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새로운 시작(2-1권) (9/16)

노예를 충동구매해 버렸다 2-1

C o n t e n t

8. 새로운 시작

“찾아!”

“블링크니까 멀리는 못 갔을 거다. 샅샅이 뒤져!”

숲 위쪽의 집에서 거칠고 억센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쿠와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쿠는 어둠 속에서 내 뺨을 만지고 내 입술을 찾아 누른 다음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말해주십시오.”

“사랑해.”

“제가 이미 죽어서 천국에, 아니 제가 천국에 갈 리가 없으니…….”

난 있는 힘껏 발뒤꿈치를 들고 쿠의 목을 휘감은 다음 키스했다. 순간 몸을 경직시킨 쿠가 곧 미친 사람처럼 날 끌어안고 키스해왔다.

“에스카, 에스카.”

속삭였다. 그의 입술도, 혀도, 손도 전부 다 뜨거워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쿠가 키스를 멈추고 내 손을 잡았다.

“여기에 계십시오. 나머지를 처리하고 올 테니까요.”

“몇 명이나 남았어?”

“일곱입니다.”

씩 웃은 쿠는 나무 기둥 가까이에 날 세워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난 내 입술을 눌러보았다. 아직도 심장이 떨려왔다. 적에게 심장 소리 때문에 들킬 것 같다는 생각마저 잠깐 들었다.

“찾았다!”

“으아아악!”

“혼자 다니지 마!”

순식간에 숲의 저쪽이 소란스러워졌다가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난 나무 기둥에 기대서서 비명이 몇 번이나 들리나 세어보았다.

‘공격용 마법은 다 두고 와버려서……. 바보 같은 에스카 블란테.’

스스로 책망하며 난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잠시 후 숲은 완전히 고요해졌고, 발소리도 없이 쿠가 내 뒤에서 나타나 내 팔을 잡았다.

“에스카.”

“히이익!”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자 쿠가 놀란 얼굴을 했다가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괜찮아…….”

새삼 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쾅쾅쾅 뛰었다. 그러다가 문득 난 의문점을 생각해냈다.

“쿠, 그 기사들 우리 집으로 그냥 들어왔지?”

“네.”

“이상한데? 인식되어 있지 않으면 들어올 수가 없는데……?”

이전에 날 납치하려고 했던 남자 둘이 집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집을 무방비로 놔두는 게 아니기에 인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찾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아니면 인식표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나와 쿠는 집으로 올라가 시체들을 살펴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내 침실 문 앞에 죽어 있었고, 즉사여서 피비린내가 집에 가득했다.

“이 녀석이 대장 같더군요.”

쿠가 남자의 신체를 발로 밀며 말했다.

난 그의 옷에 마력을 퍼트려 그의 주머니에서 네모난 문양이 새겨진 은판을 찾아냈다.

“아, 이거야. 이거…… 사키의 인식표야…….”

갑자기 피가 식는 기분이 들어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쿠가 내 뒤를 따라왔다.

“밤에 산길을 말로 달려가는 건 위험합니다.”

“하지만!”

“제가 몰죠.”

그렇게 말하고 쿠가 말에 올라타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쟁터에는 낮밤이 없으니까요.”

쿠가 내게 손을 내밀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에 올라탔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려 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사키의 집 앞에 도착하자 나는 안장에서 구르듯이 뛰어내려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미 문손잡이는 고장이 나 있었다. 안에서 사키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묶인 채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사키가 보였다. 그는 날 발견하자마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에스카님! 루아가, 루아를……!”

난 바로 그의 맞은편 벽에 루아가 앉아 있는 걸 보고 숨을 삼켰다.

“아, 세상에, 루아. 루아!”

루아의 머리 위에 양손이 단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새빨간 피가 그녀의 팔을 따라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에스카……님…….”

루아는 고통 때문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 보았고, 뒤따라 들어온 쿠가 그녀 앞에 무릎 꿇었다.

“셋을 세면 뽑겠습니다.”

루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쿠는 “하나.” 하고 말하자마자 단검을 뽑아버렸고 루아는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젠장, 치료용품을 더 만들어놓을걸.”

난 욕을 하며 루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힐.”

작게 말하자 내 에메랄드 반지가 빛이 나며 내 손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가 치유용이 아니라 타인 치유용이기는 한데, 하필 제일 등급이 낮은 힐이라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래도 고통은 수그러드는지 루아의 떨림이 한결 나아졌다.

“죄송해요, 사키 잘못이 아니에요……. 인식표를 넘겨준 건 저 때문이에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안 봐도 뻔해. 루아를 인질로 잡고…… 그 미친 새끼들이 임산부를……!”

쿠가 사키를 풀어주어 사키가 후다닥 루아에게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몸 상태는?”

“괜찮아요.”

루아가 아직 창백한 입술로 미소 지으며 사키에게 말했다. 사키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사키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당신 손도 엉망이잖아요.”

“이 정도는 별거 아니오. 에스카님, 그 새끼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하나는 남겨뒀고요.”

쿠가 조용히 대답하자 사키가 미소를 지었다. 그 처절한 미소에 등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럼 그 녀석은 제 몫입니다.”

“응.”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루아의 손바닥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나자 사키의 상처를 봐주었다. 그의 손톱이 반은 벗겨지고 반은 깨어져 있었다. 어떻게든 손목의 밧줄을 풀려고 발버둥 쳤기 때문인 듯 손목 역시 살갗이 다 벗겨져서 피가 흘렀다.

“손톱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괜찮습니다.”

“나 이사 가려고.”

“저희도 그럴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에스카님, 기억이 돌아온 것 같군요.”

루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 밑은 고통과 피로로 그늘져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루아, 들어가서 쉬어. 오늘은 나랑 쿠가 여기 있을 거야. 사키도 들어가서 같이 쉬어.”

루아 혼자서는 절대로 잠들지 못할 것이다. 사키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아에게 방으로 들어가자고 속삭였다. 방문이 닫히자 곧 루아가 흐느끼는 소리와 사키가 그녀를 달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쿠에게 눈짓해서 슬쩍 저택 밖으로 나왔다.

일부러 현관문 닫는 소리를 크게 내서 나간다는 걸 알려주면서 말이다.

여전히 그녀의 정원은 꽃과 관목들에 푹 파묻혀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난 현관 포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쿠가 내 옆에 따라 앉자 난 이런 상황인데도 심장이 뛰었다. 닿지 않았는데도 가까이에 있는 그에게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난 조금 옆으로 물러났다.

“에스카.”

“으응?”

“아까부터 절 바라보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

“네, 지금도요.”

“…….”

“…….”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지나갔고 결국 난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왠지 부끄러운걸…….”

“뭐가 말인가요?”

“그게, 그…… 내가 쿠에게 고, 고백했잖아……. 나…… 그러니까, 음, 연인은 처음인걸.”

말하고도 스스로 창피해져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아, 부끄러워어! 한참을 그러고 있었지만 쿠는 반응이 없었다. 난 고개를 들어 곁눈질로 쿠를 보았다.

“쿠?”

새파란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 사이가 뭐라고요?”

그가 떨리는 걸 억제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여…… 연인……. 아냐? 쿠도 날 사랑하고, 나도 쿠를…….”

쿠가 날 눕히듯 밀치며 키스해왔다. 포치의 딱딱한 벽돌 바닥이 등에 닿아 아팠지만 그런 것보다 쿠의 손길이 달콤해서 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날 꽉 껴안았다.

“꿈이 아닐까요?”

“꿈?”

“네, 전 아까 이미 죽었고, 지금은 제가 너무 원하는 걸…… 죽기 전에 뇌가 환상으로 보여주는 거죠.”

“뭔가 더 원하는 게 있어?”

내 물음에 쿠가 날 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주십시오.”

“내가?”

“네, 내가 원하는 걸 당신이 들어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걸 제가 들어주고 싶군요.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줘. 날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줘. 날 외롭게 혼자 두지 말아줘. 항상, 항상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역시 꿈인 걸까요?”

그 물음에 내가 웃으며 답했다.

“꿈이 아냐.”

가는 한숨을 내 뺨에 내쉰 쿠가 날 일으켰다. 난 그에게 기대어 속삭였다.

“아까 온 사람들, 아를과 관련된 거 맞지?”

“네, 기사 훈련을 받은 놈들입니다. 하지만 델루치아 기사단은 아니고요. 거기보다는 수준이 훨씬 떨어지더군요.”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느리게 쓸었다. 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쿠.”

“네.”

“이제 나에게 존댓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에 쿠가 웃었다. 그리고 내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그렇군.”

난 마주 웃고는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사키랑 루아를 말려들게 해서, 너무 미안해…….”

“네가 미안해할 건 없어. 미안해해야 하는 건 공작 전하지.”

그 「공작 전하」라는 단어가 어찌나 날카롭던지 누가 들으면 그 말이 욕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아를은 또 자신의 친족을 죽이게 되는 걸까…….”

난 피곤하고 지쳐 보이던 그의 얼굴을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죽이는 편이 자비로운 거지.”

그렇게 말하는 쿠의 얼굴을 보고 난 그의 입술에 스치듯 키스했다. 내가 뭔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은데. 쿠하힐이 그런 곳에 떨어지지 않게, 미리 만나서, 뭔가 도와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쿠가 그런 날 내려다보고 속삭였다.

“내가 너와 이렇게 있을 자격이 있는 걸까?”

“무슨?”

“에스카, 넌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 그곳에서 나는…….”

쿠가 눈을 감았다.

“항상 너와 닿기를 바랐어. 하지만 닿으면 안 된다는 자각도 있었어. 하지만 욕심이 나서, 그리고 막상 에스카, 너와 닿으니…….”

“무슨 일이 있었든 난 쿠하힐이 좋아. 내 눈앞의 쿠가 좋아.”

“난 더러워, 에스카.”

쿠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내게 고백하듯, 내뱉듯이 말했다.

난 쿠하힐을 꽉 껴안았다. 괜찮다는 말 외에 다른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괴로웠다.

“울지 마, 에스카. 널 울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가 내 축축한 뺨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말했다. 쿠는 나에게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더 좋으니까.

결국 난 쿠에게 기대어 꾸벅꾸벅 졸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동이 트자마자 밖으로 나온 사키가 나와 쿠를 보고 말했다.

“계속 바깥에 계셨던 겁니까?”

“응…… 사키……. 루아는 괜찮아?”

“괜찮습니다. 아이도 괜찮고요.”

난 피곤한 눈을 비비며 사키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사 가야지.”

“그래야죠. 어디 정해두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직. 나도 어제서야 기억이 돌아온걸. 일단 집부터 좀 치워야 하고.”

“사람을 부르죠. 그리고 쿠하힐, 어제 잡았다는 사람은…….”

“묶어뒀으니 하룻밤 사이에는 안 죽었겠지.”

사키는 쿠하힐의 어투 때문인지 가만히 그를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지러 가야겠군요. 그리고 에스카님, 공작님께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응.”

사키는 루아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난 어제 주머니에 마구 집어넣었던 물품들을 털어보았고, 거기에서 연락 구슬이 나와 새벽부터 아를에게 연락을 넣었다. 몇 번의 신호 후 아를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연락을 받았다.

“으……. 설마 또 아침부터 엉뚱한 놈인 건…….”

“아를, 자?”

“아, 이런, 내 아가씨가 맞네.”

“아를, 어젯밤에 우리 집에 습격이 있었어.”

“뭐?”

아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를이 말했다.

“에스카, 기억이 돌아온 거야?”

“응.”

“아, 세상의 모든 신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아를이 말했다.

“말해봐.”

“어제 칼을 든 열다섯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왔어. 공작에게 혈족인지 친척인지를 죽이게 한 암캐는 나오라고 하면서. 아셔 백작의 원한을 갚는다고 그러더라.”

“다 죽였어?”

“아니, 한 명 살려뒀어. 아, 그 자식들이 사키에게 인식표를 빼앗으면서 루아에게도 부상을 입혔어.”

“분명히 그거 기사단이야…….”

“델루치아 기사단?”

“아니, 내 사촌의 기사단. 독단인지 숙모님이 사주한 건지는 알아봐야겠지만.”

그리고 아를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에스카, 보고 싶다.”

“나도.”

“당분간이야 못 만나지만…….”

“그렇지, 이런 소동이 벌어졌는데. 아, 그래서 나 이사 갈 생각이야.”

“어디로 가든지 알려줘, 내 아가씨.”

“응.”

“사키에게 내가 피해를 보상해주겠다고 전해줘. 따로 연락을 또 하겠지만. 우리 가문에서 파생된 일이니 처리해야지.”

“알았어.”

“그럼, 내가 그쪽으로 기사단을 파견할게. 포로를 넘겨줘.”

“사키가 먼저 손본다니까 멀쩡할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혀와 목숨만 붙여놓으라고 그래.”

“응.”

나는 아를과의 연락을 끝내고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쿠에게 물었다.

“쿠는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

“어디든 너랑 함께라면 상관없어.”

“에이, 그러지 말고. 강가? 산? 바다? 초원?”

“다 좋아.”

쿠는 그렇게 말하고 내 이마에 키스했다.

일주일 뒤 공작의 기사단에서 세 명의 기사가 찾아왔다. 그들은 어떻게 저런 상태인데 살아 있게 해둔 건지 모르겠는, 너덜너덜해진 포로를 데리고 돌아갔다. 사키는 그들에게 자신이 받은 자백서를 함께 건네주었다.

루아의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지만, 그래도 심리적인 건 어쩔 수 없는 듯 밤에 소리만 나도 불안해한다며 사키는 이사를 서둘렀다.

나와 쿠는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항구마을 바깥에 위치한 저택을 골랐고, 사키와 루아는 그 항구마을 안의 저택을 선택했다. 곧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키우는 게 더 안심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삿짐을 챙기다가 난 문득 쿠의 부서진, 아니 부서트린 오르골이 생각났다.

“저기, 쿠…….”

쿠가 날 돌아보았고 난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다 말면 더 궁금해지는데.”

“으, 아니, 그게…… 쿠…… 그러니까…… 내가 선물한 오르골…….”

그 말에 쿠가 멈칫하고 날 돌아보았다.

“본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보며 쿠가 쓰게 웃었다.

“네 선물이라 기뻤어. 하지만 그 노래는 참을 수가 없었고. 그게 엘란시아의 자장가라는 건 알아?”

“그래? 그런 것치고는 명랑한 선율이던데?”

“응. 하지만 자장가야.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불러주던.”

“…….”

그의 가족 이야기에 난 숨을 멈췄다. 하지만 쿠가 말을 멈춰서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괜히 물어본 거야.”

“그 여자를 봤어.”

“어?”

“어머니 말이야. 내가 노예가 되었을 때, 조련사가 날 끌고 갔었지.”

그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니까 지금…… 노예가 된 아들을 어머니에게 데리고 갔다는 거야?

“그 여자가 날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더라. 「모르는 사람이에요. 내 아들은 죽었어요.」”

“쿠하힐…….”

괴로워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쿠하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아들이 죽어서, 백작님이 저에게 위로차 이 저택을 주신 거예요. 제 아들은 죽었어요.」 그 여자가 사는 화려한 저택과 꿈같은 생활이 어디서 온 건지 난 똑똑히 알 수 있었지. 몸값치고는 꽤 높지 않아? 내가 나타난다면 곤란하다는 얼굴이더군.”

난 쿠하힐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쿠, 미안.”

“에스카는 몰랐으니까, 상관없지.”

“아냐, 내가 바보였어. 당연히 고향에 대해 나쁜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어머니에게서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당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고 했던 쿠하힐의 말이 떠올랐다. 백작 역시 쿠가 이렇게 된 것에 관여하고 있겠지.

“쿠, 복수할까? 응? 다 죽여버릴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 달쯤 지나니 그 생각도 사라지더군. 그리고 지금은 글쎄……? 어딘지 마비된 감각이야. 그게 진짜였을까? 내 망상이 아니라? 조련장 바닥에서 내가 꾸며낸 환상이 아닐까?”

“쿠하힐…….”

“응, 계속 그렇게 불러줘, 에스카. 그럼 난 너의 쿠하힐로 있을 수 있을 거야.”

쿠가 내 턱을 들어 올려 가볍게 키스했다. 난 그 빌어먹을 오르골을 산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2주 뒤 우리는 새 도시로 이사했다.

“새집은 마음에 들어?”

“네. 전에 살던 집보다는 작지만, 2층이라서 괜찮아요.”

루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항구도시는 활기가 가득해서 거리마다 사람들이 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난 우연히 시장에서 만난 루아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고 함께 걷는 중이었다.

“에스카님은요? 새집에 적응하셨어요?”

“응. 전의 집이랑 크기는 비슷해, 구조는 조금 다르지만…….”

“쿠하힐과는 잘 지내고 계시고요?”

루아의 말에 난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말이야.”

난 작게 루아에게 속삭였고 루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각방을 쓰신다고요?”

“쉬쉬, 루아~.”

“어머, 어머, 왜 그러시는 건데요?”

“그, 그게 창피하단 말이야.”

“네에?”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봉사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어머, 어머, 어머.”

루아가 어쩜 하고 날 보고는 짐짓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그러다가 쿠하힐 마음이 식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그, 그럴까?”

“그럼요. 연인은 쌍방이 노력해야 하는 거라고요. 하지만 지금 에스카님은 일방적으로 밀어내고 계시잖아요.”

“그건…….”

확실히 루아의 말이 옳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가 싱글싱글 웃었다.

“그렇게 창피하세요?”

“그, 그야, 나 연인을 가져보는 건 처음이고…… 쿠는 멋있으니까……. 지금 생각하니까 나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봉사를 받았는지 모르겠어. 나 눈이 좀 이상했던 게 아닐까?”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까 부끄럽다는 말이군요.”

“응, 맞아. 바로 그거야! 그리고…….”

“그리고?”

“내가 쿠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동안이야 쿠에게 일방적으로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쿠는 나 말고 다른 여자들도 있었을 테고…….”

막상 했다가 쿠가 식으면 어쩌지?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루아에게 물었다.

“루, 루아는 사키랑 어때?”

“만족스럽죠.”

“비법이나 뭔가 비결이 있어?”

“비법이라면 비법일까요……. 제가 첫날밤에 사키를 한 방에 넘어트린 비법을 알려드릴까요?”

“응. 알려줘!”

내가 귀를 쫑긋 세우자 루아가 후후 하고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머리를 싸맸다.

‘이, 이런 걸 어떻게 입어?’

루아가 나에게 준 것은 첫날밤에 입는다는 신부 속옷이었다.

‘아냐, 루아가 연인은 쌍방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어. 힘내자! 에스카! 파이팅!’

난 얼굴이 뜨끈뜨끈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반투명한 네글리제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그란 구멍으로 유륜과 유두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가터벨트를 차고…….

‘어? 팬티가 없어? 빼먹었나? 아닌데……. 설마 처음부터 없는 건가? 그야 네글리제가 가려줄 만큼 길기는 하지만……. 다 비쳐 보이는데…….’

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천천히 실크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다. 벨트로 스타킹을 고정하고 전신 거울에 한번 비추어 보자 참을 수 없게 부끄러워졌다.

“무리야,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당장 옷을 벗을까 하다가 난 손을 멈췄다.

‘쌍방 노력, 쌍방 노력, 쌍방 노력.’

그래도 이 차림으로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난 시트를 몸에 둘렀다. 그러고는 내 방에서 나와서 조심스럽게 쿠의 방문을 노크했다.

“나 들어가도 돼?”

달칵.

문이 열렸다. 쿠는 시트를 두른 내 모습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야? 나쁜 꿈이라도 꿨어?”

“드, 들어가도 괜찮아?”

쿠가 문에서 비켜서서 길을 내주었고 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고 있었어?”

“잠깐 생각 좀. 그래서 에스카, 무슨 일인데?”

쿠가 부드럽게 물어와서 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난 시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툭 하고 시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쿠가 가볍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손을 꼬면서 내 발만 바라보았다.

“저…… 저기 나, 그러니까 그동안 딱히 쿠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니라?”

쿠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난 쿠를 올려다보았다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허둥지둥 시트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쿠, 나, 나 이만 가볼…… 꺅?!”

쿠가 내 허리를 가볍게 감아들고 침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설마 여기까지 하고 도망가려고?”

“하, 하지만…….”

쿠의 손가락이 내 유두를 가볍게 눌렀다. 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쿠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그의 커다란 몸이 날 가볍게 제압하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천천히 집게손가락으로 내 유두를 돌리며 속삭였고 난 아랫배 속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의 자극에 온몸이 쿠를 향해 반응하는 것 같았다.

“읏, 쿠가…… 응…… 날 완전히 잡아먹을 것 같단 말이야.”

그 말에 쿠가 멈칫했다가 내 목덜미에 키스했다.

“먹으면 안 돼?”

“그…… 읏!”

쿠가 내 양쪽 유두를 가볍게 비틀었고 난 길게 달콤한 숨을 내쉬었다. 쿠가 쇄골 위에 키스하고 핥아 올린 다음 속삭였다.

“먹어치우게 해줘, 널 완전히 내 걸로 하게 해줘, 하나도 남김없이 삼켜버리게 해줘.”

‘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에스카, 에스카.”

그가 애원하듯 부르며 날 자신의 몸으로 눌렀다.

난 숨을 헐떡이며 쿠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쓸며 네글리제 안으로 들어왔다가 멈칫했다.

쿠가 웃음을 터트리고 가볍게 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가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질구를 손끝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깃털로 문지르는 듯한 가벼운 터치였지만 난 저절로 엉덩이가 들썩였다.

“이런 옷을 입고 날 유혹하려고 했으니까, 먹어치우게 해줘. 응? 에스카.”

난 쿠를 바라보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내게 키스하며 네글리제를 잡아 찢었고 찌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옷 같지도 않던 옷이 찢어졌다.

쿠가 내게 거칠게 키스하며 내 가슴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가 놓았다.

“에스카.”

그의 혀가 내 가슴 위로 떨어졌고 난 신음을 삼키며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쿠가 내 유두를 가볍게 깨물고 유륜을 핥으며 말했다.

“에스카의 유두, 귀여워. 항상 이렇게 뾰족해서. 민감하기도 하지.”

그가 가볍게 숨을 불어넣자 몸이 떨렸다.

“먹어치우고 싶어, 에스카.”

쿠가 이를 세워 내 유방을 물었고 난 통증에 흑 하고 숨을 삼켰다. 하지만 쿠의 손가락이 내 안으로 들어오자 통증이고 뭐고 다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이미 애액으로 질척한 질 안으로 쿠의 손가락은 쉽게 들어왔고 난 허리를 움츠리며 하으으, 작게 소리를 냈다. 쿠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에스카의 안, 꽉꽉 조여와서 기분 좋아. 알고 있어? 내 손가락을 빨아들이듯이 하고 있는 거? 내벽이 손가락에 달라붙고 있는 거?”

“쿠하힐!”

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소리를 질렀지만 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뺨을 핥고 손가락을 구부렸다.

“흑!”

“에스카의 민감한 곳이라면 전부 알고 있어. 여기랑, 그리고 여기지.”

눈앞에 별이 탁 튀었다. 저절로 허리가 떠오르자 쿠가 내 눈가에 키스하며 말했다.

“그리고 더 안쪽에……. 여기도 엄청 느끼지.”

쿠의 손가락이 지그시 그곳을 누르고 문지르자 난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리며 쿠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오랜만인데 그가 주는 쾌락이 너무 커서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쿠, 나, 이상…….”

“괜찮아, 에스카. 그대로 느끼면 돼.”

느끼다니, 뭘? 모르겠어. 그냥 머릿속이, 엉망…….

“윽, 흐윽…… 쿠…… 나…… 더 이상은…….”

쿠에게 애원했지만 쿠의 파란 눈동자는 그저 날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솔직히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에스카. 그대로 싸도 돼.”

싸? 뭘?

난 쿠의 손목을 붙잡으며 그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쿠가 내 젖은 뺨에 키스하며 더욱 강하게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쿠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듯 강하게 누르자 난 절정에 달했다.

“하아아앙!”

왈칵왈칵 다리 사이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나, 오줌 쌌어? 당황해 버둥거리는 나를 쿠가 가볍게 눌러 고정시켰다.

“에스카, 기분 좋았어?”

“으, 흑…… 응…….”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아, 라는 단순한 말로는 표현이 되지가 않았다. 쿠가 내 양 손목을 눌러 고정시키고 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자신을 밀어 넣었다. 난 숨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쿠를 바라보았다.

“아…… 쿠…… 읏.”

“하읏…… 에스카.”

쿠는 신음 소리를 내며 나에게 키스하고 완전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랫배가 가득 찬 기분이었다. 그가 천천히 내 양손에 깍지를 끼며 속삭였다.

“사랑해, 에스카.”

그의 말은 다정하고 부드러웠고 그의 눈은 마주 보고 있기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나도…… 사랑해.”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쿠가 내게 키스하고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최대한 연장하겠다는 듯이 느리게 움직여서 난 허벅지를 떨면서 흐느꼈다.

쿠는 내게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속삭이며 절정에 올랐다.

한 차례 사정이 끝나서 드디어 끝난 건가 하고 몸에 힘을 빼는데, 쿠가 내 어깨에 키스하고는 내 허리를 붙잡아 날 엎드리게 만들었다.

“쿠?”

왜 엎드리는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는데 쿠가 내 허리를 붙잡고는 강하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단숨에 끝까지 밀어붙여서 난 헉 하고 숨을 삼키며 시트를 쥐었다.

“하아, 하아…… 하아…… 쿠읏…….”

철썩철썩하고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지나친 자극에 난 몸을 빼려고 애썼지만, 쿠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달아날 길이 없었다. 흔들리는 가슴이 시트에 스쳤다.

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며 쿠의 이름을 불렀지만 쿠는 멈추지 않았다.

“에스카, 하아, 좀 더, 목소리를 내줘.”

“읏…… 하아, 쿠, 쿠.”

쿠의 한 손이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거칠게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면서 동시에 추삽질을 계속했다.

난 희한한 소리를 내며 절정에 올랐다. 쿠의 손이 애액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난 이제 신음 소리를 낸다기보다는 거의 흐느끼며 쿠에게 애원했다. 이대로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도망치려고 시트를 잡아당겼지만 쿠의 손은 내 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앗, 하읏, 싫, 으으응, 아앗!”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절정에 달하자 쿠가 그제야 파정하며 내 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난 숨을 헐떡이며 몽롱한 정신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쿠가 내 고개를 돌려 턱을 잡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혀의 놀림에 난 미약하게 반응했고 쿠가 날 추슬러서 다시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쿠의 체온은 뜨거웠고 그에게서는 진한 머스크 향이 풍겼다. 난 손을 뻗어 쿠의 몸에 새겨진 흉터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쿠가 쓰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보기 흉하지.”

“아니, 흉하지 않아. 아파?”

“지금은 전혀.”

그렇게 말하며 쿠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모아 정리해주었다. 그가 내 턱 선을 따라 내려가 목과 쇄골을 어루만지다 둥근 윗가슴을 지나 아래로 내려왔다.

“에스카는 너무 하얘.”

쿠는 내 윗가슴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만지면 더러워질 것 같아.”

“이미 실컷 만져놓고 무슨 소리야?”

내 말에 쿠가 웃고는 내 양 뺨을 감쌌다. 그의 이마가 내 이마를 누르고 쿠의 입김이 내게 와 닿았다.

“알아, 아는데도. 항상 그런 생각이 들어.”

난 고개를 살짝 들어 쿠와 입술을 맞대고는 속삭였다.

“그럼 더럽혀줘.”

그 말에 쿠가 눈을 뜨고 날 보았다. 쿠의 푸른색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저릴 정도였다.

“그럼 더럽혀질 때까지 안아줘. 네 색으로 날 물들여줘.”

그 말에 쿠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가 했더니 내게 거칠게 키스해왔다.

“에스카, 에스카, 내 에스카 블란테.”

쿠가 헐떡이며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그가 내 입술에, 뺨에, 눈에, 턱에, 광대에,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렇게 하고 싶었어.”

“……?”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네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도록.”

쿠가 내 손바닥에 키스하며 말했다.

“사랑해, 에스카.”

그러고는 웃었다.

“아, 젠장. 이 말 말고 다른 말은 없을까? 이건 너무 흔해.”

쿠가 내 양 무릎을 잡아 위로 올리며 다리를 벌리고 다시 빠르게 내 안으로 침입해왔다. 난 충격으로 숨을 삼켰고 쾌락에 정신을 잃었다.

“좀 더, 소리를 들려줘. 좀 더, 에스카.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게. 좀 더, 좀 더.”

“아앗, 하아, 쿠하……힐…… 읏, 앗, 앗, 하응.”

내 신음은 점점 더 높아졌다. 난 쿠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새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쿠가 이마를 찡그리며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고 난 이제 몇 번째인지도 셀 수 없는 쾌락의 끝에 달해 몸을 떨었다.

“쿠, 나…… 더 이상은…….”

훌쩍이며 말하자 쿠가 내 눈에 키스하고 눈물을 핥아주며 말했다.

“오늘은 널 완전히 가지고 싶어. 참지 않고, 네 안에 전부 쏟아내고 싶어.”

그 말에 난 어쩔 줄 몰라 쿠를 보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쿠는 미소 지으며 내 가슴을 붙잡았다.

“망가지지 않게, 소중하게 대할게. 내 사랑하는 에스카.”

그리고 난 그의 말을 들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아, 싫, 망가져…… 읏!” 하는 소리를 내뱉게 되었다.

중간중간 기억이 없었고 나중에는 반항할 힘도 없어서 난 쿠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그가 주는 폭력에 가까운 쾌락을 받아들였다. 그의 혀가, 이가, 손가락이, 열기가 닿지 않은 곳은 내 몸 어디에도 없었고, 난 정말로 내가 쿠의 색으로 완전히 물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느지막하게 침대에서 정신이 든 나는 쿠의 침실이 아니라 내 침실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다.

‘몸…… 아파…….’

허리도, 고관절도 전부 아팠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쿠의 품속이어서 난 멍하니 ‘다리 사이에 아직도 쿠가 있는 것 같아.’ 하고 생각했다가 그 느낌이 사실이라는 걸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를 가볍게 비틀어, 악 소리를 참으며 성기를 빼내자 다리 사이로 아직 마르지 않은 정액과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음…… 에스카?”

“나…….”

말을 꺼냈다가 난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있었다.

‘밤새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쿠가 눈을 뜨고 날 살폈다.

“씻겨줄게.”

힘없이 주먹으로 쿠를 때렸지만 쿠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무리시켜서 미안.”

쿠는 날 안아 들고 욕실로 데려갔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욕실에 왔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욕실의 뜨거운 열기와 쿠가 날 밀어붙이던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멍하니 그가 앉혀주는 대로 앉은 나는 온몸이 키스마크로 물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허벅지, 배, 가슴, 팔 할 것 없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

항의할 힘도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날 씻겨주었다. 언제 벗었는지 가터벨트와 실크스타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쿠는 날 씻긴 다음 다정한 손길로 옷을 입혀주었고 난 얌전히 그의 시중을 받았다. 쿠가 물을 가져다주어서 물을 마셨다. 그러자 조금 목소리가 나와서 난 쿠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도가 있잖아.”

“미안.”

“다음에도 또 이러면…… 각방이야!”

내 말에 쿠는 웃더니 내 이마에 키스하며 “응.” 하고 답했다. 이제 같은 방을 쓰는 게 기정사실이 된 거니까…….

‘그나저나 루아의 초이스가 그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하지만 눈 뜨고 볼 수 없는 옷이기는 했어. 게다가 옷 같지도 않은 게 왜 그렇게 비싼지…….’

아깝기는 했지만 두 번 입으라면 못 입을 것 같아서, 차라리 찢어져서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난 부엌에서 움직이는 쿠를 힐끔 쳐다보았다.

‘쿠,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이 안 나…….’

열기, 쾌락,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목소리,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파란 눈, 쾌감에 젖은 헐떡임,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며 절정에 달하던 그의 목소리.

‘……갑자기 더운 것 같아.’

난 얼굴을 부채질하며 슬그머니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뭐랄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달랐다. 만족감도 충족감도. 난 행복한 기분에 사로잡혀 웃으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틀째가 되자 근육통은 더 심해졌고 사흘째가 되어서야 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를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각 잡힌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를의 안색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눈 밑에 드리운 그늘에 나는 그가 걱정스러워졌다. 그러나 그는 날 보자 곧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아를, 어서 와.”

이어 안부를 물으려는데 그전에 먼저 아를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에스카, 내 아가씨. 뭐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혹사당해서 그래.”

“이사하느라 힘들었나? 좋아하는 거 사 왔어.”

아를이 가볍게 내 입술에 키스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그러다 그다음 순간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아를의 손이 거칠게 내 셔츠 깃을 잡아 열었다.

“아, 아를?”

“너 이게 뭐야?”

“어?”

난 당황해 아를을 따라 시선을 내렸지만 내 목을 내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쇄골까지 벌어진 셔츠 아래로 키스마크가 보여서 난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다.

“아를, 이건…….”

“놓으시죠.”

쿠가 아를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 개자식이……!”

“그녀는 제 연인입니다.”

쿠의 선언에 아를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뭐?”

아를이 되물었고 쿠가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에스카는 제 연인이니 손을 대는 건 그만두시죠, 공작님.”

아를이 내 셔츠 깃을 천천히 놓았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텅 빈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쿠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를……?”

내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남창답게 허리라도 흔들어서 에스카의 환심을 산 건가? 제 어미를 꼭 닮았군.”

“아를!”

“왜? 사실인데. 자기 아들 팔아치운 돈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지금도 수많은 남자 밑에 깔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게 저놈 어미야. 그리고 그 아들도 똑같지, 안 그래?”

아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날이 서 있었고 난 참을 수가 없어져서 아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해,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그만해? 그만할 건 너야! 에스카 블란테! 지금 저딴 새끼를 연인이라고? 너 미쳤어? 네 그 잘난 연인이 조련장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아?”

“쿠하힐이 원한 건 단 하나도 없었어!”

“그래도 더러운 건 더러운 거지.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속은 분명히 문드러져서 엉망진창일걸? 그딴 새끼가 널 안고 있다고…….”

아를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내 양어깨를 잡았다.

“결혼하지 말라거나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잖아. 내 에스카. 내 소중한 꾀꼬리 아가씨야. 연인이라면 좀 더 제대로 된 상대를 골라줘. 날 위해서, 그리고 네 스승님을 위해서. 제발, 저딴 개자식이 아니라. 좀 더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상대로. 에스카 블란테.”

“아를,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난 네게 조언을 구하는 게 아니야.”

“에스카, 이러지 마. 저딴 새끼에게 줄 거라면, 차라리, 난…… 너를.”

아를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를이 손을 내리고 번득이는 보라색 눈동자로 쿠하힐을 노려보았다.

“그때 널 죽였어야 했는데. 에스카가 독을 마셨을 때, 네 사지를 찢었어야 했어.”

“저도 그때, 공작님께서 왜 절 죽이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적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넌 에스카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건 감사하군요.”

“지금에 와서는 후회하지만. 넌 네가 에스카 옆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 걸레보다 못한 몸뚱이를 가지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쿠!”

소리 지르는 날 향해 쿠하힐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아를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이 더러운 남창 새끼가…….”

“개에서 인간으로 승격이군요.”

다음 순간 아를이 지팡이를 치켜들어 난 쿠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쿠가 그런 날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넌 내 소중한 친구야. 내 몇 안 되는, 아주 소중한 친구야.”

아를의 눈이 우울한 기색을 띠었다가 하, 하고 웃었다.

“나에게도 그래.”

“그리고 난, 네 첩이 될 수는 없어. 아를.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알아.”

“나도 알아! 그렇다고 해서 네가 언제나 혼자이기를…… 그래, 바랐어. 빌어먹을! 바랐다고. 하지만 네가 연인이 생긴다고 해도 난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적어도 이딴 자식이 아니라 멀쩡한 놈이었다면 말이야.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델루치아 공작이 인정할 만한 남자는 없을 거야.”

내 말에 아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아를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내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그래.”

“날 위해서 그를 포기하지도 못한다는 말이고.”

“그래, 알잖아.”

“알지, 내 에스카. 친인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손을 놓지 못하는 내 불티.”

아를이 딱 하고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오늘은 더 이상 못 있겠다. 샤샤에게도 말 못 해. 네가 직접 이야기해.”

“알았어.”

난 고개를 끄덕였고 아를은 현관문을 열었다가 도로 쾅 소리 나게 닫으며 돌아섰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 저 자식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거야?”

“아를…….”

난 한숨을 내쉬었다.

“섹스가 끝내줘? 젠장, 그런 거라면 내가 다른 성노예를…….”

“아를!”

난 결국 참지 못하고 아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를이 악 소리를 내며 날 노려보았다.

“뭐야? 아를이 보는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런 거 때문에 연인을 만드는?”

“그럼 대체 왜야! 동정? 쿠하힐을 닮은 거라면 차라리 개를 구해! 저딴 남창 새끼가 아니라!”

아를의 목소리가 한없이 높아졌다. 난 그가 그렇게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침착해졌다.

“아를, 사실 난 조금 외로웠어.”

“뭐?”

아를이 놀란 눈으로 날 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쿠하힐을 닮았으니까, 그래 거기서 시작한 거지. 쿠하힐에게 내가 못 해줬던 만큼 뭔가 대리만족으로 보답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곁에 있는 게 익숙해지고, 그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어. 2인분의 식탁도 좋았고. 다녀왔어, 갔다 올게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좋았어. 한밤중에 잠에서 깼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좋았고.”

난 힘없이 웃으며 아를을 보았다.

“그냥 그렇게 시작했으면 안 돼? 이런 건 사랑이 아닌 거야?”

“에스카, 그런 거면 내게 말을 해주지 그랬어. 난 널 결코 외롭게 두지 않았을 거야.”

그 말에 난 웃었다.

“아를과 샤샤가 있었으니까 지금껏 괜찮았던 거야. 이건 옛날부터 있었던 빈자리고, 아를과 샤샤로는 채울 수 없는 그런 구멍인 거야.”

그 말에 아를이 힘없이 웃었다.

“나로는 할 수 없는, 그런 것 말이지.”

아를이 지팡이를 꽉 쥐었다. 그의 보라색 눈이 날 강렬하게 응시했다.

난 손을 뻗어서 입을 열려는 아를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렇다고 만약 지금 청혼하면 정말로 화낼 거야.”

그 말에 아를이 어깨에 힘을 빼며 내 손목을 잡고 손끝에 키스했다.

“만약에 네가 날 사랑했다면.”

아를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고통스럽게 들려와 나 역시 괴로워졌다.

“아를, 알잖아.”

난 너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걸.

내가 아를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우정이지 남녀 간의 애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아를을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난 그와 함께할 수 없었다. 나와 그의 신분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고, 난 애첩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의 아내는 결코 될 수 없을 터였다. 만약 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 이상의, 연인과 비슷한 유사 연애를 하면서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쿠하힐을 만나버렸는걸.

“난 쿠하힐을 만났고, 그를 사랑해.”

아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 손을 놓고 모자를 고쳐 썼다.

“서로 마찬가지인 거겠지.”

그러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그의 선택지 가운데 나를 아내로 맞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건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를은 멋대로 내게 애정을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아를이 어깨를 으쓱하고 평소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 새끼는 안 돼.”

“아를.”

내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리자 아를이 말했다.

“어쨌든 저 남창 새끼는 안 돼. 결혼하고 싶으면 내가 후보자를 골라줄 테니까 그중에서 골라봐.”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내가 빽 소리 지르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서서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쿠하힐을 모욕한다면 아를이라고 해도 용서 못 해.”

“…….”

아를은 잠시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마 쿠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저런 소리를 듣게 하다니.

여기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쿠일 것이다. 난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쿠가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떼어내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분노와 짜증,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흘러나오는 눈물을 눌러 참았다.

“미안해, 쿠. 저런 말, 듣게…… 해서.”

하지만 쿠는 화나거나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괜찮아, 저보다 훨씬 심한 말도 각오했는걸. 실제로 공작 영애에게는 그런 말 들을 것 같고.”

“내가 못 하게 막을 거야.”

그리고 난 쿠를 끌어안았다.

“쿠, 꼭 외로워서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곁에 있어준다면 누구라도 좋았던 게 아니야. 곁에 있어준 게 쿠라서 사랑하게 된 거야.”

“곁에 있어서 다행이네.”

“제멋대로인 점도 사실 좋아.”

그 말에 쿠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 젖은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보통의 주인이라면 아마 나에게 채찍형이라도 내렸을 거야.”

“난 보통의 주인이 아닌걸.”

“그렇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랑에 빠진 거야. 에스카 블란테. 네가 날 주제넘게 만들었어.”

“그거 다행이네.”

쿠는 다시 웃고 날 꼭 안았다. 난 그의 품에 안겨서 말했다.

“아를이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쿠, 혹시 모르니까 몸조심해.”

“괜찮아, 그 사람은 아마 날 죽이지 못할 거야.”

고개를 들고 쿠를 보았다. 쿠의 푸른 눈에는 장난기가 없어서 난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내 검 실력이 대단해서, 그런 말 하려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라……. 아, 그 변명도 나쁘지는 않지만.”

쿠가 장난스럽게 눈을 한 번 굴렸다가 다시 날 내려다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는 널 사랑하니까. 너에게 상처를 주는 건,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할 거야. 반대로 나도 그를 죽이지 못할걸. 네가 상처 받는 게 싫으니까.”

“…….”

난 그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시 후 작게 속삭였다.

“샤샤에게는…… 좀 나중에 알려도 괜찮겠지……?”

그 말에 쿠하힐이 웃는 듯 진동이 전해졌다. 쿠는 날 꼭 끌어안았다.

“편할 대로.”

그리고 날 안아 들었다.

“쿠?”

그가 날 식탁에 내려놓은 다음 이마에 키스해주고 말했다.

“차 마시고 기운 내. 공작 전하가 가져온 케이크도 있고.”

“응.”

난 쿠가 주전자를 화덕에 올리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쿠는 화덕을 어떻게 쓰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이제는 요리도 하고…….

난 무릎을 모아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가 외로웠는지도 몰랐어. 조금 그렇게 느껴졌을 때도 있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쿠하힐이 곁에 있으면서 달라졌다.

그의 스치는 듯한 미소가, 소파에 나란히 붙어 있을 때의 온기가, 천천히 쓰다듬어주는 손이, 다정한 푸른 눈이 좋아서. 좋아서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었다. 동시에 곁에 남아 있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외로움쟁이네…….”

내 중얼거림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쿠가 돌아서서 말했다.

“에스카가 외로움쟁이라서 다행이야.”

“에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며 쿠가 티포트에 물을 가득 부었다. 달콤한 차 향기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티코지를 씌우고 쿠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난 눈을 감고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감촉을 음미했다.

그리고 아를은 그 뒤로 찾아오지도 않았고, 연락도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