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비창(1)
이튿날 버스에 몸을 실은 주형은 과거의 생각을 계속했다. 그리고 제가 재연과 같은 동네에 살 때 갑작스럽게 이사를 했다는 걸 떠올렸다.
‘쓸데없는 건 빼고 빨리 챙기라고, 이 새끼야!’
‘알았어요, 아빠.’
반 친구들이 주형에 대해 써 준 롤링 페이퍼를 꼬깃꼬깃하게 숨기려고 했는데 들켰다. 주형은 험상궂은 얼굴로 제게 화를 내는 아버지의 성격에 못 이겨 종이를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구겨진 종이는 이후 집을 쳐들어온 남자들에게 짓밟혔다.
주형과 지욱, 그리고 그 둘의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진 빚 때문이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결정적인 판에서 모든 걸 잃은 그는 도박장에서도 쫓겨났고, 빈털터리 신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서 노름을 같이 하던 놈 하나가 대부업체에게 정보를 전달해서 동네는 안 그래도 뒤숭숭했고, 결국 놈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주형이 전하자 그의 아버지는 정말로 필요한 것만 챙기라는 명령을 전했다.
그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의 아버지의 기준이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아는 체하면서 찌든 어른의 기준이란 말이다.
그건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작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심장이 두근거리고 무서웠다.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영화였으면 좋았을 텐데.’
극장에서, 아니, 버스에서 이동하며 그런 내용의 영화를 보며 주인공 일가를 걱정하는 입장이 되면 좋을 텐데. 주형은 OTT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바로 앞사람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미련 없이 치웠다.
지욱의 사무실은 재연과 강제로 동거하게 된 곳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다행히도 대중교통이 닿는 곳이라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재연이 팔짝 뛰었을 것 같다.
하지만 대중교통이 다닐 뿐 비어 있는 상가도 많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허황된 바람이 있다가 사라진 곳처럼, 잘 닦인 도로와 투명한 유리는 기이한 감상을 일으켰다. 저리 깨끗한 유리 너머로 흩어져 있는 공사 자재와 덕지덕지 더럽게 붙은 ‘임대’ 표시가 눈에 띄었다.
아무튼 지욱이 사무실을 얻은 곳은 현대식 자본주의 공동묘지 같은 곳이었다. 주형은 휴대폰으로 지도를 드래그해 가며 찾았다. 건물을 무사히 찾은 뒤에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식당 몇몇과 여러 상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낡아서 바닥이 울퉁불퉁했지만 나름 운영은 잘 되고 있는 모양이다.
202호. 2층에 있는 듯했다. 저벅저벅 걷자 무서울 정도로 공허한 음이 복도에 울렸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207호, 206호…… 가장 안쪽이 201호겠지. 주형이 눈에 띄게 이방인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자 뒤에서 소리가 났다.
“으잉, 뭐 찾으러 오셨나? 여기 세 내려 그러나, 청년?”
“아, 깜짝아.”
주형이 화들짝 놀랐다. 커다란 덩치로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를 바라보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이 건물 관리인 대신 잠시 마실 나왔지. 난 저기서 부동산을 하구 있어.”
할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주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이셔츠와 바지를 후줄근하게 입은 남자는 건물 바깥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기 자리가 좀 안 좋긴 하지만 세는 싸. 사무실 하면 딱 좋아. 음식점이나 그런 거는 영…… 별루고. 혹시, 뭐, 건물 쇼핑이라도 하러 나왔는가?”
남자가 눈을 반짝였다. 그 기대와 선망의 눈빛을 바라본 주형은 그대로 202호로 눈을 돌렸다. 건물 쇼핑이라니, 이렇게 거지같이 생긴 남자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로 편견 없는 할아버지군. 주형은 꽤 괜찮은 제 외모를 부러 속으로 까 내리며 202호 벽에 붙은 시트지 너머의 잔해를 눈에 담았다. 이상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여기 분명 사무실이 하나 있지 않았습니까?”
“으응. 아! 그랬지. 근데…… 보증금 다 까먹을 때까지 있더니 그냥 고대로 튀어 버렸어. 악질이지. 옆집 쓰던 곳한테 이야기해 보니 그 치는 사업을 하러 외국으로 갔다나, 뭐라나.”
세나 잘 낼 것이지, 무슨 외국이야. 남자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들은 주형은 미간을 좁히며 재차 물었다.
“외국으로 갔다고요?”
지욱이 외국으로 갔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렇게 급하게 했어야 했을까? 그러면 연락은 어떻게 하면 좋지. 주형은 현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랬대. 난 잘 몰러, 확실하진 않아.”
“그럼 사무실은 언제 비웠습니까?”
“그 놈은 말도 없이 비워서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러, 아마 이번 달 초였을 거여.”
일주일 정도 지났다. 지욱을 만났을 때가 2주 전이니…… 윤재연이 발목을 분질렀을 사이 해외로 간 건가. 아니, 정말로 해외로 간 건 맞나? 주형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쫓긴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려. 근데 들리는 말로는, 거, 돈도 아주 쪼들렸다고 하더라고? 맨날 무슨 우락부락한 놈들이 말이야! 찾아와서 살림을 결딴내려고 했다는 걸 들었어.”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다며, 옆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은 무서워서 벌벌 떨기 바빴다며, 화장실을 가느라 그가 자리를 비우기만 해도 어디 갔냐고 묻는 통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는 다른 사람의 증언도 있었다며 나불거렸다.
“우락부락한 놈들요? 조폭 같은 거 말입니까?”
“그려! 그런 거지. 사람은 엄청 순하게 생겼는데.”
놈들이 왔다가 간 건가. 주형은 그리 예상했다. 아무래도 제 아버지의 빚이 있으니 그 또한 쫄릴 수밖에 없겠거니 싶었다.
“이름이…… 민지욱 씨 맞나요?”
“으응? 아니야, 그런 이름.”
“……예?”
민지욱이 아니라니. 주형은 혹시 자신이 잘못 찾아왔나 싶었다. 지욱이 가르쳐 주었던 주소를 써 둔 메모를 다시 주머니에서 꺼내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부동산 업자가 두서없이 또 말했다.
“민 씨는 맞았어. 거, 잠시만…….”
민 씨가 그리 흔하지는 않은데. 고개를 홀로 갸웃거리며 말을 기다렸다.
“민……주형. 그래, 여기.”
“…….”
“내가 명함을 받아 놨거든. 이거 좀 봐.”
주형은 명함을 천천히 가져왔다. 그리고 정말로 보기 싫은 것을 억지로 봐야만 하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민주형, 대표. 자신은 모르는 사업자 번호와 업종이 적혀 있다. 그리고 사무실 번호로 추정되는 대표 번호와 제 옛 전화번호가 멀끔하게 적혀 있다. 잘 보니 유통업과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사무실이라고 한다.
“이거, 진짜로…… 여기 세입자가 주고 간 거 맞습니까?”
“으응. 그럼! 민 씨가 흔하지는 않잖아? 게다가 어찌나 싹싹한지 처음에는 월세도 잘 낼 거 같았다고. 또 수출업인가 뭔가 그런 거 한다는 양반은 처음 봐서 기억도 나.”
이 건물에 사무실은 많았지만 그런 류의 사무실은 잘 없었다. 주로 쇼핑몰을 하는 사람들이 작게 사무실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그도 아니라면 제작 공방 같은 게 많았다. 상권이 필요 없는 대신 입지가 나쁘지 않고 땅값이 비싸지 않은 곳을 찾아야 했던 사람들이 흔히 몰렸다.
“…….”
주형은 멍한 얼굴로 다시 바라봤다.
민주형. 대표. 전화번호. 스팸이 자꾸만 오는 데다가 이상한 전화도 걸려 와서 이기지 못해 번호를 버렸다.
“이거 사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아, 고럼! 마음껏 찍어.”
남자가 신나게 손짓했다.
“근데, 자네도 이 사람한테 돈 떼였나?”
“아…….”
“혹시, 뭐, 무서운 일……하는 거는 아니지?”
제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주형은 의지가 떨어진 눈길로 남자를 흘겨본 뒤 엷게 웃었다.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다.
“많이 떼였죠.”
주형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근데 무서운 일 같은 건 안 합니다.”
“그렇지? 반반하게 생겨서 아닐 줄 알았어.”
“외모가 모든 걸 판단하지는 않으니까요.”
윤재연만 봐도 시체를 보면 잔뜩 놀라 그대로 엎어질 것 같은 가련한 얼굴인데 사람을 패 죽이는 데에는 도가 텄을 놈이니까. 게다가 온갖 음담패설을 입에 물고 있으니, 역시 얼굴로 판단할 수 있는 건 얼굴 그 자체밖에 없었다.
주형은 조소 어린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청소도 제대로 하지 못해 뿌연 먼지가 잔뜩 쌓인 사무실에는 끊긴 전선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한데 엉켜 있었다.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더럽고 짜증이 났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니야. 거, 혹시 세 구하는 사람 있으면 좀 잘 알려줘. 청년.”
“예.”
주형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집으로 왔다.
지욱이 배신을 한 게 거의 분명했다. 하지만, 그럴 사정이 있었겠지. 아니야. 형이 그럴 리가 없다. 정말로 아무런 말도 없이 제 신상을 팔아서 빚을 내고, 사업을 벌였을 리가 없어. 이상한 놈들이 집요하게 서성거렸다고 하니 일단 빚을 낸 건 맞을 테다. 하지만 설마 형이 제 이름으로 사채를? 설마. 주형은 그냥 막연히 부정했다.
전화를 해 보면 분명히 뭔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거다.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 있을 테다.
주형은 재연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사람이 거의 없어질 때까지 귀신처럼 가만히 있었다. 음침하고 어두운 얼굴은 후드에 가려 서느렇게 잠겨 있었다. 그는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대했다.
주형의 신경은 흰자위에 불그스름한 핏줄이 돋을 정도로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잊고자 했다.
***
현관 앞에 도착했다. 주형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제 뺨을 손바닥으로 짝짝 쳤다. 살짝 불그스름한 낯이 된 채 들어가자 재연이 그대로 반겨 주었다. 심란하기 짝이 없던 상태에 맞이한 그의 모습은 매우 난감했다.
“이, 이사님.”
“……형, 왔어요?”
“미치셨습니까?”
아니, 이게 무슨……. 주형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버버, 입술을 오물거리고만 있자 재연이 예쁘게 360도로 돌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팔랑거리는 하얀색 앞치마와 함께 자지가 드러났다. 레이스가 나풀나풀 춤을 추는 게 너무 안 어울렸다. 생긴 건 예뻐서 어깨와 팔 근육만 제외하면 ‘샤라랑~’하는 징그러운 효과음이 들릴 지경이었다.
“미친, 씨발! 돌, 돌지 마십시오!”
저 흉물이 함께 보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공간에서 변태는 그밖에 없는데 옮은 것만 같았다. 주형이 으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의도 잊고 삿대질을 마구 하자 재연이 방긋 웃었다.
“왜요?”
난 형이 이렇게 해 주면 좋을 거 같아서 한 건데. 재연이 중얼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부엌을 뒤로 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옷 좀 입으시란 말입니다, 남, 남사스럽게 그게 무슨.”
주형이 허겁지겁 제 셔츠를 벗어 주었다. 낡은 패딩 안으로 입은 도톰한 셔츠를 걸쳐 주자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힘 좋은 성기가 들어올리고 있는 얇은 천이 거슬렸다. 주형은 정말로 이 흉하고 음란한 광경을 보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까 겪은 심란함이 가볍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 지랄 꾸러기 새끼는 왜 이러는 건가!
“생각해 보니 형한테만 입히고 나는 안 입어 준 것 같아서…… 이벤트를 하려고 입어봤어요.”
“지랄……. 나오십시오. 기름은 이게 뭡니까? 왜 이렇게 다 탔어요. 도대체 이 재는…….”
프라이팬을 들여다보니 계란 같았다. 아주 제대로 조져 놓은 듯했다. 재연은 정말로 뭐든지 다 조질 수 있나 보다. 사람도, 구멍도, 심지어 음식도. 게다가 뭔가를 하려고 한 듯 재료는 우르르 나와 있었는데 기름을 꽤 많이 두른 채로 프라이팬을 달구었는지 기름도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한마디로 주방은 아수라장 상태였다.
주형 또한 매우 깔끔한 편은 아니었으나 너무 난잡한 공간이라 당황스러웠다. 멀끔하게 생긴 게 정리도 잘할 줄 알았더니……. 온실 속 아름다운 도련님, 아니, 왕자님이라 그런 건가.
“뭘 만들려고 하신 겁니까?”
“볶음밥을 하려고 했어요.”
“여사님께서 식사 만들어 주지 않으십니까?”
휴가를 가셨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저 이벤트 의도가 다분한 의상도 그렇고. 사실 이벤트도 상대방이 반겨야 이벤트지, 이건 그냥 충격 요법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허벅지나 종아리도 매끈하고 예쁜 근육이 붙어 있어서 아주 보기 싫은 건 아니고, 뽀얀 피부가 마냥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주방에서 저렇게 다 벗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눈이 영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현모양처가 되려면 요리도 잘해야 하니까…….”
“…….”
넋이 나갈 뻔했다. 주형은 말도 없이 입을 벌렸다. 제가 뭘 들은 건가 싶어서.
현모양처? 네가?
“내가 형 아다 따먹었으니까, 형을 책임져야죠.”
재연이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주형은 여전히 ‘현모양처’라는 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한 술을 더 뜨는 게 들렸다.
“형은 내 좆물까지 먹었잖아요. 게다가 한 침대에서 잤고요.”
“……한 침대에서 잤다고 지금 이러시는 겁니까?”
“한 침대에서 자도 되는 성인은 결혼한 부부뿐이에요.”
사실 재연도 알고 있었다.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부부가 아니어도 한 침대에 눕는 일은 당연히 흔할 것이다. 연인 간의 섹스로도 모자라 혼전 임신, 나아가 원나잇에 섹스 파트너까지 심심하지 않게 들을 수 있으니까.
재연이 이런 속 답답한 소리를 아양처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러면 전국의 커플들은 다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
주형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으며 넋이 나간 얼굴, 혹은 짜증이 치미는 얼굴을 하는 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덩치가 저와 엇비슷해서 그런지 더욱. 재연은 주형을 한 입, 한 입 베어 물고 싶었다.
“불법까지는 아니지만 제 기준에는 안 맞는 거죠.”
“그럼, 뭐, 이사님이랑 저는 한 침대에서 잤으니까…… 결혼해야 하고?”
“그렇죠.”
재연이 정답이라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스무고개가 성공한 데에 진심으로 기쁨을 느꼈다. 그에 반해 주형은 당황하다 못해 재연을 퍽 밀쳤다. 갈 곳 없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미친……. 무슨 애 같은 논리입니까?”
저놈이 결혼이라고 하면 정말로 성사될 것 같아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인 비슷한 것까지는 오지 않았나. 처음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진짜가 되는 순간이 기어코 올 거다.
“저번에는 애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는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도 있는 법이에요.”
“씨발, 그건 양쪽이 인지해야 그런 거고.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는 건 원래 그런 겁니다.”
말투는 거칠었으나 주형은 어린 동생을 타이르는 형처럼 말했다. 그러자 재연이 음, 하고 턱 아래를 얕게 쓰다듬었다.
“그래요? 근데 형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잘났을 거예요. 좆도 크고.”
재연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매우 반짝거렸다. 눈동자가 지독하게 순수한 것을 보자 헛웃음이 났다. 그래, 그런 놈인 거지……. 아무리 변태 같아도 원래 저런 놈인 거다. 이쯤 되면 그냥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제가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됐습니다. 옷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포기했다. 그래, 저놈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냥 저런 새끼인 걸 어떡하나. 여섯 살이나 어린놈에게 기대하는 제가 바보인 거다.
“옷은 왜요? 그리고 내가 한다고 했잖아요.”
“제가 할 테니까 그냥 나오십시오. 재로 만든 기름밥 먹기 싫습니다.”
계란은 다 탔지, 볶음밥 재료도 어지간히 까맣게 그을려 있지……. 기름은 너무 많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었다. 재료는 남아 있으니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맞았다.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탄 음식 몸에 안 좋습니다. 재료도 남았는데 그냥 나오시죠.”
살면서 탄 음식을 먹어 봤을 리가 만무한 도련님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진 않았다. 주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고 강직한 얼굴이 재연을 말리고 있었다. 그는 재연이 나오기도 전에 재연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밀어냈다.
“음…….”
몸에 딱히 힘을 주고 있진 않았는지 재연이 스르르 물러났다. 그리고 주형이 걸쳐 준 도톰한 체크 셔츠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옷 입고 나올게요.”
“예.”
주형은 바닥에 대충 벗어 두었던 패딩을 거실 소파에 정리해 두고 손을 씻었다. 재연에게 셔츠를 준 탓에 그는 하얀색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굵직한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형이 손을 씻고 있는 재료를 다시 점검한 뒤 칼을 들고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탁, 탁, 가볍지만 경쾌한 소리가 부엌에 울렸다. 어릴 때부터 온갖 잡일을 시켰던 아버지와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일들 때문에 그는 은근히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재연은 바깥으로 나와 주형과 함께 입으려고 몰래 사 두었던 홈 웨어를 자랑하듯 일부러 그의 곁에서 서성거렸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타입이었던 주형이 눈길을 줄 리는 만무했다.
‘왜 안 보지?’
욕심이 생긴 재연이 주형의 얼굴 앞으로 얼굴을 기웃거렸다. 그러자 KTX를 타고 봐도 아름다움과 잘생김이 잘 섞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얼굴을 절대 무시할 수는 없던 주형이 칼을 톡 내려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피곤하고 지쳐서 그냥 무시하고 싶었으나 재연이니 반응할 수 있었다.
“이 옷 봐요, 형.”
“……봤습니다. 왜요?”
1초 정도 시선을 살짝 돌렸다. 보기 귀찮다기보다는 지금은 요리에 집중하고 싶었다.
“형이랑 맞춰 입으려고 산 거예요.”
그 목소리에 주형은 그제야 재연이 입고 있는 옷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간지럽게 말하는 것 치고는 정상적인 옷이었다. 회색 상하의였는데, 윗옷에는 커다란 곰이 그려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주형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칼을 잡았다. 당근과 애호박을 썰기 위해 칼을 다시 든 순간이었다.
“반응이 왜 그래요?”
“에?”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로 안 좋아할 줄 아는데 왜 사 오신 겁니까?”
굳이 따지면 점수를 따고 싶어서 애쓰고 싶은 편 아니었던가? 주형은 이해가 안 됐다. 가끔 이렇게 재연을 이해하고 싶어도 도저히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형이 싫어하는 얼굴이 너무 재미있거든요.”
“…….”
진짜 변태인가 보다. 주형은 진지하게 위협을 느꼈다. 싫어하는 얼굴을 좋아하다니, 사디스트 아니야? SM을 하는 건가? 나중에는 묶어 놓고 채찍으로 피멍 들 때까지 때려도 되냐고 웃으면서 묻는 거 아닌가 싶었다.
“눈을 마구 부라리는 것도 그렇고, 뺨이 뾰로통해진 것도 그렇고.”
“됐습니다……. 일단 나오십시오. 저 칼 들었습니다.”
“형은 칼을 들어도 멋있네요.”
날카롭게 생긴 데다가 몸이 좋아서 그런지 완벽한 정장을 입혀 두고 한 겹씩 벗겨 보고 싶었다. 뒷골목에서 후배위로 섹스를 하면 좋을 것 같은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런 더러운 곳에서 주형을 뒹굴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항상 실내에서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실수인 척 찌르기 전에 나오십시오.”
주형이 농담과 진담을 섞어 말했다. 농담이 7할이었고, 진담은 3할이었다. 무거운 농담을 던지자 재연이 가볍고 어여쁜 웃음을 쿡쿡 흘렸다. 나름대로 커다란 사이즈를 산 듯한데 재연의 몸에는 딱 맞는 옷을 보자 작게 위협이 느껴졌다.
“어차피 찌르지도 못하는 거 알아요.”
“…….”
“형이 날 어떻게 찌르겠어요.”
재연이 푸스스 웃었다. 그의 확신은 재력에서 오기도 했고, 감정에서 오기도 했다. 돈을 다 대주고 있는 데다가, 이런 생활을 은근히 지속하고 있는 그가 저를 상처 입힌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물론 화가 나면 살짝 찌르긴 하겠지만 정작 제가 죽으면 곤란하겠지.
재연은 스스로도 주형이 제게 어떤 존재인지 얼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형을 더욱 가지고 싶었다. 진심으로 주형이 제가 없으면 자살할 정도로 의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예, 말씀대로 전 못 찌릅니다. 그래서…… 돈도 많으신데 왜 볶음밥용 채소를 안 사고 당근이랑 양파, 감자, 애호박을 다 따로 사셨습니까?”
요즘은 볶음밥용 채소를 따로 판다. 다 곱게 다져서 나온다. 심지어 그리 비싸지도 않다.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채소를 한 봉지씩 사는 것보다는 훨씬 싸다.
“왠지 채소를 다져야 요리를 하는 기분이 나잖아요.”
“귀찮게 시리……, 아무튼, 알겠습니다.”
요리를 단순한 체험으로 아는 사람의 생각다웠다. 주형은 삐죽삐죽 짜증을 내면서도 열심히 다졌다. 그러고는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채소를 넣고 볶기 시작했다. 치이익, 먹음직스러운 소리와 동시에 소스 냄새가 폴폴 풍겼다.
그러고 있자 재연이 뒤에서 주형을 와락 안았다. 세게 안은 건 아니고, 스르르 다가와 폭 안긴 것이었다.
“으악!”
그러나 완전히 프라이팬에 집중하고 있던 주형은 잔뜩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이사님. 지금…… 불 앞에서 그런 장, 장난치면 안 됩니다!”
깜짝 놀랐네, 씹. 주형이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그리 말했다.
“난 항상 형한테 진심이에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재연이 매우 진지한 얼굴로 주형을 올려다보았다. 엉덩이를 쭉 빼고 일부러 주형보다 키가 작은 척을 하고 있었다. 주형은 그렇게 곱상한 얼굴로 저를 끌어안은 채 가슴을 조몰락대는 재연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정말 화가 나게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거, 나쁜 손은 좀 떼시죠…….”
“내 손이 나빠요?”
“가슴을 주무르는 손이 착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주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뭘까. 분명히 들어올 당시에는 당황스럽고, 짜증이 났고, 지욱의 생각이 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는데. 재연과 이런 쓰레기 같은 농담을 하니 좀 풀렸다.
“하지만 형은 가슴 만져 주면 좋아하잖아요. 그럼 착한 거 아닌가?”
“요리 중에 만져 주는 건 싫습니다.”
흥, 하고 주형이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주형은 재연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주형은 재연과 연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섹스 중엔 좋고?”
이렇게 야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까지도 완벽했다.
“…….”
문득 상상했다. 재연의 손이 야살스럽게 제 속살을 헤집을 때. 가슴을 주무르더니 온갖 음란한 칭찬을 늘어놓고, 온몸을 모두 새빨갛게 만들다 못해 씹어 먹을 기세로 덤벼올 때를 회상했다. 어떤 걸 상상해도 실제로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고혹적인 손아귀를 내밀어 저를 범하는 놈의 얼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요리 중에. 문득 내려다보니 채소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타겠다. 주형은 괜히 급하게 손을 놀렸다.
“아니, 그, 좋은 거까지는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싫은 건 아닌데. 주형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감각을 느끼곤 황급히 재연의 손길을 마구 떼어냈다.
“여기, 덥습니다. 저리 좀 가십시오. 열 나옵니다.”
“알았어요.”
재연이 고분고분히 넘어가 주었다. 그러고는 식탁에 앉아 주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를 위해 요리를 준비해 주고, 귀를 붉힌 채 우왕좌왕하는 주형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결혼한 듯해 기뻐졌다.
휘황하게 휜 눈꼬리가 더없는 만족감을 드러냈다.
***
재연이 네발로 기는 자세를 하고 있는 주형의 위를 덮쳤다. 늘씬한 곡선을 만들어내며 늘어진 허리와 봉긋하게 튀어나온 엉덩이를 감싸는 재연의 커다란 몸이 주형을 희롱하고 있었다. 어느새 주형은 알몸에 에이프런만 입은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재연이 식사 중 주형의 옷을 다 벗기고 앞치마만 입혔기 때문이었다.
“하, 윽…… 으으.”
“형……, 볶음밥 잘 먹었어요.”
주형은 못 하는 게 없나 보다. 요리도 잘하고, 자지도 잘 먹고……, 싸지르는 것도 잘하고. 물만 잘 먹으면 이제 정말로 완벽할 텐데.
“그런 걸 왜, 지금, 으, 윽.”
“근데 형 뒷구멍보다는 덜, 맛있었어요.”
재연은 그리 속살거렸다. 허리를 느슨하게 움직이니 찌걱, 찌걱 천천히 소리가 났다. 그는 빠르게 하다가도 말씨를 나누고 있을 때면 본능적으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는 했다. 그걸 느끼는 주형은 가끔 죽을 맛이었다. 이상하게도 안달이 났다. 그냥 평소처럼 난폭하고 야살스럽게 쑤시다가 싸지른 다음 더러운 말이나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상냥하기까지 한 건가 싶어서.
주형의 몸을 뒤에서 반쯤 껴안고 숨결을 불어 넣자 주형이 몸을 찌르르 떨었다. 숨 때문에 간질거리는 감각이 도무지 멎지 않았다. 안을 범하고 있는 좆도 새삼스레 자각하니 매우 크고 단단하게 느껴져서 낯설었다. 분명히 붙어먹은 지도 벌써 몇 개월은 된 것 같은데, 왜 적응이 안 되는 걸까. 적응해서는 안 되는 감각이라고 신이 못 박기라도 한 걸까. 주형은 제 가슴을 작게 가리고 있는 프릴을 자각하며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흐으…… 이, 사님. 이제…… 그만.”
“그만? 뺄까요?”
그러면 형 구멍이 섭섭해할 거 같아요, 많이. 주형의 뒤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던 재연이 그리 말했다. 짐짓 상냥한 목소리를 냈더니 이어지는 주형의 음성도 조금 소심하고 부드러웠다. 분명히 예쁘게 눈꼬리를 늘어뜨린 채 곤란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재연은 이 자세도 싫지 않았으나 주형의 얼굴을 문득 보고 싶어졌다.
“으, 그게…… 아니, 라.”
“응?”
“그냥……, 가게, 해 주십시오.”
주형은 말을 뚝뚝 끊어 말했다. 지쳐서 그런지 그는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벌어진 잇새로 혀를 드러내며 개처럼 학, 학 숨을 톡톡 튀게 쉬었다. 늘어진 몸을 한 채로 눈을 겨우 뜨고 있자 흰자위가 드러났다. 연붉은 색깔을 띤 뺨이 봉긋했다.
주형은 재연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 그런지 지쳤다. 재연을 만난 뒤로 체력을 쓸 만한 일이 없어서 체력이 슬슬 떨어진 모양이다. 저놈이 내 인생을 다 망쳐 놓는군. 주형은 정액으로 얼룩진 배를 꿈틀거렸다. 구멍이 작게 벌름거리고, 그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재연의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좀, 넣고…… 흔들면, 금세……, 하! 아으, 윽!”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자지가 쑥 빠져나갔다가 안을 침범했다. 퍽!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내장을 때렸다. 뱃가죽이 이대로 뚫리면 어떡하나, 하는 유치하고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주형은 흐윽, 하고 울음을 삼키며 그의 자지를 받아냈다. 속이 어질러지다 못해 그대로 짓무를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동시에 다가오는 쾌감만은 익숙하고 좋았다. 주형은 엉덩이를 길게 빼며 한숨 어린 신음을 흘렸다.
“하아, 아…… 응, 으으!”
“형, 이제…… 자지, 잘 먹네요.”
들어갈 때 너무 힘을 줘서 좆을 끊어 먹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 넣은 다음 꽉 조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나 보다. 아무래도 주형은 정말로 타고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야한 몸으로 힘쓰는 일을 했다니. 재연은 제가 주형을 알아본 데에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다. 선정적으로 튀어나온 근육을 하나하나 망가뜨리고 싶었다.
“이젠 풀어 줄 필요도 없겠어요. 이렇게, 그냥 잘 먹는데.”
별로 애쓰지도 않았는데 그냥 쑥, 쑥 들어갔다. 물론 지금은 좆질을 몇 번이나 하고 안에 정액까지 싸질러서 이렇게 된 거겠지만 말이다. 재연은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흑, 아, 안 됩니, 으흣!”
“안 되기는요……. 형은, 형 구멍이 지금 얼마나 벌름거리는지 잘 모르죠?”
엉덩이에 감각이 없나? 재연이 그리 말하며 주형의 엉덩이와 골반 부근을 찰싹 때렸다. 근육과 살이 출렁거리며 반응했다. 동시에 주형의 성기도 바짝 끄덕이고 있었다. 발기한 살 기둥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힉, 흐으! 아, 아파! 야……!”
주형이 힘없는 목소리로 따졌다. 그러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허벅지 안쪽으로 흐르는 정액이 간지럽게 피부를 훑었다. 주형은 힘든 건지 섹스를 즐기고 있는 건지 모르게, 작게 허리를 흔들었다. 앞뒤로 엉덩이를 움직이는 것이 약간 느껴지자 재연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움직임을 슬쩍 멈추었다.
“흐, 왜……, 이, 사님?”
혼자 움직이고 있다는 걸 금세 자각한 주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씨발, 이런……. 이렇게까지 하고 있었다니.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주형은 저도 모르게 섹스에 과하게 심취하고 있었다. 아까 있었던 충격 때문인 걸까. 현실을 얼른 잊고 싶었던 무의식이 나온 듯했다.
“형, 우리 짐승 같아요.”
네발로 기며 서로의 몸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개 같았다. 재연은 이런 야살스러운 섹스를 좋아했다. 주형의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몸의 곡선이 두드러지게, 누가 보아도 음란하다고 할 만한 자세로 다리를 벌린 채 자지를 쑤셔 넣고 있으면 황홀함이 치밀었다. 분에 넘치도록 줄줄 흐르는 쾌감이 날개뼈부터 치골까지 오싹하게 돋았다.
“무슨…… 으, 읏.”
“짖어 보면 안 돼요?”
꼭 발정이 난 짐승들이 교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연은 이 자세를 자주 하면 좋겠다고 느꼈다. 물론 침대에서 해야겠지만. 바닥의 대리석과 주형의 무릎이 자꾸 마찰되어 그의 무릎이 빨개졌을 게 틀림없었다. 마치 어른에게 혼난 아이 같아서 좆같았다. 재연은 섹스를 빌미로 한 체벌 정도는 좋았지만 진심 어린 훈육이라는 핑계가 보이는 체벌은 몹시 혐오했다.
“응?”
“아, 아으! 윽…… 흐으, 이, 사님!”
짖을 시간도 없게 속을 범하는 탓에 안이 아팠다. 이미 찔러서 성감을 준 곳을 집요하게 공략하고 있으니 힘들었다. 꿰찌르고 있는 감각에 익숙해질 때면 또 다른 곳을 치받듯 세게 때리곤 했다. 주형은 온몸이 성감대라도 된 것처럼 반응했다. 하응, 하고 간드러진 신음이 잇새로 흘렀다. 혀를 작게 내민 그가 아랫도리가 찌릿찌릿 울리는 걸 느꼈다.
“우으으, 으…… 하윽.”
주형의 성기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이미 두어 번 쌌더니 이제는 투명했다. 재연은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납작한 신음을 내는 것을 자각하고는, 곧장 아래를 바라봤다. 과장해서, 주현이 싼 것은 정액인지 물인지 모를 정도로 묽었다.
“하하.”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금 자세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핥아 먹도록 시켰을 정도였다.
“씹질 조금 했다고 이렇게 흘리면 어떡해요.”
“후으, 아…… 으……. 힘듭니, 다. 이사님…….”
이제 그만 오늘은……. 주형이 그리 말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후배위로 계속하고 있으니 허리도 아프고, 어깨와 손목도 슬슬 한계였다. 홀로 몸을 지탱하는 게 아니라 재연이 자극을 주는 상태에서 계속 가슴을 만지고, 자국을 내고, 혀 위로 손을 집어넣으니 힘겨웠다. 정말 씹질만 한 게 아니었다. 주형은 여전히 안을 후비고 있는 선단이 잔인할 정도로 힘이 세다는 걸 자각하곤, 하아,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형 얼굴, 분명 새빨개졌겠죠.”
붉어진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고 있을 테다. 난감하고 증오스럽다는 듯 흰자위를 드러내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 얄궂고 잔인할 거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틈틈이 깜찍한 구석을 보여주고 있겠지. 재연은 이제 눈만 감아도 주형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형은 참 이상해요.”
그 말을 들은 주형이 의아한 듯 미간을 좁힌 채 뒤를 슬쩍 바라봤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자애롭게 늘어진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마치 아주 너그럽고 우아한 신자가 누군가를 사하고 있듯 다정다감한 얼굴이었다. 말간 얼굴과 빨간 입술은 그토록 현실과 동떨어진 감상을 주었다. 이상한 곳에서 천사의 얼굴을 본 재연은 문득 수치심이 일어 앞을 바라봤다.
“자지 삼키는 건 걸레 새끼인데, 형 얼굴을 보면 내가 형을 강제로 따먹고 있는 것 같잖아요.”
부드럽게 웃고 있는 재연이 눈을 아래로 한 채 주형의 등을 바라봤다. 제가 빨고, 물어서 생긴 흔적이 가득했다. 한창 흥분할 때 남겼는지 잇자국이 선명한 것도 있었다.
“……제, 얼굴 보지도 않으셨지 않습니까.”
“안 봐도 알아요.”
그런데도 보고 싶네. 재연이 싱긋 웃었다. 훗, 하고 작게 코에서 바람이 나오는 소리가 주형의 귀에 뛰어들었다. 주형은 슬쩍 도망을 가려는 듯 마지막 힘으로 재연의 손을 슬쩍 떼어냈다. 가슴이 새빨개지고 유두가 내내 꼿꼿이 서도록 만들어 둔 파렴치한 손에서 벗어나 살살 앞으로 갔다.
“아는데, 봐서 뭐 합니까. 그냥…… 얼굴인데.”
“으응.”
“윽!”
재연이 좆을 넣은 채로 주형의 몸을 확 뒤집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이 거칠게 쓸렸다. 아무리 정액으로 눅진하게 젖어 있는 구멍이라도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형이 아픈 감각과 이상한 쾌감으로 얼룩진 신음을 냈다. 이윽고 미친 새끼, 하고 눈을 부라렸다. 주형은 무심코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겨왔다. 구멍이 활짝 벌어졌다.
“그냥 얼굴이 아니니까.”
“…….”
재연에게 있어 주형의 얼굴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증오 외엔 품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여럿인 제 인생에서, 주형처럼 양가감정을 들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저를 거두더니 어느 순간 버리고 사라진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을 미친 듯이 찾을 때야 깨달았다. 그게 애증이고, 나아가서는 사랑이며, 더욱 깊이 파 보면 순애보라는 걸.
“어디 연구소에 의뢰라도 할까 봐요.”
“……무슨 연구 말입니까.”
“형 얼굴 복제해서 박제할 수 없냐고.”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아마 만족하지 못할 거다. 진짜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 촉감과 성감, 그리고 그가 주는 오묘한 감정들을 생각하면 진짜 주형을 버릴 순 없었다. 아마 가짜 주형을 만들어내고 나서는 진짜에게 더욱 집착해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릴지도 몰랐다.
“…….”
“갈 때 얼굴, 박힐 때 얼굴, 울 때 얼굴, 웃을 때 얼굴……, 이런 걸로.”
배시시 웃는 얼굴에는 미묘한 진심과 순애가 섞여 있었다. 그 광기도 이제는 질릴 정도로 자주 맞이했기에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 어린 시절의 소년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주형은 재연의 좆이 꾸역꾸역 구멍을 넓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탐험을 하듯 천천히 안을 후비고 있었다.
“존나 음침하시네요.”
“그래요?”
이런 말도 익숙했다. 주형이 아닌 남이 했다면 죽여버렸겠지만 주형이 가진 특유의 말씨 덕분에 괜찮았다.
“형을 내가 너무 사랑하나 봐요.”
원래 사랑하면 밑바닥이 된다고 하잖아요. 재연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논리로 그리 속삭였다. 예전 같았으면 제대로 된 사이코패스에게 걸려서 큰일이 났겠다고 생각했을 주형이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명의를 도용해 사업을 벌이고 다니는 이복형, 태어날 때부터 학대를 거듭한 아버지, 그리고, 임금을 떼어먹었을 게 분명한 진후. 그 외에도 인복 따위는 확인할 수 없는 인맥. 주형은 이젠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그저 이놈과의 끝은 어디로 향할지가 궁금했다. 천국은 아니겠지.
어차피 어느 곳을 가도 천국은 아니다.
“고약한 새끼…….”
어쩌다가 이런 놈한테 걸려서, 정말. 주형은 속으로 한탄했다.
“싫어요?”
재연은 이번에도 주형이 너무 싫다고 하며 발작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이번만은 달랐다.
“싫다곤 안 했습니다.”
싫지 않았다. 이것만은 명확했다. 좋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연은 생각보다 주형이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주형은 아까 겪은 사건으로 인해 재연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다시 생각했다.
“좆같아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지 않습니까.”
상대적이라는 것도 있고. 주형은 알 수 없는 말을 그리 중얼거리며 재연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체념했음에도 반짝거리는 눈으로 재연을 바라봤다. 재연이 몹시 사랑하는 눈이었다. 치기 어린 눈길이 제 사지를 관통할 때, 재연은 그만 죽고 싶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형.”
“윽! 하아, 왜, 요.”
재연이 가만히 있다가 예고도 없이 성기를 푹 처넣었다. 한 번에 끝까지 넣자 안이 쓰라렸다. 주형은 눈을 크게 뜨며 재연을 바라봤다. 명백히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형……, 하아, 형.”
알 수 없는 데에서 흥분한 건지 재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허리를 세게 놀렸다. 안을 망가뜨릴 셈인지 연신 거친 소리가 났다. 젤과 정액이 부딪혀 그의 안에서 범람했다. 축축하고 쫀득한 구멍을 때리자 주형의 허리가 흔들렸다. 동시에 엉덩이를 바닥에 작게 지분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엉망이 된 에이프런이 마구잡이로 접혔다. 그 사이로 다리를 벌리고 자지를 받아들이는 주형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주형 형. 형……, 씨발, 너무 예뻐요.”
“미친…… 흑, 히으, 학!”
발정이 난 짐승처럼 재연이 허리를 크게 놀렸다. 후장이 아플 정도로 허리를 뭉근하게 돌려 이리저리 후비자 주형이 기절할 듯 숨을 끊어 쉬었다. 학, 학, 계속 숨이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뭉쳤다. 주형은 위기감이 들 정도로 밀려오는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형 얼굴에 정액 존나 싸지르고 싶어요. 해도 돼요?”
“그건, 하으, 응…… 힛!”
“하아, 왜……. 왜. 자지도 잘 먹는데, 씨발, 입으로도 먹어야죠.”
주형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계속해서 치댔다. 처덕, 처덕 새빨개진 속살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기세로 살 기둥을 육벽에 대고 문질렀다. 아주 빠른 속도로 때리고, 주형의 가슴을 희롱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물, 콧물, 침을 줄줄 흘릴 때가 되어서도 재연은 사정을 하지 않고 그를 몰아세웠다. 히으, 하고 혀가 풀림과 동시에 주형의 자지에서 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흐으, 읏!”
주형의 성기에서 또 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데 정액이 아니라 훨씬 묽고 야한 액체였다. 위를 향해 힘 좋게 싸지른 것이 둘의 얼굴과 배, 에이프런에 잔뜩 묻어나왔다. 주형은 기절을 하듯 몸을 작게 경련하며 늘어진 신음을 냈다. 머리카락을 흩뜨린 채 학학거리는 그가 음란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권을 하듯 그가 머리카락을 바닥에 문질렀다. 사르륵, 하는 소리가 묻혔다.
벌써 몇 번이나 사정을 했더니 피로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재연의 좆이 쑥 빠져나왔다. 봇물이 터지듯 구멍에서 줄줄 흐르는 것이 정액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재연이 성큼성큼 다가와 주형의 앞에 좆을 내밀었다. 이윽고 흔들었다.
커다랗고 하얀 손으로 자지를 슥슥 비볐다. 주형은 그 흉물을 어찌할 수가 없어 무력하게 숨만 내쉬었다. 그럼에도 그 음란한 광경과 그의 열기 어린 눈길이 밉지 않았다.
“씨발, 존나 예뻐…….”
재연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성감을 분출하기 위해 재빠르게 허리를 흔들고, 손으로 자위를 했다. 그리고 허리와 몸을 푹 숙여 주형의 입 가까이 자지를 들이댄 뒤 정액을 탁 내보냈다. 눈을 뜬 채 제 얼굴 위로 정액이 질척하게 쏟아지는 것을 본 주형은 무력하게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성애의 끝을 알렸다. 주형의 날카로운 눈이 반쯤 접혀 있다가, 이윽고 그의 눈을 찌르는 하얀 탁액 때문에 완전히 잠기고 말았다.
그럼에도 주형은 재연이 한참 예쁘다며 입술을 맞추고, 정액을 모두 빨아먹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노곤한 섹스였다.
***
주형은 씻고 나온 뒤 엉망이 된 부엌을 정리했다. 그 뒤에는 평범하게 재연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가하게 뒹굴거리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아 무서웠지만, 재연이 버티고 있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만히 누워 TV를 봤다. 제 이복형의 일 때문일까, 주형은 꽤 심한 무기력을 겪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섹스 때문에 분명 피곤해서 잠이 금세 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까 내내 TV를 보며 빈둥거렸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문득 멍하니 누워 있으니 밥상머리 아래서 섹스를 하게 된 경위를 회상하게 됐다.
분명 그냥…… 식탁에서 평범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연에게 요리를 잘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자, 그가 고맙다는 말을 하며 별안간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 아래로 내려갔다.
뭐 하십니까?’
‘아, 고마워서요.’
‘……에?’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아래를 바라보고 있자 재연이 간드러지게 입꼬리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앞섶에 손을 대 바지를 슥 벗겼다.
‘이게 뭐 하시는, 이사님, 미친, 야!’
‘조금만 기다려 봐요.’
속옷까지 다 벗긴 뒤에는 어안이 벙벙한 주형의 얼굴을 무시하고 자지를 입에 물었다. 연약한 귀두를 쪽 빨아들이자 주형의 몸에 성감이 잔뜩 돋았다. 오싹하게 내지르는 쾌감이 찌릿찌릿했다. 재연의 연붉은 입술이 선정적으로 달싹이고, 혀가 그 사이로 나와 자지 대가리를 핥을 때마다 몸에 전기가 통한 것 같았다.
‘이사, 님. 이사, 흣, 입술로 빨지, 마……!’
재연이 입술로 자지를 물었다. 한입에 들어오는 크기를 입 안에 쑥 넣었더니 주형이 허리를 툭 튕겼다. 적잖이 놀란 건지 그가 주먹을 쥐고 식탁을 쾅, 내리쳤다. 음식이 찌르르 흔들리며 작게 요동쳤다.
주형은 아래를 빨린 적이 거의 없었기에 더욱 당황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요사스러운 혀가 기둥을 천천히 핥고, 감싸고, 빨아들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성감이 몸을 꿰뚫었다. 아래로 모든 세포가 몰린 것 같았다. 몸이 너무 예민해진 나머지 재연의 혀에 돋은 돌기마저도 느껴졌다. 오돌토돌하지만 부드러운 감각이 가득해서 성감을 고조시켰다.
‘흐, 아으…… 읏, 떼. 떼, 씨발……!’
‘혀이 알 애아이망.’
형이 쌀 때까지만. 재연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입에 자지를 넣고 볼이 톡 튀어나올 정도로 물고 있었더니 숨결이 좆에 닿았다. 주형은 그 자그마한 자극에도 이기지 못하고 읏, 하고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재연은 주형의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달래는 건지 희롱하는 건지 알 수 없게 야살스러운 감이 있는 손길이었다.
재연이 춥, 춥 사탕을 빨 듯 음란한 소리를 냈다. 그의 타액과 주형 본인의 것에서 나온 액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제는 미끄러워서, 재연은 그냥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별문제 없이 좆을 돌려 빨 수 있었다. 그렇게 주형이 제 입 안에 싸지를 때까지 버티고 있을 심산이었다. 살포시 음낭을 조몰락거리자 주형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순간적으로 목젖을 치는 힘 좋은 성기의 느낌이 느껴졌다. 재연은 그런 주형을 벌하듯 허벅지를 세게 때렸다.
짝! 새빨개질 정도로 두어 번 때리자 주형이 으극, 하며 침을 흘리고 저항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 때면 주형이 언제쯤 싸지를까 궁금해졌는데, 아쉽게도 그는 생각보다 잘 버텼다. 자지를 넣은 채 엉덩이를 때리면 사정을 한 적도 꽤 있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나 보다. 싸면 놀리려고 했는데.
재연은 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좆을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형을 아래서 바라보았다.
그는 우월한 턱선이 모두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젖힌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고분고분하지만 치기 어린 몸짓으로 의자에 버티고 있는 걸 보니 마치 그를 납치한 채 범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야릇해졌다. 이렇게 주형이 구멍도 잘 대 주고, 자지도 잘 세울 줄 알았다면 처음에 납치를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러면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섹스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미치게 예쁘지. 그리 생각한 재연이 주형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입꼬리를 실룩거리자 뺨에 볼우물이 폭 팼다. 아주 얕은 그림자가 지고, 재연의 앞머리가 스윽 늘어졌다. 부드러운 앞머리를 고결한 손으로 넘긴 뒤 숨을 푹 들이마시고 자지를 빨았다. 볼이 쏙 들어갈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켜며 성기를 자극했다. 음낭을 만져주고, 의자에 묻혀 있는 구멍과 회음을 살포시 건드렸더니 위에서 동굴 같은 목소리가 났다.
‘하으윽…… 윽, 떼……, 십시오. 싸, 쌀 것, 같……!’
좆을 문 채 재연이 위를 바라봤다. 주형은 주먹을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꽉 쥐고 있었다. 허벅지 옆면을 손톱으로 마구 긁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운이 좋게 눈이 마주쳤다. 주형은 순간적으로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뇌는 이대로 으깨질 듯 무서운데. 이 쾌감은 몸을 망가뜨리는 것만 같은데. 저런 백조 같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재연이 싱긋 웃으며 주형의 귀두를 쪼옥, 사랑스럽게 빨았다. 그러고는 연붉은 입술을 야하게 벌려 형, 하고 목소리 없이 속삭였다. 포르노에 나오는 배우처럼 충격적이고 음란한 얼굴이었다.
주형의 성기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뜨겁게 느껴지는 액체가 재연의 입안을 가득히 채웠다. 줄줄 흐르지 않도록 그는 턱을 받친 뒤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쓰러질 듯 한숨을 내쉬고 있는 주형과 눈을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게 섹스의 시작이었다.
주형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고 과격한 흐름에 허, 하고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여러모로 골 때리는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하고 나니 모든 힘이 다 풀려서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정작 제 옆에 있는 재연에게 무어라 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놈들보단 낫지 않나, 얘가.’
아버지, 이복형……, 그리고, 기타 다수. 주형은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만행은 분명히 기억나는 놈들을 생각했다. 괴로웠다.
왜 윤재연이 가장 천사처럼 보이는 날 따위가 온 걸까.
아니다. 지욱은 아닐지도 모른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정말로 말도 없이 저를 등쳐 먹으려고 그런 건 아닐 테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제게 의지했던 형이라도, 아버지에게 맞지 않아 마음이 저처럼 무겁지 않을지라도,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 빚은 같이 갚자고 생각했겠지. 설마 2억을 모두 제게 떠넘기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하찮은 도망이라도 치자고 했을 리는 없다.
그렇게까지 병신 새끼일 리가 없잖아. 그럴 순 없다. 그럴 수는…….
문득 비참해진 주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뜬 눈으로 시간을 보낸 지도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지난 건지, 재연은 곁에서 잠에 들어 있다. 주형은 마지막으로 시험을 하려고 했다.
아주 조용히 소리를 죽이고 나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욱의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대조해 입력했다. 그리고 숨을 내쉬었다. 일단 사무실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주형은 음성이 다 나오기도 전에 성급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없는 번호. 그럴 수 있다. 그 사무실은 폐업했으니까. 사무실을 없앤 마당에 번호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도 영 이상하다. 해외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분명 한국 내 번호는 없앴겠지.
그래야만 했다. 주형은 덜컹덜컹 흔들리는 심장을 느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정말로 괴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주형은 떨리는 손으로 지욱이 직접 주었던 번호를 눌렀다. 한 번 누를 때마다 엄지손가락에 땀이 고여 괴로웠다. 1분 남짓 동안 번호를 입력하고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십시오.
안내 음성이 모든 것을 말하고 저절로 끊기기까지는 30초도 안 걸렸다. 주형은 시작되지도 않은 채 종료되어버린 전화를 바라봤다. 통화 종료.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둘 곳 없는 분노가 정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누구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도 멍청한 건이라 말하기도 부끄럽고 답답한 이야기. 속에서 잿더미가 되도록 고여 있던 감정이었다.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물웅덩이가 주형의 안에서 요동쳤다. 왜, 라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조차 이젠 잊혔다.
주형은 하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공허한 어둠이 가라앉은 거실에 헛헛한 감정들이 들어찼다. 원망과 자괴감이 일어났다.
인복이 없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좆같을 수 있나. 결국 태어날 때부터 믿었던 사람에게까지 배신을 당했다.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이제는 알 수 없다. 태도가 문제였나? 돈을 그냥 줬던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조건 준 적은 없었는데.
차라리 칼을 들고 위협이라도 할 걸 그랬다. 그러면 그 누구도 제게 다가와 이상한 짓을 하지 못했을 텐데. 아니, 차라리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처럼 청승을 떨 걸 그랬다. 그렇게 당당한 척 돈을 벌고 다니니 다들 자신이 괜찮아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속으로 아무리 핑곗거리를 찾아보아도 그는 굳이 부정하지 못했다.
추하게 부정하면 정말로 자살하고 싶을 것 같아서. 이런 와중에도 추해지기 싫었다. 주형은 재연과 함께 자는 방 앞에서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모으고 한 번 푹 웅크렸다.
“씨발…….”
그가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재연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던 샴푸 냄새가 스르르 나왔다. 그러나 이런 향기가 있음에도 이제는 정말로 혼자였다. 오롯하게 괴로워졌다.
***
어릴 적의 재연과 주형은 함께 논 적이 많았다. 해 질 녘이 될 때까지 놀이터에서 빈둥거리기도 했고, 주형이 아주 가끔 용돈을 받을 때면 재연의 몫까지 사 주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재연이 함께 따라다니는 실장에게 돈을 달라고 해서 사 먹기는 했다.
그 어린 주형에게도 자존심은 있었기에 괜히 틱틱거리며 거절하고는 했지만, 실장은 그럴 때면 말없이 세 개를 사서 하나를 먹는 척을 하다가 주형과 재연에게 입맛에 안 맞는다며 넘겨주었다. 나름의 배려였다.
재연은 모래 놀이터에서 이것저것 조몰락거린 뒤 수돗가에 다녀왔다. 녹슨 철로 된 수도꼭지를 돌려 시원한 물로 손을 씻고, 물기와 모래가 함께 어린 신발을 신고 타박타박 뛰어왔다. 그 짧은 시간에도 주형과 떨어져 있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냉큼 곁으로 와 틈도 없이 곁에 앉았다. 덥다면서도 비키지 않는 주형의 옆을 독차지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형아, 결혼이 뭐야?”
재연의 집에서는 하루에 한 번 TV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데, 그때 본 드라마에서 주인공 둘이 ‘결혼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 두 주인공의 얼굴이 너무 기쁘고 설레 보여서 탐이 났다. 뭐길래 저렇게 좋은 얼굴을 하는 건지.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 그런 낯을 하고 남에게 대화를 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걸 하면 주형도 저렇게 기쁜 얼굴을 할까? 얼른 보고 싶었다. 재연은 기대가 됐다.
“결혼?”
“응.”
공교롭게도 재연은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집안 특성 때문에 대외 활동을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던 영향이 있어서였다. 가정 교사가 있다고는 하나 사회화를 거치며 알 수 있는 기본 지식 같은 것까지 가르치지는 못했고, 교육 과정에 있는 피상적인 지식만 배웠기에 재연은 결혼이라든가, 연애라든가, 혹은 사람들과 올바르게 어울리는 방법 같은 것들을 잘 몰랐다.
“둘이 사랑해서 같이 사는 거야. 남자랑 여자가.”
“형은 남자지?”
“……너 나 무시하냐?”
주형이 발끈했다. 있을 거 다 있는데 왜 남자냐고 굳이 물어보는 걸까.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무서운 목소리를 내자 재연이 동그란 눈망울을 깜박였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순진한 얼굴이다.
“으응, 그게 아니라아…….”
혹시, 정말로 혹시 남자와 남자끼리 결혼은 안 된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물어본 것이었다. 재연은 얼굴을 붉혔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그런 생각 따위 알 리 만무한 주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고는 제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멋없게 생겼나. 이런 꼬맹이가 무시할 정도로? 하지만 반에서 팔씨름을 하면 거의 다 이기는데. 키도 1등, 2등을 다툴 정도로 크고. 물론 텔레비전에 나오는 커다란 어른들보다는 작지만.
“혹시 남자끼리는 결혼 못 해……?”
“남, 남자끼리?”
고정 관념이 가득한 세상의 지식을 배우고 자란 열두 살 어린이에게 그 질문은 꽤나 충격이었다. 주형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어어, 하고 아름거렸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턱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으음……. 되지 않을까?”
“정말?”
“응. 남자랑 여자만 결혼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잖아.”
주형은 나름대로 늠름하게 대답했다. 뭘 몰라서 하는 소리기는 했다. 법에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결혼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동성끼리는 안 됐다. 그런 소상한 법 지식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럼 형아, 나랑 결혼하자.”
“……뭐?”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며 올곧게 앉아있었는데, 재연이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무너졌다. 주형은 곁을 돌아봤다.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눈동자와 보드랍지만 명확한 선이 있는 콧날이 보였다. 오목조목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분명한 감정을 표현하는 입술도 예뻤다. 그 시절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젖살도 사랑스러웠다.
이런 애는 처음이다. 주형이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재연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이런 때가 왔다. 그래서 주형은 재연과 이야기하는 걸 가끔 싫어했다. 바보가 된 느낌이 들어서.
“시, 싫어!”
“왜……?”
금세 시무룩해졌다. 겨우 5초 만에 거절을 당하니 몹시 속상한 눈치였다.
“너, 너는 차도 없고 집도 없잖아. 난 부자랑 결혼할 거거든?”
주형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상하게도 말이 잘 안 나왔다. 저렇게 순수하게 생긴 얼굴 앞에서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려니 눈치가 보였던 듯했다.
“그럼 그거 다 있으면 돼?”
“아니, 들어봐. 난, 나는 꼬맹이 싫어. 근데 너는 꼬맹이잖아? 나는 꼬맹이랑은 결혼 안 해.”
콩알만 한 게 무슨 결혼이야. 주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보다 손도 너무 작고, 얼굴도 하얗고, 그냥 인형 같다. 소동물처럼 생겨서 결혼이라니, 완전 약은 꼬맹이다. 재연을 흘깃 바라본 주형이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실장이라는 아저씨가 따라다니는 것과 옷을 봐서 돈은 정말 많은 거 같고, 왕자님처럼 생겼으니 어쩌면 정말 어디의 숨겨진 왕자일지도. 주형은 물정 모르는 생각을 하며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있으니 잔뜩 신이 난 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붕붕 뛰며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내가 키가 크면?”
“아무튼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해. 지금은 모르는 거잖아.”
다른 이야기로 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재연이 그의 팔을 붙잡고 또 매달렸다. 주형과 떨어지는 걸 싫어하는 그 특유의 버릇이었다. 겨우 사흘 만에 생긴 버릇.
“형아, 키는? 키는 얼마나 커야 해?”
“나보다 훨씬 커야 돼.”
왠지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어서 공수표를 던졌다. 주형은 재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강조했다.
“형은 형아보다 큰 사람이 좋아?”
“몰라, 네가 나랑 굳이 결혼하고 싶으면 네가 나보다 커야 돼. 알았어?”
이상형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도. 애초에 어머니는 그 꼴이 났고 아버지는 저 지경이니 결혼이란 제도에 회의가 드는 건 당연했다. 부모라는 존재도 싫었다. 그렇기에 재연이 왜 이렇게 방방 뛰는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의 사정은 훨씬 복잡한 거라고.’
오죽하면 그 큰 어른들도 날 이렇게 막 때리겠어? 학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형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면서도 뺨을 붉히고 제 티셔츠를 잡고 늘어지는 재연이 자못 귀여운 듯 씩 웃었다.
“알았어.”
그날부터 꼭 키가 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벼르고 있던 재연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키가 크고 싶다고, 집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키가 커서 나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아버지도 그때만큼은 집안을 떠들썩하게 해도 용서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소년은 커서 장신인 주형보다도 덩치가 더 큰 어른이 되었다. 소년의 꿈은 쉬이 저물지 않았다.
***
주형은 새벽에 잠을 설친 뒤로 계속 불규칙적으로 깼다. 그래도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짓눌러 감고 고쳐 잤더니 그제야 일어나도 의심을 받지 않을 만한 시간이 됐다. 오전 9시. 꼭 이상하게도 5시, 6시 같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면 그제야 좀 깊이 자고 만다. 참 이상했다. 주형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주형이 일어나니 재연도 따라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눈가를 정리하던 주형이 재연을 바라보고는 비몽사몽 아침 인사를 건넸다.
“9시입니다. 잘 주무셨습니까?”
“으응.”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의 재연은 어리광이 심해서 저런 식으로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주형은 그런 재연의 모습이 달리 싫지 않았다.
“출근은요.”
“으응.”
재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안 해도 되거나 늦게 해도 된다는 뜻 같았다. 주형은 그렇게 빈둥빈둥 놀고먹는 재연이 내심 퍽 부러워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재연이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의 팔에 있는 희미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뭡니까?”
“아, 이거요?”
“예.”
백옥 같은 피부에 한 점, 두 점 나 있는 흉터가 영 거슬렸다. 새하얀 눈을 보면 짓밟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는데 윤재연 이놈 피부에는 왜 이런 흠 하나 있는 게 불편한지 알 수 없었다. 상처라서 그런 거겠지, 싶어도 뭔가 다른 상처와는 감상이 달랐다.
“어릴 때 생긴 거예요.”
“음……. 그렇습니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형은 재연이 주었던 옷을 입고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죠.”
“좀 더 자면 안 돼요?”
“아, 그럼 더 주무시고요.”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하려고 했는데 정작 더 자면 안 되냐는 말이 들려와서 실망했다. 참, 나. 이런 낯간지러운 걸 좋아하는 눈치기에 맞추어 주려고 했는데. 주형은 머쓱한 듯 음, 하고 손을 거두려 했다. 그 순간 재연이 손을 덥석 잡고 이불을 헤쳤다.
“아니에요. 좀 이따 낮잠 자면 되죠.”
“예.”
“밥 먹을까요?”
“좋습니다.”
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세 끼를 다 챙겨 먹게 됐다. 재연이 옆에서 계속 챙겨주는 덕분에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오고 있었다. 밤에는 고생을 해야 했지만 전반적으로 생활의 만족도는 낮지 않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싫을 거라고, 난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주 보고 밥을 먹었다. 처음엔 나란히 앉아서 먹을 기세로 밀어붙이기에 혹시 쭉 그러나 싶었는데, 그땐 그냥 재연의 고집이 발동한 것뿐이었다. 주형은 열심히 밥을 씹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반찬도 잘 들어가고, 흑미밥도 맛있었다.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한 건 인생에서 몇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재연의 집에서 맞이한 아침이었다. 아무튼 재연과 엮인 뒤로 통 이상한 일만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물을 마셔 입안을 갈무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너머로 장식장에 사진이 여럿 들어 있었다.
어제인가, 그저께 본 적이 있다. 제 사진과 재연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제 사진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저놈의 집착이라면 어디서든 구했겠거니 싶어서. 반면 궁금증이 든 건 재연의 사진 쪽이었다.
“……이사님.”
“응, 왜요?”
주형은 물컵을 든 채 쪼르륵, 한 모금씩 마셨다. 산새가 물을 아껴 마시듯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행위였다.
“문득 생각이 난 건데.”
“응.”
말해요. 재연이 곁으로 다가왔다. 보드라운 살결 냄새가 스르르 덮쳐왔다.
“왜 항상 긴팔 옷을 입고 계셨습니까?”
사진 속에서도, 그 시절에도 재연은 항상 긴팔 옷을 입고 있었다. 어린이용 와이셔츠든, 그냥 일반 티셔츠든.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밤이 찾아오고, 노을이 타오르면 뜨겁게 피부가 녹아내릴 듯한 감상을 주는 계절에 만났으니까. 분명 한여름이었는데도 긴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도 아니고, 여섯 살에 불과한 꼬맹이인데 말이다.
‘소매가 짧은 티셔츠가 없는 것도 아닐 테고.’
옷이야 차고 넘쳤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이는 흉터나 어릴 때의 옷차림을 생각하면 사실 얼추 감이 오기도 하지만, 재연의 입으로 듣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제가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이길 바랐다. 기왕이면 하찮고 우스운 이유. ‘그냥 짧은 걸 입으면 피부가 타서요’ 같은 것 말이다.
“아아.”
“…….”
심드렁한 음이 울렸다. 주형은 그 느른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폭풍전야의 밤에 잠드는 사람처럼.
“맞고 자라서요.”
그러나 당연스럽게도 그 조용한 호수에는 비단 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처에서 흐른 피도 있었다. 주형은 담담하게 말을 잇는 재연을 눈으로 흘겼다. 재연은 유리창 너머로 비친 주형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좋은지, 옛 상처를 끄집어내는 재연의 얼굴은 달리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피멍이 너무 많아서 가리려고 입었어요.”
그중에는 흉터가 지지 않아 아직도 있는 게 있다. 아까 주형이 일어나자마자 물은 것 말이다.
“하얀 피부에 물감으로 칠이 돼 있으면 그 누구나 손가락질을 할 테니까요.”
“…….”
“노인네는 밴드를 붙이는 것도 싫어했거든요.”
의심을 산다고. 재연은 엷게 웃으며 홀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진열장을 열어 액자를 꺼냈다. 두 사람의 사진이 한 장씩 들어 있었다. 주형의 어릴 적 사진과 재연의 어릴 적 사진이 나란히, 삐뚤빼뚤하게 서 있었다.
“그래서 흰 셔츠로 가리고 다녔습니까?”
“그렇죠. 얇은 셔츠를 입어야 하는 계절에는, 안에 살색 테이프를 바르고요.”
조직의 말단이 와서 성심껏 밴드를 붙여 주었다. 그리고 밴드가 하얘서 티가 나면 테이프로 덧붙였다. 매일 소독을 해 주면 너무 아파서 찔끔찔끔 울기도 했다.
“…….”
“나는 사실 들키고 싶었는데 집안사람들이 가리려고 애써서요.”
“그렇겠죠. 치부니까.”
주형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재연이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우중충한 대화 내용과 괴리되는 표정이 눈에 밟혔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까 좋네요.”
“……아.”
그제야 뭔가 잘못 말했다는 걸 알았다. 남의 상처-부모가 남긴 학대의 흔적-를 치부라고 말한 건 좀 심한 말이었다. 그러나…….
“남의 입으로 내 부모 욕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요.”
“…….”
재연은 상쾌하고 기쁜 얼굴이었다. 그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표정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재연의 얼굴은 더없이 맑았다. 이온 음료 광고에 나올 듯한 낯이었다.
“이사님도 꽤 고생하셨군요.”
그 말을 들은 재연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 수 없이 가슴이 벅찼다. 주형에게 저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제 말을 들어주는 날……. 그런 건 꿈에서도 바라지 못했는데.
“피부가 워낙 하얘서 티가 좀 나기는 했지만, 애들은 몰랐어요.”
몇 년 뒤 학교를 다닐 때도 외모로 주목을 받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재연의 속사정까지 알아주는 친구는 없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주형은 어릴 때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인데도 괜히 미안해했다. 저보다 훨씬 큰 덩치의 어른에게 피멍이 들도록 맞는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형은 소주병으로 저를 밀대 밀 듯 때리고 상처 입힌 제 아버지를 회상하곤, 체념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환기를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있으니 무서울 정도로 감정을 잃고 차분해진 재연이 보였다. 처음으로 그를 안쓰럽다고 느꼈다. 진심 어린 이유를 가진 채로.
“괜찮아요. 어른들은 모른 체했으니까.”
“……쯧.”
주형이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사람이 주변에 많았을 재연이 그렇게 숨기고 다녔다는 걸 봐선, 역시 은밀하게 진행된 가정 폭력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재연의 아버지라면 천국 캐피탈의 회장일 테니까.
‘조폭 새끼.’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애를 때리냐. 일그러진 미간을 펴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조폭이라면 자신의 아이에게는 폭력을 모르도록 자라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재연이 그렇게도 밖에 나오고 싶어 했던 건가. 주형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좋은 집에 사는데 왜 자꾸 이런 허름한 집에 와서 부대끼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정말 뒤늦게 의문이 다 풀렸다. 그간 재연을 잊고 살았더니 때늦게 뇌에서 재연이 살아났다. 머릿속이 혼잡스러운 느낌이다.
“눈속임은 그렇게 좋은 거예요.”
불편한 것들을 그리도 쉽게 지워 준다. 아이들의 눈은 가리고, 어른들의 등은 밀어 버린다. 그렇게 철저하게 고립된 재연은 외로운 사람으로 자랐다. 분리되는 것을 무서워하며, 양육자에 대한 내면의 불신이 심하고, 사람을 믿지 못한다. 게다가 학대를 무서워하면서도 학대를 해서라도 무언가를 얻고야 마는 무서운 집착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사회화 과정이었다.
“어릴 때는 형이 이런 날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주형은 저와 다르게 사람이 많아 보였다. 어릴 적의 둘은 서로를 선망했다. 사람이 많아 보인다고. 정작 남은 것은 둘 다 몸뚱이 하나뿐인 꼬맹이였는데.
아무튼 그는 나이도 좀 더 있고, 덩치도 크고, 강직하게 잘생겼으니 분명 멋진 정의의 사도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연은 주형이 귀찮을 정도로 마구 따라다녔다. 너무 즐거운 기억이었다. 형, 하고 따라다니며 그의 뒤에서 몰래 뺨을 붉히고 있으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몸이 간질거리곤 했다. 그건 잊을 수 없는 감상이었다.
“…….”
“지금 돌이켜 보면 병신 같은 생각이었죠.”
그렇게 말하는 재연의 얼굴은 무덤덤하면서도 쓸쓸해 보였다.
“너무 순진했어.”
재연이 그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형은 그 자조 어린 중얼거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릴 때의 저는 너무도 무능해서 어차피 구해줄 수 없었는데 기대해서 순진했다고 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바라고만 있던 그 무기력한 상황에 넌더리가 난 건가? 어느 쪽일까. 둘 다일까? 주형이 물끄러미 재연을 바라봤다.
“아무튼, 형.”
“예?”
재연이 갑자기 말을 끊고 주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진 더 없어요? 한두 개밖에 없으니 아쉬워요.”
“공교롭지만, 야반도주를 자주 해서 그런 건 없습니다.”
그 쓰레기 같은 어른-아버지-에게 있어 주형의 사진은 쓸모없는 것이었으니까 챙길 수 없었다.
“이런.”
너무 아쉽네요. 재연이 눈을 내리깐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권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슬픔이 어린 보조개가 있었다. 웃고는 있었으나 이상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미소였다.
“아이스크림 먹지 않을래요?”
“……예?”
아침 댓바람부터 아이스크림이라니. 후식으로 먹을 수 있긴 하겠지만 뭔가 먹고 싶지 않았다. 배앓이를 할 것만 같았다.
“아이스크림.”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좋잖아요. 예전 생각도 나고.”
아이스크림을 보면 주형 생각부터 났다. 재연은 여전히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니.”
주형은 눈을 잘게 끔뻑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이라고 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뭐, 학교 다니면서 축구하고 나서 쭈쭈바 드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땀을 줄줄 흘리면서 먹는 쭈쭈바는 맛있다. 물론 그것도 중학교까지의 기억이다.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지랄이 심해졌고, 버는 족족 갖다 바쳐야 했기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여유는 없었다. 그런 건 없어도 살 수 있으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라면을 먹지, 하는 생각이었다.
“음…….”
그리 대답하니 재연은 빙그레 웃으며 턱을 어루만졌다. 그에게서 배어 나오는 따스한 살냄새가 주형에게 옮았다. 아마 같은 섬유 유연제와 세제를 사용하고, 같은 사람이 관리해 주어서 옷에 밴 냄새도 섞인 듯했다.
“좀 다르긴 한데.”
재연이 중얼거렸다.
“다르다뇨?”
“아니에요.”
그냥 얼버무린 뒤에는 재연이 다시 매달렸다. 함께 집 앞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자고.
결국 주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다녀왔다. 뒤적거리며 고르자 몇 년 전에 비해 왠지 사이즈가 작아진 것 같은 아이스크림이 눈에 띄었다. 어릴 때는 너무 비싸다고 느껴서 절대 사 먹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멀찍이 바라만 보다가 돈을 열심히 모았다.
‘얼마를 모았더라.’
생각해 보니 아이스크림값보다 더 모았던 것 같은데, 왜 사 먹은 기억이 없지. 주형은 의문을 가졌다. 뭐…… 야반도주를 하느라 바빠서 돈도 빠뜨리고 왔을 수도 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재연의 것까지 함께 담긴 봉지를 들었다.
“이사님이 이런 걸 좋아하실 줄은 몰랐네요.”
“좋아하지는 않아요.”
사실 자라면서 입맛이 길들여져서 화학 가공품 냄새가 나는 걸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맛있다고는 생각해도 왠지 몸에 안 좋은 맛이라는 게 느껴져서 정이 안 간다고 해야 할까.
“그럼 왜…….”
주형이 미간을 찌그러뜨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옷 입고 나가는 게 영 귀찮았다.
“그냥 형이랑 해 보고 싶어서.”
“…….”
“처음 봤을 때부터 형이랑 이런 거 하고 싶었거든요.”
그와 하고 싶은 것들을 밖에서 말하면 경악할 듯해 다물고 있었다. 언젠가는 섹시한 바니걸 의상을 입혀 보고 싶었다. 너무 작고 꽉 끼는 의상 때문에 자지가 톡 튀어나오면 주형이 쪽팔린다며 씩씩거릴 텐데, 솔직히 너무 귀여울 것 같아 기대가 됐다. 그렇게 주형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게 재연의 즐거움이었다. 물론 그가 모든 걸 포기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처음이라면…… 설마 그 어릴 때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 재연은 가벼운 손길로 주형의 손에 있던 봉지를 들고 왔다. 안에 든 거라고는 담배 한 갑, 아이스크림 두 개, 그리고 음료수 하나가 전부여서 아주 가벼웠다.
“응.”
“기억력 정말 좋으시네요……. 그때 여섯 살밖에 안 되셨던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여섯 살 때 기억이 나다니. 주형은 제가 여섯 살 때 뭘 했는지 잘 몰랐다. 아마 그때도 그때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이 남았다.
“그 외의 기억은 딱히 없어요.”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재연의 뺨에 보조개가 생겼다. 쏙 들어간 볼이 그의 얼굴을 우아하게 만들었다.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웃으니 부드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형 기억만 나요.”
재연이 싱긋 웃으며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가벼운 전자음 소리가 울리고, 둘은 신혼집처럼 잘 꾸며진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부끄러워요?”
얼굴이 빨간데. 주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 재연이 말했다. 어느새 주형의 뺨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딱히 의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이, 씨.”
주형이 괜히 짜증을 냈다. 그러고는 재연의 잇자국인 남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응?”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미안해지지 않습니까.”
“뭐가요?”
“전 이사님에 대해 기억하는 게 딱히 없습니다. 애, 애초에 저희 열흘 정도밖에 안 봤습니다. 이사님이 워낙 예쁘게 생기셔서 얼굴 정도나 기억나는 거지…… 그 외에는 모른다고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미안해집니다.”
주형이 꾸물꾸물 결국 입을 열었다. 너무 순진하게 재연이 이러쿵저러쿵 묻는 게 신경이 쓰였던 탓이다. 그의 목소리는 소심하기도 했고, 동시에 쑥스럽기도 했다. 마치 좋아하는 아이에게 좋아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덧붙여 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근데 그렇게 어릴 때 열흘 본 거 가지고 미안해하는 것도 웃기잖아. 저놈이 기억해내라고 울면서 매달린 것도 아닌데. 게다가 뭐가 예쁘다고 저런 놈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있는 건지.’
아이, 씨……. 주형이 복잡한 심정을 담아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고는 봉지를 낚아채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었다. 왜 이렇게 쑥스럽고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예뻐요?”
“예. 예쁩…… 아.”
험한 손길로 집어 아이스크림을 쿡 쑤셔 박고 닫았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닫아버린 것을 알고는 홀로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재연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걸 또 깨달았다.
“정말요? 어디가 예뻐요?”
“……이, 씨.”
아까부터 왜 이렇게 들러붙어서 귀찮게 하는지. 오늘 아침부터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주형은 재연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시뻘겋게 했다. 살짝 그을려 있는 피부색에 홍조가 돌자 토마토처럼 붉게 빛났다. 재연은 너그럽게 웃으며 주형의 눈이 향하는 곳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센 힘으로 주형을 은근슬쩍 옭아매고 있어 도망갈 수도 없었다.
“왜 그래요. 형, 나 안 예뻐요?”
사실 재연은 자신이 예쁘고 잘생겼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형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달랐다. 문득 나온 말이 그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모릅니다. 몰라요.”
“토끼 같은 남친한테 그럴 거예요?”
재연이 또 달라붙었다. 자신이 예쁜 것을 아는 데에서 나오는 당당함이 주형의 마음을 헤집었다.
“……토끼요? 이사님이요?”
“응.”
무서울 정도로 당당한 모습에 주형이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님, 토끼가 어떤 동물인지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쁘잖아요.”
재연은 누가 와도 예쁘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로 말했다. 정갈한 눈썹과 입매가 돋보였다. 천사를 닮은 조각상 같은 것이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평소라면 코앞에서 마주쳤을 때 절로 숨이 멎을 정도로 당황했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토끼, 조루입니다.”
“…….”
“예쁜데, 조루라고요.”
주형이 큭큭 웃었다. 천하의 윤재연이 모르고 나댄 게 있었다니, 너무 웃겼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귀여웠다. 재연이 처음으로 당황해 아, 하고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는 걸 보니 즐거웠다. 배를 잡고 끅끅거리며 웃고 있으니 재연이 음, 하며 눈을 잘게 깜박였다.
“……웃겨요?”
주형의 앞에서 체면을 구길 줄은 몰랐는지 재연이 괜히 낮은 목소리를 냈다. 조직원들을 거느리는 보스 같은 목소리와 얼굴을 드러내고 있긴 했지만, 솔직히 이 상황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저 웃기고 잘생긴 놈에 불과했다. 뭐, 좀 귀엽기도 했고.
‘꼴에 연하라고.’
새끼. 주형이 씩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이렇게 웃은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몇 년 만인 듯하다.
그는 재연에게 이사님도 모르시는 게 있네요, 하고 슬쩍 놀리려고 했다. 그가 이렇게 허점을 보일 땐 잘 없으니까. 군림하는 게 취미이자 본업인 그가 이럴 줄은 몰랐다.
“이사님도 모르시는 게…… 읏.”
그러나 그 말은 막혔다. 재연이 성큼 다가가 주형의 입에 제 입술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쏙 들어가는 그 사이에 제 윗입술을 쏙 넣고, 재연이 주형의 아랫입술을 음미하듯 쪽 빨았다. 분명 흐리멍덩하게라도 말할 수 있는데도 주형은 몸이 잔뜩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상큼하면서도 미묘하게 단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혀뿌리를 은근하게 훑는 붉은 살덩이가 느껴졌다. 섹스를 할 때 흥분에 차 서로만을 탐할 때와는 달랐다. 감정을 옮기고, 교류하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주형은 이때까지 이런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흐, 읏.”
“형.”
재연이 살짝 입술을 떼고는 주형을 불렀다. 주형의 눈꺼풀이 여전히 긴장에 차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주형이 형, 하고 달콤하게 불렀다. 여유롭게 천국에 앉아 기다리는 소년의 목소리였다. 유혹하고 탐하려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한 주형이 숨을 들이마셨다. 코앞에 있는 재연의 콧날이 느껴졌다. 뭉근하지만 날카로운 감각이 슬쩍 스쳤다. 코를 비비며 입술을 들이밀고, 혀로 주형의 안을 농락했다. 그러나 무시하거나 깔보는 느낌은 없었다.
언제부터였지. 재연의 눈길이 다르게 느껴졌다. 재연은 주형을 처음 보았을 때 애증이 가득한 마음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서 좆같은 거지새끼라고 생각했고, 멍청하니 얼른 똑똑해져서 말귀를 좀 처먹었으면 좋겠다고 바랐고, 강간하면서 괴롭히고 싶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가 꽤 마음에 들었고, 주형이 그냥 쭉 어느 정도 멍청해서 저만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와 하는 정사가 강간이 아니라 성교이길 바랐다. 이기적인 감상이 가득한 순애보로 변하는 건 비단 사흘 만이었다. 재연이 주형을 만나고 나서 다시 사랑에 빠지는 데에 걸린 시간.
주형의 생각 또한 바뀌었다. 제멋대로인 놈이 점점 이상하게 보였다. 상대적인 걸까. 주변에서 하도 사기를 많이 당해서 재연이 좋아진 걸 수도 있다. 놈은 적어도 돈이라도 있으니까. 잘생겼으니까. 알 수는 없지만 사랑 같은 걸 주려고 하니까. 주형은 재연에게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자신이 토끼 같다고 은근히 으스댈 때는 솔직히 조금 사랑스러웠다. 씨발, 이래도 되는 건가. 지독하게 얽히기만 하고 풀 줄은 모르는 이 상황이 난감하고…… 또, 아주, 아주 조금 설렜다. 피폐한 땅덩어리에 대충 뒹굴던 인생이 다르게 느껴졌다.
쪼옥, 주형의 붉은 입술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키스를 갈무리했다. 재연의 눈길은 악마처럼 고요하고 유혹적이었다. 주형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이 주형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까는 형이 나와 관련된 기억이 많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
주형이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그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주형 특유의 낯가림이 발동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섹스가 아니라 이런 소소한 애정 행각을 하고 나면 부끄럼을 탔다. 구멍은 되는 대로 벌리고, 자지도 잘 먹으면서 이런 곳에는 낯을 가리는 게 귀여웠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
“형이 나를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빠짐없이. 재연은 그렇게 속살거렸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끈적하게 났다. 말라붙은 타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야했다.
주형은 침을 꿀꺽 삼키고, 떠는 건지 동의인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어지러운 이 감각이 낯설어서 쓰러지고 싶었다. 공사장에서 하루 내내 노역을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주형은 자신이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증상으로 이상해졌다는 걸 자각했다.
***
재연의 허락을 받고 잠시 원래 살던 동네로 향했다. 워낙 양아치와 조폭들이 많이 어슬렁거리는 달동네라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원래 쓰던 살림 몇 개를 들고 오고 싶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그리고 이제는 재연이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거니, 하고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무의식적으로 의지를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집은 아직 남아 있었다. 재연이 와서 다 정리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말이다. 서랍을 뒤적거리자 낡은 물건이 여럿 나왔다. 분명히 올 때만 해도 옷이나 다른 소지품을 많이 가져오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 보니 다 낡아서 들고 오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옷 몇 벌만 가방에 넣어 왔다.
한참 집을 비웠더니 바닥에 휴대폰이 뒹굴거리고 있었다. 먼지가 낀 바닥을 밟자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몇 주 전까지는 여기서 누워서 살았다고 하니 실감이 안 났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잘 수 있는지. 이 쓰레기 같은 달동네가, 반지하가 정말로 주거 공간은 맞는지.
처참한 광경 속에서 주형은 이미 탈출한 사람 특유의 후련함을 느꼈다. 그러고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휴대폰을 켜려고 했다. 하지만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켜지지 않아서, 곁에 마침 꽂혀 있던 휴대폰 충전기에 연결했다.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 볼 필요가 있었다. 2억 정도 남아 있을 텐데.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휴대폰을 켰다. 그러고 있으니 문자와 전화가 몇 통이나 쌓여 있었는데, 대부분은 스팸이었다. 눈길을 주지 않고 주르륵 내려 보자 천국 캐피탈에서 온 독촉 문자도 있었다.
[Web발신]
천국 캐피탈입니다.
민주형 님의 채무 340,325,193원이 있습니다.
이번 달에 납부하실 금액은 998,241원입니다.
이 번호를 수신 거부하실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으니 양지하시길 바랍니다.
주형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빚이 1억 4천이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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