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백
팡팡팡!
깃털 베개로 머리를 두들겨본 나는 이걸로는 소용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기억이 없는 상태로 계속 있는 건 무리다. 아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쿠하힐의 발목을 잡고 있고, 아를을 괴롭게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깃털 말고 다른 베개는 없나……?’
침실을 뒤져 곧 딱딱한 씨앗이 들어 있는 베개와 목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목침……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두자.’
난 목침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씨앗 베개를 만지작거렸다.
안에 복숭아씨 같은 거라도 들어 있는 걸까? 난 그 베개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꼭 감고는 풀스윙해서 옆머리를 때렸다.
퍽!
“……!”
침대에 쓰러진 나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으…….’
눈물이 저절로 찔끔 나왔다. 가속도가 붙은 씨앗 베개는 상상보다 훨씬 더 아파서 머릿속이 울리는 것 같았다.
‘기억이 돌아왔나?’
하지만 역시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난 숨을 몰아쉬고 다시 베개를 들었다.
‘안 돼, 못 때리겠어…….’
한 번 아픔을 아니까 두 번은 풀스윙으로 때리기가 어려웠다. 난 나약한 나를 가슴 아파하면서 끙끙거리다가 곧 아이디어를 짜냈다.
난 끈으로 묶은 베개를 끙끙거리며 천장 기둥에 매달았다. 그러고 나서 베개가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높이로 조절한 다음 뒤로 살짝 밀어보았다.
툭.
가볍게 베개가 내 뒤통수를 치는 걸 확인한 뒤에 난 으쌰 하고 베개를 뒤로 강하게 밀고는 돌아섰다. 베개가 내 뒤통수를 치기만을 눈을 감고 기다리는데 충격이 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나 하고 눈을 뜨니 쿠하힐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네? 으음…… 베개로 머리 때리기……?”
쿠하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왜 베개로 머리를 때려야 하는 건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충격을 좀 주면 기억이 돌아올까 하고…….”
“…….”
쿠하힐이 베개에서 끈을 풀며 날 불렀다.
“에스카.”
“네…….”
“사람이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잘못하면 죽습니다.”
“그게…….”
“뇌가 울려 기절이라도 해서 쓰러지면, 무방비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럼 어디 부딪쳐서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죠.”
그리고 그가 나에게 베개를 건네며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조근조근 말하는데도 긴장이 되어 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해하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리고 쿠하힐이 방 밖으로 나갔다. 난 슬쩍 방문 밖을 내다보았다. 쿠하힐은 다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난 머리를 치는 건 관두고 다른 충격요법을 쓰기로 했다.
‘깜짝 놀라는 요법을 쓰자.’
난 내 방문 위에 물이 담긴 양철 컵을 올려놓았다. 내가 다른 일에 집중하다가 까먹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물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질 테고, 그럼 깜짝 놀라겠지.
조심스럽게 살살 침실 문을 닫은 후 거실로 나왔다. 그다음엔 찬찬히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았다.
‘책 한 권 읽고 있다 보면 잊어버리겠지.’
내가 고른 책은 드래곤과 정략결혼을 하는 여자가 나오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난 곧 푹 빠져들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검술 연습을 끝내고 돌아온 쿠하힐이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쿠, 쿠하힐?”
쿠하힐이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양철 컵을 들고 나왔다.
“에스카, 이건 심술입니까? 아니면…….”
“아, 미안해요! 그거 내 머리에 떨어져야 하는 건데!”
“에스카의 머리에 말이죠……. 이것도 그 충격요법인가 뭔가 하는 건가요?”
쿠하힐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에스카, 무슨 일 있습니까?”
“네……?”
“기억…… 때문에 초조해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의사도 자연스럽게 돌아올 거라고 그랬고…….”
“만약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괜찮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지고 속삭였다.
“아니면 제 말로는 부족한가요?”
“하지만.”
루아는 쿠하힐이 날 좋아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그 말을 듣고 쿠하힐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외로운데 계속 곁에 있어준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거다. 그래서 은근슬쩍 몸으로도 유혹해봤고.
하지만 쿠하힐이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과거의 에스카지.
아를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렇고.
결국 계속 기억이 없으면 다들 떠나지 않을까?
“쿠하힐에게 짐이 되는 건 싫어요.”
“에스카가 짐이라면 전 평생 짊어지고 갈 겁니다.”
쿠하힐이 딱 잘라 단언했다.
“내가 당신이랑 자지 않는다고 해도요?”
내 물음에 쿠하힐은 멍하니 날 보았다. 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이건 실언이에요. 그러니까…….”
“에스카.”
난 불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에스카가 원하지 않으면 지금부터 손끝 하나 대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난 내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난 이를 악물고 말을 쥐어짰다.
“쿠하힐이…… 내게 얻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맙소사, 에스카.”
쿠하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아닌가요?”
“아닙니다. 당신이, 내게 얼마나…… 얼마나…….”
그는 말을 잇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럼 왜요?”
쿠하힐은 왜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걸까?
쿠하힐이 고개를 들어 빤히 날 보았다. 그가 이마를 문지르고, 습관처럼 오른 눈썹을 찌푸렸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
난 멍하니 쿠하힐을 보았다. 그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온갖 표현들이 다 있는데, 이런 진부한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당신은 짐이 아니라는 걸 말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난 쿠하힐을 꽉 끌어안았다.
“에스카?”
“나도 쿠하힐이 소중해요.”
“그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쿠하힐이 내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러나 난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사랑해요.」라고 말한다면 기억이 돌아온 뒤에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마음도 사라져버리게 될까?
“그럼 전 이 젖은 걸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아, 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쿠하힐은 욕실로 들어갔다. 난 털썩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난 무릎을 웅크리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입안으로 다시 이 말을 되새기고 난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속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사랑받는데 왜 눈물이 나오려는 걸까?
쿠하힐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고 싶었다. 아, 뭐야, 나 짐이 아니구나 하고 안도하면서 엉엉 울고 싶었다. 눈물이 흘러 무릎으로 떨어졌다.
난 소파에서 그렇게 웅크린 채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건 쿠하힐이 부드럽게 흔들어 날 깨웠기 때문이었다.
“에스카, 일어나세요.”
“으응……?”
“쉿.”
그가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고는 속삭였다.
“바깥에 무장한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수는 열다섯 명쯤 되고요.”
“……!”
잠이 싹 달아났다. 언제 옮겨졌는지 난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쿠하힐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정문으로 당당히 밀고 들어올 모양입니다만, 밖에서 창문을 감시하는 기척도 느껴지는군요.”
“쿠…… 쿠하힐…….”
“괜찮습니다. 에스카, 이리 오세요.”
쿠하힐이 날 일으켜 벽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조용히 계시는 겁니다.”
“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벽장문을 닫았다. 새까만 어둠에 더듬더듬 벽장 안을 더듬는데 쾅 하고 현관문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공작에게 자신의 사촌을 살해하게 한 더러운 암캐는 나와라!”
“아셔 백작의 원한을 갚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면서 요란하게 집 안을 부수는 소리가 났다. 이어,
“그 암캐가 아무래도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말하는 것 같아서 심히 불쾌한데?”
쿠하힐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들려왔다.
“넌 누구냐!”
“호위인가? 그 암캐가 있는 곳을 말하면 목숨은 살려주지.”
“으아악!”
“미첼!”
“아직 결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치사한 자식!”
“남의 소중한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걸 봐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곧 검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난 덜덜 떨면서 어두운 벽장 안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천천히 벽장문을 밀고 나왔다.
쿵!
“젠장! 산개해!”
“저 개자식이……!”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검을 휘두르면 안 된다고 아무도 안 가르쳐줬나 보지.”
“저놈도 부상 입었어! 오래 못 버텨!”
나는 홀린 듯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문 바로 앞에서 쿠하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푹 하고 문을 뚫고 피 묻은 칼날이 반짝였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아…… 안 돼, 쿠하힐이…….’
피가.
쿠가 몇 번이나 찔려서.
계속, 피가.
내장이 다 흘러나와서.
칼이 내 쿠하힐을…….
“흐윽.”
머릿속이 지잉 하고 울리듯 아파와 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쿠하힐을 떠올렸다. 푸른색 눈에 검은색 모피, 의기양양하고 다정한 내 쿠하힐.
항상 어린애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도 머리를 쓰다듬고 끌어안아 줬던 스승님, 장난꾸러기 아를, 귀여운 샤샤, 엄격하지만 친절한 사키, 다정한 루아, 그리고.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침실 안의 화장대로 달려가 난 닥치는 대로 장신구를 뒤졌다.
이게 아니라, 이것도 아냐, 이건가?!
반지와 팔찌를 착용한 다음 침실 문을 확 열었다. 바로 문 앞에 서 있던 쿠가 놀라 날 돌아보았다.
“에스카?!”
난 그의 팔을 잡고 외쳤다.
“블링크(Blink)!”
다음 순간 우리는 숲 속에 있었다. 집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였다. 난 덜덜 떨면서 쿠의 몸을 더듬었다.
“쿠, 쿠, 다쳤어? 상처 보여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이거 가지고, 시동어는…….”
내가 그의 손에 반지를 쥐여주자 쿠가 받아들었다.
“힐.”
쿠가 중얼거리고 나서 작게 신음 소리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만진 그의 셔츠가 축축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쿠, 이 바보야.”
“이제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쿠가 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
“응…….”
“전부 다 기억나십니까?”
“응.”
난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목이 메어 나오지 않았다. 기억과 감정들이 하나씩 짜 맞춰지고 모여서 딱 하나의 지침을 가리켰다.
네가 소중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곁에 있어줘.
“쿠.”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내 입술이 떨려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사랑해.”
그 말이 간신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