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환
오랜만에 느껴지는 가위다. 명치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각은 익숙하다. 뇌는 깨고 몸은 깨어나지 못한 때에는 작은 소리도 무서운 망상이 되어 자신을 공격한다. 이럴 때 올린은 말초의 운동 기능이 되살아나면 쉽게 가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여 알고 있었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부터 움직여 보기 시작했는데, 고군분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그 움직임이 지나치게 쉬웠다. 올린은 잠시 자유로이 움직여지는 손가락에 의아함을 느끼다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부연 시야 안에 노란색의 둥근 것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느껴진 것은 따뜻하고 습한 공기였다. 머리맡에 놓인 가습기에서 물이 꿀렁,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자 청각과 함께 시각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올린이 누운 곳은 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비록 아늑한 병실처럼 꾸며지기는 했으나 이곳이 병원이 아니라 한북동 저택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익숙한 창틀, 익숙한 문, 호화스럽고 무거운 가구들이 반가웠다. 다시 저택에 돌아온 것을 알았어도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은 네 남자가 특별히 변화했을 거라고 믿기보다는 자신이 변화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투명한 커튼을 통과한 햇살이 따사롭다. 눈을 돌리지 않아도 바로 보이는 곳에 온갖 호사스러운 꽃이 장식된 화병은 올린이 좋아하는 푸른색이다. 그리고 가위는 아니되 마치 가위인 양 가슴을 짓누르던 것은, 거대하고 노랗고 둥근 몸을 한,
“뭵-.”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비만하여 무거웠다. 환자의 명치에 앞발 뒷발을 오그리고 앉은 모양이 잘 구운 식빵 같다. 노란 털 사이로 희미한 줄무늬가 보이는 것이, 익숙한 것도 익숙하지 않은 것도 같다. 올린의 기억 속에 자신이 돌보던 아기 고양이는 이렇게 커다랗지도 뚱뚱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양이의 연한 녹빛 눈은 올린을 알아보는 듯 한가롭다. 동자가 가느다란 눈의 느긋한 깜빡임이 어색하여 올린은 입을 열어 너 혹시 혜향이니, 하고 물으려다가 밭은기침을 뱉었다.
시선이 닿지 않던 구석에서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왔다. 앉았던 노란 고양이가 똥똥한 발로 발딱 일어나 그 사람을 향해 하악질을 하자, 그는,
“물, 물만 주고.”
하고 변명하며 고양이의 위협을 피해 간신히 침대 버튼을 눌러 올린의 상체를 일으키고 유리컵에 따른 물을 내밀었다. 2년 만에 만났지만, 바로 어제도 보았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시중드는 정규의 손으로부터 물을 받아 마시는 올린의 태도가 담담하다. 그러나 고양이는 올린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계 태세였다. 올린은 제게 물을 건넨 후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가 앉는 정규를 보며, 그와 자신 사이에 정산할 일이 특별히 남지 않았음을 더듬어 생각했다. 자신은 함께 살자던 정규를 배신하여 돈을 훔쳐 달아난 일이 있으나, 그 전에 정규는 자신을 얼음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었다. 무딘 계산 속에 올린은 고양이의 등에 손을 올리고,
“괜찮아.”
하고 진정시켰다. 고양이는 못마땅한 소리를 내며 도로 묵직하게 앉았다. 보동보동한 몸을 문지르며 과체중한 몸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던 올린은 제 시중을 든 정규에게일지 아니면 조금 전 간호사와 함께 들어온 정비에게일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정아 형은요.”
하고 물었다. 고양이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왼손가락이 쉽게 움직여 주는 것을 보니 자신을 쏜 광인의 사격 솜씨는 엉망인 모양이었다. 어깨가 날아간 줄 알았는데 통증조차 얕다.
“수술 중이야. 들어가기 전에, 구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 달랬어, 그리고 또 하나,”
정비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간호사가 올린의 몸을 살피고 기계를 체크하는 동안 올린의 가슴팍 위에 얹힌 고양이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었다. 정규에게는 그토록 암팡스레 경계하던 고양이가 정비에게는 순순히 안겨 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택에 돌아와 달라고….”
정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정아가 그리 전하라 시키고 들어간 모양이다. 올린은 그 말을 전하는 정비의 얼굴에 어린 당혹감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더없이 뻔뻔한 소리를 제 대신 하라는 정아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전하면서 면목 없어 하는 정비나 사실 똑같은 놈들이다. 세상 제대로 알지 못하고 덜 자란 것들. 덩치만 큰 것들이 우스워 웃은 그 웃음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정비와 더불어 구석에 앉은 정규마저 긴장하는 것을 느꼈지만, 올린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살 만했나 보네요.”
올린은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척 저 멀리 앉아 핸드폰을 만지는 정환을 바라보며 답했다. 목을 가리는 형태의 옷을 입은 정환을 불러 그 니트 아래 숨겨진, 자신이 입힌 상해의 흔적을 만져 주고 싶었지만, 또 그러기엔 미운 구석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정비의 품에서 올린의 배를 향해 뛰어내려 헉, 소릴 내도록 한 이 비만한 고양이가 정환을 용납할지 모를 일이다.
“다들 생각이 같습니까?”
고양이의 얼굴을 만지고 그 조그만 이마에 거리낌 없이 이마를 비비며, 올린은 여지를 주는 듯한 말로 물었다. 잔뜩 긴장한 정비가 말을 시작하기 전에 물을 따라 입술을 축이고, 구석과 먼 데 각각 앉아 있던 나머지 두 남자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기대를 잔뜩 담은 그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올린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이제 분유 몇 방울이라도 더 먹이려고 노력하는 대신 사료 한 알이라도 덜 먹여야 할 혜향을 바라보았다.
잘못된 제도와 미신 속에서 강제된 형태이긴 했으나 자신은 액받이로서 이들을 만났다. 그것은 닥쳐올 횡액을 대신 받는, 매 맞는 아이의 혹독한 발전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여 감사조차 받지 못하는 그 직위를 유지할 생각은 없었으나, 애초부터 올린은 액을 막는다는 그 역할만은 좋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갖 나쁜 것으로 보호한다니, 비록 그 구실을 하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이 크고 명칭이 멸칭이긴 했으나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올린은 자신이 타고난 그 액받이로서의 기질이 대관절 무엇인가를 오래도록 고민했었는데, 그것은 용모의 아름다움이나 성애의 능숙함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만한 힘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만한 자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액받이만이 아니라, 훌륭한 연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이들과 한 공간에 있으며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결국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온함 속에 보고 싶던 이들을 보고 있는 기쁨이 있었다. 나쁘지만 좋은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장 포수의 말은 모호하고 뜻 없이 들렸으나 올린이 의미를 만들었다. 비록 이들을 자신의 삶에 들이는 것, 그들의 삶에 자신이 들어서는 것이 모종의 위험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올린은 그것을 무릅쓰기로 했다.
기분 좋은 무거움으로 제 몸을 짓누르며, 이제 제 목을 껴안듯 앞발을 벌려 길게 뻗는 노란 짐승을 마주 안았다. 머리 검은 짐승들이 자신들도 안기고 싶어 하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침댓가에 놓인, 장 포수가 사 주었던 올린의 핸드폰이 울렸다. 올린은 더듬더듬 핸드폰을 들어 낯선 번호로부터 수신된 메시지를 열었다.
-돌아와 줘. 잘할게. 정환이가.
올린은 눈을 들어 바로 몇 미터 앞에 앉은 정환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정환은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고개만 살짝 돌리고 올린의 얼굴을 살폈다. 참, 개 같다고, 올린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