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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강 (47/65)

# 생강

올린은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편이다. 별 물건을 사지도 않으면서 주말마다 서는 읍내 장터에 나가 보지 못하면 중요한 일정을 놓친 것처럼 시무룩해한다. 오랜만에 삽입 섹스를 했기 때문에 정비는 올린이 나다니지 않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 오후 시간을 보내길 원했지만, 올린이 꼭 살 것이 있다고 우기는 바람에 함께 나서게 됐다.

장터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한, 무지개색 파라솔이 스무 개 남짓 펼쳐진 공터에 차를 댔다. 백날 천 날 입고 다니는 후드티를 끌어당겨 올린의 머리에 씌워 주자, 올린은 정비의 얼굴도 올려다보지 않고 몰래 웃듯이 씨익 웃었다.

정비는 올린의 뒤를 쫓아다니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올린은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아무 데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두어 걸음 멀찍이 선 채 슬슬 걷다가, 관심이 가는 물건이 있으면 슬그머니 발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본다. 알락달락한 과일 따위에 관심을 둘 줄 알았는데 그가 신기해한 것은 더덕, 갈치, 그리고 편백으로 만든 주걱을 비롯한 각종 조리 도구였다. 더덕은 뭔지 몰라서 궁금해하는 것 같아,

“더덕이야. 너 저거 바짝 구운 거 좋아하잖아.”

하고 속삭여 줬더니 올린은 그저,

“오.”

할 뿐 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정비는 요리는 해 본 적이 없지만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심정으로 더덕을 한 소쿠리나 샀다. 수조에 담겨 살아 움직이는 갈치에 대해서는 한참 바라보더니,

“아름다워요.”

하고 평가하곤 걸음을 옮겼다. 현금을 박하게 준 것도 아닌데 올린은 아주 짠돌이였다. 이번에도 정비가 갈치를 샀는데, 손질하는 것을 기다리느라 잠시 늦어지자 몇 걸음을 되돌아온 올린이 토막 나는 갈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환멸 어린 표정으로 정비를 올려다보아 정비는 찔끔했다. 구워 주면 잘만 먹을 거면서 괜히 구박이었다. 편백으로 만든 각종 조리 도구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는,

“패들인가…저건 약해 보이는데… 서른 대만 맞아도 부러지겠네요….”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떠오르는 아픔이 있는 듯 한 손을 엉치뼈에 얹었다. 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니 이 모양일 때가 있었다. 정비는 마른세수를 하고 올린의 오해를 풀어 주려 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사려던 물건을 발견한 올린이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바람에 그럴 기회를 잃었다.

정비는 늘 두어 걸음 떨어진 채 안 보는 척 구경하던 올린이 상인 앞에 가까이 다가선 것을 보고 헛웃음을 웃었다. 올린은 목표했던 것을 발견하자 뜸을 들이지도 않고 가볍게 구매를 마쳤는데,

“뭐 하게, 꿀 넣어서 차 만들게?”

하며 사람 좋은 상인이 좋은 것으로 골라 담아 준 것은 흙이 잔뜩 묻은 싱싱한 생강이었다. 잘생긴 총각이니까 더 주겠다며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준 생강을 건네받고는 올린을 허리를 펴고, 정비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생강차 말고 다른 거 하려고요.”

정비의 머리털이 삐쭉 섰다.

올린은 평범한 생활을 겪은 시간이 짧아 일상적인 노동에 능한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익숙지 않은 핸드폰으로 생강 다듬는 법 영상 정도는 수월히 찾아낼 만큼 일머리도 있는 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정비가 식당에 앉은 채 회사 일 몇 가지를 처리하는 동안 올린은 짧은 영상을 1.5배속으로 보더니,

“숟가락이었군.”

하고 중얼거리며 고무장갑 낀 손으로 흙 생강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숟가락이었어.”

예전에 정비에게 벌을 받을 때는 조그만 과도로 생강을 깎느라 아주 고생이었다. 피가 흐르도록 손이 베여 손끝을 입안에 넣고 쪽쪽 빨다가 괜히 울음이 터진 적도 있었고, 삐뚤빼뚤 엉망으로 깎은 죄로 매의 대수가 더해진 적도 많았다. 숟가락으로 박박 긁으면 원래 모양도 상하지 않고 손도 다치지 않으며 깨끗하게 다듬을 수 있는 걸 칼로 하느라 그 고생을 했다.

깨끗해진 생강을 쟁반에 받쳐 들고 숟가락과 함께 내려놓은 것을, 정비는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바라보았다.

“까 주시겠어요.”

정중한 말투로 죄다 시켜 먹는 건 올린의 특기였으나, 생강을 까라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정비는 아까 시장에서 편백나무 주걱을 사 왔던가, 하고 돌이켜 보며, 만일 올린이 깐 생강을 제 항문에 넣고 매질할 작정이라면 굳이 주걱 말고도 회초리로 쓸 게 이 집에도 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비는 어쩐지 기세가 등등하여 다시 주방 쪽으로 돌아가는 올린의 귀여운 엉덩이를 바라보며, 저 엉덩이를 자기가 얼마나 혹독하게 매질했었는지를 떠올렸다. 때린 것도 그렇지만 벌세운 게 더 미안하다. 엉덩이가 새빨개지도록 매 맞은 애를 꿇어앉힌 채 오래도록 내버려 둬 놓고, 돌아왔을 때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때리기도 했었다. 엉덩이를 맞을 때는 꿋꿋하던 애가, 살집 없는 마른 허벅지를 맞을 때는 단 몇 대 만에 울부짖으며 맞은 데에 손을 비비고, 아무리 다그쳐도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했더라.

올린은 정비가 사 나른 과자를 상자째 들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돌아와, 정비가 생강 까는 맞은 편에 앉았다. 픽션보다 논픽션을 선호하는 올린을 위해 정비가 심혈을 기울여 사 나른 책 중 한 권을 든 채였다. 정비는 보드라운 입가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어 주려다, 제 양손에 이미 생강즙이 흠뻑 묻은 것을 알고 포기했다. 저렇게 잘 먹는 애를, 아픔을 견디다 못해 매 맞은 허벅지에 손을 좀 문질렀다는 이유로 굶겼다. 그때 올린의 식단은 너무 척박하여 단 한 끼만 굶겨도 힘이 없어 숨마저 느리게 쉴 지경이었는데, 정비는 이틀씩 사흘씩 굶겨 가면서도 그걸 저 애가 제 몫 다하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준다고만 생각했었다.

정비는 자신이 내린 벌로 사흘째 굶던 애가 형제들의 식사 자리에 불려 왔던 것을 기억한다. 평소 형제들이 식사하는 원탁이 아니라 손님용 정찬이 차려지곤 하는 대식당이었다. 뺨이 쑥 패고 눈 아래가 시커먼 올린을 그저 괴롭히려고 부른 자리에서, 올린은 긴 식탁의 끝에 엎드린 채 비단옷을 걷고 장남의 좆을 받았었다. 그때 식탁 위에 놓였던 뼈가 불거진 손이, 거친 추삽질을 견디느라 오그라든 연약한 주먹이 되어 벌벌 떨던 모습을 정비도 봤었다. 식탁이 무게가 있어 거친 삽입에도 식탁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단단한 식탁 위에서 마른 몸이 이리 뒤치이고 저리 뒤치이며 부러질 듯 흔들렸었다. 마음껏 해 댄 형이 올린의 엉덩이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때리면서 했던 소리도 기억한다.

“뼈 때문에 박는 게 아파.”

“죄송합니다. 도련님.”

굶어서 뼈가 도드라진 게 올린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때 올린은 순종적인 얼굴을 하고 사죄했었다. 그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고 말조차 느렸다. 사용된 후 그렇듯이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동안, 올린의 눈은 식탁 위에 차려진 정찬을 딱 한 번 쳐다보았다. 큼지막한 칠면조 요리 따위가 올라와 있던 것을 생각하면 추수감사절 즈음이었던 것도 같다. 정비는

“올린. 시선.”

하고 얌전치 못하게 식탁을 흘끔거리는 눈을 지적했다. 올린이 얼른 눈을 떨구며 용서를 구하는 말을 중얼거린 것과, 일어서서 다가선 정환이 올린의 뺨을 때려 바닥에 구르도록 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환은,

“상스럽게, 이년이, 진짜,”

하고 욕하며 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 도망도 못 가며 발발대는 몸에 대고 몇 번의 손찌검을 한 후 자리에 돌아왔었다. 발라당 뒤집어진 옷자락 아래, 정액과 장액이 뒤섞여 흐르던 구멍마저 앙상해 보였다. 도로 벌어진 옷깃을 떠는 손으로 여미고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시선 둘 곳을 몰라 하는 걸 가엾게 여긴 정규가,

“아가 배 많이 고프지? 이리 오면 이거 줄게.”

하고 뭔가 먹을 것을 잘라 테이블 아래로 살랑거리며 유혹했지만, 올린은 기어 오기는커녕 고개를 조아리고 어깨를 웅크린 채 눈물만 뚝뚝 흘렸었다. 감히 그것을 받아먹지 못한 것은 정비 자신이 냉담한 눈을 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데도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그때 올린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식 식탁에 앉아 있었고, 올린은 흠씬 얻어맞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올린의 곁을 지나쳐 들어온 정환의 개가 정규의 손에 들렸던 것을 챱챱 소리를 내며 받아먹었다. 올린이 그 모습을 부러운 듯이 봤던가, 아니면 그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가. 정규가 정비를 향해 말했다.

“애 꼴 좀 봐, 더 굶겼다간 밤새 숨이 멎고 말겠어. 이미 충분히 벌 받지 않았어요?”

“안 돼. 벌은 내일 아침까지야.”

정비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마른 몸을 내려다보았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조아리느라, 위에서 보기엔 등 쪽으로도 도드라진 갈비뼈가 보였다. 생선뼈처럼 가늘게 느껴져서, 우지끈 쥐면 죄다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몸이었다.

“무슨 잘못이었는데요?”

“매 맞다 자세 유지 못 한 벌.”

“그럼 그때 맞은 매, 지금 똑같이 때려서 자세 제대로 유지하면 뭐라도 먹입시다. 어때요?”

올린은 어느 쪽도 무서운 듯 벌벌 떨고만 있었다. 못 견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식탁 위로 올라오라 명령해서 무릎 꿇린 게 정비였다. 올린은 의자를 딛고 식탁 위로 기어오르는 몸짓조차 어려워했다. 이미 회초리 자국이 시퍼런 앞쪽 허벅지를 드러낸 올린은 두 팔을 허리 뒤로 모아, 양 팔꿈치를 단단히 잡았다. 맞기도 전에 흐른 눈물로 비단 옷자락에는 점점이 짙고 둥근 무늬가 지어졌다.

올린은 매를 맞는 순간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제 눈앞에 잘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굶주림의 고통을 모르는 네 도령은 그 시선에 들었던 비참한 허기를 탐욕으로만 여겼다. 탐욕스러운 것에게 내리치는 매질이 점점 매서워졌었다. 하, 흑, 오래 굶은 몸이 흘리는 신음조차 꺼질 듯 연약하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쓰라린 매를 견디는 몸짓은 처절했다. 잔뜩 웅크린 어깨 뒤로 날개뼈가, 꼭 작은 날개가 돋아난 것처럼 뾰족하게 펄떡거렸다.

지금 홍조가 오른 볼 아래 몸에는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여전히 마른 체형이지만 이전처럼 허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앉은 자리에서 과자 한 통을 해치우는 식욕인데도 살이 더 이상 찌지 않는 것은 속 빈 채 살아온 날을 채우느라 그럴 것이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굶는 시간이 더 괴로웠을 텐데, 정비는 올린이 과거 자신이 몹쓸 짓을 해 댔던 벌로 주말 내내 굶기지 않는 것이 감지덕지였다. 물론 올린이 음식을 해다 정비를 먹이는 것은 아니지만, 올린이 굶으라고 했다면 정비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자신을 오래 굶겼던 자의 입에 음식 드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는 다정한 사람인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었다.

“다 했어요?”

책 아래로 빼꼼 눈을 내밀고 바라보는 올린에게 엉망으로 다듬은 생강을 접시째 내밀었다. 올린은 검사하듯 생강을 요리조리 돌려 보더니

“잘했어요.”

하는 칭찬의 말을 남기고 잘 갈무리하여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비는 이제 곧 다가올 시간을 대비하여 식당의 두 면을 차지한 창에 커튼을 치고, 다시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가만히 기다렸다. 주방에서 뭔가를 하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비는 왠지 지금 주방에 가면 올린의 화를 돋울 것 같아 그저 잠자코 있었다.

정비가 깎은 생강은 잘게 채 썰려 생강 덮밥이 되어 돌아왔다. 정비는 맨밥에 생강채가 가득 올려진 덮밥을 앞에 두고,

“드세요.”

하는 올린의 말에 맥이 풀려 헛웃음을 웃었다. 올린도 생강 위에 간장을 조금 둘러 주다 말고 같이 웃었다. 올린은 애초부터 이런 식으로 매운맛을 보이려 했지,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비를 고문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겪었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다. 게다가 할 말이 있을 땐, 뭐가 되었든 먹이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고.

“…먹으면서 들어요.”

올린은 한 입 크게 떠서 맵고 아린 것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한 정비를 바라보며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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