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독 (5/16)

5. 독

일주일 뒤 사키가 말에 여행용품을 싣고 올라왔다. 그가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싫으면 자유롭게 만들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그런 거 아냐.”

“에스카님, 자신의 욕망을 누르는 것만이 남을 위한 건 아닙니다.”

“…….”

사키가 시종을 시켜 여행용품을 내리게 했다. 쿠가 저택에서 나오더니 차갑게 말했다.

“식량을 가지고 온 건 아닌 것 같군요.”

난 움찔하며 슬쩍 쿠를 바라보았다. 사키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에스카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나에게?”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하자 사키가 싱긋 웃었다.

“델루치아 공작님께서 저희 상회에 특별히 주문하신 겁니다.”

그리고 나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차라도 마시고 가.”

“이게 마지막 일이거든요. 루아를 보러 가야죠.”

“아, 그럼 잡을 수가 없네. 알았어.”

사키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하고 시종과 함께 산을 내려갔다. 난 루아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뭔가 선물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막상 여행용품이 오자 쿠가 진짜 떠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나는 모순된 마음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쿠에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상자는 뭡니까?”

쿠의 질문에 난 그제야 생각나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는데 반지꽃을 똑같이 본뜬 반지였다. 보석과 백금을 써서 누가 봐도 살아 있는 듯 정교하게, 동시에 엄청 비싸게 만든 것이었다.

“아…….”

아를에게 쿠가 반지를 사줬다고, 예쁘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었다. 속으로 작게 탄식하며 난 상자를 얼른 닫았다. 하지만 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싸구려 반지보다 주인님께 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쿠의 목소리도 표정도 변함이 없었지만, 난 왠지 엄청나게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얼른 상자를 등 뒤에 숨겼다.

“아냐, 난 쿠가 준 반지가 더 좋아.”

“주인님은…….”

쿠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지독한 거짓말쟁이로군요.”

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쿠하힐을 바라보았다.

“제가 나가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저에게 직접 말씀하십시오.”

“난…….”

“한때의 동정으로 주워두고 나니, 분명 부담스러우셨겠죠.”

“아냐, 쿠는 내 소중한…….”

“내버리려고 하는 가족 말입니까? 아, 그건 이미 한 번 당해봐서 별 감흥이 없습니다.”

“쿠하힐!”

“죄송합니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곧 나가드릴 테니 염려하지 마시길.”

그렇게 말하고 쿠는 그대로 저택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난 그를 쫓아 바깥으로 나갔다. 쿠가 내 어깨를 잡아 현관에 멈춰 세웠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화가 나서, 자꾸 주제를 넘을 것 같습니다.”

“미, 미안해…….”

“뭐가 말입니까? 쓰레기를 노예로 사준 게? 팔을 고쳐줘서? 검을 쥐여준 게? 이제 자유롭게 해준다는 게?”

“쿠.”

내가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자 쿠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잠시 머리만 식히고 올 테니까요.”

쿠는 마치 그 자리에 있으라는 듯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한 번 힘을 주었다 놓은 뒤 그대로 걸어 숲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난 멍하니 서 있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쿠가 선물해준 반지를 빼서 탁자 위에 놓고 아를이 준 반지를 꺼내서 끼워보았다. 아를이 준 반지가 훨씬 아름다웠다. 난 그 반지도 빼서 탁자에 놓고 둘을 바라보았다.

장인이 심혈이 기울여 만든 꽃과 유리로 만든 조잡한 꽃은 당연히 비교할 수도 없지만, 난 쿠가 준 반지가 더 좋았다.

“쿠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리 내어 말하고 나자 뺨을 타고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바보같이,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

쿠가 돌아오면 제대로 이야기하자. 이제 화가 나서 더 이상 내 얼굴도 보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제대로 이야기를 하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하고 난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쿠가 왔을 때 웃으면서 맞아주고 싶었다.

난 쿠의 반지를 끼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아서 쿠를 기다렸다.

쿠가 오면, 어서 오라고 말하고,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러고 나서 쿠에게 자유민이 되어도 내 곁에 남아달라고 부탁해봐야지.

만약 쿠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루아의 말처럼 용기를 내서 말해보자. 쿠가 날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게 아니라, 내가 쿠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든 것 같았다.

“주인님.”

쿠가 날 부드럽게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어? 응? 앗, 쿠 왔어?”

난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가 나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밀크티를 좀 끓였습니다만.”

“아, 고마워. 마시고 잠 좀 깨야겠다.”

난 쿠에게서 컵을 받아 들었다. 여름인데도 따뜻한 컵의 온기가 긴장감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쿠를 보니 긴장감으로 배 속이 조여오는 것 같아 침을 삼켰다.

“쿠, 나 쿠에게 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저도 있습니다.”

“그, 그래?”

쿠의 말에 난 자리에 바로 앉았다. 쿠가 미소 짓고는 말했다.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아, 응.”

난 천천히 밀크티를 마셨다. 따뜻하고 달달해서 긴장이 좀 풀렸다.

“저기 쿠……. 있지. 나 쿠가 남아줬으면 좋겠어.”

위가 울렁거리는 기분이라서 난 다시 티를 한 모금 마시고 쿠를 바라보았다. 쿠는 멍하니 날 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이야기라는 거 아는데. 쿠가 자유민이 되어서 떠나는 게 쿠에게 훨씬 좋은 거라는 거 알아. 알지만, 쿠가 가버리는 게 싫어.”

“주인님…….”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노예증서도 없는걸. 주인님이 아니라 에스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위가 조여오는 듯했다. 난 쿠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쿠는 어때?”

“전…….”

쿠가 이마를 짚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얼마나…….”

챙그랑!

“어……?”

난 떨어진 컵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심하게 흔들려서 누가 날 붙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에스카?”

“쿠…… 나…….”

울컥 하고 위에서 뭔가가 넘어와 난 웩 하고 소파 위에 토했다. 새빨간 피가 소파 위로 번져 나갔다.

피……? 지금 내가 토한 게……?

그다음 순간 내장을 긁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날 덮쳤다.

“하윽!”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피가 멈추지 않고 목구멍에서 자꾸 올라왔다. 난 바닥으로 넘어졌지만 속이 너무 아파서 넘어진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에스카!”

쿠의 경악한 음성이 내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온몸이 다 아파…… 그리고 목말라…….’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읏……!”

일어나려고 힘을 주니 통증이 덮쳐서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완전히 꺼끌꺼끌한 얼굴을 한 남자가 내게 물어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드릴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상체를 일으켜 베개로 받쳐주고 빨대를 꽂은 물컵을 내밀어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정신없이 물을 한 컵 다 비우고 나자 그가 물었다.

“한 컵 더 드릴까요?”

난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도 깨끗하게 비웠다. 그가 내 손을 잡고는 말했다.

“당신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내 어리석은 짓 때문에 당신을 잃었다면…….”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도무지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은 듯한 몰골이라 난 그가 불쌍해졌지만, 그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누구세요?”

내 말에 그는 마치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한숨을 내쉬고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질문을 하나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난 누구죠?”

그리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모르는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와 날 알지 못하느냐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들어와 내 상태를 살폈다.

“독약으로 인한 기억상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능이 회복되면서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독약이요?”

난 멍하니 되물었다. 독약이라면, 누가 날 죽이려고 했다는 말인데. 내가 그렇게까지 원한을 사는 사람이란 말인가.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있자 끝에 서 있던 은발 여자애가 내 침대에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울었다.

“아냐! 내가 준 건 최음제란 말이야! 독약이 아니었어! 저 자식이야! 저놈이 널 죽이고 네 재산을 차지하려고 한 거라고! 네 컵에 독을 탄 게 저놈이란 말이야!”

여자는 신탁을 받은 무녀만큼이나 무시무시하게 소리치며 아까 내 손을 잡고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아까의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듯, 여자애의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침대 옆에 서 있는 다른 남자가 말했다.

“그만해, 샤샤. 쿠하힐이 범인이었다면 그녀를 살리려고 하지 않았겠지. 그가 독을 먹인 건 사실이지만, 그녀를 구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준 건 정말 최음제였단 말이야. 독약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녀가 다시 엉엉 울기 시작해서 난 금방 그녀가 불쌍해졌다.

“샤샤라고 했죠?”

샤샤가 엉망인 얼굴을 들어 날 보았다. 나는 그녀의 젖은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 거겠죠.”

“에스카!”

그녀가 달려와 내 손을 꽉 잡았다.

“에스카, 흑, 에스카, 에스카.”

난 그녀의 은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했지만 도무지 팔을 들 만큼 힘이 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내 말에 그녀와 놀랄 정도로 닮은 남자가 대답했다.

“쿠하힐이 최음제라고 생각하고 네 차에 약을 탔는데, 그게 독약이었던 거야. 원래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겠지만, 다행히도 넌 해독 마법이 걸린 귀걸이를 차고 있었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어. 쿠하힐이 널 업고 산을 내려와 상회로 향했고, 상회에서 나에게 연락을 했어. 다행히 그 독의 해독제를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 널 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샤샤가 저에게 최음제를 주고, 쿠하힐이 저에게 최음제를 먹였는데 알고 보니 그게 독약이었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

그럼 샤샤가 독약을 줬거나 저 쿠하힐이라는 사람이 독약을 줬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에게 독약을 먹인 사람이 날 살리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고. 저 여자애가 나에게 독약을 먹인 걸까?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 그럼 누군가가 그 최음제를 독약으로 바꾼 걸까.

고민하는데 의사가 말했다.

“자자, 환자는 체력이 떨어져 금방 지치는 상태니 모두 물러나십시오. 아가씨도 생각은 그만 하시고 약을 먹고 주무세요. 몸이 나아야 기억이 돌아오지요.”

의사의 선언에 모두가 방을 나갔다. 난 의사의 도움으로 약을 마시고 다시 누워 잠들었다. 뭔가 복잡하고 슬프고도 기쁜 꿈을 꾼 것 같은데 깼을 때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샤샤와 아를은 내가 자신들의 집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의사가 익숙한 곳에 있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해 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 컵케이크, 여기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자신을 아를이라고 소개한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사람은 항상 날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구나. 난 그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저기 혹시 우리가 연인 사이였나요?”

“아니.”

즉답하고 그가 이어 말했다.

“내가 청혼하고 네가 거절하는 사이.”

그 말에 난 입을 헤 벌렸다. 그는 웃으며 내게 가볍게 키스했다. 너무 깜짝 놀라 온몸을 경직시키자 그가 입술을 떼고는 물었다.

“미안, 놀랐어?”

“네, 네…… 워…… 원래 저희가 그러니까.”

“응.”

“그렇군요. 죄송해요.”

“미안하면 에스카가 나에게 키스해주지 않을래?”

왠지 빈틈이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머뭇거리면서도 뒤꿈치를 들어 그에게 키스했고, 그는 내 뒤통수를 살짝 누르며 더 깊게 키스해왔다.

‘이것도 당연했던 건가?’

도저히 이 남자와 내 사이를 가늠할 수가 없어서 난 그냥 그가 키스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역시 연인 사이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점점 더 키스가 농밀해져서 숨이 막혀왔다.

“미안, 너무 열중했네.”

그가 날 놓아주며 말했고 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싱긋 웃은 그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야한 얼굴.”

“그…… 그건 당신이.”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난 내 컵케이크가 더 좋아.”

“…….”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같이 멍해져서 난 그를 보았다. 그의 보라색 눈이 날 이상하게 보더니 “아.” 하고는 내 손을 잡았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에스카가 내 꾀꼬리가 아니라는 건 아니고. 그냥, 빨리 기억을 찾아주면 좋겠어.”

“저도 그래요.”

그래야 이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친근하게 구는 이상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몇 번이나 나에게 몸조심하라고 당부한 다음, 뭐든 원하는 게 있다면 공작가 앞으로 달아놓으라고 말하고 떠났다.

샤샤 역시 얼마 머물러 있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 울어서 눈가가 다 짓무른 상태였다. 의사가 더 이상 울면 실명할 거라고 엄포를 놓은 후에나 눈물을 좀 그쳤다.

그녀는 쿠하힐만 보면 으르렁거리고 저주를 퍼부었지만 내가 그만하라고 달래니 잠잠해졌다.

꼭 혈통 좋고 예민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아, 난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본래의 나도 이렇게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음제라고 생각했다지만, 어쨌든 내게 독약을 준 사람 아닌가.

하긴 더 무서운 건 내게 그걸 마시게 한 사람이지만.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나에게 최음제를 먹인 걸까?

연인? 하지만 보통 연인에게 최음제를 먹이나? 음, 사람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든 샤샤 역시 현재 공작가의 유일한 안주인이여서 저택을 오래 비울 수 없다고 했다. 그녀도, 그녀의 오라버니도 둘 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안타까웠다. 아를은 날 위해 기사를 두셋 정도 남겨두고 떠났고, 샤샤도 시종을 두고 가고 싶어 했지만 난 집에 남는 방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사람이 많은 편이 오히려 더 피곤했으니까.

샤샤는 섭섭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와 사키에게 필요한 게 있거나 변화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사키는 나와 거래를 하는 상회 사람이면서 동시에 친구라고 했는데, 다른 세 사람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그의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하지만 세공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지식도 완전히 없어져서 난 밥을 굶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됐다. 그러나 사키가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며 덧붙였다.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으신다면, 이미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모으셨으니까요. 저희 상단에 재투자한 금액도 상당하시니 굶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과거의 나 대단하구나, 하고 감탄하고는 일단 안심했다. 적어도 빈털터리 기억상실증 환자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아를와 샤샤는 오랜 친구이며, 쿠하힐은 얼마 전에 구매한 노예인데 자유민으로 만들어주려고 했다는 설명도 사키가 해주었다.

그 얘기에 난 쿠하힐에 대해 묘한 의심이 생겼다.

작업장에 가보니 보석들이 잔뜩 있던데, 쿠하힐이라는 그 사람은 날 죽이고 이것들을 가져갈 셈이었을까.

더군다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묘하게 내 시선을 피하거나 해서 더욱 의심이 갔다.

근데 그럼 내가 피를 토하고 있으면 얼씨구나 하고 이것들을 가지고 도망쳐야지 왜 날 둘러업고 상회로 뛰어간 건가 하는 반박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라리 직설적으로 그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둘만 있는 시간이 되어 난 묘하게 거리를 두고 내 주변을 맴도는 그를 불렀다.

“저기, 쿠하힐이라고 했죠?”

“네.”

“왜 나에게 최음제를 먹인 거예요?”

“…….”

“혹시 우리가 연인이었나요?”

쿠하힐이 날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그의 대답은 느리게 나왔고 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친구?”

“글쎄요.”

“아니면, 저기 혹시, 내가 당신을 성노예로 부렸나요?”

설마, 내가 그렇지는 않았겠지 하고 그를 힐끔 보았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쿠하힐은 잡힌 자신의 손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제가 봉사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

봉사를 했으면 성노예로 내가 부린 거지, 그런 게 아닌 건 또 뭘까? 그나저나 최음제라니……. 나도 상당히 마니악하잖아? 이 쿠하힐이라는 사람도 그래서 나한테 질렸을지도 모르겠네. 과거의 내가 색녀였다니…….

난 새로운 정보에 충격을 받아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기사들은 문 앞과 현관에서 호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실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래서 난 다시 물었다.

“날 죽일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그 말에 그는 마치 비수에 찔린 사람처럼 움찔하며 날 보았다. 그의 눈에 경악과 체념과 고통이 서려서 난 내 말을 취소하고 싶을 정도였다.

“제가…… 제가 얼마나…….”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당신이 제 눈앞에서 피를 토하고 또 토하고 괴로워하면서 제 팔을 붙잡고……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지가 않더군요. 숨도 심장도 느려져서, 업고 산을 내려가는 동안 전 당신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때, 전…….”

그가 눈을 가렸다. 그의 어깨가 떨려와 난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쿠하힐이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미안해요.”

“또 그렇게 사과하시는군요.”

“하지만, 꼭…….”

덫에 걸린 동물만큼이나 괴로워 보이는걸요.

난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쿠하힐을 믿을게요. 그럼 일단 난 내 편을 한 명 얻은 거네요. 그렇죠?”

그 말에 그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대체 뭘 보고 절 믿으시는 겁니까?”

“그냥, 감이요. 만약 당신이 날 죽이고 싶었다면 난 그날 죽었을 테죠.”

“당신이 죽었다면, 저도 살고 있지 않겠죠.”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에 원을 작게 그리며 속삭였다.

“그 여자를 죽이고, 저도 죽었을 겁니다.”

그 여자? 아! 샤샤를 말하는 건가?

난 눈을 찌푸렸다.

“생명은 소중히 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고 당신의 목숨을 함부로 하면 안 되죠.”

내 말에 쿠하힐은 힘이 빠진 듯 웃었다. 그리고 내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가 떼었다.

“여전하시군요, 에스카는.”

“그래요?”

“네.”

쿠하힐의 말에 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비슷하다면 기억도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고 나면 제대로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난 의사의 명으로 침대에서 내려오는 게 엄금되어 있어서 쿠하힐이 내 시중을 다 들어주었다. 목욕도 체력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금지라서 쿠하힐이 내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곤 했다.

그가 천천히 내 옷을 벗기고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데,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처음에는 창피해서 가슴을 가렸는데 그가 태연하게 “항상 보던 겁니다.” 하고 말하는 바람에 가리는 게 되레 더 창피해져서 팔을 주춤주춤 내렸다. 그가 수건으로 가슴을 닦아주면 뾰족하게 유두가 고개를 들었고 아랫도리가 촉촉해졌다. 하반신을 닦을 때 그가 그걸 눈치채는 게 민망했지만, 그는 애액까지 깨끗하게 닦아줄 뿐이었다. 난 그의 바지 앞섶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았고, 흥분하는 게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기 쿠하힐.”

“예.”

“그, 내가 처리 도와줄까요?”

“…….”

내 말에 그가 날 빤히 보았고 난 손가락으로 그의 앞섶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힘들지 않아요?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하루 종일 내게 붙어서 나를 위해 시중을 드는 그가 힘들어 보였다. 나도 그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쿠하힐은 매일 제 시중 들어주느라 힘들잖아요. 저도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쿠하힐이 다시 한 번 말했지만 난 손을 뻗어 그의 바지 버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걸요.”

난 낑낑거리며 버클을 풀었다. 쿠하힐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속옷을 내리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난 조심조심 손끝으로 그의 귀두를 문질러보았고 그가 신음 소리를 내서 얼른 손을 뗐다.

음……. 그러니까 이게…….

난 허리를 숙여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커서 전부 입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기둥 부분은 열심히 손으로 문지르고 혀로 핥아주며 나름대로 성의를 다했다.

“윽…… 아, 에스……카…… 으!”

그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난 그를 올려다보며 쾌락을 참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는 그를 보았다. 난 좀 더 깊이 그를 입안에 넣으며 빨아들였고, 그의 허리가 조금씩 움직여 내 입천장을 건드렸다. 잠시 후 그가 내 입에서 자신의 것을 빼낸 뒤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마구 문지르기 시작했고 금방 그는 사정했다.

“아…….”

정액이 온통 가슴에 튀어 당황했다. 쿠하힐이 수건을 집어 닦아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킥킥 웃었다.

“난 알몸이고 쿠하힐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꼭 내가 쿠하힐에게 봉사해주는 노예 같네요.”

그 말에 쿠하힐의 손이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의 성기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난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한 번 더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절 계속 도와주시다가는 먼저 지쳐서 쓰러지실 겁니다.”

“…….”

쿠하힐은 자기 옷을 추스르고 나에게 옷을 입혀준 다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더 이상 주제넘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쿠하힐?”

“주무십시오.”

그는 조용히 등을 끄고 침실을 나섰다. 어둠 속에서 나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혼자 있기 싫다고, 같이 자자고 하고 싶지만 그건 그에게 폐가 될 것이다.

분명히 오랫동안 혼자였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혼자인 게 익숙하지 않은 걸까?

기억을 잃으면서 외로움을 잊는 방법도 잃어버렸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한숨을 쉬며 잠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얕은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결국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하힐이 언제든지 벨을 흔들라고 했지만 이 한밤중에 그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난 침대에서 내려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부엌까지 걸어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난 어둠 속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디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간신히 방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숨을 고르는데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어이, 교대.”

“아아, 고마워.”

“저 새끼가 그 새끼야?”

“맞아. 그 개새끼.”

“하지만 이제 노예가 기사단에 들어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행이지. 기사단의 명예가 떨어질 뻔했다고.”

“어휴, 이런 외딴 곳에서 여자 침실 불침번이라니.”

“어쩔 수 없잖아. 주군의 명이신데.”

난 나가는 걸 포기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하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짜증도 나겠지. 아를에게 그냥 기사들은 데려가라고 해야겠다.

난 다시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아, 결국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의사는 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했지만 온몸의 장기가 타격을 입어 전체적으로 약해져 있으니 휴식을 취하며 계속 몸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난 사키를 통해 아를에게 연락을 취했다. 기사들을 데려가라고 말했지만, 아를은 널 지키기 위해서 데려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내가 강경하게 맞서자 아를은 한숨을 내쉬고 포기했다.

“여전하네, 내 반지꽃은.”

“여전해요?”

“그래, 사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그것 때문에 우리 집에 와서 살라고 해도 싫다고 하고……. 뭐, 개가 있으니까 괜찮으려나.”

“개?”

“쿠하힐 말이야.”

“그는 사람이에요.”

“비유하자면. 어쨌든 알았어, 내 불티. 기사들에게 돌아오라고 할게.”

“고마워요.”

“몸조리 잘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더 찾아갈게.”

“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구슬 빛이 꺼졌다.

아를에게서 귀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내게 인사를 하고 재빠르게 저택을 떠났다. 그 모습을 보니 계속 데리고 있었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도 내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이틀에 한 번씩 오겠다고 말하고는 집을 떠났다. 드디어 집이 조용해졌다.

“쿠하힐.”

“네.”

“쿠하힐은 가고 싶은 곳 없어요?”

그 말에 쿠하힐은 대답 없이 날 바라보았다. 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만약 나 때문에 못 가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요. 내가 쿠하힐을 자유민으로 만들어준 건 분명히 그런 뜻이었을 테니까요.”

“없습니다.”

쿠하힐의 대답이 간결해서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다행이에요, 쿠하힐이 떠나면 난 외로웠을 거예요.”

쿠하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에스카가 떠나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계속 곁에 있을 겁니다.”

내가 그에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내가 계속 기억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죠?”

“그래도 전 계속 곁에 있을 겁니다.”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 자기의 인생도 있는데, 자기 몫은 챙겨야죠.”

내가 눈을 찡그리며 말하자 그가 멍하니 날 보더니 웃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

난 의아해하며 열심히 그가 얻을 이익을 생각해보았다.

‘사키가 내가 재산이 상당하다고 했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게 이득인가?’

그것도 이득이라면 이득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에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알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기억이 없으니까.

그가 날 이렇게 소중하게 대하니까 나에게도 분명히 소중한 사람이었을 텐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 괴로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냥, 당신과 제가 어떤 관계였을까 하는 생각이요.”

“어떤 관계였을 것 같나요?”

“엄청 소중한 사람이요.”

쿠하힐은 잠시 말을 잃은 듯 멈칫했다가 딱딱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난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졌다. 표정이 완전히 숨어버려서 그의 표정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느끼는 데 이유가 있나요? 제 무의식일지도 모르죠.”

그가 내 손을 잡아 내리며 속삭였다.

“그게 자신을 죽일 뻔한 사람을 생각하는 태도인가요?”

“하지만 모르고 그런 거였잖아요.”

“그래도 변명의 여지가 없죠. 제가 당신에게 최음제를 먹이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깔끔하게 떠났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난 그의 입에 손가락을 모아 대어 말하는 걸 막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지 말아요. 말로 자꾸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는 건 그만둬요.”

그가 내 손목을 붙잡고 날 밀어붙이며 으르렁거렸다.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내가……!”

그의 반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내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자꾸 주제를 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입을 맞췄다.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키스였다.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고 그의 푸른 눈 역시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스치듯 입술을 누르고 숨결을 빨아들여 키스한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내가 붙잡았다.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어서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에스카?”

그가 얼른 자리에 도로 앉아 날 살폈다.

“괜찮습니까?”

난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나…… 난 기억도 없고, 그러니까 쿠하힐이 아는 에스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왜 「주제」를 넘는다는 거예요?”

“그걸 저에게 물어보다니 잔혹한 분이시군요.”

“……아니…… 전…….”

“부서진 유리컵을 이어 붙인다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

“그 컵은 절대로 식탁에 오르지 않겠죠.”

그렇게 말하고 쿠하힐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모아서 붙여주신 것만으로도, 찬장에 넣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열이 조금 나는 것 같습니다. 누워서 쉬십시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하힐은 내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고 침실까지 부축해주었다.

빨리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와야 할 텐데.

침대에 누워 나가려는 쿠하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쿠하힐, 저기,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잠들 때까지만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쿠하힐이 내 옆에 누웠다.

난 그의 옷자락을 계속 붙잡고 있었고, 쿠하힐은 내 손을 잡아 자기 허리에 두르게 한 다음 끌어안아 주었다.

온기에 묻혀 난 금방 잠들었는데 잠결에 들린 소리에 정신이 슬쩍 돌아왔다.

비몽사몽이었지만 쿠하힐이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다 그가 진저리를 치더니 잠에서 깬 듯 숨을 헐떡이고 내 목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그리고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고 이불을 추슬러 나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단단히 날 끌어안았다.

내 의식은 다시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몸은 조금씩 회복되어 이제 집 안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쿠하힐은 날 꼭 깨지기 쉬운 세공품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체력이 약한 나는 앉아서 깜박 졸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쿠하힐은 허둥지둥 달려와 내가 살아 있는지 먼저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밤마다 꾸는 악몽이 무엇인지도 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잔소리를 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한번 죽을 뻔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어지지가 않지요.”

“하지만 내가 잘 때마다 놀라면 수명이 줄어들걸요.”

“줄어드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 말에 난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입을 떡 벌렸다.

“쿠하힐, 좀 더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요.”

“무엇을 위해서요?”

쿠하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고 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날 위해서요.”

그리고 난 잠시 고민하고는 물었다.

“너무 명령조로 들렸나요?”

쿠하힐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날 올려다보았다. 그가 속삭였다.

“한 번 더 말해봐요, 에스카.”

난 그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날 위해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세요. 쿠하힐.”

“기꺼이.”

쿠하힐이 내 손등에 키스하며 대답했다. 난 간질간질해져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쿠하힐은요?”

“네?”

“저에게 뭔가 바라는 게 없어요?”

“없습니다.”

“……그래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섭섭함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의사가 도착했다. 그는 평소처럼 날 진찰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몸이 꾸준하게 회복되고 있군요. 기억이 돌아오는 기미는 없으신가요?”

“네, 아직요. 생각해보려고 하지만 그냥 머릿속이 새하얀 기분이에요.”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런가요?”

“네. 물론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아가씨는 젊으시니 회복이 되실 겁니다.”

“네.”

“마음이 힘들면 몸도 나아지지 않으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고 회복에 힘쓰세요.”

나이 많은 의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해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온 사키가 입을 열었다.

“내일쯤 델루치아 공작 전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아를이?”

“네. 에스카님과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연락 구슬의 마력 보충을 잊으셨을 테니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사키.”

난 내 방에 들어가서 구슬을 가지고 나왔다. 사키와 쿠하힐은 마치 이제 막 걷는 아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주시하다가 내가 다시 잘 돌아오자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그런 둘에게 내가 뺨을 부풀리며 말했다.

“이제 집 안 정도는 잘 돌아다닐 수 있다고요. 선생님,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내 말에 의사가 허허 웃고는 내 편을 들어주었다.

“이제 정원을 산책하시면서 조금씩 운동을 해주셔도 좋습니다. 음식도 많이 드시고요.”

“들었죠?”

난 쿠하힐과 사키를 번갈아 보았다. 사키는 멋쩍은 듯이 웃고 구슬을 충전기에 넣어 충전한 뒤 돌려주었다.

“나중에 제 아내와 한번 들르겠습니다. 걱정이 많거든요.”

“아내분……과도 제가 아는 사이였나 보군요.”

“네.”

사키는 인사를 하고 의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충전된 연락 구슬을 다시 방에 가져다 두고 작업실로 향했다.

아마 이 일이 내 평생에 가장 많이 해온 일일 것이다. 난 작업대를 쓸어보기도 하고 괜히 서랍들을 열었다가 닫아보기도 하고 도구를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했다. 전부 낯설고 또한 익숙했다.

‘이대로 영영 기억이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더럭 일어난 공포가 날 사로잡았다. 물론 다들 좋은 사람이니까 계속 친구로 남아주겠지만 예전 같은 친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하는 과거의 에스카에 대한 이야기를 남 얘기 듣듯이 들으며 평생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그들뿐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었을 텐데…….

작업대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때, 밖이 소란해졌다. 조심스럽게 작업실에서 나오니 거실에서 아를이 망토를 벗고 있었다.

“아를?”

“아, 에스카.”

아를이 싱긋 웃으며 다가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안 좋은 곳은 없어? 내 쇼콜라?”

“없어요. 그보다 웬일이에요? 내일 온다고 사키가 말해줬는데요.”

“네 구슬로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돼서 일정을 앞당겼어.”

“오늘 사키가 충전해줬어요. 마력이 다 떨어졌었나 봐요.”

“그랬구나.”

아를이 웃으며 내게 키스했다.

“뭐 상관없잖아? 하루 정도의 오차야.”

“그건 그렇지만요.”

“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맛도 기억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하더라.”

“고마워요. 케이크 좋아하거든요.”

“알아. 내 컵케이크 아가씨.”

아를이 싱긋 웃어 보였다.

“기분 전환 삼아 나가서 먹지 않을래? 계속 집 안에만 있어서 답답하지?”

“좋아요.”

난 정말로 기뻐서 찬성했다. 계속 침실 안에서, 그리고 집 안에서만 생활하니 좀이 쑤셨던 것이다. 아를이 내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었다.

“혹시 모르니까, 에스카가 입어. 그리고 개는 집 보기.”

아를이 쿠하힐을 가리키며 말하자 쿠하힐이 조용히 말했다.

“전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아, 그래? 그럼 네가 내 에스카의 집에 왜 있어?”

“…….”

“내가 남아달라고 했어요.”

내가 아를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를은 내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보모? 식모? 시종? 최음제를 먹이는 인간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마차에 자리가 없으니, 집을 지켜야겠네. 또 내 에스카의 잔에 뭘 타면 곤란하거든.”

“아를.”

내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자 아를은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알았어.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가자.”

난 쿠하힐을 돌아보고 눈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현관을 빠져나오자마자 아를을 타박했다.

“왜 그렇게 말해요?”

“뭐가?”

“쿠하힐에게 말이에요.”

“저 새끼가 널 위험에 처하게 만든 건 사실이잖아. 난 내 소중한 꾀꼬리를 잃을 뻔했어. 그런데도 난 그의 목숨을 살려줬고. 이 이상 내가 관대할 수 있어?”

“하지만…… 하지만 내게 그 약을 준 건 샤샤잖아요……. 당신의 여동생이요.”

아를은 날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앉았다.

“에스카는…… 샤샤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아를이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 애는 널 사랑해. 절대로 널 해칠 수는 없는 아이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아를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내 허리를 안고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이러지 마, 에스카.”

“난, 샤샤를 좋아해요. 그리고 당신도 좋아하고요.”

아를이 내 말에 희미하게 웃고는 키스를 해왔다. 그의 키스가 점점 더 진해져서 난 등받이에 몰려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밀어내야 할지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목덜미에 키스하고 또 키스하고 내 셔츠 자락을 풀며 천천히 더 아래로 키스해 내려갔다. 그의 손이 내 벨트에 걸려 난 그를 밀어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를.”

나름 목소리를 낸다고 했는데 막상 그를 부른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한숨 같은 부름이었지만 아를은 즉각 반응해 내게서 손을 뗐다. 그가 작게 숨을 몰아쉬는 날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빈틈투성이라 파고들고 싶어져. 난 널 좋아하고 난 아직 혈기왕성해, 내 소중한 아가씨. 난 너에게 청혼하지만 너와 결혼하지는 않을 거야. 우스운 농담 같지만 말이야.”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내 셔츠 단추를 채워주었다.

“그러니 싫다면 말해, 네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난 손을 뗄 테니.”

마지막 단추까지 채우고 그가 내 어깨에 기댔다. 난 도대체 그와 무슨 관계인지 알 수가 없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이 아를은 즐거운 대화 상대였고, 마차가 멈춘 강가는 크고 아름다웠으며 케이크는 맛있었다. 케이크를 먹으며 뭔가가 떠오를까 싶어 집중해보았지만 엄청나게 맛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조금 마음이 아팠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난 아를에게 물었다.

“아를은 정말로 내 연인이 아니에요?”

“왜? 내 연인이 되고 싶어졌어? 내 불티?”

“그럼 연인이 아닌 건가요?”

“아니야. 청혼하고 거절당하는 사이라니까.”

“그럼 아를은 내 연인이 되고 싶나요?”

내 말에 아를은 놀란 듯 나를 보았다가 평소와는 다른 미소를 띠었다.

“응, 그리고 아니요.”

“…….”

이해할 수 없어서 난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를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이건 분명 내 잃어버린 기억 속에 해답이 있는 질문일 테니까.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먹을 때가 되어 있었다. 아를이 데리고 온 시종들이 요리를 해줘서 저녁을 먹었다. 아를은 내가 먹는 걸 보며 자꾸 더 먹으라고 내 쪽으로 그릇을 밀어댔다. 나중에는 내 앞에만 그릇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이만 가볼게.”

“하룻밤 자고 가죠?”

“내가 이렇게 자주 오는 것도 사실 너에게는 안 좋아.”

아를이 모자를 쓰며 웃고 내 뺨에 키스했다.

“그럼 푹 쉬어, 내 쇼콜라.”

그러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가버렸다.

‘공작이란 많이 힘든 일 같아.’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며 다시 한 번 그렇게 생각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른 쿠하힐을 찾았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그의 등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난 왁 소리를 지르고 그를 끌어안았다.

“뭘 하시려나 했더니.”

쿠하힐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 태연해 나는 축 늘어졌다.

“안 놀랐어요?”

“그렇게 기척을 내면서 오시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요……?”

왠지 실망해서 난 그의 등에 뺨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쿠하힐이 말하자 등을 통해 진동이 전해졌다. 뺨이 간지러워졌다. 난 그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까 아를이 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이니까요.”

“사실이 아니에요. 쿠하힐이 또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아를이 말이 심했어요.”

마지막 접시의 물기를 닦고 쿠하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 내 손을 뗀 후에 내 쪽으로 돌아섰다.

“정말로 또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쿠하힐?”

“자꾸 저에게…….”

쿠하힐이 숨을 가다듬고는 조용히 말했다.

“저에게 여지를 주지 마십시오.”

그 말에 난 발끈해서 대들었다.

“전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주제를 넘는다, 여지를 준다. 그럼 쿠하힐은 저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건가요? 그냥 사용인과 고용인? 나는, 난 쿠하힐이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쿠하힐에게 나는요?”

“당신은 제게…….”

쿠하힐은 말을 끊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부딪치는 게 나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당신은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어딘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라 난 그 말에 굉장히 기쁜데도 기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쿠하힐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 안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주제니 여지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렇게 따지면 나야말로 기억상실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인걸요. 쿠하힐이나 아를을 친구로 삼을 자격이 없죠.”

“에스카.”

내 말에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어색하게 웃었다.

“만약 이대로 기억이 안 돌아오면 다들 좀 질릴지도 몰라요. 그리고 내가 알던 에스카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하면서 멀어지는 게 아닐까요? 결국에는…….”

나 혼자 남는 게 아닐까?

“제가 곁에 끝까지 있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쿠하힐.”

난 불안감을 감추며 미소 지었다. 쿠하힐이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약을 먹고 주무세요. 오늘 너무 피곤하셔서 나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쿠하힐이 주는 쓰디쓴 약을 전부 마셨다. 마시고 헛구역질을 하는 나에게 쿠하힐이 사탕을 건네주어 허겁지겁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저 보약인지 뭔지는 왜 이렇게 맛이 없는 걸까?

사탕을 우물거리며 난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데 쿠하힐이 들어왔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기자 그는 빙그레 웃고는 내 셔츠 단추를 풀다가 손을 딱 멈췄다.

“쿠하힐?”

그는 셔츠 칼라를 젖혀 내 목덜미를 보더니 천천히 남은 단추들을 풀기 시작했다. 난 내 목을 볼 수는 없지만 가슴은 볼 수 있으니 시선을 내렸다. 쇄골부터 앞가슴까지 전부 울긋불긋했다.

“아.”

아까 아를이 남긴 자국이구나.

깨닫는 순간 당황해 나는 셔츠 앞자락을 여미며 말했다.

“저, 저기 쿠하힐, 오늘은 제가 그냥 씻을게요.”

그때 쿠하힐이 내 손을 잡아 살피고는 말했다.

“피임 반지가 없는데요.”

“네?”

갑자기 그가 내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잠, 쿠하힐?!”

내 힘으로는 도통 그에게 반항할 수가 없어서 그는 손쉽게 내 바지를 벗겨냈다. 이미 알몸을 다 본 사이라서 창피하다기보다는 그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왜 이러는 거예요?”

“안에다가 사정했습니까?”

“네?”

“공작이 말입니다.”

그제야 쿠하힐이 보인 반응이 이해가 됐다.

“안 했어요!”

내가 소리치자 쿠하힐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난 화가 나서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아를이랑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아무것도 안 했군요.”

쿠하힐의 손가락이 내 가슴의 키스마크들을 가볍게 훑었고 난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그야, 키스는 했지만…… 금방 그만뒀고, 쿠하힐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대체 바지는 왜 벗기는 거예요?”

“그 공작님이 자신의 뒤처리를 하실 리 없으니, 제가 대신 해드리려고 그랬죠.”

“…….”

기가 차서 그를 바라보는데 쿠하힐이 내 셔츠를 마저 벗겼다. 난 그의 손의 셔츠를 잡으며 말했다.

“나가요, 오늘은 그냥 혼자 씻을래요.”

“하지만 열이 올라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욕조에 안 들어가고 간단하게 씻기만 할 테니까, 나가요.”

내가 그를 낑낑거리고 밀어내자 쿠하힐은 꿈쩍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욕실 밖으로 나간 뒤에야 나는 옷을 마저 벗었다. 욕조의 물을 몸에 부으며 투덜거렸다.

“대체 쿠하힐은…….”

왜 이러는 거야?

아를이 쿠하힐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쿠하힐이 아를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꼭 질투하는 것 같…….

질투.

방금 쿠하힐의 태도에 꼭 맞는 말이라 난 멍하니 그 단어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질투.’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다. 이거면 쿠하힐이 왜 내게 최음제를 먹였는지도 이해가 간다. 쿠하힐이 내게 고백했는데 거절하자, 최음제를 먹여서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니 쿠하힐이 천하의 파렴치한이 되는지라 난 다시 물을 머리부터 쏟아붓고는 샴푸를 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쿠하힐이 전에 그냥 깔끔하게 떠났어야 했다, 라고 했었지? 마지막으로 한 번 하고 떠나겠다, 이런 거였을까?

하지만 쿠하힐은 내 성노예 같은 거였잖아. 관계야 충분히 가졌을 텐데. 설마 내가 먼저 질려서 쿠하힐을 자유민으로 만들어주려고 한 건가? 쿠하힐은 날 좋아하게 되었는데 내가 자기를 버리려고 하니까 최음제를…….

‘아니 이거 너무 비약하는 건가? 삼류 소설도 아니고…….’

맞아, 질투가 아니라 그냥 아를과 사이가 안 좋아서 화낸 걸 수도 있지.

그렇게 마음을 다독인 다음, 마저 몸을 씻어내고 가운을 입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쿠하힐이 수건을 들고 서 있다가 내 머리를 문질러 말려주었다. 거실에 앉아 그가 말려주는 대로 얌전히 있다가 난 그에게 직구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쿠하힐.”

“네.”

“왜 나에게 최음제를 먹인 거예요?”

그 말에 그의 손이 딱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물으십니까?”

“궁금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거든요. 쿠하힐이 날 죽이려고 했던 거라면 차라리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최음제는……. 왜죠?”

“제 일생일대의 불찰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바닥까지 떨어졌는지 새삼 확인한 사건이었죠. 비난하고 싶으시면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왜인지 알고 싶은 거예요.”

“당신을 안고 싶었습니다.”

“…….”

“당신을 안고 참아왔던 말들을 전부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 하지만 우리는 음…… 이미 관계를 하는 사이였잖아요.”

“그냥 제 어리석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쿠하힐은 말없이 내 머리카락을 털어주었고, 더 이상 물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입을 다물었다.

‘참아왔던 말들……?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중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침대로 옮겨진 후였다. 더듬으니 거기에 온기가 있어서 난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