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상자 (25/65)

# 상자

훈련은 끝났다. 요란했던 입소식과 달리 퇴소식은 따로 없었다.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교모임의 특성상 바로 이 주 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엔 다들 바쁜 주인들이라서였다.

입소자들은 깨끗이 세척, 건조되어 주인에게 배달될 금속 상자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 상자가 주인들에게 배달되는 것으로 훈련이 끝나는 것이다. 주인에 따라 상자에서 꺼내어 주지 않고 한동안 방치할 수도 있고, 배송받는 즉시 꺼내 주고 위로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이 상자에 대해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는 액받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앞으로 겪을 수 시간의 고난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상자더라도, 어두운 곳에 손발이 묶인 채 갇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또 하나의 두려운 관문이기 때문이었다.

올린은 순서를 기다려 젖꼭지에 달렸던 명찰이 떼어졌다. 오랫동안 연약한 돌기를 괴롭힌 명찰은 들어가 웅크릴 금속 상자의 뚜껑에 부착되었다. 12번이라고 쓰인 명찰이 달린 상자는 다른 것들과 똑같이 까맣고, 아주 작아 보였다. 훈련 기간 동안 살이 많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저기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올린은 손이 등 뒤로 묶이고 두 발목이 서로 교차하여 백숙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입에는 재갈이 단단히 채워진 채, 상자 안에 꼭 맞도록 들어가 웅크릴 수 있었다. 고개를 숙여 턱이 쇄골 사이를 파고들 지경으로 목을 움츠리자 상자의 덮개가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철컥철컥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올린은 어떻게든 공포를 기대로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상자째 짐이 되어 몇 시간만 운송되면, 네 분 도련님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운송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서른 명의 입소자들이 모두 상자 안에 들어갔는데도 그랬다. 언제쯤 이동하게 될까 잔뜩 긴장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올린의 귀에, 숨 헐떡이는 소리와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첩첩이 쌓인, 사람의 몸이 든 상자 중 올린의 것을 발견한 발소리는 철컹거리는 쇳소리로 뚜껑을 열어젖혔다. 안대로 눈이 가려지고 손도 발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제압된 올린이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너 12번 맞지? 심성그룹, 이씨 집안의 올린.”

조교 중 한 명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올린은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짓을 확인한 남자의 무릎이 올린의 구속된 몸을 찍어 눌렀다. 장갑 낀 손이 구부러진 목덜미의 어디쯤을 더듬었다. 탈주 재발을 막기 위해 간단한 시술로 박혔던 조그만 인식 칩의 위치를 확인한 남자는 그 칩과 함께 올린의 살을 도려 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것이 살을 저미는 고통을 느끼면서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재갈이 물리긴 했으나 목 안으로 비명을 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훈련된 몸은 결정적인 순간에 소리를 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순간 막힌 울음이라도 크게 울어 도움을 청할 능력이 올린에게 있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터였다.

친구라고도 부를 수 있던 19번이 그토록 처참한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첫째 도련님의 두 번째 이름이 끝까지 숨겨졌을 수도 있었다. 둘째 도련님의 다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셋째 도련님이 제 의지에 반하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 수도, 정환이 달콤한 연인 행세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올린에게 있어서는, 건강하지 않은 애착과 강제된 순종심으로 찼던 마음이 흘러나가 안이 텅 비고 마침내 그 빈 곳에서 죄책감으로 인한 광기와 전광이 움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주 먼 훗날의 올린이 괴롭거나 위급할 때 사람다운 소리를 내게 되는 계기는, 이 순간을 돌이켜 본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그는 모든 것이 이상함을 느끼고도 침묵한 과거의 자신을 혐오하거나 학대하지는 않는다. 뒷날 완성될 그는 알기 때문이다.

상자 속에 갇힌 올린에게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암묵이 불러온 끔찍한 귀추가 온전히 해악을 향하지만도 않았다. 벌어질 모든 일이 무력하게 결박된 액받이의 책임은 아니다. 책임의 파이를 나눈다면 가장 작은 부스러기는 올린의 침묵에 떨어질 것이다.

훗날의 그는 스스로에게 그러한 방식의 자기 옹호를 허락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갖는 것이 때로 통렬한 자책보다 더욱 가치 있음을 아는 미래의 올린은 이미 물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일 것이다. 주체로 났으나 그것을 잊어 대상일 수밖에 없던 자는 결국엔 자신이, 제가 섬기던 네 도련님과 하등 다를 바 없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올린은, 목덜미의 살이 칼날로 저며져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12번은, 아직 아니다. 침묵하는 제 입을 혐오하면서도 끝내 울기만 하는 그는 아직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접하지 않는다.

목덜미에서 출혈하는 올린의 귀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상자 앞에 걸렸던 번호가 교체되었다. 금속끼리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알려 주었다. 19번의 표식이 붙었기 때문에 더는 12번이 아니게 된, 물건으로서의 올린은 안대를 눈물로 적시며 숨만 몰아쉬었다.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쉴 때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는 사실 피 냄새가 아니라 철의 냄새일 수도 있다고, 올린은 자신을 속였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은 그저 허약한 제 마음이 부리는 엄살일 뿐이라고, 그는 사실을 부정했다. 도련님들을 만나려던 기대가 지나친 욕심이 아니라 곧 이루어지고 말 꿈이라고, 뜨거운 초조함으로 망상했다.

그러나 어리석음을 가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을 치는 불길한 예감 속에 그는 어둠 속에서 안대를 적시며 울었다. 제 숨소리가 끔찍한 울림으로 귓속을 채운 줄 알았는데, 더욱 커다랗게 마음을 덮는 소리가 있었다. 아, 그는 그 육중한 소리마저 침묵으로 맞이하고 말았다.

끼이익, 타아앙- 금속 상자의 덮개가, 닫히는 소리였다.

[3권에 계속]

네 도련님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