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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회 (45/65)

# 재회

바닥을 파서 만든 장방형의 수조에 밀어 넣어지고서야 헬멧이 벗겨졌다. 올린은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깊이의 물속에서도 발버둥을 치느라 몇 번이나 물을 먹었다. 물 안에 몸이 든 것만으로도 떠오르는 죽음의 기억이 있었다. 한 평 남짓한 수조에 찬물이 올린의 움직임을 따라 크게 요동하고 밖으로 튀었다. 그를 넣은 남자들이 뒷덜미를 잡아 끌어올리듯 하여 바로 세우고 머리를 쾅쾅 소리가 울릴 정도의 몸짓으로 몇 번이나 걷어찬 다음에야 올린은 제가 다리에 힘을 주고 선다면 물에 잡아 먹힐 일이 없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사지가 벌벌 떨렸다. 앞으로 묶인 두 손을 본능적으로 들어 올려 제 얼굴에 묻은 물을 훔쳤다. 질린 눈으로 내려다본, 제 몸이 든 물은 시커멨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이전에 이 물에서 죽은 시신의 남은 조각 따위가 안에 여전히 떠다닐 것만 같은 상상이 올린의 마음을 좀먹었다. 그가 공연히 소스라치며 뒷걸음치다가 수조의 벽에 닿아 또다시 놀라는 꼴은 내려다보는 남자들에게 기이한 즐거움을 주었다. 엉망인 채로도 아름다운 모습인 것은 가해자들에게는 기쁨이었으나 본인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남자들이 철문을 닫고 떠난 후에, 홀로 남은 올린은 불필요한 상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고 제 잇새에서 읏, 읏, 소리가 새도록 아프게 제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독살스럽게 굴고 나서야 공포는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려고 애썼다. 정규의 곁을 떠났던 게 오늘 낮이었는데 이동하고 얻어맞는 사이에 벌써 밤이 되었다. 수조에 밀어 넣어지기 전에는 몰랐던 조그만 창이 벽 높은 곳에 나 있다. 새들어오는 빛은 달빛이었다. 올린은 제 턱까지 물에 잠기도록 몸을 낮추어 보고야 조그만 창에 반만 걸린 달님의 반가운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고개를 빼어 보았지만 깊은 수조 안에서 밖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다. 올린이 든 수조 외에 같은 모양의 수조가 여러 개 파인 이곳은 오로지 사람에 대한 해악을 끼치기에 적합하도록 꾸며진 곳이었다. 올린이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이곳이 얼마나 공허하도록 넓고 수조가 얼마나 많으며, 스스로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잘 봉해진 공간임을 알아챘다면 그의 다친 정신은 억지로나마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몸 상태는 나빴다. 남자들은 올린을 쇠약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인 듯, 번갈아 가며 들어 벽을 향해 집어 던지고 튕겨 나올 때마다 걷어차 올렸다. 거칠게 다루어지는 와중에 발바닥의 봉합은 다시 터졌고 강간당하지 않았음에도 여러 번 찢겼던 아래가 시렸다. 올린은 제 다친 몸을 살펴보려고 하다가, 사지가 그래도 부러지지는 않았음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확인은 그만두었다.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고통을 사그라뜨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치료할 수 없다면 무시하는 편이 나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속의 발을 디뎠다. 바닥에 심한 요철이 없이 편평한 것을 확인하고는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움직여 좁은 수조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벽을 조사하여 안에서 밖으로 기어오를 수 있는지 시험하려 했지만 그럴 기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거니와, 설사 남은 힘이 있다고 해도 오를 수 없도록 위로 갈수록 안으로 기울어지는 벽이었다. 그는 몇 번 팔꿈치를 위로 올려 시멘트 바닥에 대고 배에 힘을 주어 제 몸을 끌어올리려 시도하다가, 거꾸로 뒤집히며 물을 먹고 벽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내고 나서야 시도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제 마음에 잠시간의 휴식을 찾기 위해 애써 좋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울음이 잦아들고 용기가 날 거라고 믿었다. 아무리 괴로운 것들로만 둘러싸여 사는 사람이더라도, 모든 것을 무서워만 하고 싫어만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예전의 올린은 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셋째 도련님이 네가 좋아하는 게 무어냐고 물으신 이후에는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속에 모아 두려 무진 애를 썼었다. 그리고 그건 참으로 유익한 노력이었다.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삶은 빈 것과 같았다. 그건 어쩌면 죽음과도 닮았다. 그러나 호감이 가지 않는 것들로 꾸려진 생활 속에서도 애써 좋은 것을 발견해 내는 과정 중에 올린은 조금 더 사람다워질 수 있었다. 한낮의 햇빛, 마룻바닥의 감촉, 화로의 불씨를 뒤적이던 쇠젓가락 끝의 장식, 그 젓가락을 쥐었던 셋째 도련님의 손가락. 종이접기를 위한 알락달락하고 자그만 종이들, 종이학의 부리가 완벽하게 뾰족해지도록 다듬어 낸 순간 잘하는구나, 속삭이던 첫째 도련님의 목소리. 장미의 상쾌한 향기와 그 가운데 선 채 따라오라는 듯이 턱짓하고 먼저 등을 돌려 뛰어가던 정환 도련님의 뒷모습, 청결한 시트 위에 눕는 순간의 바삭거리는 소리, 그 위에 누운 자신을 내려다보던 둘째 도련님의 이마에서 떨어지던 땀방울.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 도련님들이 숨어 있었다. 학대하여 죽을 지경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던 것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뭐,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받을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서 사랑해 줄 만한 구석을 발견해 내는 것은 올린이 강제로 터득할 수밖에 없던 특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특기의 덕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도련님들이 아니라 여기 그것이 절실한 채 고통받는 올린이다.

묶인 손으로 눈가에 묻은, 눈물일지 물일지 모르는 것을 훔쳐 냈다. 한 번 훔쳐 내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울어 봤자 기운만 빠질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데 도무지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린애가 울음 속에서 엄마를 부른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지만 올린에게는 부를 엄마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설에서 자라던 때에는 울 때마다 원장님, 하고 부르던 애들도 있었지만 그때조차 올린은 누굴 부르면서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올린은 막연히 자신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아픈 데를 가여워해 줄 사람의 이름으로서,

“도련님.”

을 불렀다. 넷 중의 누구로부터의 구원을 바란 것도 아니라 그저 부를 만한 이름으로서,

“도련님.”

하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작았다. 두 번이었다. 소용없었다. 그만두었다.

수조의 한쪽 끄트머리에 서면, 머리 위의 작은 창에 반쯤 걸린 달의 모습이 보인다. 올린은 저도 모르게 물속에서 뒷걸음질 쳐 달이 잘 보이는 모서리에 어깨를 기대고 섰다. 얼음장처럼 찬물은 아니었으나 체온보다 온도가 낮은 물 안에 갇힌 사람이니 몸이 떨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치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는 것을 그만두고 그저 지금 볼 수 있는 유일한 아름다운 것을 올려다보다가, 올린은 어느 순간 밤이 깊었고 창문에 반만 걸쳐 있던 달이 온전히 둥근 모양으로 창안에 든 것을 알았다. 젖은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올랐다.

만월이었다. 춥도록 창백한 색이더라도 올린에게는 유일한 빛이었다. 창문을 깨고 제 품 안으로 떨어질 것만 같이 생생하게 부푼 달은 너무 가까워서, 누가 올가미를 건 다음 고통받는 올린에게 위안을 주고자 가까이 당겨 놓은 것처럼 보였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강제로 좁은 창에 갇혔음에도 달은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올려다보는 것은 잠시나마 그의 차갑게 들끓는 마음에 따스한 평안을 선사했다.

올린은 자신에게 순간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황홀할 만큼 커다란 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람인 자신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면, 남에게 소용되는 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과 복을 위해서도 봉사할 줄 아는, 진실로 선량한 삶을 위해서라면,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원망 없이 솔직하고 순수한 물음이었다. 달은 침묵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치지 않았다.

손목이 앞으로 묶인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예전에 도련님들께 매를 맞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순간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비며 매를 그쳐 주십사 애원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마주 대었다. 눈물이 뜨겁게 흘러 이제는 고요해진 수조 안의 더러운 물 위에 똑 똑 떨어졌다. 올린이 숨조차 죽인 채 얼마나 조용하게 서 있었는지 그가 든 잠잠한 물 위에 눈물로 인한 파문이 번져 갔다.

올린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다. 그는 달아났고 돌아왔고 참아 냈다. 저항하다 정신을 놓기도 했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순종하며 견뎠고 도저히 그리할 수 없을 때는 당하기만 하던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고뇌하다 의존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제 발로 땅을 박차고 달리려 했다.

그런데도 제게 구원은 잡히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행할 힘이 제 안에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는 달을 향해 도와주세요, 부디 절 가엾게 여기시어, 이 비참한 삶으로부터 구원해 주세요, 하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쩌면 빠른 죽음을, 아니면 다른 삶을 갈구하는 것도 같은 홀로의 외침은 넓고 찬 지하실에 퍼져 나갔다. 그는 제 목소리를 제 귀로 들으며 그 공허한 울림에 고개를 떨구고 울었으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올린에게는 종교가 허락된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셔야 할 주인들이 곧 신이어야 했으므로, 감히 그 외의 어떤 절대자를 마음에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선량하고 거대한 존재를 상상하고 그를 향해 구원을 호소하는 그 행동은, 그 형태가 조악하였으나 종교와도 닮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실존 여부와 무관하게, 신을 믿는 사람의 마음 그 자체가 신과 같은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지금 올린의 귀에 들린,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그 힘의 발현일 수도 있다.

올린은 순간 그 소리에 소스라쳐 한 걸음 물러났다. 한 걸음 움직였을 뿐인데 창을 가득 채웠던 달의 모습은 사라졌다. 철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온 것은 서두르는 발소리와 탕, 하고 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소리였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바닥을 때리는 지팡이는 대단히 다급했으나 올린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다가올 고난을 대비하려 제 마음을 다잡았을 뿐이었다.

발소리의 주인이 지팡이를 짚은 절뚝이는 걸음으로도 뛰듯이 다가와 올린을 끌어내려 손을 내밀었을 때, 올린은 그를 반가워하지 못했다. 그는 그를 내내 그리워하면서도 그 모습을 잊었던 것만 같았다. 여위고 거친 얼굴은 낯설었고 그 눈 가득히 담긴 감정은 더더욱이 그랬다. 그러나 뜨겁게 자신을 불러 세우던 그 목소리만은 기억해서,

“올린, 올린아- 올린아!"

올린의 이름을 되뇔 뿐 그 외의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뒤늦게나마 제 묶인 두 손을 뻗으며,

“정비 형…!"

하고 한 번도 형이라고 불러 본 적 없던 사람을 낯설되 아무렇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짖었다. 그들이 서로를 서로의 품에 안을 때 올린은 흐느끼며 정비의 심장이 제 가슴을 때려 온몸을 울리도록 세차게 뛰고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은 달을 보며 빌었던,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제 탓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기쁨이, 그 사람의 손으로 구원받은 기쁨을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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