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본성 (1) (3/11)

3. 본성 (1)

재연에게서는 대략 일주일 정도 답이 없었다. 주형이 슬쩍 ‘이사님, 일전 주신 돈은 어디로 입금하면 됩니까?’라고 물어도 전화도 문자도 전혀 오지 않았다. 혹시 차단을 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걸 확인할 재간은 없어서 그냥 던져두었다. 차단하든 말든 상관없이 주형이 할 일은 하나였다.

개 같이 벌어 거지처럼 산다. 딱 하나.

어느덧 이자를 납부할 때가 다가왔다. 재연의 연락이 끊기자마자 방해도 없어져서, 그는 단기 알바를 나갈 수 있었다. 금액을 간신히 맞추어 내고 나자 며칠 정도는 먹고 살 수 있는 생활비가 나왔다. 주형은 오랜만에 편의점에 가서 담배를 사려 했다.

몸도 풀 겸 제법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서 담배를 샀다. 기분 좋게 뒷골목에 기대어 익숙하게 담배를 꺼냈다. 오랜만에 쪽 빨자 찌르르 감각이 올라왔다. 주형은 동그란 입술을 내밀며 한숨을 쉬듯 연기를 뱉었다. 음미하듯 길게 천천히 피운 다음에는 뒷정리를 하고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피웠더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것도 중독이랍시고 사람을 은근히 계속 유혹하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갈무리를 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운수가 참 좋은 날이구만, 하고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제 운을 생각하며 작게 흥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진후가 눈에 띄었다. 저 순해 보이지만 덜떨어져 보이는 얼굴이며, 피어싱이나 문신 같은 건 하나도 없는 몸, 게다가 언제나 남을 살피듯 두리번거리면서 지질하게 놀리는 고개. 주형은 금세 알아챘다.

“어, 형님?”

“……잉? 누구, 아!”

주형이구나! 진후가 금세 알아챘다. 그러고는 어깨를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주형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씩 웃으며 오랜만에 만난 그를 반겼다. 임금이 떼이고 나서 거의 한 달이 지났다. 이때까지 본 인간이라고는 일용직을 하며 본 사람과 천국 캐피탈의 사람, 아니면 재연이었기 때문인지 그가 좀 특별했다.

“여기는 웬일이세요.”

“어? 아, 뭐 좀 사느라고. 여기 앞에 백화점 있잖냐.”

저어기, 하며 진후가 대충 엄지손가락으로 제 등 뒤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낮은 건물 가운데에서 두껍고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백화점 건물이 있었다. 부자들만 눈치 안 보고 출입할 수 있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듯한 백화점 마크는 오늘도 저를 비웃는 듯해 주형은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아……. 그렇죠. 뭐 사셨는데요?”

대충 웃어 보였다. 시원한 미소가 그의 입에 있었다. 재연이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그 웃음.

“큼, 그건 비밀이야.”

“여자 친구 선물이라도 샀어요?”

“인, 인마. 쑥스럽게…….”

“하하.”

시원스레 웃는 주형은 재연과 대화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 찝찝했다. 그래도 그 감각은 무시하고 대충 대화에 임했다. 그리고 그는 그를 얼마간 바라보고 나서야 그 불쾌함의 근원을 느꼈다.

백화점, 깔끔한 옷, 전보다 덜 누런 그의 얼굴, 그리고, 장신구라고는 하나도 하고 다닌 적이 없는 진후의 목에 걸린 목걸이.

이 모든 건 진후의 씀씀이나 생활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임금이 체불된 지 한 달 만에, 이런 모습이라니. 주형은 의아함을 느꼈다.

“만나서 반가웠다. 주형이, 요즘 전화 잘 안 받던데……. 바쁘냐?”

“아, 이것저것 한다고…… 연락을 못 했네요. 죄송해요.”

틀렸다. 무슨 전화를 받아도 윤재연 그 놈이 형, 하고 말할 것 같아서 안 받았다. 바쁜 것도 당연히 맞았지만.

“아니야, 다 바쁜데. 그래도 몸은 꼭 잘 챙기면서 일해라. 나는 이만 가 본다.”

“네. 나중에 봐요.”

그렇게 말하고는 진후를 등지고 제 갈 길을 찾아 나섰다.

‘왜 돈이 생겼을까.’

서진후 씨발놈. 티라도 내지 말든가. 주형은 그가 자랑스럽게 매고 있던 목걸이로 그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제 돈이 거기에 들어갔을 게 눈에 보여서. 주형은 오늘은 운이 더럽게 안 좋은 날이었다고,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화를 낼 힘이 없었다. 주형은 너무 지쳐 있었다.

얼마간 걷고 나자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거리가 나왔다. 쓰레기가 마구 나뒹굴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뜨문뜨문 방문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은 거리. 행정의 손이 미친 지도 오래되어 아스팔트는 울퉁불퉁한 데다가 불법 주차도 즐비해 있다. 여유라고는 하나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드나드느라 클랙슨 소리와 고성이 때때로 음악처럼 흘러나오는 거리.

무법의 거리가 아니라 불법의 거리 그 자체였다, 주형이 사는 곳은.

구질구질함만 남은 노란 장판 위에서, 주형은 어느새 재연이 보고 싶어졌다. 이런 더럽고 추접스러운 거리에서 벗어나, 제정신은 아니지만 겉이라도 반듯한 재연을 보고 싶었다. 재연은 태생이 천했던 주형에게 제법 큰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

진후를 본 뒤로 사흘 정도가 더 지났다. 재미없는 삶은 끝내고 다시 바쁜 삶으로 돌아가, 주형은 열심히 일했다. 다행히도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재연은 그새 방해 공작을 멈춘 건지 이제는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아도 턱턱 합격이 됐다. 당일에 채용이 된 뒤 다음 날 카페에 나갈 때까지도 주형은 실감이 나지 않았으나, 아무튼 ‘돈은 평범하게 벌지만 몸은 덜 쓰는 일’을 시작하는 데에 성공했다.

카페 일을 시작하고 나니, 몇 개월 뒤 공사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 일이라.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어질 거란 생각과 동시에 걱정 어린 웃음이 들었다. 쓰고 떫은 웃음을 겨우 삼킨 뒤에는 재연의 생각을 했다.

“철이 들었나.”

새끼. 주형은 욕을 읊조리며 재연의 얼굴을 생각했다. 무슨 직업을 가져다 두어도 재연은 잘 어울릴 것 같이 생겼다. 그게 상스러운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성직자, 선생님, 경찰관, 경제 전문가……, 뭐든. 주형은 그의 말갛고 고운 낯을 생각하다가, 또 움찔거렸다.

‘다리 벌리고 좆 넣기 쉽게 허리 들어요.’

그가 했던 말이다. 짐승 같은 얼굴로 속삭였던 말.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고 꾸물거리자 엉덩이가 새빨개질 때까지 후려쳤다. 흥분이 가득 어린 목소리로 씨발, 하고 중얼거렸던 것도 기억이 났다. 채찍을 찾듯 손가락을 몇 번 꾸물거리다가 짜증스럽게 쯧, 하고 혀를 차며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그 손길에는 흥분도, 가학성도, 분노도 섞여 있었다. 어릴 적 저를 외면했던 주형에 대한 원망이기도 했고, 주형을 망가뜨리고 싶은 욕구이기도 했고,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천박한 취향이기도 했다. 주형이기에 그 모든 걸 풀 수 있었다. 주형은 영원히 유일한 제 형이니까.

물론 주형에게는 그런 섬세한 사정은 와닿지 않았고, 가학성만 느껴졌다. 그러나 맞는 입장임에도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그러니까, 그저 아픈 데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가 더 있는 듯한 감상이 들었다. 그마저도 주형은…….

‘시발, 구멍 따이고 있으니까 별별 생각을 다 하네.’

이렇게 치부하며 좆덩이를 받아냈지만 말이다. 흉물에 가까운 그것은 주형이 지금 재연을 생각하는 중에도 질리게 할 정도로 크고 험악했다. 주형은 재연의 얼굴로 시작해 좆으로 끝난 제 회상을 끝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 같지도 않은 집에 도착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열쇠를 찾기 위해 부스럭거리고 있자 창틀에 꽂힌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원래는 없던 것이다. 전단지 같지도 않았다. 주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모를 열어 보았다. 열쇠로 문고리를 돌리며 메모를 읽었다.

주형아, 이거 보면

너네 집 앞 카페로 와.

마감 때까지 기다릴게.

-형이

주형은 문을 열다 말고 다시 닫아버렸다. 쾅! 하는 굉음과 동시에 주형은 열쇠로 문을 잠그는 것도 잊고 복도를 내달렸다.

아버지와 싸우고 나서 내내 보이지 않던 제 이복형이 돌아왔다.

얼른 바깥으로 나와서는 집 앞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영업시간이 별로 길지 않을 텐데. 주형은 벌써 오후 11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임에 매우 탄식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가 보자 카페 안은 어두컴컴했다. 쇼케이스의 간접 조명만이 아주 엷게 켜져 있었다.

“아…….”

주형은 몇 년 만에 볼 수 있던 제 형을 놓쳤다는 생각에 씨,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이 돌아오면 할 말이 많았다. 마구 싸운 뒤에 제 아버지가 조용하더니 며칠 뒤에 사고로 죽어 버렸다는 것도 알려 주어야 했고, 그렇게 사라진 뒤로도 빚이 많다는 것도, 혼자 갚느라 뒈지게 힘들었다는 것도.

버거운 나머지 뒤로 목을 젖히며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주형아.”

“형?”

주형은 제 앞에 있는 게 진짜 제 형인 지욱인지 의심했다. 주변이 어두워서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순해 보이는 눈길과 저보다 조금 더 작은 키는 분명 형이 맞았다. 주형은 형! 하고 소리를 쳤다.

“윽, 주형아. 잘 지냈어?”

몇 년 못 본 사이에 주형에게는 근육도 많이 생기고, 눈가도 쏙 패었다. 그 덕분인지 외국 배우 같았다. 지욱은 저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주형을 힘없이 바라보며 그를 안아 주었다. 전보다 훨씬 찌들어 밑바닥의 구정물을 잔뜩 먹은 것 같은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어. 형은?”

“나도, 뭐……. 그렇게 나가고 나서 너 어떻게 지내나 보고 싶었는데, 어차피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못 갔어. 형이 미안.”

“……아니야.”

주형은 오랜만에 보는 지욱이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한참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게 진짜 지욱인지, 예전의 그 지욱이 맞는지 헷갈렸다. 몇 년 만인가. 거의 5년 만이다. 주형은 군대를 가기 전에 봤던 제 형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외모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동했다. 조금 살이 빠지기는 한 것 같지만 아무튼 이렇게 머쓱하게 허허 웃는 건 제 형이 맞았다.

“여기 앞에 놀이터 있는데, 거기 가자. 오면서 봤는데 고등학생들 없더라.”

“요즘 고등학생들 무서워, 주형아.”

“쫓아내면 되지, 뭐.”

지욱의 걱정스러운 말에 주형이 웃으며 그를 그냥 끌었다. 다행히 양아치 고등학생들은 없었다. 주형과 지욱은 나란히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추억 팔이도 하고, 근황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안부에 대해서도 질리도록 물었다. 주형은 지이잉, 하며 진동을 흘리는 휴대폰을 슬쩍 꺼내 보았다.

“응?”

“왜, 전화 왔어?”

“아니. 배터리 다 돼서 꺼졌네.”

주형은 미련 없이 그냥 휴대폰을 보내 주었다. 윤재연 그놈에게서는 연락이 안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흥,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쓰레기 새끼. 와 봤자 섹스나 하자고 할 텐데. 섹스 같은 건 다른 사람이랑 하라고. 주형은 어느새 토라진 애인처럼 굴고 있었다.

“중요한 전화 같은 거 오면 어쩌려고.”

“안 와. 괜찮아. 그래서, 형. 요즘 뭐 한다고?”

주형은 휴대폰을 으스러뜨릴 수도 있을 만큼 탄탄한 손으로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 버렸다. 시야에서 치우자 마음이 편해졌다.

“아, 어. 나 요즘……. 사업하는데, 해외에 물류 보낼 때 중개해주는 일을 하고 있어.”

“그래? 주로 어디로 보내는데.”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나, 지욱이 형이. 주형이 의아해했다.

“음, 동남아 쪽. 그쪽이 아무래도 그나마 가깝고 수입도 많아서 할 만하더라. 그래서 말인데…….”

“어.”

무슨 말이 이어질까 기대가 됐다. 지욱을 오랜만에 봐서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경청할 수 있을 듯했다.

“주형이, 너도 형이랑 같이 갈래?”

“……뭐?”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구정물을 잔뜩 뒤집어쓴 제게 세상에서 가장 하얀 안료를 덕지덕지 부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순하지 못하지만 날카로운 맛이 있는 눈동자가 일순 풀렸다.

“그게, 이제 나 어느 정도는 자리 잡았거든. 그래서 너랑 같이 일하면 괜찮을 거 같아서.”

“아…….”

주형이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급작스러웠다. 같이 가자고 하는 그의 마음도 다 와닿지 않아 곤란했다. 주형은 그의 열렬한 눈동자를 피하며 한숨을 삼켰다. 조금 시간을 가져 보자고 하며 연락처를 교환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지욱이 갑자기 대뜸 목소리를 크게 냈다. 옆을 빤히 돌아보면서 흰자위가 훤히 보이도록 눈을 떴다.

“주형아, 형 믿잖아. 응? 내가 너 자리 만들어 주려고 했던 거야.”

“아니, 형. 생각을…….”

왠지 마음이 급해 보여서 진정시키려 했다. 지욱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팔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전과는 무언가 달랐다. 주형은 덩달아 일어나서 그의 팔을 잡았다.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해? 형이야, 형!”

지욱은 씩씩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웠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왜인지 여유가 보이지 않는다. 주형은 난감한 듯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지욱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아, 하며 탄식했다.

“미안. 너무 오랜만에 봐서 흥분했네, 형이.”

“아니야. 형, 일단…… 어디서 일해?”

“난 곧 말레이로 갈 거야. 배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아서 재촉했던 거고.”

주형을 줄곧 바라보던 지욱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구깃구깃한 담뱃갑은 둘의 상태처럼 으스러지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불을 붙이고 한숨과 함께 빨아들이던 순간 주형이 말했다.

“다시 오면 되잖아. 중개하는 거면 한국도 자주 와야 하지 않아? 마음 급하게 안 먹어도 될 거 같은데.”

“아냐.”

지욱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에는 아예 정착할 생각으로 가는 거야.”

“……뭐?”

주형은 멍한 얼굴을 했다.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형이 가면, 나는?’

빚은? 그 2억은? 이제 지욱이 와서 정신적으로 의지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형은 기가 찼다. 견고하게 버티려 애쓰던 마음이 갑자기 무너졌다.

“해외로 간다고.”

“잠시만.”

“응?”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욱은 정말 순수해 보였다. 그러니까, 세상 물정도 모르는 병신 새끼 같다는 뜻이었다. 주형에게 ‘순수하다’, ‘착하다’라는 뜻은 그러했다. 순수하면 뭣도 모르고 머리채를 잡혀 맞아야 하는 삶을 살았으니까. 물론 본처 자식인 지욱은 한 번도 창협에게 맞지 않았으니 조금은 더 순수할 수 있겠지만.

“……그럼, 빚은?”

“빚?”

“내 앞으로 아직 2억이 남아 있어. 이거, 야반도주하면 큰일 나. 이거 아버지 빚이라고. 생각해 보니까, 형도 이거 같이 갚아야 하는데 해외로 간다고?”

이민을? 주형은 어이가 없어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심지어 그렇게 이민을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빚이 있는 이상 추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지욱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기서 자리 잡고…….”

“형.”

“어?”

“같이 갚아줄 거 아니면 나 잡지 마.”

주형의 얼굴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었다. 미동 하나 없이, 밀랍 인형처럼 굳은 그의 낯은 고개를 얕게 젓기만 했다. 그리고 지욱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

“좆같은 새끼들 거기서도 보면 나 자살할 거 같으니까. 나도 오랜만에 온 형한테 이런 말은 하기 싫었는데, 그냥 돌아가 줘.”

천국 캐피탈 놈들은 분명히 찾아올 거다. 소액도 아닌 데다 2억이 넘는 빚이니 돈을 생각해서라도 올 것이고, 무엇보다도 윤재연이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다. 모든 명분이 완벽한 상황에서 재연이 저를 추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주형은 그런 대치를 원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고분고분히 착취당하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돈을 갚고, 그리고 해방되는 게 꿈이었다.

“주형아, 형이…….”

“씨발, 형. 닥쳐.”

재연이 저만 건드릴 거란 보장도 없다. 주형은 지욱이 잘못되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만 욕을 해 버렸다. 아무리 애증을 가지고 있는 제 형이라도 재연에게 지욱을 내줄 수는 없다.

희생당하는 건, 이따위 관심을 받는 건 저여야만 했다.

“…….”

“내가 그 새끼들한테 무슨 짓 당하고 사는지 모르면 그냥 닥쳐.”

재연에게 무슨 말을 듣는지, 어떤 행위를 당하는지, 어떠한 감정을 받아내고 있는지 안다면 아무런 말도 못 할 거다. 주형은 괴로우면서도 화가 나는 듯 씩씩거렸다. 재연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막과도 같은 삶에 물을 잔뜩 뿌리고, 이윽고 홍수를 일으키고, 제 땅을 난잡하게 마구 쑤셔 댄다.

“형이 그래서 같이 가자는 거잖아. 주형아. 너 험한 일 못 시킨다니까? 내가 너 구해주려고 하는 거야. 우리 같이 아버지 돈 갚다가는 다 죽어! 넌 형이랑 같이 나락 가는 게 꿈이야? 아니잖아!”

지욱은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듯 그냥 계속 주장했다. 그런 지욱이 못내 답답해서 주형이 또 소리를 질렀다. 낮에는 아이들의 즐거운 고함을 받아내던 놀이터는, 새벽녘에 가까워서야 어른의 비명을 흡수하고 있었다. 천국과 지옥처럼 놀이터는 낮과 밤마다 모습을 다르게 했다.

“나락은 무슨, 씹, 이미 나락에서 사는데 무슨 멍청한 소리야? 그리고 튀다가 걸리면 어쩔 건데!”

어릴 때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하는 새끼가 정상일 리 없다. 주형은 재연을 그냥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놈이었다면 아득바득 이겨 보겠다고 애썼겠지만 재연에게는 이길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주형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지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내가 조져지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튀어서 형이 잡히면 어쩌냐고. 난 이제 가족이라곤 형밖에 없고 믿을 것도 형밖에 없는데. 형이 꼬신 거 알면 분명 형이 인질 된다니까? 게다가 이거 민창협 그 새끼 빚이라서……!”

“주형아!”

제 아버지의 이름을 험하게 담자 지욱이 화를 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예의를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는 했다.

그럴 팔자가 아니고, 그럴 여유 따위는 하나도 없는데. 주형은 그런 지욱이 못내 답답했다. 노름에 찌들어 빚을 몇억이나 만들어 놓고 간 애비에게 무얼 더 챙기겠다고 이러는 건지. 주형은 그러면서도 어릴 때부터 봐 왔던 그의 말은 거역할 수가 없어서, 입을 그냥 꾹 다물었다. 새빨간 입술이 잇새로 숨을 거칠게 내보냈다.

“……이, 씨발…….”

짜증 나네. 주형은 머리를 강하게 헝클었다.

민창협. 제 아버지다. 본처를 버리고 어디서 이상한 여자-주형의 친모-를 만나 주형을 낳을 정자를 주고, 그 여자를 때리다가, 나름대로 아비 노릇을 해 보겠다고 몇 년 발악했다. 그리고 결국 주형이 다섯 살이 되는 해 다시 정신을 놓았다.

창협은 주형이 25살이 될 때까지도 행패를 부렸다. 그마저도 주형이 17살이 되고, 지욱이 20살이 되며 머리가 굵어지면서 조금 고분고분해지긴 했지만 주형과 지욱을 때리지만 않았을 뿐 기행은 계속했다. 자그마치 22년 동안 말이다.

‘늙다리 새끼, 뒈지지도 않나’ 싶을 때- 그는 마침내 죽었다. 참고로 죽이고 싶었지만 전과가 남으면 알바를 못 하니 죽이지는 않았다. 완전 범죄를 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어련히 길 가다가 돌을 맞아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우 아쉽게도 그는 차에 치여서 과다 출혈로 죽었다. 주형은 기억도 나지 않는 다리에서 그가 차에 치여 죽었던 것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상스러운 새끼. 내장이 터져서 고통스럽게 갔어야 했는데. 주형은 부러 악독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죽었어도 이미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였다. 불법으로 빌린 돈이라 법적인 근거에 따라 파산 신청도, 한정 승인도 할 수 없었다. 주형은 행정 구멍 틈으로 떨어져 지옥을 기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등장한 지욱이 하는 말을 듣자 기가 찼다. 주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와 대화를 계속 했다가는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전화번호 줄 테니까 나중에 연락해.”

휴대폰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지욱은 덩달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형보다 조금 작은 키의 그가 불안정한 눈빛으로 주형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훤하고 피부도 누렇게 뜬 것이, 그도 그새 많이 변한 게 보였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주, 주형아.”

“왜.”

“내 사무실 주소 알려 줄게. 사무실 빼기 전에 나중에 찾아와.”

“……알았어.”

주형은 수전증이 생긴 지욱이 싸구려 볼펜으로 주소를 쓰는 것을 바라봤다. 그렇게 형제의 상봉은 전화번호 교환을 끝으로 미적지근하게 끝났다.

***

재연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작게 일어났다.

“아악!”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안면이 재차 일그러졌다. 다져 놓은 고기처럼 얼룩덜룩하게 더러워진 얼굴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걸레가 된 옷을 걸치고, 지금은 다 터져 바닥에 흩어진 금목걸이를 걸고 있던 사람. 진후였다. 재연은 진후를 때려죽이고 있었다.

“사, 살려, 으윽, 악!”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붙어 있는 숨이 진후를 괴롭게 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꼴로 재연의 부하들에게 잡혀 있었다.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복부를 세게 얻어맞으니 피가 나왔다. 내장이 파열된 듯했다. 몸이 불타는 듯 괴로웠다. 욱신거리다 못해 이제는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후…….”

재연이 비명을 듣다 지쳤는지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채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재연은 숨을 푹 내쉬었다. 담배를 벌써 네댓 개 피우고도 부족한지 담뱃재를 구두 굽으로 짓밟은 뒤에는 또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꺼낸 뒤에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제 부하에게 불을 붙이도록 했다. 이윽고 성급하게 담배를 한 번 빨아들였다. 주형에게 웃어 줄 때만 드러나는 보조개가 폭 패며 예쁘게 움찔거렸다.

“연락은?”

주형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지도 며칠이나 지났다. 아주 정확히 8일이 지났다. 그도 그럴 게, 재연은 주형에게 삐진 척을 한 뒤 그가 먼저 연락을 두어 번 해 오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렇게 나왔다. 상대방을 정말로 빠지게 하고 싶으면 ‘밀고 당기기’, 일명 ‘밀당’을 하라고.

그런데 조금 밀었다고 하나도 당기지 않을 줄이야. 게다가 연락을 씹다니. 재연은 화가 나고 서운했다. 안 그래도 몰라주어서 너무 섭섭했는데.

“아직…… 받지 않으십니다.”

“문구는 여전하고?”

“예. 상대방의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음성이 나옵니다.”

“……나한테 서운한 게 있나.”

재연이 중얼거렸다. 그는 와이셔츠를 한 번 더 걷었다. 예쁘게 정리하려고 했는지 섬세한 손길로 몇 초 건드려 보다가, 또 갑자기 울컥한 듯 짜증스럽게 팔을 탁 내렸다. 그리고 피우던 담배를 반도 태우지 못하고 그냥 버렸다. 짜증이 마구 일어났다.

“제,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어. 이 셔츠는 버릴 거예요.”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파이프를 들었다. 분을 담아 때리다 못해 열이 나서 재킷은 벗은 지 오래였다. 재연은 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가슴 근육에 딱 맞게 붙어 있는 하얀색 셔츠가 거칠게 주름져 있었다. 직접 손을 쓴 건 오랜만이라 피도 여러 군데 묻었다. 허리춤을 손으로 짚었다. 검은색 베스트 원단이 만져졌다.

퍽! 재연이 다시 한번 파이프를 휘둘렀다. 이제 놓아주라고 손짓하자 진후의 몸이 축 처졌다. 보잘것없는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들고 살려 달라고 두 손을 모아 비는 모습에, 재연은 그냥 그 얼굴을 발로 밟았다. 구두 굽에 묻어 있던 자국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구역질 나도록 진득한 진흙과 흙탕물이 진후의 얼굴에 덮였다.

“씨발, 그러니까, 왜 형 돈을 떼어먹어요.”

그는 단어를 하나 말할 때마다 팔을 휘둘렀다. 둔탁한 흉기 소리와 발길질을 하는 소리, 주먹을 휘두르는 소리가 번갈아서 났다. 진후는 한 문장을 말하는 동안 대여섯 대를 얻어맞아야 했다. 처음에는 뼈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있어 밟을 때 딱딱한 감이 있었는데 그새 하나둘 부러졌는지 약간 물컹했다. 재연은 그게 자못 싫어 사납게 발길질했다. 아쉬웠다.

이렇게 금방 망가지고 말 새끼가, 뭘 믿고 누구를 건드려. 면상이 못내 꼴 보기 싫어졌다. 재연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며 분을 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3천만 원은 온갖 핑계를 대고 거절했던 주형이 정작 이런 별 볼 일 없는 새끼한테는 형, 하고 부르며 빌빌거렸다니.

재연은 주형의 일상을 염탐하기 위해 사람을 하나 붙여 놓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며칠 전 만난 진후와 주형이 이야기를 달갑게 한다는 것을 듣고 뒷조사를 시켰다.

그런데, 진후가 공사장의 반장과 합심을 해 주형을 포함한 인부의 임금을 반 이상 떼어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주형은 그로 인해 아주 큰 생활고를 겪었다고 하고. 물론 주형이 체불을 해서 제가 따먹을 수 있게 된 건 매우 기쁜 일이었으나 주형에게는 그냥 ‘천하의 개새끼’일 뿐이다.

그래서 아직 사실을 모르는 주형이 상처를 받고 충격으로 쓰러지기 전에 먼저 처리하려고 했다. 어차피 잘생긴 외모에 은근히 여린 주형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을 테니까.

“우읍, 컥.”

“형이 화가 났잖아요. 당신, 때문에.”

조금 겁만 주려고 했다. 갈비뼈 몇 개 정도를 부러뜨린 뒤 다시는 돈을 떼어먹지 말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형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 주형을 위해서 하던 일인데 그런 주형이 저를 거부하다니. 너무 황당하고 속상한 일이다. 재연은 마음이 찌릿찌릿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자흑, 모…… 해읍, 디, 아.”

잘못했습니다. 진후가 한 말이었다. 처음에는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던 그가 몇 분이나 후려 맞고 나서 한 사죄다. 뺨을 때리는 것을 시작으로 어지간히 많이 때렸더니 이제는 몸이 흐물흐물해진 모양이다. 시체에 대고 재미를 보려고 하는 듯해 질렸다. 팽팽한 살의 맛이 나지 않는다. 좀 버티고 있어야 재미있는데.

씨발. 짜증이 난 재연은 마지막으로 쇄골을 발로 밟아 부러뜨렸다. 화가 어지간히 난 건지 아랫입술이 새빨개져 있었다. 이로 짓씹다 못해 잇자국까지 나 있었다. 제대로 된 움직임을 할 수 없는 진후는 으아, 하고 괴상한 음성을 흘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이윽고 몸에 힘을 툭 잃으며 눈을 감았다. 기절이든 사망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저거 치워요.”

“태울까요?”

“마음대로.”

가벼운 말씨와 몸짓과는 달리 재연의 마음은 무거웠다. 벌써부터 이렇게 주형과 삐걱거리다니. 그는 저와 혼인 신고까지 무사히 마친 뒤 집에서 함께 지내야 하는데, 주형이 이런 식으로 쉽게 넘어오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었다.

차에 탄 뒤에는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의 차가운 낯과 잘 어울렸다.

“낙원구로.”

“아, 알겠습니다.”

평소에 잘 가지 않던 곳을 명하니 놀란 건지 기사가 한 번 끔뻑였다. 이윽고 차는 무거운 소음을 내면서 움직였다.

***

오후 11시 58분. 2분이 지나면 자정이 된다. 재연은 부하들을 집으로 보내 두고 썩은 내 나는 반지하 복도에 기대고 있었다. 담배를 아무리 피워도 이 공간은 이미 찌들어 있어 티가 나지 않아 좋았다. 재연은 뻑뻑한 연기를 뿌려대며 주형이 언제 올지 생각했다.

참고로 문은 건드리지 않았다. 마음대로 들어가면 주형이 이번에는 정말로 경멸할까 두려웠다. 그렇다. 재연은 그렇게 마음대로 지랄을 하는 듯 보여도 나름대로 선은 있었다. 주형에게 사랑을 받고 싶고, 예쁨을 받고 싶고, 또한 영원히 아껴 주면서 들러붙고 싶었다. 그가 예쁘게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런 인내쯤은 쉬웠다.

하지만 기다림은 괴로웠다. 다만 분노는 곧 걱정으로 바뀌었다. 자정이 넘고 나자 주형이 걱정되었다. 보고 싶었고, 그립기도 했다. 약 일주일 되는 시간 동안의 밀당은 재연에게 아주 큰 괴로움을 주었다. 그래서 재연은 그냥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리고 주형을 어디에 묶어 두기로 결심했다. 좀스럽게 집착하는 애인 따위는 되지 않겠다 생각했으나 주형을 생각하면 이게 나았다.

그렇게 평소에는 이틀에 한 개비 꼴로 피우는 담배를 하루 동안 한 갑 정도 피우고, 거의 비어 있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느리지만 남들과는 달리 무게감 있는 움직임이 보였다. 인영. 발걸음 소리.

“형?”

“……이사님?”

천천히 타들어 가는 담배를 금세 껐다. 주형에게 냄새가 날까 봐. 재연은 주형 또한 흡연자라는 걸 알면서도 내심 이렇게 내숭을 부리고 싶었다. 그가 아무리 폭력적이고 제멋대로라도 그 나름대로의 낭만 같은 것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주형이 의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끔뻑이면서 숨을 내쉬었다.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니고 곤란해서 난 음성이었다. 일단 여기서 수군거리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와서 행패를 부릴지도 모르니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었는지, 황급히 열쇠를 뒤적거렸다. 당황했는지 어디 갔지, 하고 중얼거린 뒤에는 두리번거렸다.

“아. 여기 있네.”

아까 떨어뜨렸나 보다. 주형은 다행히도 마침 발길에 채는 열쇠를 반가워했다. 다만 재연은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귀신 같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윽!”

재연이 주형을 덮쳤다. 그리고 그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건장한 남성 둘이 있으면 꽉 찰 정도로 좁은 현관에서, 주형은 강제로 벽에 부딪혔다. 쾅! 문이 닫혔다. 싸구려 철제문이라 그런지 후들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어떠한 완충 장치도 없어 매우 시끄러웠다.

“이, 게 무슨……!”

“어디 갔었어요.”

주형의 코앞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고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얼굴을 오랜만에 보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주형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일하고 왔습니다.”

“이 시간까지? 12시까지 하는 일이 뭐가 있는데요.”

한숨을 삼키면서 입을 여는 주형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질 뻔했다. 건장한 몸집에 비해 가느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이 예뻤다. 이런 실랑이 따위는 없이 그냥 그의 눈두덩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요즘 카페는 늦게까지 합니다.”

“그럼 휴대폰은 왜 껐어요? 차도 없는 주제에 이 시간에 다니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납치? 허.”

너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오다가 멍청하게 길이라도 잃는 거 아니냐고 비아냥거렸다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고 말했을 텐데, 그보다 훨씬 어이없는 추측이었다.

벽에 몰린 채로도 주형은 빛을 잃지 않았다. 반항기가 가득한 얼굴이 겁도 없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재연의 가슴을 천천히 밀어냈다. 용기는 없어 거칠게 밀치지는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던 때였다.

재연이 또 갑자기 주형의 팔뚝을 확 붙잡았다. 미묘한 피비린내와 함께 풍겨오는 그의 향수 냄새, 담배 냄새가 뒤섞였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와 힘을 느끼기도 잠시 재연은 신발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주형 또한 강제로 이끌려 어쩔 수 없었다.

재연은 주형을 붙잡은 손길에 힘을 주고, 그대로 주형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몸뚱이의 무게 때문에 커다란 소리가 났다. 주형에게서는 진한 신음이 질질 흘렀다. 그렇게 일어나려고 했는데, 불가능했다. 재연이 그의 위를 깔고 앉아버텼기 때문이다. 험상궂게 느껴지는 손등 핏줄이 삐죽거리면서 다가왔다.

“이사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재연이 쇄골인지 목인지 모를 부분을 손으로 콱 짓눌렀다. 생각보다 가느다란 목이 한 손에 쏙 들어오자 쾌감이 짜릿했다. 재연은 이게 그립고, 주형의 살결이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났던 거다.

이런 그를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가만히 있어.”

“씨발, 야.”

황당했다. 재연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벽에 밀치고, 이제는 깔고 앉아?

“가만히 있으라고!”

재연이 처음으로 화를 냈다. 소리를 높이자 좁고 삭막한 공간에 그의 메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주형으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요. 이대로.”

나랑 있어. 재연은 이상할 만큼 애처롭게 그리 중얼거리며 주형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버틸 순 있었지만 언제 돌변해 목을 조를지 모르므로 긴장이 됐다. 재연에게는 사랑이었지만 주형에게 이 상황은 그냥 생존 게임이었다. 아직까지는.

“연락 왜 안 받았어요?”

“일하는 중에 배터리가 나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 여기요. 확인해 보시죠.”

주형이 끙끙거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겨우 꺼냈다. 재연은 말없이 휴대폰을 가지고 가 버튼을 눌렀다. 정말로 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잿빛에 잠겨 있었다.

“…….”

천천히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주형의 발목을 턱 잡았다. 느긋한 손길로 그의 바지 소매를 끌어올리자 발목이 드러났다. 근육이 조금 있지만 매끈한 피부를 보자 입맛을 절로 다시게 됐다. 주형은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는 듯 의심 어린 눈길로 있었다.

주형은 정말 장하게도 가만히 있어 주었다. 재연은 그런 그를 흘금 바라보고서는 두 손을 모두 다 발목으로 가져갔다. 무슨 마사지라도 하듯 천천히 감기는 손가락에 주형이 소리 없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윽고 아주 갑작스럽게 힘을 콱 주는 모양새에 주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사님. 이게 무슨……!”

“가만히 있어요.”

응? 재연이 다정하게 달랬다. 예전의 그 모습이다. 하지만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주형을 걱정하느라 생긴 불안으로 인해 그는 다소 비이성적인 상태였다. 그러면서 힘을 서서히 주자 주형이 주먹으로 바닥을 쾅 내리쳤다. 하지 말라는 듯이 움직여 보려고 해도 재연이 다리 한쪽을 깔고 앉고 있는 데다가, 한쪽 발목은 휘어잡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씹, 흐윽, 아파!”

발목을 옥죄는 손가락이 무서웠다. 주형은 심장이 쿵쿵거리다 못해 녹는 감각이 들었다. 뇌가 저릿저릿했다. 일어서고 싶다. 괴롭다. 주형은 절망 어린 눈길로 재연을 바라보며 야, 씨발, 야, 하고 계속 화를 냈다.

“가만히 있으면 안 아파요.”

“이, 게 무슨……. 사, 람 불구로 만들, 흐악!”

“이게 다 형을 위한 거예요.”

나랑 있어요. 재연은 그렇게 속삭이며 두 손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힘을 주었다. 와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주형이 욕을 내뱉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

재연은 주형의 발목을 으스러뜨리고 나서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아주 살짝 금이 가도록 애쓴 것이므로 지금 당장 가면 금세 회복하고 말 거다. 재연은 주형이 다쳤을 때를 이용해 그가 제게 의지하도록 만들 심산이었다. 지독한 순애보에 주형은 버티지 못하고 늘어졌다.

주형의 옷은 그대로 두고, 하의를 벗겼다. 재연의 손길이 파고들어도 주형은 씨근덕거릴 뿐이었다. 화를 낼 힘이 나지 않았다.

“이, 음침한…… 새끼.”

“내가 미안해요.”

재연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살갗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주형의 허벅지 근육이 너무 좋은지 그는 정신이 홀랑 팔린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쪽, 하며 귀엽게 키스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주형이 씩씩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그가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훤히 드러난 하반신 모습에 머리가 띵했다. 기절할 거 같았다. 너무 짜증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이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현실인가. 주형은 천천히 몸을 타고 번지는 고통을 무시하며 숨을 최대한 고르게 쉬었다. 그러자 이제는 우습지도 않은 재연의 어리광이 들려온다.

“내 연락, 안 받았잖아요.”

“……하.”

이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 이런 새끼는 교화도 안 된다던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저거. 주형은 재연이 이제 무섭다 못해 질렸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처연해 보이는 그의 행동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제 원죄이리라. 도대체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내가.’

대한민국에 몇 없을 것 같은 역대급 사이코가 제게 이러고 있다니. 게다가 몇 주 지켜본 결과…….

“어떤 놈이랑 같이 있었어요?”

진짜, 사랑인 건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이런 놈한테 사랑을 받는 건 그건 그것대로 좀 문제가 있다.

주형은 서서히 감겨 오는 손길이 허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사르르 몸을 덮쳤다. 재연이 다리를 쫙 잡아 벌리자 주형의 닫혀 있던 구멍이 열리고, 통통한 회음부가 달빛을 받으며 드러났다. 쫀득하게 젖어 있는 것보다 훨씬 음란한 모습이었다.

재연은 허벅지 안쪽을 끈적한 손길로 주물렀다. 근육을 풀어 주려는 듯 자그마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던 순간 재연의 손가락에 힘이 콱 들어갔다. 이윽고 구멍이 쩍 열리고 회음부가 갈라진 게 보일 정도로 주형의 허리를 확 잡아 올렸다. 붕 뜬 몸에 당황해 말도 잇지 못할 때였다.

“야!”

재연의 얼굴이 다리 사이로 쑥 들어왔다. 숨결이 흐르고 속살거리는 감각이 음낭에 닿았다. 이윽고 혀가 들어온다. 말캉하고 쫀득하게 젖어 있는 불그스름한 살. 놀라서 주형은 버둥거리며 재연을 밀치려고 했다.

“애인?”

“하지, 하, 흐으…… 윽!”

동그란 알을 재연이 입에 물었다. 그리고 혀를 야살스럽게 놀리면서 또 말했다. 주형은 숨결이 순식간에 덮쳐오는 감각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억눌린 신음과 함께 살이 꿈틀거렸다.

“친구?”

혀를 쭉 내밀고 음낭을 뱉었다. 그런 뒤에는 고개를 아래로 당겼다. 회음부를 미끄러지듯 간드러지게 지나친 뒤에는 구멍으로 혀를 넣었다. 야무지게 닫혀 있는 구멍을 열고 불룩한 살을 억눌렀다. 그러기가 무섭게 주형의 좆이 확 섰다. 재연은 눈을 들면 보이는 그의 기둥에 새삼 만족했다.

“아니면, 숨겨둔 짝사랑 상대?”

아, 여자인가? 재연이 그리 중얼거렸다. 무감각한 얼굴로 눈을 천천히 감더니, 이내 혀를 재차 내밀었다. 구멍 사이를 파고드는 혀가 주형을 농락했다. 일주일 넘게 가만히 둔 덕분에 안은 뻑뻑하게 잘 닫혀 있었다. 그새 다른 새끼에게 대주지는 않은 걸 보니 안심이 됐다. 재연은 일렁거리던 마음속 수면이 천천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 새끼예요?”

혹시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재연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형의 곁을 꿰차고 있는 걸 상상하기만 해도 화가 났다. 그래서 괜히 혀를 쭉 내밀어 주형의 속을 진득하게 핥았다. 그게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형의 곁에는 저만 있어야 했다. 예전의 저처럼 서로만 의지하고 있다가, 주형이 저를 오롯하게 바라볼 때 그를 늪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주형은 그렇게 말없이 떠났으니까. 어렸을 때도 그리도 차갑고 매몰찼으니까. 쪽지 하나 남기지 않았으니까.

“흣! 흐……. 이상, 하다고. 하지, 하지 마십, 하윽.”

“으음…….”

구멍 속을 핥고 콕콕 찔러 댔다. 쪽 빨아들이면서 엉덩이를 지분거리자 작게 바둥거리는 몸짓이 느껴졌다. 엉덩이의 외곽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린 뒤에는 골반을 쥐고, 그다음에는 골반을 이루고 있는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기를 잇고 있는 근육 덩어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단단한 살덩이와 핏줄이 만져졌다. 재연은 그의 자지를 손에 쥐고 구멍을 빨았다.

추웁, 춥 하는 적나라한 소리를 내며 그를 고양시켰다. 주형은 어찌할 바도 모르고 움찔거렸다. 강제로 당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욱신거리는 발목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좆은 계속 자극을 받아 끄덕거리고 있고, 남이 구멍을 핥아 주는 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런 중에 아래로 피가 잔뜩 몰리고, 허벅지가 당겨오는 게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더럽잖아. 더럽다고. 주형이 흐느꼈다. 이런 행위는 아직 뒷구멍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주형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짓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픈 게 아니라 속을 간질이는 게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성기가 꼿꼿이 서서 움직거릴 리가 없는데. 주형이 으읏, 하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그렇게, 좋아요?”

“아!”

재연이 주형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작게 출렁이는 근육이 바르르 떨며 발정했다. 주형은 허리를 허공에 든 채로 버티느라 버거운 듯 크윽, 하고 울음 어린 신음을 냈다. 그렇게 강직하고 귀엽지 않은 소리도 재연에게는 애교 같았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런 행위를 하면서도 불쾌하지는 않고 주형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하지만 주형이 이렇게 좋아하니 멈출 수 없었다. 재연은 좀 더 얼굴을 처박았다.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비집고 그의 음낭을 조몰락거리자 귀여운 소리가 났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주형이 정말 창부 새끼 같았다. 오직 제게만 이런 식으로 다리를 벌리는 거겠지.

제게만. 제게만, 사랑이라고 해주겠지. 재연은 미칠 듯이 기뻐졌다. 기회만 된다면 주형을 제집에 넣어 두고 사슬로 묶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그는 저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다.

“구멍이, 움찔거려요. 형. 혀로 하는 게 그렇게, 좋아?”

“씹, 하으……. 더, 러우니까 떼십, 시오. 차라리……!”

“차라리?”

그가 대안을 제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재연은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타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젤을 쓰지도 않았는데 주형의 자지에서 물이 계속 찔끔찔끔 흐르기도 했고, 무슨 이유인지 재연의 입에서도 자꾸만 침이 고였기 때문이다. 분명 맛있는 딸기나 복숭아를 먹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재연은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교감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허벅지를 꽉 움켜쥐기만 해도 주형의 혈관 속 피가 어디로 흐르는지 대충 알 수 있다. 그가 몸을 바르르 떨면서 박동하고 있으니까.

“손, 이나 좆……이, 차, 차라리.”

“…….”

주형이 아주 소심하게 웅얼거리는 게 들렸다. 아무리 작아도 제게는 다 들렸다. 재연은 그 목소리를 듣고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이 도리 없이 다 끊기는 걸 느꼈다. 툭, 툭. 한 방울, 두 방울 흐르던 점액이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재연이 그의 오금을 세게 눌렀다. 그리고 그를 아예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내려 두었다.

이윽고 안에서 발기하고 있던 제 좆을 꺼냈다. 바지에 억지로 억눌려 있던 것이 해방되자 탁 튀었다. 주형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생각해 보니 콘돔도 젤도 없다. 주형은 그제야 제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느꼈다. 어릴 때부터 별로 똑똑한 과는 아니었지만 섹스에 정신이 팔려서 윤재연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주형이 씨발, 하고 중얼거리자 그 순간 재연의 손가락이 구멍을 뚫었다.

“내 좆이 그렇게 좋았어요?”

주형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들썩였다. 꼬리뼈가 탁탁 부딪히자 귀여운 개가 바닥에 대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재연은 그를 차라리 개로 만들어 내내 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사람이니 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단단하고 튼튼한 몸에 목줄을 채워 놓고 하네스를 입히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주형의 온몸을 핥아먹고 싶었다. 재연은 혀를 내밀어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게슴츠레한 눈길을 주형에게로 쏟아 냈다. 주형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흠칫 눈을 끔뻑이면서도 홀린 것처럼 그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씩 웃으며 유혹적으로 혀를 작게 내민 뒤 손가락을 적셨다.

이윽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푹푹 쑤셨다. 정액 조금과 침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이 험악하게 안을 녹였다. 어떤 배려도 없이 제 기분에 취해 그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자, 주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을 쭉 벌리고 아아, 하면서 울고 있었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아래로 꽈악 짓누르자 주형의 구멍이 손가락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상스럽고 음란하기 그지없는 구멍이 자못 원망스러웠다.

“씨발, 내 좆이 그렇게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하윽, 미친, 터지겠……. 아!”

“그냥 얼른 풀어줬을 텐데.”

주형은 울먹거리면서 다치지 않은 다리를 꾸물거렸다. 그러나 재연이 사이에 있어 크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계속 벌어져 있는 다리가 저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못해 안으로 꽉 굽히자 다리가 쫙 당겼다. 잘못해서 발목에 힘을 주자 미칠 듯 저리고 아팠다.

“으윽, 으…… 흣, 아!”

고통과 쾌락이 번갈아 다가왔다. 너무 강도가 세고 험한 섹스에 주형은 울기 바빴다. 발목을 한 번 꺾인 탓인지 반항할 힘도 잘 나지 않는다. 이때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주형은 이미 돌아 있는 재연의 눈을 바라보며 으응, 하고 앙탈을 부리듯 울었다.

눈을 마주치자 재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애롭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사르르 감기며 녹았다. 흰자위가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사랑스럽고 고왔다. 달빛이 해수면에 녹듯 느릿하고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주형은 그의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한탄했다.

“내가 자꾸 아쉽게 말만 걸어서 너무 서운했겠어요. 형.”

재연이 그리 말하며 주형의 배를 꽉 억눌렀다. 속을 지분거리다 못해 아예 찢어 놓으려는 심산인지 그가 잔뜩 배를 붙이고 주형의 몸을 깔아뭉갰다.

“미, 친. 배…… 터진, 윽, 안, 돼. 누르지 마, 누르지 말라고!”

주형은 어깨를 바닥에 붙이고 움찔거렸다. 너무 험악한 손길에 그가 어깨를 흔들었다. 미칠 듯이 다가오는 사정감에 그가 눈을 꽉 짓눌러 감았다. 눈가에 주름이 생기도록 애쓰는 모습이 드러났다. 코까지 찡그리며 성감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가락을 몇 번 쑤시고 배를 눌러 주었다고 해서 그대로 토정을 하면 그건 그것대로 너무 우스우니까.

‘자존심이 있지.’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주형은 엉덩이를 꽉 조이며 참았다. 둔부가 움찔거렸다. 힘을 주다 못해 근육이 험상궂게 꿈틀댔다. 재연은 통통하게 부풀어 있는 그의 엉덩이가 너무 좋았다. 작게 주물럭거리던 손을 옮겨 자지를 꽉 쥐었다.

재연이 푸핫, 하고 어여쁘게 웃었다. 꼴에 버티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런 모습을 저만 보고 있다니. 너무 만족스러웠다. 연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모습도 아주 귀엽다. 주형이 좀 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배배 꼬고 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원망이 들었다. 왜 주형에게는 자지를 넣을 만한 구멍이 하나밖에 없을까. 재연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귀여운데, 귀여워해 줄 구멍이 딱 하나밖에 없다니. 왜.

“오랫동안 나랑 하고 싶었나 봐요.”

“아, 니야. 그럴 리가 있겠, 학.”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주형의 좆을 잡고 거칠게 탁탁 흔들었다. 그러자 몇 초도 되지 않아 손가락이 금세 젖었다. 정액은 끝도 모르고 줄줄 흘렀다. 자지를 그냥 만지고만 있어서 참을 수 있던 거였지, 이렇게 거친 흥분을 불러일으키면 답이 없었던 거다. 주형이 흐으, 하고 경련하듯 가슴을 떨었다. 재연의 것보다 조금 더 어두운 빛이 있는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재연은 그런 그의 성기를 탁 놓고 손가락을 벌렸다. 끈적하게 늘어진 액을 손수 보여주자 달빛을 받아 정액이 반짝거렸다. 쓸데없이 아름다운 손가락과 실 같은 정액이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이런 그의 능욕이 그리웠던 건지 주형은 이상한 안도감까지 느꼈다.

미친 거다. 발목까지 망가졌는데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머리까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아랫입은 지금 내 손가락을, 이렇게나 게걸스럽게 처먹고 있잖아요.”

재연이 주형의 구멍 사이를 좀 더 헤집었다. 주형은 생각보다 매우 까다로워서 아주 깊숙이 처넣어 주지 않으면 잘 느끼지 않았기에, 그는 조금 애를 써야 했다. 되는대로 쿡 쑤셔 넣어 손가락을 다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굴리자 주형의 자지에서 끈적한 것이 다시 쏟아졌다. 아주 진했다. 정말 조금 만져 주기만 해도 물을 질질 싸는 꼴이 아주 선정적이었다.

역시 다른 새끼랑 놀아난 건 아니었다. 재연은 주형이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아무리 튕겨도 결국 저밖에 없다는 거겠지. 이렇게 애교를 부리고 튕기는 그도, 참 사랑스럽고 멋있다. 동시에 그의 구멍은 미치도록 오물거려서 탐스러웠다.

“후…….”

이제 아래가 눅눅해졌다. 음습한 욕망을 처넣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섞일 듯이, 구멍은 흥분해 있었다. 주형은 몸을 늘어뜨린 채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할지 몰랐다. 제 몸 중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자 끈적한 액이 주르륵 늘어졌다.

재연은 굵직한 좆 끝을 잡았다. 귀두를 자극하듯 조금 만지작거린 뒤에는 주형의 사타구니를 당겨와 몸을 고정시킨 뒤 성기를 밀어 넣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살덩이는 허리 짓에 따라 구멍 안을 쑥 침범했다. 하지만 미칠 듯 조이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강간하고 있는 것만 같은 감상을 남겼다.

반면 주형은 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젤을 많이 쓰지 않았더니 안이 찢어질 듯 너무 아팠다.

“왜 항상 할 때마다 내 자지 크기 모르는 것처럼 굴어요?”

잘 알잖아. 형은 내 좆집이니까. 허리를 쭉 낮추어 주형의 몸을 덮었다.

그리 붙자 주형이 눈동자를 슬쩍 내렸다. 주형은 제가 뱀에게 잡아 먹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유려한 곡선을 가진 재연이 슬슬 성기를 처넣으며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로 뱀 같았다. 하얀 뱀. 집요할 정도로 다정한 눈동자가 제게 보이는 집착과 천천히 감기는 손길이 음란했고, 또한 미묘한 안심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손길은 무서웠다.

주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가 그나마 별로 아프지 않게 조금만 움직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발목은, 좀 어때요?”

재연은 주형의 발목을 스르르 그러쥐었다. 주형은 점점 옥죄어오는 그의 손길에 무서워진 듯 발버둥을 쳤다. 그러고는 하지 말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낡은 침대가 삐걱거린다. 주형은 제 머리가 침대 베드에 부딪혀 얼얼하다는 것도 잊었다.

“여기는 싫어요?”

“싫, 습니다. 제발 놓, 윽!”

“그러게 연락을 잘, 받았어야죠.”

주형의 발목을 놓아주면서도 재연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의부증이 있다고 말해줬는데 왜 그랬어요.”

“싫다고. 씨, 흐으……. 의부증, 이라니. 네가 왜, 내 아내야. 미친 새, 윽!”

이런 아내 따위는 둘 생각도 없고 싫다. 주형이 진심으로 질색했다. 우으, 하고 억눌린 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재연의 좆이 안으로 쭉 파고들었다. 그 감각에 주형은 헉, 하고 당황하면서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었다. 끝까지 들어온 감각이 선명했다. 툭툭 전립선을 여유롭게 건드리는 자지가 못내 미웠다. 온몸이 저렸다. 주형은 움직일 수도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숨을 헐떡거리기만 했다.

“왜 나를 자꾸 서운하게 해요.”

단말마 같은 신음이 뚝뚝 끊겼다. 주형은 하나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래서 팔을 억지로 들었다.

“형이 나쁜 거예요. 다.”

천천히 팔을 든 다음 재연의 목덜미를 껴안아 주었다. 아주 느긋하고 귀여운 움직임으로 느껴졌다.

“미, 안하다고. 내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재연의 움직임이 멎었다.

“내가, 씨발, 미안……. 연, 락 잘…… 받을, 흣!”

“미안해요?”

재연이 주형의 몸을 들어 올렸다. 제 허리를 다리로 감게 하고 어깨를 팔꿈치로 짚게 했더니 제 위에 앉은 듯 자세가 요염했다. 재연은 이렇게 주형이 건장한 덩치로 제 품에 꼭 들어와 있는 게 싫지 않았다. 관계가 역전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식으로 위에 있으면 그가 꼭 매달리는 거 같아서. 재연은 주형의 구멍을 다시 제 자지에 맞추고 푹 처박았다. 그러자 흑, 하는 울음이 재연의 귀에 들렸다.

엉망진창으로 된 주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혀로 살살 닦아 주고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사의 것처럼 다정했다.

“미안해?”

주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나부끼는 중에도 주형은 이미 재연에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묻는 것에는 맹목적으로 답하는 듯 보였다. 눈이 다 풀린 채 흐느끼는 그는 이미 망가진 장난감 같았다. 재연은 그런 그의 날개뼈를 만지작거리며 껴안았다.

“그럼 됐어요.”

“학, 하아…….”

“나도 미안해요. 발목 부러뜨려서.”

허리를 들썩거리자 주형의 살갗이 뒤집혔다. 젤 없이 성기를 박아 넣었더니 안이 금세 부어서 새빨개져 있는데도 재연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커진 좆이 느껴졌다. 주형은 아아, 하고 괴롭게 신음했다. 품은 아늑했으나 감각이 고통스러웠다. 정말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형, 책임질게요. 알았죠?”

속살이 벌벌 떨렸다. 주형은 제 살이 찢어지다 못해 배 밖으로 피부가 뚫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가 꽉 차 있어 무서워졌다. 그의 몸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작게 바둥거리자 재연이 더욱 강하게 옥죄었다. 힘없이 엉덩이가 철퍽 부딪히자 또 이상한 흥분이 일어났다. 이제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망가졌다.

“흐으, 아…….”

“내가, 형 데리고 살게. 나랑 있어요.”

나랑 있어. 재연이 그리 속삭였다. 아주 비밀스러운 요새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달곰하고 애정 어린 목소리였다. 주형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려오는 쾌락 때문에 그의 몸은 힘을 잃었다. 주르륵 미끄러지는 팔이 못내 아쉬웠던지 재연은 주형의 등 아래로 손을 비집어 넣어 주형을 끌어안았다.

이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인지. 재연은 주형이 저를 먼저 안아 주었다는 데에 감동하고 있었다.

***

드문드문 기억이 있다. 계속 속삭여 주던 재연의 목소리, 그리고 그런 그의 뺨을 한 번 쓰다듬었던 기억, 그 뒤로는 조각잠을 잤다. 몇 번 깼는데, 그럴 때마다 재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화를 내며 묻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 있어서 그냥 또 포기하듯 잤다. 자고 나면 뭐 알아서 되어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좋다고 방방거리는 놈인데 사지를 자르진 않을 거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눈을 뜬 지금,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병원. 익숙하지 않은 냄새다.

“……으.”

잠긴 목소리를 겨우 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넓은 병실이라니. 제 분수에 맞지 않는 병실이라 두려울 법도 한데 주형은 그냥 체념하고 말았다. 윤재연 그 새끼겠지. 이젠 그가 주는 호화로운 것들도 익숙해졌다. 몇 번밖에 안 만났는데.

그 3천만 원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몰라서 일단 쓰지는 않고 있지만 영 신경이 쓰인다. 그게 있다면 이사도 할 수 있을 텐데. 하, 씨발. 속으로 욕을 지껄인 주형은 몸을 겨우 일으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발목에만 깁스가 감겨 있었다. 상체는 멀쩡한가 싶었는데 근육통으로 불타고 있어 괴로웠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허리를 어루만졌다.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처럼 삐걱거리는 게 불편하고 낯설었다. 저놈과 몸을 섞기만 하면 이렇게 되니, 원.

주형은 그리 중얼거리던 차에 더욱 미친 상황을 발견했다. 베드 테이블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따위 것을 줄 만한 놈은 딱 하나밖에 없어서, 그는 고개만 까딱 들어 안을 바라보았다.

쾌유를 빕니다.

양심 뒈진 새끼. 물론 재연이 직접 저 메시지를 썼거나 시켰는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저걸 가져다 놓은 건 재연일 테니까. 메시지를 확인한 것만은 확실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듯한 몸을 풀고 싶었는데, 무언가가 걸려서 불편했다. 주형은 일단 불편한 팔을 둘러보았다. 주형의 몸에 딱 맞는 병원복을 걷어 보자 링거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그냥 발목을 삔 것뿐인데 링거까지 꽂아 준 건가.

‘그래도 덕분에 좀 상쾌하기는 하네.’

아마 비타민 뭐시기 수액인가, 그런 건가? 꽤 비싸려나. 주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고 한순간이었다.

철컹! 주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늘한 감각이 발목에 감돌았다. 발목을 삐어서 생긴 고통과는 좀 달랐다. 주형은 설마, 하면서 이불을 확 헤쳤다.

“이, 씨발…….”

사이코패스 새끼. 쓰레기만도 못한 놈. 존나 질리게 하는 쌍놈. 주형은 씩씩거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낑낑, 제 발목에 감긴 것을 풀어 보려고 어떻게든 해 보았으나 몸을 움직이자 묵직한 링거 바늘이 뽑히려고 하는 통에 포기했다. 바늘이 뽑히면 의사를 불러와야 할 거다. 바깥엔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그럴 순 없었다.

“무슨 수갑을……. 이게 드디어 돌았나.”

원래 재연이 150도 정도 돌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행각을 보니 그는 완전히 180도 돌아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소위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인 것. 주형은 재연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디도 나가지 말라는 뜻으로 발목을 부숴 놓고서 이제는 다른 쪽에는 수갑을 채운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주형은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 하는 새끼인지. 설마 그 어릴 때부터 이런 음흉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겠지.

주형은 그냥 포기하고 푹 드러누웠다. 윤재연 미친놈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어느새 주형은 재연을 따르게 되었고, 그가 주는 안락함을 꽤 괜찮다고 여겼다. 물론 섹스를 할 때는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혹시 제가 발목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형은 무기력했다. 원래라면 씩씩거리며 이거 놓으라고, 풀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을 성격인데 말이다. 유하고 아름다운 손길로 자신을 휘어 감는 재연을 몇 번이나 경험하니 이런 것도 힘들었다. 무슨 반응이 있어야 하지, 항상 ‘형’하고 예쁘게 말하면서 저를 좋아하는 티를 내니까 버거웠다. 차라리 그가 저를 피가 터지도록 팼으면 좋았을 텐데.

주형이 드러누운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른이 된 건가. 썩은 어른. 그렇게 쓸데없이 비장하게 속살거린 뒤에는 돌아누웠다. 꾸물꾸물 링거가 배기지 않도록 움직이자 주형의 가슴을 가리고 있던 병원복이 앞으로 늘어졌다. 늘씬하고 탄탄한 근육을 드러낸 그가 예전을 회상했다.

귀엽고 수줍었던 뺨이 찹쌀떡 같았던 그 시절의 윤재연을 말이다.

- 2권 에서 계속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