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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고 빙수 (55/65)

# 망고 빙수

저택의 별채 중 가장 낡은 건물이지만, 올린이 액받이로서 머물렀고 지금은 액받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 머무는 별채에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 8월 말의 찌는 더위에는 좀 시원하게 지내 주면 좋으련만 올린은 에어컨 바람을 질색했다. 정아는 하도 매 맞고 살아서 뼈가 삭아 찬 바람에 삭신이 쑤신 게지 하고 하하 웃었지만 정규는 그 말을 듣고서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본채 뒤편의 수영장에 몸을 담그는 법도 없다. 에어컨도 수영장도 싫어하니 얼음을 날라 두라 일렀더니 고용인이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이 편치 않다며 만류다. 그러니 요새 볼 때마다 비쩍비쩍 곯아 가는 건 아마도 더위를 먹어서 그럴 테다. 올린이 곯고 말라 소멸하는 걸 막기 위해 정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지런히 실어 나르는 간식을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빙수 따위로 바꾸는 것 정도였다.

정규는 오늘도 어느 호텔에서 공수해 온 망고 빙수 상자를 소중하게 품은 채 걸어오다가, 별채 건물 뒤쪽을 가리기 위해 빽빽하게 두른 정원수 사이를 기웃거렸다. 뒤뜰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옮겨 두고 누웠을 올린의 모습이 보일까 했지만 정원사들이 어찌나 야무지게 손질해 두었는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무방비하게 늘어진 모습을 보여 주질 않으니 훔쳐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빙수가 녹으면 곤란하니 포기가 빨랐다. 정규는 점잖게 현관 쪽으로 돌아가 조심스레 발을 들이며 한 번 숨을 들이쉬고, 한껏 다정한 목소리를 했다.

“올린아.”

현관에서 목을 길게 빼야만 보일락 말락 하는, 거실 미닫이문 바깥의 뜰을 올린은 무척 좋아한다. 대개의 시간을 뒤뜰의 평상이나, 뒤뜰 정경을 바라보기 좋은 툇마루, 혹은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힌 거실에서 보내니 그쪽을 향해 이렇게 부르면 대답은 없더라도 금방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통이다. 저택에 돌아오며 올린이 요구했던 사항 중 첫 번째가 다른 곳 아닌 바로 이 별채를 온전히 자신의 공간으로 내어 줄 것이었고 두 번째가 자신이 요청하지 않으면 함부로 별채에 드나들지 말 것이었으니, 현관에 서서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에는 멋대로 들어설 수 없다. 정규는 처량맞게 마루에 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올린이 장현수라는 이름의 대학생이 되어 저택에 들어온 게 벌써 반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데도 올린은 정규에게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올린의 별채를 스스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정규는 아마 반년 동안 올린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아는 그동안 형제들이 한 짓에 부끄러움도 못 느끼고 키스하자 데이트하자 졸라 대며 올린을 쫓아다니고, 올린은 무시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싫어요, 꺼져요 대답을 해 주니 모르긴 몰라도 둘은 제법 친해졌을 터다. 정비야 함께 입양했다던 비만 고양이의 다이어트 문제로 올린과 머리를 맞대거나 동물 병원에 함께 들락날락하는 경우가 잦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정규에게는 정아가 가진 뻔뻔함도, 정비가 가진 고양이도 없으니 틈틈이 간식거리를 챙겨 와 은근슬쩍 궁둥이를 붙이는 김에 이런저런 말을 붙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자면 손잡고 입술을 들이밀고 자빠뜨려 버리고 싶지만, 지은 죄 큰 놈이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에게 감히 그럴 수는 없다. 또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끔찍한 과거로의 회귀밖에는 되지 않는다.

올린을 방문하는 구실을 다름이 아니라 간식으로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 올린이 무진장 배를 곯으며 고통받던 시절에, 그저 억울해하는 얼굴을 보는 재미로 올린의 식사 시간에 맞추어 별채 방문을 일삼던 전적이 있었다, 는 걸 올린으로부터 듣고서야 기억해 낸 게 바로 그 이유다. 액받이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처음 온 액받이를 적게 재우고 부족하게 먹여 몸을 말리는 것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네 도령 모두 올린의 식생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올린은 그때, 아침 식사로 타락죽 한 그릇을 얻어먹으면 점심 겸 저녁으로 달걀 한 알과 사과 한 조각을 먹는 식의 식생활로 여러 달을 살았다. 절식에 가까운 식이로 길들어지며 예절을 가르침 받느라 날마다 당하는 게 매질이었는데, 정규도 액받이의 얼굴이 나날이 여위는구나 하는 생각만 했지 그렇게 적은 음식을 급여받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오후 네 시경에 별채에 오면, 올린은 고용인 둘이 지켜보는 가운데 꼭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그 무언가라는 게 올린에게는 하루의 가장 푸짐한 식사요 점심 겸 저녁이었지만, 종류나 양이 어떻게 보아도 간식 수준이라 정규는 그게 올린의 밥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크지도 않은 딸기 두 개와 반 잔 정도 되어 보이는 보리차를 앞에 두고 식전에 외는 액받이들의 그 길고 긴 다짐 같은 것을 외고 있기에, 정규는

“어라, 우리 아가 딸기 먹는구나.”

하고 말했었다. 그 무렵 올린은 매일같이 매를 맞고 혼이 나느라 눈가가 늘 발갰다. 그때 깜짝 놀라 정규를 올려다보던 토끼 같은 눈이 동그랬던 것을 정규는 올린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기억해 냈다.

“어디, 맛 좀 보자.”

손을 내밀어, 딱 두 개 있던 딸기 중 하나를 집어 드는 모습을 울어서 빨개진 눈이 점점 크게 벌어지며 쳐다보았었다. 아마 그 광경을 올린의 시점에서 보았다면, 반나절을 배곯으며 혹독한 훈육을 받은 후에 겨우 얻은 소중한 딸기 중 하나가 셋째 도련님의 하얀 손에 잡혀 그 얄망스러운 입으로 쏘옥 들어가 버리는 일련의 과정이 아주 느리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딸기의 맛 따위 정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올린이 몹시 서럽고 억울한 얼굴을 했던 것은 뒤늦게나마 생생히 기억났다. 감히 도련님이 묻기 전에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당시 올린은 그 딸기가 자신의 저녁밥이요, 당신은 지금 쫄쫄 굶다 겨우 얻은 식사의 절반을 뺏어 먹은 거라는 항의 따위는 하지 못했다. 설워하느라 잔뜩 눈썹이 처진 얼굴이 얼마나 우습고 귀여웠던지 정규는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녀석의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을 쑤셔 넣었던가 남은 딸기 하나를 쑤셔 넣었던가, 여튼 그랬었다.

그날 그 울먹이는 표정이 보고파서 정규는 몇 번이나 더 들락거리며,

“아가 달걀 먹는구나.”

“아가 귤 먹는구나.”

“아가 고구마 먹는구나.”

“아가 버섯구이 먹는구나… 이상한 간식일세.”

하는 소리를 하며 매번 절반 정도를 빼앗아 먹었다. 올린은 처음엔 정규의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제 몫의 음식이 사라지는 것을 끈질기게 지켜보았지만, 그게 여러 번 반복되자 힘없는 눈을 바닥으로 떨구고 얌전히 맞잡은 손을 바르작거리고만 있었다. 장난질에 만족한 정규가 재미있어하며 식당을 떠나면 남은 것마저 빼앗길세라 바지런히 집어먹었다고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올린이었다.

“…그날 진짜 춥긴 했죠. 그치만 그것보다는요,”

정규가 사 나른 케이크를 얌전히 녹여 먹으며, 올린이 중얼거렸었다. 정규가 저수지에서의 일을 다시금 사과한 직후였다.

“그때 밥 뺏어 먹은 거 사과하셔야 하는데요.”

“밥?”

“네. 제 저녁밥. 거의 한 달을.”

간식을 뺏어 먹던 장난은 하도 오래전 일인 데다 별스럽게 괴롭히려 작정한 것도 아니어서, 정규는 올린이 조목조목 빼앗긴 품목들을 읊을 때에야 그때의 일이 기억났다. 딸기 빼앗기던 순간 울먹거리던 눈도 기억나서 정규는 웃었는데, 올린이

“…정말 배고팠어요."

하는 바람에 얼른 웃음을 갈무리했다.

올린의 기억 속에 딸기 한 알 고구마 한 조각 빼앗긴 기억은 무거웠다. 그는 처음에 저택에 오고 몇 달을, 매일같이 혹독한 훈육을 받느라 몹시 울며 지냈다. 걸음걸이가 얌전치 않다고 맞고, 얌전히 걸으려 애쓰면 삐쭉거려 보기 싫다고 맞고, 얌전히 앉아 있을 때 숨 쉬느라 가슴이 너무 많이 오르내린다고 맞고, 얕게 숨을 쉬느라 긴장하면 눈썹이 소란해 보인다고 맞았다. 맞을 때의 자세가 바르지 못한다고 벌을 서고, 벌을 설 때의 표정이 곱지 못하다고 혼이 나고, 혼나면서 우느라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면 또 그것으로 매를 맞고 나서야 겨우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하고 불려 우는 중에도 기대하며 식당으로 향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울기만 해도 배는 고프다. 하루 종일 고되게 훈육받은 후에는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프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손발에 힘이 없고 머리가 둔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 몸의 상태를 눈으로 살필 여유가 없더라도

‘이러다 곧,’

하는 위태로운 느낌이 매 순간 든다. 입안에 드는 음식은 쓰린 위를 달래 주기도 했지만, 둔한 뇌를 일깨우고 힘없는 손발을 움직이게 해 줄 에너지이기도 했다. 뭐라도 먹어야 다음에 이어질 훈육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습득하여 아픈 매를 덜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딸기 빼앗기던 순간 올린의 눈에 맺힌 눈물이 귀엽다고 해서 한 달여의 저녁밥을 강도질한 정규는, 그때 지은 죄를 갚으려면 아직도 간식을 사다 날라야 할 날이 한참이나 남았다.

그래도 정규는 자신이 정환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생각한다. 지은 죄의 경중이 아니라 관계의 진전에 있어 그러했다. 정환은 올린이 사람으로서, 네 형제의 연인과 비슷한 소중한 존재로서 저택에 돌아오던 날에는 옆집에 예쁜 애 이사 오는 거 지켜보는 소년처럼 수줍어하느라 인사도 못 하더니,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올린을 피해 다니는 꼴이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둘이 같은 대학에 다니니 강의 들으러 오가는 길에 같은 차로 이동한다는 구실로 예전의 앙금을 풀 수도 있으련만 정규가 보기에 정환은 바보 천치라서, 정아가

“오늘은 내가 올린이 데려다줄 거야. 난 이제 스토커도 없으니까 자유로운 몸이거든. 올린이가 죽여 줬어. 총 쏴서."

하고 되는 대로 지껄이며 나갈 준비를 마친 올린이를 끌어당기던 모습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라도 소통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건만 아무것도 못 한다는 듯 얼뜨기처럼 물러나는 꼴이 가관도 아니었다. 정규는 그때 그 심통 난 것도 같고 삐친 것도 같던 정한의 얼굴을 생각하며 웃다가, 자신은 정환과 달리 올린과 제법 친해진 것 같으니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닷새에 한 번 찾아와 함께 간식을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진지하게 미래 계획을 다잡아 보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오래도록 대답이 없다. 학교는 방학이고 올린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즐기지도 않는 데다, 토요일에는 마치 정규를 기다려 주는 듯이 꼭 별채에 있었는데 이름을 불러도 기척을 보이지 않는다. 고용인이 곁에 있는 게 불편하대서 혼자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혹시 삼복더위에 실신한 건 아닐까, 덜컥 걱정된 정규는

‘허락 없이 함부로 드나들지 말랬는데.’

하고 네 남자 앞에서 그 말을 하던 올린의 엄격한 얼굴을 떠올리다가도, 손안에 든 망고 빙수 상자를 내려다보고

‘냉장고에 넣어 주지 않으면 다 녹아 버릴 테니까.’

하는 핑계를 만들어 신을 벗었다.

현관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거실과 그 너머 뒤뜰이, 왼편에는 주방과 식당이 이어진다. 주방과 식당 쪽에도 바깥으로 향하는 미닫이문이 있으나 그쪽은 풀도 나무도 예쁜 꽃도 없이 삭막한 돌담 따위가 보일 뿐이라 자연의 푸르름을 즐기는 올린이 썩 좋아할 만한 공간은 아니다. 그러니 정규가 망고 빙수를 녹지 않도록 잘 두려는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주방을 향하여, 다른 놈도 아닌 정환을, 올린과 아직 눈 한 번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으니 용서받기는커녕 관계에 있어 조금의 진전도 이루지 못했을 동생 놈을 발견하고, 웃통 벗은 그놈이 올린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머리를 들이미는 장면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아래가 발가벗기운 올린이 상체를 엉거주춤히 세운 채 무척 아픈 것을 참는 듯이 고개를 뒤로 활짝 젖힌 것을 확인했을 때,

“이 새끼가 아직도…!”

하며 빙수 상자가 홀랑 뒤집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달려들어 뒷덜미를 잡고 끌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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