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생활
시간은 흘렀다.
나쁜 꿈을 꿀 때조차 울음을 참았으므로, 다정한 정비일지라도 올린을 악몽에서 끌어내어 줄 수는 없었다. 올린은 기척 없이 잔뜩 웅크린 채 홀로 앓다가 혼자 힘으로 깨어났다. 그러나 그는 악몽을 대단히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들이 현실이던 시간도 길었다. 한숨 한 번이면 괜찮아졌다.
눈가를 훑은 손으로 잠든 정비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공장에서 재회했을 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초췌했었는데 워낙 근골이 든든한 덕인지 회복이 빨랐다. 반년 가까이 혼수상태였던 사람이 다리를 절게 되었을 뿐 말을 더듬지도 않고 공연히 헛손질하는 때도 없다. 벌써 회사에 복귀하여 정체되었던 사업을 가열차게 다그치고 있는 것은 정비가 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티브이 뉴스만 봐도 알았다.
짙은 눈썹 아래 잘생긴 눈가를 들여다보며 정비가 사다 준 도톰한 후드티를 뒤집어썼다. 어깨에 넘실거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다음, 침실 옆의 욕실에 들어가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와도 정비는 그대로였다. 잘 때조차 흐트러짐 없는, 그린 듯이 잘생긴 얼굴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비치지 않을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의 몸에서 더운 피가 콸콸 쏟아지던 날의 기억은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지만 중요한 것이 남았다. 그날 아무것도 믿지 못해 발버둥치던 올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정비가 했던 말들이었다.
그 진심은 비록 정비의 혼수상태와 함께 오래도록 묻혀 있었지만, 올린은 그가 그 나름의 전력을 기울여 올린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울 것을 믿었다. 올린이 선택할 방식이 정비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더라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 무정하도록 잘생긴 얼굴은 이제 무섭지 않다.
몇 걸음 걷는 발바닥 아래 마루가 삐걱거렸다. 발의 상처는 이미 잘 붙고 거의 나아 가는 중이라 조심조심 걸으면 과히 시리거나 욱신거리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조그만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낯선 남의 주방이지만 캡슐을 찾아 기계에 넣고, 요란한 소음과 더불어 커피를 내리는 것은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 커피 맛도 모르는 주제에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고 산다는 건 다 따라 해 보고 싶었다.
부은 눈인 채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복도를 걸어 주방만큼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갔다. 공간은 넓지 않은데 가운데 떡하니 차지한 나무 테이블이 너무 커서 커튼을 열기 위해 창문 쪽으로 가려면 의자 뒤를 엉금엉금 게걸음 쳐야 했다. 커튼을 열자 손질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오면 온갖 꽃이 만발할 마당과, 사랑채처럼 쓰고 있는 건너편의 단층 건물이 보였다. 그 안에는 정비의 수행원 두 명 중 하나가 아직도 한창 자고 있을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 어딘가에서 운동이라도 하고 있겠고. 저 둘은 잠조차 번갈아 자지만 정작 별 할 일이 없어 늘 한가로워 보인다.
다시 복도를 걸어 주방 반대편의 거실에도 해를 들였다. 이른 시간인데도 이렇게 밝은 걸 보면 봄도 머지않았다. 마당 구석의 성격 급한 목련 나무는 벌써 꽃을 피워 올리고 있으니 이미 온 걸지도 모른다. 올린은 커피잔을 껴안다시피 한 채 옹송그리고 앉았다. 정비가 오래전에 사 두었다던 제주도 집은 터가 넓고 담이 높아 보안이 철저한 데다 들고 나는 사람 없이 외진 곳에 있다. 마당은 넓되 집의 규모는 크지 않아 정비가 없는 주중에도 무섭지 않아 좋지만,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외풍이 심해서 열심히 난방해도 꽤 추운 편이라는 점이다. 앉은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도로 일어섰다.
침실로 올라가 양말을 신으려고 했다. 잠옷 삼아 입었던- 그렇지만 낮에도 집에 있을 때라면 거의 항상 착용하고 있는- 회색 추리닝 바지는 따뜻하지만 그 아래 발이 시렸다. 도로 올라가는데 계단이 삐걱거렸다. 어젯밤, 이러지 말라던 정비를 눕혀 놓고 그 위에서 제가 난리를 부릴 때 침대가 울리던 소리랑 닮았다. 순간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멈췄다가 피식 웃었다. 재회한 후 정비는 올린의 몸에 제대로 손댄 적이 없었다. 총을 잘못 맞아 고자가 된 줄 알았다. 아쉬워서 누운 몸엘 기어 올랐더니 엉덩이 사이를 찌르는 것도, 누르는 것도 아닌, 묵직하고 둥근 의자 같은 데 올라탄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기능을 잃은 게 아닐까 의심했던 거물이 그렇게나 발기하여 딱딱해졌는데도 얼굴만은 아무렇지 않다니, 이 사람은 어딘지 가증스러운 데가 있다고 올린은 생각했었다.
“…원래 이렇게 컸나.”
제 바지를 벗다 말아 한쪽 다리에 꿰고, 정비의 파자마 바지도 억지로 반쯤 내리다 만 채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했었다. 늘 보던 물건이지만 오랜만에 맞이하니 또 새롭게 놀라웠다. 바지를 내리는 동안 정비가 협조를 해 주지 않아 그만큼 끌어 내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엉덩잇골로 벌떡 일어선 끝을 문지르니 자지 끝에서 새는 쿠퍼액과 올린의 구멍을 적시는 장액이 함께 끈적하게 엉겼다. 그런데 이건 길이며 굵기며 웬만한 노력으로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니, 아무리 단단하게 서 있다 해도 도무지 구멍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저택에서 정비가 올린을 쓰기 전에 그렇게 오래 준비시키곤 한 것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조금만, 발기를 줄여 보면 어떨까요?”
“너도 자지 달렸으니 알잖아, 가능한 요구라고 생각해?”
“찢어질까 봐….”
“우려대로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이러지 마세요, 다칩니다아.”
별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해 대며 올린은 발바닥으로 정비의 몸 옆의 침대 바닥을 짚고, 엉거주춤한 기마자세를 한 채 두 손을 뒤로 돌려 제 볼기를 잡고 양쪽으로 벌려 냈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어린애 달래듯 경고하면서도 정비는 올린을 함부로 밀어내지는 않았다. 자지에 찢기기 전에 제 손으로 찢을 듯 벌리고 앉는데도 자꾸만 미끄러질 듯 비켜날 듯 들어갈 생각을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좆 선 각도 때문인 것 같았다. 아래를 향할 리 없이 배꼽 쪽으로 들린 각도지만, 순간 올린은 판단 착오로 주섬주섬 거꾸로 앉았다.
누운 정비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채, 다시 손을 뒤로 돌렸다. 제 손가락으로 구멍을 몇 번 쑤시는 동안 꿀쩍꿀쩍하는 소리가 났지만 이상하게도 창피하지는 않았다. 뒤에서 그 꼴을 보고 있는 정비의 숨이 조금 거칠어지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형, 숨소리가, 짐승 같은데요.”
정작 발정 난 짐승같이 구는 건 올린이지만, 느릿한 목소리로 쥐어박는 구박에 정비는 억울하단 말도 안 했다. 목 안으로 웃으며 두 손을 뒤로 보내 양 볼기를 좌우로 쫘악 벌리는 순간, 더 이상 크게 발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정비의 자지가 갑자기 끄덕, 하며 그 두께를 부풀리는 바람에 구멍이 아니라 엉뚱한 회음 쪽이 자지 끝으로 문질러졌다. 거기에 달려 있던 피어싱은 떼어 내어, 입욕제가 들어 있던 예쁜 상자에다가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이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구멍은 아물지 않는다. 매일 구멍을 소독하며 관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체모도 저녁 목욕 때마다 밀고 있어 아래는 아직도 매끈하다. 순간 아팠던 올린은 미간을 찡그리고 말간 자지를 달랑거리며,
“…얘는 좀,”
하고 손을 돌려 죄 없는 정비의 자지를 탁, 때렸다.
“범절 교육이 필요하네요….”
억, 하고 웃음 섞인 비명을 질렀지만 정비의 자지는 풀 죽기는커녕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끄떡거렸다.
“…손으로 이르케, 잡아 보시겠어요?”
공손하게 저가 하고 싶은 대로 시켜 먹는 올린에게 정비는 손톱만큼의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 선선히 제 자지 밑동을 잡아 함부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정한 정비의 가슴을 짚어 거기에 체중을 싣고, 다른 손으로는 볼기짝을 힘껏 잡아당겨 구멍을 크게 벌린 다음, 그냥 내려앉는 게 아니라 자지 머리에다가 구멍을 비비며 엉덩이를 좌우로 앞뒤로 한참이나 움직인 다음에야 올린은 자지 끝만 간신히 제 구멍에다가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넣기는 넣었으되 그다음에는 밭은 숨만 쉬며 꼬치에 꿴 오뎅처럼 옴쭉달싹을 못하는 올린을, 정비는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했잖아….”
하는 소리를 하며 저도 아픈 듯 인상 쓴 얼굴로 비웃다가,
“우욱….”
하고 억지로 내려앉던 올린이 헛구역질을 하자 깜짝 놀라 올린의 허리께를 잡아 들어 올렸다. 쑤욱, 뽑혔지만 어쩐지 뽑히는 건 정비의 자지가 아니라 올린의 몸 같은 느낌이었다. 올린은 제대로 뭘 하지도 못한 주제에 아래가 허전하여,
“그럼 언제 해요.”
하고 여러 번의 헛구역질이 가라앉은 후에는 부루퉁한 목소리를 했었다. 정비는 웃으며,
“시간 많아….”
하고 모르는 소리를 했었다. 올린은 정비의 아랫배를 깔고 앉은 채 그의 느긋함을 망연해하다가, 자신의 자지를 빨아 주려 고개를 숙이는 정비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밀었다. 선선히 밀려난 정비가 이번에는 올린의 몸을 감싸 안아 부드럽게 메치듯이 하여 눕힌 후, 아기 기저귀 가는 모양으로 하체를 발라당 뒤집었다. 벌겋게 벌어져서 안에서 묽은 피가 새 나오는 항문을 확인하고 나서는 정비도 좀 짜증 난 목소리를 했다.
“거봐. 결국 피 봤잖아.”
속이 조금쯤 찢기는 거야 익숙하다. 아래를 빨리는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정비가 찢어진 데를 위로하듯 빨며 손을 깍지 껴 주는 것이나, 때때로 얼굴을 확인하며
“울어?”
하고 묻는 것이나, 그런 부드러운 물음에 훌쩍이면서
“안 우는, 힉! 데요!”
하고 앙칼진 목소릴 하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한 번도 자기를 죽이려 한 적 없는 정비에게만은 그 익숙지 않은 모든 것들이 자유로웠다. 그는 정비의 자상한 혓바닥에 아래를 맡긴 채 똑같이 다정했던 정규에게는 이토록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까닭을 돌이켜 보다가, 제 몸과 마음을 옭아매어 고통스러운 안정을 선물했던 정아를 떠올리고, 못돼 처먹은 정환까지를 떠올렸다.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얼굴들이었다.
안 운다며 우는 몸을 오랫동안 달래 준 정비는 올린을 침대에 내버려 둔 채 마룻바닥을 걸어 계단참을 향하는 데 있는 서랍에서 연고를 가지고 왔다. 항문 안에 약을 발라 준 다음에,
“진짜 그냥 자요?”
하고 대단한 불만을 담아 팔을 붙잡는 올린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항문에 넣는 대신 허벅지 사이에 좆을 끼워 움직일 때, 자지 몸통은 올린의 항문과 회음을 함께 자극하고 자지 끝은 올린의 불알과 자지 뿌리를 찔렀다. 올린은 회음에 멍이 들 것 같은 벅찬 움직임 속에서 느껴지는 성감에 정비의 쇄골에 제 뒤통수를 문지르며 파드드득 떨어 대다가,
“아윽, 흑!”
하고 울먹거리며 토정했었다.
양말을 찾으려던 심산으로 올라올 때와 달리 올린은 세상 편한 얼굴로 자는 정비의 얼굴을 보자 심술이 더럭 솟았다. 일이 바쁜 것도 알고, 올린을 가족들로부터 감추느라 자주 오지 못하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일주일 내내 무뚝뚝한 얼굴에 말 없는 수행원 둘과 함께 지내게 하다가 주말에야 겨우 얼굴을 비춰 주는 주제에 속 편히 늦잠이라니 이건 반칙이다. 게다가 정비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이제 둘이 얼굴 볼 날도 오래 남지 않았다. 올린은 애초에 자신의 발이 다 나으면 저택의 마지막 조각인 정비를 털고 홀로서기로 결심했었다. 개중 그나마 나은 것이었는데, 눈 감은 얼굴만 보다가 안녕,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올린에게 정비는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연인이라고 하기엔 역사가 복잡했다. 그렇다고 그 외의 어떤 단어도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중요한 건 이전처럼 한쪽이 다른 쪽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를 떠나기로 한 이상 올린은 주종관계를 벗어난 형태의 성애를 반드시 나누고 싶었다. 올린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다면 그는 정비와의 삽입 섹스에 이렇게까지 목매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시는 못 볼 소중한 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고 포옹하며, 고마웠어요 잘 지내세요 따위의 인사를 나눌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보통은 상대를 충분히 따뜻한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침대로 기어오를 때 벌써 정비는 정신이 든 것 같았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허리를 타고 앉아도 그저 얌전히 있을 뿐이다. 아무리 그런 마음이더라도 아침부터 하고 싶은 것은 아니어서, 올린은 어젯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대한 체벌로써 무방비한 얼굴을 찰싹 때려 주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올린은 손이 제법 매운 편이다. 정비가 그에게 몇 번 얻어맞고서 말해 줬었다.
“아야.”
눈을 뜨지도 않은 채 하는 잠꼬대 같은 투정에도 올린은 봐주지 않았다. 다시 손을 들어 찰싹, 내리치자 정비의 얼굴에 발간 손자국이 남았다.
“아야 아파요. 잘못했습니다.”
예전에 올린이 달고 살았던 말을 이번에는 정비가 웅얼거렸다. 무슨 잘못인지는 아는 걸까, 하고 생각하던 올린은 묻는 대신 흐흐흐, 하고 짓궂은 웃음을 웃더니
"벌이 아파야지. 아프라고 때리는 거예요."
하고 예전에 수없이 들었던 야속한 말을 흉내 내며 또 때리려 했다. 그러자 정비가 올린의 손목을 턱, 잡았다. 잠 덜 깬 정비의 눈과 말짱한 올린의 눈이 마주쳤다.
정비는 별 표정도 없는 채로 옆을 더듬어 잡히는 것을 손에 쥐여 주었다. 어젯밤에 올린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던 큼지막한 머리빗이었다. 브러시 뒷부분이 올린의 손바닥보다도 컸는데, 올린은 예전에 이렇게 커다란 패들로 엉덩이나 허벅지뿐 아니라 뺨을 맞기도 많이 맞았었다. 당연히 사람 손보다 패들로 맞는 게 훨씬 아프다.
“이걸로 해… 너 손 다쳐… 세게 해도 돼… 형 코피 날 때까지 막 때려도 되니까….”
이걸로 때리면 코피뿐이랴, 뼈가 솟아오른 곳의 살갗이 찢기고 눈가가 부어오르는 것도 순식간이다. 뺨을 맞겠다 싶은 날에 살 찢기는 걸 면하려고 눈썹 뼈랑 광대에 바셀린을 발랐다가 못된 요령만 늘었다고 아주 경을 친 적도 있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고 귀 안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파열감보다 천지사방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훨씬, 훨씬,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웠던 건 갈비뼈 안쪽이 둘로 쪼개지는 것 같은 그 기분이다. 수치심과 모멸감,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학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서러움은 정비든 다른 도령들이든 이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누가 되었든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올린은 코웃음을 치고 브러시를 멀리까지 집어던졌다. 마룻바닥에 브러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맞는 놈이 이걸로 때려 달라, 저걸로 때려 달라.”
“아… 그러네. 맞다. 잘못했어요. 하고 싶은 대로,”
“입 다물어요. 맞을 때마다 숫자 세고, 감사합니다 하는 겁니다.”
“네, 네, 그러겠습니다.”
“이잇!”
“아야야, 하나, 감-사합니다.”
이럴 때 올린이 하는 말은 죄다 예전에 저가 듣던 말이었다. 일부러 기억해 두었다가 보복한다기보다는 하도 들어 머릿속 깊이 박힌 말들이 절로 흘러나오는 것에 가까웠다. 매를 맞다가 맞다가 너무 아프니 조금 덜 아픈 매로 쳐 주십사, 맞을 매를 다만 몇 대라도 감해 주십사, 조금만 쉬었다 맞게 해 주십사 빌다가 수도 없이 혼이 났었다. 맞는 놈이 까탈을 부린다고 꾸중을 듣고 눈물을 빼고 나면, 도령들의 기분에 따라 매가 정말 덜어지는 날도 있었다. 그 드문 행운을 바라고 바닥에 눈물 칠을 하며 바들바들 기어 다녔었다.
정비는 졸린 목소리로도 착실하게 수를 셌다. 느긋하지만 비꼬지는 않는, 유순한 목소리로 아프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였다. 맞는 정비의 표정은 내내 비몽사몽이었지만, 올린은 세 번째인가 네 번째가 되어 정비의 귓가까지 불그스름해지자 그만 미안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이렇게 순순히 얼굴을 대 주고 있는 사람한테 손찌검하다니, 자신은 인간도 아니다 싶다가도 다음 순간,
‘내가 인간으로 안 보였으니까 그 지경으로 들이 팼겠지.’
하는 분하고 억울한 생각과 함께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패들처럼 험악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하드커버의 책으로만 맞아도 눈두덩에는 시커멓게 멍이 올랐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몰골을 만들어 놓은 것도 저들이면서, 얼굴 꼬락서니가 험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고 베개로 얼굴을 누르고 아래를 쓴 것도 저들이었다. 못생겨진 벌로 숨 막히게 짓눌린 채 아래에 손가락이 드나들던 순간이 떠오르자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다음의 매질을 기다리며 잠자코 눈을 감았던 정비는 올린의 눈물을 제 얼굴에 맞고, 잠이 확 달아난 눈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품에 와락 안은 몸은 울어도 조용했다. 정비는 올린이 원래부터 조용히 우는 데엔 선수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아무리 해도 모자란 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올린아….”
하는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이전에 했던 온갖 방식의 학대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과 깨어나서 며칠이나 올린을 떠올리지 못한 것, 그래서 너무 늦게 구하러 갔던 것에 대한 미안하다는 말을 백 번쯤 반복하자 올린은 눈물 고인 눈으로 피식 웃었다. 미움은 빨리 잊을수록 자신에게 좋다. 눈앞의 이 사람이 그 모든 학대를 저지른 건 아니다. 그렇게 되뇌고 나면,
“…커피 마실래요?”
하고 물으며 눈물을 훔칠 수도 있는 것이다.
폐공장에서의 일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의 일로 느껴질 만큼 멀었다. 그러나 사실 그 일은 고작 두어 달 전이다. 정비는 자신이 잠들어 있던 오랜 시간과 그 이전의 시간 동안 고통받았던 올린의 응어리를 풀어 내려면 그 열 배, 아니 스무 배, 그리고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을 알았다. 그는 올린에게 사죄하는 동시에 형제들에게 대대로 그들이 지어 왔던 죄에 대해서도 알릴 예정이었다. 잘못된 관례를 전통으로 포장하여 답습하는 짓은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있는 한, 자신의 가문에 올린이든 다른 이든 액받이를 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올린에 대해서는, 정비는 자신의 욕심대로라면 그를 이렇게 제 날개 아래에서 보호하며 평안한 삶을 지속하도록 하고 싶었다. 형제들이 이 애의 행방을 안다면 그들도 만나고 싶어 하겠지만, 사람인 올린은 공유의 대상이 될 수도 없거니와 정비 자신도 그렇게 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올린의 상처를 오래도록 치료할 계획을 세우면서 그 계획에서 형제들을 배제했다. 그리고 정말로 선량한 의도 속에서도 정비가 저지른 커다란 실수는, 정비를 포함한 네 형제 모두를 떠나고 싶어 하는 올린의 바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한 바람은 정비의 진심을 의심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 주의 시간이 더 흘러 화사한 목련꽃이 허무하고 지저분한 자국만 남기고 질 때쯤, 마당 한구석에는 개나리가 만발했다. 주방 뒤쪽에 있던 작은 평상을 개나리 그늘로 옮겨온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그 아래 모로 누워 제 팔을 베고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노라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그럭저럭 괜찮게 풀려 나갈 것 같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올린은 저절로 떨어진 개나리꽃 한 송이를 집어 손가락 사이에서 뱅글뱅글 돌리다가, 저 멀리 정문 앞에 까만 택시가 멈춰 서는 걸 발견했다. 정비는 올린을 보러 올 때는 사람을 대동하지 않고 홀로 택시를 타고 온다. 올린이야 그러려니 하는 일이지만 처음엔 올린과 늘 함께 지내는 두 명의 남자 중 하나가,
“연락 주시면 저희가 공항으로 모시러 나가겠습니다.”
했다가
“허튼 데 신경 쓰지 말고 수상쩍은 놈 없나 잘 보고 있어.”
하고 올린이 듣고 있는 앞에서 면박을 당했다. 두 명이 자신과 같은 집에서 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까닭을 몰랐던 올린은 그제야 그들이 자신의 감시자 겸 보호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올린은 평상 아래 벗어 두었던 털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맨발로 다니는 것이야 익숙하지만 정비가 그 모습을 보면 유난스럽게 딱해하는 데다가, 아직 한쪽 발바닥의 상처는 거친 땅에 디디면 아릿한 통증이 올라올 때가 있다. 신발 바닥의 포근한 털을 맨발로 문지르며 미적미적 일어서는데, 수행원 중 하나가 벌써 온몸으로 대문을 당겨 여는 참이었다. 사람이 드나들 때 여닫기 쉽도록 쪽문이 하나쯤 있을 법한데, 이전에 이 집을 지었다던 주인은 늘 차로 대문을 지났는지 사람이 들 때도 커다란 문을 통째로 열어야 했다.
“형.”
올린은 달릴 때는 아직 다리를 절었다. 정비는 아직도 지팡이를 짚어야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올린이 다리를 저는 모습만 가여워했다. 그 무서운 무표정 속에 숨은 것이 자신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인 것을 잘 알면서도, 올린은,
‘그런 기분, 조금쯤 느껴 보라지.’
하는 심정으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정비는 목욕용품이며 서울 모 호텔에서만 파는 초콜릿이며 읽을 만한 책 따위가 들었을 가방을 떨어뜨리고, 지팡이를 단단히 버틴 채 한 손으로 제게 달려드는 몸을 받아 안았다. 둘의 체격 차이가 꽤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도 힘차게 달려드는 바람에 정비도 비틀거렸다. 올린은 정비의 목을 꽉 깨물며,
“…오늘은 꼭, 넣고 움직입시다.”
하고 다짜고짜 선전포고였다. 정비는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 없는 목소리를 했다.
“차라리 네가 나한테 넣는 건 어때. 그럼 피는 안 볼 거 아니야.”
정비는 진심이다. 그러나 근 두 달 동안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하는 데 익숙해진 올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형 구멍에 내 거 넣었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한 술이 아니라 열 술은 더 뜬다. 항상 젖어 있는 듯 반짝이는 눈은 정비의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는 입술은 느리게 움직인다. 음성에는 웃음기 하나 없어 마치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올린 스타일의 블랙 조크에 익숙해진 정비도 지지 않고 대거리였다.
“그럼 네가 나 책임지면 되잖아."
“…사람이 일도 아니고 어떻게 책임지지.”
“임신까지 한 날 버리려고?”
“그럴 일 없도록 형이 잘 넣으면 돼요.”
심드렁한 농담을 주고받은 후 올린의 슬리퍼 한 짝이 날아가는 것도 모른 채 엉겨든 그들을, 멀찍이 선 수행원들이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2층 침실에 도착한 올린은 정비를 밀어 침대에 쓰러뜨리고 나서, 얇은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정비는 농담 삼아 몸 불편한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고 항의를 하려다 그만뒀다. 그동안 올린의 몸 상태를 신경 써 주지도 않고 해 대던 짓이 있는데 그런 농담은 둘 사이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정비는 탐스럽게 뻗은 가느다란 목 아래 날카롭도록 섬세한 쇄골, 그 아래 하얀 가슴과 가슴 가운데 장식처럼 돋은 분홍 돌기, 그리고 날씬하고 모양 좋은 복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멍 하나 없는 매끈한 몸, 조그맣고 윤기 도는 유두에 음심이 싹튼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다가 툭, 손등을 얻어맞고 얼굴을 올려다보니 올린이 싱긋 웃었다.
“어딜, 자기 좋은 것만 하려고.”
“조금만 만질게. 안 아프게.”
“제대로 할 일 하고 나면 만지게 해 드립니다.”
“할 일? 할 일 뭐.”
“내 배 속, 여어어기까지 형 자지 박은 다음에, 정성을 다해 흔들어 주는 거. 내가 싸고 나면 형도 싸도 돼요.”
길게 갈라져 좌우의 모양이 비대칭적이어도 어여쁜 복근을 훑고 명치에 이르러 꾹, 누르는 손에는 아직 구멍이 나 있다. 아일렛을 빼지 않는 까닭은 끼고 지내는 편이 손을 쓰기 쉽기 때문일 터다. 정비는 잠시 그 구멍을 메워 줄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느라 야하기 짝이 없는 음담에 대거리하는 것도 잊었다.
고작 1센티 남짓한 구멍일 뿐이지만 저것이 올린의 삶에 지대한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을, 정비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저택에서야 구멍 난 손으로도 젓가락질을 실수하면 매를 맞았지만, 지금 올린은 젓가락 대신 포크를 쓴다. 손가락이 세밀한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잼이나 피클 따위의 병뚜껑도 열지 못한다. 악력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식당으로 향하는 좁은 복도 위에 전 주인이 설치해 둔 철봉이 있기에 거기에 몇 분이나 매달릴 수 있겠느냐고 장난쳤더니, 손 대신 날씬하게 근육이 선 팔뚝을 써서 악착같이 매달렸었다. 장난친 정비가 미안해져서 입을 다물었지만 올린은 꽤 오래 버틴 다음 뛰어내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표정 좀 봐. 왜요, 내가 먼저 싼다고 해서 놀랐어요? 싸게 해 주는 것도 고마운 줄 아시고, 허리나 드십쇼.”
올린은 지금도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일단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아무것도 걸러 내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뱉는 편이다. 평생 들어온 더러운 말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올린이 더티토크를 시작하면 정비도 낯빛이 질릴 정도로 거침이 없는데, 목소리는 담담하고 어조는 느릿하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비는 올린이 저택에서 지내 온 긴 시간을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면서, 한편 당시의 올린은 어쩌면 말 같은 거 하고 싶지도 않았을 만큼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느새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린 올린은, 자신의 명령에 정비가 순순히 허리를 들어 주자 가장 진지한 얼굴로 바지를 끌어 내렸다. 속옷까지 끌어 내려 그 아래 이미 발기한 자지가 뿅 튀어나오도록 한 올린이
“와, 얘는, 정말….”
하고 나무라는 듯 곤란한 표정을 하다가, 제 선 좆을 정비의 자지에 갖다 댔다. 발갛고 하얗고 청순하게마저 보이는 올린의 것과 한데 모아 잡자, 도드라진 굵은 핏줄 덕에 더욱 험상스레 보이는 정비의 것이 조금 더 크게 부풀었다. 올린은 두 개의 자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비벼 대다가 한순간 어떤 것을 느끼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정비는 올린의 손놀림에 엉덩이를 조여 가며 사정감을 참다가 올린의 것 머리 부분이 크게 끄덕여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인 양 꿈틀대는 바람에 벌컥 몸을 일으켰다. 올린의 날개뼈 부근을 어설프게 잡아 저지하지도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지도 못하며,
“…올, 린아,”
하고 애원하는 듯 이름을 불렀다. 올린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눈썹만 치켜들며
“읏…. 아…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그냥 조용히 있어요.”
해서 정비의 입을 다물린 다음, 제 무릎 사이에 놓인 정비의 골반을 허벅지로 꽉꽉 조여 가며 두 개의 자지를 마구 쓸고 빌었다. 살끼리 쓸려 따갑다는 소리를 하려다 이것도 시답잖은 소리일까 싶어 입을 다물었던 정비는 겨우겨우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였던 러브젤을 발견하고, 두 개의 자지를 서로 비비는 올린의 두 손 사이에 미끄덩거리는 액체를 짜냈다. 그제야 서로 몸을 비비는 좆 사이에서 찔걱거리는 젖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응, 읏….”
고통을 견딜 때의 표정과 쾌감을 참아 낼 때의 표정은 참으로 닮았다. 정비는 둘 중 어느 쪽인지 구분하기 모호하나 정황상 후자일 올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올린의 겨드랑이로부터 옆구리, 그리고 골반까지를 살살 쓸었다. 손안에 붙는 피부의 감촉은 보드랍고 말랑한 데다 실루엣은 가늘지만, 그 안에 든 근육이 강인하고 뼈가 튼튼한 것을 안다. 그 다정하고 단단한 느낌이 좋아 한동안 손을 떼지 못하니 올린이 눈을 뜨고
“가슴 만지려고.”
하고 새초롬히 경계하는 소리를 했다.
“네가, 싫으면, 안 만져….”
정비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열기를 견디며 고개를 저었다. 올린은 신음하듯 말을 잇는 정비의 모습을 감상하듯 손아귀에 더 세게 힘을 주어 귀두끼리 마구 비벼 올렸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은 채 입술을 말아 무는 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더니 갈 곳 잃은 손을 끌어다 제 가슴 위에 놓아 주었다. 정비는 판판한 가슴살을 쥐어뜯듯 모아 잡아 조물거리다가,
“지금, 빨면, 화낼 거니, 크읏!”
하고 올린의 손재간을 못 이기고 토정했다. 격렬하게 흔들어 대던 손을 놓고 턱에 묻은 정비의 정액을 스윽 닦아 내는 얼굴이 엄격했다.
"네. 화냅니다. 넣고 나서 하시죠.”
그리고는 제 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 사이에 미리 넣어 뒀던 것을 낑낑 잡아 빼느라 구멍에 손가락 여러 개가 들락거리는데, 그걸 본 정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 거기에다가 뭘 넣어 놨던 거야….”
“읍내 셋으로 마트에는… 딜도를 안 팔아요.”
정비가 없는 동안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수행원 둘과 함께 읍내 마트에 간다. 거기서도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면 안 되고, 삼십 분 안에 필요한 것만 사서 후다닥 들어 오도록 재촉을 받는 바람에 오래 고민할 새가 없었다. 그래도 용케 찾았던 콘돔을 당근에 씌워서 오랫동안 아래를 쑤시고, 제 아래에 깊이 넣어 두었었다. 미리 확장해 두지 않으면 반드시 피를 보고, 그렇게 되면 정비가 삽입 섹스를 거부할 게 너무 뻔해서였다.
단지 넓히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아래에서 당근을 꺼내는 것을 본 정비의 얼굴을 보니 생각하지 못한 효과도 있었던 모양이라 올린은 목 안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당근을 구멍 입구에 걸친 채 쑤걱쑤걱 소리가 나도록 안으로 밖으로 왕복시켜 보였다. 당근의 굵직한 밑동에 발간 속살이 딸려 나왔다가 들어가고, 다시 딸려 나왔다가 들어가는 광경을 정비가 열 오른 눈으로 지켜보았다.
새삼 저 표정이 우스운 것은, 여기 이 구멍에 온갖 것들을 넣은 게 네 도령이었기 때문이었다. 딜도나 바이브레이터를 대령하는 몇 분을 기다리지 못해서 손에 잡히는 것들로 아무렇게나 쑤시는 일도 많았고, 올린을 겁주고 아프게 하려고 깨지기 쉬운 것이나 뾰족한 것, 혹은 모양이 험상궂은 것들을 일부러 집어넣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이 둘째 도련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생강보다 안 아파요. 이건 콘돔도 씌웠고.”
올린이 잘못했을 때, 생강을 항문에 끼워 놓고 회초리질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예전에 정비는 무척 엄격한 사용자였다. 과하게 잔인한 짓을 하지는 않았으나 정해진 규율을 어기거나 지시한 바를 즉각 이행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매질을 하는 냉정한 주인이기도 했다. 손으로 때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자세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마구잡이의 린치를 가한 적도 없었다. 다만, 한 번 매질을 시작하면 정해진 대수를 바른 자세로 모두 맞기 전에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는 철저함이 넷 중 가장 지독스러웠다.
맞다가 실신하면 깰 때까지 별채로 물렸다가, 깨나면 다시 불러들여 이어 때렸다. 실신했다가 깨어나 못 다 맞은 매를 맞으러 별채에서 본채로 가는 길에 흘린 식은땀을 모으면 한 바가지는 될 거다. 못 견뎌서 벌을 덜어 주십사 빌면 매가 더해질지언정 절대로 감해지는 법은 없었기 때문에 올린은 다른 세 도련님 앞에서와는 달리 정비 앞에서는 우는소리조차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생강을 사용하는 처벌은 그런 정비가 올린을 벌줄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정비가 지적하는 잘못이란, 지금도 그렇듯 그때의 정비도 원칙주의자였으므로, 규칙을 어기는 모든 행동을 의미했다. 액받이로서 갖춰야 할 복장이 흐트러졌다든가, 사용되기 전에 정비가 지정해 두었던 루틴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든가, 아니면 바른 자세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다리는 동안 자세가 비뚤어졌다든가, 뭐 그런 것들이었다.
처음 생강을 항문에 넣게 된 것은 정비가 올린을 위해 정해 둔 루틴을 어겼을 때였다. 처음에야 루틴이라고 할 것 없이 구멍만 확장시켜 삽입하곤 했으나, 몇 번 올린의 몸에서 피를 낸 후에는 정비가 몇 가지 절차를 정해 주었다. 둘째 도련님을 모시는 날엔, 올린은 봉사 전부터 아주 호되게 시달려야 했다. 피아노 의자 위에 올려져서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딜도 위에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기를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하여 구멍을 열고, 고용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자세로 엎드린 채 짧은 패들로 제 구멍을 스스로 찰싹찰싹 때려 입구를 연하게 한 후, 요도를 막는 카테터를 스스로 꽂았었다. 자꾸 허락 없이 사정을 하는 바람에 추가된 규칙이었다.
꽂힌 채 자지가 덜렁이도록 흔들리며 박히는 것도 아팠지만, 꽂는 과정이 너무 괴로워서 넣는 내내 밀리 단위로 고개를 젖혔다 숙여 가며 울었다. 그토록 애를 써서 넣어도 자꾸만 밀려 나왔다. 바들바들 떨며 깊은 데까지 막은 다음엔 연약한 부위를 몽땅 드러낼 수 있도록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두 다리를 번쩍 치켜들고 허리를 접은 채 대기하는 것까지가 올린이 정비에게 액받이로서 사용될 때 지켜야 했던 루틴이었다.
그날도 잔뜩 긴장한 채 다리를 벌렸던 올린의 자지를 정비가 잡았을 뿐이었는데, 그만 요도구 깊숙이 단단하게 박혀 있어야 할 카테터가 주르륵 밀려 나와 버렸다. 정비가 카테터의 끝을 붙잡고, 지난번에도 이렇지 않았나, 하고 물을 때의 실망한 얼굴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올린은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기억한다.
“생강은 정말…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그때 두려움에 떨며 올려다보았던 얼굴이, 지금은 얌전히 누워 제 말을 기다린다. 적합한 표현을 찾으려 애를 쓰다가 정비의 얼굴을 내려다본 올린이 한숨을 쉬었는데, 그것은 예전의 고통을 상기한 탓이기도 하고 지금의 달라진 처지에 안도한 탓이기도 했다. 정비의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 가득히 올라 있는 것은 죄책감과 미안함이다. 올린은 그 얼굴에서조차 위로를 찾아냈다.
매질할 때 엉덩이에 생강을 집어 넣어 고통을 배가하는 방식은 액받이를 다룰 때 흔히 쓰는 훈육법이긴 했지만, 준비 과정이 번거로워서 형제들은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비는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에게는 반성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번거로움은 오히려 올린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돌이켜 볼 시간을 벌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비는 고용인으로 하여금 올린을 데리고 가서 주방에서 생강을 얻어 오게 했다. 그중 가장 큰 생강 세 개를 골라 서재 밖 복도에 앉아 껍질을 벗겨 오라 하면 올린은 잔뜩 기가 죽어서,
“네, 도련님.”
하고 쭈뼛쭈뼛 나가서는 찬 바닥에 얌전히 꿇어앉았다.
정비는 서재 안에 있어서 잘 몰랐지만, 그렇게 생강을 까고 있을 때 옆에 와서 깝죽대던 것은 항상 정환이었다. 그는 고용인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벌을 서면서 생강을 까는 꼴을 발견하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내내 놀려 댔다. 칼질이 서투른 올린이 꾸물거리면,
“그거 제대로 안 깎인 거 아니야?”
하고 훈수를 두거나,
“이거 좀 더 깎아.”
하면서 깨끗하게 깎아 놓은 생강을 이마에 던져 딱, 소리가 나도록 맞추거나,
“다 했네. 이제 그거 보지에 존나 처넣고 매 맞으러 가는 거야?”
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대거나,
“보짓살 존나 얼얼하겠네, 미리 조금 때려 줄까?”
하는 소리를 해서 결국 잘 참던 울음이 터지게 했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던 정환도 지금 그때를 회상하는 정비도 끝내 모를 것은, 휑한 복도에 혼자 꿇어앉아 묵묵하게 생강을 까는 것보다는 차라리 놀려 댈지언정 앞에 누군가 함께 있어 줬던 것이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비는 복도에서 올린이 정환과 함께 있었던 것은 모른다. 그저 다 깎은 생강을 들고 올 때마다 올린의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던 것만 안다. 생강의 크기가 원래보다 확연히 줄어들어 있어서 귀여웠던 기억이 난다. 올린의 성격에, 일부러 그렇게 작게 만든 것은 아니고 칼을 다루는 데 익숙지 않아 그 모양을 해 왔을 것라고만 정비는 생각했다. 요령 없는 올린을 답답해하며 정환이 트집을 잡아 조금이라도 더 작게 만들어 준 것은 정환 말고는 누구도 모른다.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제 속을 쓰라리게 달굴 것을 기다리는 올린은 귀여웠다. 항상 보드랍게 풀리고 살짝 젖어 있는 항문은 손가락 한두 개쯤은 우습게 삼켰다. 벌리면 안쪽 살이 벌름대는 게 보일 정도로 유연했다. 그 안을 생강이 더 붉게 만들 것을 알면서 즙 떨어지는 것을 살짝씩 돌려 가며 넣으면, 올린은 기대감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모를
“으읏, 흐윽….”
하는 우는 소리로 신음했었다. 그러면서도 매를 맞기 위해 엉덩이를 높이 쳐들며 자세를 다잡는 것을 정비는 속으로만 기특해하며 엄한 얼굴을 했었다. 정비가 자주 사용하던 구멍 뚫린 패들과 날카로운 자국을 남기는 회초리 중에 어떤 것으로 맞게 될지 곁눈질하는 긴장이 사랑스러워서 짐짓 시간을 끌기도 했었다.
“시선, 자세 유지하고 숫자 세, 스무 대다.”
“네, 감사합니다, 도련님.”
책상에 손을 짚고 매를 맞을 때라도, 정비는 올린의 상체가 바닥과 수평을 이루도록 잔뜩 엎드리게 하는 자세를 선호했다. 너그러운 마음이 들 때는 책상 위에 가슴과 배를 붙인 채 엎드리도록 해 주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손만 책상을 짚은 채 상체를 숙여 몸이 기역자를 이루도록 한 채 버티게 했다. 그렇게 상체를 기울인 자세로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감히 떨어지는 매로부터 항문을 숨길 수 없었다. 볼깃살과 항문을 함께 때리는 매질의 충격이 가장 깊은 데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런 자세가 가장 좋았다.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올린은 두 팔에 잔뜩 힘을 줬다. 충격은 첫 번째의 매가 가장 크지만, 아픔은 역시 매가 더해질수록 더 크게 솟구쳐 오른다. 매를 맞지 않고 넘어가는 날보다 맞는 날이 더 많은 나날이었으므로 두 볼기에도 역시 피멍이 든 채였지만, 정비는 그 위에 매질을 더하는 것을 크게 망설인 적이 없었다. 자주 사용하는 테니스 라켓의 그립에 늘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올린의 상처 또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었다.
“흑! 하나, …감사합니다.”
올린이 숫자를 셀 때의 목소리는, 스며 나오는 듯한 신음을 제외한다면 차분하게까지 들렸다. 매질의 고통이 머릿속을 뒤흔들어 버릴 만큼 뜨거울 때가 아니라면 올린은 울면서도 단정한 목소리를 했다. 정비는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조금 늦게 나오는 것은 용납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올린은, 매질의 뜨거움이 자신의 속을 달구고 순간 머릿속을 아찔하게 강타하면, 다음의 매질이 떨어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나서야 숫자를 셌다. 그 한숨 같은 목소리를 정비는 좋아했던 것도 같다.
맞을 때마다 볼기에 힘이 들어갔다가도 금방 원래의 말랑말랑 힘 뺀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생강이 물린 내벽이 조여들면 아린 기운이 점막에 더 잘 스며들기 때문일 터였다. 스무 대 혹은 서른 대 남짓한 매질을 맞을 때마다, 올린은 눈물을 떨구면서도 대개 지시한 바를 잘 이행했다. 간혹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릎을 굽혔다가 펴거나 한쪽 발을 발랑 들어 올리는 식으로 자세를 흐트러뜨리기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하는 냉정한 말을 들으면서도 올린은,
“죄송합니다. 도련님. 잘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부탁드립니다.”
하고 울먹일 뿐, 정비를 향해 차마 한 번의 불성실을 용서해 달라고 빌지 못했다. 그만큼 정비는 혹독하게 굴었었다.
그때의 정비는 자신이 올린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고, 제가 맡은 바를 다 할 수 있도록 이 애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물건은 물건 나름의, 사람은 사람 나름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당하는 게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지만 애초에 그 자리라는 게 얼마나 불공정하게 정해지는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니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면피의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정비의 회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올린은 다정하게도 웃어 준다. 느리게 휘젓던 당근을 뽁, 소리가 날 것처럼 경쾌하게 빼며 말한다.
“생강은 생강이고. 일단 지금은,”
그리고 정비의 자지 위에 구멍을 맞추어 대고, 은근히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느릿하고 미끈한 몸짓으로 내려앉았다.
“자지를 넣어 볼까요.”
정비는 올린이 수줍음과 즐거움을 섞어, 이렇게나 매혹적으로 웃을 수도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제 아래에서 굴러 나온 당근을 부끄러움도 없이 휘둘러 내던지는 모습은 어린애가 돌팔매질하듯 거리낌이 없었다. 정비는 당근이 마루 위를 통통 튀다 데구르르 구르는 것을 고개 돌려 바라보며,
‘물수제비도 잘 뜰 것 같다. 근처 소산 저수지에라도 데려가 봐야겠어.’
하는 올린이 들으면 기겁을 할 생각을 하다가, 별안간 제 자지를 쥐어짜는 듯한 촉촉한 감촉을 느끼고
“크흑…!”
하고 밭은 숨을 내뱉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올린은 새하얗게 질려서는, 마른 아랫배가 말뚝같이 둥근 자지의 모양처럼 불룩하게 솟은 채로 할딱이고 있었다. 아파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바람에 얇은 뱃가죽을 자지가 찢을 것처럼 각도가 뒤틀렸다. 정비는 가여운 생각이 들어 얼른 몸을 일으키고 삽입을 물리려 했다.
“빼지, 마요, 형.”
올린이 한 눈만 간신히 뜬 채 저지했다.
“형이랑 섹스, 하고 싶어요. 형한테 액받이로서 소용되었던 거 잊고, 사람 대 사람으로 성애를,”
성애를 나눈다는 말은 정규에게 배운 표현이었다. 올린은 하얗게 반짝이는 이마로부터 진땀 한 방울이 굴러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괴롭게 얼굴을 찡그렸다.
“성애를 나누고 싶단 말이에요….”
쿵, 정비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사람 대 사람으로 성애를 나눈다니, 올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그저 비슷한 행위를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고만 여겼다. 같지만 다른 행위로 이전의 기억을 덮는 흔한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도 올린과 자신의 관계에는 미처 적용하지 못했다.
정비는 올린의 두 볼기를 제 손으로 받치고 조심스레 삽입된 곳을 물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빼지 말라니까, 하고 신경질에 가까운 소리로 자지러지는 올린의 귓가에
“그래, 네 말대로 할게.”
하고 달래는 소리를 하며 최소한의 접합은 유지한 채 올린과 자신의 위치를 바꾸었다. 올린은 버둥거리던 몸짓을 멈추고, 제 마른 등에 정비의 체온으로 데워진 시트가 닿자 어쩐지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지친 듯 감긴 눈가에 입을 맞춰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접합이 깊어져 올린에게 무리를 줄 것 같았다. 정비는 손을 들어 그 눈가를 따라 그리듯 한 번 쓸어 주었고, 올린이 그 손에 기대듯 고개를 살포시 움직여 주는 것에 만족했다.
기승위로 좆을 넣는 것과 누운 채 넣어 주는 것을 받는 건 피로도가 다를 터였다. 후배위로 넣는다면 삽입은 더 쉽겠지만, 정비는 예전에 올린을 물건 취급할 때도 후배위는 선호하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혹여 숨이 막히거나 눈이 넘어가 상태가 위험해지더라도 빨리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올린은 정비가 눕혀 주고, 조심스럽게 다리 안쪽을 벌려 잡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어 보였다. 내전근이 바짝 긴장한 채 벌어진 다리 사이를 쓸어 주며, 정비가
“괜찮아?”
하고 묻는 말에 답하는
“빨리,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팔팔했다. 정비는 올린의 허리를 잡아 제 몸에 맞추어 내리듯 하며, 뭉근하고 느릿하게 벌어진 데를 파고들었다. 올린이 정비를 기다리며 풀어 두었던 안은 다정스럽게 버거운 것을 반겨 주었다. 반쯤 넣었다가, 잠시 물리고 다시 조금 더 깊이 삽입할 때, 올린이 다소 급하게
“입 맞춰 줘요.”
하고 요구했다. 그러려면 더 깊이 넣어야 하는데, 올린의 눈도 입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 것 같았다.
정비는 누운 올린의 입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잔뜩 숙였다. 따라서 발기한 것이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 들어 마치 꼭 맞는 일습의 것처럼 깊은 데 안착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성취감과도 비슷한 뿌듯함에 숨을 헐떡이며, 한 손으로는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귀로부터 턱 언저리까지를 감쌌다. 마음에 늘 맴도는 미안하다는 말을 이번에는 귓가가 아니라 입속으로 속삭여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깊이 넣는 심정으로 키스했다. 올린의 팔이 뻗어 와 정비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혀를 얽은 채,
“이제, 움직여요.”
하고 명령한 건 올린이었다. 정비는 올린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운 마음을 물리치고, 지시에 따랐다. 올린의 말을 거스르지 않는 것은 단지 그에게 지은 잘못에 대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정비는 올린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아, 하….”
과거 강제로 몸을 팔던 사람의 신음은 요사스러운 데 없이 나직했다. 저택에 팔려 와서도 감금된 채 학대받는 나날이었다. 정비는 본래 시중에서 액받이로 거래되는 물품의 소위 ‘유통 기한’이 고작 삼사 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온건한 방식으로 사용하더라도, 그런 짓을 당하는 사람의 육신과 정신이 버틸 수 있는 기한이 겨우 그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올린이 어둠을 헤매던 시간을 헤아려 보면 그것보다 훨씬 길다. 정비는 올린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해 보며, 만일 자신이라면 얼마나 오래 제정신을 유지해 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올린은 정비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처한 상황을 제하고 타고난 그 본성만 따지자면 정비는 올린을 저보다 훨씬 위의 서열에 두고 있었다. 수컷은 원래 서열의 동물이다. 그러므로 정비는 올린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