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구간
정환이 손 묶인 올린을 끌어 내린 곳은 바람이 거센 언덕이었다. 올린은 두려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벌벌 떨며 정환을 따라 걸었다. 가문의 소유로 되어 있는 농장은 계절에 따라, 토끼 따위를 사냥하며 바깥 놀이를 즐길 수도 있게 꾸며지는 아기자기한 곳이다. 겨울밤 쏟아지는 별 아래 보이는 모습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손질되었다. 그러나 지금,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마구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올린 올린에게는 살풍경하게만 느껴졌다.
통화한 상대는 마구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들이 지내는 곳이 안락하고 말들의 상태가 좋은 것은 미리 연락해 두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랗고 환한 조명 아래, 형제들이 소유하는 여덟 필의 말은 잘 관리되어 건강한 윤이 났다. 올린은 정환이 잘생긴 짐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마를 쓰다듬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쩔 수 없이 말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다. 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자신은 게다가 발도 빠른 편이다. 정환 도련님은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마를 비벼 줬을지도 몰랐다.
마구간 끝까지 다다른 정환이 턱짓했으므로, 올린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더듬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뒤쪽, 지붕이 길게 이어진 야외에 처음 보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저택에서 훈련을 받거나 체벌을 당할 때 올라가곤 했던 목마와도 비슷하게 생겼으나 그것보다 크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위에 고무 재질의 덮개가 단단히 씌워져 있었다. 정환은 올린의 묶인 손을 들어 그 물건의 둥근 윗부분을 만져 보게 하고, 발 받침대처럼 보이는 곳도 쓸어 보게 했다.
“이건 의빈대라는 물건이야.”
시선을 낮춘 채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으려는 올린의 얼굴을, 정환이 당겨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따뜻한 실내에서 새 나오는 노란 조명이 섞인 갈색 눈이 정환의 시커먼 눈을 바라보았다.
“씨암말을 임신시킬 때는 말의 정액을 받아 인공수정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 교미시키면 귀한 암컷이 다칠 수도 있고, 제대로 착상되기도 어려우니까… 의빈대에 암말의 오줌을 뿌려 수말을 흥분시킨 후에, 교미하듯이 여기, 이 발 받침대에 앞발을 올리고 사정을 유도하는 거지. 그러니까 말이 쓰도록 만들어진 오나홀이라고 보면 돼. 어때, 재미있지?”
올린은 눈을 깊이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귀에 이명이 울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자신이 지금 자신의 다리로 서 있는 건지 정환의 손에 들려 잡혀 있는 건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정환은 올린의 묶인 두 손이 비틀거리며 자신의 가슴을 짚는, 그 진동하는 감각을 뿌듯해하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은 준비가 덜 되었으니까, 내일 오후에 여기 올라가도록 하자. 올라가기 전에 칼로 발바닥을 찢어 줄게. 네 피 냄새와 암말의 오줌 냄새가 섞이면, 넌 수말들에게 더 섹시하게 여겨질 거야. 네 보지가 잘 열리도록 준비도 시켜 줄 거고, 교미하는 동안에도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많이 아플 테니까, 쉽게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래도, 만약에, 그래도, 기억 안, 나면?”
마른 입술이 속삭이는 빈 바람 소리 같은 물음에 정환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모레에도 한 번 더 올라가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그다음 날에도 한 번 더 올릴 것이다. 말 좆이 올린의 엉덩이에 수월히 닿도록 의빈대의 높이를 낮추어, 빈 구멍이 아니라 꽉 차고 통통한 보지에 짐승의 자지가 들어가도록 할 것이다. 암말의 오줌을 뒤집어쓴 올린은 울부짖을 거다. 수말은 올린의 피 흘리는 발바닥을 핥아 달래 줄지도 모른다. 구멍은 크게 찢겨 지금의 예쁜 모양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탈장해서 아주 보기 흉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충격과 고통을 함께 주는 방법으로 정환은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두 마리를 제외한 여섯 마리는 거세하지 않았다. 모두 혈통이 좋아 이것들의 씨를 받고자 하는 암컷들이 여럿이다. 올린은 지금 그 많은 암컷들의 줄을 새치기하는 특혜를 받고 있는데도, 감사한 줄을 모르고 벌벌 떨기만 한다. 하지만 정환은 사랑하는 올린이 아무리 배은망덕한 짓을 하더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기억만 해 준다면, 베풀어지는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둔함조차 괜찮았다.
좆 받고 싶은 녀석을 골라 보라고 말하며 마구간을 다시 걷게 했다. 올린은 내리감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아름답고 거대한 짐승들의 사이를 더듬더듬 걸었다. 검고 커다란 눈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조차 따갑도록 아팠다. 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옮기려 애만 쓰다, 올린은 앞으로 묶인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정환이 웃었다.
“부끄럼타는구나, 하하, 하긴 수놈이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순서지, 네 주제에 어떻게 감히 좆을 고르겠어. 올린, 허리를 숙여, 보지를 보여 줘. 네 보지를 제일 좋아하는 녀석이 어떤 놈인지 보자.”
손이 풀린 올린은 정환이 시키는 대로 하려다, 왈칵 바닥에 토하고 말았다. 그 토사물을 핥는 동안 정환은 매질하지도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바닥이 정리되자 그는 올린의 바지를 벗겼다. 스스로 볼기를 벌려 아래를 노출한 올린은 첫 번째 말의 대가리 앞에 발갛게 벌어진 항문을 들이밀고 섰다. 어쩐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수말을 향해 정환이 다감한 말투로 물었다.
“잘 봐, 이 보지 마음에 들어? 네게는 좁겠지만 이렇게까지 벌어질 수도 있어. 어때, 구미가 당기니?”
정환은 올린을 내리치지 않던 말채찍의 손잡이 끝으로 구멍의 한쪽 끝을 밀듯이 벌려 냈다. 발갛게 보이는 속은 젖어 있었다. 정환은 익숙한 손짓으로 채찍을 거둬들여 겨드랑이에 끼고, 안에서 흐르는 장액을 검사하듯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손길에 올린이 비틀비틀 힘없이 밀려나자,
“얌전히 있어야지.”
하고 욕설 없이 나무랐다. 그는 동물 앞에서는 욕을 사용하지 않는 점잖은 주인이었다.
“이렇게 물도 많이 나와. 너한테 보이는 것만으로도 흥분해서 이 지경인데, 박으면 얼마나 많이 흘리겠어.”
정환은 검지와 중지를 함빡 적신 장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점도를 검사하듯 손가락 세 개를 붙였다가 떼어 보았다. 투명한 액체가 조금 늘어지다 흘러내렸다. 잠시 관심을 두던 말이 고개를 돌리고 물을 마시자 정환은 올린의 귓가에,
“보지를 더 넓게 벌려야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넌 이미 허벌창이지만, 얘들 좆 크기가 있으니까.”
하고 다정한 포주 같은 소리를 했다. 올린은 다음의 말 앞에 섰을 때는 다리를 좀 더 활짝 벌리고, 구멍에 양 손가락을 걸어 옆으로 당겼다. 그는 꾹 다문 입술을 조금 내밀고, 혼미한 눈을 반쯤 감은 채 필사적으로 이곳에 제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공포와 슬픔에 매몰되지 않으려 이 모든 것들이 악몽인 양 행동하는 올린은 더 이상 토하지도 않고 정환의 지시를 따랐다.
관심을 두는 말도 있고, 영 반응이 없는 말도 있었다. 정환은 꿀쩍꿀쩍 소리가 나도록 손으로 쑤셔서 올린이 허리를 벌벌 떨고 다리를 무너뜨리도록 하기도 하고, 말채찍으로 항문의 벌어진 입구를 착착착착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때리기도 하고, 구멍 안에 들어갔던 손가락에 묻은 것을 윤활액 삼아 올린의 자지를 훑기도 하며 올린의 몸을 말들 앞에 전시했다.
하나하나의 말대가리 앞에 제 구멍을 들이밀던 올린은 수말 중 하나가 콧김을 뿜으며 다가와 제 항문을 핥았을 때, 그 혀에서 떨어진 거품 섞인 끈적하고 뜨거운 침이 제 불알에 떨어지는 순간 자세를 무너뜨리고 달아났다. 그리고 또 한 번, 올린에게서 어떤 암컷의 기미를 느낀 건지는 몰라도, 그중 가장 어린 말이 시커먼 자지를 발기하여 그것을 정환이 보고 유쾌하게 웃었을 때도 달아났다. 그리고 두 번 다 말채찍으로 등허리를 후려 맞으며 끌려왔다. 올린은 말들이 보는 앞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살벌한 매를 맞으며, 맞는 순간 검게 보일 지경으로 짙게 변색되는 살갗을 한 번 쓰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울었다.
“나, 흐흑, 죽어, 진짜- 히익! 죽, 을 거야….”
정환은 수말과 교접하다 허리로부터 뒷다리까지를 못 쓰게 된 어린 암말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람으로 치면 하반신 마비다. 그렇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죽는 놈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혼을 냈다. 그리고 나서는 하던 것을 계속하자고 달랬다. 다른 암컷들은 다 해내는데 너만 이 유난을 떨 게 뭐야, 나무라는 소리에 올린은 한참을 바닥에 쓰러져 울다가 결국 정환의 손에 일으켜졌다.
거세한 놈들 앞에까지 올린을 전시한 이유는 그 말들이 기분이 상할 수 있어서라고 했다.
“안 그래도 거세당해서 속상할 텐데, 자기들한테만 네 보지를 안 보여 주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
말들이 들을 수 없도록 올린의 귀에 속삭인 정환은 결국 여덟 마리 말 앞에 올린을 모두 선보인 후에야 내일 교미할 수놈을 정해 주었다.
“저 녀석으로 하자, 네 보지 보고 발기한 애. 어때, 잘생겼지? 게다가 어려. 가서 내일 잘 부탁한다고 말해.”
올린은 아직도 발기한 채 콧김을 푸릉거리는 밤색 말에게 다가가, 정환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말은 영리해서 사람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성심성의껏 부탁하라는 말에 올린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정말로 말이 자신을 범할 남자라도 되는 듯이 울며 빌었다.
“바, 밟지 말아 주세요, 히익! 너무, 세! 게 너, 너, 넣지, 말아 주세요… 보, 보, 크흑, 보지, 찢지 마, 마-, 마, 말아 주세요, 잘 부탁, 부탁, 흐흐흑… 합, 니다.”
정환은 그 말을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가슴팍 앞에 두 손을 모아 잡은 올린의 옆모습을 갈색 말과 함께 사진 찍었다. 거대한 말 대가리 앞에 서서 그 말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 숙여 우는 올린은 유독 작고 왜소해 보였다. 오래 굶어 볼품없이 여위었던 때도 올린이 작다는 생각은 해 본 일 없던 정환은 문득 저것이 저렇게 조그맸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구간에서 멀지 않은 별장까지 올린을 데리고 가며, 말이 사정하면 1리터가 넘는 정액이 나오는데 그게 다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용량을 가늠하는 듯 올린의 아랫배를 만지는 손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올린은 제 배를 쓸어 보는 정환의 손을, 구멍 난 손으로 벌벌 떨며 덮어 잡았다. 하지만 정환의 손은 무심히 빠져나갔다.
그 밤, 올린은 정환의 좆을 받으며 그를 안았다. 눈물 콧물을 닦고 아래를 씻고 오라는 명령에 욕실에서 시간을 보낸 올린은 필사의 힘을 다해 정신을 챙겨 나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정환에게 예쁘게 보여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상처 입은 정환의 발바닥을 빨아 남은 유리 조각을 뱉어 내고, 아주 조금 찢어진 상처를 여러 번 핥았다. 발기한 좆을 성심성의껏 애무한 후에는 그 위에 올라가 다정스럽게 몸을 겹쳤다. 마구간에서 항문을 많이 맞았기 때문에 구멍의 입구가 통통하게 부어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정환은 부은 살을 가르고 좆이 따뜻한 곳으로 들어설 때, 으음…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용서해 달라고, 한숨처럼 애원하는 목소리는 달았다. 눈물에 젖은 눈은 반짝거렸다. 정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이마를 마주 비비는 살가운 몸짓 속에는 올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교가 담겨 있었다. 그는 입술을 피하는 정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대려다가 거절당하고, 다시 한번 입술을 내밀었다가 매몰차게 밀쳐졌다. 잠시 풀죽은 채 얌전히 있자 오히려 정환이 다가왔다. 올린은 안도하며 입을 벌려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정환의 입술을 받으면서도 아랫도리는 쉬지 않았다. 힘껏 조였다가 풀어내고, 다시 조였다가 풀어냈다. 깊은 곳으로부터 꿈틀거리는 쾌락을 선사하려 엉덩이를 살짝 돌리자, 정환이 기특하다는 듯, 혹은 비웃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입 벌려.”
명령에 입을 벌리고 퉤, 뱉어지는 침을 달게 삼켰다.
“다 삼켰어?”
하는 말에 안을 보여 주자, 칭찬 삼아 정환이 뺨을 때려 주었다. 커다란 손자국에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기쁨을 연기했다. 살기 위해 단련해 온 연기는 제법이다. 속아 줄 만했다.
그는 이제 뾰족하도록 섬세한 무릎뼈 끝까지 떨며, 허벅지를 움찔거려 위아래로 움직였다. 입술이 붙어 있을 땐 앞뒤로 옆으로 은근히 비비기만 하던 구멍이 빨대 빨듯 쪼오옥 자지를 조이며 거의 빠져나갈 때까지 애무하다가, 한순간에 다시 집어삼켰다. 그리고 다시 쪼오옥, 토실토실한 구멍 안쪽이 자지를 쓸었다. 그렇게 하느라 올린은 제 입술을 말아 물고 눈을 감은 채 끄응, 끼잉, 하는 숨 참는 소리를 냈다.
정환은 올린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도드라진 골반뼈 위의 쏙 들어간 허리를 두 손으로 조였다. 올린이 눈을 뜨고 정환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그가 하는 대로 제 몸에 힘을 풀었다. 잘 만들어진 오나홀 다루듯 순종적인 몸을 뺐다가, 쾅, 내리치고 또 쾅, 내리친 다음에, 한 손으로 등을 받치고 제 자지가 들어있는 얇은 뱃가죽에 쾅, 하고 주먹질했다.
“아흑! 아응….”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려던 두 팔을 간신히 들어 올려, 교차한 팔 뒤에 얼굴을 숨긴 올린은 다음의 매질도 잘 견뎠다. 올린이 심한 저체중이었을 때 정환은 딱 한 가지가 마음에 들었는데, 보기 흉하게 도드라진 갈비뼈 아래로 삽입한 자지의 실루엣이 불룩불룩 비쳐 보이는 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올린을 굶기는 건 기꺼운 일이었다. 지금은 자지가 보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대신, 이렇게 삽입할 때 아랫배나, 옆구리를 매질하면!
“아악! 으흐윽, 으으….”
안 그래도 촘촘하게 조이는 안이 뒤틀리고 꼬이는 듯 요동하는 것이다.
“얼굴 때려 줄 테니까 팔 치워.”
한 마디에 얼굴을 가렸던 팔을 바로 내렸다. 그렇다고 그 팔로 배를 가릴 수도 없던 올린은 두 손을 허리 뒤로 모아 잡았다. 어디를 어떻게 때려도 복종하겠다는 제스처다. 정환은 주먹질을 하려던 생각을 거두고, 한 손으로 코를 꽉 쥐어 숨을 쉬지 못하게 단단히 막은 채 찰싹 찰싹 뺨을 때렸다.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였지만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어찔거렸다. 매가 쌓이니 얼굴도 아팠다. 잘 견디는 걸 보고 심술이 난 정환의 손이 제법 세게 따악, 하고 내리쳤다. 아프게 맞았지만 올린은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펼 뿐이었다. 하지만 생리적인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헐떡이며 울자니 코를 쥐어 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괴로워?”
앙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샐까 봐, 올린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만 때릴까?”
이번에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때려, 때려 줘, 어디가 되었든, 하는 몸짓 끝에는 끝내 흐흐흑, 하고 울음이 터졌다. 정환의 손이 망설이지도 않고 젖꼭지를 향했다. 아프게 잡아당기고 마구 비틀다가, 딱밤을 때리듯이 따악, 따악, 따악, 몇 번이나 때렸다.
“이제 그만해?”
올린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거는 다 참을 수 있으니까, 제발 말과 교미시키지만은 말아 줘,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는 숨찬 소리만 하며 몇 번의 딱밤을 맞고, 마침내 정환이 젖꼭지의 끄트머리를 콱, 깨물어 피를 낼 때가 되어서야 으극,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모아 잡았던 팔을 풀었다. 그는 제 젖꼭지를 떼어 내려는 듯 잘근잘근 씹는 머리를 꼭 껴안았다. 울음 섞였으나 유순한 목소리가 드디어 떨리는 말을 해냈다. 우는 주제에 교태롭기까지 한 음성에는 정아가 허락하는 형태로 지시한 반말에, 지금의 정환이 좋아하는 존댓말이 섞여 나왔다.
“앞으로, 잘할게요, 진짜로… 안 잊어버릴게요, 말이랑, 하는 거, 무서워, 용서해 줘, 제발…부탁이야….”
정환은 잘근잘근 씹던 젖꼭지를 뱉듯이 놓아주고는
“다른 쪽.”
하고 중얼거렸다. 올린이 얼른 상체를 조금 비틀어 다른 쪽 젖꼭지를 정환의 입에 갖다 댔다. 정환은 이쪽마저 콰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고는 조금씩 빨아들여 유륜까지를 입에 넣고 주욱 주욱 빨았다. 그 고통과 쾌감이 절묘하게 섞인 감각에 올린은 허리를 뒤틀며,
“아! 흐,, 흣!”
하고 짧게 터지는 탄성처럼 비명을 질러 냈다. 그러면서도,
“죽을지도 몰라, 배가 터져서, 진짜로 죽을 거예요, …살려 줘, 용서해 줘, 나 정말, 정말! 잘할 테니까.”
하는 애원은 그치지 않는다. 정환이 입 안에 유두를 문 채로,
“보지는 노네?”
했기 때문에, 올린은 소스라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로 몸을 들어 올리자, 정환이 문 젖꼭지가 찢길 듯 당겨졌지만 무시했다. 그는 굵고 긴 자지가 명치를 찌르는 착각이 들도록 아주 깊은 데까지 넣느라, 불알까지 구멍에 삽입할 것처럼 몸을 잔뜩 내리 붙였다. 그리고서는 엉덩이를 은근히 비비며 허리를 양옆으로 흔들고, 구멍 안쪽으로 밖의 것을 빨아들일 듯 배 근육을 잔뜩 수축했다. 보통이라면 이렇게 몇 번만 조이고 씹으면 정환은,
“으윽, 윽!”
숨찬 소리를 뱉어 대며 올린의 목덜미에 제 날카로운 콧날이며 보드라운 입술을 마구 비벼 대며 사정해 버린다. 그러고 나면 나른한 사정감에 젖어,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는 올린을 두 번 때릴 것을 한 번의 매질로 참아 주기도 했다.
비었던 곳이 정환의 정액으로 가득 차는 만복감에 올린도 함께 경련했다. 올린의 속이 곰살궂게 꼭꼭 조이는 기분 좋은 느낌에 정환은 젖꼭지를 놓아주고, 흐느끼듯이 올린의 목을 빨았다. 올린은 검붉은 울혈이 남도록 제 목을 빠는 정환이 말이 없음에 오늘은 어쩌면, 자신의 애교가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아 버렸다. 정환은 목에서 쇄골로, 탄력 있는 가슴팍으로, 그리고 다시, 젖꼭지까지 입술을 미끄러뜨려 피멍이든 채로도 도톰하게 일어선 젖꼭지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것처럼 집요하고도 세차게 빨아 댔다. 젖꼭지가 빨리자 배 속 깊은 곳이 다시 꿀렁였다. 부피를 줄인 자지가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한 번만 봐줘, 응? 말 자지, 너무 무서운데, 안 넣으면 안 돼?”
“되겠냐, 이…씨팔년아, 너… 너 지금 나 사랑 안 하잖아.”
정환은 빨던 젖꼭지에 콧날을 마구 비벼 대며 웅얼거렸다. 그리고는 애써 짓던 미소조차 한순간에 잃어버린 올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얼굴을 마주 내려다본 올린은 정환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그 눈물을 닦아 주려 뻗은 손을, 정환이 잡아챘다. 올린은 정환이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린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기억은 하지 않는 게 나을 텐데, 정환은 굳이 올린이 모든 것을 알아 주길 원했다.
오전엔 말 좆을 받기 위한 준비로써 매질이 있었다. 구멍을 잘 열리게 하려면 엉덩이를 잘 달궈 놓아야 한다고 했다. 새벽부터 나가 말을 타고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별장 앞의 데크에서 식사를 마친 정환은 아무것도 얻어먹지 못한 올린이 기다리는 실내로 들어왔다. 올린은 정환이 벽에 붙여 놓았던 딜도를 엉덩이에 담느라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리고 상체를 숙여 손끝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자세로 기다리느라 점점이 떨어진 땀이 바닥에 무늬를 이루었다.
정환은 소파에 앉아 턱짓했다. 다가가 무릎 꿇었다가, 지시대로 그의 무릎 위로 기어올랐다. 정환의 허벅지에 벗은 올린의 자지가 비벼졌다. 올린은 다리를 얌전히 모은 채 정환이 자신의 엉덩이를 가죽 패들로 달구는 동안 자지를 세우거나 장액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맞으면 젖도록 훈련된 몸이 따라 줄 리 없었다.
올린은 예정된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말을 잘 들으면, 유순하고 착하고 복종적인 모습을 보이면, 정환이 어쩌면 끔찍한 그 명령을 거둬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온 엉덩이가 벌겋게 물든 채로도 신음을 참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올린의 항문 상태를 검사한 정환은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볼기를 벌려 항문을 살펴본 정환은,
“보지가 좁아서 이대로는 도저히 안 들어갈 것 같은데.”
하며 올린을 눕혀 놓고 다정히도 아래를 빨아 주었다. 다리를 활짝 벌리고, 제 팔로 허벅지를 얽어 발라당 뒤집어진 자세로 올린은 이를 악물고 종아리를 벌벌 떨며 장액을 질질 싸다가, 정환의 손가락이 안의 도도록한 부분을 팍, 팍 짓이길 때는 분수같이 묽은 액체를 뿜었다. 안의 발간 돌기를 관찰하던 정환은 두 무릎으로 올린의 허벅지를 눌러 벌린 채, 제 주먹으로 항문 입구를 퍽퍽 쳐 댔다. 그가 원한 것은 한 번에 주먹이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한껏 벌어진 구멍에조차 정환의 커다란 주먹은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올린더러 스스로 주먹을 넣어 풀라고 시켰다. 올린은 소파 앞의 테이블 위에 쭈그리고 앉혀져서 다리 사이로 제 손가락 네 개까지를 집어넣다가 차마 엄지손가락까지 넣지는 못한 채로 울었다. 정환은 자신이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협조할 의지가 없는 올린에게 실망하여 다시 매를 들었다. 주걱형의 패들이 때리는 거센 매질은 한쪽 볼기로만 떨어졌다. 뜨겁게 달궈지는 한쪽 볼기와, 아무런 자극 없이 방치된 다른 쪽 볼기의 감각은 서로 너무나 달라 더욱 괴로웠다. 울면서 다른 쪽 볼기도 때려 주기를 간청했지만,
“넌 전부 내가 해 주기만을 바라? 내가 이렇게 애를 쓰면, 너도 어느 정도는 노력이라는 걸 해야 할 것 아니야.”
하는,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정환은 오직 한쪽만을 때려 동그란 피멍이 들고 그 가운데의 살이 터져 피가 흐르도록 만들었다. 올린은 아극, 크흑, 아윽, 하고 울부짖고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매를 견뎠다.
다른 쪽 볼기를 터뜨리는 것은 올린의 몫으로 주어졌다. 정환은 올린의 의지를 시험하듯 그의 손에 패들을 쥐여 주고, 소파 위에 무릎을 꿇고 등받이에 가슴을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올린은 온 힘을 다해 패들을 휘둘렀다. 그러나 도저히 정환이 터뜨린 쪽과 동일한 수준의 자국을 만들 수는 없었다. 정환은 올린에게 패들을 내리치는 각도를 가르치고, 볼기를 내미는 자세를 교정해 준 후 자신의 볼기를 충분히 때릴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올린은 그가 원한 만큼의 피멍이 들도록 제 엉덩이를 매질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힘껏 때리려고 해도, 내리치는 순간 손에 힘이 덜어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정환이 피멍이 들다 만 볼기를 매질하여 양 볼기가 모두 비슷한 모양으로 동그랗게 터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올린은 그 매를 맞으며, 어쩌면 이 과제를 잘 해냈다면 정환이 자신을 말과 교미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자신은 어쩌면 이러한 것조차 해내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통렬하게 자책했다.
두 볼기가 딱딱한 피멍으로 부은 채 울며불며 마구간으로 끌려가는 올린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정환의 다리에 매달려,
“살려 주, 세요, 잘못했어요….”
하고 빌었다가 결국 농장의 흙길 한가운데 버려졌다. 정환은 지친다는 표정으로 올린의 한 손에 난 구멍을 줄에 꿰어 꽁꽁 언 울타리에 묶었다. 그리고 고용인을 불러 올린을 삼십 분간 묶어 놓았다가 마구간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정환이 먼저 사라지고, 고용인이 올 때까지 올린은 젖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농장은 넓었고, 올린은 맨발이었으며, 달아났다가 잡혀 왔을 때 받을 벌은 너무 무서웠다. 잔뜩 웅크린 채 시린 발을 다른 발 위에 올린 꼴사나운 모습을 한 올린의 귓가에 19번이 깔깔 웃는 소리가 울렸지만 그 목소리마저 털어 버렸다. 정말로 정말로 미쳐서 편해지기는 싫었다.
마구간에 도달하자 바지가 벗겨졌다. 벽 없는 지붕 아래, 어제저녁 보았던 그 물건 위에 엎드려졌다. 손발을 묶지 않은 건 이것이 올린에 대한 시험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꿀쩍거리는 소리로 쑤셔 확인한 정환이 손에 묻어 나온 장액을 닦으며 고용인과 말의 상태를 의논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고용인 하나가 양동이에 든 암말의 오줌을 올린의 머리카락에, 윗옷에, 엉덩이 사이에 부었다. 냄새가 잘 나게 하려고 따뜻하게 데운 상태였다. 온몸에서 김을 펄펄 올리면서 올린은 입에 말 오줌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바로 옆의 테이블에 정환이 부스럭거리며 포장을 풀어 내려놓은 것을 내려다본 올린이 기겁을 하고 버둥거리다가 훌렁 뒤집히며 떨어졌다. 앞뒤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본능만 남아 무릎으로 기어 겨우 달아난 곳이 말들이 있는 실내였다. 열여섯 개의 검은 눈이 어지럽게 자신을 훑는 것 같았다. 투레하는 소리조차 천둥이었다. 곧 자신과 접 붙을지도 모르는 수말의 콧김을 느끼면서, 올린은 습도계가 걸린 기둥을 손톱으로 긁으며 붙잡고 늘어졌다. 다가온 고용인을 향해 미약한 저항을 하던 올린은 거꾸로 붙잡혀 거친 바닥을 끌려갔다. 원래 있던 곳에 다시 올려지며,
“조금만, 조금만 이따가… 제발! 잠시만요….”
하고 의미 없이 빌었다. 포장이 풀린 채 테이블 위에 놓였던 것은 작은 단검이었다. 캠핑용으로 쓰는 실용적인 것들과 달리 손잡이에 장식이 화려했다. 가죽이 아닌, 금속으로 세공된 검집 안의 날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그것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해코지할 것인지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잔혹한 상상을 동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것을 준비해 올 정도로, 정환은 자신을 해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던 것이다. 올린은 정규와 보았던 아름다운 오색의 빛 장식이 언제 적 일인지 돌이켰다. 바로 지난밤의 일이었는데 수년은 된 듯 까마득했다. 그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부터, 정환은 이 아름다운 단검을 미리 준비하여 가슴에 품은 채 올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작이 아득하게 먼 악의가 섬뜩했다.
애써 억누른 탓에 힘을 쓰지 못하는 19번의 환청이 귓속에서 희미하게 울렸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의 약을 먹지 못했다. 그러나 올린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이 몸의 통제권을 19번에게 내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흔들어 19번과 싸우는 동시에, 미친 정환과 싸워야 했다.
“너, 나한테 용서받고 싶지 않아? 날 잊어버린 중죄를 갚고 싶지 않아?”
미친 정환이 물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도 제정신인 올린은 흐느끼며 대답했다.
“용서받고 싶어, 제발 용서해 줘….”
“그러려면 참을 줄 알아야 해. 계속 이렇게 버둥거릴 거야? 내가 널 개처럼 묶어 줘야 직성이 풀리겠어? 네가 묶이지 않은 채 피를 내고 두려움을 참으며 말 좆을 받는 게, 나를 기억해 내고 싶다는 의지 표명이라는 걸 아직도 몰라?”
어쩐지 한 마디도 욕설을 섞지 않는 정환은 낯설었다. 올린은 제 엉덩이 쪽에 선 채 부르짖듯 하는 정환의 목소리에 어린 광기를 헤아려 보았다. 간신히 대답하는 사이에 귓속까지 말 오줌이 흘러들었다.
“모르겠어, 난 그런 거 하나도….”
그러나 정환은 단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올린에게 밧줄보다 더 강력한 구속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정환은 한 번도 사람의 몸에 창상을 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망설임이라든가 주저함 같은, 인간적인 자취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말 좆을 받는 고통이 올린의 기억을 돌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정말로 그저 피를 내기 위해서라면 한 번 긋는 것으로 충분할텐데 그 정도의 고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영 남을 상처를 내고 싶어 하는 눈이 빨갛게 언 도톰한 발바닥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두 손을 위로 뻗어서 모서리를 잡고 버텨.”
너무 무서웠으므로 그것마저도 어려웠다. 파상풍 예방 주사 따위를 준비해서 들고 온 고용인이, 바들거리며 손을 뻗어 고무 덮개가 씌워진 끄트머리를 붙잡는 올린을 바라보았다. 정환이 올린의 왼쪽 발을 한 손으로 감싸 뒤로 들어 올린 것과, 마굿간에서 말 한 마리가 히히힝,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른발은 받침대를 디딘 채였다. 두 손은 차가운 의빈대의 끄트머리를 잡고, 한쪽 뺨은 둥근 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뒤로 들어 올려진 왼발만은 정환의 손안에서 살아 있는 맥박을 틔워 내고 있었다. 정환은 꽁꽁 얼었음에도 부드러운 올린의 발을, 올린은 다른 손에 단검을 들었음에도 따뜻한 정환의 손을 느꼈다. 정환은 네 손가락으로 발등을 받치고 엄지만으로 올린의 발바닥 옴폭한 부분을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와 곁에 놓인 커다란 난로에서의 온기가 불규칙하게 흐르는 실외에 고요가 내려앉고, 마침내 올린의 흐느낌조차 잦아들었을 때, 함박눈과 함께 내내 숨죽이던 19번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는 그릇된 죄책감을 가르고 그 안에 들었던 것을 쿡쿡 찔렀다. 올린 스스로도 주제 넘는 바람이라 생각해서 감춰 뒀던 그 마음은 제일 좋아했던 도련님, 사랑하는 정환이에게 안겨서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끝내 미쳐 버리도록 괴로운 일을 겪어야 했던 자신을 연인이 안아 주었으면 했었다. 혼을 내고 매를 때리고 살을 찢고 오줌을 부어, 말과 접 붙이려 드는 게 아니라.
너, 얘 기억하지.
기억 안 나.
너, 얘 기억하잖아.
모르겠어.
너, 얠 사랑했잖아. 왜냐면 제일 처음 안아 준 도령이었거든. 첫날 그 혹독한 매질의 날에, 그 존나 춥던 10월의 수영장에서, 얘가 널 매질하다가도 끌어안았던 그날, 얠 사랑하게 되었잖아. 그때 달라붙었던 이 애의 살냄새, 옅게 풍겨 오던 포도주의 향기, 네가 아닌 다른 어떤 일로 인해 몹시 슬퍼하던 그 눈, 욕설을 뱉으면서도 키스해 주던 입술을 기억하잖아. 이 애는 가장 심한 욕설을 하고 더없이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하고 제일 오래 묶어 두었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면 널 품에 안아 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어. 이 애가 널 끌어안을 때 네가 힘이 없어 마주 끌어안지 않으면 아프도록 뺨을 때렸던, 이 애의 어리석은 사랑을 좋아했잖아.
이 애랑 함께 보던 첫눈, 이 애가 복종하라던 자들로부터의 학대, 그것들 왜 견뎠어, 얘한테 한 번 안길 그 순간의 위로를 고대해서 그랬잖아. 그게 좌절되었을 때 그토록 모진 마음으로 달아났어도 네가 기억했던 건 이 애의 이름 단 하나, 그거였잖아. 돌아와서 네 눈을 차마 못 보던 이 애한테 기어들던 그날 그 갈급했던 구애는 진심이었잖아, 장미꽃 덤불에 누운 이 애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 같다고 너 생각했잖아, 이 애가 불러 달라던 이름, 정환아, 정환아, 그거 혼자 몰래 불렀었잖아. 얘한테만은 도련님이라고 한 적 없잖아, 언제나 정환이었지.
눈은 순식간에 쌓여 그들을 제외한 온 세상을 덮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실외였으나 캐노피 형태의 지붕 아래였다. 정환은 눈이 내리는 정경을 멍하니 보다가, 손으로 어루만지던 보드라운 발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에 잡힌 단검이 올린의 발바닥에 와 닿았다. 망설이는 듯도, 혹은 괴로움을 연장하려는 듯도 한, 뜻을 알 수 없는 느린 움직임에도 올린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홉뜬 눈에서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을 고용인이 바라보았다. 몇 초가 되지 않는 새에 흐른 눈물방울이 코팅된 고무 덮개의 옴폭 들어간 장식 위로 못을 이루었다.
맞아, 언제나 정환이었지, 이 애가 사정하라고 하면 두려워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기뻐했었잖아, 네 정액을 삼키는 정환의 목구멍에 네 자지, 다시 한번, 아니 두 번, 아니 세 번 더 처넣고 싶어 했잖아. 얘한테 폭력적인 음심을 품었었잖아. 성애를 그렇게 밖에 배우지 못한 게 부끄러워서, 생각만으로도 미안해서 많이 많이 울었잖아. 이 애가 발라 주던 생선 살, 먹기 괴로울 정도로 매웠던 음식, 난생처음 먹던 노란색 그- 다디달았던 음료, 그거 다 기억하지. 전부 기억하잖아. 정환이랑 캠프까지 돌아갔었던 그날, 그 차에서 왜 도망치듯 내렸어, 그날 정환이한테, 널 데리고 멀리 멀리 달아나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네 혀, 잘라 낼 수 없어서 그랬었잖아. 네가 그렇게 말했으면 정환이가, 비록 그 끝이 비극일지라도, 그렇게 해 줄걸 알아서 그랬잖아. 정환이랑 달아나다가 잡혀 죽는 것보다는 물건 취급당하면서도 정환이에게 오래 소용되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정, 하아, 크으윽-.”
지금 정환이가 네 발바닥에 단검을 박아 넣고, 뼈끝을 긁는 듯한 고통을 주면서 살을 가르고, 네 발의 팬 곳을 채우고 정환이의 손을 채운 피가 바닥에 흐르는 소리를 또옥, 똑, 똑 들으면서도 네 팔에, 네 허리에, 네 무릎에 힘을 주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 까닭이 뭐야. 지금, 정환이가 깊게 그어 도무지 앞으로 걸을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도록 깊은 상처를 주고도, 그 상처를 가로지르는 또 다른 상처를 주려고 하는 것까지 견디는 이유가 뭐야. 저 안에서 울부짖는 저 짐승의 좆에 네 몸을 관통시키려 준비하는 정환에게 손톱만큼의 미움조차 품지 않는 이유가 뭐야. 정환이 정말 위로받는다면 이 끔찍한 물건을 붙잡고, 비록 토하고 울다 죽게 되더라도 말 좆에 꿰일 마음까지 먹은 이유가 뭐야. 뜨겁고 검고 살아 있는, 어쩌면 네 내장이 가장 크게 확장될 수 있는 지름보다 더 거대할, 그 흉기가 널 죽일 수도 있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견딜 거라고 다짐하는 이유가 뭐야.
정환이 사랑해서 얘 기억해 주고 싶었잖아, 그래서 참는 거잖아.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차마 기꺼워는 할 수는 없어도 온 힘을 다해서-
“하악, 아아악, 저- 정환, 흐아아, 아니야, 하지마아아, 아아- 제발! 아아악, 아아아!”
버티던 올린의 상체가 번쩍 들렸으므로, 고용인이 달려들어 내리눌렀다. 그는 납작하게 짜부라질 듯 짓눌린 채 두 번째의 가해를 받아들여야 했다. 엄지발가락의 바로 아래 봉긋하게 살이 솟은 곳으로부터 발뒤꿈치까지를 사선으로 가로지른 창상은 발을 통째로 갈라 낼 것처럼 깊었다. 정환은 생각보다 큰 힘을 주지 않아도 깊게 살을 가르는 단검의 날 끝에서 딱딱하고 소름 끼치는 뼈의 감촉을 느낀 것도 같았다.
고용인의 무릎이 발 받침대를 짚은 한 발을, 고용인의 상체가 등을 단단히 누르고 있었지만 다음의 가해는 서둘러야 했다. 얌전히 견뎌 줄 줄 알았던 올린은 끝내 정환이 원한만큼 온순하게 버텨 주지는 못했다. 한 번 그은 상처를 기준으로 알파벳 엑스자를 그리듯 가로지르는 다른 선은, 이번엔 새끼발가락 아래의 살로부터 시작해 발뒤꿈치를 향했다. 올린의 비명을 따라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하는 소리가 울렸다.
펄떡거리는 몸은 갓 잡아 올린 활어 같았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펄떡이는 생선처럼 올린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 바람에 한 번 칼날이 비켜났으나, 정환은 끝내 마음먹은 대로 피의 그림을 그렸다. 출혈이 너무 심해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손의 감각은 그러했다. 그는 펄떡대다 바닥에 떨어진 올린이 손에 잡히는 것도 없이 언 땅을 긁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
미친 정환의 눈에, 고통받으며 바닥을 뒹구는 올린의 모습은 극심한 성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야했다. 올린은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다가, 허리를 굽힌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가, 성한 다리를 뻗대어 어디론가 기어갈 것처럼 허둥대기도 했다. 할딱이는 몸이 하늘을 향해 뒤집혔을 때 정환의 열 오른 눈은 올린의 오그라든 좆을 관찰했다. 추위와 공포에 웅크린 그것을 발로 쓰다듬듯 밟았다. 올린은 정환의 발목을 붙들었다가, 그 발목의 열기로부터 손에 화상이라도 입을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 순간 뜬 눈이 이미 돌아선 정환의 뒷모습을 담았다. 일그러진 눈에 눈물이 고여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뒷모습이 일렁거렸다.
저택에 상주하는 고용인들과 달리, 이곳의 고용인은 표정을 관리하는 데 서툰 모양이었다. 그는 뜨악한 눈으로 어린 주인이 하는 짓을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 그가 들고 온 지혈제를, 정환은 툭 쳐서 던지듯 떨어뜨렸다. 트레이 위에 남은 파상풍 주사를 놓기 위해 고용인이 망설이며 다가왔다가, 할 일을 다하고는 서둘러 물러났다. 정환은 먼 데를 쳐다보며 올린의 고통에 귀를 세웠다. 몇 분만 출혈의 공포를 누릴 수 있도록 방치한 후, 상처의 아픔을 견디며 말 좆을 받게 하는 고문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크흑, 으윽, 숨과 함께 고통을 참던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쪽에서 흘레붙일 수말을 진정시키는 워, 워, 소리가 울렸다. 끼릭끼릭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는 올린이 두 번이나 떨어졌으나 결국엔 다시 매달릴 물건의 높이를 조정하는 소리였다. 피 냄새와 함께 오줌 냄새는 지리게도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홀로 버려진 올린의 몸은 이제 잠잠한 가운데 간헐적으로 튈 뿐이었다.
경련 속에 그는 자신이 조금도 미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정신이 명료한 적이 없었다. 사랑했던 기억은 원망과 함께 돌아왔다. 모시는 도련님의 학대는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라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정환으로부터의 학대는 미워서, 미워서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는 더없이 또렷한 정신으로 원망했다.
“나는… 그랬는데.”
올린의 속삭임을 들은 것은 그를 짓눌렀던 고용인뿐이었다. 넋 나간 듯한 혼잣말을 듣고 순간 정환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린 채 자기 자신만의 슬픔에 빠져 있느라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올린은 피가 덩어리로 쏟아지는 발조차 땅에 디디며 똑바로 섰다. 그 손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가해하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언 땅에도 피는 고이지 않고 스몄다. 핏발자국은 외발인 양 몇 걸음이나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올린의 지난한 삶에 아름다운 것들도 있었다. 보통된 이라면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들을 올린은 용케도 찾아내어 소중히 여겼었다. 그것은 달콤한 먹을거리나 한낮의 산책 같은 사소한 것들도 있었지만, 저를 학대하기만 하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드물게도 마음을 나눌 만한 사람과의 관계같이 크고 빛나는 것도 있었다. 그건 안온의 부스러기가 아주 띄엄띄엄 떨어져 있을 뿐이었던 삶에, 정말이지 너무나 커다란 행복이었다.
올린이 생각하기에, 정환은 가진 것이 참 많았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사람 모양의 물건도, 원한다면 여럿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형제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연인 놀이를 할 사람이라면 줄을 세워 둘 수 있을 정도다. 그에게 어쩌면, 올린을 향한 다정과 사랑은 별일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만큼 가벼웠던 그 마음은 어쩌면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다. 가여운 애를 가엾게 여겨 주고 긍휼히 대해 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컸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 불쌍한 애가 자신을 잊은 것에 그토록 분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중 특히 사람이 없었다. 연인을 행세하던 정환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했었느냐면, 그는 정말로 온 세상에 유일했다. 물론 네 도련님을, 액받이 된 도리와 그리고 당연한 이치로서, 참으로 기이하게도 모두 사랑하였으나- 정환은 올린에게 주인으로서 사랑해야 할 분이 아닌, 단 한 명의 연인이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제 연인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했었는지, 어쩜 주제넘게도 많은 희망을 품었던 것도 같지마는, 올린은 자신은 그에게 적어도 위로받을 자격은 있었다고 믿었다. 그토록 유일한 사람이 제게 한 짓을 알아 버린 원망은, 연인에게 잊혔던 정환의 분노보다도 더 크게 솟구쳤다.
그래서는 안 됐다. 사랑하고자 했다면 학대하고 파괴해서 기억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줬어야 했다. 공포와 절망과 싸우다 끝내 미친 연인을, 조롱하고 증오하고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얼마나 힘들면 나조차 잊었느냐고 가여워해 줬어야 했다.
기척을 죽이려 일부러 애를 쓴 것도 아닌데, 땅을 긁으며 일어나 몸을 돌리고 여러 걸음을 걸어 바로 뒤에 서기까지 정환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럿이 말을 달래러 간 사이 홀로 남아 있었던 고용인은 올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온몸이 얼어붙어 경고의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올린은 심지어 고용인을 한 번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올린의 시뻘건 눈 아래가 파르르 떠는 모습을 보고 고용인은 웃는가, 저것이 정말 웃고 있나, 하는 무서운 생각마저 했었다. 그런데도 그의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올린도 그런 줄을 아는 것처럼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쩌면 사람은, 감정이 마음을 온통 앗는 순간엔 초능력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제 발바닥을 찢는 손을 떨궈 낼 만한 괴력은 없었지만, 가혹한 방식으로 자신을 배신한 연인의 곁에 유령처럼 다가드는 능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올린의 몸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정환의 바로 뒤에, 한숨처럼 속삭이는 소리마저 귀로 바로 꽂혀 들어갈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기척 없이 다가가 속삭였다.
“난 그랬는데, 왜 너는 이래?”
훅, 숨을 불어넣는 듯한 목소리에 정환이 돌아보려던 순간, 올린은 손에 든 단검을 들었다. 사람을 베는 일은 사실 별일 아니었다. 올린은 비록 타고나기를 유순하고 평화로운 성정으로 났으나 온통 폭력으로 얼룩진 시간을 살아왔다. 제 몸이 베이고 찢기는 꼴을 보며 지내는 게 예사였던 올린이 어쩌면 오히려 정환보다, 남의 몸에 창상을 내는 순간을 수월히 여겼을 수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을 뒤에서 껴안았다. 두툼한 가슴 아래 심장이 뛰는 감각이 손바닥을 울렸다. 그것에 기꺼워하면서도 목을 긋는 긴 손길은 날랬다. 원한다면 그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가슴이나 배를, 관자놀이나 옆구리를 두어 번 더 찌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올린은 정환의 울대가 갈라져 울컥 검은 피가 흘러나오도록 그은 단검의 손잡이를 그냥 놓아주었다. 중요한 걸 묻고 싶어서였다. 챙강, 바닥에 떨어진 단검이 비명을 질렀다.
“왜! …왜!!”
두 손으로 피가 쏟아지는 제 목을 쥔 채, 정환은 돌아보았다. 예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뜻 모를 물음을 소리치며 우는 올린의 모습은 정환의 눈에 한없이 반가웠다.
정환은 그저 올린이 좋았다. 순하고 착하고, 자신이 하자는 대로 잘 따르는, 그러다가도 느닷없이 고집을 부리기도 하는 올린이 사랑스러웠다. 자지를 빨아 주면 은근히 머리채를 쥐고 제 향기로운 다리 사이로 머리를 누르기도 하는 의외의 못된 구석이 귀여웠다. 먹을 것을 주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천진스러움이 예뻤다. 맹세코 올린이 그에게 사소한 존재라 고문이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그는 늘 사랑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으니 자신이 대롱대롱 달린 나무가 별것 아닐 리 없었다. 다만, 평생을 어리광부리로 자라온 데다 사랑을 받기만 해 버릇하여, 이번에도 받고자 했을 뿐 주는 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자신을 잊어버린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제 욕심이 상대에게 어떤 괴로움을 끼칠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단 한 가지의 목표,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아는 방편을 동원했을 뿐이었다.
이제 그가 원하던 대로 되었으므로 정환은 대책 없이 기뻤다. 제 목에 깊은 금이 그어지고 거기에서 뿜어 나온 피가 올린의 얼굴까지 튀었음에도 그는 웃었다. 나중의 일 따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린 마음으로 그는 반가운 올린을 껴안으려고 했다. 미치지 않고 자신을 기억하는 올린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올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다시 한 걸음, 물러섰으며 정환은 그를 쫓아 반걸음조차 다가서지 못했다. 올린의 팔에는 힘이 붙어서, 힘껏 휘두른 손도끼가 속절없이 튕겨나던 때의 허약한 근육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준 상처는 깊었다.
“돌아왔구나.”
피 흘리며 정환이 말한 소리는 올린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소리는 실제로 난 소리가 아니었다. 꾸르르륵, 쉬익, 하고 말이 되지 못한 피 끓는 소리가 울릴 뿐이었다. 달려온 사람들이 올린을 제압하고, 가륽가륽 괴이한 소리를 내며 웃는 정환을 바로 눕혀 지혈하는 동안 올린이 대답하는 소리도 분명히 들렸을 것이다. 그 증거로, 정환은 내내 웃고 있었다.
“그래.”
돌아왔구나, 내 올린이 돌아왔구나, 이제 나를 기억하는 진짜 올린이 돌아왔구나, 바둑알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던 가짜는 이제 없구나, 정환은 기뻐하며 올린의 발목에 닿으려 손을 뻗었지만 올린은 그 손질을 피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징그러워서였다. 이제 19번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명료한 목소리가 속에서 울렸다. 그는 이 울림이 자신이 일부러 소리 내지 않을 뿐, 광기 없는 오롯한 제 생각임을 알았다. 나는 돌아왔어. 나만 돌아왔어. 우리가 가졌던, 어딘지 특별해 보이던 그것은 사라지고, 오직 나만이 돌아왔어. 이제 넌 나의 정환이 아니고, 난 이제 절대로 너의 올린이 아니야.
교미할 뻔했던 수말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고문을 멈춰 달라 애걸하며 정환과 접 붙은 어젯밤을 떠올리자 구역질이 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제 슬픔에만 머리를 처박은, 짐승보다 못한 것과 잠자리를 한 건 개, 똥 같은 일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오직 말뿐인, 잔인하고 무도한 파렴치한과 자느니, 어젯밤에 말의 좆을 받고 반으로 쪼개져 뒈졌어야 했다. 어차피 이제 죽을 거,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 느끼는 토기는 없었을 터였다. 올린은 피에 젖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며 오직 그것 하나만을 아쉬워했다. 다른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4권에 계속]
네 도련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