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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해 (20/65)

# 화해

돌아온 후 여러 번 사용되는 동안, 올린은 내내 막내 도련님의 부름을 기다렸다. 그러나 막내 도련님은 올린을 피하는 듯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다. 올린의 생각에 자신은 막내 도련님께 따로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또한, 막내 도련님을 용서할 기회를 얻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호출을 기다릴 뿐인 나날이었다. 오늘처럼 우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면 영영 원하는 방식의 회복은 어려울지도 몰랐다.

오전의 조교가 끝나면 보통 별채의 뒤뜰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날이 좋으면 정원을 거닐기도 한다. 예전과는 조금 다른 꾀가 붙은 올린은 조금씩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 가며, 고용인들이 생각보다 자신의 움직임을 제한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별채를 벗어나 정원의 디딤석 위를 걸어도, 보드라운 잔디를 발바닥에 느껴도 자세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제약하지 않았다.

본채의 응접실들과 식당, 그리고 넓은 홀들도 올린에겐 열려 있었다. 어느 장소에 있든 다만 단정한 자세만 유지하면 되었다. 그 덕에 올린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다소곳이 내린 채로, 은밀하고도 적극적으로 저택의 곳곳을 탐험했다.

초여름의 장미가 탐스러운 길을 따라 걷는 맨발의 뒤로 고용인 하나가 멀찍이 따라붙었다. 정원의 외진 오솔길 끝에는 아치형의 지붕이 덮인 서양식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정원사들이 공들여 장미 넝쿨을 덮어 키워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올린은 정원사들이 장미를 손질하는 것을 구경하며, 이곳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다를 모양이었다. 올린은 장미꽃 사이의 긴 의자에 드러누운, 소년처럼도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며 발을 돌릴까 일순 고민했다. 자신보다 먼저 이곳을 차지하고 낮잠에 빠진 사람은 막내 도련님이었다.

올린은 그러나 도망만 다니는 막내 도련님과는 달랐다. 어려운 것을 피하는 법은 배운 적도 없었다. 맞아야 할 매는 피하지 않고 맞아야 한다. 도련님이 다시금 올린의 마음을 짓찢어 놓더라도 이대로 지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들 네 형제에게 닥치는 액을 막는 물건이다.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날개 밖에서 험한 것을 홀로 맞고 있도록 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올린은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이 눈을 뜨면 보일 만한, 그러나 너무 가깝지는 않을 거리의 바닥에 앉아 평안한 꿈을 꾸는 훤칠한 남자를 지켜봤다. 붉은 장미가 만개한 아래 흰 긴 의자에 늘어진 몸은, 올린이 언젠가 구경한 적이 있는 유미주의 유화를 연상케 할 만큼 오롯이 아름답기만 했다.

아몬드빛 피부 위에 햇살이 어른거리고, 단추가 엉망으로 잠기다 만 얇은 셔츠 아래 튼튼한 가슴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길고 강인한 손가락은 배 위에 얹힌 채 조용했다. 손가락 끝에 감긴 반창고 하나가 올린을 걱정케 했다. 정작 제 몸은 늘 매 맞고 묶인 상처로 멍투성이인데,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해진 적 없는 막내 도련님의 조그만 부상이 마음 아팠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대로 꿇어앉아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같이 아름다운 몸은 오래지 않아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날 때 으레 보이게 마련인 움찔거리는 기척도 없이 번쩍 뜬 눈 안에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모를 액받이가 들어왔다. 도련님은 순간, 자신이 이 녀석을 부른 게 꿈이 아녔었나 하고 돌이켜 보다가 허락도 받지 않고 곁에 머무른 버르장머리 없는 짓의 저의를 깨닫고 얼굴이 벌게졌다. 화보다 수치가 먼저였다.

“너, 뭐야.”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성대는 게으르고 낮게 울렸다. 자신은 도망 다녔는데, 액받이 놈은 자신을 찾아왔다. 어떻게 보아도 성숙한 것은 올린이었다. 한 번 못된 짓을 해 놓고 번번이 지는 느낌이었다. 올린은 제멋대로 기다린 놈답지 않게 조금 놀라더니,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말할 듯, 하지 않을 듯 망설이다 끝내 조용했다.

“씨발년이, 꼴도 보기 싫으니 꺼져.”

막내 도령은 꺼지라고 해 놓고 정작 자신이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고 했다. 엎드린 놈을 그대로 두고 돌아서는 발이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이놈을 상대하여서 할 말도 없었다. 달콤한 낮잠 끝에 씁쓸히 돌아서는 발은 매정함을 가장했다. 걷기 시작하는데 엎드렸던 녀석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쫓아왔다.

올린은 예전에, 낯선 대학 교정에 버려졌던 그 순간에 꿈꿨었던 행동을 이제야 해냈다. 그는 감히 꺼지라는 말에 불복하여 보고 싶었던 도련님 발 앞에 앉아서는, 바지 자락을 붙잡고 거기에 이마를 비볐다. 도련님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으나 그것이 어진 마음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 것을 알았다.

곧 떨어진 꾸중과 이어질 벌은 정말로 무서웠으나, 그래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도련님이 아무리 못되게 굴었다고는 해도, 결국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할 것도 이쪽이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이 다리를 움직여 달라붙은 몸을 밀어냈다. 걷어찬 것도 아니고 밀었을 뿐인데 나동그라진 올린의 몸은 돌아온 후 다시 제한된 식사로 많이 여위어 있었다. 정환은 갓 돌아왔을 때, 벌 받기 전의 토실토실하던 뺨이 훨씬 예뻤다고 생각했다. 쇄골이 저렇게 도드라져서야 어깨를 조금 쥐어 잡는 것만으로도 쉬이 골절할 것 같다.

올린은 다시 기어 붙었다. 이번에는 신발 신은 발바닥이 얼굴을 밟듯이 밀어냈다. 흙조차 묻지 않은 깨끗한 신발인 데다 힘도 세게 주지 않았는데, 밀려난 눈가가 금방 부풀었다. 올린은 멍든 눈가를 한 번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의 발길질에 힘이 실리지 않은 것을 안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막내 도련님이 하는 양이 어리광임을 알았다. 속에도 없이 구애를 거절하는 새침데기 소녀처럼 구는 태도를 서러워할 만큼 올린의 마음이 여리지는 않았다.

“기,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

올린은 담대하게 굴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부러 못되게 구는 애인에게 다가가는 소년과도 같은 천진한 열성으로, 그는 차마 더 이상의 발길질을 하지 못하는 발등을 부여잡아 입을 맞추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제일 먼저, 도련님 생각했어요.”

입술을 누르고 다시 떼느라 멎었던 말을, 쌀쌀맞은 애인 같은 막내 도련님이 기다린다. 그는 지나치게 가까운 데다 너무나 높아서 올려다보려 해도 올려다보아지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올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그가 늘 생각하던 방식대로 도련님과 자신을 함께 엮어 말해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야만 마음이 전해질 것 같았다. 그는 말 없는 도련님이 느린 자신의 말을 기다려 주고 있는 것에 용기를 냈다.

“우리, 가 그런 식으로 헤어졌으니까.”

도련님의 다리가 한순간 움직인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다리에 매달린 자신이 떨고 있을지도 몰랐다.

“도련님께서 제게 모질게 하신 것 이상으로,”

다음 말은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목 안으로 기어드는 것 같았다.

“제가 도련님을, 모진 마음으로 떠났으니까….”

매를 맞게 될 것을 각오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다가와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주제넘은 행동임을 알았다.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도 그랬다. 게다가 감히 도련님과 자신을 우리, 라고 묶다니. 혼자 하는 망상에서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됐다.

그러나 도련님은 때리기는커녕, 욕설조차 뱉지 않고 잠잠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으므로, 올린은 주춤거리며 두 손을 그 손에 쥐여 드렸다. 잡아 일으키신 다음에 얼굴을 때리시려나 생각했는데, 도련님은 탈출의 대가로 뚫린 손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양손 가운데의 관통상은 지금도 매일 항생제를 주사 맞아야 할 정도로 회복이 더뎠다. 애초에 이런 곳에 구멍을 뚫어 아물지 못하게 아일렛을 박아 고정한 상태에서 손이 썩지 않고 멀쩡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도련님은 그 손의 구멍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아, 구멍 건너편, 땅을 기어 자신을 쫓아온 올린을 확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그때, 안아 달라고 했지. 그랬으면, 달랐어?”

그런 것을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 흠칫 놀란 올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고, 그러면 도련님이 더 말을 잇지 않을 것 같았다. 도련님도 그걸 아는지 예의 없는 행동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난 앞으로도 예전과 똑같이 굴 거야, 그래도 넌, 안아 주는 거로 돼?”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참았던 눈물이 툭툭 쏟아졌다. 똑같이 굴겠다는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안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의 탐욕이 무서워서였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쓸어 준 도련님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더 큰 것도 허용해 줄 것 같은 너그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럼 말해 봐, 뭘 더 원하는지.”

올린은 망설였다. 자신은 탐욕스러운 물건이다. 욕심은 늘 차고 넘쳐서, 어느 때에는 여기를 만져 주셨으면, 다른 때에는 저기를 때려 주셨으면, 또는 이것을 채우고 저것을 긁어 주셨으면 하고 한순간도 쉬는 법 없이 무언가를 원했다.

그러나 이토록 관대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도련님 앞에서는 정작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올린은 사랑스러운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자신이 작성해 내놓을 수 있는 수천 수만 가지의 욕망을 모두 갖다 바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밤을 새워서라도 써 올릴 테니, 개중 그나마 들어줄 만한 것을 골라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올린은 결국 딱 한 가지를 골라냈다. 게걸스러운 마음을 고백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이름.”

도련님은 가만했다. 올린은 핼끔 위를 향해 훔쳐보듯 눈길을 주었다가, 아직 도련님께 손이 잡힌 채 바닥에 꿇어앉은 탓에 들어 올려진 제 팔에 얼굴을 닦듯이 비비며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이름으로 부르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돼?”

“네, 도련님.”

“남의 손에 널 맡기더라도, 이름으로만 부르면 된다고?”

“네, 도련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올린 생각에, 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의 생각에,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자신이 다른 개체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도련님이 이년, 저년으로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얼마나 많을까. 귀히 다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름이라는 것을 부여하면 조금은 다를 수 있었다. 이름이 달린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올린은 그랬다.

도련님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별것 아닌 요구인데도 생각에 잠긴 듯 그는 답이 없었다. 올린이 자신의 요청이 지나쳤는지에 대해 반성하며 떠는 동안, 그는 손의 구멍을 단단히 물려 벌린 아일렛을 힘주어 빼냈다. 구멍에서 떨어져 나온 아일렛이 땅을 구르고, 붉게 벌어진 상처가 온전히 도련님의 혀 아래 놓였다.

상처를 후벼 파듯 침입하는 혀가 뜨거웠다. 지끈거리는 통증 위로 타는 것 같은 아픔이 더해졌다. 여윈 손바닥의 단면이 두텁지는 않았으나, 상처의 단면을 통해 전해지는 고통은 다시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올린은 이런 아픔을 주시는 이유가 혹시 자신의 탐욕에 대한 벌일까 무서워 잘못을 빌려고 했다. 이름을 불러 달라는 것은 안아 달라는 것처럼, 들어주실 만한 소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도련님은 올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에서 분노하시는 분이다. 죄, 하고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도련님의 목소리는 너그러웠다.

“이름으로 불러 주지. 하지만 내게도 조건이 있어.”

높이만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던 도련님이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손이 잡힌 채 낮게만 있었던 올린의 눈앞에 갑자기 들이대어진 잘생긴 얼굴,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우뚝한 콧대 양옆에 짙게 그늘져 그 광채만 선명한 눈으로 도련님이 대가를 바랐다.

“대신 너도, 날 이름으로 불러야 해.”

올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았다. 이미 그러고 있었다, 속으로는.

“소리 내서 대답해.”

“네, 그러겠습니다, 저, 정환… 도련님.”

“그거 아니야.”

“정환, 님.”

도련님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저, 저, 정환. 정환, 아.”

“잘했어.”

정답이다. 해괴한 것을 요구한 도련님이 웃었다. 크게 만족하여, 낮고 듣기 좋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올린아, 오늘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름이 있는 물건은 기대와 공포가 섞인 눈으로 이름 있는 사람의 감미로운 폭언을 들었다.

“내가 너, 존나 오래 기다렸거든.”

올린은 정환의 명령으로 옷을 벗었다. 아일렛이 빠진 손은 어쩐지 움직임이 더뎠다. 아래에 넣은 항문마개를 제외하고 다 벗은 몸을 봐 주는 눈길이 뜨거웠다. 올린은 다리 사이의 문신을 마음에 들어 해 주실까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자지가 두근두근 울었다.

정환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 무심코 뒤로 기대다, 장미 가시에 팔을 찔렸다. 붉게 흐르는 핏방울을 핥는 얼굴에 못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올린의 눈에도 보였다. 그가 떠올리는 못된 생각이 얼마나 자신에게 큰 고통을 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을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했다.

“정원사들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을까?”

그는 한참이나 떨어져 선 고용인을 향해 물었다. 고용인은,

“불러오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도련님은 한가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원사를 불러올 게 아니라,”

그리고는 발가벗은 올린을 향해 싱긋이 웃어 주었다.

“올린을, 우리 올린을 정원사들에게 데려가.”

정환이 기어가라고 명령했으므로, 올린은 네발로 기어 고용인의 뒤를 따랐다. 두 발로 걸어온 길을 네발로 돌아가자니 속도는 느렸다. 아일렛 빠진 구멍은 땅을 짚을 때마다 뜨겁게 뭉그러졌다. 조금 휜 길을 돌아갈 때, 살짝 돌아본 도련님은 다시 긴 의자에 앉는 참이었다. 편안히 뻗은 긴 다리가 느긋하게 흔들렸다.

정원사들은 작은 미로를 이룬 관목을 가지치기하는 중이었다. 높고 낮은 사다리 위에 각각 몸을 걸치고 있던 세 남자는 알몸으로 기어 온 액받이를 알아보고 서둘러 내려왔다. 중년의 남성 하나와 젊은 남성 둘로 이루어진 정원사들은 맨발로 정원을 쏘다니는 액받이의 존재는 익히 알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들에게 올 만한 용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용인이 정원사 중 가장 경력이 긴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올린을 소개했다. 중년의 정원사는 도련님들의 귀한 물건이 자신의 앞에서 발가벗은 채 무릎을 꿇은 것에 당황했다. 그 앞에 다가가 덩달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뒤따라 다가온 두 명의 젊은이들도 햇빛을 가리기 위해 썼던 모자를 벗었다. 올린은 도련님이 시킨 대로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깊숙이 절한 다음 말했다.

“어려운 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정원사는 이제 두 무릎을 다 꿇었다. 액받이가 비록 가혹한 대우를 받고 살기는 했으나 그 지위가 저택의 고용인들보다 낮지 않다. 중년의 정원사는 집 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과 달리 액받이를 매질하거나 묶어 매단 적도 없고, 액받이와 말을 섞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는 당황하여 어떤 일을 해 드리면 되느냐고 물었다.

“부디 사용하시는 가위를 빌려 주십시오, 제가 항문에 담아 도련님께 전해 드릴 수 있도록….”

그는 마침 굵은 가지를 치느라 양손으로 쓰는 거대한 전지가위를 들고 있었다. 검게 탄 그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걸 말입니까? 사람의 몸에 이걸, 어휴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딱 잘라 거절당하자 올린은 갈급하여 울대를 일렁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가위를 가지고 가지 못하면 몹시 호된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

올린이 납작 엎드려 빌었다. 도련님은,

“젖꼭지가 땅에 비벼져서 시커멓게 될 정도로 깊이 절하여 구걸해야 한다.”

하고 명령했었다. 유두가 땅에 닿게 하려면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어야 했다. 젖꼭지를 땅에다 문지르며 두 손을 모아 비는 액받이를 정원사들이 당혹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중년의 정원사가 고용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고용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액받이를 매질한 적은 없으나, 올린 혹은 그 전의 다른 액받이가 정원의 커다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온몸을 채찍질 당하는 꼴은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매질을 하고 나서 며칠을 달아 두는 것도 예삿일로, 멀리서 보기만 해도 가련하고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조아린 청년이 그 꼴을 당하는 것은 면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양손 전정가위를 항문에 넣어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칼날 부분만 20센티에, 무게가 1킬로는 거뜬히 나가는 어마어마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커서… 그냥 들고 가시면 안 됩니까.”

그가 전정가위를 보이자, 올린이 울상을 했다. 정원사가 보여 주는 가위는 너무 크고 거대하긴 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항문에 넣기는커녕 입에 물고 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뒤에 물러나 있던 젊은 정원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도련님께서 어떤 것을 자르려 하시나요?”

“장미 가지를, 자르셔야 한다고….”

올린이 울먹이자 그가 얼른 말했다.

“그럼 작은 원예 가위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그가 내민 것은 화목류의 가지를 칠 때 좋은 작은 원예용 가위였다. 집게처럼 벌려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플라스틱 손잡이의 끝부분은 스틸 소재의 고리로 잘 오므라들어 있었다. 엄지손가락 정도 길이의 날을 포함해도 전체 길이가 20센티 정도이므로 항문에 손잡이를 넣고 날은 바깥으로 뺀 채 기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빌려주세요.”

젊은 정원사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얼른 작업장 뒤쪽으로 돌아가 흐르는 물에 가위를 세척하여 나왔다. 손잡이에 묻었던 흙먼지를 씻어 내 물이 뚝뚝 흐르는 것을 가지고 온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상사인 중년의 정원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러는 동안 올린은 몸을 돌려 항문이 정원사를 향하도록 했다. 정원사는 망설이는 손으로 엉덩이 사이에 박힌, 늘 하고 다니는 딜도를 빼냈다. 익숙하지 않은 손길에 느리게 딸려 나오는 딜도 끝에 발간 속살이 함께 쓸려 나왔다가 다시 돌아들어 갔다. 흰 엉덩이 사이에 커다란 분홍색 구멍이 뻐끔거렸다.

중년의 정원사는 작업용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이 두텁고 상처투성이인 커다란 손이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기에 닿았다. 제자로부터 받은 가위의 날 부분을 잡고 손잡이를 밀어 넣는 손이 망설였다. 아무리 잘 벌어져 있는 항문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몸에 넣기엔 너무 크고 무서운 물건이었다.

“부, 부디, 어서….”

올린이 애원했다. 그는 한 손을 뒤로 돌려 더듬더듬 가위의 손잡이 부분을 잡기까지 했다. 손바닥과 손등을 뚫은 커다란 구멍이 난 가여운 손이 가위의 날에 찔려 다치기라도 할까 봐, 정원사는 얼른,

“다칩니다, 손 떼십시오.”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올린이 얼른 손을 치우고 납작 엎드려 엉덩이만 쳐들었다. 주의를 받아 기가 죽은 듯, 마른 다리가 벌벌벌 떨고 있었다.

“그럼 넣겠습니다.”

정원사는 날 쪽을 잡은 채, 손잡이 부분을 꾹 눌러 더 오므라들게 한 채로 벌어진 항문에 짓누르듯 삽입했다. 손잡이의 요철이 내벽을 긁으며 버겁게 들어가는 게 아플 텐데도 올린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다. 반쯤 들어갔을 때, 그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손을 놓으려 했으나, 옆에서 지켜보던 젊은 정원사가

“그러면 기어가는 동안 뒤로 빠져서 다칠 수 있습니다.”

하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중년의 정원사는 다시 가위를 잡으려다가 문득 골을 내며,

“에잇, 난 모르겠다. 네가 마저 해 드려라.”

하고는 몸을 일으켜버렸다. 올린이 흐느끼는 떨림에 번쩍 쳐든 흰 궁둥이가 따라서 푸르르 떨었다.

젊은 정원사는 올린의 볼기를 살며시 쥐어 벌리고, 원예 가위를 잡아 좌우로 돌리며 더 깊숙이 삽입했다. 칼날만 항문 밖으로 삐져나온 모습은 보기에 무척 잔인해 보였으나 올린이 다치지 않으려면 오히려 깊이 넣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상처 없이 기어서 도련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거는….”

젊은 정원사가 제 허리춤에 매달렸던 원예용 장갑 한 쌍을 내밀었다.

“도련님께서 날을 잡아 가위를 빼실 때, 장갑이 없으시면 손을 다치시니까….”

그는 네발로 기어갈 올린이 그 장갑을 받지 못함을 뒤늦게 알아채고 고용인에게 장갑을 건네려 했다. 그러나 고용인은,

“입에 물려 주시면 됩니다.”

하고 말할 뿐 받아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정원사는 올린의 입에 장갑을 물려 주었다. 올린이 꾸벅, 인사를 하는데 그 눈물 찬 눈이 너무 반짝거려서, 정원사는 한 걸음 물러앉았다.

“아, 그럼, 이건 어떻게 합니까.”

다른 정원사 하나가 아까 빼냈던 항문마개를 손짓했다. 땅에 구르던 그것은 올린의 속에서부터 묻어 나온 액체로 축축한 위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다. 올린이 입에 물린 장갑을 뱉고 그것을 물어야 하나 생각하는데, 아까 역정을 내며 물러났던 중년의 정원사가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바구니였다.

올린은 다시 고용인을 따라 기기 시작했다. 작업의 중간에 황당한 방해를 받은 정원사들은 항문에 날카로운 칼날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가위를 물고, 입에는 장갑과 항문마개가 든 바구니를 문 채 얌전히 기어가는 액받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셋 다 음심이 치솟아 바로 작업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잠시 쉬기로 했다.

그러나 올린은 쉴 수 없었다. 도련님은 정원사로부터 빌릴 물건과, 운전기사로부터 빌릴 물건, 그리고 메이드로부터 빌릴 물건을 따로이 지정해 줬었다. 고용인은 정원을 지나 단단한 붉은 벽돌 계단을 통해 한 층 아래의 주차장으로 올린을 이끌었다. 계단 아래의 차가운 공간은 고급 자동차의 전시관을 방불케 했다.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된 주차장 끝에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도련님들을 모시는 기사들이 모여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나왔다.

생활감이 강한 공간에 대기하고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정장 차림이었다. 그들은 액받이의 학대를 꽤 가까이서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올린의 몸을 동여매어 집안 곳곳에 매단 적도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액받이가 자신들의 공간에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들은 간이식 의자에서 저마다 일어나 액받이를 맞이했다.

올린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무서웠다. 자신을 훈육하는 조교들이 하나같이 정장을 입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이전에 있었던 곳의 관리자들이 모두 정장 차림으로 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로 입에 물었던 바구니를 놓고 정원사들에게 구걸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물건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이번에는 케이블 타이였다.

정원사들에게도 있을 케이블 타이를, 굳이 운전기사들에게 얻어 오라고 한 것은 도련님의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물건을 남으로 하여금 학대토록 하며 재미있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는데, 이번의 학대는 그래도 이전 것과는 달랐다. 집 밖에 내보내지도 않았고, 가장 안전한 자들을 활용한다. 올린 또한 도련님의 긍정적인 변심을 읽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수치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무실에 있던 케이블 타이를 가져와서, 올린이 요청하는 대로 올린의 두 손을 등 뒤로 모아 단단히 결박하려 했다. 항문에 뾰족이 튀어나온 가위의 날을 보고도 모르는 척한 것은 그들이 더 심한 학대를 목도한 적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손을 결박하는 방향이었다.

“도련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결박하라고 하셨습니까?”

기사 중 케이블 타이를 가져온 사람이 고용인을 향해 물었다. 고용인은 답하지 않고, 올린에게 물으라는 듯이 눈짓했다. 올린은 도련님이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했던 바를 고했다.

“왼팔은 위로, 오른팔은 아래로 하여 등 뒤에서 두 손바닥을 겹쳐 묶으라 하셨습니다.”

운전기사는 선선히 왼팔을 들어 올리는 유연한 어깨를 강하게 당겨 내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액받이의 몸이 마르고 연하다고는 해도, 그런 자세로 두 손바닥을 완전히 포개기는 어려웠다. 억지로 포개어 케이블 타이로 두 손의 구멍을 함께 묶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왼손은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당겨져 구멍의 상처 또한 케이블 타이의 날카로운 방향대로 다시 찢길 것이다.

“손목도 함께 묶어 드릴까요.”

겹쳐진 두 개의 구멍을 케이블 타이로 묶은 기사가 혀를 차며 물었다. 양 손목을 조이고 손목끼리 당겨지도록 한 번 더 결박하면 구멍의 아픔은 덜할 텐데도, 올린은 고개를 저었다. 허락받지 못했다.

“…아닙니다.”

벌써 당겨진 구멍의 끄트머리가 찢겨 피가 흘렀다. 아일렛이 있었더라면 금속이 케이블타이의 힘을 버텨 줄 테지만, 그것은 이미 정환이 정원의 잔디 위로 던져 버렸다. 올린은 손의 아픔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아픈 자세를 한 채 세 번째의 목적지를 향했다.

이제 두 손이 뒤로 묶였으므로, 네발로 걸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릎으로 길 때 상체를 세우면, 항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가위의 날이 사타구니를 찢어 상처를 낼 것 같았다. 상체를 구부린 채 무릎걸음으로 기어가는 꼬락서니를 기사들이 지켜보았다. 느리게 떨며 움직이는 다리 사이로 장액이 흐르는 걸 보고 그들은 액받이도 저 짓거리를 즐길 줄 알겠거니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익숙한 곳이었다. 본채의 후문으로 들어가 어두운 복도를 돌면, 다이닝룸을 지나지 않고도 주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메인 주방은 손님이 들지 않을 때도 언제나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저택 중에 가장 조명이 밝은 곳이기도 했다.

주방의 고용인들은 비록 굶주린 액받이에게 마음대로 음식을 먹이는 것만은 금지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 자신은 늘 맛있는 것을 즐길 수 있어 대부분 유쾌하고 통통했다. 올린은 그들의 밝은 기운이 좋아 주방 옆의 복도를 걸을 때는 일부러 느리게 걷곤 했다. 그러면 누군가는 안녕, 오늘은 몸이 좀 어때요, 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 주는 것이다.

잔혹하게 묶인 채 주방에 들어서는 것은 그래서 더 창피했다. 이곳의 고용인들도 올린의 처지를 잘 알고, 계단이나 복도에서 묶이거나 묶이지 않은 채 벌을 서는 꼴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치는 데는 다들 익숙했다. 그런데도 올린은 두 팔이 뒤틀린 채 등 뒤에 고정되고 젖꼭지에는 흙먼지가 묻고, 엉덩이에는 가위를 꽂은 처참한 몰골로 그들 앞에 기어들어 가는 게 부끄러웠다.

쉬는 시간인지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활기차게 떠들던 그들은 올린의 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중 나이 많은 여성 고용인 하나가 익숙한 태도로 아일랜드형 작업대에 기대어 말했다.

“무엇을 얻으러 오셨나요.”

형편없는 꼴을 동정하지도, 놀리지도, 호들갑 떨지도 않는 담담한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기죽은 채 떨며 들어온 올린이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떨구어 내고, 물고 온 바구니를 바닥에 둔 후 작은 목소리로 구걸했다.

“긴, 화병을… 얻으러 왔습니다.”

화병이라면 주방이 아니라 청소 담당자들에게 갔어야 하는데 고용인이 여기로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청소를 담당하는 고용인들을 만나려면, 저택의 가장 높은 층의 복도 끝까지 가야 한다. 모습을 보아하니 엘리베이터를 쓰는 것은 허락받지 못했을 터, 딱딱한 계단에 무릎을 부딪치며 기어갈 올린이 가여워 고용인은 궁여지책으로 이쪽에 도움을 청한 것 같았다.

그는 올린을 안내해 온, 겉보기에는 몹시 냉정해 보이는 고용인을 바라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는 주방에서 일하는 젊은이 중 하나에게 4층으로 올라가 가장 폭이 좁은 화병을 얻어 오라고 이르며 당부했다.

“너무 화려한 것 말고, 되도록 겉이 매끈한 거로 받아와. 액받이가 사용할 거라고 하면 알아서 줄 테지만.”

심부름을 마치고 무릎걸음으로 돌아간 곳에 도련님은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다. 올린은 날 선 것을 아래에 꽂은 채 조심하며 기느라 벌벌 떠는 다리를 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초하의 해는 생각보다 짧아서, 이제 곧 어두워질 것 같이 사위는 고요했다. 풀벌레가 찌르찌르 울었다. 도련님은 이대로 밤잠까지 잘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올린은 온몸의 아픔보다, 긴 수치 끝에 오른 아래의 열기가 괴로웠다. 비참한 꼴로 온 저택을 기어 다니면서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보이느라 가위의 손잡이가 누르고만 있는 아래의 가려운 곳이 미칠 것 같았다. 빨리 깨어나서 뭐라도, 어떻게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단잠에 빠진 도련님이 미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큰 용기를 내어 고백했으면 박아 주어야 할 게 아닌가.

“도, 도련님….”

풀벌레 우는 소리보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느라 올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도련님이 누운 화사한 서양식 정자에도, 장미 넝쿨이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설치된 고풍스러운 등에도 불이 들어왔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사위임에도 불이 켜지니 무척 늦은 밤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은 올린의 애타는 부름에 답이 없었는데, 올린은 이제 온몸이 비비 꼬이도록 홧홧한 아래가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련, 님….”

한 번 더 불렀을 때, 올린은 도련님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말았다. 자는 사람과 자는 척하는 사람의 기척은 다르다. 도련님은 벌써 잠에서 깨었으면서, 짐짓 아직 깨지 않은 척이었다. 올린은 허벅지를 모아 슬쩍 자신의 자지를 건드리면서 조금 더 버티다가, 문득 도련님이 요구했던 대가를 떠올렸다. 올린만큼이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그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어도 부를 수는 있었다.

“저, 정,”

한 음절을 소리 내 보다가 단 숨을 쉬었다. 찬 공기에 발기한 젖꼭지 끝에서 찌르르, 하고 낯선 감촉이 울렸다. 초여름 공기일지도, 아니면 몸의 주인이 내놓는 낯설고 사랑스러운 이름의 얌전한 가락에 반응한 걸지도 몰랐다.

“정환아.”

나지막한 부름에 눈을 뜨는 도련님의 눈은 맑았다. 잠든 적이 없는 것같이 깨끗했다. 졸림의 기색이란 찾아볼 수 없는 그 눈을 보면서 올린은 아주 어렸을 적에, 액받이로 일하게 되기 한참 전에 들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물레에 손을 찔렸다던데 오늘 정환의 둘째 손가락에도 밴드가 감겨 있었다.

“왜, 올린아.”

맑은 눈과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로 공주님이 물었다. 올린은 작게,

“시키신 물건, 가져왔어요.”

하고 말했다. 정환은 무심한 듯 도로 눈을 감으며 그랬어, 할 뿐이었다. 등을 돌려 누울 것 같은 태도에 애가 탄 것은 올린이었다.

“가위도, 화병도, 전부 가져왔어요….”

정환이 으응, 했다. 뒤척이느라 고개마저 저쪽으로 기울여졌다. 올린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니까, 저, 정환아,”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니 눈을 떠 준다. 드러누운 긴 몸은 게으른 호랑이 같았다.

“자지, 자지 한 번만,”

거기까지 말했는데 아래의 열기가 솟구쳤다.

“넣어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커다란 몸이 일어나 다가왔다. 어두운 사위에 노르스름한 조명을 등진 몸은 거대했다.

“한 번만 넣어 달라니 그런 건 안 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바짝 선 자지 끝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그 보지, 아주 짓무르도록 쑤셔 줄 거니까.”

올린은 넘쳐 오르는 기대에 꼴사납게 묶인 상체를 쳐들고, 자신을 잡아먹으려 드는 입술을, 입술을 벌려 맞이했다.

“올린아.”

가위도, 화병도, 바구니에 담아 왔던 다른 것들도 몽땅 내던져졌다. 올린은 장미 가시 달린 가지로 채찍질을 당하거나, 가시가 다듬어지지 않은 장미꽃이 항문에 꽂힐 것마저 각오했었다. 그러나 정환은 그런 상상이 들 만한 심부름을 시켰을 뿐 더 이상의 잔혹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픈 데는 손뿐이었다. 기이한 자세로 결박된 손이 다시 찢겨 피가 흘렀으므로 손이 아픈 건 당연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이 움찔거리도록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아랫구멍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픔이 아니었다. 몸서리치게 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쾌감이었다.

정환은 한쪽 팔꿈치만 허공으로 쳐든 채 꿇어앉은 몸을 잡아당길 때, 팔만 잡아 일부러 아픔을 주지는 않았다. 다른 손은 허옇게 빛나는 볼기를 함께 움켜쥔다. 똘똘 말리고 꽁꽁 묶인 고기처럼 가뿐히 들려, 원형 파고라의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정찬처럼 차려졌다.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린 자세였다.

정환은 지퍼를 풀어 자지를 꺼내 놓기 전에 한쪽 발을 테이블에 올려 웅크린 올린의 몸 옆에 탕, 소리가 나도록 세게 디뎠다. 볼기 사이의 구멍을 벌름거리며 황홀한 기대에 빠져 있던 액받이의 몸이 화들짝, 놀라 튀다가 커다란 손에 내리눌렸다.

“보지 더 벌려, 올린아.”

끙끙대며 무릎 사이를 벌리려 들자 정환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보지 벌리랬지 다리 벌리랬어?”

“죄, 죄송….”

“정환아, 잘못했어, 용서해 줘, 라고 말하면 돼.”

“저, 정환아, 자, 자, 잘못했어요,”

엉겁결에 나온 존댓말에 맞은 곳은 항문이었다. 가위가 빠져나간 데를 짜악, 소리가 나도록 매질한 손이 손바닥째로 삽입할 것처럼 무섭게 구멍을 쑤시다가 떨어져 나갔다. 철벅대는 소리에 끙끙대며 성감을 억누르는 목 안의 소리가 섞였다.

“다시.”

“정화, 정환아, 용서해, 줘어….”

“더 빌어 봐.”

“잘못, 했어, 보지, 잘 벌릴게, 정환아, 때리지, 말아….”

“말만?”

“지, 지금, 벌릴게요, 아니, 벌릴게.”

무서운 물음에 허둥대며 아래를 이완하자 충혈된 내벽이 둥글게 모여들었다 벌어졌다. 갓 도살되어 숙성되기 전의 스테이크감처럼 보이는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숨을 몰아쉬면서도 정환은 시간을 들여 자지 끝만 입구에 살짝 댔다. 벌어진 곳에 닿은 뜨겁고 딱딱한 것에 안달이 난 구멍이 어떻게든 그걸 담아 보려고 쩝쩝대는 것을, 대고만 있는 자지는 조금도 조급하지 않은 척 가만있었다. 올린이 안달복달했다.

“아, 저, 정환아, 아, 너무, 나 급해, 네?”

볼기를 들썩이며 안에 담으려는 몸짓에도 쑤셔 주지 않는 자지가 너무 탐났다. 간식을 앞에 두고 ‘기다려’ 명령받은 강아지처럼 올린의 아래가 침을 진득하게 흘리는 동안 자지 끝에서도 비슷한 질감의 액체가 흘렀다. 아무것도 안 해 주는 게 애가 타서 나중엔 숫제 미친놈처럼 아흐흑, 제발, 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즐기며 내려다보면, 항문이 그 주변까지 온통 발갰다.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며 긴 시간 수치를 당하느라 서서히 치밀어올라 몸을 달군 화끈화끈한 기운에 뇌마저 녹아 버린 모양인지

“정환아, 자, 지- 넣어 줘!”

하고 애원하며 울어 버릴 땐 이미 사위가 어둑할 때였다. 정환은 그 눈물겨운 통사정이 터지자마자,

“헉!”

하는 벅찬 소리가 올린의 목구멍을 통해 치솟도록 깊숙하고도 묵직하게 자지를 짓쳐 넣었다. 흥분의 정도가 지나쳐 평소보다 크게 발기한 자지가 끈적거리도록 젖은 구멍 깊이 침입하는 쾌감이 두 사람의 머리를 동시에 때렸다.

“아악, 아악, 저, 정화아악,”

단속하지 못한 날것의 비명 속에 어린 기쁨이 듣기 좋아 정환은 묵직하게 쳐올리던 것을 조금씩 잘게 쪼개어 빠르게 움직였다. 뻑, 뻑, 뻑, 하고 맞물린 데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빠르다고 거세지 않은 게 아니었고, 거세다고 움직임이 뭉툭하지도 않았다. 등 뒤로 겹쳐 묶인 손바닥 아래 날씬한 허리가 꽉 꽉 조여들다 부르르 몸부림치도록 확실한 겨냥에 올린이,

“아욱, 카악, 나 주, 죽어, 도, 도련, 저, 정환아-.”

하며 흰 궁둥이를 벌벌 떨고 퍼뜩퍼뜩 경련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며 요분질하는 항문에 꽉 잡힌 정환은, 순간 자신이 박는 이 몸도, 박고 있는 이 몸도 사람 아니라 개의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개가 교미할 때는 구멍에 물린 자지가 빠지지 않는다고, 언젠가 들은 것도 같기 때문이었다.

헐떡이며 정환은 쭈억쭈억 소리를 내는 결합부를 살폈다. 자지를 씹느라 놔주지 않는 구멍 입구가 단단히 오므라들어 있었다. 그는 아프도록 물린 데가 풀리도록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다정스런 손과 달리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다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년이, 보지, 꽉 문 것 좀 봐, 씹질이 그렇게 좋아? 보짓속이 아주, 으윽, 씹고 안 놔주네. 올린아, 이 씨발년아, 묻잖아, 씹질 좋냐고,”

올린이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은 씹질보다 정환이 좋았다. 기억이 돌아와 문득 자신이 그를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씹질이 싫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박히고 쑤셔지고 후벼지면서도, 수치를 당하고 매를 맞고 욕을 먹더라도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게 느껴지는 이 욕정이 좋았다.

“좋, 좋습, 흐으, 니다, 아아….”

“다, 다시, 그거 아니야, 올린아, 다시 말해,”

“조, 좋아아, 좋다구, 정환, 아아아!”

귓속을 핥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 버린 올린이 정환의 손안에 죄를 싸지른 후에야, 정환은 올린의 안에 은혜를 베풀었다. 오랫동안 교합한 두 남자의 숨소리가 늦봄, 밤의 뭉근한 공기 위를 떠돌았다. 정환은 올린의 죄를 덮어 줄 생각으로 손에 흥건한 것을 가만히 핥았다. 그것은 달았다. 삼킬 때는 황홀했다. 사정하면 안 되는 몸이 사정했는데도 혼낼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본 이것의 쾌락은, 정환에게도 큰 기쁨을 주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용서하지 않을 수가, 용서받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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