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설전 (12/65)

# 설전

남자는 올린을 홀로 버려 두는 대신 막내 도령이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었다. 올린은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로도 발가벗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한참을 기다리게 한 막내 도령이 마침내 나타나 다가올 때는 그 떨림이 안쓰러울 정도로 심해졌다.

그러나 막내 도령은 올린에게 알은체를 하는 대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향해 주먹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올린을 버려둔 채 멀찍이 걸어가 담배를 피웠다. 올린은 그들이 간간이 웃어 가며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는 동안 빨개진 코를 훌쩍이고 덜덜 떠는 손을 모아 쥐며 잠자코 기다렸다. 눈이 내려 쌓이는 밤 풍경은 낮과는 많이 달랐다.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는 조용한 계단이 쓸쓸하고 적막했다.

“야!”

한참이나 먼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막내 도령이 불러 주었다. 올린은 퍼뜩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선 도련님을 보았다. 이리 오라는 손짓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파 절룩거리면서도 신나서 달려오는 모양새를 보고 두 남자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커다랗고 하얀 개 같았다.

“개 같다.”

“어.”

“너 개 좋아하잖아.”

“어.”

죽을 지경까지 때려도, 잡아먹으려 들어도, 어디 가져다 버려도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드는 게 개다. 막내 도령은 올린이 정말로 개 같은 놈이라서 참 좋았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손짓 한 번에 기쁜 듯 달려오는.

올린이 다가오자 남자는 막내 도령에게 인사하고 올린에게는,

“또 봐.”

하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올린은 그리워하던 도련님의 얼굴을 바라보기 전에 마른침부터 삼켰다.

도련님은 아까부터 올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하얗던 얼굴이 얼룩덜룩해진 꼴이 볼 만은 했다. 이마의 찍힌 자국, 광대뼈의 긁힌 자국, 입술의 터진 자국, 콧잔등의 푸르게 부은 멍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눈가가 짓물러 붉게 달아오른 눈물 자국이었다.

“이거, 뭐야.”

그러나 도련님은 눈물 자국은 무시하고 아플 만한 데를 톡, 쳤다. 담배가 끼워진 손가락이 느리게 다가가도 올린은 겁내지 않았다. 마치 이제는 모든 학대가 끝나고 쉴 곳으로 돌아왔다는 듯이 안심한다. 쉬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말투에 어리광이 섞였다.

“코에, 뭐가 들어갔었는데, 잘 안 빠졌습니다.”

“뭐 넣었는데.”

건전지였다. 올린이 쓰고 있던 안경에는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다. 친구들은 틈틈이 찍은 사진을 메신저로 공유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두 알면서, 그는 올린의 입으로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올린은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이니 그럴 수 있었다.

“잘, 못 봤습니다.”

“그럼 이건.”

터진 입술이었다. 올린은 손을 올려 입가를 더듬었다. 거기서 피가 흘러내리다 굳은 것도 지금 안 것 같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리가 없었다.

“여기는.”

올린이 정확하게 기억하는 상처였다. 달아나다 넘어져서 돌바닥에 갈린 자국. 광대뼈의 찰과상을 관찰하던 남자가 사진을 찍었었다. 이번에는 차마 모른다고 답할 수 없었던 올린이 도련님의 눈을 피했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빤 도련님은 바닥에 꽁초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걷는 동안 올린은 담담해 보이려 애쓰면서도 죄를 지은 심정이 되어 뒤를 따랐다. 그토록 기다린 도련님인데 인제 와서 무서워지는 것은 어떤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올린은 아까, 흠씬 두들겨 맞으며 분노에 차 으르렁거렸던 것을 생각했다. 고라니냐고 물으며 다가온 남자들로부터 달아났던 것을 생각했다. 탁구대에 앉은 채 사정해 버렸던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도련님이 다 아실 것을 알아도 그랬다.

조수석에는 큼지막한 타월이 깔려 있었다. 그런 준비에서 올린은 도련님의 악심을 느끼고,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윤간당한 몸에서 피 혹은 정액이 흘러도 차 시트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한 타월 위에 앉으며, 그는 컵 홀더에 얌전히 담긴 종이컵 두 개를 훔쳐보았다.

낮에 올린이 반도 못 마시고 빼앗긴 것과 같은 브랜드였다. 두 개 중 하나에는 붉은 입술 자국이 나 있었다.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마신 흔적에 슬픈 시샘이 일었다. 그는 타월을 보던 순간부터 울 것처럼 떨리던 입꼬리를 감추려 손을 들어 볼 언저리를 긁는 척했다.

도련님이 듣던 음악이 플레이되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린은 이번에는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몸이 지쳐 고개를 가누는 것도 힘들었거니와, 기운이 남아 있더라도 정말이지 도무지 눈 구경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올린아.”

하지만 도련님이 이름을 불러 준 것은 처음이었다. 올린은 늘 그에게 욕설이 섞인 호칭으로 불려 왔다. 가장 점잖게 부르는 말이 야, 였는데 이름으로 불러 주시다니. 지친 몸과 마음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고 섭섭한 마음을 다잡으며 올린이 대답했다.

“네, 도련님.”

“나 많이 기다렸어?”

올린은 순간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서운함을 이긴 것은 그리움이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한참이 지나서야 말할 수 있었다.

“많이, 많이 기다렸습니다.”

그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올린은 자신의 말재간이 형편없는 것을 처음으로 한탄했다. 그가 그를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많이, 라는 가벼운 낱말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표현할 길을 몰라 올린은 작은 목소리로, 많이… 하고 한 번 더 속삭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왜.”

한참이나 지나서야, 도련님이 다른 질문을 했다. 여전히 운전하느라 시선은 앞을 향한 채였다. 한 음절의 문장에서 어조의 변화를 느낀 올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랄한 물음이었다. 올린이 망상하던 것처럼 고난의 순간에 도련님이 나타났다면, 즉시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순백의 상태였느냐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고통을 정말로 겸허히 인내했느냐고 책망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도 않았던 주제에 뭘 믿고 기다렸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도련님이 하문하신 거라면, 부끄럽지 않도록 대답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으르렁대고, 달아나고, 사정하고, 억울해했다.

올린은 모아 쥔 손을 비틀었다. 어쩌면 지금이 도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할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이 사과를 받아야 할 순간이기도 했다. 올린은 자신이 액받이로서 고통과 통제 속에 살아가는 대신 주인 된 도련님은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막내 도련님이 불특정한 남자들에게 자신을 내돌린 것은 주인으로서의 책무를 망각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훨씬 더 영민해졌을 머리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주인의 손으로 액받이를 죽일지언정 감시조차 붙이지 않고 타인의 손에 버려두어서는 안 됐다. 자신의 죄가 비록 크지만, 도련님도 오롯한 주인의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원망은 도저히 다듬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올린은 잘못을 빌지 않았다. 무심코 튀어 오르는 죄송하다는, 잘못했다는, 용서해 달라는 말 대신 그는 애써 해야 할 말을 골랐다. 극한의 긴장 속에 배웠던 예의 바른 말투는 어디로 가고 말은 마구 더듬으며 튀어나왔다. 너무 멍청하게 들려, 하고 자신의 말투를 평하면서도 올린은 끝내 하고자 하는 말을 해냈다.

“아, 안아 주실… 안아 주실 거니까요.”

“뭐?”

“안아, 안아, 주시면 다 괘, 괜, 찮아질, 거니까….”

이것은 액받이가 하는 명령이었다. 비록 네가 내 주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망각하고 위험 속에 나를 방치했지만, 나를 지금 안아 준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낮은 자의 오만한 선언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아들은 막내 도련님이 천천히 올린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에 어린 것은 눈빛이 아니라 불빛 같았다. 올린은 노여워하는 게 분명한 시선을 마주 보는 대신 긴장으로 바짝 굳어서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적색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건만 도련님은 멈췄던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너 같은 씹걸레년을 내가 왜 안아 줘. 오늘 딴 남자 자지 빨다가 흘린 보짓물이 한 바가진데, 가르친 대로 얌전히 굴지도 못했는데, 이 씨발년아, 네가 뭐가 예뻐서.”

바로 원래의 말투로 돌아온 목소리에 올린은 시선을 그대로 한 채 한번 크게 떨었다. 도련님은 하루를 윤간당한 액받이의 티끌 같은 요구조차 귀엽게 여겨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 씹년이 제 주인 망신 주는 줄도 모르고. 더러운 소리를 내질 않나, 농땡이를 부리질 않나, 도망을 하질 않나, 좆물을 싸지르질 않나. …외간 남자 품에 덥석덥석 안기질 않나. 오늘 잘못한 만큼 부러뜨리면 너, 이거 몇 개나 남을 거 같아?”

확, 손이 낚아채졌다. 당장에라도 손가락을 부러뜨릴 것처럼 한 손으로 약지를 누르는 도련님과 올린의 시선이 드디어 마주쳤다.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러나 올린에게도 슬픔과 기쁨이 있었다. 지금 도련님이 느끼는 기분 또한 올린의 마음에 있었다. 액받이는 물건과 같다. 감정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은 물론 그 자신조차 인정하지 않더라도, 감정은 감정이었다. 짓누르기만 하면 터지는 게 당연했다.

올린은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저, 저도, 제 소, 소, 손도, 도련님, 겁니다, 저, 저, 전부, 전부, 전부다, 부러뜨, 리실, 수 있지만, 도, 도, 도, 도련님 거, 예요.”

그리고 즉시 후회했다. 천치 같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도련님 앞에서, 건방지게도. 다 글렀다.

골절의 고통은 기억했던 것보다 끔찍했다. 도련님은 길쭉한 약지를 뒤튼 채 눌러 부러뜨리면서도, 손이 아니라 올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올린은 기이한 모양으로 꺾인 왼손 약지를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차가 급발진했다가, 급정지하느라 안전벨트에 구속된 몸이 크게 덜컹거렸다. 그럴 때마다 부서진 뼈끝까지 전해지는 충격이 있었다.

“안 닥쳐.”

도련님이 사납게 명령하며 거칠게 핸들을 돌렸으므로, 올린은 입술을 깨물고 왼손 손목을 오른손으로 붙잡은 채 끔찍한 승차감을 견뎌야 했다. 도련님은 올린의 몸이 앞으로 쏠리도록 브레이크를 밟고, 창문에 머리를 꽝 부딪치도록 거세게 좌회전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크게 핸들을 돌리는 바람에 얇은 코트 차림의 도련님 어깨까지 올린의 머리가 닿았다. 그렇게 한 바퀴 돈 차가 멈춘 곳은 낯선 장소였다. 올린은 눈앞에 펼쳐진 한강의 풍경과, 푸른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철교의 모습을 눈 안에 담으면서도 진땀을 뻘뻘 흘렸다.

“내려.”

음악이 흐르는 따뜻한 실내에서 차 밖으로 내려선 것은 올린뿐이었다. 겨울 억새가 흔들리는 인적 없는 땅에 발을 디뎠다. 콘크리트도, 보도블록도 아닌, 눈 쌓인 흙바닥이었다.

헤드라이트가 켜진 차 앞에 섰다. 눈은 아직도 펑펑 내리고 있었다. 도련님은 운전석의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내밀어 올린이 해야 할 일을 차례로 명령했다. 신발을 벗기고, 양말을 벗길 때까지만 해도 순하던 눈이었는데, 바지를 벗으라는 말이 떨어지자 원망하는 기색이 완연한 울음이 터졌다.

도련님이 차에서 내리자, 울며 피하듯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쓰러뜨리고 주먹다짐하여 바지를 벗겨 낸 다리는 멍들고 지저분한 게 묻어 엉망이었다. 가엾게 여겨 주지도 않고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부러진 손가락이 바닥에 눌려 올린이 아아아악, 하는 긴 비명을 질렀다.

보닛으로 밀어붙여졌다. 엎드린 자세로 범해질 거로 생각한 올린의 엉덩이에, 도련님의 좆은 와 닿지 않았다. 대신 다섯 손가락이 모두 멀쩡한 오른손 위에 도련님의 손이 겹쳐졌다.

“너 미쳤어?”

올린은 아아, 아아아, 하고 우느라 숨넘어가는 소리를 가다듬지도 않았다. 미쳤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정신은 아직도 지나치게 명료했다. 대체 왜 안 미치는지 진짜, 의아할 뿐이었다.

“나 누구야.”

통곡하던 올린이 간신히 대답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제 주, 주인 되, 시는 분,”

“네가, 그 다음 뭐야.”

“제가, 제가, 죽는 날까지, 순종해야 할.”

조교와 함께 달달 외운 기본 강령에 있던 구절이었다. 그 구절을 외고 나니 격렬하던 울음이 잦아들었다. 도련님은 한참이나 그렇게 몸을 겹친 채, 훌쩍이는 몸의 진동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가 몸을 떼었다. 보닛에 떨어졌던 안경을 주워 다시 씌우고, 따뜻한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기 전에 도련님이 명령했다.

“다섯 걸음 뒤로 가, 팔 벌려 뛰기 10회.”

올린은 성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쌓인 눈 위를 맨발로 걸었다. 도련님이 보고 계신 쪽을 향하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한 번 손바닥이 닦고 지나간 뺨 위에 눈물이 또 흘러 젖었다. 헤드라이트에 눈이 부셔 도련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련님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직도 그랬다.

“…하나.”

온몸이 아파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팔을 벌려 한 번 뛰고, 팔을 위로 하여 한 번 뛰는 두 번의 움직임에 골절된 손가락 끝까지 고통스러운 충격이 전해졌다. 울면서 수를 세는 게 꿈속처럼 몽롱했다.

“…둘.”

짜부라지도록 고문당한 자지가 출렁거리게 뛰는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발길질과 주먹질로 멍든 몸과 함부로 쥐어 잡힌 손자국이 여윈 몸에 장식 같았다. 깨끗할 때보다 고통받은 흔적이 있을 때 돋보이는 몸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 엣.”

뛰는 움직임을 따라 다리 사이에 흐르는 것은 남의 정액이었다. 도련님은 뚝뚝 흐르다 진득하게 늘어나는 것을 노려보다가, 문득 보기 괴롭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밝은 빛에 외로이 노출된 올린은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일곱 번째쯤 뛸 때, 말라붙었던 정액 덩어리가 투두두둑 한 번에 떨어졌다. 맨발로 찍은 발자국 옆에 굳은 체액이 더러운 웅덩이를 이뤘다. 그러고 나니 흐르기 시작한 건 정액이 아니라 피였다. 코피 흐르듯 툭 툭 떨어지기 시작한 핏방울은 곧 허벅지 안쪽을 흥건하게 적시며 타고 흘렀다.

올린은 더 이상의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둔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출혈도 인지하지 못했다. 열 번의 팔 벌려 뛰기를 마친 다리에는 핏길이 선명했다. 도련님은 저 물건, 이 이상 학대하면 안 될 거라는 것을 그걸 보고 알았다. 그런데도.

“주제도 모르는 년. 자지라면 환장하는 년. 뭐, 그 더러운 몸을, 안아 달라고. 씨발, 존나 너무하네.”

싸늘한 나무람은 저절로 흘러나왔다. 입술을 덜덜 떠는 올린에게 바지와 신발이 던져졌다. 지친 몸은 제가 신었던 신발에 맞는 것으로도 힘없이 넘어져 주저앉았다. 도련님은 혀를 찼다. 동정은 아니었다.

“옷 입어.”

속옷 없이 바지를 입고 양말 없이 운동화를 신었다. 한 손이 성치 않아 서두르는 동작이어도 느렸다. 헤드라이트가 위협하듯 꺼졌다가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불이 꺼질 때 오히려, 올린은 두려움에 작은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움직임을 서둘렀다.

옷을 다 입을 때까지 기다려 준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도련님은 언뜻 보기엔 패딩까지 단단히 차려입은 것처럼 보이는 액받이의 모습을 확인하고,

“넌 걸어와.”

했다. 올린이 비틀거리며 조수석 문을 열려다 잠긴 걸 알고 열린 창문에 매달렸다.

“도, 련님!”

“너 같은 년은 집까지 차 타고 가는 것도 호사야, 걸어와.”

서울의 지리를 알 리 없다. 게다가 눈 내리는 한밤. 진심이실까. 아까부터 멈추지 않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음 중에 빌었다.

“앞으로안그러겠습니다,”

안 그래야 할 것이 많았다. 도련님이 자라고 하는 남자들에게 반항하면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좋아해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조금 고생을 했다고 해서 안아 달라고 하면 안 된다. 감히 액받이 주제에 주인에게 노고의 대가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항의하다니, 올린은 조금 전까지의 자신이 정말 돌았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필사로 애걸했다.

“손 떼.”

반사적으로 순종하고는 후회했다. 차가 천천히 후진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허둥대며 따라 걸었다. 열린 창에서는 온기와 함께, 아까와는 다른 음악이 흘러나왔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절룩이는 것을, 막내 도령은 즐기지도 못하면서 흘끗 노려보았다. 어떻게 해도 예쁜 얼굴인데 오늘은 못생겼다. 너무 추해서, 어떻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도련님은 제 분노의 까닭을 헤아려 보는 연습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액받이에게서만 찾으려 들었다.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 혀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묘사한, ‘존나 귀여운’ 행동들이 평소와 다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에는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분명 있었다. 화풀이의 대상도 액받이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것을 도련님도 올린도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제발 도련님, 제발.”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숨차도록 입에 올린 애원은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은 것처럼 무용하게 흩어졌다. 올린이 흐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도련님이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두 걸음째에는 창문이 올라가고 차체가 가파르게 회전했다. 세 걸음 물러나자마자 속도를 내기 시작한 차를 올린은 저도 모르게 따라 뛰다 빵, 하고 혼내는 듯한 클랙슨 소리에 엉겁결에 발을 멈추었다.

다시 돌아올 것만 같던 차가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올린은 멀리 차가 우회전하여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비틀거리며 허리를 숙여 웩, 하고 속에 든 것을 게워 냈다. 입가를 닦으며 일어설 때, 항문에서 쏟아져 나온 뜨끈한 것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르 흘렀다. 올린은 그게 남은 정액이라고 생각했다.

걸어갈 길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선 채로 엉엉 울었다. 홑겹의 청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이 찬바람에 마구 얻어맞았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고난을 위로하는 포옹이었다. 올린은 주인에게 안아 달라고 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반 시간 정도를 그대로 기다리다가, 문득 그것이 그렇게 큰 소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손가락 부러진 손을 감싸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한강대교 위, 일방의 인도를 걷다가 충동적으로 안경을 벗어 떨어뜨렸다. 한참 더 걷다가는 손목에 찬 시계도 풀어 던졌다. 난간 위에 떨어졌길래 분한 마음으로 절룩이며 쫓아가 그대로 물 위로 밀어 버렸다. 골절로 부었던 손목에 짜릿짜릿한 해방감이 통증 같았다. 어차피 안아 주지도 않는 거, 이딴 고통은 견딜 가치가 없었다.

씨발 존나, 너무하신 것은, 도련님이었다.

달릴 힘도 없어서 달아나는 발은 느렸다. 그러나 다급하게 굴 필요조차 없음을, 올린은 알았다. 막내 도련님은 자신의 소실을 꽤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제 분을 못 이겨 방치한 주인이 소유물의 행방을 살뜰히 살펴 줄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해 주는 주인으로부터는, 이렇게 달아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디 가?”

묻는 소리가 들린 것은 시계를 던져 버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서였다.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든 올린은 눈 앞의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대답을 위해 입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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