 있었다.
“남편분, 예쁜 따님이에요.”
간호사가 애써 말했지만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볼 수가 없었다. 그 애가 날 닮았다면! 아니 에스카를 닮았다면!
어느 쪽이든 날 절망에 빠트릴 것이 분명했다.
난 천천히 의사의 멱살을 놓았다. 머릿속이 윙윙 울려왔다. 천천히 에스카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고, 부드러웠다.
나도 그녀의 옆에 눕고 싶었다.
지독한 피로감과 상실감이 날 덮쳐와, 에스카의 옆에 누워서 눈을 감고 싶었다.
“에스카.”
다시 조용히 이름을 불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커다랗게 움찔하고 움직이며 심장 부분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에스카가 밭은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렸다.
“컥, 쿨럭, 쿨럭, 하아…….”
“에스카? 에스카!”
놀라 그녀의 손을 잡는 나를 의료진들이 밀쳐내고 에스카에게 달려들었다.
“환자가 살아났어!”
“맙소사, 괜찮습니까? 이거 보이세요?”
“네, 잘 보여요.”
기침 때문인지 에스카는 조금 긁힌 목소리를 냈지만 그래도 에스카는 에스카였다. 의사는 신중하게 여러 가지 검진을 실행했고, 난 여전히 눈앞의 기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이건 내가 보고 있는 환상인 걸까? 어쩌면 처음 그녀가 고백했던 것부터가 꿈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난 거기서 죽어서…….
“모든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아직 안정하시는 게 좋겠네요.”
의사가 말하며 옆으로 살짝 비켜섰고 난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스카가 웃고는 내 손을 잡고 속삭였다.
“약속 지켰어.”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녀의 웃음은 다정했고, 그녀의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는 지금 이것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난 터져 나오는 격렬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이마에 가져다 대며 난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내 나쁜 패를 에스카는 에이스로 바꿔놓았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외전 마침.
지은이 후기
완결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쓸 때는 몰랐는데 퇴고할 때 보니 어찌나 씬이 많은지……. 씬을 좀 줄여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건 꾸금 소설이니까요!
가감 없이 씬을 그대로 놔뒀습니다. 으하하하!
노예를 충동구매해 버렸다.
딱 제목 그대로 그 한 줄만 가지고 시작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마감에 치여서 정신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제목이 너무 직관적이지 않나요? 사실은 제목을 바꾸려는 생각도 했었는데, 주변의 격려(?)에 힘입어 그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겉표지도 그림이니까요!
교정을 받으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안 틀린 곳이 없어……. OTL
제가 오타, 비문, 번역체의 총집합이거든요. 그래도 뒤로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기는 하지만……. 교정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나비노블의 첫 19금 라인이라 약간 부담되기도 합니다만, 독자님이 유쾌하게 즐겨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게다가 은화님의 그림이 너무 멋져서!
사실 은화님 그림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후기를 쓰라니,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타자를 두들기니 많이 나오지 않는군요. 미숙한 글을 아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리고, 또 컨택해 주신 나비노블 담당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2월의 월계수」 작가님들에게도 하트를 날립니다.
감사합니다.
시야 올림
그린이 후기
안녕하세요! 2권에서 다시 뵙습니다, 은화입니다!
작중의 에스카와 함께 다사다난하게 풍파를 겪은 작업이었습니다.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지푸라기 잡듯 컨디션을 쥐고 카페인과 함께 살았네요 ㅠㅠ
그나마도 잠을 너무 못 이겨서 자주 연락이 없던 절 기다려주신 담당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왠지 스페셜 땡스도 써야할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이렇게 무사히 완결이 되네요 ㅠㅠㅠ꿈만같다…….
작업을 마치면 언제나 그렇듯 아쉬움이 남네요ㅠㅠ. 더 예쁘고 화려하게 그리고싶은 욕심.
제게는 여러모로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고 기억으로 남을 『노예를 충동구매해 버렸다』.
예쁘고 재밌게 봐 주신다면 너무 뿌듯할 것 같아요 X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