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당신과 나의, 사랑스러운
“우웨엑!”
먹은 것을 전부 다 게워내며 욕실에서 숨을 헐떡였다. 아침을 먹으려고 하자마자 소시지 냄새에 구토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억지로 참고 먹어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과일류는 조금 먹을 수 있었는데 이것도 일부는 무리였다.
‘갑자기 왜 이러지?’
덜컥 겁이 나서 다시 억지로 음식을 먹어보려고 했지만 다시 전부 게워내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을병에 걸린 건가?’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내가 죽으면…….’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아냐, 일시적인 걸 거야. 괜찮아. 원래 감기도 심하게 걸리면 입맛 없고 토하고 그러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달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토마토 수프 같은 건 먹을 수가 있어서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았던 수프를 저녁에 잔뜩 끓여서 먹었다. 다음 날 아침은 그 냄새도 참을 수 없어서 또 전부 버렸지만.
저녁에 쿠하힐과 통화할 때면 목소리만 들리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온 힘을 모아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몸 상태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난 큰 결심을 하고 사키를 만나러 상회로 갔다.
“유언장 수정 말입니까?”
사키가 의아한 얼굴로 날 보았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기부하고 일부 물품은 샤샤랑 아를에게 주기로 되어 있잖아. 기부가 아니라 대부분을 쿠하힐에게 넘겨주고 싶어.”
“에스카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시면 하나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긴 내가 거울을 봐도 얼굴이 말이 아니긴 했다. 푸석푸석하고, 다크서클이 생기고, 못 먹어서 몸무게가 더 줄어든 것 같았다.
“유언장 고쳐줄 수 있지?”
“물론 고쳐드릴 수 있습니다만, 에스카님. 말씀해주세요.”
사키의 부드러운 어투에 난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사, 사키, 나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
“네?”
사키의 눈이 커졌고 난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게, 자꾸 잠만 늘어나고, 읏, 뭔가 먹으면 다 토해버려. 속도 계속 안 좋고……. 피곤함이 사라지지도 않고…….”
이야기를 듣는 사키의 얼굴이 점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더니 마지막에 그는 양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는 그 자세로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스카님.”
“……응?”
사키는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한숨과 함께 빠르게 말했다.
“임신하신 것 같습니다만.”
“어?”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사키가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직접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의사를 부를까요?”
난 손수건을 받아 눈물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반문했다.
“하, 하지만 맨날 피임 반지 끼고 있었는데? 임신이 될 리가 없어…….”
“정말로 100%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항상 끼고 있었다고?”
“어…… 그, 그게…….”
시작할 때는 몰라도 끝나고 나면 항상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키는 입속으로 뭔가 쿠에 대해 욕을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내 손을 잡았다.
“루아가 임신했을 때와 증상이 비슷합니다. 확인해보세요, 에스카님.”
그 말에 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내 아랫배에 손을 대고 마력을 미약하게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저, 저기…… 사키, 나, 그러니까…….”
“없애실 겁니까?”
사키가 심각한 얼굴로 물어와 난 얼이 빠졌다.
‘없애? 아기를? 쿠랑 나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키가 의사를 불러 날 진찰하게 했고 의사가 웃으며 “축하드립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사, 사, 사키, 어떻게 하지?”
그 말에 사키가 날 보더니 쓰게 웃고는 말했다.
“얼굴에는 기쁘다고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게…….”
그 질문에 난 당황스러움이 사라지고 단숨에 행복감이 저릿하게 몸을 채우는 걸 느꼈다.
“엄청 기뻐.”
나와 쿠의 아이.
에스카와 쿠하힐의 아이.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잘 먹고, 푹 쉬셔야죠. 그리고 쿠하힐에게는 제가 연락을 하겠습니다.”
“아, 그건 괜찮아.”
“네?”
“쿠에게 연락 안 해도 돼.”
그 말에 사키가 날 빤히 보다가 물었다.
“설마 쿠하힐의 아이가 아니라든가 그런 문제인가요?”
“사키!”
“아니라면 그에게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꽤 멀리 갔을 테니 돌아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아니, 그러니까 안 돼. 벌써 절반이나 지났는걸. 게다가 뭔가 중요한 일도 있는 것 같았고……. 돌아오면 이야기할래.”
내 말에 사키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했지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없애실 생각도 없는 거군요.”
“당연하잖아! 아, 맞다. 하지만 아를과 샤샤에게는 알릴래.”
“……그러죠.”
사키가 곧 연락용 구슬을 가지고 왔고 난 아를의 코드를 입력했다.
잠시 후 아를이 연락을 받았다.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개인 연락번호입니다.”
“아를!”
“에스카? 무슨 일이야? 왜 개인 구슬 쓰지 않고?”
“저기 헤헤, 아를 있지. 나, 아이 가졌어.”
다음 순간 침묵이 돌았고 아를이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그 개쓰레…….”
사키가 옆에서 내 귀를 막았다. 난 놀라 사키를 바라보았고 사키는 묵묵히 내 귀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사키가 내 귀에서 손을 떼고는 말했다.
“임산부가 듣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죠, 공작 전하.”
“아, 젠장…….”
아를이 침묵했고 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를. 아를이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 하지만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샤샤에게도.”
“그래? 난 너에게 최대한 말하는 걸 미루고 싶었어.”
“……뭘?”
“약혼했다는 거.”
“상대가 누구야?”
“남작 영애.”
“그때 말해줬던?”
“응. 1황자파에, 직접 만나보니까 비즈니스 상대로 탁월하더라.”
“아를, 그런 식으로…….”
난 더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아를은 행복해질 거야. 행복해져야 해.”
“……그래. 그래서, 우리 별장으로 올 생각은 없어? 너에게 하루 종일 주치의를 붙일 거고, 온천도 따뜻하고, 거기에 둘만 있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편이 좋지 않아? 그리고, 젠장할 그 새끼는 세공사가 임신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음, 아니. 간신히 여기 적응했으니까 여기 있을래. 제안은 고마워, 아를. 그리고 쿠는 아직 내가 임신한 거 모르는걸.”
내 대답에 아를이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과 함께 이어 말했다.
“몸조심해, 내 컵케이크 아가씨. 네 몸은 튼튼한 것도 아니니까. 만약에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자식이 죽을 줄 알아.”
“남의 애인을 함부로 죽이지 마.”
“그래, 그래. 일단 알았어. 샤샤에게는 내가 이야기할게. 너 애 떨어질라.”
아를의 말에 난 웃고는 이어 말했다.
“고마워. 아를. 좋아해, 아주아주. 친구로서.”
“나도 고마워, 내 꾀꼬리.”
그렇게 대화를 끝내자 사키가 말했다.
“공작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임신 초기에는 위험하니까 안정이 될 때까지는 저희 집에서 지내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렇게 위험해?”
“아뇨, 의외로 태아란 튼튼하기도 합니다만, 혼자 계시면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으니까요. 쿠하힐이 올 때까지는 저희 집에서 지내세요.”
“하지만 루아도 임신 중이잖아. 움직이기 힘들 텐데.”
그 말에 사키가 살짝 웃었다.
“그래서 에스카님을 데려가서 부리려는 거랍니다.”
“아, 그런가? 그런 거면 갈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막상 그의 집에 가자 나는 집안일은 가정부가 와서 다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왠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루아의 일을 돕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루아는 아기를 위해서 옷이나 턱받이 등을 직접 손으로 만들고 있었고, 난 난생처음으로 그녀에게 바느질을 배워 손바느질을 시도해보았다.
저녁, 흔들의자에 앉아 연락 구슬로 쿠와 대화를 했다.
“사키의 집에?”
“응, 쿠가 없어서 외롭고 쓸쓸하니까 여기에 오게 됐어.”
“사키와 루아라면 나도 안심이 되네. 몸은 어디 나쁜 곳 없고?”
“응, 완전 쌩쌩해.”
차마 입덧 때문에 몸무게가 죽죽 빠지고 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웃으며 대답했다.
뒤에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얼굴을 한 루아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레이스 달린 아기 옷을 여러 벌 만들어둔 상태였다.
“알았어.”
쿠가 대답하고 여행길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루아도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사키가 오면 난 슬쩍 둘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루아의 아이에게도 뭔가 선물해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백금으로 팔찌를 만들어줘야겠다. 보호 마법을 달아서, 루비랑 페리도트로 장식을 해서…….’
그렇게 결심하고 다음 날 집으로 향했다.
루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설마 좀 걸어 다닌다고 죽지는 않잖아? 그리고 너무 오래 집을 비워두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하고 난 집으로 돌아갔다.
난로와 화덕을 피우고 환기를 좀 시킨 다음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백금은 단단하고 까탈진 녀석이라 마력 조절에 신경을 써야 했다. 적당한 마력을 적당하게 계속 부어 넣으면 백금이 찰흙처럼 말랑말랑해지는데, 그때 떼어내서 가공을 하는 것이다. 잘못하면 물처럼 되어버리거나 가루가 되어버리거나 하는 등 쉽게 변형이 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하지만 난 다르지!
능숙하게 백금을 뽑아내어 사슬을 만들며 동시에 안에 회로를 새겨 넣었다. 그렇게 일정 크기를 만들고 나서 휴, 하고 작업을 끝냈다.
‘아이가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아야지.’
난 스승님을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슬쩍 아랫배를 만져보았다. 이 안에서 아이가 자란다니,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쿠가 소식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기뻐……해주면 좋겠는데.’
혹시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피임했는데 왜 아이가 생기느냐, 내 아이가 아니다, 라고 한다거나?
게다가 뭔가 중요한 이야기도 있다고 했고.
‘비밀로 할까. 아냐, 아냐. 그건 아니지, 에스카……. 으음…… 일단 쿠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밝혀도 되지 않을까? 그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결심하고 난 옷가지들을 챙겨서 루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백금 팔찌를 완성해서 루아에게 건네자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카님, 이건…….”
“아직 태어나기 전이지만, 내가 주는 선물이야. 보호 마법을 넣었어. 아이를 지켜줄 거야. 사실은 좀 더, 좋은 걸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내 상태가 상태인지라.”
“아니에요, 이것만으로도 기뻐요. 이렇게 비싼 걸 받아도…….”
그녀가 슬쩍 날 보더니 웃었다.
“되겠죠. 고마워요, 에스카님.”
“응, 루아랑 사키가 나에게 해주는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닌걸.”
루아가 웃고는 소중하게 상자를 닫아서 벽난로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온 사키에게 말을 꺼냈다.
“사키, 에스카님이 선물 주셨어.”
“선물?”
의아한 사키의 말에 루아가 얼른 상자를 가져와서 보여주었고, 사키는 그 상자를 보고 미묘한 얼굴을 하더니 날 돌아보았다.
“새로 만드신 거군요.”
“응,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듭니다. 아니, 이 문제가 아니라. 에스카님,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조금씩은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마력을 비축만 해둘 수도 없고, 써야 해.”
“그건 그렇지만…….”
그 말에 루아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는 나와 사키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키가 루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스카님 말고 다른 마법세공사 중에 여자를 본 적 있소?”
“아뇨,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에스카님이 신기하기도 했죠.”
“마법세공사는 도제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정통 후계자의 대부분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이어가는 직업이지. 그래서 남자를 후계자로 삼소. 왜냐하면 여자 세공사의 경우에는 임신과 출산이 힘들고, 이뤄진다고 해도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으니까.”
사키의 말에 루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냐.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놓거든. 이걸 회로 입력이라고 하는데, 복잡한 건 넘어가고. 이 회로는 항상 마력이 내 몸 안에 고이도록 해. 신경 써서 마력을 모으지 않아도 괜찮도록. 그래서 온몸에 마력이 항상 돌고 있어. 이게 보통은 전혀 상관이 없는데…….”
난 한숨을 내쉬었고 사키가 이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태아가 생기면 달라지지. 몸속에 다른 생명체가 생긴 거니까, 사람의 몸에 쌓이는 마력은 각각 달라. 목소리나 지문처럼 개성이 있지. 그런데 다른 생명이 그 마력 안에서 태어난 거야. 그러면 마력은 그 생명체에 혼란을 느끼고 흐트러져. 그리고 태아는 그 마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력을 모으기 시작해. 그리고 두 개의 다른 마력은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지.”
그 말에 루아가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당혹해서 사키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아니, 첫 출산까지는 괜찮아. 두 번째 출산은 불가능하지만. 면역력 같은 게 생겨서, 그때부터는 아이가 생기지 않거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사키가 어두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문제는 저것만이 아니었다. 내 안의 마력 역시,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버린다. 하나는 태아를 내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지키려는 쪽과, 적을 생각하고 배제하려는 쪽. 마력이 내 몸 안에서 싸움을 벌이면 당연히 몸은 약해지고,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하는 첫 출산은 상당한 부담이 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해서 루아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루아의 질문에 사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루아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왜 마력을 쓰면 안 되는 거죠?”
“마력을 쓰면 체력도 같이 소모되니까. 그렇다고 마력을 아예 쓰지 않으면 안 돼. 마력의 양이 몸속에서 너무 많아지면 그게 몸 안에서 싸울 때마다 받는 타격이 너무 크니까. 그걸 조절해야 하는 거지.”
“복잡하군요. 그럼, 예전에도 여성 세공사가 아이를 낳은 적이 있나요?”
“글쎄, 모르겠는데. 여성 세공사라는 존재도 흔하지는 않으니까.”
사키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고 난 그 질문을 루아가 나에게 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그렇군요.”
루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 노려보듯 바라보며 말했다.
“체력의 기본은 먹는 거예요. 두고 보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에스카님에게 잔뜩 먹이고 말 테니까요.”
“나도 성공하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난 웃었다.
이틀 뒤, 상회로 쿠를 마중하러 나갔다. 이제 바람이 상당히 차가워져서 루아는 날 꽁꽁 싸맸다. 이렇게 입고 있으면 쿠가 내 얼굴도 못 알아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쿠는 단번에 날 알아보았다.
“에스카.”
“쿠, 어떻게 알아봤어? 목도리에 얼굴도 가려지고 모자도 썼는데.”
“못 알아볼 리가…….”
그렇게 말하던 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이렇게 야윈 거야? 또 세공품 만든다고 처박혀 있었던 거 아냐?”
“응, 뭐 그 비슷한…… 그보다 얼른 마무리 짓고 와. 얼른, 같이 집에 돌아가고 싶어.”
내 말에 쿠가 웃더니 내 이마에 키스하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 들어온 메이가 날 보며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에스카님.”
“안녕하세요.”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참을래요.”
“뭘요?”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아, 그리고 엘런 말인데요.”
“네…….”
“쿠하힐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그를 대해서요. 지금까지 겉으로는 반성하고 괜찮은 것 같지만 그런 타입은 글쎄요. 주의하시라고 말씀드릴게요.”
“저도 강해요.”
“후후, 그야 정면으로 블란테를 상대할 사람은 없겠죠. 공격 마법은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저도 꼭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직원 할인가로도 상당한 가격이기는 하지만요.”
메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며 하는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랑 직거래해요. 쿠의 동료니까, 좀 더 저렴하게 드릴게요.”
“정말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가 내 손을 잡고 꺅꺅거리는데 쿠가 돌아와 수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날 본 뒤에 물었다.
“제 에스카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단주님?”
“와, 경계하는 거 봐라.”
“그야 단주님이니까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럼 잘 들어가보세요, 에스카님.”
메이가 싱긋 웃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쿠는 여전히 수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인사를 한 뒤, 내 허리를 감싸며 상회를 걸어 나왔다.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아, 내 세공품 사고 싶다고 그래서 직거래하자고 했어.”
“그렇군.”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의아해서 묻자 쿠가 눈을 찡그리고 잠시 허공을 보다가 날 바라보았다.
“전에 에스카가 질투했을 때 꽤 즐거웠지만…….”
“지, 질투 아니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자면, 단주님은 여자를 더 좋아해.”
“……뭐?”
“여자 쪽이 더 단주님 취향이라고.”
“……그렇구나.”
맥이 탁 풀리면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날 보고 쿠가 놀리듯 말했다.
“그렇게 안심이 돼?”
“응.”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쿠가 웃으며 날 안은 팔에 힘을 주어서 난 슬쩍 그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허리를 압박하는 건 좀 그래요.
“에스카?”
“응? 아니, 너무 많이 먹어서 지금 배가 불러서…… 누르지 마.”
“전혀 안 배부른 얼굴인데…….”
“루아가 억지로 먹였어.”
“네가 거기 머물러서 다행이야.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쿠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걸으니 추운지도 몰랐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피우고 나온 벽난로 덕분에 훈기가 느껴졌다. 내가 겉옷을 벗자 쿠가 내 손목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에스카 블란테, 너 몸이 이게 뭐야.”
“어?”
“왜 이렇게 말랐어?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지?”
“가, 감기로 좀 아팠어.”
“좀 아팠는데 이래? 왜 말 안 한 거야?”
“쿠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진짜로 괜찮아. 의사도 괜찮다고 했어.”
쿠는 그 말에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손을 놓아주었다.
“부탁이니까, 앞으로는 미리 말해줘.”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 쿠는 아주 조심조심 날 끌어안았다. 난 그의 품 안에서 웃으며 말했다.
“꽉 안아도 안 부셔져.”
“부서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저기 그런데 쿠…….”
“응?”
“다녀오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있어.”
“그 이야기 뭔지 들을 수 있을까?”
“저녁 먹으면서 해줄게. 레스토랑 예약해놨어.”
“어? 아니…… 그냥 여기서 해주면 안 돼?”
레스토랑 가면 분명히 토할 것 같아서 난 쿠의 옷자락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그냥 할 이야기가 아닌데.”
쿠의 말에 난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아니, 지금 여기서 듣고 싶어.”
“……내가 무슨 이야기 할 줄 아는 거야?”
“모르지만 나도 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그 말에 쿠가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역시 어디 아픈 거지?”
“아니라고 했잖아.”
단호하게 말하자 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날 소파에 앉힌 다음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세공의 가느다란 반지가 들어 있었다.
“저와 남은 인생을 함께해주시겠습니까?”
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지를 보았다가 쿠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고 긴장한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쿠…… 저기…… 난.”
내가 말을 더듬자 쿠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거절한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난 그 말에 깜짝 놀라 양손으로 쿠의 반지를 든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 해요! 하겠습니다! 할래요. 하게 해주세요!”
내 말에 쿠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로……?”
“당연하지!”
활짝 웃으며 하는 말에 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날 끌어안았다. 난 웃으며 그의 목을 안았고, 쿠가 자리를 바꿔 날 무릎에 앉히고 소파에 앉았다. 쿠가 내 얼굴에 키스를 퍼부어서 난 깔깔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간지러워, 쿠.”
쿠가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가볍게 누르듯 키스했고 내가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끼워주세요.”
“기꺼이, 내 여왕님.”
쿠가 조심스럽게 반지를 내 손에 끼워주었다. 살이 빠져서 약간 헐렁했지만 그래도 반지는 마음에 들었다. 쿠가 내 반지 낀 손을 쥐고는 말했다.
“내 봉급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지만,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해줄게.”
“이걸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이상하게 행복한데도 눈물이 나와서 난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쿠가 그런 내 눈가를 닦아주며 속삭였다.
“고마워, 에스카. 내 여왕님. 네가 나에게 준 모든 것들에. 난 날 너에게 줄게. 줄 게 이것뿐이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날 너에게 줄게. 내 소중한 쿠하힐.”
그 말에 쿠가 미소 짓고는 물었다.
“그래서, 에스카가 할 중요한 말은 뭐야?”
그 말에 난 쿠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끌어다가 내 배 위에 올렸다.
“나 임신했어.”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슬쩍 고개를 들어 쿠의 표정을 살피자 쿠가 날 꽉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맙소사, 에스카.”
쿠는 말이 나오지 않는 듯 한동안 숨을 헐떡이더니 웃었다. 그리고 거칠게 나에게 키스했다.
나는 그 격한 반응에 웃으며 말했다.
“이건 아주 좋아, 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괜찮지?”
“좋아? 그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맙소사, 세상에. 잠깐, 그럼 이렇게 마른 게…….”
“입덧 때문입니다.”
그 말에 곧 쿠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많이 심한 거야?”
“초기가 지나면 입덧도 끝난대,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그다음에는 먹고 싶은 게 엄청 생긴다고 루아가 그러던걸.”
“빨리 지나가길 바라야겠네.”
쿠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난 오랜만에 우리 집 침대에서 잠들었다. 밖에서는 거친 바닷바람이 창문을 흔들었지만 쿠의 품 안은 따뜻하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다음 날 쿠는 내 입덧이 심하다는 걸 알고는 안절부절못하며 뭐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생각이 없어…….”
“하지만 어제부터 계속 굶고 있잖아. 응?”
“음……. 그러면…… 크래커?”
내 말에 쿠는 찬장을 열었다가 텅 빈 걸 발견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마을에 다녀올게.”
“응.”
쿠가 계속 옆에서 걱정하는 걸 보느니 그가 나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난롯불을 쬐며 책을 읽다가 문득 신간을 사야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쿠가 들어왔다.
“쿠, 갔다 왔……..”
“왜 말 안 했어?”
“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쿠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이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아이 낳을 때는 그렇잖아.”
“그게 아니라. 아, 에스카.”
쿠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내가 두 번이나 널 죽일 짓을 내 손으로 저지르게 될 줄이야.”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해서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쿠의 양손을 잡아서 내리고 난 그의 굳은 턱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아냐, 에스카, 내가 모른 척했어, 네가 피임 반지를 끼지 않은 걸 알고도 그냥 모른 척했다고. 네가 내 아이를 임신하면 널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쿠하힐…….”
그의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기쁜걸. 쿠의 아이를 가져서 행복한데?”
쿠가 떨리는 눈으로 날 보고는 가늘게 속삭였다.
“에스카, 날 위해서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뭔데?”
“지우자.”
“…….”
난 살짝 입을 벌리고 그를 보았다. 쿠가 내 손을 잡고 손톱 끝에 키스하며 애원했다.
“제발 에스카, 널 잃고 싶지 않아. 아니, 잃을 수 없어. 절대로, 절대.”
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쿠하힐. 그건 안 돼.”
“에스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지우자? 그게 말이 돼?”
“제발.”
“쿠하힐! 쿠도 기뻐했잖아. 행복하다고 했잖아!”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기 전에는.”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살 수도 있다고.”
“사키에게 들었어. 단 한 명도 살아난 예가 없다고.”
그 말에 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옛날 일이니까, 지금보다 의학도 발달하기 전이고. 그 뒤로 오랫동안 여자 세공사가 없었잖아. 지금은 마법도 많이 발달해 있고 의술도 좋아졌어.”
“내 욕심 때문에 널 잃을 수는 없어. 만약 이런 줄 알았다면 결코 널…….”
“쿠하힐. 난 죽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생사의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지는 전쟁터에 있었던 내가 잘 알지.”
“내가 약속 어기는 거 본 적 있어? 괜찮아, 쿠.”
난 쿠에게 다가가서 그를 살짝 안으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우리 아이는 착해서, 엄마를 해치지 않고 잘 나올 거야. 쿠랑 나랑 반반씩 닮아서 분명히 미인일걸. 엄청 귀여울 거야.”
난 고개를 들고 미소 지으며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가볍게 발뒤꿈치를 들어 키스하고 말했다.
“괜찮아, 쿠. 죽지 않을게. 약속할게.”
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뒤로 아이를 없애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날 애지중지하다 못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보호했다. 솔직히 답답할 지경이었다.
“쿠, 나 이불 때문에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
“날씨가 무척 추워.”
“응, 그런데 뜨거운 물주머니랑 이렇게 두꺼운 이불이랑 있으면 찜통인걸.”
으쌰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쿠가 달려와 털 달린 실내화를 내주었다. 이제 입덧은 끝났지만 대신 진짜 먹고 싶은 것들이 멋대로 생겼다가 사라져서 쿠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쿠.”
“응?”
“나 딸기 먹고 싶어.”
“……겨울인데?”
“응. 딸기.”
진지하게 말하자 쿠 역시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알았어.”
난 가볍게 손을 흔들어 나가는 쿠를 배웅하고 나서 얼른 책상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쪽에서 종이를 꺼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만약」은 대비를 해둬야 하니까.
하지만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쿠가 엄청나게 화를 낼 테니까 몰래몰래 이렇게 작업하고 있었다. 이미 쿠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여러 통을 써서 숨겨두었다.
‘나중에 사키에게는 따로 이야기해둬야지.’
일단 죽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사람이 죽고 싶지 않아 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니까. 쿠하힐도 그랬고, 스승님도 그랬고, 죽음은 공평하고도 무자비했다.
난 편지 한 통을 완성하고 밀랍으로 봉인한 다음 잘 숨겨두었다. 그리고 거실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가서 불을 쬐고 있는데 쿠가 돌아왔다.
내가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자 쿠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기 도니까 가까이 오지 마.”
“무슨 상관이야. 얼른 이쪽으로 와.”
쿠는 옷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외투를 벗은 후 안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내주었다.
“진짜 딸기는 못 구했고, 이건 딸기절임이야.”
“우와, 고마워, 쿠! 잘 먹을게! 어디서 난 거야?”
“디저트 가게를 털었지.”
그의 말에 내가 빤히 그를 보자 쿠가 내 이마를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제대로 돈 주고 가져온 거야. 칼 들고 내놓으라고는 안 했어. 비슷한 협박은 했지만. 핫케이크 구워줄까? 올려서 먹을래?”
“응.”
잠시 후 나는 핫케이크에 시럽을 뿌려 와구와구 먹었다. 쿠에게는 미안했지만, 딸기절임은 한입 먹자마자 먹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져버려서…… 억지로라도 정성을 생각해서 먹으려는 걸 쿠가 빼앗았다.
“너 먹고 싶지 않아 하는 게 얼굴에 보여.”
“아, 아냐. 딸기 먹고 싶은걸.”
“아니잖아.”
쿠가 쓰게 웃고는 뚜껑을 도로 닫아 찬장에 올렸다. 개월 수가 올라가면서 식욕이 확 늘어서 정말로 평소에는 잘 몰랐던 것들도 왜 이렇게 맛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살이 붙고 있어서 쿠는 뭐든지 내게 먹이려고 들었다.
“이름은 뭐로 지을까?”
“뭐?”
“아기 말이야. 딸일까, 아들일까.”
“어느 쪽이든 무사하게 태어나면 좋아.”
“쿠는 어떤 이름이 좋겠어? 여자애면 역시 꽃 이름 같은 걸 붙일까?”
“태어나고 나서 붙이면 되지, 이름이야.”
“에이, 미리 후보자들을 뽑아두는 게 좋잖아.”
“그때 가서 정해도 안 늦어.”
쿠의 말에 난 눈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아이에게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걸 거부했다. 난 쿠에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잡아당겼다.
음, 차진 느낌.
“쿠하힐, 좀 더 기뻐해 줘.”
“네가 무사하고, 아이도 무사하면 그때 기뻐할게.”
“쿠!”
“이게 내 최대한의 양보야.”
그가 내 손을 자신의 뺨에서 떼어내고 손가락 마디에 키스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을 내게 바라지 마. 에스카.”
“아, 그래. 그럼 내 멋대로 붙일 테야. 여자애면 엘렌델이라고 하고 남자애면…… 음, 라온이라고 짓겠어.”
“그래.”
쿠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되물었다.
“뭐라고 짓는다고?”
“기억 안 나.”
“쿠하힐 블란테!”
화가 나서 버럭 외치자 쿠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렇게 성을 붙여서 불러주면 기분 좋더라.”
“이익!”
난 이를 악 물고 쿠하힐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은 출산 후로 미루기로 하고 서류만 접수한 상태였지만, 내 성을 같이 쓰기로 하는 데에는 둘 다 이견이 없었다. 그 이후로 내가 종종 저렇게 부르면 꽤 만족스러워 했다.
심지어! 지금 같은! 싸우는 상황에서도!
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와 양 뺨을 감싸며 말했다.
“엘렌델, 라온.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네가 지어줘, 에스카.”
난 쿠하힐의 손을 잡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하지만 그때는 너도 의견을 내는 거야?”
“그래. 얼마든지.”
쿠가 그렇게 말하고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