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비창(2) (7/11)

[btlz] 나락 3권

7. 비창(2)

“……뭐야.”

3억 4천? 주형이 눈을 의심했다. 그러고는 위로 슥, 슥 올려 보았다. 천국 놈들은 재촉이 일상이라 일주일마다 한 번씩 문자를 보낸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2억 언저리였던 금액이 3억 4천으로 불었다. 딱 제가 발목을 다쳤을 때쯤이었다.

“윤재연 씨발 새끼…….”

병원비라 이거야? 주형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문을 쾅, 열어젖히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놈도 똑같았다. 공갈 협박도 모자라 아예 자신이 발목을 부러뜨려 놓고 그렇게 1억을 늘리다니. 정말로 이 나락에서 함께 죽어 가자는 건가. 하지만 병원비가 그렇게 비싼가? 중환자실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발목뼈가 좀 잘못된 것뿐이었는데.

‘미친 새끼.’

주형은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그제야 느껴지는 을씨년스러운 살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건 비단 남의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제 일이고, 이렇게 윤재연이 조금만 장난을 쳐도 오들오들 떨고 마는 꼴이다. 물에 젖은 생쥐보다도 훨씬 비참한 시궁창 같은 삶이다.

돈이라는 목줄에 매여 평생을 앓고,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우스운 방법으로 죽어갈 거다. 너무 흔한 참극이라 관심조차 아까운 일들 말이다.

누군가는 매일 살아가는데, 자신은 이상하게도 매일 죽어 가는 것만 같았다. 주형은 문득 아침에 있던 그 달콤했던 성애를 기억해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때리고 싶었다.

그 순간을 왜 즐겁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돈 하나에 무너지고 말 텐데. 윤재연도 결국은 그런 놈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주형은 절망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그렇게 손을 벌벌 떨며 전봇대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 재연에게 건 기대가 생각보다 컸다. 어쩌면 이놈이 제일 낫지는 않을까. 정말 놈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닐까…… 같은 것들 말이다.

뻑뻑한 담배 연기를 그대로 마시고, 빨아들이고, 또 뱉었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세 대를 연달아 피웠다. 다시 자괴감을 느낀 건 이 담배조차 재연이 사 준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했을 때다.

“하하, 씨발…….”

역겨운 놈. 주형은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는 걸 깨달았다. 목 뒤가 뻐근했다. 눈가가 시리도록 아팠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메말라버린 이 감상이 두려웠다.

재연에게 기대한 만큼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속이 곪고 있었다. 곁에서 그렇게나 난리를 피우기에 이번에는 아닌 걸로 착각했다.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주형이 중얼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담뱃재가 흩어지며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재가 신발을 자그마하게 태워도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엔진이 금세라도 꺼질 듯 후들거리고 있었다.

담배가 흘린 자국을 흩어내지 않고 숨을 푹 내쉬었다. 연초 담배 향기가 깊이 섞인 숨을 내뱉고 있으니 저 멀리서 껄렁한 무리가 보였다. 동네의 못난 양아치들이었다. 재연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하찮은 것도 아닌 골목대장이었다. 나름대로 여기 사는 미천한 하층민들은 그들을 무서워했다. 영역 안에서만 날고 길 줄 아는 버러지들. 주형은 썩어 있는 눈으로 분노를 빛냈다.

그러고 있으니 저 멀리서 놈들이 킥킥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예전이라면 기분이 나빠서라도 외면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힘도 없고, 시비를 걸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담뱃재가 되어 그대로 밟히면 좋을 텐데. 그제서야 그을린 신발을 본 주형이 힘없이 속으로 읊조렸다. 심하게 감상적인 그는 비참한 분위기를 풍겼다.

“야, 민주형이!”

“……뭡니까.”

“뭡니까가 뭐야, 새끼야. 내가 너 돈도 빌려주고 그랬는데, 버릇없게. 확, 씨.”

“그냥 대부업이지 않습니까. 돈은 무슨…… 지랄.”

주형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때리면 자신도 그냥 때리고 만다. 어차피 저런 새끼들은 경찰도 못 부른다. 워낙 지역에서 염병을 떨고 다니는 데다가, 돈도 없어서 공권력과 손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경찰이 오면 분명히 주형의 편을 들 테니까. 주형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씨발, 말 좆같이 하는 거 봐라? 이 새끼가.”

“야, 참아. 그래서…… 너, 그 멀대 새끼가 사 갔는데 잘 갚고 있냐?”

“…….”

뭐라는 거야, 씨발. 주형이 그렇게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말리고 있던 놈이 허,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씹질하다가 정신이 나갔나……. 야, 너 사 간 멀대 새끼 말인데.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너랑 좆질하려고 데리고 간 거 같더라? 그 새끼랑 잘 지내냐고.”

“사 갔다니,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야.”

오늘따라 귀찮게 하는 놈들이 많아서 너무 힘들었다. 주형은 쭈그리고 있던 몸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덩치가 펴지자 놈들도 움찔했다.

“내가 그 돈 많은 놈한테 채권 넘겼어. 그러니까 그 새끼가 너 산 거지, 안 그래?”

“천국 캐피탈에 채권 넘긴 거 말인가?”

“아니, 멍청아. 천국 말고, 거기 이사!”

아, 맞다. 천국 캐피탈의 채권이 아니라 윤재연의 채권이었지. 주형은 제 채무가 회사가 아니라 재연에게 묶여 있다는 걸 자각했다.

“거기 이사님이 우리한테 직접 찾아오셔서 웃돈까지 얹어주고 사 갔다니까? 어지간히 네가 마음에 든 거 같은데, 잘 좀 해 줘라. 씹질.”

서비스도 좀 해 주고. 놈 중 하나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 뒤 손가락 끝을 서로 맞붙였다. 그리고 동그랗게 생긴 구멍 사이로 혀를 날름거렸다. 역겨운 제스처임에도 주형은 그냥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뭐야, 떡 안 쳤냐?”

“이 새끼, 이거 고자 아니야? 씹, 그렇게 생겼으면 같은 남자라도 존나 서겠던데.”

재연과는 다른 결로 더러운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주형은 역겨운 티를 숨기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웃돈이라니?”

“넌 가방끈이 짧아서 잘 모르나 본데, 채권도 돈 주고 사고팔 수 있다고. 보통은 이자 값 붙여서 주는데, 이자 값보다 훨씬 더 많이 얹어서 주고 사 갔어. 거의 두 배?”

가방끈이 짧은 건 매한가지인 주제에 남자가 아주 으스댔다. 주형은 그 말을 천천히 듣다가, 눈을 점점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윤재연이 채권을 두 배 가격으로 샀다니? 주형은 앞내용을 그만 까먹고 말 정도로 뒷내용에 집중했다.

“…….”

“그래서 우리는 재미 존나 봤지. 너 같은 새끼도 쓸모가 있더라고?”

남자가 킥킥 비열하게 웃었다. 주형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일그러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아, 나 한 대만.”

담배를 달라는 듯 놈이 침을 꿀꺽 삼키며 검지와 중지를 살랑거렸다. 그러니 주형은 담뱃갑을 면상에 던져 버렸다. 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주형이 눈을 부라렸다.

“씨발, 그거 먹고 꺼져.”

그러고는 그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욕지거리가 들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재연이 어떤 생각으로 무슨 행동을 했는지가 중요해졌다.

***

재연은 주형이 열두 살일 때 만났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다. 어린 나이였기에 볼 수 있었던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형은 말 그대로 눈에 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연의 방에서는 주형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더라도 그 하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재연은 처음부터 주형의 뒷모습을 보고 호기심을 가졌다. 어린이 특유의 성향이기도 했다.

‘저 애는 누구지?’

재연은 그냥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그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좀 작았다. 머리는 삐죽삐죽했고, 피부는 조금 까무잡잡했다. 눈을 돌리면 새하얀 곳에 물감이 찍혀 있는 제 피부가 보였기에 더욱 대비되었다.

주형은 방이 아주 많은 건물에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다세대 주택, 즉 빌라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땐 그런 건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모두가 왕래하며 서로를 일부 공유하는 곳이라니. 인간적인 따스함 따위는 없고, 전기가 주는 온기만 있었던 재연의 집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외출을 할 때면 꼭 그 집 앞을 지났다. 그러나 2층에 사는 주형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아쉬움을 느껴서 자신을 보살피는 실장에게 마구 졸라 그 집에 초인종을 눌러 보는 것도 했다. 하지만 어떤 무서운 남자가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나와서, 재연은 후다닥 도망을 쳐 버렸다.

그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을까. 문득 그 아이는, 그 소년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달싹이며 손에는 사탕을 하나 쥐었다. 주머니에 꾹꾹 눌러 집어넣은 다음에는 꼭 그 아이에게 주고, 같이 놀자고 하려고 했다.

“실장 아저씨, 걔는 나보다 나이가 많을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나이가 제법 지긋한 남자였다. 눈가에는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가 있었다. 아이 정서에 좋지 않다며 부모가 말릴 법도 한 인상이었으나, 그런 것 따위 제지할 생각조차 없을 정도로 재연의 아버지는 재연에게 무관심했다. 그냥 후계자로 키우는 게 목적인 아이였으니까.

재연은 정말로 인간의 본능과 혈통의 이점만을 고려해 낳은 아이였다.

“학교?”

“네. 그 아이가 근처 초등학교로 가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형이라고 하는 게 좋을까요?”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재연은 어린 나이임에도 말투가 의젓했다.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그래도 눈동자가 살아 있어 실장은 내심 안심했다. 애어른을 대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을 두드리고, 가까이서 본 주형은 너무 늠름해 보이고 멋졌다. 멀리서만 봤기에 작아 보였던 것이다.저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형이었다. 몸집도 조금 큰 데다가, 잘은 모르지만 어깨가 떡 벌어져 있어 영웅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 TV를 넘기다가 보면 나오는 액션 영화에 나오는 사람 같달까. 어린아이인데도 그런 모습이라니.

‘나랑은 달라.’

난 이렇게 하얗고 가느다랗기만 한데. 재연이 키가 크고 싶다고 은근히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주형과 결혼 이야기를 한 뒤로는 키와 덩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형아, TV 봐도 돼?”

“어. 근데 소리 너무 키우지 마.”

그때도 주형은 투박한 말투를 지니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왜?”

“숙제해야 해.”

“우웅.”

재연이 조금 못마땅하지만 참는 기색을 보였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그다지 크지 않은 두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소리를 낮추었다. 정말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크게 하고 있으니 주형이 연필을 고쳐 쥐며 말했다. 손에 꼭 쥐고 있었더니 손바닥에 땀이 배서, 종이가 얕게 들러붙는 소리도 났다. 전기요금 탓에 변변한 냉방 시설이 없는 데다가, 언제나 열성을 다하는 버릇 때문에 그는 언제나 가벼운 열을 몸에 품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들리냐? 좀 더 키워.”

“형아가 숙제해야 하니까…….”

“……그렇게까지 작게 하면 오히려 그쪽에 신경 쓰이거든? 더 키워.”

“응!”

사실 잘 안 들렸는데 기뻤다. 재연은 배시시 웃으며 음량을 키웠다. 그렇게 주형이 숙제로 나누어진 유인물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무어라 쓰고 있을 때였다. 재연이 슬쩍 다가와 주형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정말 작은 손가락이지만 감각이 모두 느껴졌다. 인형보다는 묵직하고,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도 깜찍한 감각.

“왜?”

“주형이 형아……, 학교 가면 이런 거 해야 해?”

유인물에는 글자가 많았다. 진하게 인쇄된 검은색 글자보다 옅은 흑연이 묻어나 있었다. 주형은 힘을 주어 글씨를 쓰는지 군데군데 번진 것도 있었다. 재연은 빼곡하게 차 있는 글자를 바라보며 어려움을 느꼈다.

‘우리 과외 아주머니는 안 이랬는데…….’

그건 글씨가 좀 더 크고, 색깔도 많았고, 지루해 보이지도 않았다.

“어.”

“많이 어려워? 안 하면 안 돼?”

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형이 다니는 학교에 같이 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을까 싶어서, 학교는 꼭 갈 생각이었다. 숙제만 빼면 정말로 완벽할 텐데! 재연은 주형과 24시간 붙어 있는 상상을 했다.

“별로 안 어려워. 그리고, 안 하면 안 돼. 그럼 혼나.”

“하기 싫으면?”

“……그래도 해야지. 선생님한테 안 혼나려면.”

이렇게 예쁜 아이한테 선생님의 체벌을 말하기는 꺼려졌다. 왠지 잘못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대충 혼난다고 얼버무렸다.

“형아는 멋지구나.”

“야,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렇지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주형이 멋졌다.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면 해가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제 곁에 있는 게 해 같았다.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고, 말동무가 되어 주는 존재. 해보다 훨씬 좋았다. 처음 맛보는 타인의 다정함은 그렇게나 달콤했다.

“나도 형아처럼 숙제 잘할게.”

그러면 분명 결혼도 할 수 있을 거다. 멋진 어른이 돼서, 키도 크고, 돈도 많이 벌고, 차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된 다음에…… 그 드라마에서 나온 것처럼 꽃다발을 건넬 거다. 꼭. 그때까지 주형을 위해서 꾹 참고 살아야겠다.

“그래야지.”

이때까지 동생을 가져 본 적 없던 주형이 으쓱거렸다. 이렇게 잘 따르는 놈이 있다니,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재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분명 자신은 머리에 물을 끼얹을 때도 이렇게 안 부드러웠던 거 같은데, 이 녀석은 무슨 커튼처럼 부드럽다. 커튼, 커튼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한…… 뭔가, 보드랍고 상냥한 감상을 주는 물건 같다. 마음에 들었는지 주형이 슬쩍 계속 매만졌다.

“기분 좋아!”

집에서는 모든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었다. 감시. CCTV의 빨간색 점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무서웠다. 하지만 주형과 있으면 달랐다. 이렇게 포근하고 좋은 감각만이 느껴졌다.

“그래?”

“응!”

재연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몹시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활짝 웃는 그의 뽀얀 뺨이 달싹였다. 조금 상기된 모습을 보자 심장이 저릿했다. 이상했다. 시험 점수를 낮게 받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스스로에게 놀라 손을 똑 떼 버리자 재연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됐다.

“왜 안 만져 줘?”

“형은 이제 숙제 해야 돼. 너도 TV 보고 있어.”

“숙제 끝나면? 끝나면 만져 줄 거야?”

“어.”

얼떨결에 재연의 페이스에 휘말려 약속하고 말았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으니 된 거라고 생각하며 숙제를 다 해내고 나자, 재연은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별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금세 지친 건가. 주형은 조심스럽게 재연의 볼을 콕 찔렀다.

‘엄청 부드럽다…….’

우유 같아. 솜사탕, 생크림, 도넛, 케이크. 주형은 지나가다 본 것 중 부드러워 보이는 온갖 것을 다 갖다 붙였다. 그러고는 입술을 동그랗게 한 채 재연을 바라봤다.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재연이 눈을 끔뻑끔뻑 뜨기 시작했다.

왠지 아주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심장이 덜컹댔다. 이러면 형으로서의 위엄이 모두 무너지는데. 주형은 큼, 하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헛기침을 했다.

“난 숙제 다 했는데, 넌 자면 어떡하냐?”

“미안, 형아. 근데 나 꿈꿨어!”

“무슨 꿈.”

처음과 달리 주형도 재연과 노는 데에 익숙해졌다. 그가 꼬물꼬물 뭐라고 말하는 게 재미있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다.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설렘이 있었다.

“형아랑 아이스크림 먹는 꿈.”

“……아이스크림? 무슨 아이스크림.”

“웅.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랑 같이 있는 거!”

“과자?”

“엄청 바삭바삭하고 맛있고 달았어. 나는 바닐라 맛 먹었고, 형은 초코를 먹었는데, 근데, 형이랑 밖에서 같이 먹으니까 너무 좋았어. 막, 형이 내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웃어 주고…… 결혼 약속도 해 줬어!”

재연이 너무 흥분해서 말을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여간 신난 게 아닌지 팔도 붕붕 흔들었다.

“…….”

꿈은 꿈이군. 주형은 다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이어졌다. 뭔가를 명백히 바라는 눈치였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응! 형아랑 먹고 싶어.”

“그 과자 있는 거?”

아마 콘 아이스크림을 먹은 거겠지. 하지만 그건…….

‘비싼데.’

끙. 혼자서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는 건데, 두 개라니. 주형은 괜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사 주기 싫은 게 아니라 재연에게 선뜻 사 줄 수 없는 이 상황이 짜증 났다. 그렇지만 재연이 저렇게 기대하는 눈길을 보내니 어쩔 수 없었다.

“응, 그거. 그거, 김 실장 아저씨한테 사 오라고 할까? 그러면 우리 둘 다 먹을 수 있어!”

“아냐! 형, 형이 사 줄게.”

주형이 순간적으로 사 주겠다고 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재연의 눈을 보니까 해 주고 싶었던 데다가, 이때까지 그 실장이라는 사람이 항상 사 줘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심 부끄러웠다. 가난한 게.

“웅……? 형아가?”

이렇게 새하얗고 어여쁘게 생긴 도련님과 저라니, 솔직히 스스로도 조금 부끄러웠다. 저는 무슨 머슴 같았기 때문이다. 왜,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도련님과 머슴 같은 관계 말이다.

“어. 형도 돈 있어. 근데, 오늘은 안 돼.”

“그럼 언제? 나중이라고 하면 안 된다?”

항상 ‘나중에’라고 말하고 무기한 기다려야 했던 재연으로서는 나중이란 말이 제일 싫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똑 부러지게 반응하는 게 신경이 쓰였는지, 주형이 꾸물꾸물 말했다.

“으음…… 수요일에.”

월요일에 용돈을 받는다. 그걸 모아 두면 된다. 게다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왔을 때 잘 보이면 몇백 원을 더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재연의 몫까지 사 먹을 수 있었다.

“수요일…… 알았어! 밖에서 먹어도 돼?”

“밖에서?”

“응. 꿈에서는 밖에서 먹었어. 놀이터에서 먹었는데, 미끄럼틀 밑에서 숨어서 먹었어.”

재연이 또 꿈을 이야기해 주었다. 해가 지고 나서 어두웠을 때, 미끄럼틀 아래서 숨어서 먹었다고 한다. 남들의 눈을 피해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고. 그러고는 서로에게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이야기는 뭔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다만 결혼 이야기는 정말 잘 기억이 나는지 재연이 또 흥분하며 이야기를 하는 통에 말리느라 힘들었다.

그래서 주형은 다음 주 수요일 오후 9시에 놀이터에서 재연과 만나기로 했다. 꿈에서 했던 걸 꼭 그대로 해 보고 싶다고 재연이 아주 난리를 피워서 결국 그렇게 됐다. 늦게 나오는 것쯤이야 괜찮았는데, 주형은 재연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렇게 매일 사람이 붙어 다니는데 괜찮은 건지. 하지만 재연이 괜찮다며 가슴을 쭉 내밀고 배시시 웃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평화롭게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에이, 씨, 돈도 안 나오는 새끼!”

술을 마시고 온 주형의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박이 잘 안 풀린 듯했다. 주형은 뭐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그의 곁에서 어깨를 주물렀지만, 갑작스럽게 그가 손을 휘둘러서 얼굴을 얻어맞았다.

“……윽!”

“씹, 왜 둘밖에 없어서…… 돈도 이제 별로 안 나오고, 쓸모없게!”

구석에서 울고 있는 지욱은 아무런 행동도 못 했다. 그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질질 짜기만 했다. 주형은 그런 제 형이 다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그의 앞에 납작하게 수그려 빌었다.

“아버지, 잘못, 악!”

“장애인도 아니고 사지 멀쩡하게 태어나서 돈은 못 벌고, 돈도 못 타 먹고…… 할 줄 아는 게 뭐냐?”

술에 잔뜩 절어 있는 남자가 주형을 마구 때렸다. 술병으로 몇 번 강타하더니 시뻘겋게 부어오르는 피부를 보고는 병을 그냥 쓰레기통으로 확 던져 버렸다. 씨발, 하고 욕을 하자 주형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무서웠다.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제 탓을 하고, 욕을 하고, 구타를 진행하는 탓에 주형은 새벽 내내 베란다에서 몸을 웅크리고 눈을 피해야 했다. 지욱이 용기를 내어 그만하라고 하자 지욱에게만큼은 손을 휘두르지 않던 남자가 술병을 들고 나가 버렸다.

“으, 흐으…… 윽.”

주형의 머릿속에는 그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맞으면서 풍화된 것인지 감각이 사라졌다. 새빨갛게 부어오르다 못해 검붉어진 피부를 붙잡고, 주형은 새벽 내내 오들오들 떨었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주형은 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열병을 앓고, 그럼에도 죽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 심장 때문에 살았다. 이틀 동안 다녀온 지옥은 그를 정신도 못 차리게 했다.

무단결석 2일, 상처, 그리고 망각. 주형은 제 집 앞에 매일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 대는 재연에게 화가 났다.

-형아, 놀자. 형아……!

애처롭고 귀여운 목소리였다. 이 꼴로 저런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냥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가지기에는 너무도 버겁고 무거운 감정이었다. 몸도 무겁고, 나갈 힘도 없고, 재연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분명 재연이 울먹거리며 형아, 형아, 하며 질질 울 테니까.

‘짜증나.’

제발 이러다 뒈지거나 사라졌으면 좋겠다. 주형은 그대로 이불 속에서 몸을 더욱 웅크렸다. 여름이라 너무 더웠는데도 이불 밖의 공기를 느끼기 싫었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주형이 아팠던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되자마자 동네는 뒤집어졌다. 주형의 아버지가 돈을 빌렸던 조폭들이 찾아와 집집마다 수소문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도박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심지어는 이것저것 허풍으로 담보까지 맡겨 두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탓이다. 놈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주형의 아버지는 수요일 새벽이 되자마자 주형의 뺨을 때려 깨웠고, 그대로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약속은 그대로 무너졌고, 재연의 일상도 무너졌다.

그러나 재연은 붕괴된 일상을 직접 몸소 체험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순진하게 굴었다.

‘형아가 좋아하는 쿠키 들고 가야지.’

재연은 품에 쿠키를 숨기고 집에서 몰래 나왔다. 아주 조용히 창문을 타고 슬금슬금 내려왔더니 아무도 몰랐다. 재연은 기쁨을 품고 톡톡 달렸다. 주형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약속은 분명 기억하고 있으리라.

똑똑한 소년은 시계를 볼 줄 알았다. 9시에 딱 맞추어 놀이터의 미끄럼틀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쿠키를 가슴에 품고 또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또 기다렸다. 미끄럼틀의 먼지에 둘러싸여 콜록, 콜록 기침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기다림의 연속이었으나 괴롭지 않았다. 새벽이 되었다. 한 시. 긴팔 셔츠를 입고 있어도 춥지 않았다. 주형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형아, 언제 오지…….”

김 실장 아저씨가 들고 다녔던 전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연에게 그런 건 없었다. 그래서 재연은 가물가물한 눈을 겨우 뜨게 했다. 안 된다고, 주형이 조금 늦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이 든 재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걸 안 재연의 아버지는 동네를 쥐 잡듯 뒤져 재연을 찾아냈고, 그를 밀실에 감금했다. 그리고 다시는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라는 이름으로 폭행을 가했다.

얼굴이 퉁퉁 붓고, 손이나 발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몸이 된 재연은 하염없이 울었다. 여렸던 소년의 몸은 망가져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붕대를 이리저리 감싸고, 수액을 맞고, 쥘 것도 없는 가느다란 몸이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그게 모두 유전자를 공유하는 남자에 의한 폭행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재연마저도 알았다. 저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며 명치를 걷어찬 게 제 아버지라는 것쯤은.

그리고 주형을 찾았다. 그러나 없었다. 몇 개월 뒤 병원에서 풀려나도 그는 없었다. 주형은 세상에서 사라져 있었다. 달다 못해 이를 시리게 하는 아이스크림도 녹아 망가져 버렸다. 재연의 마음처럼.

자신이 왜 이렇게 야살스러운 성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는 채로 자라난 소년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기억은 주형과의 추억뿐이었다.

***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주형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윤재연이 날 샀다고? 채권을 그냥 산 게 아니라 웃돈까지 얹어서? 왜? 그러면, 3억은? 갑작스레 추가된 1억은?

놈은 날 정말로…….

주형은 그 생각을 하며 황급히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재연은 주형과 제 생일을 섞어 비밀번호를 만들어 두었다. 정말로 신혼부부들이나 할 것 같은 짓이었다.

문을 부수듯 크게 박차고 들어오자 재연은 방금 낮잠에서 깬 듯 나른한 얼굴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주 평화롭게 왔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형이 눈을 부릅뜬 채로 저를 노려보는 양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봐요?”

“야.”

“왜요, 형.”

아무런 존칭도 없이 불러도 재연은 동요하지 않았다. 주형은 이런 식으로 반말을 할 때가 잦았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재연을 흔들어 놓았다.

“지금부터 거짓말하면 나 자살한다.”

“…….”

재연의 안색이 변했다. 이윽고 그는 물컵을 내려 두었다. 차가운 유리 소리가 공허한 거실에 울렸다.

“난 형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요.”

주형을 달래려는 것처럼 재연이 빙긋 웃었다. 천천히 다가가 팔을 뻗더니 주형을 보드랍게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주형은 놔, 하고 거칠게 말하며 멀어졌다. 하지만 재연은 다시 한번 참았다. 완벽한 복종의 연애사를 위해서는 이런 것쯤 몇 번이고 참아야 했다.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주형에게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씨발, 너 이때까지 잘해 준 거 내 빚 늘리려고 한 거냐?”

소리를 질렀다. 서늘한 공기로 차 있던 곳이 천천히 분노로 물들었다. 주형은 이때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지껄였다.

“내 앞으로 된 빚이 3억이고, 4억이고 계속 늘어나면 내가 네 곁에 영원히 있을 거 같았어?”

“…….”

“왜. 난 존나 병신 새끼라서 내 빚 늘어나는 것도 모른 채로 네 품에서 앙앙 울면서 그냥 살 거 같던? 씨발 새끼야. 뚫린 입, 섹스할 때는 더럽게 잘 쓰더니 왜 말을 안 해?”

분명 낮은 놈들에게는 내내 빌빌 기고, 이렇게 높은 놈에게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니. 주형은 정말로 자신이 죽으려나 보다, 싶었다. 주형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소용돌이쳤다. 고동치는 마음이 불안을 담은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내가 너 때문에 속옷도 입어 주고, 좆 빨아 주고, 그렇게 싫다는 거 다 해 줬잖아. 근데 왜! 왜…….”

“형.”

“……뭐.”

울음을 갈무리한 주형이 대답했다. 눈이 새빨개져 있었다.

“빚이 얼마인지 봤어요?”

“그래. 봤다. 내 휴대폰에서 봤다고.”

“…….”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어둠에 잠겨 밝아질 일 없는 눈동자가 정처 없이 몇 번 흔들렸다. 그러니 성경을 읽어 주듯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형이 몰랐으면 했는데.”

“뭐?”

이게 진짜 미쳤나. 주형은 넌더리가 난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있으니 울적해진 얼굴의 재연이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이내 또렷하게 뜨고 말했다.

“340,325,193원.”

“…….”

“형 빚 맞아요.”

커플 잠옷을 입고 있는 재연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함께 입기 위해서 사 온 옷이 오늘따라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씨발, 역시……!”

주형은 분을 참지 못하며 재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윽!”

그러자 재연이 주형의 손을 제법 가볍게 피하고, 그 뒤로는 팔을 아예 붙잡아버렸다. 나름대로 거칠고 투박한 삶을 살아온 그가 폭력에서 진 건 거의 처음이라 주형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재연의 팔을 내팽개쳤다.

“근데 형 명의로 된 빚이라고 했지, 빌린 사람이 형은 아니에요.”

“……뭐?”

“돈을 빌린 사람 이름은 민주형이 맞아요.”

재연이 나긋나긋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울 정도로 잘 들리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야.”

“그런데 빌리러 온 사람의 얼굴은…….”

“야!”

듣기 싫었다. 주형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러지 않길 바랐다. 그런 현실 따 따위 현실이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순 없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설마. 그럴 수가 없다. 그게 현실일 수는…….

“민,”

“씨발, 닥쳐!”

재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계속 말했다.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다. 주형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상기돼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믿어 왔던 사람의 신뢰를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민지욱 씨 얼굴이었어요. 아주 급한 얼굴로 형 민증을 꺼내서 조금씩 빌리더니…….”

그러나 모든 걸 알고 있던 재연이 더 이상 입을 다물 이유는 없었다. 민지욱, 그 기생충이 주형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타올랐다. 하지만 주형이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를 없앤다면 분명 주형에게 원망을 사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가 직접 만들어진 진실로 다가오게 했다.

“아주 최근에는 1억을 빌렸죠.”

“…….”

“그래서 형 빚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내가 최근에 탕감해서 지금은 2억일 거예요.”

하지만 받을 생각은 없어요. 재연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모두 책임지겠다고 하고 있었다. 주형은 모든 것을 잃은 얼굴로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뭐……? 하지만 그때 문자는…….”

발발 떨리는 목소리와 그의 주먹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 이후로는 내가 보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

“생각해 보니 남편이 이사인데, 그 업체에서 돈 갚으라고 문자가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재연이 활짝 웃었다. 한 송이 꽃을 어여쁘게 피워 낸 그는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 같았다. 축축하고 무서운 세상에 남겨진 건 주형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름다운 지옥으로 인도하려 하는 손길이 주형의 뺨에 닿았다.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것이, 마치 시럽처럼 녹아들었다.

끈적거리는 감상을 주었다. 주형은 절망의 끝에서 비틀거리며 살아 돌아온 시체처럼 흰자위를 드러냈다. 그새 말라붙은 눈물이 공포와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럼 왜 나한테 말 안 한 건데?”

이어지는 답은 허무할 정도로 가벼웠다.

“몰래 해 주는 게 멋지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린 재연이 싱그럽게 웃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하는 걸 보자 급하게 안심이 됐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순간적으로 주형이 재연에게 와락 안겼다. 이윽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으윽, 하고 신음을 냈다. 미칠 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몇 분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다시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가슴이 탈 듯 고동쳤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었다. 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백 번은 탄 것 같다. 저릿저릿한 몸이 흥분해서 요동쳤다.

“씨발, 내가 존나…… 이젠, 하다하다 너한테까지 통수 맞는 줄 알고, 씨발, 으, 윽.”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은연중에 묻혀 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치밀었다. 제 몸을 뒤덮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주형은 스스로가 같잖아졌고, 부끄러웠고, 무서웠다.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자 재연이 깨끗한 손으로 그를 안았다.

“……걱정했어요?”

“그래. 개새끼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아껴 주겠다고 그렇게 지랄하던 놈이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빼앗아 버린 놈이 세운 덫에 빠졌다는 그 무력감이 찾아올까 겁이 났다. 이렇게도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주형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울음을 참다못해 딸꾹질을 터뜨렸다. 히끅, 그가 귀여운 음성을 들려주었다.

그 얼굴과 체온을 느끼고 있던 재연이 빙그레 웃었다.

“형도 내가 좋아요?”

“…….”

“미안해요. 그런데 형이 이렇게 해야 나한테 올 테니까.”

그를 속인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미안하긴 한지, 재연이 조곤조곤 말했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주형을 보듬었다. 그러고 있자 주형이 무의식적으로 안겨 왔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면 형이 안 믿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세상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외로움을 느껴도 외롭지 않다고 한다. 딱히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주형이 딱 그랬을 것이다. 사람이 필요가 없고, 언제나 늘 그래 왔으니 믿음을 저버리는 것 또한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을 하나 둘씩 치운다면 어떻게 될까. 외로움을 그제야 자각한다. 그저 외면하고 있던 감상을 뒤늦게 머릿속에 띄우고, 불안을 느낀다. 익숙하지 않은 다정함은 외로움과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위기감을 안겨주면…….

“그래도, 씹, 돈으로, 히으, 장난을 치면…….”

금세 이런 식으로 연약해지고 만다.

‘형, 너무 귀엽다.’

믿음을 저버리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홀로 남겨져서는 믿을 것 하나를 붙잡고 우는 감상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존재가 사실은 저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기쁜지. 재연은 주형을 사슬로 만들어진 그물로 옭아매듯 손길을 단단히 했다.

“흑, 아으…… 윽. 씹, 개새끼…….”

지욱에게 배신을 당한 데다가 이제는 재연까지 저를 무시했을까 겁이 났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삶이라도 조금 더 나은 건 있었나 보다. 주형은 자신의 상태가 체감되지 않아 숨을 고르고 또 골랐다.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니 젖은 머리카락을 느긋하게 가르며 보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따스했다. 아주 오랜만에 맡아 보는 이 깨끗한 향기가 심장을 찢을 듯 동하게 했다.

“으응.”

내가 다 미안해요. 재연이 보드라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주형의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천사의 손길처럼 가붓한 그의 손가락이 주형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따뜻해.’

드디어 내 거다. 재연이 주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스르르 웃었다. 주형이 제가 없으면 살 수도 없을 만큼 멍청하고 무능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금 주형이 스스로 제게 안겨 온 것에 대해 감격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무능하고, 까다롭고, 귀엽고, 또 예쁜 주형을 감히 누가 탐낼 수 있을까. 이렇게 오롯하게 품에 안겨 있는데.

모든 배신을 겪은 뒤 유일한 낙으로 각인된 저를 감히 밀어낼 수나 있을까. 불가능할 거다. 재연은 계획이 천천히 실행되고 있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윤 이사님.”

“응, 형.”

물먹은 입술과 눈동자가 얼마나 좋은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재연은 그런 그의 얼굴을 쪽, 쪽 핥아 주었다.

“……정말로 저 사랑하시는 거 맞습니까?”

주형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치 주례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사람처럼 고결한 얼굴이었다. 주형은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체념하듯 깊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형이 한숨을 내쉬며 재연이 이때까지 했던 행동을 되새겼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 이때까지 받았던 그 무엇보다 사랑에 그나마 가까운 행위였다. 주형은 재연이 흥분해 저를 씹어 먹으려 했던 순간까지 되새겼다. 얼굴이 무심코 붉어졌다. 상황이 몹시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연을 외면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시는 거 치곤, 입이 험하시네요.”

“…….”

움찔, 재연의 몸이 떨렸다. 주형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서. 그가 혹시나 저를 싫어하게 될까 겁이 난 나머지 조금 다급하게 물었다.

“싫어요?”

“아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같은 놈한테는 이사님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진창에서 살던 놈이 진창을 관리하던 사람의 선택을 받다니, 퍽 잘 어울리지 않는가. 나락과 나락의 주인. 조금 음습한 연애더라도 처음처럼 싫지는 않았다. 주형은 재연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웃었다. 진지하게 웃음이 어려 있는, 어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오스럽지도 않은 웃음이 입술에 깃들었다.

저걸 보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고 구멍을 팠구나, 하는 생각이 재연의 머리에 스쳤다. 주형의 시니컬하고 미적지근한 고백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재연이 입을 열었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갈래요?”

“지금 말입니까?”

“응. 가고 싶어요.”

외출하기에는 좀 애매한 시간이었다. 저녁 시간대를 지나 보통 사람들은 쉬고 있을 때. 물론 저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주형이 시간이 좀 늦었는데요, 하고 말하니 재연이 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여쁜 속눈썹이 유혹하듯 날갯짓을 했다.

“어딜 가도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을 텐데요.”

“남들 눈에는 안 보였으면 하는 곳이라서.”

형이랑만 가고 싶었거든요. 재연이 그리 달곰하게 속삭이며 뱀 같은 손길을 휘감아왔다.

***^*

재연과 함께 온 곳은 집과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가는 중에도 손을 꼭 붙잡고 있으니 왠지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도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물며 차 문조차 스스로 열지 못하게 손을 꽉 잡은 채였으니 말이다.

바닷가에 차를 댔다. 부두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검푸른 바다가 보였다. 일렁거리는 바다가 밤에 물들었다. 먹물 같은 바다와 하얀 먼지를 품은 하늘이 조화로웠다. 시원하고 추운 바람과 방파제,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담배를 물었다.

뒤로는 불이 여럿 들어와 있는 건물이 있었다. 그래서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저 멀리 뭉뚝한 십자가가 보이는 걸 봐서는 아마 병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형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숨도 들이쉬지 않고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이, 주형의 담배 끝을 향해 다가왔다. 이윽고 불이 옮겨붙었다. 굳이 제 라이터를 쓰지 않고 주형의 불을 훔치는 행동이 자못 그다웠다.

“불 없으십니까?”

이로 잘근잘근 문 채 억눌린 발음으로 물었다. 그러자 재연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통통하고 예쁜 입술을 벌려 후, 하고 내뱉자 구름보다 더 먹 같은 연기 덩어리가 그의 입술에서 뿜어져 나왔다. 곱상한 얼굴에 깃든 불투명한 연기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소품 같았다.

“그냥 형 불 빌리고 싶어서요.”

“…….”

재연도 당연히 알고 있다. 주형의 물고 있는 담배든, 그가 품고 있는 불이든 딱히 다를 건 없다는 걸. 원초적으로 같은 성분이라는 걸. 그러나 주형과 엮이기만 하면 재연은 알 수 없는 감성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살냄새가 스치고, 뇌에 잠시 지나다니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저를 비이성적으로 만들고는 했다.

그의 앞에 서기만 하면 모든 이기심이 갑작스럽게 돌출된다. 동시에 멍청해지는 것만 같다. 티를 낸 적은 없지만 말을 고른 적도 얼마나 많은지.

‘형은 어떨까.’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물음까지 가져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작 주형을 보면 그런 것들도 모두 상관없이 주형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형이랑 담배 같이 피우는 게 꿈이었거든요.”

“별게 다 꿈이십니다.”

“형을 못 보는 동안엔 이게 내 소원이었는데.”

별거라니. 재연이 얕게 웃었다. 조그마하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주형의 귀를 꿰뚫었다. 둘은 서로를 비스듬하게 등진 채 연기를 뱉었다. 그러자 그 방향이 무색하게 바람이 스으, 불어왔다.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감상이 일었다.

“형.”

“……예, 이사님.”

“형이 내 머리카락 만지는 거 좋아했던 거 알아요?”

주형이 선심 쓰듯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눈에도 보였다. 주형 또한 제법 머리칼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 말이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으며 물었더니, 주형이 전혀 모른다는 눈치로 말했다.

“머리카락?”

“응. 내 머리카락요.”

“이사님이 좋아하셨던 게 아니라요.”

“나도 좋아했지만, 형도 그때 좋아했잖아요.”

주형이 고개를 돌렸다. 재연은 뭔가 바라는 듯한 눈길이었지만, 쑥스러움이 많은 주형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냥 괜히 입술을 비죽거리며 담배를 좀 더 깊이 빨 뿐.

“글쎄요. 기억은 잘 안 납니다.”

실은 선명하게 떠올라서 곤란했다. 주형은 어두워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담배를 지르물었다. 조금 억눌릴 정도로 꼭 씹은 다음에는 다시 한번 뱉었다. 푸후, 하고 한숨을 내뱉듯 이번에는 거칠게 내뱉으니 재연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저 멀리 세상의 빛을 품은 수평선이 일렁이는 것처럼 입꼬리가 잔잔하게 요동쳤다.

“형은 가만 보면 참, 잔인해요.”

둘의 대화가 이내 끊겼다. 숨 막히는 정적이 아니라 바다의 깊은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선선하고 아늑했다.

주형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꾸역꾸역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윤재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놈은 사랑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름대로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까 울며 매달린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저러는 거겠지. 주형은 착잡함 한 조각과 이상한 설렘을 아홉 조각 담아 연기를 뿜었다. 뻑뻑한 연기가 회색 대리석에 깃든 문양처럼 공기에 퍼졌다. 그리고 다 타버린 재를 이번에는 미련 없이 보내주고,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껐다. 주변 휴지통에 남김없이 버리고 온 다음에는 재연에게 말했다.

“이사님. 페티쉬 있습니까?”

“…….”

재연은 정말 뜻밖의 물음에 놀랐다. 이내 몇 초 만에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기대했다.

“글쎄요.”

이번에는 정말인 것 같아서. 주형이 스스로 다가온 듯해서.

“내숭 부리지 말고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이라면 들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기묘하게 번지는 박동이 주형을 긴장케 했다. 지금 내민 이 손길이 무슨 길로 인도할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굳이 따지면…….”

“예.”

“형?”

재연이 향수와 담배 냄새가 섞인 손길로 주형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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