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치아코 (34/65)

# 치아코

이정아는 자신의 이름 중 두 글자를 그대로 가명으로 쓸 만큼 허술한 데가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스무 해 가까이 그 이름을 숨기는 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다. 제 방의 한 켠에 암실을 지어 넣고 약을 만들기 시작한 게 십 대 후반, 메이커 이정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게 이십 대 초반, 선량한 제약회사로 위장한 연구소의 지하에서 첫 번째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게 삼십 대가 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동안 약에 중독되어 실려 가는 일은 몇 번 있었지만 메이커로 의심받는 일은 한 차례도 없었다.

폭음과 모터 소리 속에서 이정의 신약을 선물받은 사샤는 정아가 그 유명한 이정 본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아무 생각 없이 예쁜 몸을 모으고 그 몸들을 해체하는 놀이에나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러시아의 뒷세계를 주무르는 사람이 상황 파악이 느릴 리 없었다. 그는 단 한 명의 수행원조차 없이 선상에 오른, 샌님처럼 보이는 미남자가 자신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음에 감동했다기보다, 이제 이정을 알게 된 자신의 사업이 어떤 방향으로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계산이 빨랐을 뿐이었다.

“당신이 산 물건 장물이야, 원래는 내 거였던.”

이정은 오랫동안 알아 왔으나 한 번도 제 얼굴을 보지 못했던 벗에게 웃으며 부탁했을 뿐이었다.

“친구의 것은, 친구의 손에.”

사샤는 말했었다.

그런 식으로 알려진 얼굴이 검은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천만다행한 일은, 이제까지 심상의 장남으로서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중학교 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진단받은 후 그의 사회 활동은 배경과 철저히 분리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정이 심상의 장남 이정아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당분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태연했다. 그의 삶에 있어 걱정이나 불안과 같은 감정은 애초에 거리가 멀기도 했다. 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요인은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올린을 사지 붙은 채 데려오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로 한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다.

영중도 공장에 마지막 남은 직원을 내보내고 이정의 이름을 통해 수기로 작성된 서류를 태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으로 영중대교를 건너오는 길에 그는 멀리 보이는 화력발전소에서 한가로이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를 감상했다. 반대편, 두 개의 거대하고 하얀 바람개비는 느리게 회전하고 있다. 무해히 보이는 풍력발전소가 사실은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격렬히 회전하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발전소가 설치된 인근의 가축들을 미치게 하는 것도 평화로이 보이는 저 바람개비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 뒤에서 들이받는 충격에 그는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브레이크를 밟아 한순간 회전하는 위험보다는 여러 겹의 충돌을 만들어 내는 편이 보는 눈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럭에 밀린 흰색 세단은 여러 대의 차량을 마구잡이의 사고에 얽으며 도로를 갈지자로 굴렀다.

거꾸로 뒤집힌 채 불타오르는 차에 안전벨트로 묶여, 정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정아는 남자가 자신과 닮기도 하고 아주 끈질기게 쫓아다니기도 하므로 그림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림자는 이미 이정을 납치하기 위해 두 번이나 위험한 일을 벌인 바 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뜻대로 되려나, 그러면 앞으론 어떻게 될까 하는 기대로 정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러나 곧 사고에 연루된 차들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곧이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살펴본 자신의 몸은 옆구리가 관통되어 엉망이다.

한낮, 외지지도 않은 도로에서 이정을 납치하고자 달려든 남자는 자신과 닮은 면이 참으로 많다고 정아는 생각했다. 그는 이정의 얼굴이 알려지기 전부터 이정을 사랑한다고 여러 번 밝혀 온 자였다. 얼굴도 모르는 마약 메이커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메일을 통해 전시하던 남자가 이제는 얼굴을 알게 된 연인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정아는 그의 무모함과 광기가 자신과 꼭 닮았기에 그가 싫지 않있다. 사고를 처리하기 위해 뛰어온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며 그는 다음 번에 그림자가 자신에게 달려들 때야말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렴 뭐 어때, 귀여운 올린을 사샤로부터 받아온 대가가 얼굴이 알려지고 그 얼굴 아래 죽어 있는 내면을 사랑한다는 스토커에게 납치되는 것이라면, 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정아는 구급차에 목 보호대를 착용한 꼴사나운 모습으로 실리면서도 올린을 생각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림자 따위에 대한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

겨울이 되도록 저택에 돌아오지 않은 장남은 납치를 목적으로 한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집에 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가끔 정규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같은 곳으로 올린을 데려오라고 일렀다. 열 오른 몸을 진정시켜 안고 있던 정규는 새벽녘에 받은,

- 형은 치아코가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야

- 우리 돼지 어제는 뭐 훔쳐 먹었어?

- 오늘 치아코 데리고 잼실 와주라

- 와주면 딸기 씻어줌 너말고 치아코한테

하는 메시지에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큰형은 식탐을 부리는 올린에게 멋대로 치아코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 이름에서 오는 경멸적인 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도록 뒀다. 며칠이나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게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기 때문이라는 형의 말에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곤히 잠든 상처투성이 몸을 깨워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혔다. 어제저녁 귀엽게 반말을 지껄이던 것과 같은 목소리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지저귀기는 했지만 순순히 하자는 대로 한다. 대개 밤에만 잠깐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새로운 인격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너 지금 누구야?”

운전하던 정규가 장난삼아 묻자, 조용히 밖을 바라보던 올린이 답했다.

“19번. 하지만 의미 없어, 얘가 나고 내가 얘지.”

시선은 창밖으로 둔 채, 음료수 홀더에 꽂아 둔 껌 통을 훔치려고 붕대 감긴 손이 슬그머니 뻗어 온다. 그에 앞서 껌 통을 치우며 정규는 웃었다.

“그럼 당분간 네가 올린이 몸에 들어와 있을 예정이야?”

“재미없을 땐 나가고.”

“재미없을 때가 언젠데?”

“몰라서 물어?”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정규가 잠시 침묵했다가 빼앗았던 껌통을 슬며시 건넸다. 올린이 껌을 와작와작 씹는 소리가 음악 소리에 섞여 들었다. 꿀꺽, 씹던 걸 삼킨 올린이 이어 말했다.

“좀 말려 주지그래.”

한참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올린의 눈이 말끄러미 정규를 향했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하는 게 싫어? 이런 말을 하니까?”

정규는 숨 막혔던 사람처럼 간신히 웃었다.

“아니, 좋아. 난 올린이가 멍한 눈으로 울기만 하는 것보다 말도 하고 그러는 게 좋아.”

“내가 올린이보다 좋아?”

“네가 걔고 걔가 너라며.”

자신의 말을 고대로 돌려주자 올린은 웃었다. 도와달라는 말에 침묵으로 응대한 사람을 용서하는 게 참 쉬운 애다. 정규는 이 애의 웃음소리를 처음 들은 것 같았다. 고양이가 갸르랑거리듯 목만 울릴 때, 도드라진 울대가 함께 움직였다.

정아가 홀로 머무는 주상복합 아파트는 저층부가 쇼핑몰로 이어지는 곳이라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미 얼굴이 알려져 여러 집단의 타깃이 되어 버린 이정이 지내기에는 오히려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지만, 정규라면 좀 더 호젓한 은둔 장소를 택했을 거다.

이왕 온 김에 올린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 주기로 했다. 아침 시간임에도 지하철역이 연결되어 사람들이 꽤 오갔다. 움직이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에는 별다른 감상이 들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정규는 그가 조금씩 시선을 돌리는 모양만 봐도 새로운 구경을 기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하의 아이스링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도 한참이나 서 있었다. 사람 없는 둥글고 흰 공간에 거대한 기계가 오가며 얼음을 다듬었다. 그 느리고 평화로운 광경에 숨소리마저 고요해졌던 올린의 붕대 감긴 손가락이 별안간 움찔거렸다. 제 귀에만 들리는 환청을 떨구어 내려 세차고 짧은 몸짓으로 고개를 털기 시작하자, 정규가 어깨를 안고 달랬다.

“괜찮다, 우리 아가 괜찮다.”

정아의 집까지 한 번에 이르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아무리 보안을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이 비싼 집이 거주자의 편의를 너무 배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정규는 여러 번 투덜거렸었다. 사람 많은 몰에서 아파트 로비로, 로비를 가로질러서 다시 거주자용 엘리베이터로 갈아타며 이번엔 투덜거리지 않았다. 대신 품 안에 든 올린의 등허리를 쓸었다. 입혀 나온 기저귀가 젖었을 게, 만져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문을 열어 준 정아는 귀여운 치아코와 그 운반자를 반가이 맞았다.

“왔어?”

정아가 말하는 동안 올린의 신을 벗겨 주느라 정규가 대답하지 못하자, 올린이 대신하듯

“왔어.”

하고 대답하여 정아를 웃게 했다.

얼굴의 자잘한 상처에 밴드 따위를 꼼꼼하게도 붙인 채 느슨한 옷차림으로 나온 장남은 들었던 것보다 부상이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정규는 형의 멀쩡한 모습을 맨눈으로 확인하고, 옆구리가 뚫려 내장이 흘러나왔다던 사람이 왜 이렇게 씩씩하냐고 농담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얼굴에 자주 잊지만, 형의 인격 장애와 세트로 따라다니는 수많은 증상 중에는 통각 감수성이 몹시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정아에게는 고통을 고통답게 느끼는 능력이 없다. 고통을 느끼는 연기가 필요할 때에야 옆에서 보는 형제들의 치가 떨리도록 익숙하게 해내지만, 그것은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수많은 타인의 얼굴을 관찰하여 모방한 결과다. 지금 정아가 방글방글 웃고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수술 후 회복의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통은 입원 상태일, 사고 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간에 저렇게 잘도 걸어 다니는 것일 테다.

비정상으로 인한 평안을 마음껏 누리며, 정아가 앞서 걸어 들어가다가 쿨럭, 하고 기침했다. 기침을 너무 세게 하면 금 간 갈비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주의를 듣지 않았다면 정아는 속이 시원해지도록 몇 번이고 기침을 했을 것이다. 정규는 형이 기침하는 꼴을 곁눈으로 살피며,

“병원에 좀 더 있는 게 낫지 않았겠어?”

하고 물었지만 정아는 피식 웃으며 손만 내저었다. 정규는 한숨을 쉬고, 익숙한 거실의 소파에 앉아 눈앞에는 올린을 세워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윈 다리에서 바지를 벗겼다.

통창을 통해 먼 도심의 풍경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겨울의 해는 질 때는 바지런한데 뜰 때는 게을러, 출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겨우 일출이다. 그는 햇살을 등지고 선 올린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뒤에서 이토록 환한 빛이 비치면 얼굴은 어둡게 보여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고 빛의 산란에 대해 고민했다. 하얀 얼굴은 검붉게 찢긴 상처를 달고서도 스스로 발광하는 듯 어여뻤다.

바지 아래 기저귀를 확인했다. 역시나 젖어 있었다. 기저귀를 벗기자 순면 밴드에 눌리는 것조차 아파 보이는 아랫도리가 드러났다. 피맺힌 하얀 자지가 평소보다 조그맣게 오그라 붙었다. 회음과 항문의 피부가 벗겨진 데 습포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까지 오줌에 젖어 뜯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정아가 상처를 보고 중얼거렸다.

“치아코 많이 울었겠네.”

동정 섞인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 얼굴에는 감미로운 것을 맛보는 듯한 흡족함이 올라 있었다. 소변이 흡수되어 뜨끈한 기저귀를 정규가 야무지게 돌돌 말아 버리러 갔다. 그가 사라진 잠깐 동안 심통 난 것 같은 얼굴로 잠자코 서 있는 올린을, 정아는 만지지도 않고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정규가 따뜻한 물수건을 만들어 왔다. 올린은 소파에 앉은 두 형제가 올려다보는 앞에 서서, 다리를 벌리고 손을 허리 뒤로 모은 채 지린내 나는 아랫도리를 닦였다. 물수건 든 정아의 손이 자지를 닦고 불알을 하나씩 꼼꼼히 문지르는 동안, 어제저녁 매를 맞아 부은 항문이 움찔거렸다. 정아는 물수건을 항문에 대고 그 움직임을 손가락 끝으로 느껴 보았다. 호흡을 아래로 하는 신비한 생물을 만지는 것 같았다. 정규가 다정하게 물었다.

“오줌 싸면 무슨 벌 받아야 해?”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던 정아의 빛나는 눈이 올린의 얼굴을 향했다. 올린은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도,

“…허벅지 열 대 맞아야 돼.”

하고 대답했다. 아랫입술 비죽이는 표정과 고분고분한 대답이 너무나 이질적이라 정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이래?”

그가 물었다. 정규도 헛웃음을 웃으면서,

“넋 나가 있을 땐 반응도 없지만, 상태 좋을 땐 이래. 존나 웃기지.”

하고 대답해 주고는

“소파 위에 올라가서 무릎 꿇어.”

하고 명령했다. 올린은 정규가 손가락질한 곳으로 기어 올라가 무릎을 꿇을 때까지 한순간도 구시렁거림을 그치지 않았다.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무서운 소리가 들리니까 오줌이 저절로 나왔어,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하고 투덜대던 그는,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하는 정규의 물음에

“잘못했지. 잘못은 했는데, 한 번만 봐달라고. 매 안 맞으면 안 될까. …요?”

하고 심드렁하게 말대꾸해서 정아를 기어코 쓰러뜨렸다.

정아가 쓰러져 웃든 말든 정규는 한쪽 소매를 접어 올리며 엄한 얼굴을 했다.

“팔 뒤로 모아.”

올린은 그러나 꾸물거렸다. 예전의 올린이라면 분위기를 살피려는 시도 따위 하지 않고, 맞을 매에 대해 요령 부리는 법 없이 정자세로 딱 맞고 끝냈을 터다. 그러나 19번이 섞인 올린은 달랐다. 그는 웃는 사람이 말려 주길 기다리는 듯이 자꾸만 머뭇거리고 힐끔거리다가, 정규로부터

“손 말고 케인으로 맞을까?”

하는 협박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두 팔을 뒤로 돌려 맞잡았다.

커다란 손이 허공으로 치켜들리자, 올린의 시선도 따라 올라갔다. 손을 바라보던 겁먹은 눈이 질끈 감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짜악,

하고 살갗이 부딪는 아픈 소리가 울렸다.

“아그, 흐으윽….”

올린은 어깨를 웅크리고 상체를 숙였다. 예전 같으면 숨 들이켜는 소리조차 삼켰을 입술 사이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엄살이 섞인 소리에 정아는 도저히 웃음을 숨길 도리가 없어, 마음껏 웃으려고 올린의 시선이 닿지 않는 쪽으로 가서 섰다. 정규가 한숨을 쉬고,

“자세.”

하고 경고했지만 미친 올린은 어헝 어헝 응석 부리는 소리로 울기만 할 뿐 상체로 맞을 데를 감추듯 웅크린 자세를 바로 하지 못했다. 정규가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안아 주려는 듯이) 다가온 손이 머리채를 콱 잡아당겼다. 상체가 끌려 올라갔다. 단 한 대 맞은 것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드러났다. 원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정규를 바라본다.

손가락 모양까지 살아 있는 손자국이 빨갰다. 아프긴 할 것 같았으나 훨씬 아픈 매도 견딜 수 있는 몸이다. 엄살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건, 올린이 말 그대로 미친 탓이기도 있겠으나 정규가 무르게 대한 탓이 더 클 것이다. 정규가 과거 올린을 대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정아는 손바닥을 다시 한번 내리치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아아악- 흐윽….”

올린은 맞아 죽어 가는 개와 흡사한 소리를 내며 다시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쓸데없이 소리만 클 뿐 매질이 어찌나 지지부진하고 자세를 잡아 주는 주인이 물렁한지, 구경하는 사람은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정아는 웃었다.

정아는 올린을 향한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또 한 번 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을 모르니 속 깊은 데서 튀어 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정아로서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새콤한 것을 먹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기분과도 흡사한 감각은 싫지 않았다. 정아가 사는 별것 없는 세상에서, 이렇게 새로운 기분을 몇 번이나 느끼도록 해 주는 올린은 그 자체로 더없이 새로운 존재다.

도난당한 것을 찾으러 가기 전의 마음이 다르고 경매에 부쳐진 망가진 꼴을 보고 느꼈던 기분이 달랐다. 그리고 되찾아 와 정규에게 맡겨 두고 때때로 안부를 들으며 생긴 감정은 또 이전 것과 같다고 할 수 없었다. 자주 보지도 못하지만, 동생을 통해 듣고 있는 올린의 상태는 정말 재미있었다. 물건을 구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른 정비가 깨어나면 올린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고, 덩달아 미쳐 가는 막냇동생이 앞으론 어떤 식으로 올린을 대할지도 궁금했다. 정규야 이전과 비슷한 태도로 올린을 대하고 있다고 믿었으니 호기심이 일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올린이 하는 꼴을 보니 변덕을 부리는 것은 자신만이 아닌 듯싶었다. 정규 또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데서야 점잖지만 액받이를 상대할 땐 잔인스러운 기질을 발휘하여 통제하던 정규가 올린이 이렇게 흐트러지도록 용인하다니. 본인이 인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규도 자신처럼 치아코에게 흥미 혹은 어떤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

짜악, 세 번째 매질을 살펴보니 정규는 왼쪽과 오른쪽 허벅지를 번갈아 가며 때리고 있었다. 한 번의 매가 떨어질 때마다 올린은 여윈 무릎뼈를 서로 비벼 대며 엉엉 울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뒤로 모아 잡았던 팔을 풀고 제 눈물을 닦는 척 허벅지도 한 번 슬쩍 쓸었다. 얼씨구, 정아가 코웃음을 치는데 정규는 별말 않고 그런 방종조차 기다려 주었다.

짜악, 당연히 다음의 매질에는 두 손을 다 풀었다. 약은 꾀를 써서 간 보듯 한 손을 풀었을 때 혼나지 않았으니, 올린은 잔뜩 안심하고 두 손을 뻗어 정규의 힘줄 돋은 팔을 부여잡았다. 생각이 있었다면 팔을 뺄 수도 있을 텐데 정규는 그 붕대 감긴 연약한 두 손이 무거운 자물쇠라도 되는 듯이 붙잡혀 주었다. 올린은 주춤, 하고 멈춘 팔에다 눈물 젖은 뺨을 비벼 대며 헛소릴 했다.

“그만 때려, 어제도 맞았는데에….”

어제도 맞았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액받이로서의 지위와 특권이 모두 박탈된 처지였으나 올린은 액받이로 가문에 들어왔다. 매일 맞는 걸 디폴트로 생각해야 할 놈이 한다는 소리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라리 아프다는 호소였으면 이렇게 뒷골 땅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 황당한 건 정규의 반응이었다. 그는 물러 터진 통제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곧 올린의 말에 설득될 기세였다.

보다 못한 정아가 아직도 웃는 얼굴인 채 올린의 뒤에 다가와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상체를 꼭 껴안아 일으켰다.

“으응, 그랬어.”

응석을 받아 주는 듯한 말에 올린의 손이 정규의 팔로부터 떨어졌다. 한순간에 정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꼴이 된 올린이 훌쩍거리며 뒷머리를 보비작거렸다. 그러나 정아는 웃는 목소리로,

“그래도 맞을 매는 맞아야지.”

하며 올린의 귓바퀴를 입술로 살짝 물었다. 배뇨 실수가 있을 때마다 허벅지를 맞는다고 했는데, 그런 것치곤 다리 피부가 너무 고왔다. 자주 오줌을 싼다는 동생의 말에 따르면 올린은 허벅지에 성한 데가 없이 피멍을 달고 있어야 했다. 그런 것을 확인하는 장남의 눈에 떠밀리듯, 정규는 자신에게도 왠지 내키지 않는 이 체벌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 손을 들었다. 짜악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는 매에 올린이 우는소리를 하며 갓난애가 용쓰듯 몸을 뻗댔다. 두 팔을 한데 모아 누르고 조그만 턱을 감싼 정아의 손 위로,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양쪽 허벅지에 찍혔던 빨간 손자국의 경계가 흐려지고 전체적으로 붉게 부풀도록 이어진 매질에, 올린은

“이젠 안 할게!”

“잘못했어어.”

“아파, 아파아….”

하는 소리 사이에 힉, 힉, 하고 흐느껴가며 버둥거렸다. 뒤에서 꽉 껴안아 구속해 주는 느낌과 때리면서도 쓰다듬는 듯한 매질에 어리광이 폭발했다. 체벌이라기엔 너무 상냥한, 사용하기 전에 더 잘 느끼게 하기 위해 예열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매질이 끝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올린은 마치 엄청난 것을 참아 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정아의 어깨에다 이마를 문지르고 흐느껴 울었다.

정아가 정수리에다가 입술을 촉촉 맞춰 주고, 빨갛게 익은 허벅지를 문질러 주다가 엄지손가락 하나로 자지를 쓰다듬듯 비벼 주었다. 올린은 발갛게 고개를 든 좆이 눌리고 뭉개지자 금세 녹아내렸다. 쾌락에 약한 몸이 흘리는 비음을 무시하며 정아가 정규를 향해 물었다.

“오줌을 쌀 때마다 허벅지에 열 대?”

이전의 규칙들은 지금의 올린이 지키기 어렵다. 새로이 정한 규칙이 그것뿐이냐는 물음이었다.

“응, 그리고 음식을 훔쳐 먹어도 열 대.”

“두 가지구나… 자, 올린, 그만 울고. 일어나.”

정아가 올린을 안아 일으켰다. 올린은 아래가 저릿저릿한 느낌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좆에 딱밤을 때리려고 시늉하자 발딱 일어섰다. 정아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 거실 한쪽의 둥근 기둥 앞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서는 것도 순순했다.

“10분 반성해.”

“너무 아픈데 봐주면 안 돼?”

“안 돼.”

정규가 데리고 있을 때의 올린은 코너 타임을 지시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정아가 가만가만히 엉덩이 사이의 구멍을 만져 주며 지시하자 고분고분하게도, 두 손을 머리에 올리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미친 것을 저렇게 잘 다루는 까닭은 형도 미친 사람이기 때문일까, 정규는 정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생각을 하며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누구예요, 일부러 박았다는 놈. 못 잡았다며.”

“내 스토커. 내 얼굴 모를 때도 무섭게 굴었는데 얼굴 알려지고 나니 더 무섭게 굴잖아. 나는 죽인다고 덤비는 중국 놈들보다, 황해 공장에서 기다리던 남도 놈들보다도 이놈이 더 무서워.”

무섭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주제에 얼굴은 평화로웠다. 그가 정말 무서워서 그런 단어를 쓴다기보다는, 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감정 단어를 골라 쓰고 있는 것을 정규는 알았다. 이정의 얼굴이 알려지고 몇 달 동안 많은 일이 있긴 했다. 그 와중에도 미친 것이 보고 싶어 위험을 무릅쓰고 데리고 오게 했으니, 짧은 시간이나마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몇 시간 후에 연구소 들어가 봐야 한다며. 그렇게 세워 놓을 시간이 있어요?”

“귀엽잖아… 정환이는 좀 어때?”

그들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10분이 흘렀다. 내내 올린의 곁에 서서 손가락만으로 자지를 만져 주던 정아가 느긋한 걸음으로 냉장고에서 생수 몇 병을 꺼내 왔다. 정규가 손을 뻗자 하나를 던져 준 그는 안에서 하나를 더 꺼내 여섯 병을 채웠다. 거실 한쪽에 있는 긴 식탁 위에 여섯 병을 일렬로 늘어놓은 그는,

“치아코야, 수고했어. 이리 와.”

하고 올린을 불러서는, 쭈뼛거리며 다가온 올린을 잡아 식탁 위에 올렸다. 아랫도리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니트만 걸친 몸을 쪼그리고 앉히니, 어젯밤 맞은 상처로 부은 사타구니가 벌어져 몹시 아파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다리를 벌리고, 무릎이 바깥을 향하도록 발의 방향을 돌려 개구리처럼 앉혔다. 니트의 아랫부분을 동동 걷어 올려 젖꼭지가 보이도록 한 후에 옷자락을 올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목마르지?”

생수병 뚜껑을 따며 하는 말은 상냥한 만큼이나 살벌했다. 올린은 입가에 들이대어지는 생수병에 입을 벌리면서 옆에 늘어선 여섯 병의 생수를 힐끔거렸다. 흘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먹이기 시작한 정아가,

“지금은 세 병만 마실 건데,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한 병 더 마시는 거야.”

하는 소리를 했다. 반말로 뭐라고 말대답을 하려던 올린은 입술에 붙은 생수병을 밀어내지 못해 아무 말도 못 하고 꼴딱꼴딱 받아 마셨다. 처음 반병을 비우기까지는 물이 쉽게 넘어갔지만, 그 이상은 목에 넘길 때부터 속도가 느려졌다. 괴롭게 한 병을 다 마신 올린이, 입술에서 빈 병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냉큼 지껄였다.

“목 안 말라.”

“알아.”

“그만 마실래.”

“정환이 불러야 해?”

“아니야. 괜찮아.”

그리고는 순순히 입술을 벌린다. 정규가 덩달아 입을 벌리고, 올린이 두 병째의 생수병을 비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올린은 괴로워하며 아주 느리게 두 번째를 비우고 나서는 접힌 채 벌어진 다리를 움찔거리며,

“배 아파서 진짜 못 마셔….”

하고 젖은 소리를 했다. 세 번째의 생수병을 먹이면서는 정아가 올린의 아랫배를 슬슬 문질러 주었다. 마른 배에 물이 가득 차 부풀어 오른 게 느껴졌다. 자세 덕에 배가 눌린 올린은 세 번째 병을 비울 때부터 벌써,

“오줌 마려워….”

하고 보채기 시작했다. 정아가 웃었다.

“알아. 참아. 오줌 싸면 무슨 벌 받아.”

올린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정아를 올려다보고, 활짝 벌려 준 허벅지 한쪽을 웅크려 자지를 누르려 애쓰며 말했다.

“허벅지, 열 대, 맞아야 해….”

내리감은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정규에게 맞은 매는 매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을 이미 알았다. 정아가 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판을 깐 이유는 자신의 허벅지를 매질하여 몹시 아픈 꼴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다. 무서울 때 그렇듯 속의 허기가 격렬했다. 아침에 정규와 식사를 하고 나왔는데도 그랬다.

자지가 반쯤 서 있었기 때문에 더 참기 힘들었다. 끙끙대는 올린을 그대로 둔 정아는 서재로 걸어 들어가더니, 나올 때는 길고 질긴 케인을 한 손에 들고 왔다. 그것을 바라보던 정규가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걔 그거 못 견뎌.”

정아가 케인의 양쪽 끝을 잡아 둥글게 휘어 보며 말했다.

“내가 견디게 도와줄 거야.”

올린의 눈은 솔직한 공포를 띤 채 정아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움츠러든 한쪽 허벅지를 확, 잡아 벌리자 하학, 하고 위기에서 비롯한 신음이 터졌다. 다시 처음처럼 활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의 자지가 꿈틀거렸다. 아랫배에 실처럼 가느다랗게, 애달픈 기분이 마구 기었다. 케인 끝이 자지의 소대 부분을 찌르듯 긁고 간지럽혔다. 올린이 어흑 어흑 소리를 내고 발발 떨면서 빌었다.

“쉬, 쉬 하고 싶어, 진짜.”

“알아.”

올린은 정규 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 한없이 무심했다. 아예 편안히 자리를 잡고 형이 보던 책을 뒤적이는 그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다정하게 굴던 사람의 외면이 더 서러워 올린은

“응, 윽.”

하고 애 같은 소리로 울었지만 그렇다고 요의가 가라앉을 리 없었다. 이제 그는 눈을 쥐어짜듯 꼭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며 허리를 마구 비틀고 있었다. 입에서는 미친 사람다운 무의미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 끝에 올린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나와아….”

케인 끝으로 자지를 쓰다듬던 정아가 별스럽지 않다는 말투로, 한치도 다르지 않은 소리를 또 했다.

“알아. 오줌 싸면 무슨 벌이야.”

“허, 벅지, 열, 히익! 대….”

케인 끝이 요도구를 쿡, 찌르자 말하다 말고 숨을 들이켜며 올린은 대답했다. 실제 시간은 십오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까지는 영원처럼 길었다.

이제 됐다 싶을 때 정아는 식탁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의자를 빼 주며 화장실에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올린은 벌벌 떨며 두 손을 식탁에 집고, 벼락같은 요의를 참으며 식탁 의자에 한 발을 디딘 다음 신중하게 그다음 발을 디뎠다. 식탁 의자의 등받이를 붙잡은 채 잠시 파도처럼 닥쳐오는 기분을 견디다가, 바닥을 향해 발을 뻗는 순간 정아의 부드러운 손이 허벅지 뒤를 한 번 살짝 긁었을 뿐이었다.

“아! 아! 아응, 응……! 흐어, 어어어엉….”

그 순간 찌릿찌릿하도록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여태 배 속에 담아 두듯 참았던 것이 조르르르 흘렀다. 눈물이 큰 방울로 함께 굴러떨어졌다.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려서던 찰나 싸는 바람에 노란 액체가 높은 데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저런. 우리 치아코 오줌 쌌네.”

정아의 목소리가 노래하는 것 같았다. 길고 길게 방뇨하고 나서, 파렴치한을 원망스레 돌아보는 눈에 눈물이 큼지막하게 어렸다가 뚝 떨어졌다.

정아는 소변에 젖었다는 핑계로 올린을 씻겨 주며, 자신의 옷이 다 젖도록 요란스럽게 희롱했다. 올린은 시키는 대로 샤워 부스에 들어가 벽을 짚고 섰을 뿐이었다. 뒤에서 뽀짝뽀짝 해면 스펀지에 거품을 내는 소리가 날 때까지만 해도 곧 맞아야 할 매를 생각하느라 닥쳐온 희롱의 시간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품 가득한 커다란 스펀지를 쥔 손이 자신의 자지를 부드럽게 덮어 잡았을 때는 파드닥 놀라 그 팔에 매달리듯 했다.

“그냥 씻겨 주는 거야.”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졌다. 부드러운 거품에 덮인 자지를 조이고 느릿느릿 위아래로 쓸면서 하는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이딴 게, 씻기는 거라니, 아닌 거, 다 알아,”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에 정아는 웃을 뿐 손을 늦춰 주지 않았다. 위에 입었던 니트가 엉망으로 젖은 채, 올린은 차가운 벽에 주먹 쥔 손을 대고 그 위로 이마를 기댔다. 강압하는 대로 뒤로 당겨진 엉덩이 사이를, 두툼하고 단단한 막대기처럼 발기한 자지가 비비고 찔렀다. 거기에 매를 맞아 피멍이 들었는데도 문질러지니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쾌락은 자지를 애무하는 미끈거리는 손길이었다.

구멍은 항상 자지보다 가치로웠다. 물론 도련님들이 올린을 학대하려는 의도로 자지를 주무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마치 자지가 어딘가 좁고도 촉촉한 곳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환락을 주는 애무는 처음이었다. 커다랗고 섬세한 손은 올린의 자지가 아슬아슬하게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딱 고통과 쾌락 사이의 느낌만 들도록 잡은 채 용두질했다. 손목이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이을 때마다, 새끼손가락과 손날은 올린의 자지 밑동을 쥔 채 아랫배 언저리에 닿았다가 도로 떨어지곤 했다. 귀두의 동그랗고 단정하게 솟은 부분을 엄지와 검지가 만든 조그만 동그라미가 조일 때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샜다.

“흐윽, 으윽….”

오줌을 쌀 때 울어 버렸던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신음을 내다가도 삼켰다. 쓸데없이 크고 층고가 높은 욕실에서는 작은 신음마저 크게 울렸다. 습한 공간에 자신의 목소리가 울리는 게 소름 끼쳐 참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들었지만 정아는 다르게 판단한 것 같았다.

“올린. 올린아.”

그는 다정하게 부르고 나서,

“네 마음 알아.”

하며 귓속으로 입술과 혀를 몽땅 밀어 넣을 태세로 더욱 가까이 다가들었다.

“뭘 알아, 네가 뭘 알아.”

앞으로는 비누칠한 스펀지의 공격과 뒤로는 굵은 막대 같은 자지의 공격을 버티며 반항적으로 물었다. 여차하면 개소리라는 욕 정도는 해 줄 생각이었건만, 달콤한 진퇴양난 속에서 정아의 말들은 고통받는 가슴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올린이 저지르는 이 모든 미친 짓들의 근간이 고독한 상처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와중에 생기는 부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욕실이었건만 바로 지척에 누가 있더라도 들릴 수 없을 정도로 내밀한 목소리로, 그는 올린의 귀에 혀를 들였다 뺐다 하며 속살거렸다.

정아는 소위 말하는 19번, 실제로는 죽어 버린 그 불쌍한 애와 같을 리 없는 올린만의 19번이 올린을 질투하면서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친구인 것처럼 말했다. 올린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던, 몹시 닮은 처지인 동시에 올린을 위해 죽어 준 자로 여기는 듯 애도했다. 올린이 살아 있던 19번과 교류한 것이 아주 제한된 상황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천지사방 가진 것 없는 올린에게는 그것조차 커다란 의미였다는 것을 아는 듯 위로했다. 19번이 자신을 미워해서 제 육신을 훔치려 한다는 왜곡된 망상 속에는, 자신보다 강해 보이던 19번의 뒤에 숨고 싶어 하는 심정이 깃들여 있을 수도 있다고 헤아리는 것 같았다.

그 모든 생각은 짧고도 분명하게, 올린이 아니라 19번이라는 인격에게 말하는 형태로 올린의 귀에 전달되었다. 네 덕에 올린이 사는 거야, 내가 그것을 아는데 널 쫓아내려 할 리가 있겠니, 올린, 19번, 치아코야, 네 이름이 무어든 간에 나는 괜찮아, 하지만 너희들이 흙바닥을 기는 심정으로라도 살아 있으려면 내가 요구하는 규칙들은 지켜야 한다.

그 규칙들은 예전과는 다를 거야, 엄하고 무서울지도 몰라, 하지만 올린, 19번, 치아코, 내가 귀여워하는 애기야. 난 네가 견딜 수 없는 시련은 주지 않아. 내가 마음이 변해 차라리 널 폐기할지언정, 네가 버틸 수 없는 고통은 절대 주지 않아.

“정말, 정말이야?”

보통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무서울 이야기가 미친 자에게는 한없이 마음 놓이는 협박이었다. 그는 이전과 같고도 다른 방식으로 군림을 연장하려는 남자가 제 마음을 읽어 주었다는 기쁨에 도취하였고,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을 주겠다는 장담에 안심했다. 부드럽되 견디기 힘들 정도의 쾌락을 선사하며 자지를 애무하는 손길에 펄떡이면서 미친 올린은 울며불며 마치 요구처럼 들리는 구걸을 쏟아 냈다.

“그럼 굶기지는 마, 얜 굶는 게 너무 무섭대, 그때 얘가 굶주리지만 않았더라도 그놈들 머리를 다 쪼갤 수 있었단 말이야-.”

입양이라는 방식으로 끌려간 자리에서부터 배불리 먹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무자비한 손을 거쳐 이 저택에 들어오기까지는 마르기는 했으나 단단한 체형을 유지할 정도로는 얻어먹고 살았었다. 닷새에 하루꼴로 금식을 강요받고, 하루를 살아 내는데 턱없이 부족한 정도로 적은 음식만을 제공 받기 시작한 것은 이 저택에 들어온 다음부터의 일이었다. 평생토록 감히, 자유를 꿈꾸지는 않았다. 대신 충분한 잠을, 매질 없는 다스림을, 아프지 않은 강간을, 그리고 굶주림 없는 하루를 갈망해 왔으나 저택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가문의 전통이라는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납득했었다.

그러나 제힘으로 살아나야 했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 건성의 납득은 소용없었다. 온갖 폭력과 강압 속에서도 나름의 용기로 떨쳐 일어나 손도끼를 휘둘렀으나 그것이 자신을 가둔 자의 살갗 가장 바깥쪽에 경미한 상처만을 남기는 수준에 그친 것을 본 순간, 이미 광기가 시작되던 올린의 마음에는 분노에 가까운 원망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그러한 처지에 이르게 한 수많은 단계의 학대에 대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덜 근본적이고 더 원초적이었다. 왜, 비록 속박되어 살았으나 나의 발이 빠르고 손이 단단하고 힘이 약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던 내가 그렇게밖에 저항 못 했을까. 올린은 미쳐 가는 머리로 그것이 자신이 오랫동안 굶주렸던 탓이라고 결론 내렸다.

홀로 버려져 찾아오지 않는 도련님들에 대한 그리움이 허함으로 화했을 수도 있었겠으나, 중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은 비록 학대당하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먹기만 했으면 이토록 쇠약해지지 않았을 터였다. 뭐가 되었든 먹어야 한다, 먹어서 자신을 어떤 중대한 존재들로부터 분리하여 파괴하려는 손을 도끼로 찍어야 한다는 강박이 다른 공포보다 훨씬 크게 올린을 사로잡았다.

절제와 순종으로서의 올린만을 알고 있던 정아가 올린을 올린이 아니라 치아코, 탐식하다 지옥에 떨어진 가여운 영혼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기이한 식탐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그때부터였다. 올린은 병원에서 깨어난 바로 그날부터, 사샤의 선실에 놓인 케이크를 탐했듯이, 제 것 아닌 음식에 눈독 들이기 시작했었다.

역설적이게도 광인 속내의 알고리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정아라서, 그는 동정이나 공감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음에도 그 비틀린 논리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딱해했다.

“그래.”

정아는 응석처럼 들리나 그보다 더 진심일 수 없는 말에, 함께 진지하게 대답했다.

“굶기지 않으마.”

어허헝, 울음과 동시에 올린은 사정했다. 곧고 건강한 자지가 사정할 때의 힘찬 꿈틀거림이 손바닥을 때렸다. 제 주인의 생김새처럼 단정하고 깨끗한 자지는 몇 번이나 울컥, 울컥, 정액을 뿜어내고 나서야 조금씩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잡고 있던 정아의 손안에 그것은 늘어진다든가 처진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떤 작은 짐승이 평안히 잠드는 것 같은 감각을 선물했다. 가라앉는 순간조차 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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