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허기 (30/65)

# 허기

새벽에 귀가한 정규는 바로 방으로 올라가려다 고용인 하나와 마주쳤다.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낯선 얼굴의 젊은 여자는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달아나다 이 댁 셋째 도련님과 마주하고는

“엄마야!”

하는 소릴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선배 고용인들로부터 도련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 실제로 뵙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네 분 모두 고용인들을 상대로는 점잖은 편이지만, 이 댁 액받이에게는 몹시 잔인하게 대하신다고 들었다. 고용인들은 액받이가 정신을 놓은 이유를, 도련님께 닥칠 액을 막느라 너무 고생을 한 나머지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원래가 학대를 잘 견디도록 타고난 물건이 정신을 놓고 미칠 지경이 되도록 커다란 횡액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런 사유로 사용하게 될 수 없게 된 물건을 폐기하지 않고 곁에 두시는 도련님들마저, 두렵고 무서운 분들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한밤중 어두운 복도에서 마주친 도련님이 두려워 주저앉은 채 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바닥을 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주의한 선배 고용인 하나가 입을 놀렸었다.

“한 달 정도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이미 저 상태였어. 집 안에서도 툭하면 매달아 놓고 채찍질에, 굶기고 가둬 두기 일쑤였으니, 한 달 동안 어디에서 어떤 고문을 하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잖아.”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젊은 고용인은 주방 뒤쪽의 좁은 작업대에 선 채 식재료 따위를 손질하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들이 선 곳에서는 저택 뒤편의 수영장이 보였는데, 마침 액받이는 그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두 발을 물에 담근 채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이 늦여름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나른하고도 슬퍼 보이는 반짝임이었다. 눈 아래가 빨갛게 닳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눈물 자국이다. 서러운 일이 딱히 없더라도 온종일 눈물을 흘리는 탓에 피부가 해지고 문드러진 상처다.

햇살이 따갑게 얼굴을 비추는 게 성가실 텐데도 그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똑같은 데 앉아 있었다. 두어 걸음만 옆으로 가 앉으면 햇빛 쬐지 않고도 물장난 칠 수 있을 텐데, 고용인은 생각했었다.

“폐기하지 않으시는 게 신기해. 식탐 부리지, 오줌 싸지, 그렇게 모자란 애처럼 굴다가 가끔 말문 터지면 귀신 들린 것처럼 도련님들께 반말을 하지 않나.”

정신이 나간 후에 원래 입었던 복잡하고 아름다운 복식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여 큼지막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있게 되었다가, 그나마도 자꾸 귀신을 보고 소변을 지리는 바람에 아랫도리는 발가벗은 채였다. 원피스처럼 흘러내리는 흰색 티셔츠 밑에 늘씬한 다리가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은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온몸에 멍들고 찢긴 상처가 많은 데도 그랬다.

“하긴, 저 꼴을 해서도 저 지경으로 예쁘니 아깝긴 하지.”

한숨 쉬는 것 같은 선배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작게 웃고 다시 고개를 드니 그 자리엔 액받이가 없었다. 내내 훔쳐보고 있던 물건이 사라진 것에 순간 당황하여 눈을 돌리는데, 이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곳에 서 있던 다른 고용인들이 뛰어나와 수영장으로 달려들었다.

스스로 뛰어든 것인지, 아니면 사고로 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장 입은 몸으로 수영장에서 액받이를 끌어내는 저 사람들도 참 고생이 많겠다고 선배가 중얼거렸다. 끌려 나오는 액받이의 모습을 보니 두 손이 등 뒤로 돌려 서로 묶인 상태였다. 손 가운데 원래부터 있던 뚫린 구멍 두 개를 스카프 따위의 천으로 함께 꿰어 매듭지어 두었다.

온통 젖은 채 반쯤 정신을 잃어 끌려 나왔는데도 액받이의 손을 풀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구속은 그대로 두었으나 다루는 손길은 제법 소중한 것을 다루듯 하는 것이 모순적이었다. 그들은 힘빠져 사지를 덜렁거리는 몸을 조심스레 옮기고 모로 눕힌 다음, 타월로 꼼꼼히 감쌌다. 고용인은 수영장 저 반대편에 있는 액받이의 얼굴을 창문 안에서 쳐다보다가 문득, 그와 자신의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람 모양을 한 물건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자니 징그러운 생각이 들어야 마땅할 텐데 어쩐지 좀 다른 기분이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기분을 잊으려 그는 작업대 위의 손을 더욱 재게 놀렸었다.

“무슨 일이에요.”

늦은 귀가에 별스러운 고용인의 모습을 보고 좀 짜증이 난 듯한 도련님의 물음에, 낮의 일을 회상하던 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방을 같이 쓰는 선배 고용인의 심부름으로 주방에 내려갔다가 못 볼 꼴을 보고 달아나던 참이었다.

밤에 본 액받이의 모습은 달랐다. 곱지도 예쁘지도 않았다. 열린 냉장고의 차가운 조명 아래 그는 짐승처럼 무언가를 뜯어먹고 있었다. 두 손은 여전히 묶이고 머리는 산발인 채 바닥에 엎드려 포식하는 모습은 괴이했다. 이제 막 사냥에 성공한 날짐승이 남의 시체에 코를 박은 것처럼 열정적이었고, 바로 다음 순간 아사할 처지인 양 절박했다. 깜짝 놀라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자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액받이가 한순간 먹는 것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었다. 입가와 흰 티셔츠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시선을 교환하는 짧은 순간, 등줄기의 털이 오소소 솟았다.

달아나다 하필 마주친 셋째 도련님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감히 그 손을 잡아도 될까 고민하면서도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티비를 통해서만 보던 잘생긴 배우가 자신을 일으켜 주었다는 사실은 지금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고용주가 희미하게 짜증이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똑바로 사실을 고해야 했다.

“그, 그게,”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해 더듬거렸다. 바른대로 고하면 그렇지 않아도 가여운 신세인 액받이가 경을 칠 것 같은 예감이 그의 혀를 묶었다. 그러나 고용주는 딱히 쓸 만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그가 방금 달려 나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메인 조리실에서 새 나오는 냉장고 불빛이 여기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아 버린 표정이었다. 착잡한 얼굴로 주방을 향하는 셋째 도령을, 고용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 떨면서 따라갔다.

복도를 걸어 식당을 지났다. 식당을 걸어 고용인들이 출입하는 좁은 문을 지나 여러 개의 대형 냉동고가 소음을 울고 있는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깨끗이 정리된 메인 조리실 한구석에 냉장고 하나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쏟아져 나오는 차가운 빛 아래, 하얀 티셔츠 차림의 여윈 몸이 드러났다.

그는 열중하고 있었다. 허리 뒤로 모여 묶인 손 때문에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개처럼 엎드린 모습이었다. 커다란 통 안에 들어가려는 듯 고개를 처박고 무언가를 찢고 씹고 삼키는 중이었다. 오래 굶은 개가 젖은 사료를 먹는 것처럼 찹찹거리는 원시적인 소리, 커다란 것을 억지로 삼키느라 식도가 학대받는 꾸울꺽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도련님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한숨을 쉬고는,

“…아가.”

하고 불렀다. 그 목소리가 다정하고 호칭이 꺼림칙하여 고용인은 흠칫 놀랐다. 밤에 혼자 자지 못하게 된 액받이를, 셋째 도련님이 기저귀를 채워 품에 안고 얼러 재운다고 듣긴 했었다. 그래서 아기라고 부르시는 걸까.

“아가, 올린. 불 켠다.”

한 번 더 부른 도련님이 고용인을 향해 눈짓했으므로, 그는 서둘러 입구 쪽의 스위치를 올려 공간을 밝혔다. 도련님의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골몰하던 액받이가 파특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이 반질반질한 광기로 빛났다. 그는 입에 물었던 것을 후루룩 빨아 당겨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도련님 뒤에 숨듯이 서 있던 고용인은 그제서야, 아까 자신이 냉장고 불빛을 통해 본 시뻘건 게 김칫국물인 것을 알았다. 액받이가 고개를 묻고 있던 것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가 아니라, 김치를 포기째 넣어 두었던 김치통이었다. 아까 자신은 액받이가 무언가 산 것을 사냥하여 파먹느라 입에 피를 묻히고 있는 줄로만 생각했었다. 순간 맥이 풀렸으나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쿵쾅거렸다.

액받이는 하던 짓을 멈추고 펄떡거리며 일어섰다. 서두르다가 열린 냉장고 문에 한 번 머리를, 벽에 한 번 등을 쾅쾅 박고 나서도 아프지도 않은지 달아나려 들었다. 그가 선 곳은 막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면 철제 테이블 사이를 지나 셋째 도령과 고용인이 선 곳을 지나쳐야 했다. 번들거리는 눈이 재빠르게 퇴로를 살폈다.

“아가, 아니야.”

도련님이 침착하게 말했지만 액받이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이 등 뒤로 모아 묶인 것 같지 않게 재바른 움직임으로 고용인이 선 곳으로 뛰다가, 한순간에 테이블을 구르듯 넘어 벽 쪽의 좁은 통로로 향했다. 손도 못 쓰는데 움직임은 날렵했다. 대롱거리며 매달렸던 조리 도구들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재빨리 방향을 바꾼 도련님이 손을 뻗었지만, 뒤에서 잡아챘다가 넘어뜨릴 것을 걱정하는 것인지 함부로 그러쥐지 않았다. 뻗은 손가락 사이로 액받이의 하얀 옷자락이 스쳤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리실에서 빠져나간 올린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온 탓에 시야가 흐렸다. 열두 명은 앉을 수 있는 식탁 옆을 지나 달아나면서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잘 정돈된 의자를 흐트러뜨렸다. 그러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복도로 헐레벌떡 도망하는 뒤를 셋째 도령이 걸어서 따라갔다.

고용인은 그 소동에 동참하는 대신, 액받이가 코를 박고 먹던 김치통을 정리하기 위해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썰리지도 않아 포기째 담긴 김치를 대체 어떻게 먹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처박고 요란스럽게 먹은 것치고 얼마 배 속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 같은 김치통을 들어 조리대 위에 올렸다. 위엣것만 걷어 내고 아래에 담긴 것을 갈무리하려다가 고용인은 문득 처음에 홀로 마주쳤던, 입가에 붉은 게 잔뜩 묻었던 액받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만나 무섭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는 그러면서도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셋째 도령은 한숨을 쉬며 걸었다. 둘째 형은 몇 달째 사경을 헤매고, 첫째 형은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데다, 정환은 기억 잃은 올린을 때려 죽일 작정인 듯 매질이니 졸지에 애보개 노릇이 그의 독차지다. 미친 것이 퇴행하여 어린아이 짓을 하는 것은 때로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상상하지 못한 짓을 하는 것까지 용납하고 어르자니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린.”

그는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나지막이 가여운 이름을 불렀다. 나름대로 숨을 자리를 찾은 듯 맨발이 대리석을 딛는 찰박찰박 소리는 이제 나지 않았다. 1층에서 머무는 고용인 몇이 나왔지만, 소란 부리지 말라는 손짓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러났다. 고요한 한밤의 저택에 올린이 숨을 곳은 많았지만, 그가 찾지 못할 곳은 없었다. 이곳이 그의 집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올린은 어두운 서재에 숨어 있었다. 불을 켜자, 들통난 걸 알고는 구석을 파고드는 꼴에 정규는 한숨을 쉬었다. 굶주린 들개처럼 먹을 것을 탐할 때와는 달리, 그 결과로 혼이 날 땐 가벼운 야단에도 죽는시늉을 한다. 귀신 들린 것처럼 살똥스러운 목소리로 되도 않는 말들을 지껄일 때는 정말 귀엽지만, 겁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주제에 잘못했어요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끙끙거림은 짜증스럽기도 하다.

“아가, 식탐 부리면 무슨 벌 받아야 해.”

미친 것의 정신을 돌려놓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양식 있게 행동하게 할 수 있도록 정해 둔 몇 개의 규칙이 있다. 짐승을 길들일 때처럼 단순화한 규칙은 미친 머리에도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올린은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미친 논리로 완성되어 마음속에 심긴 허기가 먹을 것을 끊임없이 훔치고 입에 처넣도록 했으므로 올린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아는 그런 올린을 탐식하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에 비유해 치아코라고 놀려 대기만 했고, 정환은 흉한 꼴에 대해 화풀이하듯 고문 같은 매질로 겁박했다. 셋 중 그나마 나은 정규조차 그저 규율을 정해 다스릴 뿐 광기에 물들도록 상처 입은 정신을 어루만져 주지는 않았다.

음식을 훔쳐 먹었을 때 정규가 주는 벌칙은 정해져 있었다. 먹은 걸 강제로 토하게 하고, 정해진 용량의 약으로 관장을 시킨 다음, 꿇어앉혀 허벅지 앞쪽에 매를 친다. 요즈음의 올린은 도무지 자세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므로 대개 꽁꽁 묶여 맞았다. 마구잡이로 매질하는 정환과 달리 정규는 미친 것을 길들이느라 정해 준 규칙에 따라 정한 만큼의 벌만 주고는 안아 재운다. 그러나 받아야 할 벌을 덜어 준 적도 없었다.

피곤한 정규는 벌벌 떨 뿐, 잘못을 비는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올린을 안았다. 자신의 옷에 오줌을 지리기 전에, 뒤에서 대기하던 고용인에게 서둘러 떠넘겼다. 정해진 벌을 주고, 깨끗이 씻긴 다음 자신의 방으로 올려 보내라는 명령을 받은 고용인은 뒤늦게 제 죄를 깨달아 빳빳이 굳은 올린을 데리고 서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본 정규도 방으로 향했다. 올린을 벌주는 일조차 고용인에게 지시할 만큼 피곤한 하루였다. 올라가서 목욕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정규의 걸음이 무거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