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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시 (50/65)

# 착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에게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환은 성대 재건술을 받으라는 양친의 성화에 묵묵부답인 채 이 년을 지내고 있었다. 한쪽 귀가 완전히 먹어 들리지 않는 것을 숨기고 지낸 덕에 인공 고막을 이식하라는 말이 없는 게 다행으로, 부모님은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 말 못 하는 줄로만 알았지 왼쪽 귀마저 먹었단 사실은 지금껏 모르고 계신다.

덕분에 남들이 군대에서 썩는 동안 한량처럼 해외를 떠돌며 살 수 있었으니 잃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목소리와 청력을 되찾게 되면, 그것들을 잃는 대가로 받을 수도 있었던 용서가 영영 물 건너갈 것만 같은 감상적인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올린은 이미 죽었다. 불편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가 정환을 용서하러 돌아올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알면서도 그는 굳이, 목울대에 붉게 남은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도 않고 다시 말할 수 있게 될 수술도 거부한 채 살았다.

봄학기에 복학할 예정이었으므로 두어 달 정도 더 푸에르토리코에 있어도 됐다. 그리운 생각에 쓸데없이 일찍 한국에 돌아온 탓에 정규 형의 손에 끌려 수술 날짜를 잡을 뻔한 것을 뿌리치고 나왔다. 집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한참 걸어야 하므로 어차피 차를 뽑아야 할 텐데, 정환은 지하철에서 한참 흔들리고 버스를 갈아타느라 지저분한 거리를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학교 지하철역 4번 출구 앞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셔틀버스 승차장이 생겨 있었다. 겨울 방학일 텐데도 셔틀 줄이 길어서, 그는 셔틀보다 먼저 도착한 녹색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기인 고개를 넘어가는 내내 먼 곳의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핸드폰을 울리고 있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한국에 들어오고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이제 귀국을 아셨다니, 입 싼 정규 형이 오래도 비밀을 지켜 줬구나 싶었다. 그림자인지 뭔지 하는 스토커에게 쫓겨서 중국이니 동남아니 도망 다니며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는 와중에도 수다스러울 만큼 연락을 끊지 않는 정아 형이나, 어디에서 얼마나 카드를 긁든지 상관하지 않으며 내내 카드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형제로서의 정을 표현해 줬다고 생각하는 정비 형과 달리 정규 형은 떨어져 지내는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극성스러운 형 노릇이라니, 조금 우습고 많이 쑥스러운 일이었다.

버스는 정문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행정관에서 처리할 일을 보고 나면 홀로 오랜만의 캠퍼스를 돌아보고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다. 한국의 친구들은 어딘지 만나기 껄끄럽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연락이 닿을 때마다 해괴한 소문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듯이 심상가에선 이제 액받이 쓰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정환은,

‘응.’

짤막하게 대답해 주고는, 살다 살다 재벌가 자제들이 액받이를 안 쓴다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투의 피드백에는 ㅋㅋㅋ 몇 글자로 눙쳤다. 올린 이후 장남의 무관심과 나머지 두 형의 반대로 사람 모양을 한 물건을 집안에 들여앉히는 일은 없어졌다. 첩 끼고 사시느라 공사다망하신 아버지께서 저택까지 쳐들어와서 노발대발하실 만한 일이었으나, 정작 사용할 아들들이 필요 없다고 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으셨다. 두 명의 후보가 집에 들어왔다가 첫날 맞아야 할 매도 맞지 못하고 돌려보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환은 성대를 다친 것의 덕을 톡톡히 봤는데, 저가 어떻게 입 댈 수 없는 주제에 대해 의견을 질문받아도 말하는 게 불편하여 침묵하는 척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환은 액받이라는 제도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환이 새로운 액받이를 들이는 데 적극적으로 굴지 않은 데는 그저 만사 귀찮았던 탓이 가장 컸다. 형들이 그렇게 열심히 반대인 일에 저 혼자 나서서 들이자고 할 만큼 동하는 애들도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올린이었다. 정환의 마음속에 올린은 끝내 정환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으나, 그렇더라도 그는 정환이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 쓰게 될 물건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오래 참다가 자신을 기억해 낸 순간에 칼을 쥔 것조차, 생각하면 마음이 지끈거리도록 좋았다.

올린이 정환의 목을 그은 이유는 정환도 알았다. 자신이 올린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올린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그는 그 구멍 난 손에 목이 베이는 순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분수 같은 피를 쏟아 냄과 동시에 올린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도 올린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라는, 한 박자 늦게 떠오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정환도 알았다. 자신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정아 형으로부터 폐공장의 주소를 받은 2년 전 그날, 올린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해가 졌다. 그는 어둑한 국도를 위험천만한 속도로 달려 숲속에 숨겨진 폐공장에 도착하여, 자갈조차 깔리지 않은 허름한 공터에 주차한 차에서 뛰어내렸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수 걸음이나 나가떨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폭발한 공장으로부터 먼지와 시멘트 조각 따위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쪽 귀에서 이명이 울리고는 있었으나 격렬한 폭음을 들었으니 순간적으로 있는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지 왼쪽 고막이 파열한 줄은 몰랐다. 이상할 정도의 어지럼증을 견디며 폐공장에 뛰어들었다. 단 몇 분만 일찍 도착해서 공장에 들어섰으면 자신도 폭사했을 것에 대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골이 송연하도록 무서웠던 것은, 그 안에서 고문당하고 있었을 올린의 행방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내렸다. 반쯤 무너진 채 타오르던 폐허를 뒤졌다. 올린은 거기 이미 없었다.

불타는 공장에서 발견된 정환은 최 집사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 외딴 파출소에 앉아 있었다. 재벌가의 막내아들 얼굴을 모르는 시골 경찰들은 말을 못 하는 데다 한쪽 귀에서 끈적한 피를 흘리는, 온몸에 재를 뒤집어쓴 젊은이를 취조하는 것을 포기한 채 그를 수갑 채워 뒀었다. 정환은 폭발과 전혀 상관없는 행인인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고 폐공장에서의 폭발도 사고인 것으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았다.

물론, 정아를 비롯한 폐공장의 고객들은 비슷한 사업을 하는 세력들 간의 다툼 끝에 있었던 일로 이해했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 그 폭발의 주체를 오해한 폭력 조직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기도 했다. 올린의 죽음을 꾸미기 위해 정비가 벌인 일임을 끝내 몰랐던 관장님은 아쉬워하고, 정규는 슬퍼하고, 정환은 인정하지 않았다. 정아는 조금 달랐겠지만, 그는 제 발등의 불이 뜨거워 올린을 쫓을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환은 정문을 지난 버스가 직진하는 동안,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 적은 겨울의 캠퍼스는 미술관 앞도 그 앞의 대운동장도 휑하게만 보였다. 운동장의 인조 잔디가 기만적으로 시퍼렇다고 생각하며 수의대를 향하는 오르막길을 바라보는데, 정환의 눈에 걸리는 모습이 있었다.

올린이었다.

그는 하차 벨을 누르다 못해, 기사에게 달려갔다. 그 일이 있었던 후로 수술을 받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버스 좀 세워 주세요, 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 투명한 플라스틱 벽만 두드려 대는 승객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사는 답답함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 같은 소리로 정환이 말을 못 함을 알아챈 것 같았다. 정류장이 아니라면 세워 줄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다음 정류장은 좌회전하여 행정관 앞이다. 거기까지 이르러 다시 수의대 쪽으로 달려가면 방금 스쳤던 뒷모습을 잡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정환은 핸드폰을 꺼내어, 가장 크게 폰트를 키운 글씨로

‘부탁합니다.’

하고 써서 기사에게 들이밀었다. 버스가 멈췄다.

구르듯이 내려 길을 되짚어갔다. 짧은 패딩에 모자를 눌러쓴 뒷모습은 아무리 오래 지나도 잊을 수 없었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마른 몸, 동그란 뒤통수, 무엇보다 매 걸음을 신중하게 디디는 듯한 그 걸음걸이가 그랬다. 정환은 그렇게 조심스럽고도 동시에 확신에 찬 걸음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그가 디뎌야 하는 길에 안전한 데보다 위험한 데가 더 많다는 듯이, 그럼에도 자신은 앞으로 걸어가겠다는 듯이 나아가는.

그는 길고 완만한 오르막을 단숨에 올라, 수의대와 경영대를 가르는 작은 사거리에 선 채 어쩔 바를 모르고 제자리에서 뱅뱅 돌았다. 손에 잡힐 듯 생생했던 그 모습을 다시 놓친 것만 같아서 시선이 빙빙 돌았다. 올린 그 애가 죽은 것을 순간 잊어버린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목소리가 있었다면 올린의 이름을 불렀을 거다. 아까 그 모습이 살아서 움직이던 올린의 모습이 맞다면, 어쩌면 올린은 정환의 목소리로부터 더욱 멀리멀리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2년의 시간이 올린의 마음에 용서를 싹틔워서, 정환의 목소리에 선선히 대답하며 걸어 나오도록 그 애를 달래어 줬을지도 몰랐다.

2년의 시간은 정환을 바꾸었지만, 사랑하던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도 모자라 죽음에 이르도록 버려뒀다는 죄책감은 조금도 삭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아직까지도 헛것을 보는 제 눈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도 못 하고 귀도 반은 멀었는데 눈까지 병신이면 얼마나 꼴 좋은 일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조금 전에 본 모습이 정말로 그리워하던 그 애이고, 그 애에게, 내가 정말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를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꼴이 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정환은 손바닥에 묻어 나온 물기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냈다. 액받이 따위에게 정이 남아 징징거리는 것은 친구들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형과 주고받았던 채팅창을 열었다. 이전의 메시지가 바로 이틀 전으로,

‘와 나 또 피랍될 뻔 마닐라 갱은 존나 대낮에도 당당’

하는 정아 형의 말에,

‘또? 그림자 그 새끼는 형 쫓아다니는 거 외엔 할 일이 없대? 존나 나는 이해가 안 가’

‘아버지나 정비 형한테 말해서 그냥 경호를 받는 게 낫지 않아?’

‘형 말마따나 숨바꼭질 즐기다가 제 명에 못 죽을 듯 3년째 그러는 게 제 정신은 아닌듯’

‘형’

‘형님’

‘형’

‘이정아’

하고 자신이 연이어 말하고 열두 시간이 지나서야 형이 답한 마지막 메시지가 있었다.

‘쿠알라로 일단 돌아간다’

정환은 형이 과연 이번에는 그림자를 떨쳐 냈을까 궁금해하며, 그 아래에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형, 나, 까지 적었다가 영 쑥스러워 지우고,

‘올린이 봤어’

하고 걔가 보고 싶네 헛것이 보이네 하는 말들을 몽땅 생략한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옆의 1이 사라졌다. 형은 메시지를 빨리 읽고 답신도 대체로 빨랐으나 오늘의 답신은 개중 반가운 내용이었다.

‘대박 어디서? 나 지금 인천공항 떨어졌어.’

정환은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마약 제조업자로서의 신분이 들통 난 후로부터 3년에 가깝도록 지루한 스토킹을 계속하는 그림자라는 놈도 이상한 놈이지만, 거대한 조직도 아니고 한 개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숨바꼭질을 하는 형은 더 이상했다. 하지만, 부러운 면도 있는 것이, 만일 정환의 목숨을 노리고 누군가가 집요하게 달려들어 주었다면 그를 피해 다니느라 올린의 일은 지금쯤 까맣게 잊혔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아 형은 이미 올린에 대해서는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정환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말레이시아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었을까 봐 걱정하던 형에게 답신하려는 사이에, 형에게서 메시지가 이어 도착했다. 자기 자신조차 헛것으로 치부하려던 목격담에 이토록 매달리는 걸 보면, 어쩌면 정아 형도 아직 죽은 애를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제? 지금?’

‘어디?’

‘서울?’

정환은 메시지에 답하기 전에 수의대를 배경으로 찍은 제 셀카를 보냈다.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는 사진은 받는 사람을 웃기지 못한 것 같았다. 사진이 미처 다 전송되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었다. 송신자명 ‘호적메이트_1st’ 가 띄워진 핸드폰이 바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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