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lz] 나락 1권
1. 재회
문득 생각해 보면, 나는 인복이 없는 편이다. 존나. 치가 떨리게.
그야, 함께 나락으로 가자고 손을 잡고 이끄는 새끼들만 주변에 득시글거렸으니까. 혹은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오만 짓을 다 하는 놈들이거나.
그놈도 마찬가지였다. 나락으로 가자고 천사 같은 얼굴로 꼬드기곤 했다.
***
“……그래서 945,000원이 밀렸다고요.”
주형은 말을 하다 말고 어이가 없어 큭큭 웃었다. 말도 안 된다. 일주일 동안 하루 식비 5,000원이라는 미친 조건으로 대타까지 뛰어 줬는데, 뭐? 임금 체불? 고상한 말로 임금 체불이지, 그냥 노동자 등쳐 먹기가 아닌가.
-어어. 그렇게 됐더라고. 주형아, 이걸……. 어떡하냐? 하아.
상대방인 진후 또한 체불된 듯했다. 담배를 쪽 빨며 또 하아, 하고 한숨을 질리도록 내뱉는다. 그 소리마저도 이제는 듣기가 싫어서 주형은 냉담한 목소리를 냈다. 담배를 한 대 물고 싶었으나 돛대 상태-딱 한 개비만 남은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다. 돈이 없으니 담배도 아껴야 했다.
“형님은요? 형님은 얼마 밀렸는데요?”
-나? 나, 나는…… 글쎄.
“씨발, 형은 얼마 밀렸냐고요.”
주형이 분노에 차 욕을 읊조렸다. 충동적인 짜증이었다.
“……미안해요. 지금 열 받아서.”
-새끼, 성질 하고는……. 난 절반은 받았어. 근데, 그 뒤로는 잠적 타서 몰라.
나름 형인데도 불구하고 진후는 이런 하극상을 잘 받아 주었다. 일당으로 벌어먹고 사는 험한 세계의 사람치고는 꽤 유한 편이었다.
“근데 잠적을 탔다는데 형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어? 뭐, 그냥 아는 형님 통해서. 내가 좀 마당발이잖냐.
진후가 어물쩍거리며 말을 갑자기 더듬거렸다. 이내 침을 삼키고 입맛을 다시는가 싶더니, 눈에 띄게 수상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는 형님 누구요.”
-그냥 있어, 인마. 내, 내가 뭐…… 그런 거까지 보고해야 하냐? 아무튼 94만 밀리게 됐다. 나도 삼십 얼마밖에 못 받았어. 답도 안 나온다, 에이, 씹!
갑자기 또 화가 났는지 진후가 분을 터뜨렸다. 주형 또한 모르는 심정이 아니라서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94만 원……. 쉽지 않겠군. 대부 업체에게 줘야 하는 돈이 100만 원이라 딱 맞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 했다. 당장 쓸 생활비는 고사하고 담뱃값도 없으니.
“알겠어요. 나르고 튄 게 반장이었죠? 반장 나오면 연락 주세요.”
-알았다.
전화가 뚝 끊겼다. 주형은 전화를 아무 데나 놓고 방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반지하로 된 방에 아주 작은 창이 있었다. 그 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면 마치 제가 지하 벙커에 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백악관이나 청와대 같은 고급 건물에 산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전쟁통에 사는 기분이라는 뜻이었다. 어지간히도 좆같았다.
퀴퀴한 냄새와 하수구가 뒤섞여 있는 오물 덩어리가 화장실에서 올라왔다. 맡기 싫어 문을 쾅 닫은 뒤에는 180cm가량 되는 몸뚱이가 딱 한 번 뒹굴 수 있는 방에 털썩 누웠다. 골방에 틀어박힌 스스로의 모습이 자못 한심스러웠다.
누워서 창틈으로 바라본 하늘은 매우 우중충했다.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오죽하면 구름이 아니라 먼지 덩어리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감상을 줄 지경이었다.
***
주형이 돈을 빌렸던 천국 캐피탈에서는 납기일이 미뤄지면 꼭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직접 추심을 위해 나서기도 한다는 서슬 퍼런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화를 했더니 이번에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네. 천국 캐피탈 김 팀장님 계십니까?”
-네. 전화 돌려 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쁜 건지 뭐냐고 다짜고짜 욕을 해댄다.
“이번에 납기일이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에이, 씨……. 며칠?
“일주일 정도요. 그 사이에 공사장 가서 한 번 뛰고 올 테니까 조금만 봐주십시오.”
-그래, 뭐. 이번이 처음이니까……. 거, 건실하게 잘하자고? 청년.
“네.”
건실하기는 무슨, 개뿔. 사채업자 새끼들이……. 주형은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어릴 때부터 조폭을 많이 봐 와서 그런지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꼴도 보기 싫다. 이놈의 빚만 갚으면 무조건 은행에서만 돈을 빌려야겠다. 빌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얼굴을 푹 찌그러뜨리고 있기도 잠시,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잦아들었다. 김 팀장 또한 잠시만, 하며 전화를 내려 두었다. 저도 모르게 집중하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내용이 들릴 리는 만무했다. 남성의 목소리였는데, 매우 낮고 우아하게 들리는 게 특징이었다. 주형은 무슨 회장님이라도 납셨나, 하고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눈을 끔뻑였다.
-야, 민주형.
“네. 팀장님.”
-너, 얼굴 그대로냐?
“……네?”
주형은 거울 하나 없는 방의 벽에 기대어 가만히 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저딴 질문이 있나 싶어서.
“어디 고쳤냐고요? 아시겠지만 저 그럴 돈 없습니다, 팀장님.”
정말로 고쳐서 무슨 보형물이라도 넣었다면 얼굴을 갈라서라도 돈을 가지고 갈 놈들이다. 이렇게 번듯한 기업인 척 팀장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불법 채권 추심을 하러 나올 때만큼은 치외 법권에 있는 양 마구 행동하는 놈들인 걸 알고 있었다.
-알아, 새끼야. 도련님이 물으라고 명령하셔서 묻는 거야.
“도련님이요?”
-어, 회장님 아드님. 천국의 이사님이시다.
주형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누구지? 하지만 이런 업체의 회장 아들이라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굳이 얼굴을 묻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 됐고 대답하라고! 얼굴 변했어, 안 변했어?
“얼굴에 손댄 거 없습니다. 살도 안 쪘고요.”
외모가 변한 거냐는 질문이겠거니 싶어 나름대로 성실히 대답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성격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적당히 굽힐 줄도 알아야 했다. 천국 놈들은 정치인과도 엮여 있으니 반항했다간 일만 더욱 커지기 일쑤였다.
-알겠다. 그럼……. 아아! 성격은?
“성격도 변한 거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냥 성격은 내내 까칠하고 더러웠다. 애초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에게 아주 관대하고 포용적인 분위기를 바라는 건 큰 사치였기에.
-그래. 아, 돈은 일주일 안에 보내라. 되지?
“네.”
다행히도 무사히 전화가 끝났다. 전화를 해서 납기일을 미루는 건 처음이라 험한 욕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데, 대표란 인간이 옆에 있어 험한 짓은 참고 있나 보다.
주형은 으휴, 하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 늘어졌다.
***
재연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안 인사를 하러 제 아버지에게 가야 했다. 아주 보수적인 집안의 외동아들인 만큼 대우는 철저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대부분 아주 값비싸고 좋은 것들이었다. 덤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 또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묵직하고 고급스러웠다.
물론 물질적으로만 유복하게 자란 만큼 정서적으로 형성된 연결 고리 따위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기업을 이어받을 그릇 정도로 여겼고, 그는 제 아버지를 유전자 공유 개체라고 생각했다. 천륜이나 부모 자녀 간의 도리 같은 것은 부재했다.
“아버지,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산뜻하게 웃었다. 재연은 제 아버지가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그러니까, 어머니를 닮았다. 그래서 재연의 아버지는 재연이 못마땅했다. 이미 버린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영 불쾌했다. 게다가 하는 짓은 때론 무른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욱. 세간에서는 천국을 조직 폭력배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지만, 총과 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세상이 깔보더라도 재연만은 천국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완벽해야 했다. 이렇게 곱상한 얼굴로 반질반질한 웃음을 띨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재연이 완벽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기생오라비처럼 웃으며 대충 넘길 것이 아니라. 채권 따위를 사들일 때가 아니라.
“거기 앉아 봐라.”
“네.”
재연은 아버지가 어디서 잡아 온 예쁜 여자와 떡을 쳐서 낳은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없었고 유전자를 위해 사들인 난자였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결혼을 몇 번이나 했다. 아줌마부터 누나까지 갖가지 명칭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집안을 꿰찼던 여성은 재연이 커 가는 중에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리고 어느새 사라졌다.
한마디로, 쓰레기라는 이야기다. 재연은 그런 쓰레기와 같은 지붕 아래 사는 것이 싫어 독립을 했다. 그러나 주말 아침이면 이 지긋지긋한 고혈압 환자 노인네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것이 방법이었으니까. 그에게서 지분을 얻어 내고, 돈을 뜯어내려면 이게 가장 쉬웠다.
“너, 무슨 채권을 샀다고 들었다.”
“네.”
“왜 천국 이름으로 매수하지 않고, 매수는 네가 하고 천국에 관리를 넘겼냐?”
꽤 유망한 채권이 있다면 회사 이름으로 매수를 해 기업의 자산으로 넣는 게 좋았다. 개인으로서는 관리의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재연은 뜻이 있어 다른 방식을 고수했고, 내막을 모르는 그의 아버지는 이미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제가 이사로서 관리할 생각으로 매입했습니다.”
“그딴 듣도 보도 못한 신불자 새끼 채권은 왜!”
그가 산 채권은 신용불량자에 가까운 사람이 진 빚이었다. 2억 남짓. 재연은 차근차근 둥지를 틀고 가두리를 만들기 위해 그 채권을 산 것이었다.
“네 사적인 일, 회사에 끌고 오지 마라. 왜 그런 놈 돈을 사 주냐? 장기라도 빼갈 거냐?”
“장기 매매라니요, 아버지. 아침부터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이놈 새끼가! 말장난만 배워서!”
그가 곁에 있는 크리스털 재떨이를 콱 쥐었다. 지금 첩으로 있는 비서가 재떨이를 깔끔하게 치웠는지 딱 들기 좋았다. 재연은 곧 만날 제 사랑을 위해 얼굴만은 안된다고 생각하며 미리 방어하려 했다. 그때였다.
“회장님.”
“……뭔가, 이 비서.”
갑작스레 비서가 끼어들었다. 비서로서 월권을 저질러도 재연의 아버지는 아무런 짜증 없이 대답했다. 오히려 누그러지기까지 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사님도 분명 다 뜻이 있으실 겁니다.”
“저런 멍청한 놈이 내 아들이라니. 이런, 으으.”
“회장님이 어떻게 키우신 도련님인데 멍청하다니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멋진 분이십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때려 키웠지. 재연은 무덤덤한 눈길로 이번에 온 비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맙다는 듯이 살포시 눈을 휘어 웃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만들어진 듯한 미소라 보는 사람에게 있어 기이한 감상을 주었다.
비서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 일가가 몹시 혐오스럽지만 얻고 싶은 게 있어 들어온 눈치였다.
“그래……. 네가 지금 후계자 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런 지랄맞은 일에 눈을 팔지는 않겠지. 넌 날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재연아.”
“네.”
“너한테 거는 기대가 커. 천국이 얼마나 대단한 기업인 줄 아느냐? 이걸 네가 잘 받아서 잘 키워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더 키워서 주고 싶다만, 지금 몸이 영 예전 같지가 않아. 약을 먹어도 잘 듣지 않고.”
재연의 아버지, 윤 회장은 고혈압뿐만 아니라 다른 심혈관계 질환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먹는 약이 아주 많았다.
근래, 재연은 윤 회장의 측근에게 부탁해 그가 고혈압을 촉진시키는 약물을 먹도록 유도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아주 자주는 아니었다. 자주 하면 들킬 테니 일주일에 두 번 정도를 지시했다. 예후가 좋지 않더니 며칠 전에는 한 번 쓰러졌다. 재연은 전화를 받자마자 약이 잘 듣지 않나 봅니다, 하고 걱정스럽게 말한 뒤 속으로 현대 의학의 발전을 뜻깊게 찬양했다.
이제는 눈도 귀도 밝지 않은 영감이 약물을 일일이 다 구별할 리는 만무할 테다. 어차피 병원 측과도 미리 합의된 사항이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재연은 약이 잘 듣지 않아 곤란하다며 또 주절주절 짜증을 내는 노친네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 뭐, 너는 좀 멍청해도 쓸모는 있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기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연은 기계처럼 대답했다. 워낙 곱상한 얼굴인데 미동조차 없으니 왠지 인형 같았다. 말간 낯에는 미묘한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애 따위 만들지 않았을 거다. 널 낳아 준 데에 감사하도록 해라.”
“네, 아버지.”
“……그래.”
예전에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 치기 어린 눈길로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굳이 묻지 않는다. 재떨이를 맞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받아 낼 것도 있으니 고분고분히 넘어가기로 한다. 제 첫사랑을 만날 수 있는 빌미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별로 불쾌한 것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들떴다.
‘만나면 일단 엉덩이부터 때려야겠어.’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벌을 주어야 했다. 재연은 갑작스럽게 제 인생에 들어와 설렘만 남기고 모든 걸 앗아간 그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새빨개질 때까지 몸을 때리고, 채찍을 휘두른 다음, 자지를 물리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입안에 싸 버릴 거다. 그 어린 나이에도 탐스럽게 보이던 입술이 꿈틀거리면서 정액을 먹는 걸 보고 싶었다. 그리고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격하게 범하고 또 범할 것이다.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복수였다. 재연은 그를 얼른 괴롭히고 싶었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만큼 고통을 안겨주고, 그렇게 길들인 다음 조금씩 풀어 줄 심산이었다. 그러면 영락없이 적응하고 말겠지. 인간은 늘 그랬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길들여질 주형의 모습을 적잖이 기대했다.
자위를 하면서 본 사진 속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를까. 재연이 속으로 웃으며 그와의 만남을 고대했다. 그렇게 인형 같은 웃음으로 꼿꼿이 앉아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먼저 일어섰다.
“난 먼저 일이 있어서 이 비서와 나가보마. 나중에 보자.”
“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재연은 아버지 같지도 않은 인간의 뒤통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부드러운 눈길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건 독이 가득 찬 시선이라는 것을.
‘언제 죽이면 좋을까.’
고민거리가 많았다. 언제가 가장 자연스러울지 골몰했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 잘못될까 불안하지는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롭다. 영감은 얼마 남지 않았다.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내부의 장기를 녹이고 망칠 수 있다니. 정말로 좋은 일이다. 쓸모없고 유해한 인간을 금세 처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차려입고 온 코트에 손을 넣으며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을 위해 차를 움직였다. 얼른 그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좀 더 화려하게, 인상에 남게 등장하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을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곤란했지만 말이다.
재연이 온 곳은 어느 카페였다. 룸이 독립되어 있는 고급 카페라 대화를 하기 좋았다.
“임선아 씨?”
“아, 네. 윤, 윤재연 씨 맞으시죠?”
“네.”
맞선을 보기로 했던 선아와 만났다. 선아는 곱게 자란 숙녀였다. 꽤 추운 날씨임에도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모습이 정말로 온실 속 화초 같았다.
대화가 시작되고, 재연은 선아와의 대화가 정말로 재미없었고 흥미롭지도 않았다. 본래 목적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많고 많은 맞선 상대 중에서도 선아를 굳이 택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재연은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할 심산이었다.
“선아 씨.”
“네?”
“천국 캐피탈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할아버지가 넘겨주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할아버지보다 지분이 높답니다.”
“제가 제안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제안이요?”
재연은 지금부터 쭉 있을 주주총회에서 저와 같은 의견을 내주길 바란다고 했다. 재연이 찬성한다면 선아 또한 찬성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회장인 제 아버지를 반하는 때도 올 텐데, 그럴 때도 자신이 지켜 줄 테니 꼭 그를 저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물리치는 이 구도가 선아에게는 영 달갑지 않았다. 이상했다.
“……왜 그래야 하죠?”
“천국은 이제 검은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번듯하게 사업을 하곤 있지만, 그래도 모양새가 나쁘죠. 더 커지려면 이건 필수적인 작업이에요.”
재연은 제 아버지가 회장직에서 내려오고, 제가 회장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검은돈에서 벗어난다는 명목으로 조폭 기업의 특징을 모두 청소할 생각이었다. 그 김에 상징적으로 제 아버지를 제거하는 게 그의 최종적 목표였다. 어차피 더 큰 시장으로 나가려면 이런 명목 또한 필요했다. 재연은 천국에도 욕심이 있었으니, 잘만 된다면 괜찮은 작전이었다.
“그건 맞지만……. 회장님은 그럼, 그 사실을 아시나요?”
재연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했다. 안다면 죽이려고 들 테니까. 허리만 움직여서 만든 아들이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분명히 공격을 개시할 게 틀림없었다.
“놀라시지 않을까요. 회장님은 보수적인 분이시잖아요.”
“괜찮아요. 깜짝 선물 같은 거니까.”
조신하게 웃는 재연이 눈을 내리깔았다. 금장이 새겨진 찻잔을 우아한 손짓으로 들었다. 살포시 굽은 손가락으로 컵을 기울이더니, 유려하게 흐르는 홍차를 몇 모금 넘겼다. 약간 씁쓸하지만 매우 향긋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낯을 하고 있었다. 재연의 속눈썹이 보드랍게 살랑거렸다.
“천국을 생각하신다면 스스로 겸허하게 받아들이실 거예요.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아주 멋진 아들인 척 재연이 그를 칭송했다. 그러고 있으니 선아의 표정은 이상야릇하게 굳었다. 무너져 가는 인생을 연기하는 연극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미묘하게 함께 비참해지는 듯 마음이 불쾌했다. 그러나 그 감정의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회장님이 그렇게 멋진 분이실 줄이야.”
“아버지가 놀라서 쓰러지시면 좋겠네요.”
워낙 안 놀라시는 분이라. 재연이 푸스스 웃으며 덧붙였다. 선아 또한 어색하게 함께 웃으며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한참 고민했던 선아는 최대한 협조해 보겠다며 승낙의 메시지를 알렸다.
‘정말로 아버지가 놀라서 쓰러지시면 좋겠네.’
그대로 죽으면 더 좋고. 재연은 그의 지병이 고혈압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주형이 일을 당장 구하는 건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람 구실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 말이다.
일시불로 당겨 받을 수 있는 곳도 없고, 알고 지내던 사장들도 이번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정말 좆같았고 소위 열정 페이를 받으면서까지 일했던 과거가 미치게 미울 정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장 간단한 일인 카페나 PC방 아르바이트가 제일 좋았는데, 운이 안 좋게도 대학생들의 종강 시즌이라며 결국 일자리가 다 찼단다. 벌써 12월인가. 주형은 고등학교만 졸업한 입장이라 학사 일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구직을 할 때 사장들이 대는 핑계를 통해 사회적인 시기를 알아보고는 했다.
그 정도로 주형의 삶은 매우 빨랐고 고독했으며 동시에 처절했다. 시간이 그의 목에 노끈을 달아 그를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했다. 인력 사무소를 통해 공사판을 가기로 결정했다.
목포에 무슨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인력이 부족해서 추가로 모집을 한다나. 운이 좋았다. 아무튼 대기업의 하청 업체였으니 돈을 다는 안 떼이겠거니 싶어, 아무리 멀더라도 목포까지 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원정을 다녀오니 아주 배가 불렀다. 저번이야 순간적인 불행으로 돈을 떼어 먹혔지만 이번에는 아닐 거다. 얼른 놈들이 찾아오기 전에 꼭 돈을 이번에는 보내리라. 험한 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놈들은 조폭이었으니 평범하게 집을 박살 내는 것으로 그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뒤에는 황금 같은 휴식을 즐기며 하루 정도는 뻗대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씨발……. 뭐야, 이거.”
안 그래도 쓰레기 같던 집이 더 쓰레기가 되었다. 주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짜 이 집이 맞는지. 하지만 이 좆같은 집이 서울에 하나라도 더 있으면 그건 그냥 무너져야 한다. 쓰레기도 모자라 온갖 기물이 파손되어 있어 흉가 같은 모양새는 절대로 주거지의 모습이 아니다.
벽지는 칼로 직접 난도질을 한 것처럼 고약하게 다 파여 있었다. 아주 뭉뚝하고 녹슨 칼이 지나다닌 흔적이 매우 많았다. 베갯잇은 당연한 듯 터져 있었고, 가진 것 중 가장 도톰하고 두꺼운 이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찢겨 있다. 벌러덩 열린 냉장고가 끼익, 하는 묵직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이게……”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오싹하다 못해 온몸의 땀이 쭉 빠져나가는 무서움이다. 침을 꿀떡 삼키기가 무섭게 뒤에서 구두 굽 소리가 난다. 주형은 어찌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않았다.
분명 시끌벅적해서 그 누구라도 나와 상스럽게 욕을 할 타이밍인데, 이웃 중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사람들도 아는 거다. 지금 다가오는 놈들이 그냥 사내가 아니라는 걸. 얼마나 게걸스럽고 악착같고, 또한 천박한지 모두가 알고 있는 거겠지.
주형은 아주 오랜만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기가 무섭게 머리채가 확 잡혔다. 쾅! 채 닫히지 못한 현관문에 뒤통수가 부딪혔다. 명백히 상처를 주기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게 티가 나듯 남자는 한 번 더 주형의 머리를 현관에 처박았다.
“으, 씨히, 발……!”
“이게 어디서 욕을…….”
아주 가까이서 목소리가 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행동 대장 같은 험상궂은 놈이 보인다. 주먹으로 면상을 치려고 하던 순간 행동 대장이 주형을 바닥으로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아니, 기다려 봐.”
담배 냄새와 함께 진득한 시선을 뿌리던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주형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멈추어 섰다.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해졌다.
가난의 증거가, 흐르는 진물처럼 복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곳에서 그렇게 매서운 정적은 처음이었다. 주형이 이사를 온 이래로 말이다.
“형.”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얼굴인데. 강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주형은 멍하니 그 고운 낯을 바라봤다. 그러나 저런 얼굴을 잊기는 쉽지 않다.
“…….”
뒷덜미가 얼얼했다. 다행히도 뭐가 터지거나 찢어지진 않은 건지 돈 나갈 일은 굳었다. 뭐, 좀 멍하긴 하지만 이 정도론 뇌진탕도 아니다. 이러다 어련히 죽겠지. 주형은 몸을 주춤주춤 일으키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 시만. 너.”
그 꼬맹이. 주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자 남자가 싱긋 웃으면서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주형의 턱을 그러쥐었다.
“형, 대답을 해야죠.”
생각보다 온건한 부름에 당황했다. 물론 놈들과 등장했으니 깡패는 맞겠지만, 깡패가 ‘형’이라고 부르다니. 게다가 이렇게 곱상한 얼굴로. 매우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경계 어린 눈동자를 들어 입을 겨우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대답.”
사내는 인내심이 매우 부족했다. 사랑은 넘쳤으나 자비는 없었고, 인륜은 있었으나 인내심이 남들에 비해 몹시 적어 남을 괴롭히는 데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형의 턱을 콱 틀어쥔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슬 같은 눈동자가 주형을 향했다.
“……예.”
낮게 읊조리자 복도에 공명했다. 주형은 코트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있는 그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고상한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사치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재연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가진 아우라 탓인지 장신구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재연의 고고한 낯만 온건히 반짝일 뿐이었다.
무어라 말을 붙이기 어렵게, 존재감만큼은 대단한 사내였다. 주형은 문득 그의 시계를 하나 훔쳐 달아나고 싶어졌다. 같이 있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제 속사정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쪽팔렸다.
예쁘고 반반하게 쭉 뻗은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불안함 때문인지 손에도 땀이 났다. 경계 어린 눈동자를 지우지 못하고 현관을 막아선 채 우뚝 섰다.
“사람은 예의가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자 사내가 커다란 몸을 들이밀며 안으로 향했다. 쓰레기장보다도 못한 그 공간 속으로, 고매함을 두른 채.
“……그, 렇습니다.”
주형이 대충 꾸역꾸역 대답했다. 어느새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그러나 사내가 움직이는 탓에 또 정신이 확 들었다.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봐도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거지 같은 환경이 펼쳐졌다. 이렇게 공들여 공간을 조져 놓기도 쉽지 않겠다 싶었다. 주형은 어느새 걸레짝이 된 침대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며 착잡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사내가 손짓하니 다른 남자들은 집안의 현관 앞에 진을 치고 섰다. 아무렴, 최소한 간부는 되나 보다.
아, 그럼 팀장이 말했던 그 이사님이라는 게……. 주형은 본능적으로 지레짐작했다.
“형.”
“…….”
그리고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제대로 보자마자 알았다. 아. 왜, 이런……. 주형이 입술을 물며 꽉 다물었다.
“오랜만이에요.”
“어, 음…. 네. 오랜만……. 입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왠지 반말을 쓰면 안 될 듯해 주형이 눈치를 살살 봤다. 이런 어색한 말에도 사내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이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 지냈어요?”
“보시다시피…….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그렇구나.”
사내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내 미동 하나 없이 말했다.
“왜 돈을 안 갚아요?”
“…….”
남자의 물음은 생각보다 훨씬 단도직입적이었다. 섭섭하게 하지 말라든가 하는 그런 조폭들이 쓰는 귀여운 척 같은 건 없었다. 이런 태도가 남자와 매우 잘 어울렸다. 주형은 불안함을 억지로 숨겼다.
“일주일 동안 목포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내 전화 안 받고?”
“안 받은 건 아니고, 못 받은 겁니다.”
꾸물꾸물 대답했다. 사실 조마조마했다.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았더니, 또 걸려 올 때는 사채업자인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슬쩍 차단까지 했다. 주형은 대답을 하는 것조차 힘든 듯 불편한 기색을 억지로 숨겼다.
“그래? 섭섭한 마음이 좀 풀어지네.”
그는 진심으로 서운했던 듯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가 품은 향수 향기와 담배의 흔적이 방에 은은히 다가왔다.
사내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인 제 아버지에게 꼬투리를 잡히면서까지 주형을 붙잡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돈을 좀 쓰긴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노친네의 잔소리쯤이야 이젠 익숙하다. 그리고 얼굴을 보니 가끔 들었던 후회가 싹 사라졌다.
이런 놈을 붙잡을 빌미가 생겼다니. 미칠 것처럼 흥분이 된다.
그나저나 주형은 간접흡연을 조금 당한 것만으로도 한 대를 피우고 싶어졌다. 며칠 동안 한 대도 못 피웠더니 괜히 예민해졌나 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목포에서 일주일 동안 원정으로 공사장 일을 했습니다. 내일 중으로 입금될 예정이고요. 납기일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고개를 들자 사내가 엷게 웃고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미리 말했으니까.”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뽀얗고 예쁜 뺨이 자리 잡은 말간 얼굴이 보인다. 희끄무레한 자비가 얼굴에 떴다. 주형은 눈치를 보다 말했다. 분위기가 아주 조금 나아진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의 주형은 그 순간을 회상하며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되뇔 뿐이다.
“죄송한데……. 그쪽 성함이, 재연이 맞습니까? 윤재연.”
“아.”
사내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나빠진 듯 입꼬리를 굳혔다. 그 순간 분위기가 딱딱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주형은 아무도 없음에도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줄기 새하얀 빛을 투영하고 있는 반지하 단칸방의 창문이 마치 마지막 희망 같았다. 그리고 조금만 더 있으면 저 빛이 창문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다. 이 공간은 괴이하고 무서운 감각으로 가득 찼다.
무언가 태풍이라도 불어올 듯한 감상이 일었다. 주형은 답지 않게 부정적인 생각이 이토록 문학적으로 흘러가는 데에 당황을 느꼈다.
“맞아요. 윤 이사라고 불러요. 도련님도 좋고.”
“아, 이사님. 알겠습니다.”
“아니면 재연이라고 해도 돼요.”
아까 그 굳은 얼굴을 보니 절대로 이름은 불러서 안 될 것 같았다.
“아닙니다. 이사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주형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게다가 항상 피로해서 그런지 뇌도 죽어 있기가 일쑤라 더더욱.
하지만 저 얼굴은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새파랗게 어린 애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건 처음이었으니까. 십오 년이 훨씬 넘게 지난 추억 속 얼굴이 세월의 손길에 순응하며 아름답게 자라난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피곤한 듯 얕게 늘어진 눈꼬리마저도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응, 그런데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요.”
“……뭡니까?”
재연은 마치 손을 들어 강아지에게 간식을 줄 듯한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듯한 낯이라 기분이 알쏭달쏭해졌다. 주형은 그런 표정을 봤음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왜 나한테 존댓말을 써요?”
“그야, 이사님이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주형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언뜻 봐도 별로 성실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형에게는 억지로라도 웃는 것이 최선이었다. 굳은 미소는 냉동식품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음…….”
재연이 갑자기 홀로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다른 이들에게 턱짓을 해 모두 문을 닫고 나가게 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형은 그냥 같이 모른 척 나갈까 하다가, 그랬다가는 재연이 돌변해 ‘병신 새끼야’ 하고 걷어차기라도 할까 그냥 있기로 했다. 이런 놈들은 성격도 한결같이 이상하니까.
“빨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재연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별것 아닌 물음에 대답하듯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좁아터진 방에 울리는 발걸음은 매우 묵직했다. 가련한 한 마리 개새끼가 된 주형이 그 자리에 서서 멍한 눈을 했다.
“……네?”
원래는 대답을 성실하게 하는 편이었으나 오늘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말 모두가 잘 이해가 안 돼서. 설마 그 의미인가 싶은 의구심에 대답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빨라는 게, 그러니까, 뭘 빨라는 거지.
설마 자지 말하는 건가. 사탕을 말하는 건 아닐 텐데. 그럼 손가락? 주형이 의아하게 있기도 잠시 재연이 주형의 허벅지를 앉은 채 걷어찼다. 주형의 신음이 방에 절절히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주저앉아 무릎을 꿇게 됐다.
주형은 아득히 제 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재연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주형의 정수리를 톡, 건드렸다. 이윽고 제 사타구니 사이에 주형의 뺨이 닿도록 했다.
시발, 진짜 좆이구나. 뺨으로 느껴지는 굴곡이 심상하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술을 벙긋거리며 위를 바라봤다. 스르르, 하는 소리가 나며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눈이 마주쳤다. 재연의 차갑고 빼어난 얼굴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등줄기를 타고 오싹하게 내려오는 이 감각이 두려웠다. 주형이 치기 어린 눈동자를 바르르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재연은 어떠한 존중이나 배려도 없이 벨트를 풀었다. 이윽고 검붉은 핏줄을 드러내며 무섭게 발기해 있는 자지를 주형의 입에 쑤셔 넣었다. 헐겁게 열린 입술 사이로 거친 신음과 함께 주형이 턱을 한계까지 벌렸다. 두껍고 커다란 살 기둥이 주형의 입 안을 쑤시기 시작했다. 속이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 자지를 쑤셔 넣으니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미끈한 혓바닥에 대고 좆을 설설 문질렀다.
“빨아 봐요.”
그러고는 냉정하게 명령했다. 성욕이나 음란함 같은 것은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눈가가 옴폭 패 있어 고결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평소에 온갖 부도덕함을 몰고 다니면서, 정작 이렇게 결정적일 때는 상대방이 민망해질 정도로 우아한 얼굴을 하고는 했다.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듯한 뻔뻔하고 느른한 낯. 분명 강간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인데, 제발 파렴치한 짓을 해 달라며 빈 것이 저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음란한 소리와 함께 주형이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홀린 것처럼 혀를 움직이고 있기는 하였으나 미숙했다. 하지만 완전히 어색한 것도 아닌 듯 자지를 잘 받아들이고 있기도 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향에 그가 구역질을 하려고 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이 향기가 역겨워 그를 밀어내고 싶은데, 튼튼한 몸뚱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으응, 이것 봐…….”
말을 안 듣네요. 그가 그리 중얼거리더니 허리를 푹 튕겼다. 주형의 입속이 주인의 속도 모르고 젖어 들어갔다. 입술을 너무 벌리고 있는 탓에 며칠 전 입술에 생긴 상처가 다시 찢어졌다. 금세 발기한 좆에서 흐른 쿠퍼액과 침으로 젖어 입가가 엉망이 되었다. 재연의 행위를 감당할 수 없던 듯 그가 씨근거리더니, 눈을 부라렸다. 여전히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는 그가 저항하려 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시흐, 잠…… 윽!”
재연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톱이 날카롭게 섰다. 꽉 움켜쥐고 긁더니 이내 살갗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 하고 얕게 헛웃음을 흘리자 허벅지가 흔들렸다. 값비싼 천이 비천한 손가락에 의해 늘어졌다.
치기 어린 눈동자를 본 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강간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이런 식으로 음험하게 부수고 무너뜨렸던 상상을 몇 번이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게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서. 그가 너무 미워서 미칠 것 같아 어울리는 걸 마음대로 정했다. 재연은 그의 입안을 좆으로 문질렀다. 그의 입안이 벌겋게 달아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만 일이 있으면 저 날카로운 눈꼬리가 내려갈 거라 생각하니 황홀함에 사무쳐 끅끅 웃음이 나기까지 했다.
피비린내라도 날 것 같은 웃음을 흘리던 재연이 주형의 머리카락을 확 잡았다. 뽑아서 조각조각 흩뿌려 버릴 듯 잔인하고 성이 난 손등이 꿈틀거렸다. 이내 강하게 짓쳐 그의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앞뒤로 추삽질을 하듯 자지가 사라졌다가 드러났다가 했다. 환락이나 다름없는 쾌감이 하반신을 가득 메웠다.
“흡, 윽, 으읍, 응!”
“혀, 납작하게. 응?”
그가 아주 예뻐하는 아기를 부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형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어떠한 폭력적 행위에도 굴복하지 못했으나 저 음산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내 혀를 납작하게 해 꾸역꾸역 감싸더니, 입술로 쪽쪽 물기 시작했다. 이는 본능적으로 세우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잘못해서 씹으면 엄청난 짓을 당할 것 같았다. 바깥에도 놈들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하는 거라면 조금만 잘못되어도 분명…….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개새끼가 하나만 할 리가 없지. 아주 오싹했다. 주형은 오히려 더욱 급해져서 자지를 입술로 완전히 감싸 빨았다.
“한두 번이……, 아닌가, 봐요? 그새 왜 이렇게 걸레가 됐어요, 형.”
단어를 하나 말할 때마다 허리를 흔들었다. 야살스럽게 흔들리는 흉물이 주형의 입에 처박혔다. 재연의 자지가 목젖을 툭툭 건드릴 때면 정신이 혼미해졌다. 커도 너무 컸다. 숨이 탁 막혀서 나갈 일 없이 몸에서 맴돌았다. 주형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침을 제대로 닦지도 못했다. 그의 좆에서 나온 물로 인해서 턱이 벌써 흥건해지고, 눈물이 쇄골까지 닿았다.
괴로웠다. 남자 밑에서 좆이나 빨고 있다니. 역시 그냥 도망치거나 아예 처음부터 잘못했다고 빌 걸 그랬다. 애초에 보자마자 굳을 정도의 인물이면 이때까지 살아온 촉을 통해서 범상치 않다는 건 알 수 있을 텐데. 주형은 과거의 제 머리를 피가 날 정도로 때리고 싶어졌다. 끈적하고 뜨거운 쿠퍼액과 두툼한 성기가 함께 밀려 들어오자 정신이 없었다. 주형은 위를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으읍, 으윽!”
주형이 고개를 쳐들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아니,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를 수 있을 정도로 입술에 틈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재연의 좆이 죽을 리는 만무했다.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더욱 두껍고 흉한 모양새가 되어 혈관을 바짝 세웠다. 피가 아래로 싹 몰려 그대로 토정을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주형의 보드라운 입천장에다 대고 뜨거운 정액을 싸지르면 엄청난 만족감이 일 게 분명했다. 말투에 비해 부드러운 눈동자를 잔뜩 적시고 싶었다.
전신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저 반항기 어린 얼굴이 너무 꼴렸다. 자지를 처박을 수 있는 구멍이라면 어디든 다 넣어 정액을 싸지르고 싶었다. 귓구멍, 입구멍, 그리고, 아랫구멍까지. 줄줄 흐르도록 만든 뒤 이제 어떻냐고 감상평을 듣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반항하며 울부짖을지 궁금했다. 그 모습은 또 어찌나 가엽고 귀여울지 상상도 안 갔다.
재연은 주형의 구멍이 어떨지 보고 싶었다. 주름이 진 구멍이 잠깐 오므라들다가, 힘을 주어 양옆으로 벌리면 음란하게 벌어질 모양새를 상상했다. 통통한 엉덩이 살점이 가리고 있는 은밀한 구멍을 생각하니 온몸이 열점이 된 것처럼 흥분이 됐다.
“하…….”
이런 새끼를 이제 찾았다고. 그냥 처음부터 돈을 들여서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분했다. 재연은 갑자기 다시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아래로 피가 잔뜩 몰려 있어 그런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허리를 콱 튕겼다.
주형에게서 무어라 할 수 없이 거친 신음이 흘렀다. 음울한 피아노 선율처럼 뚝뚝 흐르는 침과 우는 소리가 침실에 채워졌다. 이건 고통 어린 행위였다. 애정이 있다고는 하나 너무 음습하여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안으로 꾹 밀어 넣어 목구멍을 강제로 열게 하니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던 주형이 눈을 감았다. 이내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며 흐읍, 하고 입을 다물려고 했다. 앞머리를 움켜쥐고 뜯을 듯이 노려보며 명령했다. 가만히 입술을 느끼고 있어 주었더니 주형의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변해서 매우 불쾌했다.
“제대로, 벌려 봐요.”
더. 재연이 말했다. 주형은 조금 더 애썼다. 더 벌려. 미칠 듯 야릇하게 움직이는 혀를 느낀 재연이 다시 잔인하게 강요했다. 벌리라고, 걸레야. 좀 더 애써도 재연은 그칠 줄 모르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주형을 몰아붙였다. 주형은 안 된다는 듯이 울음으로 잔뜩 젖어 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심한 기침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히으, 하고 막힌 소리를 냈다.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고 있던 재연의 턱에 돌출이 생겼다. 신경질적으로 사납게 선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흥분을 참았다. 힘을 준 탓인지 재연의 엉덩이에 보조개 같은 우물이 생겼다. 명암이 확실하지만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보조개가 성애에 절어있었다.
“후.”
“흐……윽. 큽, 컥!”
주형이 또 억눌린 기침을 했다. 불편한 듯 밭게 울먹거렸지만 입을 한계까지 강제로 벌리고 있어 도리가 없었다. 그는 목구멍을 조이며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넓다 못해 험상궂게 보이는 재연의 어깨보다 좀 더 직각에 가까운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데에는 간절함도 깃들어 있다. 기다랗게 늘어진 속눈썹이 젖어 방울방울 예쁜 눈물을 흘렸다. 아래로 축 처진 곡선이 유려하게 흔들리고, 그는 혀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축 늘어진 채 살덩이를 품는 데에 그치지 않는 펠라가 이어졌다. 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질질 울며 눈물과 콧물, 침을 흘리는 데에는 적잖은 음란함이 있었다. 접합부만 살짝 드러날 정도로 깊이 물고 있으니 숨도 쉬기 어려웠다.
“쌀 때까지, 안 빼 줄 테니 알아서 해요.”
재연이 그리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욕 따위는 전혀 없고, 종교 세례를 읊어줄 듯 고결한 낯이었다. 축 늘어진 속눈썹이 어찌나 가련하고 아름다운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할 정도로 그는 차분했다. 목소리와 달리 행동은 매우 험악했다. 재연이 자비 없이 허리를 쭉 뺐다가 혀를 잘게 찔러 댔다. 입안은 아주 축축하고 기분이 좋아서,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주형의 입안 사정은 조금 달랐다. 자지 때문에 조금씩 무너지며 망가지고 있었다. 너무 굵고 큰 것 때문에 입천장이 다 까져 버린 듯했다. 전혀 아물지 못한 상처가 덧나며 입가가 움찔대고 있었다.
“형은 왜 이렇게, 입이 작아요.”
재연이 둥그렇게 허리를 돌리며 안을 헤집었다. 재연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바르작거리는 손가락은 언제 힘을 잃었는지, 그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 쾌감이 좋아 그를 범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주형을 내려다보며 머리채를 콱 쥐고 흔들었다.
이게 다 주형이 너무 사랑스럽고 꼴려서 생긴 문제였다. 그가 조금만 덜 잘생기고 예뻤으면, 이런 남창 짓 따위 시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냥 배를 도려냈으면 되었을 일인데 이리 구질구질하고 귀찮은 펠라나 받고 있으니. 그럼에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보자마자 때리지 않고 좆을 물린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좁으면 달린 거 다 넣지도 못하겠어요.”
좆질하라고 있는 입에, 아깝게. 재연이 아랫입술을 얕게 깨문 채 중얼거렸다.
주형은 어지러워서 말을 다 듣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좆뿐만 아니라 음낭까지 다 넣고 싶다는 말인 걸 귀신같이 알아듣고 화를 냈겠지만, 그럴 정신은 없었다. 거칠한 좆을 물고 몇 분째 혀를 움직이고 있으니 몸이 음탕함으로 절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주형은 하반신을 잘게 털어대는 그를 감당하지 못해 소리를 죽이고 또 울었다. 목 점막이 상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말을 몇 마디 하다가 허리를 흔들고, 말을 좀 잇다가 또 허리로 자지를 쑤셨다. 재연은 매우 화가 난 사람 같았다. 깨끗하게 펴져 있는 미간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지독한 원망과 만족이 어려 있었다. 어금니를 살포시 깨문 그는 주형의 입속을 느끼고 있었다. 입 안의 혀가 달콤했고, 좆을 빠는 불그스름한 것이 통통했다. 마시멜로 같아 그냥 하루 종일 넣고 싶었다. 그게 학대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는 주형이 매우, 아주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볼만했다. 어느새 정신이라도 차린 건지 손을 들고 손가락으로 좆을 쥔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적잖이 느껴지는 정복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주형은 웅얼거리며 무어라 말했다. 그건 ‘제발’이라는 말 같았다.
엉엉 울며 손으로 비는 것보다 더한 쾌감을 주었다. 내내 위기감 어린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던 얼굴을 완전하게 망가뜨렸다는 데에 대한 즐거움이 있었다. 난폭하고 솔직한 욕망임을 인지하고 나니 더욱 흥분됐다. 모든 것에 솔직했으므로 그는 어떠한 죄의식도 없이 주형을 희롱하고 범할 수 있었다. 주형이 느끼는 감각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다. 그는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고, 제게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 재연은 강한 확신이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주형의 일상을 모두 망쳐 놓고 황폐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손수 꽃을 심어 주고, 새싹을 틔워 준 다음 희망인 척 손을 내민다. 그를 길들이고, 제가 없으면 숨조차 쉽게 쉴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 주형과 영원할 수 있다. 주형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저 자기주장 강한 눈동자가 귀여웠다. 그게 미치도록 성감을 이끌어 냈다. 엉덩이를 움찔거리는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꽤 좋은 그가 제 위에서 형, 하고 애교라도 부리면 미쳐서 그의 구멍을 헐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창부 같은 애교는 취향이 아니지만 주형이 하면 다를 듯했다. 아니, 정말로 너무 귀엽지 않나.
일그러진 성애의 끝을 알리듯 재연이 정액을 푹 내뿜었다. 식을 일 없는 듯 껄떡거리던 자지에서 진한 물이 나왔다. 정액이 입술을 가득 적셨다. 새하얀 우유를 머금고 질질 흘리는 모습이 야릇했다.
재연은 얼굴에 정액을 몇 방울 튀기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르르 떤 뒤에는 좆을 다시 뺐다. 한 번 더 쑤실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으나 일단 아래가 가라앉았으니 잠깐은 두기로 했다. 주형에게는 후한 처사라는 걸 알면서도. 주형의 얼굴에는 정액이 가득 묻어 있었다.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낯이라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재연이 갈무리도 하지 않은 채 주형을 내려다보았다. 살덩이가 다리 사이에 늘어진 채 정액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듯 작게 끄떡거렸다. 주형의 얼굴 때문이었다.
“예쁜데, 이러고 다니면 어때요?”
“…….”
주형은 역시 몸을 파는 데에는 재능이 없는지 정액을 핥아 먹는 등의 요사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이내 소리 없이 숨을 내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냥 너무 지치고 짜증 나서 재연을 때려죽이고만 싶었다. 만나자마자 이런 짓을 시키다니, 사람이 아니다.
분명, 안 이랬는데……. 주형이 속으로 읊조렸다. 가장자리가 부예진다. 피곤하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바닥을 노려보고 있으니 재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진지하네? 재연이 쿡쿡 웃으며 주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듯 달곰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주형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비적비적 일어났다. 이 역한 냄새가 나는 정액을 빨리 닦고 싶었다. 휴지를 아무렇게나 팍팍 뽑아 얼굴을 문질렀다.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런 사고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재연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구두 앞 코로 그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씨발 새끼.”
“형.”
“네가 어떻게 이러는데? 씨발, 곱게 다뤄주는 걸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건……!”
모난 말투에 재연이 싱긋 웃었다. 아름답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서느런 감정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싹한 감각이 문득 치솟았다. 언제든 제 배를 도려내 회를 뜰 수 있을 사내였다. 아무리 곱게 생겼어도 어차피 조직 폭력배일 거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주형은 현재에 절망했으나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매번 짓밟히며 살았기에 삶에 대한 욕구도 그만큼 강했다. 정상인처럼 살 때까지 악착같이 버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목울대를 꿈틀거리며 금세 사과했다. 분노와 설움을 참느라 몸에 힘이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그래서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그와 눈을 맞추었다. 개가 복종하듯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때의 그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저렇게 서느런 얼굴을, 그 꼬마는 한 적이 없다. 주형은 실망이 앞섰다.
“응, 좋아요. 난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말라서 존댓말은 꼬박꼬박 들어줘야 해요.”
지랄하네. 주형은 속으로 좀스럽게 욕했다. 그에게 직접 했다가는 뺨을 얻어맞을 게 뻔했다.
“요 붙였는데 제가 너무 작게 말했습니다.”
“내 자지에 묻은 것도 처리해 줘요.”
재연은 성깔을 절대 죽이지 않은 주형에게 무어라 말하지도 않고 그냥 명령했다. 뚜벅뚜벅 다가와 자지를 다시 들이미는데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다. 이렇게 큰 좆은 처음 보기도 했고, 입에 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아래서 올려다본 조폭 새끼의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을 줄도 몰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천사 같았다. 정말로 무서운 감상이었지만 그랬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며 내려온 천사가 떠올랐다. 물론 천사는 펠라 같은 거 안 시키겠지만. 주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씨발. 진짜 최악이다.
“…….”
본인이 한 건 본인이 좀 치우면 안 되냐고 하고 싶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그는 코웃음을 겨우 참고 재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니 재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내숭을 피웠다.
“정액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내가.”
“정액 알레르기가 있으면서 좆을 물게 했단 말입니까?”
기가 찼다. 너무 짜증이 나서 예의는 싹 날리고 입을 마음대로 놀렸다. 쭉 벌어진 입술이 표독스럽게 짜증을 냈다. 그러고는 홧김에 짜증을 낸 걸 후회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있자 재연이 뚫어져라 바라봤다. 방금 자지를 빨게 해서 기분이 한창 좋은 건지 으쓱 웃기만 했다. 하지만 강직한 턱에서 오는 서느런 감각은 선명했다.
“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사춘기인가 봐요.”
“……해 드리겠습니다.”
휴지를 거칠게 뽑아 정액을 티슈로 닦았다. 얼굴은 예쁜데 자지는 너무 커서 정액도 많았다. 이런 흉물을 입에 물고 있으니 턱이 이렇게 아픈 거겠지. 뭘 먹고 살았으면 좆이 이렇게 큰 건가, 발기할 때 힘들지도 않나 이런 얄궂은 생각까지 났다. 멍하니 다 닦고 바닥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뒤 주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가끔은 그렇게 반말해도 괜찮아요.”
“…….”
“옛날 생각도 나고 너무 좋으니까.”
재연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우아하게 다리까지 꼰 뒤에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그와 잘 어울렸다. 쭉 늘어진 눈꼬리와 폭 팬 눈가가 그의 성격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린 것을 놓치지 않는 잔혹함이 새하얀 피부에 새겨져 있었다.
평소 사람에 관심이 없는 주형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입안에 나뒹굴고 있는 비릿한 정액이 증명해 주고 있다. 재회하자마자 펠라를 시킨 놈 치고 제정신일 리가 없지. 이때까지 도망치고 싶은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이놈 앞에선 정말로 위험한 게 느껴졌다. 붙잡히면 죽는 걸로도 모자라 그냥 인생이 통째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나락 가는 거 아니야?’
두렵다. 주형은 가시를 몸에 둘렀다.
“우리 오래 볼 사이잖아요. 형이 돈을 많이 빌리셨더라고요, 감사하게도.”
주형은 제법 다정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게 익숙하고 친밀해 보였다. 마치 이러기를 바라 왔다는 듯이.
“납기일 안 밀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근데 형이 두 번이나 밀려서 내가 직접 수금하기로 했어요.”
재연이 소매에서 담배를 꺼냈다. 이내 주형에게 라이터를 툭 던졌다. 깔끔하게 은색으로 도색 되어 있는 지포 라이터가 바닥을 데구루루 기었다.
“뭐라고요?”
“불.”
“…….”
“혹시 안 들리는 거예요?”
나는 귀머거리는 질색인데. 재연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한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주형이 에이씨, 하고 소리 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단 말인가. 그냥 패든지, 아니면 말만 하고 꺼지든지, 왜 이렇게 치근덕대는 거 같은지 모르겠다. 그냥 조폭들은 돈 안 갚으면 때리고, 갚으라고 하고 말지 않던가. 뒤를 대라는 놈은 꽤 있었으나 이렇게 구구절절 계속 대화를 하려는 건 처음이라 이상했다.
주형은 대충 두 손으로 불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재연은 엷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볼이 쏙 패도록 담배를 부드럽게 빨아들인 뒤에는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었다. 칙칙한 연기가 그의 붉은 입술에서 나왔다. 자못 야릇한 광경이 주형의 눈에 비쳤다. 노란 장판 위 가난한 몸으로 뒹구는 놈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담배가, 그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제가 피웠던 담배는 얼마나 싸구려였는지도 감이 왔다.
“특별 고객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거예요.”
“제가 잘 낼 테니 이번만 봐주시면 안 됩니까?”
“안 돼요.”
“…….”
“나는 형이 마음에 들거든요. 그러니까 못 봐줘.”
천성이 짓궂어 남들 앞에서 구멍을 열어 보고, 뒤로 우유라도 받아먹으라고 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자지를 입에 넣어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씨발, 이걸 어떻게 남한테 줘. 살갗 조금이라도 남한테 보이면 그놈 눈깔을 뽑아버릴 거다. 재연은 주형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니, 사랑했다. 이런 걸 누구한테 보인단 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두어 놓고 싶게 생겼다는 점에서 그를 놓칠 순 없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형을 어디 남사스럽게 바깥에 내놓는다고. 재연은 그리 생각하며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상한 볼우물이 쏙 드러났다.
“아, 주형 형.”
“예?”
조금 불경하게 목소리를 올렸다. 한창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용건이냐는 듯 주형은 아직도 반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형이라고 그러니 낯짝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제는 동네 이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부르는 걸까. 재연의 압박 방법인 건가?
“눈.”
부라리고 있는 눈동자가 금세 유순해졌다. 아무튼 한참 미친놈인 것 같으니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형은 꼭 개 같아요. 말도 잘 듣고.”
“……저 개 아닙니다.”
“하는 짓이 딱 개인데. 혹시 강아지나 고양이가 더 좋아요?”
“저 개 아니라고요.”
짜증이 또 치솟았다. 다른 사채업자들에게는 당해본 적 없는 대우를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당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애완동물 다루듯 눈길이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또한 매우 음험하면서도 다정했다. 그러니까, 꼭 상대방을 끈적하고 진득하게 꼬시려고 하는 욕망이 서려 있는 눈빛 같았다.
“개는 맞아야 하는데.”
“…….”
그리고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내뱉는 담배 연기와 목소리를 자각하고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1층까지는 온 것 같았는데, 지금은 다시 반지하였다.
“농담이에요.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편이라서.”
재연이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사람은 패 죽여도 되었지만 동물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물은 빚을 내지 않고, 또한 매우 사랑스러우니까.
인간과는 다르게.
“……아무튼 전 개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자신도 그런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어깨를 작게 으쓱거리는 행동이 얄미움을 배로 만들었다. 주형은 이제는 상대하기가 정말 지친 듯, 그의 눈가에 유난히 다크서클이 돋보였다. 아까 얻어맞은 머리가 여전히 욱신거린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저 자지 다 빨았는데요.”
“고백까지 했는데 못 알아들은 거예요?”
“네.”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마음에 든다’는 말을 들으면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적어도 주형은 그리 확신했다. 꽃다발을 들고 와서 무릎을 꿇어도 진심인지 의심이 될 만한 놈에게 겨우 저런 같잖은 말 하나 들었다고 동하면 그건 생각이 없는 거지.
“자지로 구멍 쑤셔 주면 그때 알아줄 거예요?”
“말로 하시죠.”
주형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형이 날 자극했으면서 그렇게 모른 척을 하니까.”
“모른 척한 적 없습니다.”
재연은 그렇게 작게 모가 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는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에는 틈틈이 흥미가 들어차 있었다.
“내 애인 하지 않을래요?”
“……예?”
미친 건가? 주형의 강직한 낯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구불구불한 입술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이상한 고백과 추태로 얼룩진 삶을 살아왔으나 이렇게 미친 고백은 처음 듣는다. 이건……, 고백 축에도 못 낀다.
“내 애인 해 줘요.”
재차 말해주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표정도 나름대로 진지했다.
“아니, 그게…….”
“혹시 싫어요?”
“예.”
당연한 걸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형은 겁도 없이 질색했다. 그러자 재연은 흠,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는 듯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낭만 따위는 없는 말이었다.
“그럼 몸을 파는 건 어때요?”
“…….”
“형 몸, 팔아요.”
내가 살 테니까. 재연이 그리 덧붙이며 담배를 침대에 눌러 껐다. 치익, 하는 까칠한 소리와 함께 그을린 자국이 남았다. 초상이라도 난 듯 찝찝한 향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배려 따위는 하나도 없는 행위였다.
“지금 이사님 전용 남창 하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재연이 주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응. 형 독점권을 내가 살게요.”
“안 합니다. 그냥 공사판 도는 게……. 윽!”
“형.”
재연이 주형의 팔을 확 휘어잡았다. 공사장을 전전하며 팔에 근육이 제법 있음에도 역시 남을 때리기 위해 단련한 몸은 이길 수 없는지 주형이 몸을 움찔거리기만 했다. 끙끙거리며 짜증스레 신음하자 재연이 귓전에 대고 속살거렸다.
“나는 형 좋아한다니까요.”
“…….”
“형 같은 좆병신을 나 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말과 달리 전혀 고백 같지 않았다. 그냥 좋아한다고 하면 다인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이때까지 돈으로 애정 공세를 한 놈들 중 가장 최악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등줄기를 내달리는 오싹함이 너무 낯설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형 좋아한다고 할 때 나랑 붙어먹어요.”
“…….”
“안 그러면 강간할 거니까.”
간지러울 정도로 속닥거린 뒤에는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았다. 이내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야릇하게 웃었다. 주형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팽개치고 좁은 방구석까지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이런, 씨발……. 미친!”
징그러운 새끼. 주형이 씩씩거렸다. 그에게 험한 짓을 당하고도 무섭지도 않은지 그는 그냥 반항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연을 밀어내고 나니 조금 심장이 떨렸다. 이건 필시 두려움이었다.
“…….”
재연이 뿌리쳐진 손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의연한 눈동자가 몇 번 데구루루 구른 뒤에는, 고개를 얕게 주억거린다. 매우 무서운 움직임이었다. 주형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경계심을 올렸다.
“음……, 알겠어요.”
아까와는 달리 어떠한 미소도 없었다. 그의 진짜 얼굴이었다. 주형은 이때까지 그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알고 있었다.
“애인 대접이 싫으면 어쩔 수 없죠.”
재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부드러움 따위는 전혀 없이 날카롭고 유려한 선만이 그를 이루고 있었다.
“…….”
“그런데 다음은 창놈이에요.”
옛정 같은 건 없어요. 재연은 서늘하게 그리 말했다. 그의 눈꼬리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몇 번 꿈틀거렸다. 약간 짜증이 난 듯 그는 매우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은 개의치 않았다. 빚만 잘 갚으면 되니까. 그래서 그를 배웅하지도 않고 내쫓듯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이내 비릿한 향기가 여전히 진동하는 듯한 방과 몸이 싫어서, 외면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없다고, 결이 다를 뿐 냄새는 고약했다. 추레하고 더러운 화장실에서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씻어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에 물어 본 좆을 떠올리듯 얼굴을 오만상 찌푸렸다. 걸레는 무슨, 씨발, 처음인데. 주형은 이윽고 게워내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이렇게 변한 거냐고. 윤재연.
***
오랜만에 본 주형을 본 소감은, ‘황홀하다’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예전의 그 모습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얼굴에서 자신이 아는 얼굴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났던 짓무른 복숭아 냄새가 이제는 사라지고, 성인 남성의 얕은 땀내와 따스한 기운이 잔뜩 난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그때를 아는 사람이 오로지 저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그의 근육이 예전부터 얼마나 예뻤는지, 밤톨처럼 짧게 깎은 머리카락은 지금과 다르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같은 것들을 읊조리며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복수 따위를 계획했던 과거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흥분했다. 막상 보니 복수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그를 따먹고 싶었다. 그래서 늘 갈망하고 있던 입에 자지를 넣었다.
그래서 재연은 주형과 재회한 이후로 꿈자리를 설칠 정도로 내내 들떠 있었다.
“하아…….”
머리가 아프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에 또 주형이 나왔다. 그러나 괴롭게 하는 악몽이 아니라 이제는 그저 즐거운 꿈이었다. 그것도, 몽정. 재연은 귀찮은 일이 다리 사이에서 일어나 번거로운 듯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꿈에서 본 그가 딜도를 구멍에 꽂고 청테이프로 입이 막힌 채 울먹거리고 있는 걸 떠올리면 싸지 않는 게 용했으니까.
그가 벗은 몸을 본 것도 아닌데 모든 게 마음대로 그려졌다. 그가 어디에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고, 매끈한 근육에는 사실 튼 살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그저, 너무 예쁘고 반짝거리기만 했다. 사랑스러웠다.
정말로 이때까지 염원하던 것 이상으로, 미칠 정도로 가지고 싶었다. 재연은 새벽에 일어나 얕게 벙글거렸다. 마트에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아래서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 같았다. 서느런 달빛이 내리자 분위기가 조금 음습해졌지만, 그 기저에 있는 애욕만은 순수했다.
그렇게 재연은 단 한 번의 성애로 마음을 바꾸고 말았다. 무서울 정도로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심경의 변화였다. 예전부터 주형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재연다운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