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목소리 (27/65)

# 목소리

“올린. 올린아.”

어둠 속의 목소리가 있었다.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겨우 몇 분짜리 영상을 위해 여러 시간을 시달렸다. 바늘쌈지처럼 빼곡히 찔렸던 성기는 아직도 뜨겁게 욱신거렸다. 결박도 없이 침대 위에 늘어졌던 올린이 눈을 뜨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오한에 떠는 몸에 입혀진 옷은 크긴 해도 걸리적거리진 않았다. 좁은 방 안, 벽에 부착된 희미한 조명 속에 커다랗고 연약한 인영이 서 있었다. 눈을 깜빡였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일어나. 올린.”

“…정환 도련님, …정환아.”

그렇게 어려웠던 막내 도령의 이름이 쉽게 나왔다. 갈라진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을 듣자, 검은 그림자는 씨익 웃었다.

“그래.”

“여긴 무서워. 나가게 해 줘.”

올린은 그림자를 붙잡으려 했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다 굴러떨어졌다. 강간의 끝에 장내 깊은 데까지 상처 입은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도움이 있으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으켜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손을 뻗었지만 정환은 야속하게도 한 걸음 물러났다. 올린은 좁은 바닥에 웅크린 채 잠시 울었다. 소리 없이 우는 것은 익숙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몹시 고통스러웠다. 닦아도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포기하지 않고 훔쳤다. 계속 닦아 내면 언젠가는 그칠 것이다.

“네가 스스로 나가야지. 나는 그저 네게,”

정환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동기가 될 뿐이야.”

올린은 가쁜 숨으로 울음을 갈무리하며 생각했다. 정환뿐 아니라, 네 명의 도령 모두가 그에게는 동기였다. 어떠한 이유로든 그들은 자신을 필요로 한다. 아프다고 찔찔 짜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맞아.”

속으로 한 말에 반응하여 정환이 맞장구쳤다. 아니, 정환이 아니라 첫째 도련님이었다. 갇힌 후로 올린은 속마음을 저도 모르게 말로 하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도 그런 줄로 생각한 올린은 아픈 팔과 무릎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올 풀린 니트를 입은 첫째 도련님이 말했다. 여름인데도 도톰한 니트 차림이다. 실내인데도 머리카락이 햇살에 빛났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첫째 도련님은 물었다.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아까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지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올린은 두 걸음이면 끝나는 좁은 방을 걸었다. 벽을 짚지 않고서는 움직이기 어려웠다. 발바닥을 바닥에 디딜 때마다 짓이겨진 내장에 통증이 올라왔다. 손잡이 대신 둥근 고리가 매립된 곳이 문이었다. 고리를 세워 돌렸다.

“문을 잠그지 않고 가는 소리를.”

그림자로 선 도련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방 밖도 어둠이었다. 길고 좁은 복도였다. 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며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기다란 공간은 내내 그랬듯이 위로 아래로 커다랗게 울렁이는 것 같았다. 올린은 어느새 따라온 둘째 도련님께 물었다.

“저는 지금도 약에 취해 있는 걸까요?”

“그럴지도.”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올린이 앞장섰다. 도련님이 그 뒤를 따랐다. 누가 나타나면 지켜 줄 생각으로 올린은 뒤따르는 커다란 몸을 감싸며 걸었다. 도련님은 자신보다 한 뼘은 족히 작은 올린의 뒤에 숨는 것을 저어하지 않았다. 짧지 않은 복도 끝에는 육중하고 둥근 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의 한가운데에는 휠처럼 보이는 둥근 손잡이가 있었다. 올린은 그것을 예전에 구멍 뚫린 바 있고 지금은 골절하여 잡는 모양조차 엉성한 손으로 열려고 시도하다,

“쉬운 방법이 있을 거야.”

하는 셋째 도련님의 말을 듣고 어깨로 밀어 올렸다. 그그극, 위험한 소리를 냈지만 생각보다 손잡이는 쉽게 돌아갔다. 올린은 헐떡이며 둥근 문을 밀어 열었다.

문 건너편은 복도가 아니라 계단이었다. 위로, 위로 향하는 좁은 계단에 들어서기 전, 셋째 도련님이 말했다.

“저게 필요할지도 몰라.”

걸어온 길을 되짚어갔다. 벽의 투명한 플라스틱을 깰 때는 팔꿈치를 세웠다. 깨지지 않아 퉁, 퉁 소리만 울리자 도련님이 말했다. 색소가 엷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이를 악물고, 한 번에 해야 해.”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깨뜨리는 것은 경험 없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던 팔을 단단히 버텼다. 견고해 보이던 것이 생각보다 쉽게 깨지는 것을 본 올린과 네 도련님들이 동시에,

“하.”

하고 한숨 쉬었다.

깨진 플라스틱 파편 뒤에서, 안에 들었던 손도끼를 꺼냈다. 한 손으로 다루기 쉽도록 자루가 짧고 머리가 가벼운 물건이었으나, 올린은 오른손으로 쥐고 왼손으로 받쳐야 겨우 휘두를 수 있었다.

“이게 절 죽이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요.”

올린은 도끼 자루를 쥔 채 속삭였다. 안경 뒤에 숨은 첫째 도련님이 말했다.

“널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거야.”

올린은 어쩐지 크게 안심이 되어 웃었다. 긴 복도에 혼자 웃는 낮은 소리가 메아리쳤다.

좁은 계단을 올랐다. 차갑고 비린 공기에 가까워졌다. 소리가 들렸다. 파도 소리다. 계단 끝에 이르러 사방이 막힌 데에서 완전한 트인 곳으로 진입한 올린은 확인했다.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은 거대한 배였다. 방이 그토록 좁고 울렁거린 것은 선실이었기 때문이다.

밤하늘 아래 갑판이 넓었다. 올린의 귓가에 네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속삭였다. 왼쪽에 서 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때로는 머리 위에 떠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목소리의 향방이 울렁였다.

“너는 상자에 든 채로 동해 어느 항구로 운반되었을 거야.”

“차 문이 여닫히는 소리. 육중한 기계의 소리. 사람 손으로 운반되던 흔들림.”

“트럭에서 배로 옮겨지기 전에 컨테이너 안을 심하게 굴렀어. 기억하지?”

“인부들의 소리. 다른 짐들이 네 위에 쌓이는 소리. 지게차의 단순하고 소름 끼치는 경고 멜로디.”

“작은 배에서 큰 배로, 다시 또 다른 배로 옮겨졌지. 냄새. 짜고 비린 바다 냄새.”

“그동안 넌 살아남았어.”

“네가 약한 존재라면 그 긴 여정을 견뎌 내지 못했을 거야. 올린, 견뎌 내지 못했을 거야.”

혼란하고 다정한 속삭임을 들으며 걸었다. 여름 낮 동안 볕에 달궈졌던 금속 바닥의 감촉은 달빛 아래서도 생각만큼 차지 않았다. 한밤의 갑판 위에 홀로 섰던 남자의 뒤로 다가갔다. 그를 지나치지 않으면, 그 뒤에 세워져 고정된 구명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올린은 운전할 수 없는 조그만 보트에 올라 밤바다를 홀로 헤매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이 시커먼 망망대해를 홀로 떠도는 공포를 상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길 잃고 목말라 죽어도 차라리 좋았다.

이곳에서 고문당하다 팔려, 남자들이 말했던 이름조차 이국적인 도시들로-뻬쩨르로, 디씨로, 두바이로- 운송된 다음에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19번은 자신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다. 비록 그 애는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 속에 부르짖었지만, 올린은 어렴풋이 그 애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물건이 아니라는 자신을, 물건으로만 기억할 도련님들의 모습이 무서웠다.

“도련님들을 보고 싶어요.”

“우리도 그래.”

“사람인 절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것도 알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련님, 저 또한-.”

올린은 도끼를 치켜들었다. 사람을 절명케 하려면 머리를 노려야 했다. 올린의 팔꿈치를 잡아 도끼를 쳐드는 데 힘을 실어 준 둘째 도련님이,

“올린, 머리다. 머리를 노려.”

하고 힘주어 말한 뒤, 허공에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올린은 도끼를 내려쳤다. 오랜 고문을 당한 쇠약한 몸이 전력을 다해 내리친 도끼의 기색을, 그 도끼에 머리가 찍힐 뻔한 남자가 간발의 차로 알아챘다. 도끼는 남자가 들어 올린 팔을 맞고 튕겨 나갔다가, 그악스럽게 이를 악문 올린의 팔에 다시 휘둘러졌다. 됐다. 이번엔 목이었다.

“이게 미쳤나!”

깊이 박히지도 않은 도끼를 뽑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도끼가 뽑혀 나왔다. 그다음은 겨냥조차 하지 않았다. 도끼를 든 채 미친 춤을 추는 올린에게 또 다른 남자가 배를 베였다. 하나같이 치명상이 되기엔 부족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올린은 살인자가 되더라도 물건인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한순간 올린은 멈췄다. 얼굴에 피가 튄 채 헐떡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곁을 지켰던 도련님들을 찾아 푸른 안광이 번쩍번쩍 빛나는 눈을 굴렸다. 형편없이 마르고 모질게 고문당한 청년의 눈빛에, 장정 여럿이 압도되어 달려들지 못하고 한순간 주저했다.

“어디 갔어!”

남자들에게 묻는 것도, 도련님께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선이 가늘고 예쁜 용모에 비해 목소리는 강인했다. 그 목소리의 울림에 얼어붙었던 공기가 깨지는 순간, 올린은 달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둘러싸이기 전에, 뛰었다.

올린은 발이 날랬다. 뜀박질로는 정말로, 누구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달리 따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무거웠다. 평생 신발 신고 산 날보다 맨발로 살아온 날이 많았다. 발바닥이 베이고 발톱이 깨지는 느낌은 머리까지 와 닿지도 않았다.

배 위의 구조물 사이에서 남자들이 나타나면 방향을 틀었다. 빈 헬리콥터 주기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어둡던 사방에 조명이 켜졌다. 밝든 어둡든 올린에겐 다르지 않았다.

“어디야-!”

그는 환각으로 나타난 도련님을 찾는 건지,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 노예 경매선에서 탈출하려는 건지,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달리며 울부짖었다.

달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마주 울었다. 순간 번뜩 정신이 든 올린은 지금 머릿속의 이 울림만큼은 자신의 뇌가 제멋대로 지어낸 환각이 아니라,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실제로 울고 있는 어린 정환의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배의 후미로, 달려가, 밤바다에, 몸을, 던지면, 그들은 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아낼 수 없을 터다. 올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향해 도약하려고 했는데,

“이 미친년이!”

발목이 잡혔다. 올린은 날아오르던 자세 그대로 쿠당, 쾅 하고 갑판에 뾰족이 솟은 구조물에 이마를 찢으며 넘어졌다. 목이 꺾이고 살이 찢기며 불 켜졌던 시야가 팟, 꺼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네 명의 도련님이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해 타 죽은 19번이었다. 진실을 알려 주었되 올린을 원망하는 그 애였다. 그는 아직도 상자 속에 구겨진 모양 그대로였다. 동자가 사라진 눈구멍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새 웅크린 올린의 뒤에 바짝 붙었다. 타 죽은 사람의 살 냄새가, 타는 피부에서 흘렀을 피 냄새가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 같기도 하고 다 큰 청년의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올린은 그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들의 대화는 성대의 울림 없는 속삭임으로만 이어졌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호흡을 씨근덕대는 소리로만 이야기했었다.

내가 너 못 나가게 할 거야. 네가 시도하는 모든 탈출 계획을 내가 방해할 거야. 네 도끼를 헛돌게 하고 내 발목을 삐게 할 거야. 오지도 않을 도련님조차 상상하지 못하도록 내가 달라붙어 있을 거야. 그들의 환각이 하는 말 대신 내 속삭임만 듣게 할 거야. 만일 그들이 온다 해도 내가 죽일 거야. 그래서 그들도 내 탄 살 냄새를 맡게 할 거야.

12번, 생각해 봐. 어쩌면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지 않을까, 우리가 다른 것은 오로지 번호 하나였어. 넌 모든 비치는 것들에서 나를 보게 될 거야. 눈구멍이 뚫리고 거죽이 타 없어진 까만 재와 피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네가 잘못된 손길에도 순종했기 때문에, 사람인 네가 물건인 양 침묵했기 때문에 너와 내가 바뀌었어. 내가 이렇게 되고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네 탓이야.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게 맞아.

내 말은, 12번, 네가 삶을 소망하는 것조차 내게 잘못을 저지르는 거라는 뜻이야. 12번. 여기 나랑 함께 있자. 우리는 비록 물건처럼 다루어지며 잠시 눈을 마주쳤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이미 친구였잖아. 12번, 그렇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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