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사슬보다 작약 (19/65)

# 사슬보다 작약

셋째 도령과 외출했던 액받이는 도련님의 차에서 내릴 때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대신 운전해 준 사람의 깍듯한 인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걷기 시작하는 도련님은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액받이의 손에는 어른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작약 한 송이가 들려 있었는데, 겁먹은 얼굴로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그 꽃을 내려놓지 못하는 걸 보면 어쩌면 도련님이 꺾어 준 것도 같았다.

도련님은 주차장에서 본채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대신, 긴 거리를 걸어 붉은 벽돌 계단으로 향했다. 그쪽 방향의 길을 따라 우둑한 정원수를 지나면 올린이 머무르는 별채요, 별채에는 오로지 액받이를 벌주기 위한 용도의 체벌실이 있었다. 별채 입구에 이르니 고용인 몇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상찮은 도련님의 기색을 벌써 전달받은 듯, 성큼성큼 들어서는 걸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저택에서 올린은 신을 신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도련님의 취향대로 차려입혀져, 발에도 운동화가 신겨진 상태였다. 그냥 쑥 밟아 벗어도 되련만 고지식하게도 쭈그리고 앉아 끈을 푸느라 꾸물거리자 몇 걸음 앞서 걷던 셋째 도련님이 돌아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올린이 긴장하여 자꾸 헛손질하자 조심스러워 보고만 섰던 고용인들이 올린의 발에 반쯤 걸친 신을 얼른 훌러덩 벗겨 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느라 손안에 여태 쥐고 있던 꽃대가 부러져 대롱거렸다. 도련님을 따라가면서도 꽃대 부러진 데 정신이 팔린 올린을 셋째 도령이 돌아보고 기가 막혀 했다. 부러진 꽃대를 아예 꺾어 내버리고 남은 부분만 남겨서는 액받이의 귀 뒤에다 꽂았다. 비꼬느라 꽂아 준 꽃에 안 그런 척 설레어 발그스름하니 달아오른 얼굴이 숫제 백치 같았다.

“좋아?”

대답은 없었지만 좋아하고 있다.

“멍청한 놈….”

그는 탄식하며 앞서 걸었다. 꽃이 떨어질까 봐 종종걸음을 치는 올린이 그 뒤를 따랐다. 맨발로만 살던 발에 신긴 양말 때문에, 만질만질하게 광이 나는 목제 마루 위로 올린의 발이 자꾸 미끄러지며 체벌실에 이르렀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에 뒤늦게 올린의 어깨가 움칠 떨었다.

“무릎 꿇어.”

명령이 떨어지자, 착 소리가 날 것같이 낮고 빠르게 꿇어앉은 머리통에 분홍 꽃이 화사했다. 도련님이 골라 입혀 줬던 니트 위로 하얗고 긴 목이랑 잘 어울렸다. 잠시 도련님은 그렇게 서서, 저 목덜미에 매질하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상상했다. 올린이 그것도 모르고 긴 목을 더욱 길게 빼며 고개를 숙였다.

“몇 대 맞을지 생각했어?”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내가 그거 물었어? 왜 엉뚱한 답이야, 아가.”

요정에서 저택에 돌아오는 내내, 올린은 도련님의 느른한 목소리로 야단을 맞았다. 일곱 개 강령을 외라 시키고, 그중 정갈하고 단정한 몸가짐이 몇 번째 항목이냐고 묻고, 그런데 오늘 너, 범절 단정히 굴었느냐고 물었을 때 올린은 말문이 막혔었다. 긴 침묵 속에서 올린이 꺼내 놓은 답에 셋째 도령이 물었다. 그럼 몇 대 맞아야 다음에 잘할 수 있겠느냐고.

“체벌대 올라가 종아리 걷어.”

벌벌 떨며 올라가는 체벌대는 균형 잡기 어렵게 만들어진 좁은 받침이다. 무릎 높이의 짧은 평균대처럼도 생겼다. 여기에 올라 종아리를 맞으며 우는 올린을 보고, 첫째 도령은 횃대에 앉아 노래하는 새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위에 올라 엉거주춤 상체를 숙이고 걷어 올린 종아리는 희고 날씬하고 가늘었다. 그는 종아리를 치기 좋게 다듬어진 회초리를 집어 허공에 휘둘렀다. 휘익, 공기 가르는 소리에 가지런히 모인 다리가 움찔 떨었다.

“몇 대 맞을래.”

물었다. 동동 걷어 올린 바지를 꽉 움켜쥔 손이 벌벌 떨었다. 올린은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도련님들은 가끔 맞을 매의 대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생각하신 것보다 지나치게 적은 숫자를 말하면 반성의 기미가 없다며 더욱 혼이 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많이 맞겠다고 하기엔 회초리가 너무 아팠다.

그는 셋째 도련님께 혼이 났던 때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사흘 전인가, 도련님들의 서재에서 구음 봉사할 때 침을 너무 많이 흘려 범절이 엉망이라고 꿇어앉은 채 흠칫흠칫 떨어가며 어깻죽지를 맞았었다. 가죽으로 겉을 감싼 굵은 회초리로 열 대였다. 그 전에 혼난 건, 아마 계단에서였던 것 같았다. 올린은 둘째 도련님의 부름에 서둘러 가다가 셋째 도령과 마주쳤었다.

“바빠?”

빙글거리며 묻는 물음은, 지금 여기서 네게 박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올린은 둔하고도 어리석게도 말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네 도련님, 둘째 도련님께서 부르셔서 가는 중입니다.”

하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후 그 앞을 벗어나려 했다. 셋째 도령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올린을 데리고 가던 고용인에게,

“얘 좀 늦을 거라고 형님께 전해 줘.”

한 후엔 매질이었다. 계단 난간 위에 엎드려져 양다리를 허공에 휘저으며 엉덩이를 맞았다. 흐른 장액 때문에 난간이 더러워졌다고 구박을 받으며 다 핥아먹었다. 그때 엉덩이도, 열 대쯤 맞았던 것 같다. 한 번 때리신 다음 바로 구멍을 들쑤시는 손가락 때문에 무진장 울었었다. 맞고 나서 둘째 도련님 시중을 들러 가니까 둘째 도련님이 얼굴을 보자마자 혀를 츳, 찼었다.

오늘은 도련님의 지인들 앞에서 실수를 저질렀으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실수이니 어느 정도 참작해 주실 것 같았다. 손에 든 회초리 또한 몹시 매운 싸리나무 회초리니 올린은

“열 대, 맞겠습니다, 도련님.”

하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맞을 매를 부족하게 계산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도련님들은 언제나 올린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이었다. 셋째 도련님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뭐, 열 대?”

하고 묻더니 회초리를 공기 중에 쐑, 쐐액, 두 번이나 휘둘렀다. 올린은 왈칵 서러움이 몰려들어 울먹이면서도,

“스, 스무 대…?”

하고 물었다가 도련님의 기세에 눌려,

“… 서른 대, 맞겠습니다, 도련님.”

하고 대답하고는 갑자기 치받치는 울음을 참으려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말할 수가 없어 그렇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긴 진짜 억울했다. 올린은 애초에 이 집에서 식사 시중을 드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었다. 다른 집안의 액받이들이 그토록 주인의 시중에 익숙한 줄도 몰랐고, 처음 보는 하얀 도자기 주전자가 그렇게 무거운 줄도 몰랐고, 도련님의 지인들이 들고 있던 밑이 둥근 술잔이 그렇게 딱 한 모금 마실 분량의 술만 담을 수 있는 옹졸한 그릇인 줄도 몰랐다.

조심조심 술을 따르다 잘못하여 몇 방울 넘치는 순간 숨을 들이마시고 얼른 바라본 셋째 도련님은 분명, 그때까지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 그 죄로 이토록 무섭게 다그쳐지고 종아리를 서른 대나 맞게 될 줄도 모르고 자리가 파할 때까지 내내 난교가 언제 시작되는지나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올린은 두려움 속에 솟아오르는 억울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지 못하고

“흐극, 으흑,”

하고 작게 소리 내어 울다가 불시에 떨어지는 매를 맞았다.

“아윽!”

하마터면 발바닥으로 단단히 딛고 선 좁은 체벌대에서 넘어질 뻔할 만큼 세찬 매질이었다. 중심을 잡느라 쥐어 잡은 옷자락을 다잡는데, 도련님의 살벌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방금 매 안 셌지, 이건 무효야.”

“잘모, 악, 하, 하나! 아흑, 두울, 흐으… 세엣!”

잘못을 빌던 중에 연이어 세 대가 내리쳐졌다. 손안에서 형편없이 구겨지는 면바지는 오늘 낮에 셋째 도련님이 직접 골라 입혀 준 것이었다. 엷은 베이지색의 바지 아래 동그랗게 여윈 무릎에는 항상 멍이 들어 있다. 돌바닥이든 마룻바닥이든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체를 숙이고, 무릎도 구부린 상태였기 때문에 떨어진 눈물이 멍든 무릎을 스쳤다. 도련님이 짧게 지적했다.

“자세.”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고, 허리를 세웠다. 종아리를 맞을 때마다 지적받는, 무릎을 구부리는 습관도 어떻게든 억누르려 애썼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으, 네엣… 흑! 다, 다서엇….”

비슷한 강도의 매가 떨어졌다. 올린은 무릎을 구부려 아픔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아 냈다. 가느다란 회초리가 어떻게 이토록 깊이까지 스미는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악, 흐윽… 여섯, 흐으, 흐으, 일고옵… 하, 흑! 여, 여더얼….”

쌔액, 날아든 회초리가 살에 감겼다. 착, 차악, 차악- 뼈를 울리는 통증에 저절로 무릎이 굽어진 것 같았다. 오금을 쿡쿡 지르는 회초리 끝을 느끼고 무릎을 펴는 것만으로도 피맺힌 피부가 팽팽하게 부풀어 찢어질 듯 아팠다. 올린은 흘러내리는 한쪽 바지를 다시 단단히 잡으며 도련님의 꾸중을 들었다.

“너 이렇게 엉덩이 내미는 거, 종아리로 부족하다는 뜻이야?”

“아닙니, 다, 힉! 잘못했, 습니다.”

“도련님이 회초리질 할 때 제일 싫어하는 게 뭐야.”

도련님의 목소리는 침착하여 더 무서웠다. 묻는 말인데 끝이 내려가는 차가운 어조에 올린의 대답은 기어들었다.

“자세, 자세 바르게 못, 하는, 거요….”

“도련님이 우리 아가 묶어 주면 어떻게 돼.”

“두, 두 배로, 흐흑, 두 배로… 맞습니다.”

“손발 묶여서 예순 대 채우는 게 낫겠어?”

“아닙니다! 아니에요, 도련님. 자, 잘할 수 있습니다….”

올린은 지금 나누고 있는 문답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에 대함임을 잊고,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싶어졌다. 서른 대도 견딜 생각을 하면 까마득한데, 그 두 배나 맞게 되면 분명 밤새 아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잠자리 예절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해 아직도 손발이 묶여 자야 하는데 고용인들은 올린의 몸 어디에 상처가 있든 항상 정자세로 눕혀 묶었다.

종아리의 맞은 살이 이불에 눌리고 쓸리는 고통 때문에 우는 꼴을 들키면 분명히 또 눈물이 그칠 때까지 무릎을 꿇고 명상이다. 한밤중에 울다 들켜 잠자리에서 끌어내어져,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 밤에도 그렇게 되면 정말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술 몇 방울 흘렸다고 종아리가 터지도록 매질이라니, 아무리 잘해도 못 해도 매 맞는 처지라고는 하나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틀렸다고 혼내는 것처럼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

“흐으, 읍, 아, 아홉… 아윽! 아으, 여, 얼!”

우는 몸에 내려진 매는 이전 것과 비슷한 세기이긴 하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꾸만 맞은 데를 만져 뜨거움을 달래고 싶었다. 올린은 자신이 그런 충동과 싸우는 것을 도련님이 잘 알고 계신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 없이 바라만 보고 계신 것은 일종의 시험 같았다.

셋째 도령은 사교적인 편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목적의 모임부터 결코 그렇지 못할 모임까지, 업계와 업계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즐겼다. 오늘의 모임은 남성 배우들로만 이루어진 사모임이었는데, 이 모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참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공유하기 위한,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매우 건전한 모임이었다.

액받이는 정계, 재계에서뿐 아니라 제법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도 많이들 쓰곤 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액받이를 집에 들여앉혀 둔 배우들은 대개 꽤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유지하면서 덕분에 그 외의 생활에서는 청렴하고 단정한 이미지를 고수할 수 있었다. 셋째 도령처럼 안팎으로 망나니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다.

액받이를 데리고 모일 수 있다는 것은, 비밀을 공유하는 즐거움 외에 어떠한 연대 의식을 제공했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 은밀한 장난감을 대동하여 비교적 건전한 방식으로 술자리를 갖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난교 따위의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액받이를 통해 간단한 유흥을 즐기기는 하나 다들 조심스럽게 행동하여 체통을 지킨다.

액받이만 보면 눈이 뒤집혀는 온갖 못되고 지저분한 짓을 일삼는 재벌가 자제들보다 오히려 품위 있다. 다른 모임에는 액받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셋째 도령이 올린을 데리고 나선 것은 이 모임의 그러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올린을 처음으로 선보일 자리였으므로, 셋째 도령은 그를 아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색 엷은 면바지를 입히고 푸른색의 고급 니트를 걸치게 하고서도 어딘가 부족한 것은, 이제 귀를 덮을 정도로 자랐으나 멋없이 잘린 머리카락이었다. 미용실에 데려가며 형제들에게,

‘우리 아가 머리 베이비 핑크로 염색 어떰?’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가 세 형제한테 각각,

‘하기만 해 형 내가 걔 머리 싹 밀어 버리고 얼굴 존나 팰 테니깐 형은 나보고 옛날부터 얼굴 때리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놓고 요전번에 뺨에 핏줄이 다 터지도록 팼더라 여튼 형 맘대로 하쇼 나도 내 맘대로 할 꺼니깐’

‘안 돼.’

‘형은 좋아 근데 대신 형도 올린이한테 유선 발달 주사 놓을래 남자애라 그래봤자 그렇게 가슴 안 커져 끽해야 꽉 찬 에이컵?’

하는 답을 받고 포기했다.

고급 미용실에 데리고 들어가도 올린은 담담했다. 미용실 특유의 다소 소란스러운 인사에도 놀라지 않았다. 늘 셋째 도령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디자이너는 오늘은 자신이 아니라 저 녀석 머리를 만져 달라는 요구에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정규 씨, 지현이는 자기밖에 없던데?”

“나도 그래요.”

한 삼 개월 만난 여배우가 자신과의 만남을 디자이너한테까지 소문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셋째 도령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반년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였다.

“그럼 이 친구는, 자기 애인 아니야?”

촉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올린은 차분했다. 거울 속 하얀 얼굴의 갈색 동공에는 미용실 거울의 조명이 반사되어 부자연스러운 꽃모양이 반짝였다. 미운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올린에게 물었다.

“아가, 널 두고 내 애인이냐는데?”

올린은 어떻게 대답해도 당황하지 않을 미끈한 얼굴을 거울을 통해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제 딴엔 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남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일 만큼 찬 얼굴이었다. 디자이너는 깔깔 웃으면서 어머 동생분이 기분 나빴나 봐, 미안해요, 아님 아니지 왜 형을 노려보고 그래,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둑어둑해져서야 도착한 곳은 멀리서 보면 산속 절 같았다. 구불구불하지만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올린은 어두운 산중에 이는 바람이 무서워 굳었다. 도련님이 이런저런 말을 거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소한 잡담이라도 나누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올린에게는 도무지 말을 이어 가는 재주는 없었다. 그는 도련님이 묻는 말에

“네, 도련님.”

“아닙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도련님.”

하는 소리만 돌려가며 반복하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그러나 도련님은 올린의 그런 대답에도 재미있다는 듯이 하하 웃어 주셨다.

숨겨진 것치고는 규모가 큰 요정이었다. 절인 줄 알았던 곳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미인들이 가득했다. 올린은 예전에도 한복 입은 여자들이 시중드는 곳에 손님과 함께 가 본 적이 있었다. 대개 이런 곳에서는 난교가 이루어진다. 올린은 발레를 맡기는 대신 스스로 주차하는 도련님의 옆얼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따라 내렸다.

주차장에서 요정의 입구까지 걷는 길에는 작약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올린은 도련님의 한 걸음 뒤를 걸으면서 한 손으로 촉촉하고 보드란 꽃송이들을 훑었다. 곧 있을 힘든 시간에 대한 걱정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에 도련님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예쁘지?”

“네, 도련님.”

“여기 작약이 음식보다, 여자보다 더 좋지.”

올린에게 꽃 무리를 보여 주려 일부러 직접 주차한 도련님 눈에, 작약에 둘러싸인 올린이 더 꽃 같았다. 꽃같이 말재주 없는 액받이는 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네, 도련님, 하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으나 도련님은 그 싱거운 대답에도 웃어 주셨다.

“한 송이 꺾어다 내내 혼자 보면 좋겠구나.”

그 말에 올린은 남의 꽃 한 송이, 몰래 훔치고 싶어졌다.

그들은 다정스러운 환대를 받으며 둥근 기둥에 기와가 얹힌, 뚫린 복도를 걸었다. 안내하는 미인의 살가운 미소도 정원의 못에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모습도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들어선 방엔 대여섯 명의 배우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액받이들이 앉아 있었다. 올린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용모의 그들 중 누가 주인이고 누가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자인지 한눈에 구분하지는 못했다.

“정규 형, 오셨어요.”

누군가 부르자 셋째 도령이 그를 향해 가 버렸으므로 올린은 눈을 내리깐 채 얌전히 섰다. 누군가 올린의 손목을 끌어당겨 앉을 만한 자리에 앉혔다.

안내했던 미인들이 옷을 벗는 일도 없었고, 각자의 주인들 곁에서 시중드는 액받이의 옷이 벗겨지는 일도 없는 식사 자리였다. 상식적이고 유쾌한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올린만이 언제 난교가 시작될지 몰라 내내 긴장했다. 난교다, 곧 시작될 거야, 머릿속에 어지러운 울림이 있었다.

다른 액받이들은 각각 제 주인의 시중을 들고 있었으나 올린은 도련님이 시키는 대로 상에서 한 걸음 물러난 자리의 방석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이 가득한 데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앉은 자리마저 상에서 멀어 어설픈 시늉조차 해 보지 못했다. 외려 도련님께 시중을 받는 꼴이었다.

“아가, 이거 먹어 봤니?”

도련님은 때때로 낯선 음식들을 자그마한 접시에 딱 한 점씩만 덜어서 올린의 앞에 밀어 주었다. 먹어, 하는 눈빛에 내려다보았으나 수저는 없었다. 올린은 눈치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숙여 바닥에 놓인 접시 위의 예쁜 음식을 입술로 물었다. 호두를 고기로 감싸 곱게 저민 것, 이름 모를 꽃을 동그란 떡에 지져 꿀을 입힌 것, 혀와 입천장 사이에서 흐물흐물 녹는 감촉의 바다 생물 모두 다 처음 맛보는 진미였다.

올린은 몹시 맛있는 것을 먹으면 입안에 침이 도는 것과 함께 왼쪽 눈에서만 눈물을 흘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첫째 도령은 그게 침샘과 눈물샘이 함께 자극을 받아 그런 거라고 했다. 액받이의 시중을 드는 꼴이 된 셋째 도령은 볼이 해쓱하도록 마른 올린이 처음 맛보는 것을 야무지게 씹고 기쁘게 삼키며 행복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여러 번 상이 바뀌고 한복 입은 여인들이 연주하는 악기가 모두 물러 나간 후에는 제비뽑기하며 놀았다. 올린은 제비뽑기야말로 난교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화송에서는 난교 파티에 끌려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애도 있었다.

아주 예전에, 손님과 함께 참석했던 요정에서의 모임에서 올린을 데리고 갔던 손님이 짧은 제비를 뽑았었다. 그날 올린은 밑이 둥근 술병을 아래에 넣고 엉덩이를 치켜든 채 테이블 위를 기었다. 자리한 손님들의 술잔을 일일이 채워야 했다.

엉덩이를 살짝 기울여 술병에서 액체가 흐르도록 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창피했던지, 게다가 들어갔던 술병보다 더 큰 온갖 흉물들로 아래가 쑤셔질 때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 뒤쪽부터 현기증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번의 제비뽑기는 달랐다. 짧은 제비를 뽑은 주인은 액받이를 남의 먹잇감으로 내놓는 대신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시처럼 들리는 연극 대사 따위를 외웠다. 가장 쓸모없는 재주라며 야유를 받은 사람도 액받이가 아니라 그 주인이었는데, 그는 준비한 게 없다며 첫사랑 얘기를 하겠다는 헛소리를 하다가 만인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데리고 온 액받이에게,

“나비야, 주인님이 물어 뜯긴다, 좀 도와다오.”

하고 오히려 도움을 청했다. 나비라고 불린 그 액받이는 조금 떨면서 요요한 곡을 하나 불렀는데, 그 노래가 끝난 다음에는 모두가 한동안 한숨을 쉬며 조용했다. 누군가 말했다.

“저 친구 데리고 온 놈 목소리 자랑하려고 괜히 그랬구먼.”

셋째 도령도 짧은 제비를 한 번 뽑았다. 그는 형제들 사이의 내기에서는 거의 매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이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 때의 일이었다. 오늘처럼 반쯤은 짧은 제비를 뽑고 싶을 때는 그 결과가 달랐다.

그는 끝이 몽톡한 제비를 손에 들고서 난감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얌전히 뒤에 숨겨 놓은 올린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는 발갛게 술 오른 얼굴로 턱을 괸 채 발뺌했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요.”

“신작 대사라도 읊어.”

“에이 나는 얼굴 하나로 먹고살잖아. 까먹었어요.”

“그럼 네가 데리고 온 놈 노래 듣자.”

올린은 그 말이 얼마나 무섭던지 그만 얼간이처럼 퍼특 고개를 숙이고 방석 끝만 노려보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을 때, 느릿하게 돌아본 셋째 도령이 구원하듯 명했다.

“저건 소리 내는 것엔 젬병이야, 우리 애가 술 한 잔씩 따라 드리는 거로 대신합시다.”

노래도 아니고 술 따르는 것은 필요 없다던 사람들이 만지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도련님은 아니 체통 없이 왜들 이러시냐는 말로 뻔뻔한 요청을 일축했다.

공교롭게도 다시 술을 따르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술병이 아래에 쑤셔 넣어지지는 않았다. 자리에 있는 남자들의 요구처럼 젖꼭지가 잡아당겨지는 일도 없었다. 그저 백자 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상 주위를 무릎걸음으로 돌며 다섯 개의 술잔을 채울 뿐이었다.

꼭 한 번, 제일 처음에 술잔이 넘치게끔 잘못 따랐다. 그러나 그분의 액받이가 넘친 술을 얼른 핥아 치웠고 그분 또한 아무런 말이 없었으며, 건너편에 앉은 셋째 도령 또한 괜찮다는 듯이 다정한 눈을 해 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가 파할 때 가장 마지막에 나온 것은 셋째 도령과 올린이었다. 그는 일과 관련된 통화를 하느라 올린을 잠시 세워 두고 멀찍이 걸어가 버렸다. 아직 몇몇 배우들이 요정의 여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밤의 호사스러운 정경을 감상하고 그들을 따라온 액받이들이 곁을 맴도는 참에, 혼자 남은 올린에게 남자 하나가 빙긋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를 따라온 액받이는 몇 걸음 뒤에 물러나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신경 쓰였으나 올린은 도련님의 지인이 묻는 말을 그저 무시하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정규가 이랬어?”

그는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얌전히 섰던 올린이 정원의 바위에 툭 걸터앉게 몰더니, 바람구멍 난 손을 덥석 잡았다. 올린은 먼 데 선 도련님을 바라보다가, 다시 질문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도련님이 이 사람보고 선배님, 선배님하고 불렀던 것도 같았다. 중년 배우의 잘생긴 얼굴은 무해하게 웃고 있었다.

“예.”

“어이쿠, 무척 아팠겠구먼.”

질문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죽을 뻔했지만, 그랬다고 대답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잘 뚫었어. 정규도 나랑 취향이 같아서, 어쩌면 이 구멍은 이런 용도일 거 같거든.”

그는 등 뒤에 감추었던 손을 보였다. 그 손에 들린 것은 탐스러운 작약 한 송이였다. 순간 그것에 홀린 올린이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그는 올린의 왼손 구멍에다 꽃송이를 툭, 꽂았다. 쭉 펴진 손등에 탐스럽게 꽂힌 꽃이 귀한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아까 주차하고 올라오던 길에 도련님이랑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도련님은 작약 한 송이만 따로 꺾어다 내내 혼자 보고 싶다 하셨다. 올린은 늘, 제게 가진 것이 몸뿐이라 도련님들께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는 게 서글펐다. 가진 게 많아 필요한 게 없는 분들이기는 하지만 가끔 도련님들께도 밀성에 두고 온 흰 개에게 했듯이 철물점에서 파는 비싼 사슬 같은 걸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꽃이라면, 도련님께는 사슬보다 잘 어울릴 터였다.

“이거, 주시는 겁니까.”

묻는 목소리가 떨었다. 남자가 웃으며 발간 구멍 주위를 쓰다듬었다.

“그래, 너 해라.”

올린이 소담한 꽃잎 무리를 살살 쓸었다. 마음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하며 방긋이 웃었다. 멀리서 통화를 마친 도련님의 눈에는, 외간 남자와 가까이 앉아 수줍게 웃는 올린의 보드라운 볼이 노엽게만 보였다.

그러나 도련님은 자신이 물건을 상대로 질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저것에게 왜 이토록 화가 났는지 찬찬히 돌이켜 보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매질할 죄목이 하나 있긴 했다. 저 물건 아까, 술 몇 방울 흘렸었다. 액받이가 그토록 범절 없이 행동하다니, 호되게 야단하여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 할 일이었다.

액받이는 스무 번의 매질에 부르트고 피맺힌 종아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애먼 화를 쏟아 내는 도련님은 자신이 내켰다면 마음대로 올린을 취하도록 허락했을 남자로부터 꽃송이를 받아 들고 웃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매질을 그만두지 못했다.

웃는 얼굴 아래 붉은 구멍이 낯선 좆에 설레어 발씬거렸을 것 같았다. 잘 젖는 구멍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질질 흘렸을지도 몰랐다. 물론, 자신은 망상에서 비롯한 질투 때문에 이걸 때리는 게 아니라 단정하게 굴지 못한 벌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흐… 으윽… 흣.”

소리 죽여 흐느끼던 올린은 회초리가 다리에 와 닿자 숨을 급히 들이켰다. 바로 쌔액 하는 소리와 함께 타는 듯한 고통이 날아들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알던 것보다 더 아픈 매에 올린은 수를 세는 것을 한 박자 늦었다. 다행히 처음부터 다시 때리겠다는 말씀은 없었다.

“스물 하나… 흑, 흐으, 스물 둘, 흐아! 스물 세엣….”

퉁퉁 부어오른 다리에 와 닿는 매가 이전과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올린은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자세를 흐트러트려 실망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릿하고 얼얼한 통증이 무릎뼈를 타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바로 자세를 가다듬어야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자세. 몇 번째야.”

무서운 경고에 얼른 무릎을 뻣뻣할 정도로 폈다. 끅끅 울음을 먹으면서 허리도 펴고 고개도 들었는데 도련님은 회초리 끝을 가볍게 튕겨 발목을 후려 때렸다.

“발.”

비틀거리며 맞느라 얌전히 나란했던 발이 어느새 벌어져 있었다. 발을 모으느라 옆으로 잰걸음을 치는 꼴을 도련님은 기다려 주셨다. 보지 않아도 피멍이 들었을 종아리를 한 번만 손으로 만져 뜨거움을 달래고 싶었다. 헛된 욕심을 버리느라 목울대를 크게 꿀렁이며 숨을 삼키자 남은 매가 떨어졌다.

“아흑, 스물, 네엣!”

연이어 후려치던 이전 것들과 다르게 이번은 한층 더 세차고 느렸다. 몸 둘 바를 모르고 무릎을 굽혔다가 펴길 반복하는 동작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을 알았다. 피멍 맺힌 데 또 다른 피멍이 더해지다 부어올라 팽팽해진 살갗이 금 가듯 찢겨 피가 흘렀다.

살 찢기는 아픔보다 뼈에 가해지는 깊은 어릿함이 더 아팠다. 춤추듯 위아래로 흔들리던 몸을 바로 하고 다음의 매를 기다렸다. 도련님은 회초리를 털어 내듯 허공을 찢었다. 쌔액 쌕 울리는 소리에 바들바들 떨며 자세를 다잡았다.

“악! 스물, 다서엇-! 어흑, 어허엉….”

예전엔 소리 내 우는 게 그토록 어려웠는데. 여러 번 소리를 내라 채근받은 끝에 입이 터지자 울음은 어린아이처럼 크게 흘렀다. 삭히지 못한 울음을 울면서도 올린은 아까 도련님이,

“이놈은 소리 내는 데는 젬병이야.”

했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쌔액, 회초리가 날고 짜악, 다리에 감겼다. 뒤꿈치가 절로 펄쩍 뛰듯 들렸다.

“스! 물, 여서, 어, 헝, 아흐! 스물, 일고옵….”

“석 대 남았는데 묶여서 더 맞고 싶어? 자세 바로 해.”

“잘못, 했습니다, 바로, 흑, 하겠습니다.”

벌벌 떠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어깨까지 덜덜 떨어서 꽉 쥐고 있던 바지 자락이 자꾸 흘렀다. 단단히 말아 쥐려고 했는데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제대로 말아 쥐는 대신 옷자락을 최대한 높이 들어 더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다.

올린은 바로 선다고 섰는데, 도련님 눈에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양다리에 조금씩 무게 중심을 번갈아 두는 게 보였다. 그러나 터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흘러 하얀 양말의 발목 언저리에 스며드는 것을 보면서까지 매를 추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가. 너 뭐 잘못해서 맞는 거야.”

“예의범절,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입니다.”

사실은 외간남자한테 꽃 받고 웃어서 맞는 중이었지만, 때리는 자도 맞는 자도 그건 몰랐다.

“그런데 맞는 중에도 몸가짐이 이러면, 도련님이 널 더 어떻게 가르쳐야 해?”

“잘못했습니다.”

“무릎에 힘주고, 발목 모으고, 시선은 정면으로.”

회초리로 무릎, 발목, 그리고 턱 아래를 툭툭 치며 지적했다. 그대로 따르는 태도가 지쳤어도 의연했다.

“마지막 세 대는 숫자 세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습니다.”

“네, 도련님.”

쌔액- 짜악, 하는 소리가 세 번 울리고 그때마다 울음 섞인 다짐이 뒤를 따랐다. 피 묻은 회초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올린은 체벌대에서 내려오라는 명령에 고용인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내려섰다.

보통 지은 잘못이 있어 매를 맞고 나면, 벽을 보고 한동안 반성하는 시간을 가진다. 셋째 도련님이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까딱했으므로, 올린은 체벌실 한구석, 하얀 벽을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절뚝이며 걸어갔다.

그곳에 방석 대신 놓인 것은 돌로 된 요철이 뾰족한 반성대였다. 피부를 뚫지 않을 정도로만 뾰족하게 다듬어진 불규칙한 요철은 하나하나가 색색의 돌로 만들어져 보기에는 예뻤다. 그러나 그 위에 무릎을 꿇으면 정강이의 뼈를 짓누르는 아픔을 선사했다.

올린은 여러 시간을 이 반성대 위에서 보내면서, 저 뾰족한 것들이 얼마나 쉽게 뼈까지 스미는 통증을 주는지 통렬한 방식으로 배웠다. 살 없는 정강이가 어찌나 시달렸는지, 저것만 치워 주신다면 하루 종일 벌을 세우셔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린은 그 위에 올라가 무릎 꿇기 전에 이부터 악물었다. 처음 다리가 내리눌릴 때는 언제나 정강이뼈를 부수는 것 같은 고통이 있다. 종아리의 상처가 짓눌려 뭉근하고 뻐근한 통증이 더해지자 무릎 아래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버텨 낼 수 있었다. 가끔 첫째 도련님은 여기에 무릎을 꿇리면서, 허벅지 위에 발을 얹고 지그시 체중을 실어 밟기도 했다. 그러면 올린은 악문 잇새로 침을 질질 흘려가며 울었다. 그런 고문이 더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반성의 기본자세로, 허리를 바로 폈다. 무릎 꿇은 허벅지 위에 두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손을 올렸다. 시선이 가장 중요했다. 반성대 앞의 흰 벽 위에는 아주 오래된 손톱 크기의 점이 하나 찍혀 있었는데, 아무리 오래 방치되더라도 절대로 이 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셋째 도련님은 올린이 완전한 자세를 갖추고서야 다가와서는,

“내일 아침까지 단정히 있을 수 있어?”

하고 물었다. 올린은 종아리를 맞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울 시간을 예감하며 네, 도련님, 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체벌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구석에 희미한 빛만 남았다. 까만 점이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하는 정도의 밝기였다. 반성대에 오를 때 늘 그렇듯이 고용인조차 없이 올린 혼자 남았다. 혼자 남으면 으레 오래전의 일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생각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좀처럼 막을 수 없었다.

밀성에서의 기억, 저택에 처음 왔을 때의 일, 화송에서 보낸 시간과 그 이전에 자랐던 곳에서의 기억까지 떠올랐을 때 올린은 눈이 짓무르도록 내리감으며 혀끝을 깨물어 피를 냈다. 뜨끔한 아픔 속에서는 시간 여행하던 영혼이 단숨에 현재로 빨려들어 올 수 있었다. 고통은 때로 올린에게는 은인과 같았다.

“올린?”

갑자기 사위가 밝아져 올린은 눈을 떴다. 다리의 통증보다 과거의 공포로 인해 더 심하게 떨던 올린에게 빛과 사람 목소리는 구원이었다. 반가워 고개를 틀려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제자리로 했다. 둘째 도련님이었다.

“많이 맞았니?”

벌을 설 때 도련님들이 상태를 확인하시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매달리는 기분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도련님.”

“무슨 잘못으로?”

“세 번째 강령을 어기고, 예의범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네가?”

다시 묻는 말끝에 피식 새는 바람 소리가 알아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예의 없다고 매를 맞았지만, 올린은 정말로 예의 바른 액받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네, 도련님. 죄송합니다.”

시선을 함부로 할 수 없어 볼 수 없어도 그가 체벌실을 가로질러 구석의 반성대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아까 올린이 벌벌 떨며 매를 맞았던 체벌대 근처에 멈췄다가 다시 걸음을 빨리해서 다가와, 올린의 뒤에 섰다. 위에서 굽어봐 준다. 고통을 응시하는 시선은 늘 달콤했다.

올린은 힘을 빼고 하늘을 향했던 손바닥을 움찔거렸다. 벌 받는 자신을 봐 주는 도련님께 폭 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커다란 몸을 감싼 차가운 밤공기와 흐리고 깨끗한 향기, 그리고 그의 가슴에서 흐르는 체온이 따스했다. 그냥 그 품에 느물느물 쓰러지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려 애썼다.

“일어나.”

머리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하고 토를 달려다 올린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눌렸던 정강이와 종아리가 고문에서 놓여 나면서도 아렸다. 지친 몸은 나중에야 어찌 되든 지금 저 지긋지긋한 반성대가 주는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도련님은 살피는 눈으로, 내내 우느라 부은 얼굴을 훑고 나서 명령했다.

“상처 좀 보자. 바지 벗어.”

아직 종아리 맞았을 때 그대로 둘둘 걷어 올려진 바지지만, 단추와 지퍼를 푸르니 툭 떨어졌다. 도련님 앞에서는 옷 입고 있을 때보다 발가벗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다가와 아픈 데를 만졌다. 올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려다 멈칫했다. 오늘 피가 나도록 맞은 종아리와 반성대의 날카로운 요철에 눌려 피맺힌 정강이가 따뜻한 눈 아래 놓였다.

도련님은 오늘 맞은 게 아닌 허벅지의 매 자국도 골고루 살폈다. 앞과 뒤와 바깥쪽과 안쪽이 피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긴 했다. 둘째 도련님이 혀를 찼다.

네 도련님들은 자상하게 대해 주시는 때도 많다. 사용할 때마다 때리시지도 않고, 귀여워해 주시는 경우가 더 잦다. 그러나 모시는 분이 네 분이다. 한 분이 칠 일에 한 번만 매를 드셔도 올린의 입장에서는 일주일의 반을 매타작당하는 거다. 아무리 멍 빠지는 연고를 아침저녁으로 발라도 피부가 원래 색인 날이 오히려 드물었다. 액받이로 집에 들여 앉혀진 이상 서러울 일도 아니었건만, 이토록 다정하게 상처를 살펴 주실 때면 오히려 마음이 슬퍼졌다.

“넌, 이 지경으로 맞으면,”

엄살을 좀 부려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려다 둘째 도련님은 말을 아꼈다. 자신과 성교할 때도 요령 부리지 못하는 놈이다. 버겁고 무서운 것을 호소할 때는 있어도 어떻게든 기를 쓰고 몸을 열려고 노력하는 게 이놈의 성격이었다. 타고나길 이런 성정으로 났는데, 할 수 없는 것을 해 보라고 조언하는 것도 참 못 할 짓이다.

“안 아프냐?”

“…괜찮습니다.”

올린은 치밀어 오르려는 자기 연민을 누르며 의젓하게 답했다. 모시는 분들을 위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액받이들에게는 큰 죄였다. 말끝에 묻은 울음을 갈무리했다. 일신의 편안함은 결국 가문에 액이 드는 일로 이어진다. 눈을 깜빡여 서러움을 떨쳐 냈다.

액받이를 사용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두 가지가 성교와 학대다. 성교를 통해 도련님께 좋은 기를 드릴 수 있고, 강한 통제와 고통을 버텨 냄으로써 가문에 미치는 액땜을 할 수 있다. 요컨대 도련님들께 다가올 횡액을 가학의 방식으로 바꾸어 액받이가 먼저 받게 함으로써, 미래에 닥칠 나쁜 것들을 우회시키는 것이다.

액받이를 대함에서 점잖은 편인 이 댁에서도, 가문에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는 액받이의 피를 뽑는다고 들었다. 뽑은 피를 뿌리는 정화 의식은 보기에 좋지는 않으나, 액받이의 생명에 지장이 없고 신체에 대한 훼손도 없다고 했다. 온건한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자신은 다른 물건보다 운이 좋다.

“참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지고 다시 한번 답하며 올린은 시선을 내렸다. 도련님의 손에 짤따란 꽃송이가 들려 있었다. 아까 셋째 도련님이 올린의 귀에 꽂아 준 작약이었는데, 매를 맞을 때 몸을 뒤트느라 떨어진 것을 주워 오신 것 같았다. 도련님은 그 꽃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셋째한테 잘 말해 줄 테니,”

“… 도련님, 감사하지만,”

결국 토를 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말을 시작했던 올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둘째 도련님의 밤 시중은 네 분 도련님 중 가장 무섭고 아프고 힘들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도련님의 자지가 지나치게 큰 탓으로, 도련님의 성품이 거친 탓이 아니다. 한번 매를 들면 그날은 죽는 날이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고 대개의 잘못은 나직이 꾸중하시는 것으로 넘어가 주신다. 그래서인지 가끔 둘째 도련님 앞에선 이런 실수를 했다. 그런데도 둘째 도련님은 좀처럼 화내시는 법이 없었다.

“감사하지만 뭐. 내가 지시했으니 넌 그대로 하면 돼.”

“…….”

“내가 오늘 네 시중을 받고 싶어 벌을 중단한 거로 하지.”

황송한 혜의를 내리면서 말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올린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는 동안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꽃송이를 올린의 손에 툭, 떨어뜨려 주시면서 도련님은 말했다.

“벌은 끝났어. 이제 가서, 쉬어라.”

*

깨끗이 씻고 정강이와 종아리를 함께 싸매는 치료를 받은 후에, 올린은 목 잘린 작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댕강 짧아진 꽃은 이대로 둔다면 내일이면 다 시들어 버릴 것 같았고, 그전에 자그마한 그릇 따위에 띄워 방에 가져다드리면 그나마 며칠은 보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돌보는 고용인이 너무 늦었다고 말렸지만, 도련님께 꼭 드릴 게 있다고 공손히 부탁하자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릇에 물을 채우고 그 위에 꽃을 띄워 도련님 방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맨발로 별채에서 나와 정원을 지나 본채로 향했다. 메인 주방으로 통하는 뒤쪽 출입구로 들어가 곁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서 발에 묻은 먼지를 씻었다. 갸름한 발에 붙었던 풀잎 하나가 물줄기에 떠밀려 내려갔다. 긴 복도를 걸어 3층으로 올랐다. 도중에 한 번 멈칫하는 바람에 몇 방울 물을 흘린 것은 나중에 돌아오며 걸레로 훔쳐 내기로 했다.

액받이는 집에 고용된 사람들과 달리, 도련님들의 방에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이것은 돌아온 후 여러 번의 조심스러운 탐색 끝에 알아낸 귀한 정보였다. 저택 내 어디를 가든 자세만 바르게 유지하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올린에게 허용되었다. 물론 괜히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다가 도련님 중 한 분께 걸려 공연한 트집이 잡히고 곤욕을 치르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고용인들끼리 고유의 영역을 갖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데, 올린에게는 그러한 경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받는 것은 이럴 때 편리하긴 했다. 저택 안을 이토록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물건인 올린과 막내 도련님이 키우는 혈통 좋고 붙임성 없는 개, 이렇게 둘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받은 제재라곤 셋째 도련님의 방으로 향하기 전 복도에 있던 남성 고용인 하나에게 가볍게 어떤 용건이냐는 물음을 받은 것뿐이었다. 올린은 소중하게 들고 온 물그릇에 동동 띄워진 작약 꽃송이를 자랑스레 보이며,

“이것만 침댓가에 놓아 드리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맡았다. 고용인은 올린의 용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미 잠든 도련님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는-

“아.”

올린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몰랐다. 도련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오늘이 도련님의 영화 중 하나가 어떤 대단한 분기 중 하나를 맞은 날이라는 것도, 도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몰랐다. 어떤 구실을 대어 어느 정치인이 연 요란스러운 축하연에 참석하기 싫어 일부러 약속을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방 안 가득한 고급스러운 꽃다발들과 꽃바구니들, 세련된 리본으로 장식된 화분들, 그 안을 채우는 수국과 장미와 백합,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국적인 꽃들과 수백 송이의 작약이 피어 있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꽃의 물결 사이에 놓인 선물 꾸러미들조차 꽃처럼 아름다웠다.

올린은 자신이 들고 온 물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모가지만 남은 작약 한 송이가 초라히 떠 있었다. 부끄러웠다. 그는 숨 막히도록 강렬한 꽃향기 속에 잠든 도련님 얼굴조차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조용히 몸을 돌려 나와 누구도 마주치지 않을 곳까지 잰걸음으로 걸었다. 단정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은 아래로 향한 채였다.

그러나 물그릇에서 찰방찰방 물은 새었다. 계단에 복도에 뚝뚝 떨궈진 물방울 자국이 남았다.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주제에 뭐라도 해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창피했다. 아니 어쩌면, 저녁나절에 매 맞은 데가 너무 쓰려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별채의 현관에 들어서면서 올린은 고용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발의 먼지를 씻어야 한다며 욕실에 들어갔다. 텅 빈 욕실 어딘가에서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깨끗이 청소된, 차가운 타일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소리가 낮게 울리는 공간에 끅끅 숨을 삼키는 소리가 처량맞았다. 경애하는 도련님께 제대로 된 꽃 한 송이 선물할 수 없는 무능함이 사무치게 서러웠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올린은 아마도 자신의 잠자리를 살펴 주는 고용인이겠거니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고,

“지금, 곧, 나갑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고 울음 묻은 소리 그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고용인이 아니었다. 이미 샤워를 끝낸 둘째 도련님이 평소와 다르게 느슨한 옷차림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내가 쉬라고 했는데, 어딜 다녀온 거야.”

그는 무서운 목소리를 했지만,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세트처럼 미덥지 않은 두 동생 중 하나가 공용의 물건을 데리고 외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근심했었다. 밤새 벌서야 할 것을 면해 주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별채에 다시 와 보았는데, 자고 있어야 할 물건이 본채에 갔다고 들어 걱정하던 참이었다. 도로 돌아왔다니 도리어 안심이었다.

올린은 아까 별채의 주방에서 빌려 온 물그릇을 돌려놓을 심산으로 손안에 들고 있었다. 그릇 속에 눈물방울을 또옥 똑 떨구는 처량한 모습을 보고 둘째 도련님은 어쩐지 눈앞의 것이 몹시 가여워졌다. 우스운 짓을 해서라도 위로해 주고 싶을 만큼.

“말 안 들은 벌로, 이건 내가 압수하도록 하지.”

그는 거침없이 걸어와 올린이 든 물그릇 속에서 꽃을 집어 들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꽃을 올린의 귀에 꽂아 주는 대신, 도련님은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자신의 귀에 그것을 꽂았다. 거구의 남자가 귀에 꽃을 꽂은 모습은 아무리 그가 미남자라도 안 어울렸다.

울던 올린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벌리다가 이윽고 프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 묻은 눈으로 웃어 놓고 그게 잘못인 양 얼른 표정을 감추려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둘째 도련님이 한쪽 입술만 슬쩍 올리며 따라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웃음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올린은 울던 얼굴로 웃으며,

“드리겠습니다.”

하고 건방진 소리를 했다. 도련님이 대답했다.

“고맙다,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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