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일몽
“올린아. 디즈니랜드, 가 보지 않을래.”
정아가 말했을 때, 올린은 손바닥만 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은 지금은 작고한 수필가가 젊은 시절 냈던 수필 모음집의 초판본으로, 겉표지는 누렇게 뜨고 안에는 물 얼룩이 졌다. 그러나 올린은 이 책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정아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의 감성은 21세기에 있지 않고 20세기에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세상에 없게 되었되 살아 있을 때는 더없이 정상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운 좋은 남자가 쓴 책이다.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연인과의 연애담이나 어려운 시절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왔음이 느껴지는 삶의 기억들은 올린에게 공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공감하기에 그것들은 올린과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대신 낡은 책 속의 수필은 올린에게 평범한 구식의 삶에 대한 질시 없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 또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왔더라면 어떠했을까, 픽션보다 논픽션을 읽으며 상상하길 즐겨 하였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란 자신의 것처럼 지난하고도 고단한 것이어서 올린에게는 도무지 즐길 거리가 되지 못한다.
“거기가 어딘데요.”
이 책은 정아가 구경시켜 주고 싶다던 중고서적 거리에 따라가 구해 온 물건이다. 이 낡은 수필집처럼, 정아의 제안은 올린에게 기분 좋은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은 상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비정상적인 체험을 하게 하기도 한다.
미친 사람의 느닷없는 말은 그 내용이 평범한 것이더라도 올린에게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종류의 제안이었다. 올린은 심드렁함을 꾸미며 반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한 장 더 넘겼다. 정아는 옷도, 책도, 차도, 무엇이 되었든 오래된 것을 선호하는 편이며, 그래서 올린을 데리고 오래된 물건이 즐비한 곳을 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그렇지만 정아가 바라는 데이트 코스는 그렇게 소박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도쿄처럼 가까운 데도 있는데, 너랑 가고 싶은 곳은 조금 더 가야 해. 캘리포니아에 있어.”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아무리 명문 대학에서 멀쩡히 수학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제한받는 삶을 산 올린에게는, 남들 다 아는 상식이 무척이나 새로운 지식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그에게는 비교적 짧은 시간 공부하여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좋은 대학의 수의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머리는 있었지만, 접해 본 적 없는 지식까지 저절로 깨치는 초능력은 없었다. 올린 또한 그런 것을 잘 알아, 저택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 슬픈 몰상식을 감추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과묵한 태도를 선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인들 앞에서는 모르는 것을 묻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네 명의 연인들은 올린의 질문을 비웃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미국이야.”
“미국… 그럼 비행기 타고 가요?”
“응.”
헬기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정아는 전용기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용기와 흡사한 형태로 항공기를 대여하는 업체는 얼마든지 있다. 일전에 올린도 정아와 함께 호사스런 내부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 적 있다. 안타깝게도 그때 올린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얼마나 걸리는데?”
“12시간 정도 걸리지만, 거기가 여기보다 17시간 느리니까 따지고 보면 마이너스 5시간 걸리는 셈이야.”
“또 아무렇게나 말하지.”
“에이 참, 멀지 않다는 뜻이야.”
개소리다. 올린은 정아 특유의 이상한 논리에 일일이 응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뒤에 딱 붙은 정아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더 달뜬 것을 가만히 느꼈다. 숨소리만 들어도 그는 직감할 수 있다. 이 미친 자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올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태연함을 가장하여 답했다.
“좋아요. 가.”
쓸데없이 감미로운 목소리가 되묻는다.
“가? 정말?”
얇은 티셔츠 위로, 뺨을 부비적대는 정아가 입을 열어 묻고 콧김을 흥흥 내뿜으며 웃는 감촉이 선연했다. 올린은 지긋지긋한 또라이를 상대하면서도 경계할 뿐, 예전처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가자구.”
책을 보느라고 턱을 괴었던 팔을 내리며 몸을 돌리자, 딱 붙었던 올린과 정아의 사이가 한 뼘쯤 벌어졌다. 올린은 정아의 안경을 가만히 끌어 내리고, 반듯한 눈썹에 입을 맞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아는 눈을 내리감은 예쁜 얼굴을 보며 잠시 그 의중을 짐작해 보려는 듯 숨을 멈추었다가, 이내 아무렴 어때 하는 심정이 되어 그 눈꺼풀에 마주 입 맞췄다. 올린의 손이 올라와서 정아의 뒷머리를 감쌌다. 정아는 올린의 손으로부터 조그맣고 낡은 책을 받아 들고, 떨어지지 않도록 얌전히 놓았다.
정아의 방에서는 정원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침대에서보다 그들이 지금 앉은 창가에서 더욱 그렇다. 걸터앉을 수 있도록 꾸며진 넓은 창틀에서 올린이 몸을 일으키자, 정아도 그의 입술에 맞대었던 입술을 떼고 홀린 듯 따라왔다. 올린은 폭신한 침대에 누우며 정아의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 올려 벗겼다. 원래는 검은색이었을 티셔츠는 오랜 세월에 낡아서 카키색처럼 보일 정도로 물이 다 빠진 데다, 목 언저리는 너덜거릴 정도로 늘어나 있다. 정비는 늘 낡은 옷만 입고 다니는 정아더러,
“옷이 죽여 달라고 하네, 다 늙은 옷이 불쌍하지도 않아. 좀 갖다 버리쇼.”
하고 다채롭게도 구박했지만, 정아는
“넌 임마, 형이 늙으면 내다 버릴 놈이야.”
하고 응수하며 낡은 것을 버리는 법이 없었다. 올린은 정비가 내다 버리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던 낡은 티셔츠를 머리 뒤로 던져 버렸다. 만들어 파는 약으로만 수십 억대의 소득을 올리는 정아가 왜 이렇게 오래된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그러든가 말든가 내 알 바 아니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가장 긴장해야 하는 지금 이 순간, 엉뚱한 데 마음을 뺏겼던 올린은 정아가 자신의 바지 단추를 톡, 톡 치는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허리 들어 봐.”
정아는 올린의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린 다음, 올린의 협조를 얻어 바지를 끌어 내린다. 도드라진 골반뼈를 바지 천이 긁으며 아래로 떨어질 때에 올린은
“하,”
하고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정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단히 미친놈임을 알지만, 정아의 눈만은 더없이 아름답다. 색소 엷은 눈이 뱀 같아 징그럽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수의대생 올린은 뱀이라고 다 징그러운 것이 아니며, 그중에도 특별히 아름다운 용모를 한 놈이 있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얘, 왜 울어.”
정아는 뻔해서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은 소리로 올린을 수치 주려 시도했다. 올린의 반쯤 발기한 자지에서 조금씩 흘러내리는 쿠퍼액을 문지르면서였다. 올린은 별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왜겠어요.”
하고 응대하며 정아의 손 위로 제 손을 잡아 성기를 좀 더 압박해 주도록 종용했다. 그 소리 없는 명령을 알아들은 정아가 새끼손가락이 감기는 감촉마저 선명하도록 느리게 성기를 감아, 찌걱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리도록 천천히 위아래로 쓸었다. 젖은 소리 속에 귀두 끝으로부터 자지 밑동까지를 잡아감은 손이 조금씩 압박하는 부위를 달리하며 애무한다. 올린은 그 집요한 손짓에 고개를 젖혔다.
“크, 으.”
이제는 마음껏 소리를 내도 혼날 일은 없지만, 올린에게는 아직 오랜 습관들이 남았다. 조금 긴장했을 때 억누르는 듯한 신음을 흘리는 것도, 그럴 때 이를 악무는 것도 그중 하나다. 정아는 구속받던 시절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신나게 올린을 놀려 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옛 습관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아는 반쯤 뒤로 기대어 누운 올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기분 좋아?”
하고 당연한 소리를 물었다. 올린은 이런 소리에는 늘 그렇듯, 대답조차 해 주지 않는다.
“넣어도 돼?”
될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아직 넣기를 바라지 않을 때 올린은 잔뜩 흥분한 채로도 또렷한 목소리를 한다.
“아니….”
“밑에 구멍, 만져도 되지?”
“시, 으흐, 싫어….”
올린이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때야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저지르기도 하는 정아지만, 이토록 확실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는 앞에서 자기 멋대로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손바닥을 누르듯 끄덕이는 성기의 감촉도 나쁘지 않아, 그는 잠시 늦췄던 손의 움직임을 좀 더 빨리하는 데 집중했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올린의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정아는 섬세하게 갈라진 복근의 모양을 눈에 담으며, 그것이 올린의 호흡을 따라 조여들었다가 풀리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성기에 가해지는 자극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지도록 숨을 멈추고 참으면, 납작한 복근도 더욱 속으로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잠시 탁, 숨을 놓듯이,
“하아, 하아.”
하고 급하게 몰아쉴 때는 새하얀 살 아래로 핏줄의 갈래마저 선명하도록 꿈틀거린다. 정아는 그 핏줄에 뜨겁게 흐르는 피의 맛을 상상해 보다가, 이토록 생생히 살아 있는 올린의 상체에 제 가슴을 겹치듯 껴안으며,
“아 씨발, 올린아, 존나 예뻐.”
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올린은 이제 곧 절정으로 치닫는 듯한 아래의 쾌감을 참느라 힘껏 숨차고 벅찬 소리만 흘릴 뿐 답은 없었다. 정규는 답 없는 연인을 안은 채 팔뚝에 핏줄이 곤두서도록 힘을 주어 아래의 철벅이는 소리를 점차 빨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린이,
“아, 하으, 흐읏!”
하고 야한 소리로 앓으며 손안을 적셔 주자, 정아도 이제 아프도록 발기한 것을 올린이 조금 쓰다듬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올린은 왈칵왈칵 정액을 뱉는 아래와 함께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드러누웠다. 그리고 정아도 올린의 상체를 다리 사이에 둔 채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올린이 쾌감을 느낄 때의 표정은 고통을 느낄 때의 표정과도 닮았다. 정아는 한동안 다리 사이에 갇힌 몸을 내려다보며 그 가엾게마저 보이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올린아.”
하고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올린은 눈을 감은 채, 아직도 숨을 고르려 애쓰면서도,
“왜요. 씨발.”
하고 답했다. 욕할 일도 없는데 공연히 짜증을 내는 것은 사정 후의 기분 좋은 나른함을 방해받은 탓일 터다. 쾌감도, 고통도 민감하게 느끼는 편인 올린은 의외로 쾌감의 끝을 오랫동안 붙들기를 좋아했는데, 바로 이런 순간을 방해받으면 그 방해꾼을 무시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렇게 성질을 부린다.
“욕을 왜 하니. 너는 가끔 이상한 타이밍에 욕을 하더라. 형도 좀 빨아 달라고 불렀는데, 그게 욕먹을 짓이야?”
정아는 말이 많다. 자신만의 논리가 철저하고, 그 논리가 비정상적인데 또 나름의 구조가 견고하여 올린은 정아와 말싸움을 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 미친놈과 정상인의 싸움에서 정상인은 애초부터 패배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올린은 잠시 마음속에 치밀어오르는 수십 가지의 말싸움 소재를 떠올리다가, 겨우 그것들을 잠재우고 작게 딱 하나만 투덜거렸을 뿐이다.
“자기는 손으로 해 주고, 나더러는 빨래.”
“그럼 아일렛 빼고 해 주던가. 너 그거 빼고 해 주면 나는 좋아."
아일렛을 그대로 둔 채 애무하면 성기의 여린 살에 금방 상처가 난다. 그렇다고 그것을 빼는 것은, 그야말로 안 될 일이다. 올린의 양손에 남은 조그만 구멍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 일 없이 완전히 그 몸의 일부로 자리 잡았지만, 그래도 아일렛을 빼지 않고 생활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손아귀에 힘이 부족한 올린이 아일렛 없이 손을 움직일 때는 더욱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의 상처를 단단히 붙잡아 주는 금속의 아일렛이 있으면 손의 움직임이 좀 더 수월하다. 악력도 조금은 세지는 것 같고, 섬세한 움직임에 실패하는 일도 아일렛이 있으면 조금 덜하다.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일렛을 착용하는 두 번째 이유가 더욱 재미있다. 이것은 정아가 별생각 없이 올린의 손에서 아일렛을 제거하고 그 구멍을 혀로 핥아 주다가 발견한 터였다. 새끼손가락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 끝을 혀로 딱 두 번 폭폭 쑤셔 주었을 뿐인데,
“응, 큿!”
하고 당황한 듯한 앓는 소리로 올린은 사정했었다. 그 발간 구멍의 단면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새로운 성감대가 된 모양으로, 올린은 손톱을 세워 그 구멍을 누르든, 혀로 쑤시든, 혹은 장난을 치느라 면봉 따위로 그 안의 둥근 단면을 훑어도
“아, 으으, 흐윽.”
하는 연약한 소리와 함께 곧바로 사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아일렛을 빼고 자지를 손으로 애무한다니, 그거야말로 올린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정아의 심술궂은 제안에 올린은
“…나, 참….”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힘없이 손을 뻗었다. 정아는 올린의 손이 자신의 바지 지퍼를 쥐려다 두어 번 헛손질하는 것을 즐겁게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조금 전 사정하느라 느꼈던 쾌감이 아직도 올린의 몸에 물결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어서다.
“무릎이나 들어 봐요.”
올린은 떨리는 손으로 정아의 바지를 벗기면서 그의 협조를 요구했다. 정아는 올린의 어깨를 누르듯 짚은 채 한쪽 무릎을, 또 다른 쪽 무릎을 들어 바지가 올린의 손에 의해 벗겨지는 것에 순순히 협조했다. 올린은 주머니에 중요한 것이 든 그 바지를 한 손에 움켜쥔 채 한동안 입술을 다물고 있더니,
“그런데 자세는 좀.”
하고 요구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으로 밀고 들어온 정아의 자지에 숨 멎는 소리를 냈다.
다른 형제들이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정아는 특히 가끔 막무가내로 굴 때가 잦다. 올린은 그래서 정아의 자지를 빨아 주더라도 정아를 앉혀 두거나 눕힌 상태에서 저가 움직이지, 이렇게 누운 상태에서 입에 자지를 넣도록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건 정아가 올린에 대해서 갖는 수십 가지의 비상식적인 불만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올린을 눕혀 두고, 혹은 침대 가에 목을 젖히도록 해 둔 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올린의 목구멍에 자신이 자지를 박아 넣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올린은 입으로 성기를 애무하는 데에는 도가 텄지만, 목구멍으로 처넣으면 아직도 괴로워한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구역감을 내리누르며 눈물 맺힌 눈으로 정아를 올려다보다가, 못마땅한 기색을 죽이지도 않은 채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올린의 순하고 연한 마음을 여태까지도 이용해 먹는 정아는 가만히 손을 내려 올린의 뺨을 쥐고 입술이 더 크게 벌어지도록 눌렀다.
“올린아.”
허릿짓하던 정아가 가만히 부르자, 응답하듯 맺혔던 눈물이 뺨 위를 굴러떨어졌다. 정아는 그 눈물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며, 아직도 목 안으로 읍, 읍,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는 올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올린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정아의 아래로부터 벗어났다.
“형, 나, 이 자세 싫어.”
팔을 세워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이미 발갛게 익은 얼굴은 약간 골이 나 있었다.
“또 내 목구멍에 처넣을 거잖아, 그거 숨 막히고, 안에 상처 나면 열난단 말이야. 형이 누워.”
올린은 가만히 정아의 가슴을 짚어 침대 위로 툭, 치듯 쓰러뜨렸다. 평소라면 왜 자신이 바라는 자세로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막무가내의 논리를 펼쳤을 정아는 그 몸짓에 순순히 따랐다.
‘하긴 엘에이 가는 내내 잘 텐데, 그때 마음대로 하면 되지 뭐.’
하는 음험한 생각 때문이었다. 올린은 그런 정아의 속 시커먼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누운 정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렸다. 정아의 체모에 콧잔등이 닿아 찌그러지도록 깊이 넣고 빠는 입안이 뜨거웠다.
정아는 손을 내려 올린의 흠 없이 동그란 머리통을 손안에 담았다. 올린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정아의 자지를 애무한다. 좀 짙은 키스를 할 때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헤집는 손가락을 털어 내지 않았다. 정아는 과거 올린을 물건처럼 취급하며 함부로 대하고 학대하던 시절을, 양심껏 아주 조금, 진짜 손톱만큼만 그리워했다. 지금 올린에게 하자고 하면 펄쩍 뛰겠지만, 그때 정아는 올린의 아랫구멍에 커다란 바이브레이터를 삽입해 둔 채 제 자지를 애무하게 하는 것을 즐겼었다.
사람이 한 번 길든다는 것은 어쩌면 무서운 일이다. 정아는 지금 자신의 손으로 진동하는 장난감을 저 아래에 넣어 주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자지를 입으로 애무하는 동안 어쩌면 올린의 아래가 흠뻑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올린의 뜨거운 입만큼이나 뜨겁고 축축하지만, 그 조임만은 아주 조금 더 변덕스러운 아래. 지금 입을 통해 올린의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아래의 구멍을 통해서도 더불어 침입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정아는 올린의 엉덩이를 자신 쪽으로 돌리게 해, 구멍에 손가락이라도 넣어 희롱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상상으로부터 곧장 밀려온 정염에 저항하지 않고 선선히 사정했다.
올린은 정아의 자지를 깊숙이 삼켜 그 꽉꽉 조이는 목구멍으로 애무하여 사정하게 해 놓고, 입안에 쏟아진 탁액을 아무렇게나 뱉어 냈다. 잠시 정아가 눈을 감은 채 사정 후의 나른함에 헐떡이는 동안 아까 정아의 협조를 얻어 끌어 내렸던 바지를 주섬주섬 찾았다. 그리고 그 주머니에 든, 올린에게 아주 낯설지는 않은 물건을 꺼냈다.
그는 정아의 아랫배와 허벅지, 그리고 자지 중에 어디에다 이 물건을 박아 넣을까, 아주 잠시 망설였다. 대체로 유순하나 한 번 화나면 불같은 성질머리를 발휘했다면 좆에다가 아프도록 박아 넣었겠지만, 어차피 어디에 찔러도 태생이 결핍투성이인 정아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터다. 공연한 짓을 하다가 약효가 제대로 돌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자지가 영영 잠들어 버리면 큰일이겠구나 싶어 주사기를 찔러 넣은 곳은 단단한 근육이 사정 후의 쾌감에 벌떡거리는, 허벅지였다.
정아는 한순간 다리 쪽의 압박감과 함께 무언가 차가운 것이 흘러들어 옴을 느꼈다. 통증은 느끼지 못해도 약이 흘러들어 오는 감각은 생생히 알 수 있다. 순간의 느낌에 벌써 짐작하는 바가 있는 정아의 얼굴에 허를 찔린 듯한 충격이 떠올랐다가 이내 모종의 납득과 함께 흩어졌다.
“아. 형이 올린이 성격을 깜빡했다.”
충격받은 사람치고는 느릿한 몸짓으로 정아는 고개를 들었다. 퉤, 하고 맛없는 것을 뱉어 내듯 입 안에 남은 정액을 마저 내어 놓은 올린의 얼굴은 야속하게도 조금 전에 키스해 줄 때와는 달랐다. 정아는 자신이 올린을 수백 번도 넘게 배반했던 것을 잊은 듯이,
“아무리 그래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약을 놓을 수 있니.”
하는 소리를 해서 올린을 헛웃음 짓게 했다. 순한 얼굴로 독한 짓을 해낸 연인은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을 다 웃어 버린 후에야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형만 이런 짓 하란 법 있어."
말하는 입술은 침착하다.
"나도 똑같은 짓, 두 번은 안 당해요.”
손에 든 것을 정아가 잘 볼 수 있도록 치켜들어 흔드는 올린의 입가에는 쓴 미소가 올랐다. 빈 주사기를 확인하는 정아의 입가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약효가 즉발한 탓에 정아의 미소는 이내 흐려졌다.
“디즈니랜든지 머시깽인지 끌고 가려고, 날 또 재우려 했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 신랄한 말투로 나무라는 올린의 목소리가 울렁거린다.
“지난번에 똑같은 수법으로 그 거지 같은 섬에 끌고 간 거로 족해.”
거지 같은 섬이 아니라 꿈의 섬 라이아테아였다. 남들은 못 가서 야단인 아름다운 남국의 섬. 올린이 딱 잘라 가기 싫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정아는 연인에게 즐거운 여행을 선물하려 노력했었다. 지루한 비행을 견디지 않아도 되도록 약을 놔 재워서, 전용기처럼 꾸며진 전세기에 태워서, 예쁜 수영복으로 싹 갈아입혀서 선베드에 누운 채 쾌적하게 깨나도록 해 줬었다. 정아는 거기서 지내는 이틀 동안 올린이 일곱 번 넘게 사정했던 것을, 정신을 잃어 가는 순간에도 떠올렸다.
“멀쩡히 대화하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니 낯선 곳일 때의 기분, 어떤 줄 알아요.”
화를 냈었다. 돌았느냐고, 멀쩡한 사람에게 그런 약 함부로 쓰는 게 인간이 할 짓이냐고 소릴 질렀을 때 정아는 딴 사람한테는 안 그러고 이젠, 오로지 너한테만 그런다고 수줍게 대답했었다. 올린이 한숨을 쉬며 나한테도 하지 마, 특히 나한테 하지 말라고 무서운 목소리를 할 때, 민트색 바다를 배경으로 선 올린의 늘씬한 수영복 자태가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정아는 올린을 진정시키려 남국의 과일이 곁들여진 알락달락한 음료를 권하다가 한 대 맵게 얻어맞았었다. 그래도 결국, 올린도 그 바다색에 감탄했었다.
“너도… 좋아했….”
본래 이 약의 효능은 즉발하고 열다섯 시간 지속된다. 정아는 자신이 하도 약물에 찌들어 있어 약이 좀 늦게 도는가 보다 여기며, 노여워하는 올린에게 무심코 말대답했다.
“뭐라고요.”
너도 좋아했다는 말 한마디에 분노의 오오라를 풍기는 얼굴을 향해 비실비실 웃었다. 이제 곧 자신은 정신을 잃는다. 올린이 항거 불능한 상태의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하든, 자신은 저항할 수 없다. 사실 올린은 끝내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난번 라이아테아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도착해서 올린이 의식을 되찾기 전에 정아는 시체처럼 무기력한 올린을 상대로 갖가지 저 좋을 짓을 했었다. 올린은 깨어나서
“약 때문인지 눈이 뻑뻑해, 핏줄도 다 터졌어요.”
하고 불평했었는데, 그건 사실 약의 부작용이 아니라 정아가 올린의 오른쪽 눈에 한 번, 왼쪽 눈에 한 번 사정한 후 식염수로 눈을 세척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있을 때의 올린은 항문이나 입, 얼굴이나 가슴에 사정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눈, 코, 귀에다가 싸는 것은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는다. 정신을 잃어 기억하지 못할 때 조금 욕심을 채운 것에 대해, 정아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올린을 상처입히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했던 현명한 방편이라고 굳게 믿었다.
“거참 이상한 일이네. 호 해 줄게.”
정아는 올린의 눈에다 대고 입김을 호호 불어 주며, 사실 올린이 정신을 잃었을 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플레이를 떠올렸었다. 그는 사랑하는 올린의 옆구리에 아주 조그만, 반 뼘 정도 되는 창상을 입힌 다음 거기에다 좆질을 하는 꿈을 예전부터 품고 있었다. 갈비뼈 가운데를 가르고 좆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옆구리 정도를 바라는 건 온건한 취향이라고 정아는 스스로의 그릇된 욕망을 후하게 평했다.
게다가 올린이 잠든 사이에 조금만 원하는 걸 하고, 안을 깨끗이 세척한 다음에 안과 밖을 잘 봉합해 주고 항생제를 놓아 주면 생명이 위독할 일도 없을 터였다. 감염만 조심하면 아주 위험한 짓도 아니건만, 그 짓을 하려다 그만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렇게 해 버리면 기껏 바다가 아름다운 곳까지 여행간 것이 아깝게시리, 올린이 수영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올린이 약을 맞아 의식을 놓은 사이에 자신이 저질렀던 일과 저지를 뻔한 일들을 떠올리며 정아는 아주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이내 조금 전에 보였던 맛 간 미소가 그 얼굴에 다시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올린이 자신을 상대로 비슷한 음심을 품고 똑같이 해 준다면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올린이 자신의 무기력한 신체를 활용하여 어떤 쾌락을 누린 후일까, 상상하며 정아는 황홀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약 기운이 완전히 그 몸을 점령하여 꿈도 꾸지 않는 완전한 암흑 속으로 잠겨 드는 것이 그에게는 딱히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아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비록 올린의 성애 또한 일반적인 방식으로 해소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일지언정, 정아와 달리 올린은 남의 살을 찢고 거기에다가 사정하는 것을 꿈꿀 정도로까지 미친 이상 성욕자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또 한 가지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면, 올린은 정말 깊이 화가 났을 때 상대에게 맞서 싸워 상처입히는 것보다 그 사람을 상종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는 편이라는 점이었다.
정신을 잃어 가던 정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열다섯 시간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눈이 따갑거나 옆구리가 욱신거리기는커녕 가뿐하기까지 한 몸으로 깰 정아의 앞에는 무시무시한 시간이 놓일 터라는 것을. 올린은 첫 번째의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했지만, 같은 짓을 두 번 저지르려 시도한 연인을 쉽게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 일이 있은 후 삼 개월 동안 올린에게 투명 인간 취급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그것은 올린이 자신을 때리거나 상처입혀 주기를 고대했던 정아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이 될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모르는 정아는, 올린의 손에 의해 의식을 잃어 가며, 기대에 찬 행복한 미소마저 입가에 떠올리는 것이었다.
올린은 의식을 잃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미친 연인의 어여쁜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방을 떠나기 전에, 그 머리 아래 가만히 베개를 받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