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갈망
올린의 대학 생활은 건조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없고 동아리 활동이니 학생회 활동이니 하는 것에 발을 들이는 법도 없다. 정해진 시간표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거나, 강의와 강의 사이의 뜨는 시간에는 도서관에 앉아 있는 식으로, 올린은 조용한 학기를 보냈다. 네 연인들은 올린이 그간 겪어 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길 바라며 그의 절제된 생활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올린은 경호원을 붙이려는 연인들의 작은 호의조차 거절했다. 그 단호하고 엄격한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섯 학기가 지나도록 액받이로서의 올린을 기억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은 운 좋은 일이었다. 올린은 네 형제에 의해 다수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내돌려지기 전에도, 화송에서 일하는 동안 참 많은 남자들을 만났었다. 비록 올린의 표정과 태도가 그때와는 달라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언정, 타고난 생김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 리가 없었다.
최은혁은 정환의 친구로서, 아주 예전, 첫눈 오는 날에 올린을 사용한 적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학부생이었으나 지금은 대학원생이 되어 있었다. 최은혁이 의무 교양 강의의 조교가 아니었더라도, 그래서 평범한 대학생의 모양을 하고 강의실에 떡하니 앉은 저 물건이 장현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고라니라는 별명을 가진 물건임을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올린이 겪은 일은 언젠가는 겪을 일이었다. 올린은 그런 일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닥쳐올 것임을 알면서도 안전한 별채에 앉아 연인들의 품에 갇혀 사는 것을 거부했다. 위험하더라도 홀로 고개를 들고 세상을 걷기를 선택한 것은 올린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사람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무리 조심을 하더라도 이런 날이 오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 없음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오래 각오했으므로, 그날의 일은 올린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눈두덩이 부풀어 오르게는 했더라도 그 정신에는 미세한 금조차 긋지 못했다. 그러나 정환에게는 좀 달랐다.
올린은 최은혁을 알아보지 못했다. 장현수 학생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 1302호 강의실로 와 달라는 조교의 부탁을 들었을 때에도 별 의심이 없었다. 따라서 아직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신축 강의동의 계단식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뒤따라 들어온 최은혁이 문을 잠그고 뒤로부터 둔기를 내리치는 걸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은혁은 자신이 평소 자신의 액받이를 다루는 방식 그대로, 쓰러진 올린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두피를 벗길 것처럼 세게 움켜쥔 채 올린의 이마를 벽에 몇 번이고 부딪쳤다. 불시의 폭력에도 저항하려던 올린의 몸은, 속수무책으로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손안에 쥔 최은혁의 옷자락만은 놓지 않았다. 최은혁은 움직임이 잦아든 올린을 바닥에 눕히면서 그 장갑 낀 손으로부터 제 옷을 빼내려다가, 하얀 손을 감쌌던 장갑마저 벗기고 말았다.
“씨발, 이게 무슨….”
오랫동안 액받이를 써 오던 그의 눈에도 올린 손에 난 구멍은 기이하게 보였다. 그는 다른 손의 장갑마저 벗겨 확인하고는, 두 손의 구멍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뚫은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여기 누운 것을 사람 아니라 성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물건으로 보는 최은혁의 눈에, 신차를 구매할 때 옵션을 붙이듯 추가된 성기처럼도 보였다.
성기 달린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케이블 타이로 결박하기 전에, 그는 그 구멍으로부터 아일렛을 제거한 후 한 번 핥아 보았다. 구멍 안쪽은 그저 상처의 단면이었다. 알아서 조여들거나 젖지도 않았다. 그러나 구멍의 언저리를 누르듯 쓰다듬자, 의식 잃은 몸이
“흐으.”
하고 우는 소리를 하며 펄떡 튀는 것을 보면, 이 물건의 효용은 어쩌면 다른 것들보다 더 좋은 것도 같았다.
호기심을 충족한 후에야, 그는 올린의 손을 뒤로 묶었다. 자신보다 체격이 큰 액받이를 다뤄 본 적도 있는 그에게, 마른 체형인 올린을 제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올린은 두 개의 구멍 안쪽 살이 케이블 타이에 꽉 졸려 찢기고 피가 흐를 지경이 되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기절한 채로 성감을 느꼈듯이, 통증 또한 감각하는 듯 미간은 찡그린다. 최은혁은 엄지손가락으로 매끈하고 흰 이마를 공연히 한 번 문질러 보고, 솜털마저 느껴지도록 보송하게 좋은 그 감촉을 즐거워했다.
짧은 겉옷을 열어젖혔다. 겨울이기는 하지만 아직 추위가 심해지지 않은 12월, 겉옷 아래 고급 니트와 값비싼 셔츠, 그리고 속옷 대신 입은 반팔 티셔츠까지 겹겹이 들춰 보았다. 가끔 액받이를 놀리느라 사람의 복장을 하게 해 세상에 내보내는 주인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는 주인이 내킬 때에, 액받이에게 허용했던 것들을 불시에 앗고 주제넘는 호사를 누린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도 색다른 유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세상에 내보냈다면 이 겹겹이 껴입은 아래의 흰 몸이 이다지도 깨끗하지는 않을 터였다. 예쁘게 날씬한 아랫배와 수줍게 돋은 유두는 최근 몇 주간 회초리 한 번 닿은 적 없는 것처럼 말끔했다.
그렇다고 주인으로부터 도망한 액받이는 확실히 아니다. 물건이 주인의 손으로부터 달아나 이토록 멀쩡하게 대학생 구실을 하고 있을 리도 없거니와, 만일 천고만난 끝에 도망했더라도 이런 고급의 물건을 몸에 걸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최은혁은 상처 없이 건강한 몸과 몸에 걸친 값비싼 옷으로부터 알아챘다. 이것은 정환으로부터 달아나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능욕당하기 위해 외출한 것도 아니다. 미치광이임에 분명한 소유자의 변덕으로 정말 사람 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액받이의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비난과 비웃음을 함께 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섹스돌에 웨딩드레스를 입혀 이것이랑 결혼하겠소 하고 식장에 나타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물건인 것이 사람인 척 구는 모습은 그에게 반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선사했다. 방자한 기만을 계속하도록 두면 안 됐다.
이것의 본분은 따로 정해져 있다. 이렇게 사람이나 입어야 할 실용적이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옷을 겹겹이 입은 채, 책이 든 백팩을 메고 강의실에 들락거릴 것이 아니다. 사용자의 자비로 던져지는 야한 옷이 아니면 이토록 추운 겨울에도 걸칠 것 하나 없는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울어야 할 물건이다. 남자의 좆을 물고, 제대로 봉사하든 그러지 못하든 매를 맞고 눈물을 쏟으며 바닥을 기어야 할 상품이다. 그렇게 고통받음으로써 사용자들에게 소용되고, 나쁜 액을 미리 맞도록 나고 자란 물건이다. 멀쩡히 두 발로 걷는 꼴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불의처럼 여겨졌다.
그는 정신을 되찾으려는 듯 엷은 신음을 흘리며 바르작거리는 올린을 깔고 앉은 채 가만히 생각했다. 한때 절친했던 정환과의 교류는 이미 몇 년 전에 희미해져, 이제는 거의 끊기다시피 한 상태다. 자신과 정환의 사이가 소원해졌던 시기, 즉 정환이 불의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고 친구들과의 연락을 차단한 채 유럽으로 연수를 떠났던 그 시기에 친구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심상가에서 귀여워하던 고급 액받이를 분실했으며, 모종의 이유로 이후에는 액받이를 쓰지 않기로 했다는 해괴한 이야기는 믿는 이가 반, 헛웃음 치며 어불성설이라 넘겨 버리는 이가 반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물건의 상태를 확인할 때, 최은혁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 소문은 진실을 일정 수준 이상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 일의 발단은 여기 누운 이 요망한 물건이 제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처음 이 물건을 구속해 둔 뒤 정환에게 연락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네가 잃어버렸다던 물건, 내가 찾았다고 섣불리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지금 자신이 이 물건을 예전처럼 사용한다고 해서 누구도 자신을 탓할 수 없음을 깨달아 버렸다.
팔 안쪽에 화송의 바코드가 아직 남아 있는 이상, 이것은 사용자가 아무 데나 방치해 둔 물건에 불과하다. 사용하다 조금쯤 잘못되어도 원소유주에게 일정 금액을 물어 주고 합의하면 될 일이다. 물건 간수를 잘못하고 함부로 내돌리던 주인이, 물건을 아주 훔친 것도 아니고 조금 썼다고 해서 과하게 항의하는 것은 채신없는 일로 여겨질 것이다.
최은혁이, 과거에도 마음에 쏙 들었던 이 예쁘고 순한 몸을 좋을 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올린은 정신을 차렸다. 아직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힌 머리가 아파 멍한 눈이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최은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처한 상황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은 갈색 눈이 허공을 향해 깜빡였다. 최은혁은 이 물건에게 밥 사 먹이고 처음 썼던 그날처럼, 위해 주는 듯 다정한 목소리를 했다.
“깼어?”
올린의 시선이 최은혁을 향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친 것 같았다.
“큭.”
숨을 들이켜고 묶인 팔을 버둥거리며, 올린은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포기하지 않고 두 다리를 바르작거린다. 버둥거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벌레 같은 몸을, 최은혁은 따라가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올린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고는 하나 그 또한 그저 자신을 강간한 수많은 사용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이렇게 구속해 두고 물건 보듯 내려다보는 저 눈빛의 의미는 잘 알았다. 이 사람의 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혹은 그로부터 뛰어 달아나는 것 단 두 가지의 방편밖에 없었다.
아무리 배움이 깊은 사용자라 할지라도, 물건이 입을 열어 자신이 당신과 똑같이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도리어 사람과 닮은 외양을 한 물건이 사람 흉내를 내는 불쾌감을 부채질할 뿐이다. 올린은 대화를 통해 상황을 벗어나려는 나이브한 시도를 하는 대신, 이 빈 강의실의 구조를 곁눈질했다.
남자의 등 뒤에 있는 문을 바라보고, 계단식 소규모 강의실의 뒤편에도 문이 하나 더 있음을 확인했다. 손이 구속된 상태에서 이 남자와 싸워 앞문으로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일 테지만,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 뒷문으로 나가는 것은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러려면 장애물 없는 계단을 그대로 달려 올라가는 것보다는 바닥에 고정된 긴 책상을 엄폐물 삼아 가로지르는 게 나을 것이다.
올린은 이를 악물었다. 팔로 균형을 잡을 수 없으므로, 무릎을 박차고 일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남자가 달려들었다. 바닥에 고정된 형태의 책상의 뒤로 달아났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잠시 대치하느라 올린과 최은혁의 눈이 마주쳤다. 올린은 최은혁의 눈 안에 든 것을 읽어 내며, 대체 그에게 해를 끼친 적 없는 자신에 대해서 저토록 큰 적의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찰나에 스쳤을 뿐이다.
최은혁이 의자를 밝고 한 칸 위의 책상 위로 오르는 순간, 올린은 몸을 돌렸다. 뒷문을 향해 뛰었으나 정리되지 않은 의자가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지나칠 때, 뻗어 온 최은혁의 팔에 옷깃이 잡혔다.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회색이라 좋아하던 니트다. 옷이 늘어나도록 힘을 주어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거세게 넘어진 곳은 계단식의 바닥이었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었으므로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부딪쳤다. 걸어온 최은혁이 올린의 아랫배를 걷어차 몸을 뒤집었다.
“크흑.”
올린은 이를 악문 채 데굴 굴렀다. 계단의 모서리에 부딪힌 콧잔등이 깨진 듯 푸르게 부풀었다. 입술이 찢겼지만 앞니가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입안에 핏물이 차오르는 것은 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어딜 가.”
최은혁이 기쁜 듯 물었다. 올린은 그 기쁨이 곧 자신을 강간할 기대감에서 비롯한 것을 잘 알았다. 잇새로 피를 뱉으려고 했지만, 침과 함께 피는 길게 늘어졌다.
“너 고라니 맞지.”
물음을 듣는 순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격렬한 비통이 몸을 감쌌다. 이런 일이 닥칠 것을 알았는데, 억울한 폭력을 다시 당하더라도 울지는 않으려 했는데 터진 울음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올린은 헐떡이는 울음을 울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다가온 무자비한 발에 허리께가 짓눌려 실패했다. 이내 그것은 발이 아니라 무릎이 되었다.
“으윽.”
척추를 부러뜨릴 것처럼 체중을 실어 누르는 무릎이었다. 허리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환청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올린은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자유로운 발로 허공을 걷어찼지만, 그것은 최은혁의 시선을 끄는 것밖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최은혁은 맨손으로 단번에 발목을 부러뜨릴 만큼 완력이 세지는 않았지만, 계단가에 발목을 두고 힘껏 밟으면 비교적 쉽게 뼈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지식은 있었다. 올린의 발목이 계단의 모난 데 걸쳐질 때 올린은 눈을 홉떴다. 다리가 망가지면, 달아나는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악물었던 이를 열고, 외쳤다.
“사, 사람 살려!”
다급한 말은 더듬어 나왔다. 목소리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소리 지르려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뻑, 뻑, 소리가 나도록 맞은 얼굴에서 눈물과 피가 섞여 흘렀다. 눈알이 터진 것 같은 격한 압박감에 주춤한 사이에 계단 가에 걸쳐진 발목에 거센 충격이 입혀졌다.
“아아악! 흐, 으으, 사, 사람 살려!”
손만 뒤로 제압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토록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뒤로 결박된 손목과 더불어 발목 한쪽이 기이한 모양으로 뒤틀리도록 다친 상태에서, 자신을 사람 아니라 학대해도 좋을 물건으로 보는 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상태로도 올린은 입을 열어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
“또 소리 질러 봐, 얼굴을 아주 뭉개 놓을 테니까.”
진심을 담아 을러댄 최은혁의 손이 올린의 바지를 끌렀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속옷 아래, 발기하지 않은 말랑한 모양 그대로 불룩한 성기를 손으로 쥐어 잡았다. 손아귀 사이로 불알이 불거지도록 세찬 손질이었다.
“크흑.”
올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상체를 웅크리려 했지만, 웅크릴 수 없도록 다쳐서 길게 뻗은 다리가 달달달 떠는 바람에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최은혁의 무릎에 가슴팍이 짓눌렸다. 그는 과거 그토록 학대받던 그 과거에도 분명 사람이었고 지금도 사람인 자신이, 이 가해자에게는 처음으로부터 끝에 이르도록 물건일 뿐임에 분노하여 바닥에 제 뒤통수를 짓찧으며 울었다.
“씨발, 흐으윽, 씨발!”
사람을 이렇게 대하면서도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을 남자에 대한 맹렬한 적의와 함께, 이 남자와 결을 같이 하는 악랄한 자들로 인해 물건으로 다뤄져 왔던 세월에 대한 울분이 치솟았다.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슬픔도 있었다.
올린은 그러나 속옷이 풀어 헤쳐지고 성기의 맨살이 드러나고, 머리채 잡혔듯이 아래의 체모가 한 웅큼 쥐어 잡혔을 때, 이곳이 예전에 자신이 강간당하던 공간들처럼 온전히 밀폐된 곳이 아님을, 비록 이 강의실은 지금 자신에 대한 가학의 장소일지언정 벽 너머는 상식적인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임을 떠올렸다. 아래의 살이 다 뜯겨나도록 거세게 체모가 뜯겨 나갔다.
“크윽- 사, 살려, 줘어! 도와줘, 도와주세요!”
“이게 미쳤구만.”
최은혁은 액받이로 다뤄지는 물건이 이토록 발악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달아나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있었으되 이, 자신에게도 수치스러울 학대의 광경을 남에게 노출하는 방식으로라도 구원을 호소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당황하여 그 입을 막으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거센 따귀를 때렸다. 올린은 매질에 입술을 터뜨리고 코피를 쏟으면서도 다리를 버둥거려 자신을 짓누른 힘센 몸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러니 손질은 점점 거세질 뿐 그치지 않았다.
“맞아 죽고 싶어서 그러지.”
짜악, 최은혁은 손질을 할 때마다 겁박했다.
“주제도 모르고,”
짜악, 입안이 터져서 쏟아진 핏물은 목으로도 넘어간다.
“사람 사이에 섞여 있으니 네가 사람 같아?”
짜악, 올린은 최은혁의 목소리가 한순간 멀어짐을 느꼈다.
“너 같은 건,”
짜악, 코에서 피가 덩어리로 쏟아졌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눈과 코와 입과 귀가 모두 출혈하도록 매질한 최은혁은 상처 입은 제 주먹을 흔들어 털며 욕설을 짓씹었다. 멋대로 구는 물건을 길들이느라 자잘한 상처가 생긴 손 마디가 붉었다. 그는 이제 꿀떡꿀떡 제 핏물을 삼키며 잠잠해진 올린을 내려다보았다. 울고 있었다.
올린은 침묵했을 때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목소리가 구원으로 직결되지 않더라도 입을 다무느니보다 무엇이라도 말을 하는 편이 후일에 스스로를 용납하기가 쉽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이다지도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도 끈질기게 입을 여는 것은 그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밖으로 안으로 쏟아지는 제 피를 두려워하며, 흰자가 온통 시뻘게질 정도로 핏줄이 터진 눈으로 눈앞을 노려보았다.
최은혁은 올린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속옷이 함께 말려 내려갔다.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기 위해, 자신이 조금 전 상처입힌 발목을 일부러 꽉 쥔 채 두 다리를 쳐들었다. 올린은 벗은 다리 끝에 양말과 운동화만 신은 채 발라당 뒤집혔다. 납작하게 누르는 탓에 하늘을 향한 엉덩이 사이가 벌어졌다. 컥, 컥, 소리를 내며 울다가 피를 왈칵 토하는 올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최은혁은 웃었다.
“맞으니 정신이 좀 들어?”
묻는 최은혁을, 고개를 바로 하지 못한 올린이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올린의 볼기를 잡아 쪼개듯 벌린 채 발간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긴 건 존나 예쁘네. 말만 잘 들으면 예쁨 받을 몸을 해서는.”
구멍을 겨냥하여 카악 퉤, 침을 뱉은 남자의 손가락이 통통한 입구를 파고들었다. 올린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오래도록 당해 온 일이니 별스럽지 않았다. 이게 원래 자신의 자리인 것만 같은, 소름끼치도록 공포스러운 안온함마저 느꼈다.
침입한 손가락은 마디가 굵었다. 느긋하지 못한 손질로 빠르게 드나드는 감촉은 거칠었다. 올린은 제 안을 멋대로 헤집던 손가락이 느닷없이 빠져나가, 하늘을 향해 들린 엉덩이를 짝, 소리 나게 때리는 감각을 눈을 짓눌러 감은 채 느꼈다.
“흐흐흑…”
숨을 들이쉬느라 흐느끼는 소리가 새자, 다시 손가락을 삽입했다. 몇 번 쑤셔 주지도 않았는데 이미 남자를 받을 준비를 마친 구멍이 뻐끔거렸다. 올린은 차오르는 눈물 속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래 씨발, 조금 전에 느꼈던, 원래 자리를 찾은 것 같던 감각은 착각일 게 분명하다.
미친개에게 물린다고 해서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가해자에게 지금 강간당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모멸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본질을 변화시킬 정도로 거대한 일도 아니다. 올린은 벗어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그것을 견뎌 내고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준비를 모두 마쳤다. 눈물이 주르르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앞문을 거세게 부딪는 소리를 듣기 전의 일이었다. 쾅, 한 번 부딪치는 소리는 콰앙, 하고 더 거친 소리가 되어 울렸다. 올린은 그 부딪치는 소리 사이에 사람의 목소리가 없는 것을 인지하고서야, 앞문을 부수고자 하는 사람이 말 못 하는 이임을 알아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문을 부수려 들기보다는 안에 누구 없느냐고 먼저 물었을 것이다.
올린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코피가 목으로 꿀떡꿀떡 넘어가는 감각 때문에 소리를 크게 내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입을 벌리고, 흐느낌 속의 연약한 소리로나마,
“정, 환아!”
하고 지금 앞문을 부수려 애쓰고 있을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쾅, 소리가 멈췄다가 다음 순간 앞문을 들이받았고, 목제 문은 아예 벽으로부터 떨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망가진 문을 밟으며 노한 호랑이처럼 뛰쳐 들어온 것은 올린이 생각하던 사람이 맞았다. 정환의 눈에 과거 친구였던 사람이,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의 아랫도리를 벗겨 깔아 뭉개는 장면이 펼쳐졌다. 올린의 얼굴은 피투성이며, 허공에 띄워진 엉덩이는 속옷조차 없이 발가벗은 채다.
최은혁은,
“여, 정환아. 오랜만이네.”
하는 인사말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했다. 올린은 날 듯이 달려오는 정환의 얼굴을 흐린 시선 속으로 담으며 저것은 사람 아니라 정말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날랜 몸짓도, 힘센 팔도 그랬지만 앞뒤 안 가리는 듯한 그 얼굴이 가장 그러했는데, 올린은 수의대에 진학하기 전부터 사람보다 짐승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
케이블 타이로 묶인 손목을 풀기 위해서는 가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가위가 있을 리 없다. 정환은 엉망이 된 올린의 몸 상태를 살피고, 바지를 입혔다. 엉망이 된 얼굴에 자신의 코트를 씌워 두고, 바닥에 마구잡이로 떨어진 올린의 물건들을 챙겼다. 백팩 외에도 손에 들고 있던 책, 조그만 핸드크림 하나와, 볼펜의, 잇자국 남은 뚜껑까지 알뜰하게 챙겨 올린을 품에 안다시피 감싸고 걸어 나올 때, 올린은 그 강의실에 남은 최은혁이 정환에 대해 어떠한 비웃는 소리를 하는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정환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지고 이가 다 나가도록 피떡이 된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어차피 명확하지도 않아 들으려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경영대 신관 바로 옆의 주차장으로 올린을 데리고 가는 동안 정환은 내내 숨을 헐떡였다. 험한 꼴을 당한 것은 올린인데 쇼크에 빠진 사람처럼 과호흡하는 것은 정환이었다. 정환은 SUV의 조수석에 올린을 앉혀 두고, 문을 닫기 전에 가위를 가지고 오겠다는 수화를 해 보이고는 다시 한번 코트의 앞깃을 여며 주었다. 몸을 돌리려는 정환을 올린이 불러 세웠다.
“정환아.”
입안이 다 터져서 부정확한 발음으로 이름이 불린 정환이, 새끼를 걱정하는 어미 맹수처럼 고개를 불쑥 조수석으로 들이밀며 올린에게로 다가들었다. 정환의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올린의 피 흐르는 두 뺨을 잡았다. 올린은 아직도 뒤로 손이 묶인 채로, 정환의 커다란 손에 제 뺨을 쥐인 채 잠시 멈춰 있었다. 정환은 한쪽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도록 퉁퉁 부어오르고, 콧대며 입술이며 다 찢긴 얼굴을 마주 보며 올린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기다리다가,
“눈물, 닦고 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요일, 정환의 수업은 이미 오전에 끝난 터였다. 늘 그렇듯 올린이 듣는 교양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하려 경영대 앞으로 차를 옮겨 두었다. 평소라면 올린이 나오고도 남을 시간까지 나오지 않자 의아하여 신관으로 들어온 것도, 도와달라는 비명을 듣자마자 올린임을 직감하여 문을 부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정환은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어차피 수업도 없는 것, 교양 수업 내내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했다는 차원의, 가벼운 죄책감이 아닌 게 당연했다.
그 끔찍하던 눈 내리던 날, 친구들에게 단지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올린을 던져 주었던 것이 정환이다. 부주의한 손에 부주의한 방식으로 내어 주고,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물건이라 말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심상의 네 형제가 깨어나 그간의 악행을 깨달았다고는 해도, 아직 세상에는 액받이라는 제도가 암암리에 성행한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액받이를 물건으로 여긴다. 그러한 세상이 과거 액받이로 살아오며 네 형제들의 손에 의해 여러 번 남의 손에 굴려진 바 있는 올린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정환은 짐작할 뿐 이토록 통렬하게 알지는 못했었다.
어떻게 가위를 구해 와 올린의 팔을 풀어 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환은 최은혁의 집에 예전에 있었던 것처럼 아직도 두 구의 액받이가 있음을 상기했다. 자신의 집에서는 더러운 악습이 끊길 터지만, 아직도 액받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사고팔고 가두어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올린은 앞으로도 비슷한 위험 속에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정환은 자신을 비롯한 네 명의 형제들이, 절대로 가능하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일조차 아니라고 생각하여 외면했던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그것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이전에 지은 자신의 악행을 세상에 드러내어 돌팔매를 당하는 방식이더라도.
신호에 걸려 잠시 차가 멈췄을 때, 정환은 운전대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하필이면 빌어먹게도 올해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을 정환은 발견했다. 올린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떠는 정환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정환이 매 맞은 아이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올린을 돌아보았다. 엉망으로 다친 올린의 얼굴 위로, 오래전 잊었던, 자신과 형제들이 죽였던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죄책감과 분노, 가슴 찢기는 후회로 소리 없이 우느라 눈물 범벅이 된 정환의 얼굴을 올린이 어루만졌다.
“정환아. 잠깐 바람 쐬고 가자.”
차는 이제 막 노달터널을 지나던 참이었다. 멀리 보이는 푸른 철교 위로 지하철이 지났다. 정환은 그곳이 과거 자신이 올린을 학대하여 버리고 갔던 곳임을 알면서도, 강을 보고 싶다는 올린의 말에 고개를 젓지 못하고 한강변으로 진입했다.
차를 세운 곳은 철교 아래였다. 과거 억새가 우는 아래 꽁꽁 언 흙바닥이 삭막하던 이곳은, 이제 바닥에 러닝 트랙이 깔리고 자전거 도로가 잘 조성된 공원이 되어 있었다. 몇 년 사이에 공간이 변한 것만큼이나 둘의 관계도 바뀌었으나, 여전히 과거에 정체된 것은 정환의 사라지지 못한 죄악이었다. 그것은 연인인 올린이 놀라울 정도의 관용으로 용서했더라도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환이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비단 올린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리 아래에 반듯한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정환은 멀리 마련된 운동 기구와 텅 빈 벤치를 바라보다, 감히 보아서는 안 되는 대상을 훔쳐보듯 올린에게로 주춤주춤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폭행당하고 강간당할 뻔했던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한 기색은 어쩌면 그러한 종류의 폭력적인 대우에 익숙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벗어나고도 여전히 각오한 채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잘 견딘다고 하여 남들보다 험한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올린이 말이 없었으므로 정환은 어쩌면 자신이 여기에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올린을 윤간토록 하고 그 후회로 비롯한 화풀이로 손가락을 부러뜨렸던 정환은, 한 번만 안아 달라던 주춤거리는 부탁을 외면하고 이곳에 올린을 버렸었다. 자신을 버리고 가려던 정환을 향해, 다급하게 다가들며 외치던 올린의,
“다시는안그러겠습니다도련님.”
하는 울먹임이 지금까지 이 공간에 남아 떠돌고 있었던 듯 귓가를 울렸다. 정환은 거칠게 차를 돌리면서, 제 차에 올린이 부딪쳐 쓰러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길도 모르도록 갇혀 살아온 사람이 추운 겨울 한밤을 홀로 걷다 그대로 얼어 죽었으면 하는 모진 마음을 품었었다.
올린은 정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니야 정환아.”
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했다. 가까이 다가온 올린의 입술이 정환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떨어져 나갔다.
“난 그저, 너랑….”
한 마디, 더 하던 올린이 다시 한번 입술을 벌렸다. 정환은 그 다디단 입술이 퍼부어 주는 키스를 받을 자격이 과연 자신에게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듯, 석상처럼 멈춰 있었다. 올린이 고개를 기울인 채 딱딱하게 굳은 정환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올린과 맞닿은 정환의 입술 안에서 흐흑, 하고 목멘 흐느낌이 터져 올랐다. 올린은 그 말 못 하는 목이 메도록 걸려 있는, 하지 못할 말 중에 가장 거대한 울림을 알아챘다. 소리가 없어도 전해지는 말이 있다. 그것이라면 괜찮았다.
키스할 때 늘 울었던 것은 올린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물이 멎은 올린은 입술마저 적시도록 운 정환의 눈물을 맛보며, 사람의 눈물에는 짠맛뿐 아니라 단맛까지도 섞여 있구나 하고 쓰게 감탄했다. 굳이 이 철교로 정환을 데리고 온 것은 그날의 아픈 기억을 상기토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그는 조금 전 당할 뻔했던 폭력에 대해 정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미안해하는지, 그 끈질기고도 짙은 죄책감에 얼마나 잠식되어 있는지 알아 그것을 덜어 주고자 했을 뿐이다. 물론 그 죄책감을 온전히 덜어 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지는 아니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정환의 가슴에 얹힌 돌무리 중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돌만이라도 내려놓아 주고 싶었다.
이, 몸만 자란 어린 남자와 섹스하고 싶었다. 섹스함으로써 내가 너를 이미 용서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과거의 과오로 인해 벌어졌던, 벌어질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한 책임을 네 어깨로부터 덜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집까지 가는 길이 밀릴 것을 알았고, 그래서 인적 드문 한강변을 생각했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다리가 한강대교였을 뿐이었다. 정환은 이 장소가 자신이 올린을 학대한 장소이며 이제 자신에 대한 처벌의 장소라고 생각했지만, 정환에 대한 처벌은 올린의 안에서 모두 끝났다.
“울지 마.”
올린은 손을 뻗어 정환의 우뚝한 콧날을 쓰다듬었다. 정환은 엉망이 된 얼굴로 제 입술에 촉, 촉 소리가 나도록 버드키스한 다음 제 목을 껴안아 주는 여윈 품에 파고들었다. 올린은 정환의 말 못 하는 성대에서 낑, 낑,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소리의 의미는 이미 정환이 수백 번도 넘게 올린에게 전했던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 말을 제대로 된 말로 전할 수 있도록 성대 수술을 받자고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러나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연인은 자신이 말 못 하는 상태로 지내는 고행이 올린에 대한 사죄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라 믿는 듯 고집스럽게도 벙어리인 채 지내고 있다.
감히 손을 뻗어 올린을 만지지도 못하는 손을, 올린이 먼저 잡았다. 그 커다랗고 뜨거운 손을 제 옷 아래로 집어넣어 등허리를 쓸도록 하는 올린의 손에는 케이블 타이에 조이고 찢긴 흔적이 여전했다. 정환은 당황한 눈으로, 자신이 앉은 자리 쪽으로 건너오는 올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올린이 부드럽게 버튼을 눌러 좌석을 젖히고, 정환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올린의 한쪽 발목이 부어오른 상태였으므로, 바지를 완전히 벗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한 다리만 빼고 다른 쪽 다리에 바지를 꿴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도 올린은 아름다웠다. 겹겹이 껴입은 상체와 달리 맨살이 드러난 길쭉한 다리를 쓰다듬으며, 정환은 제 지퍼 사이로 우뚝 일어선 성기 위로 내려앉는 몸을 올려다보았다.
올린은 정환의 벌린 입에 제 손가락을 넣었고, 정환은 한없이 공순한 태도로 그 손가락을 적셨다. 손가락에 묻은 타액은 올린이 스스로 자신의 구멍을 넓힐 때 윤활의 역할을 했다. 그는 습한 마찰음이 들리도록 구멍을 쑤셔 벌린 후에,
“정환아, 이렇게 좀, 해 봐.”
하고 정환의 다리를 조금 벌려 성기가 더 잘 드러나도록 한 다음, 정환의 손으로 제 상체를 껴안도록 했다. 정환은 올린의 적극적인 허락에 힘을 얻어 그 마른 상체를 두 팔로 힘껏 껴안은 채, 제 성기를 먹어 치우듯 하는 따뜻한 구멍 속으로 들어섰다. 별다른 전희 없이 삽입한 터라, 섹스에 익숙한 올린도, 다정한 몸에 익숙한 정환도 잠시 그 교합에 익숙해지느라 서로 뺨을 맞댄 채 헐떡여야 했다.
올린이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 정환은 자꾸만 올린의 이마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귀 뒤에 꽂아 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는 게 안쓰러웠다. 퉁퉁 붓고 찢긴 눈과 코와 입의 상처, 과거에는 이것보다 훨씬 괴로운 꼴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했던 올린을, 왜 그때는 지금처럼 마음 아파해 주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올린의 말랐던 아래는 점차 젖어 들었다. 정환은 뻑뻑한 교합에도 한쪽 눈을 일그러뜨린 채 움직이는 얼굴을 황홀히 올려다볼 뿐이었지만, 그래도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천천히 퍼져 나갔다. 과거 올린의 몸을 쪼갤 듯이 격렬한 정사에서만 쾌락을 찾았던 정환은, 서로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방식의 섹스로부터 느껴지는 은근하고도 따뜻한 쾌감 또한 올린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다친 몸으로 도리어 정환을 안심시켜 주려는 올린을, 정환은 자신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환은 그것에 대해서는 애쓸 필요가 없었다. 남을 위안하는 데는 서툰 이 어린 연인에 대해, 올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볼 뿐인 이 남자가 올린의 고통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서 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올린은 알았다.
쏟아지는 눈물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회한과 더불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끈질긴 고난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함이다. 공감은 그 자체로 위로이며, 동시에 제대로 된 길을 알리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올린도 정환도, 이제 정환이 애써야 할 것은 올린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그것보다 조금 더 어려운 과제를 향함을 알았다.
흐느끼는 정환의 품 안에 꽉 끌어안긴 채, 올린은 정환의 귀에,
“조금만 더 참아, 같이 가, 아직 아니야.”
하고 속삭였다. 정환은 아직 사정하지 말라는 그 다정한 명령에, 차마 끙끙대는 소리조차 내지 못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올린의 단정한 입술이 벌어지고, 그 발간 속으로부터
“허억, 아흐, 흐으….”
하는 숨 참는 듯한 앓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배 위로 뜨거운 정액이 쏟아질 때가 되어서야, 눈물처럼 뜨거운 정액을 올린의 속에 쏟아 냈다. 올린은 사정과 동시에 제 속을 덥히는 것에 엉덩이를 부르르 떨며 정환의 상체 위로 엎어졌다. 둘은 서로를 꽉 껴안은 채 서로의 호흡을 듣고 심장 소리를 나눴다. 아무리 용서해도 끝내 용서받지 못하는 둘의 관계에서, 결국 정환은 자신을 용서한 연인으로부터 끝없이 위로받는 신세마저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상처 입은 올린의 안에서 길고 느른한 한숨이 흘러나오는 동안 정환은 사람 없는 한강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소리 없이 내린 첫눈이 쌓여 가는 풍경은 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계절을 여러 번 지나며 그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죄를 지어 왔다. 그리므로 남들에게 향기로운 장미꽃 향기로부터 이토록 고요한 눈 내리는 풍경까지, 모든 좋은 것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과오를 연상케 했다. 정환에게 있어 이 세상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지금 여기에 있는 올린뿐이었다. 정환은 온통 흑백인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색과 향을 가진 올린에게 매달리듯 그 몸을 꽉 껴안았다.
그것은 온통 검던 세상에서 빠져나와, 정환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을 색 있고 향 있는 것으로 마주하게 될 올린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아름다워질 세상 속에 선 올린과, 올린 외에 아무것도 마음 편한 아름다움으로 볼 수 없게 된 정환은 서로 다른 감상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올린은 입술을 내려 정환의 귓가에 가만한 마음을 중얼거렸다.
그가 속삭이는 모든 이야기는 한 점의 그름도 없었다. 올린은 어쩌면 오로지 이 말 한마디를 정환의 귀에 속삭이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무릅써야 했는지도 모른다. 제 발로 돌아와 손이 꿰뚫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삿된 손에 사로잡히면서도 침묵하고, 영영 모습을 감출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이 말을 통해 정환의 영혼을 일깨우고 나아가 비뚤어진 세상을 뒤흔들어 바로 세우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정환은 올린이 말하는, 결코 새롭지만은 않은 이야기 속에 자신이 세상을 향해 해야만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단지 사랑하는 연인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과오를 청산하고 부조리함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환에게는 목소리가 필요하게 될 터였다.
정환은 올린이 수십 번이나 말했던, 성대 수술을 받으라는 이야기에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수긍의 몸짓을 격려하듯 올린은 정환의 귓불을 쓰다듬었다. 목소리를 되찾아 말을 다시 시작할 때, 그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들이 비록 세상을 경악하게 할지라도, 정환은 담담하고 겸허한 태도로 진실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을 알더라도 올린 없이는 할 수 없을 일을, 정환은 끝내 해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