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공항 (43/65)

# 공항

출국일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정규가 정리해야 할 것들을 위해 올린을 홀로 두고 나갔다가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들은 점점 길어졌다. 올린은 그가 없는 동안에는 그의 영상들을 멍하니 보다가, 호텔 방문의 손잡이를 골똘히 바라보다가, 다시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돌아와 웅크린 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규가 돌아와 섹스할 때가 차라리 마음 편한 건 어쩌면, 혼자 있을 때처럼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규는 돌아와서 올린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면 안도했다. 이 애의, 사랑에 빠진 척하는 연기에 속은 척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진실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도망하는 것마저 막을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순간순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난 너를 해할 생각이 없다는 진실을 알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와도 정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올린은 마음 놓고 혐오를 실은 얼굴을 보인 다음 영영 자신의 곁을 떠날 것 같았다.

올린의 공포심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돋우어 내고, 그 공포를 이용하여 곁에 붙들어 놓는 편이 저 자신에게 나았다. 달아날 수 없는 마음 상태인 애를, 말 통하지 않는 낯선 땅으로 데리고 가는 거다. 의지할 데를 찾기는커녕 자신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오랜 기간 함께 있으며 후히 대해 주면 열정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랑이 싹트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갖고 싶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 걸 아는데도 소유욕은 솟아오르기만 했다.

정규는 간소한 캐리어 두 개를 거실 한 가운데 세워 놓고, 침실의 문을 열었다. 올린은 말끔한 옷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하얀 얼굴에 화면의 변화하는 색깔이 비치는 것도 모른 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이리 와, 올린,”

부르자 돌아보고 일어서는 얼굴 위에 선명한 푸른색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정규의 눈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던 애가 익숙하게 리모컨을 조작하여 티브이를 끄는 모습마저 기특해 보였다. 과거 올린이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낯선 곳의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얼마나 유능한 일꾼이었는지를 모르니, 할 만한 생각이었다. 정규는 올린이 너무 연약하여 제 손을 벗어나는 순간 곧 숨이 다할 것으로 생각했다. 야생에 방사되면 곧 죽임을 당할 햄스터처럼 보이는 그이니 속죄하고 책임지는 방법은 제가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제 욕심을 합리화하는 구석이 없지 않은 정규는 지금 들떠 있었다. 올랜도는 한때 정규가 파일럿이 될까 하고 유학을 알아보느라 깔짝거리던 곳이었다. 저택에 갇힌 채로도 정원을 걷는 것을 즐기던 올린은 그곳의 사철 따뜻한 날씨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비행시간은 길고 기내에선 만져 주지 못할 테니까….”

올린을 불러 무릎 사이에 앉히는 손길이 급했다. 탑승 수속도 핸드폰으로 끝냈고 부칠 짐도 없는 데다 정규의 얼굴은 잘 알려진 편이니 되도록 공항에는 늦게 나가는 게 나았다. 손에 여유가 없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올린은 정규가 입혀 준 바지 버클이 찰칵찰칵 풀리고 지퍼가 내려가는 동안 낮게 숨을 몰아쉬며 뒤통수를 정규에게 힘껏 기댔다. 바짝 긴장한 몸짓에 정규가 고개를 숙여 올린의 뺨과 자신의 뺨을 댔다. 조금 전에 면도를 끝낸 정규의 뺨은 매끄럽고 그의 품에서 스미는 향기는 청량했지만 올린은 그 뺨에 제 뺨을 마주 비벼 대지는 않았다.

바지와 브리프를 무릎까지 내린 올린은, 맨엉덩이가 정규의 다리 사이에 놓여진 채 다소곳이 모인 다리가 쳐들렸다. 정규가 뒤에서 안은 채 한 팔에다 올린의 양쪽 오금을 걸었다. 허공을 향해 바지와 속옷이 걸린 다리를 쳐든 올린의 정수리에 쪽쪽 입을 맞추고, 자유로운 손으로 올린의 맨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이미 신발까지 갖춰 신은 올린의 다리가 당혹스러운 듯 도당도당 움직이자,

“점잖게 있어.”

하는 말은 부드러운 명령이었다. 위로 들린 오금으로부터 얌전히 모인 뒷 허벅지를 살살 쓸고 내려간 손가락이, 어젯밤의 정사로 살짝 부어 있는 항문에 닿았다.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조금 더 젖힌 올린은 아래를 집요하게 물어뜯을 쾌락을 받아들일 준비로 눈을 감았다. 정규는 올린이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허벅지를 달달 떨고 눈물을 쏟을 때가 되도록 괴롭힌 다음에야 비로소 삽입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보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호텔방에서 둘이서만 지내면서 조금 입이 풀린 올린이,

“형은… 형은, 어, 귀찮지 않으세요?”

하고 젖먹던 때의 용기까지 쥐어짜서 물은 적이 있었다. 그날 정규는 싫다는 소리를 차마 못 하는 올린의 팔다리를 같이 묶어 개구리처럼 벌려 놨었다. 아래를 빨다가 젖기 시작한 입구를 챱챱 물 튀기는 소리가 나도록 때리고, 혀를 세워 불알 아래부터 회음의 피어싱 사이사이를 꾹꾹 누르고, 손가락으로 얕은 데만 폭폭폭 쑤셔서 서너 번이나 분수처럼 장액을 싸면서 울게 만들었었다. 그렇게 괴롭혀서 복통과도 닮은 미칠 듯한 욕정에 제발, 제발, 제발 넣어 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하게 만든 다음에야 삽입하는데, 삽입해서도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올린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 나서도 만족했다는 느낌보다는 머리 뒤가 새까맣게 타서 없어진 것같이 비인 기분을 더 크게 느꼈다.

“뭐가.”

그는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아래로 길쭉하게 열려 빠끔대며 정액을 잘금잘금 흘리는 올린의 항문을 보고, 양쪽 볼기를 힘껏 눌러 안에 든 것이 크림처럼 주르륵 흐르게 만들어 대며 물었었다.

“넣으시기 전에, 어,”

“넣기 전에 네 구멍 물고 빨고 핥는 거?”

“네, 전, 그냥 예전처럼 쓰셔도,”

“쓰는 게 아니지. 너랑 나랑 같이하는 거잖아.”

“맞아요, 형, 제가 실언했어요.”

정규는 그 항문에 검지를 넣어 안에서 갈고리 모양으로 굽힌 다음 잘게 흔들어 올린이 억누르지 못한 탄성으로 턱을 치켜드는 꼴을 보며 웃었다.

올린을 괴롭히는 시간은 정규가 실제로 안에 들어와 있던 시간보다 터무니없이 길었다. 올린은 싸지도 못한 자지가 부르르 떨도록 몇 번이나 눈을 뒤집으며 느끼고 느낀 끝에 마침내 정규가 들어왔을 때는 다리를 정규의 허리에 감을 힘조차 없어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흔들리기만 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한 목뼈가 다칠 것처럼 마구잡이로 흔들다 싼 정규가 과연 이제 막 빨아 온 걸레 같은 자신의 몸에 만족했을지 두려웠다. 물론, 액받이의 몸이 충분히 달궈진 다음에 삽입하면 사용자의 즐거움이 커진다는 믿음 때문에 사용 전의 액받이로 하여금 자위하게 하여 예열시킨 후 쓰는 주인들도 많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정규는 예전엔 물건이 달궈지든 말든 그냥 쓰는 걸 더 좋아했었다. 귀여운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놀리느라 수치스러운 짓을 시킨 적은 꽤 있었으나 제 손가락과 혀를 써 가며 삽입 전의 오나홀을 푸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수고는 아껴 두었다가, 액받이 말고 진짜 사람과 할 때 썼다. 애인들과 동침할 때는 그들이 희열을 느끼는 모습을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그 자신의 흥분을 높이는 전희이기도 했다. 지금 올린에게 하는 전희도 같은 의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쾌락에 빠진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런 것치곤 참 집요하게 굴긴 했다. 네 번, 아니 다섯 번이나 눈을 까뒤집도록 괴롭힌 다음에 정작 삽입한 정규가 사정한 것은 고작 한 번에 그쳤다. 물론 오래 참은 값을 하느라 정규의 자지가 올린의 속 깊은 데 망치질이라도 하듯 꽝꽝 때려 넣으며 몹시 아프게 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삽입자가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뭐랄까, 너무 좋아서 괴로운, 쾌감이 지나쳐 고문 같은 시간이 참 길기도 한 것이다. 올린은 정규가 이제 오직 자신만의 물건이 된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려니 하면서도 그 괴로운 쾌감을 견디기 힘들기도 하고, 쓸모없는 수고로 인해 정규가 자신을 지겨워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난 그렇게 하는 게 좋아. 너도 좋아 죽던데.”

정규의 산뜻한 대답에 올린은 절반은 안심하고 절반은 그렇지 못하며 눈만 깜빡였었다. 그는, 좋기는 좋았지만 나중에는 숨이 막혀서 정말 죽을 뻔했으며, 쾌락 속의 불안이 더욱 견디기 어려우니 부디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속 편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 결과 정규는 이 땅을 뜨기로 한 날, 호텔방을 나서기 직전까지 올린의 항문을 핑거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도톰하게 부은 입구를 살살 달래어 엄지손가락 하나만을 삽입하려다, 문득 생각이 난 듯 손가락을 들어 올려 올린에게 빨게 했다. 잘 젖는 올린이지만 밤새 시달린 탓에 빡빡할 지경으로 부은 곳을 아무 윤활액 없이 쑤시기 시작하면 아플 것 같았다. 올린은 보드라운 혀 위를 긁는 손가락을 젖 빠는 아이처럼 빨다가, 불시에 입천장이 부드럽고 느릿하게 긁혀서

“흐읏,”

하며 헐떡였다. 아주 예전엔 자신의 성감대가 엉덩이와 젖꼭지처럼 적나라한 곳으로 한정되며, 그곳도 만져지는 것보다는 얻어맞는 것에 더 잘 느낀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네 형제에게 사용되는 동안 훨씬 많은 곳을 개발당했다. 정규와 지내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올린은 새로운 곳들을 더 많이 발견했다. 정규는 올린의 몸을 수천 개로 토막 내어 그 모든 토막들이 어떤 방식의 자극을 선호하는지 연구하는 사람 같았고, 그 결과 이러한 방식으로도 올린의 목에서 신음이 새도록 길들여 냈다.

“으응?”

헐떡이는 올린을 달래듯 촉, 귀 아래 옴폭 들어간 부분에 입을 맞춘 정규가 가만히 속삭였다.

“입 벌리고 있어, 내가 다물어도 좋다고 할 때까지.”

그리고는 더운 숨을 뱉으며 벌어진 입, 아랫입술 바로 뒤에 얌전히 놓인 혀가 손가락을 닦기 위한 물수건이라도 되는 듯이 한참을 문질렀다. 당연스럽게 고이기 시작한 침을 충분히 엄지에 스며들게 한 후에는, 아랫니에 손가락을 걸어 아래로 잡아당겼다. 저절로 당겨진 턱 때문에 입은 처음 올린이 벌린 것보다 훨씬 야하고 크고 둥글게 벌어졌고, 정규의 손가락이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에도 당연히 다물어지지 못했다.

다시 올린의 항문으로 향한 엄지손가락이 어렵지 않게 구멍에 진입했다. 올린은 침을 흘리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듯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엄지의 첫 마디까지만 들어갈 정도로 얕은 삽입이지만 도톰하고 단단한 것이 아래를 넓히듯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자 올린의 볼기에 힘이 들어갔다. 정규가 다시 지시했다.

“엉덩이에는 힘을 빼. 그래야 예쁘지….”

입을 다물 수 있었더라면 숨길 수 있었을,

“하아….”

소리가 정규의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다. 정규도 가만히 침을 삼키며, 올린의 말 잘 듣는 항문이 동그랗게 벌어질 때까지 엄지 끝으로 동그라미를 거듭 그렸다. 그리는 동그라미의 크기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자, 부은 항문 근처의 살이 그 움직임에 따라 밀려나며 회음과 꼬리뼈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겨우 엄지손가락 하나, 그것도 한마디만 삽입되었을 뿐인데 겁먹은 올린이 한 손으로 정규의 허벅지를 짚고 뻗대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두 손은, 네 귀를 잡아.”

조금이나마 품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이 느껴진 까닭에, 이번의 명령은 어조가 조금 달랐다. 여전히 다정했지만 엄격했으므로 올린은 얼른 손을 떼고 제 귓불을 쥐었다. 아래의 열기를 버티느라 귀를 눌러 잡은 양손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갔다. 제 손이 제 귀를 꼬집는 꼴로, 올린은 느리게 진행되는 정규의 요리를 기다렸다. 물론, 식재료는 올린 자신이었다.

크게 벌어진 입, 아랫입술 위에 놓인 혀끝에서 침방울이 똑 떨어질 때쯤, 정규의 중지가 엄지가 든 구멍에 함께 파고들었다.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손가락이 협업하여 구멍을 길쭉하고 뻐근할 지경으로 쭈우욱 벌려 내는 감각에, 올린의 목에서는

“하, 하, 학….”

하고 긴장하여 뚝뚝 흘리는 호흡이 이어졌다. 저절로 고개가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고 어깨가 오그라들었지만 그 정도 움직임은 용서받았다. 그는 벌어진 구멍에서 엄지를 물러 내고, 대신 약지를 함께 집어넣어 중지와 함께 안으로, 밖으로 왕복하기 시작했다. 몽글몽글하고 조밀한 안을 느끼는 손가락을, 예민한 내벽도 함께 느꼈다. 엄지손톱으로 불알을 밀어 올리고, 검지와 소지로 볼기 쪽을 받친 채 느릿하게 시작한 왕복은 들어갈 때는 세차고 나올 땐 집요했다. 찌걱찌걱 소리가 울리고 장액이 새어 쑤시는 손의 손바닥을 척척하게 적실 쯤엔, 정규도 흥분한 숨소리를 올린의 귀에다 들려주고 있었다. 물론 입이 크게 벌어진 채 감히 다물지 못하고 있는 올린만큼 야한 소리는 아니었다.

점점 빠르고 거세어진 왕복에, 올린은 혹시나 정규의 손이 안의 내장을 들어낼까 봐 무서워했다. 살 없는 사타구니와 아랫배가 손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들렸다. 아픈데도 저절로 손가락을 따라서 움직이는 몸,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해 달라는 듯이 내밀어진 항문을 별안간 쑤욱 빠져나간 정규의 손바닥이 매섭게 찰싹, 때렸다.

“하아!”

순간 호된 야단을 맞은 올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려다가, 얼른 다시 벌리며 제 뒤에 딱 붙은 정규의 눈치를 보았다. 천박스럽게도 더 쑤셔 달라는 듯이 쩝쩝대는 구멍의 입구에 빨갛게 손가락 자국이 남도록 때려 준 정규는, 이번엔 장액에 젖은 손으로 올린의 자지를 훑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느리게 올라오는 손가락의 감각에 올린의 엉덩이에 다시 힘이 들어가고, 그러자 비로소 정규는

“형이 뭐라고 했어, 올린.”

하고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를 했다. 올린은 아직도 벌리고 있던 입을 움직여도 될지 몰라 잠시 눈치를 보다가,

“엉덩이에, 힘 빼라고 하셨어요….”

하고 대답하고 나서,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죄송해요 형….”

하고 용서를 빌었다. 정규는 자신에게 등을 대고 안긴 올린의 오른뺨에 왼뺨을 대고 웃었다. 진지하게 몰입한 목소리가 귀여워서였다. 이제 곧 비행기를 탈 거다. 더 이상 겁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간질거리도록 하는 목소리는 참을 수 없다.

“형 말 잘 들어야지.”

괴로움은 덜고 엄한 분위기는 더하여, 짐짓 목소리를 꾸미는 정규의 목소리는 올린에게는 놀이로 여겨지지 않았다. 놀이를 가장하는 진심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더 무서웠다. 올린의 눈가가 붉어졌다. 후끈거리는 눈두덩에서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애쓰며 올린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은, 자신이 정규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정규가 그 마음을 받아 주었으므로, 그와 함께 멀리 떠나 사진 속의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게 될 거다. 그렇지만 역시, 그와 자신의 관계는 이전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올린이 물을 수 있을 리 없지만, 상상만은 금지된 게 아니었다. 이 관계에서 갑은 철저하게 정규, 올린은 가장 철저한 을이다. 그가 제안한 것을 거절했을 때 올린에게 남는 것은 다시 그 차가운 얼음물에 처넣어져 춥게 익사하는 것, 혹은 그것보다 오래 걸리고 훨씬 아픈 방식으로 죽어 가는 것,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이 다시 그 저택으로 돌아가 폐기만은 면했으되 쓸모없어진 액받이의 지위로서 소용되는 것이다. 올린이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경우의 수가 있다 해도 그것은 가벼운 걸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닐 터였다.

“네, 형.”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올린은 온순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런 것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저 당장의 구원이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는데, 그것이 일부 사실이기도 하므로 대단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형, 저 잘못했으니까, 때려 주세요….”

올린은 따뜻하게 감싸 안겼던 품을 떠나, 카펫 깔린 바닥에 등을 대고 눕혀졌다. 소파에 앉은 정규가 원한다면 올린의 성기를 힘들이지 않고 짓밟을 수 있는 거리였다. 올린은 정규가 지시하는 대로 오금에 걸려 있던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어 바닥에 개어 두었다. 다리를 단단히 접어 벌리고, 조금 더 허리를 들어 항문을 드러냈다. 이제 곧 체크아웃할 생각으로 구두를 신었던 정규의 발이 올린의 허벅지를 밟아 조금 더 엉덩이를 높이 들게 했다. 무겁게 밟히자 그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정규는 다른 발로 올린의 반대쪽 허벅지도 밟아 주었다. 그럼에도 항문을 때리기엔 좀 위험하다고 판단한 정규가,

“올린, 두 손으로 허리를 받쳐.”

하고 명령했다. 도로 다정해진 목소리였으나 올린의 손은 벌벌 떨었다. 허리 아래를 두 손이 받치자 덜렁, 발기한 좆이 올린의 턱에 닿을 듯이 기울어지고 대신 옴폭하게 벌어진 엉덩이 사이는 완전히 위로 솟았다. 정규는 벨트를 풀어 반으로 접어 쥐며 최대한 불알을 맞지 않도록 항문을 치고자 거리와 벨트의 길이를 계산했다. 불알을 때려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마치 맞을 것 같은 공포감은 주고 싶었다. 게다가 그가 아는 올린은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할 때 아래를 더 흠뻑 적시는 취향이었다.

“숫자를 셀 필요는 없어. 네가 얌전히 잘 맞으면, 열 대를 때린 후에 여기에 형 자지를 넣어서 흔들어 준 다음, 아래를 씻고 공항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할 거야. 하지만 만일 자세가 흐트러지면, 매는 추가되지 않지만 자지는 없어. 대신 넌 도착할 때까지 이걸 아래에 넣고 가는 거야. 허리를 세워야 이게 더 잘 느껴질 테니 등받이를 눕히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 내내 바른 자세로 앉아서 가야 해. 어떤 게 더 나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겠지.”

정규가 가볍게 때리는 벨트 열 대를, 평생 매 맞고 산 올린이 견디지 못할 리 없었다. 알면서도 상상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무서운 벌칙을 읊어 주자, 올린은 불안해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이거, 라고 하면서 내민 것은 성인 용품이 아니라 아까 정규가 비운 탄산수 물병이었다. 정규는 유리병을 올린의 몸에 넣은 채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보안검색을 통과하지도 못할 거고, 한다고 해도 기내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위험했다. 올린을 을러 댈 때야 마치 올랜도에 도착할 때까지 넣겠다는 듯이 무서운 목소리를 했지만, 사실 올린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로 벌이 한정되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올린은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매를 버텨 냈다. 찰싹, 찰싹, 벨트가 이미 예전에 맞은 매 자국이 남아 있는 항문과 그 주위의 살을 달구는 동안 올린은 아랫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깨물며 자세를 유지했다.

얌전히 잘 맞은 상으로, 자지가 주어졌다. 어깨와 목, 그리고 팔로 몸을 지탱하고 엉덩이를 거꾸로 들다시피 한 자세를 바꿔 주지 않은 채, 발기한 자지를 항문에 맞추어 댔다. 위에서 짓누르는 만큼 더욱 깊이 삽입되는 자지가 버거워 입을 딱 벌린 올린의 얼굴을 즐거이 내려다보며, 정규는 과히 힘을 들이지 않은 가벼운 섹스를 즐겼다. 얼굴뿐 아니라 이 자세에서 내려다보는 모든 것이 예쁘고 즐거웠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마른 어깨에 살이 붙도록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이고, 시커먼 상흔이 남은 발바닥이 부디 색깔만은 본래의 핑크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준 다음에, 평범한 수영복을 입혀 해변으로 데려갈 것이다. 올린은 몸이 유연하고 순발력이 좋은 편이니 가르친다면 서핑도 제법 할 테지만, 처음이니 애기처럼 부기 보드에 태워 줘야겠다. 그러고 보니 올린은 바다를 본 적이 없을 테니, 도착해서 하루 정도 쉬게 한 다음에 바로 해변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좋았다.

나이브한 상상은 아름다웠다. 정규는 머릿속에서, 햇살 찬란한 온갖 풍경 속에 올린을 세워 놓아 보았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떠들고 걷고 웃는지 잘 아는 바가 없어서 상상 속의 올린은 장소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소품을 든 채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하여 목이 마르고 발이 아프다는 올린을 위해 물을 사 들고 와서, 빈 벤치에 덩그러니 남은 두 개의 캐리어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 가슴 벅찬 상상은 조금씩 더 선명하고 풍요롭게 날개를 뻗어 갔었다.

그는 망연하여 캐리어의 손잡이에 매달린 쪽지를 열었다. 호텔의 마크가 찍힌 메모지에는 단정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저택에서 반성문 따위를 쓰느라 간혹 펜을 잡아도 늘 세로쓰기의 글만 썼기 때문에, 이번의 편지도 세로쓰기였다. 도련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다정한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여 송구하오나 부디 스스로 살길을 찾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 하는 문장을 손에 든 채 출국장을 뒤졌다.

얼굴을 감추려 눌러쓴 모자 아래로 저마다 바쁜 사람 사이를 샅샅이 훑다 문득 맥이 풀려 멈춰 섰다. 생각해 보면, 정해진 결과였다. 사랑한다는 거짓부렁에 속아 넘어간 척 더 큰 거짓말을 했다. 얄팍한 감정의 유대가 아니라면 다시 얼음물에 처넣을 수도 있는 듯이 굴었다. 그러면서도 올린이 끝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랐던 것은, 악한 것은 둘째 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올린은 비록 거짓말쟁이긴 했지만 겁쟁이는 아니다. 죽음에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도 당연한 일, 그 공포에 사로잡혀 끝내 의지에 반하는 선택을 할 사람이, 올린은 아니었다.

환전을 위해 출금해 두었던 현금이 든 두툼한 봉투가 올린과 함께 사라진 것은 정규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올린은 햄스터가 아니라 제 먹이를 찾을 줄 아는 야생 땃쥐 정도는 될지도 몰랐다. 그는, 죄지은 주제에 그 애를 자신의 연인으로 삼고자 했던 괘씸한 희망을, 올린의 필체가 분명한 쪽지와 함께 접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비로소 올린을 떠올릴 때 자신이 궁리해야 할 것이, 소유욕 따위의 그릇된 욕심이 아니라 그간의 일에 대한 속죄임을 생각했다.

만일 정규가 바로 저택에 돌아갔다면 그는 오래지 않아 올린과 재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자신이 만든 것보다 더 잔혹한 죽음의 위기로부터 올린을 구함으로써 약간이나마 속죄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눈먼 자신이 형제들과 더불어 올린을 오래도록 학대했던 장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회사에서 자신의 명의로 빌려준 오피스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린이 제 의지로 그의 곁을 떠나 두 층 아래의 리무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절뚝이는 걸음 중에 낯선 남자들의 손에 사로잡힌 것을, 정규는 끝내 알지 못했다. 정규와 올린의 행방을 뒤쫓는 것보다는 정규의 명의로 구매한 항공권 스케줄을 알아내는 것이 손쉬웠으므로, 공항에서 그들이 사로잡히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정규의 손으로부터 올린을 떼어 내는 요란했을 과정이 필요 없었으므로 납치의 과정은 훨씬 조용하고 빨랐다.

올린은 남자 여럿에게 둘러싸이던 순간에조차 정규로부터의 구원을 바라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람인 자신이 우악스러운 손에 강제로 연행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챈다면 어쩌면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다른 방향을 본 채 서 있는 공항 경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 하고 숨 뱉는 소리가 터질 뿐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요청할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알았으나 익숙지 않은 구원에의 호소가 목으로부터 터져 나오도록 되는 데조차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빈 숨만 내쉬던 올린은, 자신의 힘으로라도 남자들의 사이를 빠져 달아나려 했다. 다친 발로 몇 걸음 달리지 못한 채 잡히고 작은 전기충격기에 목이 눌려 발작하듯 쓰러진 얼굴에서 분한 눈물이 흘렀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가 바닥을 박차고 달아나는 환각을 느끼느라 허공에 미약한 발길질을 계속했다. 도움을 청하려던 입술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가 소리 없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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