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충동구매(1-1권) (1/16)

노예를 충동구매해 버렸다 1-1

C o n t e n t

1. 충동구매

“이건 오늘 구입하신 원석 목록입니다. 이쪽은 판매하신 물품 내역이고요.”

사키가 서류봉투 두 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 고마워.”

“별말씀을. 항상 저희 아카상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는 서류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내 들고 대충 목록을 살폈다. 아카상회와는 워낙 오래 거래했기 때문에 서로 신용은 충분하다. 목록을 살펴보는 것은 계산이 맞는지 어떤지를 확인한다기보다 이번에 내가 얼마를 벌었는지, 재료값 변동은 어떤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으아, 장미석 가격이 올랐잖아?”

“관세가 더 붙게 돼서요.”

“으음, 재료를 다른 걸로 돌려야겠네. 장미석이 다루기 까다롭기는 했어…….”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에 놓인 과일을 집어 먹으며 문서를 마저 보는데 문득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유리창 밖으로 경매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아카상회 VIP 개인실이다. 딱히 적극적으로 경매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본디 경매란 보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다. 그러다가 아주 괜찮은 물건이 나오면 가끔 구매하기도 하고 말이다.

뭔가 좋은 물건이라도 나온 건가 싶어 내려다보니,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판매대에 오르고 있었다.

“아, 오늘 노예 경매 있구나?”

“에스카님, 시종은 필요 없으신가요? 오늘은 추천할 만한 노예가 몇 있는데요.”

“아, 사키의 추천이라면 믿을 만하지만 필요 없어. 혼자 사는데 뭐. 집안일이라도 해야 안 심심하지.”

“항상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사키가 갈색 눈동자에 온화한 미소를 담고 말했다. 난 그를 마주 보며 씩 웃고는 주머니에서 은반지를 꺼냈다.

“자, 결혼 선물. 비싼 건 안 받는다고 해서 은으로 만들었어. 세공이 예쁘지?”

“에스카님, 개인적인 선물은…….”

“다음에 부인이 만든 잼이나 좀 보내줘. 그거, 만들기 은근히 귀찮거든.”

내 말에 사키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이즈가 맞나 모르겠네. 끼워봐.”

내 말에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워본 사키가 눈을 찡그렸다.

“에스카님.”

“아, 미안. 덤으로 마법도 걸어놨어.”

“이렇게 비싼 건 못 받습니다!”

“들어간 건 내 품뿐이잖아. 어차피 이미 널 주인으로 인식했으니 빼서 줘봐야 소용없어. 자자, 나머지 한 쪽. 이건 부인 갖다 줘. 시동어를 외치면 다른 반지가 있는 곳까지 순간이동이 가능해.”

“공간이동 마법 부가가 붙은 은반지라니, 0이 세 개는 더 붙겠군요.”

“사키랑 나는 친구잖아. 넣어둬, 넣어둬.”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사키를 보며 싱글싱글 웃자 사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고치고 “감사합니다.” 하고 깔끔하게 인사했다.

사실은 보석을 잔뜩 쓴 고가품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신세 지는 것을 거북해하는 사키에게 거절당할 게 뻔했다.

은만을 사용해 만든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 경매장에서 들려온 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고개를 숙여 경매장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경매 물품은 엘란시아에서 잡아 온 기사입니다!”

무대 위로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올라왔다. 목줄은 매여 있었지만 팔은 양쪽으로 축 늘어진 채 묶여 있지 않았다.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온몸에 검상처럼 보이는 흉터가 가득했다. 키가 크고 몸이 두꺼웠다. 물론 물건도 꽤 대물이었다.

“기사?”

“아, 사지 마세요. 수지타산이 안 맞아요.”

“잉?”

“이제 설명할 겁니다.”

사키가 창문을 턱으로 가리켜 나는 다시 경매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살짝 단점이 있습니다. 기사였던지라 길들이기가 좀 힘들어서 양팔의 힘줄을 끊고 마약성 최음제를 투여했습니다. 단점을 반영해 이 몸 좋은 기사의 경매를 단돈 300페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른 노예가 올라왔을 때와 달리 작은 단위로 경매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키가 웃으며 말했다.

“들으셨죠? 저런 싸구려를 저 가격에 사는 건 취향이 맞는 손님밖에 없을 겁니다. 에스카님께는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어 찬찬히 경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을 내 눈과 마주친 것처럼 내게 와서 멎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엷은 갈색 피부, 새파란 눈동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 살래.”

“예?”

사키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나는 옆에 부착돼 있는 경매 참가 버튼을 눌렀다.

“앗! 1천 페소! 1천 페소가 나왔습니다!”

“에스카님! 저건 하등 쓸모가 없다니까요? 불쌍해서 그러시는 거면 더 불쌍한 사연을 가진, 도움이 될 만한 노예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동정심은 좀 더 효율적으로 써주세요.”

“저게 마음에 들었는걸.”

“마음에 들면요? 팔은 쓸 수가 없고 마약에 중독된 노예란 말입니다. 대소변은 누가 닦아냅니까? 마약을 사는 데에도 비용은 꾸준히 들어갑니다. 저건 마이너스 투자라니까요.”

“아, 그건 생각을 못 했네.”

앗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미 버튼은 누른 뒤였다. 나보다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천 페소나 주고 저걸 사려는 사람은 없겠지. 사회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패널을 살피더니 손을 들고 외쳤다.

“1천 페소! 더 이상 없으신가요? 그럼 낙찰되었습니다!”

“오, 낙찰됐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라니요! 1천 페소면 쓸 만한 여자 노예 하나를 살 수 있는 가격입니다!”

“사키, 난 구매자야. 화는 그만 내고, 저 녀석에게 맞는 옷이랑 이불이랑 그 외에 필요한 것들도 좀 구매 목록에 같이 넣어줘.”

내가 딱 잘라 이야기하자 사키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잘 준비시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사키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경매장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남자 노예는 다시 목줄을 끄는 손에 이끌려 무대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음, 좀 충동구매를 하기는 했네. 대소변은 생각을 못 했는데. 하지만 뭐, 힘줄 잘린 건 고칠 수 있으니까. 그것만 고치면 따로 손 갈 일 없으니까 괜찮지 않나? 나는 과일을 집어 먹으며 다시 시작된 경매를 구경했다.

잠시 후 사키가 노예에게 필요한 물품 목록을 들고 돌아왔다. 그 목록을 훑어보고 있는데 사키가 내 얼굴을 살폈다.

“에스카님, 설마 저 노예의 힘줄을 다시 붙여주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어? 왜?”

“그 정도 회복 아이템을 만드실 거면 최소 10만 페소는 들어갈 테고, 그걸 저희에게 파시면 15만 페소는 드릴 수 있습니다. 15만 페소면 최고급 수인족 호위 노예를 셋은 살 수가 있죠.”

“비효율이라는 거지?”

“네, 철저하게요.”

“하지만 난 효율, 비효율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걸.”

내 말에 사키는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비효율적인 마음이 다시 발동하기 전에 오늘은 경매장을 떠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키의 말에 떠밀리기도 했고, 이제 경매도 거의 끝물이라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아카상회 사람들이 커버를 씌운 내 짐마차에 짐을 채워 넣은 후였다.

차곡차곡 쌓인 짐 틈으로 아까 구매한 노예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다리를 묶어둔 쇠사슬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제대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인을 찾지 못한 노예가 입을 법한 거적때기가 아니라 깔끔한 옷이었다. 나는 사키의 탁월한 선택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부석에 올라앉았다.

“이랴!”

공손한 상회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마차를 출발시키자 마차는 번화가를 지나 점점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내 집은 마을에서 좀 벗어난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야산 자체가 내 것이다. 사람이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한적한 걸 좋아하는 내가 통째로 구입한 산이다. 내 산에서 나는 홀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나름대로 길을 닦아놓긴 했는데, 마차는 계속 덜컹거렸다.

난 힐끔힐끔 짐칸의 노예를 돌아보았다. 그는 멍하다고 해야 할지, 무표정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는 산길을 올라 집 앞에 도착했고, 난 현관 가까이에 마차를 세운 다음 마부석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를 돌리며 말했다.

“스트렝스 업(Strength Up).”

혼자 사는 여자에게 꼭 필요한, 근력을 늘려주는 간단한 마법이 걸린 반지다. 「이 반지만 있다면 당신 혼자서도 도랑에 빠진 마차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판매를 시작하긴 했지만, 내 판매 전략과 달리 반지는 기사들에게 더 많이 팔려나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마차에 실려 있던 짐을 열심히 나르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만 마을에 내려가는 데다, 이번에는 노예의 몫까지 더해져서 짐이 상당히 많았다. 한참을 왕래해 보석과 식료품, 옷과 생필품들을 다 나르고 나서야 나는 노예에게 내리라고 손짓했다.

‘팔을 못 쓰니까 마차에서 내릴 수 있게 도와줘야 하나?’

손을 내밀어 도와줄까 하는데, 철그렁 하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그가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 움직임이 마치 고양이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안녕, 난 에스카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A―145입니다.”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대답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진짜 이름.”

“번호가 더 편합니다.”

“그래? 그럼 내 맘대로 쿠라고 부를게. 쿠하힐을 줄인 이름이야.”

“편하신 대로.”

난 미소를 짓고 쿠의 다리를 묶은 사슬을 풀다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족쇄로 인한 흉터가 가득한 발목에 또다시 상처가 생겨 있었다.

‘나중에 치료해줘야겠다.’

그대로 쿠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되어 있는 내 집은 방이 무려 여덟 개나 있고 꽤 좋은 편이다. 나는 그에게 집을 한 바퀴 구경시켜 주고 나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씻을래?”

쿠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 맞다, 스스로 씻을 수가 없지.’

노예 경매에 나가기 전에 대충 씻은 모양이지만, 그에게서는 희미하게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인간 쓰레기장의 냄새랄까?

나는 그를 욕실로 데려가 욕조에 물을 채우며 옷을 벗겨주기 시작했다.

나보다 키가 훨씬 커서 내가 시중을 드는 듯한 모양새였다.

걸치고 있던 옷을 전부 벗긴 다음 그에게 욕조에 들어갈 것을 명했고, 그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물 온도는 괜찮아?”

“네.”

목욕이 오랜만인 듯 그는 꽤 이완된 얼굴을 했다. 난 물속에 퐁당퐁당 파란 바스볼을 던져 넣었다. 짙은 파랑으로 변한 물색이 그의 몸을 가려주었다. 그와 동시에 달콤한 향기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머리 감겨줄게, 눈 감아.”

그의 목을 욕조에 기대게 한 뒤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샴푸를 해주고 헹궈주었다.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댄 그의 얼굴이 왠지 편해 보여 난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천천히 그의 뺨을 만지자 그가 눈을 떴다. 내 손가락이 그의 뺨을 쿡 찔렀다가 입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핥아.”

반은 장난으로 한 명령인데, 그는 눈을 다시 감고 천천히 내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깊숙이 빨아들이며 마디마디 느리게, 정성스레 핥았다. 난 손가락을 빼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이면 뭐든 듣는 거야?”

“네.”

“내가 「네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라고 말하면?”

“제게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까?”

“이제 있어.”

“그럼.”

쿠가 욕조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팔 없이 일어나기 힘들 텐데, 하고 감탄하는데 그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볼일이 보고 싶으니 나가주시겠습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소변은 혼자 볼 수 있죠.”

“알았어.”

어깨를 으쓱했다. 욕실에서 나가다가 문득 생각나서 덧붙였다.

“아, 볼일 끝나면 불러. 몸 닦아주고 옷 입혀줄게.”

욕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음, 사키가 힘들 거라고 했는데 정말이네. 내가 시중드는 사람이 되어버렸잖아? 아, 맞다. 팔을 고쳐주면 되지. 상처가 오래돼 보이니 저거 회복하려면 상당히 고레벨의 회복 아이템이 필요할 것 같은데…….

방금 생긴 상처라면 모를까, 쿠의 팔에 있는 상처는 생긴 지 꽤 오래되었는지 이미 아물어 있었다. 저걸 회복하려면 보통의 마법세공품으로는 불가능했다.

고레벨 회복 아이템이…… 맞다, 다 팔아버렸지. 아, 비상용으로 좀 남겨둘걸. 돈에 혹해서 그만…….

난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하지만 정말로 가격을 잘 쳐줬단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일주일은 꼼짝없이 시중을 들어야겠구나.’

난 한숨을 폭 내쉬고 약과 옷을 가지고 돌아와 욕실 앞에 서서 기다렸다.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욕실로 다시 들어가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혀준 다음 발목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좀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 아직 네 방이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난 손님방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내 지인들은 취향이 까다로워 나름대로 열심히 꾸민 방이다.

“여기서 말입니까?”

“응,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여기밖에 없는걸. 오늘만 참아. 내일은 방 준비가 될 거야. 아마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을 떠올리며 힘없이 덧붙였다. 쿠는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느리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누울래? 이불 덮어줄까? 여기 방의 불은 마법 아이템이니까, 「라이트 온(Light On)」이라고 말하면 켜지고 「라이트 오프(Light Off)」라고 말하면…… 봐, 꺼졌지?”

나는 다시 불을 켜고 웃었다.

“이건 손을 못 써도 켰다가 끌 수 있으니까 편한 대로 써. 벽난로를 켜줄게. 봄이라곤 해도 산이라서 아침저녁엔 춥거든.”

난 마법으로 난로에 커다란 불을 붙이고 그 앞을 파티션으로 가려주었다. 불을 직접적으로 쬐면 너무 뜨거우니까.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는 와중에도 날 계속 바라보는 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난 이불까지 팡팡 두들겨서 잘 펴준 다음 방에서 나왔다.

“잘 자, 쿠.”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난 방문을 살짝 열어놓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너무 신경 쓰고 무리했어. 진짜 졸리다.’

옷을 거는 것조차 귀찮아서 방바닥에 허물처럼 벗어두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깜박 잠들었나 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걷어찼다.

“……!”

깜짝 놀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누구야?”

“주인님…… 읏…… 흐…….”

“쿠?”

방문을 열자 무릎을 꿇고 헐떡이는 쿠가 보였다.

“야…… 약을…… 흐…….”

“아, 맞다!”

마약 중독이랬지! 난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직 풀지 못한 짐들을 뒤졌다. 쿠가 내 뒤를 따라와서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 저 은색 상자…… 으읏…….”

“응? 아! 이거구나!”

상감이 되어 있는 은색 상자를 꺼내 열었다. 상자 속에는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기 여러 개가 나란히 고정돼 있었다.

“주…… 주인님, 제발, 빨리…… 약을 주시…….”

“어어.”

상자에서 꺼낸 주사를 어디다 놔줘야 할지 망설이는데, 쿠가 식은땀을 흘리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팔에…….”

“아! 응.”

난 그의 팔을 잡았다. 아까 옷 벗길 때 눈에 띄던 피부병 흔적 같은 팔뚝 상처는 주사 흔적이었구나. 계속 맞아서 아프겠다.

나는 그의 팔뚝에 난 상처 중 하나를 골라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의 표정은 더 멍해졌다.

‘이 약 먼저 끊게 해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용량을 좀 줄일까.’

주사기가 들어 있던 상자를 살펴보니 두 개의 단으로 되어 있었고, 한 단에 열 개의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설마 이거 매일 맞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흣, 아흑……. 아…… 아우윽…….”

“쿠?”

갑작스러운 신음 소리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붉어진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누워 하체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 주인…… 아아…….”

‘맞다, 이거 최음성 마약이라고 했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미 크게 팽창된 성기가 손에 잡혔다. 내 손이 닿자 그는 허리를 마구 흔들어 자극을 주려고 했고, 나도 열심히 성기를 위아래로 문질러주었다.

“아, 아아아앗!”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를 뒤로 젖히고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을 벌벌 떨며 절정에 올랐다. 발가락이 끝까지 꼿꼿하게 서고 정액이 마치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정이 끝나자 손 안의 성기는 수그러들었다가 금세 또 내 손 안에서 조금씩 발기를 시작했다.

“쿠하힐, 괜찮아?”

내 목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미 동공이 풀려 숨만 쌕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몇 번 더 그를 부르자 그의 눈이 이리저리 헤매다 나를 찾았다. 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건지, 다른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난 그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주었다.

천천히 그의 허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말없이 그의 성기를 문질러주었다. 두 번째 절정은 아까보다 좀 더 느리게 왔지만, 쾌락은 여전한 듯 그는 경련하듯 몸을 움찔거렸다. 완전히 정액투성이가 된 그의 옷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옷을 벗기는 게 낫겠다.’

잠옷 단추를 풀어주는데 꼿꼿하게 서 있는 그의 유두가 눈에 들어왔다. 난 낑낑거리며 그의 윗옷을 벗기고 바지까지 벗겨냈다. 그사이 그의 성기가 다시 발기해 난 세 번째로 핸드잡을 해주었다.

‘음……. 이것도 계속 해주니까 뭔가 의무적인 일 같네.’

흥분이 된다기보다는 그냥 할 일을 하는 기분?

세 번째 사정을 하고 나서야 그는 좀 정신이 드는지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고, 난 그의 상체를 밀어 올려 몸을 일으키게 도와주었다.

“괜찮아? 물 좀 줄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대로 무릎이 꺾이며 맥없이 앞으로 넘어졌다.

“으아, 괜찮아?!”

놀라 그를 일으키는데 그가 반쯤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응?”

“왜…… 절 사신 겁니까……?”

“충동구매.”

즉답하는 날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아, 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난 그가 벽에 잘 기대어 있는 걸 확인하고 얼른 부엌에서 빨대와 물을 가져왔다. 그는 내가 내민 물 한 컵을 다 비웠다.

“피곤해?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수 있어.”

“…….”

“아, 한 번 더 해줄까?”

쿠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반쯤 고개를 든 그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하으…….”

쿠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난 흘러넘친 정액으로 손을 움직이기가 수월해진 그의 성기를 열심히 위아래로 문질러주었다. 귀두에서 쿠퍼액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음, 소리 내도 괜찮은데. 아까 이미 다 들었는걸 뭐. 하지만 왠지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으니 하지 말자.

그의 고개가 점점 숙여지면서 허리가 움찔거리는 게 눈에 들어와 속도를 더 높였다. 그는 이내 크흑 하고 짧은 신음을 내면서 사정했다. 그의 허벅지와 복근이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게 보였다.

“허억…… 헉…….”

그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와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날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깨끗이 닦아낸 다음 내 손까지 닦고 나서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아니, 안 물을게. 그냥 내가 옮겨주지 뭐.”

그리고 스트렝스 업 마법을 걸고 쿠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고, 난 씩 웃었다.

“마법이야.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렇게 그를 침실로 옮기고 속옷을 입혀주었다. 잘 자라고 말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사키에게 연락해서 저 마약 어떻게 끊는 건지 물어봐야겠다. 저런 거에 중독되어 있으니까 당연히 명령을 잘 들을 수밖에 없지.’

나는 그를 강제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핸드잡도 의외로 피곤한 일인 모양이다. 난 그 생각만 잠깐 하고 곧 완전히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연락을 받고 빠르게 저택에 도착한 사키가 테이블 의자에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앉았다.

“그러니까 제가 사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이미 샀잖아.”

어깨를 으쓱하자 사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야 뭐, 저희 상회 물건 사주시면 감사하죠. 하지만 제 우수고객이신 에스카님께 쓸모없는 걸 팔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습니다. 친구로서도요.”

“괜찮아. 쓸모없지 않아. 마약 빼려면 어떻게 해야 해?”

“마약을 빼는 약이 있습니다. 비싸고, 괴롭죠. 일단 마약 투여량을 어느 정도 줄이고 나서 그 약과 병행하셔야 합니다.”

“살게. 자세한 사용법이랑 함께 알려줘.”

“구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약에 중독된 지 얼마나 된 거야? 오래된 것일수록 회복이 더 힘들다고 들었어.”

“6개월이요.”

“그래……. 길면 길고 짧다면 짧네.”

“노예가 된 지 1년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엘란시아 국경에서는 꽤 유명한 기사라더군요. 그가 페룬의 포로가 되어 저희 윈데일까지 흘러 들어온 거죠.”

“멀리서 왔네.”

“네, 유명한 기사라는 게 사실은 사실인지 기세가 꺾이지 않아서 화가 난 조련사가 상품에 흠집을 냈죠. 팔의 힘줄을 잘라버린 겁니다. 그걸로 가격이 뚝 떨어졌죠.”

한숨을 내쉬며 멍청한, 하고 작게 중얼거린 사키가 말을 이었다.

“양팔을 쓰지 못하게 되고도 굴복하지 않아서 결국 사용한 게 저 약입니다.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 약은 성녀도 창녀로 만들어 허리를 흔들게 한다고 유명해요. 중독성과 의존성이 강하죠. 조련사가 약을 먹이고 이리저리 괴롭힌 모양입니다. 조련장에 있을 때는 사람 꼴이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중독자는 약을 위해서 뭐든 하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사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뒤에 서 있는 쿠가 듣고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점이 사키다웠다.

“차 잘 마셨습니다. 제 아내가 감사 인사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올봄에 새로 만든 산딸기잼을 가지고 왔답니다.”

“아, 고마워.”

“약과 설명서는 인편으로 보내드리도록 하죠. 그럼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응, 잘 가.”

난 그를 현관까지 배웅해주었고, 사키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사라졌다.

“아까 들었지? 약 투여량을 줄일 거야. 조금 괴롭겠지만 참아줘.”

“싫습니다.”

“어?”

난 놀라 그를 보았다. 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저 약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죠? 적어도 인세에서 맛볼 수 없는 극상의 쾌락이라도 맛보게 해주시죠, 주인님.”

그 말에 난 머리를 긁적였다.

“음, 팔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그래?”

그 말을 한 순간 그의 눈에 불이 붙은 듯했다. 그가 날 정면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약을 줄이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위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부엌은 내 집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곳이다. 그 때문에 부엌에 베란다를 붙인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 빛이 환하게 들어온다. 나무 선반에는 식기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놓여 있고 화덕은 매일매일 청소해서 깔끔하다.

나는 사키가 가져온 산딸기잼을 찬장에 넣었다. 이렇게 잼이나 피클같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들만 쭉 모아둔 찬장에는 가지각색의 절임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걸 채우는 것 역시 나의 낙이라고 할까.

‘아침에 염소젖도 짰고, 닭 모이도 줬고…… 아! 젖에서 크림을 분리해야겠다.’

난 기지개를 켜고 쿠에게 말했다.

“나 지하에 잠깐 갔다 올게.”

“네.”

지하는 어둡고 서늘해서 유제품을 보관하기에 딱 좋다.

거기서 끙끙거리며 크림을 분리한 후 남은 염소젖을 가지고 올라왔다. 별것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점심때라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자, 앉아.”

쿠에게 의자를 빼주고 나 역시 그 옆에 앉았다. 뜨거운 차는 팔을 쓰지 못해서 마시기 힘들 테니, 빨대를 꽂은 우유와 물을 각각 준비해주고 나머지는 천천히 먹여주었다. 치즈와 버터를 바른 따끈한 빵, 오븐에 구운 소시지와 돼지갈비, 그리고 특제 소스를 부은 샐러드를 번갈아서 먹여주었는데, 처음에는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나름 재미도 있었다.

“어때? 맛은 괜찮아?”

“제대로 된 식사는 오랜만이군요.”

“그래? 그럼 더 많이 먹어. 말랐더라.”

나는 소시지를 잘라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는 모든 음식을 단정하게 꼭꼭 씹어 삼켰다. 나도 먹으면서 그도 먹여야 한 데다 먹여주는 게 서툴러서 식사 한 번이 무척 오래 걸렸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설거지까지 끝낸 뒤 그에게 말했다.

“이제 나 작업 들어갈 건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난 작업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지라……. 음, 저녁 7시쯤 되면 찾으러 와줘. 그사이에 쿠가 원하는 거 뭐든 해도 좋아. 바깥을 산책해도 괜찮아. 이 산은 전부 내 거라서 다른 인간은 없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보자.”

난 2층의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작업실은 창문이 많아 밝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벽을 따라 ㄱ자로 가구와 긴 책상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난 걸어둔 앞치마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내 직업은 마법세공사다. 보석이나 금은, 청동 같은 것에 마력을 주입해서 부가 마법을 걸고 그 보석을 세공하는 게 나의 일이다. 흔히 이 일은 유리컵을 만드는 걸로 비유되는데, 일단 보석의 가공은 유리컵 표면에 조각을 하는 일과 비슷하다. 잔뜩 세공을 넣다 보면 유리컵이 깨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정교하게 세공을 넣으면서 유리컵을 깨트리지 않고 강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훌륭한 세공이다.

두 번째로는 유리컵에 물을 가득 채우는 일. 단 나눠서 물을 부을 수는 없고 한 번에 넣어야 한다. 물이 한 방울이라도 밖으로 넘쳐흐르는 순간 게임은 끝이다. 표면장력이 허락하는 끝까지 얼마나 섬세하게 마력을 조절해서 넣을 수 있는지가 마법세공사의 능력이다. 즉, 1캐럿 루비에 보통 8마력이 들어간다면, 나는 10 혹은 11까지 넣을 수 있다. 그러면 같은 루비라도 쓸 수 있는 마법의 레벨이 달라진다.

‘자, 그럼 토파즈를 써볼까.’

난 토파즈 주머니를 꺼내서 작업대에 자르르 부었다.

황금색 토파즈들이 반사광을 사방으로 튕기며 빛났다.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진 수정판 위에 토파즈를 하나씩 올려놓은 다음 마력 부가 작업에 들어갔다.

‘옳지, 옳지, 좋아, 예쁘다.’

오늘따라 마력 부가가 잘되는걸?

양손 사이에서 토파즈가 희미한 빛을 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마법진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것을 마치 심장박동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한계치가 조금 넘는 마력을 계속 주입해나갔다.

몇 개나 끝냈나 싶어 옆에 쌓인 토파즈를 세어보니 거의 50개 가까이 작업을 끝낸 상태였다.

‘헐, 엄청 많이 했네. 그러고 보니 배도 좀 고프고……. 아직 7시가 안 됐나?’

걸린 시계를 확인해보니 7시가 아니라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엥?”

난 놀라 허둥지둥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은 칸칸이 나뉘어 있어서 칸마다 보석들이 종류별로 나란히 들어 있다. 비어 있던 토파즈 칸에 작업을 끝낸 토파즈들을 쏟아 넣고, 남은 토파즈는 다시 주머니에 넣어 정리한 후 얼른 작업실을 나왔다.

‘어두워!’

“라이트 온. 밝기 최대.”

천장에 있는 샹들리에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라이트 마법은 그렇게 마력이 많이 들지 않지만 음성 인식 마법은 좀 비싼 마법이다. 에헴.

아니, 이게 아니라.

“쿠?”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

“쿠하힐?”

방들을 다 둘러보았는데도 그가 보이지 않아 현관에 걸어둔 청동램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밤의 숲은 어둡고 깊다. 난 숨을 들이켜고 일단 집 주변 마구간과 닭장 등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도망갔나? 하지만 그 팔로는 어딜 가도 힘들 텐데?’

고개를 갸웃하고 천천히 숲 안으로 들어갔다.

“쿠! 쿠하힐!”

천천히 산길을 따라 내려가며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렇게 3분의 1쯤 내려갔을까? 그가 숲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쿠!”

난 쪼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뭐야, 이 시간에 이곳에서 뭘 하고 있어?”

“계곡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뭐?”

그러고 보니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혹시 빠진 거야? 괜찮아?”

“산책을 하러 산 중턱까지 내려왔는데 배가 아프더군요. 그리고 깨달았죠, 전 바지를 내릴 손이 없다는 것을요.”

으아아아아!

난 입을 떡 벌리고 그를 보았다. 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계곡에 들어가 좀 씻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습니다.”

“……미안. 내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조련장 바닥에는 항상 배설물이 있었는걸요.”

쿠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난 오히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너무 차갑고 물에 아직 젖어 있는 상태라 놀랐다.

“잠깐, 그럼 계속 물에 있었던 거야?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졌다고 해도 아직 저녁엔 추워! 얼른 집으로 가자.”

난 그를 이끌고 저택으로 돌아가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채우면서 옷을 벗기자 미처 쓸려 내려가지 못한 배설물들이 나왔다. 난 말없이 그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욕조로 밀어 넣었다.

“감기 걸리니까 얼른 몸 덥혀.”

그러고는 부엌으로 달려가 따끈한 생강차를 만들어, 욕실로 돌아와 그에게 마시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생강차를 조금씩 먹여준 다음, 그가 입었던 옷을 태우는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었다.

욕조 물이 식기 전에 나온 그의 몸을 닦아주는데 쿠가 말했다.

“옷은 필요 없습니다.”

“어? 하지만 몸이 식을 거야.”

“하지만 옷이 있어봤자 전 더럽힐 뿐이니까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습니다.”

“어…… 아, 그럼 긴 상의만 입는 건 어때?”

내 말에 그는 날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난 얼른 나가서 짐을 뒤져 셔츠를 꺼냈다. 돌아와 그에게 셔츠를 입히니 간신히 성기까지 가려지는 길이였다.

‘내일 긴 내리닫이 같은 걸 대충이라도 만들어야겠다.’

“배고프지? 밥 먹자.”

피곤해서 저녁을 호화롭게 차릴 기운은 없었다. 대충 만든 샌드위치를 작게 잘라 하나씩 그의 입에 넣어주면서 나도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훨씬 넘어 있었다. 으아, 왠지 엄청 졸리더라. 설거지는 그냥 내일 하자. 난 접시를 싱크대에 넣어두고 하품을 했다.

“주인님.”

“응?”

“약을 주십시오.”

“아, 매일 주사해야 하는 거야?”

“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이미 살짝 창백해져 있어서 난 얼른 주사기를 들고 돌아왔다.

“욕실로 가서 하자. 그쪽이 뒤처리도 쉬울 테니까.”

욕실 바닥에 그를 앉힌 다음 주사기를 바라보았다. 음, 이걸 전부 주사하면 안 되니까, 한 10분의 1쯤 줄이면 되겠지?

나는 주사기 피스톤을 밀어 올려 약의 일부를 버리고 그의 팔을 잡은 후 조심스럽게 주사를 했다. 주사를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난 욕실의 오일을 손에 바르고 돌아와서 그의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어주었다.

“앗, 하윽, 읏!”

그가 다리를 벌리고 발로 바닥을 문지르며 허리를 마구 흔들었다. 어제보다 좀 더 느리게 첫 사정이 왔다.

“아으으읏!”

벽에 상체를 기댔는데도 허리를 띄우는 그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보였다. 그가 힘없이 허리를 바닥에 털썩 떨어트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라 완전히 이완된 얼굴에 동공이 풀린 눈, 흐르는 침까지 딱 중독자의 몰골이었다.

‘약을 줄여도 괜찮은가 보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번째로 손을 움직이는데 한참이 지나도 사정이 되지 않았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나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약…… 약을 더 주세요……. 약…….”

“안 돼, 줄이기로 약속했잖아.”

“하지만, 하윽…… 으…… 약이 필요해요, 약을…….”

그가 나에게 애원하며 허리를 내 손에 밀어붙였다. 절정에 달하고 싶은데 가지 못해서 상당히 괴로운 듯 보였다. 지금까지 약 때문에 자극에 민감해져서 절정에 올랐던 거니까…….

‘그럼 자극을 좀 더 강하게 해주면 되나?’

남자는 어디가 성감대지?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고 유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앗, 하읏!”

‘아, 반응 온다.’

난 한 손으로 그의 성기를 붙잡고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의 유두를 애무해주기 시작했다. 손가락 아래에서 단단해진 유두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꾹 누르거나 빙글빙글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자 그가 곧 두 번째 사정을 했다.

벌벌 떨면서 사정을 한 그는 지친 듯 늘어졌지만 곧 성기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거 손도 은근히 피로해진단 말이지.’

“좀 더…….”

“응?”

그가 중얼거려서 내가 고개를 들자 그가 시선을 바닥에 두고 말했다.

“좀 더 강하게 자극해주셔도 됩니다.”

“그래? 알았어. 내가 애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테크닉도 없고 강도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가지고.”

잠시 망설이다가 혀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쓸어 올리자 그가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크게 움찔했다.

‘아, 이건 반응이 강하잖아?’

난 혀로 그의 유두를 핥아 올리고 빨아들이며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유두를 만져주었다.

“아…… 으…… 읏…….”

머리 위에서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는 목소리가 들려와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이제 완전히 발기된 그의 성기를 문질러주며 열심히 그의 유두를 혀로 애무해주었다. 그는 양 가슴이 침으로 번들거릴 때쯤 사정했다.

“하아…… 하아…….”

쿠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벽에 기댔다. 완전히 벗고 있는 것보다 셔츠를 걸치고 있는 게 더 선정적인 느낌이라 왠지 민망해졌다.

‘꼭 내가 괴롭힌 것 같네.’

“이제 괜찮아? 물 가져올게.”

나는 부엌으로 나가 물을 한 잔 마시고 입에 흐른 침을 닦은 다음, 물을 한 잔 떠서 가지고 돌아와 마시게 해주었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난 후, 날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 이제 제가 주인님께 봉사해드리고 싶습니다.”

“어?”

당황해 그를 보자 쿠의 새파란 눈이 날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왠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제가 더러워서 싫으십니까?”

“응? 아니, 전혀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나 너에게 그런 거 시킬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거요? 주인님이 제게 하고 있는 것 말입니까?”

“그, 그건 네가 약 때문에 아프니까 그런 거고. 이건 치료잖아, 치료.”

“치료.”

그는 내가 한 말을 되뇌듯 딱 한마디 하고는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제가 주인님께 봉사하고 싶습니다. 더러워서 싫으시다면, 그것도 이해합니다.”

“아이 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쿠하힐, 음, 너 기사였다면서……. 그러니까 너도 자존심 같은 게 있고……. 나에게 봉사시키는 건…… 음…….”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절 인간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군요.”

“당연하지. 그럼 인간이 아냐?”

쿠하힐이 웃으며 상체를 숙여 내게 속삭였다.

“그 조련장에서 제 일부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글쎄요.”

그리고 고개를 떨어트려 내 목에 키스하며 말했다.

“그러니 부디 봉사하게 해주시죠. 적어도 제 존재 가치는 찾을 수 있게요.”

하긴 팔을 못 움직이는데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며 의지하는 것도 괴롭겠지. 뭐, 내가 봉사 받아서 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야…….

근데 봉사라니! 으아아!

난 고개를 끄덕이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 음…… 그럼 어떻게 할까? 옷을 벗어야 하나?”

“다 벗으셔도 되고 바지만 벗으셔도 됩니다. 욕실이 편하신가요?”

“어, 응. 일단은…….”

난 망설이다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매일 훌떡훌떡 쿠의 옷을 벗겨 씻기는 내가 옷 벗는 걸 창피해하면 쿠가 더 민망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느리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옷을 전부 벗었다.

“음, 남자 앞에서 알몸이 되는 건 오랜만인데. 왠지 좀 썰렁하다.”

“이제 곧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되실 겁니다. 누우세요, 주인님.”

난 얼른 수건을 가져다가 깔고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 아까 쿠를 앉힐 때도 수건 가져다가 깔아줄걸. 엉덩이 시렸겠다.

하지만 그런 잡생각은 그의 혀가 쇄골에서 느껴지자 사라졌다.

그의 팔이 멋대로 늘어져서 내 몸을 스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쇄골을 핥고 가슴에 키스하며 내려간 뜨거운 입술이 내 유두에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다. 곧 혀가 거칠게 유두를 쓸어 올렸다.

“음…….”

저절로 소리가 흘러나와 난 주먹을 꽉 쥐었다. 욕실은 조용했고 그가 날 핥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유두를 가볍게 깨물었다가 말아 올렸다가 혀끝으로 누르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렸다가 다시 빨아들이는 등 자극이 너무 강해서 배 속이 짜르르했다.

그가 내 유방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고는 반대쪽 유두도 똑같이 자극했다. 혀로 가슴골을 핥으며 아랫배까지 내려오는 움직임에 난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틀었다. 그가 내 허벅지를 가볍게 물고 핥더니 말했다.

“다리를 벌려주세요, 주인님.”

이미 애액이 꽤 흘러서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난 조심스럽게 다리를 열었다. 쿠는 천천히 허벅지 안쪽을 핥다가 이로 살짝 긁듯이 자극을 하기도 하며 점점 위로 올라왔다. 난 긴장이 되었지만 그의 혀가 안쪽에 닿자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띄웠다.

“아…… 앗…….”

쿠는 놓치지 않고 날 따라오며 집요하게 클리토리스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압박 자위를 좀 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자극을 주지 않았던 곳이어서 그런지 저절로 허리가 확 꺾였다.

“아, 하읏…… 응…….”

스스로도 애액이 줄줄 흐르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소음순을 밀어낸 쿠의 입술이 클리토리스를 빨아들이고 혀로 문지르듯 하자 온몸의 신경이 거기로 쏠리는 것 같았다. 손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떨렸다. 원하지도 않는데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머릿속을 헤집는 쾌락에 난 좀 더, 좀 더 하고 애원하게 되었다.

눈앞에 바로 절정이 보여 허리를 흔들며 쿠의 머리카락을 붙잡았고, 쿠가 입술로 내 클리토리스를 꽉 누르며 혀끝으로 문지르자 그대로 절정에 달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몸이 확 꺾이고 허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으으응!”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도 발끝이 움찔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밑에 깔린 수건이 축축했다. 아직 쿠의 혀가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자극을 하기 위한 거라기보다는 마치 닦아내는 듯 외부를 핥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난 몸에 힘이 빠져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쿠, 괜찮아. 그냥 씻을게…….”

그렇게 말하자 쿠가 상체를 들었다. 난 너무 나른한 나머지 일어나기 싫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침대까지 둥실둥실 날아가는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마법은 없으니 일어나야지. 다리에 힘이 없어서 팔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으…….”

쿠의 얼굴이 애액투성이라 난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수건을 적셔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제 봉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응, 엄청 좋았어.”

“다행이군요.”

그가 자신의 얼굴을 닦고 있던 내 손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난 피식 웃었다. 그를 닦아주고 새 셔츠를 입혀준 뒤 나도 대충 몸을 닦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피곤해……. 오늘 진짜 너무…… 체력…… 소……비…….’

그리고 생각도 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잠들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니 이미 시계는 아침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거북이처럼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방에서 나와 화덕을 열고 불을 좀 키운 다음 주전자를 올렸다.

‘진한 차를 마셔야 정신이 좀 돌아오겠어.’

곧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포트에 뜨거운 물을 따르는데 베란다 밖에 서 있는 쿠가 보였다.

‘어라? 벌써 일어났나? 체력도 좋아. 뭐 하는 거람? 아, 운동하는구나…….’

바지는 입고 하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난 고개를 저었다. 왠지 보고 있는 것도 민망하니 그만두자 하고 선반에서 쿠키 항아리를 꺼내서 접시에 쿠키를 옮겨 담았다. 쿠키를 먹으며 진한 차에 크림을 잔뜩 넣어 마시니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쿠키도 구울 때가 됐네.’

역시 충동구매는 안 하는 게 좋은가. 사람 하나 늘었을 뿐인데 일이 엄청 늘었……. 아, 그게 아니라 쿠가 팔을 못 쓰고 최음성 마약 중독자라서 그런 거지.

‘…….’

하지만 갖고 싶은데 안 샀으면 그 뒤로 내내 후회했을 거다. 어차피 후회할 거면 사고 나서 후회하는 게 더 낫지!

난 평소에 별로 가지고 싶은 게 없는 대신에, 한 번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꼭 가져야만 했다. 그런데 그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일이 내 인생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쿠하힐을 원한 게 아마 세 번째쯤 될 터였다.

그리고 다음 주면 팔도 고쳐줄 거고, 팔 쓰는 게 좀 익숙해지면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자유롭게 풀어줄 생각이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난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운동하고 나면 배고플 테니까 좀 볼륨감 있는 음식이 좋겠네.’

무쇠 스킬릿을 화덕 위에 올리고 팬케이크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팬케이크를 굽고 버터를 얹고 단풍시럽을 뿌리고, 그 위에 다시 팬케이크를 올리고 버터를 얹고 시럽을 붓고…….

이렇게 계속 반복해서 쌓으면 케이크 사방으로 금색 시럽이 흘러넘치고, 케이크에 시럽과 버터가 촉촉하게 스며들어서 매우 훌륭한 맛이 된다.

나는 팬케이크와 매시트포테이토, 베이컨을 준비해서 쿠에게 아침을 먹였다.

“오늘 오후에 사람이 올 거야. 그런데 어젯밤에 괜찮았어?”

“뭐가 말입니까?”

“잘 때 말이야, 몸이 안 좋거나 그러지 않았어?”

“참을 만했습니다.”

“음, 그럼 다행이고.”

아프기는 아팠다는 말이구나. 한 번에 10분의 1이면 너무 줄인 건가? 조금씩 줄이는 게 나을까?

“약을 좀 적게 줄이는 게 나을까? 힘들면 이야기해.”

“괜찮습니다. 어차피 끊을 거라면 빨리 하는 게 낫죠.”

“그건 너무 힘들지 않아? 좀 더 편하게 해도 되니까 어렵다 싶으면 바로 말해줘.”

“알겠습니다. 하지만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난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미뤄둔 설거지까지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쿠가 소리도 없이 등 뒤에 와 있어서 놀랐다.

“우와, 놀라라. 뭐야? 왜?”

“이상한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만져봐도 됩니까?”

“어?”

“주인님을요.”

어떻게? 하고 멍하니 그를 보다가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손을 잡아서 들었다.

힘줄이 끊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뿐, 통각도 촉각도 제대로 있는데 그걸로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건 좀 괴롭겠지. 난 그의 손을 내 뺨에 대보고 웃었다.

“쿠는 체온이 높네.”

“…….”

뺨에서 목까지 그의 손을 천천히 움직여준 다음 내리며 말했다.

“어때? 사람은 오랜만에 만지지?”

“네, 상상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군요.”

“조금만 기다려.”

그때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람이 왔습니다.”

“아, 진짜? 귀도 좋아. 상회에서 왔나 보다.”

나가니 정말로 상회에서 온 사람이 현관문을 막 두드리려는 참이었다. 그는 작은 상자와 계산서를 내밀고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난 계산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얼른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총 세 개의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기존의 마약이 들어 있는 상자였고, 나머지 두 상자 안에는 노란색 액체가 담긴 작은 앰풀들이 쭉 들어 있었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현재 주사하는 마약의 양을 절반까지 줄인 다음 앰풀을 함께 투여하라고 되어 있었다. 앰풀의 부작용도 쓰여 있었는데 멀미, 어지럼증, 구토, 고열, 심하면 환각과 환청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어서 난 좀 떨떠름해졌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사키가 허튼 물건을 줄 리는 없으니 이게 치료제가 맞긴 맞을 것이다. 난 한숨을 내쉰 뒤 쿠에게도 설명서를 보여주었지만 그는 별말 없었다. 하긴 언제는 그가 뭐라고 말을 했었나.

“뭐, 둘 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난 상자를 거실 벽난로 위에 잘 올려두었다. 이렇게 놔두면 잊어버리지 않겠지.

그 후에 난 어제 만든 다음 마력을 안정시키느라 하루 종일 서랍에 넣어두었던 토파즈들로 2차 가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밤에는 또 밤일을 하고…….

그렇게 별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토파즈 팔찌를 완성할 수 있었다.

토파즈 열다섯 개가 들어간 금 세공 팔찌는 반짝반짝 아름다운 빛깔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 팔면 최소한 20만 페소는 받겠다. 진짜 잘 만들어졌네.’

일이 끝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당장 쿠를 고쳐주고 싶어서 팔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하힐?”

“여깁니다.”

그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던 모양인지 거실 소파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오른손잡이야? 아님 왼손잡이?”

“오른손잡이입니다.”

“그래? 그럼 먼저 이걸 오른손에 끼우고.”

내가 팔찌를 그의 팔에 채워주자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비싸 보이는군요.”

“응, 사려면 50만 페소는 줘야 할걸.”

그렇게 말하고 씩 웃으며 손을 놓고 말했다.

“시동어는 「리커버리(Recovery)」야.”

“리커버리.”

쿠는 망설임이나 기쁜 기색도 없이 내 말을 따라 했고, 다음 순간 팔찌가 희미하게 진동하더니 곧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밖에서 할걸.”

내가 카펫에 널린, 색이 변한 금과 토파즈 조각을 보며 뒤늦은 후회를 하는데 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는군요.”

그가 천천히 팔을 들어 손가락들을 하나씩 구부려보았다.

“내가 고쳐준다고 했잖아.”

“그랬죠.”

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주인님은 이상한 분입니다.”

“나도 알아. 아, 그리고 왼팔은 또 일주일 기다려야 해.”

“괜찮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내 광대뼈를 만지고 뺨을 만져왔다.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만져서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이 내 입술을 스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군요.”

“근육이 많이 손실됐을 거야. 예전처럼 움직이려면 재활훈련을 많이 해야 돼.”

“명심하겠습니다.”

“응, 힘내자. 아, 주사 맞을 시간이네.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지?”

“…….”

그 말에 그가 살짝 날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손이 하나뿐이라서 좀 힘들 것 같군요.”

“그런가?”

“네, 주사는 스스로 놓을 수 있지만, 최음 성분은 힘듭니다.”

“음…….”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요즘은 내가 해도 양손이랑 혀까지 다 써야 하는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 하나로 절정은 좀 어렵겠지.

“알았어, 당분간은 도와줄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벽난로에서 주사를 가져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이제 약은 10분의 1보다 좀 더 줄여서 10분의 2만큼을 빼서 버리고 주사를 넣고 있었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은데 쿠의 의견이 확고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금단현상도 더 빨리 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눈치챈 내가 화를 내며 주사를 놔준 적도 있었다.

‘하여간 쓸데없는 곳에서 참을성이 강하다니까. 힘들면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약을 줄이면 되는데.’

약을 주사하고 나서 그와 나는 습관처럼 욕실로 향했다. 욕실용 담요와 의자까지 가지고 말이다.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는다더니 나에게도 제법 요령이 생겨 있었다.

일단 춥지 않게 담요를 바닥에 깐 다음 수건을 올리고 그 위에 그를 앉게 했다. 약이 줄어든 만큼 약효도 줄었다.

그만큼 그는 더 괴로워 보였다. 난 쿠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쿠는 잘할 수 있어.”

“가끔 주인님께서는 절 어린애 다루듯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

난 피식 웃고 그의 쇄골을 핥았다. 그가 신음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붙잡았다. 난 깜짝 놀라 휙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이제 한 손은 쓸 수 있지.’

난 긴장을 풀고 놀랐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깨물어주었다. 곧 내 혀는 자연스럽게 그의 유두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단단해진 유두를 핥아 올리자 그의 가슴이 크게 움직였다.

“읏…… 주인님…….”

그가 거친 숨소리를 내 귓가에 뱉어내며 헐떡였고 난 그의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유두를 빨았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내 셔츠 안으로 들어와 내 등을 어루만져서 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쿠가 내 목에 키스해왔다.

“아, 잠깐, 쿠…… 으응.”

지금까지는 항상 내가 그의 위에 올라타는 모양새였는데 쿠가 내 허리를 잡고 상체를 숙이며 날 밀어내자 어느새 내 몸이 바닥에, 쿠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의 성기가 내 허벅지에 자꾸 부딪쳐서 당황해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굴리는데 쿠가 속삭였다.

“허벅지를…… 붙여……주십시오…….”

간신히 더듬더듬 말하는 게 힘들어 보여 얼른 허벅지를 붙였다. 내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밀어 넣은 쿠가 한 팔로 몸을 지탱하더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치 이성을 잃은 듯 숨을 몰아쉬며 미친 듯이 추삽질을 했다.

“앗……! 흐윽……, 으…….”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힐끗 옆을 보니 바닥을 짚은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마치 바닥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허벅지 안쪽에서 열기와 양감이 동시에 느껴져 허벅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난 그를 돕기 위해 있는 힘껏 허벅지를 조이고 양손을 뻗어 그의 가슴과 유두를 문지르며 턱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가 흐으으윽 하는 긴 신음을 내며 내 허벅지 사이에 깊게 허리를 묻고 사정했다. 그리고 반쯤 무게를 나에게 실은 채 크게 몸을 들썩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가 끝나자마자 맥이 탁 풀려 몸에서 힘을 빼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성기를 정액투성이가 된 내 허벅지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보다 허벅지가 더 좋아?”

내 말에 그가 몸을 일으키고 이성을 찾으려 애쓰는 듯이 눈을 깜박여 초점을 맞췄다.

“주인님은…… 안, 좋으십니까?”

그가 내 속옷 위로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며 물었고 난 솔직히 팬티가 다 젖은 걸 인정했다.

“아니, 자극적이었던 것 같아.”

그의 귀두가 내 클리토리스를 톡톡 건드려서 난 단 숨을 내뱉었다. 내 쇄골에 키스한 그의 입술이 셔츠에 덮인 유방을 크게 한입 빨아들이듯 물었다. 그리고 다시 내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해서 난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꽉 붙였다. 쿠가 셔츠 위로 봉긋하게 올라온 유두를 핥아대 침으로 셔츠가 흠뻑 젖었다. 유두가 뾰족하게 올라서자 쿠는 그걸 이로 가볍게 물어 당겼다.

“앗…… 응…… 쿠…….”

그의 허릿짓이 속도를 가하며 내 성기에 가깝게, 노골적으로 문질러대기 시작해 난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읏…… 으…… 아…… 주인…… 아으읏!”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절정에 올랐다. 이번에는 허벅지에서 빼고 사정해서 정액이 온통 내 아랫배에 튀었다.

잠시 후 그가 내 뺨과 눈두덩에 키스해서 내가 물었다.

“내가 만져주지 않아도 괜찮아?”

“주인님이 만져주시는 것보다 신음 소리를 들려주시는 게 더 좋습니다.”

“음…… 촉각보다는 청각파라는 거지?”

“촉각도 좋죠. 주인님의 허벅지가 뜨겁고 부드러워서 금방 사정했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허벅지를 쓸…… 수가 없었네. 팔이 없으면 난 꼼짝없이 너에게 깔릴 테니까.”

쿠는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크니까 아마 상당히 무겁겠지. 이런 거 하다가 압사하는 건 역시 좀 그렇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그가 다시 발기해서 내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오늘은 회복이 빠르네? 약 기운이 많이 빠졌나? 그래서 적은 양에도 몸이 익숙해진 걸까?”

“그렇겠죠.”

“다행이다. 이 속도로 한 달이면 양이 절반으로 줄겠는데? 그러면 다른 약도 병행해야지.”

오오, 생각보다 약 빠지는 속도가 빨라서 다행이다. 1년은 꼼짝없이 데리고 있어야 하나 했는데, 잘하면 반년 정도면 될 것 같았다. 반년만 있으면 홀로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셔츠를 벗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어?”

“셔츠를 벗어주시면 제가 봉사하기가 더 쉽지요.”

“아, 응.”

난 쿠의 요구대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다 풀고 나서 셔츠를 벗으려고 상체를 드는데 쿠가 먼저 내 유방을 깨물듯 하고는 유두를 빨기 시작했다.

“우응…… 핫, 쿠…… 나 아직 다…… 안…… 하읏…….”

그가 날 빤히 올려다보며 천천히 유두를 핥아 올렸다.

“다 벗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하체를 밀착시켜 내 성기 위로 자신의 성기를 다시 비비기 시작했다. 난 아래와 위를 동시에 자극당해 나도 모르게 허리를 움츠렸다.

“아…… 하앙…… 음…… 좋아…… 쿠…….”

숨을 헐떡이며 그가 해주는 애무를 즐겼다. 나 역시 허리를 흔들어 그의 성기와 박자를 맞추었다. 팬티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뜨거움과 질량이 자극적이어서 애액이 엉덩이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쿠가 강하고 빠르게 성기를 문질렀고, 그 압박에 난 가볍게 절정에 올라 발가락을 확 오므리며 그의 어깨에 손끝을 세웠다. 잠시 후 쿠도 사정을 하더니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숨을 가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난 욕조에 물을 틀고 천천히 팬티를 벗었다. 애액과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 씻고 나서 씻는 거 도와줄게.”

“이제 혼자서도 씻을 수 있습니다.”

“아, 맞다. 그렇지.”

난 아하 하고 가볍게 물을 끼얹어 씻은 다음 쿠에게 바가지를 넘겨주었다.

폭신폭신한 수건을 몸에 두른 뒤 욕실 밖으로 나왔다.

방으로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얼른 쿠의 옷을 챙겨서 가지고 나왔다. 이제 옷도 입고 벗을 수 있으니 예전보다 훨씬 쾌적한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난 욕실에서 나온 쿠에게 옷을 주고 단추 잠그는 것을 도와주었다.

“잘 자, 쿠.”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쿠가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품을 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뭐랄까, 이렇게 봉사 받으면 왠지 잠이 더 잘 오는 것 같은 기분이야. 쿠가 떠나면 이건 쪼끔 아쉬울지도 모르겠는데.

침대로 꼬물꼬물 기어 들어가려는 순간 협탁에 둔 구슬이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연락할 놈은 딱 한 놈밖에 없는데……. 난 한숨을 내쉬고 구슬을 향해 말했다.

“연결.”

달걀만 한 작은 구슬은 연결되었다는 표시로 흰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구슬에서 곧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스카 블란테, 내 귀여운 꾀꼬리, 내 불티, 잘 지내고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용건만 말해.”

―내 컵케이크는 여전히 매정하네.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만 매정해.”

―이번 달 말쯤에 너희 집에 갈 예정이야.

“가도 돼? 이게 아니라 갈 예정인 거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빠르쥬의 롤케이크? 랑삼의 초콜릿? 쉘루아의 마카롱?

“……전부.”

―내 에스카를 위해서라면 매장 전체를 털어서 갈 수도 있지. 그럼 그때 보자.

“응, 그때 봐.”

뚝 하고 연결이 끊겼고 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쿠하힐이 있다고 말하는 걸 깜박했네.’

뭐, 어때. 나도 그 녀석이 시종 몇을 거느리고 오든 신경 안 쓰는걸. 난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금방 잠들었다.

쿠는 다음 날부터 내 일을 돕고 싶다고 했다.

“괜찮아? 팔에 힘이 없어서 힘들 텐데?”

“재활훈련 겸이라고 생각하죠.”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간단한 일들을 가르쳤다. 닭에게 모이를 주는 일이나 염소젖을 짜는 법 같은 아주 간단한 잡일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일을 시작했지만 눈썰미가 좋아서인지 내가 가르쳐주지 않은 다른 일까지 해놓는 경우가 많았다. 외양간을 청소하기도 하고 건초를 주기도 해서 내가 허리에 손을 얹고 화를 내기도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저녁에 포크를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난 입을 내밀었다. 쿠는 묘한 얼굴로 그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고를 해도 그의 무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근육통에 좋은 연고를 꺼낸 내가 투덜거리며 발라주면 그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내 잔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고 난 그의 왼쪽 팔도 고쳐주었다. 그가 마약 투여 후 뒤처리까지 끝내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그냥 약의 양을 반으로 줄여주십시오.”

“어? 그래도 돼? 그러다가 오히려 약을 더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괜찮을 것 같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너무 성급해하지 마, 쿠하힐. 그러다가 금단현상 와서 다시 많은 약을 하게 되면 첫 단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쿠는 결심이 확고한 듯 단호했다.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늘어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정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난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쿠가 검 대신에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을 우연히 봐서 약의 투여량이 반으로 줄면 선물로 검을 해주려던 참이었다. 검은 나중에 다른 핑계로 그냥 선물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그것도 약을 잘 줄였을 때의 이야기지만. 처음에는 약 끊는 거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왜 이렇게 성급하게 구는 걸까? 사키에게 의논해볼까?’

다음 날 나는 상회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산을 내려왔다. 아카상회의 지부는 마을의 중심에 있어서 찾기가 쉬웠다. 상회에 도착하니 금방 사키가 마중을 나왔다.

“오셨습니까, 에스카님.”

“응, 오늘은 팔 물건이 조금밖에 없지만…… 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알겠습니다.”

사키는 내가 가져온 토파즈 귀걸이를 받아 들고 감정을 하기 위해 가지고 갔다가 금방 돌아와 내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노예를 폐기 처분하고 싶으신 거라면, 단골이시니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엥? 아니,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닌데.”

그 말에 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에스카님이라면 또 비효율적인 이야기를 하실 거라고 생각했지요. 참고로 그때 동정심을 효율적으로 쓰셨다면 의붓아버지의 도박 빚 때문에 팔려 나온 소녀와 주인의 학대를 받아 한쪽 눈이 먼 데다 꼬리가 잘리고 절름발이가 된 수인족 소년을 사실 수 있었을 겁니다. 둘 다 그 노예보다는 도움이 되었을 거고요.”

“아이 참, 난 불쌍해서 쿠를 산 게 아니야. 그냥 마음에 들어서 산 거야. 그러니 동정심 이야기는 이제 끝.”

동정심으로 노예를 구매했다면 이미 내가 구매하고 풀어준 노예가 잔뜩 있었을 것이다. 쿠하힐에 대한 내 마음은 동정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문제라면 알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쓸데없는 데 돈을 쓰시는 거라고 해도 취향이라면 존중해드려야죠. 그래서 무슨 문제이신가요?”

“그게, 내가 쿠의 마약을 끊게 하려고 하고 있잖아.”

“네, 그 약값이 어지간한 가정 1년 생활비 수준이라는 것도 말씀드리죠.”

“사키, 자꾸 이럴 거야?”

눈을 부릅뜨자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조용히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처음에는 약을 안 끊겠다는 식으로 나왔거든. 그런데 요즘 좀 이상해……. 약을 끊으려는 의지가 있는 건 좋은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저러다가 잘못하면 다시 첫 스텝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앞뒤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주셔야 제가 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사키의 말에 나는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사키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에스카님.”

“응?”

“성노예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어?”

“그 노예의 정액을 빼줄, 다른 노예를 빌려드리겠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글쎄…….”

“글쎄가 아니고 그 노예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 같은데요. 에스카님이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약에서 벗어나든 팔을 움직이든 노예는 노예죠. 돈은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히 무상으로 빌려드리지요.”

“으음…….”

난 잠시 고민하며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사키는 사람을 불러 무언가 지시를 했고, 잠시 후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와 싱긋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저희 상회의 고급 성노예인데요.”

‘헉, 완전 예뻐!’

나긋나긋한 몸매에 피부는 희고, 뽀얀 가슴은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게다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뭔가 좋은 냄새가 났다.

“엄청 예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그녀가 후후 웃었다. 접힌 눈꼬리가 어찌나 애교 있고 요염한지……! 통통하고 촉촉한 입술에 눈물점까지, 정말 훌륭한 조합이었다. 그러다가 무릎 위에 얹은 그녀의 손에 끼워진 익숙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 피임 반지 하고 있네?”

“소중한 재산이니까요.”

사키가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눈에 들어오시다니, 제작자는 다르군요.”

“음, 저게 히트 쳐서 나도 돈 엄청 모았지…….”

“지금도 저희 상회의 주력 상품이지요. 알음알음 귀부인들 사이에는 다 퍼진 것 같더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실실 웃었다.

“게다가 마법세공품은 소모품이라는 점까지 완벽하지.”

내 말에 사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노예를 가리키며 물었다.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저렇게 예쁘고 스킬이 좋으면 쿠도 좋아하겠지.’

“응.”

고개를 끄덕이자 사키가 벨을 눌러 다시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나는 그녀를 내 말에 태워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내 허리를 잡으며 상체를 내 등에 꼭 밀착시키는데, 가슴 감촉이 어찌나 훌륭한지 내 심장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저택에 돌아온 나는 일단 그녀를 현관 앞에 내려주고, 말을 마구간에 넣어둔 다음 그녀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쿠, 나 왔어.”

“오셨습니까?”

“짜잔!”

나는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 앞으로 밀어내며 헤헤 웃었고, 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물었다.

“누굽니까?”

“오늘 너 약 하고 나서 도와주실 분!”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쿠는 아무런 대꾸 없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색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취향이 아니야? 바꿔달라고 할까?”

“아뇨, 됐습니다.”

쿠가 빠르게 답하고 날 보고 물었다.

“그녀를 데리러 다녀오신 겁니까?”

“응?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마약 끊는 것 때문에 사키에게 의논한 건데 사키가 공짜로 빌려주겠다고 하더라고. 너도 나보다는 프로 쪽이 더 좋지 않아? 아무래도 난 스킬도 좀 떨어지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자 쿠가 말했다.

“이미 주인님께 익숙해져서 새로운 사람과 잘될지 모르겠군요.”

“그런가?”

갸우뚱하는데 성노예 쪽에서 웃으며 말했다.

“감히 제가 말씀드리는 걸 허락해주신다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와, 믿음직스러워! 역시 프로다!’

“그럼 저녁 먹고 조금 시간 보내다가 하자.”

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고 쿠가 따라 들어와서 접시 놓는 걸 도왔다.

“주인님.”

“응?”

“그동안 귀찮으셨습니까?”

“뭐가?”

“저 치료하는 것 말입니다.”

“응? 아니, 아냐.”

“그럼 불쾌하셨습니까?”

“불쾌했으면 처음부터 안 했겠지. 왜? 쟤가 마음에 안 들어?”

거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성노예를 눈짓하고 낮은 목소리로 묻자 쿠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쿠는 말없이 부엌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거실로 나와 상자를 열었다. 난 잠시 불안함에 망설이다가 주사기 내용의 절반을 버리고 그에게 약을 놓았다.

“아가씨, 지켜보실 건가요?”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응?”

난 그녀와 쿠를 번갈아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음. 난 그냥 내 볼일 볼 테니까 끝나고 나면 알려줘.”

“네. 그럼 거실에서 하면 될까요? 아니면 침실?”

“아, 난 평소에 욕실 썼는데.”

“알겠습니다.”

쿠가 그녀의 팔을 조금 거칠게 잡고 욕실로 들어갔다. 난 멍하니 거실에 서 있다가 소리라도 들리면 왠지 민망할 것 같아서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저택 밖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괜히 닭장을 들여다보고 마구간에 가서 말 상태도 살피고 여물도 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30분이나 지났는데 아직 안 끝났나?’

망설이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욕실로 다가갔다.

욕실 문은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닫혀 있지 않고 3분의 1쯤 열려 있었다. 쿠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성노예가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으아, 난 저거 해본 적 없는데…….’

“하아, 지루이신 거 아니에요? 이렇게 보내기 힘든 분은 처음 보네요.”

그녀가 쿠의 기둥을 핥으며 말했다. 반쯤 몸이 틀어져 있어서 그녀는 내 쪽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설마 30분이나 저러고 있었던 걸까? 턱이 아플 것 같……. 아!’

쿠와 눈이 마주쳤다. 쿠도 약간 놀랐는지 그의 푸른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곧 그가 낮게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가 좋으신가 보군요.”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는 바람에 뭘 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의자 손잡이를 붙잡으며 숨을 헐떡이는 쿠의 모습은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난 마치 붙잡힌 것처럼 꼼짝없이 그를 마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침이 꼴깍 목으로 넘어갔다. 난 쿠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해 그대로 몸을 떨며 절정에 오르는 걸 빤히, 전부 목도했다. 내가 해줄 때는 쿠의 얼굴을 잘 확인하지 못하니까…….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입술이 말라왔다. 사정을 끝낸 쿠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궜다.

어……? 지금…… 웃었……?

‘응? 아닌가? 잘못 봤나?’

난 시선이 떨어진 틈을 타서 후다닥 거실로 나왔다.

‘으……. 보면서 젖은 것 같아. 아, 진짜 관음증 변태 같네. 에스카 변태, 변태.’

내 방으로 올라가서 속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그녀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아가씨께서 그동안 고생하셨겠네요. 다 끝났습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상회로 돌아갈 거지? 바래다줄게.”

“네.”

상회에서 성노예를 빌리는 건 좋은데, 1박으로 잠을 자는 건 허용되어 있지 않아서 난 그녀를 상회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거실로 들어서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쿠?”

대답이 없어 난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쿠하힐?”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난 욕실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놀라 뛰어 들어갔다.

“쿠! 어디 아파? 괜찮아?”

안색이 창백하고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의사가 아닌 내 눈에도 심각한 통증이 있어 보였다.

“약을 갑자기 줄여서 그렇지? 내가 약 가져올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괜, 찮…… 흑…….”

“하나도 안 괜찮아!”

내 말에 미소 비슷한 걸 지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쿠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 괴로운 상황에서도 몸을 똑바로 벽에 기대려고 해 내가 그를 도와주었는데, 그의 다리 사이로 반쯤 발기한 성기가 보였다.

“뭐야, 아까 그 노예가 다 끝낸 거 아니었어?”

고통 중 강제 발기에, 성적 충동이라니 이 무슨……!

어쨌든 사정을 하게 해줘야 쿠가 좀 더 편해질 것 같아 그의 성기를 손으로 문질러주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맞다, 입을 쓸까?’

아까 그 노예가 하던 펠라티오가 번득 떠올랐다. 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허리를 숙여 그의 귀두를 입에 물었다. 쿠퍼액 때문에 쌉쌀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허윽!”

강한 신음 소리와 함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난 그의 허벅지를 괜찮다는 뜻으로 다독여주면서 천천히 그의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읏, 하아…… 주인…….”

마치 사탕이라도 먹듯이 굴리고 빨아올리고 입술로 압력을 주면서 어설프게 노력했고, 아까 본 것처럼 길게 기둥을 혀로 쓸어 올리기도 했다.

“으…… 그만…….”

그가 내 어깨를 밀며 허리를 꿈틀거리다가 곧 사정했다. 난 입안에 가득 뿌려진 정액을 옆에다 뱉어냈다.

“으에, 맛없어.”

쿠는 힘이 빠진 듯 잠시 숨을 몰아쉬며 늘어져 있었다. 아까보다 표정이 한결 편해 보여 다행이었다. 일단 세면대 물로 입을 헹군 다음 그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그의 손을 잡았다.

“어때? 조금 나아?”

쿠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스트렝스 마법을 써 그를 안아 들었다. 쿠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지 또 놀란 표정을 했고, 난 그런 그를 그의 방 침대에 옮겨주었다. 그러고는 나 역시 그 옆에 누워 그의 머리를 꼭 품에 안았다.

쿠는 멈칫했다가 얌전히 내게 몸을 맡겼다. 난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쿠. 괜찮아.”

이번에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나의 소중한 쿠하힐.

깜박 잠이 들었는지 나는 초원에 서 있었다. 거기에 꽃들이 많이 있어서 꽃을 따고 있는데 꽃이 쑥 자라더니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당황스럽게도 꽃술은 내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고, 그 단단한 감촉에 난 작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 있자 곧 그 꽃술의 일부가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다른 꽃술은 내 클리토리스를 계속 압박했다.

안으로 들어온 꽃술은 부드럽게 내 질 안을 더듬으며 클리토리스의 뒤쪽을 문질렀다. 클리토리스와 질 안을 동시에 자극 당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절정에 올랐다.

‘으…… 야한 꿈 꿨다…….’

침대에서 눈을 떠보니 옆 자리에 쿠는 없었다. 난 멍하니 누워 있다가 슬그머니 팬티 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역시나 안쪽이 질척했다.

‘뭐야, 나 욕구불만인가?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쿠에게 진짜로 봉사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난 킥킥거리며 스스로에게 농담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니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쿠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저렇게 운동을 하다니. 그의 독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는 내가 나온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응, 쿠는 괜찮아? 몸은 아프지 않고?”

“참을 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날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 노예는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부터 약을 먹으면 중화작용이 일어나서 괜찮을 테니까요.”

“아, 맞다. 알았어.”

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같이 아침을 먹었다.

혼자보다 둘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좀 더 잘 챙겨 먹게 된 데다, 쿠가 팔을 쓸 수 있게 된 후론 그가 도와줘서 둘이 같이 부엌에 있는 재미도 쏠쏠했다.

쿠는 부엌에서도 내가 하는 일들을 배우려고 했고, 그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것은 즐거웠다.

요즘은 쿠가 마구간 일을 거의 맡아서 하고 빨래도 대신해줘서 편했다. 두 사람 분의 집안일이지만 둘이 하니까 오히려 빨리 끝난다고 해야 할까?

남는 시간에 쿠하힐은 몸을 단련했고, 난 책을 읽거나 세공을 하는 데 좀 더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이제 그와 밤일도 하지 않아도 되면…….

‘한가해지겠네. 느긋하게 세공품 만들 수 있겠다.’

그리고 난 그렇게 생각한 걸 열두 시간 만에 취소했다.

“싫, 어……. 읏……! 그만! 제발……!”

“쿠, 괜찮아, 다 꿈이야.”

난 그가 발작하는 걸 잡아 눌렀다.

“놔!”

쿠가 소리치며 팔을 휘둘렀고, 앗 하는 사이 난 거하게 얼굴을 얻어맞았다. 눈 부분을 정통으로 얻어맞아 엄청나게 아프다 못해 눈이 화끈거리며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난 쿠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쿠의 침대로 올라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를 다리로 눌러 고정하고 그의 입에 내 팔뚝을 밀어 넣었다.

“흐윽!”

쿠가 내 팔뚝을 물어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파서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상냥하게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 쿠. 다 끝났어. 넌 자유야. 이제 아무도 널 괴롭히지 않아.”

쿠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지만 그는 턱에서 힘을 뺐고, 난 천천히 팔뚝을 꺼냈다. 그리고 내려와 수건을 얼음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올렸다.

‘그 빌어먹을 중화제인지 뭔지 부작용이 고열이라더니. 아, 진짜!’

조련장에 있을 때의 플래시백이라도 꿈에서 보는 건지 쿠는 헛소리를 하며 발작했다.

그의 애원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난 절대로 쿠에게 조련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난 한 손으로 상처에 붕대를 감으면서 다시 혀를 찼다. 그리고 붕대를 다 감은 후 해열제를 입안에 머금고는 쿠에게 입을 맞춰 넘겨주었다.

“차라리…… 죽여…….”

쿠가 띄엄띄엄 말했다. 난 그의 눈을 감겨주고 손을 잡고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속삭였다.

“쿠, 이제 안전해. 더 이상 누구도 널 고문하지 않을 거야. 내가 계속 곁에 있어줄게.”

광대가 욱신거리는 게 이건 100퍼센트 멍이 들 것 같았다.

‘멍은 빠지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뭐, 다른 사람 얼굴 안 보는 직업이라 다행이야. 그나저나 해열제가 잘 들어야 할 텐데……. 열이 심하면 다른 부작용도 있을 수 있고…….

쿠는 나흘 내내 열에 시달렸다. 낮에는 떨어져서 좀 괜찮나 싶다가도 밤이 되면 열이 올라 발작을 했고, 덕분에 난 내내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싫어, 안 돼, 제발……. 흐윽…….”

어떤 때 쿠는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난 그를 달래며 괜찮다고 계속 속삭였다. 쿠가 내 팔을 잡고 발작적으로 힘을 주어서 길게 손톱자국도 생겼다.

마치 날뛰는 야생동물을 붙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난 멈추지 않고 계속 중화제를 먹였다. 이걸 먹이다가 중단하면 어떤 꼴이 될지, 그게 훨씬 두려웠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쿠의 발작도 줄어들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의 침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시간을 보냈다.

“…….”

그러다 누군가가 툭 건드려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침대에 쿠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쿠? 괜찮아?”

쿠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로 천천히 내 광대뼈를 느리게 쓸었다.

“제가 이렇게 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쉬어서 새는 목소리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아파서 그런 건데 뭐. 아, 뭐 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닭고기수프 해놨어.”

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잔뜩 만들어둔 수프를 데워 한 그릇 가득 떠 왔다. 쿠는 그 자리에서 한 그릇을 다 비웠고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식욕이 있으면 다 나은 거래. 한 그릇 더 줄게, 기다려.”

난 수프를 한 그릇 더 가져왔고 쿠는 그것도 깨끗하게 비웠다. 쿠의 시선이 내 팔의 붕대로 향했고 난 팔을 얼른 등 뒤로 숨겼다. 쿠가 그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아서 난 내가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팔을 내놓았다.

“그 상처도 제 짓인가요?”

“아니, 이건, 내가 요리하다가 그런 거야.”

“주인님은, 거짓말이 서투시군요.”

그 말에 난 잠시 멈칫했다가 결국 실토했다.

“네가 혀를 깨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열이 떨어져서 진짜 다행이다. 난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때도 안 죽었는데, 이걸로 죽을 수는 없죠.”

“맞아, 지금 죽으면 아깝지. 자, 먹었으니까 누워서 한숨 더 자.”

내 말에 쿠가 침대에 들어가서 날 불렀다.

“주인님도 주무십시오. 웃는 얼굴도 피곤해 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쿠가 자신의 이불을 들어 보였고, 난 웃으며 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쿠가 날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품에 넣고는 말했다.

“제가 지켜드릴 테니,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그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쿠의 허리를 팔로 감고 가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아, 그 말 엄청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럼 안심하고 자볼까……?”

나흘 내내 수면을 취한 건 고작 대여섯 시간밖에 안 되는 터라, 안심을 하자마자 나는 쿠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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