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름 별장
난 아침 준비를 하면서 심각하게 프라이팬을 내려다보고 있는 쿠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쿠는 요즘 내 도움 없이 요리를 해보는 중이었다. 난 불안했지만 뭐든지 처음은 있는 거니까 하고 이해했다. 잘못돼도 그냥 요리 몇 개 망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맡겨두었다.
‘생각해보니까, 쿠 옛날에 유명한 기사였다고 했잖아? 역시 돌아가고 싶겠지? 거기에 가족이나 친구도 있을 거고…….’
쿠는 부풀어 오르는 팬케이크 바닥을 뒤집개로 몇 번이나 들어서 색을 확인하더니 조심스럽지만 과감하게 팬케이크를 뒤집었다.
갈색의 매끄러운 바닥이 위로 올라오자 그는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돌려보내 준다느니 자유인이라느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밤에는 성노예로 써먹다니. 에스카 블란테, 좀 반성하는 게 좋겠다.’
쿠는 이제 마약을 완전히 끊고 다른 약만 먹는 중이다. 먹고 나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 같긴 했지만 증상이 심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쿠는 밤마다 봉사하기 위해 내 침실에 들어왔고, 난 거절을 해야 함에도 결국 못 이기는 척 봉사를 받고야 말았다.
‘하지만 기분 엄청 좋은걸! 아아, 안 돼, 안 돼. 쿠에게는 쿠의 인생이 있는데…….’
차곡차곡 팬케이크를 접시 위에 쌓는 쿠를 보고 나는 스튜를 화덕에서 내렸다. 우리는 팬케이크와 스튜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쿠, 팬케이크 굽는 솜씨가 많이 늘었다. 맛있어!”
“감사합니다.”
식사를 끝내고 같이 설거지를 한 다음, 난 주섬주섬 몰래 소파 밑에 숨겨두었던 꾸러미를 꺼내어 쿠에게 내밀었다.
“자, 선물.”
쿠는 내 손에서 천천히 길쭉한 꾸러미를 받아 들고 포장을 풀었다. 검이 들어 있었다. 검을 만든 건 처음이어서 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겨우 마음에 드는 검을 만들 수 있었다.
“마음에 들어?”
쿠는 말없이 한참 검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검을 뽑았고, 잘 벼린 검이 스르렁 하는 서늘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몇 날 며칠을 공들여 만든 검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햇빛에 반짝였다. 쿠가 말이 없어서 난 웃으며 검 손잡이 부분을 가리키고 말했다.
“파란색 보석은 쿠의 눈동자 색이랑 맞춘 거야.”
그 말에 쿠가 드디어 살짝 미소 짓고 날 보았다.
“눈동자 색과 맞춘 보석 선물이라니, 꼭 애첩에게 내리는 선물 같군요.”
“어? 그, 그런가?”
난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생각해보니 그런가? 네 눈동자 색과 같은 보석이야, 라니 너무 오글거렸나? 하지만 아를과 샤샤에게는 그렇게 잘 해주다 보니까…… 으으…….
“저기, 그럼 다른 보석으로 바꿔줄게.”
“이게 좋습니다.”
“하지만 애첩 같다면서…….”
“네.”
“……?”
“너무 오랜만에 검을 잡아, 이상한 기분입니다.”
쿠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고는 그가 살짝 눈을 찡그렸는데 꼭 울거나 화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응, 여기 검대도 같이 만들었으니까 차고 다니면 돼. 저기, 그리고 쿠.”
“네.”
“나 항상 여름의 한 달은 공작의 별장에서 묵으면서 세공품을 수리 보수하고 제작해주거든.”
“그러시군요.”
“이제 슬슬 가야 할 때인데, 쿠는 같이 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아. 괜히 아를과 마주치면 껄끄럽잖아. 왠지 아를은 쿠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 같이 가지 않는 편이 더 괴롭습니다.”
“어? 하지만 나 수리하러 방에 처박혀 있는 경우도 많아서 더 괴롭힘 당할지도 몰라. 물론 여기 쿠 혼자 있으면 밥 먹거나 하는 게 더 힘들 수도 있지만…….”
그런가? 집안일을 혼자서 하려면 힘들까? 하긴 쿠가 집안일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쿠가 집에서 나갈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함께 있을 수 있는 동안은 함께 있자.
“알았어. 하지만 되도록 내게서 떨어지지 마.”
“네.”
얼마 후 공작가에서 관례대로 마차를 보내왔고, 난 무거운 도구상자를 잔뜩 실은 후에 마차에 올랐다. 공작가의 별장까지는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1년에 한 번 이렇게 멀리 나가는 것이 마치 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가면 또 한참 일해야 하긴 하지만 마차 여행만으로도 꽤 즐겁다고 해야 할까?
마차가 별장 앞에 서자마자 샤샤가 뛰어나와 날 끌어안았다.
“에스카!”
“워, 샤샤 오랜만이야.”
“응, 에스카 오랜만이야.”
머리도 올려 묶지 않았고 자잘한 꽃무늬 자수가 들어간 낙낙한 옷을 입었지만, 여전히 샤샤는 빛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허리까지 닿는 은발은 햇빛에 투명하게 빛났고 보라색 눈동자는 반짝반짝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아를이 말한 그 노예?”
내 손을 꽉 잡은 샤샤가 쿠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쿠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자 흥 하고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에스카가 온다고 해서 차랑 디저트랑 준비하라고 했어. 같이 먹자!”
“응.”
난 쿠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하고는 샤샤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에 천막을 치고 마련한 티테이블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식기와 먹을 것들로 꾸며져 있어서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웠다.
샤샤는 다과를 즐기면서 신나게 사교계의 온갖 사건들과 뒷담, 자신에게 대시한 남자들의 험담을 늘어놓았고 난 웃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샤샤의 이야기가 살짝 끊긴 틈을 타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를의 결혼은 어떻게 됐어?”
“신경 쓰여?”
“당연히 신경 쓰이지.”
“흐음~. 아직 결정 못 한 상태야.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를도 제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샤샤는? 결혼 안 해?”
“아를이 해야 하지. 그리고 아직 결혼할 만한 상대가 없어. 사실 2황자랑 결혼할까도 생각 중이야. 우리 둘 사이를 공고하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아, 정말 에스카도. 그런 얼굴 안 해도 돼. 결혼은 원래 정략으로 하는 거고, 사랑은 다른 상대랑 하면 되니까. 귀부인들에게 피임 반지 만들어 판매한 사람이.”
“그래도…….”
“에스카의 그런 평민적인 생각이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나도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백년해로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그렇게 말한 샤샤는 후후 웃고는 내 뒤에 서 있는 쿠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물었다.
“얘, 성노예로도 써?”
“응……? 어어…….”
그게 성노예는 아닌데 봉사를 받기는 받으니까…….
내가 더듬거리면서 대답하자 샤샤가 웃었다.
“흐음, 그럼 나 한 번 빌려줄래?”
“어?”
난 당황해 샤샤를 보았다. 귀부인들에게 노예란 물건과 같아서 솜씨 좋은 성노예를 빌려주거나 하는 일도 있었지만, 막상 샤샤가 빌려달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아니 쿠는 빌려주거나 그런 거 아니고…….”
“흐으음.”
샤샤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았고 난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보았다. 샤샤는 빙긋 웃더니 옆의 시종에게 말했다.
“베키를 데려와.”
‘베키?’
잠시 후 시종이 수인족 여자 노예를 끌고 왔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위로 솟은 귀, 길게 끌리는 풍성한 흰 꼬리가 무척 아름다웠고, 입은 옷도 남성복이기는 했지만 보통 노예와 달리 실크 블라우스에 가죽 바지라는 고급스러운 차림이었다. 입에 마개를 씌우고 있는 것만 빼면.
“완전 예쁘다. 뭐야? 언제 샀어?”
“예쁘지? 얼마 전에 구입했어. 북쪽에서만 사는 수인족이라는데 순하면서도 순종적이라서 좋아. 그런데 베키가 요즘, 발정기거든. 에스카의 노예랑 접붙이면 안 돼?”
“…….”
난 더더욱 말문이 막혀서 그런 말을 하며 생글생글 웃는 샤샤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샤샤가 웃으며 덧붙였다.
“요즘 성노예끼리 하는 거 보는 게 나름 유행이거든. 얼마 전에 살롱에서 노예끼리 하는 걸 봤는데, 와, 엄청 자극적이더라. 성노예면 그런 훈련도 받으니까, 분명 저 노예도 가능할걸? 응? 에스카~~ 한 번만! 나 딱 쟤가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애교 있게 샤샤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여기서 내게 쿠는 소중한 사람이고, 또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샤샤는 날 이상하게 바라보겠지.’
역시 귀족들의 도덕관념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난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남매에게는 몹시 약해서 난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쿠하힐이랑 이름도 똑같이 지었다면서? 개에게는 개가 제일 어울리지. 솔직히 말해서 베키의 몸값이 얼만데. 저 노예에게는 과분할걸?”
“아니, 음…….”
난 샤샤를 보고 베키를 본 다음 쿠를 살짝 돌아보았다. 쿠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표정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숨을 들이마시고 샤샤를 바라보았다.
“미안, 샤샤. 베키에게는 다른 짝을 찾아줘.”
“뭐어?”
실망한 표정을 하는 샤샤에게 난 웃으며 말했다.
“쿠는 내 거야. 못 빌려줘, 안 빌려줘.”
차라리 이렇게 소유권을 주장하는 편이 다들 알아듣기 편할 것이다. 괴짜라고 생각은 하겠지만 말이지.
내 말에 샤샤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이, 에스카. 너무 노예를 아끼는 거 아냐? 으음……. 아, 내 다른 성노예 빌려줄게! 그 애도 엄청 기분 좋거든. 그 애 테크닉을 맛보면 웬만한 노예는 눈에도 안 차.”
난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나에게 이렇게 제안하는 게 나았다.
“알았어, 빌려줘 봐.”
“후후, 그래.”
그리고 샤샤는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않고 다시 사교계 뒷담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난 마음 편하게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난 뒤 샤샤에게 말했다.
“첫날부터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지, 보수할 물건 모아뒀어?”
“응, 당연하지. 작업실에 모아뒀어. 그보다 어차피 늦었는데 저녁 먹고 오늘은 쉬어. 마차가 늦게 도착했잖아.”
“그럴까? 방금 차 마셔서 그렇게 배고프지는 않지만.”
“요리사가 차린 저녁 테이블을 보면 그 생각은 단번에 사라질걸?”
“하긴, 누가 차려준 밥 먹은 지 엄청 오래됐어.”
우리는 재잘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까지 노예가 따라올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쿠와 헤어지게 되었다. 난 쿠에게도 저녁을 챙겨달라고 부탁하고 샤샤와 저녁 식사를 했다.
혼자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호화스러운 요리들이 차례로 나왔다. 참지 못하고 잔뜩 먹어 배가 불러진 내가 샤샤에게 말했다.
“샤샤, 나 야식으로 먹게 남은 걸로 도시락 만들어서 오늘 밤에 작업장으로 가져다 놔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에스카가 좋아하는 걸로 잔뜩 채워놓을게. 근데 첫날부터 일하려고?”
“어떤 물건이 있나 봐두기라도 하려고.”
“아하, 응. 알았어. 스페셜로 준비할게.”
나와 샤샤는 밤 산책을 하며 정원을 걸었다. 샤샤는 내 팔짱을 끼고 어깨에 뺨을 비볐다.
“에스카가 와서 너무 좋아.”
“나도 샤샤를 만나서 기뻐.”
“정말?”
“정말이지.”
“후후후.”
우리 둘은 느긋하게 산책을 하며 배를 꺼트렸다. 그러고 나서 난 쿠를 찾아 작업장에 들렀다가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샤샤는 조금 입을 내밀었다가 한 달이나 같이 있을 거라는 내 말에 그제야 기분을 풀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시종의 안내를 받아 쿠가 돌아왔다. 난 그를 데리고 얼른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작업장에는 커다란 도시락 바구니가 놓여 있어서 난 그걸 내려 쿠에게 내밀었다.
“노예에게 주는 식사는 변변찮지? 이거 먹자.”
쿠는 잠시 내 얼굴을 보고 “네.” 하고 짧게 대답한 다음 도시락 뚜껑을 열어 식사를 시작했다. 난 배가 불러서 샌드위치 하나를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쿠는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도시락을 전부 비웠다.
“여기 공작가 노예들에게는 밥 안 줘?”
“저녁엔 물만 주는 모양이더군요.”
“아, 진짜 너무하네. 참! 쿠, 잘 때 노예관에서 자지 말고 내 방으로 와. 시녀 방이 따로 딸려 있는데 거기에서 자면 돼.”
“알겠습니다.”
난 작업실 한쪽에 쌓여 있는 세공품들을 살펴보았다. 이런, 이거 보수할 때가 됐구나. 아이고, 이것도 고장 났네. 흠흠. 이거 엄청 오래된 거잖아? 스승님이 만드신 건데……. 이건 고치려면 좀 복잡하겠군.
대충 견적만 내본 다음 쿠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서 있던 금발의 남자가 날 보고 얼른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의 명으로 에스카님을 섬기러 왔습니다.”
“응? 아! 맞다. 참, 그랬지. 응, 알았어. 침실에 들어가 있어.”
“네, 아가씨.”
남자는 고개를 공손히 숙이고 내 침실로 들어갔고, 난 쿠를 돌아보며 말했다.
“쿠, 시녀 방은 이쪽이야.”
공작가라도 별장이라 불빛은 촛불 정도로 어두운 편이라 쿠의 표정을 잘 살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쿠?”
“주인님.”
“응?”
“주인님은 주인님이시죠.”
쿠의 말에 난 그를 달래려고 애쓰며 말했다.
“쿠, 저기 오늘 기분 나빴지? 샤샤가 한 말 때문에……. 쿠,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사실 말이야.”
난 뒤꿈치를 들고 쿠에게 속삭였다.
“곧 널 자유롭게 해줄 예정이거든.”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기에는 좀 일렀지만 난 얼른 말하고는 웃으며 쿠의 어깨를 툭 쳤다.
“조금만 참아.”
“……주인님께는, 제가…….”
쿠의 말은 느렸고 고통스럽게 들려서 난 당황해 쿠를 살펴보았다.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쿠?”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어……?”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반응에 내가 놀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쿠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먼저 시녀 방으로 들어가는 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 우두커니 홀로 거실에 남았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러고는 닫힌 문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난…… 쿠가…… 기뻐할 줄 알았어…….”
나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노예가 보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녕, 난 에스카 블란테야.”
“네, 아가씨. 주인님께서 특별히 정성을 다해 섬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옷을 벗겨드릴까요? 아니면 직접 벗으시겠어요?”
난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가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미안한데, 그냥 안 하고 했다고 해주면 안 될까?”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노예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다른 노예도 마찬가지야. 그냥, 음. 네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그러시면 제가 내일 주인님께 혼납니다.”
“그러니까 나도 너랑 했고 엄청 좋았다고 이야기할 테니까, 말을 맞춰주면 안 돼?”
그 말에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거짓말을 잘하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건…… 그래, 맞다. 괜히 네가 덤터기를 쓰겠지……. 그럼 어쩔 수 없나.”
사, 사실 쪼끔 그 테크닉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왠지 쿠가 어른어른해서 양심이 쿡쿡 찔렸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도 내가 고민하자 그가 말했다.
“그럼 아가씨, 제가 전신 마사지를 해드리겠습니다.”
“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마음에 드셨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게 마음에 안 드시면 그때 다시 고민해주세요.”
“앗, 정말? 고마워. 그런데…… 저녁에 물만 먹었다면서, 힘 쓸 수 있어?”
“물이요?”
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응, 노예는 저녁은 물만 준다면서?”
내 말에 그가 웃었다.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부리려면 먹여야죠. 제대로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선량하신 분이군요.”
칭찬에 난 얼굴이 빨개졌다. 선량하다니. 그런 말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난 부끄러워져서 주춤거리며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주무르는 순간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많이 굳어 있으시군요. 몸에 힘을 빼세요, 아가씨.”
“읏…… 응…… 거기, 거기, 좀 더 세게…….”
그가 정확하게 아픈 지점을 누르자 난 다시 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아픈데도 시원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끙끙거리며 전신 마사지를 받고 나자 난 완전히 온몸의 근육이 다 풀린 느낌이었다.
‘완전 기분 좋았어……. 마사지 받아보는 건 처음인데, 왜 그렇게 귀족 여자들이 마사지를 찾는지 알 것 같아…….’
“만족하셨습니까?”
“응, 진짜 좋았어…….”
“그럼 내일도 불러주세요. 주인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하하, 그럴까? 아…… 발기했네.”
“죄송해요. 얼른 처리를…….”
“음? 응, 서비스도 받았으니 내가 해줄게. 핸드잡은 좀 익숙해서.”
그렇게 말하고 난 그의 성기를 감싸 쥐어 위아래로 흔들어주었고 잠시 후 그는 몸을 떨며 내 손에 사정했다. 그러고는 얼른 내 손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샤샤가 보낸 사람이니까 샤샤 얼굴을 봐서라도 그를 나름대로 총애해줘야 했다.
난 침대 옆을 두들겼다.
“자고 가. 내가 엄청 만족해서 자고 가라고 했다고 할 테니까.”
그 말에 그가 빙긋 귀염성 있는 미소를 짓고는 얼른 내 옆에 누웠다. 그가 나에게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응, 잘 자.”
다음 날 아침, 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우으…… 누구……?”
“쿠하힐입니다.”
“아, 쿠. 들어와.”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쿠하힐이 들어왔다. 침실에 들어온 그는 멈칫하고 멈췄다가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와 내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주인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식사하셔야지요.”
“응……. 일으켜줘.”
내가 칭얼거리자 잠시 머뭇거리던 쿠는 이불을 거둬내고 내 손을 잡아 침대에서 일으켜주었다.
“아가씨, 제가 세숫물을 가져다 드릴게요.”
뒤에서 나는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바지를 챙겨 입는 금발 노예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잘 잤어?”
“네, 아가씨도 편안히 주무셨나요?”
“덕분에.”
난 킥킥 웃으며 말했고 쿠가 날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어 그를 바라보았다.
“쿠? 손목 아파…….”
“죄송합니다.”
황급히 쿠가 손을 놓으며 물러났다. 난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나 금발 노예가 가져다준 세숫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가 옆에서 계속 달콤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편안히 주무셨다니 제가 더 영광이죠. 저도 아가씨 덕분에 충분한 기쁨을 누렸답니다. 아가씨의 피부가 어찌나 부드럽고 새하얀지 마치 흰 비단을 쓰다듬는 것과 같았죠.”
“네, 네.”
내가 웃으며 세숫물을 그에게 가볍게 튕기고는 말했다.
“시중은 괜찮으니까 돌아가. 피곤할 텐데.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그가 내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침실에서 물러나자 쿠가 나에게 물었다.
“어젯밤 즐거우셨습니까?”
“응, 엄청 좋았어.”
“…….”
“쿠는 잘 잤어?”
“아뇨.”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참 그리고 쿠……. 그, 어제 그 질문 있잖아.”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대답하지 마십시오.”
“어? 어…… 아니……. 음, 응.”
수면 부족 때문인지 쿠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서 난 쿠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 나서 다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쿠, 좀 더 잘래?”
“괜찮습니다.”
“그, 그래…….”
난 쭈뼛거리며 얼른 침실 밖으로 나가 시종에게 아침을 가져오게 했다. 2인분이 될 만큼 가져온 걸 확인하고 시종들을 밖으로 다 물렸다. 시종이 있으면 아무래도 쿠와 함께 아침을 먹을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 둘은 아침을 먹었다. 먹고 난 그릇을 치우던 시종이 샤샤가 아침 티타임에 초대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찾아갔다.
“샤샤, 좋은 아침.”
“응, 잘 잤어?”
샤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어서 난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로 덕분에 잘 잤어.”
아침 티타임은 길지 않고 간단했다. 만족했느냐, 기분 좋았느냐, 마음에 들었느냐 하고 연속으로 물어보는 샤샤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응, 엄청 만족했어. 나 쿠에게는 그런 거 받아본 적 없는데, 진짜로 신세계였다니까.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더라. 걔는 왜 그렇게 솜씨가 좋니? 나 처음으로 귀부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니까. 딱 원하는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서 자극해주더라고.”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어서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샤샤는 보랏빛 눈을 반짝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그래서 뒤에 있는 노예가 좋아, 내가 빌려준 애가 좋아?”
“둘 다 좋아. 각각 다른 맛이 있으니까. 참! 그래서 말인데 샤샤, 그 노예 오늘 하루 더 빌려줄 수 있을까?”
“어머? 늦게 뜬 눈이 무섭다더니? 물론이지.”
샤샤가 활짝 웃으며 대답한 뒤에 쿠를 보며 말했다.
“너, 아침은 먹었니? 이 과자, 생각보다 별로인데 너 먹으렴.”
한입 먹은 과자를 샤샤가 바닥에 휙 던졌다.
“감사합니다.”
쿠는 그 과자를 주웠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나에게 속삭였다.
“오늘 일 다 하고 나서 나랑 같이 놀러 갈래?”
“저녁에?”
“응, 경매 갈 건데 같이 가자.”
“그래? 알았어. 그럼 얼른 서둘러야겠다. 오늘 할 일이 꽤 되거든.”
“후후, 붙잡을 핑계가 없네. 그래, 저녁에 봐.”
난 자리에서 일어나 쿠와 함께 작업장으로 향했다.
한창 작업을 하고 있는데 쿠가 물었다.
“주인님.”
“……응?”
이거, 안에 마법진이 꽤 무너졌네. 새로 짜서 넣어야 하나? 보수를 해야 하나?
“제 봉사가 탐탁지 않으셨습니까?”
“응?”
“저보다 그 노예가 더 마음에 드신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으응…….”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갑자기 머리에 불이 들어왔다.
뭐라고?
난 그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냐, 쿠의 봉사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하지만, 그가 좋다고 하셨죠. 오늘 저녁에도 부르셨고요.”
“샤샤의 노예니까……. 샤샤 체면도 생각해줘야지.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너에 대한 괴롭힘도 좀 줄지 않았어? 어쨌든 오늘 아침에 쿠키도 주고…….”
“저를 위해 그러셨다면,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제가 원하는 걸 하나도 모르시는 겁니다.”
“……그래?”
난 좀 충격을 받아 그를 보았다. 쿠가 원하는 게…… 뭘까? 난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생각해서…… 팔도 고쳐주고, 검도 선물해주고, 자유까지 주겠다고 했는데…….
왠지 눈물이 찔끔 나와서 난 얼른 고개를 다시 세공품으로 돌렸다. 새빨간 루비가 조명에 반짝였다.
“그랬으면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네.”
“주인님.”
“웅…….”
“주인님.”
“왜?”
울음을 감추려고 퉁명하게 대답하자 그가 내 어깨를 돌렸다. 난 고개를 휙 돌리며 그의 팔을 뿌리쳤다.
“됐어. 나 좀 일하게 내버려둬.”
“울지 마십시오.”
“안 울어!”
그렇게 외치자 눈물이 오히려 왈칵 쏟아져서 난 에이씨 하고 눈물을 훔쳤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그가 애원하듯 날 부르며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무릎에 손을 얹었다.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그냥, 기분이 다운되어서 그래. 스승님 물건을 봐서 그런가 봐. 신경질 내서 미안.”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그가 말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서는 선의로 그러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그가 숨을 가볍게 들이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선의가 저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쿠하힐……?”
“여기까지라고 만족해야 하는데, 치졸한 생각이죠.”
“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뭘 만족해?”
이마를 찡그리며 되묻자 쿠가 웃으며 몸을 일으켜 내 눈가를 핥았다.
“이런 분이니, 저 같은 노예를 곁에 두신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일하십시오, 주인님.”
난 찜찜해하면서도 다시 세공품으로 마음을 돌렸다. 사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이 작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이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더 뿌듯한 것이다.
‘이다음에 쿠에게도 하나 더 선물해줘야지. 이번에는 다른 색으로…….’
애첩이라니. 가지가지 오해할 일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난 왠지 창피해졌다.
샤샤의 지시인지 작업장으로 저녁 식사가 도착했다. 쿠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이 샤샤의 말에 따라 날 데리러 온 것이다. 경매장에 쿠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노예는 출입금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샤샤가 보낸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올리자 쿠가 날 너무 뚫어지게 봐서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해?”
“아뇨,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푸하하, 그거 고마워. 내가 생각해도 정말 옷이 날개야.”
평소에는 바지에 셔츠가 기본 차림이라서 오랜만에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난 쿠의 뺨에 키스해주고 미소를 지었다.
“다녀올게.”
“네.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마차에 올라타자 샤샤가 웃으며 말했다.
“아, 역시 그 색이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에스카는 피부가 하야니까, 분홍색도 어울리지.”
“너만큼은 아니지. 그보다 이렇게 늦게 열리는 경매가 있어?”
“응, 귀부인들만 위한 비밀 경매 같은 거야. 초대장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고.”
그렇게 말하며 샤샤가 눈을 찡긋했다. 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밤길을 경쾌하게 달렸고 30분 후쯤 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비밀 경매라고 하더니만 저택의 불빛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서로 인사하는 소리가 무성한 걸 보니 그렇게 어둠의 경매장까진 아닌 것 같았다.
샤샤도 몇 번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하고 날 친구라고 소개해주었다. 귀족들은 공작 영애의 친구라니 누구인가 싶은 얼굴을 하면서도 내게 예를 갖춰 인사했고 나 역시 정중하게 답례했다.
공작 영애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VIP여서인지 샤샤와 나는 룸으로 안내가 되어 접대를 받았다.
우리 둘은 창문으로 경매장을 내다보며 티타임을 즐길 수 있었다. 경매가 시작되자 희귀한 짐승, 수인족, 장신구, 미술품 같은 것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난 샤샤가 베키를 어디서 구매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 제품은 엘란시아산(産) 오르골입니다!”
엘란시아라는 말에 난 귀가 쫑긋해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는 은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올라가 있었는데, 사회자가 작은 열쇠를 집어넣어 태엽을 감자 상자가 열리고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꽃이 나오면서 동시에 오르골 소리가 흘러나왔다. 봉오리였던 꽃이 점점 벌어지면서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고 전부 열리자 다시 닫혔다. 그리고 그걸 반복하면서 점점 느려지다가 도로 안으로 들어가 상자가 닫히며 오르골이 끝났다.
“어떻습니까? 엘란시아산 오르골이 유명한 건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겠죠? 이 노래는 엘란시아의 동요입니다. 섬세함을 봐서 아시겠지만 천재 오르골 장인인 유우왈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기 쓰인 보석들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자랑합니다. 이 오르골을 5천 페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나 저거 살래.”
쿠에게 선물해주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버튼을 눌렀다. 샤샤가 시시하다는 듯 부채를 팔랑이며 말했다.
“저런 흔해빠진 오르골이 이 경매에 나오다니, 여기 수준도 떨어져가나 봐.”
샤샤의 말마따나 경쟁자는 거의 없다시피 해서 난 8천 페소에 오르골을 낙찰 받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미약이나 최음제 같은 약들이 올라왔는데, 그런 것은 매우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고 샤샤도 눈을 반짝이며 하나를 구매했다.
“어디다가 쓰게?”
“후후, 내 성노예에게. 발정 나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 좋거든.”
“그래?”
난 쿠가 최음제 때문에 괴로워하던 걸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귀족들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낙태약이 경매에 올라와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 끝에 팔려나갔다.
경매가 전부 끝나자 구매한 물건과 함께 다과가 제공되었고, 나와 샤샤는 대금을 치렀다. 샤샤가 검고 작은 나무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보라색 액체가 가득 담긴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나는 나무상자 안에 벨벳에 싸여 잘 포장되어 있는 오르골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이걸로 쿠의 기분이 좀 풀리면 좋겠다. 고향의 물건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다과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길게 하품을 했다.
“졸려?”
“응, 조금.”
내가 눈을 비비며 말하자 샤샤가 내 무릎을 부채로 찰싹 때렸다.
“눈 비비지 마, 눈가에 주름 생겨. 물론 에스카는 주름이 생겨도 귀여울 테지만.”
“그게 뭐야.”
난 웃으며 손을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저택에서 창백한 얼굴의 시종이 달려오듯 걸어왔다.
“저기, 아가씨, 시종들 사이에 문제가…….”
“무슨 일이지?”
샤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세공사님의 노예와 시종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노예가 검을 휘둘러 시종을 해쳤습니다.”
“뭐?”
“어……?”
“이, 무슨! 노예가 건방지게! 어디야?”
샤샤가 물으며 치맛자락을 쥐고 빠르게 걸었고, 난 그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빌어먹을 치마가 길어서 걷는 게 힘들어 나 역시 샤샤처럼 치마를 추켜올렸다.
“쿠가 사람을 해쳤다고?”
당황해 되묻는 내게 시종은 “예.”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난 믿을 수가 없어서 더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기둥에 묶여 있는 쿠가 눈에 띄었다.
“쿠!”
난 놀라 쿠에게 뛰어갔다. 쿠는 얻어맞았는지 눈가와 입가가 찢어지고 엉망이었다. 손끝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죄송합니다.”
쿠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죄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샤샤의 물음에 얼른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차고 있는 검을 한 번 보자고 했는데 거절하기에,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니 저 노예가 검을 뽑아 동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검을 빼어 들고 방어하자 그가 저희 중 둘을 베었습니다.”
“감히, 노예가 내 시종의 명을 거역했다고?”
샤샤가 기가 차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쿠가 말했다.
“전 주인님의 개지, 다른 사람들의 개는 아닙니다.”
“간신히 기사님들이 붙잡았지만 기사님들에게도 상처를 입혔습니다.”
시종이 덧붙인 말에 샤샤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기사의 무력은 어쨌든 가문의 자존심이다. 그 기사가 노예에게 당했다고 하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인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배 속에서 불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검은?”
내가 조용히 묻자 다른 시종이 얼른 내게 검을 가져다 바쳤다.
난 검집을 받아 들고 검을 뽑았다. 그리고 쿠에게로 몸을 돌려 단숨에 줄을 내리쳐 그의 포박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쿠에게 돌려주었다.
“에스카! 기사에게까지 반항했다면 저 노예를 살려둘 수는 없어!”
“쿠는 내 노예야. 쿠에게 모욕을 주는 건 나에게 모욕을 주는 거고, 쿠를 적대하는 건 날 적대하는 거야. 검을 빼앗아? 그 검은 내가 그에게 만들어준 거야!”
내가 목소리를 높여 외치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난 할 수만 있다면 불이라도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샤샤는 내가 화내는 걸 보자 놀라 숨을 삼켰고, 난 이를 악물고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걸 왜 네 시종이 쿠에게서 빼앗지? 네가 시킨 거니, 샤샤?”
“아, 아냐, 난 안 그랬어.”
샤샤가 놀라 고개를 저었고 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샤샤가 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 시선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렸고 난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그냥 넘어가. 난 쿠를 처벌할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
난 말없이 샤샤를 바라보았고, 샤샤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에스카, 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아. 네 노예를 모욕함으로 널 모욕할 생각도 아니었어.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아줬으면 해.”
“고마워, 샤샤.”
난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해주고 쿠를 끌고 내 방으로 향했다. 길을 가며 내가 물었다.
“죽였어?”
“아뇨. 조금, 아프게만 만들어줬습니다.”
“기사는?”
“수가 많지만 않았다면 제가 이겼을 텐데요.”
그 말에 난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바라보았고 내 시선에 그가 싱긋 웃었다.
“얻어맞고도 웃음이 나와?”
“육체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음에 누가 그 검을 보여달라거나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 물건일 뿐인걸. 다음에 또 만들어줄 테니까.”
“싫습니다.”
“쿠.”
“주인님께는 그냥 물건이겠지만 저에게는 아닙니다.”
그 말에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금발 노예를 보고 가볍게 들어가라고 눈짓하고 쿠의 손에 상자를 넘겨주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쿠는 그 자리에서 선물을 열어보았고 오르골을 보고 멈칫했다.
“엘란시아산이래. 나오는 노래도 거기 동요고.”
“네……. 보면 압니다.”
쿠는 입매를 굳히고 오르골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난 당황해 얼른 쿠의 손에서 상자를 가져오려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꿔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쿠는 내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 쿠의 상처를 봐줘야 하는데…….’
하지만 쿠에게 거절당하고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차마 그의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잠시 구급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난 어깨를 늘어트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는 어제의 그 금발 노예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오늘 주인님과 싸우셨다면서요?”
금발 노예의 질문에 난 고개를 저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아니 싸운 건 아닌데……. 아, 맞다. 저기……. 엄청, 음, 그러니까 기분 안 좋을지도 모르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쿠도 노예고…… 너도 노예니까, 난 쿠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자꾸 내가 헛다리를 짚는 것 같아. 자신감이 점점 없어진다고 해야 할까……? 너는 누가 너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면 싫어?”
내 말에 그는 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웃었다.
“글쎄요, 그 선택지는 오지 않을 테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서 모르겠네요. 상상하려고 해도 잘 안 되고요.”
“그래? 쿠도 그런 걸까?”
“그를 자유민으로 만들어주실 생각이신가 보죠?”
“응. 그런데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자기가 필요 없느냐 물어보고……. 아, 그리고 말이야. 이런 말도 했어.”
난 쿠가 작업장에서 했던 이해할 수 없는 말도 그에게 털어놓았다. 오히려 제삼자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방금 오르골 사건까지 말하고 나자 그는 날 빤히 보았다.
“아가씨는 정말로 그를 아끼시는군요. 하지만 아가씨와 그의 방식에 차이가 있네요.”
“그래? 어떤 차이인 것 같아?”
난 베개를 끌어안으면서 경청할 자세를 취했고 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희는 저희가 물건이라는 것을 압니다. 주인님께서 절 총애하고 계시지만, 언제 이게 바뀌게 될지 모르죠. 철 지난 드레스나 장신구처럼요.”
“…….”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물건이 아니라 인간처럼 저희를 대하시고, 그게 저희를 힘들게 합니다. 차라리 철저하게 물건처럼 대해주시는 게 좋아요. 그럼 저희 마음도 그렇게 있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아가씨처럼 상냥한 분이라면 저희도 꼭 마음이 있는 것처럼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희는 마음이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게 저희를 괴롭게 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아가씨는 저에게도 상냥하고 다정한 분이시니 분명 쿠하힐에게 상냥하고 다정하시겠지요.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면 그 이상을 바라게 됩니다. 저에게만 다정하고 상냥하기를 원하게 되죠. 질투와 분노가 일어나고, 노예의 본분을 넘게 되어, 결국 그 노예의 주인은 그 노예를 급히 떨쳐내게 되지요.”
“그럼 쿠가…… 질투를 한다는 말이야……?”
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되물었고 그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에요. 확실한 건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지요. 아가씨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난, 쿠는…… 그러니까…….”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그냥 얼마 뒤면 떠날 사람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소중한 가족 같은 존재라고도…….
“분명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겠죠. 오늘 일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고 금발 노예가 작게 속삭였다.
“그럼 계속 소중하게 생각해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그리고 오르골은, 솔직히 별로였어요. 아가씨.”
“그래?”
“네, 쿠가 고향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오르골은 먹을 수도 없고요.”
그 말에 난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벨을 흔들어 시종에게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야식으로 커다란 파운드케이크 조각과 차, 과자가 들어와 난 금발 노예에게 그걸 권했다.
“먹고 일해야지. 그리고 상담해준 대가야.”
“그러니까 이런 점이.”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는 깨끗하게 전부 먹고 나서 날 마사지해주었다. 이틀 연속인데도 너무 좋아서 결국 마사지를 받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난 쿠와 함께 오래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침부터 밤까지 세공품 수리 보수에 몰두했다. 하루 수면 시간이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면 들어가자마자 픽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샤샤가 몇 번이고 티타임을 권하는 것도 다 거절한 채 일주일 내내 일한 결과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일감을 해치워버렸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향하는데 쿠가 옆에서 부축하며 말했다.
“주인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응? 아냐, 괜찮아.”
“저 때문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냐, 아냐. 그냥 내가 일찍 집에 가려고…….”
“…….”
그렇게 복도에 들어섰는데 거기서 샤샤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난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샤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에스카.”
“응?”
“이제 내가 미워졌어?”
“어?”
“내 얼굴 보기도 싫어? 저 노예가 그렇게 중요해? 내가 미워질 만큼?”
샤샤는 울었는지 눈이 새빨개진 상태였다. 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샤샤가 미워지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데.”
“하지만, 티타임도 계속 거절하고…….”
“일이 바빠서 그랬어.”
“나 안 미워하는 거지?”
“당연하지, 이렇게 귀여운 샤샤를 내가 어떻게 미워해.”
그 말에 샤샤가 활짝 웃으며 날 꼭 끌어안았다.
“심술 부려서 미안해, 친구의 새 장난감에 질투하다니 꼴사나웠지? 미안해, 에스카.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녀가 내 뺨에 눈물 젖은 뺨을 맞댔다. 난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
“샤샤를 미워하지 않아. 자자, 울지 마세요, 아가씨. 그 예쁜 눈이 토끼 눈 되겠어요.”
“응.”
“얼른 돌아가서 자. 내일 저녁 같이 먹자.”
샤샤가 다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를 총총 걸어서 사라졌다. 그녀 뒤에 붙어 있던 시녀가 나에게 인사를 하고 샤샤의 뒤를 따라갔다. 난 어휴,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가면 바로 잘 것 같아서 일단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쿠에게 손짓했다. 이 일주일간 난 그 금발 노예의 말을 잘 생각해보았다. 쿠는 얼른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네, 주인님.”
“쿠,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쿠 혹시 그 금발 노예를 질투했어?”
그 말에 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쿠는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전…….”
“아니, 쿠를 책망하려는 게 아냐. 그게 아니라 나, 걔랑 안 잤어.”
그 말에 쿠가 퍼뜩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쿠 생각이 나서 못 자겠더라. 그러니까 질투하지 마.”
“안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쿠는 팔걸이에 올린 내 손등에 키스했다. 난 쿠의 뺨을 어루만졌다.
“쿠, 그때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말이야.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네. 거부할 권리가 저에게 있다고 하셨죠.”
“응. 그러니까 쿠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쿠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시면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어떻게?”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요.”
쿠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해 내 허벅지를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고 난 쿠의 뺨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안 돼, 수면 부족이라서 너무 졸리단 말이야.”
쿠가 내 양 무릎을 짚고 몸을 내밀어 내 바지 지퍼를 이로 내려 지이익 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질투하는 속 좁은 노예의 응석을 받아주시지 않을 겁니까?”
난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의 이마를 꾹 밀어냈다.
“나 진짜 졸리단 말이야. 나중에 쿠, 응?”
“……죄송합니다.”
쿠가 손으로 내 지퍼를 올려주고 날 안아 들었다.
“침대로 옮겨드리죠.”
쿠가 날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고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사이 난 이미 고개를 가눌 수 없을 만큼 졸리기 시작했다. 쿠는 그런 날 보고 웃더니 내 이마에 키스했다.
“팔베개는 괜찮으십니까?”
“응.”
내 말에 쿠가 얼른 자신의 겉옷을 벗고 침대 안으로 들어와 나를 품에 안았다.
“잘 자, 쿠.”
난 입속에서 웅얼거리듯 말했고 쿠가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하고 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금방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쿠가 옆에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창밖을 보니 해가 꽤 높았다. 시계를 보자 시곗바늘이 이미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난 너무 늦게 일어난 것에 당황해 서둘러 옷을 입고 나왔다.
‘시종이 깨우러 안 왔네? 왜지?’
새벽에 깨워달라고 부탁해놨었는데, 이렇게 늦잠 잘 때까지 방치한 건 이상했다. 난 조심스럽게 시녀 방을 열어봤지만 그곳에도 쿠는 없었다.
시녀 방은 딱 침대와 선반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좁아서 난 쿠에게 이 방이 너무 작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선반에서 내가 선물한 오르골 상자를 발견하고 발돋움을 해서 상자를 내렸다.
‘노래 한번 들어볼까?’
상자를 연 나는 숨을 삼켰다. 상자 안 오르골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은색 파편들이 보석과 섞여 햇빛에 반짝였다.
‘왜……?’
난 멍하니 오르골을 바라보다가 얼른 도로 상자를 닫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다음 방에서 나왔다. 가슴속이 기묘하게 울렁거려서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부쉈지? 부서진 건가? 아냐, 저렇게 산산조각 나려면 완전히 때려 부숴야 해……. 보석들 중에도 부서진 게 있었으니까. 그 선물이 그렇게 싫었나? 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은가……?’
손끝이 떨려서 난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하게 거실을 맴돌았다. 쿠가 돌아오면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양손을 쥐어짜듯이 꼭 쥐었다가 시종을 부르기 위해 벨을 흔들었다. 그에게 쿠가 어디로 간 건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들려온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시종 대신 서 있는 것은 아를이었다.
“아를!”
“안녕, 내 꽃사슴. 잘 있었어?”
“언제 온 거야? 세상에.”
난 웃으면서 팔을 벌렸고, 아를은 날 가볍게 포옹하고 나서 내 코를 툭 쳤다.
“계속 잠도 거의 안 자고 일했다며? 그래서 오늘은 내가 깨우지 말라고 했어.”
“덕분에 완전히 늦잠 잤어.”
“하루 정도는 좀 쉬어도 돼. 그런데 그 노예는?”
“응? 어? 아를이 불렀던 거 아냐?”
“아닌데.”
아를이 눈을 살짝 찡그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아, 쿠?”
“슬슬 기상하실 듯해서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쿠는 아를에게 무릎을 꿇어 인사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두었다. 아를이 웃으며 물었다.
“같이 먹을까?”
“됐어, 나 진짜 막 일어났단 말이야. 씻어야 돼.”
“에스카는 안 씻어도 귀여운데.”
“아, 됐거든요?”
아를은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점심때 보자, 내 에스카.”
“응, 있다가 봐.”
아를이 내게 가볍게 키스하고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고 난 잠시 표정을 정리하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돌아섰다.
“쿠…… 아직 밥 안 먹었지?”
“전 아까 먹었습니다.”
“……그래?”
오르골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일단 쿠의 방에 멋대로 들어가서 물건을 열어봤다는 것부터가 양심에 찔렸다.
난 테이블로 걸어가 쿠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아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쿠, 저기…….”
“네, 말씀하십시오.”
난 포크로 애꿎은 잼을 휘저으며 말했다.
“내게 싫은 점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줘.”
내 말에 쿠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딱히 그런 점은 없습니다만?”
“그래?”
난 그런 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유민이 되게 해준다고 입만 털지 말고 빨리 되게 해줘! 이런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선물만 하지 말고! 이런 걸까……? 하긴 이제 약도 다 끊었고…… 몸도 좋아졌으니까 더 데리고 있을 명분도 없고……. 쿠가 내 노예가 아니라면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을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게 은혜를 갚는다고 봉사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빨리 그만두고 싶을지도 몰라.’
난 한숨을 푹 내쉬고 빵에 잼과 버터를 듬뿍 올렸다.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그나마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었다.
그렇게 와구와구, 잼과 버터를 바른 빵과 설탕을 잔뜩 넣은 차를 속이 느글느글해질 정도로 먹어치우고 나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쿠가 물었다.
“주인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응? 아냐, 아무것도.”
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씻어야겠다며 얼른 세숫물을 부어 얼굴을 씻어냈다. 그러고는 쿠가 도와준다고 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는 말만 남기고 침실로 쪼르르 들어왔다. 쿠의 시중을 받는 게 미안했다.
난 얼른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적당히 묶었다. 작업실로 들어가기보다 오늘은 좀 하늘을 보고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나가는데 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쿠, 꼭 따라오지 않아도 돼. 귀찮잖아.”
그 말에 쿠가 되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제가 귀찮으십니까?”
“응?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따라가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저택을 나와 오랜만에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길을 골라 걷다가 하얀 꽃무리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꽃 말이야. 예전에 반지꽃이라고 불렀어. 소꿉놀이할 때 결혼식용으로 사용했거든. 샤샤가 내 신부를 하겠다고 우겨서 내가 몇 번이나 신랑 역할을 했는데 말이야.”
“……여자분……이시잖습니까?”
“아, 어렸을 때는 남자인 줄 알았대. 지금 내가 생각해도 머리도 짧았고, 착각하기 딱 좋지 뭐. 스승님이 여기 오시면 내 또래 아이들은 아를과 샤샤밖에 없어서 셋이서 항상 이 정원을 뛰어다니면서 놀았어. 뭐 그래도 귀족 아이들이라 옷을 흙투성이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 그 나이 때 이미 검을 잡고 있었는데요.”
“진짜? 하긴 아를도 소양으로 검을 익히는 것 같기는 했어.”
“검술이 훌륭하면, 아버님이 절 인정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죠.”
쿠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라 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대신 반지꽃 무리로 걸어가 꽃을 한 아름 따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쿠.”
흰 꽃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화사했다. 꽃과 잎의 줄기가 달라 화관이나 반지를 만들기 쉬운 꽃이라서 어렸을 때 자주 가지고 논 기억이 있다. 반지꽃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난 얼른 그중 한 송이로 반지를 만들어서 쿠에게 넘겨주었다.
“자, 한 송이는 쿠 가져. 꽃반지.”
쿠는 잠시 멈칫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반지를 받았다. 역시 남자에게 이런 꽃 선물은 좀 그런가.
“아하하, 좀 유치했지? 어차피 시들 텐데, 그냥 돌려줘. 버리자.”
“싫습니다.”
쿠는 내가 내민 손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난 조금 안심이 돼서 미소를 지은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전의 정원은 상쾌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난 말없이 걸으며 팝콘처럼 이리저리 튀는 생각들을 다잡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쿠.”
“네.”
“쿠는 자유로워지면 뭐가 하고 싶어?”
“없습니다.”
“어?”
난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쿠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고 싶은 게 없습니다.”
“여행이 하고 싶다든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든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운을 떼었지만 쿠는 잠시도 틈을 두지 않고 답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그래? 왜?”
“저야말로 왜 가야 하느냐고 묻고 싶군요.”
“그야 여행 다니면 예쁜 것도 많이 보고, 바닷가 백사장이라든가……. 노을 지는 풍경 같은 것도 그렇고.”
“모르겠습니다.”
“어?”
“주인님께서는 그런 것들이 아름답다고, 예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제 감각으로는 봐도 잘 모릅니다. 그 꽃도 주인님께서 아름답다고 하니까, 그제야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쿠는 한참 말하다가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든 사람처럼 이마를 찌푸리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한숨과 함께 이어 말했다.
“저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훈련이 시작할 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삶의 기쁨을 되새겨보던 때가, 있었던 것 같군요.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 여행은 저에게는 별 의미가 없군요.”
“쿠…….”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황망히 쿠를 바라보았다.
뭔가 그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않는 부분인 것 같아서 초조감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쿠가 손을 들어 내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하지만 호박색이 아름답다고는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쿠가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투명한 금색에 홀려서, 이성을 잃을 만큼…….”
그는 말을 멈추고 손을 내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쿠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고 난 뭐라고 하려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다시 걷기 시작했다. 쿠는 하루치는 다 말했다는 듯이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정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종에게 발각되었다.
“아가씨,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맞다. 아를이 같이 식사하자고 했는데.”
“네, 그 꽃은 제가 화병에 옮겨드릴까요?”
생기를 잃고 좀 시들시들해진 반지꽃 다발을 보며 시종이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그의 안내를 받아 점심이 차려진 곳에 도착했다. 세 명으로 구성된 악단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어서 금방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아를이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날 의자에 앉히고 물었다.
“산책은 잘 했어?”
“응, 옛날 생각 많이 했어. 반지꽃 아직도 피더라.”
그 말에 아를이 웃고는 말했다.
“아, 어렸을 때 샤샤의 결혼 놀이에 억지로 어울려주던 기억이 나는걸? 내가 결혼식을 망쳐버려서 샤샤가 운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도 넌 장난꾸러기였어.”
난 그렇게 말하고 접시를 내오는 시종들에게 잠깐 눈을 돌렸다가 다시 아를을 보고 물었다.
“참, 결혼은? 결정했어?”
“아직, 아직.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정하는 건 결국 델루치아 공작가야. 미룰 수 있을 만큼은 미룰 거야. 그러니까 빨리 나와 결혼해줘. 이 컵케이크 아가씨야.”
“내가 소중하니까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놀리듯이 말하자 아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불티는 기억력도 좋네. 정말 모순이지. 청혼하면서도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하다니.”
아를이 그렇게 말하고는 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원래 감정이라는 게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런데 귀여운 아가씨.”
“그 쓸데없는 호칭은 좀 빼고 불러줬으면 하는데, 아를…….”
“뭐 어때?”
“그래, 그래. 그래서 왜?”
“네 노예 말이야, 계속 부릴 거야?”
“응? 아니……. 왜?”
“검술 실력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래서 나에게 팔면 자유민으로 승격시키고 시종으로 쓸까 하고. 아니면 더 올려줄 수도 있어.”
“정말?”
델루치아 공작가의 시종이라면 자유민으로써도 꽤 괜찮은 자리다. 잘하면 준귀족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응, 공작가의 기사로 삼아준다거나?”
그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예에서 기사라니 말도 안 될 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어쨌든 실력이 중요한 거니까.”
아를이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으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난 당장 “우와! 쿠! 기사래!”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쿠의 손을 맞잡고 외치고 싶은 걸 참으며 구운 야채를 썰었다.
“생각해줘서 고마워, 아를. 쿠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음……. 조금 생각해보고 결정해도 될까?”
엘란시아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물론이지. 하지만 더 좋은 조건은 없을걸?”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마워, 아를. 정말로.”
“내 에스카의 기분이 좋아진다면야 이 정도는 간단하지.”
난 웃으며 아를과 기분 좋게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에 오면 항상 살이 쪄서 돌아간다니까. 너희 요리사는 요리를 너무 잘해.”
“요리사에게 보너스를 줘야겠군.”
“배불러서 힘들어. 이러다가 옷이 하나도 안 맞게 되면 어쩌지?”
“난 좀 통통한 게 좋아. 만지는 맛도 있고. 하지만 그게 걱정되면, 춤출래요? 내 아가씨?”
아를이 손을 내밀었다.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손을 잡고 서자마자 악단의 연주는 왈츠로 바뀌었고 난 그런 그에게 속삭였다.
“이러려고 일부러 악단 데려오고 맛있는 음식도 준비한 거지?”
“이런, 내 꾀꼬리는 눈치도 좋지. 맛있는 음식과 분위기가 있으면 넘어온다고 하던걸?”
그렇게 말하고 아를이 내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왈츠를 추는 게 오랜만이어서 난 몇 번이고 아를의 발을 밟았지만, 아를은 내색도 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겼다. 미안하니까 내 발을 밟으라고 말했더니 그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좋아해, 에스카 블란테. 내 친우, 내 소중한 아가씨야.”
“나도 좋아해, 아를.”
“그런 의미에서 내 엄청나게 짜증 나는 사촌에 대해 좀 들어줘 봐.”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좋아. 그 짜증 나게 남 앞에서는 훈훈한 형제 노릇하는 개싸가지 말하는 거지?”
내 말에 아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정사라면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지라 훤하게 알고 있다. 겉으로는 다들 하하호호 하면서도 물밑에서는 어찌나 지팡이로 서로의 발을 찔러대는지, 내가 그런 곳에 있었다면 정신병에 걸렸을 거라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 곳에서 가주로 군림하는 아를을 보면 존경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어릴 때처럼 정원으로 내려가 돗자리를 깐 다음, 아를은 앉고 나는 누워서 이야기를 했다. 거의 일방적으로 아를이 토해내고 난 저런, 나쁜 놈, 어허,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아를은 속이 시원해진 듯했다.
“나만 떠들었네.”
“괜찮아, 나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라 재미있기도 했으니까.”
“내 불행이 내 아가씨의 재미라니, 서글퍼지는걸.”
이미 누워 있는 내 옆에 아를이 눕더니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팔을 뻗은 아를이 나를 잡아당겨 품에 꼭 안았다.
“에스카.”
“아를, 숨 막혀.”
“아, 내 귀여운 컵케이크 아가씨가 결혼하면 어떻게 하지?”
“안 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빨리 시집간대. 결혼한다고 하면, 신랑은 몰래 사고로 죽이고 슬퍼하는 미망인인 에스카를 내 첩으로 앉혀야지.”
“아를!”
난 항의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뒤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등을 주먹으로 팡팡 두들겼다. 아를은 정말 숨 막힐 정도로 날 꽉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놀고 싶은데. 아아, 내 에스카랑 놀 시간도 없다니, 이놈의 가주도 할 게 못 돼.”
“또 일이야?”
“이쪽은 일과 사교의 구분이 없지 뭐.”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가볍게 털었다. 아를은 아쉬운 듯 작별의 키스를 하고 정원을 나섰고, 난 쿠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작업장 가려면 옷 갈아입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침실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쿠가 날 끌어안았다.
“쿠?”
“아까 절 공작에게 넘겨주실 줄 알았습니다.”
“응? 아 참. 기사직 말이야……. 쿠는 어때……?”
“싫습니다.”
“싫어?”
그를 돌아보려는데 쿠가 돌아서려는 날 막고 목덜미에 키스하며 드레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난 당황해 물었다.
“기사가 되는 건…… 파격적인 조건이야, 델루치아 공작가의 기사단은 여기서 꽤 유명하기도 하고.”
쿠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내 드레스를 벗겨내고 안에 입은 네글리제까지 벗겨낸 다음 내 머리를 풀었다.
“춤을 잘 추시더군요, 주인님.”
“쿠?”
쿠는 가터벨트에 스타킹을 신고 있어서 화장실 갈 때 편하도록 끈으로 묶는 팬티를 입은 내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기사가 되면 더 이상 주인님을 보지는 못하겠지요.”
“응? 나 여름마다 공작가로 돌아오니…… 읏, 하아…… 잠깐, 쿠…… 이야기…….”
쿠가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왔다. 난 저절로 허리가 꺾여 그의 팔을 잡았다. 쿠가 그런 날 안아 들어 침대에 내려놓고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쿠는 내 허벅지를 벌리고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흐윽 하고 몸을 움츠리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앙, 말…… 못…… 흐윽, 쿠…… 그만…….”
허리를 틀며 쿠의 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쿠는 양손으로 내 허벅지를 잡아 고정한 채 절정에 이를 때까지 날 밀어붙였다. 나는 몸을 아치 모양으로 휘면서 절정에 달했다.
내 떨리는 허벅지 안쪽에 키스한 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입술을 핥았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난 으, 신음을 내며 옆에 있는 베개를 쿠에게 휙 던졌고 쿠는 말없이 베개를 맞았다.
“나가!”
난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쿠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침실에서 나갔다.
‘나쁜 놈! 내가 싫다고,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
난 침대에 다시 털썩 누웠다. 절정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솔직히 좀 모자란 기분도 들었다. 난 내 손가락을 슬슬 다리 사이에 가져가 보았다. 직접 손가락으로 해보는 건 처음이라 스스로도 서투른 손가락 움직임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열심히 자기 위안을 해보았고 난 발끝을 움츠리며 가벼운 절정에 올랐다.
‘그래도 좀 모자란 기분인데…… 뭐, 이 정도면 그냥저냥…….’
손가락과 다리 사이가 완전히 애액으로 끈적거려서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적셔 손과 다리를 닦아냈다.
‘으, 쿠. 허벅지 안쪽에 키스마크를 남겼잖아?’
성노예는 주인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게 엄금이니 이건 일부러 한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쿠는 성노예가 아니잖아. 아니니까……. 잠깐, 잠깐, 잠깐, 에스카 블란테.’
잠깐.
쿠가 성노예가 아니라면 지금 내가 쿠랑 하고 있는 건 뭐야?
아니면 나는 쿠가 성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봉사 받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걸까?
형식적으로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지만, 남들이 보면 시종과 주인의 관계 쪽에 더 가깝다. 시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에게 봉사할 수 없고 하지도 않는다.
“…….”
쿠가 노예가 아니면 이건 봉사가 아니라 정사…….
‘하…… 하지만 그건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거잖아……!’
연인.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난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 기분이었다.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가 난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도 마, 에스카. 쿠는 언젠간 떠날 사람인걸.”
난 다시 신세계의 문을 닫았지만, 한 번 열었던 풍경은 머릿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난 재빨리 다른 걸 생각하려 애썼고, 곧 부서진 오르골이 떠올라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이나 하러 가야겠다.’
난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저녁에 샤샤의 시종이 와서 부를 때까지 일에 열중했다.
샤샤는 불을 가득 밝힌 정원에 저녁 만찬을 준비해두었다. 기합도 단단히 들어갔는지 식사 사이사이에 나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샤샤. 나 마음 다 풀렸으니까.”
“정말? 저기, 에스카 이거 줄게.”
“이거?”
샤샤가 시종에게 눈짓하자 시종이 나에게 상자를 가져다주었다. 난 그 상자만 봐도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산 최음제잖아?”
“응, 내가 좀 써봤는데, 내 취향은 아니라서…….”
난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거절하기도 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 내 뒤에 서 있는 쿠에게 상자를 건넸다. 샤샤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게 진짜 한 방울만 써도 효과는 엄청 좋은데…… 부작용이 있어.”
“부작용?”
“응, 다음 날 기억을 못 하더라고. 기억을 하고 있어야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할 텐데……. 뭐 그거 쓰는 것만으로도 꽤 즐겁기는 하지만 말이야. 효과는 내가 보장할게.”
“고마워.”
“왠지 기운 없어 보여. 괜찮아?”
“오늘 물건 고치는데 말이야……. 괘종시계 알지?”
“응.”
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커다란 괘종시계는 인식해놓은 델루치아 가문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면 비상통로로 순간이동을 시켜주는 탈출 장치다. 크고 복잡한 장치인데 스승님이 제작하신 물건이었다.
“보수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더라……. 이제 정말, 스승님의 물건도 몇 개 안 남았어.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니 왠지 좀, 슬퍼져서.”
“에스카에게는 내가 있잖아.”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하는 샤샤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네, 샤샤가 있지.”
하지만 만남도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야, 샤샤. 만약 네가 결혼하면 아마 우리는 거의 얼굴을 못 보는 사이가 되겠지.
“샤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도 난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만남 안에,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무수한 반짝임이 있으니까 소중히 여겨야지.
“그럼 우리 건배할까?”
샤샤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우리의 우정을 위해!”를 외치고는 와인 잔을 비웠다. 우리는 분위기에 취해 계속 술을 마셨고, 다섯 병을 연달아 비우고 나서야 다리가 휘청이는 걸 느꼈다. 샤샤는 “에스카랑 화해해서 다행이야.” 하고 엉엉 우는 술주정을 하다가 시종에게 업혀서 들어갔다.
술기운에 어질어질해진 나는 쿠의 부축을 받으며 정원 길을 걷다가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결국 쿠가 비틀거리는 날 안아 들었다.
난 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목을 양팔로 꼭 안았다.
“쿠.”
“네.”
“나 쿠랑 만나서 다행이야.”
“이런 짐 덩어리와 말입니까?”
난 쿠의 등을 찰싹 때렸다.
“쿠는 짐 덩어리가 아냐. 쿠는…… 쿠는 내 소중한 가족이야…….”
난 열이 오른 뺨을 그의 옷자락에 비볐다. 서늘한 기운이 뺨에 전해졌다.
“쿠.”
“네.”
“쿠.”
“네.”
“쿠하힐.”
“네, 주인님.”
“에헤헤헤.”
쿠가 고개를 돌려 내 머리에 키스해주고 속삭였다.
“주무십시오.”
난 눈을 감았고 반쯤 잠든 내 귓가에서 쿠가 작게 뭐라고 말하는데 잘 인식할 수가 없었다.
“……도 당신과 그렇게…… 춤을…….”
대신 나는 꿈을 꿨다.
기사 차림을 한 쿠와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왈츠를 추는 꿈이었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해둔 덕분에 난 나머지 일들은 느긋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여유가 있어서 샤샤랑 아를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샤샤는 내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내 팔짱을 꼭 끼었다.
“저기, 에스카.”
“응?”
“그때 쿠와 싸웠던 기사들 말이야.”
“응.”
“쿠랑 다시 대련해보고 싶다는데…….”
내가 엑 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자 샤샤가 열심히 변호하듯 덧붙였다.
“그야, 노예에게 당했으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그런가 봐.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대.”
“하지만.”
난 쿠를 돌아보았다. 쿠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 결국 난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별장에는 따로 연무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 잔디밭에서 싸우게 되었다. 난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샤샤는 여유롭게 부채를 부치며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 있었다.
쿠와 기사는 서로 마주 보고 인사를 한 후 검을 빼 들었고, 간격을 좁히며 빙글빙글 돌다가 검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검날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눈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둘의 결투를 지켜보았다. 쿠의 목이 찔린다 싶다가도 쿠가 검을 한 바퀴 돌리니 쿠의 검이 상대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기사가 검을 떨구며 항복의 의사를 표명하자 쿠가 가볍게 검을 아래로 내렸다.
“다음.”
노예의 건방진 어투에 발끈한 기사들이 앞다투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쿠의 등짝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입술을 깨물며 참고 계속 이어지는 대련을 봐야만 했다. 점점 칼놀림은 과감해져서 팔이나 다리에 가벼운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쿠도 기사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아보니 샤샤도 여유로운 얼굴이라서 난 나만 초조한가 싶었다.
‘왜 난 이렇게 간이 작을까.’
하지만 대련하는 동안 쿠는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이길 때 떠오르는 남 열 받게 하는 건방진 미소 때문에 난 막지도 못한 채 끙끙거리면서 이러다가 심장병이 생기겠다고 중얼거렸다.
마지막 대련은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한눈에 봐도 실력이 거의 비슷한 싸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쿠의 얼굴에서도 그 기사의 얼굴에서도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한 발이라도 아차 하면 큰 부상이나 죽음으로 이어질 아슬아슬한 검격이 계속되었다.
둘은 서로 깊게 베고 베이면서도 항복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짝짝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그만하지.”
“아를.”
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며 아를에게 걸어갔다. 아를은 내 이마에 키스하고 쿠와 기사를 돌아보았다.
“내 얼굴을 봐서 검을 내리게, 이스 경.”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이스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에 따라 쿠도 곧 검을 넣고는 이스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아를이 쿠에게 말했다.
“이스 경과 비등하다니 검 실력이 놀랍군. 내 기사단에 오지 않겠나?”
직접적인 스카우트로 인해 기사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쿠가 그런 아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만, 제 주인은 에스카님이십니다.”
“에스카 생각은 어때? 아직 결정 못 내렸어?”
아를이 내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 난 아까 낮에 쿠가 싫다고 한 대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당분간은 사양할게.”
“그래? 하지만 언제까지 내 꾀꼬리의 노예로 있을 수는 없을 텐데.”
“응, 안 그래도 자유민으로 만들어줄 예정이야. 그다음의 일이야, 쿠가 결정하는 거고.”
내 말에 아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렇군. 그럼 그때는 내 제안을 생각해보게, 쿠하힐.”
쿠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를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다들 대련을 하느라 수고했으니 내가 특별히 술과 음식을 내리라고 말해두지. 마시고 푹 쉬시게.”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인사를 했다. 아를은 내 허리를 감싼 채 샤샤에게로 다가갔다. 샤샤가 뚱하니 아를을 보다가 얼른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에스카는 내 거야.”
난 둘의 손에서 몸을 빼냈다.
“난 내 거야. 그리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쉴래. 심장이 너무 무리했어.”
쿠의 상처도 봐줘야 하고, 라는 말은 일단 두 남매 앞에서는 하지 않았다. 샤샤가 그런 나에게 속삭였다.
“언제 자유민으로 만들 거야?”
“음……. 이제 곧.”
“그렇구나……. 저기, 에스카.”
“응?”
“내가 준 약 말이야…….”
“아, 응. 잘 가져다 놨어. 왜? 돌려줄까?”
그 말에 샤샤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무슨 약?”
아를이 의아한 듯 물었다.
“노예에게 먹이는 최음제.”
“그런 약을 왜 줘?”
“그냥, 사과의 표시로.”
아를은 살짝 눈썹을 추켜올렸다가 샤샤의 뺨을 가볍게 꼬집은 다음 손을 내렸다.
“그럼 남매 둘이서 사이좋게 노세요. 난 퇴장할 테니까.”
“아, 에스카 정말로 가는 거야?”
“아쉽네, 난 이제 도착했는데.”
“둘 다 내일 놀아, 내일.”
난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고는 치료사 앞에 줄 서 있는 기사들 쪽으로 다가갔다. 노예 신분인 쿠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한쪽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서 있는 쿠를 향해 욕을 하거나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고 눈이 마주치자 바닥에 침을 뱉었다. 진심으로 쿠를 증오하는 게 느껴져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쿠하힐.”
난 짐짓 화난 얼굴을 하며 쿠를 보았다.
“이겼으니까요.”
“하지만 다쳤잖아.”
“이런 건 부상 축에도 못 낍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 어디가 부상 축에도 못 낀다는 거야?”
“진짜 괴로운 건 이런 게 아닙니다. 이런 건 그냥 영광의 상처죠. 하지만 확실히, 공작의 기사단은 수준이 높기는 하군요. 저와 검을 겨룰 상대가 있을 줄이야.”
난 밑도 끝도 없이 오만한 그의 말에 입을 떡 벌렸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지금 당장 칼부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쿠는 전혀 신경도 안 쓴다는 얼굴이라 기가 찼다.
‘하긴 국경에서 유명한 기사라 했었고.’
이런 그가 팔을 못 쓰게 됐었다니, 그건 분명 엄청나게 절망적인 일이었겠지. 난 그의 팔에 아직 깊게 남아 있는 두 개의 흉터를 생각했다. 깊게 난 그 상처는 평생 동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외의 자잘한 상처들 역시도 상당했지만 말이다.
난 말없이 소맷자락으로 그의 뺨의 상처를 눌렀고, 쿠는 흠칫했다가 얌전히 내 손에 몸을 맡겼다. 흐르는 피는 대충 닦아냈지만 다른 곳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잘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치료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치료사는 쿠의 팔과 허벅지, 뺨에 난 상처에 지혈제를 뿌리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팔에는 꽤 깊게 상처가 나서 여덟 바늘이나 꿰매고 붕대로 감아야 했다. 난 으으 하고 몸을 떨며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는 있었지만 쿠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쿠는 그런 내 행동을 재미있다는 듯 보면서도 먼저 손을 놓지는 않았다.
나는 치료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을 꺼냈다.
“쿠, 아까 즐거워 보이더라.”
“그랬습니까?”
“응.”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거겠죠.”
“쿠는 검술도 잘하는데…… 그 실력이 아깝잖아. 여기 기사단은 어때……?”
쿠가 엘란시아로 떠나버리면 너무 멀어서 다시 볼 수 없겠지만, 여기서 공작가 기사단에 들어간다면 가깝고 교류도 많으니까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내 욕심에 슬쩍 쿠에게 기사단을 권해보았다.
“주인님은, 제가 주인님을 떠나길 원하시는 거군요.”
“그야 그렇지.”
노예보다야 자유민의 인생이 훨씬 좋잖아!
쿠의 검술 실력을 보고 나니 더더욱 내 옆에서 노예로 부리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검술 실력이 괜찮지 않았습니까?”
“엄청 훌륭했어.”
엄지를 치켜드는 내 모습에 쿠가 살짝 기쁜 얼굴을 했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제가 떠나길 원하시는군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오히려, 더더욱!
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다시 한 번 공작가 기사단에 들어가라고 권해볼까 하다가 너무 내 속만 챙기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흘 뒤 공작가에서 해야 할 일이 모두 다 끝났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샤샤는 더 머물러 있으라며 졸라댔다. 하지만 난 겨울에 한 번 더 오겠다고 그녀를 달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쿠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그리고 쿠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단둘이 보내고 싶기도 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