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아를 (8/16)

외전. 아를

아를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호숫가에 서 있는 에스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완전 우울해.’

“야!”

큰소리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부모님은 친하게 지내라며 등을 떠밀었지만 마냥 저러고 있는 놈과 어떻게 친해진단 말인가?

그동안 친구라고는 공작가 도련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애들밖에 없던 아를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동상처럼 물가에 서 있는 에스카가 영 못마땅했다.

그때 나무뿌리 사이에 걸려 있는 테니스공이 눈에 띄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끼어 있었는지 흙투성이에 더러운 공이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아를은 공을 집어 들고 샤샤를 쿡쿡 찔렀다.

“야, 잘 봐라.”

“아를, 그만해.”

샤샤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지만 아를은 시끄럽다며 여동생에게 인상을 써 보인 다음 테니스공을 있는 힘껏 에스카에게 던졌다.

퍽!

상당히 아플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에스카의 뒤통수에 적중한 테니스공이 튕겨져 나왔다. 에스카는 앞으로 휘청했다가 뒤통수를 붙잡으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참 내,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를이 히죽거리며 덧붙였다.

“혹시 귀머거리인 거 아냐? 이야, 병신을 제자로 삼다니, 블란테도…….”

퍽! 아를은 말을 하다가 안면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말을 멈췄다.

“아윽!”

“꺅! 아를!”

샤샤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젠장, 뭐야!”

“아를, 피 나~!”

“피?”

여동생의 말에 얼굴을 감쌌던 손을 펴보았다. 코에서 느껴지는 찡한 충격과 고통, 손바닥에 묻어 나온 피로 아를은 충격에 빠졌다. 샤샤가 허둥지둥 손수건을 건넸다.

“나, 가서 사람 불러 올게.”

“이…… 미친 새끼가.”

아를이 보라색 눈을 번득이며 에스카를 노려보았다. 에스카도 지지 않고 금색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을 욕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스승님을 욕하는 건 달랐다. 아를이 먼저 에스카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고, 에스카도 물러서지 않고 응수했다. 둘은 바닥을 구르며 엎치락뒤치락 서로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뭐 하는 짓이냐!”

잠시 후 호통 소리와 함께 아를은 하인들 손에 이끌려 강제로 에스카에게서 떨어졌다. 에스카는 스승님 손에 일으켜 세워졌다. 델루치아 공작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루진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내 아들놈이.”

“괜찮습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죠.”

루진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대답에 공작이 픽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아를이 버럭 소리쳤다.

“세공사 따위가!”

그 말에 델루치아 공작이 아를의 머리를 꽉 누르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를 카스테.”

아를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입은 다물었다. 에스카는 슬쩍 스승님을 바라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날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 났고, 에스카와 아를은 서로에게 최악의 첫인상을 남겼다.

“어차피 싸우는 거 이기지 그랬니?”

“이기고 싶었어요.”

루진은 다시 에스카의 대답에 가볍게 웃고는 마법으로 에스카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몸싸움을 하지 말고 다른 걸로 싸우렴.”

“뭐로요?”

“체스라든가?”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루진은 공작가로 향했고 아를과 에스카 역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를은 고개를 돌렸지만 부모님의 제대로 사과하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아니 둘이 같이 싸운 건데 왜 자신만 사과해야 하는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아를이었지만 에스카도 그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은 딱히 없었다.

“너 체스 둘 줄 알아?”

“뭐?”

“체스.”

그 말에 아를은 코웃음을 쳤다.

“난 다섯 살 때부터 뒀거든.”

“그럼 체스 두자.”

“좋다.”

그리고 아를은 에스카를 자신의 놀이방으로 안내했다. 놀이방에는 테이블 자체가 체스판으로 만들어진 체스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커다란 체스 테이블에 에스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를은 코웃음을 쳤다.

“촌놈.”

에스카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 촌놈인 건 사실이니까. 그녀는 높은 의자 위에 올라가 아를과 체스를 두기 시작했고,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무효야!”

“무효가 어디 있어?”

“어쨌든 무효야!”

“진 건 진 거야.”

에스카의 말에 아를이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 판 이긴 건 이긴 게 아냐! 세 판 해서 두 판 이기는 사람이 이긴 거지!”

“치사하게.”

“뭐?”

“치사하다고. 뭐, 좋아.”

에스카는 어깨를 으쓱했고, 아를은 하인을 시켜 다시 말을 정렬하게 했다.

이 눈앞에 있는 「남자애」가 밉상이라 아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에스카는 내리 아를을 체스에서 눌렀고, 아를은 마지막에는 체스 말을 집어 던지는 행패를 부렸다.

“너, 진짜 꼴불견이다.”

에스카가 혀를 차자 아를이 눈을 부라렸다.

“뭐?”

“졌으면 졌다고 인정하면 되잖아. 내일 또 싸울 텐데.”

“맞아. 너, 내일은 나랑 승마해.”

“나 말 탈 줄 모르는데.”

“어쨌든 해!”

씩씩거리며 아를이 외치자 에스카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르쳐주면, 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아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의 기묘한 승부가 시작되었다. 매해 여름, 루진이 델루치아 공작가에 머물 때면 둘은 체스, 승마, 테니스, 카누, 달리기, 퍼즐 등등 온갖 경기를 해댔고 아를은 처음으로 만난 라이벌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대결이 3년째에 접어들던 해, 그러니까 아를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둘이 처음 만났던 호숫가에서 물수제비 던지기를 하던 아를이 말했다.

“야, 에스카 블란테.”

“왜?”

“저기.”

“……?”

의아한 표정을 지은 에스카가 드물게 말문이 막힌 아를을 바라보았다. 아를은 그런 에스카를 바라보다가 얼른 호수로 돌을 던지며 말했다.

“그때 미안했다.”

“뭐?”

“테니스공 던져서.”

그 말에 에스카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벌리고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진짜,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너 아직까지도 그거 담아두고 있었냐?”

“아, 시끄러워.”

아를은 귀 끝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짜증을 냈고, 에스카는 킬킬거리며 계속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고마워, 사과해줘서. 하지만 그때 내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

“그건 사실이지.”

아를의 말에 에스카가 다시 피식 웃었다. 에스카의 금색 눈이 가라앉아 아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음, 내 친구가 날 구해주고 죽었거든.”

그 말에 아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카가 짧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때는 나도 어려서, 잘 몰랐어. 내가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쿠하힐을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내 유일한 가족이었는데.”

에스카는 가빠지는 숨을 눌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쿠하힐을 생각하면 항상, 이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져서, 사라질 줄 알았는데.

“정말로…… 미안…….”

아를이 다시 사과했다. 에스카가 얼른 눈가를 훔치며 아를을 보고 웃었다.

“아냐, 아를은 몰랐던 거니까. 그리고 덕분에 나도 금방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고마워,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에스카가 그의 어깨를 툭 쳤고 아를은 “뭘.” 하고는 씩 웃었다.

“흠.”

아를은 잠시 손에 든 책을 비교하다가 말했다.

“둘 다 사겠어.”

그 말에 가정교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 내가 볼 거 아니고, 에스카 주려고.”

“그분이 마음에 드시는 거군요.”

싱긋 웃는 가정교사를 보고 아를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예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만나도 되는 유일한 친구인걸.”

“도련님.”

교사가 눈을 찡그리자 아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래. 바로, 이런 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얕잡혀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아랫사람에게는 권위를 유지하셔야죠.”

“에스카는 친구야, 아랫사람이 아니라. 아, 이 책도 살래.”

“마음을 붙이실 거면 비슷한 위치의 친구분들에게 붙이시는 게 좋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만큼 친구가 많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를이 그렇게 말하며 따라 나온 시종에게 계산을 하라고 눈짓했다. 가정교사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를은 느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진짜 마음이 맞는다고 느끼는 건 에스카뿐이야. 둘이 별로 대화할 필요도 없거든. 전에 지기(知己)라든가 배웠잖아? 그게 있다고 하면 바로 그 자식이야.”

“그 정도인가요?”

“응.”

아를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싸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름마다 붙어 다녀서인지 둘은 마음이 잘 통하곤 했다.

“근데 그 자식 비리비리해서 말이야. 그 스승이라는 놈이 잘 먹이고는 있는 건지.”

아를이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하는 걸 보고 가정교사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러는 아를 역시 몸이 가늘어 주변에서 걱정하는 소년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남자애란 어느 순간 쑥 자라는 법이니까요.”

“그런 걸까?”

“네.”

“그럼 다행이고.”

아를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서점을 나와서 에스카가 좋아하는 과자와 케이크도 잊지 않고 샀다.

여름 별장으로 돌아가 아를은 방문을 쾅 열었다.

“야, 뭐 하냐?”

“아, 아를 왔어?”

“오셨어요?”

샤샤와 앉아 있는 에스카를 보고 아를은 푹 콧김을 내뿜었다.

“너 또 쓸데없는 소꿉놀이 어울려주고 있냐? 샤샤, 넌 저~기 멀리 가서 놀아라?”

“싫어. 혼자 노는 거 재미없단 말이야.”

“뭐?”

“에스카는 내 남편이야!”

“뭐어?”

샤샤가 얼른 에스카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방금 전에 결혼했거든? 아를은 우리 집 강아지 시켜줄게.”

샤샤가 혀를 내밀며 약올리듯 말하자 아를은 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이놈의 계집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싫어, 놔! 에스카아~!”

“아를, 놔줘. 내 옷 다 늘어나겠다.”

“야, 샤샤 이바스! 옷 안 놔?!”

“안 놔! 못 놔! 아를, 미워!”

아를이 앵앵거리는 샤샤를 보며 「아, 이걸 한 대 칠 수도 없고, 어찌 해야 하나」 하는 표정을 짓는데 에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딸려 샤샤도 자동으로 일어났다.

“보트 타러 가자.”

에스카가 툭 내뱉은 말에 샤샤와 아를이 에스카를 바라보았다.

“뭐?”

“응?”

“셋이서 탈 수 있잖아, 보트는.”

그렇게 말하고 에스카가 걷기 시작하자 팔짱을 끼고 있는 샤샤가, 그 목덜미를 잡고 있는 아를이 순서대로 끌려 나왔다.

결국 아를이 짜증을 삼키며 먼저 손을 놓았다. 샤샤는 에헤헤 하고 웃음을 지으며 더 꽉 에스카와 팔짱을 꼈다. 아를이 에스카의 반대편에 서며 물었다.

“공부는 잘 돼가냐?”

“응? 으음, 그게 스승님에게 맨날 바보라고 구박만 당하고 있어. 이렇게 해서 저렇게 되는데 너는 왜 이해가 안 되니? 하는 눈으로 바라보신다니까. 우둔한 제자는 그저 웁니다.”

“너 머리는 좋은데.”

아를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육체적인 면에서야 자신이 훨씬 앞서지만 게임이나 수읽기에서는 에스카 쪽이 더 앞서 있었다. 에스카가 그 말에 픽 웃었다.

“그 말 들으니까 자신감이 좀 생기네.”

아를이 손을 뻗어 에스카의 금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휘젓다가 꽉 누르며 말했다.

“정신 차려. 넌 멍할 때가 있으니까.”

“아를!”

에스카가 아를의 손을 밀어내며 아를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아를은 에스카의 손을 밀어내며 웃었다.

“이 형님의 머리를 만지기에는 아직 멀었네요.”

“누가 형님이야?”

에스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꾸했고 아를은 그냥 웃을 뿐이었다.

호수로 내려간 셋은 선착장에 매여 있는 보트 중 하나를 골라 올라탔다. 에스카가 먼저 올라타서 손을 내밀었고 샤샤가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보트에 올랐다.

아를이 그걸 보며 우엑 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가 샤샤의 휘두른 양산에 찔렸다. 토하는 시늉이야 그만뒀지만 양산에 찔린 건 잊지 않았고, 나중에 노를 젓다가 물을 거하게 튕기는 걸로 보복했다.

에스카와 아를은 나란히 앉아서 노를 저었다.

“아를은? 공부 잘 돼?”

“나야 뭐, 항상 그럭저럭이지. 솔직히 말하면, 형이 있었으면 좋겠어.”

“형?”

“그래. 그럼 그 형이 공작가를 이어받겠지? 그리고 난 망나니 동생이 되어서 흥청망청 인생을 사는 거야.”

“그리고 작위가 없어서 쩔쩔매게 되겠지.”

샤샤가 입을 내밀며 말하자 아를이 에스카를 돌아보았다.

“내가 이 얼굴이면 괜찮은 여자 하나 낚지 않겠냐? 백작이나 자작이나, 그 정도가 편할 것 같은데.”

“뭐, 너 정도면 괜찮은 여자를 꼬실 수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서로 좋아하는 게 아닐까?”

에스카의 말에 아를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건 평민들이나 하는 거야.”

“귀족은 사랑 안 해?”

“그보다 조건이 우선이지. 그리고 솔직히 평민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 그래도 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은걸?”

“그건 네가 세공사니까 가능한 거야. 노동계층이라고 해도, 너 정도면 돈도 많이 벌고. 준귀족 부럽지 않잖아? 그러니까 사랑을 찾는 거지. 솔직히 널 안 좋아해도 네 돈이랑 지위 보고 붙는 여자가 수두룩할걸.”

“그런가.”

에스카는 고개를 갸웃했고 아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네 얼굴도 그렇게 나쁘지 않고.”

“그거 고맙네.”

“나만은 못하지만.”

덧붙이는 말에 에스카는 다시 웃었다. 솔직히 자신보다 아를 쪽이 더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

“괜찮아. 재수 없는 아를보다 에스카가 훨씬 좋으니까.”

샤샤가 뾰족하게 내뱉는 말에 아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게? 하는 얼굴을 했고 곧 그의 노가 첨벙 하고 물을 튀겼다.

“꺅!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샤샤가 비명을 질렀지만 아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을 튀겼다.

“너 진짜 죽을 줄 알아! 그만해!”

샤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이미 그녀의 외출용 드레스는 물에 후줄근하게 젖어서 볼품이 없어진 상태였다.

“으아앙~!”

결국 샤샤가 울음을 터트렸다. 에스카가 당황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며 열심히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샤샤. 옷은 금방 마를 거야. 응?”

“에스카아~.”

훌쩍이며 에스카의 옷소매를 잡은 샤샤가 완전히 젖어서 납작해진 보닛을 벗었다.

“징징징징 시끄럽네.”

아를이 투덜거리자 에스카는 아를에게 눈을 한번 부라려주고 샤샤를 계속 토닥였다. 에스카와 아를은 다시 노를 저어서 뭍으로 향했고, 샤샤는 씩씩거리며 젖은 드레스 자락을 끌고 저택으로 달려갔다.

“아를, 샤샤 좀 그만 괴롭혀. 하나밖에 없는 형제잖아.”

“귀찮게 구니까 그렇지.”

아를의 투덜거림에 에스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를이 에스카의 팔을 잡아끌며 웃었다.

“이제 나랑 놀자.”

그 웃음에 에스카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하고 놀게?”

“승마?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케이크도 사 왔어.”

“진짜?”

“그래.”

씩 웃으며 아를이 헛기침을 했다.

“이기면 먼저 케이크 고를 수 있게 해줄게.”

“좋아!”

에스카가 걸음을 빨리해서 앞서 걷기 시작했고 아를이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결국 승마의 승리자는 아를이었다. 에스카는 평소에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 불리하다고 투덜거리며 아를이 케이크를 고르기만을 기다렸다.

아를은 초코케이크를 고를까 하다가 에스카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걸 보고 슬쩍 몽블랑을 골랐다. 아를은 활짝 웃으며 초코케이크를 가져가는 에스카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냐?”

“응!”

그렇게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에스카는 아를, 샤샤 남매와 아쉬운 이별을 했다.

다음 해 여름, 아를은 에스카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야, 에스카.”

“응?”

“그 사람이 너 굶기고 있는 거 아냐?”

“뭐?”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던 에스카가 무슨 헛소리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를은 심각하게 말했다.

“너 키도 별로 안 크고, 너무 마른 거 아냐?”

한창 성장 중인 아를에 비하면 에스카의 몸은 호리호리하기 짝이 없었다.

“잘 먹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에스카가 몸을 일으켰다. 여자이니 아를보다 몸집이 작은 게 당연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를로서는 못 먹어서 못 크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너 여기 있을 때만이라도 좀 먹어라.”

“충분히 먹고 있어.”

에스카는 그렇게 답하며 책으로 눈을 돌렸다.

아를은 에스카의 옆에 털썩 앉았다.

“재미있냐?”

“응.”

이제 에스카가 읽는 책의 수준은 아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아를은 자신의 친구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꽤 자랑스러웠다. 아를은 책에 집중하고 있는 에스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선이 가늘고, 목도 가늘어서 자신이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카.”

“응?”

“넌 좀 나가서 공기를 마셔야 돼. 안에서 이렇게 책만 읽고 있으니까 약골이 되는 거야.”

“약골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긴, 한 대 치면 부러질 것 같은데.”

“그런가?”

에스카는 자신의 팔을 이리저리 구부려보며 되물었지만 아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카는 책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깐 바람 좀 쐴까?”

“좋아.”

아를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정원으로 달려 나가 아무것도 없는 정원에서 금세 놀잇거리를 찾아냈다. 한참 숲 안쪽을 헤매던 아를이 쉿, 소리를 내며 에스카의 옷자락을 잡았다.

“왜?”

아를이 몸을 숙이며 에스카의 머리를 눌렀다. 둘은 덤불 속에 처박혔고 에스카는 눈을 찡그렸다가 아를이 가리킨 곳을 보고 숨을 삼켰다.

사슴이 느긋하게 산딸기 잎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를이 소곤거렸다.

“암컷인가 봐. 수컷이 훨씬 멋있는데.”

“그래?”

“응, 수컷은 뿔이 있으니까.”

“나 사슴 처음 봐.”

신기해하며 에스카는 사슴을 바라보았다. 암사슴은 고개를 들고 연신 귀를 앞뒤로 움직이며 주변을 탐지했다. 에스카와 아를은 숨을 죽인 채 사슴을 바라보았다.

아를은 천천히 에스카의 머리를 누른 손을 내리며 슬쩍 에스카의 목덜미를 천천히 손으로 감싸보았다. 의아한 듯 에스카가 아를을 돌아보자, 화들짝 놀란 아를이 손을 떼며 부스럭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사슴은 동작을 딱 멈추더니 그대로 폴짝폴짝 뛰어 사라졌다. 에스카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일으킨 에스카가 아를을 바라보았다.

“왜 남의 목은 잡고 그래?”

“왠지 한 손에 잡힐 것 같아서.”

그 말에 에스카가 자신의 목을 문질렀다.

“한 손에 잡힐 정도의 목이면 금방 부러질걸.”

“그러게.”

아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손안에 잡히던 그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부드럽고 연약하고, 작게 뛰는 맥박까지 느껴지던 그 감촉이 지워지지 않아 아를은 거칠게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에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를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아를은 그걸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부터 아를은 에스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잡은 손이 생각보다도 훨씬 작다거나, 손목이 가늘다거나, 몸이 가볍다거나, 다른 놈들과 달리 왠지 좋은 냄새가 난다거나, 안았을 때 생각보다 더 부드럽다는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전부 신경 쓰이기 시작해서 아를은 속이 답답해졌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아를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마 너무 가까운 친구라서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올여름이 끝나고 내년쯤에 보면 괜찮을 거라고 아를은 애써 위안했다.

그렇게 그해 여름이 끝났다.

아를은 가끔 에스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역시 지나가는 바람이었다고 안도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 미소년이니 어쩌니 하는 놈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딱히 마음이 떨리거나 성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겪은 일들을 이번에 만나면 이야기해줘야지. 아를은 그렇게 생각하며 여름을 기다렸다.

“아를.”

에스카가 웃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아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에스카도 키가 약간 자랐다. 하지만, 아를에 비하면 이제 한참 작았고 변한 점 역시 없어 보였다. 만약 에스카가 세공사가 아니었다면 아를은 의심을 했을 것이었다.

혹시 에스카가 여자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에스카는 마법세공사였고, 마법세공사 중에는 여자가 없다. 루진이 가볍게 모자를 들어 도련님에게 인사를 해 보이자, 아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애써 웃어 보였다.

“넌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네가 너무 큰 거 아냐?”

에스카가 툴툴거리며 불평했다.

“네가 작은 거야.”

“그런가?”

아를의 타박에 에스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샤샤가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에스카, 어서 와!”

“안녕, 샤샤. 날이 갈수록 예뻐지네.”

에스카의 말에 샤샤가 양 뺨을 붉게 물들이며 헤헤 웃었고 아를은 그 꼴을 보자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예쁘긴 뭐가 예뻐. 얘가 얼마나 말괄량이인지 들으면 너도 학을 뗄걸.”

“아를!”

샤샤가 아를을 노려보았다. 아를은 샤샤에게 약올리듯 혀를 내밀어 보였다.

“어떻게 아카데미를 가도 어른스럽지 못하니?”

어머니의 목소리에 아를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공작부인.”

루진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공작부인이 생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블란테. 에스카도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에스카가 인사를 했고 일행은 현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루진에게 여러 가지를 주문하는 사이 에스카는 아를, 샤샤와 함께 차를 마셨다.

“에스카 왠지 피곤해 보여.”

샤샤의 말에 에스카가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요즘 마법의장 새기는 중이거든.”

“마법의장?”

“응, 이런 거야.”

에스카가 팔을 내밀어 보였고, 곧 그녀의 팔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이 떠올랐다. 샤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에스카의 팔을 만져보았다.

“아파?”

“새길 때 조금? 이걸 전신에 다 새겨야 해.”

“세공사는 다 이런 걸 새기는 거야?”

“응, 그런가 봐. 그런데 이렇게 복잡하게 새기는 건 블란테밖에 없다고 들었어. 다른 회로보다도 더 직관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스승님이 그러시더라. 뭐, 워낙에 우리 스승님이 천재이시다 보니.”

은근히 자랑스럽게 말하고 에스카는 얼른 의장을 도로 집어넣었다.

“에스카가 아픈 건 싫은데~.”

샤사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동안 아를은 저걸 옷을 벗고 새기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새하얀 몸 위에 떠오른 문양이 너무 직접적으로 상상되어 아를은 루진을 향해 샘솟는 질투를 느꼈다.

‘짜증 나.’

아를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샤와 에스카가 동시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숙제가 남아 있어서 먼저 일어설게.”

“벌써?”

에스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아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걸어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에스카는 복도에서나 아를을 마주쳤을 뿐, 통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에스카가 먼저 아를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뭐야, 왜?”

“숙제하고 있다더니? 숙~제에? 너희는 체스가 숙제냐.”

“잠깐 머리 식히는 거야. 왜 왔어?”

“왜 오느냐니. 네 코빼기도 볼 수 없으니까 온 거지!”

그렇게 말하고 에스카가 체스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 아를이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검은색 말을 옮기며 말했다.

“체크.”

“너.”

“빨리 해. 세 수 안에 체크메이트 할 거니까.”

“…….”

아를은 말없이 체스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퀸을 옮겼다. 둘은 대답하지 않고 체스 말만 옮겼고, 거짓말처럼 세 수만에 아를은 체크메이트를 당했다.

눈을 찌푸리고 한참 말들을 바라보던 아를이 툭 킹을 밀며 말했다.

“졌어.”

에스카는 기뻐하지도 않고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아를을 보았다.

“아를, 나에게 뭐 화났어?”

“……아니.”

“그런데 왜 그래? 아니면, 아카데미에 다니니까 역시 세공사와 친구하는 건 좀 그런가? 그런 거라면 얘기해줘.”

“그런 거 아냐.”

아를이 단호하게 대답했고 에스카의 금색 눈이 안도감을 띠었다. 그 눈동자를 보며 아를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그런데 왜 날 피하고 그래?”

“안 피했어.”

아를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대체 뭐라고 말하랴? 널 보면 마음이 설레? 두근거려? 내가 남색가가 아닌가 걱정이 돼?

아를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너머, 에스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푹신하고, 서늘하고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아를?”

반항도 없이, 의심도 없이 순수한 의문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카를 보자 아를은 허탈감마저 들었다. 아를은 손을 내려 에스카의 뺨을 꼬집었다.

“아파!”

“아프라고 그런 거야.”

괜한 심술을 부리고 아를은 체스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판 더 해.”

결국 그해 여름은 조용히 지나갔다. 여기서 조용하다는 말은 전혀, 둘의 접촉이 있을 만한 게임은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를은 항상 에스카에게 닿지 않게 조심했고, 에스카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여름이 끝났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자마자 아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창녀를 사는 것이었다.

확인해보고 싶었다. 자신이 여자에게 서는지, 아닌지.

그리고 자신이 훌륭하게 기능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아를은 안도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아를은 닥치는 대로 여자를 사기 시작했다.

그 여자들의 갈색 계통 머리카락이, 어딘지 중성적인 외모가, 가는 선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는 아를도 뻔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사실은 딱 한 번, 남창도 산 적이 있다. 잘나간다는 호리호리한 미소년이었는데, 역시 달려 있는 걸 보자 단숨에 식어버려서 아를은 결국 그에게 돈만 쥐여주고 돌려보냈다.

아를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아카데미의 경고는 부모님께도 전해졌고, 아를은 몇 번이나 호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지만 그런 생활을 멈추지는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안 그러면 에스카 꿈을 꿀 테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에스카의 알몸을 아를은 여러 번 꿈꿨고 아를은 다른,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애썼다.

창녀라도 좋고, 레이디라도 좋았다.

자신에게 적합한, 괜찮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아를의 명성은 높아져서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남학생들은 모두 “아를에게 의논해봐.”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러다가 사생아가 나오는 게 먼저겠다는 수군거림과 델루치아 공작의 후계자가 방탕아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쫙 퍼졌다.

결국 참지 못한 델루치아 공작은 아를을 다른 먼 아카데미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거기서도 아를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를은 아카데미가 멀다는 핑계로 여름에도 본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스카를 만나지 않자 아를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에스카는 꾸준히 아를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아를은 편지를 읽긴 했지만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냥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서로 잊겠거니 하면서 아를은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답장을 하지 않아도 편지는 꾸준히 왔고, 그 편지에는 왜 답장을 안 하는 거냐는 툴툴거림이 늘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편지를 멈추지 않는 점이 에스카답지.’

아를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짓고, 기숙사 방에 앉아 이번에 새로온 아스카의 편지를 뜯어 펼쳤다. 그리고 첫 문장에서 숨을 삼켰다.

―아를, 스승님이 돌아가셨어.

허겁지겁 내용을 읽어보니 장례식과 공작부부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 내용, 외롭고 쓸쓸하다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손에 든 편지지가 파르르 떨려왔다. 아를은 이마를 감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에스카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위로하고 싶었다. 에스카에게 스승님이 가지는 위치가 어떤 건지 아를도 잘 알고 있었다.

단 하나뿐인 가족.

자신으로 말하자면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신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아를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꼭 마지막 시험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를은 몇 번이나 펜을 들었다. 아니, 마차를 부를까 했다. 방 안을 서성거리며 아를은 그렇게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펜을 들었다.

―마음이 아프겠구나. 미안, 아카데미가 바빠서 찾아갈 수가 없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개새끼였다.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거리가 멀어서 갈 수가 없네, 같은 소리나 지껄이는.

결국 그 편지도 부치지 않았다.

초조하게 한 달이 지나고, 또 변함없이 에스카에게서 편지가 왔다. 스승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냥 일상 이야기만 적힌 편지였다. 아를은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에스카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장 달려가서 친구의 우정으로 얼마든지 그를 달래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에스카에게 최악의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카의 편지에는 원망이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더 속이 쓰렸다.

양심에 찔렸다.

아를은 자신 말고 에스카에게 또 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 또래의 다른 친구가, 에스카에게 있었던가?

자신의 기억으로는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쓰레기 같은지라 아를은 더 이상 에스카에게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아를은 편지를 접으며 반복하고 반복했던 생각을 다시 했다.

어차피 에스카가 여자라고 해도, 둘이 이어질 일은 없다. 에스카는 세공사고 자신은 공작이 될 테니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야 통속 소설 안에서나 나오는 거고 에스카는 애첩의 직위 이상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은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좋은 혈통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어차피 애첩으로 삼을 거라면 남자라도 별 상관없고.

‘문제는 여기 어디에도 에스카의 의지는 없다는 거지.’

도돌이표 같은 생각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허탈감에 아를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렇게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아를은 단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고, 먼저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부모님에게서 그런 아를을 나무라는 편지도 도착했고, 샤샤에게서도 가시 돋친 편지까지 왔지만 아를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서 가방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 소리에 에스카가 뒤를 돌아보고는 활짝 웃었다.

“아를? 언제 온 거야? 아카데미 졸업했다면서. 축하해.”

“에스카?”

“응?”

“에스카 블란테?”

“응, 맞는데.”

에스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를을 보았고 아를은 힘없이 말했다.

“너 왜 여장을 하고 있는데?”

“아.”

그 말에 에스카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꾸준히 기른 금갈색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아 있었다.

푸른색의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흔들며 에스카가 아를을 올려다보았다.

“안 어울려?”

“안 어울리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너 왜, 드레스를…….”

그 말에 에스카가 너무 쉽게 대답했다.

“나 여자야.”

“……뭐?”

“딱히 속이려는 건 아니었는데. 미안. 안 그래도 샤샤도 엄청 충격받아서 며칠 동안 나랑 말도 안 했었어. 설마 너마저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맙소사.”

아를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분노, 안도, 경멸, 기쁨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에스카가 변명조로 말했다.

“내가 남자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 없다.”

“여자라고도 한 적 없잖아.”

“그건 그랬지만. 딱히 밝힐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고, 괜히 우리 우정이 어색해질까 봐 그것도 싫었어.”

“우정.”

되풀이하듯 중얼거리고 아를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곧 격렬하게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미친! 아, 진짜 푸하하하!”

에스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닥을 구를 기세로 웃는 아를을 바라보았다. 아를은 우스웠다.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자신의 고민과 인내와 격정들을 생각하니 광대 짓이 따로 없었다. 아를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조였고 분노였고 허탈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서 아를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뭐라고 하겠어?”

에스카가 아니었다면 이 우정은 진즉에 끊어졌을 것이다. 자신이라면 화가 나서 절연장을 보낼 것 같은데, 에스카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도 에스카는 마치 어제 만났던 친구를 대하듯 아를을 대하고 있었다.

아를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 누르고 에스카의 뺨을 어루만졌다.

“에스카, 내 컵케이크 아가씨.”

그 말에 에스카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그 표정에 아를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여자라는 걸 알자마자 그렇게 나오는 거냐. 과연,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내가 뭘?”

뚱하게 말하는 아를에게 에스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방탕한 소문이 저 촌구석까지 자자하거든?”

“그 소문, 반은 사실이 아닐걸.”

“적어도 내가 들은 공작부인의 한탄은 사실이겠지.”

“아, 세상에.”

아를은 억울함을 표현하며 팔을 벌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에스카는 가볍게 아를의 명치를 때렸다.

“여하튼 지금은 내가 델루치아 공작가 전속 세공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요. 차기 공작님.”

“호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 말에 좌지우지된다 이거지?”

“그건 아니지만. 나 물건 팔 다른 루트도 찾았고.”

“아, 뭐야 그게. 블란테는 독점인 줄 알았는데.”

“나도 먹고 살아야지.”

“아, 내 불티는 매정하네.”

“또 그런다.”

에스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럴 때마다 아를은 그동안 에스카를 남자로 알고 고민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렇게 그녀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웠다.

‘어차피 나야 심술쟁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를은 가볍게 에스카의 입술에 키스했다. 여동생에게 하듯 가벼운 키스였다. 에스카는 한숨을 내쉬고는 포기한 듯 말했다.

“너 진짜 그러다가 여자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그러려나?”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치고 아를은 웃었다. 이 상황이 코미디 같아서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는 에스카 블란테가 여자여서 기쁘다고. 안도했다고.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를은 최대한 길게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내 불티.

내 컵케이크.

내 에스카.

내 꾀꼬리.

외전 마침.

지은이 후기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야입니다.

『노예를 충동구매해 버렸다』를 구매해주신 독자님, 감사드립니다. 혹시라도 후기를 먼저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해주세요.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리송, 아리송하던 에스카가 쿠에게 고백을 하는 곳까지요! 쿠의 눈물겨운 어필에도 불구하고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그녀가 드디어 눈을 떴습니다.

와-!

에스카는 정말로 참, 둔합니다. 그렇게 둔하니까 쿠가 대놓고 그렇게 노예답지 않은 짓을 하는데도 옆에 두고 헤헤 하고 있는 거지만요.

2권에서는 둘만의 알콩달콩한 생활이 있을 줄 알았더니 ‘앗, 또 새로운 시련이?!’ 하는 내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럼 2권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야 올림

그린이 후기

안녕하세요, 은화입니다!

소설책 삽화는 처음이라서 두근두근하네요^0^♡

내용 속의 예쁜 아이들 이미지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설명을 자세히 써 주셔서 어렵지는 않았지만, 작가님이 생각하신 이미지와 제 그림체를 융합하는 과정이 제일 재밌는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작가님의 예쁜 로맨스와 잘 어울리는 일러스트가 그리고 싶었는데, 그 의도가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제 닉네임이 실린 종이책이 출간되다니 이렇게 기쁘고 부끄럽고 좋을 수가 있을까요!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슬슬 실감이 나고 있어서 흥분의 도가니입니다ㅠㅠ. 진정이 되지 않아요……!

열심히 쓰고 그린 책을 재밌게 봐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네요♡.♡

은화 올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