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델루치아의 남매
난 작업실에서 사파이어 팔찌를 조정하고는 피곤한 눈을 들어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 끝났어?”
옆에서 날 지켜보던 쿠의 물음에 난 웃으며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거의 최종 조정만 하면 끝나. 옆에서 보는 거 지루하지 않아?”
“아니. 전혀. 그런데 에스카.”
“응?”
“아까 보니까 팔에 무늬가 떠오르던데.”
쿠의 말에 난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셔츠를 뒤로 걷어붙인 뒤 마력을 조절했다.
팔 위로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 회로들이 떠올랐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마법의장이야.”
“난 그게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쿠가 손을 뻗어 내 팔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워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라 난 얼른 팔을 내리고 셔츠 소매를 내렸다.
“스승님이 내 몸 안에 마력으로 새겨주신 거야. 「블란테」 마법의 정수가 여기에 다 담겨 있지. 난 이걸 해석하고 보충해서 내 다음 대 「블란테」에게 넘겨주는 거야.”
“검술을 전하는 것과 같은 거로군.”
“그렇지. 그런데 좀 골치 아픈 게, 다른 건 다 해석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는데 딱 하나만 해석을 통 못 하겠어.”
“그래?”
“응, 심장 부근에 있는 의장인데…… 영 안 풀리네.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마법이라.”
그 말에 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괜찮은 거야? 심장 부근이라면…….”
“몸은 괜찮아. 마력 흐름에도 이상이 없고. 그냥 스승님의 난제를 풀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난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다시 작업대로 몸을 돌려서 팔찌에 집중했다. 섬세한 마지막 조정까지 마치고 난 팔찌를 쿠에게 던졌다.
쿠는 팔찌를 가볍게 받아 들며 의아한 얼굴을 했고 난 웃으며 턱을 괴었다.
“쿠에게 줄게. 선물.”
“이런 거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쿠가 팔찌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쿠의 말에 당황했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쿠의 검이랑 맞춘 거야. 최상급 리커버리를 세 번 쓸 수 있어.”
“내가 그 마법을 어디에…….”
쿠가 쓰게 웃으며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팔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팔찌를 손목에 차고는 말했다.
“고마워, 에스카.”
“응. 그리고 저기 쿠, 나 할 말이 있어.”
“선물을 해준 다음에 꺼내는 말이라니. 무슨 말을 할지 겁이 나는데.”
쿠의 말에 난 헤헤 하고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아를을 찾아가보려고 해.”
“…….”
“이대로 그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아. 물론 쿠가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를과 헤어진다고 해도 적어도 마지막 이야기는 하고 헤어지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난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쿠에게 말했다.
“나 아를을 찾아갈 거야. 쿠는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아.”
“널 혼자 보낼 리가 없잖아.”
쿠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해서 난 웃으며 그의 손에 뺨을 비비고 말했다.
“그럼 준비할게.”
“바로?”
“응, 더 미룰 이유도 없으니까.”
“마법으로 갈 거야?”
“응, 마차로 가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이렇게 연락을 안 받고 있으니 솔직히 좀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
“알겠어. 준비할게.”
내가 여행용 짐을 싸는 사이 쿠도 준비를 끝냈다. 가벼운 무장을 하고 검을 찬 쿠는 기사라기보다는 용병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것도 잘 어울렸다. 쿠가 내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는 물었다.
“이게 전부야?”
“별로 가져갈 것도 없는걸. 그리고 오래 있다가 오지 않을 거니까.”
“만약 공작 전하가 절교하겠다고 하면?”
쿠의 말에 난 입술을 깨물고 쿠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쿠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는 말했다.
“괜찮을 거야.”
“그……럴까?”
“내가 널 떠날 수 없는 것처럼, 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
난 쿠의 말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내가 곁에 있고 싶다고 하는 게 아를을 더 괴롭히고 있는 걸까?
만약 아를이 날 보기 싫다고 하면, 매달리지 말고 그대로 보내주는 게 그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를과 샤샤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싫어.’
이게 내 이기심이라도, 욕심이라도, 싫었다.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쿠의 손을 잡은 다음 내 브로치를 가볍게 붙잡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텔레포트(Teleport). 내 친구에게로.”
다이아몬드가 진동하며 강한 빛을 내뿜었고 동시에 주변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와 쿠는 공작가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누구냐!”
“에스카님?”
당황한 호위병들이 칼을 뽑아 들었고, 쿠는 날 자신의 등 뒤로 넣었다. 그중 내 얼굴을 아는 한 호위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에스카님, 여기는 갑작스럽게 어떻게……?”
“아를을 만나러 왔어.”
“연락을 받으신 겁니까?”
“아니, 쳐들어온 건데.”
그 말에 호위관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일단 알리겠다고 말하고는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호위병들은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으로 쿠를 바라보았고, 쿠는 느긋하게 서서 그들의 시선을 받아냈다.
“에스카!”
잠시 후 뛰어온 것은 샤샤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난 당황해 물었다.
“샤샤? 어디 안 좋아?”
샤샤는 내 옆에 서 있는 쿠하힐을 한 번 노려보고는 날 끌어안았다.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알다니, 뭘 말이야?”
“아를이 아파.”
“뭐?”
되묻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샤샤는 내 품에 안긴 채 계속 말했다.
“아를이, 너랑 연락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랬는데 와줘서 기뻐, 에스카. 에스카. 에스카. 아를이…… 읏…….”
“많이 아픈 거야?”
샤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
난 샤샤를 내 품에서 밀어내고 말했다.
“일단 아를에게 가자. 만나도 괜찮은 거지?”
“아를이 널 보려고 할지 모르겠어. 연락하지 말라고 한 게 아를이니까. 난…….”
“그럼 넌 여기 있어. 난 쳐들어갈 테니까.”
“아냐, 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내가 바래다줄게.”
샤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샤샤는 아까보다 밝은 얼굴이 되어 내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야, 에스카. 네가 와줘서. 만약 아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작위는 누구에게 가?”
난 돌리지 않고 물었고 샤샤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남아 있는 사촌에게. 그럼 나야말로 끈 떨어진 연이야.”
“그렇구나.”
“응.”
고개를 끄덕인 샤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아를이 아픈 건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어. 괜히 틈을 주면 안 되니까. 숙부들도, 숙모들도, 전부…… 공작의 지위가 얼마나 달콤하게 보이겠어?”
그런 대화를 하며 우리는 아를의 방 앞에 도착했다. 방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샤샤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샤샤가 문을 열자 그가 나와 쿠의 앞을 가로막았다.
“에스카님은 괜찮지만, 이 남자는 아닙니다.”
그 말에 난 눈을 찡그렸다가 쿠를 돌아보았다.
쿠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응, 다녀올게.”
난 쿠에게 작게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한 명의 시종이 서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고 인사했다.
샤샤가 그에게 나가라고 손짓하고는 침대 커튼을 열었다.
“손님 왔어.”
“전부 거절해.”
아를의 말에 내가 침대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미 와 있어.”
그 말에 이불을 거의 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아를이 몸을 홱 돌렸다. 그가 날 보고는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에스카? 샤샤, 너.”
“샤샤가 연락한 거 아냐. 내가 알아서 찾아온 거야. 계속 연락이 다 안 되길래.”
그렇게 말하며 난 아를이 일어나려는 걸 누르며 그의 침대에 앉았다.
“나는 나가 있을게.”
샤샤는 침대 커튼을 내리고 나갔다.
“왜 왔어?”
아를의 물음에 난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아를이 이렇게 피곤하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공작 부부의 장례식 후 작위식 때 보고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를, 열이 나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안 괜찮아.”
난 그렇게 말하고는 강제로 아를을 눕히고 옆에 있는 세숫대야에 손을 올렸다.
“아이스(Ice).”
살짝 살얼음이 어는 것까지 보고 나서 수건을 적셨다. 아를의 이마에 수건을 올리자 아를이 쓰게 웃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간호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별거 아닌데 샤샤가 호들갑 떠는 거야.”
아를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네가 나에게 연락을 안 했다는 게 심각한 거야. 보통 감기라면 당장 연락해서 와서 간호해달라느니 말했을 거면서.”
내 말에 아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켰네.”
“우리가 안 지가 몇 년인데. 어쩌다가 이런 거야? 넌 자기 관리 하나는 철저하니까, 그것만은 믿고 있었는데.”
난 한숨을 내쉬고 아를의 뜨거운 손을 내 뺨에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가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프지 마, 아를.”
“널 놔두고는 안 죽어.”
아를이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제발 그래줘.”
난 손을 뻗어 이마 위의 수건을 다시 집어 들고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주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남매의 머리카락은 정말 극상품이다. 뜨거운 이마와 달리 젖은 머리카락은 차갑고 부드러워 난 그의 머리를 슬쩍 넘기고 얼른 수건을 다시 올려주었다.
“에스카의 손, 차가워서 기분 좋네.”
“내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아를이 뜨거운 거야.”
내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아를이 “그런가?” 하고는 작게 웃더니 조용히 말했다.
“내 별명이 친족살해자인 거 알아?”
“누가 내 아를을 그렇게 불러?”
난 팍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고 아를은 담담히 답했다.
“사람들이.”
“다들 아를이 부러워서 그러는 것뿐이야. 아를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를이 그 타이틀을 안 가졌으면 그 사람들이 그 타이틀을 가져갔을 거야.”
내 말에 아를이 싱긋 웃었다.
“그건 그래. 이상하지. 내 꾀꼬리에게 손대는 게, 나에게 손대는 것과 똑같다는 걸 왜 모를까?”
난 아를 옆에 털썩 누웠다. 아를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또 그런 말 하는 사람 있으면 얘기해. 내가 가서 혼내줄 테니까.”
“어떻게?”
“엉덩이에 종기가 나게 해서 어디에도 못 앉게 해줄 거야.”
내 말에 아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 날 끌어당겼다.
“그거 좋은 생각인걸?”
“그렇지? 꼭 말해. 내가 마법도구 만들어서 찾아갈 테니까.”
아를이 날 꽉 안았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속삭였다.
“정말 지긋지긋하고 지겨워. 지쳤어.”
“아를은 너무 열심이라서 그래.”
“내 투정을 들으면 다른 귀족들은 다들 눈을 부라릴 거야. 공작이면서! 엄청난 권력을 가졌으면서! 하고 말이지.”
“작위가 위로 올라갈수록 힘든 것 같던데.”
내 말에 아를이 작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긴 침묵이 지나가고 아를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 난 사촌들이랑 뛰어 놀았어. 우리 부모님은 엄격하신 편이었으니까, 상냥한 숙모님이 좋았어. 어린 눈에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를이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사촌들 중에서 둘을 죽였지. 그리고 숙모님은 얼마 전에 목을 매달았어. 여자에게 눈이 멀어서 자기 자식을 살해했다는 거야.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그녀도 알지. 난 단 한 번도……!”
날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난 단 한 번도 내 사촌들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내 숙모의 목을 매달고 싶다고는, 단 한 번도…….”
“알아, 아를. 넌 좋은 사람인걸.”
아를의 손가락이 내 등을 파고들 것 같았다. 난 보지 않았지만 진동으로, 소리로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마주 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아를이 우는 것도, 거의 10년 만인 것 같았다.
“아프니까, 괜히 더 신경 쓰이는 거야.”
내 말에 아를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맞아, 사실 사촌들이 전부 병신은 아니니까.”
“뭐야, 전부 병신이 아니라니 다행이네”
난 그의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아를은 내 말에 작게 웃나 싶더니 날 힘주어 껴안았다.
“에스카, 난 결혼할 거야.”
“응.”
“공작가에는 후계가 필요하고, 나 역시 지지 세력이 필요해.”
“응.”
“하지만 내 곁에 네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네가 필요해.”
“난 항상 필요한 자리에 있을 거야. 알고 있잖아? 난 네 꾀꼬리고, 반지꽃이고, 불티고, 컵케이크인걸.”
아를이 몸을 움직여 날 살짝 밀어내고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를의 보라색 눈동자에 이미 눈물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네 빌어먹을 연인은 저 개새끼고.”
“아를.”
내가 경고조로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내게 가볍게 입맞춤하고 말했다.
“알았어. 네 그 자식을 개라고 부르지는 않기로 하지.”
“쿠를 쿠하힐 말고 다른 식으로 부르는 건 내가 용서 안 해. 그를 욕하는 건 나를 욕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그래, 적어도 너와 「좋은 친구」로는 남고 싶으니까.”
“고마워, 아를. 그리고…….”
난 괜한 참견인가 싶어서 잠시 숨을 멈췄다. 아를의 보라색 눈동자가 궁금증을 담고 날 바라봐서 난 그의 양 뺨을 감쌌다.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적어도 네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해. 적어도, 네가……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과.”
내 말에 아를이 눈을 빙글 굴리더니 한숨과 함께 답했다.
“고려는 해볼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로서는 최대의 양보겠지.
그때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와서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아를도 이어 몸을 일으켰다.
“나가볼게.”
“같이 나가.”
“아프잖아.”
“이제 괜찮아. 스트레스가 풀렸더니 좀 나아졌어.”
“그럴 리가 있어?”
내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를은 이미 일어나서 가운을 걸치는 중이었다. 억지로 그를 침대에 붙들어놓을 수도 없어서 난 후다닥 아를을 앞질러 방문으로 빠르게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적어도 내 뒤에 있어.”
“에스카.”
아를이 날 불렀지만 난 상관하지 않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멍하니 복도 앞 광경을 바라보았다. 샤샤가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며 쿠하힐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샤샤?”
“말도 안 돼! 이딴 새끼가! 감히!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아, 밝혀진 모양이군.”
내 뒤에서 아를이 흥미진진하다는 어투로 말했고 난 한숨을 눌러 참았다. 난 달려가서 샤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샤샤, 그만해.”
“용서 못 해! 안 해! 윽…… 흑…… 으아앙~.”
결국 샤샤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해 그녀를 놓아주자 샤샤가 덥석 날 끌어안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해줘, 응? 에스카, 에스카아~.”
“혹시 쿠가 내 연인인 게 사실인지 아닌지 묻는 거라면 사실이야.”
“싫어, 진짜 싫어! 절대 싫어! 저런 시꺼멓고 덩치만 큰 남자가 에스카를, 으으~ 싫어! 흑, 에스카아!”
울며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샤샤를 토닥이며 쿠하힐을 바라보았지만, 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샤샤, 이러지 마.”
아무리 달래도 샤샤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와, 즐거워라.」라는 눈으로 날 보고 있는 아를에게 「어떻게 좀 해봐.」 하고 입 모양으로 벙긋거렸지만, 아를도 쿠처럼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하지만, 흐윽, 저건 노예잖아! 싫어, 에스카아~ 흐흑, 흑, 나, 난! 엉엉!”
“쿠는 이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고. 잠깐, 샤샤, 좀 떨어져서, 그만 좀 울고.”
밀어내려고 하자 샤샤는 더욱 격렬하게 달라붙어왔다. 난 그녀를 떼어놓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는 그냥 그녀가 얌전해질 때까지 입을 다문 채 등을 토닥여주는 걸로 노선을 바꾸었다.
난 다시 아를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아를은 피식 웃은 다음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복도에서 이러지 마, 품위 없게.”
“아, 아를은 알고 있었어?”
샤샤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를을 보고 튀어 나가려는 샤샤를 재빨리 붙잡았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의 아를에게 샤샤가 달려들면 아를이 쓰러질 것 같아서였다.
“넌 눈 뻔히 뜨고 있으면서 그거 하나 못 막아?”
분을 못 이긴 샤샤가 빽 소리치자 아를은 눈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샤샤를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샤샤, 여기까지. 더 이상 소란 떨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 말에 샤샤가 움찔하더니 날 휙 돌아보았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애처로울 만큼 슬퍼 보여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기 고양이를 혼내지 못하는 건가. 아니, 샤샤는 고양이가 아니잖아?
정신을 다잡고는 샤샤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샤샤 이바스 델루치아.”
샤샤의 처량한 빛을 띤 보라색 눈동자가 「혼낼 거야?」 하며 올려다보았지만 난 단호하게 말했다.
“나랑 쿠가 연인인 건 사실이고. 그건 아를이라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 샤샤, 네가 운다고 해서, 아~ 샤샤, 울지 마. 응?”
“그, 그럼 안 울 테니까, 나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
“그래, 알았어. 어차피 아를이 나을 때까지는 있으려고 했고.”
그렇게 말하고 난 쿠를 바라보았다. 쿠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지?”
샤샤의 물음에 난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었다.
그 뒤로 샤샤는 나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도무지 쿠와 둘만 있을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샤샤는 내 침대까지 밀고 들어와서 같이 자자고 했고, 난 그런 샤샤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공작가에 있을 동안 만이니까, 참자.’
식사를 할 때도 샤샤는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내 접시 위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올려주고 심지어 먹여주기까지 했는데, 아를은 그 모든 걸 그저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통쾌해한다고 하나. 내가 샤샤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즐기는 게 뻔히 보였다. 나쁜 자식.
아무래도 샤샤는 나에게 지켜줘야 하는, 연약한 여동생 같은 존재라 그녀에게는 모질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쿠에게 선을 넘었다면 한 소리 했겠지만, 샤샤는 쿠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며 나에게만 집중했고 그것까지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2주일이 지나자 아를은 완전히 쾌차했고, 난 그가 괜찮다는 걸 의사에게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싫다.
물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싫은걸.’
스승님의 차가운 손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던 손인데, 그게 차갑고 딱딱해진 감촉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난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쿠랑 손잡고 싶다. 끌어안고 싶다.’
어째서 연인인데 금단현상에 시달려야 하는 거죠? 난 속으로 가볍게 불만을 토해내고는 슬쩍 방 한쪽에 서 있는 쿠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안 돼.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야.’
“그럼 정말로 나은 거죠?”
“네, 그렇습니다.”
의사는 이제 지겹다는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고, 아를 역시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진짜, 정말로, 완전히 멀쩡해. 내 꾀꼬리는 걱정도 많지.”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난 이제 돌아갈게.”
내 말에 샤샤가 놀라 내 옷자락을 잡았다.
“벌써 가는 거야? 가지 마, 에스카. 응?”
“샤샤, 하지만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는걸. 나도 집을 오래 비워둘 수 없고.”
“우응, 하지만~.”
“그리고 여기 있으면 쿠랑 시간을 보낼 수가 없는걸.”
“에스카!”
샤샤가 쌍심지를 켜자 난 샤샤의 어깨를 잡았다.
“샤샤, 아무리 그래도 쿠하힐은 내 애인이야. 그건 바꿀 수 없어. 네 심술을 받아주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 말에 샤샤의 보라색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난, 싫은걸~. 에스카를 빼앗기는 것 같아서 싫어. 이제 나보다 연인이 더 중요한 거야?”
“그렇지 않아. 샤샤는 계속 내 소중한 친구야.”
“쿠는 연인이고?”
“그렇지. 둘을 비교할 수는 없어.”
그 말을 들은 샤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쿠를 보고 나를 다시 바라본 다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영원히 친구지? 죽을 때까지?”
“당연하지.”
“그리고 연인은…….”
샤샤는 말꼬리를 끌며 쿠를 보고 히죽 웃고는 다시 날 보았다.
“응, 재미있게 시간 보내고, 다시 와, 에스카.”
난 샤샤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의아했지만 곧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닷가니까 샤샤도 나중에 한번 놀러 와.”
“좀 더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되면 그때 놀러 갈게.”
“응.”
아를이 다가와 내게 가볍게 키스했다.
“몸조심해.”
“너야말로 조심해. 앞으로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네, 네. 내 꾀꼬리 아가씨의 말에 따르도록 하지요.”
난 주먹으로 아를의 어깨를 툭 쳤고, 아를은 시녀에게 내 짐을 싸도록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단출한 짐을 방으로 들고 들어왔다. 내가 가방을 들려고 하자 쿠가 대신 들었다. 샤샤는 아쉬운 표정으로 내 양 뺨에 키스해주었고, 난 마주 키스한 뒤 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브로치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텔레포트. 집으로.”
잠시 후 나와 쿠는 집 앞에 서 있었다. 난 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고생했어, 쿠.”
“아니, 그다지.”
그렇게 말하고 쿠가 내게 키스했다. 난 헤헤 웃고는 폴짝 뛰어 쿠에게 답삭 안겼고 쿠는 날 안아 들며 미소 지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쿠랑 이렇게 붙어 있는 거 오랜만이잖아.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기쁜걸.”
쿠는 그렇게 말하는 날 가만히 보고는 날 안은 채로 집 안에 들어갔다.
그가 거실에 가방을 떨어트리듯 내려놓고 날 식탁 위에 앉혔다.
“난 이렇게 있는 것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은데.”
그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게 뭔데?”
“알려줄까?”
“응, 알고 싶어.”
쿠가 날 식탁에서 내려놓고 뒤를 돌게 시켰다. 난 당황해 쿠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쿠, 여기서?”
“왜?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쿠가 내 발 사이에 자신의 발을 밀어 넣어 내 다리를 벌리며 속삭였다. 난 다시 그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쿠가 내 허리를 안아 고정시키며 내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잠깐, 쿠하힐!”
하지만 항의보다 더 빨리 쿠의 손가락이 속옷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읏!.”
쿠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소음순을 가르고 들어오자 순식간에 애액이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쿠가 부드럽게 입구를 매만지며 귓가에서 낮게 웃었다.
“벌써 젖어 있는데?”
“이…… 이건.”
쿠가 내 귓바퀴를 깨물고 천천히 내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부엌 베란다 창문으로 바깥이 훤히 내다보여서 창피해졌다.
“잠깐, 쿠, 여기 밖에서 다 보이잖아.”
“어차피 밖에 아무도 없잖아.”
쿠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몸을 식탁으로 밀어붙이며 그대로 삽입해왔다. 이미 충분히 젖어 있기는 했지만 급작스러운 삽입에 난 헉 하고 식탁보를 움켜쥐며 그대로 허리를 꺾었다.
“에스카.”
쿠가 내 허리를 잡아 들어 난 발끝으로 서서 식탁 위에 완전히 엎어졌다.
“읏, 하아…….”
덜컹덜컹 식탁이 흔들리며 내 몸도 동시에 흔들렸다. 쿠의 귀두가 내벽의 민감한 곳을 꾹 누르며 긁어대서 난 흐느끼며 허리를 떨었다. 온몸이 쿠에게 맞춰져 길든 것처럼 쿠의 움직임에 따라 눈앞에 불꽃이 튀었고, 내가 절정에 오르자마자 쿠도 사정했다. 쿠는 내 몸을 다시 돌렸고 난 헐떡이며 쿠를 올려다보았다. 쿠가 내 허벅지를 붙잡아 자신의 허리를 감게 하고 나에게 몸을 밀착해왔다.
“사랑해, 에스카.”
“나도.”
“영원히?”
쿠의 물음에 난 웃었다. 하지만 쿠의 파란 눈이 진지하게 바라봐서 그의 물음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천천히 그와 깍지를 꼈다.
순간 쿠가 흠칫해서 난 의아해 그를 보았다.
“쿠?”
쿠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마저 깍지를 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 대답에 난 금방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응, 쿠. 사랑해. 영원히.”
쿠는 내게 키스하며 더욱더 깊숙이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식탁은 딱딱해서 등이 아팠지만 곧 그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난 숨을 몰아쉬며 쿠를 받아들였다.
쿠는 내게 무게를 싣고 가장 안쪽에 사정했다. 그리고 내 눈꺼풀에 키스하며 말했다.
“사랑해, 에스카.”
쿠가 다시 추삽질을 시작해 난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등 아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난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 이런, 하고 눈을 찡그렸다. 평소에는 겪지 않는 일이라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맨날 쿠가 빼주니까……. 너무 쿠만 의지하면 안 되는데.’
난 한숨을 내쉬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문득 내 손가락을 보니 반지꽃과 피임 반지가 나란히 끼워져 있었다.
‘내가 피임 반지를…… 끼고 있었구나.’
쿠와 함께 있은 후로는 습관이 되어서 끼고 있는지 아닌지 깜박하곤 했다. 공작가에서는 샤샤가 싫다고 해서 빼고 있었는데, 언제 또 꼈담?
‘습관이란 대단해.’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이 가득 찬 욕조로 들어갔다.
몸을 씻고 나서 욕실에서 나와 쿠를 찾았다.
“쿠?”
쿠하힐이 보이지 않아 난 당황해 이 방 저 방을 다 살펴보았고 마지막으로 부엌 식탁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그제야 안심이 되어 난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때마침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난 후다닥 거실로 나갔다.
“쿠?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잠깐, 사키에게.”
“사키?”
쿠가 고개를 끄덕이고 날 보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응, 뭔데?”
“나 다음 주부터 상회에서 일하려고 해.”
“어?”
난 놀라 그를 보았다. 쿠가? 아카상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상단 호위.”
그 말에 놀라서 쿠를 보았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
“그거 위험하지 않아?”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고.”
“최대한 단기 일로 받을 거야.”
돈이 필요한 거면 내가, 하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쿠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만약 에스카가 싫다고 하면 가지 않을게.”
그건.
그건 치사해, 쿠하힐.
난 천천히 그의 옷자락을 놓으며 웃었다.
“괜찮아. 어린애도 아닌걸. 쿠의 검술 실력을 썩히는 것도 아까우니까. 잘됐다.”
내 말에 쿠는 묘한 얼굴을 했다가 웃었다.
“에스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게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난 그냥 웃었다.
‘아, 웃는 게 이토록 어려운 건 처음이야…….’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난 얼른 쿠에게서 멀어져서 부엌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일 시작하는 거야?”
난 화덕에 불을 붙였다. 쿠의 얼굴을 보면 단숨에 이기적인 내가 올라올 것 같았다. 가지 말라고 악을 쓰게 될 것 같아서 난 쿠를 바라보지 않았다.
“응, 한 이삼일 정도. 가볍게 따라갔다가 올 거야.”
“그렇구나. 쿠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불이 잘 붙는 걸 확인하고 난 화덕의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