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나를 사랑하는 폭군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제국은 전에 없던 평화를 누렸다. 크고 작은 전쟁도, 마물의 습격도 없는 안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에 따라 카인의 업무도 줄어들었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 보냈다. 많이 미소 지었고 종종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울지는 않았다. 울만큼 슬픈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 내가 밤마다 침대 위에서 흐느끼긴 했다. 그런데 이건 좋아서 우는 거니까 뭐….
허나 아무리 아름다운 동화라도 끝은 있기 마련이다.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 신벌에 의해 요절하지는 않겠지만, 때가 되면 누구나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나는 카인이 나보다 딱 하루만 먼저 세상을 떠나기를 바랐다. 죽기 바로 전에라도, 카인에게 내 진심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진실로 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줘야 했다.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그런 건 너무 서글펐다.
카인은 침상에 누워있었다. 그의 머리칼은 여전히 검었고, 날카로운 눈꼬리와 반듯한 입매도 그대로였다.
겉가죽은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수인족의 특성 덕에, 카인의 겉모습은 스무 살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속은 심장 부근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이 찾아온 것이었다. 신벌이 아닌 자연의 섭리였다.
슬프기는 했지만 지난 생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이번 삶이 끝나고 나면, 열네 번째 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카인을 만날 거고, 우리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게 될 터였다.
다음 생에서도 신의 눈동자는 우리를 감시하겠지만. 뱀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보듯, 신벌을 내리려고 끈질기게 기회를 엿보겠지만.
상관없다. 더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이미 신벌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열세 번째 생에서 세웠던 계획을 똑같이 적용하면 된다. 네가 너이고 내가 나인 이상, 작전은 언제나 성공할 수밖에 없다.
너는 나를 감금하고 결박하고 망가뜨린다. ‘망가진’ 나는 너에게 맘껏 사랑을 고백한다. 신벌은 내려지지 않는다.
반복되는 환생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축복이었다. 신이 내린 저주 덕분에, 우리는 영원히 사랑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책상에 딸린 의자를 들어 침대 옆으로 끌고 갔다. 카인, 할 얘기가 있어. 부드럽게 속삭이며 카인의 손을 부여잡았다. 할 말은 진작 다 정리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쉽지 않았다.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카인의 손등에 내 볼을 문지르며,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나… 사실은 망가지지 않았어.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너를 사랑해. 사랑해서 이 모든 일을 꾸몄던 거야. 너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네가 젊은 나이에 죽는 걸 막으려고….”
간절히 고백하고 싶었던, 그렇지만 신벌 때문에 감춰야만 했던 진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문장들이 물기를 머금고 눅눅하게 휘어졌다. 아, 이게 아닌데. 좀 더 의연하게 또박또박 고백하고 싶었는데.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어. 네가 너 마음을 자각하기 전보다 훨씬 전부터, 나는 널 사랑하고 있었어.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어.”
이 진실을 이제야 내뱉는다. 너에게 가장 해주고 싶었던 말을, 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지금에서야 가까스로 털어놓는다. 뒤늦은 고백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고, 한 편으로는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 후련하기도 했다.
한 겹의 눈물이 망막을 덮었다. 시야가 뿌예져서 카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카인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놀랐겠지. 눈은 크게 뜨고, 입은 멍하게 살짝 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후에는 분명 환하게 웃어줄 테다.
나는 옷소매로 눈시울을 문질렀다. 맑아진 시선 끝에 카인이 담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인의 반응은, 내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역시 그랬구나….”
카인은 경악하지도 당황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충격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대신, 곧장 입술 양 끝을 끌어올려 웃었다. 놀란 것은 내 쪽이었다.
“역시 그랬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설마… 알고 있었어?”
“아니요.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이럴 수도 있겠다고 추측했을 뿐이에요.”
카인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검은 숲에서 돌아온 카인이 루시엘을 끌어안았을 때. 루시엘의 체취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방금 씻었는지, 그의 몸에서는 뽀송뽀송한 비누 향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그 비누 향 너머로, 나서는 안 될 향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비눗물로 꼼꼼히 씻겨 희석되었지만, 늑대 수인의 코는 어렵지 않게 그 냄새를 잡아내었다. 바깥 냄새였다. 풀 향기와 흙내음이 섞여 있었다.
그 순간, 어떠한 가설이 카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루시엘과 흑마법사가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지금껏 루시엘이 건넨 사랑의 밀어들이, 전부 진짜일 수도 있다고.
“그럼 왜 나를 추궁하지 않았어? 가설이고 뭐고 나한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올 일이었잖아.”
“루시엘의 그런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루시엘이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필시 존재할 거라고…. 괜한 호기심 때문에, 루시엘의 계획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카인은 알아차리지 못한 척 연기를 했다. 오늘 루시엘과 닮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냥 내 착각이었다고, 망가지지 않은 루시엘이 날 사랑할 리가 없다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굳이 꺼내며,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을 더욱 강조했다.
그 모든 것을 신이 지켜보고 있었다. 신은 전능하기는 하나 전지하지는 않다.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지켜볼 수는 있으나, 인간의 속마음만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날, 신은 카인에게 속아 넘어갔다. 정말로 카인이 모르고 있다고 착각해, 마지못해 신벌을 거두었다.
카인은 겉으로는 무지의 연기를 계속하며, 속으로는 추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얼핏 터무니없어 보였던 낭설에 살을 붙이자, 제법 그럴듯한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루시엘이 정말로 흑마법사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루시엘은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장난삼아 나를 속인 것은 아닐 테다. 거짓을 꾸며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리라.
여기서 살짝만 질문을 바꿔보자. 루시엘은 어째서 흑마법을 배웠을까? 흑마법은 신에게 대적하는 학문이다. 만약 루시엘의 적이 신이라면. 신에게서 우리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이처럼 정교한 작전을 기획한 거라면….
그렇게 된다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신은 나와 루시엘에게 저주를 내렸다. 정확히 무슨 형식의 저주인지, 어떤 일을 저질러야 실행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간 루시엘의 행동을 보았을 때, 내가 루시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실행 조건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도 신은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은 유일하게 신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영역이다.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펼치든, 신의 눈에 닿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연기를 영속해야 한다. 이른 아침 눈을 떠서 밤늦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계속.
당신이 나를 지키기 위해 연기를 해왔던 것처럼, 나 역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연기를 한다. 루시엘이 망가져서 기쁘다는 등의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그가 진짜로 날 사랑하길 원한다는 내용의 일기를 쓴다.
신전에 찾아가 괜히 고해성사를 한 적도 있었다. 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처참하게 망쳤습니다. 사랑을 핑계로 그의 육신과 영혼을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후회합니다… 신관이 들은 고해를 신 역시 들었으리라.
그중 몇몇 후회는 진심이었다.
루시엘이 감금을 원했다고는 하나, 강압적인 성교나 가학적인 플레이를 바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루시엘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흑마법을 이용해 언제든지 감금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얌전히 방 안에만 머물렀다. 고래가 넓은 바다를 버리고 좁은 어항을 선택한 격이었다.
귀중한 자유마저 주저 없이 내던질 정도로, 갖가지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할 정도로… 루시엘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 사랑에 보답할 차례였다.
나는 루시엘의 계획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따로 자료조사를 하거나 괜스레 루시엘의 동태를 살피지도 않았다. 신이 이상한 점을 눈치챈다면 끝장이었다.
나는 그저 루시엘을 믿고 가만히 기다렸다. 개인적인 궁금증은 저 아래로 내려놓고서 묵묵히 신을 속였다. 그것은 내 나름의 헌신이었고, 일종의 속죄였다.
기실 이 모든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희끗한 풀 냄새를 빈약한 근거로 삼아, 그 위에 온갖 추측들을 덧씌운 것일지도. 루시엘은 정말로 망가졌고, 나 혼자서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지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그 얄팍한 실오라기를 생명줄인 양 붙들리라.
나의 사랑하는 폭군.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폭군.
일말의 확률을 희망으로 삼을 때마다, 카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저는, 저의 방식대로 신을 속였어요.”
카인이 이야기를 끝마쳤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진심을 전할 수 없는 게 못내 슬펐는데, 카인은 어렴풋하게나마 내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외쳤던 그 무수한 ‘사랑해’들은, 막연히 허공으로 흩어진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신만 몰라서, 카인이 열심히 신을 속인 덕분에…
우리는 신벌을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계절이 수십, 수백 바퀴를 돌았어도 카인은 죽지 않았다. 스물 중반을 넘기기 전에 요절하기는커녕, 평균적인 수인의 수명만큼 살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침대에서 편히 눈을 감으려고 한다.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잘했어, 카인. 정말 잘했어. 너도 신을 속였구나. 한때 내가 그랬듯이, 최선을 다해 무지한 이를 연기했구나. 그리하여 사랑을 지켰구나.
사랑하면 닮는다고 그랬는데, 역시 너랑 나는 참 많이 닮았다. 그렇지?
맞잡은 손이 서서히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번 생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였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조곤조곤 귀엣말을 했다.
“있지, 카인. 그거 알아? 사실 이게 열세 번째 생이야.”
“…열세 번째요?”
“응. 그리고 곧 열네 번째 생이 기다리고 있어.”
“그때도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나는 힘껏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열네 번째 생에서 만나자. 그래서 우리만의 방식대로 또 사랑을 하자.”
나는 너에게 순애(純愛)를 줄 수는 없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아. 결국에는 이른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 테지.
대신 너를 위해 평생을 순애(殉愛)할게. 사랑을 위해서 내 전부를 불사를게.
“네, 다음 생에서 뵈어요.”
카인의 목 너머에서 헝클어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음을 앞둔 자로는 보이지 않는 찬란한 미소였다. 환희로 가득 찬 눈동자가 나를 비추더니, 가느스름한 눈꺼풀에 덮여 사라졌다.
그는 죽었다기보다는 자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생이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 잠이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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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번째 생. 너는 북부의 대공이었고 나는 남부의 노예였다. 우리는 어김없이 만났고, 순애는 아니지만 사랑을 했고, 나는 이번에도 너에 의해 망가진 연기를 했다. 신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내가 기사고 네가 황제일 때도, 부모의 재혼으로 만난 형제일 때도 있었다. 동물학자와 인어, 악마 사냥꾼과 하급 서큐버스, 강대국의 황태자와 약소국의 왕….
어느 세계선에서 어떠한 위치로 만나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운명처럼.
그리고 어느덧, 50번째 환생.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나는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탈색한 은발 위로 신호등의 가느다란 그림자가 그어졌다. 차들이 6차선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검고 흰 차들 사이로 시야가 닫혔다가 다시 트이기를 반복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내 양옆으로 쏟아지듯 지나갔다. 내가 횡단보도의 흰 금을 밟는 찰나, 건너편에서 네가 보였다. 검은 쓰리피스 정장을 빼입고서, 핸드폰을 귀에 대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난 생과는 얼굴도 옷차림도 달랐지만, 나는 저게 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길거리의 수많은 행인 중에서, 네 모습만은 유독 뚜렷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내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가사 모를 이국의 캐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사랑 노래처럼 느껴졌다.
나는 너를 향해 달렸다. 무작정 손목부터 잡아채자, 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내리꽂히는 목소리가 차가운 이유는, 오직 나만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완벽하게 내 취향인데 번호 좀 달라고? 도를 믿으시냐고 물어보면 첫인상이 망하려나?
아니, 너와 나 사이에 첫인상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간에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사랑할 테니까. 마치 운명처럼.
나는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하는 폭군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