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최종장
호수 위의 백조는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힘겹게 물살을 가르는 앙상한 두 다리. 가라앉지 않기 위한 무수한 발버둥들.
현재의 내 삶이 딱 그런 식이다. 이 안온한 나날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신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뭔가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건 분명한데, 그게 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수정구를 이용해 틈틈이 정보를 수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요새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신이 일으킨 자연재해로 마물의 서식지가 여러 곳 파괴되었고, 살 곳을 잃은 마물들은 자꾸만 마을로 내려왔다. 지난주에는 2급 위험 종이 수도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고생은 기사단의 몫이었다. 카인은 마물에게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전투를 벌이는 일도 잦았다.
카인이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알고 보니까 다 마물의 피였긴 했지만, 불안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피로 범벅이 될 만큼 격렬한 전투였다니. 까닥했다가는 카인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기사단이 처리해야 할 업무는 마물 사냥 외에도 차고 넘쳤다. 황실에 대한 비방을 잠재우고, 반란 분자를 색출하는 것 또한 황실 기사단의 몫이었다.
나흘 전에는 신전 정원의 석상이 피눈물을 흘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신전은 물론이고 수도 전체가 이 일로 떠들썩했고, 이와 관련된 근거 없는 소문들이 열꽃처럼 피어났다. 단테가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는 얘기부터, 자살한 루시엘의 원혼이 저주를 내렸다는 말까지.
바로 그제는 누군가가 성 외곽에 황실을 헐뜯는 벽보를 잔뜩 붙여놓았다. 그 범인을 잡는 것도 카인이 했다. 늑대 수인이라 체력이 강해서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과로로 한참을 골골거렸을 테다.
몇몇 이들은 황제의 부덕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자격이 없는 자가 황위에 올라서 신이 노하신 거라고 말이다. 부덕이라니 말도 좋다. 결국에는 다 머리색 때문이면서.
대부분의 신하들은 단테를 인정하고 존경했지만, 소수의 귀족들은 여전히 그의 머리색을 붙잡고 늘어졌다. 은발이 아니면 정통성이 의심된다나 뭐라나.
회색 머리칼의 성군보다는, 은발의 폭군이 더 낫다는 걸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단테를 지지해주는 이들이 많아서 안심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단테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신의 목적은 단테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카인과 나를 갈라놓는 데에 있다.
신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뭘 얻으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카인을 바쁘게 만들어서, 나와 보내는 시간을 줄이려는 건가?
음. 아니다. 이건 취소. 그렇다기에는 이유에 비해 사건의 규모가 너무 크다.
흑마법을 써도 신의 생각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그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신의 마음도 투시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신 역시 인간의 생각을 읽지 못하니, 점수는 0 대 0. 다시 원점이었다.
끼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카인이 온 모양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수정구를 감췄다.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서, 한달음에 거실로 뛰쳐나갔다.
“카인! 오늘은 빨리 왔네?”
“빨리 오려고 노력했어요. 루시엘이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카인이 흐릿하게 웃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피가 흠뻑 묻어있지는 않았으나, 땀방울이 이마와 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원래 검었을 제복이 흙먼지로 희뿌옜다.
“금방 씻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으응. 얌전히 기다릴게.”
나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얌전히’ 기다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배우자가 매일 같이 치사량의 업무로 허덕이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카인을 북돋아 주어야지. 지칠 때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것. 부부라는 건 그런 존재니까 말이다.
나는 기운차게 옷장 문을 열었다. 아래층에는 내 옷, 위층에는 카인의 옷이 일렬로 걸려있었다. 내 의복은 밝은색 계열이 많은 것에 비해, 카인의 옷은 하나같이 칙칙한 검은색이었다.
엇비슷한 검은 상의 중에서 고민하다가 셔츠를 꺼내 들었다. 내가 입으면 허벅지를 절반 즈음 가릴 것 같았다.
◊
가운을 대강 걸치고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뜻밖의 광경이 카인을 반겼다. 카인의 셔츠를 입은 루시엘이, 다리를 벌리고 제 뒤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루시엘이 끙끙거리며 손을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셔츠가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른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 위로 붉은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제 밤 카인이 새긴 것이었다.
“흐응, 아, 아흐… 응…”
짓눌리듯 주름이 잡힌 시트 사이로, 점액질의 액체가 스며들었다. 반쯤 녹은 젤리 같은 향과 모양새에, 보기 좋은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액체가 흐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뻐끔거리는 아랫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타원형의 물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카인은 저 물건을 한 달 전쯤에 구입했다. 체온에 닿으면 녹는 알 형태의 윤활제였다. 언젠가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비죽이 열린 구멍 밖으로, 진득한 젤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시각에 맞춰서 인공적인 과일 향이 비강을 파헤치듯 밀고 들어왔다. 정욕이 과실마냥 맺힌 방 안, 더운 공기가 혈관을 팽창하게 했다.
“루시엘.”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작은 머리통이 움찔거리더니 카인을 바라보았다. 말간 침을 떨굴 뿐이던 혀가 살며시 움직였다.
“나… 미리 준비해두고, 하읏, 있었… 어….”
루시엘이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뽑았다. 분홍색 물결이 손끝을 잔잔히 적시고 있었다. 검은 옷소매 아래로 보이는 흰 손가락이 고왔다.
혼자서 다 풀어놨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카인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미 벌어져 있는 다리를 한껏 더 열어젖혔다. 발발 떨리는 구멍 너머로 눅진히 젖은 내부가 보였다.
왼 엄지와 검지로 주름을 밀어젖히고서, 오른손으로 알을 붙잡았다. 내벽이 섬세하게 조여들며, 반쯤 녹은 알을 뱉어내었다.
“하읏, 응, 으응! 아!”
알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감각은, 루시엘에게 기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분홍색 젤이 함께 흐르며 시트에 얼룩을 만들었다. 이불도 몸 안쪽도 하나같이 습하고 질척질척했다.
카인의 손이 둔부를 양옆으로 잡아 벌렸다. 둥글게 열린 구멍 사이에서 젤이 후두둑 떨어졌다. …넣을게요. 그가 낮게 귀엣말을 했다.
쿠퍼액으로 미끈미끈한 좆이 달아오른 내벽을 가르고 들어왔다. 주름진 속살이 이물질에 촘촘히 달라붙었다. 꽉꽉 조여드는 점막을 귀두가 가쁘게 짓눌렀다.
퍽, 하고 크게 안쪽을 치받을 때마다, 그 반동으로 남은 젤이 밀려나며 허벅지를 흥건히 적셨다. 내벽과 살기둥이 서로 마찰하며 요란한 물소리를 만들어냈다. 찌꺽, 찌꺽. 음외한 소음이 고막을 자극했다.
하복부를 빠듯하게 채우고도 남는 쾌감에 정신이 뭉개졌다. 루시엘은 침대 위를 더듬거리다가 카인의 손가락을 잡아 쥐었다. 손마디를 단단히 교차시켜 손깍지를 끼고서 헤실헤실 웃었다.
흐무러지다 못해 완전히 녹아버린 얼굴이었다. 절정에 도달할 때면 눈시울이 파르르 경련하는 모양새가 야살스러웠다.
“키스, 키스하고 싶어….”
루시엘은 몽롱한 낯으로 조르며 입을 헤 벌렸다. 카인은 그의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부르틀 기세로 입술을 빨다가 혀에 혀를 감았다. 입천장을 더듬는 혓바닥이 데일 듯 뜨거웠다.
욕망 섞인 숨결이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갔다. 목 단추가 두 개 정도 풀린 셔츠 안쪽으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검은 셔츠를 입어서 그런지 흰 목줄기가 더욱 돋보였다.
카인은 루시엘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제 것이었던 셔츠가 콧날을 쓸었다. 셔츠에서는 루시엘의 살내음이 은은히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게 또 견딜 수 없이 기뻤다. 연인의 체향이 제 옷에 묻어난다는 게.
자신에게는 딱 맞는 셔츠가 루시엘에게는 이토록 헐겁다니. 당연한 사실이 새삼 재인식되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루시엘은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 허나 카인이 워낙 키가 큰데다가 루시엘이 마른 체형이라, 옷 품이 상당히 낙낙했다. 평소보다 더 여리여리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카인은 조심스레 루시엘을 끌어안았다. 낭창한 몸뚱이는 품 안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카인은 생각한다. 나는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 고.
세상은 어지럽고 형세는 급변하고, 살 곳을 잃은 마물들은 호시탐탐 수도를 노리고 있다. 황제는 슬기롭고 자애로우나, 외부의 상황이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카인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 소용돌이 속에서 루시엘이 해라도 입을까 걱정이었다. 마물이 신혼집까지 불쑥 찾아든달지. 아니면 카인이 마물과 싸우다 죽어 루시엘이 혼자 남게 된달지. 전자도 후자도 참혹한 비극이었다.
카인은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여린 육신과 망가진 영혼을 가진 폐제를. 그에게는 카인의 돌봄이 간절히 필요했다.
“사랑해, 카인.”
이제는 습관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루시엘이 방긋 웃었다. 수백 번도 더 넘게 본 미소인데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제쯤이면 당신의 웃는 모습에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일 년 후에도, 십 년 후에도, 어쩌면 다음 생에서도, 루시엘의 미소는 카인을 두근거리게 만들 터였다. 카인은 그 미소를 지키고 싶었다. 그를 평생 웃게 해주고 싶었다.
저도 사랑해요, 라고 답하며 카인이 마주 웃었다. 접힌 눈꼬리가 옅게 떨리는 것을, 루시엘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
섹스도 목욕도 다 끝마친 후, 둘은 어김없이 한 침대에 누웠다. 잠에 들기 직전, 루시엘이 카인에게 늘 하는 질문이 있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음…”
카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이 물음에 어디까지 답해야 하나 늘 고민이었다.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가는 분명 염려를 살 거다. 제 배우자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숲에 정찰을 다녀왔어요.”
“숲?”
“네. 오늘 새벽에 대신관이 계시를 받았는데, 검은 숲에 무언가가 있다는 신의 음성이 들렸대요.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울창한 숲 말이에요.”
“으음. 그래서? 거기에 뭐가 있었어?”
루시엘이 신나서 눈을 반짝였다.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를 듣는 소년처럼, 볼이 발그스레 물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카인이 말한 내용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루시엘의 행복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슬슬 거짓을 꾸며내야 할 때가 왔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진짜?”
루시엘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실망할 줄은 몰랐는데. 금은보화라도 있다고 할 걸 그랬나.
아니, 역시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금은보화 얘기를 꺼냈다간, 정확히 어떤 보물이었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려 할 터였다. 그럼 자신은 또 거짓말을 지어내야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기쁜 소식 하나 알려줄까요?”
카인은 루시엘의 볼을 쿡쿡 건드렸다. 기쁜 소식?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휴가를 냈어요. 온종일 루시엘과 함께 보낼 수 있어요.”
와아! 루시엘이 벅찬 탄성을 내질렀다. 축 늘어졌던 입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위로 솟아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인에게 주어진 것은 휴가가 아니었다. 극도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러 검은 숲에 들어가기 전,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잠깐의 여유였다.
이 작전에 참여하는 기사단원들 모두, 카인처럼 가족과의 하루를 선물 받았다. 이걸 과연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애매했다.
‘작전명이… 신의 시련이라고 했던가.’
작전명을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의 시련이라니. 정말 이런 걸 시련이랍시고 내리는 신이라면, 그런 건 선이 아니라 악이다. 그딴 신을 믿을 바에는 차라리 흑마법사와 손을 잡는 게 나았다.
흑마법사라고 하니, 암매장에서 만났던 기인이 문득 떠올랐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보면 실력이 상당한 것 같았다. 카인에게 무척 호의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자의 힘을 빌린다면,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흑마법사가 기사를 도와줄 리 없지.’
스스로가 한 생각이지만 어이가 없었다. 잇새로 씁쓸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카인, 정말로 별일 없는 거 맞아?”
카인의 눈치를 살피며, 루시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네. 괜찮아요.”
카인은 서둘러 굳은 얼굴 근육을 풀었다. 끝끝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진짜? 진짜로 아무 일도 없어?”
나름 감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엘은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선연히 빛나는 동공이 카인을 밀폐하듯 담았다.
한 점 흔들림 없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면, 카인은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꼭 속마음이 까발려지는 것만 같다고.
물론 실제로 루시엘이 마음을 읽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목덜미로 진득한 소름이 고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린 부부잖아. 숨기지 말고 다 말해줘.”
정신도 망가졌으면서 어째서 이런 부분에서는 예리한 걸까. 어쩌면 망가졌기에 보통 이들은 모를 미세한 감정까지 잡아내는 걸지도 모른다.
“부부…요.”
“응. 부부! 너랑 나는 결혼한 사이니까.”
루시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부’라는 단어는 너무 달고도 묵직했다. 한 입 베어 물면 곧바로 명치께에 얹힐 것 같았다. 체할 듯한 기분.
그래, 아주 조금… 조금만 더 진실을 말해도 되지 않을까.
“루시엘. 신수와 마물, 그리고 영물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게 뭐야?”
루시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카인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신수는 제국을 보호하는 신성한 수호동물. 마물은 마기를 품고 있는 사악한 생물이에요.”
“으음. 예전에 배운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 나, 예전의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럼 영물은 뭐야?”
“영물은 강한 힘을 갖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동물인데, 최종 성장 과정에서 신수도 마물도 될 수 있어요.”
“응. 그래서?”
“검은 숲에서 발견된 건 영물이에요. ‘낙원의 다리 달린 뱀’이라고 불리는, 수천 년을 살아온 신비스러운 존재죠.”
“…으응.”
루시엘은 연방 응, 으응, 이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딱히 카인의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알아듣지 못하니 오히려 다행이려나.
“그 뱀은 날개를 얻으면 신수가 되고, 다리를 잃으면 마물이 된다고 알려져 있어요. 충분히 오래 산 뱀은 불투명한 고치로 스스로의 몸을 감싸는데… 그게 마지막 성장을 위한 준비예요. 탈피 후 나오는 게 신수일지 마물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음.”
앞뒤가 맞지 않는 단상들이 꼬인 얼굴로, 루시엘이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카인은 한 템포 멈춰 서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숲에서 뱀의 고치가 발견됐어요. 학자들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틀 후에 부화할 것으로 보인대요.”
“…아.”
루시엘은 머릿속에서 마구 얽혀버린 문장들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너 말은,”
마침내 루시엘이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고치를 찢고 나온 게 신수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마물이면 전투에 임해야 한다는 거지?”
“네. 정확해요. 그렇지 않으면 황궁이 위험해져요. 하필이면 나타난 곳이 수도 근처라서….”
루시엘의 낯이 짐짓 심각한 빛을 띠었다.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드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한 차례 쏟아낼 것처럼 보였다. 쉬이 발개지는 눈가를 사무치게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아, 또 울려고 하는구나. 이래서 말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더, 거짓말을 자아낼 때가 온 듯했다.
카인은 루시엘의 손을 부여잡았다. 손끝으로 손등을 간질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루시엘. 분명 신수로 자랄 거예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영물이 마물로 변한다니. 신께서 그런 걸 용납하실 리 없잖아요.”
거짓이다.
카인은 그다지 충직한 신도가 아니었다. 신의 존재는 믿었으나 신의 선함을 신뢰하지는 않았다.
세계가 선한 절대자의 손안에서 굴러간다면, 왜 기근이 창출하며 질병이 발생하는가? 어째서 착한 자들은 비참한 결말을 맞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루시엘이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이유는 뭔가? 태어나자마자 친어미를 잃고, 친아비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삶이라니. 카인이 신이었다면, 루시엘에게 결코 그런 운명을 주지 않았을 터였다.
“신이 제국을 지켜주실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숨처럼 내쉬며, 카인은 루시엘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신’이라는 단어가 카인의 혀끝에서 흘러나온 순간, 루시엘이 움칠하고 몸을 떨었다.
“…만약 그 뱀이 마물로 변한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어찌 되든 해치울 수는 있을 거예요.”
“위험하지는 않고?”
“물론이죠. 저는 혼자 있을 루시엘이 더 걱정이에요.”
카인은 최대한의 준비를 이미 갖춰두었다. 넉넉하게 닷새분의 식량을 보존처리 해놓았다. 믿을 만한 보좌관인 헬레나에게 틈틈이 루시엘의 상태를 살펴달라고도 부탁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전투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을 경우겠지.’
그래도 루시엘은 잘 살아갈 것이다. 아마 단테가 대신 루시엘을 돌보겠지. 남편을 잃은 고통에 얼마간은 울적할지도 모르겠지만, 곧 금세 특유의 명랑함을 되찾을 테다.
그야 루시엘은 이미 망가졌으니까. 그의 머릿속에는 슬픔을 전하는 통로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약의 경우, 아예 카인을 기억 속에서 지울지도 모른다. 감금과 강간을 당했던 과거를 까맣게 잊었듯이, 그런 식으로 슬픔을 회피하려 들 것이다.
그를 잊은 루시엘이라니. 그 없이도 기쁘게 잘 살아가는 루시엘이라니.
그런 건 싫었다. 남의 곁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제 옆에서 불행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그것만이 카인의 소원일 것이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카인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지?”
루시엘이 물었다. 어떤 대답을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카인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요. 제가 루시엘을 두고 어디 가겠어요.”
태연하게 혀를 놀리는데 갑작스레 숨이 턱 막혔다. 묵직한 공기가 폐부를 좀먹는 기분이었다. 수인의 직감인지 쓸데없는 걱정인지 모를 불길함이, 야금야금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괜한 염려이길 바랐지만, 육감 쪽에 더 가까운 것도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거예요.”
카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루시엘을 달래기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절대로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정말?”
“네. 그러니까 이제 푹 자요. 간만의 휴일이잖아요. 내일 즐겁게 보내려면 오늘 잘 자둬야죠.”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루시엘이 알겠다며 배시시 웃었다.
루시엘은 카인의 등 뒤에서 양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팔과 다리가 침대 위에서 서로 엉겨 붙었다.
루시엘은 곧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촛불의 서름한 빛이 그의 이마 위에 드리워졌다. 잠든 이마 너머로 흔들리는 그늘을, 카인은 한참 동안 응망했다.
까마득한 불면의 밤이었다. 카인은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 그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시트 위로 균열처럼 가느다란 선들이 생겨났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밭을 닮아 있었다.
◊
‘망할. 이건 누가 봐도 마물이 된다는 거잖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비단 카인만이 아니었다. 자는 척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을 뿐, 나 역시 온갖 고민으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낙원의 다리 달린 뱀. 이름도 이상한 그 뱀은 기필코 마물로 자란다. 애초에 신수가 될 수 없는 환경이다.
검은 숲은 본래 어느 정도 신력이 존재하는 공간이었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자연재해로 마물의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검은 숲을 임시 거처로 삼은 마물이 늘어난 것이다. 신력은 온데간데없고 마기만 득실거리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숲에 고치를 튼다? 고치 밖에서 나오는 건 필시 마물이다. 영물에서 마물이 된 것이니 품고 있는 마기도 상당할 거다. 쉽사리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내 애완촉수 토토를 걸고 맹세할 수 있다.
‘신은 이걸 노리고 재해를 일으킨 거로군.’
뇌 내에서 퍼즐이 딱딱 맞춰졌다.
신벌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신은 개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못한다. 이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모든 인간은 신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 것이다.
선하지는 않으나 머리란 걸 쓸 줄 아는 신은, 나와 카인의 삶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재해를 일으켜 마물의 은신처를 공격한다는, 지극히 신다운 행동. 그 행동이 결국 카인을 위험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메마른 땅 한가운데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시트의 주름이 가뭄의 균열로 보일 정도였다. 목과 맥박이 일제히 메말라가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올 거야. 카인은 강하니까. 지금 이건 신벌도 아니니까… 죽지 않을 거야….’
나는 카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질끈 눈을 감았다.
자자, 일단은 자야지. 그래야만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귀하디귀한 휴일이다. 눈가에 짙은 그림자를 남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의 형태로 나타난 신의 계시이자, 일종의 예지몽이었다.
◊
그리 깊지 않은 숲속, 누런 고치가 있다. 빛바랜 실타래를 뚫고, 거대한 뱀이 그 얼굴을 내민다. 빽빽이 돋아난 비늘이, 햇빛을 받아 매섭게 반짝인다. 안구가 시큰할 정도의 흰빛이다.
낙원의 다리 달린 뱀.
허나 뱀은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에게는 다리가 없다. 마물로 자라버린 것이다.
길고 큰 몸뚱이가 꿈틀거린다. 육안으로도 보일 수준의 마기가, 뱀의 긴 몸을 휘감고 있다. 뱀이 고개를 돌린다. 맹렬한 시선이 기사단에게 닿는다.
뱀이 크게 아가리를 벌린다. 두 갈래로 찢어진 혓바닥이 쉭쉭 소리를 낸다. 혀 다음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송곳니다. 매섭게 가려진 이빨에서 독기가 흐르고 있다. 기사들의 손에 들린 제련된 무기도, 뱀의 이빨에 비하면 어린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뱀은 육중한 몸통을 매끄럽게 움직인다. 괴물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나무들이 맥없이 꺾여나간다. 기사들이 움직인다. 연습했던 대로 일사불란하게 진열을 정비한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툭툭 발을 분지른다. 조각난 빛이 비늘 위로, 비늘을 관통하려 애쓰는 창날로, 덜거덕거리는 갑옷으로 떨어진다.
땀방울이 햇살을 받아 잠시 반짝인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카인과 함께 봤던 별똥별을 닮아있다. 긴 꼬리를 끌며 추락하는 것들. 추락하면서 빛나는 것들.
전투는 오래 이어진다. 부상자들이 속출한다. 피범벅이 된 시체가 바닥을 나뒹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를 시신들 위로, 카인의 실루엣이 겹쳐 보인다.
육신은 왜 무른 살덩이로 이루어진 걸까. 딱딱한 돌덩이로 만들어졌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큰 뱀에게 깨물리더라도, 이리 맥없이 뭉그러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카인은 어디 있지?
나는 머리를 뒤흔든다. 정신을 차리고서 카인을 찾아 눈동자를 굴린다.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카인은 뱀의 시야 바로 앞에 있다. 그의 다리가 땅을 박찬다. 매끄러운 비늘을 계단으로 삼아, 뱀의 몸줄기를 타고 오른다.
카인은 쩍 벌어진 뱀의 아가리를 향해 달려든다.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몸짓으로, 괴물의 입속에 칼을 내리꽂는다. 육중한 투헨더 소드마저도 뱀의 입에 비하면 한없이 작아 보인다.
“키엑! 키에엑!”
급소를 찔렀는지 뱀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일반적인 뱀과는 다른 소음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다. 뱀의 눈동자가 분노로 검게 타들어 간다. 동공이 세로로 길게 벌어진다.
뱀은 분노로 눈을 치켜뜨다가 삽시간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 독을 품은 송곳니가 카인의 어깻죽지를 내리찍는다. 그리고 피가, 삽시간에 독에 잠식되어 검붉게 썩어버린 혈액이, 분출하는 용암처럼 뿜어져 나온다….
“카인!”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다.
◊
“허억…!”
나는 눈을 뜬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상반신을 겨우 일으켜, 옆에 누운 카인의 상태를 살핀다.
그런데 카인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 오른팔이 있어야 할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고, 어깨에 붕대만이 칭칭 감겨 있다. 생기 없는 두 볼이 푹 파여 있다.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나는 곧장 알아챈다.
아, 이것도 꿈이로구나. 악몽에서 깨어났더니 또 다른 악몽이 기다리고 있구나.
“루, 시엘…”
고통으로 파리하게 부르튼 입술을 달싹이며, 카인이 쉰 목소리로 말한다.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독의 후유증이 심각한 모양이다. 통증이 그의 원래 음성을 모조리 앗아가 버렸나 보다. 힘없이 잠긴 목소리가 낯설다.
“즉시 치료했다면 팔을 잃지도, 전신이 독에 잠식되지도 않았겠지.”
누군가가 내 귀에 숨을 불어넣었다. 새하얀 장발이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신이었다.
“…이런 꿈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신의 멱살을 붙잡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도 짐작했겠지만, 그냥 꿈이 아니라 예지몽이다. 그리고 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신은 느긋하게 웃으며 내 손을 뿌리쳤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허벅지 옆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이불보를 세게 움켜잡았다. 보들보들한 천이 손아귀 안에서 물결쳤다.
부가적인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명확했다. 나는 정체를 숨기고 마물 토벌에 끼어들어야 했다.
마물을 길들일 때 썼던 흑마법으로 이번에는 마물을 해치워야 한다. 예의 그 검은 로브와 우스꽝스러운 흰 가면을 뒤집어쓰고 말이다. 그래야지 제때 카인을 치료하고, 또 기사단에게 힘을 보탤 수 있었다.
늘 그랬듯이 마법으로 목소리를 변조시키고, 독한 향수를 뿌려서 살내음을 숨기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후각 정보까지 차단한다면, 웬만해서는 정체를 들키지 않을 터였다. 거짓말과 연기는 내 주특기였으니 말이다.
전에도 흑마법사의 모습으로 카인을 두 번이나 만나지 않았나. 첫 만남에서는 레라지에의 펜듈럼을 판매했고, 그다음 만남에서는 위치 추적용 초커랑 아랫배 문신을 새길 수 있는 부적을 팔았다.
처음도 두 번째도 들키지 않았으니, 세 번째 만남도 아무런 탈 없이 지나갈 거였다. 별일 없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뭔가가 불안했다. 일단 이 정보의 출처가 신이라는 것부터가 못 미더웠다. 예지몽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내게 예지몽을 꾸게 해, 카인을 치료하게 만들려는 게 수상했다. 신은 카인의 가장 큰 적이었다. 카인을 도울 이유가 하등 없었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오로지 한 가지. 이건 신의 함정이다. 그는 무언가 다른 속셈을 품고 있다. 그 속셈이라는 게 과연 무어란 말인가. 나는 애꿎은 볼 안쪽만 잘근잘근 짓씹었다.
“이러다 입 안쪽이 다 헐겠구나.”
신이 내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고 하기에, 이를 세워 손마디를 꽉 깨물어주었다. 피를 보기는커녕 잇자국도 새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뭘 고민하지? 네가 없다면 혈관에 퍼진 독이 매일같이 카인을 고문할 거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게냐?”
흠결 없는 손으로 내 입술을 더듬으며, 신이 내게 물었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살갗에 이질감이 들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의 손을 쳐내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미끼를 곧이곧대로 물만큼 멍청하진 않아요.”
“하하, 그래. 그 말이 맞지. 남들보다 열세 배나 더 살았으니 나잇값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뭐가 그렇게 웃긴지, 신이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유가 철철 흐르는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 물지 않겠다면 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주지. 내가 전해준 예지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마물이 더는 마을로 내려오게 하지 않으마.”
“정말입니까?”
“그래.”
신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열세 번째 생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마물의 무리는 더 이상 수도를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은 황제의 자질을 의심받지 않을 테고, 무고한 백성들이 괜한 불안에 떠는 일도 없어진다. 카인을 짓누르던 과로한 업무와도 이제는 안녕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시 카인이 고통받는 건 싫다. 독에 당해 심하게 앓는 카인이라니. 꿈에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신이 준비한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결국 덫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카인을 사랑하는 이상 뻔한 결말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열세 배나 많은 삶을 겪어온 나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애가 되었다.
정확히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겨내리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걸 일 순위의 목표로 삼고서, 무슨 일이 있어도 로브와 가면을 벗지 않으리라.
푸른 새벽빛이 창틀을 타고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동이 트려는 모양이었다.
◊
휴일 아침. 카인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밥을 준비하려고 막 침대 밖을 나가려는데, 루시엘이 카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으응… 가지 마, 카인.”
졸린 눈을 비비며 루시엘이 칭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요. 주방에 가는 것뿐이에요.”
“정말…?”
“네.”
긍정의 대답에도 여전히 불안한 모양인지, 루시엘이 꾸물꾸물 이불을 걷어 올렸다. 양팔로 카인의 허리를 꼬옥 감쌌다.
“그럼 나도 데려가. 요리하는 거 구경할래.”
등을 간질이는 숨결이 따스했다.
루시엘은 식탁에 앉아 카인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찬장을 뒤적거려 재료를 꺼내는 모습이 꽤 그럴듯했다.
카인과 루시엘이 결혼식을 올린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간 카인의 살림 솜씨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청소, 빨래, 설거지는 물론이고 요리까지 통달했다. 루시엘이 즐겨 먹는 음식이면 대부분 조리해낼 수 있었다.
오늘 아침은 뭐야? 라고 물었더니 베이컨 샌드위치와 쇠고기 스튜라는 답이 돌아왔다. 흠… 루시엘이 입술을 삐죽였다.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먹고 싶은 음식 있어요?”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 과일이랑 생크림 듬뿍 얹은 걸로! 꿀이랑 초코 시럽도 추가해줘.”
아침부터 달콤한 팬케이크라니. 건강을 생각해서라면 안 된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래도 카인은 루시엘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애인이 원한다는데 어쩌겠는가. 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 딱 하루면 괜찮을 것 같았다. 대신 점심에는 반드시 건강식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카인은 필요한 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릇 안에 달걀을 깨서 넣고 휘휘 저었다. 밀가루와 녹은 버터, 우유를 추가했다. 부드럽게 반죽을 휘젓고 있자니, 루시엘이 주변을 기웃거리며 카인이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 번 저어 봐도 돼?”
“네. 물론이죠. 한쪽 방향으로 계속 휘저으면 돼요.”
루시엘은 카인에게서 그릇과 휘스크를 넘겨받았다. 휙휙 신나게 휘스크를 돌려대다가, 몇 바퀴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카인에게 그릇을 건넸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카인은 마저 반죽을 저었다. 완전히 묽어지게 섞으면 안 된다. 재료의 작은 덩어리들이 약간씩은 남아 있는 게 중요했다. 반죽이 부드러우면 팬케이크는 질겨지기 마련이었다.
프라이팬에 혼합물을 붓고, 팬케이크를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가장자리에 거품이 생기는 걸 확인한 후,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반죽을 뒤집었다. 같은 방식으로 양면을 고루 익혔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희고 넓적한 접시에 푹신한 팬케이크 세 장을 담은 후, 꿀과 초코 시럽을 적당히 뿌렸다. 복숭아와 바나나를 한입 크기로 잘라 접시 테두리를 장식하고,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를 한 움큼 흩어놓았다.
생크림은 작은 그릇에 따로 내놓았다. 막 만든 팬케이크 위에 차디찬 생크림을 올린다면, 생크림은 생크림대로 녹는 데다가 케이크는 금세 식어버릴 터였다. 마지막으로 시원한 우유 한 잔까지 내놓으면 완성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루시엘은 먹기 좋은 크기로 팬케이크를 자른 후, 케이크 조각을 생크림에 푹 파묻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크림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초코 시럽이 묻은 바나나까지 입에 쏙 넣으면, 단맛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흩어졌다.
카인은 팬케이크에 손도 대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띠고서 루시엘을 지켜보았다.
“카인, 너도 먹어.”
포크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펜케이크를 잘랐다. 꿀이 듬뿍 발라진 케이크가 카인의 입 앞에 불쑥 들이밀어졌다.
카인은 얌전히 입을 벌렸다. 루시엘이 내민 단맛 덩어리를 순순히 받아먹었다. 지독하게 달았지만 루시엘이 건넨 거라고 생각하면 먹을 만했다. 미묘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씹는 카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루시엘이 툭 이런 물음을 던졌다.
“작년 가을에 우리가 같이 쿠키 만들었던 거 기억나?”
“잊을 수가 없죠. 여러 의미로 인상 깊은 음식이었어요.”
“인상 깊은 걸 넘어서 맛이 없었지….”
루시엘이 아직 황제였을 시절, 그는 아주 잠깐 요리에 관심을 가졌었다. 제과사에게 요리책을 빌려오더니, 카인을 불러 함께 초코 쿠키를 만들자고 했다.
문제는 루시엘도 카인도 요리란 걸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루시엘은 오냐오냐 곱게 떠받들어진 황족의 핏줄이었고, 카인은 고기를 써는 것보다 사람을 베는 게 익숙한 검사였다.
그런 두 명이 만나 요리를 했으니, 결과는 참혹했다. 너무 타거나 설익은 밀가루 반죽. 반죽 사이사이로 씹히는 계란 껍질 조각. 설탕을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외려 쓰게 느껴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때는 너 진짜 요리 못했는데, 진짜 많이 늘었다.”
“고마워요.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었네요.”
루시엘은 종종 이렇게 ‘망가지기 전의’ 과거를 회상하고는 했다. 불행한 유년기나 호위 기사의 배신 같은 끔찍한 기억들은 전부 소실되었지만, 카인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은 여전히 루시엘의 마음 한편에 보관되어 있었다.
같이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었던 일, 몰래 황실을 빠져나와 마을을 구경했던 일, 단둘이서 한참 동안 겨울 바다를 걸었던 일…. 모래처럼 반짝이는 추억들.
“있지, 카인.”
과거를 헤매던 눈동자가 현재의 카인에게 와 닿았다.
“네가 만든 요리를 좋아해. 그러니까…”
입 안에 든 케이크를 마저 삼키고서, 루시엘이 말을 이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때 또 팬케이크 만들어줘.”
“물론이죠.”
카인은 선선히 긍정의 답을 했다.
집에 돌아오면.
당연한 얘기다. 집은 돌아오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임무 때문에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쏘다녀야 하지만, 카인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집이었다. 루시엘이 기다리고 있는, 둘만의 보금자리 말이다.
그것은 이번 작전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살아서 다시 루시엘을 마주해야만 했다.
◊
아침을 다 먹은 후에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루시엘이 주로 말했고 카인은 중간중간 맞장구를 쳐주었다.
루시엘은 카인이랑 하고 싶었던, 그러나 여러 이유로 아직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별것 아닌 소원들이었다. 소망치고는 다소 유치하고 하찮기도 했다.
화단에 과일나무를 심어 기르고 싶어. 그리고 직접 수확한 열매로 잼을 만드는 거야. 뜨개질을 배워 목도리를 떠보고 싶어. 여름에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호수에 구멍을 내서 낚시를 하고 싶기도 해.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네가 함께했으면 좋겠어. 네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너랑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으니까…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모든 소원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카인이 별 탈 없이 귀환하는 것.
정오가 지난 후에는 책을 읽었다. 루시엘은 카인의 무릎을 벤 채 영물에 대한 백과사전을 뒤적거렸다.
십여 페이지쯤 넘기다 흥미가 떨어졌는지, 책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카인의 중심부를 더듬거렸다. 그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
푸른 정오에서 붉은 저녁으로. 시간은 흘렀다. 침대 위로 드리운 그늘이 몇 번이고 각도를 바꾸었다.
“하, 으읏… 그읏, 히극…! 나, 또, 또 가아…”
연이은 절정이 극점을 내리꽂듯 찔러대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며 어제 새로 간 침대 시트를 구기듯이 붙잡았다. 과도한 쾌감에 본능적으로 허리가 뒤로 물러났다.
카인은 루시엘의 양 손목을 모아 한 손으로 붙들었다. 달아나지 못하게 고정하고서 추삽질을 이어갔다. 목줄기를 따라 입을 맞추다가 둥근 어깨를 살며시 깨물었다. 어제 만들어놓은 순흔으로 가득한 몸뚱이 위에, 더욱 짙은 잇자국을 새겨나갔다.
저 자국이 평생 지워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림자처럼 영원히 루시엘을 옭아맨다면 기쁠 텐데. 지금껏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도 넘게 해온 생각을 다시금 했다.
카인은 루시엘의 삶에서 가장 짙은 얼룩으로 남고 싶었다. 세월의 물결이 아무리 밀려와도, 지워지지 않을 단 하나의 흔적이 되길 원했다.
“꼭 돌아올게요. 늦지 않게 올 테니까….”
“흐윽, 아, 아아… 하으윽, 흐아, 악!”
조금 굴곡진 살기둥의 모서리가 내벽을 도려내듯 긁을 때마다, 루시엘은 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몸이 뜨거웠다. 열감이 모여든 아랫배가 징징 울렸다. 혈액이 하도 부글부글 끓어 걸쭉해진 것만 같았다. 성기는 끈적끈적한 정액을 서너 번 정도 토해내더니, 이제는 고장 난 것처럼 투명한 물만 질질 흘렀다.
“흐으… 으…”
쉴 새 없이 찾아온 오르가슴의 여파에 지쳤는지, 루시엘은 제대로 팔다리를 놀리지도 못했다. 무게를 실어 깊숙이 안쪽을 휘저을 때마다, 가는 허리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반쯤 위로 올라간 눈동자에 초점이라고는 없었다. 정사의 체취가 고스란히 새겨지고 있는 침대 어딘가에, 제 의식을 내팽개치고 온 모양이었다.
일부러 전립선만을 집중적으로 쳐올리면, 루시엘은 윽윽거리는 새된 신음을 토해냈다. 신음이 터져 나오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슬슬 카인도 한계였다. 카인은 추삽질을 멈추고서, 단단하게 채워왔던 백탁액을 루시엘의 내벽 깊은 곳에 흘려보냈다. 성기를 더 확실히 고정시키기 위해, 귀두가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인간의 것보다 훨씬 양이 많은 정액이 내벽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안을 꽉 채우고도 자리가 부족했다. 남은 정액은 구멍 가장자리에 촘촘히 엉겨 붙었다. 씨물로 범벅된 주름은 얼핏 새하얗게 보였다. 질퍽한 정액으로 만들어진 물줄기가 엉덩이골을 타고서 줄줄 흘러내렸다. 밑에 깔린 이불이 축축이 젖어갔다.
“하아…”
루시엘은 헐떡거리며 팔로 눈을 가렸다. 부은 눈시울이 팔뚝에 닿아 쓰라렸다. 축 늘어져 숨만 겨우 쉬는 몸뚱이 위로, 노을이 나긋하게 내려앉았다.
저녁은 뭐 먹을래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카인이 물었다. 뭐든 좋지만 요리하기 쉬운 거였으면 좋겠다고, 이번에는 자신도 함께 저녁을 만들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였다.
정말 보통의 부부 같다.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카인은 가늘게 웃었다.
◊
행복한 시간은 항상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고, 후식으로 과일 몇 조각을 우물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벌써 잘 시간이 되었다.
루시엘은 카인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살갗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열기가 옆구리와 종아리를 뭉근히 에워쌌다.
여름이라 더울 법도 한데, 루시엘은 카인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몸을 붙이고 온기를 나누는 데에서, 일종의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잘 자요, 루시엘.”
너도 잘 자… 기왕이면 내 꿈 꾸고… 루시엘이 잠에 취해 웅얼거렸다. 그의 눈이 빠르게 감겼다.
◊
아직은 햇빛이 으슥한 새벽이었다. 방 안은 어두웠으나 윤곽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카인은 짧은 잠에서 깨어났다. 서둘러 환복을 하고 투헨더소드를 챙겨 들었다.
루시엘에게 선물 받은 레이피어는 오늘만은 내려놓기로 했다. 칼날이 얇은 데다가 화려한 장식이 곳곳에 붙어 있는 검이다. 강한 마물을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루시엘은 안온한 낯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괜히 깨우고 싶지는 않아서,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술만 맞대었다. 입술의 온기가 소리 없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녀올게요.”
반드시 돌아올 것을 상정하는 인사를 남기고서, 카인은 방문을 열었다.
◊
카인이 집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 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주문을 외우자, 예전에 만들어두었던 아공간이 드러났다.
나는 보관하고 있던 회복 포션과 해독제를 모조리 쓸어 담았다. 고급 마법을 수행할 때 필요한 지팡이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검은 로브와 하얀 가면을 꺼내 들고서 아공간을 닫았다. 한 장의 로브와 단 한 겹의 가면으로, 오늘도 꾸역꾸역 진실을 억누를 예정이었다.
새로운 연극의 막이 올랐다.
◊
그날은 카인의 굴곡진 인생 중에서도, 유난히 괴이한 일들로만 가득 찬 하루였다.
한때 영물이었던 마물이 고치를 부수고 나왔다. 다리를 잃어버린 낙원의 뱀. 뱀의 비늘은 비상식적으로 단단했다. 첨예하게 벼려진 검을 수백 번씩 휘둘러도, 괴물의 몸뚱이에는 잔 생채기 하나 그어지지 않았다.
뱀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새빨간 구강 안쪽으로 동굴처럼 열린 목구멍이 보였다. 검은 혀가 기괴하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뱀의 신체 부위 중에서, 유일하게 비늘로 덮여있지 않은 부위였다.
…저 안쪽을 내리찍는다면, 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 카인은 아이디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맨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연신 좌우로 흔들리는 뱀의 몸 줄기를 타고 올랐다. 비늘은 미끄러웠지만 균형을 잡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카인은 뱀의 입 바닥에 성공적으로 착지했다. 숨을 돌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는 검을 높이 치켜들고는, 주저 없이 아래로 꽂아 내렸다.
“키에엑-!”
뱀이 날 선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공격이 먹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검은 독이 뚝뚝 떨어지는 송곳니가 곧장 카인을 내리찍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차마 피할 틈도 없었다.
카인은 오른팔을 부여잡고서 아래로 추락했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두개골이 웅웅 울렸다. 해독제를 여러 종류 챙기기는 했으나, 그 어느 것도 극도로 강한 독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오른팔을 잘라내야 했다.
‘일단은 살아야 한다. 검사로서 생명이 끝나더라도, 살아서 루시엘에게로 돌아가야 해.’
카인은 시큰거리는 왼팔로 양손 검을 잡았다. 독의 영향 때문에 심장은 뜨겁게 뛰었으나, 머릿속은 얼어붙은 것처럼 냉철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해야 할 일만 존재했다. 검을 막 제 오른팔에 가져다 대려던 찰나, 첫 번째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검은 로브에 흰색 가면을 쓴 흑마법사. 카인과 예전에 암시장에서 마주했었던 그 남자가, 갑자기 전투에 난입한 것이었다.
그는 카인에게 해독제를 건네주고, 상처 부위에 질 좋은 회복 포션을 부어주었다. 독기는 삽시간에 빠졌다. 뛰어난 치료술로 이뤄낸 기적이었다.
흑마법사가 황실의 기사를 돕다니. 이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데, 여기서 또다시 기묘한 사건이 벌어졌다.
흑마법사가 자기도 마물 토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본디 흑마법사는 마물의 힘을 빌려 신에게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기사의 편에 서서 마물을 물리치는 흑마법사라니. 어느 역사서를 뒤져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본래라면 기사 임무에 흑마법사의 힘을 빌리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흑마법사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맹렬히 날뛰는 뱀을 처단하는 게 급선무였다.
기사단과 흑마법사는 일시적으로 연합을 맺기로 했다. 황실에다가 보고할 수도 없는 비밀 연합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기이한 일. 카인과 흑마법사는 합이 제법 잘 맞았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 같았다. 혹은 영혼의 반쪽처럼 보이기도 했다.
흑마법사가 카인에게 뱀의 약점을 알려주면, 카인이 그 부분만 정확하게 베어내는 식이었다. 때로 그는 카인의 검에 마기를 불어넣거나, 적시 적소에 맞는 강화 포션을 건네주기도 했다.
마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간은 핵. ‘낙원의 다리 달린 뱀’은 강력한 마물답게 핵이 스무 개에 달했다. 스물에 달하는 핵을 전부 파괴한다면, 제아무리 낙원의 뱀이라 해도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기력이었다. 흑마법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굼떠지고 있었다. 마력과 체력이 거의 동난 모양이었다. 흑마법사는 남은 마력을 한계까지 긁어모았다. 카인의 검에 최후의 마기를 쏟아 부었다.
“뱀 몸통 정중앙에서 1시 방향으로 일 미터 남짓. 그곳에 마물의 마지막 핵이 있어. 그것만 부수면 돼!”
“알았다.”
마기를 둘러 한층 매서워진 칼끝이, 두꺼운 비늘을 헤집고 들어갔다. 유일하게 남은 핵을 찾아내 부서질 때까지 연신 내리쳤다. 비늘이 뜯겨나간 곳에서 검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막막한 철옹성 같았던 뱀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쿵.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뱀의 사체가 숲에 길게 누웠다.
“이겼다! 카인, 우리가 해냈어!”
흑마법사가 두 손을 쳐들고서 팔짝팔짝 뛰었다. 마법으로 변조시킨 웃음소리가 성대에서 흘러나왔다. 철판을 긁는 듯 끼익거리는 소리는, 도무지 인간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카인은, 그의 웃음이 의외로 듣기 좋다고 여겼다.
그때였다. 험한 전투 도중에 훼손되었는지, 반쯤 잘려있던 나무가 흑마법사를 향해 빠른 속도로 기울어졌다.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흑마법사의 작은 몸을 깔아뭉갤 것만 같았다.
네 번째 기괴한 일은 이때 일어났다.
카인은 흑마법사에게로 뛰어들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안고서 풀밭을 굴렀다. 그가 죽음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거대한 나무에 깔려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흑마법사를 끌어안은 채 바닥으로 넘어지며, 카인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들을 했다. 대부분의 생각은 큼지막한 물음표로 끝났다.
내가 왜 저 자를 구한 거지? 몸을 날려서까지 구할 필요가 있었나? 멀찍이서 피하라고 소리만 질러도 될 일이었다. 카인의 세상에서, 몸을 던져 구할 가치가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루시엘. 루시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몸이 포개어졌다. 흑마법사는 풀숲에 누워 있고, 카인이 위에서 그를 덮치고 있는 판국이었다. 카인은 흑마법사의 얼굴 옆에 양손을 짚었다. 밀착된 상반신을 떼어내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때, 카인은 처음으로 흑마법사의 머리색을 보았다. 엎치락뒤치락하며 흙 위를 구르는 와중 후드가 벗겨진 듯했다. 이것 또한 희한한 일이었다.
암매장에서 두 번째로 흑마법사를 만났을 때, 그는 제 의상에 대해 짤막한 설명을 해주었다. 후드에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자가 벗겨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거센 겨울바람에도 꿈쩍없던 후드가, 하필 지금 벗겨진 이유는 뭘까. 어쩌면 이 모든 게 신의 농간이 아닐까? 온갖 가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곧 아득하게 녹아내렸다.
“…머리, 색이…”
카인이 더듬더듬 혀를 움직였다.
흙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선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카인이 익히 알고 있는 색깔이었다.
순은을 녹여 제련한 듯한 찬란한 은발. 붉은색과 더불어 카인이 가장 애정하는 색 중 하나. 그가 새벽녘에 쓰다듬던 머리색과 비슷한, 어쩌면 완벽히 똑같은 빛깔. 그 누구도 당신의 빛을 흉내 낼 수 없다.
‘…루시엘.’
루시엘의 머리색이 시야를 메웠다.
카인이 막 루시엘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흑마법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력을 모조리 소비한 줄 알았는데, 은신 마법을 쓸 한 방울은 남겨놓은 모양이었다.
단원들이 뒤늦게 카인에게로 달려왔다.
“부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어라? 그 흑마법사는 어디 갔지?”
“저 뱀의 비늘 말입니다. 이걸 이용해서 새로운 방어구를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을 추출해서 살상용 독약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요. 사체를 황궁으로 옮기는 게 여러모로 나아 보입니다.”
“독약은 조금 위험하지 않나? 연구자들의 피해가 상당할 것 같은데. 단장님, 단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일 큰 공을 세운 건 우리 부단장 아닌가. 부단장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수많은 소리들이 먹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어느 것도 카인의 귀를 적시지는 못했다. 카인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라가는 입술을 겨우 떼었다.
“…나는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먼저 가겠네.”
카인은 두 발로 달리다가, 곧 늑대로 수화해 네 발로 뛰었다. 굽이치는 오솔길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루시엘이 얌전히 집 안에 머물고 있는지를 말이다.
‘흑마법사는 마력을 다 탕진한 것처럼 보였어. 텔레포트 같은 고위 마법을 쓸 힘도, 이동용 마물을 소환할 만한 기운도 남아 있지 않겠지. 인간은 늑대 수인의 속도를 절대 따라잡지 못해. 고로 루시엘이 흑마법사라면, 나보다 더 빨리 집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해.’
루시엘이 집에 있다면,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한 카인의 잘못이다. 은발을 가진 건 루시엘만이 아니니까. 비슷한 은색을 루시엘의 머리칼이라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만약, 집 안 어디에도 루시엘이 보이지 않는다면? 루시엘이 정말로 그 흑마법사라면?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루시엘은 망가지지 않았다. 단지 모종의 이유로 정신이 붕괴된 척하고 있을 뿐이다. 루시엘이 그간 해온 무수한 사랑의 고백들은, 순전한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루시엘은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일까.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루시엘의 행동의 기반은 필시 사랑이다. 카인을 사랑해서 망가진 척한 것일 테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둘만의 신혼집에서, 카인과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서.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다릿심으로 힘껏 땅을 박차고 나아가며, 카인은 오직 하나만을 바랐다. 원하고 또 원했다.
차라리 루시엘이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목격했던 루시엘의 눈물이, 전부 꾸며낸 것이었어도 상관없다. 폐위당하기 위해 무능한 폭군인 척 연기하고, 호위 기사인 나마저 속였더라도 괜찮다.
족쇄를 차고 훌쩍이던 모습, 억지로 범해지며 저항하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실은 잘 짜인 연기였어도. 나는 괜찮다. 화내지도 실망하지도 않을 거다.
내가 알고 있던 ‘루시엘’이 실상은 연기로 만들어낸 거짓이라 해도, 사랑한다는 고백만은 흠잡을 데 없는 진실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더는 바랄 게 없다.
‘…그러니 제발, 루시엘이 집에 있지 않기를. 그 흑마법사가 루시엘이기를.’
카인은 숨도 고르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윤기 흐르던 털이 땀으로 눅눅히 젖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신혼집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부수듯 열어젖히고서 거실부터 훑었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들으면 마중 나올 법도 한데, 거실 어디에도 루시엘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있다면 침실에서 곤히 낮잠을 자고 있을 것 같았다.
카인은 늑대에서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옷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급히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문 손잡이가 돌아갔다. 방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
빙그르르 시야가 돌더니 뒤통수가 흙바닥에 닿았다. 누군가의 뜨거운 체온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먼저 보이는 것은 하늘이었다. 파란 하늘이 검은 나뭇잎 틈새로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괜찮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부스럭,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을 세게 누르고 있던 카인이 양손으로 황급히 제 상반신을 지탱했다. 그의 시선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훑었다. 그제야 나는, 후드가 벗겨졌음을 깨달았다.
일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뇌수에 표백제를 들이부은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하게 탈색되는데, 나를 내려다보는 카인의 얼굴만은 똑똑히 보였다.
그런 표정의 카인은 처음 보았다. 파리한 뺨과 일그러진 입술. 끝없는 허공으로 떨어지는 추락자의 낯빛.
“…머리, 색이…”
메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그 입술이 내 이름을 읊조리기 직전, 나는 한 움큼의 마력을 간신히 긁어모았다. 은신 마법으로 육체를 투명하게 만든 후, 지친 몸을 이끌고는 근처의 가메시르 덤불 속으로 숨었다.
가메시르는 검은 숲에서만 자라는 식물로, 향이 독하기로 유명하다. 내가 뿌린 향수 냄새도 충분히 감춰줄 거였다.
그렇지만 숨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나는 엉클어진 수풀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카인이 빠르게 멀어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집으로 향하는 게 확실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마력은 바닥났다. 은신 마법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다. 순간이동이나 마물 소환은 꿈에도 못 꾼다.
꼼짝없이 들켜버리는 결말밖에 없는 건가? 이번 생에서도 카인은 요절하고 마는 건가? 사랑하는 이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내 소망은, 이렇게나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나?
갈고리를 닮은 문장부호가 심장을 내리찍는 것 같다. 복잡한 머릿속을 맴도는 무수한 물음표, 물음표들.
침착하자. 방법을 찾아야 해. 이 상황에 적합한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간 생을 헤쳐 나가며 얻었던 지식들을 아득바득 되새김질했다. 그러자 곧, 아이디어 하나가 수면 위로 불쑥 떠올랐다.
방법이 있긴 있었다. 마력이 없어도 고위 마술이 가능한 편법이. 다만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작용 때문이었다.
모든 마법사들은 마력 회로라는 걸 가지고 있다. 혈관에 피가 흐르듯, 회로에는 마력이 흐른다. 타고난 회로가 넓고 정교할수록 후에 대마법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보자면, 회로 자체도 일종의 마력 집합체다. 즉, 마력이 부족하다면 회로를 파괴해 마력으로 바꾸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 번 파괴당한 회로는 다시 복구할 수 없다. 망가진 회로만큼 쓸 수 있는 마법의 가짓수도 줄어드는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더는 독심술을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신벌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내가 익혀왔던 모든 기술들이 무(無)로 돌아가도 좋았다.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오랜 세월 금기시되어온 주문을 혀끝으로 굴렸다. 몸속에 퍼져있던 회로들이 일제히 으스러져, 마력으로 재구성되는 게 느껴졌다.
실행할 마법은 텔레포트. 목적지는 나와 카인의 집, 그중에서도 욕실. 나는 손끝으로 공중에 마법진을 그렸다. 짙푸른 문양이 발광했다.
◊
“아윽!”
텔레포트 과정에서 자세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딱딱한 타일에 꼬리뼈가 정통으로 부딪혔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등 아래를 매만졌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로 얼룩진 겉옷부터 벗어 던졌다.
재빨리 탈의를 마친 후에는 마정석을 돌려 물이 쏟아지게 했다. 몸에 밴 독한 향기가 사라지도록, 꼼꼼히 비누칠을 하고 전신을 씻어 내렸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곧장 침실로 향했다. 허물처럼 나동그라져 있던 잠옷을 꿰어 입고, 허겁지겁 침대에 누웠다. 막 이불을 덮어썼는데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이라는 작자는 우리 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리라. 또렷하고 거대한 눈동자가 깜빡, 깜빡이며, 카인을 향해 살기를 퍼붓고 있을 테지.
나는 긴장을 늦추고 자만해서도, 그렇다고 불안감에 벌벌 떨어서도 안 된다.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계획은 어그러진다. 평소처럼 담담하게, 텅 빈 종이처럼 철없는 척 웃으면서.
숲에서 땅바닥을 구른 탓에, 살짝 접질린 발목이 쓰렸다. 시간이 몇 분만 더 있었어도, 환각으로 발목 상처를 가릴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이 차올랐을 텐데.
나는 잠옷 밑단을 끌어 내렸다. 어떻게든 아득바득 흔적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붉은 타박상이 남은 살 안쪽, 혈관 속으로 소름 끼치는 한기가 돌았다.
침실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내 바로 앞에서 멈췄다. 시트가 푹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카인이 침대 머리맡에 앉은 듯했다.
“루시엘.”
따스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폈다.
“으응… 카인, 다녀왔어? 어디 다친 건 없고?”
“네. 무사히 잘 다녀왔어요.”
카인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내 이마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서, 뒷머리를 살살 헝클어뜨렸다.
“오늘 루시엘과 비슷한 머리색을 지닌 사람을 만났어요. 저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루시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노랗고 붉은 시선들이 선연히 맞닿았다.
나는 카인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흐트러뜨리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맑은 미소는 내 전문이었다.
조금의 침묵 후, 카인이 입을 열었다. 굳이 독심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뒤에 이어질 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제 착각이었나 봐요. 하기야, 망가지지 않은 루시엘이 날 사랑할 리가 없는데. 그렇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가 망가졌어?”
나는 이해하지 못한 척 고개만 갸웃거렸다. 카인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을 테다. 카인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더 이상 은발의 사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아, 다행이다. 들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욕실의 비누가 바깥 냄새를 깨끗하게 지워준 덕분이었다. 부은 발목도 잠옷 끝자락에 절묘하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나와 신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환히 웃었다.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신은, 필시 분노로 치를 떨며 이를 갈았으리라.
열두 번의 죽음을 거쳐, 낙담으로 뒤덮였던 이른 장례식을 지나… 나는 드디어 연인을 살리는 데에 성공했다. 열세 번째 삶은 반짝이는 해피엔딩이었다.
찬란한 빛은 여전히 네 위로 무너지는 중이었고, 너의 눈동자는 천장의 조명보다 훨씬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갑작스레 목이 말랐다. 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갈구하는 건 너였다. 오로지 너뿐이었다. 나는 너의 입술에 먼저 내 입술을 맞대었다. 너의 입술을 부르틀 때까지 빨아대다가 혀를 집어넣었다.
달큰한 숨결이 서로의 입 안을 적셨다. 너는 눈을 감았고 나는 감지 않았다. 꽉 감긴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때마침 마력이 어느 정도 차올랐다. 카인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내 발목에 조심스레 손을 대었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자, 환각이 발목 주변을 덮었다. 부은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환각 덕분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을 떼어, 양팔로 너의 목을 감았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불타는 태양처럼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좌우로 흔들렸다.
내 눈에 비친 너는 아름다웠다.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실은 언제나 그랬다. 사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떼어내었다. 흘러넘치는 애정을 꾹꾹 눌러 담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카인.”
결코 진실이라 여겨지지 않을, 또한 여겨져서도 안 되는 고백을 오늘도 한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진심 어린 애정을 듬뿍 담아서.
사랑해.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걸지도 몰라….
이번 생에서 너는 요절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흔하지만 훈훈한 동화의 결말이, 마침내 우리의 것이 되었어.
우리는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겠지. 같이 팬케이크를 만들고, 화단에 과일나무를 심어 기르고. 그 과일로 잼은 물론이고 청이나 시럽도 만들어 먹는 거야.
외출이 허락된다면 우리 또 바다에 가자.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자. 우리에게는 시간이 아주, 아주 많으니까. 십 년이 훌쩍 지나도 너는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원하는 건 거의 다 해볼 수 있어.
그래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걸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너에게 안기고 싶다고 말할래.
◊
“카인, 어서, 어서….”
루시엘은 애달프게 카인을 재촉했다. 단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몸이 달았다. 아랫배가 딴딴하게 뭉쳤다. 배꼽 아래에 고였던 열감이 더 밑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몸으로 카인을 느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입가에 젖은 귀두가 문질러졌다. 선액이 묻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루시엘은 입을 벌려 귀두부터 머금었다.
고개를 서서히 아래로 내리자, 길고 딱딱한 음경이 혓바닥을 문지르며 목구멍 근처까지 밀려들어 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감각이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루시엘은 코로 힘겹게 호흡했다.
성기가 목젖을 쿡쿡 건드릴 정도로 깊숙이 쑤셔 박혔다. 답답함에 머리를 뒤로 빼려고 하면, 큰 손바닥이 어김없이 뒤통수를 눌러 고정시켰다. 목 안쪽이 범해지고 있다. 입 안 전체가 단순한 구멍으로 취급되는 것 같았다. 팽팽히 펴진 목구멍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읏, 윽, 하극, 욱…”
식도의 점막이 반사적으로 이물질을 조였다. 목구멍이 수축했다가 느슨해지기를 반복하며 성기를 자극했다. 부릅뜬 눈동자 밖으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넘쳤다. 물방울이 느릿느릿 아래로 흐르며, 붉게 물든 뺨을 애무하듯 쓸어내렸다.
쿠퍼액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며 식도를 흥건히 적셨다. 목마른 자가 생수를 들이켜듯, 루시엘은 반쯤 절정에 오른 낯으로 선액을 꿀꺽꿀꺽 받아 삼켰다.
이대로 정액까지 부어줬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카인이 루시엘의 입에서 좆을 빼내었다. 루시엘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입 말고, 여기 아래에다가 부어줄게요.”
카인은 루시엘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습한 혀로 귓바퀴와 귓불을 지분거리다가, 목줄기를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혀끝이 가슴에 닿자 루시엘이 흐읏, 하며 몸을 떨었다. 그간 수없이 몸을 섞었기 때문일까. 아직 삽입하지도 않았는데 아래쪽이 벌써부터 기대에 차 벌름거렸다.
피어싱을 한 왼쪽 유두는 혀로 부드럽게 애무하고, 오른쪽 유두는 검지와 엄지로 세게 잡아당겼다. 상반신이 들릴 정도로 강하게 꼬집다가 툭툭 건드리기를 반복하자, 작았던 돌기가 붉게 부풀어 올랐다.
젖꼭지뿐 아니라 가슴팍 전체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원체 흰 피부여서 그런지, 조금만 건드려도 울긋불긋 열이 오르는 모양새가 야릇했다.
유두를 입술에 끼운 채로 볼을 좁혔다. 입술로는 심지를 조이며, 혀로는 바짝 선 돌기를 간지럽혔다. 이를 세워 젖꼭지를 가볍게 갉작이자, 루시엘은 달뜬 숨을 내쉬며 허리를 들썩였다. 그는 제 아래를 더듬거리더니, 삽입하기 좋도록 스스로 구멍을 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급한 듯했다.
“가슴은 이만하면 되었으니까… 이제 여기, 여기를…”
루시엘이 카인을 재촉했다. 칭얼대는 말끝에서 애달픈 열기가 묻어났다.
허리가 공중으로 들렸다. 단단하게 달아오른 성기가 깊은 안쪽으로 틀어박혔다. 목줄을 잡아당기듯 루시엘의 손목을 붙들고서, 밑으로 힘껏 끌었다. 가는 몸뚱이가 내려오며 단박에 살기둥을 집어삼켰다.
“아흣, 아, 아앙!”
루시엘이 밭게 신음했다. 골반이 벌어지고 내장이 짓눌렀다. 불룩한 윤곽을 그린 배꼽 아래로, 안쪽에 삽입된 이물질이 비쳤다. 카인은 루시엘의 한쪽 다리를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그를 비스듬히 눕혀 추삽질하기 좋은 자세로 만들었다.
퍽, 퍽, 소리를 내며 성기가 내벽을 들쑤실 때마다, 희게 질린 발끝이 꼬옥 오므라들었다. 결합부가 옴죽거리며 살기둥을 버겁게 물었다. 발간 구멍과 물크러진 점막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애써 성기를 품고 있었다.
체위를 바꾸어 루시엘의 무릎을 가슴께에 바짝 붙였다. 다리가 벌어지며 결합부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회음부를 간질이다 꽉 찬 구멍 틈새로 엄지를 집어넣었다. 힘을 주어 애널을 옆으로 벌리자, 선홍색 점막이 언뜻 보이는 게 야살스러웠다.
뜨거운 안쪽에 선득한 바람이 드나드는 느낌이 이상한지, 루시엘이 살포시 눈가를 찡그렸다. 그 일그러진 표정마저도 귀엽게 느껴져서, 카인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해요, 루시엘.”
그러니 카인은 또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말이다.
◊
목욕을 다 마치고 나른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포근한 이불이 두 사람의 몸을 감싸 안았다. 다정한 베갯잇이 뒤통수를 폭 싸맸다.
“…행복하다.”
루시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꿈질거리며 카인과 몸을 붙였다.
카인은 가만히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루시엘은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얼굴만 위로 쏙 빼놓고 있었다.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온 여름의 햇살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얇고 푸른 커튼이 물결칠 때마다, 흰 이불 위로 드리워진 파란 빛도 함께 흔들렸다. 마치 파도처럼.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에 루시엘이 이런 말을 했었다. 내년 여름에도 바다에 가자고. 그때는 바닷물이 겨울처럼 차갑지 않으니까,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칠 수 있을 거라고.
“바다 갈래요?”
눈두덩 위로 쏟아지는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카인이 물었다.
루시엘이 웃었다. 미소가 옅은 물감처럼 번졌다.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외치는 목소리가 밝고도 앳되었다.
집 밖으로 나가도 루시엘은 도망치지 않으리라. 카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 하리라. 오히려 말갛게 웃으며, 자신을 배신한 호위 기사의 손을 굳게 잡으리라.
그러니 바다에 갈 것이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서, 여름의 해안가를 함께 거닐 테다. 희고 고운 모래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남겠지. 발자국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카인은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살갗을 적시고 있었다. 벗은 살결이 해변의 흰 모래처럼 반짝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아니,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기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말하는 대신 팔을 벌려 폐제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잔잔한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토록 바라왔던 흔하고 평안한 날들이, 오래오래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았다.