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아를 (2/16)

2. 아를

“……인님, 주인님.”

날 흔드는 손에 난 으으? 하고 눈을 떴다.

“누가 온 것 같습니다.”

“우응……? 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서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쿠가 말했다.

“한둘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입니다. 마차에 말에…….”

“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일으켰다.

“뭐야? 지금 몇 시야?”

“꼬박 스물네 시간 주무셨으니 31일 아침이군요.”

“아를이야.”

난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쿠에게 말했다.

“쿠는 환자니까 누워 있어도 돼. 엄청, 성가신 녀석이거든.”

“괜찮습니다.”

“그럼 옷 챙겨 입고 나와!”

내 방으로 날듯이 뛰어 들어가서 구깃구깃해진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빗어서 묶고 대충 세수를 하는데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거실로 나갔다.

문을 열자 평소대로 슈트에 실크해트, 외투와 지팡이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를이었다.

샤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입은 옷은 곧 유행한다던데, 난 그의 옷차림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십분 이해됐지만 동시에 안타까웠다.

‘아를은 뭘 입어도 멋져 보일걸.’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에 아이덴티티와도 같은 반짝이는 은발과 보라색 눈동자. 그가 눈길만 줘도 여자들이 쓰러진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아를은 나를 확인하자마자 날 휙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에스카 블란테, 내 날개, 소중한 아가씨, 잘 있었어?”

“응, 잘 있었어. 그리고 애도 아닌데 이거 그만해.”

그 말에 아를이 하하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날 내려놓고는 으르렁거렸다.

“너 얼굴이 뭐야? 왜 이래? 어떤 개새끼야?”

“실수로 다친 거야.”

“그 거짓말 진짜야?”

“실수 맞아. 예측하고 피했어야 했는데 못 한 거니까.”

“누군지 말해봐, 그 자식 팔을 벽난로 속에 찔러 넣어줄 테니까.”

“이번에 산 내 노예. 그리고 쿠에게 그런 짓을 했담 봐라, 너부터 벽난로 속에 처넣어질 줄 알아, 아를 카스테 델루치아.”

아를이 손에 든 지팡이 손잡이로 가볍게 자신의 실크해트를 밀어 올리고 고개를 숙여 내게 키스했다.

“복수를 원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할 거면 내가 내 손으로 해.”

“그야 그렇겠지, 내 불꽃 아가씨. 그나저나 여전히 폐소공포증에 걸릴 만한 곳에서 잘도 사네. 그거 알아? 이 집이 우리 집 현관만 한 거?”

“알고 있어. 너무 크면 청소가 힘들어서 싫어.”

아를은 다시 웃고 모자와 망토를 벗어서 자신의 시종에게 건넸다. 항상 올 때마다 한 무리의 시종들을 거느리고 오는데, 그 덕분에 집이 더 좁게 느껴졌다. 아를이 소파에 앉아 시종에게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줄줄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먹고 싶다고 했던 거. 초콜릿, 마카롱, 롤케이크, 홀케이크, 쿠키, 머핀, 사탕 그 외 기타 등등.”

“아, 고마워, 아를! 부엌에 가져다 놔주세요.”

시종들이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부엌 식탁 위에 차곡차곡 상자를 쌓아 올렸다. 아를이 자신의 시종 겸 호위만 남기고 나머지는 나가라고 명령하자 그제야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에스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너도, 아를. 샤샤는 어때?”

“샤샤도 잘 지내지. 널 보고 싶어 해. 언제 한번 우리 영지에 놀러 와라.”

“알았어. 시간 나면 갈게.”

“약속한 거다?”

아를이 보라색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쿠가 방 안에서 나왔다.

“주인님.”

아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이게 새로 샀다는 그 노예야?”

“응.”

“흐음.”

아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쿠를 보자 쿠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의 친구분께 인사드립니다.”

아를이 자리에서 일어나 쿠에게 다가가 지팡이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예고도 없이 지팡이로 그를 후려쳤다.

“아를!”

난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를의 팔을 붙잡았다.

“네 주인을 상처 입힌 벌이야.”

“달게 받겠습니다.”

“뭘 달게 받아! 아를, 너 미쳤어?! 으아아! 쿠, 피가 나!”

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쿠의 이마를 눌렀다.

“쿠?”

아를이 눈을 찌푸리고 되물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쿠하힐의 이름을 이 자식한테 준 거야? 닮은 거는 눈 색이랑 머리색밖에 없는데?”

“그야 당연하지. 종족이 다른데!”

“그나저나 키우던 개 이름을 노예에게 붙이다니, 너도 악취미다. 에스카.”

난 당황해 쿠를 보았다가 아를을 돌아보고 말했다.

“쿠하힐은 그냥 개가 아냐, 아를. 내 가족이었어. 날 지켜주다가 죽었고.”

“하지만 얜 쿠하힐이 아냐. 죽은 존재는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까.”

“나도 알아.”

쿠가 손수건을 붙잡고 내 손을 밀어냈다.

“주인님의 가족을 닮았다면, 제 쪽이 영광이죠.”

난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로 쿠하힐을 닮아서 쿠를 데려온 거라서, 더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 개와 같은 이름을 붙여줬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난 쓰게 웃으며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족해?”

아를을 노려보며 말하자 아를이 내 팔의 붕대를 툭 건드리고 말했다.

“조금.”

“난 널 당장 집 밖으로 쫓아내고 싶어.”

“화났구나.”

아를이 묘하게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널 다치게 한 놈은 고의든 아니든 내가 내버려두지 않아. 그러니까 그걸 생각해서라도 스스로 몸을 소중하게 여겨, 나의 에스카 아가씨. 오늘은 화났다고 하니까 내일 다시 올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았고, 아를은 그저 다시 웃고는 집에서 나갔다. 침묵이 거실 안에 흘렀다.

난 어떻게 쿠를 봐야 할지 몰라서 그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그래, 사과를 하자. 사과를…….’

“히이익?”

갑자기 손가락을 핥는 느낌에 난 깜짝 놀라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쿠가 내 손을 핥은 것이었다.

“쿠…… 쿠?”

“멍.”

화났구나!

난 쿠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안! 그게, 그런 뜻이 아니었어!”

“개를 원하시는 거면 기꺼이 개가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히이익!

“아니, 진짜 미안해, 다른 이름으로 정하자, 아니 정해, 응? 마음대로, 네가 원하는 이름으로 고른 다음에 알려줘.”

“하지만 제가 그를 닮아서 데리고 온 건 사실이시죠.”

“그건…… 응……. 그러니까……. 응, 맞아……. 미안…….”

목줄을 하고 있는 걸 보는 순간 쿠하힐이 떠올랐다. 의식한 것이든 무의식에 벌인 일이든 그것 때문에 데려온 건 사실이니까.

“그럼 바꾸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싫잖아…….”

“싫지 않습니다.”

그 말에 난 그제야 조심조심 쿠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쿠의 입꼬리에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살짝 스치듯 지나가서 긴장이 풀렸다.

그때 쿠가 고개를 숙여 내 뺨을 핥았다. 놀라 몸을 뒤로 빼는데, 그가 내 양팔을 잡고 고정한 다음에도 계속 핥아서 난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잠깐, 쿠 그만해, 핥지 마~.”

“개는 사람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여…… 역시 화난 거잖아!”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 그치만.”

반응이 아무래도 화난 것 같은데? 아닌가? 맞나? 잘 모르겠……?

“……!”

쿠의 혀가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난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쿠 역시 눈을 뜨고 있어서 난 쿠가 내 반응을 살피듯 내 눈을 보며 혀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쿠가 혀를 빼고 날 놓아준 후 말했다.

“개는 뭘 잘 모르니까요.”

그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나는 소파에 있던 쿠션을 집어다가 쿠를 팡팡 두들기기 시작했다.

“쿠하힐! 너 진짜!”

그러다가 쿠가 또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맞고 있으니 금방 미안해졌다. 쿠션을 도로 소파에 던지고 쿠 앞에 앉았다.

“정말로 괜찮아?”

“쿠하힐이 주인님의 가족이라고 하셨죠.”

“응, 엄청…… 소중한 존재였어.”

“제가 그를 닮았기 때문에 데리고 온 거고요.”

“응.”

“그럼 전 제 머리와 눈 색에 감사해야겠군요. 안 그랬으면 다른 사람에게 팔리거나 조련장으로 돌아갔을 테니까요. 게다가…….”

“게다가?”

“아닙니다. 다음에 그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듣고 싶군요.”

“어, 응…….”

“그리고 아까 그분은 누굽니까?”

“아, 아를? 내 소꿉친구……야. 저래 봬도 공작. 델루치아 공작가와는 스승님 대부터 인연이 있었거든. 상회를 끼지 않고 물건을 사고파는 직거래니 서로 이익이지. 미안해, 하지만 근본이 나쁜 녀석은 아닌데.”

“주인님께 상처 입혔으니 처벌은 당연합니다.”

“고의도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당연하지 않아. 하여간 감정적인 놈이라니까. 연고 발라줄게, 이리 와.”

난 쿠의 손을 잡고 일으켜서 부엌으로 데려갔다.

“샤샤라는 분은, 그분의 아내인가요?”

“응? 그사이에 그건 또 언제 들었어? 아냐, 샤샤는 아를의 여동생. 엄청 미인이야. 아를이랑 똑같이 은발에 보라색 눈인데 새초롬한 타입의 미인. 아를과 함께 있으면 황홀할 정도로 미남 미녀 남매지.”

“…….”

아를의 시종들이 갖다 놓은 가지각색의 상자들이 부엌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 있어서 난 싱크대에 구급상자를 올려놓고 연고를 꺼내 쿠에게 발라주었다. 찢어진 이마에 흉터가 남을지도 몰랐다.

아, 진짜, 아를 이 자식.

“내가 까먹어도 잊지 말고 꾸준히 약 발라. 흉터가 안 남아야 할 텐데…….”

“이 정도는 흉터가 남아도 괜찮습니다.”

“음, 앞머리 내리면 가려지니까…… 다행이야.”

그다음으로는 테이블 위에 널린 상자들이 눈에 걸렸다.

“그럼 일단 이것들부터 정리하자. 쿠, 케이크 좋아해? 아를이 가져다주는 케이크는 다 최고급품이라서 엄청 맛있어.”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뭐야.”

난 웃고 쿠가 화나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케이크들을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집어 먹은 쿠키는 진짜로 맛있어서, 난 아를에 대한 화가 쪼끔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화덕에 주전자를 올려 차를 끓여내고 쿠 앞에 찻잔과 케이크를 밀어주었다.

“난 말이야, 원래 거리의 아이였어.”

그 말에 쿠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난 헤헤 웃고는 턱을 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쿠하힐의 새카만, 윤기가 흐르는 검은 모피와 푸른 눈동자.

“그런데 좀 덜떨어져서 말이야. 다른 아이들 무리에 끼지 못했는데, 쿠하힐이 날 돌봐줬어. 왜인지는 나도 몰라. 난 들개가 무서워서, 그냥 빵을 나눠준 것뿐인데. 쿠하힐은 그 뒤로 내 곁에 계속 붙어 있었어.”

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웃었다.

“아마 쿠하힐이 보기에도 내가 상당히 못 미더웠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 난 쿠랑 계속 함께 있었어. 오히려 인간 아이들과는 더 멀어졌고 쿠하힐과 하루 종일 붙어 있었지. 겨울에 살아남은 것도 쿠가 나와 붙어 있어줬기 때문이야. 안 그랬으면 죽었을걸. 나에게 돌 던지는 아이들도 쿠하힐이 쫓아줬고, 음식도 나눠줬으니까.”

난 쿠하힐과 똑같은 쿠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 지금에 와서는 인간인 쿠의 눈이 더 어둡다는 걸 깨달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쿠하힐이 인간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게 처음으로 애정을 준 건 쿠하힐이었어.”

개에게 사랑을 배웠다고 하면 사람들은 분명히 웃을 테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쿠하힐이 갑자기 짖는 거야. 난 놀라서 잠에서 깼고……. 어두운 골목에 덩치 큰 남자가 칼을 들고 서 있었어. 나중에 스승님의 말을 들어보니 거리의 아이들을 강간한 다음 살해하는 범죄자였던 모양이야.”

난 쓰게 웃고는 찻잔을 톡톡 두들겼다. 여기서부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하기가 힘겨웠다.

“쿠가 그를 물었어. 그러니까 그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서 쿠하힐을 칼로 찔렀어. 몇 번이나, 계속해서. 나도 비명을 질렀어. 질렀다고 생각해. 그런데 쿠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도망가!」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

그리고 난 슬쩍 쿠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상하지? 개니까, 사람의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들려왔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쿠의 말에 난 애써 웃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난 도망쳤어. 비명을 지르면서 쿠를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그러다가 스승님과 만나게 된 거야. 스승님은 내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주셨고 난 울면서 매달렸어. 그리고 스승님은 날 안아 들고 그 골목으로 향했지. 그 골목에서는 막 그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칼을 들고 나오고 있었어. 스승님은 그 남자를 보고 바로 주저 없이 베어버렸지.”

“베었다고요?”

쿠가 의아한 듯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은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으셨거든. 마법은 소란스러우니까 검으로 처리한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아. 그리고 스승님이 날 내려놓자마자 난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 그리고 거기에는 쿠하힐이…….”

난 말을 멈췄고 쿠가 내 손을 잡았다. 그 뜨겁고 단단한 손에 난 길게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피가…… 엉망이었어. 내장이 다 흘러나와서, 달빛에 그 붉은색이 선명해서, 난…….”

참으려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쿠가 내 뺨을 감쌌다.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그의 손을 잡고 웃으려고 애썼다. 이렇게 오래된 일인데도 아직,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

“쿠하힐은 내 가족이었어. 내 소중한 사람이었어. 그 일 후에 스승님이 날 제자로 거두신 거야. 그러고 나서 이름을 받고, 성을 받고, 마법의장(魔法衣裝)까지 받았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은 쿠하힐과 스승님이야. 그리고 뭐, 아를과 샤샤도 조금은 영향을 줬지.”

두 소꿉친구의 이름까지 거론하고 난 눈물을 멈추고 웃어 보였다.

“그래서 쿠하힐, 네게 그런 이름을 붙인 건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널 모욕하거나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바꿔도 괜찮아.”

“바꾸지 않겠습니다.”

쿠가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바꾸지 않을 겁니다.”

“응.”

난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그의 손에 뺨을 비볐다. 모든 이야기를 끝내자 긴장이 풀렸다. 잠시 후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웃으며 차와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아를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쿠와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다시 온 아를은 내게 마차 드라이브를 권했다. 아를과 쿠가 한곳에 있어봤자 싸움만 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직전에 아를이 웃으며 말했다.

“내 시종 좀 남겨두고 가도 괜찮지?”

“응? 아, 응. 편하게 계시라고 해. 쿠, 다녀올게.”

“다녀오십시오.”

쿠의 인사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다. 아를의 맞은편에 앉자 아를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고 난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아를이 내 허리를 잡아당겨서 밀착시켰다.

“진짜 나에게 시집와라.”

“웃기지 마. 세공사를 부인으로 삼는 공작이 어디 있어?”

그 말에 아를이 피식 웃으며 내 정수리에 턱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내 결혼 문제 때문에. 지금 후보가 둘이거든? 한 명은 백작이고, 한 명은 남작이야.”

“그럼 백작이 더 좋은 거 아냐?”

“음, 그쪽은 상단이라든가 여러 가지 연줄을 가지고 있어서 꽤 괜찮아. 그런데 백작은 2황자파란 말이지. 백작의 딸이랑 결혼하면 1황자와 틀어질지도 몰라. 남작 쪽은 우리와 같은 1황자파고……. 남작 딸도 영민하다곤 하는데 딱히 얻을 이익이 없단 말이야. 물론 1황자가 황제가 되면 공신이 될 테고 그럼 작위가 올라가겠지?”

“그럼 미래를 보고 투자?”

“아냐, 작위가 올라가면 미래에 우리 두 가문의 힘이 매우 커질 거야. 그럼 누가 제일 싫어할까?”

“황제겠지.”

“그래.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지도 몰라. 아아, 짜증 나, 짜증 나.”

“그럼 둘 말고 다른 사람을 고르면 되잖아?”

“그게 또 미묘한 상황이라서……. 그 둘을 각각 추천한 사람들이 또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란 말이지. 거절하면 난리를 치니까. 그것까지 고려해서 적당한 여자를 골라야 하는데.”

“그것참, 힘들겠네.”

내 말에 아를이 픽 웃고 내 이마에 키스했다.

“이래서 네가 좋아. 너에게는 할 말 안 할 말 안 가려도 되거든.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처음에는 남자라고 생각해서 난 내 첫사랑이 남자라는 걸 전면 부인했었다고.”

난 씩 웃으며 아를의 가슴을 쿡 찔렀다.

“참고로 난 내가 남자라고 한마디도 한 적 없다?”

“알아. 하지만 처음에는 머리도 짧고, 표정도 없고, 완전히 또래 남자애라고만 생각했어. 진짜로 네가 내 아내가 되어준다면 문제는 잘 해결될 텐데.”

“이게 청혼이라면 진짜로 무드 없는 청혼이라고 생각할게.”

아를이 픽 웃고는 내 손을 잡고 다시 키스했다.

“아냐, 널 여기로 끌어들이지는 않을 거야. 난 네가 좋으니까. 에스카 블란테, 내 컵케이크.”

“아를, 조금이라도 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아봐. 분명히 있을 거야. 역시 결혼은 서로 좋아하는 상대와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난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 아를.”

그 말에 아를이 부드럽게 내 뺨에 키스하고는 웃었다.

“난 날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 결혼하는 게 좋아.”

난 눈썹을 추켜올렸다가 팔을 뻗어 마차 창문을 활짝 열었다. 초여름 공기가 마차 안으로 확 밀려 들어왔다.

아를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샤샤의 첫사랑도 너였던 거 알아? 지금도 자기의 첫사랑이 여자라는 것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지.”

“엑, 그랬어?”

“그래, 난 그 얘기를 듣고 남매가 취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니까.”

“갑자기 샤샤를 보러 가기가 무서워지는걸.”

“그러지 마, 샤샤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까.”

“귀족은 힘드네.”

“힘들지만, 부와 권력을 휘두를 때는 매우 좋단다.”

그리고 그가 다리를 건너편 좌석에 꼬아서 올렸다.

“네 팔찌와 반지, 잘 썼어.”

“새로 만들어줄게.”

“네 덕에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는지 몰라. 진짜 빨리 후계를 만들든가 해야지, 차기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사촌이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골치 아파. 아, 진짜. 내가 포도주를 전부 마실 때의 그 자식 얼굴을 너도 봤어야 하는데.”

“포도주?”

“만찬에서 말이야, 포도주를 마시는데 네 팔찌가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난 웃으면서 포도주 한 잔을 전부 다 비워줬지. 나중에 보니까 보석 색이 완전히 변해 있더라고.”

“그걸 왜 마셔? 버려야지.”

내가 황당해하며 묻자 아를이 웃었다.

“난 네 세공품을 믿는걸. 그쪽도 놀랐을 거야. 「미망인의 울음」이 통하지 않아서. 어지간한 세공품으로는 못 막는 독이니까.”

“내 물건은 어지간하지 않아.”

“알아, 넌 블란테니까.”

“하여튼 앞으로 위험한 짓은 그만둬. 걱정된단 말이야.”

내가 아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아를은 웃었다.

우리는 강가로 내려가 매트를 펼치고 피크닉을 즐겼다. 아를은 내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아를은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무렵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낸 친구는 아를과 샤샤밖에 없어서 둘 다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다.

유년 시절 친구와의 추억이라고 하면 이 둘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늦은 오후가 되어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마차에서 날듯이 뛰어내렸다.

“쿠! 괜찮아?!”

“괜찮습니다. 오지 마십시오, 더러워집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으르렁거리자 상대가 목검을 내리며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대련을 하는 것뿐입니다, 아가씨.”

쿠가 피 섞인 침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검을 들었다.

“한 판 더 하죠.”

“하지만, 쿠…….”

“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지그래.”

“아를! 이거 네가 시킨 거지!”

내가 아를의 팔을 잡고 으르렁거리자 그가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대련을 그만두려면 그만둘 수도 있잖아? 아니면 기사였을 때의 어쭙잖은 자존심 때문일까?”

“너, 알고…….”

“사키에게 물어봤지. 네 곁에 있는 사람인데, 내가 조사도 안 해볼 거라고 생각했어?”

오히려 아를이 놀랐다는 듯이 물어서 난 할 말이 없어졌다.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쿠를 돌아보았지만, 말리면 오히려 그의 자존심이 상하리라는 것이 표정에서 느껴졌다. 그저 말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목검이 몸을 때리는 소리가 상당히 컸다. 난 움찔거리며 대련을 빙자한 폭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쿠는 내리 졌다.

이제 슬슬 쿠를 상대하는 시종, 물론 시종이라고는 하지만 기사일 것이 뻔한 상대도 계속 「한 번 더.」를 말하는 쿠에게 질린 얼굴이었다.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리려는 그 순간, 쿠의 검이 시종의 검을 쳐내고 상대의 목에 검 끝을 들이밀었다. 검에는 문외한인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도 없는 속도였다. 시종은 어깨를 으쓱하며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올렸고, 쿠는 휘청하더니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릎을 꿇었다.

“쿠!”

엉망이 된 쿠에게 다가가자 그가 숨을 몰아쉬며 날 바라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에는, 뭐랄까……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이 들어 있었다.

“이겼습니다.”

“봤어.”

난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쿠가 미소를 짓고는 허리를 숙여 내 손에 묻은 눈물을 핥았다. 난 투덜거렸다.

“내일이 되면 전신에 멍이 들 거야.”

“뼈도 부러진 것 같습니다만.”

“자랑이다!”

그때 아를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를.”

그에게도 불평하려고 돌아보았는데 아를의 표정이 너무 차가워 말을 멈췄다. 그가 쿠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무 판 중의 한 판이지.”

입은 웃는데 눈은 하나도 웃지 않고 있었다. 쿠가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시간은 앞으로 많이 있으니까요.”

아를은 대꾸하지 않은 채 내게 시선을 옮기고 키스했다.

“오늘은 기분이 안 좋으니 돌아갈게, 내 꾀꼬리. 더 머무르고 싶은데 아까 말했던 일 때문에 오래 못 있어. 미안.”

“벌써 돌아가는 거야?”

“응, 그리고 내 제안은 생각해봐. 공작부인이 되는 거.”

아를이 웃으며 말했다. 난 피식 웃고는 “네, 네.”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몸조심해, 아를. 아, 맞다. 기다려봐.”

난 후다닥 저택 작업실로 들어가 아를을 위해서 만들어뒀던 팔찌를 찾아서 나왔다. 비싸디비싼 자수정과 에메랄드를 쓴 데다가 공도 많이 들인 팔찌다. 그의 눈과 꼭 같은 질 좋은 자수정을 찾는 건 힘들지만, 이렇게 만들고 나면 스스로 만족도가 높았다.

“이거 줄게. 대금은 필요 없어. 해독 작용이 있는 팔찌야.”

아를이 씩 웃으며 채워달라는 듯 손목을 내밀었다. 난 기꺼이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아를이 만족스럽게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 하지만 대금은 받아. 내 귀여운 에스카가 개에게 줄 사료가 모자라게 되면 큰일이니까.”

아를은 다시 내게 키스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아를의 시종이 내게 상자를 내밀었지만 거절했다가, 시종이 매우 곤란한 표정을 해서 한숨을 내쉬며 상자를 받았다.

난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쿠를 향해 돌아섰다.

“일단 씻어, 당장. 그리고 치료하자.”

다쳤으니까 씻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쿠는 거절하고 스스로 씻고 나왔다.

이제 슬슬 멍이 보이기 시작해서 난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쁜 자식.”

“주인님.”

“응?”

“그분과 결혼하실 겁니까?”

“어?”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아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아를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야. 자, 여기 치료용 반지. 멍이 들었다면 연고만 쓰려고 했는데 뼈도 부러졌다니까 어쩔 수가 없네.”

난 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시동어는 힐(Heal)이야. 리커버리보다는 좀 등급이 낮지만 이 정도 상처라면 괜찮아.”

“힐.”

쿠가 조용히 말하자 반지에 있던 푸른 토파즈의 색이 약간 연해졌다. 난 쿠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주고 물었다.

“어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다행이다. 그럼 나도 일단 씻고 옷 좀 갈아입을게.”

그렇게 말하고 욕실로 향하는데 쿠가 뒤를 따라왔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자 쿠가 말했다.

“목욕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뭐? 아니, 괜찮아. 너도 피곤하잖아.”

“방금 회복되어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양팔을 다 쓸 수 있게 된 후로는 주인님께 봉사해드린 적이 없더군요.”

허리를 숙인 쿠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해서 난 귀를 꽉 누르며 한 걸음 물러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 솔직히 쿠가 봉사해주는 거 기분도 좋고…… 잠도 잘 오고…….

욕실로 들어가 일단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았다. 쿠는 벗겨낸 내 옷을 잘 개서 놓아둔 다음 내 몸에 물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게 하고는 샴푸를 해주었다. 커다란 손으로 쓱쓱 문지르는데 의외로 다른 사람이 해주는 샴푸가 기분이 좋았다. 머리카락을 헹군 다음 이어 비누 거품을 내서 내 몸을 문질러주기 시작했다.

“아…… 음…….”

쿠의 연한 갈색을 띤 손은 거칠었지만 비누의 매끄러움과 섞이니 딱 좋은 정도였다. 쿠의 손가락에 단단해진 내 유두가 걸리는 게 느껴져서 난 배 속이 뜨거워졌다. 쿠가 등 뒤에서 가슴을 주무르다가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붙잡고 천천히 돌리며 잡아당길 때마다 난 신음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이어 쿠의 손이 내 허리를 붙잡고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거품으로 압박을 주면서 문지를 뿐이었지만 그의 손에 애액이 묻어나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서 왠지 창피해졌다. 이어 허벅지에 발까지 꼼꼼하게 비누칠을 하고 나서 쿠는 다시 물을 가져다 부어주었다. 그리고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우리 둘은 함께 욕조로 들어갔다.

둘이 들어가기엔 좁은 욕조에서 몸을 이리저리 틀다가 결국 쿠가 욕조에 몸을 기대앉고 그 앞에 내가 앉는 자세로 정착했다.

“좀 더 큰 욕조를 살 걸 그랬나 봐.”

“지금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

“네.”

뜨거운 물에 몸이 흐물흐물해져서 난 쿠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쿠,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가지고 싶은 것 말인가요.”

“응. 검이라든가, 검이라든가, 검이라든가?”

웃는 듯 가볍게 떨리는 그의 가슴이 등을 통해 느껴졌다. 그가 내 양손을 들어 올려 욕조를 잡게 하고는 내 가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그의 커다란 연갈색 손이 새하얀 내 가슴을 쥐고 있는 모습의 색 대비가 너무 선명해서 난 잠깐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쿠의 손이 부드럽게 내 가슴을 쥐었다가 놓아주고 다시 쥐면서 팽팽해진 유륜을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의 혀가 내 귓바퀴를 깨물고 핥아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음…… 흑…… 쿠으…….”

쿠의 손이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대음순을 벌리자 뜨거운 물이 확 느껴졌다. 쿠의 손가락이 천천히 입구를 문지르다가 소음순을 벌리고 클리토리스를 만지기 시작했다.

“아흑, 힛, 아으…… 쿠!”

“쉬이.”

날 달래듯 어깨와 목 사이에 키스한 쿠가 계속 클리토리스를 문지르자 난 나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가 주는 쾌감이 너무 좋아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가 내 목덜미를 혀로 끈덕지게 핥으며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자 난 허리를 젖히며 가벼운 절정에 달했다.

“하으읏!”

그리고 쿠에게 몸을 기댄 채 늘어져 있는데,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황해 허벅지를 붙이려 하자 쿠가 다리를 걸어 막았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면서 중지를 내 안으로 넣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 몸에서 힘을 빼십시오.”

쿠가 부드럽게 말하며 내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는데 쿠의 손가락이 어느 부위를 건드리자마자 난 힉 하고 허벅지를 움찔했다. 내 반응에 쿠가 귓가에서 웃더니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건드렸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확 꺾였다.

“아…… 웃…… 으…… 하으으응, 쿠…… 아!”

“마음에 드십니까? 주인님?”

난 대답도 하지 못하고 흐으으 하는 신음 소리만 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아, 안 돼, 뭐야, 이거, 너무…….

“아, 쿠…… 싫, 으흐…… 아앙.”

쿠의 손가락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서 욕조 물이 첨벙이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넘쳤다. 난 욕조를 꽉 움켜잡았지만, 물 때문에 내 몸이 뜨는 건지 아니면 저절로 허리가 뜨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곧 절정에 달해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몸이 저절로 확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쾌락의 물결을 타고 있다가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흐으윽 하는 간헐적인 신음 소리를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내 정수리에 키스하고 쿠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팽팽하게 발기한 쿠의 성기가 눈에 들어와 난 욕조에 기대어 물었다.

“쿠는?”

“나머지는 침대에서 하겠습니다.”

“나머지……?”

멍한 머리로 되묻자 쿠는 수건으로 가볍게 자신을 닦고 욕조로 몸을 숙여 날 일으켜 세우더니, 커다란 타월로 감싸 안아 들고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쿠는 날 안은 채 욕실에서 나와 망설이다가 내 침실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침대 위에 날 내려놓은 쿠가 내 이마에 키스한 다음 속삭였다.

“주인님, 주인님께 제 것을 넣고 싶습니다.”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난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그리고 타월 속에서 빠져나와 침대 옆 협탁을 뒤졌다. 그사이 쿠가 다가와 내 등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쿠.”

나는 킥킥 웃으며 두 번째 서랍에서 피임 반지를 찾아냈다. 반지를 끼고 나서 “이제 괜찮아.” 하고 말하자마자 쿠가 내 발목을 잡아당겨 침대 위에 쓰러트리듯 눕히고는 내 위에 올라탔다. 난 쿠의 성기를 힐끔힐끔 보면서 저게 과연 내 안에 다 들어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곧 쿠가 내 가슴을 빨기 시작해 그런 생각은 사라져버렸다.

나보다 쿠의 체온이 훨씬 높아서 그의 입안이 녹아내릴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아까 한 번 달해버린 절정에 민감해진 몸이 쿠의 애무에 더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조금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쿠의 혀가 내 유두를 눌러대며 이로 깨물었고, 곧 다른 쪽과 비교될 만큼 빨갛게 부풀어 오른 내 유두를 쿠가 열매라도 삼키듯 입에 넣고 빨아대다가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그가 자신의 무릎으로 내 양다리를 활짝 벌리듯이 고정하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악!”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쿠는 내 손목을 잡고 누르며 마치 반항한 것에 벌이라도 주듯 물고 있던 유두를 이로 살짝 잡아당겼다.

“흐, 아읏, 쿠! 아, 거기…… 읏! 좋아…… 더…….”

저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 난 쿠의 손가락을 꽉꽉 조였다. 쿠가 내 가슴과 목덜미에 키스하고 내 입술에 키스하며 혀를 밀어 넣었다.

“음, 우…….”

신음 소리를 전부 삼킬 만큼 격렬한 키스였다. 내 전부를 맛봐야겠다는 듯 안으로 계속 밀어 넣는 혀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난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쿠가 손가락과 혀로 주는 쾌락 안에서 점점 이성이 녹아 없어지는 걸 느꼈다.

민감한 곳을 문지르던 쿠의 손이 빠져나가자 아쉬워서 허리를 띄워 흔들 정도였다.

“하아, 이제…… 넣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 묵직한 질량이 입구에서 느껴졌다.

“윽!”

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굵기였지만 이미 애무로 충분히 풀어진 상태인 데다 애액까지 질척할 정도로 나오고 있어서 마치 난 빨아들이듯 쿠를 받아들였다.

“흣…… 주인님…… 으…….”

쿠는 눈을 찡그리고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이로 찔러 들어오는 쿠에 난 숨을 삼키며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쿠, 좋아…… 읏, 하응, 좀 더, 더…….”

다음 순간 쿠가 내 허리를 붙잡고 격렬하게 안으로 찔러 넣기 시작했고 난 비명 같은 신음을 지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읏, 헉, 주인님, 주인님…… 으읏…….”

쿠가 안쪽 민감한 곳을 마구 두들겨 난 벼락 맞은 것처럼 떨며 절정에 올랐다. 하지만 쿠는 만족하지 못한 듯 계속 추삽질을 반복했다. 그리고 내 허벅지를 붙잡아 밀어 올려 가장 깊게 자신을 묻고는 사정했다.

난 절정의 여운에 떨다가 다시 가벼운 절정감을 느끼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게 밀어 넣을 기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정하는 쿠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쿠가 숨을 몰아쉬며 내 위로 쓰러졌다.

“쿠…… 무거워…….”

“죄송합니다.”

쿠가 옆으로 비켜나며 사과했다. 우리 둘은 한동안 침대 위에서 호흡을 골랐다. 잠시 후 쿠가 내 질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정액을 빼내기 시작했다. 난 놀라 괜찮다고 했지만 쿠는 입까지 써서 내 안에 있는 자신의 정액을 전부 빼냈다.

그사이에 난 또 한 번 가볍게 갔고 말이다.

쿠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다. 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쿠, 같이 자자.”

그 말에 쿠가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말했다.

“더 이상 함께 있으면 본분을 잊을 것 같으니, 사양하겠습니다.”

‘본분?’

피곤한 상태라 그런지 생각하려고 해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난 쿠가 불을 꺼주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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