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아비규환 (16/65)

# 아비규환

상또라이들은 거의 동시에 저택에 도착했다. 연락이 간 때로부터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 이미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몇 가지 검사를 마친 올린은 저택의 가장 호사스러운 방 중 하나에 무릎이 꿇린 채 그들을 맞이했다. 꿇어앉은 올린의 눈에 어렸던 울음이 그치자 기운 없는 얼굴이 지나치게 침착해 보여 이질적이었다.

그들은 창문을 등지고 앉은 섬세한 실루엣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걸어가 올린을 향해 놓인 네 개의 의자 중 빈 두 곳에 각각 앉았다. 올린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한순간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던 두 동생들이 먼저 앉아 있었다. 찬 대리석 바닥에 꿇어앉은 올린과 달리 네 명 모두 푹신하고 호화로운 의자에 자리했지만, 올린보다 도령들이 더욱 불편해 보였다. 그들은 서로에게조차 아무런 말이 없이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얌전히 무릎 꿇은 올린은 이미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였다. 왔다고 하여 저절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니 본래 입던 사치스러운 비단옷을 입히기도 애매하고, 바깥의 때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히는 것도 이상하여 셋째 도령이 몸을 검사한 고용인에게 그대로 벗겨 두라 일렀기 때문이었다.

나신은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팔다리가 길고 골격이 섬세한 몸이야 조금 근육과 살이 붙는다고 크게 달리 보이지는 않았다. 상처 없이 깨끗한 피부와 색이 엷고 유륜이 발달한 젖꼭지도 그랬다. 그러나 늘 매끈하게 제모되어 있던 사타구니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네 도련님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액받이의 체모가 자라 있었던 것이다.

늘 깨끗이 제모되고 사용하기 편하도록 세척된 상태의 몸을 즐겼었다. 여러 달 만에 마주한 몸에 자란 체모가, 참 새롭고도 기묘했다. 액받이의 터럭이란 말끔히 제거되어야 할 불결하고 단정치 못한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지저분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성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장식 같았다.

다른 부분의 털은 본래부터 많지 않은 듯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곧은 성기를 덮은 엷은 색의 체모는 일부러 빗고 정성스레 다듬은 것처럼 가지런했다. 숱이 많지 않고 가닥가닥이 가늘어 어린아이의 배냇머리가 길어진 것 같은 인상이다. 그래도 털은 털인지, 소년처럼 반질거리던 몸일 때보다 성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보얗게 핀 얼굴은 어떤가. 이곳에서 매일 학대를 당하며 살 때의 겁먹고 기죽은 얼굴도 참으로 귀염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평안한 일상을 겪어 본 후 말갛게 갠 모습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귀하고, 드물고, 어디 남의 시선에 내놓는 것조차 아까울 지경으로 찬연한 낯이다. 저게 정말로, 내가, 우리가 소유했던 물건일까.

그런 모습을 한 올린을 당장에라도 쓰러뜨리고 범하고 싶은 마음은 넷이 다르지 않았다. 네 명의 표정이 느긋한 데 비해 자세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가장 한가로운 자세로 의자에 앉은 둘째 도령조차 다리를 꼬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고간을 액받이로부터 가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곁의 형제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인지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에 음심이 좀 돈다고 해서 죄마저 흐리게 볼 수는 없었다.

네 도련님이 올린의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방은 널찍하고 고요했다. 만일 올린이 다시 집안에 받아들여진다면, 돌아온 액받이에 대한 처벌 또한 이 장소에서 이어질 터였다. 간단한 회의나 예식을 할 수도 있고 일흔 명 이내의 손님이 참석하는 작은 연회를 열 수 있는 홀은 천장이 높았다. 황금색과 연녹색으로 장식된 화사한 벽에, 섬세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된 창문에는 바닥까지 닿도록 긴 커튼이 호사스럽다.

동편과 서편의 벽에 난 두 개의 문은 각각 간이 응접실과 손님을 위한 작은 대기실로 연결된다. 열린 느낌의 공간임에도 복도에서 직접 이 방으로 들어오는 문은 없었다. 행사의 종류에 따라 내부의 배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고정된 가구들은 많지 않았다.

“시작하시죠.”

침묵을 못 견딘 것은 막내 도령이었다. 생각에 잠기거나 핸드폰을 만지며 각자 침묵했던 세 명의 도령이 막내의 성급한 소리에 느긋이 자세를 바꾸었다. 둘째 도령이 늘 그렇듯, 핸드폰으로 일하며 심드렁한 목소리를 했다.

“확인됐어?”

“올린 맞아요, 홍채 지문 항문 문신 모두 일치하고 문답 전 문항 통과.”

“질병은?”

“깨끗해요, 오늘 써도 될 정도로 상태 좋아요.”

올린이 검사받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던 셋째 도령이 대답했다.

“문답이라니, 뭐 물었는데? 저게 아는 게 뭐 있다고.”

“7개 강령, 24개 자세, 그리고 제 이름요.”

이번의 대답은 막내 도령이었다. 턱을 괴고 듣던 첫째 도령이 피식 웃고 물었다.

“저게 네 이름을 안다고? 올린, 막내 도련님 이름 뭐야.”

불시에 질문을 받고도 올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자 환자 되십니다.”

막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환아 좋겠다, 올린이 이름도 기억해 주고. 막내 도령은 액받이가 아니라 자신을 놀리는 게 분명한 웃음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등받이에 기댔다. 첫째는 올린을 시험하듯 나머지 도련님들의 이름을 물었다.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한 올린이 사죄하며 바닥에 이마를 댔다. 괜찮으니 일어나, 하는 말에 도로 일어난 얼굴이 하얬다.

“정아, 정비, 정규, 그리고 막내가 정환이야.”

한가로운 가르침에 덩달아 느긋하게도, 올린은 네 분의 이름을 입속으로 왰다. 둘째 도령이 코웃음을 쳤다.

“곧 폐기될 놈한테 이름은 왜,”

하는 말을 셋째 도령이 받았다.

“내가 저거 구멍을 얼마나 성심껏 쑤셔 줬는데요, 난 저게 내 이름도 기억했으면 좋겠어.”

그 빈정거림을 듣지 못한 올린은 기억을 잃은 동안 자신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무래도 막내 도련님 성함의 잘못이었던 것 같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기억에 남은 게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도련님의 성함이라니, 어쩌면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련님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이름의 주인이 다시 한번 말했다.

“형님들, 시작하시자니까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았다. 막내 도령은 올린의 처벌을 재촉하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각오했던 바였다. 액받이 주제에 주인으로부터 달아나다니. 그 벌은 올린 저가 감내해야 했던 어떤 고통보다도 클 것이다.

그는 어제의 자신과 오늘 이곳에 꿇어앉은 자신이 같은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정안과 올린은 같은 몸을 공유하는 다른 정신 같았다. 어쩌면 두 개의 삶이, 전생 혹은 내세 따위의 아득히 먼 다른 삶들 같았다.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던 기억을 찾자 곧바로 이곳으로 기어든 자신을 어제의 정안이 보면 어처구니없어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관성에 이끌린 미물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살기로 되어 있는 삶을 벗어나 사는 것이 죄악과도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것이 유일하게 자신이 가치를 가질 방법이라고 평생 배워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타성의 노예가 된 까닭은 아니다. 더욱 중요하게도 올린은 알았다. 도련님들은, 올린 자신을, 분명.

막내 도련님의 수척한 얼굴을 볼 때, 그리고 그 눈에 비친 절박한 기쁨과 가여운 안도를 확인했을 때, 올린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것은 비틀려진 관계 속에서 영원히 휘둘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 올린에게도, 사실은 아주 미약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비록 그 힘이 주인의 애정으로부터 비롯한 것일지라도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을 잃어버린 주인이 그간 괴로워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함은 확실한 희열을 선사했다. 넉 달, 세상에, 넉 달 동안이나 도련님이 자신을 기다렸다. 고작 두 달을 함께 보냈을 뿐 그 두 배의 시간을 잃었었는데. 그것은 이 관계가 오로지 착취 피착취의 관계를 넘어서, 일방이 아니라 쌍방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명이었다.

첫눈 오던 날, 홧김에 도련님이 채워 준 시계를 풀어 버리고 안경을 떨어뜨릴 때 올린을 가장 노엽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돌이켜보면 더더욱이 그렇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마주 생각해 주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하고 그로부터 비롯한 충동으로 달아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막내 도련님께 고통을 안겨 드렸다. 후회보다 그 힘의 역전에서 오는 달콤함을 크게 느끼는 자신은, 이미 액받이로서 글러 먹었다.

그러니 처벌은 달게 받아야 했다. 올린은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만 도령들의 생각은 달랐다. 넷 중 두 도령이 올린의 처벌을 반대했다.

“저거 못 써. 폐기해야 해.”

처벌한다는 것은 다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은, 올린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둘째 도령의 말이 떨어졌을 때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눈을 다시 뜨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이 또한 생각한 일이되, 폐기에 대한 공포만은 떨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한 번 달아난 물건은 재사용이 어려우며, 그런 식으로 강령을 어긴 물건은 액받이로서의 기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 둘째 도령의 의견이었다. 넉 달 동안 숨어 지냈던 놈인데 다시 이 집안 물건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말을 올린은 잠잠히 듣기만 했다.

차고 습한 흙에 산 채 묻혀 절명하거나, 발목에 돌이 묶인 채 물속으로 가라앉거나, 거꾸로 매달려 숨이 다할 때까지 출혈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처지에 놓인 올린은 제 발로 저택에 걸어 들어온 과거의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막내 도령은 반박했다. 제 발로 돌아온 것이 그 기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며, 저게 없는 동안 들였던 두 개의 물건이 얼마나 무소용했는지에 대해서 토로했다. 둘째가 냉담하게, 그건 그 물건들을 그 지경으로 애정 없이 학대한 네놈의 탓이라고 쏘아붙였다.

“걔들이 올린과 다르다고 매질했잖아, 모질고 어리석게도.”

아아, 그러셨다니, 올린은 쏟아부어지는 달콤하고도 역겨운 과거사에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동시에 느꼈다. 단것을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어 본 사람이라면 지금 올린이 느끼는 구역감을 짐작할 수도 있을 터였다.

셋째 도령도 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 관리 없이 넉 달이나 지냈으니 유기되었던 물건과 똑같이 더러울 게 분명하다, 신체에 질병이 없더라도 바깥을 겪은 저것의 머리통이 깨끗할 리가 없다는 신랄한 말을 뱉고 나서 그는 올린을 향해서는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미워서가 아냐, 아가. 그저 이치가 그래. 그렇지 않겠니.”

달래는 목소리는 솜털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 무서운 말에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달랐다. 올린은 자신을 변호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져 버릇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혀끝을 깨물어 피를 냈다.

첫째 도령은 동생들의 갑론을박에 내내 침묵했다. 긴 다리를 꼰 채 지루한 듯 발을 까딱이기도 했다. 충분히 논쟁하도록 내버려 둔 그는 올린의 말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올린, 고개 들어.”

지시는 간단했다.

고개를 들자 이마에 맺혔던 진땀이 주르륵 흘렀다. 얻어맞은 지 얼마 안 되어, 신선한 멍이 알록달록한 얼굴이 온화한 눈을 올려다보았다. 첫째 도령이 웃으며 물었다.

“너 할 말 있잖아.”

올린은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해도 될지도 모르겠고, 도련님이 말씀하시는 할 말과 자신의 할 말이 일치하는지도 모르겠고,

“너 도망갈 때 어떤 상황이었어.”

막내 도련님께서, 아아니, 첫째 도련님께서, 아니 이것도 아닌가, 그날 몸이, 이건 정말 아니고, 그날 마음이.

“말하기 어려워?”

안경 너머의 눈은 안심시켜 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올린은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달아날 때의 상황을 변명하여 죄를 덜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더 중요한 이야기다.

“그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다른 걸 물어보자. 올린아.”

올린의 가느다란 목에, 섬세하고 각진 모양으로 융기한 울대가 꿈틀거렸다. 뾰족하게 돋은 빗장뼈가 만지고 싶도록 섬세하게 오르고 내렸다. 마른 입술을 축이려 발간 혀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너 왜 왔니?”

네 도령이 저마다 조금씩 몸을 기울였다.

“왜 여기로 돌아왔어. 다른 데 가도 됐었잖아, 기억 찾은 후라도.”

올린의 행방 혹은 상태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에 세 동생이 큰 형을 돌아보았다. 첫째 도령은 그 뜨악한 시선을 무시하고 올린만을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목은 성대를 거의 울리지 못한 채 소리 냈다.

“…절 기다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정환이가?”

생각이 말로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 같아 올린은 제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돌아온 이유는 전하고 싶었다. 네 도련님이 저절로 숨을 죽인 공간에, 무디고 어설픈 말솜씨로 속삭이는 액받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억이 돌아오니까, 도련님들께서 절 필요로 하셨다는 게 기억나서… 게다가 여태 찾고 계신다고 하니까, 그래서 기다리고 계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네 분, 모두가….”

네 남자들은 주저하는 액받이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각자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필요, 했나. 답은 액받이의 말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그런 이유였다고.

둘째 도령이 물었다.

“왜, 거긴 네가 필요 없었어?”

“필요했어요, 필요했지만.”

둘째 도령이 자세를 바꿨다.

“그런데 왜 왔어, 거기 있지.”

하는 말에 한참 생각한 올린은 착잡한 얼굴이 되었다. 거친 남자 직원들이 툭하면 발로 차고 담뱃불로 지지던, 제 몸길이보다 짧은 사슬에 줄곧 매여 살았던 멍청한 진도 잡종 때문이었다.

“거긴, 한 마리였고, 여긴, 더 많으시니까.”

모두 침묵했다.

“여기에서, 제 소용이, 더 큰, 거 같아서….”

뭐. 한, 마리? 자신들을 짐승과 비교해 내놓은 어처구니없는 고백에도 침묵을 깨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틀린 점 하나 없는 재귀의 동기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들 넷은 하나도 빠짐없이 올린을 기다렸다. 갖다 붙이는 이유야 다들 달랐고 그 이유마저 어쩌면 허울이었지만, 그랬다. 그 넉 달간의 기다림을 없던 일 치려는 것은 기만이었다. 그것을 올린은 지적해 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올린을 폐기해야 할 명분을 잃었다. 저런 돼먹지 못한 놈 필요 없으니 폐기한다, 는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주인에게서 달아나 오래도록 밖을 나돌며 얌전치 못하게 지낸 놈을 이제 와 다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둘씩, 정아와 정비와 정규와 정환은 웃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액받이의 압승인 것 같았다.

*

첫눈 오던 날이었다.

“어디 가?”

묻는 소리가 들린 것은 시계를 던져 버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서였다.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든 올린은 눈앞의 첫째 도련님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집이 아닌 곳으로, 달아나던, 참이었습니다.”

결심하고 몇 걸음밖에 걷지 않았지만, 마음을 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거짓을 고할 수도 있었겠지만 올린은 그러지 않았다. 이대로 끌려가서 맞아 죽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너무 아프고, 너무 춥고, 사실은 아주 아주 슬펐다. 이 상태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첫째 도령은 그 말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올린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바지의 무릎 부분이 해지고 피가 흘렀다.

“무릎 왜 그래?”

“넘어졌습니다, 도련님.”

“어쩌다가?”

“걷다가… 아니, 달리다가 넘어졌습니다.”

답하는 말마저 덜덜 떨었다. 어디 탄광이라도 헤치고 다닌 것 같이 꼬질꼬질한 몰골로 얼음처럼 차게 굳어서는, 그래도 예의를 갖춰 보겠다고 단정한 답을 내놓으려 애쓰는 게 우스웠다. 상태를 보아하니 고열에 들떠 있었다.

첫째 도령은 올린이 버려진 곳이 어딘지 알았다. 그가 보낸 고용인의 차가 아주 멀리서 따르고 있었다. 거기서 여기까지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면서 걸어올 만큼 먼 거리는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낮에 겪어야 했던 고난과 갇혀 살아온 액받이의 삶에 공감할 리 없는 도련님으로선 올린이 이렇게 엉망인 걸 그가 몽매한 탓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윤간을 당한 날의 밤이었다. 낯선 장소에서 공포 속에 끌려다니며 여섯 남자의 욕정을 받아 냈다. 엉덩이를 맞고 뺨을 맞고, 성기와 항문을 얻어맞았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주먹질과 발길질도 당했다. 젖꼭지와 콧구멍에 이상한 게 꽂히고, 울며 남의 자지를 몇 번이나 빤 다음 자신의 것을 빨렸다. 강제로 사정하고 정액을 뒤집어쓴 채 사진을 찍히는 모욕도 당했다. 게다가 그런 짓을 당하도록 올린을 내어 준 도련님은.

아무리 원래부터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는 몸이라고는 해도, 멸시받으며 당한 강간이 괴롭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일을 겪고 홀로 낯선 곳에 버려져 한겨울 밤의 긴 거리를 걷게 된 건 가혹한 일이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기침은 폐 깊은 곳에서 울리는 쌕쌕 소리로 바뀌었다. 고통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 고열이 되어 올랐다.

어쩌면 올린은 자신이 하는 말이 그저 뱃속의 울림으로 그치지 않고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마저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런 몸으로 달아날 계획이라니 기특하네.”

첫째 도련님이 말했다.

“다른 물건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릴 궁리를 했을 텐데.”

조용하던 도로에 굉음이 일었다. 올린의 저 먼 뒤쪽에서 한밤을 달리는 차들이 질주하여 다가왔다가 저 앞으로 멀어져 갔다. 그 바람에 도련님의 코트 자락이 눈과 함께 휘날리는 것을, 올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당한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이제 겨우 두어 달 사용했을 뿐이지만, 첫째 도령은 이미 올린을 잘 알았다. 이 애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들 자리는 없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흔히 한 번쯤 스치고 지나가는, 말끔히 모든 것을 끝낸다는 것은 조그맣고 동그란 머리통에 볍씨만 한 선택지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기도 하던 극종은 결코 자기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존을 위함이다. 징그럽도록 끈질긴 생명력이 좋았다. 악착같고 그악스러워 예쁘다. 동생을 벌하기 위해서 떠나보내는 게 아쉬운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첫째 도령은 막냇동생이 하는 양이 어떤 짓인 줄도 알았다. 지난번 액받이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짓거리를 하고 있겠거니 했다. 시험한답시고 못된 친구들에게 내돌리고, 내내 괴롭힌 다음 자신의 품에 기어드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심이다. 아직 어리니 그런 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액받이라는 제도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신의 물건을 나누어 쓰는 일은 권장되지는 않아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데리고 간 것이 문제였다. 조교의 동행도 없이, 하다못해 고용인의 감시도 없이 내돌린 것,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 대학 교정에서 일을 벌인 것, 그리고 중간의 상태 체크조차 하지 않은 것은 무책임한 짓이었다.

최 집사님이 붙인 감시를 떨어뜨릴 때, 정환은 첫째 도령의 차가 앞서 한국대에 도착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정환의 차량이 주차 등록된 곳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경영대 앞의 주차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니 멋모르고 방긋대는 액받이와 저가 저지를 짓에 미리부터 화가 난 막냇동생이 함께 차에서 내렸다.

올린이 벌벌 떨며 스무 살 남짓한 어린애들을 따라갈 때까지만 해도 막냇동생이 벌인 일이 귀엽다고도 생각했다. 고용인을 붙여 두고 다음의 행적까지를 촬영해서 보내라고 했다. 올린은 한 번의 윤간을 겪고도 온 얼굴이 바둑이가 되어서는, 눈에 초점마저 흐려졌다. 심지어 그 몸으로 추격자들을 따돌리려고 레이스를 벌이기까지 했다. 지치고 다쳤을 몸으로 깡충깡충 잘도 뛰는 게 흥미롭기는 했다.

가장 불쾌했던 장면은 올린이 낯선 자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찍은 화면에 올린은 저급한 품질의 음식을 앞에 둔 채 망설이다가 국을 삼키고 있었다. 푸르고 붉게 물든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첫째 도령은 찢긴 입술에 쇠로 만든 숟가락이 들고 나는 역겨운 광경에 눈을 찌푸렸다.

남들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그로선, 올린이 다 포기한 듯 다음의 학대자를 따르는 모습이나 기운이 빠져 빈사 상태로 앉아 있는 모습보다 그 모습이 가장 가엾게 느껴졌다. 귀엽고 어리석은 동생을 벌주기로 마음먹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그 비위 상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집에서 쓰는 것에게 정체 모를 음식을 먹이도록 둔다니, 장남의 눈에 그것처럼 무책임한 일도 없었다.

“지금도 달아나고 싶어?”

질문이 떨어졌을 때 올린은 한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을 고해도, 진실을 고해도 매를 맞는 것은 다르지 않다. 처음에 이곳에 와서 그렇게 배웠다. 그런 바에야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째 도령은 품 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는 붉은색 앰풀과 주사기가 들어 있었다. 올린은 손자국이 지저분하게 새겨진 목에 바늘이 꽂히고 약물이 흘러들어 가는 동안에도 고요했다. 더이상 뭘 어떻게 해 볼 힘도 없는 것 같았다.

“많이 졸릴 거야. 하지만 아직, 잠들면 안 돼.”

명령한 첫째 도령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 곳 없습니다.”

“너 자랐다는 보육원은 어때. 거기로 보내 주랴.”

“아뇨, 거긴 무섭습니다.”

“그럼 해 보고 싶은 거 있니?”

“저, 기차, 기차 타 보고 싶습니다, 도련님.”

멀리 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한다는 소리가 비행기 아니라 기차인 게 재미있었다. 세워 두었던 차의 문을 열어 주자 망설이며,

“타월이 없, 시트가 더러워질 것 같아서….”

하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첫째 도령은 혀를 찼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내가 타라고 했잖아.”

올린은 서울역까지 가는 내내 고요했다. 어깨를 조금 웅크린 채 먼 데만 보는 게 얼빠진 것 같았다. 차 안에 있던 생수를 건네며 마시라고 했더니 한쪽 팔에 끼고 다치지 않은 손으로 돌려 따려 애썼다.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울기 시작했다.

도련님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뚜껑을 열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영영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용을 쓰다 잠시 쉬고, 그다음에는 성한 손으로 잡은 채 뚜껑을 이로 물어 돌리려 했다. 울면서였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다리 사이에 끼우고 아픈 손으로 고정했다. 마침내 생수병 뚜껑이 열렸을 때 올린이 흐흑, 하고 안도하는 듯한 숨을 흐느꼈다. 도련님은 알 수 없는 말로 축하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우리 올린이한텐. 안 그래?”

눈물을 닦으며 물 한 모금을 삼킨 올린이 대답했다.

“…네, 도련님.”

한밤의 서울역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도련님은 키오스크에서 출력한 가장 빠른 탑승권과 함께 지폐 한 움큼을 건넸다. 올린은 손가락 부러진 왼손과 성한 오른손을 함께 내밀어 그것을 받고서도 멍하니 들고만 있었다. 도련님이 돈을 접어 안주머니에 단단히 넣고 지퍼를 올려 주었다.

“기차에 타서 내리고 싶은 곳에 내려. 그러기 전에는 잠들지 마. 주사를 맞았으니 한번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내 말 알아들어?”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올린아, 도련님 말은,”

첫째 도령은 혼란해하는 갈색 눈을 들여다보고, 동그란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너, 아직도 달아나고 싶다면, 눈 감아 주겠다는 말이야.”

피딱지가 굳어 붙은 이마에 이마를 맞대어 문질렀다.

“물론 기차를 타느냐, 아니면 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느냐는 네 선택이지만.”

올린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어느 쪽이 좋아?”

도련님의 손이 뒤통수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반동에 올린이 비틀거렸다. 흔들리는 몸은 그대로 뒷걸음치다,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도련님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윽고 절룩이며 달아나기 시작할 때는 두려움도 없이 가래 낀 기침을 쿨럭이며 웃고 있었다. 잠들고 일어나면 기억을 잃게 된다니, 어쩌면 그토록 홀가분한 선물이 다 있을까. 게다가 기억이 없는 자신은 어쩐지 영영 몸을 숨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사람 사이로 사라지던 하얀 뒷모습을 가만히 봐 준 것은 첫째 도련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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