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해결
얼마 지나지 않아 사키가 부인과 함께 찾아왔다. 그의 부인은 대단한 미녀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요정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루아라고 불러달라고 한 그녀는 내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다 괜찮아질 거랍니다, 에스카님.”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 난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걸 참았다. 루아가 후후 웃고는 말했다.
“잠깐 저랑 산책하면서 이야기 좀 할까요?”
“네.”
이제 집 앞 정원을 지나 입구의 오솔길까지는 당당히 산책을 나갈 수 있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을 거닐며 루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어서 힘드시죠?”
“힘들기도 하지만, 이런 절 보는 주변 사람들도 힘들 테니까요. 루아도 내가 못 알아봐서 섭섭하지 않아요?”
“어머, 어머. 에스카님께 섭섭한 게 아니라, 그 범인을 잡아다가 해체해주고 싶어지는 거죠. 에스카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걸요.”
그 말에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웃었다. 괜찮다는 말보다 어쩐지 그 말이 훨씬 더 위안이 되었다.
“설마 누군가가 에스카님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 건 아니겠죠.”
“아니에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쿠하힐이 에스카님의 차에 독을 탔다고 들었어요.”
“독이 아니라 최음제인 줄 알고 탄 거예요.”
나도 모르게 변호하듯 말하자 루아는 날 돌아보더니 다시 웃었다.
“그 사람을 믿고 계시나요?”
“그게…… 믿고 싶은데, 믿는데, 잘 모르겠어요. 왜 저에게 최음제를 먹였을까요? 쿠하힐이 절 소중하게 대하는 건 저도 알겠어요. 하지만 그랬다면 왜 저에게?”
“그는 에스카님을 연모하고 있지요.”
“……!”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루아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에스카님, 기억이 없어서 혼란스러우시겠죠. 제 말도 분명히 거기에 혼란을 더하는 것뿐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조금 안심이 되네요.”
“안심이요?”
“네, 조금도 변한 게 없으셔서요.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장 눈앞의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과거의 기억이 없더라도, 지금 보이는 것들과 느끼는 것들은 분명 에스카님이 그동안 쌓아올린 것이랍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루아의 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 내 생각과 선택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과거의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기억도 못 하는 예전의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생각하는 것에 지쳐 있었나 보다.
“에스카님, 울지 마세요.”
루아가 손수건으로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손수건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와 그녀의 손길에 금방 기분이 나아졌다.
“고마워요, 루아.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요.”
“다행이네요.”
루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수건을 접어 넣었고 우리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루아가 가져온 점심 도시락을 먹어치웠다. 도시락은 정말로 맛있었다. 사키와 루아는 나랑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났다.
‘왠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데자뷔가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쿠하힐이 말을 걸었다.
“에스카.”
“어, 네?”
“아까 정원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우는 것 같던데…….”
“루아가 너무 친절하게 이야기해줘서요. 그리고…….”
당신이 절 좋아한대요.
난 지그시 쿠하힐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로 그를 찬 걸까? 하지만 찼다면 그가 이렇게 가까이 머물러 있을 사람인가?
그럼 지금 나는 그가 고백한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전에 먼저 고백을 듣는 게 순서인가?
―당신을 안고 참아왔던 말들을 전부 해주고 싶었습니다.
“저기, 쿠하힐.”
“네.”
“저랑 자지 않을래요?”
“…….”
“그게 과거의 일을 하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알겠습니다.”
쿠하힐이 간단히 대답하고 날 가뿐히 안아 들었다.
“쿠하힐?”
“여기서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야…….”
설마 바로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난 몸에서 힘을 뺐다. 쿠하힐이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날 내려놓고 창문의 커튼을 전부 쳤다.
그러고 나서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되자 난 왠지 창피해져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쿠하힐은 그런 날 곁눈질하고는 자신의 옷 역시 벗은 후 이불을 걷어냈다.
“추우신가요?”
“조…… 조금이요……?”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가 내 입술에 키스해왔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다 싶었는데 곧 지독하게 나를 샅샅이 탐색하고 맛보려는 키스로 변했다.
“에스카.”
그가 작게 속삭이며 내 목덜미에, 쇄골에, 어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손가락은 내 유두를 붙잡고 굴리다가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내 가슴을 입에 물었고, 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신음을 참았다. 쿠하힐이 내 손을 잡아 누르며 속삭였다.
“참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강도를 천천히 올리다가 순간, 강하게 유두를 빨아들여서 난 하윽,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그가 딱딱해진 유두를 입술로 물었다가 혀끝으로 눌렀다가 핥아 올리며 희롱했고, 다른 한쪽은 손가락으로 튕기거나 잡아당기거나 비틀어 돌렸다가 아주 부드럽게 누르는 식으로 전혀 다른 자극을 주었다. 난 그 손길에 흐느끼며 헐떡였다.
“아, 읏…… 쿠하힐…… 쿠……하…… 으응!”
그가 손마디로 내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내 귓바퀴를 깨물고는 다시 작게 속삭였다.
“에스카.”
그의 목소리 역시 끈적할 정도로 욕정이 가득해서 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클리토리스를 눌렀다.
“힉!”
난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하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내 표정을 샅샅이 관찰하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아…… 음, 읏…….”
그가 날 바라보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쿠하힐의 손가락은 질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집요하게 내 민감한 곳들을 눌렀고, 조금이라도 반응이 있으면 반응했던 곳을 몇 번이나 자극했다.
결국 난 절정에 올라 허리를 띄웠다.
“하으읏!”
쿠하힐은 내가 가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계속 지켜보다가 내가 숨을 헐떡이자 내게 키스하며 웃었다.
쾌락으로 아직 머릿속이 멍한데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난 무디게 반응했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입안을 유린하듯 키스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혀가 다시 가슴으로 배로 떨어졌고 아직 파르르 떨고 있는 내 아랫배에 키스한 그가 애액으로 질척한 질 안에 손가락을 다시 집어넣었다.
“앗!”
내가 허리를 움찔거리자 그는 내 허벅지를 벌리고 아랫배를 가볍게 핥아대다 키스를 퍼부었다.
질 안으로 완전히 손가락을 밀어 넣고 내벽을 문지르기 시작해서 난 다시 흐느꼈다.
민감해진 벽에서 쿠하힐의 손가락 움직임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그가 클리토리스를 빨아들였다.
난 시트를 움켜쥐고 허리를 휙 굽히며 발끝을 오므렸다. 하지만 쿠하힐은 계속 클리토리스를 빨고 물고 핥고 혀끝으로 빠르게 자극하며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내가 절정으로 가기 직전에 손가락을 빼고 내 위로 올라와 히끅거리는 내 허리를 붙잡고 단숨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
난 입을 벌리고 허리를 휙 젖히며 벌벌 떨었다.
“흐……읏…… 에스카, 너무, 읏…….”
쾌락의 물결이 사로잡아 난 계속 몸을 떨었고 그사이에도 쿠하힐은 계속 추삽질을 해왔다. 난 그의 박자에 맞추지도 못하고 그저 흑, 윽, 하는 신음 소리만 낼 수 있을 뿐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고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쿠하힐이 내 안에 파정한 뒤에도 난 계속 그를 조여댔고 쿠하힐은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내 이마에 키스하며 쉬이, 하고 달래듯 몇 번이나 눈가와 뺨에 키스했다.
“괜찮습니다. 숨을 쉬세요, 에스카.”
“하아, 하아, 쿠아……이일…….”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다시 내 안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읏…… 안…….”
더 이상의 쾌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몸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쿠하힐은 내 허리를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척추부터 저릿함이 올라오기 시작해 난 발가락을 구부리며 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쿠하힐이 내 클리토리스를 누르며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고 난 그에게 매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쿠하힐은 멈추지 않았고 난 중간중간 의식이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그를 붙잡고 있을 힘도 없어 손이 그의 팔을 스치며 침대로 떨어졌다. 그가 성기를 넣었다가 뺄 때마다 결합부에서 정액과 애액이 섞여 흘러넘치며 질컥질컥 하는 야한 소리를 냈다. 난 그가 밀어붙이는 대로 흔들리며 쾌락으로 완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가 절정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정하고 나서 그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내 눈물을 핥고 키스했다.
난 쌕쌕 숨을 내쉬며 쿠하힐이 아직도 작게 경련하는 내 아랫배를 쓰다듬는 걸 보다가 그에게 말했다.
“지쳤어요…….”
내 목소리는 작고 쉬어 있었지만 그는 알아들었다. 쿠하힐이 내 눈가에 다시 키스했다.
“죄송합니다.”
“내게 뭐 할 말 없어요?”
“다음부터는 부드럽게 하겠습니다.”
“…….”
이게 아닌데……. 잘못 시작한 걸까. 당신은 날 안고, 참아왔던 말을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고민하다가 정신을 잃듯이 잠들고 말았다.
한번 물꼬를 트고 나니 그 후로 나와 쿠하힐은 자주 몸을 섞게 됐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고 그게 나를 좀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를이 꼬박꼬박 보내오는 선물들이 날 달래주었다.
그가 보내온 장신구를 정리하다가 난 보석상자에서 반지를 찾아냈다.
‘어라, 둘 다 반지꽃 모양으로 만든 거네.’
하나는 유리로 만든 거고 하나는 보석으로 만든 거라서 웃으며 두 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리로 만든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꼭 소꿉놀이 할 때 쓰는 것 같았지만 그 점이 왠지 더 마음에 들었다.
아를이 준 장신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쿠키 항아리에서 쿠키를 꺼내 먹으며 베란다를 보니 검술 연습을 하는 쿠하힐이 보였다.
‘운동하고 있는 거 보니 나도 하고 싶은걸. 잠깐 산책이나 할까.’
난 조심스럽게 저택 문을 열고 나왔다. 집중하고 있는 쿠하힐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난 그를 부르지 않고 천천히 오솔길로 내려갔다. 멀리 가지는 않고 바로 앞까지 갔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으으.”
그때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려와 난 귀를 쫑긋 세웠다.
“으으으…….”
역시 신음 소리였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누구 있어요?”
“사…… 사람 살려…….”
이번에는 더 뚜렷하게 목소리가 들려서 난 수풀을 헤치고 빠르게 걸었다. 곧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그때 뒤에서 누가 내 입을 막으며 날 끌어당겼다. 놀라 버둥거리는데 쓰러졌던 사람이 일어나 내게 칼을 들이댔다.
“얌전히 있으면 다치지 않을 거야.”
“빨리 그냥 죽여.”
내 뒤에서 날 잡은 남자가 말하자 칼을 들이댄 남자가 말했다.
“죽이면 3천 페소지만 인질로 잡으면 공작이 만 페소는 낼걸. 빨리 재갈이나 물려.”
그가 내 목을 검 끝으로 찌르며 말했다.
“소리 지르면 바로 찌른다. 죽여도 3천 페소니까.”
난 덜덜 떨며 내 뒤의 남자가 재갈을 물리고 손목을 묶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내 발목까지 꽁꽁 묶고는 말했다.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겠어?”
“흥, 3천 페소만 받고 그만두라고? 델루치아 공작에게 연락하면 만 페소, 아니 10만 페소라도 내놓을걸.”
‘델루치아……? 아를 이야기인가?’
“그리고 마법세공사라면 분명히 집에도 보석이 쌓여 있을 거야. 야, 너 집이 어디야?”
그 말에 난 놀라 그를 보았다. 집이 어디냐니? 바로 저 위에 집이 있지 않은가?
내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내 뺨을 후려쳤다. 재갈 때문에 입안이 터지면서 피가 흘렀다.
“이 쌍년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어. 네년 집이 어디냐니까!”
뭔지는 몰라도 이들에게는 집이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집에는 쿠하힐 혼자 있는걸, 이들은 두 명이고……. 나라는 인질까지 있으면…….’
“아쭈?”
그가 내 멱살을 잡고는 다시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봐주지 않은 손길이었다. 둥근 재갈이 이와 입안에 부딪쳤다. 피와 침이 섞여 턱으로 흘러내렸다. 한 다섯 대쯤 연속으로 맞자 옆에 있던 남자가 그를 말렸다.
“야, 재갈 물려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는데.”
“뭘 대답을 못 해? 그냥 아주 말할 본새가 아닌데. 공작의 애첩인지 뭔지 곱게 자란 모양인데, 나에게는 안 통해요.”
그렇게 말하고 그가 내 셔츠 앞섶을 잡아 뜯었다.
“……!”
놀라 발버둥치자 그가 킬킬 웃으며 내 목을 잡아 눌렀다. 그리고 속옷을 잡아 내리고는 웃었다.
“와, 역시 공작의 애첩 빨통은 다른데! 시발, 이 색이랑 탄력 봐라.”
그가 내 목을 더 조였다. 난 컥컥거리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검 끝으로 내 유두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게 공작 전하도 빨아 먹은 젖인가? 응? 빨리 집이 어디 있는지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다시는 공작이 젖을 못 빨게 될 수도 있잖아?”
그가 검날로 유두를 밀어 올리며 말했지만 난 대답할 수 없었다. 내 목을 잡은 그의 손아귀 힘이 강해져, 숨을 쉴 수가 없어 거의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그걸 눈치챈 다른 남자가 그의 손을 잡아채며 말했다.
“야, 이러다가 죽어, 눈 돌아가잖아.”
“아차차.”
그가 손을 놓자마자 난 격렬하게 기침하며 산소를 마시려고 애썼지만 재갈 때문에 힘들었다.
‘아파, 괴로워……. 이 사람들은 왜……?’
“이제 안 봐준다는 거 알았지? 얼른 말해, 더 이상 몸 해치지 말…….”
그가 말을 멈췄다. 흐린 시야로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온 검날이 보였다. 검이 빠지고 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머리가 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몸뚱이만이 남아 피를 사방으로 뿌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내게도 피가 잔뜩 튀었고 강렬한 피비린내가 엄습했다.
쿠하힐이었다.
“너, 넌 뭐, 으아아아악!”
나에게 검을 들이대고 있던 남자가 당황해 자세를 잡았지만 쿠하힐이 더 빨랐다. 쿠하힐이 검을 휘두르자 남자의 손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의 손이 툭 떨어진 것을 보고 그는 비명을 질러댔고 이내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쿠하힐은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남자의 허벅지를 깊게 베었고, 그는 땅에 쓰러져 발악하며 계속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시발! 악! 내 손목! 으아아악!”
쿠하힐은 그를 무시하고 나에게 달려왔다. 이렇게 화난 표정을 한 쿠하힐은 처음 봐서, 난 가늘게 숨을 내쉬며 변명을 생각했다.
쿠하힐이 내 입에서 침과 피범벅이 된 재갈을 꺼내고 손발의 끈을 잘라냈다.
“에스카, 괜찮습니까?”
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품에 나를 안아들자 격렬한 울음이 속에서 터져 나왔다.
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흐윽, 윽…… 쿠하힐…… 흐흑…….”
쿠하힐은 그런 내 등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다 끝났어요.”
남자의 비명이 계속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쿠하힐은 그를 끝장내지 않았다. 그리고 달리듯 다시 산을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쿠하힐은 날 계속 안고 있을 뿐 내려놓지 않았다. 나도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는 나를 한 팔로 안은 채 구급상자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식탁에 나를 내려놓은 쿠하힐이 내 몸을 살폈다. 뿌드득 하고 이를 악 무는 소리가 났다. 쿠하힐은 내 입을 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깨진 이는 없군요.”
그 뒤에 쿠하힐은 내 목과 가슴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가슴에는 상처가 난 줄도 몰랐는데……. 목이 너무 아파서 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눈물은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다. 약을 다 발라준 쿠하힐은 날 다시 안아 들었다. 내가 떨다가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안아주었다.
깨어보니 여전히 그의 품 안이라 난 고개를 퍼뜩 들었다. 쿠하힐은 잠에서 깨어난 날 내려다보았다.
“좀 괜찮으신가요?”
“쿠…….”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 난 입을 다물었다가 성대를 울리지 않고 작게 말했다.
“계속 안고 있었던 거예요?”
“내려놓으면 깨실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난 깜짝 놀라 얼른 그의 품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쿠하힐은 천천히 바닥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가 가볍게 팔을 털고 어깨를 돌린 다음 내 상처를 살폈다.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를에게 연락해야 해요.”
내 말에 쿠하힐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난 아까 그 두 사람의 대화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쿠하힐의 파란 눈에서 불꽃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쿠하힐은 내 방으로 들어가 연락 구슬로 아를에게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아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내 꾀꼬리. 무슨 일이야?”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쿠하힐.”
아를이 차가운 목소리로 쿠하힐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어제 에스카가 두 명의 남자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에스카는? 괜찮은 건가!”
“안 괜찮습니다.”
그 말에 놀라 쿠하힐의 팔을 잡았는데, 쿠하힐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입안은 찢어졌고, 목은 졸려서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가슴에는 칼로 인해 상처가 났고요. 그리고 그 두 명의 남자가 델루치아 공작가를 언급했다고 하더군요.”
“…….”
연락 구슬 저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곧 아를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들은 살아 있나?”
“한 명은 즉사했습니다. 또 다른 놈은, 손목과 허벅지 힘줄 없이 살아서 산을 내려갈 수 있다면 살아 있겠지요.”
“자세한 대화 내용은?”
쿠는 내가 이야기한 그대로 아를에게 전했고, 아를은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는 “곧 연락하지.” 하고 통신을 끊었다.
얼마 후 사키와 의사가 허둥지둥 저택으로 올라왔다.
의사는 내 목을 보고 혀를 차며 다른 상처들을 살폈고, 사키는 쿠하힐과 이야기를 나눴다.
“놀랍게도 살아 있더군요.”
“그거 굉장한 생명력이네요.”
“늑대들에게 상당 부분 먹혔지만 말입니다.”
둘은 평안한 어조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의사가 내 목에 시원한 느낌이 드는 약을 발라주고 붕대로 감아주며 말했다.
“성대에 손상이 간 것 같습니다만, 다행히도 심하지는 않습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아가씨. 가슴 상처도 흉터가 남지 않을 거고요.”
난 고개를 끄덕이고 「고마워요.」 하고 입만 벙긋거려서 대답했다. 의사는 연고 한 통을 쿠하힐에게 맡겼다. 사키와 의사가 떠나자 쿠하힐이 나에게 물었다.
“왜 저를 부르지 않고 혼자 나가셨습니까?”
“검술 연습을 하고 있어서, 방해하기 미안했어요.”
쿠하힐이 눈을 꾸욱 감고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진정하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가 눈을 떴다.
“왜 제가 검을 연마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제발, 부탁드립니다. 에스카. 절 혼자 두지 마십시오.”
“미안해요.”
“전에 에스카를 위해서 절 소중히 하라고 했지요. 그때 부탁할 게 없느냐고 물으셨고요. 부탁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십시오. 신경 쓰지 말고 절 부르세요. 언제든지요.”
난 고개를 끄덕였고 쿠하힐이 내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또 저를 과소평가하지도 마시고요. 에스카가 인질로 잡혀 있다고 해도, 그런 놈들 열 명이 와도 지지 않습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쿠하힐이 날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계속 날 안고 있었고, 나 역시 말없이 그에게 안겨 뺨을 가슴에 비볐다. 그러다 문득 내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없어진 걸 발견했다.
내가 그의 등을 툭툭 치자 그가 날 내려다보았다.
“쿠하힐, 혹시 내 손에 있던 반지 못 봤어요?”
“반지 말입니까? 보지 못했는데요.”
“…….”
“어떤 반지죠?”
“반지꽃 모양의 유리 반지요. 마음에 드는 건데, 괜히 끼고 나갔다가 잃어버렸나 봐요.”
그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에스카.”
“네.”
“기억, 돌아오지 않은 거 맞지요?”
“네……. 저기 그 반지 뭔가 이상한 건가요?”
“아뇨, 하지만 반지꽃 반지라면 그것 말고도 하나 더 있잖습니까?”
쿠하힐이 날 빤히 보며 느리게 물었고 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유리 반지가 왠지 더 마음에 들어요.”
내 말에 쿠하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내 이마에 키스했다.
“한번 찾아보죠.”
그리고 다음 날 쿠는 정말로 반지를 찾아다 주었다. 어떻게 찾았느냐고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에 띄어서 찾기 쉬웠다고 대답했다. 난 반지를 손에 끼고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하얀 색유리가 햇빛에 반짝거렸다.
“정말로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네.”
고개를 끄덕이자 쿠하힐이 다시 웃었다. 왠지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뒤로 밤에 종종 악몽을 꾸기는 했지만 그가 항상 곁에 있어서 괜찮았다.
한 달 뒤, 목의 멍이 어느 정도 빠졌을 때쯤 아를이 지친 얼굴로 집에 찾아왔다.
“아를.”
이제는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었다.
아를은 날 번쩍 안아 들어 한 바퀴 돌리고 내려놓더니 목에 아직 남아 있는 멍 자국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에스카.”
“네?”
“나 무릎베개해줘.”
난 눈을 깜박이다가 웃었다.
“그래요.”
소파에 앉아 아를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자 아를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촌이 죽었어.”
난 말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은색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찰랑거려 기분이 좋았다.
“아니, 내가 죽였어. 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걸로 만족을 못 할까? 우스운 일이야.”
아를이 말해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그의 사촌은 계속 공작 작위에 욕심이 있었다고 한다. 아를의 아내 후보로 백작 영애를 세운 것도 그 사람이었다. 아를을 살해하려는 시도도 몇 번 했는데 아를이 마법용품으로 유유히 빠져나가자 날 어떻게 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일단 널 없애고, 자기가 아는 세공사를 나에게 이어줄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네가 마셨던 그…… 독약이었던 최음제 있지?”
“네.”
“그건 샤샤 잘못이야. 그 애가 빈틈을 줬어. 물론 내 잘못도 좀 있는데…….”
아를이 다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나는 기억 못 하는 이야기였는데, 일단 샤샤가 나에게 처음에 준 최음제는 중독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곧 쿠하힐을 자유민으로 풀어줄 걸 알게 되자 너무 심한 심술을 부린 것 같아서 겁이 났다고 한다. 그럼 그 자리에서 바로 최음제를 돌려받았으면 좋았을걸, 혹시 내가 이유를 알게 되면 화를 낼까 봐 무서워서 몰래 최음제를 바꿔치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맡겼는데…….
“그리고 여기부터가 내 잘못.”
아를이 쿠하힐을 기사단에 받아준다고 하자 당연히 기사단에서는 반발이 일었다. 감히 노예가 공작가의 기사단에! 하고 분노한 것이다. 기사단 안에는 사촌의 세작도 있었는데, 그가 분노를 더 부추겼다고 한다. 그리고 샤샤의 호위 기사 역시 기사단 사람이어서 「아무리 레이디의 명이지만 노예의 최음제나 바꾸러 가야 하는 서러움」에 대해 토로했고, 사촌의 세작은 그 일을 자신이 대신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최음제는 독으로 바뀌었다.
“쿠하힐을 죽이면 무슨 이득이 있는데요?”
“세작 입장에서는 너랑 나 사이를 갈라놓을 기회로 보였겠지. 들켜도 노예 하나 죽인 거니까, 그리고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 그랬다는 훌륭한 변명도 있고.”
“그리고 그걸 내가 마셨군요.”
“응. 내 사촌형님은 매우 기뻐하셨을걸. 공식적으로 알린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말이지. 첩자란 참 유용한 존재야, 안 그래? 하지만 네가 죽지 않은 거야.”
“그래서 또 사람을 보낸 건거요?”
“이것도 내 잘못이야. 네가 묵고 있는 곳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내가 널 너무 많이 찾아왔어. 샤샤까지. 그 때문에 여기를 들킨 거야. 그래서 이번에 그는 자신이 밀고 있는 백작 영애의 가문에 속삭였지. 우리 사촌동생이 사실은 애첩이 있어서 결혼하지 않는 거다. 그 애만 없으면 될 텐데.”
“그래서 백작가에서 사람을 보낸 건가요.”
“응. 그래서 꼬리 잡고 파헤치고, 알고 있었던 세작을 다 족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부까지 합쳐서 형님에게 말씀드렸지. 독과 나이프와 끈 중에 고를 수 있게 해드리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아를이 미소 지었다.
“숙부님의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말이야. 아버지의 말씀도 있고 해서, 잘 봐 드리려고 했는데.”
“힘들었겠네요.”
“응, 힘들었어. 샤샤에게도 엄청 화내고……. 지금도 울고 있을걸. 그리고 당분간 내 친척들은 내가 있는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을 거야. 숙모님은 울면서 저주를 하시더군.”
그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이마에 얹었다.
“그래서 지금 엄청 피곤해. 좀 자도 괜찮아?”
“네, 그럼요.”
아를이 눈을 감았다. 그의 은발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쿠하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앞에 앉아 이 이야기를 전부 함께 듣고 있었다.
“쿠하힐, 담요 좀…….”
내가 작게 말하자 쿠하힐이 담요를 가져왔다. 난 아를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말 잠든 듯 고른 숨을 내쉬었다.
난 내 주변 사람이, 친구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샤샤나 아를, 혹은 쿠하힐이나 사키가 범인이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까.
“끝났군요.”
쿠하힐이 작게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범인이 잡혔지만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지.’
역시 다음번에는 충격요법을 써봐야겠다고 난 단단히 결심했다.
아를은 서너 시간 자고 부스스 일어났다.
“잘 잤어요?”
“우응…….”
그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멍하니 날 보다가 배시시 웃고는 가볍게 키스했다.
“안녕, 에스카. 일어나자마자 네 얼굴을 보니 좋네.”
“좀 괜찮아요?”
“응.”
아를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아, 진짜 오랜만에 깊게 잤다. 에스카, 다리 저리지 않아?”
“조금이요.”
피가 다시 통하기 시작한 허벅지가 저릿저릿해서 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를은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이런 건 주물러야 금방 나아.”
“꺅! 안 돼, 만지지 마요!”
내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를은 내 허벅지를 꾹꾹 눌렀고 난 괴로움에 소리를 질렀다.
“에스카?”
쿠하힐이 현관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어때? 괜찮아지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에스카가 싫어하면, 그만두시죠. 공작 전하.”
아를이 쿠하힐을 빤히 보다가 웃었다.
“싫은데.”
“…….”
아를은 쿠하힐을 무시하고 날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카, 이사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사요?”
“응, 네가 여기 산다는 게 알려졌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놈들을 다 없앤 것 같기는 한데, 이런 건 한번 소문이 새어 나가면 금방이거든.”
“하지만…….”
“알아, 기억 때문에 여기 있다는 거. 하지만 염두에 두라는 거야.”
“…….”
“정 그러면 우리 겨울 별장에 와. 너도 거기 좋아하잖아. 평생 거기서 살아도 돼, 에스카.”
“전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는걸요.”
내 말에 아를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 불꽃, 거기는 눈이 많이 와. 방마다 커다란 벽난로가 있고 온천수가 나와서 언제든지 몸을 덥힐 수 있지. 온천을 이용해서 만든 유리온실에는 겨울이 오지 않아. 거기서 너랑 나랑 샤샤랑…….”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곁에서 사라지지 마, 내 반지꽃. 그러면 난 분명히 웃을 수 없게 될 거야.”
“사라지지 않아요.”
조용히 말하자 아를이 빙긋 웃고는 내게서 이마를 떼어냈다.
“그럼 배고픈데, 저녁 먹으러 갈까? 내 꾀꼬리?”
“그런데 아를, 수행원 없이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귀찮은 수행원 한둘보다야 네 세공품이 더 나아. 내 마법사 아가씨.”
“…….”
갑자기 난 내가 세공품을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졌다. 내가 그에게 세공품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누가 만들어주지? 물론 아를은 공작이니까 다른 세공사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아를이 망토를 두르며 쿠하힐을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가 저녁 먹고 올 동안, 멍멍이 쿠는…….”
“아, 쿠하힐도 같이 갈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모욕적인 명칭은 그만둬주세요.”
눈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를은 놀란 듯 날 보았다가 사르르 녹듯이 미소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 쇼콜라. 그래서 같이 갈 건가?”
어딘지 도발하는 듯한 음색이었다. 쿠하힐이 가만히 그를 보다가 대답했다.
“가죠.”
같이 밥을 먹으면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기기 마련.
난 이 기회에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졌으면 했다.
아를은 겉보기에도 호화로운 식당을 골랐고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난 괜히 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왔다고 생각하며 쿠하힐을 슬쩍 보았다. 그 역시 셔츠와 바지 차림이지만 느슨하게 맨 검대와 검 덕에 자유 검사처럼 보였다.
‘나만 여기서 너무 튄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웨이터가 에스코트해주는 대로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치고는 조금, 절망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저기, 난 아를이 시키는 걸로 시킬게요.”
“그럴래? 그럼 내 에스카가 좋아하는 걸로.”
아를이 주문을 하고 나서 쿠하힐 역시 주문을 끝냈다. 곧 세팅이 시작되었고 난 왜 이렇게 포크와 나이프가 많이 나오는 걸까 하고 고민했다.
“설마 포크, 나이프 다루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이런 건 다섯 살 때 끝내는 거죠.”
쿠하힐이 싱긋 웃으며 맞받아쳤고, 난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나, 난 모르겠는데요…….”
내 말에 두 사람 다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원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이놈의 기억상실 때문에 모르는 건지. 난 후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괜찮아, 에스카라면 손으로 집어 먹어도 귀여우니까.”
“바깥 것부터 사용하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 사람의 친절에도 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오는 음식들은 놀라울 만큼 맛있었고, 난 금세 부끄러움도 잊고 먹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아 서로 일체 대화가 없었다. 모든 대화는 나와 쿠하힐 또는 나와 아를 이렇게 둘 사이에서만 진행될 뿐이었다. 그렇게 맛있지만 껄끄러운 분위기의 식사가 끝나고 나서 계산할 때가 되자 아를이 말했다.
“내가 살게.”
“네? 하지만.”
“괜찮아, 내 에스카의 식사야 내가 사주는 게 당연하고, 그쪽은, 돈이 없을 테니 내가 내야지.”
아를이 쿠하힐을 보며 히죽 웃었고 난 쿠하힐이 주먹을 하얗게 되도록 쥐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 오늘은 내가 낼게요!”
“에스카?”
난 허둥지둥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웨이터에게 물었다.
“얼마죠?”
“67페소입니다.”
다행히도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백 페소짜리 금화를 찾아내 무사히 대금을 치렀다. 아를이 옆에서 툴툴거렸다.
“여자에게 밥을 얻어먹는 취미는 없는데.”
“친구잖아요. 아를이 내게 잘해줬으니까 나도 한 번쯤은 사게 해줘요.”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야.”
아를이 내게 키스했다.
“그럼 난 가볼게, 귀여운 내 불티.”
“아, 네.”
아를이 싱긋 웃고는 낮게 말했다.
“텔레포트, 공작가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놀랐다가 마법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수행원도 없이 혼자 왔나 했더니 마법으로 날아온 모양이었다.
‘비쌀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난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기억, 되찾고 싶어.’
“에스카?”
쿠하힐이 날 조용히 불러 난 그를 돌아보고는 손을 뻗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쿠하힐, 아를은 내가 기억이 없어서 섭섭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쿠하힐이 그렇게 말하며 걷기 시작해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마을을 거닐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쿠하힐. 아까 아를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요.”
“에스카.”
“네?”
“만약 내가, 내가 떠난다면…….”
쿠하힐의 말에 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날 혼자 두지 마요. 계속 곁에 있어준다고 했잖아요.
입술까지 그 말이 올라와 난 입을 살짝 열었다가 닫고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쿠하힐이 원하는 대로 해요.”
“아뇨, 아닙니다.”
“난 괜찮아요.”
“그런가요.”
쿠하힐은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나와 그는 말없이 걸어 집까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