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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립 (39/65)

# 대립

“형.”

비몽사몽한 중에도 제 발로 걷던 올린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이었다. 주차장과 같은 층에 연결된 지하층의 다용도실에는 당구대니 트레드밀이니 하는 물건들이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고용인들이 쓸고 닦고 정리하지만 주인들이 정작 사용하는 법 없는 공간은 조명이 꺼져 어두웠다. 통창 밖의 작은 뜰에서 낮은 조명이 새어 들어오는 앞에 홀로 앉아 있던 사람은 정환이었다.

“형. 늦었네.”

신발을 신고 다니도록 설계된 바닥을 맨발로 딛고 걸어오는 폼이 덜렁거렸다. 아직 대여섯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 마주 섰는데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올린의 뒷목에 솜털이 사악 섰다.

“그래. 늦었는데 안 잤어?”

안았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앞서 제 몸 뒤로 올린을 숨기는 정규의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포악한 눈을 한 정환으로부터 올린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동생을 미래에 겪을 뼈아픈 후회로부터 구제하려는 중인지도 몰랐다.

“잠이 와야지.”

대답한 정환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올린을 보는 대신 정규를 마주 보았다.

“어디 다녀왔어.”

그 눈에는 어딘지 낯선 감정이 들어 있었다. 정규가 느낀 것을 올린도 감지했다. 형제들은 액받이를 두고 서로 다툰 적이 없다. 풍요 속에 사는 사람들이 한낱 물건을 가지고 다툴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먹잇감을 가지고 서로 입질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일이다.

“응? 형. 어디 다녀왔냐고요.”

그런데 지금 정환의 말투는 가난했다. 제 애인을 가로챈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도 닮았다. 웃으며 피하려던 정규는 그 심상찮은 태도에 몸을 돌리고 흉흉한 기세의 동생을 마주 보았다. 두 남자의 눈빛이 부딪치는 순간 서로의 눈 안에 든 것이 별다를 게 없음을 둘이 동시에 깨달았다. 얽힌 감정이 복잡한 데다 그 복잡함을 풀어내지 못한 고통까지, 똑 닮은 둘의 감정은 다른 듯 꼭 같은 사이좋은 형제다웠다.

그러나 정규는 다툼에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일순, 지금 눈앞의 다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올린은 폐기될 놈이다. 정비 형만 깨어나면, 이것을 구하느라 목숨을 걸었던 그의 인가만 받으면, 정규는 자신의 손으로 올린을 폐기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동생을 포함한 형제들에게 유익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 울 것 같은 눈을 한, 덩치만 어른이 된 소년이 비틀거리는 꼴은 입맛이 쓰다.

“잤구나 씨발?”

”그럼 안 자, 씨발.“

“큰형 있을 땐 데리고 나간 적 없잖아.”

“그땐 매달아 놓고 때린 적은 없었잖아.”

“그렇다고 데리고 나가? 내가 애 기억 좀 찾아 주려고, 어, 애쓰는 건데, 형은 그걸 몰라 줘?”

“그러다 애 죽여. 너 제정신 아니야.”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저년 저거, 나 빼고 다 기억한다고. 야 이 썅년아 너 정규 형이랑 떡 치는 거 좋았냐?”

당연한 것을 묻고 당연한 것을 들은 정환은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할 법한 소리를 했다. 난데없이 화살을 저에게로 돌린 정환을, 올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맞지 않고 떡만 치니 좋긴 좋았다. 하지만 원래 공용의 물건인데 인제 와서 질투라니, 올린은 그 물음이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너도 내 구멍, 쓰면 되잖아.

“어? 나도 존나 성의껏 박아 주는데 형 자지가 더 맛있냐고.”

“미친놈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저 씨발년, 나는 기억도 못 하면서, 내가 쓸 때는 빳빳하게 굳어 있는 주제에 형들한테는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정환에게 사용될 때의 올린은 넘쳐나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 어느 순간에라도 얻어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으니 쾌락은 오더라도 매우 더뎠다. 강압하여 다리를 발발 떨며 느끼게 해 줘도, 그 순간마저 눈치를 본다. 머리카락을 넘겨 주려고 손을 들었을 뿐인데, 그것에 겁을 먹어 움찔거리는 꼴을 보는 것은 입맛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아나 정규가 쓸 때의 올린은, 손이 스치는 모든 곳이 성감대인 듯 예민하게 굴었다. 온종일 얌전하게 가구처럼 있던 놈이 요분질치며 밑을 적시는 꼴을 보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일부러 부리는 것은 아닐 수 있었으나 그건 미친 것의 교태요 아양이었다. 정환은 바로 그걸 질투하는 것이다.

정환은 성큼성큼 날듯이 걸어왔다. 형형한 눈빛은 올린을 향하고 있었는데 주먹은 형을 향했다. 올린이 사라지면 정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정규는 불시의 공격에 당황했어도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는 않았다. 재빠르게 피하는 바람에 잠시 균형을 잃었던 정환이 금세 태세를 도로 갖추고 달려들었다.

정환이 비록 완력이 세긴 했으나 몸 다루는 데는 정규가 더 익숙했다. 술 취한 주먹이 몇 번이나 형의 턱을 노렸으나 한 번은 피하고, 두 번째에는 주먹을 마주 잡아 막은 정규가 더 이상 참아 주지 않고 정환의 배를 향해 주먹을 꽂았다. 헉, 순간 숨을 토했지만 타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바로 자세를 잡고 달려드는 동생을,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한 정규가 똑바로 쳐다보며 맞이했다.

제게 쏟아지는 폭력에는 익숙하나 저들끼리 싸우는 모습은 처음이다. 올린은 그 모습에 공포 말고 다른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죄책감, 혹은 걱정 같은 감정 속에서도 무력히 늘어뜨려진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원래는 낯설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학대자로서의 지위를 굳힌 정환 도련님과, 본래 더없이 잔인하였으나 이제는 다정하게 대해 주는 정규 형의 싸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호와 표, 범 같은 두 남자는 주먹다짐에서 시작한 싸움에서 서로에게 걷어차여 바닥을 구르고 떠밀려 벽에 등을 부딪치면서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정규의 몸은 빠르고, 주먹질은 정확했다. 그러나 정환은 정확히 꽂힌 주먹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번 날린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정환은 다리가 긴 의자를 쳐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욕설하며 정규는 날아드는 의자를 한 팔로 막아 냈다. 의자 다리가 산산조각이 나 그 조각 하나가 올린의 눈가를 스치고 떨어졌다. 살이 찢겨 울컥 쏟아지는 피를 손목으로 누르며 주저앉았다. 병신이 된 손으로는 지혈이 안 되는 걸 알아서 손목이었다. 그는 형제들이 볼 수 없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씨발, 정규가 팔뚝에 가해진 충격을 털어 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정환, 나무라는 소리에는 형한테 뭐 하는 짓이냐는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태생이 다름에 대한 뿌리 깊은 자각이 없지 않았다.

잠시 서로에게서 떨어진 남자들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규가 인상을 쓰고 쳐다보는 동안 정환은 당구대에 올려 두었던 술병을 손아귀에 쥐고 꼴꼴꼴 소리 나도록 들이켰다. 아 형은 몰라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느릿한 응석도 섞였다. 형의 공격을 피하다가 무심코 집어들었던 큐대가 다른 손에서 흔들렸다. 그는 술을 마시며 형을 마주 보고, 그림자 끝으로 튀어나온 웅크린 올린의 어깨를 쳐다본 다음에, 술병을 내리다가 미끄러뜨렸다. 술 취한 손은 병을 어디에 올려놓아야 하나 거리를 계산하는 데도 서툴렀다. 견고한 타일 바닥에 녹색 양주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흐린 눈을 한 정환은 위험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는 취기로 인해, 혹은 노기로 인해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굴었다. 이성은 그보다 훨씬 전에 마비되어 있었다. 분노의 대상을 잘못 잡은 그는 어머니가 다른 것과 관계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형제를 향해 혀 꼬인 소리로 주정했다.

“저게, 형은 기억하잖아.”

정규가 뻐근한 주먹을 다른 손으로 주물러 풀며 코웃음을 쳤다.

“왜 난 잊어버렸지? 잊어버린다면 형을 잊어버렸어야 하지 않나.”

“막내야.”

“굳이 따지자면 저년에 대한 소유권은 형한테 제일 적게 있지 않아요?”

“정환아.”

“형은 반쪽짜리니까.”

“이정환!”

벽 쪽에 선 채 우스꽝스러운 주정을 지켜보던 정규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은 것은 동생이 유리 조각을 밟으며 성큼 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었다. 와작 소리를 내며 동생의 발바닥에 박혀 드는 유리의 소리에 정규가 말리는 소리를 채 더 하기도 전에, 웅크리고 벌벌 떨던 올린이 퍼특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다급한 나머지 기다시피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정규보다 정환이 그 모습에 더 놀랐다. 네 발로 유리 조각의 파편 위를 기어 발치에 무릎 꿇은 올린은 정환의 다리에 매달려 그 발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정환의 몸이 당구대 쪽으로 기울었다.

바들바들 떠는 손이 어쩔 줄을 모르고 다리 위를 오르내렸다. 유리에 찢겼을 발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이 고개는 아래를 향했다가, 정환의 얼굴을 확인하는 듯이 위로 향했다. 정환이 발을 들어 주자, 발바닥에 붙은 유리 조각들을 털어 내고 박힌 것은 맨손으로 뽑았다. 두 도령이 싸우느라 서로의 몸을 치고받는 것에 대해서는 공포를 보이지 않던 눈에 다급한 두려움과 걱정이 차올랐다.

마침내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 얼굴은 잔악스러웠다. 기억 속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소거하여 커다란 상처를 줬으면서, 고작 살갗이 찢긴 것이 애틋하고 아깝다는 듯이 우는 건 가증이었다. 정환은 눈물과 피를 함께 흘리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이것이 자신에 대한 기억이 돌아와서 이러는 게 아님을 읽어 냈다. 기억을 잃었으면서도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살피지 못한 어리석음이었다.

정환은 지금, 반쯤 자신을 기억해 낸 것도 같은 바로 지금, 가장 잔혹하게 박해한다면 기억이 완전히 돌아올 것 같다는 광상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상처에 마음 아파 우는 것의 머리채를 단단히 잡아 올렸다. 악, 소리를 내고 억지로 젖혀진 얼굴로 정환을 마주 본 올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포악한 고문자의 발밑으로 스스로 기어들어 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뒤늦게 올린이 놀란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정규는 그저 서 있었다. 오롯한 고통으로 보이던 폭력을 어쩌면 저 미친 것도 고대했을지도 모른다는 순간의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정환의, 올린의 소유권이 다른 형제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조차 그랬다. 자신에게는 정환으로부터 올린의 손목을 떼어 낼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형제라는 이름으로 살아오기는 했으나 서자인 자신이 적자인 동생을 가까이서 수행하는 심정으로 지낸 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사랑하는 동생의 표정은, 비통함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찾은 것처럼 빛나는 저 눈은.

정환은 더 이상 정규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올린의 두피가 심하게 당겨져 눈이 제대로 감길 수도 없을 정도로 세게 부여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올린은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끌려가면서 곁눈으로 정규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스스로 기어들어 간 놈을 끌어낼 만큼 정규의 열등감이 가볍지 않았다. 올린을 살리려 했던 둘째 형의 의지와 자신을 기억하게 하려 고문하는 막냇동생의 마음을 저울질하느라 서자는 정작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여운 애가 컥, 큭, 하는 숨 들이키는 소리를 내며 끌려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정환의 차가 SUV인 것은 다행이었다. 세단이었으면 빛 들지 않는 트렁크에 실려 가는 동안 올린은 어쩌면 두려움으로 인한 호흡 곤란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올린은 차 뒤편, 평소라면 개가 올랐을 자리의 한 구석에 손이 묶였다. 정환은 취한 눈으로도 올린의 손 구멍을 찾아 두 손을 케이블 타이로 꿰어 고정하는 것은 수월히 해냈다. 그는 술 취한 채 운전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블루투스로 통화하는 내용은 올린에게도 가림없이 생생했다.

“이정환입니다.”

깍듯한 존대에 더욱 깍듯하게 전화를 받는 상대방과의 통화를 들으며, 올린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피와 함께 닦아 내고 눈을 깜빡였다. 저녁 약을 한번 걸렀을 뿐인데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웅웅 울기 시작했다. 공포와 불안을 먹이 삼는 망상에 지배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 겪을 일이 아무리 무섭고 아프다고 해도, 올린은 망상 뒤에 숨기보다는 자기 자신인 채 모든 것을 감내하고 싶었다. 그건 살고자 하는 스스로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고통받는 정환에게 더 이상의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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