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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행유예 (31/65)

# 집행유예

초주검이 되어, 정비가 돌아왔다. 죽었다던 액받이도 함께였다. 정규는 형이 총을 맞았다는 이야기에 사냥 시즌도 아닌데 어디에서 뭘 하고 다녔길래, 하고 피식 웃었었다. 액받이를 구하러 용병놀이를 하다가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총을 맞은 것으로 사람의 내장과 척추가 다 짓이겨질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렇게 되고도 살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스무 시간 넘는 수술이 여러 번 이어졌다. 그 과정을 견딜 수 있던 것도 정비가 젊고 건강한 덕이었다. 일단 한숨을 돌렸다는 의사의 말에 대체 그렇다면 내 아들은 왜 깨어나지 않느냐고, 관장님이 물었다. 정규는 제 형제들의 어머니인 관장님이 우아한 말투로 의사를 잡는 것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봤었다. 노년의 나이에 가까운 관장님은 용모로는 아들들과 동년배라고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액받이 또한 같은 병원에 입원시킨 것은 큰형의 만용이었다. 정규는 관장님이 액받이의 병실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초조하게 그 뒤를 따랐다.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액받이에게 다가가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빼냈다. 바늘이 꺾일 정도로 거친 손질에도 혼수상태로 누운 몸은 미동도 없었다.

“저기 누운 시신은 영안실로, 이 침대는 비우도록 해요.”

가벼운 말투의 지시에 직원들이 움직이는 동안 정규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살아 있는 액받이를 시신이라고 칭하는 까닭은 명확했다.

“이건 폐기해야 하니까요.”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곁에 선 정규를 향한 통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될 말이다. 그는 액받이가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애정으로 용기를 냈다.

“관장님,”

“정규 씨.”

그러나 정규가 관장님을 부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정규를 불렀다. 형제들의 어머니, 심상의 안주인, 회장님의 본처인 관장님은 정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규에게 깍듯한 존칭을 붙였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애가 듣기에도 아주 굵고 명확한 선이 느껴지는 동시에, 서자로서의 지위를 약속하는 듯한 확실한 태도였다.

“네. 관장님. 말씀하십시오.”

정규는 그녀에게 죄인이었다. 회장님의 씨앗을 받아 자신을 낳았을 뿐, 첩도 무엇도 아니었던 자신의 어머니가 어린 정규를 의탁한 건 회장님이 아니라 관장님이었다. 어머니는 정규가 보는 앞에서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그대로 사라졌다. 관장님은 정규를 회장님의 아들로 입적시키면서 단 한 번도 부당한 대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아들들과 다르게 깍듯하게 존대하여 선을 그을 뿐이다.

그러한 대접은 송구스럽고 감사한 동시에 거대한 부채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관장님이 마음만 달리 먹었다면 자신이 지금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을 뻔히 알았다. 정규는 관장의 말을 거역한 적도 없었고, 서로를 대하듯 자신에게도 똑같이 대하는 형제들에게 불충한 적도 없었으며, 서자에게 허용되는 이상의 과한 욕심을 부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가끔 관장은 정규에게, 친아들들에게는 결코 요구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곤 했다.

“이 사장이, 우리 정비가 왜 저런 짓을 벌였는지 아는 바가 있나요?”

자신이 아는 것은 관장님도 아는 이야기뿐이었다. 올린이 살아 있었다. 그것을 안 정비 형은 용병을 고용해서 경매가 진행되던 선박을 습격했다. 러시아 마약상과 경매를 주최한 브로커 집단, 그리고 정비 형이 고용한 용병 간의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고 배가 침몰하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큰형이 거기 있었던 덕이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이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거기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 액받이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되, 오롯이 물건으로서만 보던 그가 이 물건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고개를 젓자, 관장님이 허공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정비가, 미쳤나 보네요.”

그렇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 정규는 맞습니다 관장님, 하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관장님이 모르는 사실도 있었다. 정아에 대한 것이었다.

정아 형 또한 정비와 같은 시간에 액받이를 구하기 위해 선박에 올랐다. 정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소수만 초청하여 진행되는 경매에 참석하는 술수를 부렸다. 그리고 그는 올린에게 입찰하는 대신 그날 낙찰받은 사람에게 접근했다.

정아 형이 이정, 이라는 이름의 마약 제조업자로 알려져 있는 것은 형제들도 몰랐었다. 희귀한 약을 만드느라 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 재벌가의 장남인데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점은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두 번째 이름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얼굴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낙찰품을 쉽게 넘겨받을 수 있을 만큼 그 이름이 가치 있다는 것도, 본인이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장님이 묻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 대답을 해야 했다. 잠시 말을 고르는데, 정아 형이 들어왔다. 그는 살아 있는 액받이의 머리를 흰 천으로 덮으려는 직원들을 향해 나가라고 명령한 뒤 관장님을 바라보았다. 아, 그는 정말로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 두 모자가 미소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아름답고 강한 뱀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상대를 삼킬 수 있을지 각을 재려 대가리를 쳐든 모습을 연상케 했다.

“어머니.”

젊은 수컷 뱀이 말하는 동안, 늙은 암컷 뱀은 들었다. 정규는 잠시 그 곁을 지키고 섰다가, 그들을 병실에 둔 채 걸어 나왔다. 큰형이 모든 일을 이치에 합당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가 믿었던 것처럼 정아는 회장님과 관장님을 설득하여 당분간 올린의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폐기되고도 남을 폐물이 저택을 돌아다니며 광증을 보이는데도 누구도 폐기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한시적인 조치일 뿐, 올린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관장님은 정규에게 때때로 연락했다. 액받이가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폐기해야죠, 그는 점잖게 지시했다. 잘 지켜봐 주세요, 정규 씨. 형제들을 생각하면 조만간 폐기해야 하지 않겠어요. 건조하게 보이지만 그 메시지는 감히 서자인 주제에 적자와 모든 것을 똑같이 누리는 정규가 지저분한 것에 대한 청소를 마다할 리 없다는 신뢰가 담긴 명령이었다.

맞는 말이다. 액받이가 부정탔고 그로 인해 오히려 가문에 횡액을 몰고 왔으므로, 폐기하는 게 상책이다. 관장님은 피 섞이지 않은 정규에게 쉬워 보이되 꺼림칙한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세 아들들이 올린에게 빠져 있음을 알기 때문인지도, 어쩌면 아무리 액받이의 피라고는 하나 손에 피 묻히는 일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를 아는 까닭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정규는 올린을 폐기하자는 말도, 그를 제 손으로 폐기하는 짓도 차마 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올린이 있는 곳으로 뛰어든 정비 형이 저 애를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까닭을, 어둠의 세계에서 오래도록 숨겨 왔던 자신의 정체를 올린 하나를 빼오기 위해 드러내 버린 정아 형의 생각을, 죽은 애가 살아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시체 같던 눈에 생기가 돌던 정환의 마음을 생각하면, 저놈, 아무리 효용이 없어도, 도무지 없애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안다. 소용없어진 액받이는, 언젠가는 죽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미치광이가 된 올린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한편, 언제 어떤 방식으로 폐기해야 할지 늘 날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더럽고 괴롭고 징그러운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적자인 형제들이 아니라 서자인 정규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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