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선상전투 (29/65)

# 선상전투

낙찰된 올린은 머리부터 하얀 천이 씌워졌다. 서두르는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긴 복도를 여러 번 돌아 이동한 곳은 올린이 내내 갇혀 있던 곳의 스무 배는 될 법한 넓은 선실이었다. 총 든 남자들이 지키는 방 안에 들어서서야 시야를 가렸던 천이 벗겨졌다.

조금 전에 있었던 경매가 꿈같았다. 이곳은 그곳과 달리 공기가 부드러웠다. 올린은 맥없이 웃으며 그저 서 있었다. 흐린 눈에 자신의 구매자가 비쳤다. 벗은 상체와 머리카락 없는 머리통에 문신이 많은 장년의 남자였다. 그는 둥근 침대에 반쯤 드러누운 채 올린과 올린을 데리고 온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 띄워진 표정이 하도 부드럽고 인자하여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그가 손짓했으므로, 올린은 그에게 걸어갔다. 그의 곁에 함께 누웠던 미청년이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와 무릎걸음으로 사라졌다. 미청년은 기어가며 올린을 곁눈질했고, 올린은 걸어가면서 침댓가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속이 허했다. 배가 고팠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와 올린을 데려온 수염 난 남자가 무언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올린은 케이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러시아어는 약에 취한 올린에게 노래 같았다. 그러니까, 일테면, 케이크, 맛 좋은 케이크, 먹으면 어떤 맛일까, 맛 좋은 케이크, 같은.

올린의 시선을 읽은 구매자는 친절하게 웃었다. 그를 따라 수염 남자와 총 든 남자들이 함께 웃었다. 그는 케이크를 한 조각 덜어 내어 올린에게 권했다. 올린은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받아 들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먹어, 구매자의 낯선 언어가 올린에겐 들렸다. 먹고 그 빈 속을 채우렴, 그가 재차 권했다. 올린은 케이크를 손으로 덥석 집어 입에 넣었다. 처넣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본새였다.

더 넣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운 입이 우걱거렸다. 흐렸던 눈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씹을 때만은 반질반질 빛났다. 소화하지도 못할 게 뻔한 기름진 것을 탐하는 얼굴은 절박했다. 채우려는 게 배가 아니라 영혼인지도 몰랐다.

생크림이 코에, 뺨에, 입술에 묻은 올린은 구매자에게 손이 잡혔다. 손의 구멍에도 흘러 들어간 크림을 구매자가 핥았다. 금속 아래의 상처가 간지러워 올린은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웃었다. 구매자는 그 웃음을 몹시 기뻐했다.

먹을 것을 주었으니 하는 대로 따랐다. 침대의 빈자리에 눕혀질 때도 순순했다. 다리도 스스로 벌렸다. 여러 개의 딜도로 달궈진 항문은 아직도 벌렁거렸다. 거기를 한 번 길게 핥은 구매자가 오얏꽃 문신을 손으로 훑었다. 그는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왼쪽 가슴 위에는 십자가가, 오른쪽 가슴 위에는 장미가 문신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를 가리키며 한 말은,

“사샤.”

였으며, 올린을 쿡 찌르며 한 말은,

“올린.”

이었다. 구매자가 자신에게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이 재미있어서 올린은 사샤, 사샤, 하고 반복했다. 예전에 이름으로 부르라던 주인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아니면 그저 착각일지도 몰랐다. 혼란스러운 생각을 떨쳐 낸 얼굴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그 얼굴을 사랑스러워하며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샤는 어린아이에게 마술을 보일 때처럼 손가락을 꺼떡거리더니, 올린의 다리 사이에 새겨진 열여덟 개의 자두꽃을 한 송이씩 짚으며 올린에게 들려주듯 숫자를 셌다. 짝수는 불길하단다, 사샤가 아이에게 말하듯 마지막 꽃송이를 짚으며 말하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올린은 그가 수염 남자에게 손짓하는 것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크림의 텁텁한 맛이 입을 채우고 있었다. 수염 남자가 한 뼘 길이의 단검을 품에서 꺼내 사샤에게 건넸다. 올린으로선 러시아에 미신을 맹신하는 마약상도 있다는 것, 짝수의 숫자는 불길하다고 믿는 미신도 있다는 것, 그래서 열여덟 송이의 꽃 중 한 송이를 지워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던 사샤가 칼날을 눕혀 보고 가늠하다가, 역시 아니라는 듯 던졌다. 그 칼은 수염 남자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고, 그 사이 사샤는 올린의 벌어진 허벅지에 키스하듯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사람의 이가 그토록 날카로운지는 미처 몰랐다. 올린은 칼날로 포 뜨이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사람의 이에 물어뜯기는 감각도 한 박자 늦게 인지했다. 일단 깨닫자 무릎을 마구 떨었다. 마약상은 쭉 뻗은 다리 안쪽의 살을 윗니와 아랫니로 지그시 눌러, 오브차카가 희생자의 숨통을 끊을 때처럼 들끓는 소리를 내며 마구 고개를 휘저었다.

“아, 아, 아….”

올린은 거대한 머리통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턱의 경련이 지나쳐 이 사이에 혀가 물렸다. 으르릉, 크릉, 개의 소리와 함께 뜨겁게 살점이 뜯겨 나갔다. 다리의 출혈은 흐르지 않고 솟았다. 두 손이 출혈을 막아 보려 더듬거리며 상처를 덮었지만 구멍난 손으로는 지혈을 할 수 없었다. 멍한 눈에서 눈물이 흘렀는데, 그 눈물이 어찌나 짠지 눈물 흐른 자리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너털웃음을 웃은 사샤는 입 안으로 무언가를 씹으며 올린을 내려다보았다. 질겅거리던 것을 삼키는 입가가 피투성이다. 올린은 지혈을 포기하고 동그란 상처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잘린 단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교상의 둘레엔 손가락으로 만지기만 해도 느껴지는 잇자국이 선명했다. 어딘가로 몸이 휙 끌려갔다가 다시 확 던져지는 것 같은 혼돈 속에, 올린은 울던 눈으로 힘없이 웃기 시작했다.

19번이 올린의 곁에 누웠다. 그는 검게 탄 손을 들어 올린의 얼굴을 훑었다. 죽은 친구가 말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올린은 웃으면서 웅얼거렸다. 맞아,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 중얼거림은 만일 정확하게 발음되었더라도 사샤에게는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샤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야, 19번이 비난하듯 위로했다. 나는 널 대신해서 죽었거든, 그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겹쳐 일그러졌다. 귓가에 와 닿는 친구의 숨결에서는 탄내가 났다. 수십 번, 머릿속으로 반복했던 그가 죽는 장면이 다시금 눈앞에 그려졌다.

트럭에 실린 유일한 철제 상자는 충격을 받아 사방에 부딪혔다. 12번의 명찰이 달린 상자 안에 웅크린 몸은 오랜 핍박과 학대 아래에서도 살려고 애썼다. 그는 이미 알았을 것이다, 상자 밖으로 영영 나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상자가 뜨겁게 달궈지고 그 안의 몸이 익어 갈 때 그는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라고 올린은 상상했다.

19번은 타 죽어 가는 사람의 비명을 올린의 귓가에 마음껏 질렀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날카로운 고음의 목소리와 이미 청년이 된 자의 비통한 목소리가 섞인 소음이었다. 올린은 귓속을 울리는 비명 속에 대가를 치르라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아, 정말이지, 허벅지의 살이 물어뜯긴 건 잘된 일이었다. 올린에게는 빠른 죽음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고통을 쌓아 느린 걸음으로나마 죽음을 향해 간다면 어떻게든 속죄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아니 그래도 살고 싶으니 죽기 전에 받을 고통만으로 속죄하게 해 주면 안 될까.

“더, 더 뜯어 줘, 내 피부를 다 벗겨 줘.”

올린이 중얼거리는 말을 누군가 통역했다. 느리게 전해진 말에 사샤가 대답했다. 그 말은 올린에게 통역되지 않았지만 올린은 알아들었다. 19번이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러길 원하지 않는다는데. 뻬쩨르에 가면,”

19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샤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은 구멍 속에서 즐거운 시선이 올린을 훑었다.

“그의 침실에는 깔끔하게 피부를 벗겨 낼 수 있는 기구가 있나 봐. 거기서 놀자고 하는데.”

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응, 19번,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19번은 그러나 신중하게도 끝내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았다. 올린은 그런 정도로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았다. 웃던 그는 다시 울부짖다가 입에 수건이 물렸다. 목구멍 깊이까지 들어찬 수건 따위에 아파하는 것조차 올린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인 것 같았다.

일행의 헬리콥터가 준비되었다는 전갈이 있었다. 긴 복도를 돌고 돌아 갑판에 오르는 동안, 올린은 처음 머리에 뒤집어씌워졌던 하얀 천에 돌돌 말려 누군가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남의 어깨에서 거꾸로 보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도 않았다. 동그랗게 피가 번진 천 안에 갇힌 몸은 얌전했다.

저 멀리 이미 이륙할 준비를 마친 헬리콥터에 사샤가 다가가고, 바로 뒤를 올린을 짊어진 사람이 따랐다. 그 순간 콰앙, 예상치 못한 폭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던 그들이 목적했던 곳을 향해 다시 달리려는 순간 총성이 이어졌다. 올린을 짊어진 사람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 또한 갑판 위에 나동그라졌다. 천에 구속된 채 멀리 쓸려 나가며 정신을 잃는 건 한순간이었다.

굉음과 총성이 이어졌다. 덕분에 정신은 깨었지만, 후미진 곳의 구조물 사이에 다친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었다. 눈구멍이 검게 뚫린 19번이 옆에 개처럼 꿇어앉아 깔깔 웃었다. 다리를 자르면 되지 않겠어, 약을 올리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가 밀어 준 것은 어딘가의 폭발과 함께 찢겨 나온 금속 조각이었다.

끝이 뾰족하고 날 선 조각을 쥐었다. 쥐는 것만으로도 손이 베어 피가 흘렀다. 19번이 시키는 대로 낀 다리를 자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제 정강이를 마구 찌르고 베다가, 다음 순간 이 모든 게 너무 우스워 깔깔 웃다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에는 웃음을 멈췄다.

사샤 일행을 습격한 자들과 같은 옷차림이었다. 올린은 집요한 손에 저항하느라 손에 쥔 나름의 무기를 휘둘렀다. 남자의 옷은 견고하여 그 무기가 파고들지는 못했다. 남자는 자신을 상처입히려 악독스럽게 튀던 손목을 지그시 잡아 내리눌렀다. 조각을 빼내려다, 뺏기지 않으려 더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올린의 손에서 피가 철철 쏟아지자 더 이상 강제하지 않았다.

“왜, 나한테 왜 이래,”

올린은 더듬었다. 헬멧 아래 가려진 얼굴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소리와 폭발음에 묻혀 올린의 울음은 무음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배의 절반에 불이 붙어 타올랐다. 올린의 눈 안에 형광빛의 선명한 불길이 비친 순간, 그는 남자의 헬멧 사이로 드러난 두 눈과 눈이 마주쳤다. 짐작하던 대로다. 또 다른 환각이다. 이번에는 둘째 도련님의 모습을 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그가 애원했다.

“이러지 마, 제발 놔줘-.”

그가 말하는 찰나에는 소음이 멎었으므로 그 말은 남자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 소란 속에서도 침착하던 얼굴에 어떤 감정이 스쳤다. 올린은 흐느꼈다.

“너희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순간 남자의 손에 힘이 빠졌으므로, 올린은 재빨리 내리눌렸던 손을 들었다. 미쳐 가는 사람 특유의 비정상적인 결단력과 완력으로, 손에 쥔 것을 제 귀에 박아 넣으려고 했다. 남자의 손이 막았지만 이미 귓바퀴가 찢겼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사샤가, 내 피부를 벗겨 줄 거야,”

올린은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닿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떠들었다.

“그럼 19번이 용서해 줄지도 몰라.”

남자, 정비가 소리 질렀다. 올린, 정신 차, 콰앙- 목소리조차 진짜 같았다. 환각임을 알면서도, 다정한 저음이 생생하여 올린은 웃으며 울었다. 그가 말하는 도중에 아까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굉음이 치솟았다. 무언가 터지고, 휘발성 있는 고약한 냄새의 액체 따위가 강력한 압력으로 솟아올랐다. 머리 위에서 19번이 히히히 웃었다. 올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러니 날 놔 줘, 가게 해 줘, 그렇지 않으면….”

쥔 금속 조각을 한 번 더 꾸욱 눌러 쥐었다. 날카롭게 휜 금속의 단면이 손 깊이 스며들어 손가락이 잘릴 것처럼 보였다. 만일 정비가 올린의 부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것을 빼앗아 멀리 던져 버리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이것이 물건 아니라 사람이며, 놀랍게도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 버린 정비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올린의 손가락이 잘리는 것을 감수하고 흉기를 빼앗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이걸 귓속에 박고 죽어 버릴 테니까.”

그는 올린의 무기를 빼앗는 대신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번들번들 빛나는 눈을 향해 아무리 악을 써도 마음이 전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불길이 번져 가는 가운데 헬멧을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피에 젖은 얼굴이 빛났다. 올린은 그 진짜 같은 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미친 올린의 귓가에 가까이 입술을 대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다친 쪽이 아니라 반대쪽을 향해 입술을 갖다 대며, 다른 손으로는 금속 조각을 쥔 피 흘리는 손에 커다란 손을 덮어 잡았다. 익숙하게도 거대한 몸이 올린을 덮어 가렸다. 까맸던 밤하늘에 붉은색과 주황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올린의 눈 안에 주황색의 불빛이, 그 눈을 반사한 정비의 눈에 조금 더 작은 주황의 불빛이 함께 탔다. 살길인 듯 매달려 잡듯 무기를 쥐었던 손가락이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말했다.

“올린, 나다. 널 데리러 왔어.”

올린의 비었던 눈에 불꽃의 색 말고 또 다른 색이 함께 들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전과 같지 않을 거다.”

번들거리던 광인의 눈에 원래의 유순한 빛이 깃드는 것도 같았다.

“몹쓸 관습이 당연한 거라고 믿은 내가 틀렸어, 난 너를 그렇게 대하는 게 네게도 좋은 거라고 믿고 있었어, 네가… 사람이 아,”

멀리서 콰쾅, 하고 무언가 터지고 남자들이 낯선 언어로 고함치는 소리가 가까워졌지만 그는 그치지 않았다.

“아니라고 여겼지만 이제 알아,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네가 물건이겠어.”

올린의 손에서 금속 조각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다행히 잘리지 않은 손가락의 상처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그 아픔이 느리게 느껴져서 올린은 웃었다.

“네가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마. 가자. 올린. 나와 같이 가자.”

그래, 올린은 말했다. 그래, 그러자. 나도 알고 네가 아는 걸 어떻게 정아랑 정규랑 정환이 외면할 수가 있겠어.

짧은 순간 올린의 혼은 과거 혹은 미래, 아니면 그저 상상일 뿐인 어느 시간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는 저택의 잔디밭을 걷고 있었는데, 늘 맨발이던 그 발에는 하얀 운동화가 신겨져 있었다. 신발 끈이 풀리는 바람에 멈칫한 다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둘째 도련님, 아니, 정비였다. 그는 신발 끈을 한 번 묶은 다음, 매듭 위에서 다시 묶었다. 그리고는 올린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하라고 알려 줬잖아.”

“알아요. 그냥, 묶어 주시는 게 좋아서요.”

되바라진 말투는 낯설었으나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다. 정비는 나무라지 않고 일어나 올린의 손을 잡았다.

“혼내실 거예요?”

올린이 묻고,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나란히 걸어 잔디밭을 벗어났다. 저택의 어느 곳이든 올린에게는 열려 있었으나, 정문을 향하는 돌계단을 밟아 본 적은 이전엔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당연한 듯 그 돌계단을 밟고 내려와 정문을 나섰다. 올린은 더이상 저택에 갇혀 있는 게 아니었다. 문은 그에게도 열려 있었다. 문 밖에는 세 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올린은 어쩐지 맥이 풀려서 하, 하고 웃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렇게 돌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중 하나가 말했다.

“오늘 늦게 끝나니? 데리러 갈까?”

올린은 입을 열었다.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앞의 얼굴이 뭉그러지고 일그러져서는 도무지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그는 숨을 들이켠 채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번의 총성이 울렸다.

현실로 돌아왔다. 꿈으로 빨려 들어갈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저항했다.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은 19번이었다. 숨찬 속삭임이 귀에 꽂혔다. 내가 죽일 거라고 했잖아, 내가 죽일 거라고 했었어, 오지도 않을 테지만 오더라도 내가 다 죽일 거라고 했었어.

열렸던 입안으로 피와 살점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비의 것이었다. 그것들을 뒤집어쓴 얼굴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정비의 피는 팔팔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정,”

무언가 말해 보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입안을 가득 채운 자기 것 아닌 피로 올린의 목에서는 그르륵 소리가 울렸다. 늘 견고하게 닫혔던 입술이 벌어지는 모습이, 홉뜨인 눈으로부터 명료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올린의 눈에는 몹시 느리게도 보였다.

뜨겁게 출혈하는 커다랗고 가엾고, 언제까지나 지켜 주고 싶던, 자신을 지켜 주려 하던, 비로소 자신을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 사람이 올린의 위로 무너졌다. 피투성이로 깔린 채 눈을 깜빡이던 몸은 방금 총 쏜 자의 팔에 끌려 나왔다. 남자의 죽은 몸이 바닥을 굴러, 마침내 천지를 진동하는 어둡고 무거운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올린은 몸을 돌려 그를 부여잡으려 했다. 도련님, 이라는 이전의 호칭으로는 부를 수가 없었다. 만일 불렀더라도 폭발음에 묻혔을 터다. 피투성이 얼굴이 올린을 향해 있었다. 감기지 않은 눈에 피가 흘러들어 갔다. 올린은 끌려가며 피가 고여 붉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를 불러야 할지 모르는 입술이 달싹거리다, 이윽고 어떤 음절도 아닌 길고 긴 비명을 토했다. 피처럼 내장처럼 흘러나온 비명이 주르륵 바닥을 칠했다.

발작은 뒤늦었다. 그는 불판 위에 피부가 벗겨져 나뒹구는 심정으로 몸을 뒤틀었다. 바닥을 긁느라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이 꺾였다. 발길질이 떨어졌다. 그래도 그냥 끌려갈 수 없었다. 멀어지는 죽은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은 제 몸에서 묻어 나온 비명 같은 피에 미끄러졌다.

올린은 바닥에다 핏길을 그으며 사샤가 선 곳으로 인계되었다. 핏길을 따라 검게 탄 19번이 춤추며 걸었다. 불길이 오르는 갑판 위의 총성은 몇 분 새 멈춰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은 눈에 또 다른 환각 같은 상이 맺혔으나 이미 넋이 나간 올린의 머리는 그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되지 못한 장면 속에서, 사샤와 반갑게 웃으며 포옹하는 사람은 키가 크고 날씬했다. 보풀이 일어난 면바지에 낡은 셔츠 차림의 남자가 러시아 마약상과의 다정한 인사를 끝내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안경 쓴 얼굴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는 올린을 아는 것 같았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아 말끔한 얼굴에 다시금 미소를 띄운 그는 못된 뱀을 닮았다.

동생과 따로 움직인 그의 방식은 달랐다. 정비는 용병을 고용하여 배를 습격했지만, 그는 혈혈단신으로 들어와 낙찰받은 사샤와 몇 마디 말을 나눴을 뿐이었다. 사샤는 부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총이 주어졌다. 사샤가 총 든 모습에도 남자는 태연했다. 사샤의 총구는 그가 아니라, 그 뒤에 선 남자를 향했다. 그 남자의 얼굴에는 하트 모양의 화상이 눈에 띄었다. 브로커 업체의 대표다.

이번의 총소리는 그다지 느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장면, 피와 함께 뇌수가 흐르는 질퍽한 소리, 정육점에서나 맡을 수 있는 익숙지 않은 냄새는 올린의 눈과 코와 귀를 통해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오감이 살아 있다고 해서 그 감각의 의미가 절로 파악되는 것은 아니었다.

올린은 그저 울며 웃으며 놓여 있었다.

제 동생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알았다고 해서 별다른 얼굴을 할 것 같지도 않은 첫째 도련님이 다가왔다. 올린의 눈에는 이 사람도, 곧 죽을 남자일 뿐이었다. 우뚝 선 채 내려다보는 뒤로,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이륙했다. 저 멀리서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이 거셌다. 남자는 비록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바다 한가운데 전쟁터가 아니라 여름 꽃 만발한 정원에 선 듯 홀로 화사했다.

“넌, 뭐야.”

미쳐서 다 잊고자 하는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19번이 올린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을 몰랐다. 올린은 안 돼, 대답하지 마세요, 하고 제 몸속에 갇혀 울부짖었다. 남자가 볼우물이 패도록 웃으며 대답했다.

“이정아다 이 버릇없는, 액받이 놈아.”

올린은 기침했다. 입안에 가득 찼던 정비의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정아가 조금 걸음을 물렸다. 바지에 피 튈까 봐 저어하는 꼴이 우스웠다. 올린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손을 들어 자신이 끌려온 방향을 가리켰다.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샜다. 바닥에 제게서 묻어 나온 핏자국이 폭력적으로 찍힌 그 방향, 핏길 끝에는 차가운 시체가 누워 있을 터였다.

19번은 올린의 몸을 통해 말했다.

“이정아.”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귀를 기울였다. 다음의 말이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기색의 얼굴에 괴롭고 신기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 19번이 올린의 손을 들어 핏길의 끝을 가리켰다.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올린의 혼은 저항을 포기했다. 몸의 지배권을 19번에게 내어 주고 빠져나와 피투성이로 누운 자신의 몸과 청량한 차림을 한 도련님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도련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을 향해 누운 자신의 얼굴은 잘 보였다.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피에 젖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니 동생인 것 같다.”

19번이 말한 다음 허공을 보며 깔깔깔 웃었다. 첫째 도련님은 19번이 지배하는 올린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대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올린은 첫째 도련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올린의 착각인 것 같았다. 도련님이 뱀처럼 웃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각에 지배되던 올린은 다시 누워 있었다. 정비를 향해 걸어가는 첫째 도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였다. 몸에서 따뜻한 것이 스며 나왔다. 피식피식 웃음처럼 새어 껍데기에 붙었다가, 주워 담기 어렵도록 느리고 멀겋게 퍼지는 그것은 피도 땀도 눈물도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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