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추격 (53/65)

# 추격

다른 대학에도 수의학과는 있다. 하필이면 한국대에 지원한 것은 장 포수 아저씨의 소원이기도 했거니와, 정말로 합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정환의 학교다. 예전에 올린은 이곳에서 개처럼 끌려다니며 윤간당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괴로운 기억이 있다. 장 포수 아저씨가 죽은 아들이 살았다면 이 학교에 입학했을 거라고, 자랑 겸 하소연 겸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라면 올린은 이딴 곳에 원서를 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정문에서 내려 수의대 쪽으로 오르다, 문득 올린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에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려 내려다보니 운동장의 잔디는 푸르고 멀리 보이는 산은 껑충히 가까웠다. 사람 없는 캠퍼스, 멀리 언덕 아래에 초록색 버스 하나가 느리게 지났다. 올린은 괜히 그 버스에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털어 냈다.

교수들은 장현수가 중학교 졸업 후에 고등학교에 가는 대신 뭘 하고 지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올린은

“공백 기간이 있는데 그동안 뭘 하고 지냈어요?”

하는 물음에는 태연스럽게 지난 2년이 장현수의 시간인 양 거짓말하고,

“왜 수의대를 지원했습니까?”

하는 말에는 아무렇지 않게 팔자 얘기를 해서 교수들을 웃겼다. 올린은 자신에게는 중대하게 다가온 이야기가 어째서 교수들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는지 몰랐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게 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인데, 올린에게는 어쩐지 남을 웃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그들의 웃음이 그치기를 담담히 기다렸다가, 나가도 좋다는 말을 듣고 일어섰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재로 먼저 들어가야 했다. 인재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 버스를 타면 내일 점심 무렵에는 집에 도착할 것이다. 복잡한 노선도를 확인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아랫집에 부탁해 둔 사냥개들을 생각하며 복잡한 길을 따라 걸었다. 서울이 낯선 것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었다. 그는 한북동 저택에서 지낼 때에도, 그 이전에 화송에서 지낼 때에도 이 거리를 걸은 적이 없었다.

아직 버스 시간은 한참 남았다. 올린은 잠시 터미널 실내에 앉아 있다가 승차장으로 나갔다. 벽에 등을 대고 나란히 붙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사람 냄새가 섞인 답답한 공기 속에 있는 것보다는 춥더라도 밖이 나았다. 그는 패딩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우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눈을 감았다. 장 포수 아저씨 없는 집, 주차장 옆 개장에서 자신을 기다릴 포인터들을 생각했다.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컹컹 짖어 대는 소리가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게 관심을 갈구하는 목소리임을 안다. 올린은 그 사납고 귀여운 개들의 점박이 무늬 하나하나를 꿈에서 만난 것 같았다. 그들을 낡은 코란도 뒤에다 태우고 밤 사냥에 나서던 장 포수 아저씨의 얼굴도 본 것 같았다. 아, 겨우 가족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니 또 혼자였다.

원래부터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다지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가진 것 없이 오롯한 혼자의 몸으로 제주도를 떠날 때도 막막함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환경에 따라 얼마나 갈대같이 변화하는지, 본래 혼자였던 때를 잊은 듯이 올린은 혼자임을 비통해했다. 그 허전한 비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올린은 장 포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했던 네 사람을 떠올렸다. 과거는 마음보다 몸에 더 깊이 새겨져 있어 떠올릴 때마다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올린은 사랑했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랑이라도 끝내 없었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새로운 가족의 소실로 말미암은 반작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기엔 그들을 떠올리던 게, 지나치게 꾸준한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장 포수가 멀쩡히 살아 있던 중에도 올린은 여러 번이나 제 좆을 쥔 채 그들을 생각했었다. 저에게 주어진 좁은 방에서였다. 네 명의 형제들에게 같은 무게로 나누어져 향하는 마음은 몸에도 영향을 주어, 올린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제 항문에 손가락을 넣었었다. 오래 길든 몸은 젖꼭지를 조금 문지르는 것으로도 쉽게 젖어 들고, 침입한 손가락이 예전에 사랑하던 남자들의 자지인 듯 뻐끔거리며 물었었다. 올린은 제 옷자락을 입에 문 채, 네 명 중 누구를 특정하지 않는

“도련님, 도련님….”

하는 신음을 하며 제 뒤를 쑤시고 사정한 후에는, 스스로를 향한 배반감과 치욕감의 탓만은 아닌 허탈에 젖기도 했었다. 저택에서의 시간에서 벗어나야만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로 믿고 떠나왔다. 그런데 그들을 생각하면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았던 미안함이 함께 떠올랐다. 어쩌면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더불어 마음을 물들였다.

“아저씨, 뭐가 되게 나쁜데, 또 그게 좋으면 어떡하죠?”

올린은 장 포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올린은 그 말을 듣고 으음, 하고 생각에 잠기던 장 포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장갑 아래 감춰진 구멍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서너 걸음 앞, 지붕 없는 곳에 눈이 쌓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눈을 드니 버스 나간 자리에 들어오는 건 하늘이었다. 눈이 흩날리는 하늘은 너무 밝아서 눈이 시렸다. 쨍한 느낌을 가리려 눈가를 닦다가 멀리, 저 건너편 승차장에 선 사람이 눈에 들어와서 잠시 손을 멈췄다.

순간 올린은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남들 다 겨울옷을 입었는데 홀로 셔츠 차림이니 헛것처럼 여겨질 만도 했다. 갈색 머리카락, 어딘지 붕 뜬 듯한 눈으로 웃는 얼굴, 금속 테의 안경. 올린은 그가 정말로 자신이 기억하던 정아가 맞는지 확인하려 눈을 부릅떴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도로 그 저택에 끌려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움은 물화되었던 나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네 도령들을 향한 것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회귀는 위험하다. 손톱으로 마르고 단단한 것을 긁을 때의 소름 돋는 그 감각, 짐승의 살을 베다 제 살마저 함께 베는 순간의 머리털 솟는 그 감각은 위험에 대한 신호였다. 올린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올린이 기이한 질문을 했던 그즈음, 장 포수는 유독 덩치가 큰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와서는 왜 이렇게 거대하고 강한 짐승이 자신에게 사냥당할 수밖에 없었는 줄 아느냐고 물었었다.

“총이 있어서요?”

“총?”

장 포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에게 총이 있더라도 멧돼지가 들이받으면 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멧돼지를 몰기 위해 개를 푸는 거다. 장 포수의 지론에 따르면, 멧돼지가 사냥당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딱 하나,

“먼저 도망갔기 때문이지. 도망 안 가고 날 쫓아왔으면 나도 저놈 못 잡았어, 저놈한테 사냥당하지 않으려고 줄행랑치느라.”

스스로를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으로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정아는 그린 듯이 웃고 있다가, 앉았던 올린이 바로 서는 것까지를 보고는 바로 뒤의 유리문을 통해 사라졌다. 올린은 느긋한 움직임으로 사라지는 정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가빠지는 숨을 씨근덕거리다, 몇 초나 지나서야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달렸다. 이제 막 도착하는 버스와 승객을 싣고 나가는 버스와 버스에 타기 위해 짐을 들고 꾸물거리는 사람들과 이제 막 하차하여 더딘 걸음을 걷는 사람들 사이를 어지럽게 달렸다. 기역자 모양으로 휘어진 저쪽 끝 승차장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었건만 사람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승차장에 어지럽게 놓여진 간이 의자와 이제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으려고 유리문을 밀고 달려 나오는 젊은이들에게 부딪치고 떠밀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눈 쌓인 데를 왔다 갔다 한 젖은 발자국 덕에 바닥은 미끄러웠다. 그러나 넘어질 듯한 순간마저도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정아가 섰던 데에 도달하여, 그가 밀고 들어갔던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저 멀리, 밖에서 올린이 뛰어왔던 바로 그 방향을 향하는 정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곧 닿을 수 있을 듯 보였다가 다시 인파 속으로 잠겨 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그를 놓친다면 영영 그로부터 도망 다녀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싫다. 터미널에 연결된 몰의 북적임 속으로 섞여 든다면 올린은 그를 놓치게 될 터였다.

“정아 형!”

목이 터지게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형, 저예요, 올린입니다!”

불린 사람은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아는 이제 거슬러 올라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계단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오로지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달리기 시작하던 때와 달리, 이제 올린의 다리에는 새 힘이 돋았다. 자신이 사냥꾼이 되어 쫓자 정말로 달아나는 정아의 뒷모습이 전복으로 인한 희열 같은 것을 선사했다. 계단에는 깃발을 든 사람을 필두로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즐거운 듯이 떠들어 대며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올린은 계단의 난간을 타다시피 미끄러져 정아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갔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지하 광장, 쇼핑몰과 백화점을 연결하는 분수대에 옹기종기 앉은 사람들 사이 멀리 유리문을 향해 달리는 정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탕!

낯설지 않은 파열음과 함께 정아가 막 밀어 젖히려던 유리문이 산산이 조각나 깨어졌다. 실내의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의 움직임이 거의 동시에 멎은 다음 순간, 누군가의 비명과 울음소리,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사이렌 소리로 다시 한번, 올린에게는 익숙하고 태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설 총소리가 울렸다.

탕!

처음의 총성에는 순간 몸을 낮추었던 올린은 두 번째에는 움직임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가 노리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추격하던 사냥감임을 알아챈 올린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조각난 유리문 사이를 통과했다. 유리문 밖은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알지 못하는 공간을 재빨리 훑은 올린은 정아의 옷자락이 또 다른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여름 장 포수와 올린은 어린 고라니를 뒤쫓아 산을 헤맨 적이 있었다. 밀렵꾼이 놓은 덫에 걸린 놈이었다. 멀리서 보면 성체와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덩치가 큰 것을 보고도,

“저놈은 애기야. 아무리 유해종으로 지정된 동물이더라도, 저렇게 어린 개체는 도와줘야 해.”

하고 장 포수는 말했었다. 당연히 여름이었으므로 그들의 손에는 총이 없었다.

덩치만 큰 어린 고라니는 제 발목에 덫을 단 채 깊은 산중으로 뛰어 달아났다. 가느다란 발목을 자를 듯 문 덫을 풀어 주기 위해 그것을 추격하던 장포수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었다. 올린은 지하철 개찰구를 뛰어넘는 날렵한 정아의 움직임에서, 덫에 물린 어린 고라니를 연상했다. 달리는 동안 추격의 이유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얼굴이 그때 장 포수 아저씨처럼 진지할지는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올린은 긴 계단을 뛰어내리고 사람의 무리와 부딪치면서도 정아를 시야에서 놓지 않았다. 그를 쫓아 마침내 도달한 플랫폼에는 지하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제 막 떠나가고 있었다. 빈 플랫폼에 선 채, 올린은 자신이 놓친 사냥감에 대해 남은 어떤 감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남들보다 한발 늦게 플랫폼을 떠나던 사람들이 땀투성이 청년이 으르렁거리는 걸 보고 몸을 피해 지나치는 것조차 눈에 들지 않았다.

지하철의 날카로운 소음과 지상의 것과는 완연히 다른 빛, 어딘지 웅성거리듯 흐르는 공기와 사람으로 가득하였다가 일시에 비워지곤 하는 공간의 복잡한 냄새가 올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가운데 선 채, 묻고 싶었던 말들과 두 번 울린 총성과 눈부시던 얼굴과 마구잡이로 섞인 두 개의 마음이 주위의 풍경과 함께 휘몰아쳤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격렬한 어지럼에 빠져들던 올린을 돌려세우는 손이 있었다.

전력으로 달려오던 흥분감이 아직 남았으므로, 그 팔을 쳐 낸 다음 체중을 실어 미는 동작이 거칠었다. 온 힘을 다해 벽으로 밀어붙이고 보니, 부딪치는 충격에 순간 미간을 찌푸리다가도 곧 미치광이처럼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은 자신이 놓친 줄로만 알았던 사냥감이었다. 올린은 두 번이나 울린 총성에도 불구하고 핏자국 없이 멀쩡한 정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밖으로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날 어떻게 찾았습니까.’

‘지난 2년 동안 감시한 겁니까.’

‘왜 내게서 달아났습니까.’

‘나 말고 당신을 쫓던, 총 든 자는 누굽니까.’

‘이제 우리는 만난 겁니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날 이대로 내버려 둬요.’

‘아니, 실은, 내버려 두지 말아요.’

하는 혼란한 기분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감격한 듯한 정아가 개가 입질하듯이 워, 하는 소리마저 내며 입을 맞추려 들기에 순간 그것을 피한 올린은 증오나 분노와는 다르되 또 어딘지 흡사한 눈빛으로 정아를 노려보았다. 기만적일 정도로 온화한 얼굴은 여위었어도 아름다웠다. 웃지 않아도 웃는 것처럼 끝이 말려 올라간, 찬 바람에 말랐어도 붉은 기운을 잃지 않는 얇고 긴 입술 위로, 격한 감정에 휘둘릴 때마다 하얗게 질리곤 하는 올린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맹수가 사냥한 고기를 뜯어 먹으려는 것처럼 야만적으로 벌어졌던 입술이, 어떤 순간에도 장난만 치는 미운 얼굴로 내려앉았다. 정아는 처음으로 올린으로부터 선사받는 키스를 입을 크게 벌리고 맞이했다. 곤란할 때 일부러 심한 장난을 치는 어린애처럼, 그는 게걸스러운 쩝쩝 소리를 내며 마주 덤벼들었다. 올린은 정신 차리라는 듯이, 꼭 뺨을 치듯 거세게 손바닥을 올려 정아의 얼굴을 강하게 붙잡았다. 정아는 장갑 너머 뜨거운 올린의 손을 반가워하며 얌전히 눈을 감았다.

기억하기로 올린의 입술을 핥을 때 그 입술에서는 늘 짜고 쓴 맛만 느껴졌었다. 그것이 올린의 입술에서 나는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 입술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어쩌면 예전에 느꼈던 그것은 눈물의 맛인 모양이었다. 혀를 뽑을 것처럼 달려들던 올린의 입술은 점잖되 조금은 야한 기분이 들도록 혀끝만 살포시 얽었다가, 겁많은 애인을 다정히 어르듯 정아의 윗입술을, 그리고 아랫입술을 빨아 주고는 마지막으로는 도톰한 입술을 모아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의 그 소리는 어린아이에게 애정을 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정스러워서, 정아는 감았던 눈을 뜨기 전에 목 안으로 웃었다.

올린은 짧은 키스를 끝내고 저와 코끝을 마주하도록 가까운 정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엉거주춤 벽에 기댄 채 안경마저 삐뚤어져서 웃는 얼굴이 과거 어떤 식으로 자신을 학대했는지 잊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덩치만 큰 어린 고라니와 자신이 어쩌면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그는 느꼈다. 희망의 근거라곤, 제 키스를 얌전히 받아들이는 이 얼굴뿐인데도.

“뭐가 되게 나쁜데, 또 그게 좋으면 어떡하죠?”

올린이 그 말을 물었던 때는 면허도 없이 처음으로 코란도를 운전한 직후였다. 운전하던 장 포수가 조수석에 있던 올린에게 다급히 운전대를 맡겼다. 올린을 향해 오른쪽, 왼쪽, 저기 뒤를 돌아가, 하는 식으로 지시하여 사냥감을 몰도록 하고는 조수석 창으로 상체를 반이나 내민 채 공기총을 조준했었다. 장 포수는 중학생이던 아들도 이 정도의 보조는 할 수 있었다며 여유 만만해했지만, 올린은 사냥이 끝난 후에도 손이 덜덜 떨렸었다.

“나빠도 좋으면 해야지 뭐. 하고 싶은 거 참고 사는 게 사람이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나.”

정아의 입술에서 입술을 뗀 올린은 그때의 장 포수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해방감과 함께 자신만만함이 섞여 있었다. 정아가 그 눈에 홀린 듯 바라보고 자신에게 홀린 정아를 올린이 들여다보는 순간, 탕, 세 번째의 총성이 울렸다.

울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하던 올린은 웃는 얼굴도 보기 좋았다.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을 붙잡아 키스한 어리석은 얼굴에 어린 웃음은 행동만큼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올린이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그 선택을 배신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정아는, 하얀 얼굴에 웃음이 띄워지던 것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그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잡아먹을 듯한 키스에 입술을 내어 줬을 때는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던 것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심장 박동은 지나치게 느리게 느껴졌다. 어쩌면 박동이 느려진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인지하는 자신의 뇌 기능이 잘못되어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허물어지는 몸은 너무 무거웠다. 부둥켜안은 손안의 몸은 단단하나 날씬하다. 자신을 추격하는 바쁜 발소리조차 나는 듯 가벼웠다. 그런 올린인데,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었다. 미끄러지는 몸을 붙잡는 두 팔은 쓸모없이 버둥거릴 뿐이었다. 마른 무릎이 찬 바닥에 부딪치는 쿠우웅, 소리마저 느리고 기인 소리로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바삐 얼굴을 돌리는 바람에 안경 위로 늘어졌던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둘리는 감각마저 지나치게 선명해서 모든 것이 꿈 같았다. 통각이 마비된 몸과 감정이 결핍된 마음으로 평생 살아온 정아에게, 지금 이 순간 밀려들어 오는 모든 자극은 너무 격렬했다. 손안에 구겨지는 올린의 옷자락, 그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뜨겁게 치솟아 오른 피가 올린의 어두운색 티셔츠를 뚫고 자신의 흰 셔츠 안으로 스며들어 맨몸까지 닿는 느낌, 심지어 출혈의 소리마저 생생하여 기이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지는 그 감각을 받아들이느라 정아는 먼 데를 바라보는 시선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허물어진 올린의 몸은 느리게 호흡했다. 골반과 아랫배 사이에 와 닿는 올린의

“허억, 허억,”

하는 숨소리는 조금의 야한 구석조차 없이 뜨겁고 축축했다. 정아는 그 숨을 가여워하고 괴로워하며, 혹시 이, 심장을 누군가 움켜잡았다가 놓아주고 다시 아주 세게 움켜잡는 듯한 느낌이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사는 감정이라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늘 허공에 붕 떠 있던 자신의 발목을 올린의 숨결이 움켜잡아 바닥에 내려놓아 준 것 같았다. 발바닥이 땅에 닿자 비로소 느껴지는 현실적인 모든 것이 징그러운데, 또 그것이 너무 아파서,

“올린아!”

정아는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이며 올린의 몸을 간신히 끌어안았다.

플랫폼 건너편에 자신과 꼭 닮은 그림자가 서 있다. 올린을 사냥감 삼아 쏜 엽총을 천천히 내리며 웃는다. 그림자는 정아가 이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던 때부터 이정의 이메일로 러브레터를 보내곤 하던 자다. 이정이 만든 잔혹하고도 기이한 약들을 사랑하며 그것을 제조하는 당신과 같이 죽어 한 몸이 되고 싶다는 글을 보내던 사람이다. 그러나 정아는 이정으로서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그림자가 정아를 찾아낼 방법도 없었다. 올린이 피랍되어 선상 경매의 매물로 오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샤에게 얼굴을 드러낸 대가로 올린을 넘겨받은 정아는 이후로 이정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정아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일반 대중에게 알려져 가문에 폐가 될 위험이 있기도 했거니와, 이정의 약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곤란을 겪은 정적들이 얼굴을 알게 된 이정을 뒤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집요한 것이 이정의 얼굴을 알기 전부터 기이한 집착을 보이던 이 남자, 그림자였다.

올린이 정비의 품에서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된 무렵 그림자와의 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올린은 당연히도 알지 못하지만, 정아는 올린을 구해 낸 대가로 국내외에서 운영하는 공장 여러 곳의 문을 닫았다. 저택에 오가는 것조차 긴밀히 해야 할 만큼의 위험 속에서 그림자와의 숨바꼭질을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성가신 사람쯤으로 생각하던 그림자에 대한 흥미가 더해진 계기는 우습게도 그림자가 이전보다 재미있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었다. 폭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던 올린이 정비의 손에 의해 구조되었음을 알고, 정비가 올린을 놓아주었음을 알고, 올린이 놀랍게도 제 목숨을 이어 갈 만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아는 어쩐지 이제 올린에게 향하던 자신의 흥미를 그림자에게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아에게 생명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 특히 지나치게 개체 수가 많다고 느끼는 생물인, 사람의 것이 그랬다. 그리고 굳이 따진다면, 사람의 것 중에서도 특별히 재미없는 자신의 것이 그랬다. 오로지 재미를 보기 위해 사는 것일 뿐인 정아의 삶에 재미있는 것이 많지가 않았다. 이전에는 사람인 주제에 스스로 물건인 줄 알면서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 하던 올린이 재미있었는데, 그가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비슷한 것을 쟁취해 내자 어쩐지 싱거워졌다. 새롭게 자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도발하는 그림자와 술래잡기를 계속하다가 그림자가 바라는 방식으로 생을 끝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중국으로, 동남아로 떠돌아다닌 것은 죽음을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꽤나 즐거웠던 술래잡기에서 그림자가 유능하지 못했던 까닭도 아니었다. 정아는 그림자가 몇 번이나 자신을 잡았다가 놓아주고, 또 잡았으면서 잡지 못한 척한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정아 자신이 그러하듯 즐거움을 연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러 난이도를 낮춘 놀이는 시시해지게 마련이고, 시시한 놀이를 계속하는 것은 정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저자가 원하던 대로 한날한시에 죽어 줘야지 마음먹었었다. 2년이나 재미있는 놀이 시간을 제공해 주었으니 그 정도의 호의는 얼마든지 베풀어 줄 용의가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이유는 올린이었다. 제 목숨에 그러하듯 이 세상에도 미련 없는 그가 따로 정리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약이니 재산이니 명성이니 하는 것들은 죽으면 끝으로, 정리하는 것조차 집착이었다. 그는 오로지, 그림자 이전에 자신을 가장 재미있게 사로잡았던 올린을 단 한 번만 더 보기 위해서 한국에 왔을 뿐이었다. 올린이 이전의 모습과 동일한 형태로 살아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이미 올린의 이름을 아는 저것으로 하여금, 올린을 해치는 즐거움마저 누리게 할 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올린은 늘 그러했듯이 정아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올린의 어깨에 흩뿌려지듯 박힌 산탄은 이 애의 몫이 아니었다.

총성에 순식간에 비워진 플랫폼에서, 두 개의 철로를 사이에 두고 그림자와 정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엽총을 짊어진 채 철로로 뛰어 내린 그림자가 저벅저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정아는 올린을 바닥에 눕혀 두고 주머니 속의 주사기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맞이했다. 그림자는 정아의 앞에서, 처음으로 정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얘지? 네가 수음하면서, 이름을 불렀던.”

하고 물었다. 총 끝이 정신을 잃어 무력해진 올린을 다시 한번 겨눴다. 한순간 뛰어들어 기다란 총신을 허공으로 쳐올린 정아의 귀에 쾅, 천둥 같은 총소리가 울렸다. 그림자와 숨소리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순식간에 다가든 정아가 다른 손으로 그림자의 손으로부터 총을 떨어뜨렸으나 그림자는 그 바로 다음 순간 한 걸음 물러났다. 총을 놓친 손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쥐어져 있었다. 정아에게는 주사기가 있었으나 칼보다는 사정거리가 훨씬 짧았다.

정아는 애초에 죽을 생각이었다.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달콤한 쿠키를 양보하는 데 별 주저함이 없는 것처럼, 그는 살고 싶어 하는 올린을 위해 살고 싶지도 않은 자신이 죽는 건 별일 아니라 여겼다. 저돌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그림자는 정아와 같아, 육탄전을 대비한 훈련을 받은 자도 아니며 완력이 특별하지도 않다. 그가 휘두르는 칼끝에는 오로지 자신과 정아가 한날한시에 죽되, 둘 중 누군가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겨 두지 않겠다는 미친 신념이 묻어 있을 뿐이었다.

미친 칼끝이 정아의 얇은 셔츠를 베고 살을 그었다. 칼날에 살이 갈려 내장이 다 쏟아지더라도, 그림자에게 다가가 목에 주사만 놓으면 확인 사살을 위해 올린을 향할 두 번째의 가해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제 목숨을 아까워 않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가드는 정아는 팔과 배와 어깨와 얼굴을 베이는 순간마다 잠시 느려지는 일은 있었으나 그치는 일은 없었다.

통각은 신체를 보호하는 경고 신호다. 통각 없이 태어난 자는 자신의 몸에 닥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생존에 불리하다. 그의 양친은 어린 정아가 통증 감각도 감정 인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주받았다 생각하고 후계 교육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저주는 축복이 되었다. 무기라곤 주사기 안에 든 약뿐인 사람이 거리낌 없이 칼 든 자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날에 베이는 아픔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림 없는 공격은 위험했다. 피투성이가 된 셔츠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달려드는 정아를 결국 그림자가 타고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번의 상해가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정차하지 않고 지나는 지하철의 소란한 소리 끝에, 정아는 그림자의 몸에 짓눌린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림자는 사랑하는 이정이 자신의 손에 곱게 죽어 주는 대신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향해 덤벼들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칼은 이제 정아를 막기 위해 베는 대신 처벌하기 위해 찔렀다. 전에도 다친 적 있어 큰 흉터가 남은 옆구리에 몇 번이나 박혀 드는 칼날은 정아의 입에서 피와 함께 바람처럼 새는 숨을 쏟아 내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정아는 제 얼굴을 향해 떨어지는 그림자의 눈물을 닦아 줄 것처럼 피 묻은 손을 뻗었다가,

“같이, 죽자며.”

하는 헐떡임과 함께 손바닥을 내보였다. 네가 나를 찌른 만큼 나도 너를 찔러 줄 테니, 손에 들린 칼을 달라는 뜻이었다. 그림자는 이정을 무력화해 두고 올린을 죽이기 위해서는 상처입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아픈 줄 모르는 정아는 자신이 돌아서는 순간 다시 달려들 것이다. 그림자는

“잠깐만, 얌전히 있어, 자기야….”

하고 말하며 내밀어진 손을 바닥으로 짓누르고, 피 묻은 칼을 들었다. 단검이 정아의 오른손을 관통하여 바닥에 박히는 바로 그 순간, 정아의 안에서 낯선 것이 들이닥쳤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로부터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순간까지 제 몸에 입혀진 상해에 대해 단 한 번도 아픔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색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둔함으로 남의 고통을 상상해 볼 뿐이었다. 그러니 올린의 손을 뚫을 때, 사랑하는 올린이 피를 토하듯 우는 꼴을 보면서도 재미있어할 수 있었다. 아픔을 모르므로 그 아픔을 동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눈을 홉뜨고, 소리 나지 않는 입을 딱 벌렸다. 처음 느끼는 통각은 머리를 울리는 충격으로 그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내내 관찰자로서 세상을 구경만 하다, 비로소 오늘 세상에 강제로 떠밀린 것과도 같았다. 통증을 느끼는 것에 관해서만은 정아는 갓 난 것이었다. 손끝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미치는 괴로운 감각, 그 저리고 쓰리고 아리고 뜨거운 감각을 다루는 데 서투른 몸이, 태어나 처음으로 일그러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피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그림자는 정아의 손에서 떨어진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고통받는 정아를 내버려 두고 느리게 일어나는 그림자의 몸도 피투성이였지만, 그 피는 모두 정아의 것일 뿐 그림자 자신의 것은 없었다. 정아가 수음의 대상으로 삼던 것을 먼저 죽이고, 그다음 정아와 자신이 함께 죽을 것이다. 미친 뜻을 이루는 게 코앞이라 기쁘게 웃으며 일어난 광인이 마주한 것은, 흔들림 없이 똑바로 선 남자였다. 총을 맞고 쓰러졌던 남자의 옷은 그 자신이 흘린 피에 젖었으나 그 얼굴은 단단하고 표정에서는 통증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끼릭, 안전장치를 풀고 엽총을 겨누는 올린의 태도가 평온했다. 그는 눈앞에 선 그림자가 사람이 아니라 한겨울 설산에서 발견한 사냥감인 듯 침착하고 담대했다. 이미 상대에 대한 탐색을 끝낸 올린이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사냥감 또한 올린을 탐색했다. 위험한 짐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을, 견고하게 완성된 사냥꾼이다.

그림자는 사냥꾼의 눈과 마주한 채 다음의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을 들었다. 올린의 귀에는 그 방송이 드는 대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자신의 호흡이 울렸다. 사냥감이 멈춰 있다. 그 발아래에는 정아가 쓰러져 있다. 쓰러진 이에게 주사기를 꽂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올린의 둘째 손가락 끝에 방아쇠의 차고 매끄러운 감촉이 생생했다. 총을 쏘는 건 젓가락질보다 차라리 손의 운동을 덜 요한다. 그림자가 몸을 낮추는 재빠른 동작이, 냉철한 사냥꾼의 눈에는 느리게 보였다. 구멍 난 손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마지막 총성이 울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주사기를 쥔 손이 찢겨 나가는 반동에 그림자가 반원을 그리며 크게 뒷걸음질 쳤다. 피를 뿜는, 너덜너덜한 손을 내려다보던 그림자가 선로로 떨어지기 직전 올린은 그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자의로 뛰어내린 건지 아니면 손에 산탄을 맞은 충격에 떠밀려 떨어진 건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눈에 들어 있던 처절한 원망의 감정은 올린도 읽었다. 멈칫, 했던 올린이 총구를 내리는 순간 요란한 소리로 지하철이 들어왔다.

이전의 올린이라면 그림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미친 사랑을 동정하며 제 사격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올린은 무조건적인 공감이 몰가치함을 넘어 해악이 될 수 있음을 안다. 그는 총 쏜 것에 대한 일말의 후회도 죄책감도 없이 제 몸의 상처에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다시 정신을 잃기 전에, 핸드폰 액정에 피를 묻히며 누른 번호는 제주도 시절 정비가 쓰던 번호였다. 지난 2년 동안 기다렸던 전화를 받는 낮은 목소리에 차마 여상히 말을 시작하지 못해 침묵했지만, 상대는 마치 전화를 건 사람이 올린임을 안다는 듯이 가만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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