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도련님 3-# 장물 (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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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 장물

# 목소리

# 경매

# 선상전투

# 허기

# 집행유예

# 녹나무

# 내린 이

# 치아코

# 욕조

# 새 규칙

# 가족실

# 루미나리에

# 대립

# 마구간

# 장물

캠프를 운영하는 회사는 오랫동안 액받이를 다뤄 왔다. 다양한 종류의 사건 사고가 있었으나 액받이의 사망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두 주간의 훈련을 무사히 버텨 낸 12번 입소자를 배달하던 차량이 교통사고에 휘말렸다. 운전자와 업체의 직원, 두 사람이 사망하고 12번 물건이 들었던 상자가 전소되었다.

확인한 것은 첫째 도령이었다. 업체 쪽 사람과 함께 시체를 마주한 그는 까맣게 탄 철제 상자 안에 반쯤 재가 되어 웅크린 사람의 형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적였다. 불타오르는 차 안에 장시간 있었으나 뼈의 형체는 남았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피부가 다 타 버렸지만, 목뼈 근처에서 발견된 타다 남은 칩은 올린의 것이다.

영안실의 차가운 조명 아래 마스크를 쓴 눈이 피곤하다는 듯 감겼다 뜨였다. 뱀 같은 눈은 늘 그렇듯 미소 짓고 있었다.

“산 채 탔을까요?”

그리고는 장갑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탕, 철제 테이블이 진동했다.

“아니면, 죽은 다음 탔을까요?”

답을 알고 물은 물음에 관계자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죄송하다고 빌 뿐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회사의 존망이 눈앞의 고객에 달려 있으니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그 질문을 한 고객이 이미 회사를 해체하기로 결정한 것은 알 리가 없었다.

관계자가 조심스럽게 내민 보상과 관련한 서류는 그를 수행하던 최 집사가 챙겼다. 첫째 도령이 최 집사의 손에서 가볍게 서류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하얀 복도를 걷는 도련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최 집사는 잠시 입을 열어 타 죽은 시체의 손에는 아일렛의 흔적이 없었음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발견한 것을 도련님이 보지 못하셨을 리가 없었다.

소식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전했다. 올린이 확실하냐고 물은 것은 셋째 도령이었다. 첫째 도령은 인식칩을 확인했다고만 답했다. 열세 자리의 일련번호는 네 도련님 모두가 외고 있었다. 올린의 것이 맞았다.

앉은 채 듣던 둘째 도령은 마른세수를 했다. 캠프에 보내자고 한 것도, 돌아온 올린을 다시 보내기로 결정한 것도 자신이었다. 분노와도 닮은 후회로 한숨을 쉰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자신이 느끼는 이 불쾌한 감정은 형제 공용의 물건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 후속 조치에 대한 의무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책임을 다하면 될 일이다.

“당분간 불편하게 됐군. 다음의 물건은 내가 책임지고 구해 올 테니,”

에둘러 사과하는 말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정환이 달려들었다.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둘째 형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꼴을, 첫째는 두 눈을 번들거리며 지켜봤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어쩌면 매번 저렇게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첫째는 자신과는 대척점 끝에 선 것 같은 막내의 얼굴을 관찰했다.

저렇게 인간의 이마가 일그러지고, 눈썹 사이에 금이 생기고, 눈에 눈물이 맺히고 이를 앙다문 표정이 분노와 슬픔의 혼합 표현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에 수천 장의 사진을 교보재 삼아, 인간의 감정을 구분해 낼 수 있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그에게는 학습해야 하는 교과와 같았고, 그가 수월히 터득해 낸 일들은 남들에게는 어려운 것이었다. 세상은 공평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그는 노력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막내의 손을 떨어내지 않았다. 정환의 젖은 눈과 둘째의 마른 눈이 마주쳤다.

“형은, 그 애가 죽었는데,”

비탄한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어린애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늘 목소리를 까는 정환이, 울부짖을 때는 아직 젖내 나는 소년 같았다. 첫째는 정환이 늘 이렇게 솔직한 목소리를 내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제 형을 상대로 주먹질하는 꼴을 바라보았다.

“정환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외치며 셋째가 달려들었다. 액받이를 대할 때와 달리, 형제들을 향할 때 보이는 셋째의 다정함은 어쩌면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터다. 나머지 셋과는 어쩐지 결이 다른 용모도 모계 혈통의 것일지 몰랐다. 첫째는 어쩌면 우리 넷 중 제일 보통에 가까운 놈은 셋째일 거라고 생각하며, 동생이 필사적으로 정환을 뜯어말리는 꼴을 지켜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원래부터 정상의 범주에 들지 않으며, 나머지 둘은 지금 액받이 하나 때문에 주먹다짐을 하고 있다. 물론 아주 사랑스러운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작 액받이일 뿐이니 저 둘도 지금 반쯤 돈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혼란한 와중에 첫째 도령과 최 집사의 눈이 마주쳤다. 첫째 도령은 한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댔다. 최 집사는 눈을 떨구었다. 곤란한 상황이지만, 예전의 일을 생각하면 그편이 나았다. 죽은 게 아니라 도난당한 것을 알게 되면, 지금 싸우는 저 도련님들은 이전과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일 것이다. 둘째는 미친 사람처럼 찾아다니고, 막내는 미친 사람처럼 자학했었다. 주인들이 미쳐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최 집사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가 빙긋이 웃었다.

액받이로 쓰이는 자들은 보통 성인이 되면서 그 능력이 개화한다. 갖고 있는 기운만으로도 동침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개 하나 이상 소유하고 밤 시중을 들게 한다. 동 세대의 남성들이 공유하면 그들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고 가문에 행운을 깃들게 한다는 것은 주로 동아시아에서 믿고 있는 이야기로, 그 미신 같은 이점을 제외하고서도 액받이들은 소유자들에게 가치 있었다.

갓 성인이 되어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맏물의 값도 높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것은 오랫동안 승승장구한 가문이나 명망 높은 유명인이 사용하던 물건이다. 주인과 액받이가 몸을 섞으면서 액받이에게도 주인이 본래 가진 행운이 깃든다는 이야기는, 러시아나 중동, 혹은 구주지역의 부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이었다. 남의 손을 한 번 탄 것이 어둠의 시장에서 더욱 비싸게 팔리는 까닭은 그러한 이유였다.

따라서 사용하던 액받이를 폐기하지 않고 되파는 경우도 많다. 어느 가문에서 얼마 동안 사용되었던 액받이, 라는 화려한 딱지가 붙은 액받이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으로 흘러들어 가는 경우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효능이 좋아도 전의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물건이라는 꺼림칙함에 그런 놈들은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대단히 짧은 시간 내 소모되곤 하지만 그것은 브로커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단순한 거래다. 괜찮은 액받이를 물색하여 그 주인을 설득한 후, 적당한 프리미엄을 얹어 구매한다. 집안이 좋고 명성 있는 주인이라면, 액받이를 사 왔을 때보다 더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헌 것을 팔아 치우고 새 물건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브로커들은 남의 손을 한 번 탄 것을 선호하는 해외 바이어들에게 경매에 부쳐 이윤을 얻는다. 누구 하나 손해 볼 것 없는 매매 구조다.

그러나 심상은 좀 별난 집안이었다. 네 도령의 집안은 사용할 수 없게 된 액받이를 폐기할지언정 절대 되팔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은 심상의 가치관으로는 가문에 봉사한 물건에 대한 일종의 예우였고, 브로커들의 눈으로 보기엔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금덩어리를 태워 버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제3세계의 문맹조차 코리아는 몰라도 심상은 안다. 그러한 심상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 가문에서 단 몇 개월, 혹은 몇 주라도 사용되었던 액받이가 경매에 나온다면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을 터다. 그들은 액받이를 폐기하면서 그 돈도 함께 묻어 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심상의 액받이를 손에 넣어 되팔기 위한 범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도난의 과정에서 몸값이 비싼 심상의 물건을 저렴한 시신으로 바꿔치기하는 정도의 눈속임을 한 것 또한 당연했다. 교과서에는 인간은 모두 동등하게 존엄하다고 쓰여 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액받이들도 그 가치가 물건마다 모두 다르다. 12번의 도난은 정아를 고요히 분노하게 했지만, 19번의 죽음은 오히려 그 주인이 값싼 몸값을 받고 허용했다는 사실이, 그 상이한 가치의 예시와도 같다.

정아는 아주 예전에, 증조부 대에 있었다고 전해 들었던 요란스러운 도난 사건을 떠올렸다. 최 집사도 들은 바 있었다. 심상은 결국 액받이를 되찾아왔고, 전통대로 집안에서 폐기했으며, 가문의 물건에 손댄 자들을 처단했다. 되찾아온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글쎄, 꼭 과거의 전통을 따를 필요야 있겠느냐마는, 만일 폐기하는 편이 낫다고 해도 그것은 도로 찾아온 이후에 생각해도 좋을 일이다. 어떻게 다루든 올린은 그들의 것, 살고자 하는 영민한 눈과 깨지지 않는 굳센 마음과 상처 입어도 예쁜 몸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살리고 죽일 권한까지를, 결코 이대로 빼앗긴 채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정아는 이번에 입소한 액받이들 중 올린과 체형이 비슷한 물건들을 먼저 추렸다. 그들의 행방을 찾으면 범죄 조직에 협조한 자가 누구인지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아에게는 동생들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는 뱀이었다. 무리 지어 사냥하는 뱀은 없다.

*

만 하루의 시간이 지나 상자가 열렸을 때, 올린은 제가 뱉은 토사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덜컹거리고 뒤집어지고 던져지는 동안 격렬한 어지러움과 공포를 견뎌야 했던 탓이다.

“이런 씨발, 이거 죽은 거 아니야?”

보슬보슬했던 머리카락이 오물에 엉기고 창백한 낯에도 그런 게 묻었는데 남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죽은 듯이 고요한 몸을 꺼낼 때 그들은 상자의 끄트머리를 발로 누르고 안에 든 물건의 머리채를 쥐어 잡아 와당탕 쿵탕 소리를 내며 마른 몸이 바닥에 부딪히게 만들었다. 어차피 상품의 질이 좋으면 자잘한 상처 따위는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회복이 가능한 수준에서의 경미한 손상은 오히려 바이어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때도 있다.

뺨을 때리느라 안대가 벗겨졌다. 입을 벌려 안에 든 것을 긁어 냈다. 컥, 히익- 비린 공기를 들이마시느라 오히려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깨어난 것의 눈은 흐렸다. 긴 시간 좁은 곳에 갇혀 마구 내던져지는 고문에, 꺼칠한 얼굴에는 공포가 짙게 곤두섰다. 제 토사물에 질식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이렇게 품질 좋은 것을 빼돌리는 데 성공한 중개업체는 대단히 운이 좋았다.

남자들은 올린이 괴로운 숨을 쉬어 보려 애쓰는 동안, 굽어진 채 굳은 사지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뒤틀린 채 묶인 한쪽 손목이 상한 것은 괜찮았다. 일으켜도 제 발로 서지 못하는 것도 정상이었다. 목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힘없이 고꾸라지는 것도, 예상했던 바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안과 싸우느라 빈사 상태가 된 몸을 이렇게 놀리고 저렇게 움직여 보다, 뜻대로 되지 않아 철썩 철썩 소리가 나도록 뺨을 때려 준 남자가

“상태 좋네.”

하며 생수병을 열어 올린의 얼굴에 마구 쏟아부었다. 만족한 웃음이 떠오른 얼굴에 화상 자국이 선명한 그는 브로커 업체의 대표였다. 토하느라 마른 채 찢긴 입술을 벌리고 물을 받아 마시려 애쓰는 걸 보고,

“이건 웬만큼 험하게 다뤄도 안 죽을 거야.”

하는 그는 과연, 물건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닥과 천장이 온통 출렁인다고 올린은 생각했다. 어쩌면 오래 좁은 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남자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가운데 망가진 물건처럼 바닥에 내버려져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몸이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반복되었다. 올린은 울컥울컥 묽은 토사물을 더 뱉어 냈다.

화상 있는 남자가 허리를 숙여 올린을 살폈다. 그가 웃을 땐 뺨의 화상이 징그러운 하트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올린이 도련님들은, 하고 물으려는데 남자가 선수를 쳤다.

“숨은 쉬어져?”

아직 사지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숨은 쉴 수 있었다. 올린은 입가에는 오물을, 눈가에는 눈물을 묻힌 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대답했다.

“넌 정말 튼튼하구나. 그럼 바로 시작할 수 있겠다.”

손이 뒤로 묶인 채 울렁거리는 복도를 절룩이며 걸었다. 간격이 좁은 문들이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올린은 이것 또한 훈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캠프의 조교들은 상자에서 버티는 시간이 마지막 훈련이라고 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교육 기관에 바로 위탁된 것일 수도 있었다. 캠프에서 더 잘했다면, 도련님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으셨을 터였다. 후회가 울음처럼 가슴을 쳤다.

좁은 문이 열리고, 창문 없이 어두운 방에 들어섰다. 작은 침대와 벽에 부착된 손바닥만 한 탁자가 있는 그곳이 올린의 숙소요 고문실이었다. 올린은 허락받지 않았을 때 질문을 하면 매를 맞을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칩이 도려내진 목덜미의 욱신거리는 아픔을 무시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이것도,”

화상 남자가 돌아보았다. 올린은 어두운 방 한가운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뒤로 묶인 손을 열중쉬어하듯 올리고 턱을 든 자세가 곧았다.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상자 속에서 죽다 산 놈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이것도 새로운 훈련입니까.”

천장의 고리가 견고한지 점검하던 다른 남자가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화상 남자가 그쪽을 한 번 바라보다가, 다시 올린을 흘끗 보았다. 그는 밧줄을 감아 솜씨 좋게 올무를 만들고는,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고 올린을 향해 손짓했다. 올린은 다가가지 않았다.

“도련님들은, 언제 뵐 수 있습니까.”

질문하는 하얀 얼굴에 눈물이 한 방울 굴렀다. 남자는 참을성 있게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다시 손짓했다. 올린은 그러나 그대로 멈춰선 채 입안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자신도 이 모든 질문이 어리석음을 알고 있었다. 올린은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과호흡하며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했다. 힉, 힉, 힉, 빠르게 들이쉬는 숨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남자가 손바닥을 뻗어 올린을 향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올린의 어깨가 화상 남자의 손에 부드럽게 잡혔다.

“주인이 바뀔 뿐이야. 하는 일은 같아.”

올린의 목에 올무가 걸렸다. 올린이 불안 속에 눈을 감았다. 눈물 줄기가 여러 갈래로 흘렀다.

“그러니 예의 바르게 굴어야지.”

올무의 끝이 천장의 고리를 통과했다. 밧줄이 조금씩 당겨 올려지자 올린의 고개가 바로 들리고, 가슴이 위로 향하고, 발뒤꿈치가 들렸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끌어 올려져 발가락 끝만 간신히 바닥에 닿게 되었을 때, 화상 남자는 컥, 컥, 딸꾹질하듯 숨을 몰아 들이키는 올린의 등을 가볍게 쓸었다. 그 손짓에도 쉽게 떠밀린 올린의 발가락이 춤추듯 애타게 바닥을 찾아 디뎠다. 딛지 못하면 목이 졸리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더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될 거야. 내가 지켜봐 줄게.”

화상 남자는 방 한구석의 CCTV를 흘끗 눈짓하며 자상한 말투를 꾸몄다. 목 졸린 올린이 눈을 치뜨고 그것을 확인했다.

“너무 땀을 많이 흘리지 않도록 노력해. 오줌을 싸는 것도 좋지 않은 생각일 거야. 바닥이 미끄러워지면, 그만큼 버티기 힘들어지거든.”

올린이 무슨 말인가를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목의 통증에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을 보며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깜빡했던 것이 있는 사람처럼 사진 폴더를 뒤적였다.

“그리고 음, 네 전 주인들은 아마 널 찾진 않을 거야, 왜냐하면, 어, 여기 있었는데. 아.”

그는 사진을 열어 올린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게 넌 줄 알거든.”

핸드폰에 담긴 새까맣게 탄 시체 사진을, 올린은 흔들거리며 바라봤다. 남자는 친절하게도 올린이 눈을 떼지 못하는 긴 시간 동안 잘 볼 수 있도록 핸드폰을 치우지 않았다. 자신이 담겼던 상자와 똑같은 색깔, 똑같은 크기의 철제 상자 안에 팔다리를 바로 펴지도 못한 채 타 죽은 시신은 얼굴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올린은 헷갈려서 멈칫했다. 사진 속 이 모습이 진짜 자신이고, 여기서 이걸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인 것만 같다. 아니면, 이건.

“너 대신 죽은 애. 19번.”

죽은 시체는 사진 속에서 문득 움직이기 시작했다. 꽁꽁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기이하게 목을 뒤틀며 굳이 고개를 들어서는, 사진 밖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올린을 향했다.

“12번,”

타 죽은 19번이 말했다. 검게 뚫린 눈구멍 뒤에서 분명 시선이 느껴졌다.

“너 그때 왜 소리 안 질렀어. 너 왜 우리가 뒤바뀌도록 가만있었어. 그때 네가 입을 열어 소리만 질렀어도,”

“모르긴 몰라도, 네 전 주인들은 많이 비통해하셨을 거야.”

“죽은 내가 사람이듯, 거기 있는 너도 사람인데, 혀가 잘린 것도 아니었는데, 왜 목소리를 내지 않았어, 어째서 침묵했어, 이, 어리석고 악한 놈 같으니, 너 대체 왜 가만히 있었어.”

19번의 원망 속으로 화상 남자의 말이 끼어들었다. 부릅뜬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장마철 소란한 빗방울처럼 투둑투둑 떨어지는 눈물이 사진 속 타 없어진 얼굴을 둥글게 부풀렸다. 남자는 에이, 더럽게, 하고 옷소매에 화면을 닦으면서도 노래 부르는 듯한 말투를 했다.

“그러니까 이제, 새 주인 잘 만나는 게 네 살길이다. 알았지?”

올린은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한동안 열렸다 닫힐 뿐 소리를 내지 못한 입술 속에서,

“아.”

하는 짧고 깊은 탄식이 흐를 때쯤, 또 다른 남자가 긴 장대 끝에 꿰인 딜도를 가져왔다. 저택에서도 자주 만났던 물건이지만, 딜도의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어린애 주먹처럼 부풀어 있는 점이 달랐다. 장대의 길이는 상당히 길어 바로 세우면 올린의 배꼽까지 닿았다.

올린의 아래가 전혀 젖지 않았으므로, 남자는 손에 침을 뱉어 다물린 입구에 바르듯 문질렀다. 혐오보다 큰 공포로 올린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동안, 살이 쓸리도록 거친 움직임 끝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진 손가락들이 퍽퍽 속을 들이받았다. 좁을 리 없는 속이 좁다고 중얼거린 남자가 한쪽 무릎을 잡아 꺾어 올릴 때, 나머지 한쪽 다리로만 체중을 지탱하는 게 버거워 목이 졸린 올린의 눈이 반쯤 넘어갔다.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가 창끝으로 찔러야 할 어떤 과녁이라도 되는 듯, 장대 끝의 딜도가 함부로 와 닿아 항문을 우악스럽게 좌우로 눌러 비볐다. 목매달린 얼굴에서는 충격과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수도꼭지 틀어 놓은 듯 흘러내렸다. 안에 단단한 심이 든 딜도가 살을 짓이겨 가며 들어가고, 가장 두꺼운 부분이 속에 자리 잡을 때, 올린의 목에서는

“곡.”

하는 구역질과도 닮은 소리가 새었다. 그 비통한 고통의 발음이 지나치게 명료함에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렸던 남자도, 장대 끝의 딜도를 쑤셔 넣은 남자도 피식 웃었다. 장대는 이제 머리 부분이 올린의 배 속 깊숙이 들어간 채, 그 다리 사이에 세워졌다. 짧게 매인 목, 발끝으로만 지탱하는 자세 때문에 올린의 항문과 바닥을 잇듯 선 장대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단단하게 버텼다. 꼬챙이에 꿰인 듯한 상태의 치욕적인 고통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육체에 가해지는 잔인한 고문 속에서도 올린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19번의 시체를 떠올렸다. 남자는 바닥을 적시지 않는 편이 견디기 쉬울 거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바닥은 땀이나 소변이 아니라 올린의 눈물로 벌써 젖기 시작했다.

*

좋은 액받이란 어떤 물건인가. 둘째 도령은 쓸 줄만 알았지, 제 손으로 액받이를 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죽어 없어진 물건에 대한 애석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더 훌륭한 액받이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회사 일도 일이지만, 자신의 실수로 인해 소실된 형제 공용의 물건을 더 나은 대체품으로 채워 두는 것도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업체를 통해 소개받은 몇 개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흠잡을 데 없었다. 체질과 기질이 갖춰졌을 뿐 아니라 건강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어딘가 달랐다. 그는 올린에게서 받았던 곧은 인상을 그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전 액받이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길러졌는지 궁금해진 까닭은 순전히 비슷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동일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것을 찾으면 될 것 같았다.

그는 비서를 통해 화송으로부터 액받이의 과거 자료들을 받아왔다. 화송에서의 올린의 모습은 별다르지 않았다. 저택에서 입는 비단옷과는 다른 복장이었지만,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이어도 그 미모는 같았다. 조금 다른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지만 얌전하고 순한 태도는 비슷했다. 견디기 어려울 일들을 당하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은 가엾기는 했으나 평범했다. 그저 그런, 액받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올린이 자랐다던 보육원을 통해 얻은 자료는 달랐다. 영상은 고작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그것을 보고 그는 얼어붙었다. 대여섯 살 남짓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연말 행사 따위인지 모두들 별이 달린 종이 왕관을 썼다. 올린은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 중 두 번째 줄 왼쪽 끝에 서 있었다. 영상이 플레이되기 전의 멈춘 모습을 보면 입이나 벙긋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만 댕그랗게 커다란, 겁먹은 인상의 아이였다.

그러나 인상과는 달랐다. 플레이하자, 올린은 웃었다. 거미에 대한 노래는 정비에게도 익숙한 가락이었다. 그냥 미소 짓는 게 아니라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까딱이며 방글거렸다. 짧은 노래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올린은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옴찔거리며 율동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다가, 무언가 실수를 한 모양으로 혓바닥을 길게 내밀었다가 쏙 집어넣고 고개를 젖히며 꺄륵꺄륵 자지러졌다. 웃는 모습은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액받이라는 관습을 조사하고, 자신과 아버지 대와 그 윗대를 거쳐 간 액받이들을 조사하면서 그는 며칠 밤을 새고 며칠 낮을 고뇌했다. 처음부터 액받이였을 것 같던 올린의 과거를 캐며 낱낱의 정보에 일일이 괴로워했다.

네 형제처럼, 올린도 사람으로 태어났다. 운이 좋고 나쁨의 차이를 제외하면 하나도 다를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눈에 띄지 않으나 성적은 좋은 아이로 졸업했다. 중학교를 입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잘했다. 타고난 몇 가지 형질이 희귀한 사람을 매매하여 물화하는 업체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까지 갈 수도 있었다.

일을 하고 여가를 즐기고 관계를 맺으며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게 어린 올린이었다. 겉모습만 사람과 닮았을 뿐, 타고나기를 물건으로 났다고 생각한 것은 돌이켜보면 괴이하리만치 끔찍한 착각이었다. 그가 물건이 되어 버린 까닭은 정비 자신을 비롯한 그의 사용자들과, 사용자들을 위해 물건을 공급하는 자들이 그를 물건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지구는 둥글다. 불은 타오르고 물은 흐른다. 그토록 당연하던 것이 사실은 조금도 당연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게 된 그 날 아침, 정비는 자신이 느끼는 애틋한 감정의 정체 또한 머리를 때리는 충격으로 깨달았다. 보게 된 영상은 그래서 반가운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이전에 쓰시던 물건과 음성 및 신체 특징이 일치합니다.”

간략한 보고와 함께 비서가 보내 준 것은 낯선 링크였다. 클릭한 화면은 여러 개의 언어로 자막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둔 경매 홍보 영상이었다. 가장 철저히 물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도, 순간 정비는 이기적이고 잔인하게도 그의 생존을 기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 형을 의심했다. 정아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가 해 왔던 무심하고 잔혹한 장난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번 일도 형의 손길이 닿았을지 모른다. 혼자 움직여야 했다.

핏발 선 눈이 비서를 향했다. 비서는 이미 다음의 명령을 예측하고 있었다.

“레드 워터에 의뢰할까요.”

정비는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투르크메니스탄에도 민간 군사 기업이 있었지.”

“코자치 말씀이십니까.”

“코자치와 레드 워터 중 의뢰인의 현장 동반을 허용하는 쪽으로 의뢰하지.”

“사장님,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정비는 초조하게 관자놀이께를 주물렀다. 영상 속에서 공포에 질려 가쁘게 쉬던 올린의 숨소리가 그 안을 꽉 채운 것 같았다. 비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올린은 사람이다. 그것도 정비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직접 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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