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내용은 모두 픽션입니다. 실재하는 인물, 단체, 사건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등장인물의 사상은 작가의 사상과 무관합니다.
※권리자의 명시적인 승낙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콘텐츠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복제(복사, 스캔, 디지털화 등) 및 전재, 편집, 번역, 방송, 출판, 공중송신 및 재송신, 판매, 배포, 대여 등에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차례 |
# 정안
# 귀가
# 아비규환
# 대리석 촛대
# 오얏꽃가지
# 사슬보다 작약
# 화해
# 입소 고지
# 캠프
# 패착
# 데이트
# 상자
# 정안
필봉산에서 밀영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유명한 수타 짜장집이 있다. 여러 번 방송을 타서 유명한 이 집은 시골 외진 곳에 있는데도 하루 종일 손님이 밀려들었다. 테이블만 백여 개가 넘는 식당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이 힘들고 보수가 적어 오랫동안 다니는 직원보다 몇 달 일하다 사라지는 뜨내기 직원들이 더 많았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휴일 없이 하루 열두 시간을 설거지하는 것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 구하기 어렵지 않은 이유는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잠깐 일하면서 몸을 의탁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새로 온 청년은 말수가 적었다. 자신의 이름을 김 씨도 박 씨도 아닌 ‘그냥 정안’이라고 밝힌 남자는 과거의 기억이 없어서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처음에 왔을 땐 몸도 엉망인 데다, 일도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본 것은 곧잘 해내고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해 금세 한 사람 몫은 하고도 남았다.
잠깐 있고 말겠거니 했던 직원들의 생각과 달리 겨울 한 철을 보내고 봄이 다 되도록 묵묵히 그 자리에 있자, 사람들이 정을 주기 시작했다. 홀 서빙하고 주방을 보는 나이 든 여자 직원들도 그를 예뻐했고, 잡일하고 배달하는 젊은 남자 직원들도 그를 좋아했다.
부르던 이름은 서울 아에서 정아이로, 정아이에서 아이로 바뀌었다. 시켜야 할 일이 있어 아이 어데 갔나, 이리 와 본나, 하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모자 쓴 얼굴은, 늘 시커먼 옷만을 입고 다니는데도 단정하고 차분하고 유순하여 귀여워하지 않을 수가 없긴 했다.
좀 희한한 면도 있었다. 보는 사람이 그저 지나쳤다가도 다시 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외모나 핸드폰도 없이 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속 편히 지내는 성격을 제하면, 가장 두드러지는 게 식탐이었다. 많이 먹는다거나 남의 것을 탐낸다는 게 아니라 음식 자체를 좋아했다. 덤덤하고 허여멀끔한 얼굴에 잠깐 오르는 미소를 보려면 뭐가 되었든 먹을 것을 주면 쉬웠다.
크림 붕어빵을 먹였더니 울더라는 홀 팀장 배 여사 말은 과장이었지만, 음식을 귀히 여기는 태도나 마른 몸을 보면 요즘 세상에 여태 굶고 살았나 싶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점잖게 조금씩만 베어서는 입을 꼭 다물고 오물거리는 식사 매너는 또 일평생 굶주려 본 적 없는 양반댁 귀한 자제같이도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남자들이 다 같이 담배를 피우는 시간에도 그는 굳이 어울리려 들지 않았다. 철 식용유 통 위에 신문지 따위를 두껍게 깐 것을 간이 의자 삼아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는데도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흡연실이 따로 있을 리 없는 시골 식당이라도 보통 남자들이 몰려 담배 피우는 곳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정안은 거기서 아주 멀찍이 떨어진 주방 뒤쪽에서 꾸벅꾸벅 졸곤 했는데, 남자들은 어느새 정안이 조는 곳까지 은근슬쩍 이동해서 담배에 불을 댔다. 어쩌다 담배 연기를 맡고 깬 정안이 재채기라도 하면,
“와 서울 미남, 니 기침도 할 줄 아나.”
하는 소리를 하면서 재미있어했다. 그러면 정안은 또 그저 씨익 웃었다. 까만 모자를 쓴 둥그런 뒤통수를 식당 외벽에 기댄 채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유약한 청년이라고 여겨 싱거운 장난을 걸던 이들도 있었다. 정안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도 집요하게 따라붙어 연애하자던 못된 양아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성가신 일이 뚝 끊길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안이 타정총에 손을 뚫린 것이다.
총각 몇이 모여 개집을 짓는다고 부산을 떠는데, 소란스러운 것 싫어하는 정안이 웬일로 섞여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챙겨 주느라 정이 들었는지 덩치만 크고 머리가 나쁜 잡종 진도의 집을 지어 준다며, 합판이니 스티로폼이니 하는 것들을 구해 온 게 정안이었다.
못 박는 데 쓰는 타정총이 어쩌다가 천방지축 중졸 무지개 머리의 손에 들리게 된 건지는 모른다. 다들 뜨악하여 비명을 지르고 보니 정안의 오른손이 대못에 관통되어 개집 지붕 삼으려던 합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는 반 뼘 길이에 손등 위로도 3센티는 족히 튀어나온 대못은 공사장에서나 쓰는 아주 굵고 험상맞은 놈이었다.
손바닥이 뚫리고도 정안은 끙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도리어 놀라서 울부짖은 건 사고를 친 무지개 머리였다. 옆에서 개도 따라서 울부짖긴 했다. 누군가가 119를 부른다는 걸 들은 정안이 침착하고도 단호하게,
“구급차 부르지 마세요.”
했다. 하도 말이 없으니 그때 정안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도 많았다. 정안은 바닥에 널린 공구 중에 장도리를 눈짓했다. 무지개 머리가 벌벌 떨며 건네주었다. 장도리의 방향을 손안에 가늠하는 꼴을 보고, 사장 아들 배불뚝이 형님이 고함을 쳤다.
“아이 니 돌았나!”
스스로 못을 뽑으려던 정안 대신 그 형의 손에 장도리가 들렸다. 두 남자는 거사를 치르기 전에 서로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박히는 건 순간이지만 빼는 건 그보다 오래 걸렸다. 두 번, 힘을 준 끝에 검붉은 피를 쏟으며 못이 뽑혀 나왔다. 보는 사람들이 다 아파 자지러졌건만 정작 정안은 숨만 한 번 크게 들이쉴 뿐이었다.
그 사건을 목격한 양아치는 다시는 정안에게 연애하자는 싱거운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자기 같은 시시한 놈이 함부로 들이댈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는 고백에, 그걸 들어 주던 다른 총각이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고 쿠사리를 먹였다.
젊은 남자들이 다 같이 자는 군내 나는 방에서, 언젠가 정안이 반팔에 트렁크 바람으로 앉아 제 팔 안쪽의 문신을 들여다보고 있던 적이 있었다. 제 몸에 문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 막 발견한 참이었다. 섬세한 바코드 모양의 문신 아래에 한자로 작게 뭐라고 적힌 걸, 중졸 천방지축 무지개 머리가 읽어 주었다.
“형님 그거 서, 송 아입니꺼? 책 서, 에 소나무 송!”
그는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하며, 자기가 한자 하나는 자신 있다고 잘난 척이었다. 그래서 정안은 자신의 이름이 정안이 아니라 서송이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난 데도 자란 데도 살던 데도 잊어 말끔한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름이 정안, 딱 하나였다. 그래서 그게 자신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의 생활이 안락하니 서송이든 정안이든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새벽이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난다. 양치하고 비누를 문질러 얼굴부터 짧은 머리까지를 한 번에 씻기 전에, 정안은 밤새 사슬에 묶여 있던 개부터 풀어 줬다. 꼬리를 흔드는 개를 뒤에 단 채 사장님 내외가 실어 온 식재료를 나르고 분류하는 일을 돕는다. 돼지고기와 양파, 양배추와 오징어 따위의 재료들을 애벌 손질해 둔다. 오토바이를 탈 줄 몰라 배달 일을 못 하는 대신 해내는 일들이 더 많았다.
재료 중에 개 줄 만한 잡고기를 골라 죽을 끓여 주고 콘크리트 발린 너른 주차장을 한 바퀴 돌며 잡풀을 뽑노라면 다른 사람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과 눈인사할 때 정안은 대개 무표정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게 그의 평온한 얼굴이었다.
보통 기억을 잃은 사람이라면 과거를 찾으려 애를 쓸 텐데, 정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배불리 먹고,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반쯤 드러누워 피식피식 웃어 가며 테레비를 보다가, 사지 쭉 뻗고 잘 수 있는 거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제법 친해진 배불뚝이 형님이 정안의 사정을 알고는,
“마 니는 엄마 아빠도 안 궁금하나? 요샌 기억 상실 그란 거 멘 사무소 가서 지문 조회하면 간단하다. 이십일 세기 아이가.”
하고 말해 주었지만, 정안은 씨익 웃고 말았다.
그는 정안을 장가보내 기반을 마련해 주고도 싶어 했다. 결혼하면 아버지한테 이어받은 수타 기술을 알려 주겠으니 오래 일하라고도 했다. 젊은 여자만 보이면 몰래 턱짓하면서,
“저 딸아는 어떤데? 쟈는 영 파이가? 서울 딸아 느낌 안 나나?”
하고 정안의 여자 취향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자기가 일찍 결혼해 보니 남자는 결혼을 일찍 하는 게 장땡이라는 지론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소주를 마시다가도 그런 소리를 하길래, 정안은 잘 안 마시던 술에 취하지도 않는지 아니면 그게 취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하하 웃으며,
“전 진짜로 지금이 좋아요.”
하고 드물게 긴 말을 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햐 니 목소리도 진짜 좋네.”
“서울말 하니까 진짜 막 보들보들하고 쥑이네.”
“아이 니 그라모 욕도 할 줄 아나?”
하고 말을 시켰다. 정안은 늘 젖어 있는 것처럼 반짝이는 갈색 눈으로,
“…씨발 존나, 형님들 너무들 하시네, 저라고 왜 못 하겠어요.”
하고 애교를 섞어 대답했다. 쫀득쫀득한 욕설을 뱉는 저음의 단정한 목소리에 홀려 다들 넋을 놓았다가 다음 순간 와핫핫 호탕하게 웃었다.
창완방송에서 지역 맛집 취재를 나온 날이었다. 배불뚝이 형이 리포터가 예쁘다고 뛰어왔다. 정안은 번들거리는 방수 앞치마를 입고 이젠 한 몸처럼 느껴지는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너덧 망이나 되는 양파를 까고 있었다. 고무장갑도 채 다 못 벗고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질질 끌려 나왔다.
영문을 모르고 모자가 벗겨진 정안의 앞에 예쁘장한 리포터가 조그맣고 네모난 기계를 들이댔다. 그게 마이크인 줄도 모르고 두리번거리던 정안의 눈에, 수타 짜장집 늙은 사장님이 카메라 뒤에서 손짓 발짓하는 게 들어왔다. 정안은 리포터가 들이댄 마이크에 키를 맞추느라 허리를 조금 숙였다. 마침 불어온 봄바람에, 주차장을 따라 심긴 벚꽃나무로부터 날아오른 꽃잎이 마구 흩날리는 배경으로
“수타, 짜장! 정~말 맛있어요!”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다. 양파가 매워 눈가와 콧등,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모자 썼던 짧은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눌린 미남의 인터뷰는 지역방송에 약 3초 정도 송출되었다.
방송이 나오던 날, 정안은 배불뚝이 형의 딸내미가 아이 삼촌 인제 나온다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홀에 있는 커다란 티브이를 통해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시키는 것 다 하는 뻔뻔한 낯은 보얗게 살이 올라 편안해 보였다.
방송 다다음 날이었다. 동이 틀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어두운 새벽, 정안은 직원 숙소로 쓰는 가건물 앞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은 채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주차장 입구에 새벽 시장 갔던 사장님의 용달차 대신 낯선 외제 차가 소리도 없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입가의 거품을 닦으며 주춤주춤 일어섰다. 양치하기 전에 사슬을 풀어 주었던 덩치 큰 진도 잡종이 자기랑 놀아 주는 줄 알고 꼬리를 맹렬히 흔들며 번쩍번쩍 뜀을 뛰었다.
정안은 공용 쓰레빠 안의 벗은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그 차로 다가갔다. 가끔 국도를 타던 차가 24시간 영업을 하는 식당인 줄 알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정안은 미안하다는 듯 차 앞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식당 앞의 입간판에 쓰인 영업시간을 가리켰다. 손님을 놀라게 하거나 아니면 펄쩍거리며 뛰다가 손님 차에 치이기라도 할까 봐 진도 잡종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투 잡아 뛰지 못하게 하면서였다.
밤새 홀로 운전해 달려온 첫째 도령은 개를 다루는 올린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람 손에 개처럼 다뤄질 줄만 알던 놈이 고작 몇 달 사이에 자란 건지, 아니면 원래 저런 놈인 걸 모르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올린이 이번에도 기특하게도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선 것을 보며 입가로 비죽비죽 새는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헤드라이트 속에 선 그는 허름한 추리닝 바지에, 이 날씨에는 추울 반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 덕에 동그랗고 귀여운 두상이 더 돋보였다. 퀭하고 수척하던 하얀 얼굴에는 살이 조금 올라 이전보다 더 잘생겨졌다. 그는 헐렁한 옷 안에 감춰진 엉덩이도, 얼굴만큼이나 단정했던 자지도 더 잘생겨졌을지 궁금했다.
가만히 운전석 창문을 내리자 손님이 길이라도 물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의심 없이 다가오는 태도가 유순했다. 그냥 이대로 지내게 좀 더 둘까도 싶었지만, 이제는 부주의한 막냇동생에 대한 처벌을 끝낼 때도 되었다, 물론 기억이 돌아올 올린이 용서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안녕?”
인사하자, 다가오던 올린이 딱 멈춰 섰다.
“그동안 재미있게 지냈어?”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거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도련님 기억, 정말 하나도 안 나?”
혼란에 빠진 정안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역주행해 봐도 과거의 기억에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예전에 느꼈던 감정들이었다. 미칠 것 같은 갑갑함과 억울함, 슬픔과 서러움, 그리고 두려움 따위의. 정안이 과거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던 까닭은 이것이었다. 이런 감정의 기억들로 미루어 보아, 자신은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나은 시간을 살아온 게 분명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러나 그 시간으로부터 나타난 것 같았다. 안부를 묻고 기억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철저한 망각을 기뻐한다. 해로웠다.
“말 못 하겠으면 고개로 대답하면 되잖아.”
그제야 정안은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포식자의 눈을 마주한 피식자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합니다, 저런, 이 가여운 톰슨 가젤도 그러하군요, 어제저녁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어색한 내레이션이 머릿속에 흘렀다.
그래서 이렇게 멈춰 섰던 동물이 톰슨 가젤이었는데, 아니 고라니였던가, 그게 결국 잡혀 먹혔는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정안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유쾌하게 웃으며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잠옷으로 입는 소매 짧은 티셔츠 아래, 생활 근육이 붙은 단단한 팔이 저절로 올라가 남자의 손안에 들었다. 쌀쌀한 새벽 공기 속, 남자의 손은 너무 뜨거워서 닿은 데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옳지.”
그가 조수석에 두었던 작은 케이스 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제법 굵은 바늘의 포장을 탈탈 털어 주사기에 꽂고 앰플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옮겨 담는 동안 남자는 한 손으로는 정안의 팔을 잡고 있느라 다른 쪽 손과 입을 썼다. 팔을 쥔 큰 손은 정안을 붙들어 놓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힘을 들이지 않고 살갗을 주물거릴 뿐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강한 완력에 구속된 것처럼 뺄 수 없었다.
주사를 놓기 전에 남자는 물었다. 손바닥과 손등을 관통했으나 이제는 붉게 아문 못 자국을 보면서였다.
“그런데 이거, 뭐야?”
“못, 박혀서… 사, 고였, 습니다.”
자신은 말을 더듬은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겁에 질린 목소리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예쁘다. 집에 돌아오면, 왼손에도 만들어 줄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정맥에 주사기가 꽂혀 들어갔다. 약이 몸 안에 흘러드는 동안 정안은 발작하듯 떨었다. 이대로 차에 실리게 되나, 일테면 트렁크 같은 곳에, 아니 어쩌면 다른, 하고 혼란한 생각이 흐른 것이 무색하게 남자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정안을 놓아준 그가 말했다.
“주소는 알아?”
“모, 모릅니다.”
“한북로 34번지.”
정안은 입속으로 한북로, 34번지, 라고 되뇌었다.
“기억 돌아오는 데는 서너 시간 걸릴 거야. 그 후엔 잘 생각해서 선택해. 다른 데로 도망가면 난 안 쫓아가. 또 방송에 출연하는 바보 같은 짓만 안 하면, 아마도 둘째도 널 찾지는 못할 거야. 너, 숨는 데 꽤나 재능있는 것 같으니까.”
울렁거리며 들어오는 말 속에 정안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한번 한북로 34번지, 했다.
“그래, 맞아. 돌아오고 싶으면, 한북로 34번지.”
그런 말을 하며, 남자는 다 쓴 주사기와 약병을 정리했다. 그제야 뒤늦은 도망을 치듯 주춤주춤 몇 걸음 물러나, 등에 닿은 벽에 기대려다 주르르 미끄러져 앉았다.
“만약에 다 기억하고도 이대로 살고 싶어지면, 되도록 빨리 다른 데로 가. 둘째가 그 영상 곧 볼 거 같거든. 수타 짜장 맛있어요 그거, 되게 귀여웠어.”
남자는 차를 돌리기 전에 그런 말을 하며 웃었다. 정안은 약효가 돌기 시작한 충혈된 눈알을 굴릴 뿐, 외제 차가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귀를 눕힌 잡종 진도가 낑낑대며 다가왔다.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한쪽 팔을 간신히 들어 커다란 개의 몸을 안아 주었다.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형아가 그냥, 좀 졸려서 그래, 속으로만 하는 거짓말을 개가 믿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사지를 웅크린 채 굳어 쓰러진 정안을 발견한 것은 새벽 시장을 다녀오던 사장님과 배불뚝이 형님이었다. 정안은 처음 엉망의 몸에 부러진 손가락을 하고 왔을 때처럼, 개집을 지어 주다 파상풍에 죽다 살아났을 때처럼, 이번에도 병원에는 갈 수 없다고 버텼다. 형님은 그가 아플 때마다 남에게 고통받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것을 기억하고 맘 편히 홀로 앓으라고 창고에 달린 곁방에 보일러를 틀어 주었다.
꼬박 하루를 누워 있던 정안은 다음날 새벽에 모습을 감췄다. 가끔 직원들이 무척 잘생겼던 서울 남자의 얘기를 하긴 했어도, 워낙 사람이 잘 들고 나는 식당이라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오기 전과 바뀐 것이 있다면, 개가 묶여 있던 짧고 무거운 사슬이 조금 더 길고 가벼운 것으로 바뀐 정도였다. 시내 철물점에서 파는 사슬 중 가장 좋아 뵈는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