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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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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병원에서 만난 고용인들은 올린, 그 애가 정환의 목을 갈랐다고 했다. 출혈이 심해 생명까지 위험했던 동생은 속 편한 얼굴로 잠자듯 누워 있었다. 곧 깨어나긴 할 테지만, 성대가 상해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발성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눈 밑이 퀭한 채 병실을 나서다가, 정규는 관장님과 마주쳤다. 당혹하지도 않은 듯 담담한 얼굴의 관장님은 정규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정규는 그 시선에서, 이래도 내가 그 물건을 그대로 둬야 하느냐는 소리 없는 물음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말했지만 관장님은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오래전에 폐기되어야 했을 물건이다. 미적거린 게 잘못이었다. 다급하게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세단의 바퀴가 신경을 긁는 비명을 질렀다.
농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정규는 정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정환이가 지금 병원에 있는데,’
로 시작했던 긴 메시지를 지우고,
‘정환이가 다쳤어요,’
로 시작하는 조금 짧아진 메시지를 썼다. 그러나 결국 보낸 것은
‘액받이 폐기하겠습니다.’
하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읽히지도 못했다. 그는 메시지 옆에 사라지지 않는 숫자를 바라보다가, 이제 더는 정아나 정비의 인가를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저것이 특별하더라도 자신이 결정해야 할 때였다. 관장님이 올린의 몸에 여태 손대지 않았던 까닭은, 사용자가 직접 폐기해야 길하다는 전통,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막내아들의 성대를 상하게 한 놈이다. 인습하느라 곱게 둘 리가 없었다. 이제 올린이 곱게 죽는 방법은 정규 자신의 손에 폐기되는 것뿐이다.
올린은 손발이 묶여 별장의 화장실에 갇혀 있었다. 옭아맨 끈이 하도 모질어 풀리질 않아 가위로 잘라야 했다. 데리고 나오느라 품에 안은 머리카락에는 살얼음이 버석댔다. 험하게 다루어진 흔적에 착잡한 눈이 오르내렸다. 성한 데 없는 몸에 제 옷을 벗어 입히고 담요로 둘둘 말아 지고 나왔다. 아직 영혼이 담긴 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예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장소로 차를 몰았다. 서울에서 멀지도 않은 곳, 사방에 인적 없는 저수지를 두른 콘크리트 길 끝에 차를 세웠다. 드물게도 가로등조차 없는 길 끝은 죽여야 할 것을 제 손으로 죽이기에는 참으로 편리한 곳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정규는 직접 이 애를 여기 데려오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업체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른 누구의 손에도 넘길 수 없었다. 시신의 처리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업체에 장소를 문자로 남겼을 뿐이다. 올린이 얼음 아래에서 절명하면 지금으로부터 열두 시간 후에 그 시신은 아무도 모르게 거둬져 안전한 곳에 매장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난다.
올린이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어두웠다. 차 안은 따뜻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들어 밖을 보자,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선 남자가 보였다. 정규다. 푸르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제 차의 보닛에 기대선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규는 아직도 전자담배보다는 연초에 불을 붙여 피우는 것을 선호했다. 올린도 정규가 주는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쓸모있는 액받이로 취급받을 때의 일이었다. 가슴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그것을 엷은 형태로 내보낼 때, 속에 든 다글다글 끓는 감정이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었다.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은데 그의 옷이 얇았다. 코트가 자신에게 덮여 있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올린은 차마 그 코트를 정규의 추워 보이는 어깨에 얹어 주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올린은 자신이 정환을 몹시 미워하는 마음으로 칼을 휘두른 것을 기억했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정규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운이 좋았다. 정규라면, 자신을 아프고 무서운 방식으로 폐기하는 대신 분명 빠른 죽음을 맞이하게 해 줄 것이다.
올린은 자신이 폐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열 가지도 넘게 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의식이 없던 자신을 죽이지 않고 정규가 저러고 있는 이유는 잘 몰랐다.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탁한 감정들을 올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자신이 걸어나가 정규에게 코트를 건넨다면, 정규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밟아 버리리라는 것만 알았다. 그러면 자신의 처형은 시작되는 것이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칼을 휘둘렀던 때와 지금의 마음은 또 달랐다. 피할 수는 없지만 미루고 싶었다. 다만 몇 분, 몇 초라도 더 살고 싶었다.
눈만 들어 주위를 살폈다.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달려온 차는 물가 막다른 길에 서 있었다. 얼음 호수에는 눈이 쌓였다. 횡액을 몰고 온 액받이는 수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올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배를 태우고 먼 바다로 나가서 그대로 빠뜨리는 경우가 제일 많다고 했었다. 이곳이라면 배가 필요 없을 테니 비용은 훨씬 적게 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정규를 바라보았는데, 그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정규의 눈에, 멍투성이 얼굴을 하였어도 올린은 너무 예뻤다. 그렇지만 저것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품 안에서 살리는 것에 대한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건 정규가 자라 온 환경에서, 대단히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위험한 짓이었다. 형제들을 저렇게 망가뜨리는 악의 근원을 폐기하지 않고 예쁘다는 이유로 혼자 가지고 놀기 위해 빼돌리는 짓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이 무책임한 행동이다.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올린에게 다가와 운전석에 앉았다. 줄담배를 태우느라 딱 한 대 남은 연초를 물려 주었다. 정규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피딱지 맺힌 입술을 느리게 벌려 받아 무는 것조차 예뻤다. 불을 붙여 주고 조수석의 창문을 내려 주자, 올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바들바들 떠는 팔을 열린 창가에 걸쳤다. 핏자국이 지저분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연초 끝이 환한 주홍빛으로 빛났다. 연기는 입술 사이로 아주 느리고 가늘게 흘러나와 어두운 밤사이로 사라졌다.
“정환이 목, 일부러 그랬어?”
“네.”
어느새 존댓말이다. 정규는 왜 그랬느냐고 묻는 대신 찢기고 부어오른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올린은 아픈 듯이 한 눈을 찡그렸지만 피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그랬니?”
“…아니요.”
심드렁하기까지 한 목소리 끝에는 자신이 목을 가른 그 사람,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다는 무심이 묻어 있었다. 올린은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물어볼 만큼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규는 그 순간의 광경을 자신의 필터가 끼워진 영상으로 상상했다. 그는 정환이 올린에게 늘 해 왔듯이, 때리고, 던지고, 흔들어서 울부짖게 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발바닥을 칼로 베는 동생에게 무력히 다리를 뻗어 준 채 우는 몸 위에 눈이 떨어져 녹는 차가운 감촉은 현실의 것처럼 그를 떨게 했다. 살고 싶어서, 바닥을 기어 다니다 엉겁결에 쥔 칼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것에 목을 벤 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올린이 웃으면서 정환의 목을 베었다는 고용인의 말보다는 이쪽이 둘의 관계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고의 끝일지라도 올린은 죽어야 했다. 그는 유해하지만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말간 눈을 가만히 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정규가 조수석으로 걸어가는 동안 올린은 조수석 창문을 올리고, 문을 잠갔다. 정규가 올린을 끌어내리려 문을 열려다, 철컥, 하고 걸리는 의외의 소리에 멈칫했다.
“이것만, 이것만 다 태우고요.”
올린은 정면만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입에 담배를 가져다 대는 손이 벌벌 떨었다. 정규는 먼 곳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며 그저 기다렸다. 올린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담배를 다 피우고 난 후에, 곧 자신을 죽일 사람에게 사소한 보복이라도 하듯 베이지색 가죽 시트에 담뱃불을 눌러 동그랗게 태웠다. 그것을 지켜보던 정규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며 스스로 조수석 문을 열고 나왔다. 맨발이었다.
차에서 나오면서 발을 헛딛는 몸을 잡아 준 정규에게 안기다시피 겨우 균형을 잡은 올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규가 올린을 어깨에 짊어지려 했지만 완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정해진 일에 반항하는 얼굴도 아니라 다만 제 발로 가고 싶어함을 읽은 정규는 손을 내밀었다. 둘 다 손이 차서 누구의 손도 덥혀질 수 없었다.
비탈을 함께 구르듯 내려갔다. 미끄럽게 언 땅으로 내려서니 날이 따뜻할 때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이었을 곳이 꽝꽝 얼어 오히려 걸을 만했다. 그러나 그건 발이 성한 사람에게만 그랬다. 올린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자꾸만 넘어졌다. 멎었던 피가 다시 흘렀지만 올린은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제 발로 땅을 딛고 일어났다. 바람의 날카로운 소리에 올린의 울음소리는 바로 곁에 선 정규의 귀에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정규는 꼭 입을 맞춰 줄 것처럼 다가와 올린의 귀에 매정한 명령을 속삭였다. 올린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눈으로 하라는 대로 했다. 꽁꽁 얼어 눈이 쌓인 호수 위를 걷기 시작하자, 하나는 희고 하나는 붉은 발자국이 번갈아 눈 위에 찍혔다. 정규는 한참 뒤에서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눈 쌓인 얼음 위를 걷는 올린은 발이 시리고 아린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숨이 가빴다. 눈에서는 뜨겁게 눈물이 떨어졌으나 그것을 닦을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제, 비록 그것을 감히 표현해 본 적이 없으나, 자신이 물건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를 때부터 제 마음과 격렬한 싸움을 계속해 왔던 자신이었다. 이토록 처절하게 살고자 하는 자신이 물건일 리가 없다. 액받이로서의 제 몸을 소유한 도련님들은 이 세상의 규칙에 따라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몸을 사 온 것일 뿐, 그 안에 든 욕망을 파괴할 권한은 갖지 못한다.
그것은 원치 않는 폭력을 겪고 사람의 소실과 배신을 겪으며, 미친 상태가 되어서까지도 계속된 꾸준한 자아 성찰로 이미 깨달은 바였다. 하나의 계기로 진리를 깨닫는 자들은, 대개 그 계기가 기쁜 일은 아닐지라도, 오히려 운이 좋다. 올린에게는 그런 찰나의 빛나는 순간은 비록 없었지만, 비참한 삶을 꾸역꾸역 살면서도 나름의 성실을 다하면 주어지는 적당히 광택 나는 진리는 있었다.
자신은 물건이 아니다. 사람이다. 벗어날 수 없이 지독스러운 운명을 짊어지긴 했으나, 사람 아닌 적이 없었다.
사람답게 살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라도 사람답게 죽고 싶었다. 만일 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하여 호수 가운데로 향하는 대신, 저어기 정규의 손이 닿지 않는 데로 달린다 치자. 이 몸을 해서 정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거니와 운 좋게 그렇게 된다 해도 기다리는 것은 결국 다른 형태의 죽음이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참혹하게 도살되느니 그나마 사람의 죽음과 비슷한 형태라도 갖추어 죽고 싶었다. 그것이 언 눈물방울을 떨구도록 두려워하면서도 얼음 위를 걷게 하는 힘이 되었다.
올린의 머리카락을 스친 바람이 정규의 뺨을 긋고 지나갔다. 정규는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코트를 걸친 올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올린의 발밑이 깨져 그가 가라앉을 때, 그 얼음의 금이 자신이 선 곳까지 이르러 함께 빠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친 올린이 되바라진 소리를 해 댈 때의 모습을, 헛것을 보고 제 품으로 기어드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거릴 정도로 공포에 떨던 것이 둥글게 팔다리를 모으고 제 품에 안겨 들 때, 그가 올린을 위로하면서 도리어 돌려받은 위로는 난생처음의 것이었다.
비록 남보다 많이 가진 삶이기는 하나, 모친으로부터 버림받은 결핍이 쉬이 메워질 리 없다. 서자인 자신을 온전한 형제로 받아들여 준 형제들로부터도, 그 후 만난 수많은 애인으로부터도 받지 못한 위로를 미쳤던 이것에게서 받았었다. 미친 것만이 할 수 있는 남의 영혼 든 얼굴로,
“괜찮아.”
하고 가만가만 얼굴을 쓰다듬는 순간 얼굴이 예쁜 것을 대할 때 솟거나 처지를 동정하며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의 감정이 움텄었다.
‘하지만,’
하고 정규는 저 자신을 타일렀다.
‘저건 물건이다.’
사람처럼 팔다리 달리고 사람의 말을 하고, 때로 사람보다 더 따뜻하게 남의 마음을 매만질 줄 알아도, 앞서 걷는 저것은 물건이어야만 했다. 물론 사람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으나 정규는 그 찬란한 단편의 모습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가 분별하려 애썼던 것처럼 저게 정말로 사람이라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형제들은, 아버지는,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
올린을 사람으로 여기는 순간, 정규의 세상은 뒤집힌다. 자신의 형제들은 사람의 껍데기를 쓴 다른 무언가가 된다. 사람을 물화하여 학대하고 강간할 뿐 아니라 소용이 다하면 살인한 셈이 되니,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아마 악마나 마귀쯤이 될 터다. 정규는 자기 자신과 제 형제들을 뿔 달린 존재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저기 죽음을 향해 걷는 저것이 횡액을 가져오는 사악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편이 제게는 차라리 안전했다.
한 톨의 의심조차 없이 확신한 적도 있었다. 예쁘게 생긴 오나홀, 형제들과 공유하는 자위 도구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건이니 정도 주지 않고, 심지어 생자지를 삽입하는 것은 찝찝하다고 여길 정도로 지저분한 것인 양 취급한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것이 미친 상태에서 거르지 않고 내보인, 꼭 사람 같은 생각과 행동을 목격하고 보살피기 전이었다. 저것으로부터 위로받은 경험 이전의 장담이었다.
두 개의 마음을 끌어안은 정규는 혼란 속에서, 올린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입속으로만 중얼거리는 이름의 울림은 느닷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올린.”
그들은 이제 뭍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희미하게 날리기 시작하는 눈발은 올린이 선 곳으로부터 정규를 향해 나부낀다. 탁한 목소리로 부른 그 이름이 주인의 귀에 닿았을 리가 없는데, 절뚝이던 걸음이 그쳤다. 부른 사람을 돌아본다. 올린의 투명한 눈과 정규의 흐린 눈이 마주친 순간은 짧았다. 마치 부름에 답하려는 듯 터진 입술을 달싹인 다음 순간, 올린의 발아래가 깨어졌다.
그대로 꺼지듯 사라지는 그 몸에서 정규가 입혀 주었던 검은 코트가 펄럭였다. 순간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도 얼음 아래로 가라앉았다. 비명과 함께 토한 숨이 허공에서 미세한 얼음이 되어 희게 흩어지는 동안 그는 허둥지둥 달려서 올린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이르렀다.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을 그를 애도하러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악착스럽게 매달린 모양을 내려다보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어두운 책무가 떠올랐다.
정규가 이 저수지에 마지막으로 와 보았던 것은 올린이 미친 채 저택으로 돌아왔던 늦여름날이었다. 미친 상태를 확인하고 곧 폐기하게 되리라 여겨 장소를 물색하러 왔었다. 당시 저수지의 수심은 상당히 깊어 조악한 도로 끝에서 두어 걸음만 비탈을 내려오면 바로 늪처럼 검은 물이었다. 지금은 한겨울, 저수지의 물이 빠져 수심은 한참이나 얕았다. 차를 세워 둔 곳에서 얼음이 시작되는 물가까지 여러 걸음을 미끄러져 내려왔던 것을 정규는 이제서야 돌이켜보았다.
그들은 이미 저수지의 가운데에 이르러 있었다. 두꺼운 얼음이 깨진 아래 검은 물은 겨우 올린의 가슴에 닿을 정도, 이 정도의 물로는 손쉬운 익사는 불가능했다.
바닥의 진흙이 섞인 차디찬 물속에서 올린은 미끄러지고 허우적대다 발끝으로 선 채 얼음의 두꺼운 가장자리에 팔을 기대고 버티는 중이다. 얼음 아래로 빨려 들어가면 수심과 관계없이 곧 죽음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순간에도 다친 발이 길게 미끄러져 정수리까지 잠겼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던 그 눈에, 자신에게 다가와 선 정규가 비쳤다. 죽음에 저항하는 절박한 순간에도 그 얼굴을 통해, 올린은 끈질기게 갈등하는 두 개의 마음을 읽었다. 썩은 동아줄이나마 발견한 눈에 불꽃 같은 것이 튀었다.
올린이 다급히 입을 열려는 순간, 정규가 다리를 들었다. 매끈한 구둣발이 얼음가에 매달린 구멍 난 손을 밟아 밀었다. 늘 순순하기만 하던 올린의 손이 그악스럽게 얼음 위로 뻗어 왔다. 제 손을 밟는 발에 오히려 매달리고자 허우적대는 손에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다. 사정을 두지 않고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려는 구두에는 오직 책임감으로 말미암은 살의가 담겨 있었다. 올린이 얼음 아래로 꺼지던 순간 느낀 가슴 철렁한 상실감은 처음부터 없던 감정 같았다.
사람의 숨구멍으로 차가운 물이 들이켜지는 따갑고 숨찬 소리, 얼음 아래 무념하게도 찰방이는 물소리, 죄 없이 죄 많은 흉악한 물건을 폐기하는 의무에 떠밀린 남자의 숨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눈 쌓인 얼음 위를 제 발로 걸어올 때와 다르게, 정작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저항은 끈질기고 악착스러웠다. 하나는 얼음 위에 서고 하나는 찬물에 잠긴 채의 몸싸움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올린은 머리끝까지 얼음물에 젖었고 정규는 겨우 발목 언저리에 물이 튀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밀면 달려들고, 밟아도 놓지 않았다.
정규는 이제 얼음가에 무릎을 꿇었다. 기운이 다한 다친 몸이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내어 매달려 오는 것을 보면서도, 쥐면 부러질 것처럼 가는 목을 두 손으로 잡아 거꾸로 물에 짓처넣으려고 했었다. 그러면 올린은 얼음 아래로 뒤집힌 채 빨려들어 더 이상의 저항을 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 이미 반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것 같은 올린이,
“사랑, 컥,”
하고 얼음물에 턱까지 잠긴 채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규 형, 사랑, 해요.”
알아듣기 어렵되 그러나 결국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기 전까지, 정규는 정말 이것을 죽이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선하고 합리적인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하게 스치는 생각에 정규의 손아귀가 풀어졌다. 느닷없는 사랑 고백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예전에 올린은 네 도련님을 천진스럽게도 사랑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의 고백은 거짓이다. 사랑의 말을 토하는 얼굴에 발린 것은 새하얗게 질린 공포였다.
그 거짓은 정규를 괴롭게는 하였으나 화나게 하지는 못했다. 죽음의 순간에 남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이용해서라도 살아 보려고 거짓말을 해 보는 게 과연 물건일 수 있을까, 물건이라는 게 이다지도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을 수 있나, 애초에 사람을 물건으로부터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생각하는 능력과 자유의지 아니었던가, 맥이 빠진 것은 가루처럼 쏟아진 의문 때문이었다. 차곡차곡 쌓여 왔던 의심은 올린의 꺼질 듯한 말 한마디에 비로소 저울을 기울일 만한 무게가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얼음물에 젖은 얼굴, 죽음 앞에서도 광채 나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물건에 달린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었다. 그저 살고자 할 뿐의 본능만 남은 짐승의 눈깔도 아니었다. 나름의 꾀를 내고 지혜를 짜내어 어떻게든 살아 보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자 정규는 자신이 하려던 끔찍한 짓에 제풀에 놀란 나머지 허억, 하고 숨을 토했다. 자신은 살인을 저지르던 중이었다. 외면하려고 했었던 사실이 온몸을 후려치는 충격에 그는 순간 모든 행동을 멈췄다. 힘 다한 올린의 몸이 정규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머리부터 뒤집혀 얼음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정규는 그 몸을 잡으려 했다. 허둥대다가 함께 물속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물에 젖는 것은 수만 개의 바늘로 몸을 찔리는 것과 같았다. 채찍으로 모질게 후려 맞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이미 죽도록 얻어맞고 피 흘리도록 상처 입었던 몸에 제가 한 가해를 실감하며, 그는 의식 잃은 몸을 얼음 위로 밀어 올렸다. 죽이려고 짓누르는 것보다 살리려고 밀어 대는 것이 천 배는 어려웠다. 한참이나 갖은 애를 쓴 끝에 이미 숨이 끊긴 것처럼 보이는 몸을 얼음물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언 몸을 안은 채 얼음 위를 걸었다. 핏발자국을 두 개 세 개씩 거꾸로 밟으며 뛰다시피 걷는 동안, 담담해 보였던 올린이 얼마나 좁은 보폭으로 얼마나 천천히 걸어왔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죽음의 순간을 유예하고팠던 마음이 발자국과 함께 찍혀 있었다. 겨울의 잡초가 날카로운 언 땅을 걸어 높은 도로로 기어올랐다. 차 안으로 밀어 넣을 때, 올린의 벌어진 입에서 느껴진 미세한 날숨이 반가웠다. 죽지 않은 몸을 데우려 발가벗겼다. 히터로는 부족하여 끌어안았다. 가슴에 맞닿은 차가운 몸이 덜걱거렸다. 아까 그 날숨과 함께 이미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건 아닌지 무서웠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열렸던 정규의 입술이 닫혔다가, 다시 망설이며 열렸다.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 앞에서 가해자가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다른 말을 찾아냈다. 아까 죽음의 문턱에 선 올린이 살기 위해 했던 거짓말, 사랑한다는 그 말은 쓰고도 달았다. 올린은 어쩌면 정규 자신을, 액받이를 소유하지 못할 바에는 죽여 버릴 만큼 못난 놈으로 여겼던 것도 같았다. 살려 주면 오로지 당신의 것이 될 테니 살려 주세요, 당신의 형제들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연인이 되겠습니다, 말 한마디에 영악한 제의가 녹아 있었다. 거짓말 속에 든 처절한 삶의 의지를 무시하고 마치 그 고백이 진심이라고 믿는 양 자신을 속이며 정규는 대답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대답해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소리를 냈다.
“나도, 나도 그래, 사실은 나도 그래, 올린아.”
식은 뺨에 정규의 뺨이 문질러졌다. 정규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죽은 것처럼 보이는 올린의 몸속에서는 아주 조금씩 온기가 피어올랐다. 살인미수범의 사랑 고백을 들으며 올린은 거의 끊어질 뻔한 숨을 기쁘게 들이쉬었다. 살았다. 살았다. 공기가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