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lz] 나락 2권
4. 본성 (2)
두 사람 다 꼬맹이였을 시절이다. 주형은 열두 살, 재연은 여섯 살. 머리를 맞대도 하찮고 귀여운 생각밖에 하지 못할 나이다.
‘형아, 들어가도 돼?’
여섯 살 재연은 제법 귀여웠다. 볼살도 통통했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아마 젖살이었던 거 같다. 보들보들해 보이는 머리카락과, 누가 봐도 부잣집 아이 같은 서스펜더 복장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아주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주형은 저 당돌하고 어이없는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니.’
‘왜? 형, 집이 엉망이야?’
재연의 부모님은 언제나 집이 엉망이라는 핑계로 아는 사람들을 들이지 않았다. 피비린내를 없애지 못했을 때 주로 그런 핑계를 썼고, 최근 들어 그 핑계를 자주 들은 재연은 ‘주형의 집 또한 엉망이라 들이지 못하는 것’이라 예상했다.
‘……뭐? 아니, 너 나랑 처음 보잖아.’
주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애초에 한창 텔레비전을 보던 중에 누가 띵동, 띵동 거려서 짜증이 났던 참이었다.
‘그런데, 나는 형이 사는 집을 내 방 창문으로 계속 봤는걸. 그래서 형이 궁금했어.’
재연의 방은 3층이었다. 그래서 빌라의 2층, 그것도 복도 끝 집에 사는 주형의 모습이 잘 보였다. 가끔은 주형이 거의 내쫓긴 채 집 앞을 서성이는 것도 봤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궁금하다고 하는 건데?’
‘그냥 형 집은 우리 집이랑 달라서.’
‘뭐?’
‘형 집은 여러 명이서 살잖아.’
재연은 저택에서 살았다. 한 건물을 모두 점유하는 형태로 살았기 때문에, 주형과 같이 빌라에서 다세대가 칸으로 나누어진 집에 살 거라곤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빌라 하나를 통째로 쓰는 줄 알았고, 동시에 재연은 그렇게 복작복작 언제나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런 집을 선망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제 아버지가 저를 때릴 때도 한 명쯤은 막아 주지 않을까, 싶어서. 재연이 맞을 때는 그 누구도 곁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주형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제 아버지를 포함해 셋이서 사는데, 그게 뭐라고. 오히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때리는 제 아버지가 짜증 나서 싫었다.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형은 한순간 욱해서 그냥 짜증을 냈다.
‘꼬마야, 돌아가. 나 숙제해야 되니까.’
이제는 쪼끄만 것까지 귀찮게 구네. 주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숙제는 김 실장 아저씨한테 하라고 할게. 형, 놀자.’
김 실장. 재연을 보살피는 경호원 중 가장 직급이 높은 남자였다. 재연은 그에게 잡다한 것들을 부탁하고는 했다. 책을 읽어 달라든가, 방문 교사가 이런 걸 사 오라고 했다든가, 그런 것. 가끔은 아버지에게 때리지 말라고 말해 줄 수 없겠냐는 곤란한 부탁도 해서, 김 실장은 재연을 매우 어려워했다. 그래서 재연은 때때로 고립당했다.
‘내 숙제는 내가 해야 하는 거야. 가라, 이제. 난 너랑 놀기 싫어.’
주형은 어릴 때부터 책임감이 굉장히 컸다. 뭔가 잘못된 방법으로 해결하는 걸 무서워했다. 도박에 미친 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형아……!’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얼마나 예뻤는지, 주형은 태어나서 그런 건 처음 봤다. 문방구에 파는 구슬보다 예뻤다. 반에서 제일 예쁘다고, 공주님 같다고 남자아이들이 은근히 눈길을 주는 여자애보다 더 예뻤다.
그래서인지 주형은 문을 닫아 주고 나서도 조금 후회했다. 그렇게 예쁜 애인데 한 번쯤은 그냥 봐줄 걸 그랬나. 집이 아니라 저기, 놀이터에 가서 놀자고 할 걸 그랬나. 숙제 같은 거야, 밤에 몰래 이불 안에서 해도 되는데. 물론 들키면 맞겠지만.
주형은 그리 끙끙 앓다가 그냥 결국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재연을 은근히 기다렸더랬다.
주형과 재연의 만남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해 질 녘이 다가오고, 해가 매우 길어질 즈음. 슬슬 여름의 뜨거움을 사람들의 뇌에 각인시키며 아스팔트를 녹이는 해가 내리쬘 때. 초여름의 해 질 녘에 물든 재연은 여름의 왕자님 같았다. 주형은 꼬질꼬질한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기에 더더욱 재연이 어려웠다.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성격 하난, 참…….”
주형은 끙, 하고 앓으며 중얼거렸다. 제 성격도 못지않게 지랄맞지만 재연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남달랐다. 어떻게 그렇게 제멋대로인지. 그러고 보니 어릴 때는 항상 긴팔을 입고 있었는데 그건 왜였을까. 햇빛 알레르기라도 있는 걸까. 요즘이야 겨울이니 그렇겠지만 그때는 여름이었는데.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자 똑똑, 하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드르륵 열렸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들어오기에 당황해 곁을 바라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연이었다. 뒤에는 꼴도 보기 싫은 천국 캐피탈 놈들이 보였다. 검은색 양복이 아주 치가 떨렸다. 재연은 그중에서도 가장 곱상하게 카멜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형, 몸은 좀 어때요?”
“…….”
대답하지 않고 그가 들고 오는 것을 바라봤다. 그는 음료수 박스와 과일 바구니, 케이크, 비타민을 부하에게 시켜 안에 들이고 있었다. 그게 기가 차서 대답도 않고 허, 하고 픽 비웃었다. 그러자 안에 들이고 있던 놈 하나가 눈을 부라렸다. 주형은 그게 짜증이 나서 놈을 째려봤다. 재연이 그 눈길을 따라가듯 뒤를 돌아보자 엉거주춤하게 홍삼 진액 박스를 두고 있는 부하 하나가 보였다.
“다 했으면 나가.”
아주 싸늘한 목소리였다. 주형은 흠칫 놀랐다. 재연의 목소리가 몹시 다정해서 징그럽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다 연기였다. 얼음장을 깨부수듯 날카롭고 무서운 목소리에 주형이 저도 모르게 재연의 눈치를 봤다. 너무 지질한 짓인 듯해 놈들이 나가고 나서는 다시 애써 긴장을 풀었다.
“몸은 좀 어때요?”
원래라면 귀가 안 들리냐고 턱을 꽉 잡고 저를 보게 했겠지만 재연도 나름대로 양심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다. 주형의 발목을 부러뜨린 건, 역시 주형을 위해서였으나 그래도 그가 고통스러웠을 테니까.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주형을 이렇게 붙잡아 두니 만족스럽고 기뻤다. 그가 고분고분히 앉아 있으니 더없이 예뻤다.
“……모르겠습니다.”
“복숭아는 좋아해요?”
“아, 예……. 뭐.”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 그냥 대충 끄덕였다.
“홍삼은?”
그 뒤로도 재연은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냐, 비타민은 먹냐, 과일은 가리는 게 있냐,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대부분 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라 주형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주형에게 음식이란 있으면 먹는 것이었고, 없으면 뒈지게 짜증이 난다는 것에 불과했다. 딱히 가릴 처지가 아니라 그런지 편식도 안 했다.
“이사님.”
“네, 형.”
“진지하게…… 저랑 뭐가 하고 싶으신 겁니까?”
주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번을 되짚어 보아도 이해가 어려웠다. 주형은 재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사님, 생각을 해 보십시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의 발목을 부숩니까? 그런 건 미워하는 사람한테나 하는 겁니다.”
혼란스럽다고요. 주형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동공이 얕게 진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절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냥 제가 이사님의 개가 되길 원하십니까?”
병신? 아니다. 병신을 만들려면 그냥 다 부쉈겠지. 돈? 장기는 멀쩡하니 이미 다 뗄 수 있었는데도 떼지 않았다. 애인? 씨팔, 무슨 미친놈이 애인 될 사람의 발목을 부수는가. 개? 하지만 윤 이사에게는 개가 이미 많지 않나. 어릴 때의 복수? 아니, 잘못한 게 딱히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형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대충 부하에게 시켜 패면 돈이야 꼬박꼬박 들어올 상대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건 말이 안 됐다.
“형이랑 사귀고 싶어요.”
“……뭐라고요?”
“형이 나밖에 모르는 좆병신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좆병신이지만 더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재연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설렘도 없어서 무섭게 느껴졌다. 왜일까. 기계적인 목소리에는 아름다움이 있기 어렵다. 주형은 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런 결정적인 말을 할 때, 꼭 싸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그래서 주형은 재연을 믿을 수 없었다.
“전 이사님밖에 모릅니다. 됐습니까?”
“그런 기계적인 거 말고요.”
조금만 더 건드리면 ‘형은 맨날 이런 식이야. 됐어, 유치하고 우스워. 그만해.’ 이런 드라마 속 대사가 나올 정도로 간절해 보였다. 분명 덩치도 크고 하는 짓도 짐승 새끼인데 왜 이렇게 가련한 소녀처럼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주형은 재연에게 매우 약했다.
“아니…….”
울컥한 나머지 짜증을 냈다. 주형은 아니야,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이마를 쿡 짚었다. 이내 진정했다.
“뭘 하면 되겠습니까?”
“형.”
“예.”
이제는 저 형 소리도 익숙했다. 주형은 숨을 소리 없이 내쉬며 재연을 반듯하게 바라보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꼿꼿한 척추가 잘 드러나는 자세였다.
“형이 내 애인이 되고 나서 나를 거부하면, 코뼈부터 부러뜨릴 거예요. 제일 예쁜 것부터 박살 내고, 그다음 예쁜 순으로는…… 자지.”
“…….”
“형 좆 잘라 버릴 거예요. 그리고 발목 인대 끊어 버린 뒤에 개처럼 기게 할 거고, 그때도 날 거부하면 그땐 약 먹여서 나만 보게 할 거예요.”
재연의 얼굴은 놀랍도록 진지했다. 장난꾸러기처럼 살포시 올라간 입꼬리와 폭 팬 볼우물이 탐욕스럽게 보였다. 하나하나 잔인한 말을 읊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랑 정식 연인이 될 거예요?”
이건 ‘이래도 나랑 사귈 거야?’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안 사귀면 앞으로 이사님이 저한테 그 짓 하실 거 아닙니까?”
‘나랑 엮인 이상 넌 무조건 나랑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거였다. 주형은 이번만은 매우 눈치가 빨랐다. 가자미눈을 뜨고 슬쩍 흘겨보았다.
“맞아요.”
“씨발, 그럼 왜 물어보는데!”
참다못한 주형이 꽥 소리를 질렀다. 쾅 침대를 내려치자 재연이 그런 그의 주먹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예쁘고 둥그런 손톱이 반짝거렸다. 재연은 주형의 구멍을 잘 쑤셔 주려고 매일 아침 손톱을 정리하고 있었다.
“형한테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그 행위 또한 다정함의 일부였다. 재연은 정말로 뿌듯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순애보 같아서. 물론 토끼 포지션은 포기했지만, 아무튼 다정하지 않나 싶었다. 주형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든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형이 그런 얼굴 할 때가 제일 꼴려요.”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귀엽지. 재연이 그리 생각하며 주형의 뺨을 톡 그러쥐었다. 잘 자서 그런지 피부가 매끄러웠다. 그렇게 스르르 어루만지자 주형이 아연실색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눈을 끔뻑이는 순간이 재연의 시야에 잡혔다. 재연은 그 반응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지 그는 안광을 반짝거렸다. 예전부터 느낀 거였지만 콧날도 그렇고 속눈썹도 그렇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재연은 벌써부터 아래가 동하는 걸 느꼈다.
“아무튼 형이 내 애인이 되면 그렇게 해 줘야 해요.”
“야, 누가 애인 자지를 잘라? 미쳤냐? 그게 무슨 연애야!”
이제는 황당해서 소리를 빡빡 내질렀다. 넓은 병실에 주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를 높여서 재연이 화를 낼 법도 했으나 그는 달콤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사귀면 내가 형 빚도 다 갚아 주고, 형이 지낼 곳도, 옷도 다 마련해 줄게요.”
“보통 사귀는 사이엔 그렇게까지 안 해, 안 해도 됩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주형이 말을 하다 말고 툭 끊은 뒤 말씨를 공손하게 바꾸었다.
“내 연애는 그래요.”
“사람 새끼 연애가 아니잖아요! 씨팔!”
“그래도 연애는 연애예요.”
나는 형이랑 연애하고 싶어요. 재연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큼하고 예쁜 미소였다. 주형은 그럼에도 예쁜 그의 얼굴을 저주하고 싶었다. 차라리 좆같이 메주처럼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조각상을 가져다 놨다. 주형은 신이 매우 미워졌다.
“미친 새끼.”
모든 게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또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재연은 그 이상인 거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상상 이상이었다. 돈 갚으라고 지랄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게 분명하다.
어릴 땐 이러지 않았는데. 분명 귀엽게 형아, 형, 하지 않았나. 아까 한 회상은 그냥 허상이었나. 과거 미화가 된 건가. 하지만 그렇게까지 머리가 안 좋지는 않은데.
주형이 끄응, 하고 앓으며 재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것이 사슴의 눈동자 같았다. 반짝거리는 걸로는 잘 세공된 보석 못지않았다.
“어떻게 할래요?”
재연은 싱긋 웃고 있었다. 천하의 악당 새끼도 모자라 동화에 등장할 것 같은 마왕 같기도 했다. 순수악, 혹은 맹목적인 악의 결정체 말이다. 주형은 일단 말을 돌리기 위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지금 당장은 말씀 못 드립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 사귀고 생각하면 안 돼요?”
재연의 눈썹이 축 처졌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한 번 사귀기 시작하면 그걸 빌미로 주형을 마구 몰아붙일 심산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점잔을 빼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주형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마구 떠올랐다. 분명 몇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것쯤은 괜찮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당장 주형을 찾아가 뭐라도 하고 싶고, 뭐라도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보자마자 안도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발목을 부러뜨린 건 잘못이라는 걸 알고 있으나 아무튼 재연은 자신에게도 나름의 명분과 사정이 있다고 여겼다.
재연은 스스로가 충동적으로 주형에게 거친 고백을 줄줄 늘어놓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형의 앞에 서기만 하면 평소보다 말을 고르기 어렵다. 고르라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짜증이 날 정도로 멍청해져서, 무심코 주형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재연은 주형을 좋아했기에 이런 폭력적인 애정 공세도 멈출 수 없었다.
이것마저 멈추면 주형이 슬쩍, 또 떠나버릴까 봐.
“……아무래도 매우 중요한 일인 거 같으니 생각을 좀 하고 싶습니다.”
“음, 알았어요.”
주형에게 있어 재연과의 재회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생각보다 과정이 매우 험악했고, 과거 따위는 떠올릴 여유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의 행패는 대단했다. 원래 성격이 더러웠던 주형도 그런 그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재연에게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를 잘 길들일 방법이라도 알아야 했다. 주형은 작전을 바꾸었다. 재연이 어디서 예쁜 아가씨를 만나 그대로 사랑에 빠져 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면 이런 가난하고 덩치만 큰 형 따위는 금세 버릴 거다.
그러고 있자 재연은 그의 마음도 모르고 다시 뚜벅뚜벅 다가왔다.
“받아요, 형.”
재연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무얼 꺼내고는 주형의 품으로 툭 던졌다. 깨져도 상관없는 물건인가 싶었으나 일단 반사적으로 받고 보니 휴대폰이었다. 아니, 한두 푼짜리도 아닌 걸 저렇게 막 던진단 말인가. 어린놈이 물건 소중한 줄 모르고 마구 대하는 걸 보니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개통까지 되어 있는 거니까 켜기만 하면 돼요. 내 연락 오면 10분 안에 받아야 해요.”
“에?”
주형은 불만 어린 얼굴로 휴대폰을 받기는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준 휴대폰을 테이블에 두었다. 그리고 반항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10분 안은 너무 빡빡한 거 아닙니까?”
“어차피 할 일도 없을 텐데 왜?”
아주 얕게 구김이 간 코트를 톡톡 털어내는 그의 모습이 매우 얄미웠다. 주형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해도 그는 내내 여유로웠다.
“요즘 일 다닙니다. 어제도…… 하, 카페 일 마치고 왔지 않습니까.”
말을 하다 보니 짜증이 났다. 참을성 없는 놈과 함께 있기란 이토록 힘든 일이다.
“돈은 걱정 없이 줄 테니까 애인해 줘요.”
“그거랑은 별개로 제 생활을 영위해야 한단 말입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그의 애인 노릇을 하느라 돈을 못 벌 수는 없다. 재연이야 돈이 많으니 이런 노리개도 부릴 수 있겠으나 저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 생활비까지 더해서.”
“제 빚이 늘어나는 건 원치 않습니다. 일할 시간 정도는 주십시오.”
“그런 푼돈 벌겠다고 내 연락을 무시한다고요? 섭섭해요.”
“지금 그 푼돈 갚으려고 너랑, 아니, 이사님이랑 사귀고 일하는 겁니다. 무시하지 마세요.”
발끈한 나머지 입술이 조금 짓눌렸다. 누구는 진심으로 일하고 싶은데 그런 노고를 전부 무시하다니. 한두 번 무시당한 삶이 아니지만 재연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괜스레 더욱 짜증이 났다.
“음.”
재연이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사님.”
“응?”
“의사 선생님 좀 불러와 주시면 안 됩니까? 그리고 이 수갑도 좀 빼 주시고요.”
수갑을 차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입이 좀 걸긴 해도 범죄를 저지른 적은 단연코 없었으니까. 그가 반항의 의미로 몸을 움직이자 침대가 덜컹거리며 수갑과 함께 꿈틀거렸다.
“형이 도망가면 어떡해요.”
“제가 무슨 가련한 노예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아직 아픈데 나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주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연의 눈치를 슬쩍 봤다. 난리를 피우면 재연은 귀엽다고 하면서 여기서라도 따먹을 놈이니까, 그에게 맞추어 주기로 했다. 이상하게 주형은 재연에게 점점 길들여지고 있었다.
“으음…….”
“화장실은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이거 풀어 주십시오.”
“아, 이대로 두면…….”
형 분수 볼 수 있어요? 재연이 반짝반짝한 얼굴로 물었다. 그 목소리와 얼굴에 주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천천히 다가와 아랫도리를 슬쩍 쓰다듬어 보려는 행각에 주형이 으윽, 하고 낑낑거리다가 짜증을 냈다.
“제발, 좀…… 그냥 풀어 주십시오. 씨발.”
“그렇지만.”
좋은 기회인데. 재연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고 상냥했다. 주형은 다가온 그의 얼굴을 때리려다 꾹 참았다. 그래. 바깥에는 경호원이 있을 거다. 죽을 것도 아닌데 그러진 말자. 하지만 죽기 직전이 되면 재연의 얼굴 하나는 꼭 분지르고 가리라. 주형이 억누르고 억눌렀다.
그리고 화가 난 맹수처럼 씨근거리다가 재연에게 이리 와 달라고 말했다. 귀를 보여달라 하니 재연이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몸짓했다.
성숙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확 끼쳤다. 주형은 코를 쿡 찌르며 기분을 좋게 하는 향수를 얕게 들이마시다가, 재연의 귀에다 속살거렸다. 듣는 사람이라고는 저와 재연밖에 없는데도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분, 분수는…… 씹, 꼭 오줌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분수란 말 자체를 너무 입에 담기 싫어 잠시 멈칫했다.
“아아.”
“……풀어 주십시오.”
“알았어요.”
도대체 왜 이따위 것으로 해결이 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재연은 재킷 안주머니에 꽁꽁 숨겨 두었던 열쇠를 꺼냈다. 이렇게 견고한 철이 저렇게 작고 얇고 조악한 열쇠 하나에 풀리다니.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잠시, 재연이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이 소름이 끼쳐서 순간적으로 발길질을 했다. 다행히도 재연의 허벅지에 살짝 부딪힐 뿐,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다.
“……형.”
재연이 눈을 끔뻑이다가 주형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스산한 목소리가 익숙했다. 발목을 분지르기 전 목소리다. 주형은 잔뜩 긴장했다. 심장이 꽉 옥죄는 게 이대로 터지지는 않을까 겁도 났다.
“아, 니.”
“…….”
“어제…… 발목, 누르실 때가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재연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커다란 덩치를 한 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재연은 아무런 말도 없이 주형이 말을 끝맺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오늘의 그는 참을성이 조금 있어 보였다.
“겁이 나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주형이 정처 없이 사과했다. 그러고도 놀랐다.
‘왜 그랬지.’
돈이 무서워진 건가. 아니, 재연에게 호되게 당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주형은 약간 기가 죽은 걸 스스로도 느꼈다. 역시 발목이 부러진 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나 보다. 그렇게 바라보자 재연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알았어요.”
“…….”
“내가 싫은 건 아니죠?”
재연이 정적 속에서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조금 더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재연은 주형의 곁에 걸터앉았다. 생각보다 매우 가까워서 숨결이 닿을 수도 있을 듯했다. 주형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끄덕였다.
“예.”
아까 ‘이사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랐다. 재연은 그 굳건한 얼굴이 만드는 긍정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씩 웃었다. 뱀 같은 웃음이었다.
“안 싫습니다.”
올곧은 목소리와 여전한 의심, 치기가 어려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재연은 그런 주형의 볼을 감싸고 입을 거세게 맞추어 주었다. 아무튼 그의 눈을 보고만 있으면 한없이 빠져들어 갈 것처럼 행복해졌다.
재연은 역시 주형을 놓칠 수 없었다.
***
한 달. 주형이 입원을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간이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아무튼 의사가 그렇다고 하니 믿어 보기로 한다.
재연이 일부러 섹스를 시도하고 주형의 병원 방문을 유예한 뒤로도 계속 발목을 망가뜨리려 지분거렸더니 생각보다 기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한 달이면 주형이 일을 그만두기도, 제게 의지하기도 딱 좋은 기간이지. 재연은 자못 만족스러웠다.
‘겁이 나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주형이 그렇게 겁먹은 사슴처럼 말을 할 때는 너무 귀여웠다. 이런 순간을 바라왔다. 주형이 제게 약간의 겁을 먹고 조심스럽게 다가올 때. 길들여지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면 적잖은 쾌감이 다가왔다.
재연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웃음을 가리는 게 버릇이 되어 미묘하게 손으로 입가를 감싸고 있기는 했으나 웃음은 숨기기 어려웠다. 미소에는 부드럽고 온화한 감성과 음습하고 어두운 욕망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재연은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어느새 낡아버린 주형의 사진을 바라봤다. 주형의 초등학교 졸업 앨범 사진이다. 주형이 12살이었을 때 만났으니, 그의 기억 속 주형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시절의 사진을 공수했다. 기억 속 주형과는 조금 다르게 머리카락도 조금 덥수룩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눈썹이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카락이 그의 동그랗고 예쁜 이마를 반쯤 덮고 있었는데 말이다.
“귀여웠는데.”
재연이 지갑의 명함 칸에 있는 사진을 쓰다듬었다. 주형의 얼굴을 얕게 어루만져 보는 그의 손길이 느릿느릿함과 동시에 온순했다. 주형에게 미쳐 달려드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고로 가정 형편 때문에 졸업 앨범을 찍지 못할 때도 있었는지, 중학교 사진은 없었다. 밤톨처럼 짧게 깎인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은 있었지만. 재연은 자위를 할 때면 간혹 그 사진을 꺼내고는 했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한숨이 푹 흘렀다.
재연은 곁을 돌아보았다. 주형에게 주기 위해 산 것들이 한구석에 모여 있었다. 몇몇 부피가 너무 큰 것은 트렁크에 실어 두고, 케이크나 꽃다발처럼 그나마 부피가 작은 것은 곁에 두었다. 오피스텔 출입 권한 키, 홍삼 진액, 또 다른 영양제, 곰인형……. 모두 주형을 위해서 산 것이었다.
사실 차와 반지도 사고 싶었으나 아직 너무 이른 일인 듯해 미루어 두었다. 재연은 주형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가 되면 꼭 차와 반지를 함께 선물할 생각이었다. 신혼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꼭 담요를 뒤집어쓰고 그와 섹스를 하고 싶었다. 재연은 은근히 낭만이 있었고, 그 낭만을 주형과 함께 만끽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넘쳤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깜짝 놀라겠지. 생각만 해도 기뻤다. 재연은 리본이 달린 곰인형의 손을 잡고 살랑거렸다. 그렇게 라테처럼 웃는 그는 평소와는 달리 완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그 순간 진동이 울렸다.
재연은 미간을 푹 찌그러뜨렸다. 순식간에 깨진 환상에 의해 현실로 회귀하자, 모르는 번호가 액정에 떠 있었다. 누구인가 싶어 일단 거절했다. 그러나 겁도 없이 한 번 더 오기에 재연은 일단 받았다.
“여보세요.”
-아, 재연 씨.
“……네.”
임선아. 제 아버지가 한번 만나 보라며 종용했던 여자다. 천주일보 회장의 손녀.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깨달았다. 톡 튀는 밝고 발랄한 목소리가 인상에 남았던 탓이었다. 재연은 그녀의 지분을 이용해야 했기에, 부러 목소리를 따뜻하게 고쳤다.
“무슨 일이시죠?”
-그게, 엄청 예쁜 식물을 샀는데……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요. 겸사겸사 꽃다발도 샀으니 집에 꽂아 두시면…….
선아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재연이 말했다. 이내 차가운 눈길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은색 메탈이 반짝거렸다.
“아, 저는 식물을 키우는 데에는 취미가 없어서. 선아 씨가 키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오늘은 약속 있으세요?
“……지금은 병문안을 가는 길이라서요.”
-어느 병원으로 가세요?
왜 이렇게 끈질길까. 재연은 슬슬 짜증이 났다. 하지만 제 아버지를 생각해 어느 정도만 어울려 주다가 천천히 멀어지는 게 좋을 듯해, 병원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 선아가 아핫, 하고 맑게 웃으며 권했다.
-그러면 저도 잠깐 어울릴 수 있을까요? 제 친구가 거기 레지던트를 하고 있는데, 한번 만나고 싶었거든요. 아! 재연 씨에게도 소개해 드리고 싶고요.
“음……. 의사인 친구분을 함께 만날 시간까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후 약속이 있어요.”
약속은 없었다. 그러나 선아를 보고 싶지 않았고, 그 시간에 주형을 보고 싶어 거짓말을 했다.
-그런가요. 그러면 그냥 병원에서 잠깐 뵈는 건 어떨까요?
나름대로 약혼이 구두로 예정된 사이니 선아도 노력하고 있었다. 재연의 목소리에는 흥미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그럼에도 참았다. 그건 재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손을 떼어내고 싶어 했다. 주형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대충 만나고 보낸 뒤 주형과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사업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제 아버지에게 눈총을 살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하 3층 주차장에서 뵙죠.”
-갑자기 연락했는데 받아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좀 이따 뵙겠습니다.”
재연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간단하고 차가운 미소는 유선상 목소리로도 전해졌다. 재연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는 왜인지 선아가 주형과 제 만남에 끼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조금 싫은 게 아니라 아주 짜증이 났다. 눈을 평소보다 자주 깜박이게 되고, 괜히 바깥을 바라보기 싫어 혀를 차게 되고, 속이 끓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을 일이었던 걸까. 사실 별로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에 쉽게 승낙했는데, 막상 끊고 나니 기분이 안 좋았다.
재연은 재차 주형의 사진을 꺼내 보다가, 덮은 뒤 지갑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오늘은 주형이 제게 먼저 키스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오늘은 조금 더 간절했다.
***
선아와 만나 주형의 병실로 향했다. 주형에게 전화를 해서 곧 병문안을 가겠다고 했더니 주형에게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조심히 오십시오’라고 말한 뒤 끊었다. 왜인지 오늘따라 탐탁하지 않게 느껴지는 목소리라 추궁을 하고 싶었으나 곧 선아를 만나야 하니 참았다.
곰인형도, 주렁주렁한 선물도 모두 놓고 내렸다. 들고 갔다면 주형이 곰인형을 보고 질색을 하며 무슨 애새끼 같은 취향이냐고, 이딴 걸 들고 오면 어쩌냐고 화를 냈을 텐데. 그도 아니라면 생각보다 굉장히 어리고 귀여운 취향을 가지셨네요, 하고 억지로 삐걱삐걱 웃는 모습을 보일지도 몰랐다. 주형의 그런 모습을 미루게 되다니, 굉장히 슬프고 아쉬웠다.
“재연 씨, 그…… 잘 지내셨어요?”
“아, 네. 잘 지냈습니다.”
“그렇구나.”
“왜 그러시죠?”
엘리베이터를 타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잘 지내지 못한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 됐다. 주형에게는 언제나 예쁘고 잘생긴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왠지 조금 피곤해 보이셔서요. 막, 많이는 아니고요! 그냥 조금 차분한 인상이라 그러신 거 같아요.”
“아……, 네. 피곤하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재연이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선아 또한 누구에게나 잘 들이대는 성격이었으나 재연에게는 알 수 없는 벽이 느껴져서 그냥 웃었다.
“네. 아, 참!”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자 선아가 쇼핑백을 건넸다.
“이거, 지금 병문안을 가시는 분께 전해드리려고 샀어요. 예쁘죠?”
“이게 뭐죠? 화분?”
“네. 제가 아까 화분 이야기를 했잖아요. 마침 가게에 있을 때 전화한 거라 하나 더 샀어요. 공기 청정식물로 유명한 거랍니다.”
선아가 보여 준 것은 파릇파릇한 잎이 인상적인 식물이었다. 재연은 그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영 마음에 들지 않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가느다랗게 뜬 뒤 씩 웃었다.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길이 식물과 선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군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재연은 평소에 남에게 늘 이런 식이었다. 주형에게만 몹시 특별한 대우를 하곤 했다.
“화분은 왠지 낭만적인 거 같아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재연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복도가 미워졌다. VIP 병실을 꽁꽁 숨겨 둔 건 가상하고 좋았으나 오늘따라 싫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재연이 싱긋 웃었다. 대답이 괜찮지 않다면 그냥 약혼을 무르고 싶을 것 같다. 다만 함부로 그럴 수 없는 건, 선아와 함께 하기로 한 일이 있어서였다. 제 아버지를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참아야 했다. 재연은 피곤해졌다.
“화분은 사람의 곁에 말없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 물건으로 인해 선물을 준 사람을 쭉 생각하게 되고, 마치 그 사람이 식물의 형태로 내 공간에 잠자고 있는 것 같아요. 노래 중에도 그런 노래가 있잖아요?”
<화분>이라고. 선아가 흠흠, 하고 해맑게 흥얼거렸다. 재연은 감흥 하나 없는 눈길로 그 말을 들었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나서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흥미롭네요.”
흥미롭다는 말은 반은 거짓이었고 반은 참이었다. 선아가 한 말 자체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그녀가 건네는 화분의 의미는 제법 흥미로웠다. 그래서 재연은 그녀가 준 화분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의도로 주는 거라면 주형의 병실에 감히 둘 이유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형의 병실에 도착했다. 주형은 보리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다. 제법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유명한 서양 고전을 읽고 있기에 반가웠다. 재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형.”
“……아, 오셨습니까. 이사님.”
“책 보고 있었어요?”
“네. 병실에 꽂혀 있길래.”
어릴 때 학교 도서관에서 봤던 것 같은 제목이라 꺼내 보았다. 매우 재미있진 않았으나 참고 볼만했다. 주형은 몸을 살포시 일으켰다. 그리고 재연이 데리고 온 여자가 그의 등 뒤에서 빼꼼 나타나는 걸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주형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자의 눈을 보니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절대로 반한 건 아니었고,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예쁘고 젊은 여자. 이목구비가 깔끔하니 귀티가 난다. 걸치고 있는 옷도 우아했다. 현대판 재벌 영애 같다고 해야 할까. 약간 붉은 머리카락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주형은 이런 여자야말로 그의 곁에 있으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덩치도 크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제가 아니라.
“안녕하세요. 저는 임선아라고 해요. 재연 씨랑 소개로 만나게 된 사람인데, 지금은…….”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렇죠?”
재연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불쑥 말을 자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인지라 주형도 선아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선아가 멋쩍게 억지로 웃었다.
“네. 저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요. 참! 이거, 화분인데 선물로 가지고 왔어요. 창가에 두세요.”
“아, 감사합니다. 잘 키우겠습니다.”
주형은 싱긋 웃었다. 재연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깔끔한 미소였다. 그 모습에 재연은 짜증이 불쑥 이는 것을 느꼈다.
눈치 따위는 없고 재연의 관심을 돌릴 생각만 하고 있는 주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아 씨는……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셨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그건 저도 잘…… 하하. 혼담이 몇 번 오가기는 했어요.”
“아아.”
역시 그런 거였나 보다. 아무리 조폭이다, 조폭이다 해도 천국 캐피탈의 모체인 천국은 돈세탁을 한 대기업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으니 정략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왜 이렇게 관계가 조용한가 했더니 윤재연 저놈이 그냥 알려주지 않았던 거였나.
‘그런 걸 무엇 하러 숨기는 건지.’
이렇게 금세 들킬 건데. 주형은 좀스럽게 속으로 욕했다. 왜인지 서운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장한 이 여자가 못내 수상하게 느껴졌다. 분명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첫인상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유도 없이 못 미더웠다.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고 머리도 괜히 아픈 것 같다. 오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아니, 저놈이 와서 그런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윤재연을 만나면 쾌락을 수반한 고통을 겪을 때가 많았으니까. 그래, 노이로제 같은 거다. 주형은 재연을 얼렁뚱땅 그렇게 취급했다.
“그런데 재연 씨가, 저도 재연 씨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니 너무 무겁게 만나지는 말자고 하셔서……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두 분…… 잘 어울리십니다.”
주형은 그들에게 잘 어울린다고 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진심에 없는 말을 하는 건 사회인의 특징이지만 오늘따라 그런 스스로를 버티기 어려웠다.
“그, 그런가요. 하하.”
선아가 매우 경직된 웃음을 보였다. 그렇지만 쑥스럽기는 한 건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반면 재연의 얼굴은 점점 식고 있었다. 차가운 웃음을 짓고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이제 몇 분 봤는데 잘 어울린다니, 형도 입에 발린 말을 너무 잘하는 거 같아요.”
그런 점이 좋지만요. 재연이 선아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그러면서 주형에게 그렇죠? 하고 괜히 말했다. 요염하게 반으로 접혀 있는 눈동자가 마주쳤다. 기다랗고 고운 속눈썹이 부드럽게 휘어 위를 향하고 있었다. 갸륵한 듯 아름다운 모습이 스치자 주형에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다가왔다.
왜 저러지. 왜, 왜 웃지. 어차피 저 여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차라리 주변에서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해 주는 게 편한 거 아니었던가. 뭘 또 잘못한 거지? 주형은 재연이 저렇게 자애롭게 웃을 때면 불안해졌다.
“입, 에 발린 말이라뇨? 진심입니다. 이사님.”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재연이 싱긋 웃으면서 주형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코앞까지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의 향기가 물씬 다가왔다. 오늘은 또 다른 향수를 뿌린 건지 전과 다르게 상큼하고 발랄한 향기가 난다. 묵직한 향이 아니었다. 빨래를 하고 난 뒤의 청량한 향기.
그런 소소한 향기마저 재연과 잘 어울려서 곤란할 때였다. 재연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을 했다.
“선아 씨 바래다주고 올 동안 구멍 풀어 놔요.”
“…….”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 재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던 눈가가 조금 밝아지고, 재연이 배시시 웃었다. 여우처럼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선아를 흘겨 본 뒤 주형을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능숙함이 묻어났다.
느른함에 차 있던 주형의 얼굴이 짓무른 복숭아처럼 변했다.
“형, 선아 씨 지인을 잠시 뵙기로 했어요.”
선아를 손으로 가리키며 밝게 웃어 보였다. 주형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런 그의 손과 선아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네? 아까는 안 된다고…….”
“생각해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 뵙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죠?”
“저야 좋죠!”
선아가 밝은 얼굴로 끄덕였다. 재연이 아까까지만 해도 어두워 보이다가 갑자기 밝아졌으니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연애 감정은 전혀 없지만, 일단 만나야 하는 사람이니만큼 선아도 재연을 꽤 신경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잠시 인사하고 올게요. 다시 올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고요.”
“전혀 안 아쉽습니다.”
주형이 앙칼지게 대답했다. 구멍을 풀어 놓으라느니 뭐니 그런 말을 하니 괜히 심란해졌다.
“하하. 형, 왜 이렇게 토라졌어요. 선물 안 사와서 그래요?”
재연은 주형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윽고 끈적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슬쩍 쓰다듬었다. 아프게 억누르는 등의 행위가 가해질까 겁을 먹었는데,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의심을 풀 순 없었다.
“…….”
주형은 눈을 부라리며 슬쩍 흘기고는, 선아에게는 부드럽게 눈을 한 채 말을 건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식물도 감사합니다.”
“네! 저도 반가웠어요. 재연 씨 지인분은 처음 봬서요.”
“아…….”
처음이라는 건가. 재연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심란해졌다. 좋아하는 형이라든가 그런 낯 간지러운 호칭을 빼면 뭐가 남는지 궁금해졌다. 재연의 진심이 궁금했다. 그가 만들어낸 웃음을 지으며 마수와도 같은 손길을 뻗을 때 말고, 나체로 정신없이 저를 몰아붙일 때 가지는 감정 말이다. 날것 그 자체의 상태일 때.
그렇게 생각하다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남의 눈에는 그저 굳건하고 듬직한 청년의 웃음일 뿐이었다.
“다음에 또 뵈어요. 얼른 나으시길 바랄게요.”
“네. 감사합니다.”
선아의 미소는 재연과는 달리 겉과 속이 일치하게 맑은 느낌이었다. 주형은 훈훈한 청년과의 만남에 기뻤던 듯 웃었다. 아마 재연의 또래겠지. 재연이 스물하나이니, 그 언저리일 거다.
그나저나 부자들은 저렇게나 어린 나이에도 결혼을 생각해서 만남을 가지는 건가. 뭐가 되었든 제 세상과는 멀어 보여서 마음이 오히려 편했다. 저러면 윤재연도 금세 포기하겠지.
주형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자 재연이 그런 주형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선아에게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 뒤 1분만 기다리는 말을 남겼다.
한편 둘이 함께 사라질 줄 알았던 주형은 의아한 눈치였다. 재연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나가지 않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더니 진짜로 뒤늦게 무언가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문을 닫고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형.”
“네, 이사님.”
“…….”
주형을 빤히 바라보던 재연이 이불을 갑자기 확 헤쳤다. 이윽고 무방비하게 있던 주형의 사타구니 쪽으로 손을 푹 집어넣었다. 금세 잡히는 좆을 아프도록 쥔 다음에는 거칠게 문질렀다. 헉, 하고 놀란 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주형의 좆이 딱딱해졌다.
이 감각이었다. 재연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 주형의 눈을 흘긴 뒤 재연이 달뜬 눈길로 말했다. 코앞에서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은밀하고 낮았다. 숨결이 피부를 가득 덮도록 그는 귀를 녹일 듯 말했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어요.”
“윽, 이거 놓으십, 시오.”
“자지 똑바로 세우고. 싸면 안 돼요.”
나중에 검사할 거니까. 그렇게 말한 재연이 헐거운 병원복을 확 잡아 벗겼다. 이윽고 품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재연이 꺼낸 것은 기다란 핀이었다. 끝에는 하트 모양으로 된 사정 지연 핀. 주형은 아연실색해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그의 가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연 또한 다가오고 있어서 도저히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고 링거가 엉망이 되어 의사가 오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분명 의사를 부르게 된다면 재연은 이보다 더한 꼴을 만들어 둘 테니까. 여간 악한 놈이 아니다. 주형은 잔뜩 경계했다. 일단 그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삐죽 섰다.
“그딴 건 어디서 난 건데, 씨발! 저리 치워요!”
“하나도 안 아파요.”
재연이 달곰하게 속삭이며 주형의 좆을 세게 꽉 억눌러 잡았다. 귀두를 문질거리자 주형이 허리를 꿈틀거렸다. 그러면서도 기세를 약하게 한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핀이 귀두를 톡 건드렸다.
“아픈 게 문제가 아닌…… 아, 아으.”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안 아파. 병원복 상의가 위로 밀려 올라가 있는 데다가 하의는 골반에 엉거주춤 걸려 있어 엉덩이만 살짝 보이는 상태였는데, 이게 미치도록 꼴려서 곤란했다. 얼른 그의 구멍에 손을 쑤셔 넣고 싶었다. 재연은 그럼에도 주형이 아프지 않도록 핀을 살살 넣고 있었다.
주형의 구멍을 찢어발기고 싶을 정도로 그에게 짜증과 원망이 들었던 데다 질투도 났지만, 결국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에 질투는 필수라고 하니까. 하지만 그냥 질투라기에는 가슴이 활활 타올라서 불편했다.
왜 제게는 그렇게 안 웃어주는 거지. 왜 그 여자와의 관계를 그저 부드럽게 웃으면서 보고만 있지. 불편한 기색 정도는 내비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만약 주형에게 그런 존재가 곁에 있다면 자신은 아주 화가 날 텐데. 애가 탔다. 재연은 꾹 눌러 참으며 주형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저 여자에게 차라리 이 소리를 모두 들려줄까.’
떡 치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듣게 하면 알아서 기겁하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게다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말을 하고 다니지도 못하겠지. 뭐, 말하고 다녀도 상관없지만. 오히려 그렇다면 환영이었다. 그 누구도 제게 같잖은 기대 따위는 걸지 않을 거고, 자신은 주형을 영원히 껴안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재연이 핀을 천천히 안으로 처박아 넣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동안 주형은 흐윽, 하고 울먹거리며 차갑고 이상한 감각에 흐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씨히, 브, 흣.”
“쉿.”
재연은 주형의 귀두를 꾹 눌러 막았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주형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살포시 가리며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아이를 달래고 구슬리듯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재연의 손길은 무서울 정도로 고상했다. 험한 일 따위는 하나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깨끗하고 예쁜 손가락이 공기를 녹이듯 움직이는 게 이상했다.
“밖에, 선아 씨가 있어요.”
“……윽.”
주형은 또 거리감을 느꼈다. 저만 더럽게 좆을 벌떡 세운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기다란 핀이 요도를 천천히 꿰찌르기 시작했다. 스르르 들어오는 차가운 감각과 동시에 주형의 귀두 위에 하트 모양이 맺혔다. 사정 지연을 위한 카테터 끝에 있는 하트 모양 장식 때문이었다. 그 깜찍하고 끔찍한 디자인이 참 재연과 닮아 있어서, 주형은 어안이 벙벙했다.
“형 강간당하는 거 들려주고 싶어요?”
“…….”
“나는 좋지만 형은 아니잖아요.”
미친 새끼. 제정신이 아니다. 주형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애인이니 뭐니 하더니,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물론 이렇게 묻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겠지만 ‘완전 비정상’에서 ‘조금 덜 비정상’이 되었다고 해서 정상이 된 건 아니다.
주형이 험악한 얼굴로 재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재연의 기가 죽을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 이사님도 결혼할 사람한테, 이사님이 남자 후, 장 따먹는 게 취미란 거 들키면……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나름대로 보루였다. 재연이 회사나 집안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남자를 사랑하고 섹스를 한다는 걸 알고도 멀쩡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주형은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면 재연이 뜨끔한 눈치로 슬쩍 손을 뗄지도…….
“나는 괜찮아요.”
“무, 뭐?”
아니네, 씨발. 너무 나른한 대답에 놀라 말까지 더듬거린 주형은 왜 이렇게 세상이 커졌는지, 편견이 없어졌는지 갑자기 원망했다. 조금만 더 좁고 보수적이어도 괜찮지 않나. 주형은 어느새 머리로 피가 쏠리다 못해 어지러워졌다. 성감이 뇌를 가득 채웠다.
“나는 형만 있으면 돼요.”
재연이 속살거렸다. 분명 아까 강간이니 뭐니 말할 때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는데 유난히 이 말을 할 때의 목소리는 자그마했다. 비밀 기지에서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뭇잎조차 둘의 존재를 모르도록 귀에다 대고 혀를 소곤소곤 내미는 것만 같았다. 재연의 숨결이 천천히 덮쳐오자 이상하도록 몸이 떨렸다.
주형은 드디어 제가 미쳤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럴 순 없다.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그래. 여기서 이상한 건 제가 아니라 재연인 거다.
“알면서.”
주형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내 씨발, 하고 또 욕을 읊조렸다. 굵직한 자지에 꽂힌 핀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형은 작게 움찔거리기만 해도 이상한 감각을 주는 핀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재연이 성기를 은근히 주무르고 있어 쾌감이 밀려왔다. 뱃가죽이 자르르 떨렸다.
“무슨, 이런 이상한…… 걸, 갑자기……. 미친, 새끼. 하으, 윽.”
“그러니까 금방 오겠다는 거 아니에요. 이런 모습을 들키면 다른 새끼들이 형 따먹을 수도 있잖아.”
주형의 허벅지는 너무 탐스럽고 탄탄해서 누구라도 눈에 보이기만 하면 분명 움켜쥐고 싶을 게 틀림없었다. 재연은 그리 확신했다. 근육이 잘 붙어 있는 허벅다리를 아프도록 짓누를 수 있는 건 저뿐이었다. 이 다리가 움찔대며 사이를 벌리고 좆을 세우는 것도 제 앞에서만이어야 했다. 재연이 주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흐으…….”
“잘 기다릴 수 있죠?”
형은 좋은 형이니까. 재연은 되도 않는 말로 주형을 구슬렸다. 주형은 후들거리는 안쪽 허벅지를 겨우 진정시키며 숨을 씨근거렸다. 이윽고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씨발…….”
울먹거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재연이 손을 깨끗하게 놓아주었다. 하지만 액이 조금 묻어 나와 있어서, 그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았다. 약간 끈덕지긴 하지만 어차피 몇 분 뒤 다녀와서 섹스를 할 테니 상관없었다.
“예쁘게 기다리고 있으면 상 줄게요.”
“씹, 새끼. 존나 변태 같은 게……! 상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주형은 화가 난 맹수처럼 그르렁거렸다. 흰자위가 잔뜩 드러난 눈동자에는 핏줄이 듬성듬성 드러났다. 목에도 선명하게 떠 있는 근육과 뼈가 늠름했다.
“싫어요? 풀어 주지 말까?”
재연이 짐짓 놀란 티를 냈다. 어머, 하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고는 순진하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짜증이 잔뜩 일었다.
“……씨발, 그 말 할 시간에 그냥 다녀오십시오! 지금 지랄 난 거 풀어 줄 거 아니면!”
“하하.”
재연이 입꼬리를 올린 채 웃었다. 이윽고 손으로 입술을 슬쩍 가렸다. 커다랗고 시원하게 쭉 뻗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은 반달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휘황하게 위를 향하는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거렸다.
“아주 잘 어울려요.”
그 말을 남긴 뒤 재연이 누가 봐도 유혹하려고 작정한 모양새로 윙크를 했다. 주형은 그 윙크를 무시하며 주먹으로 침대를 쾅 내리쳤다. 그렇게 몸을 꿈틀거리자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반응했다. 그렇게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기다렸다.
카테터를 살짝 빼 볼까 하는 생각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가도 그가 검사해 볼 거란 말을 했던 걸 떠올리고, 흠칫 손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주저하던 주형은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며 버티기로 했다. 한 번 사정을 한 뒤 토정을 하면 정액의 색이나 양이 차이가 나니, 저 변태 새끼는 분명 알아볼 거다. 주형은 재연을 얼추 파악하고 있었다.
‘무슨 마시멜로 실험도 아니고.’
지금 준 마시멜로 하나를 먹지 않고 참으면 나중에 하나 더 주겠다는 그 실험 말이다. 주형은 실험을 당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고 한탄하며 짜증과 고통, 쾌락으로 얼룩진 신음을 냈다. 지친 맹수가 숨을 내쉬는 듯 묵직하고 거친 음이었다.
지친 그의 안색을 따라, 주형이 코를 살짝 어루만졌다. 뾰족하고 우월한 콧대를 조금 만지작거리던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애써 이불을 덮었다가, 헤쳤다가 했다. 붕대를 감지 않고 있는 발가락도 연신 귀엽게 꼬물거렸다.
열이 올라서 참기 어려웠다. 주형은 눈을 푹 감고 애썼다.
*^**
재연은 응어리져 있던 기분이 조금 풀린 걸 느꼈다. 주형과 즐거운 만담을 했더니 좀 나아졌다. 하지만 선아가 소개해 주기로 했던 인간을 만나니 왜인지 기분이 더러워졌다. 한창 예쁠 주형을 두고 와서 그런 걸까.
“그래서, 둘은 무슨 사이에요? 분위기가 심상하지 않은데?”
대한민국은 이래서 좆같다. 남자와 여자를 붙여 놓으면 꼭 얼굴을 아는 사이가 아니라 속살까지 다 아는 사이일 거라 생각하지. 아니면 속살을 곧 알게 될지도 모르는 사이. 재연은 그런 시선이 넌더리가 났다. 주형과 제 사이도 그렇게 좀 봐 줬으면 좋으련만.
‘정작 형이랑은 혼인 신고 빼고 다 했는데.’
정말 좆같군. 재연은 부러 속으로 강조했다. 그러고 있으니 선아가 곤혹에 처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대놓고 싫어하지는 못하겠는지 어어, 하고 장난스레 웃었다.
“선배, 그냥 아는 사이라니까요.”
“이런 데까지 온 걸 보면 아닌데?”
“대학병원이 병원이지, 뭘 그래요. 그렇죠?”
선아가 슬쩍 재연의 팔을 톡톡 쳤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듯 입꼬리가 이상하게 휘어 있었다. 선아 또한 재연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네. 아무 사이 아닙니다.”
재연이 싱긋 웃으며 선배라는 작자를 바라봤다.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다고 하는 놈이었다. 생각보다 말이 많아 그냥 입을 찢어버리고 주형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병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좆이 바짝 선 게 조금만 만져 주면 자지러질 텐데. 그 절경을 두고 오다니, 재연은 자신의 참을성도 매우 늘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이는 짜증을 참을 수 없을 듯했다.
“알……겠어요. 하하, 표정 풀어요.”
“저는 원래 이렇습니다. 혹시 이상한가요?”
선아가 소개해 준 레지던트를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아 서늘한 감각이 물씬 다가왔다. 미묘하게 맹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재연을 앞에 두고, 레지던트는 외모에 대한 칭찬으로 대화를 얼추 갈무리했다.
“아, 그렇구나. 엄청 미남이시네.”
“네.”
재연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 그냥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고맙습니다, 하고 얕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이 이어지기 어렵게 말을 툭툭 끊어내자 선배라는 놈도 못 버티겠던지 슬쩍 시계를 바라봤다.
“아, 나 곧 교수님 뵈러 가야 해. 선아는? 좀 더 있다가 갈 거야?”
“아니, 나도 이제 가 보려고. 재연 씨는요?”
“저는 병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까 돌아가겠다고 말했으니까요.”
주형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재연은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하하, 엄청 돈독한 사이신가 봐요.”
“그래 보이나요?”
“네. 뭐랄까……. 재연 씨가 그분을 참 좋아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아.”
재연이 드물게 공감하는 듯 늘어진 신음을 냈다. 입술을 살포시 벌린 채 긍정하는 그의 속눈썹이 우아하게 아래로 깔렸다. 음흉하게 보이기도 하고 고결하게 보이기도 하는 입꼬리가 휘었다. 선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좋아하죠.”
많이. 그렇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재연과 눈이 마주쳤다. 선아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잠시 시달렸다.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들뜬 얼굴이었다. 주형을 생각하며 그런 얼굴을 한다니. 선아는 재연의 사생활 따위는 하나도 모르지만 그 둘이 범상한 관계에 놓인 것 같지는 않다고 단정 짓기로 했다.
레지던트가 지내는 사무실을 나온 뒤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란히 섰다. 선아는 일부러 재연이 VIP 병실로 올라간다는 걸 의식하고 상향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열리자 타지 않고 손짓했다.
“그분이 기다리실 거 같은데, 얼른 가 보세요! 저는 주차장으로 가거든요.”
“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네. 재연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재연은 선아와 헤어질 때 처음으로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선아 또한 그걸 알고 있어서, 제 단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
재연이 뻔뻔하게 웃으며 선아의 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3분이 지났을 때까지도 주형은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꾸역꾸역 다리를 오므리고 이불까지 덮은 뒤 진정하려고 숨도 고르게 쉬었으나, 조금 달싹이기만 하면 오는 자극 때문에 힘들었다. 오히려 이불을 덮으니 답답했다. 살짝이라도 살갗에 쓸리는 게 이토록 강한 자극이 될 줄은 몰랐기에, 주형은 그냥 이불을 확 헤치고 말았다.
“으으…….”
자지가 선 채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귀두를 문지르며 수음을 해주는 재연의 얼굴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그랬던 놈이 이제는 싸지 말라고 지랄을 하다니. 주형은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중간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웠다. 간질간질하고 꽉 죄는 듯한 느낌이 불편했다. 하지만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막상 해방될 때를 생각하면 아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싸고 싶었다. 정액이든 오줌이든, 좆 끝에서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 그냥 얼른 내보내고 싶었다. 주형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하트 모양 핀을 바라봤다. 다리를 오므린 채 사타구니를 바르르 떨었다. 구멍이라도 손으로 만질까. 아니, 구멍을 만져서 해결이 될 리가 없다. 뒤를 건드려서 사정하는 건 그냥 AV 속의 이야기니까. 주형은 그런 생각부터 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게다가 윤재연 그 새끼가 검사를 한다고 했다. 그 미친놈은 진짜로 토정을 한 양을 보고 의사처럼 해소한 지 얼마 안 되었네요, 하고 웃으며 말할지도 모른다.
그게 들키면…… 이보다 더한 꼴을 당할 거다. 주형은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절대로 안 된다. 절대! 주형은 끄으, 하고 신음하며 참았다. 그러고도 참기가 어려워 자꾸만 아래로 손이 가려는 걸 중간중간 멈추었다. 손가락을 휘어 침대 시트를 꾹 잡고서는 재연의 욕을 했다.
변태 같은 놈. 살다 살다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주형은 아까 재연이 제 좆을 잡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던 것을 무심코 떠올렸다. 그러자 다른 생각을 하기도 어렵게 머릿속에 재연이 가득 찼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재연의 흔적밖에 없었다. 이 공간에서 오롯하게 제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병원복은 병원의 것이고, 이 병원마저도 재연이 데려다준 곳이다.
“미친놈…….”
제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재연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주형은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
‘형은 내 좆집이잖아요.’
그 말이 떠오르자 괜히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성기를 잇고 있는 뱃가죽의 근육이 꿈틀댔다. 주형은 핏줄이 보이도록 험하게 화나 있는 물건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가지고 갔다. 조금만. 핀을 조금만이라도 빼고 싶다. 주형은 하트 모양 손잡이를 잡았다. 이 얄팍한 카테터를 산산조각 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열쇠도 없는데, 그냥 그럴까. 하고 도망을 가면…… 그래도, 하루 정도는 버티지 않을까. 이 주렁주렁한 링거를 빼면.
그렇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시발,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비장하게 각을 잡고 있는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을 때였다.
드르륵, 문이 옆으로 조용히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누구나 예상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잘 있었어요?”
나지막하고 유려한 목소리였다. 다정하게 짙게 깔려 있는 맑은 음성. 누구나 가뭄의 단비처럼 느낄 목소리겠지만, 주형에게는 아니었다. 그에게 재연의 목소리는 그저 고인 빗물, 혹은 흙탕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걸 끼얹어 저만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
“……이, 사님.”
“으응.”
재연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주형은 멍한 얼굴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재연은 아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분위기가 달랐다. 아까보다 조금 부드러웠으나 이상하게도 서느런 감각이 있어 절로 긴장이 됐다. 주형은 몰래 값비싼 도자기를 깨 두고 부모님께 숨기다 들킨 아이가 된 것처럼 두려움을 느꼈다.
왜일까. 여섯 살이나 어린 새끼인데. 그냥 벌이라고 해도 섹스 몇 번이 다일 텐데. 그러다 어차피 질려서 버려질…… 것 아닌가. 그럼 그냥 대충 맞추어 줘도 되는 건데. 주형은 이상할 만큼 과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있으니 여유롭게 탄성을 내던 재연이 좆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흉악하게 핏줄까지 서 있는 발기한 좆이 그의 말간 얼굴 앞에 닿자 알 수 없는 수치심이 일었다.
“뭐 하려고 했어요?”
이 예쁜 손으로. 재연이 그리 말하며 주형의 손을 확 휘어잡았다. 힘이 크게 들어가 있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거절할 수 없었다. 주형은 이미 제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무심결에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목으로는 아쉬워요?”
재연이 빤히 그 손길을 바라봤다. 투박한 손끝이 둥그렇게 말려 있었다. 분명 자지 가까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핀을 뽑으려고 했다. 재연은 모두 간파하고, 그냥 손목을 다시 지분거렸다. 그러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낀 주형이 슥 손을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응, 그런데 의심스러워서.”
주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뭘 말하면 그가 의심을 풀까. 주형은 재연이 스르르 제 몸 위에 올라타는 것을 느꼈다. 묵직한 몸이 겹쳐졌다.
“내가 의부증이 있다고 했잖아요.”
왜 형은 이렇게 말을 안 들어줄까. 재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이 자못 야릇했다.
“손발 모두 다 묶어 놓고 섹스하고 싶어요?”
“아닙니다! 제가 아까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형은 되려 화를 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입술을 삐죽거리는 게 보였다. 재연은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의심과 화를 풀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형이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도 귀여웠고, 눈썹이 갈매기처럼 험하게 올라간 모양새인 것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런 얼굴은 처음이라 그런 걸까.
“그럼요?”
주형의 몸에 천천히 올라탔다. 구두를 벗었다. 톡, 톡 가지런하게 벗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데구루루 소심하게 뒹군 구두를 뒤로 하고, 재연은 침대 위로 스르르 올라왔다. 그리고 코트를 느긋하게 벗는 손길이 금세 지나갔다. 그렇게 주형이 당혹스러운 마음을 안고 계속 말을 지껄일 때였다.
“아니, 저는! 그냥, 있었……습니다. 그런, 데.”
“응?”
하얀색 와이셔츠와 베스트가 돋보이는 옷을 입은 재연이 등을 푹 수그렸다. 그러고 있으니 주형이 더욱 민망해졌다. 얼굴이 붉어져서 토마토처럼 익어 버렸다.
“얼굴 좀 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더럽게, 좆에다 무슨…….”
“하지만 형도 입으로 내 자지 받았잖아요.”
“그거랑 이건…….”
곤혹에 처했다. 주형은 제 성기 가까이 숨결이 닿는 데에 또 당황했다. 핀을 깊이 꽂고 있더니 이런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게 되어 곤란했다. 재연은 그런 마음을 분명 알고 이러고 있는 거겠지. 납작하게 숙인 채 허벅지를 슬금슬금 더듬는 손만 봐도 음흉했다.
“왜 달라요?”
“아니, 당연히 다른 거 아닙니까.”
재연과 말하면 이런 게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걸 같다고 해 버리니까. 물론 같은 펠라지만……, 아니, 애초에 그건 저놈이 시켜서 한 거고 이건 시키지도 않은 건데 갑자기 하는 거니까 다른 거지! 주형은 또 재연에게 휘말릴 뻔했다는 걸 알고 입을 우물거렸다.
“형이랑 나는 애인 사이인데. 애인 사이에 자지 좀 빨아 줄 수도 있는 거지.”
응? 재연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한 뒤 이내 좆을 한 손에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내숭이라도 피울 심산인지 별로 길지도 않은 앞머리를 살짝 뒤로 넘겼다. 그러자 훤하고 봉긋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 뽀얗고 아름다운 피부 결을 감상하기도 잠시였다.
“으, 윽!”
재연이 혀를 내밀어 주형의 좆을 핥았다. 이윽고 두 입술로 문 채로 쪽 빨아당기자 주형의 허리가 팍 튀었다. 침대를 쾅 내리치는 성난 주먹이 주형의 상태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연이 엷게 웃으며 그의 귀두를 둘러 핥았다. 요도에 핀이 꽂혀 있어 위에서 완전히 품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를 돌리며 요사스럽게 훑어 주었다. 그럼에도 주형의 반응은 꽤 볼만했다.
재연은 그렇게 아래서 주형의 얼굴을 바라봤다. 굵직한 선이 요동친다. 괴로움과 흥분으로 물들더니 이내 홍조까지 띠고 수줍게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이 너무 야해서 자못 만족스러웠다.
남의 자지 따위는 빨 생각이 없었으나 주형의 이런 모습이라면 기꺼이 봉사해 줄 의향이 있었다. 이런 얼굴은 사진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데. 재연은 나중에 빨게 되면 주형의 사진을 찍어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좆을 다시 만지작거리며 혀를 크게 내밀었다. 뱀처럼 길게 내밀어 기둥을 쓸자 주형의 자지에 재연의 돌기가 맞붙었다. 타액이 얽히는 소리와 동시에 핀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주형의 좆은 이미 잔뜩 흥분해 있었다.
“정말 안 만졌나, 봐요.”
“윽…… 으, 그만.”
“좆이 딱딱해요. 아까처럼.”
주형이 나름대로 제 말을 잘 듣고 있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재연은 주형이 제 강아지처럼 따르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얼른 빼, 십시오. 검사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형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흘렀다. 강직한 어깨를 늘어뜨린 그가 커다란 베개에 등을 묻고 뱃가죽을 들썩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 재연은 주형이 원망스러웠다. 주형은 언제나 제게 참으라고만 한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참으라고. 너무나도 과한 부탁에 재연은 그가 미웠다.
“안 돼요.”
“씹, 왜!”
“더 급한 게 생겼으니까.”
재연은 주형의 허벅지 위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주형의 몸을 여전히 억누른 채 기다란 팔을 뻗어 베드 테이블에 손을 댔다. 서랍을 열자 병원에 있을 만한 물건으로는 상상도 안 될 것이 나왔다. 젤. 주형은 피부에 바르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섹스를 할 때 사용하는 그 물건이라는 걸 자각하고는 딸꾹질까지 했다. 그러고는 재연을 바라보며 아연실색해 입을 벌렸다.
“형이 하고 싶어 할 거 같아서 미리 준비했어요.”
주형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젤을 쭉 짰다. 넉넉할 만큼 손가락에 묻힌 뒤에는 언질도 없이 구멍에 쑥 처넣었다. 회음을 부드럽게 한 번 쓸자 주형이 몸을 파드득 떨었다. 그러고 있으니 주형에게서는 역시나 반항기 어린 말이 들려왔다.
“전 그딴 말 한 적 없습니다. 이, 이거부터 빨리……! 윽!”
사람을 미치게 하는 핀이나 제거해 주었으면 좋겠다. 주형은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 있으니 구멍을 쑤시던 손가락이 안을 급하게 침범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며 안을 찢을 듯 쑤시는 통에 주형의 입이 꽉 다물렸다.
“형.”
이윽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뭉뚝한 손가락을 확 빼버렸다. 주형의 자지가 끄덕거리고, 그는 입술에서 야한 숨을 뱉었다. 학, 하고 단말마처럼 들리는 신음 때문인지 재연의 좆도 뻐근해졌다. 주형은 다리를 벌린 채 자신의 위에 올라타고 있는 그의 살 기둥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탄식했다.
“보채지 말아요.”
주형의 턱을 꽉 잡았다. 구멍을 쑤셨던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압박했다. 살이 짓눌리고 입술이 톡 튀어나올 정도로 억누르고 있으니 주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하기 어려운지 뱃가죽이 연신 들쑥날쑥 올라갔다.
“내 우선순위에 따라요. 형은 지금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으, 흣.”
“자꾸 섭섭하게 하면 내가 실망할 것 같아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처연하게 흔들렸다. 주형은 가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고는 했다. 재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밉고, 사랑스러웠다. 키스는 언제쯤 해 줄까. 저렇게 사랑스러운 이목구비를 가진 그가 제게 먼저 다가오는 꿈을 꾼 지도 벌써 이천 일이 훨씬 넘었다. 처음은 그토록 유의미했다.
이제껏 주형을 제외하고 재연의 눈길은 끈 사람은 서넛 정도 지나갔지만 모두 다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도 모두 주형의 성격이나 외모를 닮아 있었다. 어릴 적 만난 영향이 커서, 재연은 이상형을 주형으로 꼽게 된 것이다.
붙잡고 나니 재연은 주형을 더욱더 놓치기 싫어졌다. 그래서 주형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그래도 형 아랫입은 절대로 날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1초 정도 바라본 뒤에는 눈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질척거리는 액이 조금 묻어 있던 뺨이 움찔거렸다.
주형은 지금 제가 누구의 혀를 받아 내는지 분간이 안 되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을 뜨자 고결한 눈두덩이가 움찔거리고 있다. 처음인 건지 속도도 느릿했다.
하지만 흥분할 땐 갑자기 휘젓고 만다. 제멋대로 제 기분에 따라 움직이며 사랑을 갈구하는 재연이었다. 주형은 눈두덩만 보아도, 혀를 느끼기만 해도 재연인지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짓을 할 놈은 대한민국에 이 새끼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입술을 살짝 떼고 숨을 골랐다. 1초도 안 됐는데 재연이 다시 입을 크게 벌려 주형의 입술을 먹었다. 쪼옥 빨아들인 뒤에는 그 작은 틈도 아쉽다는 듯 다시 혀를 밀어 넣었다. 잇새를 틈틈이 쓸자 단내가 가득 풍겨왔다. 재연의 향수와 섞이자 싱그럽게 느껴졌다. 주형에게서는 어떠한 향도 나지 않았으나, 그 특유의 살냄새가 재연을 흥분하게 했다. 재연은 주형이 가지고 있는 엷은 향기마저도 사랑했다.
어릴 때는 어떤 남자-아마 주형의 아버지일 거다- 땀 냄새가 가득한 집안 냄새가 좋았고, 지금은 주형이 품고 있는 따뜻한 향기가 좋았다.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코를 푹 묻으면 빠져들어 갈 듯 다정한 향기. 주형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재연은 주형과 처음으로 혀를 얽으며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탄탄하고 부드러운 가슴이 마음에 들었다. 젖꼭지를 톡 튕기며 나쁜 손버릇을 자랑하니 주형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으, 읏.”
놀란 주형 때문에 재연의 혀가 아주 얕게 씹혔다. 아프진 않았다. 애교처럼 느껴져서 더 좋았다. 재연은 주형에게서 입을 떼어 내며 금세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윽고 다시 구멍을 탐하듯 손가락을 넣었다.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손가락의 감각이 이제는 불편하지 않은지 주형이 억눌린 신음을 냈다. 그러면서도 윽, 윽, 하고 끊어진 소리를 흘렸다. 요도가 막혀 있어 미칠 듯 억눌린 성감이 주형의 몸에 고였다. 근육통처럼 배꼽에 뭉쳐 있는 자극이 주형의 허리를 뒤틀리게 했다. 엉덩이를 시트에 대고 살살 문지르는 모습이 야살스러웠다.
“하아, 씨발…….”
“윽, 흐으…… 으.”
“형이 이러니까 가만히 못 있는 거예요.”
때가 되면 데리고 오자고 생각하면서도 포기하려고 할 때도 있었는데, 그건 모두 헛된 생각이었다. 주형이 이렇게나 사랑스럽게 몸부림치는 걸 알고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재연은 주형이 아까처럼 미운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듯 기뻐졌다.
“형은 나랑 어울려요.”
주형은 이렇게 황홀하게 잘 만들어진 시궁창에서 저와 붙어먹는 게 잘 어울렸다. 야한 짓을 미친 사람처럼 하고, 가만히 붙어만 있어도 얼굴을 붉히고, 사랑을 속삭이면 잠깐 당황하고 마는, 그런 나락 같은 연애.
재연은 주형과 그런 연애담을 나누고 싶었다. 수렁에 빠지더라도 모든 게 순조롭다고 할 수 있고, 둘만이 세상에 남겨진 듯 서로를 바라보면 다정하게 타오르는 것. 재연은 주형과 재회한 뒤로 줄곧 그런 상태였다.
재연이 손가락으로 범하고 있던 구멍을 쿡 찔렀다. 그러자 주형이 해결할 수 없는 성감에 또 발가락을 안으로 말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니 발목도 아릿하게 아팠다. 손이 빠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쾌락에 다리를 떨고 있자, 재연이 벨트를 풀었다. 하의를 전부 벗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골반에 건 채 자지를 드러냈다.
“그런, 여자가 아니라. 난 형이랑 어울린다고.”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처럼 말했다. 이미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재연이 흥분한 채 주형의 구멍을 자지로 문지르고 있었다. 콘돔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재연은 주형의 배가 제 정액으로 부푸는 것을 보고 싶었다. 가득 채우고 비운 다음, 주르륵 흐를 정도로 또 채우고 싶었다. 재연은 아까 주형이 한 말을 떠올릴 때면 공허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무어라도 채우고 싶었다. 그러면 이 외로운 성애가 예쁘게 얼룩질 수 있을 거라 느꼈다.
한편 주형은 그런 그의 구애가 못 미덥고 어려웠다. 재연이 밉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렇게 제게 들러붙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개소리하네, 씨, 발…….”
그 걸고 낮은 목소리에 재연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어떠한 사정도 봐주지 않고 자지를 처넣었다.
“악! 흐, 으…… 아, 파. 아프, 흣!”
“벌려요.”
“아, 프다고. 못, 아니, 찢어져! 시, 흐으……!”
욕을 하다 말고 또 구멍을 꾸역꾸역 벌리는 통에 말이 끊겼다. 그렇게 저항하자 재연이 주형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쥐고 있으니 주형의 몸에 평소보다 더한 긴장이 깃들었다.
“벌리라고, 씨발. 왜요, 싫어?”
주형이 고개를 계속 저었다. 도대체 이 막무가내인 섹스는 언제쯤 고쳐질는지 감도 안 왔다. 주형은 앞도 뒤도 모두 막힌 상태에 기함하고 말았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미칠 듯 끙끙거리자 재연이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핥아서 녹일 듯 부드럽고 진득한 감상을 일으키는 야한 숨결이었다.
“창부처럼 아랫입 벌리겠다고 한 게 누구인데 고개를 저어요, 응? 씨발……, 아랫입은 지금 내 자지가 좋아서 미치겠다는데.”
“흐, 으…… 그, 건 네 착각이고!”
“그럼 이 좆 고개 든 거나, 좀 정리하고 말하든가요.”
재연이 주형의 좆을 확 휘어잡았다. 꾹 억누르자 카테터가 꿈틀거렸다. 주형은 헉, 하고 입술을 크게 벌렸다. 평소와는 달랐다. 이해할 수 없게도 재연은 화가 나 있는 듯했다.
“형은, 가만히 보면…… 배은망덕한 거 같아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면서도 질척거리는 좆을 쥐고 안으로 천천히 허리를 들이밀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이미 얼추 길들여진 구멍은 아주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아니, 메말라 있었으니 사실상 찢기고 있었다는 게 맞았다.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주형은 ‘찢어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기함하고 있었다.
“형이 뒹구는 시궁창에서 꺼내 주려고 하는 게 누구인데, 왜 나한테 이 지랄을 떨지?”
사실 재연도 알고 있었다. 주형은 전보다 고분고분했다. 그리고 주형이 하는 말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왜, 제게 사랑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가. 어떻게 감히 선아에게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나. 그것도 제 앞에서. 그리, 예쁘고 잘생기게 웃으면서.
씨발, 누굴 꼬시려고. 재연은 제 아래서 할딱거리고 있는 주형을 더욱 억눌렀다.
“하, 하아.”
“좆병신 새끼 하나 거둬서 이렇게 자지도 박아 주고, 입도 예뻐해 주는데.”
그뿐인가. 주형이 거부하고 있지만 그에게 모든 걸 안겨줄 자신이 있었다. 그가 한마디만 하면 벙글거리면서 따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주형이 전부 거부하니 도리가 없다. 속상했다. 재연은 제가 바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실망하다 못해 이제는 어린 티를 내고 말았다. 마음이 급했다.
“형은 정말 내 좆집 외에는 역할이 없나 봐요.”
연기도 못하고, 펠라도 못하고, 튼튼하지도 않고. 재연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계속 지껄였다. 왜인지 심사가 뒤틀렸다. 내내 속상했던 마음이 계속 응어리져 있었다. 풀리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도 해결되지 않을 듯 보였다. 주형이 고분고분해져도 이 마음은 해소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막막했다.
‘왜 날 사랑해주지 않는 거야.’
그냥 사랑해줘. 그냥……. 그러면 예전의 실수도, 어쩌면 있을 수 있는 오해도 모두 잊을 수 있어. 재연은 여전히 아주 예전에 머무른 채 주형을 사랑하고 있었다. 행동은 어른이었지만 마음은 여섯 살이었던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어제는 밤늦게 들어와서는 제대로 무엇 하나도 말해주지 않고, 방금은 선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형을 보니 속이 탔다. 한 걸음 다가가면 열 걸음이나 도망가 버리는 주형의 앞에서는 사랑해 달라는 구걸마저도 아깝지 않았다.
재연은 주형의 구멍을 헤집으며 한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쾌락이 밀려왔다. 통통한 살갗을 자지로 쑤시니 꽉 조이는 감각은 여전히 좋았다. 그러나 이유도 알 수 없게 또 기분이 더러워졌다.
재연과는 또 다른 이유로 비참해진 주형이 씨발, 하고 욕을 읊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속상한 듯 그가 눈꼬리를 늘인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개, 새끼야. 나도 너 싫어.”
“뭐?”
“나도 너 싫다고, 씨발놈아.”
주형은 정말로 재연이 미워졌다. 저런 말이나 지껄이는 놈한테 가끔 불쌍하다느니, 신경이 쓰인다니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연민이었다. 역시 피아식별 정도는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했는데. 주형은 밀려오는 수치심과 괴로움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새 재연에게 기대를 걸었나 보다.
“……싫으면 날 좋아하려고 노력해야지. 형이 그러겠다고 했잖아.”
애인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를 가졌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는 기준이더라도 재연의 마음속에서는 그랬다. 여섯 살 때부터 주형을 마음속에 품고 곁에서 괜히 꼼지락거리던 꼬마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가 되어도 똑같았다.
“나랑 있기로, 했잖아요. 나랑.”
재연은 설령 주형이 제게 질리더라도, 혹은 제가 주형에게 질리더라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굳건한 믿음이자 행동 수칙이었다. 그럼에도 주형이 제가 싫다고 하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재연은 허리를 푹 튕겼다. 그가 잘 느끼는 부분이 어디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아파, 앗, 하으, 윽.”
“나 사랑해줘요. 사랑한다고 해.”
“갑, 자기, 왜……!”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재연은 왠지 화가 난 것 같은데 그가 왜 화가 난 건지. ‘설마’ 하는 요인이 있긴 했지만 정말 설마, 했을 뿐이지 진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까지 진심일 리가…….
“형이, 처음이에요. 처음이니까, 날 사랑해줘요.”
자신을 속인 것도, 아프게 한 것도, 사랑을 이끌어 낸 것도 주형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재연은 주형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마 그리도 무관심하고 눈치 없는 주형이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재연에게는 상처였다. 선아와 잘 어울린다니. 그런 말은 헛소리나 농담으로도 해서는 안 됐다.
“나랑 있어요……, 그럼, 안 괴롭힐 테니까.”
“거, 짓말.”
재연에 대한 신뢰는 거의 바닥이었다. 주형은 몸을 연신 움찔거리는 중에도 가자미눈을 하고 재연을 흘겼다.
“……맞아요. 그러니까 형이 나랑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해요.”
주형은 말을 하지 않고 버텼다. 고개를 슥 돌리며 외면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형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그런 예쁜 여자를 두고 잘 어울린다고 으스대라니, 아무리 낯짝이 두껍대도 그런 건…….
“얼른.”
“알았어. 알았, 으니까! 씨발, 아파, 아흐, 흐으……윽.”
재연이 종용하며 허리를 튕겼다. 그러고는 안을 거세게 문지르듯 허리를 얕게 돌렸다. 질척거리는 감각과 동시에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움찔거렸다. 주형은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푹 수그려 쇄골에 턱을 문지르는 그는 자못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숨을 씨근덕거리며 구멍을 조였다. 하체에 힘이 들어가고, 자지는 잘릴 것처럼 아팠다.
“……안, 가요? 어디도?”
“내가 어딜, 갑니까. 해외라도 가면…… 분지르러, 찾아올 거면서.”
지욱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출입국 기록이 하나라도 남으면 금세 털어버릴 놈인 것을 알기에 주형은 그가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어도 질린다는 생각보다는 그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재연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 꼬맹이가,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말 중에 무얼 믿으면 좋을지.
“그러면.”
재연이 천천히 좆을 뺐다. 이윽고 숨을 고르며 앞머리를 넘겼다. 열을 냈더니 땀이 조금 흘렀다. 앞머리에 맺힌 땀방울이 한 방울 흘러 주형의 배를 톡 건드렸다. 귀엽고 가벼운 감각이었으나 제 위를 점령한 사내는 전혀 그런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주형은 위압감이 가득한 눈두덩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왜 아까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으읏.”
아까와는 다르게 좆이 느긋한 속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꿈쩍도 않고 안에 버티고 있었다. 주형은 아랫배가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내가 더 낫겠다고, 하지 그랬어요. 그런 말 할 필요 없었잖아요.”
그제야 이해했다. 재연이 왜 화가 난 건지. 주형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겨우 그런 걸로……. 그래서 탄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하, 참.”
“…….”
재연은 순간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주형이 제 마음도 몰라주고 별것도 아닌 걸로 트집을 잡느냐는 눈치로 한숨을 푹 내쉬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형은 또 비수를 꽂았다. 재연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인 말이었다. 냉담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사님은, 그냥 예전에 머물러 계신…… 겁니다. 예전에, 좀 봤다고 그런 거라고요. 누구라도 어릴 때, 추억 정도는 다 있어요. 그걸 착각하면 안 되흣, 흐으……!”
입술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가슴을 사정없이 주무르는 손길에 주형은 무릎을 움찔거리며 손길을 거부했다. 그러나 연신 안을 쑤시고 있는 자지와 은밀한 탐욕을 지닌 그의 손 때문에 다시 몸이 달았다. 몇 초 정도 가만히 있을 때만 해도 숨을 쉴 만했는데, 갑자기 젖꼭지에 손을 대니 또 반응을 시작했다. 주형은 이젠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말을 흘렸다.
“저으, 런 여자가 더 잘, 어울립니다, 이사님은. 예전에 내가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아, 학……, 이젠, 잊고…… 으, 흑! 아, 아으…… 읏!”
잊고 그만 적당히 정리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재연이 자지를 쭉 뺐다가 안으로 퍽 처넣었다. 성감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고 아프게 하기 위해 쑥 넣자 뱃가죽이 훌렁 들렸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숨을 고르고 있자 재연이 자세를 무너뜨렸다. 흉물이 안을 쑤시자 주형의 몸이 녹아내렸다.
“헉.”
“선아, 씨가. 우리 둘이 잘 어울린대요.”
주형을 위에서 꼭 껴안았다. 가슴 사이로 얼굴을 수그리자 재연의 앞머리가 스르르 처졌다.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여자도 아는데, 형은 왜 몰라요?”
그리고 포마드로 고정해 두었던 앞머리가 갈라지고, 그 사이로 눈동자가 보였다. 뺨도, 광대도. 우월한 콧날까지.
“형은…… 왜 형만 몰라요.”
주형은 그의 콧날에 눈물이 한줄기 흘러간 자국이 있음을 알았다. 사막에 생겨난 물줄기처럼 고결하고 눈에 띄었다. 재연 또한 스스로가 울 줄은 몰랐는지 당황했다. 주형을 좋아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좋아하다 못해 섹스를 하다가 울 정도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주 어렸다. 주형과 함께라면 어릴 때에 머물러 있었다.
놀란 건 주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버버, 어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그는 겨우 말을 전했다.
“이, 사님이 왜 웁니까.”
왜 그렇게 소년처럼 예쁘게 울고 지랄인지. 재연은 멍하니 훌쩍거리고 있었다. 우냐고 물으니 콧잔등이 작게 움찔거렸다. 입술을 말아 안으로 넣는 듯 보였다. 주형은 골치가 아팠다. 정말로 피곤하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으며 이런 재연을 마냥 무시하지 못하는 제가 아주 미련하게 느껴졌다.
이런 괴물이, 뭐가 아름답다고. 사랑을 갈구할 줄만 아는 이런 인두겁이 뭐가 좋다고…….
“…….”
“울어도, 씨발, 내가 존나 아픈데.”
주형이 좀스럽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위로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누가 봐도 당하는 건 저인데 재연이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으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주형은 재연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했던 탓이다.
“그치십시오.”
안 어울립니다. 주형이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고는 팔을 아주 조금 내밀었다. 안아 주려고 한 행동인지, 그냥 팔을 앞으로 세우고 싶었는지 알 수도 없게 소심한 손길이었다. 그 모습에 그만 재연은 몸을 푹 숙이고 주형을 껴안았다. 그 손길을 미치도록 기다렸다.
날개뼈 아래로 손을 넣은 채 허리를 푹 튕기자 사이가 한계까지 벌어졌다.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린 주형이 입술을 씹었다. 이윽고 고개를 숙이며 성난 신음을 냈다.
“윽…… 으으.”
“닦아주세요……, 형.”
그가 조금이라도 손을 먼저 뻗어 주었다는 것에 기뻐졌다. 재연은 주형과 있기만 하면 롤러코스터를 타듯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이런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멍청하다는 것도 알지만 참을 수 없었다. 주형과 있으니 이상해졌다.
“왜, 그런 것까지…… 아!”
재연의 움직임이 더욱 격해졌다. 오히려 아까처럼 모진 말을 할 때는 느슨하게 허리를 돌려서 그나마 버틸 만했는데 이번엔 힘들었다. 주형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서 쉬었다. 미칠 듯 허리가 당겨 왔다. 뱃가죽이 튀어나올 것처럼 갑작스러운 고통과 흥분이 밀려왔다. 눈가가 아릿할 정도로 밀려오는 감각이 낯설었다.
“형이 나랑 하고 있으니까……, 형이, 해 줘야죠.”
“흑, 이사, 님, 아…… 아아, 제발, 좀!”
푹, 푹 안을 쑤시는 소리가 더욱 강렬해졌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을 범하던 재연은 배꼽이 살짝 늘어난 모습을 바라보며 그 살갗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여 주형의 가슴을 입으로 물었다. 쪽쪽 빨아들이며 간드러지는 손가락을 놀리니 주형이 하악, 하고 숨을 터뜨렸다.
“하으, 으, 으응……? 앙, 하아.”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에서 요염한 신음이 쭉 흘렀다. 이윽고 몸을 자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근육이 가득한 재연의 등을 겨우 붙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몸을 축 늘어뜨린 뒤에는 경련하듯 그가 몸을 떨고, 이내 눈을 스르르 감으며 얕은 숨을 자꾸만 뱉어냈다. 기절한 사람처럼 목을 뒤로 젖힌 모습에 재연이 얼굴을 들어 보자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하, 하아, 씹…… 흐, 흐응.”
주형의 시야가 혼미했다. 새하얘졌다가, 까매졌다가, 색을 알 수 없는 희한한 점이 시야에 몇 개 생기고, 이윽고 점점 색깔이 돌아왔다. 제 살색, 그리고 재연의 베스트 색깔이. 주형은 그제야 눈이 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미친, 하며 욕했다.
“아…….”
재연은 그렇게 몸을 떨어대는 주형의 모습을 상기했다. 미치도록 야했다. 재연은 아랫도리로 피가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정신을 떠나보내고 허리를 흔들자 주형의 살갗이 다시 뒤틀렸다. 방금 사정 같지도 않은 사정을 했는데 또 안을 건드리니 미칠 것 같았는지, 주형이 타액을 입가로 줄줄 흘리며 흥분했다.
“그, 러니까! 씨발, 내가 풀라고……! 으, 흐윽…….”
계속 욕을 지껄였다. 그러자 재연이 멍한 얼굴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형의 안에 정액을 내보냈다.
“아, 형…….”
정액이 끝도 모르게 계속 나왔다.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자지를 품고 있는 구멍이 약간 넓어졌다. 주형은 자지 때문인지 정액 때문인지 가득 찬 안을 느끼며 흐느꼈다. 둥그렇게 튀어나온 뱃가죽을 보자 감당할 수 없이 수치심이 밀려왔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듯 주형의 눈가가 시뻘게졌다. 눈물 한줄기 흐르는 모습을 본 재연은 오히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형, 너무 귀여워요.”
“씨흐, 흐으, 발……, 빼, 빼라고!”
“으응.”
재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정액을 싸지른 구멍에서 제 자지를 꺼냈다. 그대로 끝이 나나 싶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재연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몇 번 헤집었다. 정액이 끈적하게 묻어 나왔다. 새하얗고 말간 액체가 이토록 가슴을 부풀게 할 줄은 몰랐는지, 재연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카테터를 빼겠다는 생각 따위는 않고 다시 귀두를 구멍 가까이 문질렀다.
스르르 다가오며 또 제 살갗을 뻔뻔하게 문지르는 모습이 이젠 가히 무서웠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안 보이나, 쟤는. 주형은 으으, 하고 울음을 삼켰다. 코끝이 시큰했다. 따가웠다. 음식을 잘못 먹을 때보다 더 아프고 가슴이 아렸다.
“하지, 하, 하윽!”
“형…… 한 번만 더요.”
아까 주형이 한 말 따위는 잠시 잊혔다. 지금 주형의 모습이 너무 야해서. 재연은 그를 부드럽게 안아 주며 속삭였다. 특유의 예쁜 웃음으로 그를 꼬시려 들어도 주형은 저항하기만 했다. 침,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안, 안 됩니다. 안 된다고, 씨발! 이, 이거 빼!”
“이번에는 드라이로 가는 모습 사진 찍어 둘게요. 이번만. 응?”
사진? 주형은 눈물이 쏙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재연의 가슴을 온몸으로 꾹꾹 밀어댔다. 주먹으로 등을 쾅쾅 쳐 보아도 재연의 힘이 너무 세서 잘 밀리지 않았다. 힘으로는 어디 가서 진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뒷구멍에 박힌 것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안 돼, 개새끼야. 안 돼, 안, 흐윽, 으……, 안 된다고…….”
“…….”
말을 하다 말고 난데없이 서러워졌다. 씨발, 이런 이상한 섹스도 지치는데 기구 하나 빼 달라고 울어야 한다니. 기분이 좆같다. 주형은 건장한 몸을 늘어뜨린 채 결국 울음을 제대로 터뜨렸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혀를 푼 채 잉잉거리자 재연의 눈동자가 약간 달라졌다.
“많이 싫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형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지친 데다 울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기세가 약해졌다. 주형은 마치 리트리버처럼 커다랗게 처진 귀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형이 울고 있는데도 너무 귀엽고 좋아서 그런지 다른 생각이 났다.
“빼, 주십시오. 너무…… 아픕니다.”
자지 터질 거 같다고요. 뭉개진 발음이 이어졌다. 재연은 그 모습을 본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알았어요, 하고 말한 뒤에는 천천히 허리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억눌려 있는 좆이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제대로 정액을 내보내지 못해 한계까지 지친 모습이었다. 그래도 발기는 하고 있으니 괜찮아 보인다.
재연은 유려한 손길로 하트 모양을 잡았다. 이내 빠르게 돌려 빼냈다. 그러고 있으니 주형은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톡, 하는 소리와 함께 핀을 바닥으로 던졌다. 재연은 성기를 반쯤 빼내고, 다치지 않은 주형의 다리를 쑥 들어 올렸다. 힘없이 들린 튼튼한 다리를 한 팔로 꼭 껴안았다. 허리가 훌렁 들리며 구멍이 귀두를 받아들이고 있는 게 보였다. 주형은 동그란 눈을 한 채 끔뻑였다. 뭔가 또 시작하려는 느낌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재연이 주형의 허벅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예고도 없이 허리를 강하게 튕겼다. 안까지 완전히 침범한 자지가 부어 있는 속살을 씹었다. 구멍은 귀두만 받고 있던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커다랗고 굵은 성기를 반기듯 한계까지 벌어졌다. 이윽고 오물거리며 작게 경련했다. 그 귀여운 감각에 흥분한 재연은 깊이 찔러 넣은 성기를 더욱 욕심내어 넣었다. 깊숙한 안쪽을 쿵쿵 찌르자 주형이 신음했다. 뱃속에 북이 울리는 것 같았다.
입술을 벌린 채 주형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시트를 할퀼 듯이 거칠게 휘어잡은 뒤엔 나부끼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재연이 거칠게 성기를 처넣는 통에 성감이 미칠 듯 넘쳤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정액을 내보냈다. 허리를 둥그렇게 휜 채로 쌌더니 정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꼿꼿하게 서 있던 좆에서 나오는 하얀 액이 재연의 옷에도 묻었다. 끝도 없이 음란하게 흩뿌리는 모양새였다.
“흐으, 흐, 아…….”
그러나 추욱 처진 몸을 늘어뜨리고 나서도 좆에서는 물이 계속 나왔다. 묽었다. 줄줄 흐르며 배와 서로의 것을 적시고 있었다. 전립선 액이 터지듯 선정적으로 흐르고, 주형은 뇌를 짓이기는 흥분에서 아직도 탈출하지 못한 채 뱃가죽을 꿈틀대고 있었다. 허리를 비틀며 겨우 정신을 차린 주형은 엉망이 된 아래를 바라보며 아찔한 숨을 내쉬었다.
“으, 이, 이거…….”
“그렇게 좋았어요?”
“아, 니야. 이거…… 씨발, 아니라고. 그냥……!”
이렇게 화려하게 물을 흘릴 거면 차라리 그 쓰레기 같은 물건을 꽂고 있어야 했다고, 주형이 후회했다.
“으응, 지릴 정도로 좋았구나.”
“아니라니까, 씨발!”
주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분수라니, 씹, 남자랑 붙어먹으면서……. 주형은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럼에도 재연은 푹 빠진 듯 그 액을 손가락에 묻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궁금한 건지 슬쩍 요염하게 혀를 내밀어 쪽, 빨아 마시기도 했다. 별맛이 나지는 않는다며 아름답게 웃는 모습이 아주 짜증 났다. 주형은 화가 날 정도로 미인인 그를 바라보며 으으, 하고 분을 삭였다.
“알았어요.”
오줌이 아닌 것쯤이야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안다. 재연은 쿡쿡 웃으며 주형을 꼭 껴안았다. 자지를 빼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그의 위에서 살짝 내려와 엎드리게 했다. 링거가 걸리적거려서 확 뽑아버리고 싶긴 했으나, 조심스럽게 뒤집으니 다행히도 괜찮았다.
“환자 상대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억울해 미칠 지경이다. 이렇게 몸져누운 것도 저놈 때문인데 섹스까지 하다니. 주형은 목을 뒤로 돌린 채 저항했다. 하지만 반항해도 달리 답은 없을 걸 알기에 그냥 늘어지고 말았다.
“형이 너무 예쁘니까.”
“하, 씨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코까지 푹 묻은 뒤에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래도 너무 내숭 떨지 않아도, 돼요.”
나는 다 이해해요. 재연이 주형을 뒤로 안은 채 속삭였다. 이윽고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형의 엉덩이 골에 대고 제 자지를 비볐다. 가슴을 맞대고 그리 하는 행위가 야살스러웠다. 주형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좆을 꼭 무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재연은 주형의 골반을 쑥 들어 올렸다. 골반을 강하게 움켜쥐고 엉덩이를 내밀게 한 뒤, 좆을 잡고 구멍을 설렁설렁 쑤셨다. 다행히도 아까 정액을 싸질러 놓았더니 잔뜩 젖어 있었다. 축축하고 말캉하지만 꽉 조이는 구멍을 범할 생각을 하자 또 아래에 피가 몰렸다. 재연은 주형의 구멍이 제 자지를 천천히 삼키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형……, 역시 도구보다는 내 좆이 더 좋죠?”
“흐으, 흣, 으.”
천천히 넣는 중이었으나 주형의 입에서는 연신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저번에도, 씹, 존나 처박고 있는데도 가질 못 했잖아, 응? 지금은, 씨발, 좆물을 질질 흘려 대는데.”
딜도를 쓸 때도 제대로 사정을 거의 못 했었다. 카테터를 꽂고 있자 미칠 듯이 몸을 배배 꼬긴 했지만 드라이 한 번밖에 없었지. 그리고 빼고 나서 좆을 좀 쑤셔 주자 금세 사정했다. 이렇게, 있는 액과 없는 액을 다 질질 흘리면서. 그 음란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잔뜩 흥분한 재연은 몸을 푹 수그린 채 주형을 껴안았다. 뒤에서 뱃가죽을 붙잡고 안을 후리자 주형의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허리가 아래로 처지며 엉덩이를 더욱 내민 모양새가 되었다. 내벽에 성기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그러자 주형의 자세가 다시 한 번 무너졌다. 하지만 재연이 억지로 몸을 들고 있는 통에 온몸에 긴장이 깃들었다.
“자세가 왜 이렇게 능숙해요. 응?”
“이, 건 허리가 아파서……!”
뒤를 슬쩍 바라보자 재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 순간을 황홀경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 눈을 푼 채로 섹스에 임하고 있었다. 완전하게 심취한 채 저를 범하는 모습을 보자 등줄기가 미묘하게 오싹해졌다. 주형은 제 살갗을 핥으며 자국을 내기 시작한 재연을 느꼈다. 무릎이 버티기 힘든 듯 바들바들 떨렸다. 통통한 엉덩이가 재연의 음낭에 얻어맞아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다른 새끼랑 섹스 존나 떴나 봐요.”
“학, 으으, 읏!”
“나는 형이랑 하려고 아꼈는데, 섭섭하네.”
재연이 좆 질을 계속했다. 살덩이를 쑥 처넣고 육벽을 거칠게 긁었다. 잔뜩 부어 있는 벽이 짓이겨졌다. 주형은 안 그래도 쓰라린 부위가 자꾸만 건드리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흥분을 느꼈다. 엉덩이에 힘을 주자 보조개처럼 근육이 드러났다.
“……그래도 앞으로는 나랑만 해요.”
“…….”
“약속.”
주형은 무어라 반문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숨을 고를 틈도 없던 주형을 앞에 두고 재연은 다시 한 번 종용했다. 언뜻 보아도 강요하듯 강한 눈길이었다.
“약속.”
“흐으……, 알, 겠습니다.”
다시 재연이 몸을 움직였다. 꾹 성기를 안에 처박고 있더니, 쭉 뺐다. 물을 줄줄 흘리는 좆이 빳빳하게 서 있었다. 주형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렇게 큰 살덩이가 안을 건드리고 있었으니 당연히 성감이 잔뜩 이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쾌락과 고통으로 몸이 산산조각나면 어쩌나 하는 실없는 소리가 났다.
“아으, 흣!”
“형……, 약속, 잘 지켜야 해요.”
“하, 하으. 지킬, 테니까…… 그만, 그으.”
주형이 말을 하다 말고 몸을 튕겼다. 잠깐 재연이 저를 놓아 준 사이 마지막 반항처럼 재연에게 뛰어들었다. 활시위를 당기듯 부드럽게 튀어 오른 몸이 재연을 껴안았다. 튼튼한 팔로 재연을 무너뜨리며 안은 뒤에는 그가 입은 베스트를 꽉 쥐었다. 고급 원단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주형이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말간 피부에 닿는 야한 숨이 재연을 덮쳤다.
재연은 은근히 웃으며 주형을 안았다. 그리고 재차 그의 몸을 뒤집어 저를 바라보게 한 뒤, 주형의 음낭과 회음 가까이를 좆대가리로 문질렀다.
“예전에 안 지킨 것까지, 지켜야, 돼요.”
주형은 재연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다. 아주 예전에.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재연은 망가지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 이 성미도 그 과정에서 발달됐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잊지 않은 건 주형, 주형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맛본 또래의 순진한 애정은 무서울 정도로 맹목적인 각인이었다.
재연은 어릴 적의 기억이란 정말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주형의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껴안았다. 그가 망가지더라도 제 품 안에서 망가졌으면 했다. 그러면 엉망이 된 주형의 시체라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아으, 응…… 흐, 아!”
머리를 찌릿찌릿하게 하는 감각이 아래로 내려왔다. 자지까지 닿은 뒤에는 발가락을 오물거리게 할 만큼 커다란 느낌이었다. 주형은 몸을 자르르 떨며 축 늘어뜨렸고, 그렇게 매우 지친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자 그제야 구멍에 무언가가 가득한 느낌이 들었다. 질척거리는 것 이상으로 불쾌하지만 야릇한 기분이 든다.
구멍을 억지로 침범하고 있던 자지가 물을 내보냈다. 한껏 흥분한 재연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쌍꺼풀이 선명해지도록, 핏줄이 얕게 드러나도록 눈을 크게 뜬 뒤에는 허리를 잘게 떨어댔다. 이윽고 움직임이 멎고, 재연의 흉물이 바깥으로 유유히 빠져나왔다. 엉망이 된 구멍 사이에서 정액이 몇 방울 줄줄 흘렀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엉덩이가 예뻐요.”
“……으으, 씹.”
주형은 마지막 힘을 다해 겨우 베개에 머리를 누였다. 재연이 뭔가 또 할까 걱정이 된 나머지 이불까지 괜히 끌고 왔다. 그렇게 꿈틀거리고 있자 재연이 주형을 빤히 바라봤다. 부드러운 햇살 같은 눈길이었다. 정액과 젤로 젖은 사타구니와 셔츠, 그리고 그에 반해 깔끔하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그러나 제 안을 사정없이 후리다가 나온 자지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걸 보니 방심할 수 없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에 이토록 험악한 섹스라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그래서 주형은 금세 정신을 조금 차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학을 떼면서도 그리 물었다. 그러자 재연이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엷게 웃었다. 이윽고 다가와 귀엽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쪽쪽거리는 소리를 괜히 노골적으로 내며 뺨, 코끝, 입술에 맞추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야하고 진한 키스를 남겼다. 입술을 한껏 벌려 주형의 입을 삼키고서는 혀로 안을 헤집었다. 몇 초 동안 주형의 목을 살짝 젖힌 채 잡아먹듯 취한 뒤엔 속삭였다.
“씻겨 줄게요. 옷 입어요.”
재연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형은 내심 그가 화를 풀었다는 것에 안심했다.
***
병원 안의 시설을 단독으로 이용했다. 구멍에서 좆물을 빼 주겠다는 이유로 뭘 또 하려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재연은 정말 할 일만 했다. 이상한 감각이 들어 눈을 흘기며 쳐다보자 재연이 응? 하며 예쁘게 고개를 저었다. 새침한 모습이었다.
‘혹시 다중인격인가?’
섹스를 할 때는 천하의 쓰레기 새끼고, 평소에는 그나마 덜 쓰레기고, 지금은 무슨 천사처럼 웃네. 지킬과 하이드도 저러지는 않겠다. 주형은 떨떠름하게 재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새로운 병원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머리카락까지 재연이 낯간지러운 손길로 말려 줬다. 뭘 한 건지 볼륨도 있고 꽤 멋져 보인다고, 주형은 스스로 생각했다. 그렇게 나란히 서서 느리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고 있자 어느 꼬맹이가 과자를 고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침 눈에 띄었으니 하나 사 가기로 했다. 주형은 병원복 주머니에 항상 넣어 놓은 만 원짜리를 확인한 뒤 멈추었다.
“이사님, 먼저 가 계십시오.”
“왜요?”
“매점에 잠깐 들르려고요.”
바로 옆에 있는 매점을 가벼운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재연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나도 같이 볼래요.”
“아…… 예.”
고개를 끄덕인 뒤 매점으로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먹던 초콜릿 과자를 발견했다. 주형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좀체 먹을 일 없던 과자의 이름을 낯선 곳에서 발견한 데에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전과는 달리 박스도 아주 달라졌다. 그걸 집고 주변을 둘러보니, 재연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을 보고 있었다.
“이사님, 고르셨습니까?”
“그냥 보고 있었어요. 아, 형이 사 주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냉장고의 유리문을 짚고 있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미미하게 남아 있던 온기로 인해 하얀 김이 꼈다가 사라졌다. 재연은 누가 봐도 사 달라고 하는 듯한 눈동자로 조르고 있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니 주형은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정도는 됩니다. 만 원밖에 없어서요.”
“그렇구나. 그러면 고를게요.”
병원 공기가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아서, 재연의 귀와 뺨에 자그마한 홍조가 생겼다. 철없고 어여쁘기만 한 소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예. 아이스크림 드실 겁니까?”
주형은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괜히 아이스크림을 들여다보았다. 병원에 딸린 작은 가게라 그런지 다양하지는 않았다.
“……형은, 아이스크림 안 먹어요?”
이상한 기대를 품은 듯한 눈길이었다. 아이가 무언가를 바라지만 쉬이 입을 열 수 없을 때 짓는 얼굴. 여전히 주형 앞에서는 아이가 되고 마는 재연은, 때로 그런 감상을 줄 법한 낯을 했다.
“네. 별로 안 좋아합니다.”
다만 아직 그만큼의 애정과 관심은 없는 주형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애초에 겨울이라 그런지 별로 안 당겼다. 주형은 계절감에 맞게 먹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재연은 시끌벅적한 곳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미묘하게 쓸쓸해 보였다. 카멜색 코트를 입어서 그런 걸까. 왜인지 빛바랜 양피지처럼 선선한 웃음을 짓는 게, 평소와는 달랐다.
의아한 감각을 느끼기도 잠시 재연이 구석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나는 이걸로 할게요.”
“저랑 같은 건데…… 저랑 나눠 드셔도 됩니다.”
“그럼 형이 덜 먹잖아요.”
주형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렇게 순수한 모습으로 제게 다정함을 보여줄 때면 가끔 흔들리고 만다. 어느새 숨길 수 없는 홍조를 띤 주형이 머쓱하게 머리 뒤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재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산할 과자를 달라는 뜻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뭐,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만 하면 됩니까?”
“네.”
계산을 하고 나왔다. 초등학생 때 많이 먹던 과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는 주형과 달리, 재연은 두 손으로 과자를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걷는 자세와 행동부터 둘은 매우 달랐다.
병실로 돌아왔다. 그새 엉망이 되었던 침실도 정리가 되었다. 마음이 그나마 편해진 주형은 과자를 그 자리에서 뜯었다. 씻는 김에 링거도 제거한 덕분에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VIP 병실엔 창가에 테이블과 의자도 두 개나 있어 좋았다.
여유를 부리듯 싸구려 과자를 뜯어 소포장이 된 과자를 하나 건넸다. 그러니 재연은 싱긋 웃으며 받아 들었다. 이윽고 건너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뜯었다. 우물거리며 과자를 먹는 중에는 냠냠, 하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소음만 울렸다. 그리고 주형은 그런 재연을 은근히 훔쳐보았다. 재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하얀 피부를 햇빛에 쬐고 있었다.
이럴 땐 천사 새끼가 따로 없는데.
“그, 이사님.”
“네, 형.”
주형이 말문을 겨우 텄다. 이제 좀 진정한 듯하니 사람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겠지?
“아까…… 말입니다. 선아 씨랑 잘 어울린다고 한 거.”
“……네.”
재연은 잠깐 정적을 유지한 뒤 말했다. 그 간격이 신경이 쓰여서, 주형은 부러 테이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그게 그렇게 싫으셨습니까?”
“응. 싫어요.”
1초 정도는 고민할 줄 알았는데 문장이 끝나자마자 대답했다. 단칼에 떨어지는 말 때문인지 주형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괜히 말을 주절주절 덧붙였다.
“그냥 겉치레로 한 말이었습니다. 아니, 그, 그런 사이라고 하시니까……. 그런 분에게 대고 아무런 말이나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이사님도 이사님 자리가 있고, 그분도 나름…… 좋은 집안 따님이실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그냥 이상한 말을 하면, 이사님도 곤란해지실 거고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말도 안 하면 그분께서 불편하실 거고.”
사회성을 위해서 그랬다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싶었다. 그러나 재연의 삐죽 나온 입술과 조금 성이 난 눈동자, 게다가 아까 그 폭력적인 행위를 생각하면 이게 답이었다. 주형은 재연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그래서, 형이 지금 잘했다는 거예요?”
왜 이래, 이 새끼가. 주형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매우 단단히 삐진 애인처럼 구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에도 그랬던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형은 말을 더듬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일단 그를 달래기 위해 제 과자를 하나 뜯어 재연에게 건넸다.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받침까지 했다.
“끝, 까지 들어 보십시오.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응.”
조금 누그러진 듯 재연이 눈을 부드럽게 떴다. 그러면서도 주형이 건네준 과자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손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려던 주형은 그냥 꾹 참았다. 그래, 일단 이놈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거니까…….
“……꼭,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거짓말이었다?”
재연이 고개를 돌려 고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그렇죠. 거짓말…… 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냥 한 말이란 말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한 말은,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말이 좀 통하는 듯해 안심이 됐다. 주형은 커다란 덩치에 비해 조신한 자세로 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이 만족한 듯 싱긋 웃었다.
“그렇구나.”
이윽고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 고개를 숙여 미소를 짓고서는, 다시 올곧게 주형과 눈을 마주쳤다. 재연의 보드랍고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천천히 꽂혔다.
“다행이에요. 형 진심이 아니라서.”
“…….”
재연은 주형이 제게 선을 긋는다는 게 속상했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했는데도 잔인하게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벽을 치고 있으니 화가 났다. 가장 바라던 주형이 저를 부정한다는 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게 형 진심이었으면 이번에는 인대를 잘랐을 거예요.”
재연은 휘황한 속눈썹을 뽐내며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주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예전이라면 설마 그러겠냐는 생각으로 일관했겠지만 그가 정말 제 발목을 조져 놓은 이상 방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데에 불안감만 드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마음도 들었다. 가슴이 묵직하지만 부드럽게 감싸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건 이상했다.
주형은 재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구보다 우아한 손길로 과자를 하나 집는다. 그리고 지익, 하는 소리를 내며 봉지를 뜯은 뒤 이번에는 주형에게 내밀었다. 손으로 가져가려 하니 재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형은 무어라 반문하지도 못하고 입술을 꾸물거렸다.
‘쪽팔리게, 진짜.’
왜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요즘 중학생들도 이런 간지러운 짓은 안 할 텐데. 주형은 매우 못마땅한 눈길을 지우지 못한 채 입을 억지로 벌렸다. 그리고 턱을 내밀어 재연이 내미는 과자를 받아먹었다. 재연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도톰한 애굣살이 올라왔다. 호수처럼 반들거리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분위기를 녹였다.
“참, 아까 이사님이 오시기 전에 의사가 왔었습니다.”
“뭐라고 해요?”
주형은 박스를 닫았다. 마땅히 열리지 않도록 고정할 만한 건 없으나 입구를 꾹꾹 누른 뒤에는 남은 쓰레기를 한 손에 쥐어 버렸다. 재연의 것도 함께 버리는 데에서는 그의 원숙함이 슬쩍 드러났다.
“내일이나 모레 퇴원하면 된답니다.”
“음……, 아직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거의 다 나았습니다.”
주형은 아직 발을 절고 있긴 했으나, 그건 딱딱한 붕대를 감아 놓은 데다가 의사가 조심하라는 조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뼈와 살도 모두 아물어 있었으니 심한 운동만 하지 않으면 됐다.
“하지만 형은 너무 작고 말라서 좀 더 치료해야 돼요.”
“미친 새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경악하고 말았다. 주형은 재연의 동그란 눈을 바라봤다. 주형이 서 있는 탓에 재연을 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시선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재연이 키가 커서 언제나 살짝 올려다보아야 했는데, 아래로 내려다보아도 굴욕 따위는 없이 봉긋한 광대와 촘촘한 속눈썹이 돋보였다.
“아.”
말을 실수했다. 미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하다니!
“…….”
“그, 커흠, 흠!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하는 분은, 이사님이…… 처음입니다.”
말을 고쳐야 하는데 너무 당황해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주형은 괜히 헛기침까지 하며 재연의 눈치를 봤다.
“그래서 너무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부드러워서 의심스러웠다. 주형이 의심을 풀지 못하고 특유의 의심 어린 눈동자를 했다. 살포시 드러난 흰자위가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잘 어울렸다.
“앞으로도 나한테 간혹 반말하면 좋겠어요.”
“에?”
예전에는 예의니, 인사니 하며 좆병신 취급을 해 놓고 이제는 이러는 건가. 그래도 뭐, 거지새끼 취급을 하진 않으니 다행이었다. 그건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난봉꾼 새끼인 건 제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의구심을 품은 채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며 재연에 대해 곱씹을 때였다. 그러고 있으니 재연이 서방을 기다리는 색시처럼 가련하게 뺨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넓고 튼튼한 어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섹스할 때 그러면 더 좋고.”
“…….”
“나중에는 이름 불러 줘요. 주형 형.”
변태다, 변태. 정말로 이제는 의심조차 들지 않는다. 윤재연은 변태다. 이사 자리에 있으면서 반말을 듣고 싶어 하고, 다른 놈에겐 웃지도 않으면서, 덩치 크고 시커먼 제게 이러는 거니까. 저 새끼는 변태가 맞다. 주형은 재연이 혹시 어릴 때 머리라도 다쳤나 의심했다.
“이만 가 볼게요. 선물은…… 사 왔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까 내일. 아, 그리고.”
“예.”
“저 화분, 줄래요?”
재연은 그 화분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 완전히 태워 버리고 싶었으나 생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교과서의 기계적인 가르침을 이행해,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에 가져다 둘 심산이었다. 이런 널린 화분을 주형에게 주기도 싫었고, 선아의 흔적을 주형에게 남기기도 싫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키우고 싶어서.”
식물을 키우고 싶었거든요. 재연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 기묘한 서늘함에 주형은 화분이 담긴 쇼핑 백의 손잡이를 꾹 눌러 잡았다.
“근데,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건데 함부로 제가 드려도…….”
“아무런 상관없으니까 줘요.”
재연은 이런 상황에도 선아 이야기를 하는 주형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보기 좋게 일그러뜨린 뒤에는 얼른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알겠…… 습니다.”
“고마워요.”
재연의 손에 화분을 건넸다. 주형은 왠지 다시는 식물을 못 볼 듯해 괜히 말을 덧붙였다.
“나, 나중에.”
“응?”
“……나중에, 식물 잘 크면 보여 주십시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뜨문뜨문 이었다. 재연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차가웠다.
“…….”
“꽃이 피면 예쁠 것…… 같으니까요.”
꽃이 피는 식물인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아무렇게나 말했다. 주형이 말하는 것을 들은 재연은 쇼핑 백을 벌려 안을 쳐다봤다. 괜히 오늘따라 파릇파릇한 식물이 마음에 안 들었다. 역시 태워 버려야겠다.
“선아 씨가 준 게 그렇게 신경이 쓰여요?”
“아, 아니. 이사님, 잠시만! 잠시만, 말씀 좀 전하겠습니다.”
뭔가 또 심기가 뒤틀린 게 보인다. 주형은 귀신처럼 눈치챘다. 그에게도 드디어 눈치와 감이라는 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손까지 내밀었다. 그대로 떠나려는 재연의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갔다.
“……해요.”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선아 씨가 식물을 주셔서 좋은 게 아니라, 그 식물을 마침 좋아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이사님이 키우신다고…… 하셨으니까.”
“…….”
미친놈, 저 싸늘한 눈빛 좀 보게. 주형은 슬슬 불안해졌다. 조금 화가 나면 요도 카테터까지 들고 오는 새끼 앞에서 답이란 없다. 아부밖에는. 주형이 눈을 질끈 감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주먹을 만든 채 꾸역꾸역 말하는 그는 괴로워 보이면서도 설레 보이기도 했다. 이상했다.
“이사님, 은 저랑 다르게 잘 키우실 거 같아서, 그냥, 아부 좀 부려 본…… 겁니다.”
“아부?”
“예. 예쁘게 잘 키워 주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을 포장하는 건 굉장히 힘들었다. 주형은 처음 해 보는 예쁜 말투에 속앓이를 했다. 재연의 저 부드럽고 촘촘한 속눈썹 너머로 자리 잡은 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졌다.
그러면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주형은 어느새 재연에게서 도망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 그렇게 생각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간 좀 펴시죠.”
“…….”
주형은 재연의 상태를 살피는 게 버릇이 됐다. 돈과 폭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 눈치에는 좀 더 많은 게 있었다. 그는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건 마치 어릴 때 재연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 때의 감각 같다.
사리사욕 따위는 없고, 순수하고, 좀 더 멍청한 감정…… 같은 것들.
“형이 문질러 줄래요?”
“에?”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주형은 눈을 끔뻑였다.
“미간.”
주형의 손을 가져간 재연이 주형의 손을 제 가슴 가까이 오게 했다. 주형은 그냥 저항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숨기고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런 뒤에는 여전히 구겨져 있는 느낌이 드는 미간에 손을 댔다. 슬쩍 문지르며 재연의 얼굴에 집중했다. 아름다운 곡선이 돋보이는 눈두덩이 보였다. 주형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그냥 살짝 지분거린 뒤 손을 뗐다.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울렁거리는 게 뭔가 잘못 먹었나 하는 의심도 들었다. 과자가 문제인가. 하지만 공복에 먹은 것도 아닌데.
섹스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런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간질거리는 짓이었다. 낯설고 어렵다.
주형이 손을 거두고 우물쭈물 입술을 말아 넣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으니, 재연이 싱긋 웃었다. 뺨에 살포시 뜬 홍조는 그를 사내가 아니라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형 손은 굵직하니 반지를 끼면 잘 어울리겠네요.”
“칭찬은 감사하지만 전 반지 같은 걸 낄 여유는 없는지라.”
“왜 없어요.”
“저 돈 없습니다. 아, 돈을 안 갚겠다는 건 아니고요.”
혹시 돈으로 물고 늘어질까 본능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니 재연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봉긋한 뺨과 폭 들어간 볼우물이 사랑스러웠다.
“내가 있는데 왜 돈이 없어요.”
“…….”
그래서 네 재산이 내 거냐고, 씨발. 주형은 이제는 표정 관리도 못 했다. 시퍼렇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은근히 삐뚠 입꼬리가 그의 감정을 나타냈다. 이내 하아, 깊이 한숨을 쉬고서는 경호원이 에스코트를 하듯 재연의 허리춤 가까이 팔을 댔다. 다른 팔은 병실의 문 쪽으로 내밀어 그를 얼른 나가게끔 인도했다.
“향수도 다르시고, 아까도 그렇고…… 오늘 좀 이상하신 거 같습니다. 얼른 귀가하시죠.”
“향수?”
재연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정말로 의외라는 듯 그의 눈이 평소보다 동그랗고 순했다.
“예. 전과 다르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주형이 엷게 콧방귀까지 뀌었다. 둘을 이루고 있는 분위기가 은근히 부드러워졌다.
“……그런 것도 알고 있어요?”
“가까이 있으면 누구나 압니다.”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안 해 줬어요.”
재연의 목소리가 별안간 변했다. 감동을 받은 듯 눈동자가 호수처럼 일렁였다. 도시의 전경을 앞에 둔 호수가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발광하는 모습이었다. 그 분위기와 눈길을 이기기 어려웠는지 주형이 주절주절 또 말을 덧붙였다.
“이사님이 평소에는 무서운 얼굴을 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요. 아무튼, 얼른 귀가하십시오. 병실에 오래 계셨습니다. 병원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거 없어요.”
병원은 치유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조금만 돌아보아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에 재연은 안 어울렸다.
주형은 별별 핑계를 대며 재연을 내보내려 했다. 이상하게 그와 같이 있기 어려웠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어깨가 찌르르 굳는 거 같다. 머리도 조금 지끈거린다. 괜히 멍청한 소리나 하게 되는 게 분명 윤재연 저놈 때문임이 틀림없다.
“알았어요.”
걱정해 주는 거죠? 재연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는 주형과 진짜로 친해졌다고 생각하며 기분을 들뜨게 했다. 주형이 제게 빠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은 옳았다. 다정하게 대해 주고 선물도 주고, 섹스도 자주 하니 사이가 좋아졌다. 역시 이때까지 했던 것도 다 주형의 투정과 내숭이었던 거다.
“……안녕히 가십시오.”
“응. 모레 퇴원할 때 올게요.”
“알겠습니다.”
그 짧은 말을 끝으로 재연은 바깥으로 나갔다. 선아가 주었던 식물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로.
홀로 남겨진 주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재연이 나간 뒤 몇 분 지나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기둥에 기대어 유유히 담배를 피우는 그는 재연의 말을 한 번 상기했다.
‘예전에 안 지킨 것까지 지켜야 돼요.’
예전의 약속? 주형은 눈을 끔뻑이며 입술을 벌려 연기를 뱉었다. 오랜만에 피웠더니 입에 착 감기진 않았으나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재연이 남기고 간 의문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예전에 안 지킨 것이라. 그놈이 그냥 헛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주형이 중얼거리며 담배를 껐다. 재연에 대한 생각은 담배 연기처럼 부풀어서, 주형의 몸속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는 퇴원을 할 때까지도 재연에 대한 생각을 틈틈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